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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1> 일본어에는 욕이 없다
일본 말에는 욕이 없다. 기껏해야 ‘바카야로 (ばかやろ, 바보자식)’ 정도가 있는데, 이 정도는 우리나라에서는 욕 축에 끼지도 못한다. 우리나라 욕들은 얼마나 얼큰하고 걸쭉한가? 내가 꿈에도 그리던 제물포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실망했던 것은 그 선망의 대상이던 동료들이 일상의 대화 중에 욕을 섞어 쓰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서울대 학생들도 마찬가지이었다. 군대 시절은 말해 무엇 하리오. 고참의 말은 욕이 절반은 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친한 친구 사이일수록 욕을 많이 주고 받는다. 욕을 안 하면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찌 욕뿐인가? ‘쪼끄만 놈, 쪼다, 바보, 돌대가리, 병신’ 같은, 상대방에게 인격적인 상처를 주는 험악한 말들이 태평스레 사용된다. 일본 사람은 어떠한가? 우리와 정반대이다. 욕은 커녕 행여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까 봐 정말로 곱고 예의 바른 말만을 사용한다. 친구 간에도 그렇다. 모르긴 해도 아마 일본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왜 우리말에는 욕이 많고, 우리말과 문법이 매우 비슷한 일본어에는 왜 욕이 없을까?내 생각에는 일본엔 우리와 달리 사무라이의 칼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반격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험한 말을 내 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칼을 차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 (남)이 무서웠다. 상대방이 좋아할만한 말만 골라 해도 돌아설 때 등골이 서늘해질 판이었다. 그래서 일본말은 예의 바르고 고와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과거 일본에서는 욕을 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진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다가가 찔러 죽이면 그만이다. 괜히 욕으로 상대방의 성질을 돋구어 선제 공격을 당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말이란, 최대한 예의 바르고 부드럽게, 그것도 되도록 낮은 목소리로 해야 하는 도구인 것이다. 일본에선 길거리 싸움도 드물다. 왜 그럴까? 칼의 나라 일본에서의 싸움이란 ‘죽고 살기’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우리처럼 말싸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인은 웬만해서는 남과 싸우지 않는다. 하긴 욕이 없으니 말싸움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보고 남과 싸우되 절대로 욕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답답해서 차라리 싸움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욕과 싸움은 불가분 (不可分)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어엔 욕이 없다. 그러니 싸울 수가 없다. 안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못 싸우는 것이다.우리는 싸움을 해도 상대방을 죽이기 까지는 않는다. 요즘엔 세상이 험해져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주로 말로 싸우고 기껏해야 주먹을 쓴다. 재미있는 것은 누구든 먼저 코피를 흘린 사람이 진 것이라는 불문률도 있다. 물론 말로 싸운다고 해도 말의 상당 부분은 욕이다. 한번 우리나라 시장판에서의 싸움을 보라. 싸움의 실체는 서로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핏대를 세워가며 구경꾼들에게 설명하는 여론전 (與論戰)이다. 이 때 걸쭉한 욕을 섞어 상대방의 나쁜 점을 강조해야 구경꾼의 여론을 내게 유리하게 돌릴 수 있다. 무엇보다 그래야 내 스트레스도 풀린다. 1987년에 미국 퍼듀 대학에 방문교수로 가 있을 때 어떤 미국 여학생이 내게 자기 남자 친구가 연구실 안에 있느냐고 물었다. “아까 나가더라”라고 했더니, 그녀 왈 “I will kill him”이란다. 이제 미국도 제법 안전한 나라가 되었나 보다. 누구나 총을 차고 다니는 서부영화 시대이었다면 ‘죽이겠다’는 말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총칼을 쓰던 나라의 말이 곱고, 안전했던 나라의 말이 거칠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인가? 말은 어쩌면 인격의 절반 이상이다. 그러니 고운 말을 배우자. 일본말에서 배우자.우리가 더 안전한 나라이었다는 어설픈 역사적 배경 따위는 다 잊어 버리자.
2011-01-31 1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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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0> 장기판의 졸(卒)
일본어에 오야붕 (おやぶん)과 꼬붕 (こぶん)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각각 왕초와 똘마니에 해당하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오야붕이 꼬붕을 함부로 대하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야붕과 꼬붕의 관계는 어미닭과 병아리의 관계인 것 같다. 다만 병아리들이 칼을 차고 있다고 상상하기 바란다. 어미닭은 병아리들을 품는다. 그러나 결코 병아리들이 깔려 죽을 정도로 낮게 품지는 않는다. 병아리들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병아리들의 안전 때문만은 아니다. 실은 병아리들이 무섭기 때문이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낮게 깔고 앉으면 병아리는 참다 못해 칼을 꺼내 어미닭을 찌를 수도 있다. 어미닭은 병아리들의 이런 특성을 잘 안다. 그래서 병아리들을 품되 늘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도록 조심하며 품는 것이다.일본 유학시절 일본 학생과 대만 학생이 각자 자기 나라의 장기 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대만의 장기 룰은 우리와 거의 같았다. 그런데 일본 장기에서는 내 졸 (卒)도 상대방에게 잡히면 바로 그 자리에서 적군이 되어 나를 공격하는 공격수가 되는 것이었다. 배신이 일상 (日常)이 되어 있다고 할까? 내게는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졸이 상대방의 상 (象)이나 마 (馬)를 먹고 죽으면 장렬하게 잘 싸우다 죽은 것으로 치부한다. 졸을 함부로 사지 (死地)로 내보낸다. 상이나 먹고 죽으라고! 그래서 우리말에는 ‘누굴 장기판의 졸로 보느냐?’ 란 말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런 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졸도 상대방에게 잡히면 칼을 돌려 나를 찌를 수 있기 때문에 만만하기만 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졸을 함부로 죽음판으로 내몰 수가 없다. 배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 배신의 가능성 때문에 일본에서는 장기판의 졸도 제법 존중받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꼬붕은 물론 오야붕을 섬긴다. 하지만 오야붕이 지나치게 무시하면 칼을 꺼내 오야붕을 찌를 수 있다. 마치 병아리가 어미닭을 찌르듯, 또는 장기판의 졸이 배신의 칼을 돌려대듯. 오야붕은 꼬붕들의 이런 특성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무작정 꼬붕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꼬붕들을 부려먹되 구슬리며 부려 먹는다. 결코 꼬붕들이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무작정 깔고 앉지 않는다. 결코 장기판의 한국식 졸로만 보지는 않는 것이다.내가 서울약대에 다닐 때, 약대의 각 연구실 체제는 2-3명의 교수가 한 주임교수의 밑에 놓여있는 소위 교실제이었다. 이 제도는 약대 캠퍼스가 관악으로 옮겨질 때까지 오랫동안 약대의 연구실 문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는 실은 일본의 대학들을 흉내 낸 것이었다. 즉 일제 치하에서 해방이 되어 학교를 급히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서울대학교는 한 연구실에 2-3명의 교수를 소속시키면서 가장 연장자를 주임교수로 임명한 것이다. 이 교실의 주임교수는 일본 대학의 주임교수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연구실 내의 후배 교수들 위에 군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본의 주임교수가 어미닭처럼 후배 교수들을 조심해서 품는 것은 미쳐 보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늘 후배 교수들이 건방지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단지 2-3년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주임교수 자리를 놓친 후배 교수들은 주임교수에 대해 ‘언제부터 자기가 주임교수이었나?’ 하는 불만을 갖게 되었고, 결국 주임교수라는 어미닭을 따르지 않았다. 세월이 감에 따라 교실제는 교수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나쁜 제도로 치부되어 1990년대부터 급속도로 붕괴되었고, 마침내 조교수든 정교수든 모든 교수가 1:1로 대등한 권한을 갖는 오늘날의 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꼬붕에 대한 배려가 없는 오야붕 제도의 사필귀정 (事必歸正)이라고나 할까? 사람을 장기판의 한국식 졸로 보는 사회는 결코 오래 갈 수 없는 법이다. 칼의 나라 일본에서 배우는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2011-01-12 0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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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9>고노마에와 도오모 (요전번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칼을 차고 살던 나라인 일본에는 농담이 별로 없다. 윗사람에게 대한 농담은 윗사람이 기분 나빠하는 순간 공포를 부르기 때문이다. 즉 네가 나한테 농담할 군번이냐? 는 식으로 화를 내거나, 심지어 칼을 빼들면 바로 난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함부로 농담을 해선 안된다. 특히 윗 사람에게는… ‘나라’라는 도시에 가면 옛날 무사들이 차를 마시던 곳이 있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찻집의 천정이 매우 낮아 안으로 들어 가려면 거의 기어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천정이 높으면 차를 마시던 상대방이 갑자기 칼을 뽑아들 수 있으므로 긴장을 풀고 차를 즐길 수 없기 때문에, 일부러 천정을 낮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칼을 뽑으려다가도 팔꿈치가 천정에 닿아 칼을 다 뽑을 수 없도록 말이다. 이런 방이라야 비로소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늘 칼을 의식하며 살수 밖에 없었던 일본이 안쓰러워지는 대목이다. 뼈대 있는 일본인의 집안을 보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일본도를 모셔놓은 경우가 적지 않다. 마치 우리나라 양반이 청자나 백자를 잘 모셔 놓은 것처럼. 이처럼 칼은 일본인의 생활 습관이나 문화와 깊숙이 관련되어 보인다.칼은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것이다. 일본인이 얼마나 칼을 무서워했는지는 일본인의 인사 습관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은 남과 헤어질 때, 조금 과장을 섞으면, 대여섯 번은 굽실거린 후에야 헤어진다. 왜 그럴까? 한번 칼을 찬 사무라이와 헤어지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돌아 설 때, 사무라이가 찬 칼이 자꾸 마음에 걸리지 않겠는가? 뒤가 근지럽다. 그래서 슬쩍 돌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순간 사무라이와 눈이 마주친다. 민망하다. 그 민망함을 감추려 서둘러 굽실거리며 ‘도오모 (저, 참..)’, ‘시츠레이 시마쓰 (실례합니다)’ 또는 ‘사요나라 (안녕)’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 가려는데 아무래도 뒤가 또 켕긴다. 나도 모르게 다시 돌아보다가 또 눈이 마주친다. 또 굽실…. 이를 대여섯번 쯤 반복하면 이젠 제법 사무라이와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뒤돌아 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칼 때문인지 자고로 일본 사람들은 남에게 정말 친절하다. 예의 바르다. 말도 참 곱다. 그런 일본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인사말은 ‘안녕하십니까?’가 아니다. 우선 ‘고노마에와 도오모 (요전번에 정말로)’ 라고 말해야 한다. 그 뒤는 우물우물하면 된다. 요전번에 감사했는지, 아니면 미안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감사할 일이나 미안해 할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그런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부터 밝혀두는 일이다. 생각이 잘 안 나더라도 일단 조건반사적으로 이 말부터 해두고 보는 것이다. 일본어에 서툴던 시절, 나는 ‘요전번에 뭐?’ 냐고 되물어 상대방을 당황케 한 기억이 있다. 일본인을 만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고노마에와 도오모’ 부터 읊어 두기 바란다. 권력자가 백성의 인권을 존중하게 되는 것은 백성이 두렵기 때문이지, 권력자의 자비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 사람과 미국 사람이 친절하고 남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특별히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백성들이 칼과 총을 무서워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과거에는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던 총과 칼이 오늘날에는 오히려 인권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 셈은 아닐까? 요컨대, 친절함, 고운 말, 예의, 그리고 민주주의는 총과 칼 끝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총칼의 역설인 셈이다. 새해부터는 총과 칼이 아니라도 약자가 보호되고 인권이 엄중하게 존중되는 그런 지구촌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0-12-22 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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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8> ‘이리 오너라’와 ‘스미마셍’의 차이
우리나라 사람은 남을 부를 때 “여보세요”라고 부른다. 아마 ‘여기 좀 보세요’라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일본 사람은 뭐라고 부를까? 답은 ‘스미마셍’이다. ‘미안합니다’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남을 부르는 것이 미안한 일인 것이다. 왜 그럴까? 내 생각엔 일본인들이 칼을 차고 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칼을 차고 가는 사람을 불러 세운다고 생각해 보라. 어찌 겁이 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부를 때 ‘미안합니다’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그것도 기어들어가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우리나라 사람은 예컨대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 뵙고 싶을 때, “선생님, 조만간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말할까? “우깡아와세떼 이따다끼마쓰” 또는 “오자마사세떼 이따다끼마쓰”라고 말한다. “저로 하여금 찾아 뵙게 해 주십시오” 또는 “저로 하여금 폐를 끼치게 해 주십시오” 라는 뜻이다. 한국식으로 ‘찾아 뵙겠다’는 직설적인 표현은 일본에서는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우려가 있는 일방적이고 도전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도록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일본 음식점은 예컨대 3일간 쉴 경우, 우리처럼 ‘3일간 휴업’이라는 대담한 글귀를 입구에 써 붙이지 못한다. 대신, ‘3일간 쉬게 해 주십시오’라고 써 붙인다. 여름 휴가철에 일본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를 본 한국 사람은 대개 ‘자기가 쉬려면 그냥 쉬면 되지, 꼭 손님 허락을 받아야 쉴 것처럼 저렇게 위선적인 글귀를 써 붙이나’ 하며 못마땅해 한다. 남의 집을 방문해서 문간에서 주인을 부르는 말도 우리와 너무 다르다. 일본에서는 “시츠레이시마쓰” 이다. ‘실례합니다’란 표현이다. 문을 열어주어 집안에 들어 갈 때에도 ‘오소레이리마쓰’, 즉 ‘황송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남의 집에 들어 가는 일이 ‘실례’이며 ‘황송한’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떠했는가? 조선시대에는 남의 집 대문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리오너라’ 라고. 조금 배포가 약한 사람은 ‘계십니까?’ 라고 외쳤다. 어떻게 남의 집 문 앞에서 소리를 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만큼 조선이 안전한 나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저녁에 우리 집으로 마실을 오는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실례합니다”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어이 참 달도 밝다’ 라든지 ‘비가 오시려나’ 라든지, 아니면 ‘저놈의 개는 왜 괜히 짖고 지랄이야’ 라고 큰 소리를 내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불쑥 들어 왔다. 우리 집에 개를 빼고는 그들을 해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본과 엄청나게 다른 대목이다.일본어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유난히 수동태를 많이 쓴다는 것이다. ‘선생님 언제 학교에 나오십니까?’ 라고 묻는 대신, ‘언제 학교에 보이십니까 (이쯔 오미에니 나리마쓰까?’ 라고 여쭙는다. 감히 선생님 보고 언제 학교에 ‘오시냐?’고 직설적으로 묻지 못하고. ‘내 눈에 언제 보이시게 되느냐’고 간접적으로 겨우 묻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생각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나는’ 이라는 주어는 슬며시 빼고 그냥 ‘이렇게 생각된다 (오모와레루)’는 수동태적인 표현을 훨씬 많이 쓴다. 역시 직설적인 표현이 상대방을 자극할까 두려워 하는 모습이다. 우리말과 일본어는 달리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오너라’와 ‘스미마셍’, ‘직설적으로 말하기와 돌려말하기’, 그리고 ‘능동태로 말하기와 수동태로 말하기’ 같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과거에 일본은 칼을 차고 사는 불안한 나라이었던 반면,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나라이었음에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2010-12-08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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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7> 창피했던 공항 소동
1979년 4월 9일 일본 문부성 초청 장학생 33인 중의 한 명으로 선발된 나는 동경행 비행기를 탔다. 동경대학에서의 유학 생활 3년 반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이런 저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을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았다. 일례로 1983년 11월 ‘신일본기’라는 글을 약업신문에 발표한 적도 있다. 여기서는 그 글 중 ‘일본은 사람을 무서워하는 나라’라는 주장 부분을 조금 확장해서 써 보기로 한다. 1980년 겨울, 어느 일요일, 아버지 회갑 잔치에 참석하러 가족과 함께 일시 귀국했다가 동경으로 돌아 가는 길이었다. 장소는 당시 국제공항인 김포공항. 나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KAL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려고 줄을 서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일본 사람들이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금요일 저녁에 워커힐에 와서 도박을 하고 일요일 저녁 비행기로 동경에 돌아가야 하는 샐러리맨 들이었다. 그런데 무슨 사정이 생겨 비행기가 뜨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월요일에 출근을 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카운터에 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묻기도 하고 항의도 하느라 웅성거리는 것이었다. 문제는 카운터 직원들의 태도였다. 승객들의 질문과 항의에 지친 그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버렸다. 당시 그들의 서비스 수준은 그 정도이었던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화가 나 있었다. 그 때 성미 급한 한 한국인 남자가 카운터를 훌쩍 뛰어 넘어 안으로 들어 갔다. 그러고는 ‘이 XX 들 다 어디 갔지?’ 하면서 항공사 직원을 찾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사람이 항공사 직원인줄 알았던 모양이다. 단체로 몰려 가더니 항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언제 비행기가 떠나느냐? 만약 오늘 못 가면 무슨 대책을 세워주고, 안내라도 제대로 해 주어야 할 것 아니냐?’ 는 내용이었다. 카운터 안쪽에 있던 한국인 남자는 처음에는 짧은 일본어로 나름대로 상황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내자 드디어 그는 자제력을 잃었다. “야, 이XX들아, 왜 떠들어? 나도 승객이야 임마, 내 나한테 시비야? 그리고 여기가 일본이냐? 여기가 너희 나라야? 왜 떠들어? 내가 일본 가서 이렇게 떠든 적 있냐? 조용히 해, 이 XX 들아”. 한국 남자의 우렁차고 걸쭉한 욕설에 공항 카운터 앞은 한 순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무리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저게 욕이구나 하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나는 우선 창피하였다. 일본 사람들, 심지어 관공서에 근무하는 일본 사람들마저도 얼마나 간 빼먹으려 들 듯 친절한지를 1년간 충격으로 경험했던 나로서는, 정말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KAL의 서비스는 무슨 꼴이며, 게다가 직원도 아닌 사람이 카운터를 뛰어 넘어가 상스런 욕설까지 퍼붓다니, 이게 무슨 나라 망신이란 말인가? 그런데 묘한 것은,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문 일본 사람의 모습에 한편으로 대한남아 (大韓男兒)의 기개 (氣槪)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부끄럽지만 당시에는 극복할 수 없었던 유치한 민족적 열등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이 때부터 나는 “일본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사람은 특히 한국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 쿠데타나 월드컵은 물론, 때로는 사람마저 거칠고 무례하게 몰아치는 한국 사람이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일본의 어린이 교육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라’라는 소심한 내용으로 시작되지만, 우리는 내 새끼가 ‘기죽지 않고 크기만’을 바란다.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란 광고 카피도 같은 맥락은 아닐까? 일본의 교육이 꼭 옳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조금은 사람을 무서워할 줄 아는 그런 민족이 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옛날 이야기이긴 하지만, 공항에서의 난동은 분명 부끄러운 일이었다.
2010-11-24 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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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6> 명강의
내가 섬기는 ‘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님은 설교를 잘 하시기로 유명하다. 나는 그 분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설교를 잘 할 수 있을까 감탄하곤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목사님들이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는 교인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길 잃은 양들을 구원하고픈 간절한 마음이 결여된 설교는 호소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설교 기법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목사님의 설교는 듣기에 편안하고, 쉽고, 위선적이지 않으며 요점이 분명하기 때문에 누구나 어느덧 빨려 들게 되는 것이다. 일부 목사님들 가식적인 어투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나에게 하목사님의 어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번째로는 무엇보다도 설교하는 내용 자체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목사님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하신다. 설교의 내용이 워낙 뛰어나고 멋 있는 분이기 때문에 명설교가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학교에서의 강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학생에 대한 사랑, 강의 기법, 그리고 깊은 전공 지식이 없이는 명강의를 할 수 없다. 학생들이 강의에 집중하지 않자 눈물을 흘리시던 고등학교 때 물리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 눈물이 사랑임을 깨달은 학생들이 그 후 진지한 자세로 수업을 들었음은 말 할 나위도 없다. 학생에 대한 사랑도 없고, 깊은 전공 지식도 없이 오직 유창한 언변 (강의기법) 만으로 강의를 하면, 청중을 잠시 현혹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감동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2008년 4월 4일 우리대학의 학장으로부터 ‘우수강의상’을 받았다. 영광이다. 당시 부상으로 돈(100만원)까지 받았다. 학생들로부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은 “약제학” 강의를 담당한 3교수 중에서 내가 가장 연장자인 까닭에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영광이다. 연구만 중시하는 대학의 현 세태에서, 강의를 잘 한다고 주는 이 상의 이름이 매우 훌륭하지 아니한가?. 아무쪼록 2008년 범 서울대적으로 생긴 이 상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금년 11월에는 우연히 서울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주최하는 바이오 대중강좌-‘생활속의 생명공학’에 강사로 위촉되었다. 중고등학생을 비롯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강좌에는 공대, 농생대, 의대, 치대, 자연대, 수의대 교수 등 모두 10명의 교수가 참여한다. 우연히 위촉되었다고 했지만, 약대의 누군가가 나를 평생교육원에 추천하였을 것이고, 그 추천은 어쩌면 “우수강의상”수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평생교육원의 담당자는 나에게 수강자가 일반인이니 강의를 쉽고 재미있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쉽고 재미있게’라!. 말하자면 ‘명강의’를 해야 한다는 말인 것 같은데, 이게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인가?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코 적지 않은 강사료에 눈이 멀어 덜컥 강의를 맡기로 승락하였다. 걱정은 그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고 했던가? 돈에 눈이 멀면 언제나 수심이 생기는 법이다. 아무튼 나는 ‘맞춤약학-당신에게만 딱 맞는 약을 맞추어 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겠노라 회신하고야 말았다. 조교수 시절, 강의 전날 술을 드시지 못하는 노교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그 교수님은 강의하기가 두려우셨던 것이다. 걱정이 되셨던 것이다. 나도 그렇다. 30년 가까이 해 온 강의이지만 막상 다시 하려면 늘 두렵다. 더구나 서울대 학생들의 똘망한 눈빛을 마주 보며 강의하기란, 준비가 허술했다간, 진땀이 나는 일이다. 과연 나는 이번 대중강좌에서 명강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청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철저히 준비하고, 편안한 어투로 강의를 해야지, 다짐을 해본다. 성령님 도와 주시옵소서.
2010-11-03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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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5> "이 놈의 문이 미쳤나"와 알았시유
충청도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쉽사리 남에게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으면, 자기들은 사과할 일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단다. 심지어 그들은 쉽게 사과하는 사람을 가벼운 사람이라고 낮추어 보기도 한다.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서울 여자가 충청도로 시집을 가서 살면서, 옆집에 사는 나이 들은 목수에게 부탁해 방의 문을 제작해 달았다. 그런데 이 문이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목수에게 문이 맞지 않는다고 얘기 했더니, 그 목수가 와서 한다는 말이, “이 놈의 문이 미쳤나? 안 맞고 지랄이여” 했단다. 나는 충청도 출신 아내와의 경험을 통해 이 정도면 충청도에서는 나름대로 심심한 사과의 말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루는 그 새댁이 목수 집에 놀러 가서 목수 부인이 부치면서 권하는 부침개를 먹어 보았더니 맛이 일품이었다. 다만 부침개가 너무 커서 볼품이 좀 없길래 “할머니, 아주 맛 있네요. 근데 조금 조그맣게 만들면 더 예쁘고 좋겠다. 그치요?” 했다. 그랬더니 충청도 할머니 대답하시기를, “내비둬유, 부침개가 무신 미쓰 코리아 나가남유? 맛만 있으면 됐지” 하더란다. 식약청 재직시 업무 관계로 어떤 여성과 대화를 하다가, 내가 놀라면서 그 사람에게 “고향이 충청도시지요?” 라고 소리친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나보고 어떻게 아셨냐고 되물었다.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긴요, 똑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과 35년 이상 살아 봤으니까 알지요”. 그 사람은 부부 싸움을 하면 언제나 남편이 먼저 사과하지 절대로 자신이 먼저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자신은 애초부터 사과할만한 일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난 “앗 이 사람이 충청도 출신이구나” 고 깨달았던 것이다. 충청도 사람의 세 번째 특징은 맥 빠지는 말을 잘 한다는 것이다. 코미디언 김학래씨한테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충청도 사람이 경영하는 식당에 들어간 서울 손님이 주인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이 집 뭐가 맛 있어요?” 그랬더니 돌아온 주인의 대답은, “밖에서 사 잡숫는 게 다 그렇지유 뭐” 였단다. 솔직한 대답인지는 몰라도 손님으로선 맥 빠지는 대답이다. 충청도 사람은 남들처럼 “다 맛 있어유” 라는 위선적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골의 길거리에서 쌈이나 야채를 뜯어 팔고 있는 충청도 할머니에게 “이거 얼마예요?” 하고 물으면, “줄만큼 줘유” 라고 대답한단다. 1000원 드리면 되냐고 되 물으면, “놔둬유, 집에 소나 먹이게” 라고 대답한다. 할머니 생각에 3000원은 받을 요량이었던 것이다. 성미 급한 서울 아줌마는 제 스스로 값을 올려 결국 3000원에 물건을 산다. 충청도 사람은 결코 자신의 입으로 야박스럽게 ‘3000원’을 부르지 않는다. 오직 “놔 둬유” 이 한마디로 받을 값을 다 받는 것이다.다른 지방 사람이 충청도 사람과 협상을 하면서 흔히 오해하는 것이 “알았시유”란다. 예컨대 경상도 사람이 무언가 열심히 주장을 하면 충청도 사람은 “알았시유” 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경상도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인 줄로 생각하고 회담을 끝낸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충청도 사람이 딴 소리를 한다. 왜 이제 와서 딴 소리냐고 추궁을 하면, “내가 알았다고 했지 언제 한다고 그랬남유?” 란다. 이에 성미 급한 경상도 사람은 “그래 니 잘 묵고 잘 살아라” 며 협상 테이블을 뒤엎는다. 심지어 자신에게 유리하게 합의했던 사항마저도 다 상대방에게 줘 버리고 자리를 턴다. 이렇게 보면 충청도 사람은, 천상 외교관이 적격인 것 같다. 우리나라 첫 유엔 사무총장으로 충청도 청주 출신 반기문씨가 뽑힌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그저 웃자고 해 본 이야기이다.
2010-10-13 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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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4> 교수님이 시키는데 어떻게 못 한다고 해유?
충청도 공주 출신의 아내와 35년 이상을 살다 보니 어느덧 충청도 사람의 기질에 관해 반 전문가가 된 느낌이다. 내가 파악한 충청도 사람의 기질을 한번 기록해 보고자 한다. 다만 이 글을 너무 진지하게 읽지는 마시길 바란다. 그저 다년간 아내를 관찰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편견에 가득 찬 재담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 우선 충청도 사람은 겉으로 온순하고 예절이 바르지만, 실상은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다. 오래 전 대학원 석사 과정 제자 중에 충청도 출신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실험실에 들어가 그 학생을 불렀더니, 즉시 내게 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편 옷걸이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지도 교수가 부르시니 상의부터 단정하게 입고 오려는 의도이었다. 그 학생의 예절에 감탄을 하면서 어떤 실험을 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학생은 물론 ‘예’하고 대답하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다시 그 학생을 불러 내가 지시한 실험을 했냐고 물었더니, 그 학생 왈 ‘하지 않았습니다’이었다. 내가 왜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더니 자기 생각에 그 실험은 잘 될 것 같지 않아 안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럼 지시할 당시에 그렇게 대답을 해야지, 하겠다고 해 놓고 안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야단을 쳤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하시는 말씀, “교수님이 시키시는데 어떻게 못 한다고 해유?” 이란다. 기가 막혔다.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 되는 것도 같고…, 아무튼 그 사건 이후 ‘충청도 학생은 말을 잘 듣지 않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은 그 후 아내와의 결혼 생활 연수가 늘어 갈수록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우리 대학을 11년 전에 정년 퇴직하신 김낙두 명예교수님은 충청도 출신답게 유순해 보이신다. 그러나 많은 후배 제자들은 김교수님의 고집이 전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루는 김교수님이 재임하실 때 내가 “충청도 사람은 고집이 세답니다” 했더니, “나도 충청도 사람인데 별로 고집이 안 센데..” 하셨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 모르셨어요? 선생님께 한번 말씀을 드리려면 선생님 머리부터 붙잡고 좌우로 흔드시지 못하게 하면서 말씀 드려야지, 한번 고개를 좌우로 저으시면 그 후에는 아무리 잘 말씀 드려도 안 된다는 사실을 남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 드렸더니, 얼굴이 빨개지시도록 웃으시며 수긍하셨다. 재학시절 학생들이 학점을 고쳐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끝내 고쳐 주시지 않았던 유일한 분이 충청도 출신인 김교수님이셨던 것이다.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일제 때의 독립투사는 충청도 출신에 많은 것 같다.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신채호 선생 등이 다 충청도 출신이시다. 그렇다면 이는 “말을 잘 안 듣는 충청도 기질”과 일맥상통하는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독립투쟁보다 더 “말을 안 듣는 행위”가 어디에 있겠는가? 역시 근거는 없지만 36년간의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우리나라가 신속히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제 하에서 다른 도 사람들은 겉이나 속이 어느 정도 일본화 될 수 밖에 없었지만 충청도인의 속은 그리 간단히 변하지 않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마치 손 힘으로 눌렸던 용수철이 손을 떼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오는 것처럼, 일제가 물러나자 마자 원래의 충청도인, 즉 원래의 한국인으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내가 오늘날까지 그야말로 대과없이 교수 생활과 공직 생활을 해 올 수 있었던 것도, 범사에 고집스럽게 바른 길만 가기를 강조했던 아내의 충청도 기질 덕이라고 생각한다. 공주 (公州) 출신의 공주 (公主)여! 감사합니다.
2010-09-29 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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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3> FAPA의 ‘서울 선언’
지난 8월 13일 아시아약학연맹(FAPA, 회장 남수자 박사)은 세계보건기구(WHO)의 후원으로 “1차 보건의료에서 국민건강을 위한 약사의 역할에 대한 문제점 및 해결책”을 주제로 서울 팔레스 호텔에서 워크숍을 열었다. 워크숍에는 한국, 일본, 인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싱가포르 등 17개국 50여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진지하게 진행된 이 날 회의에 필자는 청중으로 참석하였다.이 날 특별했던 것은 회의 말미에 아시아 약학교육 제도와 약사의 역할에 대한 일종의 ‘서울 선언’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는 것이다. 영문 6개항으로 구성된 결의문의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아시아 각국의 약사 교육 및 약국 업무 내용이 나라별로 매우 다른데, 이는 최소한도의 세계 표준에 맞도록 조정되어야 한다. 2. 약국의 업무 내용은 전 세계적으로 약물 위주에서 환자 중심의 돌봄 (care)으로 바뀌고 있으며, 지역 사회와 임상 업무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 FAPA 회원국들에서의 약국 업무는 이러한 방향으로 더 변화하여야 한다. 3. 약사의 역할과 약국 업무는 약학 교육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FAPA는 약사훈련기관의 평가를 통하여 약학교육을 지지하고 나아가 향상시키도록 모색하여야 한다. 4. 아시아 각국의 약국 업무는 서구의 발전된 나라에서와 같은 인정을 못 받고 있다. FAPA는 약국 업무가 더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나라들을, 필요하다면 규제기관과의 접촉을 통하여, 도와야 한다. 5. FAPA는 WHO, ACCP (미국임상약학회), AASP (아시아 약대협회), FIP 등 국제적인 건강 관련 기관들과의 협력 하에 전문가 자문단을 만들어, 아시아 지역에서 FAPA가 더욱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6. 약사는 고도로 규제를 받는 전문 직업인이다. 또 약사는 보다 양호하고 안전한 환자 관리를 하기 위한 건강관리 팀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이러한 약사의 역할의 영향력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약사의 정치적 존재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FAPA는 각 나라에서 약사가 그 직능에 마땅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각국의 약사단체가 그 나라의 국가 기관에 대해 적절한 대표성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필자는 결의문의 내용 하나 하나에 공감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약사의 정체성, 전문성, 사회로부터의 인정, 임상약학으로의 방향 전환 등 지극히 당연한 내용을, 21세기가 시작된 지 10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 새삼스레 결의문에 넣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 동안 우리를 포함한 아시아 각국은 약사라는 이름을 공유하면서도 약학 교육이나 약사 직능에 대한 공동체 의식을 갖지 않고 지내 왔다. 그 결과가 오늘날 위와 같은 결의문을 만들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필리핀 약대 교수를 만나 “당신의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당뇨병약”이라고 대답을 해서 놀란 적이 있다. 중국과 태국의 어떤 약대는 신입생을 뽑을 때 영어반 또는 일어반을 자국어 반과 함께 뽑아 졸업할 때까지 그 언어로만 교육한다. 또 일본의 임상약학 교육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게 준비가 잘 되어 있다. 우리는 아시아를 너무 모른다. 아시아에 일본과 중국만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최근의 AASP의 조사에 따르면 아시아에는 무려 39개국에 400개가 넘는 약대가 존재한다. 아시아에 관심을 가지자. 아시아를 모르면서 세계로 나가려는 것은 쉽지도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미국과 유럽과 함께 아시아 각국의 약학 교육 및 약사 직능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가 동남 아시아에서 소외된 극동의 한 국가로 남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FAPA 등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참고로 제23회 FAPA 모임은 2010년 11월 5~8일 대만의 타이페이에서 열린다.
2010-09-08 1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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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2> 내사랑 예나
장남으로부터 태어난 우리 손녀 예나의 나이는 방금 25개월, 우리 나이로 3살이 되었다. 정말 예쁘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우리 손녀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동네 사람들도 예나를 만날 때마다 다들 예쁘다고 난리다. 접대용 멘트가 아닐 것이다. 김연아를 닮아 똘똘하고, 잘 웃고, 총명하고, 귀여운 예나를 보고 예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나를 보는 재미로 산다. 안보면 못 견딘다. 다행이 아들내외가 우리 집 근처에 살아서 정말 아침 저녁으로 예나를 볼 수 있다. 요즘 아내에게 고백하였다. “당신하고 연애할 때 보다 예나가 더 보고 싶어. 나 예나하고 연애하는 것 같애” 라고. 둘째 손녀 예원이도 태어난 지 방금 2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은 첫 사랑 예나 편 이다. 예나가 한참 말을 배워 쪼잘거리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무얼 설명해 주면 알아듣지도 못한 것 같은데, ‘아 그렇구나’ 한다. 그럼 나는 귀여워 반 죽는다. 그래서 예나가 ‘하부지가 안아 줘’ 하면, 나를 선택해 준 것을 큰 영광으로 알고 기쁘게 안는다. 옆구리가 결려도 파스를 붙이며 참는다. 자식보다 손주가 더 귀엽다는 말을 많이 들어 왔다. 사실이다. 두 아들이 어렸을 때보다 더 귀엽고 더 소중하고, 걱정도 더 된다. 누군가 말하기를 손주는 내 책임이 덜 하기에 더 귀엽단다. 그럴 듯도 하기도 하나 잘은 모르겠다. 아무튼 요즘 사는 재미가 온통 예나에 달려 있다. 그래서 당신들의 손주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실 수 없으셨던 내 부모님들이 안되어 보이신다. 어떤 분이 늦둥이 아들을 낳고는 오래 살려고 운동을 시작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도 예나가 시집갈 때까지 살 수 있을까를 따져 보기도 하고, 오래 살긴 해야겠구나 생각을 하곤 한다. 집사람은 손주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밥 먹이고 기저귀 갈고 돌봐 주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니까. 나는 밥은 먹이지만 기저귀는 갈아주지 않는다. 데리고 나가 놀아 주긴 하지만 옷을 입히지는 않는다. 요컨대 나는 귀찮은 일은 안하고 데리고 놀기만 하니까 별로 힘들지 않다. 더구나 집사람이 애를 봐주니까 나는 당당하게 아들 집, 아니 며느리 집을 드나들 수 있어 좋다. 그래서 틈틈이 집사람을 꼬드긴다. ‘여보 이 나이에 애 보는 것 빼놓으면 뭐 달리 즐거워할 일이 있겠소? 누구네는 손주들이 미국에 살아서 보지도 못한대. 우린 가까이 사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치?’ 아내도 이내 손주만 보면 비타민을 먹은 듯 피로가 풀린다며 동의한다. 나는 애를 야단치지 않는다. 악역을 담당하기 싫기 때문이다. 야단은 제 부모나 할머니보고 치라고 한다. 심지어 사고 싶은 것 있으면 다 사줄 테니까 할아버지 앞에서 뒹굴라고까지 가르친다. 식구들은 할아버지가 애 버릇 다 버려 놓는다고 야단이다. 그래도 나는 마이 웨이를 갈 것이다. 왜냐고? 예나는 야단칠 필요가 없는 아이임과 동시에 오냐 오냐 한다고 삐뚤게 자랄 애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출생 직후의 예나로부터 순진무구 (純眞無垢)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자라면서 말을 배울수록 밥 먹으라고 하면 ‘안 먹어’ 하고, 장난감을 치우라고 하면 ‘아니야, 이따가 할께’ 한다. 배운 말을 어른 말을 안 듣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또 배운 그 말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어린이 놀이터에 데리고 가면 ‘그네를 태워라, 뒤에서 세게 밀어라. 할아버지도 옆 그네에 타라’ 등 시키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말의 용도가 원래 거절하고, 시키는 이런 것이었나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나는 우리 예나가 이 험한 세상을 살면서 되도록 오랫동안 순진무구 상태를 유지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설사 때가 좀 묻더라도 나는 예나를 끝까지 예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나는 영원한 내 사랑, 내 운명이니까.
2010-08-25 1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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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1> 아내와 해로 (偕老)하는 비결
결혼 50주년을 맞이한 할아버지에게 「결혼 생활을 50년이나 계속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뭡니까?」 라고 한 젊은이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옛날을 회상 하는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들은 멕시코로 신혼여행을 갔었지. 그곳에서 당나귀를 빌려서 둘이 사막을 한가롭게 걸어 다녔어.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탄 당나귀가 무릎을 굽혀서 아내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아내가 바닥에 우당탕 떨어졌지. 그럼에도 아내는 그저「하나」라고 말하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당나귀를 타고 산책을 계속했어. 그런데 얼마 안 지나 당나귀가 다시 무릎을 구부려 아내를 떨어뜨렸지. 그래도 아내는 「둘」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당나귀를 타더군. 그런데 당나귀가 이내 아내를 다시 떨어뜨리는 거야. 세 번째 떨어진 아내는 말없이 짐 속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그 자리에서 당나귀를 쏴 죽여 버리더군. 너무 놀란 나는 ‘아무리 그래도 당나귀를 쏴 죽이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아내를 꾸짖었지. 그랬더니 아내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뭐라고 했는데요?」. 그냥 「하나」라고만 하더군. …… 그 사건 때문에 50년 이상 탈 없이 살게 된 거지 뭐.” 유머 책에서 발견한 이야기이다. 요즘 티브이를 보니 아나운서 왕 아무개와 코미디언 김 아무개는 자기 아내에게 100장도 넘는 각서를 써 주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기꺼이. 왤까? 각서를 쓰라고 하면 ‘그것이 이제 잔소리와 추궁을 끝내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각서 쓰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게 된다고 까지 하였다. 반면에 남편에게 각서를 써주며 사는 아내는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차라리 이혼을 하면 했지 각서는 못 쓰겠다는 여자의 자존심 탓 이리라. 이처럼 여자의 자존심은 남자보다 세다. 그래서 나는 주례를 설 때마다 “아내를 휘어잡을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라”고 신랑에게 신신당부한다. 아내를 휘어잡으면 잠시 남자의 위신이 서고 남 보기에 폼도 좀 나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또 만의 하나 아내가 남편에게 휘어 잡히면 그 가정은 머지 않아 십중팔구 깨지게 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남편은 되지도 않을 헛된 꿈을 버려야 한다. 그저 행복한 가정이란 간단히 말해 ‘남편이 아내의 주장에 순종하는 가정’ 이라는 현실적 진리를 믿어라. 나이가 들수록 아내를 무서워하는 남편이 늘고 있다. 신혼 초 있었던 잘못을 환갑이 넘도록 반복적, 논리적으로 추궁하는 아내의 잔소리는 모든 남편의 공포의 대상이다. 그런데도 남자는, 늙어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아내가 곁에 있을 것’을 꼽는다. 이 무슨 모순된 반응인가? 아내가 무섭긴 해도 아내가 내 곁을 떠나는 것은 더 무섭다니! 그러나 어쩌랴. 늙을수록 아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내 중독증’ 환자가 되는 것이 남편들의 신세이니. 그러니 각서를 100장 넘게 써 주더라도 “제발 내 곁에 있어 주” 라고 애원할 수 밖에. 오호 통재라.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고 말았는가? 반면에 여자는 행복한 노후를 위해서는 영감이 없어야 한단다. 진심일지도 모른다. 설사 농담이라 해도 슬프긴 매한가지이다. 몇 년 전 결혼한 장남에게 쿨한 척 한마디 해 봤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너도 네 처에게 잘 해라. 가사도 반반씩 나누어 하고” 라고. 내 딴엔 제법 신식 아버지 흉내를 내 본 것이다. 며느리가 임신하고 얼마 안 있어 아들이 내게 말했다. “요즘 같아서는 제가 집안일의 99%를 합니다. 아버지는 좋은 시대를 사신 줄만 아세요” 라고. 아들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나 보다.그렇다. 아들 말대로 나는 모든 의미에서 좋은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더 할 수 없이 행복하다. 그러나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영위하며 해로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손자 증손자 들에게는 한마디 주의를 주고 싶다. “시대가 진작에 바뀌었다. 아내에게 입 다물라, 그리고 순종하라.”
2010-08-11 1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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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0> 약대 4+2년제는 세계적으로 보편타당한 제도
지난 6월 30일 도꾸시마 약대의 이토 교수 등으로부터 일본 약대의 6년제 현황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올해는 일본의 소위 통 6년제 약대에 입학한 학생이 5학년이 된 해이다.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은 학생 전원이 6년간 공부해서 약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학생은 4년간의 공부만 마치고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의 경우 적지 않은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이나 회사 취직 등을 위해 4년 만에 약대를 졸업하였다. 물론 약제사 면허를 따고자 하는 학생은 추가로 2년, 즉 총6년을 공부해야 한다. 이러고 보면 일본의 6년제는 “4+2”년제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국립 도꾸시마 약대의 경우 입학 정원은 80명인데, 4학년을 마치고 졸업할 것인가, 아니면 추가로 2년을 더 공부해서 약제사가 될 것인가는 학생의 3학년 때까지의 성적과 희망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4학년 말까지는 80명 전원이 똑 같은 교육을 받는 것 같다. 도꾸시마 대학은 4년제 및 6년제 과정의 정원을 각 40명으로 정하였다. 작년의 경우, 6년제 지원자의 성적이 대체로 더 우수하였다. 4년제를 지원한 40명은 대부분이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홋까이도 (북해도) 대학도 4년제와 6년제가 있는데 6년제를 지원하는 학생의 성적이 조금 더 우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립대학인 동경대학과 경도대학의 경우에는 4년제 지원학생이 더 우수하였다 한다. 도꾸시마 대학과 달리 동경대학 등은 희망하는 학생은 누구나 6년제로 진학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작년의 경우, 90%가 4년제로 졸업하였고, 10%의 학생만이 6년제 코스를 택하였다고 한다. 경도대학의 경우에도 4년제나 6년제의 정원은 없다고 한다. 작년의 경우 50명이 4년제로 졸업하여 대학원으로 진학하였고, 30명이 6년제를 택하였다고 한다. 이들 대학 모두 4년제로 졸업하는 학생은 거의 100%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이었다. 사립대학의 경우, 4년만 마치고 졸업한 학생은 국립대학의 경우보다 적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립대학들도 4년제 학생의 수를 늘리려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 정부도 4년제 정원을 늘릴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에는 약제사 공급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다고 한다. 4년제로 졸업한 학생도 나중에 약제사가 되고 싶으면 다시 약대로 돌아 와 2년간 추가로 임상약학 등 관련 공부와 실습을 더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습 여건 등을 고려할 때 실제로 이런 경로로 약제사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상에서 일본의 상황을 간단히 소개하였지만, 6년제 약대를 실시하고 있는 미국도 4년 만에 약학사로 졸업하는 길을 열어 놓고 있었다. 우리 대학의 정세호 교수가 바로 미국 SUNY Buffalo약대에서 4년제 약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가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경우이다. 현재 모든 대학이 4년제를 병행 실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필요하면 4년제 과정을 열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번 팜월드 포럼에서 성균관대 정규혁 교수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프랑스를 비롯한 EU에서도 약대에 4년 학사 과정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요컨대 세계 유수의 선진국들이 4년 학사 과정이 병설된 약대 6년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신약개발 등 약대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연구 기능이 전원 6년제 하에서 무너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행 2+4년제는 통6년제로, 특히 4년 학사 졸업이 허용되는 통6년제로 바뀌어야 한다. 약사의 자질을 향상시키며 동시에 대학원 연구기능의 약화를 최소화 할 수 있고, 나아가 약사 수의 조절도 가능한 방안은 오직 이 길뿐인 것 같다. 약계 여러분께 간곡히 호소드린다.
2010-07-21 1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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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9> 과거로부터 미래를 믿는다
과거를 돌아 보면 구비구비 긴 인생 길을 용케도 돌아 돌아 오늘 이 자리에 도달해 있구나 감탄할 때가 적지 않다. 우리 부부는 공부를 잘 하는 큰 아들의 미래를 설계하곤 했었다. 몇 살에 대학을 나오면, 몇 살에 무얼 시키고 등등의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 아들이 대학을 다니다 아토피를 심하게 앓고 망막에 이상이 생기고 보니,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세운 ‘사람의 시간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절망적이던 아들의 병은 뉴욕에서 약국을 하는 친구와 존스홉킨스 대학병원에서 망막 박리를 치료받은 경험이 있는 친구의 조언과 헌신적인 도움으로 말끔히 나았다. 이 두 병이 얼마나 어려운 병인가를 절절히 경험해 온 우리 부부에게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리 미국에 이 친구들을 보내 경험을 쌓게 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것도 무려 30여 년 전에.내 인생도 기적의 연속이다. 나는 경기도 김포에 있는, 전교생이 50여명 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국민학교를, 전교에서3-4등 하는 성적으로 졸업하고, 당시 경인 지방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명문 인천 중학교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시험지를 받아보니 아는 문제가 거의 없었고, 결과는 당연히 낙방이었다. 인천 중학교는 그 정도 실력의 시골학교 출신이 감히 합격할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같은 반의 김군은 합격하였다. 당시 인천 중학교는 전국의 어느 초등학교이건 전교에서 1등으로 졸업한 학생은 무시험으로 입학을 시켰었는데, 김군의 아저씨인 담임 선생님은 김군을 1등으로 서류를 조작했던 것이다. ‘서류를 조작할 바에야 성적이 나았던 나를 1등으로 만들어 합격시켰어야지’ 하는 원망은 사실 그다지 들지 않았다. 나도 내 실력이 워낙 형편없는 줄을 시험을 보면서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소문을 들어 보니 그렇게 합격한 김군은 두 해 거푸 낙제를 하더니 결국은 퇴학을 맞고 말았단다. 만약 내가 서류를 조작해서 그 학교에 들어 갔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낙제까지는 몰라도 비슷한 성적의 밑바닥 학생이 되진 않았을까? 인천 중학교에 떨어진 나는 전원 선착순 무시험으로 신입생을 뽑는 동산 중학교에 들어 갔는데, 1학년 처음 본 시험의 성적이 우리 반 80여명 중 50여 등에 불과하였다. 스스로도 놀랄 수 밖에 없는 초라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름대로 노력을 거듭하여 마침내 졸업 시에는 우등상을 받게 되었다.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성적이 올라간 케이스이다. 졸업 후 동경의 대상이던 제물포고등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 해부터 그 학교의 입학 정원이 240명에서 300명으로 늘어 난 덕을 톡톡히 본 것 같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연세대 의대에 응시했다가 떨어졌지만, 1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1967년 서울 약대에 수석으로 합격하게 되었다. 그 때 얻은 작은 자신감은 평생 내 인생의 작은 동력이 되었다. 기적은 그 후로도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절망 속에 있는 우리 아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30여 년 전에 친구를 미국에 보내 놓으신 하나님.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인천 중학교에 불합격되게 해 주시고, 대신 감당할만한 동산 중학교로 인도하신 후, 입학정원을 늘려 제물포 고등학교에 합격하게 해 주시고, 재수 끝에 서울약대에 합격하게 하심으로 자신감 없던 나를 격려해 주신 하나님. 그 후에도 수많은 기적으로 나와 우리 아들을 살려 내신 하나님, 이처럼 내 과거를 설계하시고 인도해 주신 그 하나님이, 나의 미래도 필경은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실 줄을 믿는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산다.
2010-07-07 0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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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8> 선거, 겸손, 월드컵, 파이팅
지난 6월 2일 지방 선거가 끝났다. 예상을 뒤엎고 여당인 한나라당이 참패하였는데, 이를 두고 매스컴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여당이 미워, 할 수 없이 국민들이 야당을 찍은 결과라고도 하고, 여당의 교만함에 대한 국민의 응징이라고도 한다. 둘 다 맞는 말 같다. 교만은 늘 화를 부른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늘 “잘 나갈 때가 위험한 때”라고 하신다. “내가 요즘 너무 잘 나가는 것 같으면 내가 지금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라”신다. 사실 잘 나가지 않을 때에는, 자동차가 천천히 달리면 사고가 안 나는 것처럼, 위험할 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잘 나갈 때 반드시 “겸손”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 동안 한나라당은 너무 잘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 겸손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사고를 당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야당도 이번 승리에 도취하여 국민에게 교만하게 보이면, 다음 번 선거에서 반드시 사고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정치인은 겸손하여야 한다. 어디 정치인 뿐이랴. 무릇 힘있는 자는 누구나 힘없는 자에 대해 범사에 겸손하여야 한다. 힘센 척, 잘난 척 하지 말아야 한다. 교만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마음이다. 건방을 떨고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상대방을 인정한다. 존중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따라서 상대방에 대해 저절로 온유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 온유, 겸손 등은 본질적으로는 다 같은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번 선거에서 여론조사가 실제 개표 결과를 반영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설이 있었다. 젊은이가 잘 사용하지 않는 집전화를 이용해서 여론조사를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여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론조사 전화가 오면 응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한편 야당을 지지한다고 하면 불이익을 당할까 봐 두려워 많은 사람들이 여론조사에 응답을 하지 않거나 거짓 대답을 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만약 정말 불이익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면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아무튼 이번 선거를 통해 모든 힘있는 사람들이 겸손한 마음, 온유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되 찾아, 사랑이 넘치는 우리나라를 만드는 데 힘을 합치게 되길 기원한다. 6월 12일 대망의 월드컵이 시작됐고 우리나라는 그리스와 첫 시합에서 통쾌한 승리를 얻었다. FIFA 랭킹만으로 보면 우리와 같은 조에 속한 세나라 즉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스의 랭킹을 다 합친 숫자가 우리의 랭킹 숫자 보다 작단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실력이 나머지 나라보다 월등히 뒤진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우리 국민들은 믿는다. 아니 믿고 싶어 한다. “FIFA 랭킹은 랭킹일 뿐이다. 축구는 실력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맞부딪혀 보지 않으면 결과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전에 4강 할 때도 뭐 실력이 좋아서 이겼나? 이번에도 잘만 하면 얼마든지 16강, 나아가 8강에 들 수 있다”라고. 나도 FIFA 랭킹을 비웃는 결과가 나오길 기대한다. 이 대목에 관한 한 결코 “겸손한 대한민국”이 되지 않길 바란다. 차라리 교만한 대한민국을 보고 싶다. 제발 상대방을 온유하게 대하거나 심지어 사랑하는 우리 팀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범사에 겸손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지만, 축구 같은 스포츠에서는 용감무쌍하게 전력을 다해 싸우는 파이팅이 오히려 겸손한 스포츠맨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처럼 두려움 없이, 일치된 전국민의 속마음을 터 놓고 월드컵을 즐겨 보자.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참, 그러나 때로는 이런 와중에도 약대 2+4년제의 개선 방안에 대한 재논의가 무르익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하지 말기로 하자. 축구는 지나가도 약대6년제는 지나갈 수 없는 대한민국의 백년대계이기 때문이다.
2010-06-23 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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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7> 약대 6년제, 4+2 년제로 바꾸자
필자는 금년 초 ‘데일리팜’에 쓴 글을 통해 “새해는 약대 6년제 형식이 재검토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6년제 (개방형 2+4년제)는 누구나 공감하듯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제도는 나쁘게 말하자면, 과거 4년제 때보다 두 살 이상 더 나이 먹은 학생들에 대해 4년간 약학을 교육하는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수업연한이 2년 이상 연장되었지만 약학 자체를 가르치는 기간은 예전처럼 4년인 제도이다. 현 제도의 또 하나 큰 문제점은 대학 학부 교육 전반에 파행을 야기할 것이란 것이다. 특히 자연대, 공대 학생들은 학부 2학년을 마치면 약대 입시에 매달리게 될 것이고, 약대로 빠져 나가지 않고 남은 학생들은 학부 4년을 마치면 의학전문대학원 입시에 매달리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략) 때문에 까딱하면 우리나라의 대학 학부 교육 전반이 근본부터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5월 10일자 약업신문을 보면, “지난 4월 28일 중앙대에서 열린 한국약학교육협의회(이하 약교협) 임시총회에서 교과부 대학지원과 박주호 과장이 통 6년제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보이면서 향후 논의과정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자리에서 박주호 과장은 "이공계 학문이 무너진다는 의견을 무시할 수 없다"면서 "교육 정상화를 위해 약대 통 6년제를 진행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전했다. 특히 박 과장은 "합의된 의견이라면 통 6년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 관련 단체가 논의를 거쳐 통일된 의견을 제시한다면 추진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놀라운 변화이다. 사실 연초 필자가 4+2년제 형식을 바꾸자고 소원을 밝힐 때만 해도 큰 기대를 하지는 못 했는데, 교과부 주무 과장이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상황은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 잘 된 일이다.교과부가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여론의 뒷받침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김수봉 교수는 5월 14일 “대학이 의학전문 대학원 입시 준비소인가?”라는 글(조선일보)을 통하여 “내년부터 현재의 약학대학이 6년제 학부 과정의 약학전문대학으로 개편된다. 대학 2학년까지 다니던 학과를 그만두고 약학전문대학 시험을 치르게 돼 학부 과정이 약학 전문대학의 입시 준비장으로 전락할 우려가 커지고 있다” 면서 “정상적인 대학 학부 과정의 회복을 위해서 정부는 한시라도 빨리 파행적인 의.치학 전문대학원과 약학전문대학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이미 의학전문대학원 제도 (4+4)는 사실 상 폐지의 길로 들어 선 것처럼 보인다. 이제 약계는 대학과 사회 전반의 지지와 의학전문대학원 폐지라는 흐름을 이용하여 현행 2+4년제를 고쳐야 한다. 지금이 절호의 찬스인 것이다. 교과부는 2+4년제를 통6년제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통6년제는 2+4년제보다 훨씬 좋은 제도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기회에 아예 4+2년제로 변경하기를 강력히 주장한다. 4+2년제는 우리와 여건이 비슷한 일본이 오랫동안 검토 끝에 결정한 제도이다. 4+2년제 하에서는 4년 수료자는 기초약학을 전공하고 “약학사’가 되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제약회사 등에 취직한다. 그들에게는 “약사” 면허는 주어지지 않는다. 약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기초약학 4년에 더하여 +2년간 임상약학 교육을 받고 “약사고시”에 합격하여야 한다. 이 약사들은 임상약학 원래의 목적대로 병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 4+2년제는 기초약학자의 공급 확대를 요구하는 국내 신약개발계, 제한된 숫자의 고급 임상약사를 필요로 하는 병원약국계, 그리고 개국 약사 공급과잉을 반대하는 약사회의 입장 모두를 절묘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묘안이다. 제발 4+2년제로 고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2010-05-26 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