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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01> 새로운 약의 창조 1 – 우연의 시대에서 필연의 시대로
지금까지 개발된 약의 역사를 돌아 보면 어떤 물질이 특정 질병에 효과가 있다는 우연한 경험을 근거로 개발된 사례가 적지 않다. 작용 기전도 모르는 채 오랫동안 약으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세가지 사례를 들어 본다.(사례 1) 아주 옛날부터 당뇨에 걸린 사람의 오줌이 달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한편 민코우스키 박사는1889년 췌장을 적출한 개의 오줌에 글루코스가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췌장에 당뇨를 억제하는 성분이 들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1921년 마크라우드 박사는 마침내 돼지 췌장에서 당뇨 억제 성분을 추출, 분리, 정제한 다음 이 물질을 인슐린이라고 이름 붙였다. 1980년에는 유전자 변환 기술을 이용하여 대장균으로부터 ‘사람 인슐린’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사람에게 안전하게 쓸 수 있는 당뇨병 치료제가 개발된 것이다. (사례 2) 고대 중국에서는 이(齒)가 아플 때 작은 버드나무 가지로 이 사이를 문질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본말로 이쑤시개를 ‘요지(楊枝)’, 즉 ‘버드나무(楊)의 가지 (枝)’라고 부른다. 1820년대에 버드나무 중에 살리신(salicin)이라는 통증 완화 성분이 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살리신은 너무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를 개량하여 살리실산을 만들어 보았다. 쓴 맛은 줄어들었지만 이번에는 위장장해가 문제였다. 1897년 독일 바이엘사의 호프만은 쓰지 않고 위장장해가 적은 아세틸살리실산, 즉 아스피린을 합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스피린의 해열 진통 작용 기전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1971년이었다. (사례 3) 노벨이 살던 1870년대 말, 협심증을 지병으로 갖고 있는 다이너마이트 공장 노동자가 집에서 쉬는 날에 오히려 발작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났다. 이때부터 다이너마이트의 성분인 니트로글리세린을 협심증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의 작용 기전, 즉 니트로글리세린에서 발생하는 일산화질소(NO)가 혈관 평활근을 확장하여 심장 발작을 막아준다는 ‘번듯한’ 기전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70년대 후반이었다.이처럼 우연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것을 영어로 세렌디피티 (serendipity)라고 한다. 그러나 세렌디피티 같은 우연한 경험에만 의지하여 새로운 약을 창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는 성공 확률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이제는 질병의 발증(發症) 메카니즘(즉 건강과 질병의 차이)을 규명하여 치료 표적을 정함으로써 신약개발의 성공 확률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우연의 시대에서 필연의 시대로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필연’의 성공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한다.(사례 1) 1989년 일본의 산쿄(三共)사는 푸른 곰팡이로부터 콜레스테롤 생합성효소 (HMG-CoA 환원효소)를 저해하는 메바스타틴이라는 물질을 찾아 낸 다음, 이의 뇨 중 대사체를 약으로 개발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콜레스테롤 저하제인 프라바스타틴이다. (사례 2) 또 1983년 일본의 후지사와사는 장기 이식 후의 거부반응이 Helper-T임파구에서 방출되는 인터루킨(IL-2) 때문에 일어나는 것에 주목하여 IL-2의 생성을 억제하는 물질을 찾고자 하였다. 수많은 곰팡이와 방선균을 스크리닝한 결과 1984년 S. 추쿠바엔시스라는 방선균의 배양액이 그런 작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성분을 분리 정제하였다. 이를 장기 이식 후의 거부반응 억제 약으로 개발한 것이 타크로리무스이다. 2003년 완료된 ‘사람 게놈 프로젝트’에 의해 질병의 발증 기전을 유전자 레벨에서 밝힐 수 있게 된다면, ‘필연’의 성공 확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소위 ‘게놈 창약’의 시대가 열릴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갖게 된다. 물론 필연의 시대에도 우연의 가능성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대한민국 신약개발 만세! 이다.
2012-05-09 0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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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00> 할아버지 학교가 필요해
우리 부부는 어느덧 큰 아들로부터 두 명의 손녀, 그리고 작은 아들로부터 한 명의 손자를 얻었다. 작은 며느리는 전업 주부를 선언하고 제 손으로 애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맞벌이 부부인 큰 아들 내외가 낳은 다섯 살짜리와 세 살짜리 손녀를 봐 주고 있다. 우리 부부는 일주일에 삼 일은 아침 일찍 큰 아들 집으로 출근한다. 자동차로 10분 걸린다. 아내는 출근하는 며느리 밥상을 차리고 나는 어린이집에 데리고 갈 두 손녀에게 밥을 먹인다. 두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밥을 잘 먹어야 예쁜 공주가 될 수 있다’는 둥 별 소리를 다 해 가며, 때로는 쫓아다니며 먹여야 한다. 대충 먹인 다음에는 물수건으로 얼굴을 씻기고 옷을 입힌다. 옷을 입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다섯 살짜리는 때때로 꼭 무슨 옷을 입어야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한편 세 살짜리는 신발은 꼭 제 손으로 신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운다.그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에 가서 내 차에 두 손녀를 태운다. 큰애에게는 안전 벨트를 채우고, 작은 애는 아직 어려 아내가 안고 탄다. 다행히 어린이집은 15분 거리에 있다. 아내는 작은 애를 ‘꽃사과반’으로 데리고 가고, 나는 큰애를 ‘진달래반’으로 데리고 간다. 작은 애는 할머니와 헤어질 때마다 울더니 얼마 전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이빠이”다. 그 뒤 나는 아내를 우리 집에 태워다 주고 학교로 출근한다. ‘1단계 임무 완료’이다.저녁이면 나는 아침의 역순(逆順)으로 2단계 임무에 돌입한다. 즉 오후 6시에 학교에서 나와 어린이집에 들러 미리 와 있는 아내와 함께 애들을 태우고 큰 아들네로 간다. 참, 매주 월요일 저녁 7시에는 큰 애가 우리 집에서 ‘한글나라’ 공부를 하기 때문에 우리 집에 데리고 갔다가 아들 집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아들 집에 오면 아내는 저녁 밥상을 차린다. 아들 내외가 퇴근하면 여섯 식구가 식사를 함께 한다. 역시 시간이 걸린다. 식사를 마쳤다고 ‘일과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애들과 놀아야 한다. 어찌나 애들이 나를 좋아하는지 잠시도 나를 가만 두지 않는다. 큰애는 특히 ‘역할 바꾸어 놀기’를 좋아한다. 자기가 ‘엄마’가 될 테니 나보고는 ‘자기’의 역할을 하란다. 그리고는 진짜 엄마처럼 나에게 이런 저런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고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나보고 결혼을 하잔다. 어디서 보았는지 ‘입장’에서부터 ‘주례사 듣기’, ‘애기 돌보기’ 등을 함께 하자고 조른다. 이런 식으로 안아주고 업어 주고, 엄마 아빠 놀이와 소꿉놀이의 상대가 되어 주다 보면 옆구리가 결리고 허리가 아파 온다. 우리 집으로 돌아 오고 싶어진다. 그러니 큰 손녀는 저녁 9시 반에서 10시 반이나 되어야 ‘퇴근’할 수 있도록 우리를 ‘풀어’준다. 일주일의 나머지 나흘 중 이틀은 외할머니가 와서 봐 주시고 나머지 이틀 즉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들 내외가 애들을 본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당번이 아닌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스스로 큰 아들네 가서 애들과 논다. 스스로 생각해도 심각한 애들 중독 현상이다. 우리가 하도 큰 아들네 애들과만 노니까 작은 아들 내외는 살짝 서운해 하기도 한다. 손녀들과 놀면서 깨달은 것은 손녀들과 노는데도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화영화 ‘뽀로로’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 한다. 또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그리고 인어 공주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겨우 대화가 된다. 바람직하기는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의 작동법을 숙지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만화, 동요, 율동, 그림 그리기, 동영상 등 아이가 좋아할만한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신혼 부부 학교’나 ‘아버지 학교’처럼, 교회 같은 곳에 ‘할아버지 학교’가 생겼으면 한다.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좋은 할아버지 노릇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배움에 끝이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12-04-25 0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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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9> ‘우리’라는 ‘우리’
우리 나라 사람들은 ‘우리’라는 말을 쓰기 좋아한다. 심지어 자기 부인을 ‘우리 와이프’라고 말할 정도이다. 외국인들은 ‘our wife’ 라는 이 표현에 황당해 한다고 한다. 우리가 이처럼 ‘우리’라는 표현을 애용하게 된 것은 옛날부터 농어촌 등에서 함께 모여 일하던 공동체 습관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라는 말의 어감 (語感)은 서구인들이 쓰기 좋아하는 ‘나’라는 말보다 덜 야박해 보여 좋다.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동네’라는 표현에는 왠지 모를 따듯함이 묻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이 ‘우리’라는 표현에 한두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생겼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 보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우리’의 크기를 너무 작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싶다. ‘우리 나라’의 경우처럼 제법 큰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우리 식구, 우리학교, 우리 팀, 우리 지역’처럼 비교적 작은 규모의 공동체를 일컬을 때 ‘우리’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우리’란 말을 ‘남’이란 말의 반대어(反對語)로 사용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 편’ 소속이 아니면 ‘남의 편’으로 보고, 심하면 ‘적(敵)’으로까지 본다. 이럴 때의 ‘우리’에서는 ‘우리끼리만’이라는 배타성(排他性)이 엿보인다. 사전을 보면 ‘우리’라는 단어는 ‘돼지우리’와 같이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 (畜舍)’ 또는 ‘울타리’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러고 보면 말 장난 같지만 우리는 우리를 너무 ‘우리’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려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오늘날 보수 또는 진보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 나름대로의 ‘우리(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우리’라고 부르는 것 같다.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좋지만 걱정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을 ‘남이나 적’으로 간주(看做)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을 ‘진영(陣營)의 논리’라고도 부르는 모양인데, 진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세상은 온통 ‘우리 편’과 ‘적’과의 싸움터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세상이 싸움터이면 인생은 필연적으로 싸움일 터이다. 그런 세상, 그런 인생에 무슨 평화와 평강(平康)이 있겠는가? 우리는 세상이 진영간의 싸움터로 바뀌는 사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싸움터로 만들 권리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모두가 진영이라는 ‘작은 우리(울타리, 틀)’를 깨고 드넓은 밖으로 나오도록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크기를 키우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배타적 집단으로서의 ‘우리’의 틀이 아니라, 우리와 반대되는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포용하는 ‘이해의 폭’으로서의 ‘우리’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대립된 진영 간에 공감하는 영역(공감대; 共感帶)이 발견될 것이고, 이 공감대가 넓어질수록 진영 간의 대립에 의한 사회적 불안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의 삶에 평화와 평강이 찾아 오게 될 것이다. 최근 ‘힐링 캠프’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인기 탤런트 차인표씨가 인도와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해 헌신하는 내용을 보았다. 또 얼마 전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하여 현지에서 순교하신 이태석 신부님의 일대기를 보았다. 진한 감동이었다. ‘우리’의 개념을 ‘인류’ 전체로 확대하고 있는 이런 분들의 고귀한 삶이 있기에 아직 지구에 평화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정치판이 ‘작은 우리’간의 진영 싸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각 진영의 투사(鬪士)를 지도자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이제 진영 간의 화해를 이끌어 낼 포용력을 갖고, ‘인류’ 전체를 ‘우리’로 이해하는 비전을 가진 ‘점잖은’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총선의 날 4월 11일을 맞는 간절한 소망이다.
2012-04-12 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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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8> 기다렸다 말할 걸
며칠 전 대학 후배 댁 혼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줄을 서 있는데 어떤 후배 하나가 나를 따라와서는 “선배님, 저기 앉아 있는 분이 누구세요?” 물었다. “내 친구 K야”라고 대답했더니, 그 후배 얼굴이 하얘지면서, “아 큰일 났네”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접시를 들고 K 옆에 앉았더니 그 친구 왈, 저 후배가 아는 척을 하길래 “야 너 요새 혈색 참 좋다”고 했더니 그 후배 답하여 가로되 “야 임마, 네 혈색이 더 좋다”고 했다나. 순간 머리가 띵 했지만 ‘아마 저 녀석이 날 잘못 알아 본 모양이구나’ 생각했단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후배는 곧 우리 자리로 오더니 “선배님, 제 동기로 잘못 알고 죽을 죄(?)를 졌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며 사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네가 알고도 그랬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말 때문에 낭패를 본 사례 몇 가지가 머리에 떠 올랐다.
내가 군대 사병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사례1) 정기 휴가를 나갔다가 귀대하면서 ‘마리아 상사’라고 별명이 붙은 선임하사 댁에 들렀다. ‘마리아 상사’란 말끝마다 “이O의 XX들 말이야” 하는 그의 말 버릇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 댁에 들른 것은 무언가 뇌물을 좀 바쳐 귀대 후의 내 신분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어둑어둑한 방안에 들어 가 인사를 마치는 순간, 부엌 쪽 문이 열리며 한 노인네가 밥상을 들고 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인사성 바른 나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드렸다. “어머님 되십니까?”라고. 그런데 그 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내가 크게 실수한 느낌이 엄습하였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선임하사의 침통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냐, 우리 마누라야”라고 하는. 그 때 나는 “아! 이제 나는 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비슷한 실수는 수십년이 지난 요즘에도 반복되고 있다. (사례2) 오랜 만에 옛 제자를 만날 때가 있다. 그때마다 그냥 “잘 지내?” 라고 만 하는 것이 좀 그래서 한번은 “그래 지금 어느 회사 다니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제자 대답 왈, “지난번에 D제약 다닌다고 말씀 드렸었는데요”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괜히 물어 봤네 생각하며 머쓱해 한 적이 있었다. (사례3) 한번은 어떤 영악한 제자를 만났는데 그는 내가 이름을 물어 보기도 전에 “교수님, 저 누군지 또 모르시죠?” 라고 선수(先手)를 치는 것이었다. 아마 얼마 전에도 내가 그 제자의 이름을 몇 번 물어봤던 모양이다. (사례4) 이 정도의 망신(?)은 약과이다. 언제인가 나이가 좀 든 제자가 찾아 왔길래 “이제 너도 장가가야지?” 했더니 “교수님, 지난번에 딸 낳았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하는 게 아닌가?
나의 대학 동기 C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처음 약국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아이를 업고 약국에 와서, “우리 아이가 감기가 들어서 그러니 약 좀 주세요” 했단다. C는 친절하게도 업힌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고는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여태 무얼 하셨어요?” 하며 아주머니를 좀 나무랐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내 친구를 바라보더니, “약사님, 얘는 안 아파요, 아픈 애는 집에 있는데요” 했다나. 그 친구는 그 때 결심했단다. ‘조금만 기다리자. 그러면 상대방이 다 말하게 되어 있다’ 라고.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리하기로 결심하였다. 즉, 오랜만에 누구를 만나면 그냥 온화하게 웃으며 기다리기로 하였다. 괜히 아는 척, 자상한 척 먼저 말을 걸었다가 불필요한 망신을 자초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다렸다 말하기’는 제법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리면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고 자기 이름, 직장, 가족 상황을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설명해 주게 되어있는 것이다. 혹시 나처럼 순간 기억력이 부실한 분들은 이 ‘기다렸다 말하기’를 한번 시도해 보시면 어떨른지.
2012-03-28 1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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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7> 제네릭이 어때서?
어느 초등학교에 교육감이 시찰을 나왔다. 지구본을 하나 들고 5학년 수업시간에 들어 가 반장에게 물었다. “이 지구본이 왜 23.5도 비뚤어져 있는지 아나?” 반장 왈,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원래 사올 때부터 그렇게 삐뚤어져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교육감은 담임 선생님에게 물었다. 담임 선생님은 “반장 말이 맞을 겁니다. 걔는 거짓말을 하는 아이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화가 치솟은 교육감은 이번에는 수행하던 교장에게 물었다. 교장은 지구본을 한참 이리저리 조사하더니 드디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 이거 국산품이군요. 국산품이 다 그렇죠 뭐”. 교육감은 말문을 닫고 발길을 돌렸다. 이 우스개 소리는 국산품의 품질이 형편 없었던 옛날에 많은 공감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국산 TV가 소니 제품보다 비싸게 팔리고, 중국산 농수산식품을 국산이라고 속여 파는 시대가 되었다. 그 정도로 국산품의 품질이 좋아진 것이다. 최근에는 한류 (韓流)의 덕도 톡톡히 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국산 의약품이 나설 차례이다. 최근 한 제약기업이 ‘제네릭’을 발매하기로 결정을 하고서도 이 사실이 매스컴에 크게 보도되는 걸 꺼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네릭이란 특허 보호 기간이 끝난 외국 회사의 약을 모방하여 만든 약인데 시중에서는 흔히 ‘복제약’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제네릭을 법적으로나 매스컴에서나 ‘후발의약품’이라고 부른다. ‘복제약’은 웬지 남이 만든 약을 불법으로 손쉽게 베꼈다는 뉴앙스를 풍기지만, ‘후발의약품’은 조금 나중에 만든 약일 뿐이라는 한결 밝은 뉴앙스를 풍긴다. 앞서 말한 회사는 점잖은 회사가 복제약을 만든다는 세간의 오해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도 제네릭을 ‘후발의약품’으로 부르기를 제안한다. ‘복제약’ 이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틀린 말이기 때문이다.나는 신약뿐만 아니라 제네릭을 만드는 일도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우수한 품질의 제네릭을 값싸게 만들어 환자에게 제공한다면 이는 국가적으로도 매우 필요한 일이다. 제네릭 생산을 조금도 꺼림칙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최근 이스라엘의 ‘테바’라고 하는 제네릭 전문 회사는 BMS를 제치고 세계 11위의 거대한 회사로 성장하였다. 화이자 같은 미국의 메이저 제약회사들도 최근 속속 제네릭 제조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의 제네릭 관(觀)을 되돌아 보게 만든다. 국산 제네릭과 관련하여 다행인 것은 이들의 품질이 세계 최고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제약회사의 역사는 제제가공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제제를 만드는 기술에서 우리가 어느 나라에 뒤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식약청의 인증이 이를 입증한다. 무조건 오리지널 회사가 만든 약의 품질이 더 좋은 줄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오해이다. 오리지널 회사가 새로운 신약의 개발에 있어서 우리보다 우수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제네릭 약을 합성하고 제제로 가공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들보다 못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제네릭은 이미 구조와 제법이 다 공개된 약이기 때문이다. 제네릭은 오리지널에 비해 싸게 만들어 팔 수 있다. 신약개발 비용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싼 제네릭은 국가 의료보험 재정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정부는 신약은 신약대로, 제네릭은 제네릭대로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오리지널과 품질이 똑 같아 한다며 특히 제네릭을 규제하는 모습이다. 반면에 막상 제네릭이 따라 가야 할 오리지널의 품질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제를 가하지 않는다. 예컨대 오리지널 약의 용출 (溶出)이 로트 별로 달라져도 이를 규제하는 아무런 조항이 없는 것이 실정이다. 이제 정부는 제네릭을 보다 공정한 자세로 밀어 주는 정책을 펴야 한다. 회사들도 어깨를 펴고 말해야 한다. “제네릭이 어때서?” 라고.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 일이다. “이거 국산 맞죠?” 하는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날, 그 날이 바로 국산 의약품의 한류 시대가 열리는 날이 될 것이다.
2012-03-14 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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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6> 좋은 말만 하고 살기
부부들에게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천차만별의 대답이 돌아 왔다. 어떤 사람은 “미쳤어, 당신과 또 결혼하게?” 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배우자는 “와 다행이다, 나는 혹시 나 혼자만 안 하겠다고 하면 미안해서 어떡하나 했는데 당신도 안 하겠다니 정말 다행이다. 우리 오늘 처음으로 서로 의견이 맞았네, 그치?” 했다나. 대답하기에 입장이 난처한 어떤 이는 아예 ‘차라리 다시 태어나지 않겠어요’ 했단다. 어떤 남편은 아내의 점수를 딸 욕심으로 “예 저는 다시 아내와 결혼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단다. 그러나 돌아 온 아내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왜 자기 혼자서 마음대로 결정해? 나한테는 물어 보지도 않고. 당신은 바로 이런 게 문제야”라고. 아 아내들은 무섭다. 아부도 사랑도 내 맘대로 고백해선 안 되는 모양이다. 어떤 남편은 처가에 가서 술을 마신 후 장모님 듣는 데서 “나는 다시 태어나면 아내와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어요”라고 했단다. 장모님을 비롯한 처가 식구들은 벌떼같이 들고 일어 나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 봐” 했단다. 그 사위가 목소리를 깔고 답하여 가로되 “아내가 또 다시 나 같은 남편을 만나 고생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처가 식구들이 모두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을 했다나 어쨌다나. 우리는 살면서 말을 잘 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태반이므로 당연히 말을 잘 해야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나는 때로는 ‘말이 인생의 다이다’ 라고 까지 생각한다. 그만큼 말이 중요한 것이다. 혹자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면 뭐하냐’고 묻는다. 그럴 때에는 이렇게 대답한다. 진짜 번지르르한 말이란 ‘상대방이 듣기 좋아하는’ 말이라고. 내 생각에 ‘말을 잘 하는’ 기술은 실은 ‘상대방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골라 하는 기술’이다. 나는 ‘말 잘하기 또는 듣기 좋은 말 하기’에는 최소한 2단계의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단계는 ‘겉으로라도 듣기 좋은 말만 하기’를 훈련하는 과정이다.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고 칭찬하기 따위를 훈련해야 한다. 이 과정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어찌어찌 해서 대충 수련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거든, 얼른 다음 단계인 ‘진심으로 상대방을 좋게 생각하기’를 훈련하는 과정으로 넘어 가야 한다. 부족한 채라도 2단계로 넘어 가야 1단계도 완성되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나는 내 인격의 수양을 위해 ‘화나도 참기’의 1단계 수련과, ‘근본적으로 화 안나기’ 의 2단계 수련에 도전하기를 결심하였다. 내게 1단계는 문제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워낙 내가 왜소하여 실제로는 상대방에게 화를 냈어야 하는 상황에도 대부분 화를 참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2단계이었다.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기’로만 누르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화를 너무 참으면 암에 걸린다는 말도 있는데 그래서인지 1994년에 직장암 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그래도 부족한 채로 목사님 설교 등을 의지하여 2단계 수련에 도전하였다. 그 결과인지 지금은 예전에 비해 훨씬 화나는 일이 줄어 들었다 (혹시 진짜인가 나를 시험해 보려는 독자가 안 계시길 바란다). 좋은 말하기와 인격 수양은 공통점이 많아 보인다. 1단계 수련을 쌓다 보면 2단계 수련도 어느 정도 저절로 되는 것 같다는 점이 그렇다. 겉으로라도 듣기 좋은 말만 사용하다 보면 (이상 1단계) 어느 새 속마음도 부드러워져 상대방을 좋게 생각하게 되는 것을 느낀다 (이상 2단계). 바른 말이나 뼈 아픈 지적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니다. 그런 말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뿐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 솔직하게 나눈 대화 때문에 관계가 악화된 된 사례가 하나 둘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부부에게 말한다. ‘부부간에 솔직한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직장인에게도 말한다. ‘상사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말라’고. 앞으로 좋은 마음으로 좋은 말만 하고 삽시다. 이로써 나와 독자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인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2012-02-15 1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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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5> 2개 국어 : 냐옹 아니 멍멍
쥐를 좇던 고양이가 쥐를 거의 덮치려는 순간, 쥐가 자기 집인 쥐구멍으로 쏙 들어 가 버렸다. 아쉬운 표정으로 쥐구멍 앞에서 앉아 있던 고양이는 갑자기 멍멍 개소리로 짖기 시작하였다. ‘아이구, 십년감수 (十年減壽) 했네’ 하며 가쁜 숨을 몰아 쉬던 쥐는 한참 동안 개 짖는 소리만 들리자 ‘이제 고양이가 갔나 보네’ 하며 슬그머니 쥐구멍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물론 고양이는 이 때다 하고 잽싸게 쥐를 낚아채었다. 쥐를 입에 물고 이렇게 한 말씀 하시는 것이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엔 2개 국어는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니까”. 유머 책에서 본 이야기이다.얼마 전 교회에서 만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옆에 있는 애 엄마가 더 고마워 하였다. 평소에 영어 배우기를 싫어하던 자신의 애도 “아 이제는 정말 영어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나 보다” 이해했을 것이라며 말이다. 초등학교 학생이 영어를 배울 정도로 오늘날 영어는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 되었다. 문자 그대로 고양이(우리나라 사람)도 개소리(영어)를 해야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2년 전 영어 학원 개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학원은 원어민 (原語民) 선생들이 영어 회화를 잘 가르치기로 소문이 난 체인형 학원이었다. 이 학원에 다니면 미국에 가지 않아도 누구나 영어를 술술 말할 수 있게 된단다. 그렇다면 이런 학원이야말로 영어 때문에 미국 등지로 처자식을 떠나 보내는 ‘기러기 아빠’를 줄여 주는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영어 학원 사업은 일종의 ‘애국 사업’이라는 취지의 축사를 하였다. 애한테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애와 엄마를 미국에 보내고, 한국에 혼자 남아 뼈빠지게 돈을 벌어 이들에게 부치는 아빠를 ‘기러기 아빠’ 라고 부른다. 내 기억에 기러기 아빠의 역사는 삼십년도 넘은 것 같다. 기러기 아빠의 숫자도 수만 명을 넘은 느낌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강남에서 조금 삽네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녀들을 미국 등에 보내고 있다. 실제로 강남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애들을 미국에 보냈다. 그리고는 나더러 왜 애들을 한국에서만 공부를 시키냐고 질책하기도(?) 하였다. 내 보기에 그 식당은 애들 뒷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로 영세해 보였지만, 그 사람은 애들을 미국에 보낸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기러기 아빠들이 미국 등지에 부치는 돈은 막대할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에 악 영향을 미치는 규모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돈보다도 더 큰 문제는 적지 않은 기러기 아빠들의 가정이 사실상 붕괴되고 있다는 점이다. 애와 아내를 미국에 보낸 아빠들은 짧게는 1-2년, 길게는 10년 이상 ‘기러기’ 생활을 하게 된다. 아빠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이런 가정을 가정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런 가족을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 간다. 그 정도로 기러기 아빠들의 생활은 비참(?)하다는 이야기이다. 내 친척 동생도 10여 년간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였는데, 그 동안 그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 고생을 하였고 애꿎은 형수는 다 늙은 시동생 뒤치다꺼리에 없던 병까지 얻었다. 오랜 기러기 생활 끝에 이혼을 당하는 아빠도 적지 않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가정이 완전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들에게 국내에서 영어를 잘 가르치는 일은 경제와 가정 양면에서 국가적으로 매우 중차대한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무슨 특단의 대책이라도 세워야 할 시점이다. 예컨대 학생들에게 아무개의 회화책을 강제로 외우게 하거나, 아니면 원어민 선생이 가르치는 영어학원을 장려해서라도 국내에서 영어 회화를 배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언젠가 스마트 폰이 발전하면 자기 고유의 언어로 말해도 자동으로 상대방 언어로통역되는 그런 날이 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어쩔 수 없다. ‘개소리로도 짖을 수 있는 고양이’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냐옹, 아니 멍멍”
2012-02-01 0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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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4> 훌륭한 삶들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느 교회에서 원로 목사 한 분이 청중들에게 인사 말씀을 하게되었다. 원로목사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하였다. 일등 항해사인 어느 남자가 아들과 아들의 친구를 자신의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가 큰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
운 좋게 항해사는 구명 밧줄 하나를 손에 잡게 되었다. 이 밧줄은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항해사는 이 밧줄을 누구에게 던져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 하였다. 자기 아들에게 던질 것인가, 아니면 아들 친구에게 던질 것인가? 아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아들 친구는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순간 항해사는 자신의 아들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지만, 아들 친구는 이대로 죽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항해사는 아들을 향해 ‘아들아 사랑한다’고 외치고 아들 친구에게 밧줄을 던졌다. 결국 아들은 죽었고, 아들 친구는 살아 남았다.
예배 시간이 끝나자 몇몇 사람이 담임 목사에게 물었다. ‘목사님, 오늘 원로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는 감동적이긴 하지만, 현실성이 없습니다. 자기 아들 대신 아들 친구를 살릴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담임 목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까 말씀하신 원로목사가 그 항해사이고, 그 항해사가 살려 준 아들 친구가 바로 납니다”라고.
이상은 며칠 전 기독교 TV에서 어느 중국계 미국 목사가 설교한 내용이다. TV 속 목사님은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심정을 이 항해사의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신 것이었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얼마 전 큰 비극이 있었다. 어느 장로님의 큰 아들이 혼자 산에 갔다가 갑자기 절벽에서 추락하여 죽은 것이다. 갑작스런 비보에 장로님 내외분은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믿음이 좋으신 장로님 내외는 “우리 아이가 천국에 갔다는 것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견디지 못 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아이를 만지며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슬픕니다” 라고 했단다. 결국 두 분은 아드님이 천국에 갔다는 믿음으로 그 비극을 잘 감당하고 지낸다.
얼마 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그린 영화 “울지마 톤즈”는 감동 이상이었다. 그 분의 삶은 인간이 훌륭해질 수 있는 한계를 수십 단계 높여 놓으신 것 같았다. 소록도에서 음성 나환자와 몇 십 년을 같이 보내시는 스페인 출신의 신부님 이야기도 감동 자체이었다. 이런 분들의 삶은 감동이라는 흔한 말로 표현하기에 벅찬 지고지순 (至高至順)한 것이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훌륭한 삶들이 의외로 많음에 놀라게 된다. 시골에서 열명도 채 안 되는 할머니 할아버지 교인들을 돌보고 계시는 목사님들의 삶도 감동이다. 묵묵히 진정 어린 봉사를 하며 사시는 분들도 정말로 많다. 주변을 둘러볼수록 훌륭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 많음에 유구무언 (有口無言), 할말을 잃게 된다.
이 세상의 삶 (이생)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 (영생)에 비하면 긴 밧줄의 손잡이보다도 짧다고 한다. 짧은 이 생의 의미는 영생 (永生)의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시민권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생의 고난과 짧음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의 시민권을 얻는 방법은 오직 이 생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뿐이란다. 한편 “내주 예수 모신 곳은 그 어디나 하늘 나라”란다. 요컨대 예수님을 믿으면 이 생에서도, 죽어서도 천국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들 대신 아들 친구를 살린 항해사도, 아프리카에서 순교한 신부님도, 그리고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받아들인 장로님도, 모두 천국을 믿는 믿음으로 이 땅에서 평강의 천국을 사셨거나 사시는 분들이다. 하늘에 모든 영광을 돌림으로 땅 위에서 진정한 평강을 누리신 분들이다. 이분들의 훌륭하신 삶에 경의를 표한다. 할렐루야.
2012-01-18 0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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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3> 내가 바라는 대선(大選)공약 - 적령기에 결혼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2012년 말이 되면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가 있을 것이다. 나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젊은이들이 적령기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약해 주기를 바란다. 얼마 전 초등학생들의 무상급식이 이슈가 되어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있었다. 급식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급식을 하려면 급식의 대상이 되는 아이의 출산과 육아 문제가 선결되어야 하고, 아이를 낳으려면 젊은이가 결혼을 할 수 있는 사회 여건부터 만들어져야 하는데, 문제의 시발점인 결혼을 제쳐 놓고 맨 나중의 급식부터 이슈를 삼는 것은 순서가 한참 잘못된 일이라 생각한다.내 대학 동기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30을 훌쩍 넘겼는데, 정확하게 세어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처음에는 ‘요즘 애들은 왜 결혼을 안 하려 드나?’라 했었는데, 조금 깊이 생각해 보니 그 애들이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려면 신랑감은 우선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신랑은 아파트를 마련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신부감이 그걸 제일 원하기 때문이다. 아파트도 없는 총각에게 시집 올 여자도, 딸을 시집 보낼 부모도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자력 (自力)으로 아파트를 구할 (사거나 빌리거나) 수 있는 신랑감이 몇이나 되겠는가? 부모가 부자가 아닌 다음에야 젊은 나이에 아파트를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파트, 특히 서울의 아파트는 정말 비싸기 때문이다. 신랑감이 운 좋게 서울에 취직을 했다 하더라도 시골 출신은 하숙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자신의 봉급 중에서 하숙비 내고 가끔 부모님께 용돈을 부치고 나면 저축할 돈이 얼마 남지 않는다. 어느 나절에 돈을 모아 아파트를 구하겠는가? 신부감은 미모 (美貌)가 뛰어나거나 직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미모가 뛰어나면 경제력이 있는 신랑감들이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성형 (成形)을 하는 신부감들이 많이 생긴다. 그러나 성형을 하더라도 미모가 뛰어나게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외모가 수수한 신부감이라면 직장을 갖고 있어야 시집을 갈 수 있다. 대개의 신랑들은 자신의 봉급만으로는 살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맞벌이 아내를 원한다. 옛날에는 ‘여자가 취직은 무슨 취직, 시집이나 가지’라는 말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가기 위해서라도 취직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취직하기란 남녀를 불문하고 얼마나 어려운가? 미모가 뛰어나기도, 취직을 하기도 어려우니 여자가 적령기에 시집을 가기가 어려울 수 밖에. 경제력이 있는 신랑감은 되도록 예쁘고 젊고 직장 다니는 신부감을 원하고, 그런 신부감은 잘 생기고 돈 많고 게다가 성격마저 좋은 신랑감을 원한다. 눈이 높아 웬만한 사람은 서로 눈에 차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서른이 후딱 넘고, 서른이 넘어 누군가를 만나보면, 내가 겨우 이런 사람 만나려고 여태까지 기다렸나 하는 마음에 결혼 결정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래저래 젊은이들이 적령기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농촌 총각들이 40세 전후 (前後)에 부득이 다른 나라 여자들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다. 머지않아 도농 (都農)을 불문하고 일부 가진 총각 (부자나 특권층) 만이 적령기에 결혼할 수 있고, 대부분의 총각들은 끝내 결혼을 못하거나 외국 신부들과 결혼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 뉴스를 들으니 우리나라 한 주택당 인구가 2.5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독거인 (獨居人)이 늘었기 때문이란다. 특히 혼자 사는 노총각 노처녀 독거인이 늘었다고 한다. 심각한 일이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기본 구성단위인데, 국민의 상당수가 결혼을 못해 가정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면 그걸 어찌 건강한 나라,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음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겠다고 공약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2011-12-28 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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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2> 건망증 (健忘症)
얼마 전 학교에서 퇴근할 때 연구실에서 나와 보니 건물 앞에 내 차가 없었다. 순간 도둑 맞았나 했지만 곧 점심 때 혼자 차를 타고 구내 식당에 갔다가 걸어서 돌아 온 것이 생각났다. 식당에서 동료들을 만나 잡담을 하다가 그만 차를 가지고 간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들과 함께 걸어서 돌아 온 것이었다. 이런 증상을 아마 건망증 (健忘症, absent mindedness)이라고 부를 터인데 건망증은 치매 (dimentia 또는 Alzheimer’s disease)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래도 최근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 내 자신의 기억력 (memory)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나는 특히 예전에 만난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가끔 어떤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고 마는 경우가 있다. 나중에 ‘아! 그 사람이었구나, 그럼 그렇게 인사를 받아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하고 후회 (?)를 했던 경험도 많다. 물론 누구인지 끝내 생각이 안 나 기억하기를 포기한 경우고 있다. 얼굴은 생각나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는 부지기수 (不知其數)로 많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 만나기가 두렵다. 다행히 (?) 이런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닌 모양이다. 가끔 남의 건망증 이야기를 듣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최근 내가 위로 받은 사례 4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사례1: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친구 아들 결혼식에 갔었는데 어떤 부인이 아내의 손을 붙잡고 매우 반갑게 아는 체를 하였다. 아내도 얼떨결에 반갑게 인사를 받긴 했지만 그 부인이 누구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단다. 그런데 나중에 그 부인이 자기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엿들어 보니, 그 부인이 아내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을 하고 인사를 한 것이었다. 허허 웃을 수 밖에. 그 사람이나 아내나 기억력이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았다. 사례2: 서울대 P교수는 대덕단지에서 열리는 회의에 자기 차를 운전하고 갔다가 돌아 올 때에는 고속 버스를 타고 왔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려고 아파트 주차장에 가 보니 자기 차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자기가 대덕에 차를 두고 온 사실을 생각해 내었다. 학교 구내에 차를 두고 걸어 온 내 건망증은 쨉도 되지 않아 보였다.사례3: 연세대 K교수는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들면서 하는 회의를 소집해 놓고는 자신은 깜빡 잊고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모임 시간이 지나자 식당에 모인 한 참석자가 전화를 걸어 왜 안 내려 오시느냐 물었다. K교수는 ‘아! 깜빡 했네요. 곧 내려갑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식당으로 가기 위해 연구실을 나섰다. 그런데 식당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절친했던 옛 친구를 만났다. 반갑게 대화를 나누는데 그 친구가 점심 때이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K교수는 ‘그렇지, 밥은 먹어야지’ 하면서 무심히 그 친구를 따라 외부에 있는 식당에 갔다. 얼마 후 아까 전화했던 사람이 다시 전화를 해왔다. ‘어디 계시는데 이렇게 못 오세요?’. K교수는 앗! 소리 외에는 아무런 대답이나 변명을 할 수 없었다. 그 일로 K교수는 매우 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사례4: 우스개 책에서 본 건망증 이야기 하나를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씩씩하게 아내의 이름을 부르곤 반말로 이것 저것 시키던 경상도 싸나이가 있었다. 친구들은 그의 싸나이다움을 늘 부러워했다. 그런데 환갑이 지난 어느 날 친구들이 그 집에 놀러 가 보니, 그가 자기 아내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자기야, 자기야’ 라고. 그 것도 한껏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를 본 친구들이 이구동성 (異口同聲)으로 놀려댔다. “야, 너 옛날의 그 기세는 다 어디로 가고 남사스럽게 ‘자기야’ 가 다 뭐냐?”고. 사나이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야, 너무 놀리지 마, 얼마 전부터 마누라 이름이 생각이 잘 안 나서 그래, 이해해 줘’ 했다나? 독자 여러분, 위로 받으셨나요? 어쩌겠습니까? 나이 먹으면 다 그러려니 하며 서로 이해하며 삽시다.
2011-12-1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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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1> 사립 경성약학전문학교
1918년 6월 21일 개교한 2년제 조선약학교는 1925년 3년제가 되었고 1930년에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學專門學校; 3년제, 이하 경성약전)”로 승격되었다. 승격된 연도는 자료에 따라 1930년 (“약사산고1~3) )과 1928년4)으로 다르지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1930년이 맞는 것 같다.5) 최근에 입수한 일본 문헌6)에는 1929년 (교장, 동경대학 약과 출신 玉蟲雄蔵)이라고 써 있지만 이에 대한 1차 사료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경성약전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입학 할 수 있었다. 1932년에는 일본 문부성의 인가를 받은 전문학교가 되었다. 조선약학교와 경성약전의 건물은 현재 서울시 중구 구민회관과 구의회의 부지에 있었는데, 서울대 약대 동창회는 이 사실을 기념하고자 1991년 이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비석에는 1918년부터 1959년까지 이 자리에 학교 건물이 있었다고 써 있지만 1918년은 조선약학교가 설치된 해이고 실제로 학교가 이 자리로 이전한 것은 다음해인 1919년이었다. 조선약학교와 경성약전을 통틀어 교장은 초대 조중응 (사진 1)을 제외하고는 5명 모두 일본인 (児島高里, 吉木弥三, 國峰專吉, 安本義久, 玉蟲雄蔵)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동경제대 의과대학 약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대한의원, 총독부의원, 경성제대 부속의원의 약국장을 겸하고 있었다. 경성약전에는 교수, 강사, 비상근 강사를 합쳐 약 34명이 근무하였는데 이중에 한국인으로는 도봉섭 (都逢涉) 교수 1명 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다 일본에서 제국대학이나 약전을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참고로 조중응씨는 1860년 9월 22일에 경성의 남송현 (南松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중협 (重協)이었는데 31세에 개명하였다. 가숙(家塾), 평균관중학동제 (平均館中學東齊)에서 공부하였다. 1883년에 만주, 외몽고, 러시아 바이칼 호수 지방등을 여행하였다. 1885년에 전라도 보성군으로 유배되었으나 1890년에 특사되어 의정부전고과 (議政府詮考課) 주사, 보통문무시험 위원에 임명되었다. 1895년에 외교교섭국장이 되었으나 김굉집 (金宏集) 내각의 와해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고마바 (驹場) 농학교 강습생, 외국어학교 조선어 강사로 근무하였다. 1906년에 통감부 촉탁 농사조사원으로 임명되었다. 통감부의 장은 이또 히로부미 (이등박문, 伊藤博文)이었다. 1907년에 이완용 내각의 외무대신에 취임하였다. 1908년에는 농상공부대신으로 취임하여, 1910년 한일병합 후 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자작 (子爵)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된 친일파 유력자이었다. 1915년에 약학강습소 소장이 되었고, 1918년에 조선약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7월에 죽었다. 조중응은 한일병합에 공을 세워 정미 칠적 (丁未七賊) 및 경술국적 (庚戌國賊, 8인)에 이름을 올린 대단한 친일파 매국노 (賣國奴)이었다. 그가 얼마나 거물이었나는 이완용, 송병준 및 이토 히로부미 (사진 2의 가운데)와 함께 한 구절씩 휘호를 남긴 서화 (사진 3)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서화는 조선 병합에 의기투합하고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이토 히로부미는 ‘정신일도’(精神一到), 이완용은 ‘산하무성’(山河無聲), 송병준은 ‘천재명야’(天載命也), 그리고 조중응은 ‘묵불어’(默不語)라고 적었다. 7) 거물 매국노의 힘을 빌어 우리나라의 근대 약학교육이 시작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엄연한 사실이라 하겠다.1) 홍문화, 약사산고, 동명사 (1980).2) 한구동, 나의 학창시절, 서울대약대동창회보 제2보 (1984).3)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요람 (2007).4) 한국약업100년, 약업신문사 (2004).5) 심창구 외, 한국약학사, 약학회지, 51(6), 361-382 (2007)6) 藥史学雜誌, 日本藥史学会, pp31 (2009).7) http://jeongrakin.tistory.com/492
2011-11-30 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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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0> 조선약학교 (朝鮮藥學校)의 역사
2009년 일본의 ‘藥史學雜誌’를 보면 ‘한국근대약학교육사 자료-일한병합시대를 중심으로’라는 흥미로운 논문 (Vol. 44, No. 1, pp 31-37)이 게재되어 있다. 필자는 2007년 ‘약학회지’에 ‘한국약학사’라는 제목의 논문 (이하 ‘약학사’, 제51권 제6호 361-382)을 쓴 바 있는 데 그 논문을 보완도 할 겸 일본 논문의 내용 일부를 이하에 소개 한다. 1) 전사 (前史)1910 (明治 43)년에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약제과 (3년제)가 설치되었으나 1년만에 폐지되었다. “당시 조선의 민도 및 습관이 의약분업 제도를 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이따금씩 소수의 약제사를 양성하는 것은 오히려 의학진흥을 방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란다. 졸업생이 있었는지는 불명이다. 2) 약학강습소1915 (大正4)년 6월 자작 (子爵)인 조중응 (趙重應)씨를 소장 (所長)으로 하여 ‘약학강습소’가 설립되었는데, 이 강습소는 사립장훈학교 (長薰)로서 야간에 조선인 약업가의 자제를 교육하였다. 3) 조선약학교1918년 4월 15일, 경성에 사는 약종상 (藥種商)인 일본인 2사람 (문헌에 따라 3인)이 대표로 조선약학교의 설립을 청원하였다. 6월 7일에 인가를 얻어 1918년 6월 21일에 자작인 조중응씨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하였다 (서울대약대 요람 2007년 판에 1919년 6월에 개교되었다는 기록은 오류인 듯). 교사 (校舍)는 현재 남대문 시장 남쪽 (당시 南米倉町 284번지)에 있는 관청 소유의 건물을 빌렸다 (약학사에서는 종로 6가의 30평 기와집). 1918년 7월 11일에 종로 5정목 (丁目) 29번지 (현재 종로5가 하나은행 부지)로 이전하였다. 1919년 5월에 황금정 8정목 (黃金町 8丁目, 현재 중구 을지로 6가 중앙구민회관 자리)에 있는 훈련원 (訓練院, 구 한국군 연병장) 부지 약 2000평을 총독부로부터 무상으로 받아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약학사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서울약대 동창회는 우리나라 근대 약학의 발상지인 이 자리에 1991년 9월 12일 (당시 회장 한명승) 교적비를 건립하였다. 이 교사는 나중에 약전 (藥專, 약학전문학교)으로 승격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학교는 본과 1년 + 별과 (別科) 1년의 총 2년제로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조선 내에서 약제사가 되었다. 다른 문헌에 의하면 1920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약제사 시험에서 30명의 응시자 중 11명이 합격하였고, 그 중 한국인 이호벽씨 (국산 약사 1호)와 신경휴씨 (국산 약사 2호)가 1, 2등으로 합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무시험으로 받은 면허는 조선 내에서만 통용되는 면허이었고,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하여 받은 면허는 일본 영내 어디서나 통용되는 약제사 면허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본과에서는 매일 5시간씩 수업을 하였고, 별과에서는 매일 밤 3시간씩 수업하였다. 1년 차 본과에서는 수신 (修身), 수학, 독일어, 광물학, 물리학, 화학, 식물학, 분석학, 제약화학, 생약학 과목을 배우고, 2년 차 별과에서는 분석학, 제약화학, 생약학, 위생화학, 약품감정, 약국방, 조제학, 약제학을 배웠다. 이 학교에는 일본인은 심상소학교 (尋常小學校) 졸업생, 조선인은 보통하교 졸업생이 입학할 수 있었다. 학생정원은 일본인 조선인 합쳐서 50인 이었다 (100인이라고 기록된 문헌도 있음). 학비는 1학년은 월 1원 50전, 2학년은 여기에 월 1원의 실습비를 더 내야 했다.1925년 3월 16일에는 고시 제 41호에 의해 조선약학교는 약학교로 공식 인정되었다. 또 1925년에 조선약학교는 2년제에서 3년제로 바뀌었다고 한다. 3년제로 바뀌었다는 기록은 이 논문에서 처음 보는 기록이다. 1925년부터 교장은 약제사인 국봉전길 (國峰專吉, 다른 문헌에서는 국봉수길 國峰壽吉)씨였다. 1929년 (필자는 약학사에서 1930년을 주장)에 조선약학교는 사립경성약학전문학교 (藥專)로 승격되었다. 藥專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소개하고자 한다.
2011-11-16 0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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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89> 재미한인 제약인협회 (KASBP)를 소개합니다
KASBP (재미한인 제약인협회, 이하 협회, 회장 한용해)는 신약개발을 포함한 생명과학 분야의 주요 이슈에 대한 학술정보 교류와 회원간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 10년 전인 2001년에 만들어진 비영리단체이다. 협회를 설립한 목표는 한국의 제약회사 및 정부출연 연구기관들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한국의 신약연구개발을 돕고, 나아가 한국에서 개발된 기술이 국제적으로 상업화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회원은 주로 미국 제약산업의 심장부인 뉴저지를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의 빅파마와 바이오텍에서 근무하는 연구자들과 기업 종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회원들은 매년 봄과 가을에 신약개발 분야의 새로운 이슈들과 트렌드를 집중적으로 조망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하는데 미국의 기업, 대학, 연구소 및 FDA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심도 있는 토론의 장을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금년에는 대웅제약 및 녹십자와 공동주최로 가을 심포지움 (10/28-29)을 열었다. 이번에는 한국인 중 가장 노벨상 수상에 근접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버클리대학 (UC Berkeley)의 김성호 교수가 기조 강연을 하였다. 그는 그간 업계의 주목을 끌어 온 항암제 연구 과정을 소개하는 한편 후배 연구자들에게 생명과학 연구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신약 연구 현장에 몸담고 있는 재미 한인과학자들의 수준 높은 연구 발표와 FDA 심사관들과의 열띤 토론도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이 협회 활동의 특징은 FDA에서 활동하고 있는 심사관들을 대거 초청하여 한국의 제약업계 연구자들과 대면 토론시킨다는 것이다. 이 때 주로 우리말로 토론을 진행한다는 것이 이 협회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런 프로그램이라면 신약개발 경험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신약연구자들 및 식약청 관계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준 높은 학회는 많다. 그러나 한국어를 통해 한국의 연구자들이 미국의 신약개발 현황에 관한 최신 정보를 효과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곳은 이 협회 외에 따로 없는 것 같다. 한국의 정부도 이 협회가 펼친 지난 10년간의 활동에 주목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3월 뉴욕에서 열린 <한국의료현대화 50주년 기념행사>에 직접 참석하여 이 협회에 공로상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이 협회는 젊은 한국인 연구자들을 이끌어 주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즉 대학원생 및 박사 후 연구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뒤 그들의 연구결과에 대해 함께 토론하며 장래 계획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이 협회의 활동이 점차 알려지면서 회원수도 빠르게 늘어나, 2011년 10월 현재 미국 전역의 제약기업(BMS, Novartis, GSK, Merck, Sanofi, J&J, Pfizer, 등 100여 회사), 60여 개의 아카데미아, 그리고 미국FDA, 국립보건원(NIH) 등 정부기관으로부터 총5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 협회는 회원들의 구직 활동 및 한국 제약기업들의 인재 채용과정을 돕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따라서 이 협회의 심포지움에 참석하면 인재를 구하는 한국 기업이 어디인지, 그리고 장래가 기대되는 재미 젊은 인재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 수 있게 된다.이 협회의 활약을 보고 있노라면 ‘친정집을 염려하는 시집 간 딸’ 이 연상된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하여 미국의 제약업계에서 기반을 구축한 한용해 회장 (BMS)을 비롯한 협회의 임원들이 친정집인 대한민국의 제약업계를 돕는 일에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 시집 간 딸을 보듯 가슴이 뭉클해진다. 세계 최고 수준의 실무경험에 기반한 이들의 전문성과 애국심은, 불타는 의지 하나로 신약개발 강국으로 도약하고자 수고하는 우리나라의 제약업계에 분명하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국내의 많은 기업이 이 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미국의 제약업계 및 FDA로부터 신약개발에 관한 최신 정보를 흠뻑 입수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가르쳐 준다는 데 안 배울 이유는 없을 것이다.
2011-11-02 1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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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88> 약학대학은 신약개발 연구의 본산 (本山)- 소책자 머리말 (2)
잘 알려진 대로 신약개발에는 대략 8-15년이라는 오랜 세월과 평균 1.7억불 (최대 5억불)이라는 막대한 돈이 소요된다. 더구나 성공확률도 거의 제로 (0.02% 이하)에 가까울 정도로 낮아서 수만 개의 화합물을 검토해야 그 중 하나가 약으로 개발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이다. 그래서 모두들 신약개발은 매우 위험한 (risky) 도박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질병을 낫게 하되 (有效性) 동시에 인체에는 무해해야 (安全性) 한다는 약의 이율배반적 (二律背反的)인 요건을 동시에 충족시키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돌을 던져 장독대에 앉은 쥐를 잡되 독을 깨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난치병 및 불치병들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신약개발은 어렵다고 포기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신약개발은 인류의 영원한 숙명적인 과제로 남을지도 모르겠다.전 세계 사람 중 3명 중 1명이 일생을 통해 암에 걸리고 있지만 아직도 확실하게 암을 완치시키는 치료약이 개발되지 못하였다. 만약에 획기적인 항암제 신약을 개발하여 수만~수백만 암환자의 생명을 살려낼 수 있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좋은 신약을 개발하면 연간 최대 매출 10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신약개발의 첫 번째 사명은 무엇보다 환자의 생명을 구함에 있어야 한다. 경제적 이익은 그 다음에 따라 오는 것이다. 신약개발을 총체적으로 교육하는 곳은 물론 약학대학이다. 약학대학의 교육 전략은 간단하다. 학생들에게 신약개발에 필요한 제반 전문지식을 균형 있게 교육하는 것이다. 균형된 (balanced) 지식을 통하여 개발 초기에 성공 가능성이 높은 후보물질을 선정하여 약으로서의 유효성과 안전성을 보증하기 위해 필요불가결 (必要不可缺)한 최소한의 연구를 수행하도록 연구팀을 지휘할 수 있는 안목 (眼目)을 갖도록 학생들을 키우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저자가 머리말에 “약의 개발에는 유기화학, 물리화학, 생물화학, 분자생물학, 약리학, 약제학 등 많은 학문 영역의 총합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이들을 계통적으로 교육하고 연구하고 있는 곳은 오직 약학대학뿐이다” 라고 쓴 것은 약학대학 교육의 특징이 바로 이와 같은 ‘균형 잡힌 교육’에 있음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내가 약학대학을 다니던 1960년대에는 아무도 우리나라에서 신약이 개발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2011년 현재까지 총 17 개의 신약과 6개의 천연물 신약, 그리고 28 개의 개량신약 (2010년에만)을 개발하였다. 놀랍고 대견한 반전 (反轉)이다. 어려운 가운데에도 각고 (刻苦)의 노력을 다 한 우리나라 제약업계에 감사드릴 따름이다.2009년 ESI란 단체의 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의 약학대학 중 최근 10년간 가장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한 대학은 자랑스럽게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서울약대)이었다. 서울약대는 교수 1인당 연간 발표 논문 수에서도 서울대학교의 16개 단위대학 중 1등이었다 (서울대 전체 평균 : 0.9~5.4편, 약대 : 6.9편). 최근 서울약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승인된 신약은 대부분이 서울약대 교수 및 동문이 연구 개발한 것이었다. 신약개발과 서울약대의 연구가 상관관계에 있음을 짐작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 국내의 다른 약대들의 연구 분위기도 서울약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생명을 살리는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제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blockbuster) 신약이 우리나라에서 개발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나는 이 번역판 책자의 머리말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내려 한다. ‘아무쪼록 이 책이 이 땅의 뜻있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신약개발이라는 숭고한 사명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하는데 있어서 균형 잡힌 안내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 않는다’ 라고.
2011-10-19 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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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87> 왜 6년제인가?-소책자 머리말 (I)
요즈음, 나는 일본 교토 대학 (京都大學)에서 2007년에 발간한 “새로운 약은 어떻게 창조하는가?” 라는 작은 책을 번역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의 머리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을 쓰려고 한다. 2011년은 우리나라 약학대학의 학제가 6년제 (2+4년제)로 바뀜에 따라 첫 신입생이 입학한 역사적인 해이다. 약학대학의 교육연한을 종래의 4년에서 6년으로 늘인 것은 ‘의료복지’를 추구하는 21세기의 시대 상황에 부응하는 교육을 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 하겠다. 즉 삶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사람들은 의약품에 대하여 더 높은 수준의 안전성을 요구하게 되었고, 암과 같은 불치병 및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신약이 개발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교육을 하자는 것이 약대6년제인 것이다. 물론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 약학교육의 추세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의약품의 안전성 문제는 실로 심각하다. 미국의 경우 약물의 부작용 때문에 입원하는 환자가 응급 입원 환자의 8%에 이르며, 입원 환자의 7%는 입원 중 먹은 처방약 때문에 심한 부작용을 경험하며, 입원환자 1,000명 중 3명이 의약품의 부작용 때문에 사망한다고 한다. 또 1998년의 추계에 의하면 매년 입원 환자 중 10만 명이 약물 부작용 때문에 사망한다고 한다. 실로 참혹한 일이다. 의료복지를 추구하는 21세기에도 이와 같은 참혹한 일이 반복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미국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식약청 자료에 따르면 2006년부터 올해 7월까지 우리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는 상위 10개 일반약 중 최근 슈퍼판매 대상으로 거론되는 진통제 및 감기약 등에 대해 보고된 부작용이 무려 3,958건에 이른다. 놀라운 것은 대표적으로 안전하다고 알려진 해열진통제인 ‘타이레놀ER 서방정’에 관한 부작용 보고가 1,275건으로 가장 많다는 사실이다. 의약품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사례도 2008년 193건, 2009년 411건, 2010년 539건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10번 이상 부작용이 보고된 의약품의 품목도 2009년 481개에서 2010년 1,495품목으로 급증하였다. 모든 부작용이나 사망 사례가 보고되지 않았을 것이란 점까지 고려하면 우리나라의 약물관련 사고도 미국처럼 참혹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근 아스피린으로 얼굴 팩을 만드는 방법이 인터넷에 올라와 충격을 주고 있다는 뉴스는 우리가 의약품의 안전성 문제를 얼마나 잘못 다루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약대 6년제는 우선 의약품의 안전 사용에 관한 교육을 추구한다. 그 철학을 임상약학 (臨床藥學, Clinical Pharmacy)이라고 부른다. 종래의 약물 요법은 환자 개개인의 인종이나 개체에 따른 유전적 특성 (흡수, 분포, 대사, 배설 및 약물 반응성에 대한 유전적 차이)을 무시하고 무조건 ‘성인 1정, 어린이 1/2정 복용” 같은 식의 일률적인 투약을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최근 발달하고 있는 임상약학은 예컨대 약물유전학 (藥物遺傳學)을 바탕으로 환자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에 따른 최적의 약물요법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처럼 환자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반영한 약물요법을 ‘맞춤약학 (Personalized Medicine)’이라고 부른다. 맞춤약학의 목표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약의 부작용에 의한 희생자를 최대한 줄이자는 것이다. 약대6년제가 추구하는 두 번째 목표는 신약개발이다. 잘 알려진 대로 신약개발에는 막대한 돈과 오랜 시간이 요구되며, 따라서 신약개발은 실패 위험도가 매우 높다는 특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신약개발의 관건 (關鍵)은 실패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성공확률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신약개발 전반에 대해 균형 잡힌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약대 6년제는 이러한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을 또 하나의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신약개발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 계속).
2011-10-05 09: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