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고] <141> 走馬看藥- 달리는 말 위에서 약을 보다
지난 11월에는 미국 뉴저지에서 열린 KASBP(재미한인약학자협회, 15-16일)에 이어,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이화학연구소(리켄)의 스기야마 특별연구실 (29일)에 다녀 왔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 두 가지를 소개한다.1. 신약개발 비용이 9년마다 2배로 늘어났다. KASBP에서의 한 발표에 의하면 1950~2010년까지 신약개발에 소요되는 비용(물가 보정 후)이 매 9년마다 두 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 동안 조합화학 발전에 의해 케미칼 라이브러리가 획기적으로 증가하고, DNA시퀀싱에 의해 새로운 타겟이 발견되었으며, X-레이 크리스탈로그래피 발전으로 인해 타겟의 구조 결정 능력이 50년 전보다 1,000배나 빨라졌고, 단백질 구조 데이터베이스가 25년 전에 비해 300배 늘어 났으며, HTS에 의해 타겟 테스트 비용이 10분의 1로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기술(컴퓨터를 이용한 약물 설계, 검색 기술 및 유전변형 마우스 기술)이 발명되고 질병에 관한 지식(질병 기전, 새로운 약물 타겟, 바이오마커 등에 대한)이 진보한 사실을 생각하면, 의외의 결과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마 이는 1960년대의 탈리도마이드 비극 이후, 안전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 수준이 높아진 데 따른 것일 것이다. 1987~2011년까지의 25년간 FDA가 승인한 신물질 신약(NME, new molecular entity)은 first-in-class, advance-in-class 및 addition-to-class를 모두 합쳐 645개이다. 흥미로운 것은 매년 승인되는 신약의 개수는 줄고 있지만 first-in-class 신약 갯수는 매년 8개로 일정하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전체 신약 중 first-in-class 신약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예컨대 1987~2001년까지의 15년간에는 27%를 차지했으나 2002~2011년까지 10년간에는 39%를 차지하였다. 신물질 신약의 55%는 미국의 25개 큰 제약회사가 개발한 것이지만, 나머지45%는 작은 회사들이 개발한 것이다. 작은 회사들이 개발한 신물질 신약은 first-in-class 신약의 53%나 차지하였다. 작은 회사 파이팅! 글로벌화를 시도하는 우리나라 제약계에 시사하는 바가 있어 보였다.
2. 모델링과 시뮬레이션이 중요하다일본약학회의 의약화학부회가 발간하는 Medichem News(23, May 2013)의 표지에는 나의 35년 지기(知己)인 스기야마 박사의 연구 주제가 소개되어 있다. 그 일부를 옮긴다. 요즘 미국 FDA를 중심으로, 생리학적약물속도론 모델(PBPK모델)을 사용하여 약물동태를 예측하고, 이로부터 임상시험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하거나, 투여량을 설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이 모델은 약물간 상호작용, 노인, 어린이, 신장해시 또는 간장해시의 약물동태 및 약효를 예측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다. 사실 신약개발 시 다양한 환자 측의 인자 모두를 반영한 임상시험을 하라고 하면, 신약개발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모델링과 시뮬레이션 기법이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PBPK 모델은 이미 50년 전에 미국의 연구자가 제시한 아이디어로, 인체에 투여된 의약품이 약효와 부작용을 나타내는 조직에 이행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생리해부학적 파라미터(조직부피, 혈류 등)와 생화학적 파라미터(혈중 및 조직 중의 단백과의 결합성, 생체막 투과성, 약물transporter 및 대사효소와 약물간의 상호작용 등)를 사용하여, 연립미분방정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식에 “약의 투여량, 투여빈도, 투여경로”와 “환자의 병태, 생리적 상태(나이, 성, 간과 신장의 기능)” 정보를 입력하면, “약물의 혈중농도 및 조직중농도 추이”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모델은 장차 약물상호작용을 피할 수 있는 의약품, 개체차 및 병태에 의한 영향을 덜 받는 의약품, 치료역이 넓은 의약품을 개발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언제나처럼 많은 것을 배우게 해 주었다.
2013-12-24 15:48 |
![]() |
[기고] <140> “약학사 분과학회’ 신설을 꿈꾸며
우선 2013년 11월 30일부로 약교협에 제출할 ‘한국약학사’의 머리말로 내가 쓴 글의 일부분을 이하에 옮긴다.
“2012년 11월 한국약학대학교육협의회(이하, 약교협)로부터 ‘한국약학사’의 발간을 위한 집필 작업을 주관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기에 만용(蠻勇)이지만 맡기로 결심하였다. 감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고 김신근 교수님이 저술하신 ‘한국의약사(韓國醫藥史)’(2001, 서울대학교 출판부), 본인이 발표한 ‘한국약학사(약학회지, Vol. 51, No 6, 2007)’란 논문, 그리고 대한민국학술원이 발간한 ‘한국의 학술연구-약학편’(2008) 등과 같은 몇 가지 선행연구(先行硏究) 결과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작업에 들어 가 보니 우선 ‘약학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의문과 만나게 되었다. 결국, 약학을 좁은 의미(狹義), 즉 약학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 연구만으로 정의하는 것 보다는, 제약기업에서의 신약개발 연구는 물론, 약과 관련된 모든 제도와 기술 및 연구를 전부 포함하는 넓은 의미(廣義)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약학의 범위를 이처럼 넓게 잡고 보니, 기존의 선행연구 결과물에만 의지해서는 도저히 책을 만들 수 없었다. 대부분의 선행연구는 신약개발이나 제약산업을 부실하게 다루는 등 그 관심 범위가 이 책의 범위보다 좁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책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제약산업과 신약개발 관련 역사를 집필해 줄 수 있는 탁월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광의(廣義)의 우리나라 약학사를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우선 책의 내용을 크게, 단군신화에서 현대 약학까지의 의약제도 (제1장), 약학교육 및 연구 활동 (제2장), 한국약업 100년 (제3장), 신약개발 연구 동향 및 전망 (제4장)의 4장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3장과 4장에는 각각 ‘한국제약기술발달사’와 ‘신약개발사’를 첨부하였다. (중략)
아무쪼록 이 책이 앞으로 우리나라 약학사 연구에 귀중한 받침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끝으로 ‘한국약학사’의 발간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업을 후원해 주신 약교협(당시 이사장, 김대경 중앙대 교수)의 결단에 감사드린다.”
이상이다. 이 책은 아직 많은 부분에서 부족함이 있지만, 우리나라 약학사 전반을 다루려고 시도했다는 점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고 자부해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 약학의 역사를 어찌 달랑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앞으로 더욱 내용이 충실해진 약학사 책이 속속 발간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아무래도 이제 누군가가 나서서 ‘한국약학사 학회’를 만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1972년에 고 홍문화 교수님이 ‘약사학(藥史學)연구회’(약춘 44 참조)의 발족을 시도하였으나 이 연구회는 사실상 열매를 맺지 못하고 끝났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분야를 방치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다.
생각 끝에 ‘한국약학사학회’를 만드는 대신, 대한약학회 안에 ‘약학사분과학회(藥學史 分科學會)’를 신설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별도로 학회를 창립하는 것보다 비용이나 행정 업무 면에서 훨씬 효율적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조만간 분과학회의 신설을 추진하려고 한다. 뜻있는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 드린다.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약대 내에 ‘약학사’를 전공하는 연구실과 교수가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전공 교수들의 평생을 통한 연구가 있을 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약학사 정리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아마추어 역사가들에게 약학사의 겉핥기를 시키고 있을 것인가?
약학사 뿐만이 아니다. 약대 내에 약사법규나 사회약학 같은 다양한 드라이랩들(약춘 110)이 설치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약학은 사회와 정상적인 소통(疏通)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청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기대한다.
2013-12-04 16:29 |
![]() |
[기고] <139> ‘창약과학의 매력’의 번역판을 내면서
나는 2012년 3월에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을 통하여 ‘새로운 약은 어떻게 창조되나?’란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이 책은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 약학과에서 신약개발의 전모(全貌)를 고등학생이나 일반인 눈높이에서 설명하고자 저술한 책을 번역한 것으로, 약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나 신약개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책이었다. 이 방면에 관한 전문 서적이 워낙 없었던 탓인지 이 번역판은 연달아 3쇄를 찍을 정도로 독자들의 호평(好評)을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신약개발에 관한 입문서(入門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현장에서 신약개발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 하였다. 그러던 차에 도쿄대학 대학원 약학과에서 ‘창약과학(創藥科學)의 매력’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먼저 책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채워 주기에 충분한 수준의 책이었다. 즉시 일본에서 약학을 공부한 20여명의 국내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이 책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아마 내년 1월 초이면 이 책의 번역판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에 쓴 머리말을 이하에 소개하기로 한다.“우리나라 제약회사는 그 동안 약 20개의 신약개발에 성공한 경험을 갖고 있다. 아직 소위 블록버스터 급 신약개발에 성공한 경험이 없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제 신약개발은 많은 국내 제약회사가 도전하고 있을 정도로 일상적인 과제(課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신약개발 러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이러한 시점(時点)에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떤 연구를, 언제, 어떤 순서로, 또 어느 수준으로 수행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신약개발 지도자 (Decision Maker)가 아닐까 한다. 유능한 지도자 없이는 리스크가 큰 신약개발 프로젝트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개발 지도자가 되려면 우선 신약개발의 전모(全貌)를 균형 있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약개발의 전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방법을 배울 길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 그 동안 우리의 아쉬움이었다. 물론 약학대학 등에 신약개발지도자 과정 같은 교육과정이 개설되기도 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그 내용은 체계가 잘 잡혀있지 못 하거나 때로는 개론(槪論) 정도의 수준에 머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인하여 효율적인 의사 결정 능력을 갖춘 신약개발 지도자의 양성은, 뜨거운 국내의 신약개발 열기에 비추어 매우 미흡한 실정이었다.그런데 마침 도쿄대학 대학원 약학과에서 신약개발의 전모를 높은 수준에서 설명해 주는 책이 발간되었다. 원저의 편집자인 스기야마(杉山) 교수로부터 이 책을 소개 받은 번역진은 바로 이 책이 유능한 신약개발 연구자들을 양성하는 좋은 교재(敎材)가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하였다. 이에 즉시 동경대약우회(동경대학 대학원에서 약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모임, 회장: 이은방)를 주축으로 일본에서 약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 책의 번역에 착수 하였다. 모든 번역자들은 완벽한 번역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다. 특히 여섯 명의 편집위원들은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1차 번역된 원고를 수차에 걸쳐 교정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마치고 보니 용어나 체제가 제대로 통일되지 않았고, 색인도 없는 등 미비한 점이 적잖이 눈에 띄었다. 사실 이와 같은 미비점은 원저(原著)에서도 발견되는 문제점이었다. 그래서 편집위원들은 ‘원 저자들이 강조하고자 했던 싸이언스 자체만 독자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하루빨리 이 책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정도에서 번역을 마무리하였지만, 아무튼 독자 여러분의 넓은 양해를 부탁드린다.아무쪼록 이 책이 우리나라 신약개발 연구자들, 약학대학을 비롯한 많은 대학의 교수 및 대학원생들, 그리고 신약개발 정책을 담당하는 전문가 여러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13-11-20 10:41 |
![]() |
[기고] <138> 뭘 나까지 찍어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사진하면 당연히 흑백 사진이었다. 1970년 봄, 제주도로 단체 수학여행을 갔을 때 한라산 정상 근처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한 장이 평생 처음으로 찍어본 유일한 칼라사진(당시는 총천연색 사진이라고 부름)이었다. 칼라사진은 필름이나 인화 비용이 비쌌기 때문에 기념으로 한 장 밖에 찍을 수 없었다. 사실 당시는 흑백사진도 아무나 찍을 수 없었다.
카메라(당시는 사진기라고 부름)는 일반 서민들이 구입하기에는 너무 비싼 사치품이었다. 우리 집은 시골에서는 밥술이나 먹는 집이었지만 그 정도로는 카메라를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수학여행을 가기 전에 부자로 사시는 이모부 댁에 카메라를 빌리러 갔다. 이모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카메라(아마 ‘캐논’)를 내 주셨다.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귀중한 물건을 빌리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그러나 그 때는 그런 무례가 예사(例事)로 있던 시절이었다. 이모는 내가 그걸 고장을 내거나 잃어버릴까 봐 내심 불안하셨을 것이다.
내가 결혼한 1975년 전후(前後)에는 신혼 부부 집에 놀러 가면 사진 앨범부터 내놓는 것이 관례이었다. 신혼 부부가 열심히 사진 설명을 하면, 방문한 사람은 흥미가 없더라도 예의상 “멋지다, 예쁘게 나왔다” 같은 호의적 감탄사를 적당히 섞어가며 앨범을 ‘봐 주어야만’ 하였다. 1979년 동경 유학 시절, 일본인 부부 집을 방문하였다가 혼이 난 생각이 난다. 일본인 부부는 자기들이 유럽여행 중에 찍은 8미리 영화를 보여주었다. 방의 불까지 끄고 1시간 가량 그들의 설명을 들으며 동영상을 보느라 좀이 쑤셨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당시는 비디오 카메라나 8미리 촬영기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로망이었다.
세월이 흘러 필름이 필요 없는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자 사진을 무한대로 찍어도 돈이 들지 않게 되었다. 또 흑백사진이냐 칼라사진이냐 하는 말이 사라질 정도로 사진하면 당연히 칼라사진을 의미하게 되었다. 누르기만 하면 찍히는 자동카메라가 등장하고부터는 사진을 찍는데 아무런 기술이 필요 없게 되었다. 카메라의 크기와 무게도 예전에 비해 엄청 줄어들었고, 덩달아 카메라 가격도 엄청 싸졌다. 막말로 이제는 개나 소나 마구 사진을 찍어댈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래저래 칼라사진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고 보니, 그에 따라 사진의 존귀함도 덩달아 땅에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제는 번거롭게 사진을 인화해서 보지도 않는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수많은 사진(영상)을 컴퓨터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감상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사진이 지천(至賤)으로 넘쳐나다 보니 이제는 신혼 부부 집에 놀러 가도 사진 앨범을 내놓지 않는다. 해외 여행 중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사람도, 또 보려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아들 며느리조차 부모님의 해외 여행 사진을 거들떠 보지 않는다. 가끔은 “좋은 구경 많이 하셨어요?” 하면서 사진 몇 장이라도 보는 척 해 주면 좋을 텐데. 사진이 흔해진 만큼 우리는 더 삭막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진이 흔해져서 인지 무조건 사진 찍히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특히 늙어가는 사람에 많다. 그 바람에 사진 찍는 시간만 길어진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에게 말한다. “얼른 찍히고 빨리 가자, 어차피 찍혀도 사진 안 줄 텐데 뭘 걱정해”. 그리고는 덧붙인다. “지금이 가장 젊을 때야, 나중에는 지금보다 더 늙을 테니까 차라리 지금 한 장 찍혀 주고 얼른 가자”
과거 결혼식장에 가면 예식이 끝나고 가족 사진을 찍을 때, 누군가가 앞에서 외치곤 하였다. “이모, 고모 사진 찍게 빨리 나오세요” 그러면 객석에 앉아 계시던 이모 고모 할머니는 “뭘 나까지 찍어”하며 사양하며 느릿느릿 나온다. 속으로는 불러주는 것을 고마워 하면서 말이다.
사진 찍히는 호강을 사양하며 좋아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사진 경시 풍조(?)는 살짝 씁쓸한 느낌이다. 아 옛날이여!
2013-11-06 12:22 |
![]() |
[기고] <137> 착각 4제
1. 너나 잘 해라 - 자신을 생쥐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드디어 어느 날 퇴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병원 입구에서 병원 입구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의사가 이상해서 이유를 묻자, 남자가 손가락으로 한 쪽을 가리켰다. “저기 고양이가 있어서요.” 의사가 말했다. “당신은 이제 자신이 생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남자가 대답했다. “물론 나는 알죠. 하지만 고양이가 그걸 모를 것 같아서요.” 이 이야기는 탈무드 동화책에서 본 내용이다. 우리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볼지 지나치게 걱정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볼링을 처음 배울 때, 남들이 내 폼을 보고 웃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이내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롭게 되었다. 그냥 나만 잘 하면 되는 것이었다. 2. 잘못된 정보가 사람을 잡는다 – 한 남자가 검진 결과를 들으러 진찰실에 들어가보니 의사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잠시 책상 위에 놓인 파일을 넘겨다 보니 ‘소근암’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소근암이라니…!” 그는 의사가 돌아오자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하였다. “선생님, 제가 소근암이지요?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나요?” 의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소근암은 제 이름인데요!” 이 이야기는 ‘엔도르핀 팡팡 유머집’이란 책에서 옮긴 내용이다. 내가 몇 년 전 병원에 가서 암이 재발하지 않았나 초음파 검사를 받았을 때, 결과를 영어로 녹음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내용은 어느 부위엔가 암 비슷한 것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매우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며칠 후 담당 의사를 만나 검사 결과를 들어 보니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앞의 환자에 대한 검사 결과를 들었던 모양이다. 잘못된 정보 때문에 엄청 고민했던 추억이 떠 오른다. 정보는 정확해야 한다!3. 조작된 여론은 여론이 아니다 – 한 동물원에서 사육사가 고깃덩이를 주기 위해 호랑이 우리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호랑이의 습격을 받았다.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때 한 사나이가 몽둥이를 들고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사나이는 용감하게 몽둥이를 휘둘러 호랑이를 물리치고는 재빨리 사육사를 어깨에 메고 나왔다. 구경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와 그 사람을 헹가래질하였다. 그 때 어디선가 신문기자가 달려와서 사나이의 신분을 물었다. 사나이는 조그만 목소리로 “나는 유대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튿날, 조간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난폭한 유대인 깡패가 아무런 방어 도구도 없는 호랑이를 습격했다.”라고.매스컴과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은 가끔 국민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않고, 국민들이 자신들과 같은 견해를 가지도록 계몽하려 든다. 마치 자신만이 모든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착각이고 교만이다. 4. 오해하지마 – 한 남자가 새로 산 최신형 스포츠카를 타고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닭 한 마리가 엄청난 속도로 이 차를 추월하여 달리는 것이었다. “아니! 감히 내 차를 앞서 달려?” 남자는 최대한 차의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닭은 이 차를 따돌리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세상에 이런 닭이 있을 수 있나?’ 남자는 동네를 수소문해 이 닭의 주인을 찾아가 말 했다. “그 닭을 100만원에 파시오!” 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1,000만원에 파시오!” 주인은 역시 안 된다고 하였다. 열 받은 남자는 “그럼 3,000만원에 내 차까지 줄 테니까 파시오!” 그래도 닭 주인은 막무가내였다. 남자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물었다. “도대체 안 파는 이유가 뭐요?”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잡혀야 팔지요” 역시 같은 유머 책에서 본 내용인데, 사람이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꼭 욕심이나 고집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다. 힘있는 사람들은 여론에 밀리는 사람의 의견에도 세심히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13-10-23 10:41 |
![]() |
[기고] <136> 아 옛날이여!
1974년 5월부터 다니기 시작한 Y약품에서의 약 3년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사장님에게 잘 보인 나는 평사원 시절에도 공장 간부들과 사장님이 만나는 간부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사장님이 특별히 나를 찾으셨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기고만장 (氣高萬丈)의 세월을 보냈다. 당시 나는 시험과에서 P라고 하는 어린이용 앰피실린 드라이 시럽 (복용 시 물을 가해 흔들어 먹이는 분말형 시럽제) 중 앰피실린의 함량을 정량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한번은 분석하려고 물을 가해 실험대에 놓아 보니 기존 제품들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P시럽 고유의 핑크 빛이 엷어지는 것이었다. 전에는 없던 일이라 즉시 상사에게 보고하였더니 회사에 난리가 났다. 그리고는 내게 얼른 변색(變色)의 원인을 찾아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이 드라이 시럽제에는 약 20가지의 첨가제가 들어가기 때문에 어떤 첨가제가 잘못 들어갔을까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생각해 보니 색갈이 변색(탈색, 脫色)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환원제가 잘못 들어갔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럽제의 원료를 칭량(秤量)하는 원료실을 방문해 보니, 첨가제 중의 하나인 쏘디움 설페이트(S) 통 옆에 환원제인 쏘디움 치오설페이트(TS) 통이 있는 것이었다. 정상적으로 P 시럽제에 가하는 첨가제는 S이었다. 순간 담당자의 착각으로 S 대신 TS를 가해 시럽제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실험실로 돌아와 S 대신에 TS 를 넣어 P 시럽을 조제한 다음 물을 가해 보았더니, 며칠 전에 발견했던 것과 똑 같은 탈색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원료실로 달려가 각 원료의 칭량 기록을 살펴 보았다. 예상대로 S 는 처방 보다 많이, 그리고 TS 는 처방보다 모자라게 남아 있었다. 이로써 탈색의 원인이 첨가제를 잘못 넣은 것임을 완벽하게 밝힐 수 있었다. 원료실 책임자는 나에게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무얼 어떻게 살려 줄 길이 없는 사고이었다. 다행히 P시럽을 조기(早期)에 회수하여 인명(人命) 사고로 연결되지는 않았으니,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그 책임자를 살려 준 것일지도 모르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부터 나는 GMP가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 그 후로 Y약품에서 유사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 공 (功)으로 다음 해 연초에 ‘창의상(創意賞)’과 부상 10만원을 받았는데 10만원은 한 달치 봉급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 나는 다음 해에도 연거푸 이 상을 받았다. 두 해 모두 나 홀로 이 상을 받았으니 내가 얼마나 으쓱했겠는가? 그런데 회사 내의 시험과를 거쳐 연구과 주임으로 승진하면서 이런 저런 연구를 해 보니 어떻게 연구하는 것이 제대로 연구하는 것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예컨대 일본에서 수입하는 남천 (南天)을 가지고 일본에서 팔리고 있는 어린이 감기약 시럽인 ‘남천 시럽’을 만들어 보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어떻게 주물럭거리다 보니 외관상으로는 제법 그럴듯한 시럽 모양을 만들 수 있었고, 당시 보건원으로부터 제품허가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선진국에서도 이렇게 주물럭거려서 제제(製劑)를 만드는지 매우 궁금하였다. 더구나 어린이가 먹을 시럽을 이렇게 대충 만들어도 되는지도 매우 걱정이 되었다. 회사 내에는 이런 의문에 대답을 해 줄만한 마땅한 선배가 계시지 않았다. 그래서 ‘이왕 제제를 설계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원칙인가를 제대로 배우자. 그러려면 유학을 가서 이 방면의 박사 학위를 받자’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1977년 회사를 떠나, 1979년 일본 유학 길에 나서게 되었다. 우리 나라 제약회사의 경영자는 지금도 소속 직원들의 잦은 이직(離職)을 막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잦은 이직은 자연 업무효율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혹시 이직률은 회사 내에 모방하고 싶은 롤 모델이 없을 때 높아지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 때는 젊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아 옛날이여!
2013-10-10 07:08 |
![]() |
[기고] <135> “사랑해” 밖에 난 몰라
소나 말, 개, 돼지 같은 짐승들의 새끼들은 대개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며 어미 젖을 먹다가 이내 엄마 품을 떠나 자립한다. 그러나 사람의 아기는 태어난 뒤 상당한 세월이 흘러도 자립하지 못한다. 성장해서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부모가 밥해 주고 빨래 해 주고 돈 대주지 않으면 자립하지 못한다. 심지어 결혼한 뒤에도 손주들을 돌봐 주지 않으면 못 살겠다고 부모들을 들볶는다. 오죽하면 “자식 AS는 영원하다”는 체념적인 ‘속담’이 생겼을까?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그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식을 돌볼 수 있을까? 혹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특별한 능력을 주셨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는 속담처럼 짐승들도 어느 정도 자기 새끼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구한 세월을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정성으로 아기를 키우는 것은 사람뿐이다. 그런데 사실 사랑은 아기를 키울 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성장하고 결혼해서 가족으로 늙어가면서도 부부를 포함한 가족 간에 사랑이 없으면, 구성원 모두가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다. 요컨대 사랑은 ‘사람을 온전한 사람 되게 결정 짓는 결정적 요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사랑을 해야 한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일생을 통하여 사람을 사랑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연인들에게 있어서 사랑하기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서로 사랑했던 연인들도 부부로 살다 보면 서로 종종 사랑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 심지어 서로 미워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부부는 스스로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사랑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목사님의 말씀처럼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결혼이고, 이를 선포하는 의식이 결혼식’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의 90%는 말이요, 행위는 10%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인생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느낌이다. 사랑도 90%는 말이 아닌가 한다. 즉 사랑을 잘 하려면 말을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오늘은 사랑을 잘하기 위해 말을 잘하는 비결 (계명)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혹시 독자 중에 아직도 “부부간에 꼭 남사스럽게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줄 아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사랑해”라는 말을 직접 듣지 않으면 절대로 사랑하는 줄 모른다고 확신한다. 나는 여섯 살과 네 살 난 두 손녀딸에게 틈만 나면 “할아버지 사랑해”라고 말하도록 주입 교육을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해” 소리를 들으면 한결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그런 말을 들으면 애들이 더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이다. 부부 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해” 소리를 주고 받아야 더 사랑스러운 사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혼부부만 보면 “여보, 사랑해” 소리를 입에 달고 살라고 역설한다. 이것이 평생 사랑하는 부부로 해로(偕老)하기 위한 첫 번째 계명이다.그러나 열 번 ‘사랑해’ 소리를 하다가 어쩌다 한번 상대방의 단점이나 결점을 솔직히 지적하는 ‘실수’를 하면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 간다는 무서운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대개 경험해 봐서 잘 알겠지만, 부부 간에 가장 나쁜 것이 ‘솔직한 지적질’이다. 상대방의 지적을 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결점이나 단점을 고칠 수 있는 인격자는 고금(古今)을 통해 지구상에 없었다. ‘우측으로 가야 한다’고 지적하면 오히려 왼쪽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보이다. 그러므로 ‘솔직한 지적’을 하고 싶어지더라도 이를 꽉 물고 “여보, 사랑해”나 “당신 최고야” 따위의 아부성 멘트를 날려라. 이것이 두 번째 계명이다. 참고로 이상의 계명은 나의 임상시험으로부터 어느 정도 검증된 것임을 밝혀둔다.
2013-09-25 11:09 |
![]() |
[기고] <134> 프로레슬러와 매미
1974년 5월 육군 사병을 34개월 만기로 제대하고 약 3년간 영진약품 시험과 및 연구과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세관 업무를 담당하는 본사의 천OO과장님한테서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왔다. 그는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하면서도 멋있게 생긴 당대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 프로레슬러였다. 인품마저 점잖아 사내 평판도 좋았다. 그에게 무얼 도와주면 되겠냐고 물어 보니, 당시 회사에서 생산하고 있는 솔코세릴이라는 연고제의 원료를 수입해서 세관에서 통관시키려고 하는데 문제가 좀 생겼다는 것이다. 세관 측 담당자는 이 원료가 그 약 제조에 왜 필요한지 설명을 하라고 했단다. 그런데 자기는 그런 내용은 잘 모르니 나보고 같이 가서 설명을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회사 일이기도 하고, 또 설명 못할 일도 아니기에 그러기로 하였다. 막상 그와 함께 길을 나서 보니 모양새가 영 말이 아니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한 프로레슬러와 왜소하기 짝이 없는 내가 나란히 걷는 모습이란! 정확히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어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서부 서울역에 위치한 세관에 들어서자 그는 나에게 “약사님, 저기 앉아 있는 저 사람이 담당자입니다. 그 사람한테 설명 한번 해 주세요” 해 놓고는 자기는 저만치 떨어진 구석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내 설명은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여 세관 직원에게 설명 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천 과장이 내게로 오더니 “약사님, 설명 다 하셨나요?’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나보고 좀 비키라는 눈짓을 하더니 곧 세관 직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설명을 하였으니 통관시켜 주시죠”.
세관 직원은 무언가 이해가 덜 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 중얼중얼거렸다. 금방 통관시켜 줄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자 천 과장은 두 손으로 직원의 책상을 짚으며 그 우람한 상체를 세관직원에게 쑥 디밀었다. 그리고 이렇게 따지는 것이었다. “이 원료가 무엇에 쓰이는지 약사님 불러다 설명하라고 하셨죠? 그래서 약사님 모시고 와서 설명 했습니다. 그런데 왜 통관을 안 시켜 줍니까?” 천 과장에게 있어서 내 설명으로 세관 직원이 이해가 되었는지 여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추궁하는 것은 ‘담당자 불러다 설명하라고 해서 설명했는데 왜 딴 소리냐?’는 단순한 것이었다. 우람한 체격의 천 과장의 위세에 움칠한 세관 직원은 금방, “아, 물론 통관 시켜 드려야죠” 하며 쩔쩔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알량한 지식으로 세관 직원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한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가 더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천 과장은 결코 무례하게 말하거나 고함을 치지 않았다. 다만 두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상체를 디밀었을 뿐인데, 그 즉시 세관직원이 설득(?)된 것이었다. 나는 그날 체격 큰 사람이 한없이 부러웠을 뿐만 아니라, 왜 천 과장이 회사에서 점잖게 처신할 수 있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당대 최고의 프로레슬러임을 모르는 바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가 점잖게 처신해도 상대방들이 다 알아서 기었던 것이다. 그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거나 인상을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상대방은 그가 비록 점잖게 말 하더라도, 여차하면 자기를 하늘 높이 들어 던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내 체격이 왜소해서 늘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문득 생각해 보니, 내 체격이 작아 다행이었던 점도 없지 않아 보인다. 우선 나는 남에게 화를 잘 내지 못한다. 잘못 화냈다가 보복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사정도 모르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착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뭐, 그런 오해가 꼭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또 만약에 내가 덩치가 컸으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나무라다가 상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태어난 대로 감사하며 사는 외에 무슨 방도가 달리 있겠는가?
2013-09-11 10:15 |
![]() |
[기고] <133> K군의 기(氣) 추억
1991년, 대학 졸업 20주년 기념으로 대학 동기 수십 명이 부부 동반으로 설악산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모두 관광 버스를 타고 갔는데, 버스 안에서 K라는 남자 동기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자기가 마스터한 기(氣)를 한번 넣으면 아무리 골초라도 담배를 끊게 되고, 소주는 특유의 쓴 맛이 없어진다고 했다. 그의 유창하고 장황한 언변(言辯)은 동반한 일부 부인의 귀에는 솔깃했던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허리 통증을 앓고 있던 I 부인은 K군에게 자기 허리도 기(氣)로 고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물실호기(勿失好機)! K군은 당연히 고칠 수 있으니, 100만원을 내겠다는 계약을 하자고 재촉하였다.
I 부인은 자기 남편에게 K군과 계약을 하자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애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돈 있으면 차라리 떡을 사먹겠다”고 내뱉었다. 아 뿔싸! 이에 I 부인은 “내가 100만원의 가치도 안 되느냐?”며 비분강개하였고, 그 바람에 공연히 나머지 참가자들마저 긴장된 분위기 속에 여행을 하게 되었다. 동기들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K군의 기(氣) 장사는 버스가 동해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모두에게 낯선 한 여자가 K군의 새 아내라며 자신을 소개하고는 K군의 기(氣) 장사에 추임새를 넣는 모습이었다.
버스 안에는 골초인 L군도 타고 있었다. K군은 L군을 자기 사업의 선전도구로 삼을 생각이었는지, 자기가 기를 한번 넣어 주면 아무리 골초라도 담배를 끊게 된다고 L군을 구슬렸다. 마음 약한 L군은 어쩔 수 없이 기를 받게 되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 기는 무료라는 사실이었다. L군에게 기를 넣은 K군은 ‘이제 L군은 자기의 기를 받았으니 담배가 써져서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 이라고 버스 안의 친구들에게 선언하였다.
기의 효과 때문이었을까? 놀랍게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L군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과연 골초였던 L군이 담배를 끊게 된 것일까? 궁금함을 참지 못한 한 친구가 조용히 L군에게 물었다. “야, 담배 맛이 써졌냐? 그래서 너 정말 담배 끊었냐?”
L군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야, 쟤가 저렇게 침을 튀기며 기(氣) 장사를 하는데, 내가 어떻게 담배를 계속해서 피울 수 있겠냐? 할 수 없이 더럽지만 화장실 가서만 피우고 있다. 에이!” 나는 L군의 뜨거운 우정(?) 에 감탄하였다.
설악산 콘도에 짐을 푼 후 동기들이 속초 바닷가에서 회 한 접시에 둘러 앉아 소주를 마실 때이었다. 갑자기 K군이 한 소주 병에 기를 불어 넣은 후 이렇게 말하였다. “야, 너희들 이 소주와 저 소주의 맛을 한번 비교해 봐라, 기를 넣은 소주는 더 이상 쓴 맛이 나지 않을 거다, 어떠냐? 마셔 봐, 그렇지?” 그러나 두 소주 간에 맛의 차이를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끄~응, 그러고 보니 이쪽 소주가 좀 덜 쓴 것도 같다” 라고 얼버무릴 수 밖에. 그러나 속으로는 “너의 기는 사기(詐欺)야” 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아마 K군 자신도 자신의 사기에 속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氣)와 관련된 K군의 추억은 무궁무진하다. 유창한 언변은 그의 기(氣) 장사의 자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듣다 보면 어느 새 현혹되기 십상(十常)일 정도로 그는 정말 말을 잘 했다. 한번은 그가 내 연구실에 와서 “너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늘 남산의 소나무를 생각해라” 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너, 백반(白礬)을 혀에 댔다고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럼 침이 나오지? 그게 바로 생각이 우리 몸의 생리를 바꿀 수 있다는 증거야. 마찬가지야, 네가 소나무를 생각하고 있으면 너도 모르게 네 건강에 유익한 생체 성분이 분비되거든. 그래서 소나무를 생각하며 살라는 거야”.
어떻게 내가 이 친구를 당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낼까? 문득 옛날의 추억들이 꼬리를 문다.
2013-08-28 10:39 |
![]() |
[기고] <132> 5가지 부탁
퇴임을 앞두니 종종 “약대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래서 정리해 보았다.우선, 약대 내에 몇 가지 드라이 랩(dry lab)을 설치해 주기를 부탁 드린다. 드라이 랩이란 약사법, 약학교육학, 약물경제학, 약학사나 윤리약학처럼 실험을 하지 않고 연구하는 전공을 일컫는 조어(造語)이다. 이에 반해 약물학, 약제학, 유기제약처럼 실험을 해야 하는 기존의 전공을 웻 랩(wet lab)이라고 부른다. 세포(cell)에 비유하자면 웻 랩들은 핵(nucleus)에 해당하는, 약학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핵심전공들이다. 그러나 세포는 핵만 가지고는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일견 핵보다는 덜 중요해 보이는 세포질이나 세포막도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세포의 요소들이다. 드라이 랩도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약학의 한 요소인 것이다. 약사의 직능은 법으로 정해진다. 그런데 예컨대 ‘조제는 아무나 할 수 있다’로 그 법이 바뀐다면, 약학에서 핵심전공(웻랩)을 열심히 공부하는 의미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약사법을 전공하는 교수가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약학교육학이나 약물경제학 등을 전공하는 교수도 시간이 흐를수록 절실히 필요해 지고 있다. 이제까지는 핵심전공 교수를 확보하기에도 TO가 빠듯했기 때문에 드라이 랩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천연물과학 연구소와 합병을 하면서 교수 수가 45명으로 늘었다. 드디어 몇 개의 드라이 랩을 설치할만한 여유가 생긴 것이다. 조만간 각 약대에 다양한 드라이 랩이 설치되는 꿈을 꾸어 본다.다음으로는 6년제를 일본처럼 4+2년제로 바꾸는 노력을 해 주기 바란다. 사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4+2년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는 약학사(藥學士)는 4년, 약사(팜디)는 6년 교육하는 제도로, 실질적으로는 4년제와 6년제를 병행 운영하는 제도이다. 4+2년제를 당장 도입하기 어렵다면, 정진호 서울약대 전 학장의 의견처럼 최소한 약사면허 시험을 2단계로 나누는 것도 합리적일 것이다. 1단계에서는 과거 4년제 하에서의 약사국시처럼 합격자에게 약학사 학위를 주고 졸업을 시킨다. 그리고 이들 중 약사가 되고자 하는 학생에게는 추가로 2년간 임상약학을 공부시킨 후 시험 합격자에게 면허를 주자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약대 교수를 뽑을 때 기존 교수와 전공이 다른 사람을 뽑았으면 한다. 지금 학문은 나날이 진화 분화하여 유전자치료제학, 세포치료제학, 생물약학, 의공학약학 등 과거에는 들어 보지도 못한 학문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를 외면하고 과거의 학문 분류에 집착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약학은 옛날 학문들의 박물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새 시대를 리드할 수 있는 새로운 전공들을 과감히 받아들여야 한다. 네 번째로는 ‘맞춤약학(individualized pharmacy)’을 임상약학 교육의 최종 목표로 삼기를 제안한다. 미국에서 매년 입원 환자 중 10만 명이 의약품의 부작용 (ADR)으로 사망한다. 이는 환자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 차이(대사효소, 막수송체 및 수용체 면에서)를 고려하지 않는 기존의 약물요법의 필연적인 결론이다. 따라서 ADR은 머지않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擡頭) 될 것이다. 해결책은 환자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고려한 약물요법, 즉 ‘맞춤약학’뿐이다. 이 시대적 요구에 선도적으로 대비하지 않으면 머지 않아 약사 직능의 심각한 도태가 우려된다. 끝으로 생물의약품학(biologics) 교육을 강화해 주기 바란다. 21세기가 되어서도 백신, 유전자 치료제, 세포치료제 같은 생물의약품의 출현은 우리가 생각했던 만큼 빠르지 않다. 이는 이들에 대한 ‘물질’로서의 이해가 부족한 과학 수준 때문이다. 약은 구체적으로는 결국 물질이다. 따라서 약학에서는 생물의약품에 대해 ‘물질’로서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보증할 수 있는 규격을 설정하는 연구와 교육에 치중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실질적으로 ‘생물의약품 시대’를 여는 공로가 약학에게 주어질 것이다. 약학만만세!
2013-08-14 10:16 |
![]() |
[기고] <131> 어쭈, 손을 놔?
내가 군대에서 얻어 맞으면서도 감동한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나는 1971년에서부터 1974년까지 꼬박 34개월을 육군 사병으로 원주에서 근무하였는데, 복무 중 2번이나 유격 훈련 (遊擊訓練, guerrilla training)을 받았다. 유격 훈련은 북한 공비(共匪, communist guerrillas)의 남침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이다. 훈련생들은 모두 자기의 계급과 이름 대신 ‘O번 올빼미’로 불린다. 이는 계급이나 이름이 고려되지 않는 훈련 상황의 상징적 표현이다. 그래서 유격 훈련을 받으러 가는 군인의 심정은 군대에 처음 입소하는 민간인 이상으로 심란하다. 유격은 평시에 하는 작전이 아니다. 기진맥진(氣盡脈盡) 지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하는 작전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훈련을 시킨다. 한마디로 죽을 맛이다. 올빼미들은 우선 강변에서 각종 기합을 받거나 이 산 꼭대기에서 저 산 꼭대기로 선착순 구보(驅步)를 해야 한다. 마침내 올빼미들이 녹초가 되면 그제서야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다. 로프를 잡고 절벽과 90도 되게 몸을 세우고 절벽을 뛰어 내려오는 훈련은 재미있는 편에 속한다. 훈련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도강(渡江) 훈련이다. 이는 절벽에서 도르래에 매달려 로프를 타고 저 아래 강으로 뛰어 드는 훈련이다. 나도 남들처럼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절벽에 서서 두 손으로 도르래를 잡았다. 발 아래로 강이 까마득하였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뛰어내리나 잔뜩 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훈련 조교가 곡괭이 자루로 머리와 허리를 후려 갈겼다. “아야, 왜 때려요?”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도르래를 잡았던 손을 놓고, 머리와 어깨를 만지며 소리쳤다. 그러자 조교는 “어쭈, 이 XX 봐라, 도르래를 놓네. 너 죽을래?” 하며 계속해서 더 세게 나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왜 때리냐고 분개를 하다 보니 퍼뜩 저 아래에서 “어떤 경우라도 도르래를 놓으면 곧 죽음이다. 머리에 총알이 박혀도 도르래를 놓지 말아라. 알간나?” 하며 우리를 닥달하던 조교의 가르침이 뇌리에 스쳤다. 그 순간 머리와 어깨의 통증을 참고 얼른 다시 도르래를 움켜 잡았다. 그제서야 조교의 매질이 멈추는 것이었다. 나는 진정으로 감탄 감동하였다. “그래 이게 훈련이다! 이게 참 교육이다!” 도르래를 꽉 잡은 올빼미들은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며 한 명씩 절벽을 뛰어 내린다. 얼마만큼 도르래를 타고 쏜 살같이 내려 가다 보면 강 끝 지점에 서있는 조교가 깃발을 드는 게 보인다. 이 순간 과감히 도르래를 놓고 강으로 떨어져야 한다. 이 때 머뭇거리면 강 건너 설치된 담벼락에 부딪혀 큰 부상을 당한다. 강에 떨어져 허우적대는 올빼미들은 보트가 와서 건져 낸다. 운이 좋은 친구들은 한번만 받아도 되는 이런 유격 훈련을 나는 두 번이나 받았다. 그러나 이 훈련은 평생 나에게 깊은 교훈을 주었다. 원래 비합리적인 것의 극치가 전쟁이고, 따라서 전쟁을 치르는 조직인 군대도 자연 비합리적일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는데, 그런데 이 유격 훈련만큼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극한 상황을 뚫고 살아 남기 위한 훈련이 유격 훈련이라면, 도르래를 잡기 전에 혹독한 기합으로 사람의 진을 빼놓고, 또 도르래를 잡았을 때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도르래를 놓지 못하게 훈련시키는 것을 비합리적(irrational)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오히려 혹시 초합리적(超合理的, surrational)이라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이 더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국에서 입원환자 중 약 10만 명이 의약품의 부작용으로 죽고 있을 정도로 의약품의 안전 사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명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30년 6개월간의 약대 교수 생활을 돌아 보니, 어떤 지식은 유격훈련처럼 초합리적인 훈련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예비 약사들에게 암기시켰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같은 소리지만 말이다.
2013-07-30 17:39 |
![]() |
[기고] <130> 사라져서 좋아요 – 욕과 견학
지난 호에는 쉽사리 사라질 것 같지 않던 우리나라의 나쁜 풍속들이 용케도 사라진 사실로부터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게 전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대학에서 사라진 풍습 두 가지를 더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는 욕이다. 예전의 서울대학 학생들은 자기들끼리의 일상의 대화에서 별의별 화려한 (?) 욕들을 사용했었다. 1966년 학원에 다닐 때 서울대 법대를 나온 영어 강사 선생님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높은 외국인이 여름 방학이 끝나 막 개강을 한 서울대에 가 보았더니 오랜만에 만난 학생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내용을 들어 보니 “야, 이 새끼야 잘 지냈냐? 오랜만이다”라는 것이었다. ‘최고 명문 서울대 학생들이 오랜만에 만나 웃으며 나누는 말이니까 저 말은 틀림없이 품위 있고 좋은 말일 것이다’. 외국인은 그렇게 생각했단다. 그래서 다음날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뜸 활짝 웃으며 “야 이 새끼야 오랜만이다” 하며 손을 내밀었다나.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당시에는 그 정도로 대학생들 대화의 상당 부분이 욕이었다. 영어에서 ‘first name bases’ 란 말이 친한 사이임을 나타내는 말인 것처럼, 우리 말에는 ‘욕을 하고 지내는 사이’ 라고 해야 진짜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의 대학생들은 별로 욕을 하지 않는다. 우리 학생들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주 잘된 일이다. 참 욕설이 대화의 대부분이던 군대의 대화는 요즘 어떻게 바뀌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둘째는 실습시간에 가는 견학(見學)이다. 67학번인 우리 동기들은 대충만 꼽아 보더라도 구의동 수원지, OB맥주, 해태제과, 삼양라면, 종근당, 한독약품, 연초제조공장, 홍삼제조 공장 등을 견학 갔었다. 또 공기 오염도를 측정한답시고 흰 가운을 입고 공기 채취 병을 들고 대한극장에 들어 갔던 일도 생각난다. 약용식물학 실습시간에는 뚝섬 약초원에 가서 약초를 구경하였다. 그러나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던 간에 학생들의 관심사는 견학 자체가 아니었다. 선물로 무얼 주려나가 관심사이었다. 종근당은 견학 간 우리 학생 80명 전원을 회사 버스에 태워 영등포 시내에 있는 음식점에 데리고 가 맛있는 설렁탕을 사 먹였다. 아마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던 견학이 아니었던가 기억된다. 해태제과에서는 과자를 얻어 먹고, OB맥주에 가서는 맥주를 공짜로 얻어 먹는 것이 재미 있었다. OB맥주에서는 견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재떨이 같은 기념품도 주었다. 삼양라면에 견학 갔을 때에는 방문 기념으로 라면 5개가 들어있는 덕용 포장 한 개씩을 받았다. 누군가의 제의에 따라 이를 들고 뚝섬에 가서 라면 집 아주머니에게 5개를 주고 2개를 끓여 받아 먹었던 추억이 아련하다. 왜 당시에는 이처럼 견학이 많았을까? 졸업을 하고 난 한참 뒤에 알고 보니 그것은 오로지 돈 때문이었다. 견학을 가면 실습에 한 푼의 돈도 들지 않기 때문에 되도록 견학을 간 것이었다. 아마 위생화학 실습 시간에 견학을 가장 많이 갔었던 것 같다. 훗날 유기제약 연구실의 조윤상 교수님 말씀에 의하면, 설사 학교에서 실습을 할 때에도 실습 주제를 선정하는 첫 번째 기준은 돈이었다. 되도록 싼 화학 물질을 가지고 오랫동안 반응을 시켜야 합성이 되는 반응을 찾아서 실습을 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실습시간은 늘 지루하기만 하였다. 영리한(?) 학생일수록 실습 테이블을 두세 명의 착실한 학생에게 맡기고 실습실 앞에 있는 운동장에 나가 야구시합을 하거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당구장에 가곤 하였다. 당시에는 그런 것을 낭만이라고 생각하는 교수와 학생들이 많았다. 낭만의 극치(?)는 실습 담당 조교가 종종 학생들의 야구 시합 심판을 보았던 일이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비뚤어진 낭만이다. 지금은 그런 류의 견학이나 실습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대학에서 욕과 농땡이 실습(견학)이 사라진 것은 일말(一抹)의 아쉬움도 있을 수 없는 아주 잘된 일이다.
2013-07-17 07:09 |
![]() |
[기고] <129> 용케 없어진 것들
오랜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자가용으로 출퇴근하게 된 A박사에게 직장동료 B가 조언을 하였다. ‘한국에서 운전을 하려면 지갑에 면허증과 오천원짜리 한 장을 함께 끼워 놓아야 한다’고. A박사는 ‘아마 그렇게 해야 사고가 잘 안 난다는 말인가 보다’ 생각하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어느 날 시내를 지나는데 교통 경찰이 차를 세우고 면허증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면허증을 제시하였더니 경찰은 잠시 후 말없이 면허증을 되돌려 주었다. 한참을 가던 A 박사는 면허증 뒤에 끼워 놓았던 오천 원권이 없어진 사실을 발견하였다. ‘내가 부적처럼 갖고 다니는 오천 원권을 빼 가다니!’ 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그 자리에서 차를 돌려 경찰에게 다가 갔다. 그리고 따졌다. “여보시오, 왜 남의 돈을 빼 갑니까?”라고. 그 말을 들은 경찰은 창백해진 얼굴로 황급히 돈을 돌려 주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를 반복하였다.직장에 도착한 A 박사는 ‘별 이상한 경찰이 다 있더라’며 동료 B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B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어 A박사, 앞으로는 그 길로 다니다가 절대로 신호 위반을 하면 안 됩니다. 다시 그 경찰한테 걸리면 절대로 무사하지 못 할 겁니다”. A 박사는 당시 운전자들이 경찰에게 걸리면 돈을 주는 관행(?)을 몰랐기 때문에 그 경찰이 몹시 불쾌했었다. 한편 경찰은 얼마나 놀랐을까? 운전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면 경찰에게 돌아 와 ‘왜 내 돈 가져갔냐?’고 따졌을까 싶었을 것이다. 아마 자기가 짤리는(파면되는) 순간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은 1980년대의 이야기이다.지금은 그 때처럼 교통경찰이 돈을 받는 관행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다. 정말 용케도 없어졌다.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일을 보면 우리나라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적지 않은 불합리한 일들도 언젠가는 없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희망이 생긴다. 말이 나온 김에 돌아 보니 학교에도 그 동안 사라진 것들이 많았다. 우선 교수들이 학부 강의를 빼먹는 소위 ‘휴강’이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1967~1971) 연건동에 있던 약대는 봄이 되면 당시 창경원에서 흘러 나오는 스피커 소리 때문에 공부 분위기가 흐트러지곤 하였다. 학생들은 수업에 들어 오신 교수님을 보고 “선생님, 휴강해 주세요” 소리를 두세 번 외친다. 그러면 교수님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휴강을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 휴강이 많았던 것은 무엇보다 교수님들의 불성실함 때문이었다. 어떤 교수님은 전날 과음하신 탓에, 또 어떤 교수님은 테니스를 치다 보니 수업시간에 맞추어 오기 어렵다는 등, 요즘 같으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휴강을 하였다. 그랬던 휴강이 1980년대부터 서서히 없어지더니, 90년대 이후에는 거의 완벽하게 대학에서 사라졌다.또 하나 학교에서 사라진 것은 교수들의 ‘교과서 표절’이다. 2010년대 전까지만 해도 외국 책을 서너 권 번역한 후 적당히 편집을 하여 교과서로 만드는 것이 관례이었다. 그 때에는 ‘표절’이라는 말 자체도 없었다. 당시에는 외국 책을 베끼지 않고는 교과서를 만들 방법이 달리 없기도 하였다. 나만 해도 1999년까지 두 권의 책을 썼는데, 외국의 유명한 한 책을 중심으로 기타 몇 가지 책을 참조 보완하여 나름대로 독창성 있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남의 책에서 문장이나 그림, 또는 표의 일부를 가져다 써도 ‘표절’이 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내 책들도 아마 ‘표절’의 의혹을 벗기 어려울 것이다. 요즘 원전비리(原電非理) 때문에 전기가 모자란다고 아우성이다. 에어컨도 못 켜게 해서 더욱 덥다. 이처럼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불합리한 일들이 아직도 부지기수이지만, ‘돈 받는 경찰이 없어지고, 대학에서 휴강과 표절이 사라진’ 기적들을 회고하면서, 언젠가는 원전비리 같은 일도 근본적으로 사라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져 본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더울 것 같다.
2013-07-03 10:10 |
![]() |
[기고] <128> 누가 말하느냐가 더 중요해
며칠 전 온누리교회 설교 시간에 이재훈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온누리교회의 담임목사이셨던 고 하용조 목사님께서 부목사님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란다. 한 젊은 부목사가 ‘자기는 영어를 잘 못해서 속상하다’는 취지의 하소연을 했단다. 이 말은 들은 하목사님은 “속상해 하지마”라고 말한 뒤 “사실이잖아?” 했단다.
많은 교인들이 이 예화를 듣고 감동하였다. 마침 이날 이목사님의 설교 주제가 겸손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설교 말씀에 따르면, 열등감은 교만한 사람이 나타내는 반응이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겸손할 수 있지만 교만한 사람은 같은 상황을 굴욕으로 느끼기 쉽다고 한다. 또 열등감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슬퍼하는 감정인데, 열등감을 갖는 사람이 바로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겸손과 굴욕은 영어로 각각 humility와 humiliation로 두 단어가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두 단어의 어원이 같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서 겸손과 굴욕은 본질적으로 같은 특성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수시로 “영어를 못해서 답답해” 소리를 하고 다닌다.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다. 사실인데도 솔직히 열등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내가 영어만 잘 했으면 세상을 뒤엎었을 것이다”라고 마음 속 허풍을 떨기도 하였다. 그런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내 마음에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맞다. 내가 혹시 영어를 잘 했다면 아마 다른 것에 열등감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그날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우리들 마음에 겸손을 가장한 열등감, 그리고 그에 기인한 교만함이 자리잡고 있음을 돌아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한편 나는 갑자기 하목사님이 생전의 설교 중에 하신 말씀, 즉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 말을 하느냐이다’라는 말씀이 떠 올랐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 등등의 말들은 사실 그 말들을 한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유명해진 말들이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렇다면 유명한 말을 남기기 위해서는 먼저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유명한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다 유명해 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행적에 감동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야 감동을 줄 수 있고, 감동을 주는 말이라야 후세에 유명해 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은 에디슨 같은 대천재가 하면 감동이지만, 실제로 아무 것도 발명하지 못한 바보가 하면 무슨 감동이 있고, 어떻게 유명한 말이 될 수 있겠는가? 장애를 극복한 닉 부이치치 같은 분이 하는 말은 말마다 감동이다. 그러나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말은 감동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정말로 무슨 말이냐 보다 누가 그 말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사실 “사실이잖아”라는 말도 인자하고 영적 권위가 있는 하목사님이 했으니까 감동이나 교훈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다르게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감동이 있는 인격자의 입에서 나온 말만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후세에 유명해질 수도 있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교회를 오랫동안 섬기다 보면 대중기도를 할 기회가 주어진다. 대중기도란 남들을 대표하여 소리 내어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이다. 처음에 내게 그 역할이 주어졌을 때의 난감함을 잊을 수 없다. 기도에 적합한 성경 구절을 인용할 지식도 모자랐지만, 무엇보다 마치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거룩한 말씀을 동원하여 기도를 올려도 괜찮은 것일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조금 기도의 연륜이 쌓인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혹시 기도의 기술만 느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실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대중기도는 늘 두려운 행사이다. 기도에 있어서도, 내용보다 누가 드리는가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2013-06-19 10:07 |
![]() |
[기고] <127> 사랑의 말
“예나야, 너는 누굴 닮아 이렇게 똑똑하지?” 물으면 예나 (큰 손녀, 여섯 살)는 “할아버지요”라고 대답한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도록 평소에 교육시킨 탓이다. 뻔한 대답이지만 나는 기분이 좋아져 “옳지, 옳지” 하면서 껄껄 웃는다. 물론 아내가 옆에 있으면 예나의 대답은 “할머니, 할아버지요”로 바뀌지만… 나는 결혼식 주례를 볼 때마다 ‘결혼은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의식이다’라고 강조한다. 결혼 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질 때에도 ‘사랑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의식이 결혼식이라는 말이다. 이 말에 이의 (異議)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지, 즉 사랑의 행동지침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나는 인생은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이란 ‘사랑의 말을 주고 받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은 행동이 아닌 말로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하려면 ‘사랑스런 대화’를 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스런 대화’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심리학자에 의하면 우선 상대방을 칭찬하고 인정하는 말을 하라고 한다. 설사 사탕발림이라도 나를 인정해 주는 말이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할아버지를 닮아 똑똑하다’는 손녀의 말에 할아버지가 웃는다. 운전하는 남편에게 “여보 당신이 운전을 하면 나는 저절로 잠이 와”라고 해 주면 남편이 웃고, 미장원 다녀 온 아내에게 “여보, 오늘 머리 정말 잘 나왔네” 해 주면 아내가 웃는다. 칭찬과 인정이 바로 사랑을 유발하는 ‘사랑스런 대화’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무시, 비난, 솔직한 지적이나 충고 등은 ‘저주의 말’이다. 평소 공부를 잘 안 하던 아들 녀석이 모처럼 백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집으로 뛰어 들면서 소리쳤단다. “엄마, 나 백점 맞았다”. 엄마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의 실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뜸 “뭐? 너 컨닝했지?” 물었다. 아이는 소리쳤다 “아냐, 정말 아냐 엄마”. 그러자 엄마가 다시 물었다. “그럼 네 학교에서 백점 맞은 애가 몇 명이냐?” 엄마는 저 녀석이 백 점을 맞았다면 아마 거의 전교생이 백점을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는 마침내 울면서 결심을 했다. “내가 다시 공부하나 봐라” 라고. 아내를 옆 자리에 태우고 서툴게 교차로를 건너던 남편에게, 옆을 지나던 트럭 운전사가 소리쳤다. “야, 이 쪼다 같은 X아, 운전 좀 똑 바로 해, 부딪칠 뻔 했잖아”. 그러자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 아는 사람이야?” 남편은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인데” 하였다. 그러자 아내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을 그렇게 정확히 알지?” 위의 대화는 서로 사랑을 해야 하는 가족 사이에 나눌 대화가 아니다. 아이가 천하의 바보이고, 남편이 분명한 쪼다였다고 해도, 그런 대화는 서로간에 증오와 저주를 낳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신혼 부부를 포함한 모든 부부에게 신신당부 (申申當付)한다. 부부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절대로 솔직한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솔직한 대화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솔직히 터 놓고 이야기하자’고 나온다면 이미 문제는 심각해 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아, 지금이 바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칭찬해야 할 그 때이구나’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사력 (死力)을 다해, 마치 직장 상사에게 아부하듯, 상대방이 듣기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해야 한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고, 결국 다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크게 느껴진다. 얼마 전 며느리가 아내에게 말했단다. “아버님 정년 퇴임하시면 뭐 하세요, 큰 일이네요” 이 말을 들은 아내는 “네 아버지한테는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고 했단다. 얼마나 고마운가? 이 말을 들은 후 나는 아내가 어디 간다고만 하면, 정성껏 차로 모셔다 드리고 있다. 사랑은 정말로 ‘말’을 통해 커지는 모양이다.
2013-06-05 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