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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싱가포르는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등의 다양한 문화권이 공존하는 동남아시아 국가이다. 이에 싱가포르 정부는 각 문화권의 전통 예술을 존중하는 민족화합정책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중국인들이 말레이시아 문화를 배우고 말레이시아인들이 인도 문화를 배우는 ‘문화의 상호교류의 이해’를 적극 장려한다. 이처럼 복합적이고 통합적인 문화적 배경을 끌어안아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 싱가포르만의 저력이다.
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 후 짧은 시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그 놀라운 성장의 바탕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융합 문화예술을 만들어가기 위한 예술정책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인 개입과 통솔을 하고 있다는 점 또한 중요하게 생각할 지점이다. 특히 싱가포르는 젊은 층의 전통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한다. 다양한 공연 행사 및 각국의 전통예술 대회를 여는 등 그들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장려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문화예술 지도를 그렸을까? 1989년의 도시계획 정책은 싱가포르를 문화예술의 중심지이자 동서양의 관문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더불어 국제적인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금융, 교육에 힘을 쏟는 것은 물론이고 도시 개발 과정에 문화가 바탕이 되어야 모든 분야가 골고루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하고 도시를 계획했다. 그 안에 공연예술 대표기관인 ‘에스플레네이드’가 있다. 도시 계획 초기부터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문화용 부지를 사전에 마련해 해안과 도심을 잇는 노른자위 땅에 복권 기금을 바탕으로 설립했다.
공연장 외벽은 시민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위해 유리로 만들어져 언제나 공연장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로비는 개방되어 공연이 없을 때에도 언제든지 들어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 건축에서부터 드러난다. 에스플레네이드의 프로그래밍 또한 클래식, 연극, 전통예술, 시각 예술 등의 분야를 모두 아우른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첫째, 각각의 민족 문화를 고려하여 전통예술 공연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중국 명절인 설날에는 영어와 중국어로 공연을 하고 말레이시아의 명절인 하리 라야 기간에는 말레이시아 공연 축제가 열리는 식이다.
둘째, 에스플레네이드의 공연 프로그램의 70%는 무료 공연이다. 야외 공연장에서는 매일 무료 공연이 열려 지나가는 관객 누구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대극장에서 열리는 ‘Beautiful Sunday'가 무료 시리즈의 대표적인 공연이다.
20년 동안 에스플레네이드의 수장을 역임한 벤슨 푸아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무료공연을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싱가포르는 여러 민족을 존중하며 포용하는 싱가포르만의 색을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나가고 있다. 특히 무료 공연은 이를 통해 얻는 무형의 이익이 더 크다. 먼저, 신인 예술가의 무대 경험을 쌓아줄 수 있고, 미래 관객이 전통 공연을 접할 기회가 확장된다. 그리고 에스플레네이드 고유의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 언제나 음악이 있고 대중들에게 열려있는 장소로 에스플레네이드가 기억되었으면 한다.”
더불어 그는 미래 관객 계발에 대해 ‘바다에 돌을 던져 둑을 만드는 것’이라며 강조했다. 핸드폰 스트리밍에서 k-Pop을 골라 듣는 청소년들도 야외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전통음악을 자주 접하다 보면 전통음악에 대해 친숙해질 것이고, 후에 전통음악을 자연스럽게 찾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싱가포르는 ‘SG Culture Anywhere’ 라는 슬로건 하에 예술 향유층 확대에 힘쓰고 있다. 이렇게 정부와 기업이 예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은 예술을 통해 창의성, 융통성, 다양함을 얻을 수 있고, 이것이 국가 발전의 근간을 이루는 힘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국가가 전폭적인 후원을 하는 에스플레네이드는 예술이 자연스럽게 사회에 스며들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예술을 공부로 느끼는 순간 아이들은 흥미를 잃기 쉽다. 벤슨 푸아의 말처럼 예술이 아이들의 주변에서 맴돌고 무의식 속에 예술이 스며들 때, 성인이 되어서도 예술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 관객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돌을 던져 둑을 쌓아야 할까?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어린이와 청소년의 마음속에 예술이 자리잡아 성인이 되어있을 때 예술을 즐기게 할 수 있을까? 이를 바탕으로 창의적이고 융통성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우리의 전통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을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 아이들이 k-pop에 익숙한 것은 접할 기회의 장이 크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고 무대를 볼 수 있는 대중가요처럼 전통음악과 클래식 역시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무대를 늘릴 필요가 있다. 또, 음악 수업 시간은 딱딱한 수업이 아니라 즐거운 감상과 발표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효과적이고 질 높은 예술교육에 대한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계획해야 한다. 다양하고 유연한 사고를 가진 인재를 육성하는 데 예술교육이 제몫을 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하고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곳곳에서 즐길 수 있는 질 높은 무료 예술 공연, 그리고 예술과 다른 과목을 연계하여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통합교육 같은 다양한 정책 등을 펼친다면 우리 어린이와 청소년의 삶 속에 예술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1-06-04 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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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그야말로 매진 행렬의 연속이다. 간혹 장기간 사랑받은 뮤지컬 스테디셀러 작품이 가진 생명력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지만, 적어도 몇몇 작품엔 그와 같은 공식이 절대 통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뮤지컬 ‘시카고(CHICAGO)’다.
믿고 보는 뮤지컬 ‘시카고’가 한국 공연 21주년 기념 공연을 이어간다. 지난 4월 2일 서울 대성 디큐브 아트센터에서 개막한 공연은 오는 7월 18일까지로 예정돼 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시카고’는 1975년 초연 이래 무려 40여 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강력한 명성을 가진 브로드웨이 대표 뮤지컬이다. 날카로운 사회 풍자와 재기발랄한 표현이 강점인데, 여기에 관능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연기와 경쾌하고 농염한 재즈 음악 특유의 분위기가 잘 어우러진다.
물질만능주의와 향락으로 가득했던 1920년대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동명 영화로도 무척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마 영화로 이 작품을 먼저 접한 관객이라면 르네 젤위거와 캐서린 제타존스, 리차드 기어 주연의 2002년 작 영화를 우선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출발은 연극이 먼저였다. 시카고 트리뷴 지의 기자이자 희곡작가였던 모린 달라스 왓킨스가 한 공판에 영감을 받아 탄생시킨 연극(원제 ‘A Brave Little Woman’, 1926년 작)은 뜨거운 호평을 받고 무성영화로 제작됐다. 이후 좀 더 시야를 넓힌 작품이 뮤지컬로 재탄생되며 계속된 변화를 거쳐, 1996년부터 지금의 ‘시카고’로 자리 잡았다.
각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온갖 방법으로 무죄를 선고받으려는 여성들, 그리고 자신의 부와 명성을 유지할 목적으로 이들 곁에 선 속물 변호사 이야기엔 휩쓸리는 언론과 더불어 그보다 더 쉽게 휩쓸리는 사회를 향한 비판이 담겼다. 사랑스럽고 예쁘면서도 적당히 허술한 록시 하트의 거짓말과 법의 허점을 파고든 빌리 플린이 만든 합작 시나리오는 탄성을 자아낼 만큼 그럴듯하다. 안무가 밥 파시, 앤 레인킹의 감각적인 안무도 눈길을 끈다. 화려한 쇼 비즈니스의 중심에서 ‘살인을 했지만, 죄는 아니다’라 당당히 외치는 록시 하트와 벨마 켈리를 보다 보면 어느새 자연스레 수긍한 고갯짓을 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될지 모른다.
뮤지컬 ‘시카고’는 일반적인 작품과 달리 평범한 플롯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시간에 따른 순차 구성을 택하기보다 극적인 연출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등장인물의 소개나 퇴장, 구체적인 상황 묘사를 하는 장면에서 이 같은 특성이 좀 더 두드러진다. 보드빌 형식의 무대는 눈부시게 화려한 빛으로 인물들을 조명한다. 무대 중앙 박스에 자리한 오케스트라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마치 재즈 클럽처럼 생동감 가득한 연주를 펼치는 이 15인조 밴드가 작품 안에서 또 어떻게 녹아드는지 잘 살펴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그렇다면 뮤지컬 ‘시카고’가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잘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무엇보다도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에 바탕을 둔 공감대가 자연스레 형성된 까닭도 있다. 언론은 대체로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소모전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여전히 선동되기 쉬운 대중의 경우, 진실보다는 믿고 싶은 사실의 손을 들어주려고 한다. 그런 가운데 개인이 내심에 품은 본능과 욕망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특성 중 하나란 사실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현실은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매력적인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 배우들 또한 큰 역할을 차지한다. 이번 ‘시카고’에도 최정원, 윤공주, 아이비, 티파니 영, 민경아, 박건형, 최재림 등 실력 있는 뮤지컬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여 관객들의 기대감을 확실하게 충족시킨다. 그중에서도 아직 ‘시카고’를 보지 않은 예비 관객이라면 초연부터 지금까지 무려 21년 동안 같은 작품을 연기한 배우 최정원의 무대만큼은 꼭 직접 보길 추천한다.
관록이 묻어난 무대는 최고의 디바답게 언제 봐도 더없이 감동적이다. 그가 ‘All That Jazz’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저절로 온몸이 뜨거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또, ‘역대 최연소 빌리 플린’ 최재림의 에너지 가득한 노래와 복화술 연기 또한 압권이다. 그가 선보인 ‘We Both Reached For the Gun’ 프레스콜 영상은 온라인에서 이미 크게 주목받은 바 있다. 마지막으로, 10년 만에 뮤지컬 무대에 선 티파니 영의 무대도 사랑스럽다. 계속해서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 배우는 관객이 먼저 알아본다. 아마 이번 작품을 기점으로 새로운 활동 영역을 구축하게 되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러닝타임 내내 모두의 눈과 귀를 황홀하게 할 뮤지컬 ‘시카고’. 작품을 봤던 관객이 시즌마다 다시 공연장을 찾고, 뮤지컬을 즐겨보지 않았던 관객들도 일부러 걸음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 가진 매력이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번 시즌부터는 실감 나는 연출을 위해 쓰였던 담배 소품 사용도 중단했다고 하니, 혹시나 이 때문에 관람을 망설였다면 이제 편안하게 관람해도 괜찮겠다. 경쾌하고 멋진 무대가 당신에게 신선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것이다. <사진제공 : 신시컴퍼니>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1-06-01 1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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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한국의 많은 이들이 현재 '준며들고' 있다. 준며든다는 표현은 개그맨 '최준'과 '스며들다'의 합성어로 최준에게 빠져든다는 의미의 신조어다. 현재 그는 코로나 시대에 발맞춰 B대면 데이트를 히트시키며 카페사장이라는 '부캐(부캐릭터)'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댓글 또한 주목받고 있는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진짜 이상한데 왜 끝까지 보고 있지?", "부담스러운데 계속 보게 되는 내가 싫다".
베토벤 합창환상곡 공연장면 (출처:싱가포르 심포니 오케스트라)
뭔가 과하면서고 은근히 끌리는 그의 부캐를 보며 연상되는 베토벤의 작품이 있다. '합창 환상곡(Choral Fantasy)'이라는 곡이다. 사실 베토벤같은 위대한 작곡가에게서 위대한 '띵작'을 기대하는건 당연지사. 하지만 이 곡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1808년의 초연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가 작곡한 위대한 교향곡들의 그늘에 가려져 왔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대략 20분이라는 모호한 길이 속에 오케스트라, 피아노, 합창을 모두 갈아 넣는 음악적 과욕으로 인해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베토벤의 가장 '유니크'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합창 환상곡은 180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되었는데 공연 자체로 엄밀히 평가하자면 '망한'공연이었다.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오케스트라는 실수를 연발했으며, 직접 피아노를 맡았던 베토벤과 오케스트라는 합이 안맞아 연주를 멈췄다가 다시 시작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그의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리즈는 당시 공연을 회상하며 "부실한 연주들이 극도로 인내심을 시험했다"고 했다. 당시 38살의 베토벤은 난청이 악화된 상태였으며 단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원활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이날 공연은 극심한 추위 속에 개최된 장장 4시간짜리 공연이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6번, 피아노 협주곡 4번, 피아노 즉흥곡, 아리아등 무려 8곡이라니. 관객입장에서 보자면 기획자의 욕심이 과했던 부담스러운 공연임엔 확실 했다. 모든 출연자들을 망라한 끝 곡으로 기획한 이 작품은 이렇게 부실한 연주로 막을 내렸다.
합창환상곡은 사실 급조된 작품이었다. 시작 피아노 솔로부분 악보가 채 완성되지 않아 베토벤이 즉흥으로 연주해야 했을 만큼. 일단 이 곡의 독특한 구성을 살펴보자. 두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곡은 형식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피아노 독주 환상곡, 피아노 협주곡, 칸타타 형식의 피아노와 합창 협주. 이는 파격적이며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구조다. 환상곡풍의 악상을 그려낸 피아노 독주에 이은 오케스트라 콘트라베이스 도입부, 이어서 제시되는 피아노의 주제선율을 필두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변주해나가는 협주곡의 비중이 적지 않다. 중창을 시작으로 웅장한 합창이 가세하며 피아노와 함께 절정을 향해 달리는 독특한 칸타타 형식의 대미. 익숙치 않은 구성이 처음 듣는 이로 하여금 미학적 거부감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을 터. 짧은 시간안에 써 내려간 작품이자 연주자 전원과 피날레를 장식하는데 주안점을 둔 작품이라 완성도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 작품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향곡 9번 '합창'의 DNA가 내재된 보석같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4악장 <환희의 송가>의 전신이 바로 합창환상곡의 주제선율이다. 선율의 진행이 놀랍도록 흡사할 뿐더러 드라마틱한 절정으로 손꼽히는 '별들위에 창조주가 있다'부분은 합창환상곡의 화성을 따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베토벤은 1824년 한 편지에 9번 교향곡의 <환희의 송가>를 가리켜 "합창환상곡과 같은 형식이며 다만 더 큰 스케일을 갖고있다"고 했다. 9번 교향곡처럼 교향곡에 합창을 더한 도발(?)은 당시에 전례가 없던 일로 이는 분명 14년전의 '합창환상곡'이라는 음악적 임상실험을 통해 가능했을 터.
처음 비엔나에서 이 곡을 접했을때 '작품이 좋다'라기보다는 '뭔가 과하다'라는 인상을 받았다. 오케스트라,합창 그리고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등장하는데 다소 산만해 보였다. 불분명한 곡의 정체성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자주 접하면서 혁신을 추구했던 베토벤의 무모함이 가능케 한 협주곡과 칸타타의 묘한 중첩이라는 측면을 고려, 교향곡 9번과 또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많은 평론가들은 이 곡을 다채로운 '하이브리드 음악'이라고 표현했다. 피아노 독주, 협주곡 형식을 비롯해서 웅장한 합창과 피아노가 함께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는 곡이 몇이나 될까.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 테마를 첼로가 먼저 제시했던 것처럼 이 곡에서는 파이노가 주제선율을 처음 제시한다. 합창이 등장했을때도 파이노는 세를 놓치지 않고 합창과 당당한 조화를 이루며 절정으로 치닫는다는 점에서 편성은 산만해보이지만 밸런스가 훌륭하다.
개인적으로 이 곡이 끌리는 이유는 베토벤 9번 <환희의 송가>의 '장려함'을 음악속에 머금고 있으면서 클래식에서 보기 드문 피아노와 합창의 조합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봄날 베토벤이 창조해낸 하이브리드 음악과 함께 '클'며들어보자.
이 곡의 매력은 다채로움이다. 합창의 피날레도 멋있지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변주해나가는 협주곡도 희망차고 매력적이다. 무엇보다도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 환희의 송가>의 합창까지 한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하지만 합창환상곡의 경우는 20분 안에 피아노 솔로 환상곡, 협주곡 그리고 합창·피아노 협주를 압축된 형태로 모두 경험할 수 있다. 클래식 입문자에게도 적극 추천한다.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1-05-28 0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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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 포커스
“디지털 소유의 장(場), 메타버스는 현실대체가 가능한가.”
코로나팬데믹으로 기존의 문화예술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현실과 만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2021년 상반기를 달구고 있는 NFT(Non-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 토큰) 미술거래 열풍과 디지털콘텐츠의 다양한 활용 등은 이제 스마트폰과 SNS를 대체할 방안으로 ‘메타버스’에 주목하고 하고 있다. Meta(초월)와 Universe(현실세계)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이 용어는 현실을 초월한 가상을 뜻한다.
현실세계가 아닌 장소에서 자신을 대체한 아바타로 ‘메타버스’에 들어가 음악감상과 미술전시, 쇼핑, 부동산매매, 타인과의 소통 등이 가능한 세상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이미 게임분야에서는 가상의 아바타가 활동하는 현실, 이제 우리는 메타버스 세상에서 유명 음악가의 콘서트를 감상하고 인기영화와 명작 전시를 보는 등, 3D공간에서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과 소통을 즐기는 가상 라이프와 만나게 된 것이다.
디지털콘텐츠를 활용한 온라인 문화행사 각광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상위버전으로 격상될 때마다, 전시와 공연을 준비해온 문화단체들은 쓴 웃음과 만나야 한다. 대비책으로 만들어진 언택트 전시와 공연들은 이제 온라인 시스템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다. 온라인 문화행사란 오프라인에서 개최되던 전시·공연에 온라인 구현 기술(online technology)을 통해 가상공간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사이버 형식(cyber show) 혹은 버츄얼 형식(virtual show)을 갖춰야 한다. 지난 1년간 국내 박물관·미술관·공연장 등은 미술품 전시, 대중공연 등의 분야에서 온라인 전시를 폭넓게 활용했으며, 실제 상품거래를 주목적으로 하는 아트페어(키아프, 홍콩 바젤 등) 등에서도 혁신적인 플랫폼 개발을 진행 중이다. 오프라인 행사개최가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VR, 3D 등의 가상 구현 기술은 초기 단계임에도 빠르게 도입·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오프라인 전시회보다 온라인 전시회가 갖는 중요한 차별적 특성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전통적 의미의 행사들은 한정된 장소와 시간에 아티스트와 관람객이 만나 수행하는 활동이 전제됐다면, 하지만 온라인 행사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지속적으로 어디에서나 개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5월 뮤지엄 주간, 가상현실과 미래를 담은 포스터 (출처:문화체육관광부)
5월 문체부와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한국위원회의 가장 큰 행사는 단연코 ‘2021 박물관·미술관주간’(5.14~23/박물관의 미래: 회복과 재구상) 행사다. ‘세계박물관의 날(5.18)’을 계기로 열리는 행사의 올해 주제는 코로나19와 4차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환경변화에 대응해 박물관·미술관이 미래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역할과 기능을 찾는 것이다. ‘뮤궁뮤진’(집콕 박물관·미술관 여행), ‘거리로 나온 뮤지엄’, ‘뮤지엄 꾹’(박물관·미술관 도장찍기 여행) 등의 행사에서도 중시되는 것은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문화 체험’, ‘사회적 연대’, ‘치유와 회복’ 이라는 키워드다.
디지털 소유의 경험, NFT와 메타버스가 온다!
라이브 아트의 온라인화와 디지털 혼합형식, 이제 라이브스트리밍은 기존 작품에 기반 하거나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예술적 제안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많은 질문과 만난다.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관객과 상호작용을 잃지 않아야하기 때문이다. 상황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새로운 형식에 귀 기울이면서도 현실을 재검토하는 유연성도 있어야 한다. 지적재산권과 관람료 책정 문제는 해결이 시급하다.
아바타로 팬미팅과 공연, 전시, 뮤비까지 경험하는 '제페토'의 메타버스 세상
온라인 공연이 유료화되기 위해서는 현실플랫폼을 대체하는 획기적인 경험이 정당화돼야 한다. 많은 예술가들은 좌석과 입장이 제한된 문화행사의 현실이 일시적일 뿐, 코로나가 끝나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로운 종류의 경험들은 사라지지 않으며, 단순한 전환이나 대체에서 한발 더 나아가 5G·클라우드·VR·AR·AI 등 관련 기술과 더불어 ‘가상의 원격현실’을 가시화할 것이다. 이제 메타버스는 ‘세컨드’ 공간을 넘어 ‘퍼스트’ 공간 개념으로 나아가고 있다. 메타버스의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단연코 게임이다.
배틀로얄 게임인 ‘포트나이트 공연’(2020.4.23.)에서 1,200만 명 이상의 플레이어들이 새빨간 하늘을 배경으로 멋진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트래비스 스캇’의 디지털 아바타에 환호했고, 총5회로 구성된 매회 10분 공연에 참여한 버추얼라이브에는 2,770만 명 이상의 플레이어들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메타버스에서 어떤 식의 대규모의 문화 이벤트라도 개최될 수 있음을 예측케 한다. 실제로 작년 9월26일 포트나이트의 메인 스테이지에서 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Choreography ver.) 뮤직비디오는 전 세계 최초공개되면서 1억뷰를 돌파하여 주목받았다. 메타버스의 일종인 ‘포트나이트 파티로얄 모드’는 친구나 다른 플레이어들과 함께 콘서트와 영화를 관람하거나 함께 즐길 수 있는 소셜 공간이다.
1억뷰를 넘긴 '방탄소년단' 메타버스 콘서트, dynamite remix ver (출처:BTS 유튜브)
국내 메타버스서비스인 네이버제트의 증강현실 아바타앱 ‘제페토’는 사용자의 얼굴을 촬영해 가상아바타로 만드는 증강현실(AR), 3D 서비스를 실현중이며, 현재 2억명이 넘는 글로벌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다. 그룹 블랙핑크의 제페토 사인회에는 4,600만여 명이 넘는 이용자가 참여했고, 5월4일 제페토는 더 샌드박스·네이버제트와 협업해 NFT 시장에 진출한다고 밝혔다. 사용자들은 제페토의 NFT를 메타버스 내에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으며, 이용자가 늘어날수록 사용자의 요구에 맞는 클래식공연이나 뮤지엄 전시들이 유료로 운영될 수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Hermitage Museum)은 2021년 연내 NFT 미술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대다수의 비평가들은 NFT 작품의 구매가 ‘진정한 수집이 아니다’라고 평가하지만, 시대변화에 기성미술관들이 나서는 현실에서 NFT 전시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는 지켜봐야한다.
국내최초의 NFT전시 ‘더 토큰 매니페스토(The Token Manifesto)
’ (출처: https://www.numomo.com)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린 NFT(Non Fungible Token) 전시도 주목해보자. 이들 작품들은 메타버스에서의 전시가 아닌 실제 판매되고 거래된 NFT작가들을 모은 현실전시로, NFT 시장을 선도한 작가들의 미디어아트와 프린트가 전시된다. 크리에티브 에이전시 누모모(NUMOMO)는 5월7일부터 일주일간 성수동 분또블루에서 ‘더 토큰 매니페스토(The Token Manifesto·사진)’전을 개최하면서 직접 컬렉팅한 NFT 슈퍼스타 ‘비플(본명 마이크 윈켈만)’을 비롯한 국내작가 70여명과 해외작가 20여명으로 이루어진 NFT 전시회를 개최했다. 지난 3월11일 글로벌 미술품 경매사 크리스티에서 자신의 작품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을 6930만달러(약 780억원)에 낙찰시키며 3번째로 비싼 생존 작가가 된 비플의 NFT가 가시화된 지 불과 두 달 만의 확산세인 것이다.
크리스티경매에서 6930만달러(약 780억원)에 낙찰한 비플의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출처: Beeple 홈페이지)
현실테마를 대체하는 가상현실의 미래, 이들의 성공이 실제 어디까지 이어질지, 메타버스가 포스트코로나 시대 이후에도 어떤 영향력으로 자리 잡을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실경험을 흡수하는 가상경험, 새로운 시장 경제의 원칙 속에서 메타버스와 NFT가 만들어갈 미래는 기존 온라인 전시·공연이 갖지 못한 자본가치의 재생산에 분명 새로운 기수가 될 가능성은 농후하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1-05-21 1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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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
단소 vs 생황
우리 음악 중에는 노래에서 비롯된 기악곡들이 다수 있다. 19세기에는 성악곡인 가곡의 반주 음악을 따로 떼어내 기악곡으로 발전시킨 곡들이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수룡음水龍吟’이다. 초록이 지천인 여름의 초입, 맑은 물살이 계곡을 따라 고요히 흐르는 산중의 청량함을 절로 떠오르게 하는 곡이다. 수룡음에는 ‘생소병주笙簫倂奏’라는, 다소 생소한 수식어가 붙곤 하는데 이는 생황과 단소의 이중주를 가리킨다. 여기에 양금이나 아쟁을 더하거나 해금, 가야금, 타악 등을 얹어 편곡한 수룡음도 유튜브 등에서 들어볼 수 있다. 하지만 수룡음은 생소병주로 들었을 때 가장 청아하고도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맑고 고운 소리, 단소
생소병주 중 단소 (©국립국악원)
요즘에는 학교에서 소금이나 가야금 등의 악기를 배우기도 하지만, 꽤 오랫동안 단소는 음악 시간에 배우는 유일한 국악기였다. 40센티미터가량 되는 대나무에 숨을 불어넣는 ‘취구’와 음정을 만드는 ‘지공’을 뚫어 만드는데 플라스틱으로도 제작되어 보급이 용이하고 휴대하기는 좋다. 하지만 단소가 배우기 쉬운 악기는 아니다. ‘단소’라는 창작 동요의 가사에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단소 소리 내기의 어려움이 담겨 있다.
어질어질어질 지끈지끈지끈 머리가 아파 / 하 후후후 헥헥헥 아이고 숨차 아이고 숨차 아이고 숨차 아이고 숨차 / 후후헥 후후헥 듣고 싶은 그 소리는 언제쯤 날까 / 태태태(중중중) 임임임(무무무) 내 친구는 잘도 하는데(태황무임중) / 내 입술이 이상한가 나만 안 되네 (중략)
- 창작 동요 ‘단소’ 노랫말 중
예전에는 단소로 민요 몇 곡을 연주해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최근 교과서에는 ‘청성곡’이나 ‘타령’ 같은 풍류 음악에 관한 내용도 실려 있다. 전문 연주자들의 단소 연주를 들어 보면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국악기라 여겼던 단소의 미처 몰랐던 아름다운 음색에 깜짝 놀라게 된다. 음원을 통해 학교에서 배우는 단소 외에도 음이 4도 정도 낮은 평조 단소나 개량 단소의 소리도 들어볼 수 있다. 처용무 보유자이기도 한 김중섭 명인은 영산회상 한바탕뿐 아니라 가곡의 반주 음악 그리고 수룡음처럼 기악곡으로 변주한 곡들까지 연주해 음반에 담았다. 몇몇 곡은 평조 단소로 연주해 함께 수록했으며 음원 사이트와 유튜브에서 모두 들어볼 수 있다. 대금 연주자 이용구의 음반에는 추산 전용선류 단소 산조와 함께 개량 단소로 연주한 북한 작곡가들의 단소 협주곡 등이 실려 있다.
국립국악원 e-국악아카데미(academy.gugak.go.kr)를 비롯해 온라인으로 단소를 배울 수 있는 사이트도 많다. 강사마다 나름의 전공 분야와 노하우가 있어서 따라 하다 보면 소리 내기도 한결 수월하고,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섭렵할 수 있다. 간혹 단소 배우기의 어려움이 국악 교육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금세 터득하긴 어렵지만, 곧게 등을 편 바른 자세와 오랜 시간 집중해서 연주 방법을 익히는 과정도 우리 음악을 값지게 얻는 과정이 아닐까.
신비로운 소리, 생황
생소병주 중 생황 (©국립국악원)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소에 비해 생황은 접하기 어려운 악기에 속한다.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맥이 끊어져 대부분의 악기를 중국에서 수입해서 쓴다. 제작 방법의 복원이나 생황 연주를 위한 작곡, 생황이 주가 되는 연주 등이 활발해진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생황의 역사는 길다. 고대 중국에서 전해져 삼국 시대부터 연주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악학궤범 등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악보인 ‘생황자보’나 생황이 그려진 풍속화로 보아 궁중 밖에서도 생황이 연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박에 대나무 관을 꽂아 만드는데 전통 생황은 17관이 가장 널리 쓰이며 개량한 생황은 27관, 36관, 37관 등 다양하다. 한 개의 관에서 하나의 음이 나므로, 대나무 관이 많을수록 많은 음정을 낼 수 있다. 또 생황은 국악기 중 유일하게 화음을 낼 수 있는 악기이다. 한 번에 여러 개의 음을 동시에 낼 수 있고 음색도 아코디언이나 풍금에 가까워 창작곡이나 서양 음악과도 잘 어울린다.
생황 연주자로 활동하는 김계희와 김효영이 낸 음반에는 동요 ‘고향의 봄’부터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까지 귀에 익숙하고 듣기 좋은 크로스오버 음악들이 진진하다. 박경훈이 작곡한 ‘서동요’나 ‘생황을 위한 푸리’ 같은 창작곡도 생황의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화 <사도>의 마지막 장면에도 생황이 등장한다. 조승우가 불러 유명해진 ‘꽃이 피고 지듯이’를 생황만으로 연주한 선율이 잠시 사도 세자를 그리는 정조의 춤사위에 얹힌다. 정조의 비통함이 생황의 부드러운 음색에 감싸여 아련함으로 승화하는 순간이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1-05-21 1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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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잔디밭이 가장 신선한 초록빛으로 물드는 5월이다. 요맘때면 가정의 달이라는 문구와 함께 생각나는 영화 포스터가 하나 있다. 푸른 하늘과 알프스를 배경으로 두 팔을 펼친 한 여인의 미소가 그 배경과 분위기를 잘 압축하고 있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로버트 와이즈, 1965)의 포스터다. 약 세 시간에 달하는 이 영화는 1938년 나치에 병합된 오스트리아를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한 ‘본 트랩’ 가족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수녀가 되려고 했던 ‘마리아’(줄리 앤드류스)가 ‘조지 본 트랩’(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주다가 조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 스위스로 망명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많은 히트송을 낸 뮤지컬 영화일 것이다. 마리아가 아이들에게 음계를 가르쳐주기 위해 부르는 ‘도레미송’, 천둥번개 치는 날 아이들을 안심시켜주었던 ‘마이 페이보릿 씽’(My Favorite Thing), 사랑에 빠진 큰 딸 ‘리즐’(차미언 카가)이 부르는 ‘식스틴 고잉 온 세븐틴’(Sixteen Going on Seventeen), 아이들이 자러 가기 전에 파티에 온 손님들에게 불러주는 ‘소 롱 페어웰’(So Long Farewell) 등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넘버만 해도 여럿이다. 그 중에서도 영화가 끝날 때쯤, 조지 대령이 무대에서 가족들, 관중들과 함께 부르는 ‘에델바이스’는 수십 년 동안 대중들에게 사랑받아온 유명한 노래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인기와 더불어 잘못 알려져 있는 바와 달리, 에델바이스는 오스트리아 민요가 아니라 영화의 원작이 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위해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가 새로 만든 곡이다. 두 사람은 아홉 개의 작품을 함께 하면서 토니상 35개, 아카데미상 15개를 비롯해 퓰리처상, 그래미상, 에미상 등을 동반 수상해 뮤지컬계의 전설적인 콤비로 꼽힌다.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은 해머스타인 2세의 유작으로, 안타깝게도 그는 뮤지컬 넘버들이 삽입된 영화의 개봉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수상한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삽입곡들은 한 곡 한 곡의 음악적 완성도 뿐 아니라 가사가 뮤지컬 영화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잘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나면 우울할 때마다 장미꽃의 빗방울, 새끼고양이의 수염과 따뜻한 털장갑을 떠올리게 되고, 뻐꾸기 시계가 ‘쿠쿠’ 하고 정각을 알릴 때 종종 자러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의 아쉬운 재잘거림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가사만으로 문학적 가치가 있을 만큼 시적인 표현들과 라임은 원어에 잘 표현되어 있다. 좋은 가사들은 또한 배우들의 감수성과 극적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하는데, 깨끗하고 밝은 꽃 한 송이에 나라의 안위를 부탁하는 에델바이스는 그 좋은 예다.
나들이가 쉽지 않은 올 가정의 달에는 아이들과 함께 가사를 음미하면서 다시 한 번 ‘사운드 오브 뮤직’을 감상하는 건 어떨까.
윤성은의 Pick 무비
추억을 벗삼아 살아가는 당신에게, ‘비와 당신의 이야기’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도 한 줌 햇살이 책상에 드리우면 다시 마음이 심숭생숭해진다. 외출도 만남도 자제해야 한다는 비극을 잊기에 5월의 햇빛은, 바람은, 나뭇잎들은 너무 잔인하다. OTT에 올라오는 신작보다 이번 주 개봉영화에 무관심하게 된 지도 어느덧 1년, 하지만 이렇게 반짝이는 봄날엔 영화관 데이트의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큰 스크린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지 않을까.
‘비와 당신의 이야기’(조진모, 2020)는 부활이 1986년에 발표한 노래와 동명의 제목을 사용함으로써 그 유전자가 향수, 낭만, 사랑 등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음을 천명한다. 시간적 배경은 사실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 21세기 초반이다. 핸드폰이 한창 나오던 시절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품고 있다면 정말 시대가 빨리 변하고 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겠다.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삼수생, ‘영호’(강하늘)는 초등학교 운동회 날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진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넸던 한 소녀를 잊지 못한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급기야 그녀의 소재지를 알아내 편지를 쓰기로 한다. 부산에 살고 있는 소연은 사실 영호가 기억나지 않는데다 편지를 쓰기 어려운 상태지만 동생 ‘소희’(천우희)가 대신 답장을 해주면서 본격적으로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펜팔이 시작된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소소한 청춘들의 일상으로 채워져 있는 영화다. 운명, 가능성, 기다림에 관한 대사들이 계속 나오기는 해도 일반적인 연애담은 아니다. 두 남녀의 설레는 투 샷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로맨스는 정작 이 영화의 수많은 레퍼런스들이 이끄는 관객들 개개인의 추억 속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호가 소연을 만났던 수돗가는 꼬마들의 깜찍한 키스가 나왔던 ‘위대한 유산’(알폰소 쿠아론, 1998)의 수돗가를, 손편지와 특수한 삼각관계는 ‘러브레터’(이와이 슌지, 1995)와 ‘클래식’(곽재용, 2003)을 떠올리게 한다.
우산을 파는 영호의 직업과 비오는 날들의 이미지는 희미하게나마 ‘쉘부르의 우산’(자크 데미, 1964)과도 연결된다. 유명한 멜로드라마들의 차용은 두 주인공의 은근한 감정을 관객들 스스로 고조시키게 만드는데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특정한 감성을 공유하는데 이미 그것을 담고 있는 고전 콘텐츠를 차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국영의 죽음까지 소환한 것은 다소 게으르게 느껴진다. 장국영은 풀 대신 본드를 사용한 것처럼 무심히 소비되기에는 너무 강렬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내용물 보다는 포장지가 고급스런 작품이지만 받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목적은 이룬 셈 아닐까. 유독 치열하고도 서툴렀던 청춘의 한 페이지가 자주 떠오르는 이들이라면 만족할 만한 작품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1-05-14 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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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Curtain Call)
<사진제공 : EMK>“귀가길 안전히 운전하시거나 날아가세요(Safe Driving or Flying)!”
십여년전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위키드’를 보고 극장을 나서며 만났던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홍보문구다. 마녀는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영미권 사람들의 기대심리를 재치 넘치는 홍보문구로 치장해놓았다. 무대의 환상은 마지막 출구까지도 이렇게 흥미를 자극시킨다.
서울에서 앙코르 무대의 막을 올린 ‘위키드’가 한창 인기몰이다. 코로나 19로 모든 곳이 얼어붙어버린 듯 경직됐지만, 몇몇 공연장에는 열기가 대단하다. 최근 들어 방역당국으로부터 동반자들끼리 거리두기를 시행하면서 티켓 판매도 70%에 육박한 실적을 보이고 있다. 아직 감염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공연을 올리는 사람들, 극장에 직업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위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기본적으로 작품이 재미있어서 가능한 풍경이다.
뮤지컬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를 비틀어 재구성한 작품이다. 태풍에 실려 ‘오즈’로 날아온 캔사스 소녀 - 도로시는 자신과 함께 날아온 집에 그만 동쪽 마녀가 깔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초록색 피부의 표독스런 서쪽 마녀는 여동생인 동쪽 마녀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도로시는 다행스럽게도 착한 북쪽 마녀의 도움을 받게 되고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오즈’에 살고 있다는 마법사를 찾아 나선다.
노란 벽돌을 따라 떠난 여행길, 도로시는 뇌 없는 허수아비, 용기 없는 사자, 심장 없는 양철인간을 만난다. 어렵사리 찾은 마법사의 성, 그러나 무엇이든 해결해 준다던 마법사는 서쪽 마녀를 없애야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일행을 돌려보낸다. 우여곡절 끝에 서쪽 마녀를 녹여서 물리치게 된 도로시 일행은 다시 마법사를 찾아와 각자의 소원을 얻으려 하지만, 마법사는 사실 기구를 타고다니다 도로시처럼 회오리 바람에 날아온 평범한 발명가에 불과했다. 실망하는 일행에게 마법사는 그러나 못된 초록 마녀를 물리치는 과정을 통해 허수아비는 지혜를 보였으니 학위증을, 사자는 용맹을 보였으니 훈장을, 양철인간은 뜨거운 희생정신을 보여주었으니 똑딱거리는 괘종시계를 대신 가지라 준다. 홀로 남겨진 도로시, 하지만 착한 북쪽 마녀는 도로시가 신고 다니던 죽은 서쪽 마녀의 마법 구두가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줄 것이라며 마법의 단어를 가르쳐준다. 마침내 도로시는 동화 같은 나라 - 오즈를 떠나 캔사스의 고향집으로 돌아와 잠에서 깨어난다.
원래는 소설이 원작이다. 바로 미국 작가 프랭크 바움이 1900년 발표한 동화 ‘오즈의 멋진 마법사’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책보다 1939년에 발표됐던 뮤지컬 영화 때문이다. 볼수록 귀엽다는 당시 최고의 뮤지컬 스타 ‘주디 갈란드’가 타이틀 롤을 맡아 영화 한 가득 매력이 뿜어냈기 때문이다. 그녀가 노래하는 ‘무지개 너머 어딘가(Somewhere over the rainbow)’는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인기 영화음악 중 하나다.
하지만 과연 도로시가 본 것이 오즈의 진짜 내막일까? 여동생의 죽음에 대한 서쪽 마녀의 분노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사람들을 속인 마법사는 정치적으로 사면 받을 수 있을까? 서쪽 마녀의 초록 피부색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으며, 마법에 걸린 구두는 누구 작품일까? 온갖 마법을 부리던 초록마녀는 겨우 물 한 동이에 그리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 것일까?
뮤지컬 ‘위키드’는 이런 엉뚱한 발상에서 비롯됐다. 이야기의 주인공을 도로시가 아닌 초록마녀 엘파바와 북쪽 마녀 글린다로 바꾼 것이다. 제목으로 쓰인 ‘위키드’의 사전적인 의미는 ‘기괴하다’ 혹은 ‘괴상하다’는 뜻인데, 태생적으로 마녀라는 뜻인 ‘위치(witch)'와도 자주 어울려 등장한다. 제목에서 이미 마녀들이 주인공이라는 해석도 내재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뮤지컬 ‘위키드’도 원래는 소설이 원작이다. 그레고리 맥과이어가 1995년 발표한 베스트셀러 ‘위키드: 괴상한 서쪽 마녀의 삶과 시간들’이다. 그리고 이 기상천외한 발상의 전환을 뮤지컬로 탈바꿈시킨 것은 바로 스테판 슈왈츠다. 디즈니 만화영화 ‘포카혼타스’나 ‘노틀담의 꼽추’에서 알란 멘켄과 함께 작업했던 그는 뮤지컬 애호가 사이에서는 ‘가스펠’이나 ‘피핀’의 제작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뮤지컬 ‘위키드’에서 그는 작곡과 작사를 맡아 대중의 흥행 감각을 읽어내는 변함없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사진제공 : EMK>‘위키드’는 특히 음악 좋은 뮤지컬로 정평이 자자하다. 감미로운 선율들이 흥미롭지만 특히 극 안에서의 쓰임새가 잘 어우러져 극성을 지닌 뮤지컬 음악으로서의 존재감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금발의 글린다와 기숙사 룸메이트가 된 초록마녀 엘파바를 여성스럽게 치장해주며 부르는 노래 ‘파퓰러’나 엘파바와 피예로(나중에 허수아비가 되는 인물로 글린다, 엘파바와 함께 사랑의 삼각관계를 이룬다)의 노래도 뒷맛이 오래 남는 수작이다. 기숙사에서 만난 괴상한 룸메이트에 대해 각자 고향집에 편지를 쓰는 장면에 나오는 ‘이 기분 뭐지?(What is this feeling?)’도 공연을 보면 한참이나 잔상에 미소짓게 만든다. 재잘대듯 끊임없이 얘기하는 글린다가 한참을 불평하는데 비해 ‘금발이야’라며 한마디로 룸메이트를 정의내리는 엘파바의 노래말에 객석에선 폭소가 터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는 역시 1막 마지막에 등장하는 ‘중력을 넘어서(Defying Gravity)’다. 요즘 세대들에게는 미국 드라마 ‘글리’의 삽입곡으로도 유명한데, 엘파바가 스스로의 사명을 깨닫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극적 장치로 활용된다. 몇 번만 반복해 듣다보면 저도 모르게 따라서 흥얼거리게 되는 수려한 멜로디도 인상적이지만, 글린다와 엘파바가 나누는 우정의 대화는 관극후 감상하면 절로 눈물이 흐르는 감동적인 명곡이다. 꼭 도전해보길 추천한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1-05-14 1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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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들어보았는가. 이 노래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며 나라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불리곤 한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때 연주된 이 곡은 독재와 권위주의에 맞서는 저항가요이기도 하다. 칠레의 시위대도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시위 중 이 곡을 불렀다. 그 밖에 수 많은 예술가들이 민족과 국가가 위기 앞에 희망을 주는 예술 작품을 남겨왔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 저변에는 자신의 뿌리를 알고 지켜나가고자 하는 의지와 그를 뒷받침하는 교육이 있어 왔다. 유대인들에게도 힘든 순간마다 용기와 희망을 준 교향악단이 있다. 바로 이스라엘 필하모닉(이스라엘 필)이다.
이스라엘 필은 1936년 폴란드계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 후베르만이 나치로부터 압박받는 유대인들을 위해 유럽 주요 악단의 유대인 음악가를 모아 만들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중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중동지역에서 군인들의 사기 증진을 위해 공연했고, 이스라엘 독립 후 비어 세바 사막에서 유대계 미국인인 번스타인의 지휘하에 군인들 앞에서 공연했다. 주빈 메타는 제3차 중동전쟁 중 탄약이 가득 실린 비행기를 타고 와 전시상황에서 연주하며 유대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해주었다.
1987년에는 나치에 의해 큰 인명 손실을 입은 폴란드의 바르샤바, 크라코우, 카토위체 도시에서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인 말러 5번 교향곡을 연주했다. 이를 두고 주빈 메타는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정신적 승리’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저명 음악가들은 힘든 순간마다 주저 없이 본국으로 돌아왔다.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존속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말이다. 망설임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드는 용기. 그 시작은 무엇일까?
필자는 사명감과 공동체 의식을 교육에서 찾았다. 그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부분이 바로 예술교육에 대한 무한한 투자와 열정이다. 그들은 교육 기금을 스스로 자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1967년 번스타인과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의 공연이다. 이 공연은 대통령조차도 표를 구매해 관람했는데, 티켓 수익의 전부가 유대인과 아랍 청소년 오케스트라 설립에 쓰였다.
1995년 주빈 메타는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어린이들을 위한 합동 공연을 하였고, 교육 부서를 설립, 많은 어린이에게 음악교육을 하고 있다. 또, 2005년 텔아비브 대학에 부흐만-메타 음악학교를 설립해 단원들이 차세대 연주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스라엘 필 대표 아브라함 쇼사니는 신인 음악가 발굴이 오케스트라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 말한다. 그는 세계적인 유대계 음악가들이 이스라엘 필에서 신인 시절을 보냈으며 오케스트라의 자식과도 같다고 했다. 더불어 쇼사니는 이스라엘 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국립 오케스트라이며 동시에 세계 각국의 유대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대인들을 위한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지역을 넘어서 공동체 의식을 계승하고 공유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다. 이것이 다른 오케스트라들과 차이점이자 고유성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이 말을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필자의 뉴욕 필하모닉의 경험 덕분이었다. 뉴욕 필에서 일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받았던 교육이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들의 요지는 이러했다.
“우리는 ‘뉴욕’필하모닉이다. 우리는 번스타인의 오케스트라이고 우리보다 번스타인의 곡을 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뉴욕이라는 뿌리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했으며 지휘자의 명예를 중요시했다.(물론 다국적 오케스트라로서 각 문화에 대한 존중이 기반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오케스트라의 뿌리를 지역(뉴욕)에 둘 것인가, 민족(유대인)에 둘 것인가의 문제에서 태생적으로 둘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필은 장소에 국한된 오케스트라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작은 의문이 생긴다. 유대인들의 ‘지역에 얽매이지 않는’ 정체성의 시작은 어디일까. 필자는 탈무드의 힘을 언급하고 싶다. 유대인 교육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인 탈무드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유대인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체득하게 한다. 내가 어디에서 나고 자랐으며 어떤 민족인지 인지하는 것은 정체성의 형성에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나의 뿌리를 알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게 만드는 교육. 그것이 자기표현의 힘으로 이어진다. 힘든 상황에 닥쳤을 때 스스로를 위로하고 주변과 공동체 정신을 함양시키는 예술적 표현을 위해서는 건강한 정체성이 전제된다.
세계 최고의 예술단체들은 단단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최고의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 ‘나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하고, 이 자신감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건강하게 소통하며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해 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유대인의 저력 역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 겪어 온 고난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정체성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필은 그 뿌리를 잊지 않고 이어나가는 ‘교육’에 어떤 오케스트라보다 열정을 쏟고 있다. 우리에게도 국민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문화와 교육의 힘이 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1-05-07 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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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2019년, 음악계에는 흥미로운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하딩(DanielHarding, 1975- )이 프랑스의 대표적인 항공사인 에어 프랑스(Air France)에 조종사로서 입사하였고, 2020/2021 시즌에 지휘에서 잠시 물러나, 조종에 전념하게 될 것이라는 뉴스였지요. 그가 조종하게 되는 비행기 기종(A320)과 직책(부기장, co-pilot)도, 그리고 비행기 조종과 지휘를 앞으로 계속해서 병행할 것이라는 그의 의지도 전해졌습니다. 2017년 상업 여객기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한 하딩은 어릴 때부터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밝혔는데요. 파리에 있던 예전 그의 집에는 조종사들이 연습과 훈련을 위해 사용하는 비행기 시뮬레이터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성공한 ‘덕후’가 아닐까 싶네요.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지휘자가 하딩이 처음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이지요.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던 카라얀은 개인 비행기를 소유하였으며, 그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멋지게 차려입고 비행기 옆에 서 있는 카라얀의 사진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요. 카라얀이 작은 개인 비행기를 조종하는 정도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하딩은 많은 승객이 탑승한 여객기를 직업적으로 조종하는 것이어서, 그의 에어 프랑스 입사 소식은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조종사와 지휘자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직업을 가졌던 음악가들은 예전에도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중세시대의 작곡가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입니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빙엔은 작곡가이자, 수녀, 언어학자, 약초학자, 의사, 철학자, 시인, 운동가, 예언가 등으로 소개됩니다. 대체 한 사람이 이 많은 역할을 다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싶지요. 그런데, 빙엔은 대부분의 영역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열된 직업 중 하나만 잘하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지요.
현대에서, 음악과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직업을 소유했던 음악가의 예를 들으라면, 작곡가 찰스 아이브스(Charles Ives, 1874-1954)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일 대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직업 음악가의 길을 걷지 않고, 보험 회사에 취직하며 사회 생활의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그리고, 1907년 동료와 함께 보험 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고, 은퇴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지요. 하지만, 아이브스는 보험 회사 일을 하면서도 작곡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다만, 그의 작곡 활동은 평생 지속되지는 않았고, 1927년 그가 53세 되던 해 까지만 이어졌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그의 생애 말년에야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오늘날 그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있지요.
하딩, 빙엔, 그리고 아이브스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음악과 별다른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이 음악에 도움이 될까?” 왠지 막연한 대답만 나올 것 같고, 그 대답을 증명해 내기란 쉽지 않은 질문으로 보입니다. 하딩의 비행기 조종이 그의 지휘에 영감을 줄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참고해 볼만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뇌과학자 정재승의 책 <열 두 발자국>에서였는데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 중 하나가 ‘창조적인 사람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입니다. 흥미로운 제목이지요?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만들어질 때, 뇌에서는 평소에는 연결되지 않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영역끼리 신호를 주고받는 상황이 연출된다고 합니다.
이는 어떤 문제를 다른 각도로 바라보거나, 상관없는 개념들을 서로 연결하고, 추상적인 두 개념을 잇는 일이, 창조적인 사람들의 뇌에서 벌어진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이를 하딩에게 적용해 본다면, 비행기 조종과 지휘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비행기 조종에서만 얻을 수 있는 성찰, 특별한 느낌과 생각 등이 그의 음악적 창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과연 하딩은 여객기 조종사로서의 첫 발을 잘 내딛였을까요? 아쉽게도 지휘자이자 조종사가 되고 싶던 그의 꿈이 실현되기에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전세계의 항공 산업이 위축되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하딩이 지휘자와 조종사라는 두 개의 직업을 갖는 것을 오래도록 계획해 왔으므로, 그의 꿈이 이루어질 날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행이 다시 자유로워질 때, 유럽의 어느 비행기에서 조종사 하딩을 만날 날을 기대해 봅니다.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1-05-07 1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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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클래식 역주행의 아이콘, 고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픈 노래들의 교향곡'
현재 브레이브걸스가 대세다. 그들의 히트곡인 '롤린'은 2017년에 공개되었지만 4년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한 유튜버의 댓글 모음 유튜브 영상으로 해체직전에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고 한다. 브레이브걸스의 진정성을 알아봐준 군인들의 지지와 더불어 유튜브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은 이 영상이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롤린은 현재 발매 4년만에 거의 모든 음원차트에서 1위를 석권하며 역주행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
데이비드 진먼 지휘, 소프라노 돈 업쇼 , 런던신포니에타가 연주한 고레츠키 교향곡 3번 음반
알고리즘이라는 개념이 무색했던 1992년, 클래식에서도 초연이후 15년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 교항곡의 이례적인 역주행이 전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폴란드 작곡가의 음반이 영국·미국 클래식 차트 1위를 석권했음은 물론 영국 팝차트 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게다가 클래식 중에서도 듣기 어려운 현대음악으로 말이다. 이 믿기 힘든 기록을 세운 작품이 바로 작곡가 헨릭 고레츠키의 교향곡 3번 '슬픈 노래들의 교향곡'이다. 어떻게 이런 '대박'이 가능했을까.
1977년 프랑스 루아양 페스티벌에 처음 선보였던 이 곡에대한 반응은 악평 일색이었다. 초연당시 세계적인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가 이 작품을 듣고 했던 말. "Merde! (쓰레기)". 심지어 하이파이 스테레오포니라는 음악잡지는 " 작품이라 부를 수도없는 이 곡은 돌이킬 수 없이 잘못된 길을 택했다"라고 평했다.
사실 7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모더니즘을 대변하는 난해한 음악들이 현대음악의 주류였다. 하지만 작곡가 고레츠키가 야심차게 발표한 교향곡 3번은 당시에는 뜬금없는 전통적 조성음악에 소프라노 독창이 가미된 단조로운 음악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교향곡은 3악장 내내 50분이 넘도록 일관된 느린 템포를 유지하면서 악구를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조를 지녔다.
Henryk Gorecki(1933~2010)
흥미롭게도 그의 음악적 궤적을 되짚어보면 그가 보여준 교향곡 3번의 음악세계는 철저히 예상밖이다. 작곡가 고레츠키는 1933년생, 폴란드 출신이며 여느 현대음악 작곡가처럼 아방가르드적인 음렬주의(Serialism)의 선두에선 작곡가였던 것이다. 1900년대 중반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조성을 버린 무조음악을 지향했으며 당시 난해한 현대음악의 사조를 충실히 따르던 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1961년 파리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교향곡 1번을 들어보면 교향곡 3번과는 판이하게 다른 전형적인 현대음악으로써 12음기법을 사용했다. 놀랍게도 1977년 그가 내놓은 교향곡 3번에서 그는 과감하게 기존의 전위적인 음악사조를 버리고 '친숙함'을 택했던 것이다. (교향곡 2번에서 미세하게 그 징후를 발견할 수 있다.)
교향곡 3번은 1978년 폴란드에서 처음 음반으로 발매되었는데 주목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소피마르소 주연의 프랑스 영화 <폴리스>에 등장하며 점차 관심을 끌었고 이 음악에 내제된 대중성을 인식시켰다. 이어 이 교향곡의 가능성을 발견한 레코드회사 에라토는 1986년 이례적으로 영화OST 음반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80년대 후반에는 영국 클래식 FM에 꾸준히 선곡되어 전파를타며 대중속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결국 이 작품은 1992년 데이비드 진먼의 지휘에 소프라노 돈 업쇼가 합세하였고 런던 신포니에타의 명연주에 힘입어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전례없던 전무후무한 역주행을 기록했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음반의 뜬금없는? 대히트에 의아해했는데 사실 이 음악속에 내제된 대중성은 벌써 그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형식파괴에 치중했던 당시 현대음악의 홍수 속에 외려 심플하고 친숙했던 그의 음악은 역설적으로 전위속에 '전위적인 음악'이었을까. 고레츠키는 혹평에 아랑곳하지않고 오히려 이 작품이 가장 '전위적인 음악'이라고 했다. 또한 훗날 인터뷰에서 흥행의 근거로 "사람들은 놓쳐버린 그 무엇을 이 음악속에서 발견했으며 자신은 본능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했다. 작곡가가 듣는이의 입장을 잘 간파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방가르드 노선을 따랐던 그이기에 듣기 쉬운 작품을 내놓았을 경우 쏟아질 혹평은 예상했을 터. 하지만 그는 과감히 '전위'라는 욕심은 배제했다. 그리고 교향곡의 부제' 슬픔의 노래'가 말해주듯 전쟁을 겪은 작곡가 자신이 바라본 전쟁의 참상과 슬픔을 진솔하게 음악속에 담아내는데 집중했다.무엇보다 단순명료하게. 이 음반의 성공은 그 용기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초연당시 평론가들에게 박한 점수를 받았지만 장르를 뛰어넘어 전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 작품이 던지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아무리 어렵다는 현대음악일지라도 듣는 이들을 헤아리고 마음을 두드린다면 대중은 열렬히 반응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슬픈 노래들의 교향곡'이라는 부제가 붙은 교향곡 3번은 3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악장은 15세기 폴란드 수도원의 '성 십자가의 탄식'이라는 기도문, 2악장은 게슈타포 수용소에 내던져진 18세 소녀가 벽에 새겨놓은 기도문 그리고 마지막 3악장은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노래로써 폴란드 민요가 모티브다. 잘 알려진 2악장을 추천한다. 기도문의 내용은 짧다. " 어머니, 울지 마세요. 하늘의 순결한 여왕님이 우리를 지켜주실꺼에요 ". 2악장은 천국을 예견하듯 밝은 장조로 시작을 알린다. 소프라노가 부르는 소녀의 기도는 엄숙함을 자아내며 담담하게 구원을 노래한다. 이 악장의 감상포인트는 침통함이 아닌 천상을 바라본 한 소녀의 초연함이다. 고레츠키는 구구절절한 절규와 두려움이 아닌 단 몇마디의 간결한 기도문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고 말한 바 있다.
*유튜브 링크: 고레츠키 교향곡 3번 2악장
https://www.youtube.com/watch?v=BVVlSGSVjjw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1-04-30 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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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사랑과 낭만으로 가득한 파리에도 외로움은 있었다. 물안개가 자욱한 파리 오페라 극장 아래 홀로 지하 묘지에서 살아가는 남자.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면서도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를 두고 다들 ‘유령’ 또는 ‘팬텀’이라 불렀다. 그런 그가 다시금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건 바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며 거리에서 악보를 팔던 크리스틴이 오페라 극장에 오게 되면서부터였다. 마치 운명처럼, 모든 이야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라이선스 뮤지컬 ‘팬텀(PHANTOM)’이 돌아왔다. 2015년에 초연됐던 작품은 올해로 벌써 네 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마니아층이 상당한 흥행대작 중 하나로, 지난 3월 17일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해 오는 6월 27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세상이 무너진 이 순간, 너의 음악이 되리라’란 대표 문구처럼, 3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팬텀’은 변함없이 아름다우면서도 감동적인 멜로디로 반복된 일상에 지친 관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한다.
뮤지컬 ‘팬텀’ 역시 프랑스 추리 소설가 가스통 르루의 원작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바탕으로 창작됐다. 하지만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제작했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완전히 다르게 전개된다. 놀랍게도, 오히려 시도는 이 ‘팬텀’이 먼저였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확실하게 차별화된 뮤지컬 ‘팬텀’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극작가 아서 코핏과 음악 및 가사를 맡은 모리 예스톤이 함께 한 작품으로, 고전적인 분위기 속에 현대적인 감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또 다른 감동을 전한다. 무엇보다도 작품을 통해 뮤지컬, 발레, 성악, 오케스트라 연주를 한 무대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자연히 뮤지컬 배우와 성악가, 발레리나 등 각 분야에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출연진이 다 모였다는 사실 또한 이 작품의 강점이다.
가면 속에 정체를 숨긴 팬텀 역에는 박은태, 카이, 전동석, 규현이 이름을 올렸고, ‘팬텀의 영원한 사랑’ 크리스틴 다에 역은 김소현, 임선혜, 이지혜, 김 수가 맡았다. 이 밖에 윤영석, 홍경수, 신영숙, 주아, 최성원, 에녹을 포함해 발레리나 김주원, 황혜민, 최예원, 발레리노 김현웅, 정영재, 윤전일 등도 무대에 오른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번 ‘팬텀’은 소프라노 임선혜가 연기하는 크리스틴 다에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여서 더욱더 소중하다.
작품에서는 주인공인 팬텀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하면서 숨겨졌던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새롭게 덧붙였다. 눈여겨 볼만한 부분은 오페라 극장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었던 존재를 향한 궁금증에 안타까운 서사를 더하면서 개연성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잔혹하게만 보였던 공포의 대상도 결국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연민과 더불어 애틋한 감정이 증폭된다.
에릭은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흉측한 외모를 타고난 탓에 ‘팬텀’이란 가면을 쓴 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 늘 숨어 살아야만 했다. 타고난 운명을 저주하며 평생 마음 편히 쉴 곳을 찾아 헤매던 그에게 크리스틴은 존재만으로도 안식처이자 위로이고, 희망이었다. 하지만 길게 허락되지 않은 행복이 결국 에릭을 떠나게 되면서 끝이 다가오고야 만다.
3시간에 걸쳐 풍성하게 펼쳐진 이야기는 화려한 볼거리와 어우러져 눈으로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작품의 백미인 거대 샹들리에 추락 장면뿐만 아니라 팬텀의 가면 컬렉션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공들여 만든 가면들은 모두 적절한 장면에 쓰이면서 팬텀의 감정을 좀 더 세밀하게 표현한다. 또 이번 시즌 팬텀 가면에 작은 변화가 생겼는데, 얼굴을 전부 가리다시피 했던 기존 반 가면을 더 작은 가면으로 바꾼 덕분에 배우의 표정을 훨씬 더 생생히 느낄 수 있게 됐다.
반복된 멜로디가 자연스레 깊이 각인되는 넘버도 좋다. 크리스틴과 팬텀이 같이 부른 ‘내 고향’과 크리스틴의 데뷔 무대를 장식한 ‘비스트로’는 인물이 느낀 설렘과 기쁨이 가득 담겼다. 팬텀의 넘버 ‘그 어디에’와 ‘그대의 음악이 없다면’, 그리고 작품 전체 분위기를 아우르는 ‘내 비극적인 이야기’는 서곡과 리프라이즈로 각각 달리 불리며 극적인 장면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여전히 생생히 남겨진 여운은 글을 쓰는 동안에도 자꾸만 뮤지컬 ‘팬텀’을 추억하게 만든다. 지금껏 멈출 줄 모르고 돌아가는 OST를 보니 조만간 다시 공연장을 향하리란 예감이 강하게 든다. 요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멜로디, 뮤지컬 ‘팬텀’이 당신의 눈과 귀를 황홀하게 적셔줄 그 순간을 독자들과 꼭 함께 나눌 수 있길 바란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채널을 운영중이다.
2021-04-23 1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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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 포커스
“현대미술로 둔갑한 달항아리, BTS 음악에 등장한 전통국악”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미 누군가 다 해놓은 것들을 꿰매고 고쳐서 다시 만든다는 것. 한때 드라마와 패션에서 불던 복고(復古) 열풍도 이런 의도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와 연관된 학술적 언어가 바로 ‘만들어진 전통(Invented tradition)’이다. 이 개념은 1983년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 bawm, 1917~2012)이 주창한 것으로, “전통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최근에야 시작된 것이고, 때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만든다’와 ‘시작한다’가 전혀 다른 뜻을 갖는다는 것이다. 전통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근대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국민통합을 촉진하기 위해 정체성을 창조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우리가 전통을 ‘오래된 옛 소재’로만 인식한다는데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으나 2021년 미술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달항아리 바람’이나 BTS 음악에 등장한 전통국악의 예들은 대중적 인기와 더불어 전통이 성공적으로 활용된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통’은 고정되지 않은 전하여 통해지는 ‘과정형 가치’라는 사실이다. 소재주의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해석을 통해 새로운 전통의 방향을 만들어 가야하기 때문이다.
달항아리 100년史, 야나기의 민예부터 미술시장 마케팅까지
지난 2월 25일자 중앙일보(25면) 문소영 기자는 “‘달항아리’는 철학과 감성 결합한 최고의 브랜딩 사례”라는 기사에서 최근 문화계에서 일고 있는 달항아리의 유행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세간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이를 반영하듯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에 명상형 달항아리 공간이 등장하는가 하면, 지난 3월 열린 화랑미술제에서 ‘Sold Out’된 가장 많은 작품들은 달항아리 그림이었다.
김환기의 <항아리와 매화>(1954) (출처 : 환기미술관)
문 기자는 1960년대 등장한 명칭 달항아리의 이름을 지은 이가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1913~1974)이거나 그의 절친인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최순우(1916~1984)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실제 달항아리의 이름은 백자대호(白瓷大壺), 흰 빛깔을 가진 큰 항아리라는 뜻이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달항아리 대표작가로는 구본창, 고영훈, 강익중, 최영욱 등이 있지만, 실제 달항아리 그림은 근·현대 문학잡지를 장식하거나, 김환기를 비롯한 1950~60년대 작가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곤 했다.
김환기의 <항아리와 매화>(1954)에서 보이는 것처럼, 늘 백자를 집안과 마당에 두었던 그는 ‘이조항아리’라는 시를 쓸 정도로 항아리에 애착을 가졌다. “지평선 위에 항아리가 둥그렇게 앉아 있다. 굽이 좁다 못해 둥실 떠 있다.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와 푸른 하늘과 흰 항아리와 틀림없는 한 쌍이다. 똑 닭이 알을 낳듯이 사람의 손에서 쏙 빠진 항아리다.” - 김환기의 ‘이조항아리’
허버트리드가 소장했던 대영박물관 한국관의 달항아리 (출처 : 대영박물관)
통도자의 유행은 100년 전 열린 조선미술전람회(1922~1944, 1923년 제2회전부터 다수 등장)에서도 다수 발견되며, 1925년 제4회에서는 재조선일본인 화가가 매화가지가 꽂힌 백자대호 작품으로 3등상을 받은 바 있다. 이는 유교적인 사대부 중심의 계층적 미술이 아닌 민중의 예술인 민예(民藝)에 심취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영향으로,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의 작품들에서, 전통도자 위에 꽃을 꽂는 정물화의 모습에서 그 유행의 전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등장한 백자대호 (출처 :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한편, 야나기의 민예운동에 큰 영향을 받은 영국 현대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1979)가 1935년 서울방문 시 구입한 백자대호는 현재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버나드 리치는 이 항아리를 구입해 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며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 백자의 담백한 자연미감에 빠진 그는 야나기와의 교류 속에서 자신의 작품에 여백과 자연미감을 품고자 했다. 아시아문화에 심취한 그는 화려한 스튜디오풍 영국자기들을 단아한 미감으로 변화시키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달항아리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한다.
방탄소년단(BTS) RM이 현대도예가 권대섭의 달항아리와 함께 찍은 사진
최근 방탄소년단(BTS) RM이 현대도예가 권대섭의 달항아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자 달항아리는 인스타 그램같은 SNS를 크게 달구고 있다. ‘민예적 성격의 백자대호’에서 세련된 가정에 잘 어울리는 ‘장식적 대중예술’로 그 이미지가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달항아리의 유행에는 자본시장의 마케팅과 대중효과가 팽배해 있으므로, 이를 과열이 아닌 새로운 전통으로 만들어 나가야할 책임 또한 남겨진 것이 사실이다.
BTS 음악에 등장한 전통, 국악퍼포먼스와 ‘대취타’
작년 6월 발매된 BTS 슈가의 신곡 첫머리에는 “대취타! 대취타! 자 울려라 대취타!”라는 음악과 함께, 실제 조선 저잣거리에서 펼쳐지는 도전적인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이미 국악과 한국춤을 퍼포먼스에 활용한 바 있는 BTS의 곡들은 대부분 유튜브 조회수 1억뷰를 넘긴다. 대취타 발매 당시 국악계는 국악과 대중문화가 ‘글로벌로 윈윈’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울 기회라며 풍악을 울리는 분위기였다.
1억뷰를 넘긴 BTS 슈가의 대취타 (출처 : 방탄소년단 뮤직비디오 유튜브)
K팝과 국악을 곡이 일부에 활용한 예는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 태평소 샘플링과 2013년 GD의 ‘늴리리야’ 등이 있었지만, 왕의 행차를 위한 음악을 전면에 내세워 실제 국립국악원의 1984년 버전을 사용한 점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앞서 RM이 달항아리의 유행을 보여주듯이 슈가가 던진 ‘전통을 활용한 대중 표상’은 난타 같은 타악 분야에서 국악을 활용한 것과는 더 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서구적인 틀로 살아온 오늘의 삶 속에서도 곳곳에 자리한 전통과의 소통은 우리가 만들어나갈 세계화의 나침반일지 모른다. 다이나믹과 하이브리드를 내세운 ‘문화한류’ 속에서 전통을 순혈주의에만 가둬둔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중화와 세계화의 맥락 속에서 새롭게 읽어야할 전통의 재발견, 다양한 관객층을 견인하고 있는 전통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향후 예정돼 있는 ‘국가 규모의 공연과 다양한 전시(국악원의 새로운 도전과 국립현대미술관 7월 덕수궁 전시 주목)’ 등에서 새롭게 바탕을 정비해 나갈 예정이다. 대중성으로 무장한 전통 만들기, 세련된 브랜딩과 마케팅을 통해 ‘문화한류의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할 시점이자 전문화된 전통원형의 깊이를 동시다발적으로 연구해야할 때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1-04-23 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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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봄날의 고궁을 거닐어 본 적이 있으신지. 수백 년을 산 고목에 연초록 새싹이 움트고 노란 봄볕 사이로 꽃잎이 흩날리는 계절이면, 구중궁궐에도 오래 묵은 봄날이 또다시 돌아왔음을 알게 된다. 문헌과 예인들에 의해 전해오는 전통 춤으로 우리는 옛 궁궐의 봄 풍경을 보다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궁중에서 추었던 춤, 궁중 무용을 다른 말로 ‘정재(呈才)’라 한다. ‘재주[才]를 드린다[呈]’는 뜻을 담고 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정재는 수십 가지인데, 그중 조선 순조 때 새로 만들어진 정재가 20여 종목이다. 정재 창작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은 순조의 아들이었던 왕세자 ‘효명’이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인 정조를 빼닮아 성군이 될 재목으로 기대를 모았던 효명은 총명하고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조선 말 세도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와 악으로 나라의 법도를 굳건히 하고,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가 만든 춤 가운데서도 ‘박접무’와 ‘춘앵전’은 봄날의 정취를 고스란히 무대에 옮긴 듯한 작품들이다.
범나비의 춤, 박접무(撲蝶舞)
[국립국악원 토요명품 공연 중 박접무]
나비를 흉내 낸 춤, 하면 동요 ‘나비야’에 맞춰 양팔을 팔랑거리는 율동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궁중 춤 가운데에도 나비의 모습을 본떠 만든 춤이 있다. 순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박접무다. 궁중의 춤답게 느리고 우아한 춤사위로 나비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조선 순조 때 무자년의 잔치에 대해 남긴 진작의궤를 비롯해 몇몇 정재무도홀기에 박접무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정재무도홀기는 정재의 연행 순서에 따라 춤사위와 반주 음악, 노랫말 등을 적어둔 무보舞譜의 일종이다.
[박접무(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무자진작의궤)]
무자진작의궤에는 잔치에서 추었던 춤을 그림으로도 남겨두었는데, 박접무 그림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점이 많다. 먼저 춤의 대오가 독특하다. 대부분의 궁중 춤에서 무용수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 있거나, 나란히 일렬로 서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여섯 명의 무용수가 위아래로 긴 열 십(十) 자 형태로 서 있는데, 둘씩 짝을 지어 서로 등지고 있다. 춤의 기록을 재현한 오늘날의 박접무에서 무용수들은 각각 여섯 마리의 나비가 되기도 하고, 둘씩 짝을 지어 세 쌍의 무용수가 함께 나비의 움직임을 표현하기도 한다.
의상의 화려한 문양도 눈길을 끈다. 비교적 단조로운 여느 궁중 춤의 복식과 달리, 그림 속 박접무 의상에는 사방으로 날고 있는 나비들이 ‘화접포’라 불리는 겉옷에 가득하다. 날개의 무늬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색색의 나비를 초록 비단에 수놓은 의상은 꽃과 나비로 가득한 궁궐의 정원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춤으로 분류하지만, 반주 음악과 노래가 어우러진 정재는 종합 예술 형태를 띤다. 박접무는 ‘만정방滿庭芳’이란 이름의 기악곡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춘다. 꽃이 가득한 뜰로 풀이되는 ‘만정방’은 조선 후기의 문인인 신위가 정민교의 시조를 한시로 번역한 후 붙인 제목과 같다.
또 춤 중간에 무용수들이 직접 노래도 부르는데, 무용수들이 부르는 노래 혹은 노랫말을 ‘창사唱詞’라 한다.
채접쌍쌍탐춘광(彩蝶雙雙探春光) / 화불금시박(花拂金翅撲) / 격주렴미인(隔珠簾美人) / 일반화작삭(一般花灼爍)
- 박접무 창사 전문全文
봄볕에 흐드러지게 핀 꽃과 쌍쌍이 날아든 오색나비의 금빛 날갯짓으로 봄 풍광을 노래한 창사의 화자는 후반부에서 ‘주렴 너머 미인도 활짝 핀 꽃과 같은데…….’ 하고 여운을 남긴다. 미인의 오지 않은 봄 그리고 ‘낙화인들 꽃이 아니랴’ 노래한 시조 ‘만정방’ 화자의 이미 가버린 봄이 묘하게 닮은 소회를 불러일으킨다.
꾀꼬리의 노래, 춘앵전(春鶯囀)
[국립국악원 토요명품 공연 중 춘앵전]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담은 춘앵전은 정재 중에서도 보기 드문 독무獨舞다. 바닥에는 꽃돗자리[花紋席]가 깔리고, 한번 돗자리 위에 오른 무용수는 춤이 끝날 때까지 돗자리 밖으로 벗어나는 일이 없다. 좁은 돗자리 안에서 홀로 추지만, 춘앵전은 춤사위가 풍부한 춤으로도 손꼽힌다.
춘앵전에 관한 기록은 무자진작의궤를 비롯해 헌종, 고종 대의 각종 의궤와 무도홀기에 두루 전한다. 왕실 잔치를 기록한 의궤마다 남아있는 것을 보면 당대에도 인기 레퍼토리였던 모양이다. 의상은 꾀꼬리를 닮은 노란 빛깔 ‘앵삼鶯衫’을 입는다.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알록달록한 오색한삼을 손에 낀다. 남성 무용수의 경우 흰색 상의에 패랭이꽃[石竹花] 문양이 그려진 초록 쾌자를 입고 붉은색의 홍한삼을 손에 끼기도 한다.
[춘앵전(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무자진작의궤)]
춤의 반주 음악은 영산회상의 한 갈래인 ‘평조회상’이다. 평조회상을 ‘유초신지곡’이라 달리 부르기도 하는데, 새잎을 피워 연둣빛 풋풋한 버드나무가 단박에 그려지는 이름이다. 꾀꼬리 한 마리 노닐기에 그만큼 어울리는 배경이 또 있을까 싶다. 평조회상 한바탕을 다 연주하려면 30분이 넘게 걸리는데 최근에 공연하는 춘앵전은 10분 이내로 짧게 구성하고 공연 중에 부르는 창사 또한 첫 구절 정도만 노래한다. 박접무의 창사와 더불어 춘앵전의 창사 또한 효명세자의 작품이다.
빙정월하보(娉婷月下步) / 나수무풍경(羅袖舞風輕) / 최애화전태(最愛花前態) / 군왕임다정(君王任多情)
- 춘앵전 창사 전문
춘앵전은 창사뿐 아니라 춤사위의 이름도 시어詩語처럼 아름답다. 난새가 날아돌듯[回鸞], 탑을 오르듯[塔塔高], 흩날리는 꽃잎을 잡듯[轉花持], 꽃잎이 흐르는 물에 떨어지듯[落花流水], 금빛 모래가 날리듯[飛金沙], 제비가 집으로 돌아가듯[燕歸巢] ……. 반짝이는 비유로 봄 풍경이 눈에 선하다. 글로 읽는 춘앵전 역시 무르익은 봄을 만끽하기에 부족함 없는 작품이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1-04-16 0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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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비가 오는 날이면 한 번씩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몇 년 전, ‘라라랜드’(데미언 셔젤, 2016)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유로 많이 회자되었던 작품, ‘쉘부르의 우산’(자크 드미, 1964)이다. 고전의 힘이랄까. 처음 개봉한 지 반 세기가 훨씬 넘은 작품이지만 그 영상미와 음악은 관객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자크 드미 감독은 음악감독인 미셸 르그랑과 함께 이 영화를 모든 대사가 노래로 진행되는 ‘송 스루(song through)’ 방식으로 기획한다. 이는 오페라 공연의 감흥을 극장에서 느낄 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배우를 비롯한 모든 제작진들에게 도전적인 시도였다.
1950년대 말, 프랑스의 항구도시 쉘부르에서 엄마를 도와 우산 가게를 하는 아가씨 ‘쥬느비에브’(까뜨리느 드뇌브)는 자동차 수리공 ‘기’(니노 카스텔누오보)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알제리 독립전쟁으로 기에게 소집영장이 날아오자 두 사람은 눈물의 이별을 하게 된다. 기의 아기를 가진 쥬느비에브는 날마다 전장으로부터 편지를 기다리지만 소식은 거의 오지 않고, 그 사이에 보석상 ‘까사르’(마크 미셸)가 고백을 해 온다.
‘쉘부르의 우산’은 프랑스인들에게 비극적이었던 현대사를 배경으로 당대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낭만성을 탈피해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두 남녀를 담담하게 묘사한다. 세월이 흘러 조우했을 때, 그들은 의외로 건조해 보인다.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룬 쥬느비에브와 기에게 현재의 행복만큼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쉘부르의 우산’은, 조금은 쓸쓸한, 해피엔딩이다. ‘라라랜드’의 엔딩에도 이러한 감수성이 잘 묻어나 있다.
미셸 르그랑은 지휘자이자 재즈 피아니스트이며 프랑스 누벨바그의 중요한 작곡가로, 200여 편이 넘는 영화와 TV 드라마에 참여했다. ‘쉘부르의 우산’에서는 저 유명한 테마곡을 다양한 악기와 스타일로 변주해 삽입했다. 쥬느비에브와 기의 이별 장면에서 사용된 슬픔을 폭발시키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Je Ne Pourrai Jamais Vivre Sans Toi(I’ll wait for you)‘는 멜로드라마 OST의 정석과도 같다.
‘쉘부르의 우산’은 ‘사운드 오브 뮤직’(로버트 와이즈, 1966)에 아카데미 음악상을 내주었지만(제작년도는 ‘쉘부르의 우산’이 빠르지만 미국 개봉시기 때문에 같은 해 후보에 올랐으므로) 이후, 미셸 르그랑은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노먼 주위슨, 1968), ‘42년의 여름’(로버트 멀리건, 1972), ‘엔틀’(바브라 스트라이샌드, 1983) 등으로 3회나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약 2년 전 타계할 때까지 연주와 작곡에 매달렸던 그는 어릴 적 바람대로 완벽히 음악 안에서 평생을 살았고, 이제 그의 음악과 함께 불멸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윤성은의 Pick 무비
우리 시대의 성리학은 무엇인가, ‘자산어보’
누가 다산 정약용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실학사상이나 목민심서 등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정조와의 우정이나 긴 유배 생활, 방대한 저술 활동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형 정약전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정약용의 평생 벗이자 멘토였던 정약전은 동생과 마찬가지로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해배되지 못하고 섬에서 숨을 거둔 비운의 학자다. 그러나 유배 기간에도 그는 강진으로 간 정약용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교류한 바 있다.
동생이 많은 제자를 배출하며 그들과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긴 반면, 형은 후학 양성에 뜻을 두지 않고 직접 물고기, 소나무 벌채 정책 등을 깊게 파고 들었는데, 그렇게 탄생한 ‘자산어보’, ‘송정사의’ 등은 서민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실용적인 저서들이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보낸 나날들에 관한 영화적 기록으로서 그가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의 남 달랐던 철학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동주’(2015)에서 송몽규, ‘박열’(2017)에서 가네코 후미코 등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인물을 전면에 내세웠던 이준익 감독은 또 한 번 ‘정약전’(설경구) 옆에 흑산도 청년, ‘창대’(변요한)를 세운다. 창대는 양반의 서자로 바다 생물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인물이다. 성리학을 추종하는 그는 처음에 서학을 따른다는 죄목으로 유배 온 정약전을 배척하지만 정약전이 각자가 잘 아는 것들을 가르쳐 주는 ‘거래’를 제안하자 결국 합의하고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영화는 중반 이후까지 정약전과 창대가 서로의 지식을 교환하면서 우정을 쌓아나가는 과정을 따뜻하고 아기자기하게 풀어낸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친부를 따라 섬 밖에 나간 창대가 겪게 되는 가치관의 혼란이 여실히 묘사된다. 성리학을 갈고 닦아 관직에 나가고자 했던 그는 지위를 이용해 자신들만 배 불리는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를 보고 현실의 참담함을 깨닫는다.
책상 공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서서히 체험하게 되는 창대의 좌절, 유배지에서 병이 깊어가는 정약전의 쓸쓸한 말년이 교차되면서 영화는 여러 질문들을 남긴다. 학문의 목적은 무엇이며, 훌륭한 학문은 무엇인가. 또한, 우리 시대에 학문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조선시대 성리학처럼, 너무 힘이 세서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가치관과 관습들은 무엇인가.
‘자산어보’는 ‘동주’의 성공을 모델 삼아 흑백으로 제작되었다.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섬과 바다의 절경을 수묵화처럼 감상해야 하는 대신 인물들의 감정선은 더 섬세하게 드러났다. 장면 장면의 메시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데도 차분한 흑백 영상이 한 몫을 한다. 무엇보다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참 고마운 작품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1-04-16 0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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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Curtain Call)
21세기 공연가의 화두는 단연 원 소스 멀티 유즈(OSMU)다. 대중적 인지도를 지니고 있는 원작을 가져와 무대적 양식에 맞춰 새롭게 각색해 다시 즐긴다는 의미다.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니까 비슷하지않나 생각하면 엄청난 오해다. 무대적 문법에 맞춰 재구성된 콘텐츠는 이미 알고 있어도 다시 새로운, 심지어 더 즐거운 경험을 제공한다. ‘청출어람 청어람’의 콘텐츠 활용 공식이 무대위 공연세상에서도 흥미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 무비컬이나 주크박스 뮤지컬 같은 장르다. 흘러간 왕년의 흥행 영화나 좋아했던 가수의 음악들로 꾸며진 무대용 콘텐츠들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노블컬’이라 불리는데, 소설을 의미하는 영어인 ‘노블’에 ‘뮤지컬’을 합성한 용어다. 아무래도 활자가 무대로 구현되며 라이브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매력을 더해놓은 것이 매력이자 볼거리요 즐길 거리다.
장발장이란 주인공으로 유명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이나 꼽추 콰지모도와 집시처녀 에스메랄드의 눈물나는 사랑 이야기가 담긴 ‘노트르담 드 파리’, 귀족들이 평민 계급의 아이를 납치해 일부러 입을 찢어 유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내용의 ‘웃는 남자’, 루이스 스티븐슨의 미스테리 소설을 각색한 ‘지킬 앤 하이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이채롭게 변주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나 프랑스식 감수성으로 재구성한 동명 타이틀의 뮤지컬 그리고 오랜 세월 창작 뮤지컬로 흥행을 누려온 ‘명성황후’ 등이 모두 이런 사례들이다.
최근 국내 무대에서 사랑받았던 작품 중에서도 OSMU의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바로 ‘팬텀’이다. 프랑스 작가인 가스통 르루가 1910년 발표했던 동명 타이틀의 소설이 원작이다. 젊은 시절 기자생활을 했던 작가는 당시 파리에서 실제 일어났던 몇몇 죽음과 미제 사건을 엮어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 유령이라 불리는 인물이 살고, 그가 모든 미스테리의 배후라는 내용의 괴기 소설을 발표했다. 출판물 자체로도 엄청난 임기를 누렸지만, 특히 흑백 무성영화가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았던 1920년대에는 괴물역 단골 영화배우인 론 채니가 특수분장을 하고 나왔던 흑백 무성영화로 전대미문의 흥행을 기록했다. 주인공이 늘 가면을 쓰고 다니고, 그 안에는 흉측한 괴물 같은 사내가 살고 있다는 강렬한 이미지는 영화의 흥행이 큰 기여를 했다. 훗날 칼라 영화가 만들어지며 샹들리에가 천정에서 떨어지는 특수효과가 더해지기도 하고, ‘13일의 금요일’이나 일본 괴기영화 ‘링’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이미지를 더해 스크린을 수놓는 경우들도 등장하며 기괴한 이야기의 단골 소재로 각광을 받았다.
뮤지컬 작품도 여러 편이다. 우리나라에선 영국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만든 작품이 제일 유명하다. 무대는 배고픈 예술이란 선입견을 깨뜨리고 공연산업도 규모의 경제가 가능하다는 선례를 남겼다. 실제로 2001년 ‘오페라의 유령’이 기록적 매출을 보인 이후, 우리나라 공연계에서 뮤지컬의 성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획기적이었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브로드웨이를 능가(?)하는 추진력으로 심지어 뉴욕에서 실패한 작품까지 한국어로 번안하며 관객을 모으는 우리나라 공연가를 대서특필했을 정도니 ‘오페라의 유령’이 우리나라 공연계 나아가 문화산업 전반에 미친 영향은 가히 엄청난 수준임을 미루어 짐작할만하다.
지난 3월 17일 앙코르 무대의 막을 올린 뮤지컬 ‘팬텀’은 같은 원작으로 만들어진 무대용 콘텐츠이지만,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아닌 모리 예스톤이 만든 또 다른 버전의 작품이다. 예스톤은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을 각색한 뮤지컬 ‘9(나인)’으로 토니상을 수상한 바 있는 유명 뮤지컬 작곡가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작품이 판타지같은 상상력의 스토리텔링에 집중했다면 모리 예스톤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설적이며 원작에 가까우면서도 미처 들려주지 못한 감춰진 뒷이야기라는 로맨틱한 정서를 전달해준다. 덕분에 ‘오페라의 유령’에선 만날 수 없던 유령의 출생 비밀이나 크리스틴에게 음악을 사사하는 과정 등 다채로운 장면들이 훨씬 사실감있게 묘사되는 것이 특징이다. 유독 ‘오페라의 유령’을 좋아하는 관객이 더 많이 무대를 찾는 이유도 바로 이런 배경 탓이다.
뮤지컬 ‘팬텀’의 한국어 공연은 우선 시각적으로 만족스럽다. 제작사인 EMK뮤지컬컴퍼니가 최근 선보이는 작품들에서 만날 수 있는 특징들을 이 작품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작품의 기본적인 틀거리는 외국 것을 가져오되 무대를 보는 재미는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글로컬화(Glocalization) 전략이다. 덕분에 외국 원작에서는 없었던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작품 속 상징적 이미지인 샹들리에의 추락 장면이 한국 무대에 추가됐고, 파리 지하 호수 위로 배가 떠다니는 장면도 덧붙여졌다. 제한된 공간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착시를 통해 효과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배가 진행되는 반대 방향으로 배경 영상이 흐르는 별난 비주얼적 특수효과도 충실하게 더해졌다. 장면에 따라 바뀌는 유령의 가면은 그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며 화려한 장식을 따라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작품을 즐겼고, 소설까지 탐독했다면 분명 눈물 찔끔 나는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한국어 ‘팬텀’만의 차별화된 매력이다.
2021년 서울에서 막을 올린 앙코르 무대엔 주인공 유령 역으로 박은태와 카이, 전동석, 규현이 무대를 꾸민다. 모두 같은 역할로 무대에 나와 인기를 누렸던 익숙한 배우들이다. 사실 한국어 공연은 초연에서 박효신이 등장해 큰 이슈와 인기를 한 몸에 누렸는데, 이번무대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박은태나 카이 등은 조금은 결이 다른 감미로운 보컬을 선보인다. 소프라노 김소현과 임선혜, 이지혜의 무대는 클래식의 벨칸토 창법을 현란하게 구사하며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을 완성시킨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을 가장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것은 사실 팬텀의 과거 회상 장면에 나오는 발레 시퀀스다. 마치 꿈을 꾸는 것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는 단연 압권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발리리나 김주원과 황혜민, 최예원 등이 번갈아 등장하는데, 군더더기없는 말끔한 안무를 선보여 박수갈채를 받고 있다. 몸 동작, 손 동작 하나 하나가 전율을 안겨준다. 이제 외국 원작을 가져와 단순히 복제만 하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한 수준의 무대를 완성시키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무척 반가운 일이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1-04-09 1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