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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1> 어쭈, 손을 놔?
내가 군대에서 얻어 맞으면서도 감동한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나는 1971년에서부터 1974년까지 꼬박 34개월을 육군 사병으로 원주에서 근무하였는데, 복무 중 2번이나 유격 훈련 (遊擊訓練, guerrilla training)을 받았다. 유격 훈련은 북한 공비(共匪, communist guerrillas)의 남침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이다. 훈련생들은 모두 자기의 계급과 이름 대신 ‘O번 올빼미’로 불린다. 이는 계급이나 이름이 고려되지 않는 훈련 상황의 상징적 표현이다. 그래서 유격 훈련을 받으러 가는 군인의 심정은 군대에 처음 입소하는 민간인 이상으로 심란하다. 유격은 평시에 하는 작전이 아니다. 기진맥진(氣盡脈盡) 지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하는 작전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훈련을 시킨다. 한마디로 죽을 맛이다. 올빼미들은 우선 강변에서 각종 기합을 받거나 이 산 꼭대기에서 저 산 꼭대기로 선착순 구보(驅步)를 해야 한다. 마침내 올빼미들이 녹초가 되면 그제서야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다. 로프를 잡고 절벽과 90도 되게 몸을 세우고 절벽을 뛰어 내려오는 훈련은 재미있는 편에 속한다. 훈련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도강(渡江) 훈련이다. 이는 절벽에서 도르래에 매달려 로프를 타고 저 아래 강으로 뛰어 드는 훈련이다. 나도 남들처럼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절벽에 서서 두 손으로 도르래를 잡았다. 발 아래로 강이 까마득하였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뛰어내리나 잔뜩 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훈련 조교가 곡괭이 자루로 머리와 허리를 후려 갈겼다. “아야, 왜 때려요?”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도르래를 잡았던 손을 놓고, 머리와 어깨를 만지며 소리쳤다. 그러자 조교는 “어쭈, 이 XX 봐라, 도르래를 놓네. 너 죽을래?” 하며 계속해서 더 세게 나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왜 때리냐고 분개를 하다 보니 퍼뜩 저 아래에서 “어떤 경우라도 도르래를 놓으면 곧 죽음이다. 머리에 총알이 박혀도 도르래를 놓지 말아라. 알간나?” 하며 우리를 닥달하던 조교의 가르침이 뇌리에 스쳤다. 그 순간 머리와 어깨의 통증을 참고 얼른 다시 도르래를 움켜 잡았다. 그제서야 조교의 매질이 멈추는 것이었다. 나는 진정으로 감탄 감동하였다. “그래 이게 훈련이다! 이게 참 교육이다!” 도르래를 꽉 잡은 올빼미들은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며 한 명씩 절벽을 뛰어 내린다. 얼마만큼 도르래를 타고 쏜 살같이 내려 가다 보면 강 끝 지점에 서있는 조교가 깃발을 드는 게 보인다. 이 순간 과감히 도르래를 놓고 강으로 떨어져야 한다. 이 때 머뭇거리면 강 건너 설치된 담벼락에 부딪혀 큰 부상을 당한다. 강에 떨어져 허우적대는 올빼미들은 보트가 와서 건져 낸다. 운이 좋은 친구들은 한번만 받아도 되는 이런 유격 훈련을 나는 두 번이나 받았다. 그러나 이 훈련은 평생 나에게 깊은 교훈을 주었다. 원래 비합리적인 것의 극치가 전쟁이고, 따라서 전쟁을 치르는 조직인 군대도 자연 비합리적일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는데, 그런데 이 유격 훈련만큼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극한 상황을 뚫고 살아 남기 위한 훈련이 유격 훈련이라면, 도르래를 잡기 전에 혹독한 기합으로 사람의 진을 빼놓고, 또 도르래를 잡았을 때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도르래를 놓지 못하게 훈련시키는 것을 비합리적(irrational)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오히려 혹시 초합리적(超合理的, surrational)이라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이 더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국에서 입원환자 중 약 10만 명이 의약품의 부작용으로 죽고 있을 정도로 의약품의 안전 사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명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30년 6개월간의 약대 교수 생활을 돌아 보니, 어떤 지식은 유격훈련처럼 초합리적인 훈련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예비 약사들에게 암기시켰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같은 소리지만 말이다.
2013-07-30 1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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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0> 사라져서 좋아요 – 욕과 견학
지난 호에는 쉽사리 사라질 것 같지 않던 우리나라의 나쁜 풍속들이 용케도 사라진 사실로부터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게 전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대학에서 사라진 풍습 두 가지를 더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는 욕이다. 예전의 서울대학 학생들은 자기들끼리의 일상의 대화에서 별의별 화려한 (?) 욕들을 사용했었다. 1966년 학원에 다닐 때 서울대 법대를 나온 영어 강사 선생님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높은 외국인이 여름 방학이 끝나 막 개강을 한 서울대에 가 보았더니 오랜만에 만난 학생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내용을 들어 보니 “야, 이 새끼야 잘 지냈냐? 오랜만이다”라는 것이었다. ‘최고 명문 서울대 학생들이 오랜만에 만나 웃으며 나누는 말이니까 저 말은 틀림없이 품위 있고 좋은 말일 것이다’. 외국인은 그렇게 생각했단다. 그래서 다음날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뜸 활짝 웃으며 “야 이 새끼야 오랜만이다” 하며 손을 내밀었다나.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당시에는 그 정도로 대학생들 대화의 상당 부분이 욕이었다. 영어에서 ‘first name bases’ 란 말이 친한 사이임을 나타내는 말인 것처럼, 우리 말에는 ‘욕을 하고 지내는 사이’ 라고 해야 진짜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의 대학생들은 별로 욕을 하지 않는다. 우리 학생들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주 잘된 일이다. 참 욕설이 대화의 대부분이던 군대의 대화는 요즘 어떻게 바뀌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둘째는 실습시간에 가는 견학(見學)이다. 67학번인 우리 동기들은 대충만 꼽아 보더라도 구의동 수원지, OB맥주, 해태제과, 삼양라면, 종근당, 한독약품, 연초제조공장, 홍삼제조 공장 등을 견학 갔었다. 또 공기 오염도를 측정한답시고 흰 가운을 입고 공기 채취 병을 들고 대한극장에 들어 갔던 일도 생각난다. 약용식물학 실습시간에는 뚝섬 약초원에 가서 약초를 구경하였다. 그러나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던 간에 학생들의 관심사는 견학 자체가 아니었다. 선물로 무얼 주려나가 관심사이었다. 종근당은 견학 간 우리 학생 80명 전원을 회사 버스에 태워 영등포 시내에 있는 음식점에 데리고 가 맛있는 설렁탕을 사 먹였다. 아마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던 견학이 아니었던가 기억된다. 해태제과에서는 과자를 얻어 먹고, OB맥주에 가서는 맥주를 공짜로 얻어 먹는 것이 재미 있었다. OB맥주에서는 견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재떨이 같은 기념품도 주었다. 삼양라면에 견학 갔을 때에는 방문 기념으로 라면 5개가 들어있는 덕용 포장 한 개씩을 받았다. 누군가의 제의에 따라 이를 들고 뚝섬에 가서 라면 집 아주머니에게 5개를 주고 2개를 끓여 받아 먹었던 추억이 아련하다. 왜 당시에는 이처럼 견학이 많았을까? 졸업을 하고 난 한참 뒤에 알고 보니 그것은 오로지 돈 때문이었다. 견학을 가면 실습에 한 푼의 돈도 들지 않기 때문에 되도록 견학을 간 것이었다. 아마 위생화학 실습 시간에 견학을 가장 많이 갔었던 것 같다. 훗날 유기제약 연구실의 조윤상 교수님 말씀에 의하면, 설사 학교에서 실습을 할 때에도 실습 주제를 선정하는 첫 번째 기준은 돈이었다. 되도록 싼 화학 물질을 가지고 오랫동안 반응을 시켜야 합성이 되는 반응을 찾아서 실습을 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실습시간은 늘 지루하기만 하였다. 영리한(?) 학생일수록 실습 테이블을 두세 명의 착실한 학생에게 맡기고 실습실 앞에 있는 운동장에 나가 야구시합을 하거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당구장에 가곤 하였다. 당시에는 그런 것을 낭만이라고 생각하는 교수와 학생들이 많았다. 낭만의 극치(?)는 실습 담당 조교가 종종 학생들의 야구 시합 심판을 보았던 일이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비뚤어진 낭만이다. 지금은 그런 류의 견학이나 실습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대학에서 욕과 농땡이 실습(견학)이 사라진 것은 일말(一抹)의 아쉬움도 있을 수 없는 아주 잘된 일이다.
2013-07-17 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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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9> 용케 없어진 것들
오랜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자가용으로 출퇴근하게 된 A박사에게 직장동료 B가 조언을 하였다. ‘한국에서 운전을 하려면 지갑에 면허증과 오천원짜리 한 장을 함께 끼워 놓아야 한다’고. A박사는 ‘아마 그렇게 해야 사고가 잘 안 난다는 말인가 보다’ 생각하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어느 날 시내를 지나는데 교통 경찰이 차를 세우고 면허증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면허증을 제시하였더니 경찰은 잠시 후 말없이 면허증을 되돌려 주었다. 한참을 가던 A 박사는 면허증 뒤에 끼워 놓았던 오천 원권이 없어진 사실을 발견하였다. ‘내가 부적처럼 갖고 다니는 오천 원권을 빼 가다니!’ 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그 자리에서 차를 돌려 경찰에게 다가 갔다. 그리고 따졌다. “여보시오, 왜 남의 돈을 빼 갑니까?”라고. 그 말을 들은 경찰은 창백해진 얼굴로 황급히 돈을 돌려 주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를 반복하였다.직장에 도착한 A 박사는 ‘별 이상한 경찰이 다 있더라’며 동료 B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B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어 A박사, 앞으로는 그 길로 다니다가 절대로 신호 위반을 하면 안 됩니다. 다시 그 경찰한테 걸리면 절대로 무사하지 못 할 겁니다”. A 박사는 당시 운전자들이 경찰에게 걸리면 돈을 주는 관행(?)을 몰랐기 때문에 그 경찰이 몹시 불쾌했었다. 한편 경찰은 얼마나 놀랐을까? 운전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면 경찰에게 돌아 와 ‘왜 내 돈 가져갔냐?’고 따졌을까 싶었을 것이다. 아마 자기가 짤리는(파면되는) 순간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은 1980년대의 이야기이다.지금은 그 때처럼 교통경찰이 돈을 받는 관행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다. 정말 용케도 없어졌다.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일을 보면 우리나라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적지 않은 불합리한 일들도 언젠가는 없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희망이 생긴다. 말이 나온 김에 돌아 보니 학교에도 그 동안 사라진 것들이 많았다. 우선 교수들이 학부 강의를 빼먹는 소위 ‘휴강’이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1967~1971) 연건동에 있던 약대는 봄이 되면 당시 창경원에서 흘러 나오는 스피커 소리 때문에 공부 분위기가 흐트러지곤 하였다. 학생들은 수업에 들어 오신 교수님을 보고 “선생님, 휴강해 주세요” 소리를 두세 번 외친다. 그러면 교수님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휴강을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 휴강이 많았던 것은 무엇보다 교수님들의 불성실함 때문이었다. 어떤 교수님은 전날 과음하신 탓에, 또 어떤 교수님은 테니스를 치다 보니 수업시간에 맞추어 오기 어렵다는 등, 요즘 같으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휴강을 하였다. 그랬던 휴강이 1980년대부터 서서히 없어지더니, 90년대 이후에는 거의 완벽하게 대학에서 사라졌다.또 하나 학교에서 사라진 것은 교수들의 ‘교과서 표절’이다. 2010년대 전까지만 해도 외국 책을 서너 권 번역한 후 적당히 편집을 하여 교과서로 만드는 것이 관례이었다. 그 때에는 ‘표절’이라는 말 자체도 없었다. 당시에는 외국 책을 베끼지 않고는 교과서를 만들 방법이 달리 없기도 하였다. 나만 해도 1999년까지 두 권의 책을 썼는데, 외국의 유명한 한 책을 중심으로 기타 몇 가지 책을 참조 보완하여 나름대로 독창성 있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남의 책에서 문장이나 그림, 또는 표의 일부를 가져다 써도 ‘표절’이 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내 책들도 아마 ‘표절’의 의혹을 벗기 어려울 것이다. 요즘 원전비리(原電非理) 때문에 전기가 모자란다고 아우성이다. 에어컨도 못 켜게 해서 더욱 덥다. 이처럼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불합리한 일들이 아직도 부지기수이지만, ‘돈 받는 경찰이 없어지고, 대학에서 휴강과 표절이 사라진’ 기적들을 회고하면서, 언젠가는 원전비리 같은 일도 근본적으로 사라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져 본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더울 것 같다.
2013-07-03 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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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8> 누가 말하느냐가 더 중요해
며칠 전 온누리교회 설교 시간에 이재훈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온누리교회의 담임목사이셨던 고 하용조 목사님께서 부목사님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란다. 한 젊은 부목사가 ‘자기는 영어를 잘 못해서 속상하다’는 취지의 하소연을 했단다. 이 말은 들은 하목사님은 “속상해 하지마”라고 말한 뒤 “사실이잖아?” 했단다.
많은 교인들이 이 예화를 듣고 감동하였다. 마침 이날 이목사님의 설교 주제가 겸손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설교 말씀에 따르면, 열등감은 교만한 사람이 나타내는 반응이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겸손할 수 있지만 교만한 사람은 같은 상황을 굴욕으로 느끼기 쉽다고 한다. 또 열등감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슬퍼하는 감정인데, 열등감을 갖는 사람이 바로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겸손과 굴욕은 영어로 각각 humility와 humiliation로 두 단어가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두 단어의 어원이 같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서 겸손과 굴욕은 본질적으로 같은 특성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수시로 “영어를 못해서 답답해” 소리를 하고 다닌다.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다. 사실인데도 솔직히 열등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내가 영어만 잘 했으면 세상을 뒤엎었을 것이다”라고 마음 속 허풍을 떨기도 하였다. 그런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내 마음에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맞다. 내가 혹시 영어를 잘 했다면 아마 다른 것에 열등감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그날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우리들 마음에 겸손을 가장한 열등감, 그리고 그에 기인한 교만함이 자리잡고 있음을 돌아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한편 나는 갑자기 하목사님이 생전의 설교 중에 하신 말씀, 즉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 말을 하느냐이다’라는 말씀이 떠 올랐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 등등의 말들은 사실 그 말들을 한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유명해진 말들이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렇다면 유명한 말을 남기기 위해서는 먼저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유명한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다 유명해 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행적에 감동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야 감동을 줄 수 있고, 감동을 주는 말이라야 후세에 유명해 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은 에디슨 같은 대천재가 하면 감동이지만, 실제로 아무 것도 발명하지 못한 바보가 하면 무슨 감동이 있고, 어떻게 유명한 말이 될 수 있겠는가? 장애를 극복한 닉 부이치치 같은 분이 하는 말은 말마다 감동이다. 그러나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말은 감동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정말로 무슨 말이냐 보다 누가 그 말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사실 “사실이잖아”라는 말도 인자하고 영적 권위가 있는 하목사님이 했으니까 감동이나 교훈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다르게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감동이 있는 인격자의 입에서 나온 말만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후세에 유명해질 수도 있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교회를 오랫동안 섬기다 보면 대중기도를 할 기회가 주어진다. 대중기도란 남들을 대표하여 소리 내어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이다. 처음에 내게 그 역할이 주어졌을 때의 난감함을 잊을 수 없다. 기도에 적합한 성경 구절을 인용할 지식도 모자랐지만, 무엇보다 마치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거룩한 말씀을 동원하여 기도를 올려도 괜찮은 것일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조금 기도의 연륜이 쌓인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혹시 기도의 기술만 느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실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대중기도는 늘 두려운 행사이다. 기도에 있어서도, 내용보다 누가 드리는가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2013-06-19 1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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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7> 사랑의 말
“예나야, 너는 누굴 닮아 이렇게 똑똑하지?” 물으면 예나 (큰 손녀, 여섯 살)는 “할아버지요”라고 대답한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도록 평소에 교육시킨 탓이다. 뻔한 대답이지만 나는 기분이 좋아져 “옳지, 옳지” 하면서 껄껄 웃는다. 물론 아내가 옆에 있으면 예나의 대답은 “할머니, 할아버지요”로 바뀌지만… 나는 결혼식 주례를 볼 때마다 ‘결혼은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의식이다’라고 강조한다. 결혼 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질 때에도 ‘사랑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의식이 결혼식이라는 말이다. 이 말에 이의 (異議)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지, 즉 사랑의 행동지침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나는 인생은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이란 ‘사랑의 말을 주고 받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은 행동이 아닌 말로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하려면 ‘사랑스런 대화’를 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스런 대화’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심리학자에 의하면 우선 상대방을 칭찬하고 인정하는 말을 하라고 한다. 설사 사탕발림이라도 나를 인정해 주는 말이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할아버지를 닮아 똑똑하다’는 손녀의 말에 할아버지가 웃는다. 운전하는 남편에게 “여보 당신이 운전을 하면 나는 저절로 잠이 와”라고 해 주면 남편이 웃고, 미장원 다녀 온 아내에게 “여보, 오늘 머리 정말 잘 나왔네” 해 주면 아내가 웃는다. 칭찬과 인정이 바로 사랑을 유발하는 ‘사랑스런 대화’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무시, 비난, 솔직한 지적이나 충고 등은 ‘저주의 말’이다. 평소 공부를 잘 안 하던 아들 녀석이 모처럼 백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집으로 뛰어 들면서 소리쳤단다. “엄마, 나 백점 맞았다”. 엄마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의 실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뜸 “뭐? 너 컨닝했지?” 물었다. 아이는 소리쳤다 “아냐, 정말 아냐 엄마”. 그러자 엄마가 다시 물었다. “그럼 네 학교에서 백점 맞은 애가 몇 명이냐?” 엄마는 저 녀석이 백 점을 맞았다면 아마 거의 전교생이 백점을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는 마침내 울면서 결심을 했다. “내가 다시 공부하나 봐라” 라고. 아내를 옆 자리에 태우고 서툴게 교차로를 건너던 남편에게, 옆을 지나던 트럭 운전사가 소리쳤다. “야, 이 쪼다 같은 X아, 운전 좀 똑 바로 해, 부딪칠 뻔 했잖아”. 그러자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 아는 사람이야?” 남편은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인데” 하였다. 그러자 아내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을 그렇게 정확히 알지?” 위의 대화는 서로 사랑을 해야 하는 가족 사이에 나눌 대화가 아니다. 아이가 천하의 바보이고, 남편이 분명한 쪼다였다고 해도, 그런 대화는 서로간에 증오와 저주를 낳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신혼 부부를 포함한 모든 부부에게 신신당부 (申申當付)한다. 부부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절대로 솔직한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솔직한 대화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솔직히 터 놓고 이야기하자’고 나온다면 이미 문제는 심각해 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아, 지금이 바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칭찬해야 할 그 때이구나’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사력 (死力)을 다해, 마치 직장 상사에게 아부하듯, 상대방이 듣기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해야 한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고, 결국 다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크게 느껴진다. 얼마 전 며느리가 아내에게 말했단다. “아버님 정년 퇴임하시면 뭐 하세요, 큰 일이네요” 이 말을 들은 아내는 “네 아버지한테는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고 했단다. 얼마나 고마운가? 이 말을 들은 후 나는 아내가 어디 간다고만 하면, 정성껏 차로 모셔다 드리고 있다. 사랑은 정말로 ‘말’을 통해 커지는 모양이다.
2013-06-05 1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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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6>일본과 네델란드의 전통 지키기
얼마 전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일본의 동경대학은 지금도 입학시험 합격자를 옛날처럼 게시판에 번호를 써 붙여서 발표하고 있었다. 학교 내 운동장 게시판에 합격자의 수험번호를 써 붙여 놓고 정해진 시간이 되기까지는 건장한 럭비부 학생들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다가, 정각이 되면 게시판 앞으로 군중들을 인도한다. 그러면 군중들은 자신의 이름을 찾으려고 목을 빼고 게시판을 쳐다 본다. 물론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사람은 환호하고,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낙심하거나 운다.
문득 1960년대 우리나라의 대학입시 발표 현장으로 돌아 간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때 우리는 추운 날 손을 불며 대학교 운동장에 가서 게시판에 자기 이름이 있나 없나를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예외적으로 수석 합격자는 신문과 라디오를 통하여 미리 공개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현장에 가서야 합격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세월이 좀 지나서는 대학에 인맥이 있는 사람은 그 인맥을 통해 정식 발표날 하루 이틀 전에 자신의 합격여부를 은밀히 알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선진국이라는 일본이 아직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언제가 네델란드의 라이덴 대학을 방문했을 때, 그 대학에 포닥으로 있는 제자의 설명을 듣고 엄청 놀랐다. 그 대학에서 박사 학위 실험이 거의 완료되면 지도교수가‘이제 박사 학위 논문을 발표하고 심사 받을 장소의 사용 신청을 하라’고 한단다. 그러나 본부에 신청하면 대개 1년 후에나 그 장소를 사용할 수 있단다. 전교에 박사 논문 발표 및 심사를 하는 방이 딱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을 투덜대는 학생이나 교수는 없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옛날부터의 전통이기 때문에 으레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방에는 권위가 생겼다고 한다. 학생도 교수도 그 방에 들어가는 것 자체에 엄숙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일본이나 네델란드나 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서울대학에서 심사장소를 예약하는데 1년이나 걸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런 가정은 사실 해 볼 가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서울대학에서는 신청 당일에 방을 사용할 수 없으면 당장 난리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전통을 지키는 것이 미덕’임을 잘 안다. 그렇다면 과연 전통은 어느 정도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일본이나 네델란드 만큼 지독할 정도로 전통을 지키는 것을 옹호할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을까? 왜 그들과 우리는 전통에 대한 생각에 이만한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는 ‘약창춘추’를 통하여 일본 사람들이 ‘남을 두려워하는 민족’이라는 주장을 펴 온 바 있다. 남이 무서우면 제도를 함부로 바꿀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민족은 전통을 존중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혹시 일본의 전통지키기는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네델란드의 전통지키기는 도무지 설명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네델란드도 남을 두려워하는 민족이었는지 한번 알아 보아야겠다.
우리가 전통을 지키든지 말든지를 논하려면 우선 그 전에 자신의 역사를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먼 옛날의 역사는 차치하고 우리들 스스로가 겪은 역사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예컨대 서울약대에 와서 과거 약제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의 명단과 논문 제목 리스트를 얻고자 해보라. 적어도 몇 날은 서류를 뒤적이며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이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컴퓨터의 시대에 이처럼 수작업으로 답을 구하고 있는 우리의 태도야말로 아주 오래된 우리의 전통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 과연 지킬 전통은 무엇이고 버릴 전통은 무엇일까?
2013-05-22 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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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5> 홍매(紅梅) 한 그루를 심으며
관악산 자락에 자리잡은 서울대학교는 지금 만화방창(萬化方暢), 그야말로 꽃동산이다. 춘흥(春興)에 겨워 “꽃이 정말 예쁘지?” 하고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되돌아 오는 대답은 여지없이 “하지만 교수님, 내일 모레부터 중간고사가 시작되요”이다. 아! 학생들은 꽃이 피어도 꽃을 즐길 심정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해마다 봄 꽃이 흐드러지면 학생들에게 그것은 1학기 중간고사가 멀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전령(傳令)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봄 꽃은 그저 스트레스에 불과한 것이다. 어디 봄뿐인가? 가을에도 단풍이 곱게 물들면 영락없이 2학기 중간고사가 코앞이다. 어떻게 그렇게 계절이 좋을 때만 골라 중간 고사를 보게 하는지, 참 잔인하고 절묘하게도 시기를 골랐다는 느낌이다.
누가 하필 이처럼 계절이 아름다울 때 시험을 보게 만들었을까? 물론 과거부터 수업을 하기에는 한 여름과 한 겨울이 너무 덥거나 너무 추웠다. 그래서 여름과 겨울에는 방학을 하고 시원한 계절인 봄과 가을에 수업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 학기가 중간쯤 지나 중간고사를 보게 되었을 때가 마침 가장 꽃이 좋거나 단풍이 아름다운 시기와 겹치게 된 것일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처럼 계절이 좋으면 시험 때가 되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은 대부분의 학교의 냉난방 시설이 완벽해서, 여름에도 덥지 않고 겨울에도 춥지 않게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꼭 여름과 겨울에 방학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꼭 봄이나 가을에 수업을 해야 할 이유도 없어졌다. 그렇다면 혹시 여름이나 겨울에 수업을 하고, 봄이나 가을에 방학을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너무 덥거나 추워 놀러 다니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여름이나 겨울에는 시설이 잘 되어 있는 학교에 나가 수업을 하고, 꽃과 단풍이 아름다운 봄과 가을에는 방학을 해서 실컷 놀러 다니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同價紅裳)’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왕 하는 방학이라면 자연이 아름다운 봄 가을에 하기를 제안한다. 이처럼 방학시기와 수업시기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한결 더 풍요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뿐만이 아니다. 일반 직장도 봄이나 가을에 휴가를 갖고, 여름과 겨울에는 열심히 근무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내 주장이 세상 물정 모르는 한심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의 방학 시기가 기후라는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에 의해 정해진 것처럼, 완벽한 냉난방이 가능해진 오늘날에는 또 다른 타당한 이유에 근거하여 방학 시기가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방학은 꼭 여름과 겨울에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친 고정 관념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옛날부터 우리에게 ‘봄 방학’ 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논에 모를 내야 하는 농번기에 집에서 농사일을 도와주라는 의미로 만든 방학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의 봄방학은 오늘날 사라졌다. 학생들이 농사를 도울 필요성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봄방학은 농사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필요해 보인다. 마찬가지 이유로 가을 방학도 필요해 보인다. 이제 오직 기후에 따라 방학이나 휴가의 시기를 정하게 할 것이 아니라, 언제 하는 것이 가장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를 보고 방학이나 휴가의 시기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학교나 직장의 사정에 따라 자율적으로 그 시기를 정하게 하면 될 것이다.
캠퍼스에 꽃이 피고, 단풍이 고와지면 자연에 대한 찬탄(讚嘆) 대신, 중간 고사의 압박에 새어 나오는 학생들의 비명(悲鳴) 소리가 애처롭다. 그래서 지난 4월, 21동 우편에 홍매 한 그루를 심고 소원을 빌었다. 사랑하는 홍매야, 무럭무럭 자라다오. 그리고 해마다 봄이 오면 예쁘게 꽃을 피워 중간고사에 시달리는 우리 학생들을 오랫동안 위로해 다오. 올 여름 퇴임하는 내 대신에!
2013-05-08 1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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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4> 불효 2제 (不孝二題)
1971년 나는 강원도 원주 38사단에서 훈련을 마치고 경남 사천 (泗川)에 있는 ‘육군항공학교’라는 부대에서 항공기 정비 교육을 받고 있었다. 학교 교장이었던 모 중령은 늘 우리에게 ‘너희들이 졸병 계급장을 달았다고 인간이 졸병인 것은 아니다. 너희도 장교 계급장을 달면 바로 장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라며, 졸병들에게 하기 쉽지 않은 프라이드 교육을 하곤 하였다. 이런 지휘관 때문이었을까? 육군항공학교는 여러 면에서 드물게 모범적인 부대이었다.그러나 그 부대에 대한 쓰라린 추억이 있다. 그곳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어느 초가을 날 그 먼 곳까지 어머니가 큰 매부와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 손에는 튀김닭 두 마리와 떡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경기도 김포에서 사천까지 그야말로 ‘진주라 천리길’을 기차를 타고 오신 것이었다. 사천은 진주 (晋州) 옆 동네이었다. 어머니는 김포 시골집에서 직접 기르신 토종닭 두 마리를 잡아 들고 시외 버스로 30리 길인 부평(富平)까지 나오셔서 튀김집에 부탁해서 튀김닭을 만드셨다. 떡도 어머니가 직접 만드셨을 것이다. 나는 천리길을 마다 않고 찾아 와 주신 어머니의 사랑이 가슴이 시리게 좋았다. 그러나 찾아 오신 날은 마침 평일이었고 시간은 일과 (日課) 중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나는 닭과 떡을 중대 본부에 맡겨 놓고 어머니와 이야기 꽃을 피웠다. 1시간쯤 지났을까? 아쉬운 면회를 끝내고 중대 본부로 닭과 떡을 찾으러 갔다. 그랬더니 중대 본부에 있는 기간병 x들이 그걸 싹 다 먹어 치웠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 닭과 떡을 맛은커녕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 아무리 군대라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노가 끓어 올랐다. 그러나 새까만 쫄병이자 피교육생인 내가 무얼 어찌 할 수 있었겠는가? 속절없이 속으로만 분노를 삭이고 지냈었다. 그 때 그 기간병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내 닭과 떡을 다 먹어 치웠을까?나는 휴가를 나갔을 때는 물론이고 제대한 후로도, 그리고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이 사건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 닭과 떡을 구경도 하지 못한 줄 아셨다면 아마 어머니는 그 즉시로 홧병이 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어머니께 큰 불효를 한 것 같아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비슷한 일로 어머니께 불효를 한 사건이 하나 더 생각난다. 1981년쯤인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찾아 동경에 오셨다.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엿 한 보따리와 흰 떡 한 보따리를 해 가지고 오셨다. 어머니는 엿을 잘 고는 (만드시는) 분이셨다. 엿과 떡의 양은 두 분이 어떻게 다 끌고 오셨을까 궁금할 정도로 많았다. 어머니는 ‘무얼 무겁게 이렇게 많이 갖고 오셨냐’ 고 인사를 드린 아내의 말에 은근히 섭섭해 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 목동에 사는 큰 누이가 자기 좀 나누어 주고 가시라는 걸 완강하게 뿌리치고 애 써 다 끌고 왔는데, 며느리가 그런 식의 반응을 보였으니 그러실 만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불효를 했다고 하는 것은 이 대목이 아니다. 며칠 후 두 분이 한국으로 떠나신 다음날, 아침에 일어 나 보니 부엌에 두었던 한 자루나 되던 흰떡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알고 보니 마루 바닥 에 난 구멍 속으로 밤새 쥐가 다 물어 간 것이었다. 어떻게 쥐가 그 많은 떡을 하룻밤에 다 물어 갈 수 있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아마 김포 쌀로 만든 흰떡이 일본 쥐들에게도 무척 맛이 있었던 것 모양이다. 실로 허망한 사건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짐짓 잊은 척하고 살았다. 끝내 어머니께 말씀 드리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아셨으면 무척이나 상심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정성을 부실하게 관리한 불효가 지금도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어머니 용서하세요.다음달 5월에는 어버이 날이 있다.
2013-04-24 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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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3>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최근 ‘개그 콘서트’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면 어떤 사안 (事案)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의 정의를 내리는 코너가 인기를 끌고 있다. 오늘은 이를 흉내 내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내 나름의 정의를 내려 보기로 한다. 팔구십을 훌륭하게 살고 계신 대 선배님들 보시기에 가소로운 이야기이겠지만 말이다.
1. 나로부터 아버지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문득 거울을 보니 그 속에 내가 아닌 늙으신 아버지 모습이 보인다! 순간 가슴에 애잔한 바람이 지나간다. 2. 여기저기 아프다는 소리를 자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요즘 들어 여기 저기가 아프고 기분도 종종 우울하다. 보통 감기에도 ‘이번에 잘못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장한 생각이 들더라는 대 선배님의 말씀이 떠 오른다. 그러나 아무도 ‘아프다’는 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 마치 내가 과거에 어머니의 하소연을 ‘노인들의 18번’ 쯤으로 치부하였던 것처럼. 3. 서운한 게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존재감이 가벼워진다. 곧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일 것이다. 젊었을 때와 달리 별 것도 아닌 일에 자주 섭섭하다. 학회나 결혼식장에 갔을 때 제자들이 멀리서 보고 목례 (目禮)만 하고 가까이 오지 않으면 섭섭하다. 또 몸이 아프다고 했는데도 자식들이 관심을 표시해 주지 않으면 살짝 섭섭하다. 그래서 젊은이와 자식들에게 가끔 이른다. 어른을 뵐 땐 반드시 다가 가서 손을 잡고 흔들면서 ‘건강은 어떠시냐’, ‘재미는 어떠시냐’ 꼭 여쭈어 보라고. 4. 효도 받기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며느리가 밥상을 차려 놓고 “식사하세요’ 부르면 기분이 좋아진다. “진지 잡수세요” 라고 극존칭을 써 주면 더 좋다. 또 “어디 편찮은 데 없으세요?” 소리에 통증이 반쯤 사라지고, “아버지 잘 다녀 오셨어요? 아버지” 하며 앞 뒤로 ‘아버지’ 소리를 붙여주면 더더욱 행복해 진다. 용돈까지 받으면 금상첨화 (錦上添花)의 기분이 된다. 5. 손주가 무지무지 예뻐지는 것이다. 손주는 내 삶의 동력이자 내 애인이다. 나는 매일 아침 큰 아들 집에 가서 두 손녀에게 밥을 먹이고, 내 차로 어린이 집에 데려다 준 후 출근한다. 저녁 때는 아침의 역순 (逆順)으로 어린이 집에 가서 애들을 데리고 아들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인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는 둘째 아들이 낳아 준 손자를 만난다. 손주를 생각하면 살 맛이 나고 건강해 지고 싶어진다. 손주에 관한 한 세상에서 나보다 행복한 할아버지는 없을 것이다. 6. 매사에 관심이 없어지거나 반대로 쓸 데 없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별로 없어진다. 94세이신 아버지는 용돈을 드리면 세어보기만 하신다. 그런데 90 가까이 되신 숙부는 상황이 반대이다. 설날이나 추석 때 우리 집에 오시면, “서울대학교가 법인화 된 후 뭐가 달라졌느냐, 동사무소를 주민센터라고 이름을 바꾼 것이 과연 잘 한 일이냐?” 등 묻는 것도 많으시다. 파고다 공원에 왜 애국지사가 많은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7.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행여 젊은이가 무얼 물어 오면 ‘오, 아직 내 가치가 있는 모양이구나’ 흥분해서 말이 많아진다. 물론 젊은이는 대개 ‘괜히 물었네’ 후회하게 된다. ‘나이 먹으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말이 그래서 생긴 모양이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집안의 젊은이에게 늘 이르셨다. “근면만 하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니 열심히 살거라”. 나이 먹은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남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젊은이는 ‘노인의 지혜는 곧 잔소리’ 라고 생각한다. 8. 끝으로 이처럼 바뀌는 자신의 변화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나도 내가 인사 받기나 즐기고, 잔소리 하기를 좋아하며, 며느리의 ‘식사 하세요’ 소리에 행복해 하는 그런 ‘시시한’ 사람이 되어 갈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사람은 나이 먹으면 누구나 다 별 수 없음을 배워가는 요즘이다.
2013-04-10 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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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2> 2단계 약사국시(안)-II
2단계 약사국시안에 대해 중론(衆論)이 모아지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은 나는 답답한 마음에 2012년 11월 13일 몇몇 교수님들께 “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국시 2단계 도입안에 찬성합니다. 제 의견에 동의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메일을 보냈다. 메일 내용(이하 일부 생략)은 다음과 같았다.
1. 우리나라에서 의사 고시 등은 기초과목을 배제하고 직능 시험만으로 면허를 주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조만간 약사고시에도 적용될 수 밖에 없는 흐름임. 이렇게 되면 약학의 기초과목들은 존폐가 우려됨. 그러나 주지하는 대로 약학은 의학과는 달리 기초과목도 매우 중요함. 만약 약사고시를 1단계로만 보면 결국 기초과목이 조만간 없어질 우려가 있으므로 2단계로 보도록 제도화 해 놓아야 기초과목의 존치(存置)를 보증할 수 있음. 즉 약학의 기초과목 존치를 위해서도 약사고시를 반드시 2단계로 나누어야 함.
2. 약사고시를 1단계로만 보면 임상약학 과목과 기초과목 공부를 다 해야 면허를 취득할 수 있으므로 결국 기존의 4년제를 단순히 6년으로 늘인 것과 효과가 비슷해질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함. 6년제 시행 이유는 임상약학 강화가 일차 목적인데, 임상 약학에 전념해야 할 학생들이 기초과목을 공부하느라고 임상에 전념할 수 없어, 결국 지금의 4년제 약사 고시와 비슷한 시험을 보고 면허를 따게 되므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6년제를 도입한 의미가 거의 없어지게 됨.
3. 약사고시를 2단계로 보면, 1단계 합격자는 과거 4년제 약사 면허 취득자와 비슷한 대(對) 국민 이미지를 갖게 되고, 2단계 합격자는 정말로 임상약학 전문 약사(팜디)의 이미지를 갖게 되어 약사의 직능에 대한 대외 (대 국민 및 의사 등) 이미지 개선을 확실히 도모할 수 있음. 반면에 1번만 시험 보면 이러한 약사 이미지 업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움.
4. 2단계로 보면 행정업무가 번거로워 진다는 우려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상 더 번거로울 것 없다는 반론이 많음.
5. 학생들에게 2번이나 시험을 보게 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의견도 있다고 하나, 한번만 시험 보게 할 경우, 여러 과목을 공부하느라 더 고생하게 됨. 즉 2단계 시험제도가 반드시 더 가혹한 제도라고 할 수 없음. 또 애써 약대에 들어 온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약사 대접을 받게 해 주어야 한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오히려 2단계 방안이 학생들을 더 배려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음.
6. 끝으로 공청회 등을 통해서 약대 교수들이 이 건과 관련하여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여야 한다고 생각함. 이상입니다”.
이 메일을 보낸 후 두 분의 약대 교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회신을 받았다. 한 분은 원로 학장님이셨는데, 그 분의 의견을 감히 대폭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2단계 시험 실시 시 학년별 교과목 편성, 졸업자격 등과 같은 중요 부분에서 약학대학의 자율성이 크게 제한되며 약학 교육이 약사국가고시에 지나치게 종속될 우려가 있다.
2. 2단계 시험 제도 하에서 1단계 시험 불합격자는 대학 졸업자(약학사)조차 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교육적 측면에서 2단계 안은 재고되어야 한다.
3. 현재 약대 재학 중인 학생들이 어차피 1회의 약사국시를 치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향후 3년간 약사법에 규정된 약사직무 수행에 관련된 표준교과과정을 재정비하고 실무실습도 좀더 심도 있게 연구하면서 약대생들에게 합당한 교육을 하여 졸업시킨 후, 그 결과를 가지고 심도 있는 재논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다른 한 분은 기초약학 위에 서 있지 않은 임상 지식의 위험성을 언급하면서, 필기시험을 모두 묶어 1단계에 보고, 2단계에서는 실습에 관한 내용만 시험 보게 한다면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의견을 주셨다.
최근 의사고시도 2단계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 의과대학에 의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약학과 약사 직능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2단계 약사국시안이 다시 한번 진지하게 검토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3-03-27 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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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1> 2단계 약사국시(안)-I
2015년 2월이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6년제 약대 졸업생들이 배출된다. 그들부터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시험 (이하 약사국시)에 합격해야 약사 면허를 받을 수 있게 된다. 6년제가 실시된 이래 6년제 졸업생들에게 어떠한 시험을 통해 면허를 줄 것인가가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 많은 논의 중 오늘은 소위 ‘2단계 약사국시안 (이하 2단계안)’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이하 국시원)은 이미 6년제 시행 전부터 ‘약사직무 분석 및 평가 영역 분류 연구 (‘04-‘06)’와 ‘약사국시 과목 개선 실행 방안 연구 (’10. 9~’11. 9)’를 수행한 바 있다.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국약학교육협의회 (35개 약대 학장으로 구성됨, 이하 약교협)의 약사시험위원회 (제1차, ’12.2, 이하 시험위원회)는 약사국시를 4개의 대 영역으로 합치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시험위원회에서 처음으로 2단계안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2단계안이란 원래 서울대 약대의 정진호 학장이 2012년에 제안한 아이디어로, 요점은 약대 본과 3학년을 마친 학생들에게 기초과목들 (기존의 약사국시 과목들)에 대한 자격시험 (1차 시험)을 치르게 하여 이를 통과한 학생들에게만 현장실습 (약국, 병원약국, 제약회사 등)에 나갈 수 있게 하고, 현장 실습을 마친 학생들에게는 임상약학 시험 (2차 시험)만 치르게 하여 이에 합격한 학생들에게 약사 면허를 주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1차 시험에서는 약학 고유의 기초과목에 집중할 수 있고, 2차 시험에서는 임상약학에 집중하여 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갖게 된다.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되자 약교협은 그 해 3월 교육과학기술부 (이하 교과부), 국시원 및 대한약사회 (이하 약사회) 관계자로 구성된 ‘약사국시 연구회’를 조직하여 ‘2단계 약사면허 국가시험 도입 방안 (’12.3~12.5)’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12년 6월에 열린 제2차 시험위원회에서는 약사국시 4개 영역의 명칭이 생명약과학 (기본약학), 산업약학, 실무약학 (임상약학), 보건의약관계법규 및 사회약학으로 수정하기로 하는 외에, 2단계약사국시 제도의 도입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해 9월 국시원과 약사회는 각각 이와는 상충되는 의견을 교과부에 제시하였다. 즉 약사회는 4개 과목명에 특정 세부 지식명을 추가해야 한다고 하였고, 국시원은 ‘2단계 국시 도입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보건복지부 (이하 복지부)는 이해 관계자들의 간담회 (’12. 7.18)를 갖고 이들의 의견을 개별적으로 청취 (’12. 9.3, ’12. 9.4, ’12. 9. 10)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약교협도 이 2단계안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 (’12.11.16) 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찬성 5, 반대 28, 기권 2로 압도적으로 많은 학장이 2단계안을 반대하였다. 그러자 복지부는 부득이 2단계안의 추진을 일단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 2단계안이 기초약학과 임상약학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절묘한 방안임과 동시에, 많은 비용을 감수하고 실시하는 6년제 교육 본래의 목적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 이 2단계안을 정학장으로부터 들었을 때“이 안은 정학장이 추진하는 어떤 정책 들보다 백배 천배 중요한 아이디어이니 반드시 성취시켜주기 바랍니다”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 때만 해도 이 아이디어가 실현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우리 나라 정부 (교과부와 복지부)가 약사를 위해 전례가 없는 제도를 만들어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부도 이 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비로소 2단계 시험안에 대해 기대를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은 약교협 자신이었다. 스스로의 반대에 의해 2단계안의 추진이 일단 좌절된 것이다.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다 (다음 호에 계속).
2013-03-13 1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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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0>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2013년 1월 9일, 약제학 전공 대학원생들과의 신년하례 모임에서 학생들의 새해 소감과 각오를 들어 보았다. 그들의 말들을 요약하면 ‘지난 1년은 연구에 시행착오(施行錯誤)가 많았는데 올 한해는 의미 있는 결과를 얻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 그리고 가끔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을 기획할 때에 내가 너무 늦게 시작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초조할 때가 있는데, 앞으로는 매사에 좀 더 부지런을 떨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은 덕담(德談)으로 그들을 축복해 주었다.
‘첫째, 시행착오는 그 끝에 성공이 붙어 있을 경우에 한(限)해 성공을 돋보이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끝이 성공적이지 못 한 시행착오는 안타깝지만 빛을 발(發)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세상은 역경(逆境)을 딛고 일어선 사람에게는 박수를 치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그러나 끝내 일어서지 못한 소위 루-저(loser)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여러분은 세상사가 이처럼 냉혹하다는 사실을 직시(直視)하여야 한다. 물론 나는 여러분들이 세상의 루-저들에게도 관심을 갖는 따듯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둘째, 여러분들이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일들도 정년을 앞둔 내 시각으로 보면 결코 늦은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내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대학 동기인 C군보다 2년 후에 유학을 떠난 나는 당시에는 내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보다도 2년이나 뒤에 유학 길에 오른 대학 동기 Y군을 보고는 그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돌아 보니 결국 세 명이 다 똑 같이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결국 출발 시점의 2-4년 차이는 전체 인생의 시간 틀 속에서는 사소한 시간 차이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말이 있다. 여러분들도 인생의 속도, 즉 너무 작은 시간 스케일로 인생을 보지 말기를 바란다셋째, 열심히 하는 수준을 뛰어 넘어 ‘잘 하는’ 한 해를 맞고 싶다고 말한 학생이 있었는데, 부디 모두 그리 되기 바란다. 그러나 ‘잘 하기’ 위해서는 우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 열심히 하면서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 살기 바란다.넷째, 미래에 대한 올바른 비전을 세우기를 바란다. 최근 조 아무개라는 야구 선수가 자살한 뉴스를 들었다. 잘 알다시피 그는 인기 배우 겸 탤런트인 고 C씨와 결혼했다 이혼한 사람이다. 그들이 결혼할 당시 그들에게 이와 같은 불행한 종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의 종말은 그저 사소한 일들이 거듭 어긋난 결과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들도 인생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크고 작은 선택의 결과가 여러분의 인생의 결론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갈림길에 설 때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광고 카피처럼 올바른 길을 선택하여야 한다. 문제는 매번 올바른 길을 선택할 지혜가 사람에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지혜는 없다. 다만 한 가지 조언할 수 있는 것은, 늘 밝고 떳떳한 길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양심에 비추어 보면 대개 그 길을 알 수 있다. 크리스챤은 이에 더하여 기도를 드린다. 아무튼 갈림길에서 선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인생은 마치 작은 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는 항해와 같다. 노를 성실히 젓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항해 중에 순풍(順風)을 만나는 것이다. 큰 풍랑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순풍(順風)의 항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2013-02-27 1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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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9> 진작 말하지
내가 1967년 약대 1학년이었을 때 1,2학기에 걸쳐 문화사(文化史)라는 교양 과목을 수강해야 했다. 문화사 강의를 담당하신 유 아무개 교수님은 외부 강사이셨는데, 작지만 뚱뚱한 체구에 늘 올백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셨다. 그 분은 강의 중에 ‘우리가 집권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식의 허풍을 떠시곤 해서 어떤 학생 하나가 ‘선생님 도대체 집권할 가능성은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던 적도 있다. 1학기 수업이 끝날 즈음 교수님은 ‘모든 학생들은 방학 중 리포트를 써서 개학 전에 제출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는 출석부를 보고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면서 “아무개 군은 인천 개항사(開港史)”, 아무개 군은 차이나타운의 역사, 아무개 군은 조선의 쇄국정책에 대해서…” 라는 식으로 학생마다 다른 주제를 과제로 주셨다. 어찌나 빨리 주제를 불러 주시는지 학생들이 받아 적기가 바쁠 정도이었다.
그리고 1학기말이 되어 시험을 보았는데 나는 나름 잘 본 것 같았다. 그래서 내심 A학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2학기 개학을 해서 성적표를 받아보니 어럽쇼? 내 문화사 학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2학기 첫 수업 후 교단 앞으로 교수님을 찾아가 ‘왜 제 학점이 안 나왔습니까? 제 답안지를 한번 보여 주시죠’ 라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교수님 왈, “학생에게 답안지나 보여 주고 그러는 사람이 교수인줄 아나?” 하시는 것이었다. 이상한 반격이었지만 감히 반박을 못하고 그냥 물러 나왔다.
그런데 누군가가 “야 그건 말이야, 술 한 병을 사 들고 교수님 댁을 찾아가서 부탁을 드려야 되는 거야”라고 귀뜸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청주[淸酒, 당시 말로 ‘정종 (正宗)’] 큰 것 한 병을 사 들고 원효로에 있는 교수님 댁을 방문하였다. 혼자 갈 용기는 없었는데 고맙게도 친구인 최응칠 군과 고 공영식 군이 동행해 주었다.
유교수님 댁은 약간 초라하였다. 우리 셋은 교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술 한잔씩을 따라 올리며 학점 이야기를 꺼내었다. 교수님은 생뚱맞게 “여러분에게 나누어 준 방학 숙제 주제를 내가 기억할 것 같은가?” 물으셨다. 그리고는 ‘사실은 출석 부르며 즉흥적으로 주제를 주었기 때문에 교수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지엄하신(?) 교수님이 이런 허술한 이야기를 하시다니’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내 학점 이야기를 드렸다. 그러자 교수님은 이번에는 “자네 어느 고등학교 나왔나?”고 물으셨다. 내가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교수님은 바로 “야, 그럼 진작 말하지, 나는 인천중학교 나왔잖아” 하시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제물포고등학교에 딸린 인천중학교를 졸업하신 분이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곧 이어 “야, 학점 걱정하지 마라, 2학기 학점도 걱정하지마” 하셨다.
교수님은 끝내 동문(同門)으로서의 의리(?)를 지키셨다. 실제로 나는 2학기 말에 1학기 문화사 학점을 A로 소급해서 받았을 뿐만 아니라, 2학기 학점까지도 A를 받았다. 나는 그 때 우리나라에서 동문(同門)이 얼마나 중요한 인자인가 하는 것을 알았다. 모르긴 해도 같은 고등학교 동문인 최군도 그 때 아마 A학점을 받았을 것이다.
최근 이 이야기를 절친한 친구인 대웅제약 이종욱 사장에게 들려 주었더니 그는 한 수 더 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가 약대에 들어 와서 보니 S고등학교 때의 국어 선생님이셨던 P선생님이 대학국어 강의를 담당하고 계셨더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 가 인사를 드렸더니 선생님도 반가워 하시면서 “야, S고등학교 출신 학생들 이름 다 적어와” 하셨단다. 그 후 S고등학교 출신 학생들 성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이 사장의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이런 일들이 다반사(茶飯事)로 있었다. 그리고 얼마쯤은 이런 이야기가 미담(美談)으로 치부 (置簿)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인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한다.
2013-02-06 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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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8> 꼴찌와 농땡이
1. 꼴찌가 일등?
1971년 경의 일이다. 서울 약대 4학년에 B라고 하는 한 복학생이 있었다. 그의 4학년 1학기까지의 학업 성적은 클래스에서 거의 꼴찌일 정도로 형편없었다. 4학년 2학기에 거의 올A를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대학을 졸업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4학년 2학기 시험이 끝나자 마자 B군은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자기 생각에 2학기 성적도 클래스에서 꼴찌가 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담당 교수님들을 연차적으로 찾아 뵙고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부탁 드렸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교수님 과목의 학점을 조금 올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조금만 올려 주시면 제가 졸업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런 간곡한 부탁을 들으신 교수님들은 대개 “그래? 그거 안되었네. 어때, 내 과목을 한 C나 B 정도로 올려 주면 되겠나?” 라고 반응하셨다. 그러나 B군은 한걸음 더 나가 이렇게 부탁 드렸다. “교수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B나 C를 주시면 제가 졸업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왕 올려 주시려면 눈 딱 감으시고 A를 주셔야만 졸업을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 살려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교수님은 어이가 없어 하시면서도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원래는 안 되는 거지만 특별히 A를 줄 테니 졸업해서는 성실하게 살게나” 하셨단다.
그는 모든 교수님 들에게 이런 부탁을 드렸다. 결과는 대 성공이어서 약물학 (담당교수 김낙두) 한 과목을 빼 놓고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4학년 2학기 성적은 클래스에서 일등이 되었고, 마침내 그는 무사히 (?)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꼴찌가 일등이 된 것이다. B군의 이런 능력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졸업 후 약사고시에 잘 붙어, 약국도 잘 하고 있다고 한다.
2. 농땡이 모범사병?
내가 군인 (10781-1974)이었을 때 K란 동기 사병이 있었다. 그가 유격 훈련을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열명이 한 조가 되어 함께 장애물을 통과하는 훈련을 받는 도중에, 이 친구 혼자 슬그머니 대열에서 빠져 나가 숲 속에 들어 가 하루 종일 쉬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나머지 9명은 ‘한 명을 어디에 팔아 먹었느냐?’고 훈련 조교로부터 혹독한 기합을 받았다. K군에게 그런 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힘든 훈련이 끝나 모든 병사들이 연병장에 다시 모일 때쯤 그는 슬그머니 그리고 무사히 (?) 귀환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훈련에서 빠져 하루 종일 숨어 있는 것이 더 불안했을 터이지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그의 담대함 (?)에 그저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K 군의 농땡이가 성공하는 걸 지켜본 다른 병사 몇 명이 다음날 덩달아 비슷한 흉내를 내다가 조교에게 걸려서 혼 줄이 났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아, 농땡이도 아무나 치는 것이 아니구나. 우선 농땡이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타이밍을 알아내는 천부적 동물적 감각이 있어야 하고, 둘째 무엇보다도 농땡이를 치는 동안 마음이 조마조마하지 않을 배포 (또는 속칭 깡다구)를 타고 난 사람이라야 농땡이를 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그래서 얻은 교훈은 ‘‘나 같이 소심한 사람은 그냥 내 식대로 살아야지 어설프게 K를 흉내 내다가는 인생을 망치기 십상이겠구나’ 이었다.
그와 관련된 일 중 하이라이트는 그가 우리 부대의 ‘모범사병’으로 뽑혀 표창을 받은 사건이다. 최고의 농땡이가 모범 사병으로 선정된 것이다. K는 제대 후 사회에 나가 박사가 되고 모 대학의 교수까지 되었다. 훗날 안타깝게 간이 나빠져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아직도 전우들은 K의 농땡이 기질이 가히 천부적이었다고 회고한다.
꼴찌가 가짜 일등도 될 수 있고, 농땡이가 가짜 모범 사병으로 뽑힐 수도 있는 것이 세상사이다. 그러나 그건 나처럼 능력도 배포도 없는 사람들이 함부로 부러워할 일들이 아니다. ‘그냥 나는 내 식대로 성실히 살아야지’, 새해 아침 추억의 앨범 한 장을 넘겨본다.
2013-01-23 1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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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7> 군대 이야기 세가지
1. 최소한 지지는 않을 수 있었는데.
1974년 봄 원주의 한 부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옆 부대와의 축구 시합에서 1:0으로 지고 난 우리 부대는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부대 간부는 전 중대원을 식당에 ‘집합’시켜 바닥에 무릎을 꿀렸다. 일종의 기합이었다. 그리고는 인사계를 맡아 보면 이 상사님이 훈시를 시작하였다. 긴 잔소리가 있었지만 요점은 ‘너희들 요새 군기가 빠졌다’는 것이었다. 요샛말로 빠져도 ‘너~무” 빠졌다는 말씀이었다. 까닥하면 연병장 집합으로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분에 못 이겨 이 말 저 말을 반복하던 이 상사님이 갑자기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심병장, 자네 생각에는 왜 우리 부대가 축구 시합에 졌다고 생각하나?” 라고 물었다. 나는 무슨 용기에서 그랬는지, “예, 저는 아무래도 우리가 골을 먹었기 때문에 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골만 먹지 않았으면 최소한 비길 수는 있었던 시합이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순간 식당 안은 웃음 바다가 되었다. 그 엄숙 (?) 했던 분위기가 일순에 깨진 것은 물론이다. 이 상사님도 이미 웃음 바다가 된 상황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 들 일어나 내무반으로 헤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해서 그 기합은 끝이 났다. 내 재치로 기합에서 풀려난 동료들은 모두 나를 고마워 했다. 그 후 이 상사님은 나만 보면, “심병장, 뭐 우리가 골을 먹어서 졌어? 나 참!” 하면서 웃곤 하였다. 군대 시절 드물게 좋았던 추억의 한 조각이다.
2. 누굴 장기판의 졸 (卒)로 보나?내가 군인이었을 때 유신 헌법으로의 개정에 대한 찬반 투표가 있었다. 투표 용지를 보니 “나는 대통령의 중요 정책을 (1) 지지한다 ( ), (2) 반대한다 ( )” 라고 써 있는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질문 내용은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투표를 앞두고 닭고기를 실컷 먹었던 이야기를 잠시 회고하고자 한다. 투표일을 닷새쯤 앞두고부터 식당엘 가면 매일 삶은 닭 한 마리씩이 나왔다. 그것도 혼자서 다 먹기 어려울 정도도 큰 닭이…. 평소에는 겨우 고기 몇 점씩을 구경하던 사병들은 “야, 군대 참 좋아졌다. 이 참에 우리 말뚝 박자”고 좋아라 하였다. 며칠간 지겹게 닭고기를 먹는 중에 투표일이 지났고, 이와 함께 닭고기도 식단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라져도 너~무 오랫동안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이상해서 취사 담당 최상병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최상병은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셨어요? 금년 내내 먹을 닭고기를 지난 닷새간에 다 먹은 겁니다” 라고. 이 말을 들은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아무리 군대의 졸병이지만, 누굴 장기판의 졸 (卒)로 보나? 그럼 여태까지 내 닭을 당겨 먹고 좋아한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해도 불쾌한 추억이다. 참고로 당시 최상병은 훗날 우리나라의 연극 영화계의 스타가 된 최종원씨였다.
3. 왜 이러시나?원주 38사단에서 신병 교육을 마친 우리 일행 몇 명은 하루 반쯤 군용열차를 타고 경남 사천에 있는 육군 항공학교에 가게 되었다. 특과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육군항공학교에 들어서니 최상병이라는 사람이 우리를 반갑게 마중하면서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라고 경어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이러시나? 이러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빳다를 치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훈련소에서 온갖 욕설과 거친 말을 들어 온 우리들에게 경어는 오히려 가장 공포스러운 어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상병의 경어는 그 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알고 보니 최상병은 기독교 군종 사병이었다.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최상병의 그런 태도 때문이었을까? 어느덧 나는 항공학교 안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지나고 보니 다 아련한 군대의 추억들이다.
2013-01-09 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