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몸속 ‘정수기’가 멈춰간다면? : 만성신부전증을 다스리는 한의학의 지혜

<필자 소개>
유덕주 유덕경희한의원 원장은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방재활의학을 전공, 학위를 취득했다. 경희대학교 한방병원 한방재활의학과 전공의 과정을 수료했으며 대한한방재활의학과학회 평생회원 및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방재활의학과 전문의이자 통증 및 재활의학분야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유덕주 원장은 현재 경기 안양시 소재 유덕경희한의원 대표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편집자>
■ 들어가는 글
“이제 단백질을 제한하고, 칼륨을 조심하며, 그저 버티다가 기능을 잃으면 투석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만성 신부전 판정을 받은 환자들이 병원 문을 나서며 공통으로 듣는 이야기입니다. 몸이 점점 부어가고, 소변의 이상이 생기며 만성피로가 나타나는 만성 신부전증. ‘치료’보다는 어쩔 수 없는 ‘현상 유지’에 방점이 찍힌 이 냉정한 현실 속에서 환자들은 묻습니다.
“그저 현상을 유지하는 것 말고, 내가 내 몸을 위해 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요?”
한의학은 이 질문에 대해 ‘정사상쟁(正邪相爭, 내 몸의 바른 기운과 나쁜 기운이 싸움)’의 관점으로 답합니다. 신장의 사구체가 기능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가는 과정을 단순히 노화나 파괴로만 보지 않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체내의 ‘독소(어혈, 담음)’를 제거하고 ‘정기(면역력)’를 북돋는 적극적인 중재안을 제시합니다. 투석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기 전, 우리 몸이 가진 스스로의 치유력을 극대화해 삶의 질을 높이는 법. 만성 신부전을 바라보는 한의학의 시선은 기계적인 수치만을 보지 않고, 그와 더불어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전신(全身)을 향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대한 도시라고 본다면, 신장(콩팥)은 도시의 청결을 책임지는 ‘하수처리장’이자 맑은 물을 공급하는 ‘정수기’입니다. 하지만 이 정수기는 한 번 고장 나면 부품 교체가 극도로 어렵습니다. 소리 없이 다가와 삶을 잠식하는 만성신부전증,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 만성신부전증의 서양의학적 시선
“몸 안의 정수기 필터가 파괴되고 굳어버렸습니다”
서양의학에서 신장은 아주 정교한 ‘모세혈관의 집합체’이자, ‘필터’입니다. 신장 하나에는 사구체라고 불리는 모세혈관 필터가 약 100만 개나 들어있죠. 만성 신부전은 이 필터들이 하나둘씩 망가져 결국 폐업 상태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혈액 속 쓰레기(노폐물)는 쌓이고, 몸에 꼭 필요한 단백질은 소변으로 빠져나가 버리죠. 그렇다면 무엇이 이 소중한 필터들을 망가뜨릴까요?
당뇨병 : 혈당이 높다는 것은 혈액이 설탕물처럼 끈적해진다는 뜻입니다. 이 끈적한 피가 사구체의 얇은 막을 통과하며 끊임없이 상처를 내고, 결국 필터 구멍을 막아버립니다. 서양의학에서 신부전 원인의 압도적 1위(약 50%)로 꼽는 주범이죠.
고혈압 : 혈압이 높으면 신장 내부의 미세혈관은 엄청난 압박을 받습니다. 마치 약한 고무 호스에 소방차 수준의 고압수를 계속 쏘는 것과 같습니다. 압력을 견디다 못한 혈관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경화증’이 발생하며 신장은 기능을 잃어갑니다.
사구체신염과 자가면역 : 우리 몸을 지켜야 할 면역세포가 이상을 일으켜 원래 아군이어야 할 신장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하면서 필터에 염증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결국 서양의학적 원인은 ‘물리적인 필터의 파괴와 노후화’로 요약됩니다. 수치상으로 사구체 여과율(GFR)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서양의학은 투석이나 이식을 고려해야 하는 ‘관리의 영역’으로 진입했다고 봅니다.
■ 만성신부전증을 바라보는 한의학적 시선: “생명의 화로가 식고, 탁한 물이 고이다”
한의학에서는 신장을 단순히 하나의 필터나 해부학적 장기로만 보지 않고, ‘신계(腎系)’라는 비뇨생식계통의 일부이자 우리 생명의 ‘원천 배터리’이자 ‘근본 뿌리’로 봅니다. 그렇다면 만성신부전증의 원인을 한의학에서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1. 타고난 배터리가 다 됐다? (선천부족, 신허(腎虛))
우리 몸에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선천의 정(精)’이라는 에너지가 저장돼 있습니다. 이걸 쉽게 말해 ‘인생 배터리’라고 하죠. 어떤 사람은 100년 가는 대용량 배터리를 갖고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용량이 적게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 배터리가 선천적으로 약하거나, 너무 일찍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면 신장의 기능이 급격히 떨어지며 만성 신부전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2. ‘촛불’을 너무 화끈하게 태웠다 (과로와 스트레스, 간기울결(肝氣鬱結))
한의학에서는 이를 ‘간(肝)의 과열’로 인한 ‘신수(腎水)의 고갈’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장은 우리 몸의 열기를 식혀주는 냉각수 역할도 하거든요. 밤샘 작업, 극심한 스트레스, 과도한 성생활 등은 우리 몸의 엔진을 과열시킵니다. 엔진이 계속 뜨거워지면 냉각수(신장의 기운)를 억지로 끌어다 쓰게 되고, 결국 냉각수가 바짝 말라버리면서 신장이 타격을 입는 것이죠.
3. ‘비실비실’한 비위 (후천부족, 비신양허(脾腎陽虛))
신장이 ‘뿌리’라면, 우리가 먹는 음식물을 에너지로 바꾸는 비위(소화기)는 ‘거름’입니다. 잘 먹고 잘 흡수해야 뿌리에 영양분을 공급하는데, 소화 기능이 망가지면 신장 배터리를 충전할 방법이 없습니다. 영양 공급이 끊긴 신장은 결국 굶주리다 지쳐 기능을 멈추게 됩니다.
4. 몸 안에 쌓인 ‘찌꺼기’의 습격 (습담(濕痰)과 어혈(瘀血))
신장은 맑은 물이 흘러야 하는 곳인데, 몸속에 노폐물이 쌓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습담(濕痰): 몸 안의 끈적끈적한 가래 같은 비정상적 체액.
어혈(瘀血):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탁한 피.
이런 찌꺼기들이 신장의 통로를 막아버리면, 신장은 마치 꽉 막힌 하수구처럼 변하게 됩니다. 한의학에서는 이 독소들이 신장을 공격해 만성 질환으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서양의학의 ‘요독’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으로, 이 탁한 찌꺼기들이 신장 주변을 에워싸고 기혈의 통로를 막아버립니다. 즉, “기운이 없어서 못 치우고, 못 치우니 더 막히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입니다.
서양의학이 “필터(사구체)가 고장 났으니 수치를 조절하고 기계를 써서라도 걸러내자”라고 말한다면, 한의학은 “필터가 왜 고장 났겠는가? 에너지가 바닥나고(신허), 몸이 차가워져 물이 흐르지 못하니(양허), 찌꺼기가 쌓인 것(수독)이다. 그러니 다시 에너지를 보충하고 온기를 불어넣어 스스로 흐르게 하자”라고 제안합니다.
단순히 병든 장기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전체적인 생명 에너지를 들여다보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만성 신부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의학의 지혜를 빌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 한의학적인 평소 예방과 관리법
신장이 제 기능을 못 한다는 건, 우리 몸이라는 자동차의 ‘냉각수’가 마르고 ‘배터리’가 방전 직전인 상태와 같습니다. 이럴 땐 가속 페달을 밟기보다 ‘에너지 절약 모드’로 전환하고, 남은 배터리를 알뜰하게 관리하는 지혜가 필요하죠. 망가진 신장의 부담을 덜어주고 삶의 질을 높이는 ‘신장 살리기 비책’ 생활법을 한의학적 시선으로 풀어보겠습니다.

1. 식사: “비위(脾胃)는 신장의 충전기다”
한의학에서는 신장을 ‘선천의 뿌리’라고 하지만, 그 뿌리에 영양을 주는 것은 ‘비위(소화기)’입니다. 신장이 약해졌을 땐 신장을 직접적으로 컨트롤하기 어렵기에 소화기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따뜻한 음식, 블랙푸드 : 찬물, 아이스크림은 신장의 남은 불씨(命門火)를 꺼버릴 수 있습니다. 음식은 늘 따뜻하게, 성질도 따뜻한 것을 섭취하는 게 좋습니다. 또한 한의학에서는 검은색은 신장과 연결됩니다. 검은콩, 검은깨, 목이버섯 등은 신장의 기운을 보강하는 대표적인 '블랙 푸드'입니다. 연하고 따듯하게 먹는 구기자차도 신장에 도움이 됩니다. (단, 전해질 조절이 필요한 말기 환자는 반드시 칼륨수치에 대한 검사 및 전문가와 상의해야 합니다.)
소식(小食)은 최고의 보약 : 소화시키는 과정 자체가 에너지를 쓰는 일입니다. 신장이 힘들 땐 소화기라도 일을 덜 하게 해줘야 그 에너지가 신장으로 갑니다. “배가 부르기 전에 숟가락을 놓는 것”이 신장 관리의 핵심입니다.
짠맛의 이면 : 한의학에서 짠맛은 신장으로 가지만, 과하면 신장을 공격합니다. 이미 지친 신장에 소금기(수분 정체 유발)는 치명적이니, 슴슴하게 드시는 것이 배터리 수명을 늘리는 길입니다.
절대 금기 : 만성 신부전 말기상태에서는 아무리 몸에 좋다는 약, 약재, 식품이라도 의료진의 상의 없이 임의로 드시면 절대 안 됩니다. 특히, 칼륨수치의 급작스런 변화로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2. 수면: “밤 11시는 신장이 충전되는 시간”
한의학에서 신장은 ‘음(陰)의 장기’입니다. 해가 지고 달이 뜰 때 주로 에너지가 보충된다는 뜻이죠.
신데렐라 취침법 : 밤 11시부터 새벽 3시는 우리 몸의 음기가 회복되는 골든타임입니다. 이때 깨어 있으면 신장의 진액(냉각수)이 바짝바짝 마릅니다. 늦어도 11시 전에는 꿈나라에 가 계시는 것이 좋습니다.
낮잠은 꿀잠 : 신부전 환자분들은 쉽게 지칩니다. 기운이 떨어질 때 15~20분 정도 짧게 낮잠을 자는 것은 방전된 배터리에 ‘보조 배터리’를 끼우는 것과 같습니다.

3. 온도 관리: “발은 따뜻하게, 허리는 든든하게”
신장의 경락(에너지 통로)은 발바닥에서 시작해 허리를 지납니다. 이 길이 차가우면 신장은 얼어붙습니다.
족욕(足浴)의 마법 : 매일 밤 잠들기 전, 체온보다 약간 높은 물에 15분 정도 발을 담그세요. 발바닥의 ‘용천혈(湧泉穴)’을 자극하면 신장의 기운이 샘물처럼 솟아오릅니다. 피로회복과 부종완화에 큰 도움을 줍니다.
허리 보호 : 한의학에서 허리는 ‘신장의 집’입니다. 허리가 차가우면 신장 기능도 떨어집니다. 여름에도 배와 허리는 따뜻한 복대로 보호해 주는 것이 집안 온도를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4. 감정 관리: “스트레스는 신장의 적”
한의학의 흥미로운 점은 감정이 장기를 상하게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불(火) : 스트레스는 위로 솟구치는 불의 성질을 가졌습니다. 이 불이 신장의 물을 다 증발시켜 버립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가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실제적인 ‘신장 보호제’입니다.
■ 신장의 시간을 늦추는 한의학적 솔루션
이미 손상된 필터를 완전히 새것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남은 필터가 더 오래가도록 윤활유를 치고 청소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 몸의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시키고, 막힌 필터를 뚫어주어야 합니다. 보통 체질이나 변증, 증상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신장이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1.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라” (보법, 補法)
신부전은 결국 신장의 ‘정(精)’과 ‘기(氣)’가 바닥난 상태입니다. 한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보고 두 가지 충전 방식을 선택합니다.
냉각수 보충(육미지황환 등) : 몸에 열이 나고 진액이 말라 신장이 쪼그라든 경우입니다. 이때는 ‘산약’ 등의 신장의 ‘음(陰)’을 채워 엔진 과열을 막습니다.
히터 가동(팔미지황환 등) : 몸이 차갑고 소변이 잘 안 나오며 붓는 경우입니다. 신장의 ‘양(陽)’ 기운을 불어넣어 몸속의 물이 잘 순환되도록 따뜻하게 데워줍니다.
2. “막힌 하수구를 뚫어라” (사법, 瀉法)
신장이 일을 못하게 하는데 있어 그 원인을 한의학에서는 ‘습담’이나 ‘어혈’로 봅니다. 신장이 못 치우는 쓰레기를 다른 길로 내보내는 전략입니다.
땀과 대변으로 배출 : 신장이 소변을 못 만드니, 피부의 땀구멍을 열거나 장 운동을 도와 대변으로 독소를 밀어냅니다. “정문이 막혔으니 뒷문과 창문을 열자!”는 것과 같지요.
어혈 제거 : 신장 혈관이 끈적한 피로 막히지 않도록 피를 맑게 하는 약재를 사용해 혈액 순환의 ‘고속도로’를 정비합니다. ‘단삼’ 등의 약재를 사용합니다.
3. “전기 신호를 정상화하라” (침과 뜸)
침과 뜸은 우리 몸의 에너지 통로인 ‘경락’을 자극하는 원격 조정 리모컨입니다.
침 치료 : 신장과 연결된 혈자리(태계, 신수, 용천 등)를 자극하면 신장으로 가는 혈류량이 늘어납니다. 이는 마치 신장에게 힘내라고 응원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뜸 치료 : 아랫배의 단전이나 허리에 따뜻한 뜸을 뜨면, 신장의 원기가 살아나면서 몸의 면역력이 올라갑니다.
■ 마무리하며
신장은 70~80%가 망가질 때까지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인내심 강한 장기입니다. 또한 만성 신부전 관리는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과한 음식, 과한 스트레스, 과한 활동을 줄이고 몸을 고요하게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관리법이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일하는 당신의 신장을 위해, 오늘은 자극적인 음식 대신 연하지만 따뜻한 차 한 잔과 편안한 휴식 및 수면을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요? 한의학은 당신의 신장이 끝까지 그 빛을 잃지 않도록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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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몸속 ‘정수기’가 멈춰간다면? : 만성신부전증을 다스리는 한의학의 지혜

<필자 소개>
유덕주 유덕경희한의원 원장은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방재활의학을 전공, 학위를 취득했다. 경희대학교 한방병원 한방재활의학과 전공의 과정을 수료했으며 대한한방재활의학과학회 평생회원 및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방재활의학과 전문의이자 통증 및 재활의학분야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유덕주 원장은 현재 경기 안양시 소재 유덕경희한의원 대표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편집자>
■ 들어가는 글
“이제 단백질을 제한하고, 칼륨을 조심하며, 그저 버티다가 기능을 잃으면 투석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만성 신부전 판정을 받은 환자들이 병원 문을 나서며 공통으로 듣는 이야기입니다. 몸이 점점 부어가고, 소변의 이상이 생기며 만성피로가 나타나는 만성 신부전증. ‘치료’보다는 어쩔 수 없는 ‘현상 유지’에 방점이 찍힌 이 냉정한 현실 속에서 환자들은 묻습니다.
“그저 현상을 유지하는 것 말고, 내가 내 몸을 위해 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요?”
한의학은 이 질문에 대해 ‘정사상쟁(正邪相爭, 내 몸의 바른 기운과 나쁜 기운이 싸움)’의 관점으로 답합니다. 신장의 사구체가 기능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가는 과정을 단순히 노화나 파괴로만 보지 않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체내의 ‘독소(어혈, 담음)’를 제거하고 ‘정기(면역력)’를 북돋는 적극적인 중재안을 제시합니다. 투석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기 전, 우리 몸이 가진 스스로의 치유력을 극대화해 삶의 질을 높이는 법. 만성 신부전을 바라보는 한의학의 시선은 기계적인 수치만을 보지 않고, 그와 더불어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전신(全身)을 향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대한 도시라고 본다면, 신장(콩팥)은 도시의 청결을 책임지는 ‘하수처리장’이자 맑은 물을 공급하는 ‘정수기’입니다. 하지만 이 정수기는 한 번 고장 나면 부품 교체가 극도로 어렵습니다. 소리 없이 다가와 삶을 잠식하는 만성신부전증,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 만성신부전증의 서양의학적 시선
“몸 안의 정수기 필터가 파괴되고 굳어버렸습니다”
서양의학에서 신장은 아주 정교한 ‘모세혈관의 집합체’이자, ‘필터’입니다. 신장 하나에는 사구체라고 불리는 모세혈관 필터가 약 100만 개나 들어있죠. 만성 신부전은 이 필터들이 하나둘씩 망가져 결국 폐업 상태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혈액 속 쓰레기(노폐물)는 쌓이고, 몸에 꼭 필요한 단백질은 소변으로 빠져나가 버리죠. 그렇다면 무엇이 이 소중한 필터들을 망가뜨릴까요?
당뇨병 : 혈당이 높다는 것은 혈액이 설탕물처럼 끈적해진다는 뜻입니다. 이 끈적한 피가 사구체의 얇은 막을 통과하며 끊임없이 상처를 내고, 결국 필터 구멍을 막아버립니다. 서양의학에서 신부전 원인의 압도적 1위(약 50%)로 꼽는 주범이죠.
고혈압 : 혈압이 높으면 신장 내부의 미세혈관은 엄청난 압박을 받습니다. 마치 약한 고무 호스에 소방차 수준의 고압수를 계속 쏘는 것과 같습니다. 압력을 견디다 못한 혈관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경화증’이 발생하며 신장은 기능을 잃어갑니다.
사구체신염과 자가면역 : 우리 몸을 지켜야 할 면역세포가 이상을 일으켜 원래 아군이어야 할 신장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하면서 필터에 염증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결국 서양의학적 원인은 ‘물리적인 필터의 파괴와 노후화’로 요약됩니다. 수치상으로 사구체 여과율(GFR)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서양의학은 투석이나 이식을 고려해야 하는 ‘관리의 영역’으로 진입했다고 봅니다.
■ 만성신부전증을 바라보는 한의학적 시선: “생명의 화로가 식고, 탁한 물이 고이다”
한의학에서는 신장을 단순히 하나의 필터나 해부학적 장기로만 보지 않고, ‘신계(腎系)’라는 비뇨생식계통의 일부이자 우리 생명의 ‘원천 배터리’이자 ‘근본 뿌리’로 봅니다. 그렇다면 만성신부전증의 원인을 한의학에서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1. 타고난 배터리가 다 됐다? (선천부족, 신허(腎虛))
우리 몸에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선천의 정(精)’이라는 에너지가 저장돼 있습니다. 이걸 쉽게 말해 ‘인생 배터리’라고 하죠. 어떤 사람은 100년 가는 대용량 배터리를 갖고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용량이 적게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 배터리가 선천적으로 약하거나, 너무 일찍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면 신장의 기능이 급격히 떨어지며 만성 신부전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2. ‘촛불’을 너무 화끈하게 태웠다 (과로와 스트레스, 간기울결(肝氣鬱結))
한의학에서는 이를 ‘간(肝)의 과열’로 인한 ‘신수(腎水)의 고갈’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장은 우리 몸의 열기를 식혀주는 냉각수 역할도 하거든요. 밤샘 작업, 극심한 스트레스, 과도한 성생활 등은 우리 몸의 엔진을 과열시킵니다. 엔진이 계속 뜨거워지면 냉각수(신장의 기운)를 억지로 끌어다 쓰게 되고, 결국 냉각수가 바짝 말라버리면서 신장이 타격을 입는 것이죠.
3. ‘비실비실’한 비위 (후천부족, 비신양허(脾腎陽虛))
신장이 ‘뿌리’라면, 우리가 먹는 음식물을 에너지로 바꾸는 비위(소화기)는 ‘거름’입니다. 잘 먹고 잘 흡수해야 뿌리에 영양분을 공급하는데, 소화 기능이 망가지면 신장 배터리를 충전할 방법이 없습니다. 영양 공급이 끊긴 신장은 결국 굶주리다 지쳐 기능을 멈추게 됩니다.
4. 몸 안에 쌓인 ‘찌꺼기’의 습격 (습담(濕痰)과 어혈(瘀血))
신장은 맑은 물이 흘러야 하는 곳인데, 몸속에 노폐물이 쌓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습담(濕痰): 몸 안의 끈적끈적한 가래 같은 비정상적 체액.
어혈(瘀血):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탁한 피.
이런 찌꺼기들이 신장의 통로를 막아버리면, 신장은 마치 꽉 막힌 하수구처럼 변하게 됩니다. 한의학에서는 이 독소들이 신장을 공격해 만성 질환으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서양의학의 ‘요독’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으로, 이 탁한 찌꺼기들이 신장 주변을 에워싸고 기혈의 통로를 막아버립니다. 즉, “기운이 없어서 못 치우고, 못 치우니 더 막히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입니다.
서양의학이 “필터(사구체)가 고장 났으니 수치를 조절하고 기계를 써서라도 걸러내자”라고 말한다면, 한의학은 “필터가 왜 고장 났겠는가? 에너지가 바닥나고(신허), 몸이 차가워져 물이 흐르지 못하니(양허), 찌꺼기가 쌓인 것(수독)이다. 그러니 다시 에너지를 보충하고 온기를 불어넣어 스스로 흐르게 하자”라고 제안합니다.
단순히 병든 장기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전체적인 생명 에너지를 들여다보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만성 신부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의학의 지혜를 빌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 한의학적인 평소 예방과 관리법
신장이 제 기능을 못 한다는 건, 우리 몸이라는 자동차의 ‘냉각수’가 마르고 ‘배터리’가 방전 직전인 상태와 같습니다. 이럴 땐 가속 페달을 밟기보다 ‘에너지 절약 모드’로 전환하고, 남은 배터리를 알뜰하게 관리하는 지혜가 필요하죠. 망가진 신장의 부담을 덜어주고 삶의 질을 높이는 ‘신장 살리기 비책’ 생활법을 한의학적 시선으로 풀어보겠습니다.

1. 식사: “비위(脾胃)는 신장의 충전기다”
한의학에서는 신장을 ‘선천의 뿌리’라고 하지만, 그 뿌리에 영양을 주는 것은 ‘비위(소화기)’입니다. 신장이 약해졌을 땐 신장을 직접적으로 컨트롤하기 어렵기에 소화기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따뜻한 음식, 블랙푸드 : 찬물, 아이스크림은 신장의 남은 불씨(命門火)를 꺼버릴 수 있습니다. 음식은 늘 따뜻하게, 성질도 따뜻한 것을 섭취하는 게 좋습니다. 또한 한의학에서는 검은색은 신장과 연결됩니다. 검은콩, 검은깨, 목이버섯 등은 신장의 기운을 보강하는 대표적인 '블랙 푸드'입니다. 연하고 따듯하게 먹는 구기자차도 신장에 도움이 됩니다. (단, 전해질 조절이 필요한 말기 환자는 반드시 칼륨수치에 대한 검사 및 전문가와 상의해야 합니다.)
소식(小食)은 최고의 보약 : 소화시키는 과정 자체가 에너지를 쓰는 일입니다. 신장이 힘들 땐 소화기라도 일을 덜 하게 해줘야 그 에너지가 신장으로 갑니다. “배가 부르기 전에 숟가락을 놓는 것”이 신장 관리의 핵심입니다.
짠맛의 이면 : 한의학에서 짠맛은 신장으로 가지만, 과하면 신장을 공격합니다. 이미 지친 신장에 소금기(수분 정체 유발)는 치명적이니, 슴슴하게 드시는 것이 배터리 수명을 늘리는 길입니다.
절대 금기 : 만성 신부전 말기상태에서는 아무리 몸에 좋다는 약, 약재, 식품이라도 의료진의 상의 없이 임의로 드시면 절대 안 됩니다. 특히, 칼륨수치의 급작스런 변화로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2. 수면: “밤 11시는 신장이 충전되는 시간”
한의학에서 신장은 ‘음(陰)의 장기’입니다. 해가 지고 달이 뜰 때 주로 에너지가 보충된다는 뜻이죠.
신데렐라 취침법 : 밤 11시부터 새벽 3시는 우리 몸의 음기가 회복되는 골든타임입니다. 이때 깨어 있으면 신장의 진액(냉각수)이 바짝바짝 마릅니다. 늦어도 11시 전에는 꿈나라에 가 계시는 것이 좋습니다.
낮잠은 꿀잠 : 신부전 환자분들은 쉽게 지칩니다. 기운이 떨어질 때 15~20분 정도 짧게 낮잠을 자는 것은 방전된 배터리에 ‘보조 배터리’를 끼우는 것과 같습니다.

3. 온도 관리: “발은 따뜻하게, 허리는 든든하게”
신장의 경락(에너지 통로)은 발바닥에서 시작해 허리를 지납니다. 이 길이 차가우면 신장은 얼어붙습니다.
족욕(足浴)의 마법 : 매일 밤 잠들기 전, 체온보다 약간 높은 물에 15분 정도 발을 담그세요. 발바닥의 ‘용천혈(湧泉穴)’을 자극하면 신장의 기운이 샘물처럼 솟아오릅니다. 피로회복과 부종완화에 큰 도움을 줍니다.
허리 보호 : 한의학에서 허리는 ‘신장의 집’입니다. 허리가 차가우면 신장 기능도 떨어집니다. 여름에도 배와 허리는 따뜻한 복대로 보호해 주는 것이 집안 온도를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4. 감정 관리: “스트레스는 신장의 적”
한의학의 흥미로운 점은 감정이 장기를 상하게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불(火) : 스트레스는 위로 솟구치는 불의 성질을 가졌습니다. 이 불이 신장의 물을 다 증발시켜 버립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가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실제적인 ‘신장 보호제’입니다.
■ 신장의 시간을 늦추는 한의학적 솔루션
이미 손상된 필터를 완전히 새것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남은 필터가 더 오래가도록 윤활유를 치고 청소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 몸의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시키고, 막힌 필터를 뚫어주어야 합니다. 보통 체질이나 변증, 증상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신장이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1.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라” (보법, 補法)
신부전은 결국 신장의 ‘정(精)’과 ‘기(氣)’가 바닥난 상태입니다. 한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보고 두 가지 충전 방식을 선택합니다.
냉각수 보충(육미지황환 등) : 몸에 열이 나고 진액이 말라 신장이 쪼그라든 경우입니다. 이때는 ‘산약’ 등의 신장의 ‘음(陰)’을 채워 엔진 과열을 막습니다.
히터 가동(팔미지황환 등) : 몸이 차갑고 소변이 잘 안 나오며 붓는 경우입니다. 신장의 ‘양(陽)’ 기운을 불어넣어 몸속의 물이 잘 순환되도록 따뜻하게 데워줍니다.
2. “막힌 하수구를 뚫어라” (사법, 瀉法)
신장이 일을 못하게 하는데 있어 그 원인을 한의학에서는 ‘습담’이나 ‘어혈’로 봅니다. 신장이 못 치우는 쓰레기를 다른 길로 내보내는 전략입니다.
땀과 대변으로 배출 : 신장이 소변을 못 만드니, 피부의 땀구멍을 열거나 장 운동을 도와 대변으로 독소를 밀어냅니다. “정문이 막혔으니 뒷문과 창문을 열자!”는 것과 같지요.
어혈 제거 : 신장 혈관이 끈적한 피로 막히지 않도록 피를 맑게 하는 약재를 사용해 혈액 순환의 ‘고속도로’를 정비합니다. ‘단삼’ 등의 약재를 사용합니다.
3. “전기 신호를 정상화하라” (침과 뜸)
침과 뜸은 우리 몸의 에너지 통로인 ‘경락’을 자극하는 원격 조정 리모컨입니다.
침 치료 : 신장과 연결된 혈자리(태계, 신수, 용천 등)를 자극하면 신장으로 가는 혈류량이 늘어납니다. 이는 마치 신장에게 힘내라고 응원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뜸 치료 : 아랫배의 단전이나 허리에 따뜻한 뜸을 뜨면, 신장의 원기가 살아나면서 몸의 면역력이 올라갑니다.
■ 마무리하며
신장은 70~80%가 망가질 때까지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인내심 강한 장기입니다. 또한 만성 신부전 관리는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과한 음식, 과한 스트레스, 과한 활동을 줄이고 몸을 고요하게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관리법이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일하는 당신의 신장을 위해, 오늘은 자극적인 음식 대신 연하지만 따뜻한 차 한 잔과 편안한 휴식 및 수면을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요? 한의학은 당신의 신장이 끝까지 그 빛을 잃지 않도록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