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설계해 만든 동경대 약학부
얼마전 약학사분과학회의 김진웅 회장을 통해 동경대 약학부(이하 약학부)의 100년사를 다룬 「동경대학백년사」 (부국사 2(1987), 동경대학 출판부) 를 입수하였다. 그 중에서 약학부의 창설 시기와 배경 부분만을 발췌 정리해 보았다.
약학부는 1958년 3월 31일 동경대 의학부 약학과에서 분리·독립하여 창설되었다. 그러나 그 뿌리는 1873년 제1대학구(大學區) 의학교에 설치된 제약학과(製藥學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약학과 시절부터 따지면 85년간에 걸친 교육 경험의 축적이 약학부 창설의 바탕이었다.
약학은 의학과는 다른 별개의 전문과학
메이지(明治) 새 정부는 근대국가 건설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의·약학 교육의 모델로 당시 선진국이던 독일을 택했다. 독일인 의사 뮐러(L. Müller)와 호프만(T.E. Hoffmann)을 초빙해 의학교육을 독일식으로 재편하였다. 이들은 정부에 약학과 의학은 같은 공중보건 목적을 공유하지만 각각 별도의 전문인력이 담당해야 할 독립 분야라고 건의했다. 불량 수입약의 유통, 약품 감별 능력의 부족, 제약기술의 낙후와 수입 의존은 단순한 교육 문제가 아니라, 국민건강을 위협하고 국가경제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었다.
이에 메이지정부는 ‘제약을 진보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도쿄 시내에 제약학교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무국장 나가요센사이(長與專斎)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즉 1873년 7월 25일, 문부성 포달(布達)로 제1대학구 의학부에 제약학과를 설치하면서 일본에서의 근대 약학교육이 제도적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제약학과에서는 예과 2년과 본과 3년의 총5년 동안 독일어, 라틴어, 수학, 화학을 비롯해 약방학(藥方學), 제약학, 약물분석, 약국 실습, 실용화학 등을 가르쳤다.
국가가 유학생을 ‘보내고, 돌아오게 하고, 배치하다’
약학부 형성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메이지 정부의 인력양성 방식이다. 정부는 독일인 교사를 단순히 초빙하는 데 그치지 않고, 1870년 제1회 유학생 제도를 통해 쇼케이(柴田承桂)와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를 베를린대학에 보냈다. 이들은 훗날 일본 약학의 교육·연구 기반을 세우는 핵심 인물이 되었다.
시바타 쇼케이는 베를린에서 화학과 위생학을 익히고 귀국한 뒤, 도쿄의학교 제약학과의 초대 교수로 임명됐다. 그는 독일에 체류 중이던 나가이 나가요시 등에게 전임교사 추천과 실험기기·약품·서적의 구매를 요청했다. 그 결과 독일 유학생들이 추천한 랑가드(A. Langgaard)가 교두(敎頭)로 부임했고, 독일에서 확보한 기기와 교재가 도착하면서 서구 약과대학에 준하는 교육·연구 체제가 갖춰졌다.
의학부 안의 약학과에서 독립 학부로
1877년 동경대학이 출범하면서 제약학과는 의학부 제약학과로 편입됐다. 이후 제국대학 의과대학 약학과, 의학부 약학과로 명칭과 소속을 바꿔가며 교육과 연구를 확대해 나갔다. 전후(戰後)에는 새 교육기준과 커리큘럼을 마련하고, 제제학, 약품작용학 등 새로운 전공 분야를 추가했으며, 연구시설과 실험장비도 확충했다.
1958년 3월 31일 국립학교설치법 개정을 통해 동경대 약학부가 창설됐고, 마침내 4월 1일 의학부 약학과에서 약학부 약학과로 분리·독립했다. 당시 8개 강좌, 교수 8명, 조교수 8명, 조수 20명으로 시작한 약학부는 곧 제약화학과를 신설하고 교육내용을 생물화학과 물리화학 분야로까지 넓혔다.
맺음말
일본의 약학교육사는 국가가 독일을 선진국 모델로 정하고, 유학생을 선발·파견한 뒤 귀국자를 교육 현장에 계획적으로 배치했으며, 현지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교원·장비·교재까지 확보해 온 국가 주도형 발전 과정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미국·독일·일본 등에서 수학한 약학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귀국해 약학교육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다만 유학과 귀국 인력의 활용이 국가 차원의 일관된 계획 아래 이루어지지 않고 주로 개인과 대학 단위의 노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약학 교육의 방향 정립과 발전에 효과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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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설계해 만든 동경대 약학부
얼마전 약학사분과학회의 김진웅 회장을 통해 동경대 약학부(이하 약학부)의 100년사를 다룬 「동경대학백년사」 (부국사 2(1987), 동경대학 출판부) 를 입수하였다. 그 중에서 약학부의 창설 시기와 배경 부분만을 발췌 정리해 보았다.
약학부는 1958년 3월 31일 동경대 의학부 약학과에서 분리·독립하여 창설되었다. 그러나 그 뿌리는 1873년 제1대학구(大學區) 의학교에 설치된 제약학과(製藥學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약학과 시절부터 따지면 85년간에 걸친 교육 경험의 축적이 약학부 창설의 바탕이었다.
약학은 의학과는 다른 별개의 전문과학
메이지(明治) 새 정부는 근대국가 건설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의·약학 교육의 모델로 당시 선진국이던 독일을 택했다. 독일인 의사 뮐러(L. Müller)와 호프만(T.E. Hoffmann)을 초빙해 의학교육을 독일식으로 재편하였다. 이들은 정부에 약학과 의학은 같은 공중보건 목적을 공유하지만 각각 별도의 전문인력이 담당해야 할 독립 분야라고 건의했다. 불량 수입약의 유통, 약품 감별 능력의 부족, 제약기술의 낙후와 수입 의존은 단순한 교육 문제가 아니라, 국민건강을 위협하고 국가경제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었다.
이에 메이지정부는 ‘제약을 진보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도쿄 시내에 제약학교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무국장 나가요센사이(長與專斎)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즉 1873년 7월 25일, 문부성 포달(布達)로 제1대학구 의학부에 제약학과를 설치하면서 일본에서의 근대 약학교육이 제도적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제약학과에서는 예과 2년과 본과 3년의 총5년 동안 독일어, 라틴어, 수학, 화학을 비롯해 약방학(藥方學), 제약학, 약물분석, 약국 실습, 실용화학 등을 가르쳤다.
국가가 유학생을 ‘보내고, 돌아오게 하고, 배치하다’
약학부 형성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메이지 정부의 인력양성 방식이다. 정부는 독일인 교사를 단순히 초빙하는 데 그치지 않고, 1870년 제1회 유학생 제도를 통해 쇼케이(柴田承桂)와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를 베를린대학에 보냈다. 이들은 훗날 일본 약학의 교육·연구 기반을 세우는 핵심 인물이 되었다.
시바타 쇼케이는 베를린에서 화학과 위생학을 익히고 귀국한 뒤, 도쿄의학교 제약학과의 초대 교수로 임명됐다. 그는 독일에 체류 중이던 나가이 나가요시 등에게 전임교사 추천과 실험기기·약품·서적의 구매를 요청했다. 그 결과 독일 유학생들이 추천한 랑가드(A. Langgaard)가 교두(敎頭)로 부임했고, 독일에서 확보한 기기와 교재가 도착하면서 서구 약과대학에 준하는 교육·연구 체제가 갖춰졌다.
의학부 안의 약학과에서 독립 학부로
1877년 동경대학이 출범하면서 제약학과는 의학부 제약학과로 편입됐다. 이후 제국대학 의과대학 약학과, 의학부 약학과로 명칭과 소속을 바꿔가며 교육과 연구를 확대해 나갔다. 전후(戰後)에는 새 교육기준과 커리큘럼을 마련하고, 제제학, 약품작용학 등 새로운 전공 분야를 추가했으며, 연구시설과 실험장비도 확충했다.
1958년 3월 31일 국립학교설치법 개정을 통해 동경대 약학부가 창설됐고, 마침내 4월 1일 의학부 약학과에서 약학부 약학과로 분리·독립했다. 당시 8개 강좌, 교수 8명, 조교수 8명, 조수 20명으로 시작한 약학부는 곧 제약화학과를 신설하고 교육내용을 생물화학과 물리화학 분야로까지 넓혔다.
맺음말
일본의 약학교육사는 국가가 독일을 선진국 모델로 정하고, 유학생을 선발·파견한 뒤 귀국자를 교육 현장에 계획적으로 배치했으며, 현지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교원·장비·교재까지 확보해 온 국가 주도형 발전 과정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미국·독일·일본 등에서 수학한 약학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귀국해 약학교육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다만 유학과 귀국 인력의 활용이 국가 차원의 일관된 계획 아래 이루어지지 않고 주로 개인과 대학 단위의 노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약학 교육의 방향 정립과 발전에 효과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