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맹
미래 전쟁에 가장 필요한 게 뭘까? 드론? AI? 독약과 해독제?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그래도 수많은 보기 중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택지가 혈액이다. 결국 마지막에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피를 흘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피가 모자라면 전쟁을 마무리지을 수 없다.
수혈이 꼭 전쟁 때문에 개발된 기술은 아니지만, 전쟁을 계기로 빠르게 진화하기는 했다. 가령 ABO식 혈액을 통한 직접 수혈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시행되었고, 1930년대에는 지금의 혈액은행 제도가 정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보다 광범위하게 혈액이 이송되었는데 이때 빠르고, 변질 없이 전장에 전달하도록 성분을 분리하고 건조 혈액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수혈받고 살아난 사람들은 말 그대로 ‘혈맹’이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오염된 한 팩의 피가 다른 피를 대량으로 함께 섞여서 수혈되다 보니 황열병이나 간염 등의 질환이 대규모로 발병한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혈장을 분리하는 과정에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이뤄지기도 했다. 혈액 중 지질단백질이 밀도에 따라 두 가지로 구별된다는 것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알려졌다. 다만 효율적인 분리는 좀 어려웠는데, 두 지질단백질 즉 HDL과 LDL을 빠르고 정확하게 분리하는 방법은 초원심분리기를 이용해 이뤄졌다. 이 방법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방사성동위원소를 깔끔하게 분리하는 방법을 응용한 것이다. HDL과 LDL, 나아가 콜레스테롤 연구가 우리 인류 건강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전쟁 기술의 활용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다.
최근 들어 연구되는 분야는 인조 혈액이다. 과거에는 전장에 보내기 위해 헌혈을 주로 했다. 육군 장병에게 피를 보내기 위해 줄을 서곤 했었는데 그다지 먼 기억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군인이 피를 뽑아 민간 병원에 제공하는 시절이다. 평화로운 시절이라는 증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어떨까? 다시 1970년대처럼 민간인들이 육군 장병을 위해 자신의 소매를 걷어 부칠까?
이런 고민은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하고 있다. 피가 없으면 전쟁을 하지 못 하는데 피가 없다. 로봇으로 세밀하게 전투를 마무리하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날이 언제나 오겠는가?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피가 있어야 한다. 충분히. 피를 어떻게 하면 확보할 수 있을까?
질문을 바꿔 보자. 피는 왜 소중할까? 혈액 내 모든 성분이 소중하겠지만 가장 시급하게 생명과 연결된 기능은 산소 운반이다. 적혈구 중 헤모글로빈이 담당하는 기능이다. 헤모글로빈 속 헴은 철 이온을 이용해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적절한 조직으로 옮겨 준다. 가끔 일산화탄소나 청산가리가 이 기능을 방해하면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날 정도로 소중한 기능이다.
헤모글로빈은 단백질이다. 21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 시점에서 단백질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에서 헤모글로빈을 만드는 시도도 이뤄졌다. 하지만 단백질 합성은 극도로 어려운 분야다. 유전자 염기서열을 조작해 아미노산을 순서대로 구성할 수는 있지만, 단백질에는 아미노산 외에도 당과 같은 다양한 성분들이 들어와서 3차원 구조를 형성한다. 그에 따라 기능도 달라진다. 헤모글로빈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전략도 나날이 발전하지만 갈 길이 멀다.
그보다 혈액 공급에 가까이 다가간 분야는 인공 혈액이다. 예를 들어 소에게서 나오는 피는 시간이 지나면 응고되어 의학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 이 피를 활용할 수는 없을까? 소의 혈액도 적당히 가공한다면, 그리고 조건만 맞으면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긴급한 상황에서는 사용할 수 있다.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이러한 개념 하에 인공 혈액이 혈액 대체재(blood substitute)로 판매되고 있다. 미래에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그래도 미래는 미래일 뿐이다. 동물 유래 물질이 인체에 들어오는 데에는 여전히 장애가 있다. 면역 반응과 같은 문제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면역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혈액 대체재를 개발하는 쪽으로 연구 방향이 모아지고 있다.
자연은 언제나 과학의 스승이다. 언젠가 과학이 자연을 따라잡고 뛰어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피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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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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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맹
미래 전쟁에 가장 필요한 게 뭘까? 드론? AI? 독약과 해독제?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그래도 수많은 보기 중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택지가 혈액이다. 결국 마지막에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피를 흘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피가 모자라면 전쟁을 마무리지을 수 없다.
수혈이 꼭 전쟁 때문에 개발된 기술은 아니지만, 전쟁을 계기로 빠르게 진화하기는 했다. 가령 ABO식 혈액을 통한 직접 수혈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시행되었고, 1930년대에는 지금의 혈액은행 제도가 정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보다 광범위하게 혈액이 이송되었는데 이때 빠르고, 변질 없이 전장에 전달하도록 성분을 분리하고 건조 혈액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수혈받고 살아난 사람들은 말 그대로 ‘혈맹’이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오염된 한 팩의 피가 다른 피를 대량으로 함께 섞여서 수혈되다 보니 황열병이나 간염 등의 질환이 대규모로 발병한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혈장을 분리하는 과정에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이뤄지기도 했다. 혈액 중 지질단백질이 밀도에 따라 두 가지로 구별된다는 것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알려졌다. 다만 효율적인 분리는 좀 어려웠는데, 두 지질단백질 즉 HDL과 LDL을 빠르고 정확하게 분리하는 방법은 초원심분리기를 이용해 이뤄졌다. 이 방법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방사성동위원소를 깔끔하게 분리하는 방법을 응용한 것이다. HDL과 LDL, 나아가 콜레스테롤 연구가 우리 인류 건강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전쟁 기술의 활용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다.
최근 들어 연구되는 분야는 인조 혈액이다. 과거에는 전장에 보내기 위해 헌혈을 주로 했다. 육군 장병에게 피를 보내기 위해 줄을 서곤 했었는데 그다지 먼 기억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군인이 피를 뽑아 민간 병원에 제공하는 시절이다. 평화로운 시절이라는 증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어떨까? 다시 1970년대처럼 민간인들이 육군 장병을 위해 자신의 소매를 걷어 부칠까?
이런 고민은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하고 있다. 피가 없으면 전쟁을 하지 못 하는데 피가 없다. 로봇으로 세밀하게 전투를 마무리하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날이 언제나 오겠는가?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피가 있어야 한다. 충분히. 피를 어떻게 하면 확보할 수 있을까?
질문을 바꿔 보자. 피는 왜 소중할까? 혈액 내 모든 성분이 소중하겠지만 가장 시급하게 생명과 연결된 기능은 산소 운반이다. 적혈구 중 헤모글로빈이 담당하는 기능이다. 헤모글로빈 속 헴은 철 이온을 이용해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적절한 조직으로 옮겨 준다. 가끔 일산화탄소나 청산가리가 이 기능을 방해하면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날 정도로 소중한 기능이다.
헤모글로빈은 단백질이다. 21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 시점에서 단백질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에서 헤모글로빈을 만드는 시도도 이뤄졌다. 하지만 단백질 합성은 극도로 어려운 분야다. 유전자 염기서열을 조작해 아미노산을 순서대로 구성할 수는 있지만, 단백질에는 아미노산 외에도 당과 같은 다양한 성분들이 들어와서 3차원 구조를 형성한다. 그에 따라 기능도 달라진다. 헤모글로빈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전략도 나날이 발전하지만 갈 길이 멀다.
그보다 혈액 공급에 가까이 다가간 분야는 인공 혈액이다. 예를 들어 소에게서 나오는 피는 시간이 지나면 응고되어 의학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 이 피를 활용할 수는 없을까? 소의 혈액도 적당히 가공한다면, 그리고 조건만 맞으면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긴급한 상황에서는 사용할 수 있다.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이러한 개념 하에 인공 혈액이 혈액 대체재(blood substitute)로 판매되고 있다. 미래에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그래도 미래는 미래일 뿐이다. 동물 유래 물질이 인체에 들어오는 데에는 여전히 장애가 있다. 면역 반응과 같은 문제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면역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혈액 대체재를 개발하는 쪽으로 연구 방향이 모아지고 있다.
자연은 언제나 과학의 스승이다. 언젠가 과학이 자연을 따라잡고 뛰어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피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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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