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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6> 차라리 제비뽑기를 하자
지난 5월3일 있은 서울대 총장 선거에서 3명의 출마 교수 중 오연천 교수가 총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는 대학이라는 비교적 제한된 공간 내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출마자들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갖고 투표에 임할 수 있었다. 물론 완벽한 정보가 제공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상황이라면 나름대로 정당성을 확보한 선거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머지 않아 6월이 오면 전국적으로 각종 지방 선거가 있게 된다. 벌써 얼마 전부터 거리에 입후보자들의 현수막이 어지러이 걸려 있고, 보도에는 입후보자들이 나누어 준 명함들이 뒹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입후보자를 알지 못한다. 정책은 물론이고 이름마저 알지 못한다. 그나마 서울시장이나 도지사 선거처럼 비교적 큰 선거에 나오는 사람은 좀 알지만, 시의원이나 구의원 선거에 나오는 입후보자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이왕 선거를 할 바에야 정부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입후보자의 됨됨이와 정책을 알게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각 지역 방송 등을 통해 입후보자간의 토론회를 열게 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도통 여야 정치권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입후보자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선거를 치르는 것이 오히려 자기 당에 유리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투표하는 이런 “묻지마” 식 선거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주목할 것은 성경에서는 선거 대신에 제비뽑기를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우선 자질을 갖춘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도를 한 후 제비를 뽑는다.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돌린다. 따라서 후보자는 모두 그 결과에 승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소위 선거 후유증이라는 것도 없어 선거 후에도 구성원들이 서로 단합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선거도 제비뽑기로 해 보면 어떨까?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식 제비뽑기를 한다면 적어도 “묻지마” 식 투표의 문제점 (정당성의 부족 문제)과 비용 문제, 후유증 문제 등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차라리 제비뽑기로 결정했었으면 좋았겠다 라고 생각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즉 교과부가 신설 약대를 결정하였을 때이다. 돌아보면 작년 6월29일 복지부는 약대 정원을 350명 늘려 신설 대학에 배정하고, 40명을 늘려 기존 대학에 배정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때만 해도 정부가 약대 정원을 최소한 50명은 유지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이 50명 안도 그 동안 약학계가 꾸준히 주장해 온 “최소 80명” 안과는 거리가 먼 불합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약대 신설 업무가 교과부로 넘어간 이후 일은 더욱 우습게 되어 버렸다. 교과부는 놀랍게도 정원 20∼25명짜리 초미니 약대 15개 신설을 인가해 버렸다. 아연실색! 어이없는 결정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교과부도 처음부터 초미니 약대를 15개나 신설할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초미니 약대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부가 이런 결정을 내린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뒷 이야기가 들리고 있다. 여러 곳으로부터 압력을 받는 바람에 자유롭게 정책결정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만약에 교과부가 서류 심사로 약대 신설 요건을 갖춘 대학을 선정한 후, 이 모든 대학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해서 대여섯 개 대학을 선정했더라면, 외부 압력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탈락 대학이나 압력 단체들도 결과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결론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제발 앞으로는 제비뽑기만도 못한 선거나 정책 결정 과정이 결코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자 적어 보았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마는.
2010-05-12 13: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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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5> “빨리 빨리” 정신 예찬
지난 초봄 서울대 후문 낙성대 근처에서는 “영어마을 관악캠프” 공사가 한창이었다. 서울에서 세번째로 문을 여는 영어마을이란다. 그런데 공사는 약속된 개원일인 3월30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까지 지지부진, 완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속도로는 도저히 약속된 개원일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개원일을 불과 사나흘 앞두고부터 인부들이 평상시의 몇 배로 늘어나고, 낮은 물론 밤에도 대낮 같은 조명을 켜 놓고 난리 북새통을 이루며 공사에 급 피치를 올리는 것이었다. 드디어 개원일인 3월30일, 영어마을 관악캠프는 겉보기에 아무런 하자 없이 멀쩡한 개원식을 할 수 있었다. 비록 개원 후 2주가 지난 4월25일까지도 개보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유감이지만, 일단 개원일은 지킨 것이다. 장하다. 대한국민!
1980년대 어느 해 여름, 설악산에 대명콘도가 생기던 해에 대학원 학생들하고 그곳엘 갔었다. 그런데 손님은 받았지만 준공식은 내일이란다.(이런 법도 있나?) 공사도 여기저기 덜 끝나 있었다. 밤에 자는데 실례합니다 하면서 인부들이 들어 와서는 방안에 있는 문설주의 페인트를 칠할 정도이었다. 실외 수영장도 밤새 타일을 붙이고 있었다.
얼마나 공사가 다급했던지 손님인 우리 대학원생들보고 일당을 줄 테니 공사를 도와 달라고 했을 정도이었다. 그런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10시, 속초 시장이 참석하는 준공식에는 모든 공사가 감쪽같이 완료되어 있었다. 비록 준공식이 끝난 후 상당기간 추가 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튼 준공일을 지켜 손님을 받을 수 있었다. 장하다. 우리 대한국민!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일본 기자들이 우리나라를 걱정하는 기사를 쓴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이미 축구장 건설을 완료하고, 실제로 그 운동장에서 시합을 치르면서 운동장의 문제점까지 보완한 일본의 기자의 입장에서, 시합이 코 앞에 닥쳤는데도 아직도 완공되려면 멀어만 보이는 한국의 축구장 공사 진척 상황을 보면서, 과연 한국에서 월드컵이 제대로 열릴 수 있을까 걱정되어 죽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걱정과는 달리 우리는 월드컵을 훌륭히 치러냈다. 어찌 장하다 아니할 수 있겠는가?
얼마 전 그리스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공사가 지연되어 실내 수영장의 지붕을 미쳐 덮지 못한 상태에서 시합을 치렀다는 기사를 보았다. 어떤 난리를 치더라도 좌우지간 당일에는 일단 완공을 하고야 마는 한국 국민과, 당일에도 완공을 하지 못하는 그리스 국민, 이 차이가 오늘날 우리나라와 그리스의 차이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닐까?
1980년대 중반 런던에 한달 간 가 있을 때, 조그마한 보도 블럭 공사 하나를 한달 동안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라면 하루 이틀에 끝내버릴 것 같은 작은 공사이었다는데, 흡사 영국병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았다.
이상의 사례는 우리 국민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달리 처음에는 다소 나태하고 스타트가 늦더라도, 마지막 순간 즉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서둘러 반드시 해 내고야 마는 그런 “빨리빨리” 정신을 가졌다는 것을 입증한다.
요즘 서울 근교에 100년의 예정으로 성당을 짓고 있다고 한다. 100년이란 “빨리빨리” 정신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좀처럼 기다리기 어려운 세월이다. 아마 오랜 세월에 걸쳐 건축되는 유럽의 성당에 자극 받은 결론일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는 “빨리빨리” 병을 고칠 때가 되지 않았나 반성을 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의 “빨리빨리” 정신은 결코 부끄러워할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국과 그리스의 예를 보면 더욱 그렇다. 아무리 서두르더라도 챙길 것은 반드시 챙긴다는 “챙김 정신”이 뒤따라 주기만 한다면, 우리의 “빨리빨리” 정신은 이 시대를 선도하는 시대정신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빨리빨리” 만세!.
2010-04-27 0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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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4> 무상 급식과 마음의 상처
옛날에, 그러니까 1950-1960년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는 가끔 학생들에 대해 여러 가지 ‘가정조사’를 하였다. 가정 조사서에는 부모님의 학력은 어떤가? 집에 시계, 재봉틀, 라디오, 자전거 따위는 있는가? 등을 적는 란이 있었다. 나는 부모님의 학력에 대해서는 1-2 단계씩 졸업 학교를 상향 조정 (?) 해서 써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집안 살림은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적어 내는데 큰 거리낌이 없었다.
최근 오래 전에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리가 어렸을 때 이런 저런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고 성장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하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이 친구는 더 심했던 것 같다. 이 친구는 초등학교 시절에 매우 공부를 잘 했었단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별도의 과외 공부를 받을 수 없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담임 선생님이 특별히 그를 무료로 과외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하셨단다. 그러나 이 친구는 공부를 안 하면 안 했지, 돈을 내고 공부하는 친구들 틈에 끼어 혼자 무료로 과외를 받기는 싫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제안을 사양했지만 그 때 받은 마음의 상처는 작지 않았다고 했다.
이 친구와 비슷할 것으로 예상되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집안 사정을 시시콜콜히 적어내야 하는 가정조사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도대체 왜 이 따위 가정조사를 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집에 시계나 라디오가 있으면 어떻고 또 없으면 어떻다는 것인지? 부모가 학교를 안 다녔으면 어쩌라는 것인지? 이제와 공부를 시켜줄 것도 아니고, 시계나 라디오가 없다고 사 줄 것도 아니면서 꼬치꼬치 묻기는 왜 물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아이들을 통해 손쉽게 국민들의 생활 형편을 조사해 보자는 정부의 행정편의적인 생각 때문이었겠지만, 이는 도무지 아이가 받을 마음의 상처를 헤아려 보지 않은 참으로 비교육적인 처사가 아니었던가 싶다. 가정조사가 죽기보다 싫었던 아이도 있지 않았을까? 덜 가진 자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과거의 이런 정책은 과연 오늘날 우리국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결과를 잉태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 전원에게 무상으로 급식을 하도록 급식제도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부 학생들에게만 무상으로 급식할 것인가가 얼마 앞으로 다가온 교육감 선거의 최대 이슈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집 아이에게는 지금처럼 유상으로 급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부자집 아이까지 무료로 급식할 돈이 있으면 다른 더 급한 곳에 쓰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한다. 전원 무료 급식은 좌파적인 주장이라고 몰아치기도 한다. 한편 전원 무료급식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무상 급식이 초등학교 의무교육 원칙에 맞을뿐더러, 또 경제적으로 그 정도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급식 문제는 더 이상 돈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와 내 친구들이 초등학교 시절 가정조사 때문에 받았던 것과 같은 마음의 상처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급식 문제는 마음의 상처와 돈을 저울에 올려놓고 어느 쪽이 더 무거운가를 저울질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교육 지도자들이 아직도 마음의 상처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전원 무상급식은 시기 상조라 할 것이고, 상처 문제가 돈보다 더 심각하다고 판단한다면 전원 무상급식은 서둘러야 할 것이다. 다만 필자의 저울질로는 마음의 상처가 훨씬 더 무거운 시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옳은 결론이 내려지길 기대한다.
2010-04-13 0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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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3> 김연아의 금메달은 어디에서 왔나?
멀지 않은 옛날에 일제 코끼리 표 밥통을 사러 일본에 가는 우리 주부들의 행렬이 볼썽 사납다는 기사가 매스컴을 도배한 일이 있었다. 그랬던 나라의 삼성전자가 작년에 일본 전자회사 전체의 이익금의 두 배가 넘는 이익을 냈다고 한다. 쏘니 제품이 최고인줄로만 알던 우리 세대에게 있어서 삼성전자의 이와 같은 활약은 문자 그대로 기적이다.
지금 기적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작년에 우리나라는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바뀌었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주는 나라로 바뀐 예는 우리 외에는 달리 없다고 한다. 기적은 경제 분야에서만이 아니다. 민주주의도, 현 정부에서 퇴보했다는 평은 있지만, 과거에 비해 놀랄 만큼 발전한 것이 사실이다. 또 과학 수준도 엄청나게 높아져 서울약대가 세계 약대 중 가장 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대학으로 뽑힐 정도가 되었다. 특히 스포츠 분야는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등의 활약으로 종합 5위를 마크하는 등, 우리나라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는 있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우리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과거에 비해 모든 면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어떻게 이런 발전이 우리에게 가능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의 성실한 노력이 발전의 밑바탕이 되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그러나 우리 말고도 노력한 나라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나라만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노력 이외에도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은 그 무언가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설명한다. 그는 설교를 통해 “대한민국은 일제시대와 6.25동란과 가난과 혼란의 시대를 뚫고 기적처럼 반세기만에 세계에서 주목받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중략) 그 이유는 그 동안 우리 선조들이 6.25와 일제시대에 순교의 피를 흘리고, 가난하고 힘들 때에도 하나님을 붙들고 새벽마다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지켜 주신 것입니다”라고 설명한다. 동감이다.
그의 설교를 더 들어보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신세계를 만들었던 미국의 청교도들은 초기에 많은 고생을 하고 미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60년대부터 십계명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제일주의를 제창했던 미국은 대통령이 되면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할 정도로 성경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과 인본주의 사상 때문에 종교 다원주의가 생겼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절대적인 가치에서 상대적인 가치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미국 사회는 동성애가 성행했고, 마약중독자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요즘 미국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형식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몇십 년이 지난 오늘 날 사회적인 혼란을 가중시켰고, 미국이 세계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주목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국가 발전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가? 하 목사님의 결론은 “하나님이 축복의 손을 거두지 않으시도록 겸손해야 합니다” 이다. 우리가 겸손과 성실로 오늘과 내일을 살아 갈 때 우리의 미래는 창대 (昌大)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10-03-31 10: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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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2> 초미니 약대 15교의 신설
지난달 26일 교육과학기술부는 입학 정원 20∼25명의 약대 15개의 신설을 결정 발표하였다. 이로써 전국의 약대 수는 기존의 20개에서 두 배 가까운 35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조그마한 희망과 커다란 절망을 동시에 느낀다.
조그마한 희망이란 약대가 늘어남으로써 우리나라 약학이 얼마만큼이라도 발전할 것이란 기대를 말한다. 신설 대학들이 써낸 신청서를 보면 대부분의 대학이 20명 정도의 전임 교수를 뽑겠다고 했고, 어떤 대학은 모든 약대 학생에게 4년간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는가 하면, 어떤 대학은 기존 대학의 백화점 식 교육을 탈피하여 생물약학에 초점을 맞춘 특화 교육을 하겠다고 하였다.
우선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정되기 위해 무리한 아이디어까지 총 동원한 느낌이다. 그래서 과연 신청서에 써 낸 내용이 그대로 실현될 수 있을까 적잖이 우려가 된다. 실은 써 낸 것의 반만 실현되어도 기존의 약대들 보다는 모든 면에서 훨씬 우수한 대학이 될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이번의 약대 신설은 6년제라는 역사적 사건 앞에서도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기존 약대들의 기득권에 대한 바람직한 도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조그만 희망을 가져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을 압도하는 커다란 절망감이 엄습한다. 신설 대학의 입학 정원이 너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전국약학대학협의회 (약대협)는 약대 6년제의 내실화를 위해서는 약대의 입학 정원이 최소 80명은 되어야 하니 기존 약대의 정원을 80명이 되도록 증원해 달라고 이구동성으로 복지부에 건의했었다.
복지부는 처음에는 약대협의 의견을 존중하는 척 하더니, 결국은 약대협의 의견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정원 50명 정도의 약대 7개 정도를 신설하는 의견을 교과부에 이첩하였다. 그리고는 손을 털었다. 이에 전국 약학대학 교수들은 궐기대회를 여는 등 반발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복지부의 의견을 받은 교과부는 이에서 한술을 더 떠 입학 정원 20∼25명짜리 초미니 약대 15개의 신설을 허용하고 말았다.
입학 정원을 최소 80명이 되도록 늘려 달랬더니, 정부는 오히려 정원을 오히려 1/4로 줄여 20∼25명짜리 대학을 15개나 신설토록 한 것이다. 약대협의 의견을 안 들어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들어 준 셈이다. 어이가 없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약대협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했는지, 그리고 소통을 강조하는 정부가 이처럼 국민의 의견과 반대되는 행정을 할 권리를 누구로부터 위임 받았는지 묻고 싶다.
정부의 이와 같은 태도는 한약학과 신설 시, 그리고 통6년제를 주장하는 약학계의 의견을 무시하고 2+4년제를 도입할 때부터,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정부는 오랜 경험을 통하여, 약학계가 처음에는 좀 반발하지만 결국엔 정부안을 따라 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과연 그 예상 그대로 지금 약학계는 무력감을 느끼며 한숨만 내쉬고 있다. 어디에다 말해도 들어 줄 곳이 없는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마디 더 물어 보자. 만약에 후세에 이번 결정으로 인하여 모처럼의 약대 년제가 부실해지는 등 약학교육이 심각하게 퇴보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이번 결정을 내린 정부 당국자는 당당히 역사 앞에 책임을 질 용의가 있는가 하고. 약대 신설! 아무리 생각해도 절망의 크기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2010-03-16 0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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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1> 꽃병의 운명과 점(占)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옛날에 유명한 점쟁이가 있었단다. 하루는 심심해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꽃병의 운명을 점쳐 보았더니, 그 날 중으로 깨질 팔자이었다. 책상 위에 잘 있는 꽃병이 어떻게 깨지게 되는가 궁금해진 점쟁이는 하루 종일 그 꽃병을 관찰하기로 하였다. 한편 점쟁이 아내는 떨어진 식량을 얻기 위해 오늘도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다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 왔다.
식량을 구하지 못한 아내는, 하루 종일 집안에만 앉아 있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남편의 화상을 보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내가 물었다. “하루 종일 일은 안하고 뭘 보고 있는 거야?” 점쟁이는 태연히 “응, 오늘 중으로 이 꽃병이 깨질 운명이라는 점괘가 나와서 어떻게 이 꽃병이 깨지는가 그걸 보고 있었지”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아내는 “야, 이 영감탱이야, 하루 종일 꽃병만 쳐다보고 있으면 쌀이 나와, 돈이 나와?” 하면서 꽃병을 높이 들어 앞마당으로 내동댕이쳤다. 그 바람에 꽃병은 물론 산산조각이 났다. 이를 본 점쟁이는 무릎을 탁 치며 “아하, 이렇게 해서 꽃병이 깨지게 되는구나!” 하였단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점쟁이가 용하다는 것이 아니다. 점을 쳐서 어떤 점괘를 받으면, 그 점괘의 암시에 걸려들어 정말로 점괘와 같은 결과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점쟁이로부터 여름에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물만 보면 겁이 나 수영 중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아마 점쟁이가 유명할수록 그 확률은 높아지지 않을까?
희한한 것은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결혼을 앞두고 궁합을 보고 사주를 보는 등 점을 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크리스찬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이런 것들이 미신은 아니란다. 기가 막힐 일이다. 기성 세대뿐만이 아니다. 멀쩡한 젊은이들마저 인터넷 카페니 뭐니 하면서 점을 치고 있다. 또 각종 신문에는 “오늘의 운세”라고 해서 그날이 생일인 사람의 운수가 나와 있다. 도대체 생일이 그날인 사람의 운세가 다 똑같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혹자는 할말이 없으면 “오늘의 운세”를 보긴 보지만 재미로만 보지 믿지는 않는다고 변명한다. 그렇다면 점을 재미로 보는 것은 과연 괜찮은 일일까?
크리스찬의 관점에서 보면 점을 본다는 것은 사탄으로 하여금 우리 인생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일이다. 사탄은 일단 개입의 빌미를 얻으면 좀처럼 우리를 떠나지 않고 점점 더 깊이 개입하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으려 든다. 사탄의 속성이 원래 그렇단다. 사탄은 늘 운명을 이야기한다. 너는 결국 이렇게 될 팔자라고. 그러나 운명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성경은 아무리 망가진 인생이라도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 쪽으로 돌아오면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말을 섞을 가치도 없지만, 성경과 점은 정반대의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손을 내밀어 인생을 사탄의 장난과 섞어서는 안 된다. 우리 인생은 오직 하나님만이 간섭하시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점, 사주, 궁합은 행여 재미로라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올해에는 이런 미신 같은 풍조가 깨끗이 없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2010-03-02 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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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0> 이혼율을 높이는데 일조하는 부모들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OECD 국가 중 2번째로 높다고 한다. 결혼 대신 동거를 많이 하는 서구와 우리의 이혼율을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과거에 비해 많이 높아진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간의 우리나라 평균 이혼율은 약 6%로, 특히 30∼40대 부부의 이혼율이 10% 전후로 가장 높았다.
왜 이렇게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높아졌을까? 우선은 여권 향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요즘 아내 들은 과거처럼 남편으로부터 대접을 못 받으면서까지 부부 관계를 유지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 인권에 대한 자각의 결과로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시대적 남존여비 사상을 가지고 결혼 생활을 영위하려고 하는 남편은 조만간 아내로부터 퇴출(이혼)을 통보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이랍시고 부인에게 호통치는 남편의 모습은 머지 않은 장래에 티브이 속 사극에서나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술 먹고 노름하고 아내를 두들겨 팸으로써 가정을 파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미 과거의 넌센스가 된 것처럼.
두 번째로는 우리 같은 부모들이 젊은 부부들의 이혼에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들이 평소에 아내를 존중하고 남편을 위하는 모범을 보여 왔다면, 우리의 아들 며느리, 또는 딸 사위는 이를 본받아 배웠을 것이고, 따라서 이혼율도 지금처럼 높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요즘 부모들은 자녀들의 이혼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시집간 딸이 조금만 고생하는가 싶으면 “그런 식으로 살 바에는 차라리 이혼해라” 라고 하는 친정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아들이 제 처에게 조금 불만을 가진 듯하면 “걔(며느리)는 처음부터 너와 맞지 않았어, 너는 얼마든지 새 장가 갈 수 있어” 하면서 아들의 이혼을 부추기는 시어머니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면 젊은 부부의 이혼율을 낮추기 위해 우리 같은 부모 세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선은 우리부터 늙은 마누라, 늙은 영감을 존중하고 아끼며 서로 다정하게 사는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 무시하고 싸우며 산다면 젊은 부부는 자기들의 미래의 모습에 환멸을 느껴 이혼을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이혼은 절대로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일부러라도 시집간 딸에게 ‘출가외인’ 정신을 가르치고, 장가 든 아들에게 ‘가문의 전통”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그러나 제일 시급한 것은 못된 “시어머니 정신”부터 불식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혼수가 시원찮다는 등 말도 되지 않는 말로 며느리와 아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아들 며느리는 부모로부터 무시 내제 구박받기 위해 결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최소한 젊은 부부의 행복에 방해는 되지 않는 부모가 되도록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딸과 사위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이다. 주신 축복대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행복한 가정을 영위할 것인가, 아니면 미워하고 구박하여 이혼에 이르게 할 것인가는 우리 부모들이 하기 나름이다. 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자식에게 도움이 되는 부모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식을 이혼시키는 부모가 될 것인가? 두 며느리를 둔 행복한 시아버지의 입장에서 감히 질문을 드리는 바이다.
2010-02-12 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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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9> 아내여 좀 봐주소
나는 오래 전부터 여성이 남성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다고 믿고 있다. 남성보다 평균 수명도 길고, 모성애도 부성애보다 훌륭하고 (뜨거운 골방에서 자식을 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엄마 고릴라, 반면에 자식을 깔고 앉아 있는 아버지 고릴라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라), 지혜도 많고 (대소사에 아내 주장대로 따르면 실수할 확률이 매우 낮음),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다리미질하면서 요리하면서 애 옷 입힐 수 있는 것은 여성뿐), 배우자가 아프면 종일 붙어서 간호하는 사랑이 크고 (남편은 아내가 아프면 대개 무슨 핑계를 대고 아내 곁을 떠남), TV 연속극을 이해하는 능력도 크고 (남성이 연속극을 잘 안보는 이유는 사실 이해력이 여성만 못하기 때문이라 함), 대체로 기억력도 뛰어나다 (젊었을 때 남편이 잘못한 일을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기억하면서 남편을 닥달하는 능력은 여성에게만 있음). 자식들도 엄마가 아빠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산다. 아침에 아내의 심부름으로 아들을 깨울 때 “야 빨리 일어나. 엄마 화났어” 하는 아빠가 많다고 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결혼을 앞 둔 신랑에게 늘 당부한다. 아내를 휘어잡을 생각을 꿈에라도 하지 말라고. 물론 아내를 휘어잡고 사는 남편의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멋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한번 휘어 잡아 보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 경험과 관찰에 의하면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아내를 휘어잡는데 성공한 순간, 그 가정은 곧 깨지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남편한테 휘어 잡혀 사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아내를 휘어잡을 생각은 애저녁에 포기하여야 한다.
특히 신혼 초에 아내를 휘어잡아야 한다고 조언하는 신랑의 선배들이 있는데, 실은 저희들이 못 해낸 일을 후배는 해 낼 수 있으려나 보려는 심보에 불과하니 속지 말아야 한다. 오직 신혼 초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아내에게 순종하라. 행여 반항의 몸짓도 보이지 마라. 신혼 초에 아내를 휘어잡으려다가 또는 아내에게 반항하다가 실패하고 평생 아내에게 보복 당하며 살고 있는 남편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결국 행복한 가정이란 간단하다. 남편이 아내의 주장대로 살면 행복한 가정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아내에게 의존하라. 돈 쓰는 것도 옷 입는 것도 화장실 이용법도 TV 리모콘도 아내에게 허락을 받아라. 그러면 행복한 가정을 영위할 수 있다.
이쯤에서 아내 들에게도 한마디 부탁의 말씀을 드린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남편들은 모든 면에서 아내보다 못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남편들을 좀 긍휼히 여겨 주기를 부탁드린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아내께서 너그럽게 봐 주셔야 남편도 그나마 갖고 있는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않겠는가? 백화점 갈 때, 여행 갈 때 남편도 좀 데리고 가 주기 바란다.
그리고 제발, 아래 이야기처럼 남편을 우습게 여기는 아내가 되지 말아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이다.
부부가 외출을 했는데 앞서 가던 남편이 그만 무단 횡단을 했다. 깜짝 놀란 트럭 운전사가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바보 멍청이, 얼간 머저리, 쪼다야 ! 길 좀 똑바로 건너”
이 말을 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 아는 사람이에요?"
" 아니."
"그런데 당신에 대해 어쩜 그렇게 잘 알아요?"
남편은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소리없이 울었다 한다.
2010-02-02 0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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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8> 튤립 꽃이 없는 복지국가 네덜란드
2007년 4월 ‘약물감시에 관한 국제조화’에 관한 초청강연을 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도시 암스테르담에 간 일이 있었다. 그 곳에 가서 2가지 사실에 놀랐다. 우선 그 곳 노인들은 매달 연금을 받는데, 그 연금을 조금씩만 아껴 쓰면 1년에 1달은 외국에 가서 살 수 있을 정도로 복지가 완벽하였다. 이는 병원비가 무료라 아파도 연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튤립의 나라라는 네덜란드의 길거리에 튤립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거리가 온통 튤립으로 장식되어 있을 줄 기대했었는데, 튤립을 비롯한 각종 꽃들은 유료 식물원 같은데 가야만 볼 수 있었다. 각종 꽃들은 유럽 각지로 팔기에도 바빠 길거리 장식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작년 가을 광화문 광장이 세종대왕 상을 세우는 등 새 단장을 마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광장은 온통 온갖 꽃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그 꽃을 파 버리더니 스노우 보드 대회니 빛의 축제니 뭐니 하는 행사를 연다고 한다. 그 때마다 광장의 조경은 바뀌고, 무엇인가가 설치되었다. 매스컴의 보도를 보면 이런 행사 하나에 몇 억 내지 몇 십억의 돈이 든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분명히 옛날에 비해 잘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옛날보다 세금도 더 거두어야 하고, 그 돈으로 조경도 잘해야 하고, 행사도 더 많이 해야 한다. 문제는 조경이 너무 호화롭고 행사가 너무 잦아 국민의 세금이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광화문 광장뿐이 아니다. 서울의 길거리에는 일년 내내 각종 꽃 장식이 넘친다. 또 일년 내내 도로 공사가 끊이지 않는다. 내가 늘 다니는 낙성대 길만 해도, 도로에 몇 년 전에 중앙 분리대를 만들어 나무와 꽃을 심더니, 작년에는 다시 중앙분리대를 없애면서 도로를 곡선으로 고쳤다. 이러한 낭비 성향은 나라 곳곳에서 발견된다.
세계에서 분수 (噴水)를 가장 많다는 나라, 성남시청처럼 지나치게 호화로운 지방청사를 짓는 나라, 과연 이런 것들이 우리 나라 분수에 합당한 칭호들인지 의문이 든다. 막말로, 정부나 지자체가 “네 돈이냐 내 돈이냐” 하는 심정으로, 또는 높은 사람들의 생색내기 용으로 길거리를 장식하고 호화로운 청사를 짓는 일에 세금을 마구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노숙자나 쪽방 사람들처럼 형편이 어려운 이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추운 겨울을 억지로 견뎌내는 이분들에게 광화문 광장의 조경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아직도 우리는 그들의 형편을 돕는 일에 훨씬 더 많은 예산을 사용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도 우리의 국민이 아닌가? 아프고 약하고 힘없는 국민들을 보호하라고 정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 네덜란드도 길거리에 쓸 돈을 아껴 국민 복지에 사용하고 있는데.
예산을 책정하고 집행하는 높은 분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그분들의 집무실 벽에 노숙자, 쪽방 사람들, 몸이 아파 고생하는 어려운 우리 이웃의 모습을 담은 사진 액자를 걸어 놓기를 제안한다. 그 사진을 보면서도 예산을 낭비하지는 않겠지 하는 기대에서이다. 길거리에 튤립은 없지만, 늙어서 병들어도 정부가 치료비를 전액을 대주는 복지 선진국, 네덜란드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한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
2010-01-19 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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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7> 아직 네 집에 도착한 것이 아니란다
십오여 년 전에 온누리 교회의 우리 순(구역) 식구인 50대 중반의 남자 체육교사(이 집사님) 부부가 멀쩡한 직장인 서울의 한 고등학교를 사직하고 보츄아나라는 아프리카 나라로 선교를 떠났다. 그리고 1년도 못 되어 혼자 일시 귀국한 이 집사님을 순예배 (구역예배)에서 만났다. 그는 선교지의 무더움과 생활의 불편함을 설명하면서 사실은 선교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그 곳에 남아 있는 아내에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돌아 갈 날을 연기하고 있노라고 했다. 그러나 물론 그는 얼마 안 있어 보츄아나로 돌아갔다. 그는 다음 해에도 역시 혼자 일시 귀국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그는 1∼2년 선교 생활을 마치면 귀국하고 싶은데, 아내가 그곳에 뼈를 묻자고 하니 어쩌면 좋겠느냐고 하소연(?)을 하였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선교사는 선교가 좋아서 오지에 가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선교지가 싫다”라고 하는 고백은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 충격은 실망이 아니라 오히려 커다란 감동이었다. “아, 선교사님들도 선교지에 가기가 싫구나, 다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기에 순종하는 것이구나”를 깨달은 이후 선교사님들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화여대 약대에서 활발한 연구를 하던 김 아무개 교수도 벌써 몇 년 전에 학교를 사직하고 캄보디아에서 선교를 하고 있다. 학계에서 전도가 양양하던 그가 학교를 그만 두었을 때, 그의 처남이자 나의 고등학교 동기인 한 친구는 “교수직을 하면서도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다. 당시 내 생각도 친구와 비슷하였다. 아무튼 그 교수는 그의 전성기에 학교를 그만 두고 캄보디아를 택하였다. 캄보디아 생활이 서울 생활보다 더 좋아서 그곳에 간 것은 분명 아니리라.
최근에 교회 설교 시간에 들은 말씀이다. 어떤 선교사가 오랜 기간 동안의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배에는 우연히 루즈벨트 대통령도 타고 있었다. 항구에 도착하자 수많은 인파가 대통령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를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에 돌아 와 잠자리에 누운 선교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길을 위해 오지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집은 낡아졌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다니, 나는 과연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다녀 오기를 잘 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엄습하였다. 그러다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들었다. “아무개야, 너는 아직 네 집에 도착한 것이 아니란다” 라고. 그 때 선교사는 깨달았다. 그가 자고 있는 그 집이 그가 영원히 살 그의 집이 아니란 사실을. 그래서 다음 날부터 그는 다시 기쁜 마음으로 선교의 열정에 사로잡힐 수 있었단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이 세상에 있는 우리 집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임시로 거처하는 곳에 불과하다. 나의 영원한 안식처, 영생할 집은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천국에 대한 믿음이 오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의 하루 하루의 동력이 되고 있을 것이다. 온누리 교회에서는 이런 오지의 선교사님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CGN-TV라는 위성 방송망을 통해 전세계에 한국어 선교 방송을 내 보내고 있다. 객지에서 모국어를 듣는다는 것, 그것도 방송으로 듣는 것은 그야말로 감격이라고 한다.
연말 연시 날씨가 추워지면서, 고생을 참고 선교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이 생각난다. 세상엔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집을 마련해 주고자 헌신하는, 정말로 훌륭한 크리스챤이 결코 적지 않다는 생각이다.
2010-01-05 0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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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6> 나이를 먹으면 잘 안 들려
친구들로부터 “아내가 남이 부르는 소리를 잘 못 들으면 늙었다는 증거”라는 말을 들은 어떤 남편이 집에 와서 아내를 테스트를 해 보기로 하였단다. 우선 마루 끝 저만치에서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아내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아내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하 이 사람이 벌써 귀가 잘 안 들리는구나” 생각한 남편은 부엌 입구 가까이 가서 다시 물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는 뭐지?” 그러나 이번에도 아내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이토록 귀가 어두워졌나?” 싶어 왈칵 마누라가 안쓰러워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내 바로 뒤까지 가서 아내의 어깨를 치며 물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냐고?” 그제서야 아내는 돌아서며 한마디 했다. “아니 수제비라고 아까부터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라고. 이 말에 남편은 그만 좌절하였다.
늙으면 소리가 잘 안 들린다. 아이들과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고는 “얘, 지금 방송에서 뭐라고 했냐?” 라고 묻는 일도 많아진다. 그래서 자연히 텔레비전도 크게 틀어 놓게 된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는 ‘청력나이 측정법’ 프로그램이 유행이라고 한다. 이는 10초 동안 음 높이가 다른 9개의 소리를 들려주고 몇 차례 들리느냐에 따라 청력나이를 알려주는 것인데. 9번 이상 들리면 청력 나이 5∼10세, 5번 이상이면 26∼30세, 2번 이상이면 41∼45세, 한번도 들리지 않으면 51세 이상이라고 한다. 한번 http://www.science.go.kr/webzine/20061002/00847.html 에 들어가 청력을 테스트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나도 실제로 한번 측정을 해 보았더니, 청력나이는 육체 나이대로 청력 나이가 나왔다. 그런데 매우 신기한 것은 30대인 우리 아들에게는 분명히 들린다는 소리가 내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청력이 약해져 50대는 1만2,000㎐, 40대는 1만4,000㎐, 30대는 1만6,000㎐, 20대는 1만8,000㎐ 이상을 거의 들을 수 없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주파수 영역이 좁아진다는 의미이다. 왜 그럴까? 사람의 귀 고막에는 청신경전달계인 달팽이관이 연결돼 그 입구에서 고주파를 감지하고, 점차 안쪽으로 갈수록 저주파를 느끼게 되는데, 나이가 많거나 큰 소리를 많이 듣게 되면 달팽이관 입구의 신경세포가 손상돼 고주파 음부터 듣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들을 수 있는 주파수 영역 (음역)이 좁아지면, 즉 간단히 말해서 귀가 어두워지면 일상생활이 불편해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게다가 남의 말을 잘 못 들으니 남을 오해도 하기 쉽고, 나만 빼놓고 무슨 궁리들을 하나 싶어 마음이 삐치기도 쉽다. 그래서 귀가 어두운 사람 옆에서 다른 사람과 수군거리는 것은 금물이다. 남의 말이 잘 안 들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늙으면 남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생각이 굳어진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이유로 늙은이는 젊은이의 사회로부터 점점 고립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장모님은 나이 먹어서 잘 안 들리고 잘 안 보이는 것은, 이제 세상사에서 한발 빼라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신다. 늙은이가 젊은이처럼 세상의 사소한 것까지 다 보고 다 듣고 일일이 참견해서는 볼썽 사납단다. 그러므로 나이가 먹으면, 덜 들리고 덜 보이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신다. 나는 지금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있는가? 어김없이 다가 오는 새 해를 맞으며 잠시 생각에 빠져 본다.
2009-12-22 10: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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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5> 겸손은 어려워
조영남 씨의 노래 제목 중에 “겸손은 어려워”라는 것이 있다. 가사 중에는 “겸손하지 못한 점 하나 빼 놓으면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있을까? 아버지는 늘 겸손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겸손은 어려워”라는 말이 나온다. 오늘은 겸손은 어렵다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들이 너무 예뻐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내의 친구가 했다는 말, 즉 “못 생긴 사람은 집안에도 많은데 텔레비전에서까지 이런 사람들을 본다면 지겹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그래 이왕이면 잘 생긴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화면이 보기에 더 좋겠지. 나도 예쁜 탤런트가 나오는 프로그램에 눈이 더 가지 않는가? 그렇다. 텔레비전은 시청률을 위해 현실이 아닌 희망사항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미모나 몸매가 잘 생긴 사람은 이를 뽐내고 못 생긴 사람은 이를 부러워하는 문자 그대로 얼짱, 몸짱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편 점잖은 척 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머리가 좋아야지 얼굴이나 몸매만 잘 생기면 무엇에 쓰느냐고 비판한다. 일리 있는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머리가 나쁜 사람들보다 더 성공하기 때문이다. 미모나 몸매는, 최근 성형 수술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타고 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인은 자신의 노력으로 예뻐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크게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머리도 인물처럼 타고 나는 것이지 스스로 노력해서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면에서 인물보다 머리를 자랑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아 보인다.
나는 이미자, 패티킴, 나훈아, 조영남 같은 명가수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사람이 노래를 이렇게 잘 부를 수 있을까 감탄한다. 가끔은 이들이 얄밉기 (?) 까지 하다. 별로 열심히 연습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도 아무 때나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부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죽어라 연습해도 뜨지 않는 가수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수들뿐이 아니다. 미술가, 음악가, 운동 선수, 배우, 그리고 정치, 경제, 학문 등 인생살이의 모든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 때문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하면 된다”는 말을 거의 믿지 않는다. 나처럼 키가 작은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훌륭한 농구선수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면 된다”는 적지 않은 경우에 사기성 격려문에 불과할 뿐이다. 누군가의 글을 보니, 최선을 다 해 노력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지만, 하늘에 맡길 일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양 노심초사하는 것도 잘못이란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하늘에 맡겨야 할 일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큰 지혜란다.
인물, 머리, 재능, 그리고 설명은 안 했지만 심지어 인격도 모두 본인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그야말로 천부적으로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물이 좋은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 재능이 뛰어난 사람, 심지어 인격이 좋은 사람도 스스로 이를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은 모양이 좀 우습다. 물론 사람이니까 우쭐대고 싶은 심정을 다 억누르고 살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랑을 하더라도 적절히 겸손한 태도로 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챤은 이 모든 장점들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알고 범사에 늘 감사한다. 감사하는 사람은 교만해 질 수가 없다. 그래서 감사와 겸손은 동의어이다. 나도 늘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살기를 다짐한다. 그러나 겸손도 겸손히 해야 한다. “나보다 더 겸손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하는 교만한 겸손은 솔직한 교만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역겹기 때문이다. 아 “겸손은 어려워!”.
2009-12-08 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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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4> 한국 약사학 (藥史學) 연구회
약춘 필자는 2007년 4월 일본약사학회(藥史學會)총회 (동경대학약학부 강당)에서 ‘한국의 약학사’라는 제목으로 특별강연 (강연요지; ‘藥學史雜誌’ 제42권 제1호 게재)을 한 바 있다. 일본의 藥學史雜誌는 올해에 제44권을 발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창간호의 역사는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당시 필자는 약학사를 연구하는 일본의 인력과 수준을 보고 기가 죽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약학사 연구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을 안타까워했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 대학의 김진웅 교수가 우연한 기회에 우리나라에도 이미 약학사 연구의 움직임이 있었던 자료(발기대회 인쇄물)를 발견하였다.
즉 1972년 5월에 김광수, 김일혁, 김조형, 김태봉, 신길구, 우종학, 유경수, 이선주, 이은옥, 장상길, 정동규, 지형준, 한구동, 홍현오 씨가 홍문화 교수를 대표로 하여 발표한 ‘한국약사학 (藥史學)연구회 발기 취지문’을 입수하게 되었다. 발기 취지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약학사는 본초의 역사로부터 비롯되며 민족의 문화와 더불어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근년의 과정만 치더라도 서양의약의 도입으로부터 이미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오늘날 약학의 발전은 눈부신 바 있으며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질병의 치료와 건강유지를 위한 약학의 사명은 그 중요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약학도 오랜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이미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며 세분화, 전문화를 거듭하고 있으나 과연 그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하였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인가는 체계적으로 고구되지 못하고 있음은 심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약학의 발전과 제약산업의 융성에 발맞추어 한국약학의 특성과 방향을 찾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바탕으로서 약학사는 그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으나 불행히도 아직까지 이 방면을 미개척지로 남겨놓고 있음을 볼 때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약사학 연구의 의욕을 북돋우고 나아가서는 한국약학의 특성을 발견 발굴하기 위하여 약사학 연구회를 발기코저 하오니 동학 제현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 연구회의 회장은 당시 서울대 생약연구소 홍문화 교수, 감사는 서울대약대 이선주 교수, 학술간사는 생약연구소 지형준 교수, 총무간사는 당시 약업신문사 장상길 편집부국장이 맡게 되어 있었다. 이들 외에 한구동, 우종학, 홍현오, 김일혁, 김조형, 김광수, 유경수, 이은옥, 김석찬, 도상학, 유용근, 박경철 씨 등 총 16명이 회원이었다. 총 10개조의 회칙 중 제1조에서는 이 연구회를 영어로 The Korean Society of History of Pharmacy로 부르기로 하였다. 제5조를 보면 연 회비는 1,000원이라고 되어 있다. 1972년 6월부터 1973년 5월까지의 예산안을 보면 회비 수입 7만 원(정회원비 2만원, 특별회원회비 5만원), 찬조금 7만 원, 잡수입 1만 원으로, 총 수입합계 15만 원으로 되어 있다. 아무리 옛날이라고는 하지만 아마도 매우 적은 금액이었던 것 같다.
상기 발기취지문을 보면 그제나 지금이나 약사학 (藥史學) 연구에 관한 우리의 상황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분들의 새까만 후배로서 심히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누구 이 분야를 살려낼 분은 안 계신지…. 약사학은 정년퇴임 했거나 정년을 앞두고 있는 노교수들의 심심풀이 대상으로 맡겨두기에는 너무나 막중한 분야이다. 또 모두 자기 전공 연구에 바쁜 젊은 교수들에게 약사학을 부전공 비슷하게 연구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대안은 오직 하나, 6년제 커리를 짜고 있는 이 참에 약사학 전공자를 약대 전임으로 채용해야 한다. 어찌 약사학 뿐이랴? 약사법규, 약물경제학, 사회약학 등 약학의 울타리 역할을 해 줄 소위 인문약학을 전공자들도 채용해야 한다. 귀가 있는 사람은 들을지어다.
2009-11-24 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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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3> 귀에 거슬리는 말들
가끔 어떤 말들이 귀에 거슬린다. 단풍 구경을 나온 사람에게 리포터가 “이런데 나오시니까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물으면 구경꾼은 “모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보니 스트레스도 풀리고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좋은 것 같다”라니 좋다는 건지 안 좋다는 건지… 이런 경우에는 그냥 “기분이 참 좋네요”하면 좋지 않을까? 가끔 “너무 좋은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는데, 보통 “너무”는 “너무 힘들다, 너무 비싸다, 너무 크다”의 예에서 보듯 정도가 지나쳐서 좋지 않은 경우에 쓰는 말로 “예쁘다, 맛있다, 멋있다”와 같은 긍정적인 단어 앞에는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너무”를 남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또 아침에 만나 인사할 때 “좋은 하루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되세요”가 영 귀에 거슬린다. “되는”이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에 “되세요”와 같은 명령어체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오늘 하루 잘 보내세요”라고 바꾸어 말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비슷한 예로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이란 말이 한 때 있었다. 이 말도 이상하다.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인지, 안심할 여건이 안되더라도 억지로라도 안심하고 애를 학교에 보내자 라는 취지인지가 불분명하다. 이 말은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학교 환경 만들기”로 바꾸는 것이 어떨까?
또 논문 등의 맨 마지막에 잘 쓰이는 표현으로 무엇 무엇으로 “사료된다”가 있는데, 우선 “사료 (思料)”가 너무 어려운 말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비슷한 경우에 “생각된다” 를 쓰기도 하는데 사료된다 보다는 알기 쉽지만,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되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역시 귀에 거슬린다. 즉 “사료된다”나 “생각된다”는 둘 다 수동태인데 가능하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식의 능동태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영어의 “It appears to be …”에 해당하는 우리 말 표현을 “사료된다” 또는 “생각된다”로 생각해서 사용하고 있다면, 이 말 대신 “…인 것처럼 보인다”로 바꾸어 쓰면 어떨까?
발음이 귀에 거슬리는 경우도 있다. 일부 아나운서나 방송진행자가 단어의 장단음을 틀리게 발음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영등포 시장 (市場)에 간 시장 (市長)님”에서 “시”는 각각 길게 발음해야 하지만, 배가 고프다는 의미로 “시장하다”고 말할 때의 “시”는 짧게 발음해야 한다.
끝으로 귀에 거슬리는 정도가 아니라 분명히 틀린 약업계의 용어 몇 개를 소개한다. 대표적인 것이 “엑기스”인데 옳은 표현은 물론 “엑스”이다. 원래 추출물 extract의 약자인 Ex를 일본 사람은 엑기스라고 읽는다. 일본어 발음의 한계 때문이다. 우리는 우수한 국어의 덕택으로 이를 엑스라고 발음할 수 있는데도 오랫동안 이를 엑기스로 읽어 왔다. 우스운 일이다.
최근에 엑기스 대신 엑스를 표준어로 바로 잡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엑기스에 익숙해 있어서 엑스라고 하면 “엑기스” 같은 느낌이 안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캅셀 (캡슐)이나 리모나아데 (레모네이드)도 일본인의 발음을 그대로 가져와 우습게 된 용어들이다. 한편 충진제 (충전제), 평량 (칭량), 상등액 (상징액), 활탁제 (활택제) 등은 한자를 잘못 읽어 틀리게 사용되는 용어들이다.
말들이 가끔 귀에 거슬린다는 것은 나이를 먹었다는 징표일까? 아니면 환갑이 지났어도 아직 귀가 순해지지 (耳順) 않고 철이 덜 들었다는 징표일까? 만추(晩秋)의 한 때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2009-11-10 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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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2> 칭찬은 교육의 기본 기술
오늘은 칭찬이 교육의 기본 기술이라는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모 대학의 L교수는 남의 칭찬을 잘 한다. 그가 자주 하는 표현은 아무개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그의 칭찬을 받는 사람보다 칭찬을 하는 그가 더 인격적으로 훌륭해 보인다.
칭찬을 하려면 먼저 그 대상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미워하면서 칭찬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이 겸손해야 한다. 저만 잘 난 줄 아는 사람은 남이 우습게 보여 칭찬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속은 꽉 찬 사람일 것이다. 그래야만 남을 칭찬할 정도의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칭찬은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는 책이 나와 있는 것처럼 듣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칭찬은 교육의 기본이 되는 기술이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림을 잘 그린다는 선생님 칭찬을 들은 후 미술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예수님도 수난을 받으시기 전 대제사장으로서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면서 당시 보잘것없던 제자들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 칭찬대로 제자들은 후일 성령 세례를 받고 난 이후 정말로 믿음의 본이 되었다. 이처럼 칭찬은 또한 신뢰의 표시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칭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칭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야단침, 깎아 내림, 비난, 잔소리, 질책, 비판, 충고, 저주, 불신 대충 이런 것들이 아닐까? 이런 것들은 칭찬과 달리 상대방을 삐뚜로 나가게 만들기 일쑤이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설교를 통하여 “잔소리로 아내나 남편의 버릇을 고치는데 성공한 사람 있느냐?” 물으신다. 목사님 말씀대로 뼈아픈 지적, 날카로운 비판, 솔직한 충고, 이런 것들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반감만 불러일으킬 뿐으로 정작 당사자의 결점을 고치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심지어 부부지간에도 상대방의 결점을 지적하는 솔직한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늘 강조한다. 직장의 상사와 부하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솔직한 대화는 당사자간의 관계를 악화시키기 십상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적, 특히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틈틈이 “나는 네가 남들과 달리 허튼 행동을 하고 다닐 애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며 내게 특별한 신뢰를 보여 주셨다. 이런 말을 듣고도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즐겨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조금 삐뚜로 나가볼까 하다가도 어머니의 이 말씀이 생각 나 행동을 바로잡곤 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어머니는 학력은 별로 없으셨지만 본능적으로 신뢰와 칭찬이 효과적인 교육 방법임을 체득하고 계셨던 것 같다. 또한 우리 아버지는 대학생인 내가 친구들과 사랑방에서 담배를 피우는 기색이면 결코 방문을 열지 않으셨는데, 내가 담배 피우는 것을 공인하지 않음으로써 나에 대해 신뢰를 되도록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교직에 있는 나로서 스스로 안타까운 것은 나이가 들수록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 예전만 못해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다시금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칭찬에 열심일 것을 다짐해 본다. 집에서도 되도록 비난, 잔소리, 질책, 비판 대신 칭찬을 하면서 살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칭찬은 듣는 사람의 기분은 물론 칭찬을 하는 사람의 기분도 좋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기분 좋은 나의 인생 후반을 위하여 남을 칭찬하는 마음을 주시길 하나님께 기원한다.
2009-10-27 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