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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53> 붓과 펜, 괘도와 슬라이드
붓과 펜, 괘도와 슬라이드우리 조상님들은 붓으로 글을 썼다. 우리 동네에서도 집을 낙성(落成)하거나 혼인을 치를 때면 붓으로 쓴 글씨를 기둥에 붙이거나 함(函)에 넣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1950년대에는 붓글씨를 쓰는 습자(習字) 시간이 있었다.국민학교에서는 글씨를 연필로 썼다. 6학년이던 1960년, 주안 이모부로부터 난생 처음보는 볼펜 한 자루를 선물로 받았다. 1960~1966년, 인천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잉크를 찍어 쓰는 펜글씨가 대세였다. 볼펜도 조금은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대학에 입학하던 1967년 무렵에는 입학 기념이나 새해 맞이로 파커나 파이롯트 만년필을 받는 것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만년필은 직장인의 멋과 품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편리성 때문에 볼펜이 대표적인 필기구가 되었다. 타자기와 컴퓨터의 출현으로 글씨는 더 이상 ‘손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두드려’ 쓰는 것이 되었다가, 이제는 휴대전화의 녹음 기능의 발달로 ‘말로 쓰는’ 것이 되었다. 놀라운 변화이다. 이와 더불어 남의 앞에서 강의하는 기술과 방법도 매우 달라졌다. 1975년 내가 대한약학회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할 때에는 모조지로 만든 커다란 괘도(卦圖)에 매직펜으로 그래프나 표를 그린 뒤, 긴 막대로 종이를 한 장씩 넘겨 가며 발표하였다. 당시 군대나 정부에서도 주요 내용을 브리핑할 때면 대개 이런 괘도를 사용하였다. 1950~60년대에 흔했다고 하는 이 괘도는 나의 석사 발표 몇 년 뒤에 사실상 사라졌다. 1979년 도쿄대학에 유학 가 보니, 일본에서는 이미 슬라이드 발표가 대중화되어 있었다. 슬라이드란 발표할 내용의 영상 필름을 4각형의 종이 케이스 사이에 끼운 것을 말한다. 롯트링(Rotring)이라는 독일제 제도(製圖) 용구와 원·세모·네모 등 다양한 모형이 잔뜩 그려 있는 판박이 종이(dry transfer symbols)를 이용해 정교한 그래프를 그린 뒤, 교내 문방구점에 가져다 주면 35 mm크기의 네모난 슬라이드로 만들어 주었다. 이 슬라이드를 슬라이드 트레이, 또는 캐러셀(carousel)이라고 하는 원형 회전통에 꽂은 다음, 프로젝터(projector)에 장착하고, 조명을 끈 실내에서 한 장씩 빛을 비추어 스크린에 영상을 띄워 발표하는 방식이었다.1979년 귀국해 보니 우리나라도 이미 완연한 ‘슬라이드 시대’였다. 대학원생들은 슬라이드 원고를 만들어 종로에 있는 특정 문방구점에 슬라이드 제작을 맡겨야 했다. 슬라이드의 제작에는 보통 하루가 걸렸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널리 쓰인 이 방법은 매우 편리하긴 했지만, 슬라이드를 끼운 종이 틀의 두께가 조금만 규격에서 벗어나도 발표 도중에 슬라이드를 실은 원형 트레이의 회전이 멈추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였다.1988년 미국 퍼듀대학에 방문교수로 머물렀을 때에는 강의실에서 OHP(overhead projector)가 즐겨 사용되고 있었다. 밑에서 빛이 비추는 네모난 프로젝터 위에 투명한 플라스틱 필름을 올려놓고, 그 위에 매직 펜으로 필기해 가며 강의하는 방식이었다. 슬라이드와 달리 실내 조명을 끌 필요가 없고, 적어 놓은 내용이 강의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플라스틱 필름의 크기는 대략 A4 크기도 있었지만, 연속해서 감아 가며 필기할 수 있도록 롤 형태로 만든 것도 있었다. 이 OHP는 슬라이드와 병용되었으나 슬라이드보다 약간 먼저 사라졌던 것 같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발달에 힘입어 거의 모든 사람이 파워포인트 (PowerPoint) 라는 앱을 사용하여 슬라이드를 만드는 ‘파워포인트 시대’가 되었다. 그 이후는 컴퓨터에서 영상, 사진, 그래픽, 애니메이션 등을 직접 화면에 출력하는 ‘디지털 프레젠테이션 시대’가 되었다. 발표 도중 슬라이드가 돌아가지 않는 사고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붓글씨는 커녕 펜 글씨도 모르고, 궤도는 커녕 슬라이드조차 모르는 학생들을 보면 어쩔 수 없이 격세지감(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10-07 0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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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52> ‘약의 날’의 제정, 중단, 부활 및 법정화의 역사
‘약의 날’의 제정, 중단, 부활 및 법정화의 역사 ‘약의 날’은 약사법(藥事法) 제정 4주년을 기념하여 1957년 처음으로 11월 18일로 지정되었다. 11월 18일이 1953년 제정된 약사법의 공포일 또는 국회 통과일에 맞춰 정해졌다는 주장도 있으나, 국회 회의록과 정부 기록물 등을 조사한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 초기에는 6월이나 7월 중에 약의 날을 정하려고도 하였으나, 약계의 참여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끝에 11월 18일로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이상 유대규, 「11월 18일 ‘약의 날’의 유래와 오해」, 『약학사회지』 7권 1호, 79~92쪽, 2024)그러나 약의 날은 이듬해인 1958년부터 1972년까지 매년 10월 10일로 바뀌었는데, 이는 1958년 대한약전(大韓藥典)이 제정·공포된 날인 10월 10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던 약의 날은 1973년 ‘보건의 날’로 통합되는 바람에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2003년 3월,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제5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식약청장)에 임명된 나는 곧바로 30년째 사라져 있는 약의 날 부활(復活)에 착수하였다. 매년 식약청이 ‘식품안전의 날’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것처럼, 의약품 안전과 관련된 ‘약의 날’도 부활시켜 기념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2000년부터 의약분업(醫藥分業)이 시행되면서 의약품의 안전성과 신약 개발 등 약업 발전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提高)가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해진 상황이기도 했다.약의 날은 원래 민간 주도의 행사였기에, 식약청 입장에서는 대한약사회(회장 원희목) 등 약업 관련 민간단체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였다. 나는 약의 날이 결코 약사들의 친목행사일에 불과하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범약계의 합의 도출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10일, 대망의 제17회 약의 날 부활 기념식을 개최할 수 있었다. 실로 30년만의 부활이었다. 당일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는 1) 약의 날 부활 선포, 2) 대통령 축하 메시지, 3) 식약청장 기념사, 4) 축사, 5) 의약 발전 유공자 포상, 6) 신약 개발의 가치와 제약산업의 미래에 관한 특별보고, 7) 학술대회 및 기념 포럼 등의 순서로 기념 행사가 진행되었다.부활 기념식이 열린 2003년 10월 10일은,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에게 재신임 여부를 묻는 중간평가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한 날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행사를 진행하였다. 그 와중에 대통령은 약의 날 부활을 축하하는 영상을 보내왔다. 대통령은 영상을 통해 “여러분은 가장 친근한 곳에서 국민의 건강을 돌보는 친근한 이웃의 역할을 잘 감당해 왔습니다. 의약분업이라는 어려운 결정도 국민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며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덕분에 3년이 지난 지금, 의약분업은 상당히 안정적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습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약업계의 새로운 소망인 생명공학 육성과 신약 개발을 위해 정부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도 하였다. 축사 전문은 대한민국 정책브리핑(현재의 Korea.kr)에 남아 있다.그런데 부활한 약의 날인 10월 10일은 식약청이 국정감사를 받는 기간과 겹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2005년부터 다시 11월 18일을 약의 날로 환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의 날이 부활한 지 10년 후인 2013년, 식약청은 복지부의 품을 떠나 국무총리실 소속의 식품의약품안전처(食藥處)로 승격되었다. 이어 2021년에는 약사법 개정을 통해 약의 날이 식약처가 주관하는 법정기념일(法定紀念日)이 되었다. 이때부터 약의 날을 기념하여 의약품 안전성 향상 등에 기여한 유공자에게 훈장 등을 수여하는 포상도 가능해졌다.2021년 11월 18일, 민간 주도로는 마지막으로 약의 날 행사를 공동 주관한 약계 7단체는, 황송하게도 약의 날을 부활시킨 공로를 들어 내게 감사패를 주셨다. 제정, 중단, 부활, 법정화의 과정을 거쳐온 약의 날의 진화 과정은 대한민국 약계 발전의 이정표(里程標)라 할 수 있을 것이다.<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9-23 0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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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51> 국가가 설계해 만든 동경대 약학부
국가가 설계해 만든 동경대 약학부얼마전 약학사분과학회의 김진웅 회장을 통해 동경대 약학부(이하 약학부)의 100년사를 다룬 「동경대학백년사」 (부국사 2(1987), 동경대학 출판부) 를 입수하였다. 그 중에서 약학부의 창설 시기와 배경 부분만을 발췌 정리해 보았다.약학부는 1958년 3월 31일 동경대 의학부 약학과에서 분리·독립하여 창설되었다. 그러나 그 뿌리는 1873년 제1대학구(大學區) 의학교에 설치된 제약학과(製藥學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약학과 시절부터 따지면 85년간에 걸친 교육 경험의 축적이 약학부 창설의 바탕이었다.약학은 의학과는 다른 별개의 전문과학메이지(明治) 새 정부는 근대국가 건설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의·약학 교육의 모델로 당시 선진국이던 독일을 택했다. 독일인 의사 뮐러(L. Müller)와 호프만(T.E. Hoffmann)을 초빙해 의학교육을 독일식으로 재편하였다. 이들은 정부에 약학과 의학은 같은 공중보건 목적을 공유하지만 각각 별도의 전문인력이 담당해야 할 독립 분야라고 건의했다. 불량 수입약의 유통, 약품 감별 능력의 부족, 제약기술의 낙후와 수입 의존은 단순한 교육 문제가 아니라, 국민건강을 위협하고 국가경제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었다.이에 메이지정부는 ‘제약을 진보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도쿄 시내에 제약학교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무국장 나가요센사이(長與專斎)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즉 1873년 7월 25일, 문부성 포달(布達)로 제1대학구 의학부에 제약학과를 설치하면서 일본에서의 근대 약학교육이 제도적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제약학과에서는 예과 2년과 본과 3년의 총5년 동안 독일어, 라틴어, 수학, 화학을 비롯해 약방학(藥方學), 제약학, 약물분석, 약국 실습, 실용화학 등을 가르쳤다.국가가 유학생을 ‘보내고, 돌아오게 하고, 배치하다’약학부 형성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메이지 정부의 인력양성 방식이다. 정부는 독일인 교사를 단순히 초빙하는 데 그치지 않고, 1870년 제1회 유학생 제도를 통해 쇼케이(柴田承桂)와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를 베를린대학에 보냈다. 이들은 훗날 일본 약학의 교육·연구 기반을 세우는 핵심 인물이 되었다.시바타 쇼케이는 베를린에서 화학과 위생학을 익히고 귀국한 뒤, 도쿄의학교 제약학과의 초대 교수로 임명됐다. 그는 독일에 체류 중이던 나가이 나가요시 등에게 전임교사 추천과 실험기기·약품·서적의 구매를 요청했다. 그 결과 독일 유학생들이 추천한 랑가드(A. Langgaard)가 교두(敎頭)로 부임했고, 독일에서 확보한 기기와 교재가 도착하면서 서구 약과대학에 준하는 교육·연구 체제가 갖춰졌다.의학부 안의 약학과에서 독립 학부로1877년 동경대학이 출범하면서 제약학과는 의학부 제약학과로 편입됐다. 이후 제국대학 의과대학 약학과, 의학부 약학과로 명칭과 소속을 바꿔가며 교육과 연구를 확대해 나갔다. 전후(戰後)에는 새 교육기준과 커리큘럼을 마련하고, 제제학, 약품작용학 등 새로운 전공 분야를 추가했으며, 연구시설과 실험장비도 확충했다.1958년 3월 31일 국립학교설치법 개정을 통해 동경대 약학부가 창설됐고, 마침내 4월 1일 의학부 약학과에서 약학부 약학과로 분리·독립했다. 당시 8개 강좌, 교수 8명, 조교수 8명, 조수 20명으로 시작한 약학부는 곧 제약화학과를 신설하고 교육내용을 생물화학과 물리화학 분야로까지 넓혔다.맺음말일본의 약학교육사는 국가가 독일을 선진국 모델로 정하고, 유학생을 선발·파견한 뒤 귀국자를 교육 현장에 계획적으로 배치했으며, 현지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교원·장비·교재까지 확보해 온 국가 주도형 발전 과정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미국·독일·일본 등에서 수학한 약학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귀국해 약학교육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다만 유학과 귀국 인력의 활용이 국가 차원의 일관된 계획 아래 이루어지지 않고 주로 개인과 대학 단위의 노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약학 교육의 방향 정립과 발전에 효과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9-09 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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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50> 선교사의 힘든 선택
선교사의 힘든 선택 얼마 전 캄보디아에서 사역 중인 A 선교사님으로부터 안부 문자를 받았다. 내가 2014년 7월 우리 교회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캄보디아 아웃리치를 갔을 때 처음 만났던 분이다. 벌써 12년이 흘렀지만 이따금씩 인사를 해오신다. 특히 그때 내가 의약품을 많이 마련해 주었다며 감사해하신다. 캄보디아로 출발할 때만 해도 내가 거기로 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막연하였다. 그런데 프놈펜에 도착해 B라고 하는 젊은 한국인 부부 선교사의 사역 현장을 방문하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모임에서 대표 기도를 드리는 동안 생전 처음으로 내내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웃리치는 받는 사람보다 가는 사람이 더 큰 은혜를 받는다는 목사님 말씀이 사실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만난 A 선교사 부부의 신실하고 근면한 사역 모습은 그 자체가 감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더하여 자기들보다 몇 살 후배인 C라고 하는 선임 선교사의 지휘에 순종하는 모습에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아무리 선교사라 해도, 때로는 생각이 다른 젊은 보스의 지휘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쉽지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며칠 동안 A 선교사 내외분과 깊은 교감을 나누었던 우리 아웃리치 팀원들은 마지막 날 공항에서 작별할 때에 서로 눈물로 기도하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12년 전의 그 때를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주시는 A 선교사님께, 선교사님의 극구 사양에도 불구하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작은 후원금을 보내 드렸다. 예전의 나는 ‘선교사란 우리와 달리 처음부터 특별한 소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 또는 선교하기를 즐거워하는 체질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180도 바꾸게 된 계기가 내게 있었다.30여 년 전의 일이다. 같은 교회에 다니던 D라고 하는 50대 후반의 남자 교사 한 분이 교직을 내려놓고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 보츠와나에 선교사로 떠나셨다. 나는 D선교사 내외분이 처음부터 선교사로 태어나신 분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분들이 선교지로 떠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D선교사가 혼자 일시 귀국해 들려주신 이야기는 내게 큰 충격이었다.그는 그곳이 너무 덥고 생활이 힘들어 거기 있는 것이 너무 괴롭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몸이 좀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일시 귀국했는데, 아내 선교사는 빨리 돌아오라고 전화로 매일 성화를 하신단다. 그래서 D선교사는 이런저런 핑게를 대며 차일피일 출국 날짜를 미루고 있다고 하셨다.나는 그 말씀을 듣고 매우 놀랐다. 선교사도 우리와 똑같이 선교 생활이 힘들고, 그래서 선교지에 가기 싫고, 선교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지만, 끝내 그 마음을 이기고 선교지로 가는 길을 선택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니 모든 선교사 내외분들이 엄청 존경스러워졌다. 문득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난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가 즐거워서 지신 것은 아닐 것이다. 가셔야 할 사명의 길이었기에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그 고난의 길을 끝까지 감당하신 것이 아니겠는가!D 선교사님은 결국 다시 보츠아나로 돌아가 오랫동안 사역을 해 오시며, 이따금씩 일시 귀국하신다. 그분의 요즘의 고민은, 정작 본인은 은퇴 후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은데 아내는 그곳에 뼈를 묻자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숙연한 마음으로 들었다.이런 선교사님들로부터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지만, 이런 선교사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그런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D선교사님을 비롯한 모든 선교사님들의 건강과 믿음과 마음의 평안을 간절히 기원한다. 이번 여름에도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는 여러 명이 중앙아시아의 한 나라로 아웃리치를 다녀왔다. 현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 가족을 격려하고, 현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여행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아웃리치는 현지 사람들보다 오히려 다녀오는 사람들이 더 큰 은혜를 받는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된다면 교인이든 아니든 되도록 많은 분들이 해외 아웃리치를 경험해 보기를 권한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8-26 0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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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49> 사람을 무서워하는 나라, 일본(16) / 잃어버린 30년과의 연관성
사람을 사람을 무서워하는 나라, 일본(16) / 잃어버린 30년과의 연관성며칠 전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분석한 동영상을 보았다. 그 내용은 일본이 우리나라와 달리 최근 30년간 발전이 정체된 까닭은, ① 매뉴얼 중심 문화, ② 연공서열, ③ 일본 내부에서만 인정받는 전문가를 길러내는 이른바 ‘갈라파고스 사회’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상당 부분 공감이 갔다. 나는 이 세 가지 현상의 바탕에 공통적으로 ‘사람(남)을 두려워하는 일본인의 특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사무라이 시대는 자칫 잘못하면 남의 칼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무서운 사회였다. 그런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본능적으로 남의 신경을 건드릴 우려가 있는 급격한 변화나 돌출된 행동을 삼가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일본 문화의 저변으로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얼마 전까지 일본에는 선진국 답지 않게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상점이 많았는데 이것도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기 조심스러워하는 일본 국민성의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사람(남)을 두려워하는 일본인의 특성은 일상의 언어 생활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본인은 대화 중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지 않고, 맞장구를 자주 쳐줌으로써 상대의 말에 경청하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또 어떤 제안을 받으면 “노”라고 답해야 할 경우에도 “안됩니다"라고 단정적인 표현을 하는 대신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식으로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차마 ”노“라고 거절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일본어에서 능동적인 표현보다 "생각됩니다", "보여집니다"와 같은 완곡한 수동태 표현을 즐겨 쓰는 것도 상대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일본인의 친절함과 예의 바름, 어떤 행사에 대한 철저한 사전 준비, 높은 질서 의식도 같은 맥락, 즉 상대방을 두려워하는 사회분위기의 영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을 부를 때도 "여보세요" 대신 "스미마센 (죄송합니다)"이라고 한다. 남을 부르는 일조차 두려운 일인 것이다. 헤어질 때는 몇 번씩 돌아보며 인사를 반복한다. 이사를 가면 곧바로 이웃에게 선물을 돌리고, 여행을 다녀오면 직장이나 연구실 동료들에게 작은 과자라도 반드시 사다 주는 풍습도, 사람(남)을 두려워하는 사무라이 문화의 유산이 아닐까 싶다. 일본인의 식사 문화도 매우 흥미롭다. 그들의 식탁에는 우리처럼 함께 떠먹는 찌개 같은 메뉴가 거의 없다. 또 자기 쟁반에 날라온 음식을 쟁반에서 꺼내지 않고 각자 자기 쟁반에 놓인 음식을 먹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쟁반은 오직 운반의 도구일뿐이다. 날라온 음식들을 반드시 쟁반에서 꺼내 식탁에 진열해 놓고, 내 것 네 것 구분없이 먹는 것이 우리의 식습관이다. 일본의 쟁반이 면적을 많이 차지하지 않도록 직사각형이고 작은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나라 쟁반은 운반용이기 때문에 싸이즈가 크고 원형이나 타원형이고 싸이즈가 크다. 그래야 운반 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인이 우리와 달리 각자 자기 음식을 별도의 그릇으로부터 떠먹는 것은, 위생 관념이 철저한 때문이 아니라, 예컨대 웃사람의 찌개 그릇에 내 수저를 집어넣어 음식을 뜨는 행위가 너무 조심스러워 식사를 즐길 수 없기 때문에 생긴 문화인 것이다. 이 역시 남을 무서워하는 사무라이 문화가 낳은 습관이 아닐까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분위기는 자연히 매뉴얼을 중시하는 문화로도 이어진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그들이 이재민에게 음료수를 공급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런 대처방법이 매뉴얼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은 매뉴얼 공화국이다. 큰 사고 이후에도 "왜 융통성 있게 대처하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점부터 반성한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사고가 나더라도 매뉴얼대로만 대처했다면 담당자의 책임을 크게 묻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만사를 매뉴얼에 따라 대처하는 것이 내가 위험에 처하지 않는 가장 현명한 처사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사회가 지나칠 정도로 개인의 판단과 융통성을 중시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연공서열을 중시하고 해외 유학을 꺼리는 분위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능력 위주의 파격적인 인사를 했다가 주변의 반발을 사는 것보다 기존 질서에 따라 인사를 하는 것이 남의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적을 것이다. 이래서 일본 사회는 안정적이지만 역동성이 부족해 보이고, 반대로 우리는 변화는 빠르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역동적이라 사회적 혼란을 겪기도 한다.변화를 두려워하는 문화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수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는데, 이는 연구자가 자리를 자주 옮기지 않고 한 분야를 오랫동안 묵묵히 파고드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일본인의 문화가 큰 장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본인’이라는 시각이 일본 사회, 일본 문화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제도보다 사람의 마음인 경우가 많다. 남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변화의 속도를 늦추는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일본을 참착하고 신중하고 질서 있는 사회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변화에 대한 대처에는 능하지만 때로는 상대를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는, 즉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마음 중 어느 쪽이 더 좋거나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장점은 단점의 다른 얼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장점을 배우고 자신의 약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8-12 0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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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48> 믿음의 유익
믿음의 유익 얼마 전 교회의 한 집사님으로부터 부탁을 하나 받았다.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려는 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에 대해 한 말씀 해 달라는 것이었다. 부담을 느끼던 중, 신앙생활의 앞면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뒷면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설명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1. 하나님을 믿는 믿음믿음이란 우주를 포함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창조와 존재, 그리고 운행의 질서를 주관하시는 무변광대(無邊廣大)한 절대자, 곧 창조주가 계심을 믿는 것이 아닐까 한다.무변광대하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나는 우주가 끝없이 무한(無限)하다는 개념 자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우주가 유한(有限)하다고 가정하면, 그 끝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무한한 우주와 자연의 질서정연함,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신비를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이 모든 일에서 창조주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시계의 모든 부속을 모자 안에 넣고 아무리 오래 흔들어도 저절로 시계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삼라만상의 창조와 질서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주가 개입하신 필연의 결과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 창조주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창조주 하나님이 얼마나 무변광대하신 분인지는 사람이 짐작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는 일인 것 같다. 개미들이 평화롭게 사는 마을에 어느 날 코끼리가 지나가다 소변을 보아 대홍수가 났다고 상상해 보자. 온 마을의 지혜로운 개미들이 몇 달을 연구하고 토론해도 끝내 홍수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코끼리와 그 소변은 개미가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역시 인간의 헤아림 속에 갇히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하나님의 크심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意圖) 또한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고(故) 하용조 목사께서 "당신이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당신이 하나님이지."라고 하신 말씀에 공감한다.믿음이란 결국 무변광대한 능력을 지니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경배하며 찬양하는 일일 것이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자랑할 만한 능력이 티끌만큼이라도 있겠는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믿는 사람은 감히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범사에 겸손해지고, 티끌 같은 나에게 인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멸망의 지름길'이라 불리는 교만에서 벗어나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유익은 참으로 크지 않은가?2. 이웃에 대한 사랑다음으로 믿음의 뒷면인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종교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이제 우리는 사람이신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마지막 카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몸소 사랑을 보여주셨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사람의 아기는 개나 소, 말과 달리 자립할 때까지 매우 오랜 세월 부모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긴 돌봄의 시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부모의 마음에 깊고도 큰 자식 사랑을 심어 주신 것 같다. 애초에 사랑이 없으면 인생을 시작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람인 것이다.그런데도 사람들은 틈만 나면 가족과 이웃 사이에서, 나아가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질투하고 증오하며 전쟁을 벌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사랑’이 여러 가르침 중에 제일 중요하다고까지 말씀하셨다. 믿는 사람들이 먼저 사랑의 본을 보이라고 하신 것이다. 모두가 서로 서로 사랑하는 사회, 생각만 해도 얼마나 아름다운가!맺음말하나님을 믿으면 위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되며,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믿음 생활이 가져다주는 유익이 충분히 크지 않은가?<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7-28 1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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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47> 문명아 좀 천천히 가자 !
문명아 좀 천천히 가자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식당에 가면 키오스크로 음식을 주문해야 한다. 처음에는 거북했지만 이제 나도 제법 익숙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휴대전화로 QR코드를 찍어 주문하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자동차보험도 예전에는 직원이 직접 찾아와 설명을 해주고 계약을 체결했지만, 이제는 대부분 온라인으로 처리된다. 갱신할 때마다 자동차 계기판과 블랙박스 사진을 찍어 올려야 하는데, 결국 해내고 있긴 하지만 매번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상에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연결이 가능한 사이트는 또 얼마나 많은지. 몇 년 전만 해도 코딩을 배워야 한다며 초등학생들이 학원에 다녔는데, 이제는 말(vive) 몇 마디만 하면 인공지능(AI)가 몇 분 안에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내는 바이브 코딩이 유행이란다. 실제로 금년 초에 삼육대 약대 학생들이 벡터라고 하는 바이브코딩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약사공론, 26.6.22).인류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문명(과학기술 등 포함)이 발전하는 것이겠지만, 그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정작 인류가 적응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겨우 하나 배웠나 싶으면 또 다른 변화가 우리 에게 신속한 적응을 강요한다. 인터넷을 사용할 줄 모르면 각종 신고나 신청의 기한을 놓쳐 본의 아니게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특히 나 같은 노인들의 경우 상황이 사실 심각하다. 주민 센터에 이런 첨단 문명 부적응자를 도와주는 전담 부서가 생겼으면 좋겠다.문명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었지만, 지나치게 빠른 발전은 부적응자에게 소외감을 주는 차원을 넘어, 인류의 존립 기반을 흔드는 위기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AI를 장착한 휴머노이드 로봇의 등장은 사람을 로봇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지 않을까 염려된다. 조만간 로봇를 정말 사람과 똑같이 만들 수 있게 된다고 하니, 그 때가 되면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상대가 로봇인지 진짜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한다. 정말 무서운 이야기이다.이제 대학에서 배운 지식으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던 시대도 지나간다고 한다. 그 정도의 전문성은 AI가 더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일부 전문직 분야에서 신입 사원의 채용 규모가 대폭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사람은 AI가 처리한 일을 확인하는 정도의 경륜을 갖고 있는 최고 전문가(사람) 한 명만 필요해진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젊은 세대가 AI에게 직장을 빼앗기니, 이제 사람이 직장에서 경륜을 쌓아 최고 전문가가 될 기회마저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가 수직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1975년 내가 제약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공장에 사람이 참 많았다. 그후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근무 인력이 현저히 줄어들었는데, 앞으로는 AI와 로봇의 도입으로 인력의 필요성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앞으로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사실 오늘날 우리의 문명(과학 기술 포함)은 이미 충분히 편리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 그래서 나는 문명이 10년 정도 멈추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좀 천천히 발전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명은 인류의 적응 여부에 개의치 않고 제 멋대로의 과속으로 발전하고 있다. 인류가 브레이크를 놓친 것은 아닐까? 판도라의 뚜껑이 이미 열린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문명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지 인간을 파괴하면서까지 제멋대로 발전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인류가 만든 문명이 인류를 위협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서둘러 판도라의 뚜껑을 닫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그래서 우선 사람과 구별하기 어려운 휴머노이드 로봇의 개발, 진짜와 분간하기 어려운 가짜 (음성, 영상 등)의 개발 및 제조부터 엄격히 금하기를 제안한다.솔직히 내 생애까지는 이런 변화의 피해를 크게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무거워진다. 문명아, 좀 천천히 가자.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이 시대를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7-15 1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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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46> 일본의 단골약국에서 배운다
일본의 단골약국에서 배운다‘일본의 단골약국과 약사의 직능 변화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회장 김진웅,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 공동 주최)의 제3회 ‘약학사 세미나’가2026년 6월 5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서 열렸다. 연사는 약사공론 편집부국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의약통신 발행인 겸 도서출판 정다와 대표인 정동명 박사(언론학)였다. 세미나 내용을 약사공론 (2026.6.59, 문전약국의 나라 일본, 왜 단골약국으로 방향 틀었나?)의 기사를 참고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1949년 미군정 시기 미국약사회 사절단의 권고에 따라 의약분업법을 제정(1953년) 했지만 의사가 처방전을 발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조항 때문에 분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4년 정부가 의사의 처방전료를 대폭 인상하는 조치를 함으로써 그후 의약분업 기반이 마련되었다. 분업의 확대와 함께 약사의 역할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983년에 복약지도료가 신설됐고 1986년에는 약력관리료가 도입됐다. 이후 일본 약사사회는 여러 의료기관을 이용하더라도 하나의 약국을 정해 약력을 관리 받음으로써 중복투약, 상호작용, 부작용을 관리하는 '단골약국' 개념을 적극 확산시켰다. 2016년부터는 환자가 특정 약사와 약국을 선택해 지속적으로 복약관리를 받을 수 있는 단골약사·단골약국 제도가 제도화되었다. 단골약국이 수가(酬價)를 받게 된 것이다. 단골약사는 24시간 환자의 상담에 대응하며, 필요할 경우 의사에게 처방 변경을 요청하거나 환자 상태를 전달하는 복약관리의 지역 거점이 되었다. 일본은 1994년 재택의료 제도를 도입했는데, 그 후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약사의 재택의료 참여 범위도 확대되었다. 재택환자를 대상으로 의약품 공급과 복약관리뿐 아니라 의료기기 사용 지도, 암성 통증 환자 관리, 종말기 환자와 가족 상담 등도 약사의 업무 영역에 포함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지역포괄케어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지역사회 안에서 의사·간호사·약사가 협력하는 팀의료 체계가 강화되었다. 이것이 1992년 의료법 개정을 통해 약사를 의료 제공자 범주에 포함시킨 배경으로 보인다.일본은 우리와 달리 후생성(보건복지부)이 아닌 문부성(교육부)이 약대 6년제를 추진함으로써2006년 큰 갈등없이 6년제를 실시할 수 있었다. 현재 73개 약대에서 연간 13,500명의 졸업생과 8500명의 약제사가 배출 (합격율 80-85%)되고 있다. 일본은 2018년 온라인 복약지도를 시작했고, 코로나19사태를 거치며 비대면 진료와 원격 복약지도를 확대했다. 2023년에는 전자처방전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해 의료기관과 약국 간의 정보 공유 체계를 구축하였다. 전자처방전은 의사가 처방 정보를 전산망에 등록하면 약국이 이를 확인해 조제한 뒤 결과를 다시 시스템에 입력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이를 통해 중복투약 방지와 약력관리 강화, 의료기관 간 정보 공유를 추진한 것이다.2022년 시행된 리필처방전 제도도 주목할 만하다. 환자는 최대 3회까지 동일 처방전을 사용할 수 있는데, 약사는 환자의 상태와 남은 약, 부작용 발생 여부 등을 확인한 다음 리필조제 할 수 있다.약사의 역할 변화와 함께 후발의약품 (우리의 제네릭 의약품)의 대체조제도 활성화되었다. 의사가 별도 제한 사유를 기재하지 않으면 약사가 후발의약품으로 대체조제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었고, 대체조제시 병의원과 약국 모두 인센티브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2018부터 전 처방 중 대체조제와 성분명 처방의 비율이 80%를 넘었다고 한다. 일본의 약사의 업무는 단순히 약을 전달하는 역할에서 약물치료 전반을 관리하는 업무로 바뀌었다. 우리의 약국 업무도 이제 대물(對物)에서 대인(對人)업무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날 청중들은 일본 약국의 높은 업무 수준에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외국의 약국 상황을 너무 모른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제라도 외국의 사례를 철저히 연구하여 우리의 나아갈 바 미래의 비전을 세우는데 참고해야 할 것이다. 전담 연구 조직의 구성이 필요해 보인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7-01 0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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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45> 일락회(一樂會)의 견학 행사
일락회(一樂會)의 견학 행사 2016년 4월 4일부터 2026년 5월까지 11년 동안 일락회 (한국약학대학정년퇴임교수회)의 주요 활동을 소개한다. 2016년은 이은방 서울대 명예교수가 전임 손동헌 교수(중앙대)에 이어 회장에 취임한 해이다.활동의 대부분은 제약회사 견학이었다. 우선 회사와 교섭하여 견학 날짜를 정한 후 일락회 단톡방(회원 90여 명)을 통해 참가자를 모집한다. 견학 당일 아침 8시경 양재역 근처에서 회사 측이 제공한 버스를 타고 회사에 도착하여 공장을 견학한 다음, 회사에서 제공하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인근의 볼거리 구경한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양재역으로 돌아오는 식으로 진행된다.2016년의 첫 견학일은 11월 23일이었다. 29명의 회원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코스맥스 공장을 견학한 뒤, 인근의 융릉(사도세자의 능)과 건릉(정조의 능)을 방문하였다. 이 내용은 일락회 뉴스레터인 일락회지(一樂會誌) 제12호(2017년 4월, 덕성여대 정기화 회원 기록)에 실려 있다.2017년 4월 23일에는 종로의 한일관에서 총회를 열어 일락회의 발전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어 5월 10일에는 23명의 회원이 충남 당진에 있는 JW생명과학을 견학한 후 심훈기념관과 솔뫼성지를 방문하였다 (2018.5.3, 회지 제13호, 서울대 김종국 회원 기록). 같은 해 11월 7일에는 26명의 회원이 경기도 오산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뷰티 공장을 견학한 뒤 물향기수목원을 둘러보았다 (회지 제13호, 이화여대 이병구 회원 기록).2018년 5월 3일, 22명의 회원이 서울대학교 약학역사관(관장 박정일 회원)을 탐방하였다. 또 10월 3일에는 회원 13명이 조선대학교 이진환 회원의 개인전 개막식(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 참석하였다 (2019.7.21, 회지 제14호, 심창구 회원 기록).2019년 5월 20일, 25명의 회원이 충북 오송에 있는 서흥캡슐 공장을 방문하여 소프트캡슐 제조 공정을 견학한 후 계룡산 동학사를 찾았다. 이때 충남대 김봉희 회원이 동동주와 도토리묵을 대접해 주었다 (2019. 7. 21, 회지 14호, 덕성여대 신승원 회원 기록). 같은 해 10월 24일에는 25명의 회원이 충남 예산에 있는 보령제약 스마트 팩토리 견학한 뒤 예당호 출렁다리를 걸었다 ((2019. 12. 20, 회지 제15호 서울대 김영식 회원 기록).2020~2022년에는 코로나가 극성을 부려 견학을 쉬었다.2023년에는 5월 26일, 24명의 회원이 강원도 원주에 있는 진양제약 공장을 견학한 후 간현관광지와 소금산 계곡을 둘러보았다 (2023. 9. 30, 회지 제16호, 이대여대 하헌주, 덕성여대 조애리 회원 기록). 같은 해 10월 31일에는 23명의 회원이 충북 제천의 휴온스 제약 공장을 견학한 뒤 제천 의림지와 청풍문화단지를 둘러보았다. ((2023. 12. 13, 회지 제17호, 동국대 조정숙 회원 기록).2024년4월 30일, 41명의 회원이 충북 오송에 있는 충북대학교 약학대학과 첨단의료기기센터를 견학한 뒤 청남대를 방문하였다 (2024. 5. 20, 회지 제18호, 숙명여대 강영숙 회원 기록).2025년5월 12일, 28명의 회원이 경기도 향남의 하나제약 공장을 견학한 후 용주사와 화성행궁을 관광하였다 (2025. 12. 31, 회지 20호, 숙명여대 류재하 회원 기록). 같은 해 10월 28일에는 27명이 경기도 가평에 있는 아침고요수목원과 구곡폭포를 탐방하였다 (회보 제20호, 연세대 황성주 회원 기록).2026년 4월 22일, 30명이 충주에 있는 동화약품 공장을 견학한 후 인근의 충주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5월 19일에는 제14회 동화 봄맞이 음악회 (동화약품 보당홀)에 24명의 회원이 참석하였다. 요약돌아보니 11년 동안 견학 10회, 탐방 2회, 총회 및 축하 방문 각 1회, 음악회 참석 1회로 총 15회의 활동을 하였다. 2002년 이전에 창립되어 경희대 권창호, 이화여대 정기용, 중앙대 손동헌 교수님 등에 의해 발전해 온 우리 일락회가 회원들의 사랑 속에 더욱 발전하고 있음이 자랑스럽다.<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6-17 0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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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44> 조항연 약사의 커피믹스 개발
조항연 약사의 커피믹스 개발『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동창회보』 제100호 (2022, p170-173)를 보면 ‘조미료, 진짜꿀, 그리고 커피믹스의 개발’이라는 제목으로 조항연 약사 (사진, 서울대 약대 11회 졸업, 1953~1957)가 쓴 글이 실려 있다. 그 글에 의하면 그가 동서식품의 생산과 기술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1975년(?) 경에 커피믹스를 개발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커피믹스 개발과 관련된 부분만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 조항연 약사와 커피믹스 ©약업신문 “어느 날 등산이나 낚시를 하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먹일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커피 1술, 크림 1술, 설탕 1술을 섞어서 봉지에 담아 5봉짜리 포장물을 만들어보니 담배갑 1개 크기가 되었다. 나는 내심 ‘이거 잘 하면 좀 팔리겠네”라는 생각이 들어 1봉지를 개봉하여 컵에 쏟은 다음 더운 물을 붓고 차 숟갈로 저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상하게도 몇 번을 시도해봐도 깨끗이 용해되지 않고 무언가 불용물(不溶物)이 표면에 뜨는 것이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커피의 산성 때문에 커피크림 성분중의 하나인 '카제인 나트륨'이 '카제인'으로 석출되면서 표면에 뜨는 것이었다. 다행히 학교에서 배운 것이 생각나서, 이런 때는 '약산(弱酸)의 염(鹽)'을 조금 넣어주면 완충(緩衝) 역할을 하여 카제인이 석출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소량의 인산 나트륨, 인산 칼륨 등을 봉지에 넣고 섞은 다음, 더운 물에 녹여보았더니 정말 부유물이 생기지 않고 깨끗하게 녹는 것이었다. 과연 학교에서 배운 대로 약산의 염은 완충제(緩衝劑, buffer)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이것이 최초로 ‘커피믹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지금의 커피믹스는 튜브형 포장으로 시판되지만 처음에는 네모난 파우치형 봉지로 출시되었다. 처음에는 아주 구식인 봉지포장기를 몇 대 돌리며 생산하여 공급하였으나, 순식간에 커피믹스가 인기를 끌어 판매량이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그래서 이런 구식 포장으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여 적당한 포장설비를 찾다가 미국에 1초에 10봉을 포장하는 포장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장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 포장기 회사를 찾아 갔더니, 회사는 설탕으로 포장 시범을 보일 준비를 다 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장기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정말 분당 600포라는 경이로운 속도로 설탕이 포장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세월이 조금 지나면서 시판 설탕의 포장이 네모 포장에서 연필 굵기의 막대 포장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마케팅 및 판매부서로부터 커피믹스도 막대형(튜브형)으로 포장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국제포장전시회에 따라다녀 봐도 튜브형 포장은 기껏해야 3~4줄로 포장되는 기계가 전부이고 그 이상의 기계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그래서 동서식품은 발전성이 보이는 모 기계제작소와 상호 협력하여 10줄짜리 포장기를 국내에서 개발하였다. 능률이 외국제의3배는 되는 포장기가 개발된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를 통해 동서식품이 세계에서 유수한 튜브형 포장기 메이커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16년 전의 일이다 (후략).”최근 (2026.4.22) 조선일보는 조필제 동서식품 부회장이 101세를 일기로 영면하셨다는 기사를 실으면서, 그를 ‘커피믹스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기사에 의하면, 조 부회장은 자서전인 『사막에 닻을 내리고』 (문지사, 2017)’에서 “품질관리 담당 사원이 커피, 프리마 (동서식품 크리머 브랜드), 설탕을 한꺼번에 배합해서 물만 타면 간편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커피믹스 개발에 들어갔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그 품질관리 담당 사원이 바로 조항연 약사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조항연 약사의 현장 아이디어가 조필제 부회장의 경영적 판단에 힘입어 ‘커피믹스’라고 하는 휴대용 커피가 세계 최초로 개발된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은 돌아볼수록 흥미롭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6-04 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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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43> 66년 만에 4·19 혁명 유공자로 선정된 김한주 약사
66년 만에 4·19 혁명 유공자로 선정된 김한주 약사 지난 4월 19일 전후, 제주에 사는 김한주 선배(서울대 약대 15회 졸업)로부터 두 차례의 전화를 받았다. 본인이 서울 강북구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열린 4·19 혁명 66주년 기념식에서 유공자 표창을 받게 되었는데, 이런 계기를 마련해 준 서울대 약학박물관에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이 기념식에서 김한주 선배(제주 4·19기념회장)를 포함한 5인이 4·19 혁명 유공자로 선정된 70명 중 주요 인물로 선정되어 직접 이재명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포장(사진 참조)을 받았다.김한주 약사가 받은 건국포장 ©약업신문국가보훈부(이하 보훈부)의 4월 16일 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김한주 선배는 1960년 당시 서울대학교 약학과 4학년에 재학 중 동기와 후배들을 이끌고 시위에 나서 민주주의 실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이상 약사공론 2026.4.27. 21면 기사 참조).돌아보면 4·19 혁명 다음 날인 1960년 4월 20일, 동아일보 석간에 19일 오전 백색 가운을 입고 시위하는 서울대생들의 사진과 함께 ‘백색 가운을 입고 데모하는 의대생들’이라는 설명이 붙은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나는 이 기사가 오보라는 사실을 선배님들의 전언(傳言)을 통해 알게 되었다. 즉, 그들은 의대생이 아니라 약대생들(1957~1960년 입학생, 15~18회 졸업생)이었던 것이다.나는 기회가 되는 대로 이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다. 감사하게도 김병년 선배(17회, 당시 2학년)는 동아일보로부터 시위 사진 원본을 구해 주었고, 홍청일·박정식 선배(이상 15회)는 사진 속 인물 하나하나에 실명(實名)을 붙여 주었다. 이로써 사진 속 인물들이 약대생임을 명백히 입증할 수 있었다.이제는 동아일보의 오보에 대한 정정 기사를 받아내는 일만 남아 있었다. 마침 서울대 약학역사관장이던 박정일 교수가 동아일보 김동혁 기자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박정식·김한주 선배의 인터뷰를 부탁하였다.드디어 2017년 4월 13일, 약학역사관 자료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두 선배의 준비는 비장하였다. 특히 제주에 사는 김한주 선배는 ‘민주혁명의 기록’(1960년 6월, 동아일보사)과 『월간 사상계』(1960년 6월호) 부록 「피의 화요일」 화보 등을 들고 상경했다.그리고 그 기자는 고맙게도 2017년 4월 19일 자 동아일보 A12면에 ‘4·19 시위 선두에 선 건 의대생 아닌 약대생들’이라는 기사를 내주었다. ‘서울대 약학과 70여 명이 경무대 철문 앞까지 대열 이끌어’라는 부제도 붙여 주었다. 서울대 약대생들의 4 19의거 당시 시위하는 모습을 재확인한 동아일보 기사 ©서울대약학박물관무려 57년 만의 정정 기사였다. 감격이었다. 4·19 시위에 참여했던 서울대 약대 선배들은 물론 나와 같은 약학사 연구자들의 숙원이 풀린 순간이었다. 나는 즉각 이 내용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백년사』(2016) 수정판에 실었고, 「약창춘추 223」(2017년 5월 10일 자 약업신문)에도 소개하였다.보훈부는 아마 동아일보의 그 정정 기사와 『백년사』 등을 보고 약학역사관의 협조를 얻어 김한주 선배와 연락을 취한 듯하다. 김 선배는 4·19 시위 중 경무대 앞에서 맹장이 터지는 부상을 입어 45일간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당시 간호사(현 90세)의 증언으로 이 사실을 입증받아 유공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고 한다.나는 이상의 과정에서 작은 돌 하나를 놓을 수 있었음에 큰 보람을 느낀다. 끝으로 김한주 선배를 비롯해 4·19에 참여한 약대 선배님들의 용기와 헌신에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5-20 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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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42> 기록의 의미
기록의 의미나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를 편찬하면서 여러 대선배님들께서 남기신 회고담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예컨대 1918년 조선약학교 제1회 입학생인 이호벽 선배의 「나와 3·1 만세사건」(약사공론, 1974.5.16), 조선약학교 특별과 제7회 졸업생(1926) 이경봉의 「반도 의약계 대관 2」(삼천리 제10권 제8호, 1938), 조선약학교 본과 제7회(1930) 졸업생인 한구동 교수의 회고담(『한국약학의 아버지 녹암 한구동』, 서울대약대, 2016)과 동기이자 최초의 여약사인 장금산의 「나의 학창 시절」(서울대약대 뉴스레터, 1985) 등이 100년사 복원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뒤이어 경성약전을 졸업(3회 졸업, 1933년)하고 훗날 일동제약을 창업한 윤용구 선배의 「나의 학창 시절」(『서울대약대동창회보』, 1985), 경성약전 15회(1944년) 졸업생 오수창 선배(전 과학수사연구소장)의 「일제에 의해 주석산 제조 지도에 동원된 경험」(『동창회보』, 1987), 1950년 사립 서울약학대학에 입학해 6·25 전쟁 속에서 부산 전시 약학대학에 다닌 조윤상 교수의 회고록(『동창회보』, 2011) 등도 희귀한 기록이었다. 사진 또한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컨대 서울대약대 제9회 박한순 선배님이 기증하신 1955년도 졸업앨범을 통해 1950년 ‘사립 서울약학대학’ 시절의 교가(김성태 작곡, 김광균 작사) 악보를 찾아낸 일은 하나의 쾌거였다. 나는 이 교가의 악보와 가사를 『동창회보』 제103호(2026.1)에 실었다. 2025년 6월 12일 열린 개교 110주년 기념행사에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중창단이 이 교가를 불렀는데 그 영상은 『동창회보』 제103호(2026)에 QR코드로 수록되어 있다. 휴대전화를 이용하면 누구나 그 교가를 손쉽게 보고 들을 수 있다. 이처럼 기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선배님들께 자서전이나 회고담을 써 주십사 부탁드리고 있다. 동창회보는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 데 매우 유익한 매체이다. 내가 동창회장이던 2020~2021년에 발간된 『동창회보』 제98호에는 권창호, 임경택, 지형준, 이은방, 장용택, 최재인, 김종국, 윤창영, 박찬효, 김영제 동문의 회고담을, 제99호에는 주중광 동문(18회, 미국 조지아대 석좌교수)의 인터뷰와 함께 동문 25명의 삶과 직업을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제100호에는 김수만(조선약학교 7회), 우린근(경성약전 7회), 김선봉(서울약학대학 전문부 1회), 신선호(11회), 황기준(25회) 등의 회고담을 실었다. 특히 세계 최초로 커피믹스를 개발한 조항연(11회, 1955년 졸업) 동문의 회고담은 독자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글쓰기를 어려워하신 서정규 선배의 경우에는 광복 이후 혼란기 속에서 미군정으로 팔려 갈 뻔한 ‘서울약학대학’을 지켜낸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직접 청취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제101호(2024)에는 김재환, 이정석, 김대중, 맹호영 동문의 회고와 함께 서영준, 이봉진, 조윤수 교수의 정년 인터뷰, 그리고 한덕용, 김병각, 이상희, 한용남, 김상훈 동문의 추모사를 실었다. 제102호(2025)에는 조항연 동문의 회고담 2편을 추가로 실었다. 내가 창립한 약학사분과학회의 학회지 『약학사회지』 역시 기록을 남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제1회 졸업생 손동헌 명예교수의 월남과 약학 인생」(제4권, 2021), 이상섭 교수의 「냉전기 동구권 학회 참석기」(제5권, 2022), 원로 「군진약사들의 회고담」(제6권, 2023),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설립 배경 및 발전 과정」(제7권, 2024), 그리고 「원로 약사 제약공장장 10인의 회고」 및 「서울대약대 약초원과 약용식물학 교실에 관한 회고」(제8권, 2025) 등이 그 예인데, 이들은 모두 인터뷰나 좌담회를 개최하여 녹취한 기록이다. 이처럼 기록을 남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기록한 사건이 후세에 과도하게 중요시되는’ 일이 없도록 기록자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5-06 1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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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41> 손녀의 전화.
손녀의 전화 며칠 전 막내 손녀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올 해 중학교에 입학한 후 바쁘다고 내 전화도 잘 받지 않던 아이가 스스로 전화를 걸다니! 기쁘고 황송한(?) 마음에 얼른 아내를 불러 함께 손녀의 말을 경청했다. 손녀는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날은 그 학교의 학생회 임원을 뽑는 날이었다. 손녀는 임원이 되고 싶어 여러 부 중 이름이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기획부’에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선정은 신청자 중 서류 심사를 통해 2~3명을 선발한 뒤, 이들을 대상으로 면접을 거쳐 1명을 뽑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두 명씩이었던 다른 부서와 달리 기획부만 서류 통과자가 3 명이었다. 이로부터 손녀는 기획부 지원자가 다른 부 지원자보다 많았던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나 역시 그 짐작에 동의했다. 면접위원은 3 명으로, 2학년 선배 1명, 3학년 선배 1명, 그리고 선생님 1분으로 구성되었다. 면접 문제는 예상했던 문제도 있었지만 제법 까다로웠다고 한다. 손녀는 아는 문제가 나와도 일부러 몇 초간 뜸을 들인 뒤 신중하게 대답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손녀는 3 대 1이라는 가장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기획부 임원으로 선발되었다. 손녀는 가장 인기가 높은 부에서 임원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몹시 기뻤다. 그 기쁨을 참을 수 없어 몸소(?) 우리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오후, 손녀가 좀 분개(?)할 일이 생겼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몇몇 친한 친구들에게 “나 오늘 기획부에 뽑혔어”라고 살짝 자랑의 말을 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와, 정말 축하해!”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한 친구는 “나는 ○○반에 들어갔다”라고 했고, 다른 친구는 “나는 OO 반에 신청했는데 떨어졌어” 라고 자기 이야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손녀는 이에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먼저 “축하한다, 좋겠다”는 반응을 보인 뒤에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손녀는 친구들에 대한 서운함을, 임원으로 뽑힌 기쁨보다 더 열정적으로 우리에게 토로했다. 나는 손녀가 자신의 서운했던 감정을 가감 없이 이야기해 주는 그 순수함에 감동하였다. 더불어 아직도 우리가 손녀의 하소연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흐믓해졌다. 사실 우리 모두는 남의 경사에 진심 어린 축하는 커녕,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일본에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상대방의 말끝마다 “혼또데스까 (정말이에요?)” 또는 “우소데쇼 (거짓말이죠?)” 하며 맞장구를 쳐준다, 이는 ‘내가 당신의 말을 잘 듣고 있다’는 표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화 중에 이런 맞장구를 잘 치지 않는다.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맞장구를 치지 못하는 것은, 먹을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은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아이구, 허리가 갑자기 아프네”라고 하면, 상대방은 “어디가 얼마나 아픈데?” 하지 않고, “나도 요즘 여기가 아프네” 하며 자기 소리를 한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 상대방의 호소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게 된 것은, 우리가 늙어가면서 여기저기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업보(業報)일지도 모른다. 더하여 평소 상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훈련이 부족했던 탓도 있어 보인다. 아무튼 손녀와의 긴 통화 끝에 우리 부부는, 그 어려운 기획부 임원으로 선출된 쾌거(?)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주었고, 친구들의 무반응에 대한 서운함에 백 퍼센트 공감해 주었다. 그제사 손녀는 마음껏 자랑하지 못했던 아쉬움, 그리고 친구들의 반응에 대한 서운함이 어느 정도 풀린 듯했다. 전화를 끊기 전에 나는 1) 자랑할 일이 생기면 가족, 즉 부모와 형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마음껏 자랑해야 한다. 2)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가족과는 다르니 조금 절제해서 겸손하게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다’. 3) 나는 네가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자주 칭찬해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 주었다. 손주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내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할렐루야!<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4-15 0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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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40> 객관적 시각
객관적 시각 우리는 사물이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본다’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정확하고 공정하게 바라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주관적으로 본다’고 하면 불공정하게, 즉 나에게 유리하게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대개 객관성이 주관성보다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오늘은 객관적 시각, 나아가 소위 메타인지(meta認知)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대전제 하에 다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가볍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오래전 한·일 축구 경기 중계 방송의 해설자가 ‘너무 객관적으로 해설을 한다’고 해서 해설자 자리를 뺏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대해 우리 아들은 “우리끼리 보는 방송인데, 꼭 그렇게 객관적일 필요가 있나요?” 라고 코멘트 했다. 예컨대 일본 선수와 우리 선수가 충돌했을 때 웬만한 상황에서는 ‘일본 선수의 잘못’인 것 같다고 말해주면 시청자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들의 논리에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로부터 모든 상황에서 객관성이 늘 최선은 아니라는 통찰(通察)을 얻게 되었다. 특히 가족 관계에서 그래 보인다. 아내가 이웃과 다투었을 때 객관적으로는 아내의 잘못이 더 커 보일 때라도 남편은 우선 아내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 또 아버지가 남과 시비에 휘말렸을 때 자식은 우선 아버지의 편에 서야 한다. 여기에서 객관적이라고 할 때의 객(客)이라는 글자의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주인이 수정과(水正果)를 내오면 내가 손님(賓) 대접을 받는 것이고 식혜(食醯)를 내오면 지나가다 들른 ‘과객(過客)’ 정도의 대접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수정과는 수정과액에 곶감을 넣고 한참을 불린 뒤에야 손님에게 낼 수 있어서 기다리고 있던 손님에게만 낼 수 있다. 반면에 식혜는 그냥 퍼주면 되는 음식이므로 불쑥 찾아온 나그네에게는 식혜를 낼 수 밖에 없다.) 큰 행사장에서 축사(祝辭)를 부탁받는 사람은 내빈이지 객이 아니다. 만약에 객이 ‘객(客)쩍게’ 내빈 행세를 하려 들면 십중팔구 비웃음을 사게 된다. 이처럼 객은 주인이 기다리던 손님이 아닐뿐더러 가끔은 주인에게 번거로운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客觀的)’이라는 말로부터는 주인 정신이 결여되고 무책임하며 다소 냉소(冷笑)적인 시선(視線)마저 느껴진다. 시험 문제에도 주관식과 객관식이 있는데 객관식에서는 정답이 아닌 답지(答枝)를 고르면 무조건 0점이다. 그래서 채점자의 재량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식은 공정하지만 냉정한 평가 방법이다. 반면 주관식에서는 정답은 아니더라도 논리를 갖추어 성의껏 답안을 쓰면 얼마간의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주관식 시험이 객관식 시험보다 조금 더 인간적이라고 하면 궤변(詭辯)일까? 아무튼 앞에서 중계방송을 예로 들었지만 범사를 객관적으로만 바라보기로 한다면 세상은 한결 재미없고 삭막해질 것이다. 특히 가정사를 객관식 문제처럼 봤다가는 큰 낭패(狼狽)를 당할 우려가 크다. 부부 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효도와 사랑, 그리고 형제 간의 우애(友愛)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어찌 ‘옳다·그르다’라는 객관식 답지(答枝) 중에서 선택할 수 있겠는가? 가족을 마치 과객(나그네, 남) 대하듯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보고 비교 평가한다면 그 가정에 무슨 안식과 따듯함이 있겠는가? 그러나 가족 한 명 한 명을 정성을 다해 대접해야 할 내빈, 아니 더 나아가 나와 함께 우리 가정을 일궈야 할 ‘주인(主人) 중의 하나’로 여긴다면 필경 그 가정에는 화목과 사랑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우리 집, 우리 회사 그리고 우리 나라를 객관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남의 집, 남의 회사, 남의 나라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일은 결코 편협(偏狹)함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서이고 인습(因習)이다. 물론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되겠지만 객관적이라는 미명(美名) 하에 우리라는 공동체에 대해 마치 남을 대하듯 차가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을 사는 데는 어느 정도 ‘주관식’ 시각과 같은 여백과 따듯함이 필요해 보인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4-01 10: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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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39> 동화약방 초대 사장 민강의 독립운동과 조선약학교 설립
동화약방 초대 사장 민강의 독립운동과 조선약학교 설립 동화약품은 2월 25일 오전 10시 서울 순화동에 있는 신축 본사 1897홀에서 초대 사장 (당시는 동화약방) 민강(閔橿, 1883~1931)의 생애를 다룬 ‘민강 평전(評傳)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였다. 민강은 1897년 동화약방을 창립하여 우리나라 근대 제약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로, 궁중 선전관이었던 부친 민병호와 함께 국산 신약 ‘활명수’를 개발하여 구한말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또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즉, 대동청년단 활동에 참여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동화약방을 독립운동의 연락망과 자금 통로로 활용하였으며, 활명수 판매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으로 이동할 때 활명수를 판매하여 활동 자금을 마련한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동화약방에 서울 연통부(聯通府)가 설치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963년 제약업계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追敍)받았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큰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서울대 약대) 관계자를 비롯한 약학계 인사 약 25명이 참석하였는데, 약학계 인사들이 이처럼 많이 참여한 데에는 아마 다음과 같은 배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첫째, 민강 사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약학교육기관 설립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한일강제병합(1910) 이후 조선총독부는 ‘약품 및 약품영업취체령’ 제정(1912)을 통하여 근대적 약업(藥業)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이에 따라 약종상과 약제사를 양성할 교육기관의 필요성이 생겼다. 이에 따라 1915년에 1년제의 조선약학강습소가 개설되었으나 1916년 실시된 최초의 약제사 시험에 졸업생이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자, 정식 약학교육기관의 설립 필요성이 대두(擡頭)되었다. 이에 민강을 비롯한 약업인들이 자금 마련을 주도하여, 1918년에 2년제 조선약학교를 설립하였다. 민강은 조선약학교의 6인의 상의원(常議員) 중 한 명이었다. 조선약학교는 1930년에 경성약학전문학교, 광복 후인 1946년에는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바뀌었다가 1950년에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민강은 이처럼 우리나라 근대 약학교육의 출발점에 서있던 인물이다. 둘째, 동화약품이 서울대 약대와 맺어 온 인연 때문이다. 1983년 동화약품은 액면가 500원의 주식 2만 주를 서울대 약대에 기부하여 서울대 약대 연구 재단의 출범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서울대 약대 인사들의 다수 참석은 이래저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셋째, 동화약품의 역사 계승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초대 민강 사장의 뒤를 이은 4대 민인복 사장은 1937년 회사를 민족기업가 윤창식에게 넘겼다. 이후 회사의 경영은 윤광열 회장과 윤도준 회장으로 이어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 윤도준 회장은 독립운동에 관여해 온 두 선친의 후손답게, 남산 일대의 일제강점기 흔적을 찾아보는 ‘남산 역사탐방 프로그램’을 50회 이상 이어 오고 있다. 또한 동화약방의 초대 사장 민강의 역사를 동화약품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계승하여 기리고 있다. 사람들은 민씨 일가(一家)의 역사를 계승하는 윤씨 일가의 모습에 감동을 느낀다. 넷째,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에 대한 윤도준 회장의 각별한 관심 때문이다. 그는 2025년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약학사분과학회를 매년 지원하겠다고 자진해서 약속해 주었다. 더구나 학회의 요청보다 더 많은 지원을 약속하였다. 이날 약학사분과학회 회원이 특히 많이 참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歸結)이다. 평전의 뒷부분에는 1930년경 이화여고보(梨花女高普) 학생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민금봉 여사의 활동이 실려 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민여사의 손녀인 송지희 서울시립대 교수의 간절한 마음이 작가 고진숙을 움직인 덕분이라고 한다. 송교수의 진심도 감동적이었다. 이 출판기념회는 한 제약 기업인의 독립운동이 근대 약학교육의 발아(發芽)와 맞물려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뜻 깊은 행사였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3-18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