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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6> 역사가 미래이다
강아지가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꼬리를 흔드는 이유는? 정답은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몸통이 꼬리를 흔드는 것이 순리(順理)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꼭 순리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영어에도 The tail is wagging the dog이라는 표현이 있다.
내가 육군 항공기 정비부대에 근무할 때 본 OA-1이라는 정찰용 비행기는 비행기의 앞날개가 아니라 방향타(方向舵)라고 부르는 뒷날개(꼬리)가 비행기(몸통)의 비행(飛行) 방향을 결정한다. 조종면에서는 주객이 전도된 비행기인 셈이다.
그런데 꼬리로 몸통의 비행 방향을 조종하는 것은 앞머리를 움직여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조종간을 움직이면 비행기의 기수(機首)가 아니라 꼬리 부분이 움직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숙지하지 않으면 비행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린다.
나는 2013년에 대학을 정년퇴임하기 조금 전부터 우리나라의 약학교육사를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 동안 대한약학회 안에 ‘약학사분과학회’를 만들어 5번의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서울약대 안에 가산약학역사관을 개관하는 일에 일조(一助)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약학사(藥學史)를 연구할 수 있는 작은 둥지 두 개를 마련해 놓은 느낌이다. 최근에는 탁월한 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서울대약대 백년사(百年史)’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백년사를 집필하면서 가끔 ‘역사(歷史)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 결과 ‘역사란 과거사의 단순한 나열(羅列)이 아니라, 과거사에 대한 해석(解釋)’이며, 또한 ‘과거로의 회귀(回歸)가 아니라 미래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뒷날개로 OA-1의 비행방향을 조종하는 것처럼, 과거의 역사로부터 얻은 지혜는 우리의 나아 갈 바 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란 과거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未來)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백년사’를 집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어떤 사건을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다룰 것인 것 하는 문제이었다. 그것은 ‘중요한 사건이 역사에 남는 것이 아니라, 기록에 남은 사건이 역사에 남을 수 있다’는 역설(逆說)의 가능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도 기록으로 남겨 놓지 않으면 후세에 망각되기 쉬운 반면, 지극히 사소한 사건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언급해 놓으면 후세에 중요한 역사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손을 대는 사람은 본의이든 아니든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어려웠던 점은 자료의 부족이었다. 심지어 불과 40년 전의 약대 연건 캠퍼스 전경(全景) 사진도 남아있지 않았다. 솔직히 일제(日帝) 때 보다 광복(光復) 후의 역사 자료가 더 부실해 보였다.
부끄러웠다. 사실 광복 후의 일이 조금 더 잘 기록되어 있었더라면, 겨우 백년에 불과한 약학사 쯤은 ‘연구(硏究)’의 대상이 아니라 단순한 ‘정리(整理)’의 대상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그럼 지금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 예컨대 한약분쟁, 의약분업, 약대 6년제 등을 충실하게 기록해 나가고 있는가?
아마 누구도 이에 대해 자신 있게 ‘예’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기록을 남기고 자료를 모으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선진국이 되었다고 하는 오늘날에 와서도 정부를 비롯한 여러 기관의 정책수립이나 업무수행 행태가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은 미래에 나아갈 바를 제시해주는 방향타(역사서)가 없는 데에 기인하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온고지신(溫故知新)! 역사로부터 미래에 나아갈 방향(비전)을 찾아냄으로써 시행착오를 줄이는 것이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는 첫걸음은 아닐까?
2016-08-3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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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5> 최초의 여성 약학박사 함복순(咸福順)
오늘은 약춘 200(약학박사 1호)에서 다룬 바 있는 함복순 교수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그는 1913년 9월 6일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서 6녀 중 3녀로 태어났다.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던 그는 소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 국문을 깨쳤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성당엘 갔다가 수녀의 권유로 뒤늦게 성당에 있는 소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에게 공부는 너무 쉬워서 언제나 일등을 했고 반장도 하였다. 결국 학기말에 3학년으로 월반하여 5년간 소학교를 다녔다. 졸업(1923년) 후 사립학교 출신으로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들어가기 어려운 경기고등여학교(경기고녀)에 합격하였다.
경기고녀를 졸업(1933년)한 후 수녀가 되기 위해 카멜(carmel)봉쇄 수도원에 지원하였지만 중병을 앓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낙방되었다. 그 후 신부님의 권유로 1933년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들어가) 1934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1937년까지 3년간 가명(加明)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으나,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일본 동경여자약학전문학교에 편지를 보내 입학 허가를 받아 1937~1941년의 4년간 공부를 마치고 졸업하여 약사가 된 다음 귀국하였다. 1941~1948년 서울 국립중앙화학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6.25 전쟁의 와중인 1951.5.31~1952년(정식 면직은 55.1.15) 서울대 약대 전임강사로 봉직하였다.
서울약대의 전임강사까지 되었지만 오랜 꿈인 유럽 유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직 서울대 독일어 교수이었던 독일인으로부터 독일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잡혀 가자, 이번에는 명동 성당에 와있던 프랑스인 공벨 신부에게 3년간 매일같이 가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부산 피난시절, 부산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 파리대학 입학 지원서를 써서 제출하였더니, 프랑스 대사가 차를 보내 데리고 가서 대사관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외교관 특별 보따리 속에 파리대학 입학지원서를 끼워 파리대학에 전달하도록 조치하여 주었다. 그 때는 우편물의 국제 왕래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파리대학으로부터 입학을 허락한다는 회신이 도착하였다. 그는 곧 동경의 요코하마 항으로 가서 프랑스로 가는 Marseillese호라는 배를 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만석이라 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일본 여자 하나가 몸이 아파 예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운 좋게 탈 수 있었다.
배는 상해, 홍콩, 사이공, 싱가포르, 홍해, 수에즈 운하, 지중해를 거쳐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하였다.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대학을 찾았는데, 교수 등의 배려로 1952부터 약대 대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1953년에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55년까지 동 대학 이과대학 생물화학연구실에서 근무하였다. 1957년부터는 다시 동 대학 이과대학원에 입학하여 1961년에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1962년까지 동 대학 이과대학 유기구조화학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2년간(1962.9.15~1964.9.24) 서울대 약대 교수(약효학)를 지내며 교지인 약원(제6호, 1963.3)에 ‘빠리 약대의 약학교육’이라는 글을 남겼다. 1963~1968년에는 미국의 뉴욕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물화학 연구원으로, 1969년에는 미국 콜럼버스 병원에서 임상화학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1985년에 정년퇴직 하였다. 그 후 1년간 Cooper Union 대학에서 영문학을 수강하였다.
만 77세인 1990년 5월에는 일본 유학 시에 만났던 최재방씨와 수유 성당에서 황혼 결혼을 하고, 뉴욕에서 ‘길벗’이라는 문학 동인 활동을 하다가, 1999년 5월 29일 서울에서 심장마비 후유증으로 영면하였다. 유작(遺作)으로 ‘고독을 누리는 시간 (미리내, 2000년 4월 10일)’이라는 수필집을 남겼다. 이 글도 그 책의 ‘나는 왜 혼자 살아 왔나’라는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의 천재성, 학구열 및 개척정신에 심심한 경의를 표하며 이 글을 마친다.
2016-08-1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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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4> 보스의 탄생
지난 7월 7일 일본 동경의 제국호텔에서 열린 나가이 재단(Nagai Foundation) 창립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다녀 왔다. 재단 이사장인 나가이(永井恒司, Nagai Tsuneji) 박사는 약제학 분야를 포함한 약학의 영역에서 적극적인 국제적 활동을 펴 온 일본 약학계의 보스 중 한 사람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 홍문화 박사님 비슷한 분이라고나 할까?
나가이 교수는 동경대학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1년에 호시(星)약과대학에 부임할 때부터 제인(帝人)파마주식회사의 고문으로서 회사와 공동으로 HPC(hydroxyl propyl cellulose)의 새로운 용도 개발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여 HPC의 용도에 관한 특허를 받았고, 회사는 이를 이용하여 3가지 신의약품(아프타치, 리노코트, 사루코트)을 개발하여 시판하게 되었다. 이 업적으로 나가이 교수는 1984년 ‘전국발명상’을 받았고, 1986년 9월 1일 일본인 최초로 FIP의 Hoest-Madsen 메달을 수상하였다.
이때 50년 지기(知己)인 향천대학(香川大學)의 고니시(小西良士) 교수는 FIP상의 수상을 기념하여 재단을 만들라고 제안하였다. 그 해 10월에 호시약과대학의 이사장 주최로 뉴오타니 호텔에서 FIP상 수상 축하 파티가 열렸을 때, 제국제약(帝國製藥)의 아까자와(赤沢) 사장이 많은 액수의 돈을 기부하여 주었다.
이 돈이 재단이 처음으로 받은 기부금 1호이었다. 그러나 이 재단에 자금 면에서 더 큰 도움을 준 것은 제인 파마이었다. 제인 파마는 특허에 대한 공로금을 호시 대학의 구좌로 넣어 주었는데, 호시대학의 구타니 학장은 그 돈 전액을 나가이 재단이 전용(專用)할 수 있는 재산으로 처리하여 주었다.
1986년에 ‘나가이기념국제약학기금’이라는 임의단체(任意團體)로 출범한 이 단체는 그 후 재단법인으로의 변신을 도모(圖謀)하였다. 그 과정에서 문부성의 심사담당관은 ‘국제교류재단은 전국적으로 예가 드물고, 약학영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며, 재단의 설립은 사립대학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각별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나가이 교수는 재단설립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으로, 문부성에 드나들며 심사담당관으로부터 정관 작성에 필요한 조언을 받았다. 1993년 2월 12일에 예비심사를 신청한지 만 1년 후인 1994년 1월 28일에 ‘나가이기념약학국제교류재단’ 이라는 이름으로 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았다.
그 후 법인제도가 전면적으로 개정되고 관할부서가 문부성에서 내각성(內閣省)으로 바뀌면서 2012년 4월 1일부터 공익재단법인(公益財團法人)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의 연혁을 살펴보면 군데군데에서 남의 명예로운 성취를 잘 지켜주려고 하는 일본 사회 전체의 미덕(美德)이 느껴진다.
나가이 박사는 5년전부터 하반신 불수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가이 재단이 후원하는 각종 국제 약학관련 학술행사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있다. 이는 지극 정성으로 남편을 섬기는 부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언제나 남편의 휠체어를 밀면서 나타나는 부인이 실은 나가이 재단의 실질적인 운영자라고 한다. 나가이 이사장은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심포지엄 전날부터 초청연자들과 밤늦도록 식사와 담소를 나누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내가 감탄한 것은 그가 심포지엄 당일 휠체어에 앉은 채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학회장의 맨 앞자리를 굳세게 지키며 모든 강연을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국제학술회의에서 자리를 뜨지 않고 하루 종일 어려운 학술 강연을 듣는 것은 나 같은 젊은(?) 사람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문득 오래 전 서울에서 열린 신약개발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교토대학의 세자키 교수가 머리에 떠올랐다. 당시 정년을 앞두고 있는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종 학회장의 맨 앞자리를 고고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는 중견교수만 되어도 학회장 밖에서 환담(?)이나 즐기던 우리에게 따끔한 자극이 되었다.
보스는 어떤 경위로 탄생하는가? 이번 여행은 이에 대한 귀중한 힌트를 주고 있었다.
2016-07-2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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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3> 울림이 있는 말 한마디
남에게 들은 말 한마디가 내 삶에 긴 울림으로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1. D제약의 L부회장은 ‘도리 없지’란 말을 자주 한다. 이미 엎질러져서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포기할 때 하는 말이다. 지나간 실패를 오래도록 묵상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럴 시간이 있으면 실패를 털고 앞으로 나갈 방도를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도리 없지’는 지나간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사고 방식 소유자의 표현이다. 적지 않은 사람이 실패한 일을 오랫동안 묵상함으로써 낙심(落心)하고 좌절한다. 온누리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은 ‘실패는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한 낙심과 좌절이 더 큰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도리 없지’ 하면서 실패로 인한 낙심과 좌절을 털어버리는 것은 것은 범인(凡人)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L부회장의 ‘도리없지’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의 비범함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우리 둘째 애가 사업을 하다 큰 실패를 경험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가 가장 걱정한 것은 실패보다 그 애의 낙심이었다. 그 때 나도 L부회장처럼 ‘도리 없지’ 생각하며 아들을 진심으로 위로하였다. 마침내 아들은 하나님 은혜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재기에 성공하였다. 할렐루야.
2. 고 하용조 목사님은 늘 ‘잘 나갈 때가 위험한 때’라고 설교 하셨다. ‘스스로 요즘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되면, 위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잘 나가는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대로 교만은 패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권력에 취해 교만을 떨다가 추락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은사 한 분은 ‘당신이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할 사람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될까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잘 될 때 겸손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이 다 싫어한다는 좀 서늘한 경고 말씀이었다. 그러나 겸손은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거죽은 겸손이나 속은 교만인, 즉 위장된 겸손은 더욱 위험하다. 위장된 교만은 곧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마련이고, 더욱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3. 오랜만에 뵌 93세의 박창환 목사님은 내게 “아직도 여기 저기 강의를 하러 다니신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셨다. 나는 정년 퇴직 후에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뜻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의하러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귀한 일이냐’란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큰 울림이 있는 말씀이었다. 나는 박 목사님과 하 목사님의 말씀대로 겸손과 정직이 인생을 바로 이끄는 중요한 나침반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4. 내가 졸업한 제물포 고등학교의 교훈은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다. 또 이 학교 강당에는 유한흥국(流汗興國)이란 붓글씨 족자가 걸려 있었다. 모두 이 학교를 설립한 길영희 교장 선생님의 철학에서 나온 말씀이셨다. 이 학교는 무감독(無監督)시험과 같은 명예제도(honor system)를 실시해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교훈, 족자, 무감독시험제도 등을 통한 이 학교의 가르침, 즉 근면, 성실, 정직은 나를 비롯한 많은 졸업생들의 평생 교훈이 되었다.
나는 이 가르침이 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를 소망한다. 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되는 삶을 살아낼 때, 기독교는 세상에 저절로 전도되고 세상은 성경적으로 바람직하게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5.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네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믿는다’고 자주 말씀 하셨다. 내가 남들보다 착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라고 믿는다는 말씀이셨다. 그 믿음의 말씀 덕분에 나는 책을 산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용돈을 타는 등의 유혹을 참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23년 전에 작고하셨지만, 어머니의 그 말씀은 그 후로도 평생 내 삶의 태도를 가다듬어 주었다. 어머니 그립습니다.
2016-07-1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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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2> 손주 자랑
우리 부부에게는 큰 아들로부터 손녀가 셋, 작은 아들로부터 손자가 하나 있다. 이 네 명의 손주는 우리 부부의 항우울제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 부부의 생명이다. 큰 아들네는 같은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살고 작은 아들네는 4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산다. 덕분에 나는 손주들을 수시로 본다. 큰 아들네 세 손녀는 아침 저녁으로 만날 정도이다. 호강이 아닐 수 없다.
아내와 둘이 만 있으면 몸은 편하다. 그러나 곧 심심해진다. 그러면 몸만 편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힘들어도 애들과 함께 있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일요일마다 가족 전원이 만나는 규칙을 정해서 지키고 있다. 즉 같은 교회에서 각자 예배를 드린 후 전원(10명)이 모여 점심 식사를 한다. 돈이 드는 부작용은 있지만 행복하다.
나는 손주들과 놀 때 눈높이를 맞춘다. 내 눈이 애들보다 높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내 눈높이를 낮추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손주들의 눈이 더 높을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공주 이름 대기, 아이돌 이름 대기, 피아노 치기,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분야에서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인 큰 손녀 예나를 당할 수 없다. 하루는 “예나야, 이제는 할아버지가 예나보다 잘하는 게 하나도 없네” 했더니, 예나 왈, “아니야, 약에 대해서는 할아버지가 더 잘 알잖아?” 하였다. 이제 손녀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다섯 살짜리 손자인 우주는 축구를 잘 한다. 학원에서 축구를 시작하였을 때, 나는 30골을 넣으면 선물을 사주겠다고 덜컥 약속하였다. 평생 한 골도 넣어 본 적이 없는 나는 30골이면 우주가 결코 달성할 수 없는 높은 목표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주는 축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후딱 20골을 넘겼다. 아무래도 이 달 중에는 선물을 사주어야 할 모양이다.
손주들은 내가 저희들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느 날 예나가 “할아버지, 나한테 하듯 할머니에게 한번 해 봐, 그럼 훌륭한 할아버지라고 티브이에 나올 거야”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아내가 기뻐했지만, 나도 내 사랑이 전달된 것에 몹시 기뻤다.
끝으로 예나가 요즘 과학 글짓기 시간에 쓴 글 세 개를 담임 선생님(윤쌤)의 코멘트와 함께 소개한다. 자랑질(?)을 참아 주시길 부탁 드린다.
- 봄 -
봄이 왔습니다. 따듯한 봄이 왔습니다. 추웠던 나무, 꽃, 우리 마음도 봄의 날씨와 향기에 사르르 녹아 갑니다. 꽃이 좋아서 날아가는 나비를 보니 우리도 덩달아 기분이 좋습니다. 봄에 비록 겨울이 샘내서 꽃샘추위가 있어도, 며칠 뒤면 봄 향기가 다시 찾아 옵니다. 꽃들도, 나무도, 나비도, 모두다 봄 색깔에 물들어 즐깁니다.
(심작가님! 정말 봄처럼 아름다운 글이군요. 향기에 사르르 녹는다~는 표현에 윤쌤의 마음도 사르르 녹습니다! 또 봄 색깔에 물들어 즐긴다는 표현은 정말이지 세계 최고입니다!)
- 나 -
나는 나의 주인나를 생각으로 격려해주는 것도 나, 칭찬해 주는 것도 나.나는 내가 뭘 할지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생각한대로 움직인다. 마치 로봇처럼.그럼 나는 로봇일까?나는 생각을 하고, 창작을 하니까 로봇이 아니다. 그럼 나는 뭘까? 아직도 비밀에 꽁꽁 싸여 뭔지 모르는 나.
(어머나, 정말 이 글을 예나가 혼자 쓴 것인가요? 우와~~ 철학자가 쓴 심오한 글보다도 훨씬 훌륭합니다! 감동, 감동, 감동)
- 내가 살고 싶은 집 –
나는 하늘에 있는 구름집을 만들어 보고 싶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집. 그림을 보면 나비날개가 있다. 그 나비날개를 메고 나는 것이다. 길에는 무빙워크가 깔려있는 구름집이다. 이사를 할 때는 바닥에 붙은 끈을 떼면 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누구나 살고 싶은 좋은 집 같기도 하다.
(하하하~~ 어쩜 이토록 아름답고 과학적인 집이 또 있을까요?!!! 하늘에 있는 구름집, 나비날개가 있는 집, 상상만으로도 정말 훌륭하네요~~무빙워크며 끈을 떼어내어 이사를 한다는 구체적인 상상력은 정말 우리 예나 아니면 할 수 없는 생각!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2016-06-2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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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1> 한국인 약학박사 1호 (2)
독일 박사(1962~)
이화여대 약대 출신인 고영수(高英秀)는 1962년 뮌스터 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덕성여대, 이화여대 약대를 거쳐 한양대 식품영양학과에도 재직하였다.
1965년 김영희가 독일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상세한 정보는 불명이다.
이화여대 약대 출신의 서명은(徐明殷)은 1966년 Braunschweig 대학에서 ‘Belladonna Alkaloid에 대한 Vitori 반응의 연구와 Nitro Radical에 관한 연구’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KIST, 경희대를 거쳐 이화여대 약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서울대 약대 출신으로는 1969년 Bonn 대학에서 ‘축합 tannin의 분리 및 합성‘으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안병준(安丙俊, 1962년 졸업, 16회)이 최초이다. 그는 한국화학연구소, 충남대 약대 학장 및 충남대 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서울대 약대 출신으로 두 번째는 1975년 뮨스터 대학 약대에서 ‘소염진통작용이 있는 hydantoin 유도체의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권순경(權順慶, 16회)이 있다. 그는 덕성여대 약대 학장 및 동교 총장서리를 역임하였다.
미국 약학박사(1964~)
미국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고 제일 먼저 귀국한 사람은 김병각(金炳珏, 1953년 부산에서 서울대 약대 입학, 1957년 3월 졸업, 11회)이다. 그는 1961년 9월 미국 시애틀에 있는 University of Washington의 약학대학에 유학하여 ‘Alkaloid production and metabolism of Claviceps Paspali strain Li 189 in submerged culture’라는 논문으로 1964년 8월에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2년간 University of Connecticut에서 포스닥을 하고 1966년 6월에 귀국하여 경희대 약대에 복귀하였다가, 그 해 9월에 서울대 약대 전임강사로 자리를 옮겨 교수로 근무하였다.
미국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두 번째 사람은 1954년 3월에 서울대 약대를 졸업(8회)한 이상섭(李相燮)이다. 그는 1966년 8월에 Wisconsin University 약학대학에서 ‘스테로이드의 미생물학적 분해’라는 연구로 학위를 받고 그 해 9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서울대 약대 학장 및 대한약학회장을 역임하였다.
신제(新制) 서울대학교 약학박사(1967~)
국내에서 최초로 신제(新制)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한덕룡(韓德龍, 1952년 서울대 약대 졸업, 6회) 이다. 그는 1959년 4월 1일에 서울대학교 대학원 약학과 생물화학 전공에 입학하여 1961년까지 소정(所定)의 학과목을 이수(履修)한 후, ‘한국 인진 성분과 그 유도체에 관한 생물화학적 연구’ 라는 논문으로 1967년 8월 30일에 학위를 받았다. 그는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학장 및 대한약학회장을 역임하였다.
신제 박사 2호는 이민화(李民和, 1959년 서울대 약대 졸업, 13회)로 그는 ‘제제의 효율에 관한 연구: Computer를 이용한 1차흡수소실 모델에서의 효율 및 흡수속도 계산’이라는 논문으로 1972년 8월 서울대학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서울대 약대 교수와 서울대 병원약제부장을 역임하였다.
캐나다 박사 (1971~)
캐나다에서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신선호(申善鎬, 1953년 서울대 서울분교에서 약대 입학, 1957년 3월 졸업, 11회)이고, 두 번째는 역시 서울약대 11회 졸업생인 김낙두(金洛斗)이다.
두 사람은 모두 Mannitoba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약리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았다. 신선호는 1971년 학위를 받은 뒤 Queen’s University 의대 교수로 재직하였고, 김낙두는 1972년 2월 ‘Digoxin의 강심작용과 세포 내 분포와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 해 12월에 서울대 약대 조교수로 임명 받았다. 그는 서울대 약대 학장 및 서울대병원 약제부장을 역임하였다.
2016-06-15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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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0> 한국인 약학박사 1호 (1)
일본 약학박사(1944~)
우리나라 사람으로 최초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경성약전 6회 졸업생(1936년 졸업)인 이남순(李南淳)이다. 그는 1936년 동경대학 의학부 약학과 선과(選科)에 진학하여 1944년 2월 5일에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 제목은 ‘개미산 아미드의 반응에 관하여’ 이었다. 이남순은 화평당 약방과 조선매약을 경영한 이동선(李東善)의 장남으로, 조선약학교 설립에 관여한 이응선(李應善)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는 뒤에 서울약대 교수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의 교수 및 초대학장을 역임하였다.
일본에서 두번째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 사람은 경성약전 11회 졸업생(1941년 3월 졸업)인 김영은(金泳垠)이다. 그는 금강제약 전용순(全用淳) 사장의 전적인 후원을 받아 1943년 동경제국대학 약학과 선과(選科)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보다 2년 전인 1941년에 김기우(金基禹)도 전용순의 후원으로 동경제대에 유학을 떠났다. 김기우는 경성약전 출신은 아니나 독학으로 조선약제사 시험에 합격(1930)하여 1931년에 면허를 받은 바 있다.
두 사람은 일제의 전쟁으로 인하여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였는데, 김영은은 광복 후인 195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여 1959년 5월 ‘표지 타액선 홀몬의 연구: 랫트의 여러 조직 호모지네이트에 의한 요드 표지 파로틴의 분해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음으로써 광복 후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김영은은 뒤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교수(생화학)와 학장 및 한국생화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김기우는 1950년에 사립 서울약학대학의 학장서리를 역임하였다.
프랑스 약학박사(1953~)
프랑스에서 최초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 사람은 함복순(咸福順)이다. 그는 동경여자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1953년 파리(솔본느) 대학교로부터 약학박사 학위를, 1962년 동 대학교로부터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63년~1964년에 서울대 약대 교수를 역임한 후, 미국으로 건너 가 뉴욕대학 및 컬럼비아 대학의 생물화학 연구원을 거쳐, 1969년~1985년 Columnus 병원에서 임상화학 연구원으로 정년퇴직 하였다. 그의 약학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Cis-pinone 산 및 그 ester와 그의 유도체의 열분해에 관한 연구’이었다.
국내 약학박사(1962~)
국내에서 최초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경성약전 7회 졸업생(1937년 졸업)으로 당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이던 홍문화(洪文和)이다. 그는 1962년 2월에 구제(舊制) 박사학위 제도에 의해 서울대학교로부터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구제(舊制)박사란 ‘논문박사’라고도 하여 학점을 취득하는 과정 없이 논문만으로 받는 학위를 의미한다. 그의 논문 제목은 ‘분말성 약품의 입자도 측정에 관한 연구’이었다.
이 학위는 1952년 4월 26일 서울대학교가 전쟁 중에 거행된 제6회 졸업식에서 6명에게 최초로 박사 학위(문학2, 의학1, 공학3)를 수여한지 10년만에 약학자에게 수여한 것이었다. 그는 1955년 미국 파이퍼 약학교육재단의 연구비를 받고 미국 퍼듀(Purdue) 대학에 가서 1년간 마틴 (Martin) 교수의 지도로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바 있다. 그는 1966년에 국립보건원장에 취임하여 3년간 봉직한 후 1970년~1981년까지 생약연구소 교수로 근무하였다.
1963년 2월에 한구동(韓龜東, 조선약학교 본과 7회, 1930년 졸업)과 우린근(禹麟根, 경성약전 7회, 1937년 졸업) 교수가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서울대학교로부터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구동의 논문 제목은 ‘Acerginnala Max에서 분리한 신 Tannin Polygagallin의 화학구조’이었고, 우린근의 논문 제목은 ‘Acertannin’의 화학구조’이었다. 한구동은 국립 서울대 약대의 초대 학장, 생약연구소장 및 대한약사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우린근은 서울대 생약연구소장과 서울대 약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2016-06-0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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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9> 내가 보는 훌륭한 사람들
세상에 훌륭한 사람들이 더 많을까? 아니면 나쁜 사람들이 더 많을까? 이런 저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생기는 의문이다.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우선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위인전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시선(視線)을 교회 안으로 돌리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받아들인 고 손양원 목사님과, 조선에 와서 죽임을 당하거나 병들어 죽은 수많은 미국 선교사님들 같은 분들이 떠 오른다. 이런 분들은 사실 나 같은 사람이 함부로 그 성함을 입에 올리기도 송구스러운 훌륭한 분들이다.
이런 분들은 매우 고명한 분들이지만 내가 직접 그분들의 훌륭하심을 목격하지는 못한 분들이다. 반면에 이분들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런 분들 못지 않게 훌륭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많은 걸 요즘 깨닫고 있다.
오래 전, 당시 55세의 나이로 고등학교 교사직을 내려 놓고 부부 동반하여 선교사로 떠나셨던 분이 있었다. 선교지인 아프리카로 떠난 지 1년 뒤 무슨 일 때문에 일시 귀국한 그 분을 만났더니, ‘그 곳이 너무 덥고 힘들어 솔직히 다시 가기 싫지만, 사명감 때문에 다시 돌아간다’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그 때까지 나는 선교사들은 그런데 가서 선교하기를 좋아하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었다.
2년전 캄보디아에 아웃리치를 갔을 때 만난 60대 후반의 선교사 부부도 감동이었다. 선교 자체 보다, 훨씬 젊은 선배 선교사의 지휘에 따르는 모습이 내겐 더 감동이었다. 한 때 괄괄했던 성격을 다 죽이고 어린 선배의 지시를 섬기기가 어찌 쉬웠겠는가? 어쩌면 하나님 섬기기보다 젊은 선배 선교사 섬기기가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내와 함께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같은 교회의 식구 10여명과 함께 모여 소규모 예배를 드린다. 우선 7시에 모여 근처 식당에서 가벼운 식사를 한 다음, 미리 정해 둔 장소로 가서 성경 말씀을 읽고 이를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11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이 예배를 순예배 (筍禮拜)라고 부른다.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식구(食口)라고 정의한다면, 이들이야말로 나의 가장 가까운 식구들이다. 이들보다 더 자주 만나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은 가족 둥에서도 아내 밖에 없으니 말이다. 나는 이처럼 많은 식구들과 매주 모여 밥을 같이 먹는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낀다.
이 순예배 식구들 중에 정말로 보석처럼 빛나는 훌륭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금년 1월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주 토요일에 2시간씩 예배당 청소를 솔선 수범하는 60세의 김집사님, 그리고 연하(年下)인 그를 모시고(?) 열심히 걸레질을 하시는 70대 집사님 내외분, 그리고 주일 예배를 위한 성찬(聖餐) 준비 등 각종 봉사에 적극 협력하는 우리 순 식구들이 모두 보석처럼 빛나는 훌륭한 분들이시다.
봉사란 찡그리며 해도 훌륭한 일인데, 이 분들은 모두 ‘하나님 일은 뺏어서라도 해야 한다’며 늘 싱글벙글하신다. 이처럼 우리 순 식구들이 진정으로 ‘한 식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장님의 섬기는 리더십과 순 구성원들의 겸손한 팔로워십(followership) 덕분이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최근에 우리 순(筍)에 한 초심자가 새로 배정되었다. 그는 낯가림을 좀 하는 편인데 그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하여 한 유명한 음악가 부부가 순예배 때마다 초심자와 자리를 함께 해주고 있다.
그는 그 초심자가 매주 별도로 교육받는 15주간의 성경 공부 시간에도 합석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귀한 영혼 구원이라고 하지만, 한 초심자의 영혼을 위해 매주 이틀씩이나 시간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생각할수록 감동 또 감동이다.
이런 분들의 섬김은 교회의 잡음을 잠잠케 하고, 교회로 하여금 세상의 비난을 이기고 세상에 선(善)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만든다.
인생 후반에 이처럼 훌륭한 분들과 한 식구가 되어 교제하며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크나큰 축복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2016-05-1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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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8> 가정(家庭) 붕괴의 공포
가정이 붕괴되는 소리가 요란하다. 우선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평균 만 68세인 나의 대학 동기 남자 8가정의 총 15명의 아이들 중 40%(6명 : 남3, 여3)가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의 우리나라 인구 천명당 혼인건수는 지난 45년 동안 가장 낮은 6명이었다고 한다.
직장이 없어 결혼을 못해요: 2012년 OECD국가의 15-29세 청춘 남녀의 평균 고용율은 60%이었고, 우리나라가 40%이었다. 우리나라 청춘 남녀의 60%가 백수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고용된 40% 중 정규직은 그나마 절반 이하이었다고 한다.
취직을 하지 못한 사람은 경제 현실상 결혼을 하기 어렵다. 일본의 경우, 정규직 청춘 남녀의 결혼율은 55%가 넘지만, 비정규직 남녀는 3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남자만의 결혼율을 비교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낮은 고용율이 낮은 결혼율의 주된 원인인 것이다.
결혼하기 싫어요: 그런데 경제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데도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특히 여성이 그렇다. 지난해 지속가능연구소가 전국대학생에 대하여 실시한 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대생의 절반 가량은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고 한다.
또 통계청 사회조사에서도 “결혼을 해야 한다”고 답한 여성이 52.3%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누구나 반드시 결혼을 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절반의 여성이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좋은 직장에 다니는 여성일수록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그들은 지금이 딱 좋은데 골치 아픈 결혼을 왜 하냐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시부모 관계, 출산, 육아는 그냥 골치 아픈 일인가 보다.
여성의 학력과 결혼율은 반비례?: 우리나라 여성의 경우, 학력이 높을수록 결혼율이 낮다고 한다. 즉 고졸 여성의 결혼율을 1로 보았을 때 중졸 이하 여성의 결혼율은 1.61인 반면 대졸 이상 여성의 결혼율은 0.69에 불과하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그 차이가 더 커서 중졸 이하는 1.97, 대졸 이상은 0.59라고 한다. 여성의 학력이 높아질수록 결혼율이 낮아지는 것은, 여성들이 자기보다 동등 이상의 명문 대학 출신, 또는 더 공부를 많이 한 남자를 신랑으로 선택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미 우리나라 여학생의 대학진학률은 남자를 능가하고 있다. 예컨대 2014년의 경우 여학생의 진학률은 74.6%로 남학생의 67.4%보다 훨씬 높았다. 이에 따라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고학력 신랑감의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이것이 여성이 결혼을 결심하기 쉽지 않게 만든 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출산(出産)의 문제: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체출산율은 지속적으로 낮아져 2014년에는 1.21명(1983년, 2.1명)까지 낮아졌다고 한다. 또 2014년 우리나라 초혼자(初婚者)의 평균 연령은 남성이 32.4세, 여성이 29.8세로 10여년 전에 비해 남녀 모두 두 살 가량 많아졌다고 한다.
이렇게 만혼이 증가하면 여성의 30대 이후의 출산, 즉 노산(老産)이 늘어나 추가적인 출산 여지가 감소하게 된다. 아이들이 뛰노는 가정을 점점 보기 어렵게 된다는 말이다.
가정(家庭)의 붕괴는 국가 붕괴의 전조(前兆):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전통적인 개념의 가정은 사회와 국가 구성의 기본 단위이다. 그런데 그 기본단위가 머지않아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결혼율과 출산율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가정은 특권층이나 누리는 사치품이 되고, “여보, 당신”, “엄마, 아빠” “형, 동생, 오빠” 같은 호칭은 극소수가 사용하는 낯 설은 말이 될 지도 모르겠다.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지도자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무섭다. 가정을 살리자. 나라를 살리자!
2016-05-0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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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7> 민간요법 등을 바라보는 시각
TV 특히 케이블 방송을 보면, 산에서 나는 무슨 풀이나 버섯을 꾸준히 먹었더니 어떤 난치병이 감쪽같이 나았다는 민간요법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또 방송에는 잘 안 나오지만, 민간요법이 아닌 유전자치료, 줄기세포 치료, 면역요법 등 현대의약학의 모습을 띠고 있는 치료법으로 난치병을 고친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의약 전문가들은 이런 정보를 들으면 우선 그 정보를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주 오래 전에 민간요법으로 뇌암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난 적이 있었다. 이 기사를 보고 한 의사가 민간요법자에게 찾아가 환자가 뇌암 인지, 또 나중에 뇌암이 완치된 줄은 어떻게 판단했는지 물었다고 한다.
이에 민간요법자는 백약(百藥)을 써도 낫지 않던 두통이 자신의 요법으로 사라진 걸 보면 뇌암이 나은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한다. 이처럼 질병의 진단 및 완치 판정에 대한 근거(evidence)가 부족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의약 전문가의 두 번째 반응은, 설사 그 요법이 특정 환자에게 유효하였다 하더라도, 그 사례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일반화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과학의 기본인 재현성(再現性)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질병에 대하여 사람들이 믿기 힘든 요법에 귀를 기울이는 현상은 그 병에 대하여 현대의약학이 마땅한 치료법을 제시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약학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반성부터 하여야 할 것이다. 병원에서 제공하는 치료만 받으면 반드시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면 어느 암환자가 근거 없는 치료법에 미혹 당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요법을 환자에게 권유하는 것은 범죄 행위가 될 공산이 크다는 사실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미확립 요법을 시행하는 동안 환자가 더 좋은, 잘 확립된 치료를 받을 기회를 놓친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미확립 요법을 시행하는 동안, 나을 수 있었던 병을 불치의 병으로 키우는 결과가 된다면 이보다 더 나쁜 범죄 행위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환자를 상대로 폭리를 취하려는 것이 동기이었다면 그 죄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22년전 직장암 3기 수술을 받았을 때 아내의 정성어린 간호 덕택에 나는 지금껏 좋은 결과를 누리고 있다. 아내는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에서 암환자를 만나면 ‘무엇은 먹지 마라, 무엇은 먹으라’며 정성을 다하여 조언을 한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런 조언을 거의 하지 않는다. 나의 케이스를 섣불리 일반화할 수 없으며, 나의 조언으로 오히려 환자의 병원 치료가 방해를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최근 가까운 사람이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본인과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일본에 가서 중입자 치료를 포함한 최신 치료를 받아 보면 어떻겠느냐는 의견 등의 정보와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당연히 큰 관심을 보인 환자와 달리, 주변에 있는 상당수의 의료진은 반대 내지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직 그런 방법들이 유효하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란다.
이는 실력과 양심을 갖춘 의료진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겠지만, 암 전문의도 막상 자신이 암에 걸리자 민간요법을 사용해 보게 되더라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그러니까 비전문가인 암환자가 새로운 요법에 미혹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거 없는 요법에 휘둘리다가 적절한 치료 기회를 잃는 우(愚)를 범해서도 안되겠지만, 교과서적 논리에 함몰되어 새로운 치료 정보에 스스로 귀를 막는 교만한 사람이 되어 서도 안될 일이다. 생명의 신비는 우리의 논리, 과학의 이해 범위를 뛰어넘어 오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근거 없는 믿음을 하나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왜 암에 걸리는지 잘 모르는 것처럼, 왠지도 모르게 암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치료 기전을 밝혀 보편적인 치료 방법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의약학자들의 몫이다.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병이 낫는 것이다. 그리고 나으면 낫는 것이다!
2016-04-2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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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6> 안전성 신뢰 획득이 우리나라 경제의 활로(活路)?
옛날에 일본 가전제품(家電製品)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신뢰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당시 일제(日製) 소니 티브이는 최고급 티브이의 대명사였다. 어느 해인가는 일본에 여행간 아주머니들이 줄지어 코끼리표 밥솥을 사 들고 오는 모습이 고발성 기사로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그런데 벌써 오래 전부터 해외 시장에서 한국산 티브이가 소니를 능가하는 가격에 팔리고 있다. 일부 한국 사람들은 이것이 정말일까 의아해 한다. 너무 오랫동안 일제를 신앙처럼 신뢰해 왔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어떤 제품이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도 어렵지만, 대신에 한번 신뢰를 얻으면 매우 오랫동안 소비자의 뇌리에 남는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최근 독일 자동차가 연비(燃比)를 속였다는 뉴스를 듣고도 ‘독일 자동차 회사가 정말 그랬을까?’ 하며 여전히 독일차에게 신뢰를 보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얼마 전에 일간지를 보니, 생리대와 분유(粉乳)처럼 안전성이 우선시되는 제품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취지의 글이 있었다. 중국 제품에 대한 신뢰가 낮다 보니 중국인들이 이들 제품을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구입하는 현상을 보고 내린 전망이었다. 중국 시장의 거대함을 생각할 때 대번에 공감이 가는 기사였다.
이 기사는 흔히 첨단 과학기술 제품의 개발과 수출만이 나라 경제를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 사람들은 안전성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소득의 상승속도보다 안전에 대한 소비자의 기대치 상승속도가 더 빠르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지구촌 사람들이 한국의 식품(특히 어린이 식품), 의약품 및 위생용품의 안전성을 무조건 믿게 되는 날, 이들은 더욱 더 한국 제품을 구입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될 것이다. 해외 시장에서 가짜(짝퉁)와 저품질 제품이 범람하면 할수록 이와 같은 현상은 심화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신뢰가 곧 ‘돈’임을 철저히 깨닫고 모든 상품을 정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품질은 정직함만으로 얻어지지는 않는다. 정직과 함께 기술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기술이란 제조하는 기술은 물론, 만의 하나라도 불량품이 만들어질 수 없는 품질관리 기술을 말한다.
그러므로 식약처를 비롯한 정부는 안전성이 중시되는 제품들(생리대, 기저귀, 마스크, 화장지, 유아용품, 식품, 건강기능식품, 유아용 식품 등)에 대해서는 단 한 건의 불량제품도 국내에서 제조 유통될 수 없음을 보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기술이다. 그냥 “한국 제품 믿어 주세요”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한국 제품은 믿을 수 밖에 없는 완벽한 관리 시스템을 통하여 제조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는 간단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첨단 기술 제품을 개발하는 것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소요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한국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믿음이 확립되면, 과거에 우리가 일제 전자제품이나 독일제 자동차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세계의 사람들은 모든 한국 제품의 품질을 신앙처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날이 올 것이다. 비용과 시간을 투입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만 되면 이들 제품의 중국 등지로의 수출은 첨단 기술 제품 이상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제약회사도 신약개발에 여전히 힘을 쏟아야 되겠지만, 기존 의약품의 품질에 대해서도 모든 국민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계속하여야 한다. 아직도 일부 국민들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국산약이 소위 미제 약이나 일제 약보다 품질이 좀 떨어지지 않나 의심한다.
신뢰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제약업계가 배전의 노력으로 품질 보증 시스템을 가동시킨다면 우리나라 의약품은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인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에라도 미꾸라지 한 마리가 호숫물 전체를 흙탕물로 만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다시 한번 챙기고 정비해야 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국산 의약품 파이팅!!
2016-04-0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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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5> 6년제 약대 신입생들의 호흡
지난 3월 2일 서울대 약대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우리나라 근대 약학교육의 역사, 맞춤약학의 동향 등을 소개하고 뒤이어 정직, 감사, 겸손, 성실하게, 그리고 긴 호흡으로 인생을 살라는 잔소리를 추가하였다. 오늘은 ‘긴 호흡’에 대하여 부연 설명하기로 한다.
나는 1971년에 약대를 졸업하고 그 해 6월에 입대하여 1974년에 육군사병으로 제대하였다. 군대에서 34개월이라는 ‘세월’을 흘려 보냈다. 제대 후 영진약품에 입사하였는데 회사는 나에게 연구과를 맡겼다.
어느 날 회사로부터 어린이용 생약 시럽제를 만들어 보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시행착오 끝에 외관상 제법 그럴듯한 시럽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럽제가 과연 제대로 만들어진 것인지, 또 선진국의 제약회사도 나처럼 주물럭 주물럭 해서 시럽제를 만들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제대로 약을 만드는 이론과 기술을 공부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본시 촌놈인 나는 유학을 어떻게 가는 것인지 알지 못 하였다. 아는 사람 중에 유학을 떠난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77년에 대학 동기인 C군이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 이거다’ 싶어 C군에게 길을 물어 보았더니, 우선 서울대학교의 정식 조교 발령을 받은 다음 문부성 장학생 선발 시험에 붙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 조교 발령을 받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이었다. 차라리 교수되는 것이 더 쉽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었다. 나는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대 약대 약품분석실에 들어 갔다. 당시 분석실에는 매우 똑똑한 후배가 방장(房長) 노릇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1년여 무보수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한 끝에 드디어 조교 발령을 받았다. 조교가 되자마자 문부성 장학생 시험 준비에 착수 하였다. 맹렬한 공부 끝에 마침내 그 해 중에 수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드디어 1979년 4월 9일 아내 및 두 아들과 함께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 때 내 나이가 무려(?) 32살 이었다.
내가 일본에 간지 2년 후, 유한양행에 다니던 대학동기 Y군도 같은 방법으로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내가 유학을 떠난 32살도 C군에 비해 2년이나 늦어 마음이 초조하였는데, Y군은 나보다도 2년이나 더 먹은 34살에 유학을 가다니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한 참 지나고 보니 C나 나나 Y나 다 같이 교수 노릇을 하며 늙어가기는 마찬가지이었다. 유학을 떠나던 당시에는 엄청난 차이로 느껴졌던 30살, 32살, 34살이 실은 다 그게 그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조금 긴 시간 스케일로 볼 필요가 있구나 깨닫게 되었다.
6년제 하에서 약대에 들어 온 신입생의 50%는 2년 이상, 나머지 50%는 3년 이상 다른 학과에서 공부를 마친 학생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약대생들은 자신들의 나이가 제법 많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문득 내가 대학에 다니던 때에, 군대 갔다 온 남자 복학생들이 강의실 뒷자리에서 인생의 원로(元老)라도 되는 양 점잔을 떨던 모습이 떠 올랐다.
그래서 그날 나는 신입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여러분들이 다른 학과 학생들보다 몇 살 더 먹은 것은 인생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자신을 다 늙은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초조해 하지 말고 긴 호흡으로 공부하라, 인생에서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고 한다. 그러니 가능하면 대학원에 진학해서 더 깊이 공부하라, 젊었을 때 공부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보지 못 하였다. 지금 우리나라 제약업계는 신약개발이라는 밀물을 맞고 있다. 바로 이 시기에 여러분들의 헌신을 통하여 우리나라가 신약개발 강국의 꿈을 이루길 기원한다’
그러나 신입생들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그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잔소리를 내가 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들을 사랑하는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으면 다행이겠다.
2016-03-2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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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4> 쏘오데스까?와 소통(疏通)
우리 모두는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권력자와 국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노인과 젊은이,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를 비롯한 모든 갑(甲)과 을(乙) 사이에 소통이 잘 되면 오해가 풀리고 서로 이해하게 되며, 마침내 세상의 많은 갈등이 풀리게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소통이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소통의 첫 단계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傾聽)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딴 생각 또는 내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에 남의 말이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속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진다.
우리 손녀는 어쩌다 내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들면 “할아버지 나 그거 벌써 알고 있거든” 하며 내 말을 자른다. 나는 민망해져서 “어떻게 알았어?” 물으면, 책에서 봐서 다 알고 있단다. 이렇게 되면 나는 설명을 계속할 수 없다.
이 경우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손녀와의 대화이니까 괜찮지만, 만약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둘 사이에 소통은 첫 걸음도 떼기 어려울 것이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소통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문제는 경청하는 실제 기술(技術)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일본인의 대화법이 머리에 떠 오른다. 일본 사람은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면 설사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연신 쏘오데스까? (그렇습니까?)와 혼또데스까? (정말입니까?)를 반복해 준다.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창(唱)이나 마당극에서 얼쑤! 하며 추임새를 넣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맞장구를 쳐 주면 말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내 말을 경청하는구나 생각하고 신이 나서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 놓게 된다. 상담전문가에 의하면 사람은 속 마음을 대화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말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화 초장(初場)에 경청해 주지 않으면, 상대방이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단계로 까지 대화가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혹시 일본 사람들의 맞장구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단지 습관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무라이 문화가 빚은 ‘남에 대한 공포감’에서 비롯된 반응일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사무라이가 말씀하시는데 감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자초(自招)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일본인들은 상대방의 말씀 사이사이에 그렇습니까? 정말입니까?를 반복함으로써 ‘어르신 말씀을 계속 잘 듣고 있으니 계속하시옵소서’ 하는 의미로 이런 추임새를 넣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는 ‘쏘오데스까’는 우리 창에서의 신명나는 추임새와 달리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아부(阿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는 사무라이가 없었기 때문에 남, 특히 약자(弱者=乙)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갑은 을의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시간 낭비일 수도 있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경청을 위하여, 그리고 소통을 위하여 우리도 일본인처럼 맞장구를 치거나 우리 고유의 추임새를 장려하는 운동을 펴보기를 제안한다. 당장에 진심으로 맞장구를 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므로, 우선은 기계적 또는 반사적으로 맞장구 치기 운동을 펴 보는 것은 어떨까? 교회의 상담 전문가는 ‘상대방의 말을 고대로 따라 하기’를 제안한다.
예컨대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엄마 나 오늘 선생님이 혼내서 기분 나빴어”라고 하면, 엄마는 일체의 다른 소리를 하지 말고 “오늘 선생님이 혼내서 기분이 나빴구나”라고만 하라는 것이다. “니가 뭘 잘못했길래 혼을 내셨겠지!”라고 말하고 싶더라도 꾹 참고 아이의 말을 그대로 반복해 주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도 그냥 일본 사람처럼 ‘그렇습니까? 그래요? 정말이요?’를 사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삼일절 아침에 일본인 흉내를 내자는 주장이 좀 거시기(?) 하지만 누구 말마따나 배울 건 배워야지 어떠하겠는가? 참고로 나는 아침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이 글을 쓴다.
2016-03-0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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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3> 은칠기삼(恩七技三)
사람들은 성공의 요인으로 운칠기삼(運七技三)을 꼽는다. 성공의 7할은 운(運) 때문이고, 기술(실력 또는 재주)의 기여도는 3할을 넘지 못한다는 생각의 표현이다.
사실 나름대로 성실히 사는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내 친구 한 사람은 두 번이나 가게가 수용(收用)을 당하면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직도 어렵게 살고 있다. 또 어떤 통닭집은 조류 독감이 유행해 문을 닫게 되고, 어떤 구멍가게는 불쑥 옆에 들어 온 대규모 마트 때문에 타격을 입는다. 이처럼 세상에는 운이 없어서 인생이 풀리지 않고, 그래서 억울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로 많다. ‘운칠기삼’이 4자성어로 자리를 잡은 배경일 것이다.
약국의 성패에 있어서도 제일 중요한 건 길새(약국의 위치)라고 한다. 약사의 실력은 그 다음이란다. 화투에서도 손에 쥔 패가 좋은데 지는 사람이 있고, 쥔 패가 나쁜데 뒷장이 잘 붙어 승리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결혼을 하고도 파탄을 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미약하게 시작을 하였지만 창대(昌大)한 결말을 맺기도 한다.
화투에서 뒷장이 잘 붙는 사람, 또 인생이 순조롭게 잘 풀리는 사람을 재수가 좋은 사람, 또는 운(運)이 좋은 사람이라 부른다. 아무래도 화투나 인생은 운(運)이 좋아야(또는 재수가 있어야) 성공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신약개발도 운이 따라야 성공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운이 왜 따르는지를 미리 알지 못한다.
한편 크리스찬들은 운(運)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恩惠)’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은혜로 받았으니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린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찬에게는 운칠기삼이 아니라 은칠기삼(恩七技三)이 더 타당한 말일 것이다. 다만 언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은혜가 왜 임하는지는 크리스찬도 그 비밀을 미리 알지 못한다.
나는 결혼식 주례사에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결혼은 마치 신랑 신부 두 사람이 조그만 나룻배를 저어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와 같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은 합심해 목적지 항구 방향으로 노를 저어야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아무리 합심해 노를 저어도 도중에 태풍을 만나면 배가 뒤집힐 수 있다.
그러므로 항해 중에 순풍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순풍은 두 사람의 능력이나 기술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은혜의 시(時)와 양(量)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비밀’이므로,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성실하게 노를 저으며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일뿐이다. 그야말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두 사람의 인생 항로에 하나님의 축복, 즉 순풍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한다.’ 라고 말한다.
크리스찬은 내 노력으로 받지 않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 즉 은혜라고 믿는다. 나의 성공은 물론, 때때로 자랑하는 외모, 두뇌, 성격, 재산, 배우자, 친구, 출세, 건강 등의 모든 것이 내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은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저절로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믿음이 좋은 크리스찬일수록 범사(凡事)에 미리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을 운이나 요행(僥倖)의 결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 은혜의 결과로 받아 들인다. 또 내 기술(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만에 빠지지 않고 범사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 된다. 사람이 최선을 다 해도 실패할 수 있다는 은혜의 비밀, 즉 은칠기삼(恩七技三)의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만큼 이루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고 함부로 비웃지 않는다. 마침내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다.
새해에도 여전히 지구 도처가 전쟁과 증오로 넘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 마음에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감사의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여야 한다. 그것만이 인류의 평화를 회복하는 근본적인 길일 것이다.
2016-02-2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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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2> 약학진사(藥學進士) 학위는 누구의 아이디어?
하기(夏期)약학강습회가 개최되기 4년 전인 1910년에 이미 대한제국은 근대적인 약학교육을 실시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즉 1910년 2월 7일에 공포된 ‘대한의원부속의학교규칙(내부령 제5호, 관보 제4596호)’에 따르면, 1910년 대한의원부속의학교 내에 정원 10명의 3년제 약학과를 설치하여 근대 약학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학비는 전액 관비(官費)로 지급하고 졸업 시에는 약학진사 칭호를 수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무산(霧散)되었다.
1914년의 하기 강습회는 한국인 이석모(李碩模)에 의해 추진되었지만, 정식 약학 교육 기관인 1915년의 조선약학강습소와 1918년의 조선약학교의 개교에는 모두 일본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한일 강제병합 전인 대한제국 시절에 이와 같은 관립(官立) 약학과 설립 계획이 있었던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일본인 고지마 다까사또(兒島高里)가 조선약학교의 초대 교장인 조중응의 작고를 애도하는 조사(弔辭)가 매일신보(1919년 8월 27일자)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기사를 읽고 대한제국 시절의 약학과(내부령 제5호)도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고지마의 아이디어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지마는 1859년 일본 출생, 1892년 동경제국대학 약학과 졸업, 1908년 대한의원 약제관 초빙을 받은 후 조선총독부 등 근무, 하기강습회 강사 역임 후 1919년부터 5년간 조중응의 뒤를 이어 조선약학교의 2대 교장을 지낸 사람이다. 조사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약학계의 큰 은인(恩人)인 조중응 자작이 흉거(凶去)하였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무어라 할 말을 모르겠다. 이제 겨우 서광(曙光)이 비치는 듯하던 조선의 약학계가 이와 같은 큰 은인을 잃은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다.
13년 전 구한국 정부의 내정이 개혁되어 대관원(大觀院) 안에 병원의학부(病院醫學部)가 생길 때에, 약학에 대해서는 아무 계획이 없는 것이 매우 섭섭하여 내부대신 등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보았으나 약학부를 신설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농상공부대신이던 조중응에게 의논하였더니 그는 내 의견에 적극 동조하여 급히 조의(朝議)를 열어 약학부도 신설하게 조치하였다. 그러나 2년 뒤 한일 병합에 의해 불행히 관제(官制)에 약학부가 없어지게 되었다.
나는 사립(私立)으로라도 약학을 장려하려고 결심하고 조 자작과 의논하였더니 흔쾌히 동의하고 노력해 주었다. 그 결과 소학교의 집을 빌려 야학(夜學)으로 조선약학강습소를 설립(1915년) 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조 자작은 약학교육 발전에 많은 힘을 썼다. 몇 년 후 약학강습소를 조선약학교로 이름을 고치고 (1918년), 훈련원(訓練院) 넓은 마당에 교사를 새로 짓고, 교육 내용을 충실하게 하였다. 학생수도 1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조 자작은 신병 때문에 사양하였지만, 나는 13년의 오랜 역사가 있는 약학계의 은인인 조 자작이 교장을 맡아야 한다고 적극 추천하였다. 작년 (1918년) 섣달에는 여러 번 병문안을 하고 약학계에 대하여 상의를 드렸으나 최근에는 일부러 위문을 하지 않고 속히 쾌차하기만을 기도하였다.
학교 교사의 신축이 완료되었을 때에도 자작이 나은 후에 성대한 개교식을 거행할 생각이었다. 또 혹시 흥분하면 병세에 좋지 않을까 염려되어 학교 신축에 대해서도 보고를 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운명을 하시고 보니 차라리 생전에 13년간이나 고심하신 결과를 보고 드려 기쁘게 해드릴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 자작의 장례를 학교장(學校葬)으로 모시고 싶으나 조선의 기둥 돌이 되시는 분의 일이라 경솔하게 결정할 수 없다. 아무튼 가장 좋은 방법으로 자작을 조상(弔喪)하고, 또 그의 뜻을 이어 끝까지 약학을 발달시킬 결심이다.”
대한제국의 근대 약학 교육기관의 설립 시도가 한국인의 아이디어 이었기를 바라던 나는 적잖이 실망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먼저 깨달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6-02-11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