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롱프랑, M&A는 없다"
쟝 르네 푸르토가 롱프랑-로라 회장에 부임할 당시만 하더라도 이 회사는 국영기업체로 유럽에서 135개에 달하는 다양한 사업체를 경영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음은 푸르토 회장이 최근 '스크립'誌 경제부장 카렌 베이넌과 가진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특히 이번 인터뷰를 통해 푸르토 회장은 M&A를 검토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롱프랑은 아메리칸 홈 프로덕트와 몬산토의 통합으로 외형상 노바티스에 버금가는 수준의 대형사 발족이 임박함에 따라 경쟁력 유지 및 제고를 위해 합작을 통한 외형확대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과연 어떤 기업이 합작 파트너로 선택될 것인가를 놓고 제약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왔었다.
쟝 르네 푸르토는 대학을 졸업한 후 35년 동안 성공적인 경영컨설턴트의 한사람으로 손꼽혀 왔던 인물로서 그동안 유럽내에서만 사업을 영위해온 기업으로 보잘 것 없이 덩치만 큰 프랑스의 일개 화학기업(sluggish French chemicals behemoth)에 불과했던 롱프랑을 번창하는 국제적인 생명과학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지난 86년 롱프랑에 부임한 프루토는 즉각 135개에 달하는 그룹內 다양한 사업체들에 대해 주력사업 위주로 구조개편에 착수했다. 특히 부임 첫해에 독일 제약기업 나텔만 및 농화학업체 유니온 카바이드와 기업인수 협상을 추진했다.
부임 초창기에 진행한 이같은 기업인수 사례들은 저효용성(low-margin) 일용화학제품이나 섬유류 위주에서 벗어나 혁신적이고 이윤창출형 생명과학 분야로 이행해 나가겠다는 그의 전략을 보여준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또 향후 미국에서 추진할 주요 기업인수 협상과정에서 이론적 기초가 되어 90년 로라, 95년 훽스트와 혈장분야의 합작을 위해 센티온(Centeon)에 대한 인수협상을 진행할 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이다.
23살 때 그가 졸업한 프랑스 에꼴 폴리테크니끄 및 국립행정학교는 프랑스의 톱 클라스 사업가들과 프랑스 정부의 토대를 튼튼히 해주는 엘리트 관료그룹의 성장기에 좋은 밑거름을 제공해 주고 있는 최고의 명문학교들이다.
프루토는 "나는 모험을 원하는 사람이지 안주하려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졸업할 무렵 그는 고급교육을 받으면서 국가로부터 받아온 장학금 혜택에 상당하는 금액을 상환해야 할 입장에 있었던 관계로 이브 보샤르가 설립한 경영컨설턴트 기업 보샤르社(Bossard)의 입사제의를 받아들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같은 결정이 그처럼 고급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는 경솔한 선택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60년대만 하더라도 경영컨설턴트 사업이 조직컨설턴트 정도로 인식됐었고 오늘날과 같은 입지를 구축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상대방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끔 다룰 줄 알았으며, 사람들에게 많은 흥미와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성장했던 그의 유년시절부터 다져진 것. 프루토의 모친은 그가 불과 6살 때 복막염으로 세상을 등졌고, 수학교수였던 부친은 그를 여덟살이 될 때까지 산 세바스챤에 살았던 그의 외조부모에게 맡겼다.
그의 외조부모는 원래 알사스 지방에 살았었으나 그곳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독일이 국경을 점령한 1870년 스페인으로 이주해야 했다. 푸르토는 성장과정에서 불어와 스페인어 등 2개국어에 능통하게 된 것은 물론 두 나라의 상이한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문화적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는 훗날 그가 국제적인 사업을 잘 수행함으로써 롱프랑에서 수많은 기업인수를 가능케 해준 교훈으로 작용했다. 프루토가 보샤르社에서 일했을 당시 제약산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으나 그의 고객들(clients) 가운데는 썰, 워너램버트, 와이어스, 클린빌란(Clin Bilan:훗날 미디社와의 통합으로 사토피가 되었음) 등 제약기업들이 유독 많았다.
이는 사실상 그와 제약산업과의 오랜 인연의 시작을 뜻했다. 보샤르에서 9년간 재직한 후 1972년에 이르면서 당시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컨설턴트 업체의 하나였던 보샤르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컨설턴트 산업이 위축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관계자들이 회사를 떠나 독립해 나가기 시작, 3년 후 보샤르社의 임직원 수는 400명에서 50명으로 줄어들었다.
곧이어 석유파동과 경제침체가 잇따라 경영컨설턴트 업체들은 시련기를 맞았다. 그러나 프루토는 오히려 여기서 기회를 포착했고, 불과 32살의 나이에 그룹內 최대규모 업체의 최고 실무책임자(chief executive officer) 자리에 올랐다.
79년 프루토는 보샤르를 지배하길 원했던 경쟁업체 캡 제미니 소제띠社(Cap Gemini Sogeti)의 도전을 물리치는 등 성장세를 주도, 프랑스의 선도적인 경영컨설턴트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보샤르에 재직하는 동안 프루토는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 의료전문잡지 '임팍뜨 메데쌩'(Impact Medecin)을 창간하는 한편 병원용 의약품 마케팅 업체 '프랑스 1'을 설립하기도 했다.
보샤르社와 프루토는 제약사업 분야에서 상당한 입지를 구축해 나갔으며,(pharmaceutical franchise) 제약산업 전문가로서의 명성을 구축했다.
81년 그는 컨설턴트 업무의 일부로 프랑스 중도우익정당 UDF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 일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정치가 및 그랑제콜 재학시절 동료들과 안면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는 권력엘리트층(corridors of power)에 그의 명성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UDF 당수로 훗날 대통령에 오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땡과도 교분을 맺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1986년 새로 들어선 드골주의 RPR당 정권으로 쟈끄 시락이 이끌었던 정부는 당시까지 롱프랑-로라 회장이었던 르와끄 르 플로-프리젱의 후계자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롱프랑은 1980년부터 82년에 이르기까지 30억프랑의 손실을 내고 있었는데, 82년 당시 프랑스와즈 미테랑의 사회당 정부에 의해 27억프랑이라는 파격가로 정부에 의해 매각되어 국영기업화 됐었다.
푸르토의 고객기업 중 하나였던 롱프랑-로라의 경영진은 그에게 현상을 유지해 줄 것을 요청했고,(asked him to stand for the post) 마침내 롱프랑 회장에 취임하기에 이른다.
그의 취임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가 정치적 배려로 회장에 임명된 사람이며, 제약산업 분야에서 그가 쌓아올린 업적들은 곧 잊혀질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정부는 롱프랑을 사유기업으로 전환시키고자 했으나 1987년 세계 證市가 위기를 맞으면서 사유화는 뒤로 미뤄졌다.
88년 봄 총선에서 쟈끄 시락 정부는 패배했고, 재 집권한 사회당 정부는 롱프랑을 국영기업으로 유지키로 했지만, 동시에 푸르토 회장을 유임시켜 그가 시도해온 공격적인 변화를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해 줬다.
그는 롱프랑이 사유화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나 구조개편을 단행할 수 있는 자유는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국영화되면서 가장 불편했던 점은 기업이 돈을 필요로 할 때 정작 정부는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점이이었으며, 오히려 엄청난 빚만 지고 있었다.
그는 "회사가 국영화되었을 때 임원진들을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했고, 고위관료나 공무원들에게 전적으로 좌우되는 상황이 야기되었을 뿐"이고 말했다. "이의를 제기할 주주가 없다는 점은 일반기업과 중대한 차이점이고,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프루토는 고위관료들 및 장관에게 문제를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고, 그가 필요로 했던 변화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는 "엄청난 규모의 채무에도 불구하고 생명과학사업을 매입하고 화학사업을 매각키로 결정했다"며 "135개에 이르는 다양한 사업들에 손을 대고 있지만 이중 상당수가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었고, 경쟁력 및 국제화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업을 국제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프루토가 롱프랑에 재직하면서 200억달러 이상이 기업인수에 투자됐다. 지난 86년에는 한 미국기업을 인수하는데 3억달러가 들어갔는데, 오늘날 이는 40억달러 상당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푸르토 회장이 부임한 후 롱프랑이 R&D에 투자한 금액은 크게 늘어나 올해의 경우 R&D 투자비용이 90억프랑에 달했다. 지난 86년에는 R&D에 25억프랑을 투자하는데 그쳤었다. 매출액 대비 R&D 투자비 점유율을 보면 ▲제약산업 17% ▲농업 8% ▲특수화학 3% 등이다.
지난 수년간 개혁을 단행한 후 프루토는 구조개편이 어느정도 완료됐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특수화학사업을 맡고 있는 로디아社의 경우 올해 30%의 매출증가를 구현했다.
프루토 회장은 최근 주당순이익 20% 증가를 실현하고, 내년도에 채무는 55% 이하로 떨어뜨리겠다는 또 하나의 목표를 설정했다.
기업볼륨 측면에서 볼 때 롱프랑은 로디아社를 제외할 경우 생명과학 분야의 선두업체인 노바티스 및 아메리칸 홈 프로덕트와 몬산토의 통합으로 생겨나게 되는 새로운 기업의 절반 수준에 불과할 전망이나 시장에서 선두권을 계속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백신 분야에서 롱프랑은 스미스클라인 비챰과 함께 최정상의 자리를 양분하고 있는데, 특히 소아용 백신에서는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동물용 의약품 분야에서 머크社와 합작을 통해 새로 설립한 메리알(Merial)은 이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랐다.
제약산업 분야에서 롱프랑은 심혈관계 및 종양 치료제 분야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지고 있다. 이와함께 항암제 '탁소테레'와 저분자량 헤파린 '로베녹스/클렉세인'(에녹사파린 소디움) 등의 신제품을 전 세계에 발매, 상당한 이익신장을 실현할 수 있을 전망이다.
그러나 롱프랑이 호흡기계 치료제 분야에서 누려온 독보적인 지위(franchise)는 경쟁업체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롱프랑은 천식치료제 '아즈마코트'(트리암시놀론)에 대한 영업력 배가 등 사업전환에 힘쓰고 있다.
롱프랑이 당면한 또 다른 어려운 문제는 혈장제품 분야에서 훽스트와 의 합작으로 설립한 센테온社(Centeon)의 성장에 관한 것이나, 미국內 생산설비를 통해 제품을 생산하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올해 이익구조로 전환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향후 계획과 관련해서 질문을 받을 때면 프루토는 유전자 치료법 등의 프로젝트로부터 롱프랑이 개혁에 따른 결실을 볼 수 있기를 원한다고 밝히고 있다.
롱프랑은 지난해 80억프랑을 R&D에 투입, 10년 전의 35억프랑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룹 전체 R&D 투자비용의 80% 이상이 오늘날 생명과학 분야에 집중투자되고 있다. 또 전 세계에 9,000여명의 연구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파스퇴르연구소가 임상 2상에 들어간 AIDS 백신 등 현재 개발중인 제품들 중 일부는 인류의 삶을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프루토은 롱프랑의 구조조정 문제와 관련, 한가지 의문점이 불식되지 않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것은 롱프랑이 현상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생명과학 분야에서 파
트너를 구해 손을 잡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AHP/몬산토의 합병계획 발표 후 더욱 첨예한 사항으로 부각된 것이다.
프루토는 롱프랑이 앞으로도 3~5년간 현재와 같은 성장세를 지속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위험한 상황을 맞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중요한 것은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 J. 프루토 회장 양력
· 1986년 : 독일 나텔만 제약부문 인수.
유니온 카바이드 농업부문 인수.
· 1987년 : 스토퍼(Stauffer)로부터 산업화학부문 인수.
· 1989년 : 캐나다 코너 래보라토리(백신 전문기업:Connaught Laboratories) 인수.
· 1990년 : 美 로라(Rorer) 제약사업부문 합병.
· 1991년 : 합병社로부터 비 주력(Non-core) 제약사업 부문 처분.
· 1993년 : 롱프랑 사유기업화.
· 1994년 : 파스퇴르社(Pasteur Merieux Connaught)를 롱프랑의 100% 자회사(subsidiary)로 편입시켜 롱프랑 젠셀 설립.
· 1995년 : 센테온과 혈장부문 합작으로 롱프랑-로라&훽스트 설립.
프랑스 유통업체 쿠페라숑 파마슈티끄 프랑스와즈(쿠퍼)와 영국 제약기업 피슨(Fisons) 인수.
· 1997년 : 머크와 합작으로 동물용 의약품업체 메리알(Merial) 설립.
· 1998년 : 일부 화학 및 섬유업체 합병을 통해 특수화학기업 로디아 설립.
로디아, 뉴욕 및 파리 증권시장에 상장.
이덕규
1998.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