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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3> 은칠기삼(恩七技三)
사람들은 성공의 요인으로 운칠기삼(運七技三)을 꼽는다. 성공의 7할은 운(運) 때문이고, 기술(실력 또는 재주)의 기여도는 3할을 넘지 못한다는 생각의 표현이다.
사실 나름대로 성실히 사는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내 친구 한 사람은 두 번이나 가게가 수용(收用)을 당하면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직도 어렵게 살고 있다. 또 어떤 통닭집은 조류 독감이 유행해 문을 닫게 되고, 어떤 구멍가게는 불쑥 옆에 들어 온 대규모 마트 때문에 타격을 입는다. 이처럼 세상에는 운이 없어서 인생이 풀리지 않고, 그래서 억울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로 많다. ‘운칠기삼’이 4자성어로 자리를 잡은 배경일 것이다.
약국의 성패에 있어서도 제일 중요한 건 길새(약국의 위치)라고 한다. 약사의 실력은 그 다음이란다. 화투에서도 손에 쥔 패가 좋은데 지는 사람이 있고, 쥔 패가 나쁜데 뒷장이 잘 붙어 승리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결혼을 하고도 파탄을 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미약하게 시작을 하였지만 창대(昌大)한 결말을 맺기도 한다.
화투에서 뒷장이 잘 붙는 사람, 또 인생이 순조롭게 잘 풀리는 사람을 재수가 좋은 사람, 또는 운(運)이 좋은 사람이라 부른다. 아무래도 화투나 인생은 운(運)이 좋아야(또는 재수가 있어야) 성공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신약개발도 운이 따라야 성공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운이 왜 따르는지를 미리 알지 못한다.
한편 크리스찬들은 운(運)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恩惠)’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은혜로 받았으니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린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찬에게는 운칠기삼이 아니라 은칠기삼(恩七技三)이 더 타당한 말일 것이다. 다만 언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은혜가 왜 임하는지는 크리스찬도 그 비밀을 미리 알지 못한다.
나는 결혼식 주례사에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결혼은 마치 신랑 신부 두 사람이 조그만 나룻배를 저어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와 같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은 합심해 목적지 항구 방향으로 노를 저어야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아무리 합심해 노를 저어도 도중에 태풍을 만나면 배가 뒤집힐 수 있다.
그러므로 항해 중에 순풍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순풍은 두 사람의 능력이나 기술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은혜의 시(時)와 양(量)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비밀’이므로,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성실하게 노를 저으며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일뿐이다. 그야말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두 사람의 인생 항로에 하나님의 축복, 즉 순풍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한다.’ 라고 말한다.
크리스찬은 내 노력으로 받지 않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 즉 은혜라고 믿는다. 나의 성공은 물론, 때때로 자랑하는 외모, 두뇌, 성격, 재산, 배우자, 친구, 출세, 건강 등의 모든 것이 내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은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저절로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믿음이 좋은 크리스찬일수록 범사(凡事)에 미리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을 운이나 요행(僥倖)의 결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 은혜의 결과로 받아 들인다. 또 내 기술(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만에 빠지지 않고 범사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 된다. 사람이 최선을 다 해도 실패할 수 있다는 은혜의 비밀, 즉 은칠기삼(恩七技三)의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만큼 이루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고 함부로 비웃지 않는다. 마침내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다.
새해에도 여전히 지구 도처가 전쟁과 증오로 넘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 마음에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감사의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여야 한다. 그것만이 인류의 평화를 회복하는 근본적인 길일 것이다.
2016-02-2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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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2> 약학진사(藥學進士) 학위는 누구의 아이디어?
하기(夏期)약학강습회가 개최되기 4년 전인 1910년에 이미 대한제국은 근대적인 약학교육을 실시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즉 1910년 2월 7일에 공포된 ‘대한의원부속의학교규칙(내부령 제5호, 관보 제4596호)’에 따르면, 1910년 대한의원부속의학교 내에 정원 10명의 3년제 약학과를 설치하여 근대 약학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학비는 전액 관비(官費)로 지급하고 졸업 시에는 약학진사 칭호를 수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무산(霧散)되었다.
1914년의 하기 강습회는 한국인 이석모(李碩模)에 의해 추진되었지만, 정식 약학 교육 기관인 1915년의 조선약학강습소와 1918년의 조선약학교의 개교에는 모두 일본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한일 강제병합 전인 대한제국 시절에 이와 같은 관립(官立) 약학과 설립 계획이 있었던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일본인 고지마 다까사또(兒島高里)가 조선약학교의 초대 교장인 조중응의 작고를 애도하는 조사(弔辭)가 매일신보(1919년 8월 27일자)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기사를 읽고 대한제국 시절의 약학과(내부령 제5호)도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고지마의 아이디어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지마는 1859년 일본 출생, 1892년 동경제국대학 약학과 졸업, 1908년 대한의원 약제관 초빙을 받은 후 조선총독부 등 근무, 하기강습회 강사 역임 후 1919년부터 5년간 조중응의 뒤를 이어 조선약학교의 2대 교장을 지낸 사람이다. 조사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약학계의 큰 은인(恩人)인 조중응 자작이 흉거(凶去)하였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무어라 할 말을 모르겠다. 이제 겨우 서광(曙光)이 비치는 듯하던 조선의 약학계가 이와 같은 큰 은인을 잃은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다.
13년 전 구한국 정부의 내정이 개혁되어 대관원(大觀院) 안에 병원의학부(病院醫學部)가 생길 때에, 약학에 대해서는 아무 계획이 없는 것이 매우 섭섭하여 내부대신 등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보았으나 약학부를 신설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농상공부대신이던 조중응에게 의논하였더니 그는 내 의견에 적극 동조하여 급히 조의(朝議)를 열어 약학부도 신설하게 조치하였다. 그러나 2년 뒤 한일 병합에 의해 불행히 관제(官制)에 약학부가 없어지게 되었다.
나는 사립(私立)으로라도 약학을 장려하려고 결심하고 조 자작과 의논하였더니 흔쾌히 동의하고 노력해 주었다. 그 결과 소학교의 집을 빌려 야학(夜學)으로 조선약학강습소를 설립(1915년) 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조 자작은 약학교육 발전에 많은 힘을 썼다. 몇 년 후 약학강습소를 조선약학교로 이름을 고치고 (1918년), 훈련원(訓練院) 넓은 마당에 교사를 새로 짓고, 교육 내용을 충실하게 하였다. 학생수도 1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조 자작은 신병 때문에 사양하였지만, 나는 13년의 오랜 역사가 있는 약학계의 은인인 조 자작이 교장을 맡아야 한다고 적극 추천하였다. 작년 (1918년) 섣달에는 여러 번 병문안을 하고 약학계에 대하여 상의를 드렸으나 최근에는 일부러 위문을 하지 않고 속히 쾌차하기만을 기도하였다.
학교 교사의 신축이 완료되었을 때에도 자작이 나은 후에 성대한 개교식을 거행할 생각이었다. 또 혹시 흥분하면 병세에 좋지 않을까 염려되어 학교 신축에 대해서도 보고를 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운명을 하시고 보니 차라리 생전에 13년간이나 고심하신 결과를 보고 드려 기쁘게 해드릴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 자작의 장례를 학교장(學校葬)으로 모시고 싶으나 조선의 기둥 돌이 되시는 분의 일이라 경솔하게 결정할 수 없다. 아무튼 가장 좋은 방법으로 자작을 조상(弔喪)하고, 또 그의 뜻을 이어 끝까지 약학을 발달시킬 결심이다.”
대한제국의 근대 약학 교육기관의 설립 시도가 한국인의 아이디어 이었기를 바라던 나는 적잖이 실망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먼저 깨달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6-02-1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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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1> 시상식(施賞式)
작년 10월 및 11월에 대한약학회 및 FDC법제학회로부터 공로상패를 받았다. 퇴임 후의 상이라 민망함도 있었지만 아무튼 감사하게 잘 받았다. 그런데 상패에 쓰여 있는 글을 읽어 보니 초등학생의 우등상처럼 내용이 애매모호하고 정형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상(賞)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1990년도에 과학기술처에서 주는 ‘우수연구논문상’을 받은 일이 있다. 그 때 시상식장에 들어 갔더니, 주최측이 회의실 같은 곳에 수십 명의 수상자를 몇 줄로 도열시켜 놓고 “아무개 외 몇 명”이라고 이름을 부른 뒤 신속하게 상패를 나누어 주었다. 작은 쟁반처럼 생긴 알루미늄 상패에는 수상자(受賞者)의 이름보다 시상자(施賞者)의 이름이 더 크게 새겨져 있었다. 나누어주는 상패를 받은 나는 웬 일인지 그다지 영광스러운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2001년에도 모처에서 주는 상을 받으러 간 일이 있었다. 시상식이 시작되자 개회사와 명사들의 축사가 장시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작 수상자들에게 대한 시상 순서는 눈 깜박할 사이에 끝나 버렸다. 수상자들의 소감을 듣는 순서도 없었다. 시상식에 뒤이은 만찬에서도 나를 비롯한 수상자들은 시종 뻘쭘한 기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중에 깨닫고 보니 우리나라의 시상식은 대개 상을 주는 사람, 즉 시상자가 주인이고 수상자는 들러리인 경우가 허다(許多)하였다. 주객(主客)이 전도(主客顚倒)된 것이다. 주객전도의 정도는 보통 시상식장에 늘어선 화환의 개수에 비례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행사의 이름부터가 상을 받는 수상식(授賞式)이 아니고 상을 주는 시상식(施賞式)이다. 문득 어디선가 본듯한 글귀가 떠오른다. 원래 훈장이나 상패는 돈 안들이고 백성들을 감동시켜 다스리는 독재자의 수단이었다나?
그런데 2001년도 1월의 어느 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약국신문사 사장이라는 분이 내게 전화를 걸어, 내가 그 신문사에 의해 ‘2000년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어 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런 상 제도가 있는 줄도, 그리고 내가 그 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사장님은 곧장 직원 한 명과 함께 불쑥 내 연구실로 찾아와 상패를 전해 주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상패를 보니 이 상의 시상 날자는 2000년 12월 25일 즉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나중에 돌아보니 이 상에는 다른 상에는 없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우선, 화려한 시상식이 없었다. 신문사 사람 둘과 내가 내 연구실에서 만나 상패를 주고 받은 것이 전부였다. 화환도 박수치는 사람도 없었다. ‘약국신문사’가 이런 방식으로 상을 주는 이유는, 무엇보다 거창한 시상식을 개최할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일지 모른다.
둘째, 상패에 수상자의 공적이 200자 넘는 글자로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지금도 누가 내 공적을 조사해 썼는지 모른다. 다만 느낀 것은 시상자의 정성이다. 셋째, 상패에는 천연색 사진과 함께 내 이름이 큼직하게 인쇄되어 있었지만, 시상자의 이름은 아예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약국신문’이라는 로고만 겸손한 크기로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시상자의 고결한 인격이 느껴진다.
나는 학교를 퇴임할 때에 상당수의 상패를 처분하였다. 그러나 약국신문사의 이 상패만은 지금껏 식탁 위에 모셔놓고 때때로 감동하며 바라보곤 한다. 지금까지 내가 받은 여러 상 중 이 상이 가장 아름답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시상자가 수상자를 찾아와 상을 주고 가는 조촐함, 그래서 시상자가 아닌 수상자가 주인공이 되는 시상식, 상패에 수상자의 구체적 공적을 적는 정성, 무엇보다 시상자의 이름을 상패에 드러내지 않는 파격적인 겸손, 이런 특성을 갖고 있는 이 상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만약에 세상의 소위 높은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상을 줄 때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약국신문사의 이런 마음, 이런 태도를 본 받을 수만 있다면 세상은 한결 아름다워질 것이다. 어찌 상(賞)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랴.
2016-01-2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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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0> 약대 옛 교가(校歌)의 발견
‘서울대 약학역사관’의 장윤이 연구원은 최근 우연한 기회에 중고 서점에서, 1962년 2월 25일에 발간된 서울대약대 동창회 명부를 발견하여 1만원에 구입하였다. 이 책은 가로 15cm, 세로 21.3 cm, 총 84페이지의 작은 책자로 세로 쓰기, 왼쪽 넘겨보기로 제작된 책자이다.
아마도 이 책이 우리 나라 사람이 주축이 되어 발간한 최초의 서울약대 동창회 명부가 아닐까 한다. 이 명부에는 조선약학교, 경성약전, 사립서울약학대학 및 국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일본인 졸업생의 이름은 실려 있지 않다.
이 명부의 발간사는 당시의 한기엽(韓基燁) 동창회장이 썼고, 축사는 한구동 학장이 썼다. 이 책의 도입부에는 한기엽 회장, 한구동 학장 및 이호벽 전 회장의 사진이 실려 있으며, 구 교사(을지로 교사)와 함께 연건동 캠퍼스의 1호관(교수연구실동) 및 2호관(학생관)의 사진도 실려있다. 사진을 보면 당시 2호관은 마무리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62년 11월 준공)
한구동 학장은 축사를 통하여 ‘동창회가 약학대학의 연례 행사인 ‘전국남여중고등학교 연식 정구대회’를 후원해주어 감사하다’고 하였다. 당시 약대가 전국 규모의 연식 정구 대회를 매년 주최하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 대회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식 정구대회이었다고 한다.
약학대학의 옛 교가
이 책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이 책에 김광균(金光均) 작사, 김성태(金聖泰) 작곡의 ‘약학대학의 옛 교가’가 실려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여태껏 그런 교가가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 교가는 1945년의 광복 이후에서 1950년 서울대학교에 편입되기 전, 즉 사립 서울약학대학 시절 아니면, 사립약학대학이 1950년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된 이후 초기의 교가일 것이다.
그러나 사립 서울약학대학 시절이 여러 면에서 혼란스러웠던 사실을 생각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 교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진리의 횃불 두 손에 들고, 성동(城東)벌 고대(高台) 위에 모인 우리들, 배움의 길은 멀고 험하나, 희망에 가득 찬 깃빨 올리자, 희망에 가득 찬 깃빨 날리자.
2. 조국은 우리 것 힘을 합하여, 거치른 황토 밭에 씨를 뿌리자, 장차올 영광의 날 두 품에 안고, 하나의 이름없는 초석(礎石)이 되자.
3. 우리의 갈 길을 누가 막으랴, 장하다 약대(藥大) 500(五百)의 학도,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
가사만 보아도 약학도의 웅지(雄志)가 느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창회 명부에는 가사만 실려 있을 뿐 교가의 악보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의 기술상 악보를 인쇄하기 어려웠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악보를 찾아 이 고색창연한 교가를 다같이 합창해 보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저기를 뒤져보고 몇몇 선배님들께 문의도 드려보았지만 이 교가의 존재 사실조차 아는 분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약사공론에 이 악보를 찾는다는 광고 기사를 부탁 드렸다. 언젠가 악보가 발견될 날을 기대해 본다.
경성약학전문학교 교가
한편 사립 서울약학대학 이전의 경성약학전문학교 시절에도 일본어로 된 교가가 있었다.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산은 움직이지 않고, 한강의 물은 끊이지 않는다. 그 한양의 한 성지(聖地)에 약연(藥硏)의 빛을 우러러 모여든 우리들의 학사(學舍), 반도 문화의 진전에 큰 사명을 짊어지고 청춘에 타오르는 우리 학도들, 자강불식(自强不息)의 교풍 속에 부지런히 힘쓰는 모습 실로 씩씩하다. 아침 해에 비치는 남산의 짙은 녹음, 영구(永久)히 빛나는 우리들의 이상, 자 장래의 큰 희망에 끝없는 행복을 자랑하세.(이 번역은 약학역사관의 조누리 연구원의 초역을, 서울대 인문대학의 사이토 아유미 교수가 감수한 것이다)
아쉽게도 이 교가의 악보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새해에는 새로운 약학사 관련 자료가 더 많이 발굴되기를 기대하며, 근하신년(謹賀新年), 독자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 드린다.
2016-01-1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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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9> 아시아 약제학회(AFPS)
지난 11월 25일부터 27일까지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 AFPS(Asia Federation for Pharmaceutical Sciences)에 다녀 왔다. 요즘엔 외국에 오래 머무는 것이 싫어서 꼭 필요한 최소한의 기간만 있다가 돌아 오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AFPS는 ‘아시아 약학회’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참가자들이 주로 약제학 전공자들이라는 점에서 ‘아시아 약제학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AFPS는 2007년부터 2년마다 개최국을 바꾸어 가며 열리고 있는데, 재작년에는 우리나라 약제학회의 주최로 제주도에서 열린 바 있다. AFPS는 2002년 나와 일본의 스기야마 교수가 시작한 ‘한일(韓日) 약제학 심포지엄’이 기원이다.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 약제학회의 회장이었던 나와 스기야마 교수는, 각국의 약제학자 10명씩이 구두로 발표하는 심포지엄을 2년마다 열기로 합의하였다.
나는 이 합의를 이룬 것이 매우 기뻤다.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자부하며 미국이나 유럽하고만 심포지엄을 열어 왔던 콧대 높은 일본 약제학계가 마침내 우리나라 약제학의 수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고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회 심포지엄은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렸다. 우리 측은 최고 수준의 연자 10명을 선정하는 등 최선의 준비를 하였다. 그 결과 심포지엄은 대성공이었다. 즉 우리 측 연자들의 영어 수준도 매우 높았고 영어 발표도 훌륭하였다. 그 심포지엄은 결국 일본 학자들이 우리나라 약제학의 수준을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보이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연자 풀이 엄청나게 큰 일본과 달리 우리로서는 10명의 연자를 선정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연자 수 10명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연자 수의 상한선이었다. 내가 심포지엄을 매년이 아닌 2년마다 열자고 제안한 것은 이처럼 우리의 연자 동원 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교토에서 2004년에 열린 제2회 한일 약제학 심포지엄도 성공이었다. 1회 때와 마찬가지로 양국으로부터의 참가자 모두가 심포지엄의 내용과 진행에 만족하였다. 당시 식약청장으로 신분이 바뀌어 있던 나는 그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그 후 일본 호시(星)약과대학 학장을 역임한 나가이 교수(Nagai T)는 이 심포지엄을 범 아시아 차원으로 확장하자고 제안하였다. 우리나라 약제학회 임원들은 이 제안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였다. 모처럼 한일 간에 성사된 심포지엄의 수준이 낮아질뿐더러 한일 간의 유대도 느슨해질 우려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일 심포지엄의 한 상대방인 일본측의 대장 나가이 교수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데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시아약제학회(AFPS)는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태동되었다. 2007년의 일이다.
그 동안 AFPS 학회는 처음에 우려했던 대로 과학의 수준이 많이 낮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시아 학회라는 이름 때문에 아시아 각국에 연자를 안배할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일본과 한국 외에 약제학을 수준 높게 연구하는 아시아 나라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충 노는 기분으로 AFPS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나도 그 동안 반쯤은 그런 자세로 AFPS를 바라보곤 하였다.
이런 인식 하에 이번 학회에도 비교적 가벼운 기분으로 참석하여 26일 오후에 ‘나노 의약과 광조사 치료법’이라는 주제로 초청강연을 하였다. 그러나 이 가벼운 기분은 내가 다음 날 오전 중국 베이징 대학의 Zhang Qiang 교수와 태국 출라롱콘 대학의 Pithi Chanvorachote 부교수의 강연 좌장을 맡으면서 완벽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이 두 교수의 연구 수준이 놀랄 만큼 높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태국 교수는 겨우 35세의 약관(弱冠)이었다. 이에 나는 큰 충격을 받고 다소 자만에 빠져 있던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충격을 우리나라 약제학자들에게도 반드시 전달해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국제 학회에 참석하면 언제나 사전에 예기하지 못했던 자극을 받고 돌아오게 된다.
2015-12-3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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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8> 일본약사학회(日本藥史學會)
지난 11월 20일부터 23일까지 일본 나라(奈良)에서 열린 ‘일본약사(藥史)학회 2015년회’ 및 ‘일중한(日中韓) 국제약사(藥史)포럼’에 다녀 왔다. 이은방 명예교수님, 김진웅, 박정일 교수, 이봉진 학장 등은 하루 먼저 19일에 출발하였다.
나는 21일(토)에 열린 년회에서 ‘한국근대약학교육 백년의 역사’에 대해서 구두 강연을 하였고, 그날 오후 포럼에서 좌장을 맡았다. 일본에 의해 시작된 우리나라 근대 약학 교육의 역사를 일본인들 앞에서 발표하게 되어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박정일 교수는 ‘History of Ginseng Research’에 대하여 포스터 발표를 하였다.
21일에는 총 8개의 구두 발표가 있었는데, 모두 10분간 발표에 2분간의 토론시간이 주어졌다. 1980년 대에 일본 DDS학회에 참석하였을 때에도 구두 발표 시간이 총 12분이었다. 그만큼 일본 학회에서는 12분 발표가 보편화된 것 같았다. 백년의 역사를 설명해야 하는 나에게 10분은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발표자 모두는 시간을 엄수하였다.
뒤이어 열린 국제 포럼의 주제는 ‘글로벌 상품으로서의 조선인삼-일본, 중국, 조선에서의 역사-‘이었다. 나는 중국의 肖永芝(Xiao) 교수와 공동으로 좌장을 맡았는데, 사실 일본어로 보는 좌장은 처음이라 약간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20일, 김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 일본약사학회 츠타니 회장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하였다. ‘걱정하실 것 같아 좌장 시나리오를 적어 보내니 참고하시라’는 내용이었다.
시나리오를 살펴보니 좌장을 볼 때 그대로 읽으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좀 안심이 되었다. 간사이 공항에 도착 후 리무진 버스로 1시간여를 달려 ‘나라 호텔’에 도착하였다.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프린트 된 그 시나리오가 내 방에 들어와 있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일본 사람들의 섬세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였다. 덕분에 다음날 좌장 역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나라’는 옛날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 인삼에 관한 한중일 국제 포럼을 여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먼저 게이오(義塾) 대학의 다시로(田代 和生) 명예교수가 ‘일본 에도 시기의 조선인삼의 교역과 국산화’에 대하여 강연을 하였다.
두 번째로는 규슈 대학 인문학부에 유학중인 중국인 여학생 童德琴(Tong, Teqin)이 발표하였다. 그녀의 주제는 ‘명치 초기의 일본의 조선인삼 산업무역정책과 중국시장’이었다. 마지막 연자는 일본에서 태어나 현재 동경이과대학대학원 과학연구교육과의 신창건(愼蒼健) 교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인삼정책 - 전매정책, 무역정책, 유용식물 탐구’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신교수는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도 유창하게 하는, 활달하며 친근감이 가는 학자이었다.
포럼에서 나온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자면,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조선인삼의 인기가 매우 높아 인삼 1근에 요즘 돈으로 몇 천 만원이나 호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조선 인삼을 국산화(일본 국내 재배)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경주하였다.
조선으로부터 인삼 씨앗을 입수하여 여러 농가에서 시험 재배시키는 등의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인삼 재배에 성공하면서 일본은 일본 인삼을 청국으로 수출하게 되었다. 중국 학생의 발표에 의하면 청국이 수입한 인삼의 절반이 일본 인삼이었고, 나머지 절반이 미국 인삼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인삼의 원조인 조선인삼이 차지하는 비율은 수입량의 1% 정도로 매우 미미한 위치로 전락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매우 세밀한 부분에 까지 연구의 폭을 넓히고 있는 일본 약학사 학계의 연구 상황이 몹시 부러웠다.
22일(일)에는 학회 참석자들과 함께 ‘나라’현에 있는 각종 약 관련 박물관을 둘러 보았다. 간판이나 광고지 등 소소한 물건까지 수집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섬세함에 새삼스레 놀랐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우리나라 약학사 연구의 나아갈 바 등에 대하여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2015-12-1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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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7> ‘참 좋은 것 같아요’
오늘은 우리 말 중 좀 이상하고 거북하게 사용되고 있는 표현들을 다루고자 한다.
그런 표현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물건을 사고 계산대에 가서 값을 치르려고 하면 담당 직원이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 ‘계산을 해 보니 얼마입니다’가 아니라 ‘내가 계산하는 것을 도와주겠다?’ “십만 원 되시겠습니다”도 웃기는 표현이다.
학회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이 “지금부터 발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연자를 소개할 때 “아무개를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 ‘시작하겠습니다’와 “소개하겠습니다’가 바른 표현이라고 한다.
“아침식사 됩니다”와 “좋은 하루 되세요”도 좀 이상하다. 각각 ‘아침 식사 준비할 수 있습니다’와 ‘오늘 하루를 잘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뜻일 터인데 좀 더 나은 표현을 찾아 봐야 할 것이다.
유식한 사람들의 토론을 듣다 보면 ‘일정 정도 책임이 있다’라든지, ‘영향력은 제한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그냥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라든지,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하면 더 알기 쉬울 것이다. 최근 대화 중에 ‘나의 지인(知人)’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많은데, 과거에는 그냥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나는 ‘지인’보다는 ‘아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귀에 편하다.
자기의 재능을 ‘십분’ 활용한다는 표현이 있다. 내가 알기로 일본어에서는 ‘充分(충분)’을 간단하게 쓸 때 ‘十分(십분)’ 이라고 쓴다. 일본어에서는 充分의 발음이 十分과 똑같이 ‘쥬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充分’과 ‘十分’의 발음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충분’을 ‘십분’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십분’은 있을 수 없다. ‘충분’만이 옳은 표현이다.
사람 중에 말끝마다 ‘제가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또는 ‘맞는 부분입니다’ 식으로 ‘부분’이라는 표현을 오용 남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의미 전달상 적합하지 않은 ‘부분’에서 사용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또 ‘염두(念頭)하다’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염두에 두다’의 틀린 표현이다.
방송에 나와 인터뷰에 응하면서 “저는 그 때부터 굳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는 식으로 자신의 과거사를 현재형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사를 현재형으로 표현하면 신기하게도 그 사람이 마치 위인이나 영웅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과거사가 역사적인 일처럼 들리기도 한다. 위인전이나 영웅전 같은 전기에서 그런 현재형 표현을 많이 사용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현재형으로 말하는 것은 우선 문법적으로 틀렸고, 대부분의 경우 말하는 사람을 교만하게 보이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피해야 할 일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지만, ‘생각된다’와 ‘느껴진다’는 ‘생각한다’와 ‘느낀다’로 표현해야 맞다. 우리가 이처럼 수동태 표현을 남용하게 된 것은 십중팔구 일본어의 영향이다. 일본인은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다’고 능동태로 표현하는 것을 꺼린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이 ‘된다’고 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진다’고 책임 회피성 표현을 하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수동태로 표현하는 것이 예의였을 것이다.
“단풍 길을 걸으니 기분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처럼 ‘좋은 것 같아요’도 너무 오남용 되고 있는 비겁한 표현이다. “단풍 길을 걸으니 기분이 참 좋네요”하면 될 일인데, “정말 기분 좋은 것 맞나요?”라고 누가 추궁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책임을 회피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일본어의 영향일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느끼고, 이런 것이 좋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매우 비겁한 언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그만큼 험해졌음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평화를 바라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파리 테러의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바이다.
2015-12-0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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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6> 부패의 추억
약 한달 전, 우연한 기회에 1989년에 미국에서 우리 부부에게 세례를 주신 박창환 목사님이 서울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늘 존경해 마지않던 그분과 헤어진 지 무려 26년만의 일이었다. 그 분이 살고 계시다는 장신대 기숙사로 찾아 뵙고 보니 모든 것이 감격이었다.
우선 92세라는 연세에도 여전히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는 것이 놀라웠고, 아직도 일주일에 2-4시간씩 신학생들에게 히브리어와 헬라어 강의를 하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신학 교육이 부실한 남미에 가서 참된 신학교육을 시킬 계획이라는 사실이었다.
감격의 해후를 한 후 내 근황을 보고 드렸더니, “여기 저기 다니면서 특히 약사님들에게 강의를 하신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라고 하셨다. 나는 ‘정년 퇴임 후에도 할 일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라는 말씀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목사님은 곧 이어 내게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강의하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평소 정직을 강조하시던 목사님이지만 다시 한번 목사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은사이신 고 김신근 교수님이 한국동란 때 말단 부대의 약제장교로 근무하던 때의 일이란다. 하루는 상부에서 DDT 한 드럼통을 잘 받았다고 싸인 해서 올려 보내라는 서류가 한 장 도착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드럼통은 보이지 않았다. 위 부대에서 아래 부대로 내려 오는 도중에 여기 저기서 다 빼 돌렸기 때문이었단다.
내가 1971년 육군의 모 특과 학교에 입학한 날, 나와 함께 입학한 졸병 모두는 갖고 있던 돈 전부를 부대 간부에게 뺏겼다. 각자 돈을 소지하고 있으면 고참들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으니 안전하게 중대본부에 맡기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더니 매일 저녁 모두에게 빵을 한 개씩 나누어 주었다. 웬 호사인가 했더니 월말에 피교육생들의 봉급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우리가 받을 봉급에서 먹은 빵 값을 제하니 한 푼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또 희한하게도 그 학교는 피엑스에서 막걸리를 사 마신 사람은 그날 저녁 점호를 면제시켜 주었다. 저녁 점호는 당시의 일과 중 가장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술을 마신 졸병에게 내무반 침상에 누워서 점호를 면제받게 해 주다니, 세상에! 그러니 너도 나도 집으로 술 사 마실 돈을 부치라는 전보를 칠 수 밖에.
또 8-90년대만 하더라도 운전자는 지갑에 면허증과 함께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끼워 넣고 다녀야만 했었다. 교통경찰이 면허증 제시를 요구할 때 지갑을 건네주면 그 오천 원권을 꺼내 갖는 대신 위반 사실을 눈감아 주곤 하였기 때문이다. 교통 경찰을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한 채 살 수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돌아 보면 우리의 과거는 이처럼 온통 부패와 부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또 이런 세태는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개선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가? 이제는 교통경찰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또 동사무소나 구청의 민원 창구에도 과거에 만연했던 급행료가 없어지는 변화가 생겼다. 분명 군대도 지금은 엄청 달라졌을 것이다.
얼마 전 친구가 산행 중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단다. 119에 연락하니 10분도 안되어 대원이 출동하여 산중턱까지 들 것을 들고 와 병원으로 날라 주었다. 친구는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 10만원 정도의 사례비로 주려고 하였지만 119 대원은 끝내 그 사례비를 받지 않았단다. 나도 119에 대하여 이미 20여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바가 있다. 분명 119는 우리나라의 희망이다.
그러고 보면 서민들의 세계는 이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아진 것 같다. 문제는 고위층의 부정 부패는 오히려 더 은밀해지고 그 규모가 커진 느낌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고위층의 부정 부패까지 없앨 수 있을까? 분명 교통 경찰과 119 및 관공서의 성공 사례를 연구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고위층이 스스로 청렴결백 해 질 의지가 있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박 목사님의 말씀이 다시 그리워진다.
2015-11-1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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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5> 우리나라 근대약학교육의 공로자들
오늘은 100년전에 시작된 우리나라의 근대 약학교육이 오늘날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고비마다 큰 역할을 해 주신 공로자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최초의 근대 약학교육기관 설립을 주도한 선각자 이석모 선생
1914년 7월 17일, 우리나라 최초의 ‘약품취급하기 강습회(기간: 3개월)’가 개최되었다. 약업총합소의 이석모 소장(조선매약 사장)은 간사장이 되어 주도한 결과이었다. 1915년 6월 12일 이석모 등의 수고로 1년제의 ‘조선약학강습소’가 개교되었다.
이석모는 장진계(장진계; 현 을지로 입구인 구리개의 한약업자 100명이 만든 계) 멤버들과 함께 개교 비용을 부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친일파의 거두 조중응(한말 상공대신 및 법부대신 역임)을 움직여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내었다.
이 강습소는 1918년 5월 21일 2년제의 ‘조선약학교’ 발전되었고, 훗날 국립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으로 계승되었다. 이석모는 분명 약계의 선각자이었다.
2.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 운영권을 인수 받은 도봉섭 교수
도봉섭 교수는 1930년 동경제대의학부를 졸업하고 그 해에 조선약학교로부터 승격된 경성약전의 생약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20명의 경성약전의 교수 중 유일한 한국인 약학 전공 교수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광복이 되자 경성약전의 교장(타마무시)은 학교를 미군정에 넘기려고 하였다.
이에 도봉섭 교수 등은 교장과 일본인 이사진을 압박하여 경성약전의 운영권을 인수 받아 그 해 10월에 경성약전을 재개교(교장: 도봉섭, 이사장: 이동선) 하였다. 경성약전은 다음 해인 1946년 9월에 ‘(사립)서울약학대학’(학장: 도봉섭)으로 승격되었다가, 1950년 ‘국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으로 편입되었다. 만약 그 때 경성약전의 운영권을 인수받지 못했더라면 우리나라의 약학교육이 어찌 되었을까?
3. 6.25 동란 시 약학대학을 피난시킨 한구동 학장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한 후 9월에 정부는 경영이 부실한 (사립)서울약학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으로 편입시키고 초대 학장에 한구동 선생을 임명하였다. 한구동 학장은 1951년 1.4 후퇴를 맞아 학교를 피난시키는 일부터 할 수 밖에 없었다.
우선 학적부, 현미경, 천칭, 시약 및 문헌 등을 꼼꼼히 챙겨 가족과 함께 트럭에 실어 부산으로 보내고 남은 도서와 문헌은 을지로 교사의 도서실 천정에 깊이 감추었다. 그 후 정부의 명령에 따라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 해 12월 하순 인천에서 마지막 피난선(LST)을 타고 제주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의 침착한 피난 준비 때문에 전시 부산에서의 약학교육이 타 학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실하였다고 한다.
4. 부산 피난시절 교육 장소를 제공한 김근규 사장과 지달삼 사장
국립 서울약대가 부산으로 피난 갔을 때 당연히 교사가 없었다. 이에 1938년 동경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계림화학(제약회사)의 김근규 사장은 대청동의 사무실과 공장의 일부를 약대 사무실과 실험실로 제공하였다. 또 영도에 위치한 대한비타민 주식회사의 지달삼 사장도 목조 바라크 강의실 4개와 사무실 1개를 지을 수 있도록 공장 부지를 빌려 주었다.
그는 구마모토 약전 출신으로 성균관대 약대 지옥표 명예교수가 그의 아들이며, 1956년에 서울약대를 졸업(10회)하고 약정국장과 보건원장을 지낸 지달현 박사가 그의 동생이다. 이 두 사장의 배려가 없었다면 부산 피난 3년여간 약학교육은 맥을 잇지 못하였을지도 모르겠다.
5. 약학대학을 관악 캠퍼스로 이전시킨 김영은 학장
1975년 서울약대 김영은 학장은 약학대학을 연건동의 메디컬 캠퍼스에서 관악산에 위치한 서울대 종합 캠퍼스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울약대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으며, 다른 약학대학의 발전도 촉발하게 되었다.
끝으로 조선약학강습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학교육의 중요한 고비마다 탁월한 예지와 사명감 그리고 추진력으로 고귀한 역사를 써 오신 여러 선배님들의 공로에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2015-11-0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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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4> ‘빨리 빨리’와 ‘은근과 끈기’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빨리 빨리’로 규정짓는 사람들이 많다. 이 말은 상반된 이미지를 갖는다. 많은 부실 공사의 원인이 ‘빨리 빨리’에 있다고 할 때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정해진 기간 내에 공사를 완료할 수 있었던 것은 ‘빨리 빨리’ 정신 덕분이었다 라고 할 때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얼마 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실내 수영장 지붕 공사를 완료하지 못해서 배영 경기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배영은 지붕이 없으면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경기를 할 수 없는 종목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한 내에 지붕을 덮었을 것이다. 그리스 경제 위기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은근과 끈기’라고 규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예컨대 조선왕조 실록과 같은 기록은 은근과 끈기가 없으면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또 조선조에는 100여년에 걸쳐 조상의 복권을 상소한 기록도 눈에 띤다. 이에 비하면 아무래도 오늘날 우리들의 호흡은 옛날에 비하면 많이 짧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근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3명의 이름이 발표되었다. 그 상의 1/2 지분은 쑥으로부터 말라리아 치료제인 아르테미신(artemicin)을 개발한 중국의 투 교수가 받았고, 나머지 1/2은 사상충 구제약인 이베르멕틴(ivermectin)을 개발한 캠벨 교수와 일본의 오무라 사토시 명예교수가 나누어 받았다.
노벨 생리의학상은 한 학문 분야를 대상으로 한 상이 아니라 ‘생리 또는 의학 (Physiology or Medicine)’ 이라는 두 부문을 대상으로 한 상인데, 이번에는 첨단 생리학이 아닌 전통적인 약물 (메디신) 개발 분야에 시상한 것이 특징이다. 기초적인 학설보다 개발연구 업적에 대해 시상한 것이다. 이번처럼 수상자 전원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신약을 개발한 사례는 전례가 없었던 것 같다.
이번 생리의학상을 ‘과학 평화상’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 자체보다 과학의 결과물(신약)이 인류에 끼친 좋은 영향(질병의 치료 및 예방)에 대해 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한다면, 이번 생리의학상은 과학의 본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업적에 상을 준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만든 아르테미신은 정통 생약학적인 방법론에 따라, 그리고 이베르멕틴은 의약화학(medicinal chemistry)의 방법론에 따라 개발된 약이다. 또 수상자 중 투 교수는 베이징 의학원 약학과를 졸업하였다고 하고, 캠벨 교수는 아일랜드 출신의 약학자라고 한다. 이래 저래 이번 생리의학상은 국내 약학자들 및 제약회사 신약개발 담당 연구자들에게 노벨상에 대한 꿈을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노벨상 발표를 들을 때마다 왜 우리나라는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할까 의문을 갖게 된다. 동시에 일본은 어떻게 총 21명이나 되는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 ’빨리 빨리’ 정신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일본의 눈부신 성취는 ‘은근과 끈기’의 덕택일 것으로 생각한다.
한 나라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는 ‘빨리 빨리’가 필요한 부문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은근과 끈기’가 필요한 부문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할 모방 또는 추격 부문에서는 ‘빨리 빨리’가 효율적이겠지만, 노벨상이나 신약개발처럼, 모방이 아닌 창조를 이룩해야 할 부문에 있어서는 ‘은근과 끈기’ 있는 불가피한 요소가 될 것이다.
결국 ‘빨리 빨리’와 ‘은근과 끈기’는 적재적소에 적용하기만 한다면 둘 다 우리의 장점이 될 수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노벨상 시즌을 보내며 우리 민족의 특성으로부터 얻는 교훈의 일단이다.
2015-10-2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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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3> 수마트라 약대에서의 세미나
며칠 전 (9/18-9/20) 인도네시아(인니)의 수마트라 섬의 메단(Medan)시에 있는 국립 수마트라 (Sumatera) 약대에 가서 약물송달(Drug Delivery)에 관한 강의를 하고 왔다.
수마트라 섬은 수도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 섬 북쪽에 위치한 인니 최대의 섬이며, 메단은 인니에서 세 번째로 인구(200만명)가 많은 수마트라 최대의 도시이다. 자카르타 까지는 인천에서 항공기를 타고 7시간, 메단까지는 자카르타에서 다시 국내선을 갈아타고 2시간을 가야 한다.
메단 공항에 도착한 나는 나를 초청한 수마트라 약대의 B교수와 함께 약 40분간 전철을 타고 메단 시내로 들어 갔다. 전철은 우리나라 회사가 건설하였다고 하는데 열차가 매우 깨끗하고 세련되었다. 메단역에 내려 자동차를 타고 폴로니아라는 호텔에 도착하였다. 가는 도중의 거리 모습은 여느 동남 아시아 국가들과 비슷하였다. 도로에는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차들은 좌측으로 달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호텔 식당에 가보니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 좋아 보였다. 아침 식사 후 세미나가 열리는 수마트라 약대의 강당으로 갔다. 거기에는 무려 700여명의 청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약대의 학부 학생 들이었다.
수마트라 약대의 한 학년 당 학생 수는 300명이며, 그들의 90%는 여학생이라고 한다. 수마트라 약대 외에도 메단에는 학년 당 학생수가 100~150명에 이르는 사립 약대가 2개 더 있다고 하였다.
인니의 경우, 약대는 4+1년제로 학생들에게는 4년간 공부하여 약학사로 졸업할 수 있는 길과, 추가로 1년간 실무 연수 교육을 받아 약사 면허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두 길이 열려 있었다. 과거에는 5+1년제였었다고 한다.
인니는 오래 전부터 의약분업을 시행하고 있는데, 이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이었던 이 나라의 역사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로부터 인니의 교육 연한이나 학생수, 기타 의약분업 등의 제도가 우리보다 더 잘 정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미나는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식전 행사로 4명의 여학생이 무대에 올라 인니 전통 춤을 추었고, 조직위원장, 학장, 약사회장 등이 축사를 하였다. 나는 나노파티클을 이용한 항암제의 타기팅(targeting)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나와 B교수의 오전 발표가 끝나자 점심 시간이 되었다. 학생들에게는 현장에서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이 배급되었다. 오후에는 학생들의 발표가 있다고 한다.
점심 시간에 무대에서는 20여명이 합창을 하였다. 무슨 노래인가 들어보니 예수님을 찬양하는 영어 찬송이었다. 무슬림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찬송가를 부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B 교수도 크리스천이었다.
점심 시간에 많은 학생들이 칠팔 명씩 그룹을 지어 나한테 와서 기념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30분이 지나도 사진 찍기가 끝나지 않을 정도로 희망자가 많았다. 학생들은 사진을 찍은 뒤 악수를 할 때에 내 손을 자기들 머리에 갖다 대었다. 축복을 받기 위한 무슬림의 전통 같았다.
학생들은 대체로 키가 작았고, 여학생들은 히잡(hijab)을 쓴 사람이 많았다. 히잡의 길이가 길수록 엄격한 무슬림이라고 하는데, 학생들은 대부분 짧은 히잡으로 머리만 가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친절하고 명랑하였다.
다음 날 B교수와 함께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한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 교회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지은 교회이었다. 대부분이 무슬림인 인니의 크리스천 비율은 인구의 10%이나, 메단에서는 30%에 달한다고 한다. 어쨌거나 크리스천과 무슬림이 잘 지내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인니에는 수마트라 섬에만 20개의 언어가 존재할 정도로 다양한 종족들이 함께 산다. 그러나 각 종족은 표준 인도네시아 언어를 배워 서로 잘 소통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한민족이면서도 남북으로, 또는 영호남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의 마음 밭이 몹시 부끄러웠다.
이반 여행은 우리보다 다소 뒤떨어져 보이는 어떤 나라로부터도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 의미 있는 여행이 되었다.
2015-10-0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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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2> ‘따듯한 말’이 곧 사랑이다
두 종류의 약을 함께 복용할 때 두 약의 효과를 합친 만큼의 약효가 나타나는 현상을 상가작용(相加作用)이라고 하고, 합친 것 보다 더 큰 약효가 나타나는 경우를 상승작용(相乘作用)이라고 한다. 사랑은 어느 쪽인가 하면,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감정인 듯 같다. 상대방과 사랑을 주고 받다 보면 사랑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투자한 것 보다 더 많이 되돌려 받는 수지 맞는 감정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랑의 특성 중 또 하나 신기한 것은 가짜 사랑도 진짜 사랑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며느리가 자신을 구박하는 시어머니 밥상에 계란찜을 올리며, 억지로나마 ‘어머니 사랑해요’를 반복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의 참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짜 사랑이 이 정도라면 진짜 사랑은 얼마나 위력이 크겠는가?'
크리스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일을 사랑의 극치로 믿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 내 제자임을 증거하라’고 하셨고, 성경의 여러 계명 중 으뜸되는 계명은 사랑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인생에서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는 말씀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증표이자 바이오마커(biomarker)라 할 것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수록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기 쉽다.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사랑을 받으며 늙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래서 부모들도,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원하는 것처럼 자식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식들의 부모 사랑은, 옛날부터 효도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여 놓아야 할 정도로, 기대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모기 입이 돌아 간다는 처서(處暑)가 지나니 아침 저녁으로 시원하고, 때로는 서늘하다. 머지 않아 가을이 오고 뒤이어 겨울도 올 것이다. 겨울이라. 문득 어린 시절 아랫목이 떠 오른다. 겨울철 밖에서 놀다가 방안에 들어 오면, ‘아이 추워’ 하면서 아랫목 이불 속에 손부터 넣었다. 그러고는 ‘아이 따듯해’ 하며 따듯함을 즐겼다.
내가 일본 유학시절 보낸 겨울은 늘 쓸쓸했었다. 다다미 방에 아랫목이 없어 이 따듯함을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랫목이 그리워진다. 점점 쓸쓸한 게 싫어지고 따듯한 게 좋아진다. 그러면서 인생의 가치는 따듯함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혹자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으로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이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그런 것은 오히려 개 떡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내가 섬기는 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은 늘 따듯하셨다. 그 따듯함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었다. 교회에 그런 따듯함 또는 그런 사랑이 있으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형 교회를 이룬다. 이는 현대인들이 겉으로는 의연한 척하지만 대부분은 아랫목의 따듯함을 그리워하는 ‘사랑 결핍증 환자들’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모르는 것은 사랑의 방법론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배우라고 가르친다. 그 말씀대로, 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양자로 입양하여 사랑하신 고 손양원 목사님의 거룩한 사랑은 입에 올리기도 벅차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은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할까? 나는 인생의 적어도 7할은 말로 의해 말미암으며, 3할 또는 그 이하 정도가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칭 ‘언칠행삼(言七行三)’ 설이다. 그렇다면 사랑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말부터 사랑스럽게, 즉 따듯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상대방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반복하면 마침내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게 된다. 반면에 상대방의 단점에 대한 ‘솔직한 지적’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게 만든다.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다.
반복하건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냉철한 이성이 아니라 따듯한 감성이다. 그러므로 따듯한 말, 그게 바로 사랑의 첫 걸음임을 확신하게 되는 요즘이다.
2015-09-1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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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1> 자식사랑 부모사랑
'인생은 성적 순(順)이 아니잖아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대체로 옳은 말이다. 나는 인생은 성적순이라기 보다는 사랑 순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에게는 두 아들과 두 며느리 및 그들에서 태어난 네 손주가 있다. 사실 요즘은 이 식구들을 보는 재미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딴에는 최선을 다해 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가끔 우리가 각자 자기를 다른 아이보다 덜 사랑해준다고 삐치거나 투정을 부린다. 때로는 어이가 없고 난감하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아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랑은 양(量)보다 순서(順序)가 더 중요하다’라는 사실이다. 내가 받는 사랑의 양이 아무리 많더라도, 남보다 조금이라도 적게 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곧 남을 시샘하고 질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질투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모자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공감이 간다. 어쨌거나 자식들이 서로 시샘과 질투를 하지 않도록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 주는 일은 보통 어려운 기술이 아니다. 어쩌면 끝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자식은 하나만 두어야 사랑하기 편하다는 말이 있을까?
두 번째로 깨달은 것은, 사랑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공통적인 필수 요소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 심지어 화초나 나무 같은 식물까지도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성경 도처(출20:5, 출34:14, 신5:9, 신6:15, 수24:19)에 언급되어 있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사랑 받기를 강력하게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질투’는 사랑의 시샘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 (요일4)만 아니라, 스스로도 사랑 받기를 원하시는, 우리와 같은 생명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골(毛骨)이 송연(松煙)해지는 깨달음이었다.
그렇다면 왜 모든 생명체는 공통으로 사랑을 필요로 할까? 아마도 그것은 사랑이 안에 있어야 생명이 온전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 것처럼,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남의 사랑을 잘 받을 수 있다.
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해도 선생님 앞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아이는 십중팔구 제대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이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남을 제대로 사랑하기 어렵다. 그런 사람의 인생을 온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란 의미에서, 사랑은 인생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묘약(妙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는 말이 있다. 자식에 대한 내리 사랑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의 원초적 본능(本能)이라는 말인 듯 하다.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자식 사랑은 사실 자랑할 것이 못 된다.
반대로 자식의 부모 사랑은 굳은 결심을 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선 애들과 달리 늙은 부모는 저절로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 좀 추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추하게 보이는 부모를 저절로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부모에 대한 사랑을 효(孝)라고 하고, 효를 행하는 일을 효도(孝道)라고 하는데, 이는 효도 하기가 도(道)를 닦는 일만큼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이처럼 자식에 대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효도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그 차이를 단적(端的)으로 말해 주고 있다.
만약에 하나님이 자식 사랑은 하기 어렵고, 부모 효도는 저절로 하게끔 만들어 놓으셨다면 세상이 어찌 되었을까? 아마 인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동물이 이미 멸종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사랑법칙의 오묘함에 놀라는 요즘이다.
2015-09-0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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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0> 여성의 우월성 (3)
1, 2에 이어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한 근거를 소개하기로 한다.
9. 자존심이 더 강하다
남자는 아내에게 사과하면서도 살 수 있지만, 여자는 남편에게 사과하면서까지 살지는 않을 것 같다. TV에서 아내에게 100장도 더 되는 각서를 써 주고 살고 있다는 방송인 이야기를 보았다.
아내로부터 각서(覺書)를 쓰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제 각서만 쓰면 잔소리가 끝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얼른 써주게 되었단다. 아마 아내더러 이런 각서를 쓰라고 하면 차라리 이혼을 하자고 대들 것이다.
나도 부부 싸움 후 내가 아내에게 사과를 한 적은 많지만, 아내로부터 사과를 받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자존심 싸움에서 아내를 이기려 들지 말 일이다. 도저히 불가능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10. 모성애(母性愛)가 부성애(父性愛)보다 위대하다
고릴라 모자(母子)를 골방에 가두어 넣고 30분 동안 불을 때 방바닥을 뜨겁게 만든 뒤 문을 열어 보았다. 엄마 고릴라가 아이를 머리에 이고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부자(父子)에 대해 같은 실험을 해 보았다.
어찌 되었을까? 아버지 고릴라가 아이를 깔고 앉아 있었단다. 그것도 태연스러운 표정으로! 부성애가 모성애에 KO 패하는 장면이다. 애초에 부성애라는 말이 있기는 했는지 의심스럽다.
내가 20년 전 큰 병으로 입원해 보니, 대부분의 아내들은 입원한 남편을 위해 헌신적으로 간호하고 있었다. 세상의 아내들은 대부분 그 정도의 훌륭함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내가 ‘아내 없는 사람은 아플 자격도 없나 보다’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입원하고 있는 경우의 남편들은 대부분 이 핑계 저 핑계로 병석을 지키기 않았다. 그걸 보고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아내들에 비해 훨씬 나쁜 x들이라는 사실을. 만약에 남편들이 아내들의 절반만큼이라도 정성껏 아내를 간호한다면, 아마 그 사람은 ‘드물게 훌륭한 남편’이라고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지 않을까?
남자들은 ‘인간적으로 훌륭하기’ 종목에서도 도저히 아내들의 발꿈치를 따라가지 못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11. 여자의 수명이 남자보다 훨씬 길다
2014년 우리나라 남자의 평균 수명은 78.5세이고 여자는 85.1세였다고 한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약 7년이나 더 사는 것이다. 사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다. 여성의 생물학적 수명이 남성보다 길다는 사실은, 위에서 열거한 그 어떤 항목보다 더 분명히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남자가 여자보다 일찍 죽는다는 것은 남자들의 복이다. 그래서 아내의 무릎을 베고 죽는 것이 뭘 좀 안다는 남자들의 로망이다. 반대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라. 아내를 먼저 보낸 남자들의 말로(末路)가 얼마나 처량할 것인지를! 다만 아내보다 남편이 너무 먼저 죽는 것은 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는 생각은 든다.
아내가 남편보다 오래 살기 때문에, 훗날 남편에 대한 주변의 평판마저 아내의 평가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다. 생시에는 물론 사후에도 남자가 불리하다는 이야기이다.
12. 결론
나도 ‘남편이 아내에게 이기고 사는 것이 폼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내를 이기고 제대로 사는 남편을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나는 확신한다. 전투를 제외하고는 남자가 여자를 이길 분야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40대 후반부터는 내 경우에도 나보다 아내가 훨씬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뒤늦게라도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남자들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 “모든 면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범사에 한시 바삐 아내에게 항복하라, 그것이 당신이 행복한 가정에서 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라고.
끝으로 아내 들에게는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다. “아내 들이여, 모든 면에서 열등한 남편을 긍휼히 여겨 주시라”고. 이것이 내가 3편의 글을 통하여 말하고 싶은 결론이다.
사족: 위 글에서 남자 또는 남편이란 대부분의 경우 ‘나’를 가리킴을 밝혀 둔다.
2015-08-1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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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9> 여성의 우월성 (2)
지난 번에 이어 여성이 왜 남성보다 우월한 존재인가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기로 한다. 역시 가볍게 읽어 보기 바란다.
5. 용감하다
전쟁을 제외하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용감한 경우가 많다. ‘지하철에서 자리 잡기’라든가 ‘시장에서 물건값 깎기’ 등에서 남자들은 여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아줌마 정신’은 바로 용감함이다.
아침 산책에 나서 보면 그룹을 이루어 대화를 하며 산보하는 것은 아줌마나 할머니들뿐이다. 남자들은 대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혼자 걷는다. 사람을 사귈 용기도, 떠들고 다닐 용기도 없기 때문이다.
등산로 중간 운동장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율동을 가르치는 모임을 보면 참여자의 대부분이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뻘쭘해서 그런 데에 잘 끼질 못한다. 또 여자들은 산보할 때 마스크나 모자로 얼굴을 다 가리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남자들은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그러지 못 한다. 남자에겐 그런 용기가 없는 것이다.
경로당이나 노인정의 주도권이 할머니들 손에 완전히 장악된 것은 무척 오래된 일이다. 다소 간에 기부금을 좀 내고, 시종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만 할머니들이 주는 대로 받아 먹는 수양이 되어 있는 영감님이 아니거든, 아예 노인정은 근처에도 얼쩡거리지 않는 편이 좋다.
6. 수다를 즐길 줄 안다
여자들은 수다의 깊은 맛을 안다. 전화로 1시간이나 수다 떨고 나서도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자이다. 앞에서도 말 했지만 여자들은 관심사가 다양하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하루 종일이라도 수다를 즐길 수 있다.
반면에 남자들은 단순 무식해서 별로 수다를 떨 건덕지가 없다. 그래서 남자들은 할 수 없이 수다대신 골프를 치거나 술을 같이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서로 말만 하기’로는 30분도 같이 보낼 수 없는 것이 남자들이다.
7. 사교성이 좋다
여자들은 사교성이 뛰어나다. 처음 보는 여자와도 금방 사귄다. 예컨대 ‘아이가 몇 살이냐’ ‘무슨 학원 다니냐’ 같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만나자마자 금방 서로 수다를 떠는 사이가 될 수 있다. 남자들은 그게 도저히 안 된다.
남편 모임에 따라 나선 아내들은 금방 서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아내들 모임에 따라 온 남편들은 서로 사귀지 못하고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해 하고 거북해 한다. 그래서 남편들은 아내 모임에 따라 나서지 않는다. 아니, 아내들은 그런 남편들을 다시는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여자들은 친구나 동창들과 국내외로 여행도 잘 다닌다. 서로 수다 떨며 다니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 후 같이 갔던 친구들의 흉을 보는 후유증은 좀 있지만, 아무튼 잘 다닌다. 그러나 남자들은 남자들끼리만 여행을 다니지는 않는다.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행길에 부득이(?) 아내를 모시고 다니는 것이다.
8. 판단력이 좋다
집을 사는 문제 등 사소한 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자기는 지구의 미래 같은 큰 주제만 담당한다는 남편들이 많다. 농담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가사의 주도권을 빼앗긴 남편들의 자조(自嘲) 섞인 진담이다.
과거의 아버지들은 아내 말을 듣지 않고 술 먹고 노름하고 바람 피우는 바람에 집안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낸 경우가 많았다. 또 제 멋대로 집을 사거나 사업을 시작하다가 실패한 가장이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명한 남편이라면 중대한 문제일수록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아니 아내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대체로 여성의 판단력이 남성보다 우수하기 때문이다.
행여 여성의 판단력이 남편보다 우수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남편은 범사에 아내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신상에 좋다. 현실적으로 집안 내 파워를 장악한 사람이 아내인데 달리 어찌하겠는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여성의 우월성은 다음 호에도 계속된다.
(정정) 약춘 177에서 이남순 박사 (전 성균관대 약대 초대학장)의 성함을 ‘이남선’이라고 잘못 기재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단순 착오이므로 이에 바로 잡으며 사과 드린다.
2015-08-06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