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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발레음악 '코레아의 신부'가 드디어 공개되다
124년만에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낸 발레 '코레아의 신부'의 음악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유려한 후기낭만 사운드, 빈 왈츠의 정수 그리고 한국적인 정서, 이 모든 요소들을 담고있었다.
영광스럽게도 악보가 발굴된 이후 지난 9월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과 함께 처음으로 연주를 맡게 되었는데 첫 리허설때 작품을 귀로 처음 접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반응은 고무적이었다. 비엔나 풍이면서도 동양적인 색채를 지녔고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 같다는 평과 함께.
고착화된 클래식 레퍼토리에 단비같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부풀어오르는 순간이었다.
4막9장으로 이루어져있는 이 발레극은 조선왕자와 부하의 딸 사이에 펼쳐지는 러브스토리로 내용은 이렇다.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조선의 왕자는 나라를 구하기위해 직접 전장에 뛰어들기로 결심하는데 전장으로 떠나기 전 한 부하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이름은 '대사'. 헤어졌던 그들은 결국 전쟁의 풍파속 제물포항에서 왕자와 재회하고 즉석에서 결혼한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의 치열한 전투끝에 일본이 승리하고 왕자는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일본 장군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는다. 결국 신부 '대사'는 각고의 노력끝에 사랑의 신들의 도움을 받아 꾀를내어 일본 장군을 쓰러뜨리고 둘은 마침내 서울에서 다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발레 '코레아의 신부'에서 여주인공역을 맡았던 Irene Sironi
이 작품은 1897년 빈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5년간 무대에 오르며 대성공을 거두었고 까다로운 빈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오페라 포함, 그 시즌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되기까지했던 작품이다.
잊혀졌던 이 작품의 악보가 2012 다시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졌을때부터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무척 애착을 갖고 있었지만 한국을 소재삼았다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성역화 시킬 수 없을 터. 이 작품이 알려졌을때부터 우려의 시선도 존재했다.
<춘향전>을 토대로 만들어진 <사랑의 시련>이란 단막 발레를 70년만에 국립발레단이 재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는데 작품에 드러난 동양에 대한 얕은 지식과 왜곡된 시선이 큰 몫 했을 터. 결국 서구문화가 중심이고 동양문화는 이국취미 정도로 다뤄지며 그 내면에 문화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있음이 확연했던 것이다.
코레아의 신부의 경우 한 여자가 왕자를 구하기 위해 전장에 뛰어들어 각고의 노력끝에 일본장교를 쓰러뜨리고 왕자를 구한다는 설정은 한국인의 정서애 부합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 또한 타자화된 서구인의 시선을 비롯해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불편한 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를 들어 왕자를 구하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주인공의 이름은 Daisha(대사)로 서구인의 일본 편향적인 시선으로 간주할 수 있다. 또한 대사와 재회한 왕자가 즉석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한국에서는 결혼한 남자만이 전쟁에 출전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관습이 등장한다. 어이없게도 남자들이 전쟁에 출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체로 해녀들을 부인으로 맞이하는 장면이 있다.
발레 '코레아의 신부' 리허설장면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
지휘자 총보에 보면 전쟁에 출전하기 전 왕자가 아편굴에서 미래를 점치는 장면에 "미신을 섬기는 다른 모든 한국인처럼 왕자는 아편굴에서 미래를 점친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중국을 휩쓸었던 아편의 영향권에 한국을 함께 포함시킨 오류가 명백하다.
당시 오리엔탈리즘이 만연했던 시대적 정황을 고려했을때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아시아에대한 진지한 접근과 고찰이 아닌 겉핧기식 자의적 해석이 엿보여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미지의 나라였으며 청일전쟁에 나라의 운명을 내맡겨야했던 힘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이 작품에 드러난 동양에 대한 편견과 일본과 중국이 뒤섞여버린 설정을 불편해하는 시각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현재 드높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달리 약소국이었던 당시 역사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되 예술은 예술자체로 인정받을 필요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인의 왜곡된 시선과 오류들과는 별개로 작곡가 요셉 바이어(Joseph Bayer)의 탁월한 음악적 예술성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바이어는 빈 왈츠의 아이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절친이자 미완으로 남아었던 발레 '신데렐라'를 완성한 인물인만큼 124년만에 최초로 공개된 그의 발레음악을 연주해본 결과 발레의 주를 이루는 왈츠들은 뻔하지 않으면서도 빈의 기상이 서려있으며 멜로디가 유려했다.
흥미롭게도 2막 4장에는 '제물포항'을 묘사한 음악이 등장하는데 전쟁통의 어수선함속에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클래식한 음악과 옛날 트로트 감성의 멜로디, 온음계 동양적 선율이 잘 녹아있는 음악으로 독립적인 음악으로도써도 꽤 매력적이었다. 1897년 발레 초연이후 빈의 일간지 다스 파터란트(Das Vaterland)는 "빈 스타일과 한국 스타일 사이를 우아하게 오간다"는 공연평을 내놓았는데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악보는 발견되었지만 아쉽게도 안무에 대한 자료가 미비하고 대부분 창작에 의존해야하기 때문에 발레를 무대에 올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 하다. 하루 빨리 발레와 음악이 함께 만나는 날을 기대해 본다.
1897년 초연이후 빈 일간지 너이에스 비너 쥬르날(Neues Wiener Journal)에 실린 기사내용이다. "요제프 바이어의 예술가적 감각은 전 세계에 널리 퍼진 빈 왈츠가 한반도에서도 통할 만하다고 말하고 있다". 앞으로 클래식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잡기 바라며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다.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1-10-01 0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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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 포커스
“문화오감의 시대를 넘나드는 코로나 시대의 기획 방식”
달고 짠 맛을 시각화한 전시 <설탕과 소금, Sugar and Salt>展(기획 임종은, 9.2-9.26, 서울 문래동‘술술센터), 전통 처용무를 코로나 시대의 위로공연으로 전환한 <다섯오>(감독 손인영, 9.2-9.5, 국립무용단 달오름극장), 이들의 공통점은 기존 전시와 공연이 갖는 정통성을 오늘의 시선에 맞게 다각화한 융합형 예술이라는 점, 코로나시대 지나 우리가 만들어나갈 총체적 감각을 총동원한 영리한 기획이라는 점이다.
국립무용단 손인영 감독의 한국적 아방가르드 ‘다섯오’
전통을 과거가 아닌 오늘에 살게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예술가들의 숙제다. 그 치열한 예술현장에서 춤꾼에서 지도자로, 동서고금을 아우른 다채로운 하모니로 한국무용계를 견인하는 손인영 감독의 부임 후 초연작 <다섯오>가 코로나로 인한 1여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막을 올렸다. 1962년 창단된 국립무용단은 전통춤 모둠 <코리아 환타지>, 극무용 <춤, 춘향>, 스타일리시 한 전통 <묵향> <향연>,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 춤의 가능성을 확장한 <회오리> <시간의 나이> 등 각기 다른 미학의 춤 예술로 한국창작무용의 기틀을 다지고 있다. 어제의 감동을 미래의 전통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법고창신의 미학, 풍부한 레퍼토리와 무대경험을 바탕으로 한 손 감독의 <다섯오>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다섯오가 초연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은 최근 전시장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관객들과 소통하느라 한창인 공간이다. 불안한 현대인에게 건네는 국립무용단의 따뜻한 위로가 이번 전시의 컨셉이라면,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손인영이 부임 이후 안무가로 이름을 내걸고 선보이는 첫 작품으로 티켓이 오픈되자마자 전석마감 되었다. 손감독은 2020년 9월14일자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적 창작무용의 해외시장 개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우리가 고민해야할 부분은 '세계성'이다.
세계시장에서 봤을 때, 우리의 움직임이는 '전통'이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하나의 독창적인 움직임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중략) 한국무용도 그 재료중 하나라면, 우리의 것을 우리가 재고성, 재창작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해외 프로듀서, 스태프와도 협업하여 연결고리를 넓혀야 하고, 앞으로 10년 뒤를 보면서 작품에 투자해야 한다." 손 감독의 바람인 한국적 원형의 세계화 가능성은 '다섯오'의 세련됨과 '위로무'로서의 처용해석 속에 충분히 탑재돼 있다.
무용의 새로운 지평을 확장하고 있는 손 감독은 ‘현대적 한국무용’을 어떻게 무대에서 구현할지를 고심해왔다. 공연이 열린 순간 선과 색을 살린 세련된 무대와 1년을 기다린 단원들의 춤사위는 완벽한 일체를 이루며 관람객들의 숨을 멈추게 만들었다. 손 감독은 기획인사에서 “<다섯 오>는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로 고통 받고 불안해하는 현대인에게 긍정의 힘과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자 한다.”며 “동양의 오행(五行)과 다섯 원소(목·화·토·금·수)를 상징하는 다섯 처용의 춤인 오방처용무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지혜롭게 조화와 균형을 꾀하는 세상으로 관객을 안내한다.”고 설명한바 있다.
국립무용단 무용수 전원이 출연하고, 공연계가 주목하는 정민선이 무대·의상·영상디자인을 맡아 통일감 있는 시각적 효과를 구현한 작품으로, 독창적인 음악세계의 작곡가 라예송이 새로운 한국춤을 만드는 여정에 동참했다. 지난해 초연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순연된 만큼, 벌써부터 빠른 시일 안에 앵콜 공연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충만하다는 평이다. (유튜브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xxplAGVIbuc)
단짠을 통해 보는 미감을 제시한 ‘임종은 총괄큐레이터’
<설탕과 소금> 전시포스터
공장지대로 가득했던 영등포구 문래동은 몇 년 전부터 도심재생사업과 더불어 다양한 예술집단의 새로운 기획들로 가득 찬 곳이 되었다. 새로운 활력을 이끄는 문래동엔 새롭게 들어선 ‘술술센터’, 이곳을 독특한 미감으로 채운 전시 <설탕과 소금, Sugar and Salt>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우수전시 선정작이다. ‘설탕’과 ‘소금’의 역사와 기억, 이른바 단짠을 통해 살펴본 현대인의 일상을 본다는 독창적 설정은 대중코드 속에 은밀한 예술인류학을 숨기는 임종은 독립큐레이터와 김정현 협력 큐레이터의 기획이다. 아시아 현대미술가 10인(팀)으로 구성된 국제전시로, 김지평, 김화용, 노승복+신판섭+쏠티 캬라멜, 문형민, 이완(, 탕 마오홍, 이루완 아멧 & 티타 살리나, 엘리아 누르비스타, 첸 칭야오, 키요코 사카타 등이 참가했다.
전시에서는 아시아 현대 미술가들이 설탕과 소금을 통해 그들의 역사와 현재를 돌아본 현대미술작품을 선보인다. 달고 짠 것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소비하는 ‘단짠’이라는 현상을 계기로 설탕과 소금을 돌아보며, 이를 매개로 근대화 과정, 세계화, 사회 현상, 환경문제 등을 탐구한다. 출품작은 설탕과 소금으로 우리의 몸, 역사와 문명, 그리고 자연환경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유기적인 연결을 가시화하며 미래와의 공존에 대한 선택과 상상을 제안한다. 기획의 글을 살펴보자.
“‘단짠’은 설탕과 소금의 과소비를 상징하는 신조어이다. 하나는 중독의 맛으로 다른 하나는 생존의 맛으로 설탕과 소금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지만 개항, 식민지, 분단 등 한국 근대 역사 속에서 유입, 생산 되었고, 소비가 급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익숙해진 단짠이라는 현상은 중독과 생존의 굴레에 있는 현대인의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설탕과 소금> 展은 현재 설탕과 소금의 중독적인 소비 현상부터 이것을 매개로 연결된 근대화 과정, 세계화, 사회 현상, 환경문제 등을 탐구한다. 특히 설탕과 소금의 생산, 유통, 소비 등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아시아의 현대미술작가들의 참여를 통해 동시대성과 아시아성이 교차되는 논의의 장을 형성할 것이다.
죽음의 섬 The island of death slave strike(2021), 2D 유니티, 사운드 2분 45초
흔한 식재료인 설탕과 소금을 주제로 한 현대미술전시를 통해 삶과 사건, 감각을 입체적으로 해석하는 장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아시아 현대 미술가들은 설탕과 소금을 통해 역사와 기억을 돌아보며, 예술적인 상상력으로 설탕과 소금의 다층적인 의미를 해석한다. 매일 먹는 설탕과 소금이지만, 우리의 몸, 역사와 문명 그리고 자연환경의 관계를 성찰하는 출발점이 되어 공존을 위한 새로운 선택으로 이어지길 상상해 본다.”
실제 이들이 제시한 방식처럼 작가들은 깊이 있는 위트와 일상적 해석 사이에서 작가 나름대로 21세기 단짠의 미학을 해부한다. 김지평은 <두 개의 신화>에서 소금과 연관된 구전 설화와 현대의 신화를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소금장수는 전국을 유람하며 소금을 파는 상인이면서도 소문과 이야기의 전달자이자 당대 유행을 전파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김지평 작가는 소금장수가 전하는 옛날이야기 위에 현대의 소금 광고 이미지를 선별해 로고와 문구를 덧그렸다. 노승복+신판섭+쏠티 캬라멜 팀은 <죽음의 섬>에서 설탕과 소금의 역사와 사건들을 디지털 게임 형식으로 재해석한다.
게임 스토리는 XYZ년 설탕왕국과 소금왕국에서 시작한다. 이 두 왕국은 백설탕과 정제염이 지배하는 왕국으로 백설탕은 마스코바도를 노예로 삼아 설탕을 생산하였고 정제염은 천일염을 노예로 소금을 만들었다는 세계관을 설정하고 있다. 오늘의 게임세대를 반영한 예술작품과의 교유가 놀랍도록 신선하다. 첸 칭야오(Chen Ching-Yao)는 역사와 사회구조의 따라 변화하는 산업과 노동자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계화의 영향에서, 산업의 구조는 조정되고 혹은 업그레이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작가는 어떤 장소가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커다란 내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 장면을 그의 특유의 시선과 유머로 재해석한다. 대만의 국영 산업이었던 설탕공장의 변화를 관찰하고, 현재의 모습 속에 예술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설탕과 소금> 전시는 공식 SNS를 통해 다양한 영상을 만날 수 있다. (인스타그램: instagram.com/sugarandsalt_art)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1-09-24 0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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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
국악기 가운데서도 거문고와 양금은 판이한 전사와 위상을 지녔다. 거문고의 역사가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비해 양금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에 비로소 나타난다. 오랜 세월 거문고가 선비들의 숭상을 받은 백악지장百樂之丈이었다면,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 양금은 비교적 최근까지 낯선 이방의 악기로 여겨졌다. 굳건히 제자리를 지켜온 악기와 이제 막 제자리를 찾은 악기. 그래서 거문고와 양금 모두 앞으로의 변화와 불러올 파장이 기대되는 국악기이기도 하다.
구라철사금歐羅鐵絲琴
양금 ⓒ 국립국악원
양금은 유럽의 덜시머, 아랍의 산투르에서 비롯된 악기로, 그 모양새가 흡사한 악기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한 양금은 사다리꼴 모양의 울림통 위에 금속 재질의 줄을 얹고 대나무를 깎아 만든 채로 줄을 쳐서 소리를 낸다. ‘구라철사금’이라는 양금의 또 다른 이름에는 ‘유럽에서 온, 금속 줄의 악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조선 후기 기록에서 중국에서의 양금 목격담, 외래 악기인 양금의 주법을 습득하고 널리 연주하게 된 과정 등을 엿볼 수 있다.
실내악 합주에 편성되거나 성악곡인 가곡의 반주 악기로 쓰이며 짧은 시간에 널리 사랑받는 악기가 되었지만, 양금이 독자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양금을 돋보이게 하는 창작곡이 개발되고 다양한 주법을 고안하게 되었으며 악기의 개량도 활발해졌다. 14벌의 줄을 얹었던 전통 양금에서 줄 수를 늘리고, 양금채의 재질이나 모양을 다양하게 하여 보다 풍성한 소리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가야금 연주자들이 양금을 함께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요즘에는 양금 연주에 주력하는 연주자들도 많다.
퍼커션과 베이스, 양금 연주자가 포진한 동양고주파의 음악은 록 또는 인디 음악으로 분류되지만 대부분의 곡에서 국악기인 양금의 선율이 도드라진다. 양금이 얼마나 매력적인 악기인가를 체감하고 싶다면 이들의 음악은 꼭 영상을 통해 만나야 한다. ‘독보적 양금 연주자’라는 수식에 걸맞은 윤은화의 연주 모습은, 듣는 즐거움과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2018년 음반 「틈」을 낸 후 꾸준히 활동을 이어 온 동양고주파는 올해도 ‘Arcade’라는 곡을 발표하고 여러 공연을 통해 관객과 만나고 있다. 네이버 온스테이지에서 동양고주파의 뮤직비디오를, 윤은화의 개인 유튜브와 한국양금앙상블(한국양금협회) 유튜브 등에서 다양한 양금 연주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전통 음악에 녹아든 양금의 신비로운 음색에 집중하고 싶다면 ‘천년만세’를 들어볼 것을 추천한다. ‘천년만세’는 계면가락도드리, 양청도드리, 우조가락도드리라 불리는 세 곡을 이어서 연주하는, 고즈넉하면서도 경쾌한 실내악곡이다. 양금과 함께 가야금, 거문고, 해금, 장구와 관악기 중에서도 비교적 소리가 작은 세피리, 단소 등이 편성된다.
백악지장百樂之丈, 거문고
거문고 ⓒ 국립국악원
『삼국사기』에는 익히 알려진 고구려의 왕산악과 신라의 백결 선생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 선비들의 악기이자 수신의 도구로 오래 사랑받은 만큼 거문고를 소재로 한 글과 그림, 악보 등 조선 시대를 거치며 남겨진 음악 유산의 가짓수 역시 단연 으뜸이다. 법도를 중시했던 선인들은 거문고를 연주하는 데에 있어서도 ‘오불탄五不彈’, ‘오능五能’ 등의 이름을 붙여 조건이나 자세를 갖추고자 하였는데, 속된 사람을 대하고는 연주하지 않는다거나 시선은 한곳을 향하도록 하고 생각을 한가롭게 한 후 연주해야 한다는 식이다.
견고한 위치를 점하고 추앙받아온 대신, 변화를 향한 운신의 폭이 넓지 못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악기 개량을 시도한 기록이 남아 있으나 거문고는 다른 악기에 비해 오래도록 본디 모습을 지켰다. 민속 기악의 꽃이라 불리는 산조가 꽃피우던 시기에도 거문고 산조를 만드는 데에는 반발이 있었고, 다른 국악기들이 산조 악기를 구분해 쓸 때에도 거문고는 그냥 거문고로 남았다. 현대에 이르러 전자 거문고를 비롯해 여러 개량 악기들이 개발되었으나 지금도 거문고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더 많이 사랑받는 악기다. 그러므로 거문고를 찬찬히 음미하기 위해서는 줄풍류나 산조 한바탕을 집중해 들어보는 것도 좋다.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부쩍 조회 수가 올라갔다는 평창올림픽 폐막식 영상에는 잠비나이의 ‘소멸의 시간’ 공연 장면이 남아 있다. 80명의 거문고 연주자가 협연하며 묵직하게 반복하는 음절이 좌중을 압도하며 진한 울림을 남긴다. 잠비나이를 비롯해 세계 유수의 월드뮤직 페스티벌에서 한 획을 그은 거문고팩토리, 블랙스트링의 음악에서도 각기 다른 거문고의 매력을 맛볼 수 있다. 한편, JTBC 슈퍼밴드 2에서 거문고 광인이라 불리며 K-Bass 거문고를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게 새겨넣은 거문고 연주자 박다울은 ‘거문고의 대중화’라는 이름으로 유튜브를 열어놓았다. 먹빛 악기 거문고는 영상 속에서 오색찬란하게 빛나며 대중들에게 손을 내민다. 천년을 이 땅에 존재해온 거문고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겠다면, 그의 ‘거문고 연주법’ 만우절 특강을 꼭 들어보시기를.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1-09-24 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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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
예술은 한 때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며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예술이 적극적으로 일상에 스며들어 남녀노소가 쉽게 향유하는 엔터테인먼트의 영역까지 확장되고 있다. 14-16세기 예술이 찬란한 꽃을 피웠던 르네상스의 배경에 메디치가가 있었다면, 현대예술이 일상의 곳곳에 스며드는 데는 기업들의 후원이 든든한 재정적 동반자가 되어주었고 더 나아가 예술가의 소비재가 결합해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펼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 중 펩시는 ‘현대의 메디치’로서 그 역할을 제법 충실히 수행 중이다.
기업의 주도하에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기특한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2017년 펩시에서 출시한 새 프리미엄 워터 브랜드인 라이프워터(LIFEWTR)이다. 펩시는 음료수 병이나 텀블러를 마치 액세서리처럼 생각하는 소비자의 취향을 감안해 각계의 신진 예술가와 협력하여 라벨을 디자인했다. 라이프워터의 라벨 디자인은 주기적으로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변경되어 예술과 트렌드에 민감한 소비자를 매료시킴과 동시에 신흥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있다. 경쟁업체 페리에나 스마트 워터와의 차별화 전략으로 예술을 선택한 것이다.
Life Unseen 프로젝트는 3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수(마이너리티) 예술가들의 활동에 대해 조사하고, 그들이 ‘선정’한 숨겨진 예술가들을 소개하며, ‘Take Action'을 통해 적극적으로 그들의 작품을 공유하거나 펀딩을 유도하고 있다.
LIFEWTR의 프로젝트의 Life Unseen은 소수 민족, 장애인,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예술가들이 물병의 라벨을 디자인했다. 일례로 패션 분야에서는 양팔이 없는 장애인 디자이너 Christina Mallon의 디자인 모티브를 활용해 라벨을 디자인 했고, 영화 분야에서는 흑인 영화 감독 및 사진 작가 Amandla Baraka가, 시각 예술 분야에서는 성소수자 일러스트레이터 및 아트 디렉터인 Shanée Benjamin의 디자인을 활용해 병 라벨을 디자인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음악 분야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 Life Unseen은 우리가 듣는 음악의 17.5%만이 여성에 의해 만들어졌고, 미국인구 중 4.8%를 차지하는 아시안 중 1.8%만이 음악 창작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홈페이지 전면에 내걸었다. 그리고 그들이 선정한 ‘Unseen Artists'들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 소개하고 있다.
2021년 선정된 한국계 미국인 인디밴드 Run River North, 2020년 라틴 그래미 어워드의 후보이자 라틴계 천주교 성소수자인 Gina Chavez. 흑인 여성 밴드 리더로서 트럼펫 연주자이자 보컬인 Arnettta Johnson가 있고 그들 역시 LIFEWTR의 라벨 디자인에 참여했다.
왜 이들에게 라벨 디자인을 의뢰했을까. 아마도 펩시는 소비자들이 예술 경험의 폭을 넓혀 예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열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힘으로 가능한 영역이라 믿는다.
다양성·포용과 관련된 움직임은 클래식계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 전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대표와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제 전통 클래식을 넘어 현대 클래식, 영화, 음악, 호주 전통 음악까지 도전해가는 중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전문가로 두어 그들의 견해를 오케스트라 운영과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노력 중이라며 다양한 관객이 폭넓은 레파토리를 경험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며 자기의 목소리를 낼 때 사회의 시너지가 더 커지기 때문이란다.
지금 예술계와 기업의 혁신적이고 포용적인 움직임으로 미루어 보아 앞으로 예술·산업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게 될 아이들에게는 개성과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조건이 될 것이다.
다양한 장르의 클래식, 뮤지컬, 국악, K-pop, 트롯트, 발레, 현대무용, 힙합까지 장르를 막론하고 공연을 접하고 즐기며, 미술관의 고전부터 시각 예술 작품을 접하는 등 어떤 종류의 예술이 존재하는지 온몸으로 경함하며 체득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길러졌을 때 개성과 다양성에 대한 편견 역시 반성적 사고로 걸러낼 수 있다.
우리의 교육은 다양성이 힘이 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양적인 평등(Equality)에만 초점을 둔 게 아닌가 싶다. 다문화교육을 표방해 다양한 가족의 형태와 문화를 경험시켜준다고 하지만 관광식 교육에 지나지 않아 오히려 섣부른 편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교실에서 겪는 잠재적 교육과정 곳곳에는 여전히 사회의 다양한 형태에 편견이 심겨져 있다. 필자는 이런 편견을 예술 교육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술 안에는 서로 다른 양식과 표현만 존재할 뿐 나쁜 예술과 좋은 예술로 구분되지 않는다. 다양한 예술적 표현을 접하고 시도해 볼수록 이는 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 공평함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펩시의 LIFEWTR 사례는 우리에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다양성을 존중할 준비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예술과 표현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정답만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각양각색의 대답을 그들의 표현과 생각으로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펩시는 그걸 해내고 있다. 기업의 발빠른 움직임을 쫓아가기 위해서 예술계와 교육계 역시 서둘러 움직일 때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1-09-17 0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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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당신은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1982)를 기억하는가? ‘미래소년 코난’(미야자키 하야오, 1978)이나 ‘2020 원더 키디’는?. ‘블레이드 러너’는 2019년을, ‘미래소년 코난’은 2008년을, ‘2020 원더 키디’(정세권, 1989)는 202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우리는 과거의 영상 콘텐츠들이 막연히 상상했던 미래를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외계인의 침입이나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수십 년 전에 기대한 만큼 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백 투 더 퓨처’(1985) 시리즈 중 2편에서는 2015년을 예측한 부분이 나오는데, 홀로그램이나 화상통화 등은 현대 사회에서 상용화된 것들이라 더 눈길을 끈다. 3편까지 제작된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도 시간여행 영화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질 만큼 영화사적 의미가 큰 작품이다.
시간을 뛰어넘는 모험을 묘사하고 있는 만큼 화려하고 웅장한 테마 음악은 앨런 실베스트리의 작품이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경쾌한 멜로디들 또한 코믹한 브라운 박사 캐릭터 및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들과 잘 어우러진다. 한스 치머처럼 그 이름만으로 티켓 파워를 가질 만큼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보디가드’(1992), ‘캐스트 어웨이’(2000), ‘레디 플레이어 원’(2018) 등 그가 수십 년간 참여해온 작품들은 대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가장 최근의 흥행작은 물론 ‘어벤져스’ 시리즈일 것이다.
50년간 백 삼십여 편의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쳤지만 그의 음악들은 ‘백 투더 퓨처’의 경우처럼 로버트 저메키스와의 협업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장르를 불문한 저메키스의 휴머니즘과 실베스트리의 따뜻한 감성이 정확히 합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뛰어난 스코어들이 많지만 ‘포레스트 검프’(1994)의 첫 장면에서 깃털 하나가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흐르는 ‘feather theme’은 오랜 세월을 다루는 이 영화의 오프닝 곡으로 탁월한 결과물이었다. 한 사람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미국의 지난한 현대사가 녹아 있는 멜로디는 단순하지만 강렬해서 주인공이 소개될 때까지 벌써 관객들의 뇌리에 박히게 된다. 실베스트리의 잘 알려진 스코어들 중에서는 가장 미니멀하면서도 중독성이 강한 곡이라고 할 수 있다.
1972년 ‘도베르만 갱’(바이런 처드노)으로 영화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앨런 실베스트리는 곧 데뷔 50주년을 맞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영화음악의 경향도 많이 달라졌지만 그는 관록과 적응력으로 여전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윤성은의 Pick 무비 /
‘너의 결혼식’이 아닌 ‘여름날 우리’
코로나와 함께 한 두 번째 여름. ‘이글이글’이라는 부사를 그대로 체험했던 뜨거운 날들도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다. 우리의 2021년 여름은 어떻게 기억될까. 마스크와 무더위, OTT 드라마 외의 추억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여름날 우리’(감독 한톈, 2021)는 여름을 배경으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다. ‘저우 샤오치’(허광한)는 열일곱 살에 같은 학교로 전학 온 ‘요우 용츠’(장약남)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수영반에 있지만 운동보다 싸움을 일삼았던 샤오치는 그 때부터 모든 남학생들의 우상이 된 용츠를 따라다니며 순애보를 드러낸다. 용츠도 순수한 샤오치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면서 둘 사이는 가까워지지만, 용츠의 가정 문제로 인해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만다. 2년 후 용츠가 입학한 대학을 알게 된 샤오치는 투지를 발휘해 재수에 성공하고 캠퍼스에서 다시 그립던 첫사랑과 재회한다. 이번에는 용츠의 킹카 남자 친구가 가장 큰 장애물이다. 친구와 연인 사이의 연옥에서 허우적대던 샤오치는 결국 먼저 용츠에 대한 마음을 접고 연락을 끊어 버린다.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연애는 다시 몇 년이 흘러 사회인으로 만났을 때에야 성사된다. 수영 챔피언을 꿈꾸던 샤오치가 경기를 포기하고 용츠를 사고에서 구해낸 직후다.
그러나 행복의 시작점인 줄만 알았던 그 사건에는 비극의 그림자도 함께 드리워져 있다. 재활 후에도 선수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샤오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 뒤돌아본다. 첫사랑의 판타지로 가득한 이 영화가 논리를 갖는 것은 사실상 이 대목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샤오치가 성공한 친구들 속에서 자신을 낙오자처럼 느껴며 용츠에 대한 사랑을 되짚어 보고 잠시나마 후회를 내비치는 순간에 영화는 비로소 현실에 발을 딛고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아야 하는 법이라고. 미래의 어느 순간에 당신은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후회한들 어쩌겠는가. ‘여름날 우리’는 김영광, 박보영 주연의 우리 영화, ‘너의 결혼식’(이석근)의 리메이크작으로, 중국판 제목도 ‘너의 결혼식’(你的婚礼)이었지만 한국에서 개봉할 때는 ‘여름날 우리’라는 제목을 달았다. 원제는 두 사람의 긴 인연이 어느 한쪽의 결혼으로 인해 일단락되는 과정을 강조했다는 느낌을 준다. 서로의 행복을 빌어준다는 점에서 주인공들이 미련 때문에 처절하게 울던 20세기 멜로드라마와는 다르다 해도 서사가 이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러나 ‘여름날 우리’라는 제목에는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에 방점이 있다. 후회하든 안 하든 다시 돌아갈 수 없고, 이제 조금씩 희미해질 과거라도 그 여름날의 풋풋하고 설렜던 감정들은 영원히 그 시간 속에 놓여 있을 것이다. 각자의 길을 가는 샤오치와 용츠의 마지막 모습이 슬퍼 보이지만은 않는 것은 추억만은 여전히, 그 계절 속에 남아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1-09-17 0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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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바이올린 여제 안네 소피 무터의 끈질긴 구애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 여제라 불리는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그녀가 처음에 영화음악의 거장 존 윌리엄스로부터 들은 대답은 "노(no)"였다.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존 윌리엄스를 만난 무터는 단 몇 마디라도 자신을 위해 작곡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존 윌리엄스는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자신은 곧 잊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시절 영화 <스타워즈>를 접한 이후부터 존 윌리엄스의 팬이었던 무터는 그와의 만남 이후 그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크리스마스에 존 윌리엄스에게 독일식 진저브레드를 보내줬는데 그게 통했던 것 같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진저브레드 덕분인지 그녀의 끈질긴 구애는 점차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존 윌리엄스는 그녀를 위해 "Markings"라는 곡을 헌정했으며 2017년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보스톤 심포니의 연주로 초연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공연은 끝이 아닌 멋진 서막이었다. 그 이후가 무터가 스타워즈 시리즈의 테마들을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형식으로 편곡해달라고 그에게 의뢰한 것이다. 이에 존 윌리엄스는 화답했다. 결국 그들의 협업으로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러브테마 Across the stars, 레아 공주의 테마를 비롯해서 해리 포터, 사브리나등 주옥과같은 영화음악으로 엮어만든 음반이 도이치 그라모폰을 통해 발매되었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뿐만아니라 2020년 존 윌리엄스의 지휘아래 빈 필이 연주하고 무터가 협연자로 참가한 실황 음반 는 그 해 오케스트라 음반부문 베스트 셀러에 등극하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무터의 끈질긴 구애 끝에 성사된 두 거장의 협업. 정통 클래식의 정점에 선 무터가 존 윌리엄스와 함께한 공연뿐 아니라 음반 또한 성공시키며 그녀의 꿈을 이뤘다는 사실도 의미가 있지만 존 윌리엄스도 큰 수혜자임엔 틀림없다.
안네 소피 무터는 1963년생으로 13세의 나이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게 전격 발탁되어 베를린 필과 데뷔한 클래식 무대의 정점에서 단 한번도 내려온 적이 없는 바이올리니스트이다. 그녀는 바로크, 고전으로부터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레퍼토리에있어 폭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예를 들어 클래식 아티스트로는 이례적으로 네 번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는데 베토벤 소나타를 비롯한 고전음악 뿐 아니라 림, 펜데레츠키와 같은 현대음악 작곡가들을 망라한다. 그 밖에도 폴라 뮤직상, 독일 레코드상등 수많은 상을 휩쓸었고 흥행에 성공한 베스트셀러 음반도 수두룩하다.
클래식의 대표적인 아이콘 무터가 상업영화 작곡가로써의 이미지가 짙은 존 윌리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바로 존 윌리엄스가 클래식에서 존재감있는 작곡가로써의 빠른 안착이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무터는 한 인터뷰에서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 21세기의 현대음악이다"라고 했는데 영화음악 작곡가라는 국한된 이미지를 불식시키는데 앞장선 인물이 무터였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그가 현재 클래식에서 주목받는 이유를 클래식 연주자들과의 긴밀한 작업과 더불어 현대음악도 꾸준히 선보였던 말년의 존 윌리엄스를 위한 예우로 규정짓기도 하는데 어불성설이다.
2019년 존 윌리엄스가 최고인기 현대음악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를 제치고 가장 많이 연주되는 현대음악 작곡가에 등극했다는 사실. 2019년은 존 윌리엄스와 무터의 음반 'Across the stars'가 출시된 해이기도 하다. 무터는 거절하기 힘든 여자라는 존 윌리엄스의 너스레처럼 클래식의 중심에 선 무터의 부탁이었기에 가능했던 또 하나의 단비같은 희소식. 음반의 성공에 이어 탄력을 받은 그들의 협업이 지난 7월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바이올린 콘체르토 2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현대음악 범주에 포함된 이 작품을 통해 존 윌리엄스는 클래식 작곡가로써의 면모를 클래식계에 더욱 각인 시켰다. 최근 탱글우드에서 존 윌리엄스의 지휘아래 초연된 이 작품은 영화음악적 요소와 현대음악의 어우러짐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호평을 받으며 고착화된 클래식 레퍼토리에 참신한 작품으로 기대감이 높다.진저브레드로 존 윌리엄스를 꼬셨던? 무터가 아니었으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음반으로 출시되며 베스트 셀러를 기록한 빈필과의 공연의 매진사례에 이어 2021년 10월 예정된 베를린 필과의 공연 또한 한시간안에 매진시키며 존 윌리엄스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제 그는 세계 최고반열의 오케스트라들을 섭렵하며 클래식 팬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것이다.
클래식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와 영화음악의 거장의 만남이 이벤트성 이슈몰이로 끝난게 아니라 의미있는 결실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무터도 윈(win), 존 윌리엄스도 윈, 결국 음악을 향유하는 우리가 윈이다. 진저브레드가 그토록 매력적인 맛이었을까.
무터가 연주한 해리포터의 '헤드위그의 테마'는 원곡과 또다른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무터는 단순한 편곡이아닌 "바이올린을 위해 재탄생된 작품"이라고 표현했는데 적절한 표현이다.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테마는 매력적인 사운드를 자아내며 바이올린 특유의 테크니컬한 묘미를 십분 살린 협주곡으로 손색이없다. 무반주 독주 부분은 카덴짜형식으로 현대적인 음악어법의 매혹적인 해리포터 판타지를 그려낸다. 영화 테마를 다채롭게 변주해내는 존 윌리엄스의 마법이 놀랍다.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qsCZP3wdF4w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1-09-10 0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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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1979년 10월, 지휘자 번스타인(L. Bernstein, 1918-1990)은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습니다. 프로그램은 말러(G. Mahler, 1860-1911)의 교향곡 9번. 번스타인이 매우 아끼던 작품이었지요. 반면, 베를린 필에게는 당시만 하더라도 상당히 생소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총 리허설이 평소와는 달리 홀을 가득 메운 청중들 앞에서 진행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모았던 번스타인과 베를린 필의 만남은 이틀간 열렸던 공연 이후 다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RIAS 방송국에서 첫 날 공연을 녹음하였고 그 음원이 번스타인이 사망한 후인 1992년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정식 음반으로 발매되었습니다.
번스타인이 베를린 필을 지휘했던 유일한 기록이라는 희소성만으로도 이 음반은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는데 그래미 상을 비롯하여 몇몇 음반상을 수상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음반 속에 담긴 음악 자체도 매우 훌륭했지요. 그런데, 이 음반은 또 하나의 큰 화제 거리를 몰고 왔습니다. 4악장이 절정에 이르는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트롬본 소리가 아예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말러는 그의 9번 교향곡에 총 3대의 트롬본을 편성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음반에서 문제가 된 부분에서는 3대의 트롬본이 모두 매우 크게 연주하도록 표기해 놓았지요. 그러니까 이는 당시 베를린 필의 트롬본 주자들 모두가 그들의 소리가 뚜렷하게 부각되어야만 하는 이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말았다는 뜻이 됩니다.
천하의 베를린 필 주자들이 왜 이런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두고 이런저런 추측들이 오고 갔습니다. 베를린 필이 당시 말러 교향곡 연주에 익숙하지 않아서 트롬본 주자들이 실수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그 중 하나였지요. 그러던 중에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인터넷에 등장했습니다. 이 공연에 객원 호른 주자로 참여했다는 사람이 이 실수에 대해 설명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문제가 된 이 부분에서 트롬본 주자들 뒤에 앉아있던 청중 한 명이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트롬본 주자들의 주의가 흐트러져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실수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쓰러진 청중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트롬본 주자들이 의사가 급히 와야 했던 위급한 상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이었지요.
베를린 필과의 말러 교향곡 9번 연주가 끝난 뒤 박수를 받고 있는 번스타인
(출처: Archiv Berliner Philharmoniker)
이 이야기는 믿을만한 것일까요? 인터넷에 실명을 밝히지 않은 채 올라왔던 글이어서 그 신빙성에 의문을 품을 법도 한데 오랫동안 베를린 필의 제1 바이올린 주자로 활약하였고 번스타인의 말러 공연에도 참여했던 페터 브렘(P. Brem, 1951- )의 회고록을 보면 이 이야기는 사실로 보여집니다. 브렘 또한 이 부분에서 관악기 뒤에 자리한 청중 한 명이 실신했다고 밝히고 있으니까요. 브렘은 그 청중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는지의 여부까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공연 도중 쓰러져 트롬본 주자들이 영향을 받아 실수를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실수의 원인은 밝혀졌지만 이제 궁금해지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왜 이런 큰 실수가 포함된 음반이 발매되었을까요? 답은 이 공연이 원래는 정식으로 녹음될 계획이 없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만약 음반사가 이 공연 실황을 음반으로 발매하려는 계획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적어도 이틀 간의 공연과 총 리허설을 녹음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편집을 통해 실수를 수정하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번스타인과 베를린 필의 말러 공연은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첫 날의 공연만 녹음되었습니다. 아마도 라디오 송출을 위함이었겠지요. 그래서 트롬본 실수처럼 큰 실수가 존재해도 이를 대체할 편집 음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다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번스타인은 이 공연이 음반으로 정식 발매되는 것을 찬성했을까요? 서두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이 음반은 번스타인이 사망한 후에야 발매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번스타인의 대답은 추측만 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번스타인이 이 음반의 발매를 분명 반겼으리라 생각합니다. 공연에서 그와 베를린 필 사이에 깊은 음악적 교감이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성공으로 끝났던 첫 공연에서 번스타인이 무대에서 눈물을 훔치면서 단원들을 포옹했으며 단원들도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는 뉴욕 타임즈의 기사와 첫 리허설 때만 해도 베를린 필이 번스타인이 원하는대로 말러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공연에서 마침내 그가 원하는대로 연주할 수 있었다는 브렘의 회고를 통해 알 수 있지요. 트롬본 실수를 비롯하여 앙상블이 다소 산만한 몇몇 부분들은 자주 지적되지만 처음 만났던 이들이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낸 음악적 성취가 이로 인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번스타인과 베를린 필의 공연이 편집을 통해 기술적으로 보다 완성도 높은 음반으로 발매되었더라면 어땠을까요? 분명 그 음반도 훌륭했겠지만 한 공연을 온전히 담아낸 생생함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이 음반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아쉬움은 트롬본 파트의 실수가 아닌, 이것이 번스타인과 베를린 필의 유일한 만남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입니다. 이들의 만남이 더 이어졌더라면 어떤 흥미로운 결과물들이 탄생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유일해서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이들의 만남을 음반을 통해 찬찬히 음미해보는 것을 어떨까요?
추천음반: 번스타인과 베를린 필의 말러 교향곡 9번 음반입니다. 4악장에서 트롬본 파트의 실수가 들어있는 부분은 1시간10분34초부터 등장하지요. 전곡을 듣다보면, 조금씩 어수선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들리기도 하는데, 번스타인과 베를린 필이 처음으로 함께 했다는 점이 실감납니다. 그러나, 전곡을 관통하는 강력하고 생생한 에너지는 일품이지요. 번스타인이 지휘를 하며 기합을 넣는다거나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도 들을 수 있는데, 음악에 한껏 몰입해 지휘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연주가 끝나고 쏟아졌던 청중들의 박수 소리도 음반에 실어주었으면 생생한 현장감이 더 살아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ah3mcaRpc9Q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1-09-09 1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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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조승우 공연장면 <사진제공 : 쇼노트>
요즘 인기있는 뮤지컬 넘버를 알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공연담당 기자에게 전화를 걸면 된다. 핸드폰 연결음으로 대부분 노래가 좋은 작품을 담아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자주 공연 음악을 접해야 하는 일종의 직업병(?)탓이다. 한때 대부분 기자들에게서 ‘사랑의 기원’이 흘러나왔던 적이 있다. 뮤지컬 ‘헤드윅’이 초연됐던 2005년의 일이다. 신물 날만큼 자주 뮤지컬 공연장을 들락거렸을 텐데, 얼마나 좋으면 전화 응답도 이 노래일까 미소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음악이 좋아 선율이 입가를 떠나지 않기로 유명한 이 작품의 매력이다.
원래 제목은 조금 더 길다. ‘헤드윅과 성난 1인치(Hedwig and the Angry Inch)’라는 다소 이색적인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헤드윅은 동독 태생이지만, 이데올로기 대립이 한창이던 시절 자유와 음악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동경해 별난 제안을 해온 미군 남성을 따라 이민을 결심하고 성전환 수술을 감행한 독특한 성정체성의 인물이다. 문제는 넉넉지 않은 경제적 사정 탓에 싸구려 시술을 받아야 했고, 잘못된 수술로 1인치의 살덩어리가 남아있는 존재가 됐다는 점이다. 결국 헤드윅은 온전한 남성도, 그렇다고 성전환 여성도 아닌 경계인의 삶을 살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군 남성과 헤어진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그녀처럼 혹은 그처럼 희생을 치르지 않고도 동서방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게 되는 역사속 변화에 홀로 버려지게 된다. 뮤지컬은 헤드윅의 자아와 사랑 찾기라는 여정을 함께하는 허름한 콘서트장의 풍경 속 이야기로 전개된다.
처음은 오프 브로드웨이의 작은 무대부터다. 존 카메론 미첼이 극본과 주연을 맡고, 스티븐 트라스크가 음악을 만든 소극장 뮤지컬로 1998년 2월 14일 첫 막을 올렸다. 공연장으로 쓰인 장소가 제인 스트리트 극장인데, 원래 타이타닉의 생존자들이 잠시 머물렀던 뉴욕 리버뷰 호텔의 볼룸을 개조해 만든 곳으로 유명하다. 뮤지컬에선 타이타닉 이야기나 생존자 사연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물론 초연이 됐던 소극장이 지닌 별난 배경을 극적으로 활용한 데서 기인한 탓이다.
독특하고 신선하며 특히 음악이 좋았던 초연 무대는 오래지않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결국 2년여 동안 857회의 연속공연이라는 흥행을 이뤄냈다. 오프 브로드웨이에서의 성공은 글로벌 규모로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물론 작은 규모에 이색적인 소재가 지닌 문화상품으로서의 경쟁력이 유리하게 작용된 면도 있지만, 역시 언어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좋은 음악의 무대이기에 가능했던 성과라 보는 시각도 절대적이다. 무대의 인기는 스크린으로 번지기도 했다. 영화가 제작된 것은 2001년인데, 무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존 카메론 미첼이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해 마치 진짜 사연을 넋두리처럼 늘어놓는 듯한 실감나는 연기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영화 버전의 ‘헤드윅’은 그 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과 연출상을, 이어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장편 영화상을 거머쥐면서 일약 세계적인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우리나라도 무대보다 영화를 먼저 접한 애호가 관객층이 적지 않다.
다양한 언어와 세계 각지에서의 프로덕션, 그리고 스크린용 뮤지컬 영화의 제작 탓에 ‘헤드윅’을 만날 수 있는 음원은 그 종류만 수십가지에 이르는 재미를 담아내게 됐다. 가장 잘 알려진 음반은 역시 무대용 오리지널 캐스트 음원이다. 초연이 올려진 이듬해인 1999년 아틀랜틱 레코드에서 발매된 이 앨범에는 물론 오리지널 캐스트였던 존 카메론 키첼의 음성이 담겨 있다. 영화의 제작에 맞춰 등장한 앨범도 있다. 2001년 발매된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다. 무대에서의 초연 음반 재킷은 짧은 원피스를 입고 붉은 루즈를 바른 존 카메론 미첼의 전신사진이었던데 반해, 영화의 OST는 블론드 가발을 쓰고 눈을 감은 채 열창을 하고 있는 헤드윅의 얼굴이 강조된 이미지를 사용해 보다 대중적으로 친근해지는 변화를 가미했다.
우리말 음원도 있다. 가장 먼저 제작된 것은 2005년으로 이지나 연출이 대학로의 SH 씨어터에서 막을 올렸던 버전이다. 오만석과 조승우, 송용진, 김다현 그리고 이츠학으로는 이영미와 백민정이 참여했던 버전의 뮤지컬 넘버들을 감상할 수 있다. 여러 배우들의 노래를 한 음반에 수록하다보니 특정 배우의 육성으로 전곡을 들을 수 없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멀티 캐스트가 일반적인 한국적 상황을 감안해보자면 그래도 나름 만족할만한 다양성을 반영됐다고도 보여진다. 2006년에 다시 제작된 또 다른 우리말 음원도 있다.
뮤지컬 ‘헤드윅’의 감상 포인트는 노랫말의 배경이 된 신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오리진 오브 러브’가 대표적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고대 희랍의 아리스토파네스가 설파했다는 자웅동체의 신화를 빌려와 인간이 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원래 인간은 두 사람이 한 몸이었으나 스스로의 교만과 신들의 질투로 찢겨졌고, 그로부터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설명이다. 뮤지컬에서는 여기에 이집트 나일강이나 인디언의 신들까지 더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는 섬세한 디테일의 완성도는 명작이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다.
2021년 서울에서 막을 올린 버전은 최근 브로드웨이 공연가에서 선보인 대극장 버전의 무대다. 1990년대 KBS의 인기외화 시리즈로 인기를 누렸던 ‘천재소년 두기’출신의 인기 뮤지컬 배우 닐 패트릭 해리스를 전면에 내세웠던 바로 그 무대다. 아무래도 소극장에서 대극장 버전으로 탈바꿈되며 무대 공간을 폐차장으로 바꾸고, 무대에 다양한 볼거리와 영상을 덧입히는 업그레이드가 이뤄졌다. 미국 무대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토니상에서 기발한 재치와 무대 매너, 안정적인 진행를 선보이며 수상식이 가장 선호하는 호스트가 됐던 그이기에 세인들의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었던 데다, 그 스스로가 커밍 아웃을 했던 성소수자여서 ‘헤드윅’의 인기는 그야말로 상한가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번 대극장 버전의 업그레이드 우리말 무대에는 오만석, 조승우, 이규형, 고은성 그리고 뉴이스트의 렌이 가세하며 쉽게 표를 구하기 어려운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고은성 공연장면 <사진제공 쇼노트>
‘헤드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헤드헤즈’라 부른다. 특히 우리나라 ‘헤드헤즈’들은 주로 여성이 절대다수다. 무대 위에서 꽃미남 배우들이 화장을 하고 고운(?) 모습으로 등장했던 배경 탓이다. 그러나 역시 이 작품의 본질은 캐릭터의 이면에 감춰져 있는 인간적인 매력을 찾아낼 때 오히려 극대화되어진다. ‘헤드윅’ 공연장에 더 다양한 배경과 연령, 다양한 성정체성의 ‘헤드헤드’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이유다. 묵직하게 다가오는 진짜 감동을 그래야 비로소 완성되어진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1-09-03 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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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공식포스터 <사진제공 : EMK >
인간 사회는 항상 정의를 추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받고 선뜻 답을 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고대 철학자들부터 시작해 현대의 저명한 학자들 사이에 이르기까지 이 개념은 무척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마땅한 기준이 없었던 데다, 때에 따라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세력의 주장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꽃을 피운 프랑스 혁명 뒤에도 그림자는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다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해 비참히 생을 마감해야만 했던 한 여인은 이제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가 부른 노래를 통해 우리에게 매우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 말이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가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2019년 재연 이후 2년 만에 무대에 오른 이번 공연은 7년 전 관객들에게 첫인사를 건넸던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돼 더욱더 뜻깊다. 지난 7월 13일 막을 올린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는 초연부터 함께한 ‘마리 앙투아네트 장인’ 김소현과, 지난 시즌 완벽한 연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던 김소향이 다시금 타이틀 롤을 맡아 감동적인 무대를 선사한다. 또 스웨덴 귀족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인이었던 악셀 폰 페르젠 백작 역에 민우혁, 이석훈, 이창섭, 도영이 캐스팅돼 새로운 시너지를 선보이고 있다. 공연은 오는 10월 3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는 일본 현대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가 탄생시킨 대형 뮤지컬로 자리 잡았다. 작품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완전히 대비되는 삶을 살아온 가상 인물 마그리드 아르노를 등장시켜 극적인 요소를 더한다. 마그리드 아르노는 혁명을 주도한 인물로 그려진다. 빈한한 삶으로 인한 고통은 그에게서 분노와 증오심을 키웠다. 그 후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중요한 순간 깨달음을 얻고 뒤늦게나마 참된 정의를 실현하려 애쓰는 캐릭터다. 서사적인 측면에서 다소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설정도 분명 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만큼이나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라 꽤 애틋하게 느껴진다.
이 밖에 작품 전반으로 본다면 스토리부터 의상, 소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고증에 가깝게 살리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난하기 위해 쓰인 비속어와 마그리드 아르노를 낮잡던 일부 표현의 경우, 전 시즌과 달리 말 줄임으로 처리하거나 확실히 강세를 약하게 표현하면서 어감을 순화했다. 단, 뮤지컬에 등장한 실제 사건들은 극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위해 전후 순서를 바꾸기도 했다는 점을 미리 참고해 둔다면 훨씬 편하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제공 : EMK>
오스트리아 공주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황태자 루이 16세와의 결혼을 위해 베르사유에 입성했다. 오랜 기간 적대관계였던 두 국가 간 정략결혼은 단순히 동맹을 맺기 위한 목적 외에도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당시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본디 지녔던 이름부터 시작해 복식, 행동거지 등 모든 것을 완전히 프랑스식으로 바꿔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뮤지컬 시작과 함께 페르젠이 부르는 ‘프롤로그 마리 앙투아네트’에도 이런 이야기가 간략하게 담겨있다.
낯선 환경에서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었던 그가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활에 몰두하기 시작한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주변 사람들은 그저 해맑은 그를 두고 손가락질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만 들었다. 그런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스웨덴 귀족 페르젠은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사랑이자 단 하나뿐인 자신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로지 궁 생활에만 익숙한 탓에 바깥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군의 날 선 칼날이 왕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페르젠의 경고와 마그리드의 도발은 곧 현실이 됐다.
그릇된 증오심과 맹목적인 복수심은 어느덧 모두를 불태울 만큼 커져 있었다.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을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마지막까지 왕비다운 품위를 지키며 조작된 사실과 거짓 추문, 끔찍한 오해 속에 쓸쓸히 단두대로 향한다. 혁명의 불길이 절정으로 치솟자 남몰래 품은 본심이 결국 각기 다른 곳을 향하고, 정의를 구현하려 했던 의지마저 광기로 변해버린 모습은 놀랍고도 씁쓸하다.
<사진제공 :EMK>
이 모든 장면은 360도로 회전하는 대형 턴테이블 위에 고스란히 펼쳐져 입체감을 더한다. 속도감 넘치는 무대전환도 짜릿한 긴장감을 선사하며 작품에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여기에 대표 넘버인 ‘최고의 여자’,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 ‘더는 참지 않아’ 등을 듣다 보면 감정은 더욱 고조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탄식이 우러나는 순간,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는 무겁게 막을 내린다.
수많은 오해 속에 가려졌던 진실은 오늘이 되어서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여전히 참된 정의를 찾기 위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요즘,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가 던진 질문은 물음표가 되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돌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공연 예술이 갖는 가치도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 작품이 전할 긍정적인 영향력을 기대해본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1-09-03 0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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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 포커스
“문자가 현대와 만났을 때, 세계문자페스티발의 전시해석”
바야흐로 21세기는 문자 홍수의 시대이다. 다양성의 시대, 우리는 문자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하는가? 문자는 동양과 서양, 내용과 형식, 구상과 추상을 연결하는 미적토대이자 원형이다. 고개 드는 문자추상의 유행과 서예전시 열기의 연계성은 중국국가미술관의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와 LA카운티 라크마미술관의 ‘한국 서예전, Beyond Line’ 그리고 예술의전당 서예관의 ‘ㄱ의 순간’등의 성공과도 맞아 떨어진다. 감각본위의 서구적 유행만을 좇던 한국미술계에 불고 있는 문자화 바람, 조만간 전통서화와 민화문자도를 비롯한 작품들이 제 가치를 찾고 동시대 작가들과 함께 호흡할 날이 멀지 않음을 시사한다.
1884년 갑오춘서라는 제작시기가 명확한 백수백복도 (제공 : 현대화랑)
민화 문자도에 반영된 무명작가의 세련된 멋 (제공 : 현대화랑)
문자형상의 재해석, “문자, 현대와 만나다”
작년 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독특한 전시가 열렸다. 한국 근현대 서예전 ‘미술관에 서(書)’는 서예를 미술의 범주로 인정한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전시였다. 유튜브 10만 뷰를 바로 찍었던 이 전시는 배원정 근대미파트 학예사가 기획한 것이다. 배 학예사는 인터뷰에서 “서예가 회화나 조각 등 다른 장르의 미술에 미친 영향들을 살펴봄으로써 미술관에 ‘서(書)’를 조명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다른 형태의 미술임을 말하고자 한다”며 “전통의 시화일률(詩畵一律)을 계승한 문자추상과 서체추상이 동서양 융합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현대화 되는지를 모색한 전시”라고 밝혔다. 추상화의 유행이 서구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미술가들이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창열, 회귀, 1987 (출처: 갤러리현대)
최근 국내 옥션의 하이라이트에는 작년 작고한 물방울 작가 김창열(1929~2021)의 문자작품들이 일부 포함돼 있다. 현대화랑의 ‘더 패스(The Path)’ 전시에서 재조명된 바 있는 문자그림들, 서화(書畵)가 다시금 고개를 들면서 문자추상에 대한 관심이 미술시장에까지 연결된 것이다. “한자는 끝없이 울리고 펼쳐진다. 어린 시절 맨 처음 배운 글자이기 때문에 내게 감회가 깊은 천자문은 물방울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받쳐주는 구실을 한다.”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과 동양정신이 담긴 천자문, 도덕경 등이 캔버스의 여백과 어우러진 독창적인 추상미술의 형태인 것이다. 이응노, 이정지, 남관, 김영주 등의 문자추상이 재발견되고 한국적 아방가르드(전위)의 재해석이 요구되는 측면에서 최근 유명 옥션을 통해 거래가 늘어난 서예와 문자추상에 대한 관심 또한 단순한 유행으로 치부하기엔 그 반응이 심상치 않다.
박방영 作, 전통을 재해석한 현대작가들의 문자그림 (제공 : 현대화랑)
이를 반영하듯 민화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경주대 정병모 교수는 최근 월간민화와 함께 ‘문자도투데이’를 주제로 민화의 현대적 해석과 연계된 전시를 기획해 화제를 모았다. 현대화랑(대표 박명자)이 9월부터 개최할 《문자, 현대와 만나다》(9.14~10.26예정)를 주목해보자. 불과 100여 년 전 문자그림이라 불린 ‘민화 속 문자도’는 한자를 소재로 하여 만든 효제도(孝悌圖)가 다수를 차지했다. 유교에서 말하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 여덟 글자에 담아, “효도, 형제와 이웃 간의 우애, 충성, 신의, 예절, 의리, 청렴, 부끄러움을 아는 삼강오륜의 요체”를 장식과 부귀, 길상, 벽사적 성격에 맞게 제작하였다.
대개 병풍으로 제작된 문자도는 조선 말기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서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대중적 그림이었다. 말그대로 ‘효제충신예의염치’는 그 형상성만으로도 쉽게 이해되는 반추상적 상징성을 지닌다. 현대화랑은 조선시대 민화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담은 ‘민화, 현대를 만나다’로 전문가와 대중 모두에게 신선한 호응을 받은 바 있다. 화랑측은 “조선민화의 명작들을 소개하는 ‘문자도의 어제’와 박방영·손동현·신제현의 현대미술가가 제안하는 ‘문자도의 오늘’을 함께 펼침으로써, 시·공간을 아우른 민화의 직관적 묘미와 뛰어난 조형감각을 발견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현대화랑이 오랜 기간 눈여겨 수집해온 문자도의 단면들은 어느 한 지점을 콕 집어 확대해보아도 유쾌한 ‘눈맛’을 헤치지 않는다. 이름 모를 무명의 작가가 그린 고루한 솜씨로만 치부하기엔 민화문자도의 감성이 시대를 가로질러 신선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계문자심포지아, 메타버스 전시연계한 비대면 행사개최
예술과 학술로서 세계문자를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취지로 문자를 둘러싼 기술과 예술의 조화가 새롭게 기획되었다. 이름하여 ‘제6회 세계문자심포지아 신세기_문짜 NFT 작품 공모전’(기획 변홍철)이 그것이다. 문자심포지아 측은 기획취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제6회 세계문자심포지아의 메타버스 전시 (제공: 세계문자심포지아)
“인류 문명의 역사 속에서 많은 문자가 소멸되어 문화와 함께 잊혀졌다.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가 다른 문자로 흡수되어 다양성을 잃게 되면 우리의 사고와 표현 역시 그렇게 되기 쉽다. 우리는 예술가로서 이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을 갖는다. 사단법인 세계문자연구소는 올해로 6회째 세계 문자 심포지아를 열어 예술과 학술로서 세계 문자에 대해 기록하고 기억하는 장을 열어왔다. 우리의 글이 플랫폼 / 테크놀로지 / 블록체인 등 존재하고 있으나, 보이지는 않는 것과 통하지 못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표현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그래서 몰이해에 중독된 세상을 해독하는 신세기_문짜를 만들려 하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어 즐겨 놀도록 하자. 이에 창제의 원리를 공유하고 문짜를 만든 창작자분들의 작품을 공개하니 대동천고개몽롱 하리라.”
이를 반영하여 고대문자 체계를 활용해 현대적인 이야기를 담은 ‘신세기_문짜’를 공모 받았다. 최종 16팀의 26개 작품이 선정되었으며 이 작품은 9명(황규태, 한재준, 허민재, 채병록, 이성진, 임옥상, 안상수, 문승영, 김종구)의 초대작가 작품과 함께 8월 12일 ~ 15일까지 NFT아트 형태로 메타버스 솜니움스페이스(https://somniumspace.com/parcel/3625) 스페이스55(www.space55.art)에서 전시되었다. 전시 후 출품된 작품들은 두나무 자회사인 림다256과 함께 NFT 작품으로 민팅된다. 시대인식을 반영하듯 8월14일과 15일 양일간은 음성기반 소셜 미디어 <클럽하우스>에서 비대면 학술토론을 진행했다. <나의 문자 창제기>에서 '신세기_문짜 공모전' 수상자들의 이야기과 더불어 이어령 전 문화체육부 장관의 축하인사도 이어졌다. 한재준 서울여대 교수는 “'아래아'없는 한글은 얼빠진 한글이다”를, 구연상 숙명여대교수의 “문자는 가장 뛰어난 문화재” 등 재미있는 의제들을 가지고 깊이 있는 담론을 펼쳤다. 세계문자심포지아 공식 인스타그램(@wscriptsymposia)에서는 #문자의부활 캠페인을 진행했다.
훈민정음 해례본과 간송 전형필(출처: 간송미술관)
본 캠페인은 24시간 후 사라지는 인스타스토리의 특성을 살려 잊혀지는 훈민정음을 기억하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당시 28자였지만, 현재는 24자만 쓰이고 있다. 문자의 역사성에 따라 잘 쓰이지 않는 자모가 사라지긴 했지만 세종대왕의 백성을 생각하는 첫 마음이 담긴 글자들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획된 캠페인이다. 참여자들은 훈민정음의 사라진 네 글자가 적혀있는 인스타스토리 화면을 자신의 스토리 채널에 올림으로써 본 캠페인에 참여할 수 있다.
게시된 인스타스토리는 사라진 훈민정음 네 글자의 생명을 추가로 연장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맞는 세계문자심포지아는 예술과 학술로서 문자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해왔다. 세계문자심포지아는 이번 행사를 통해 문자의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경종을 울리고 문자가 갖는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1-08-27 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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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
국악기 연주자 하나 없는데, 국악 축제나 공연에 빠지지 않고 초청을 받는 재즈 밴드와 레게 밴드가 있다. 최근 몇 년, 이들은 김율희, 이희문, 전영랑 등 국악계의 이름난 소리꾼들과 함께 국악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재즈 밴드 프렐류드 + 전영랑, 이희문
프렐류드는 팀을 결성한 지 20년 가까이 되는 재즈 밴드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서울 재즈 페스티벌 등 큰 무대에서의 공연뿐 아니라 해외 공연, 소극장 공연, 여러 장르 예술가들과의 협업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긴 시간 동안 구성원의 변화가 크게 없어 수준 높은 연주를 안정적으로 들려주는 밴드로도 정평이 나 있다.
2014년 발매한 「Fly In 날아든다」는 프렐류드가 처음으로 낸 국악 프로젝트 음반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 민요 이수자인 전영랑과 함께했다. 완성도와 시너지가 훌륭하다는 평과 대중적이지 못하다, 각자의 특성을 살리지 못했다는 평으로 전문가들의 의견은 나뉘었으나 국악 애호가들은 수준급의 재즈 연주를, 재즈 마니아들은 프로 소리꾼의 전통 민요를 제대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 프렐류드는 경기 소리하는 남자 이희문과 「한국남자」라는 타이틀로 음반을 낸다. 2016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함께 공연한 레퍼토리들을 음반에 옮겼는데, 민요뿐 아니라 경서도 잡가 등이 고루 담겼다. 2020년 발매한 「한국남자 2」 음반은 보다 잡가에 집중했다. 같은 해 말 진행된 공연에서 프렐류드의 고희안은 민요와 잡가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소리꾼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의 잡가가 재즈의 특성과 더 잘 맞는다고 답하기도 했다.
2020년 말에는 전영랑과 작업한 또 하나의 음반 「Fly in vol.2 – Modern Jass(모던 짜스)」를 내놓았다. 1900년대 초 조선에 유입된 재즈가 민요와 뒤섞이며 만들어진 ‘경성 재즈’를 새로운 버전으로 재탄생시켰다. 노들강변, 강원도 아리랑 같은 민요뿐 아니라 빈대떡 신사, 왕서방 연서 등 귀에 익은 대중가요들이 흥을 돋운다.
서곡, 서막을 뜻하는 프렐류드는 프롤로그와 같이 도입부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이 재즈나 국악에 입문하기 위한 음반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은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이름에 담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레게 밴드 소울소스 + 김율희, 이희문
지난 7월 다큐멘터리 영화 ‘자메이카의 소울-이나 데 야드’가 개봉했다. 쿠바의 전설적인 음악가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자메이카판이다. 자메이카의 음악가들이 황금기를 이끌었던 음악이 바로 레게다. 레게는 자메이카의 전통 음악이 미국 대중 음악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으며, 큰 인기를 얻어 다시 전 세계로 뻗어 나간 대중적이고도 세계적인 음악이다.
우리나라에도 레게 음악을 하는 밴드들이 있다. 그중 노선택과 소울소스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5년차 밴드는 세계 곳곳의 뮤직 페스티벌을 섭렵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레게 밴드로 성장해왔다. 2017년과 2019년에 두 장의 정규 음반을 그리고 2020년부터는 소울소스로 이름을 바꾸어 싱글 음원 시리즈를 내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인 소리꾼 김율희와 함께하기 시작한 것은 두 번째 음반부터다. 민화 작가가 참여한 첫 번째 앨범을 비롯해 다분히 한국적인 음반 표지들만 보아도 그들이 한국적 색채의 레게 밴드에 지향점을 두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노선택과 소울소스 meets 김율희로 낸 두 번째 음반 「Version」에는 모두 여덟 곡이 실렸다. 판소리 심청가의 뺑덕어미 대목, 흥부가의 중타령과 박타령, 춘향가에서 춘향과 몽룡이 처음 만나는 장면 그리고 남도 민요 흥타령 등을 바탕으로 한 다섯 곡과 그중 ‘뺑덕, 중타령, 정들고 싶네’를 덥(Dub) 음악으로 편곡한 세 곡이다. 덥은 레게에서 파생 음악을 만드는 기법으로, 사운드 엔지니어가 제3의 창작자로 참여해 완성한다. 이밖에 2020년부터 발표한 소울소스 meets 김율희의 음원으로는 판소리 흥보가 중 제비가를 모티브로 한 ‘(Who knows) The Swallow Knows’와 ‘Swallow Dub’, 신민요 동해바다를 모티브로 한 ‘동해바다’ 등이 있다. 레게와 전통 성악의 만남이 빚어낸 결과물로 이들은 세계 유수의 음악 축제에 초청되며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 냈다.
한편 프렐류드를 비롯해 타 장르 예술가들과 전방위로 컬래버레이션을 펼치고 있는 이희문은 신승태와 조원석을 지칭하는 놈놈, 소울소스 구성원들이 대거 참여하는 밴드 허송세월과 함께 오방신과(OBSG)를 조직했다.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의 대향연이 그들이 낸 두 장의 음반 「오방神과」, 「Sea Breeze」에 담겨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밴드들은 국악 공연 무대에 자주 서게 되었고 소리꾼들은 밴드 공연 무대를 얻었다. 그리고 이들의 음악은 ‘새로운 익숙함’을 앞세워 방송 진출도 활발히 하고 있다. 작가 장정일은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서 클래식이나 재즈 같은 악우(惡友)들과 절연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은 바 있으나, 찬찬히 궁리하면 이 매력적인 악우(樂友)들과 손잡고 가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1-08-27 0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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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한 장면 올리버 역 신성민, 클레어 역 해나 (제공. CJ ENM)
미래 서울의 한 아파트.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인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있다. 이젠 낡아버린 구형으로 고장난 부품조차 구하기 힘들지만, 오래전 떠났거나 사라진 주인을 기다리며 외롭게 살고 있다. 어느 날, 자신의 전기 충전기가 망가진 클레어가 올리버의 집을 찾아오고, 그렇게 두 헬퍼봇들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반딧불을 찾아 예기치 않던 여행도 함께 하면서 인간의 사랑 같은 복잡한 감정도 배운다. 그러나 마음이 깊어질수록 그것이 가져올 고통 또한 깨닫게 되고, 결국 둘은 자신의 기억 속 서로에 대한 메모리를 지워버리기로 약속한다.
다시 미래의 어느 날, 충전기가 망가진 클레어는 우연히 올리버의 집을 찾는다. 그러나 올리버는 예전과 달리 아무 말이나 조건 없이 충전기를 빌려준다. 올리버는 차마 클레어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나 괜찮을까요?” 걱정스럽게 묻는 클레어에게 올리버는 말한다. “어쩌면”...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들려주는 따뜻한 이야기의 단면이다.
상복이 참 많은 작품이다. 제 2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극본 및 작사상, 작곡상, 여우주연상, 연출상, 프로듀서상, 소극장 뮤지컬상의 6개 부문을, 제 6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에선 올해의 뮤지컬상, 음악상, 연출상, 여자 인기상의 4개 부문을 휩쓰는 파란을 연출했다. 대학로의 수수한 소극장 뮤지컬이 대극장의 화려한 작품들을 모두 제치고 이뤄낸 성과라서 더 이목을 집중시켰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가장 큰 미덕은 음악적 완성도에서 찾을 수 있다. 대부분 재즈와 클래식, 그리고 복고풍의 스탠다드 넘버 풍의 음악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미래고, 인간이 아닌 로봇들이 주인공인데 오히려 아날로그적 감성이 느껴진다는 묘한 조화는 옛 것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따스함과 공감대에 적절히 버무려지며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포근하고, 세련되며, 서정적인 느낌의 조화가 이 작품만의 무대를 즐기게 만드는 매력을 완성한다.
뮤지컬을 만든 콤비는 요즘 우리나라 공연계에선 ‘천재적인 콤비’라는 에칭으로 불리는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Will Aronson) 작곡가다. 두 사람이 호흡을 처음 맞췄던 작품은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에서 첫 선을 보인 후 역시 큰 인기를 끌었던 뮤지컬 ‘번지 점프를 하다’이다. 뉴욕대학교(NYU)의 뮤지컬 전문 대학원 과정인 티시예술학교에서 만나 함께 작업을 하며 다양한 콘텐츠들에서 특유의 색깔과 맛을 더해 독특한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선보여왔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박천휴와 윌 애런슨의 조화가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호평과 찬사를 이끌어냈던 2000년대 만들어진 최고의 창작 무대였다고 인정할 만하다.
연출은 뮤지컬 ‘신과 함께’ ‘난쟁이들’로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동연이 맡았다. 특유의 아기자기하고 꼼꼼한 대사 속에 담긴 의미, 그리고 피식거리며 새어나오는 웃음을 즐기기에 적합하다. 상황 설정 자체가 헬퍼봇들의 사랑이라는 독특한 내용을 배경으로 하지만, 말랑말랑하고 간질간질한 감수성을 느끼게 하는 흥미로운 스토리 전개는 로봇들로 하여금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스러운(?) 감흥마저 느끼게 만든다. 물론 이야기의 주요한 주제는 사람들은 왜 사랑을 하게 될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는 단 세 명에 불과하다. 캐릭터의 머릿수만 따지면 창작 뮤지컬 ‘김종욱 찾기’와 똑같다. 덕분에 적은 수의 배우들로 무대를 꾸미는 아기자기한 재미는 이야기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을 잉태해낸다. 소극장 뮤지컬이다보니 공간적인 거리도 가까워 더욱 생동감을 느끼게 된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라는 느낌이 현실적인 감상을 도와주는 셈이다.
요즘 서울 대학로의 예스24스테이지에서 막을 올린 앙코르 버전에선 올리버 역으로 신성민과 임준혁 그리고 정욱진의 세 배우가 번갈아가며 무대를 꾸민다. 올리버를 찾아오는 또 다른 헬퍼봇 클레어 역으로는 홍지희와 해나, 한재아가, 올리버의 옛 주인인 제임스 역으로는 성종완과 이선근이 출연한다. 예전 무대에서 크게 사랑을 받았던 캐스팅으로는 정문성과 전미도가 있다. 요즘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인기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는 두 배우는 무대에서의 조화도 뛰어나 꽤나 만족스런 추억을 관객들에게 남겼다. 드라마 속에서 음치도 연기해내는 뮤지컬 배우 전미도의 팔색조 매력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그녀 최고의 장점이다.
대중적 인지도라는 측면에서는 이전 무대의 캐스팅이 아쉬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풋풋한 신예들의 연기는 그 나름의 매력을 잘 담아내 좋은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뮤지컬은 배우‘만’ 보기위해서 공연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당연한 명제를 다시금 곱씹게 한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일부러 날짜를 맞춰 좋아하는 배우들의 캐스팅 일정에 따라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도 적지않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우란문화재단의 기획으로 개발된 작품이다. 2015년 우란문화재단 리딩 공연, 트라이 아웃을 거쳐 2016년 뉴욕에서의 리딩 공연을 열고, 2016년 말 대학로에서 첫 무대를 올리며 신선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작품의 인큐베이팅 과정에서부터 차근차근 전개된 담금질의 과정이 비교적 탄탄하고 교과서적이어서 창작 콘텐츠의 개발에 있어 바람직한 사례로 손꼽히게 됐다.
화려하기보다 수수하고, 요란스럽기보다 차분한 이야기는 결국 결말에 다달아 짙은 여운을 남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기쁨과 환희 못지않은 아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올리버와 클레어가 결국 서로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우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재회는 관객들로 하여금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두 헬퍼봇의 만남을 다시 조명해보게되는 기회를 허락한다. 그렇게 구체적이지도 꼼꼼하게도 묘사되진 않지만, 무대는 여러 해석이 가능한 열린 결말구조로 관객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정말 열혈 마니아 관객중에는 충전기를 건네받는 클레어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는 이유로 그녀 역시 기억을 지우지 않았을 것이라 의미심장(?)하게 주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손으로도 연기를 한다는 감탄을 내뱉는 경우다. 제작진의 진짜 의도나 배경, 해석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열린 결말이 이 뮤지컬의 최고의 장면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나름 공감을 할 수 있다. 궁금한 독자라면 지금 대학로로 발길을 옮겨보길 권한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1-08-20 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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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더운 거 이제 아주 지겨워.” ‘정원’(한석규)의 사진관에 앉아 ‘다림’(심은하)은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거리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주차단속요원 일의 고단함이 묻어난 말이다. 정원과 그의 사진관은 사회초년생의 수업료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다림에게 유일한 쉼터와도 같다. 정원이 위로의 의미로 선풍기를 틀어주자 다림이 일어나서 정원을 등지고 말한다. “아저씨, 생일이 8월이죠? 사자자리 아니에요? 사자자리가 나랑 잘 맞는다고 하던데.”
설렘이 있는 8월, 생일이 있는 8월, 크리스마스가 있는 8월이 그 어느 해보다 간절한 요즘이다. 허진호 감독은 장편 데뷔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1997) 한 편으로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를 대사와 눈물 대신 이미지와 음악으로 풀어낸 세련된 화법은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즉, 이전까지의 한국 멜로드라마가 감정의 과잉과 표출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면 이 영화는 폭발하려는 감정을 억누르고 절제하는데 미덕이 있는 작품이었다.
음악을 맡은 조성우 감독에게도 이 작품은 꽤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악기를 가능한 줄이고 단순한 멜로디를 반복하면서도 두 사람의 교감을 충분히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의 엔딩 직전 약 17분간은 대사가 전혀 없는 영상이 이어지는데 섬세한 사운드 디자인을 바탕으로 적확한 타이밍의 소스 음악, 스코어 음악이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학창시절부터 친구였던 허진호 감독과 조성우 감독의 호흡은 이후, <봄날은 간다>(2001), <덕혜옹주>(2016),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8) 등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철학박사로 모교의 조교수까지 역임한 적이 있던 그의 커리어 때문일까. 그의 음악은 짙고 깊다. 인물들의 상황과 감정에 대한 몰입도가 강한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음악들이다 그가 만들어낸 선율들은 머릿속에 오래 머물다가 아주 천천히 사라진다. 향을 음미하게 되는 고급 커피나 고급 위스키처럼, 그 음악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형태를 바꾸어 나가며 다양한 느낌을 전달한다. 특히 <봄날은 간다>, <형사>(2005), <만추>(2010)의 음악들이 그렇다.
8월은 조성우 감독이 집행위원장으로 있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열리는 달이기도 하다. 작곡가로서 뿐 아니라 제작자로서, 영화제의 리더로서 한국영화계에 많은 공을 세워온 그에게도, 그가 정성껏 차려놓은 음악과 영화의 정찬을 즐기는 관객들에게도 크리스마스 같은 한 달이 되기를 바란다.
윤성은의 Pick무비 / 우리가 생존을 위해 버려야 할 것들, <모가디슈>
기대를 많이 한 영화일수록 실망할 가능성도 크다. 관객들의 기대감이 적으면 초반 극장 유입이 어렵고, 실망을 많이 하면 금방 발길이 끊어진다. 과연 <모가디슈>(류승완, 2020)의 제작진은 관객들이 영화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길 바랐을까? 아무리 경험이 풍부한 스타 감독과 배우들이라 해도 수십 편의 영화가 빛을 보지 못한 채 적체되어 있는 팬데믹 상황에서 오랜만에 개봉하는 한국 블록버스터라 그 하중은 여느 때보다 컸을 것이다. 다행히 초반 예매율과 관람평은 매우 좋은 편이다.
사실, 20세기 말에 일어났던 소말리아 내전이 궁금해서 극장을 찾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모가디슈>의 제작이 가능했던 것은 철저히 그 당시 고립되어 있던 남한 대사관과 북한 대사관이 어떻게 협력하여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는 기획에 있다. 탈출과 공조라는 대중영화 서사의 두 가지 핵심 키워드가 이 영화에는 균형을 이루고 있다. 관객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는 남북한이 불편한 동행을 하게 되는 본론으로 나아가는데 너무 힘을 많이 썼다는 느낌이 든다. 민중 시위, 정부군의 진압, 반군의 진격까지 기관총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도 속도감은 없다. 후반부 남북한 사람들이 탄 네 대의 차가 총알 세례를 뚫고 이탈리아 대사관까지 가는 길의 액션이야 필요한 것이었지만 전반부 소말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보다 간결했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모가디슈>는 이 낯선 제목의 배후처럼 대중적 재미 외에 어떤 역사의식을 전달하고자 강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시 우리 외교관들이 처한 상황은 부정, 부패한 소말리아 독재 정부와 폭력적 반군 사이에서 희생양이 된 소말리아 민중들과 다를 바 없다.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 거리에 ‘우리는 소말리아인들의 친구이자 협력자’라는 내용의 육성 테이프를 틀어놓는 장면의 아이러니는 매우 인상적이다. UN 가입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소말리아와의 외교가 허상을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매사 정치적 공작을 한다며 툭탁거렸던 남북한 사람들이 남측 대사관에 모여 생존과 귀환만이 목표임을 확인하면서 날선 경계심을 풀어가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이데올로기는 당면한 재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자 이들에게 하늘길이 열리고 각자의 조국으로 돌아갈 구멍이 생긴다.
그럼에도 디테일은 다소 아쉽다. 현란한 총격신 보다는 남북한 사람들이 서로 젓가락으로 깻잎을 떼어주는 장면의 여운이 더 오래 남을 작품이기에, 그와 유사한 교감의 신들이 부족했다는 느낌이 남는다. 한편, 한국의 분단과 소말리아 내전은 현재진행형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1-08-20 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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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1842년 창단된 뉴욕 필하모닉(New York Philharmonic/이하 뉴욕필)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오케스트라이다. 그 역사에 걸맞게 치열하고 엄격한 경쟁을 통해 뽑힌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세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다. 비올라 수석 한 명을 뽑기 위해 다섯 번의 공개 오디션을 진행할 정도로 깐깐하게 선정된 106명의 단원들을 한명 한명 꼼꼼히 관리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40여 년간 오케스트라의 퍼스널 매니저를 담당한 칼 쉬블러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그가 세인트 루이스 오케스트라에서 호른 연주자 겸 퍼스널 매니저의 역할을 하다 뉴욕 필하모닉으로 자리를 옮기며 정식 퍼스널 매니저가 되었다, 그가 2016년 타계하기 전까지 레너드 번스타인, 주빈 메타를 비롯한 5명의 음악감독과 함께 일했고, 수많은 전설적인 연주자와 함께 했다.
뉴욕필 공식 웹사이트는 그를 ‘guardian and mentor(보호자와 멘토)’라고 언급하고 있다. 퍼스널 매니저의 업무를 뛰어넘는 오케스트라의 정신적인 지지대와도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타계한 후, 뉴욕 필하모닉은 특별 헌정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퍼스널 매니저라는 직업은 조금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퍼스널 매니저는 행정을 포함해 단원들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한다. 이 업무의 역할도 그가 더욱 체계화 시켰는데 크게 행정적인 일과 리허설 및 공연을 관리하는 두 종류로 나뉜다. 행정 업무는 단원 오디션, 엑스트라 섭외, 단원들의 월급 지급 등이 포함되고 리허설과 공연을 관리 업무에 방송 녹화, 투어, 정기 및 야외 공연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는 모든 업무의 궁극적인 목표는 연주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단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곧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늘 언급하곤 했다.
쉬블러는 가장 중요하지만 어려운 점은 모든 단원들을 똑같이 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단원들 개개인은 오케스트라의 부분이자 동시에 뉴욕필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악장, 수석, 단원을 같은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악장과 평단원의 월급이 같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아프다거나, 가정에 문제가 있거나 하는 등 모든 일들이 생길 때 똑같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그가 말하는 진정한 평등함에는 어떤 특정 사람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면 절대로 안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 공평함이야말로 모든 단원들과 직원들에게 그가 멘토로 자리잡은 근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를 나의 상사로 두고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다. 타지의 큰 오케스트라에서 일한다는 것에 주눅이 들곤 했던 나에게 그는 항상 ‘특별한 사람’이라고 용기를 주셨다. 지치고 힘들어 할 때는 음악감독들과 세계적인 음악가들과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위로해주시기도 했다.
사실 그와 함께 했던 시절은 고단하기도 했다. 실수라도 할라치면 가차없이 “Use your brain!"이 날아왔기 때문에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열정적인 그의 업무 태도를 보며 본받고 싶었고 몸짓 하나, 생각 하나 닮고싶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칼과 함께한 10년이 내게 남긴 것은 일에 대한 열정과 의식적으로나마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려는 태도이다.
여전히 힘든 일이 닥칠 때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리곤 한다. 그는 뚝심과 배짱, 그리고 정의를 가지고 사리 판단을 할 것이다. ‘공평함’이라는 토대를 가지고.
나는 아이가 셋이고,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다. 내가 이 다음 세대들에게 늘 공평함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공평함’ 이 바로 멘토 쉬블러에게 배운 기본 정신이기 때문이다. 멘토의 정신은 후세가 살아갈 수 있는 뼈대를 만들어 준다. 이 뼈대를 이루는 정신은 대를 이어나가 후세의 사고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진정한 멘토들의 가르침을 받은 멘티들일수록 인생을 알차게, 신념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으며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주기도 한다.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도 어른들이 형식적인 멘토가 아닌 진실한 멘토로서 삶의 청사진을 보여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한 걸음 앞서 걸어가는 어른들의 의무가 아닐까.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1-08-17 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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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범죄 중 가장 끔찍한 것을 고르라면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여 절멸시키려는 행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 <알쓸범잡>에서, 끔찍한 전쟁 범죄 중에서도 최악의 것으로 제노사이드가 언급되기도 했지요. 가장 널리 알려진 제노사이드는 나치 독일이 약 600만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홀로코스트(Holocaust)일 것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당시 여러 곳에 설치되었던 수용소였지요. 가장 대표적인 수용소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 세워진 절멸 수용소인데, 이곳에서만 100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참상을 생각하면 쉽게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 오케스트라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총 5-6개의 오케스트라가 존재했는데, 대부분은 남성 수용소 안에서 만들어진 오케스트라였습니다. 1941년부터 생겼다고 합니다. 여성 수용자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는 악명높았던 간부 만들(M. Mandl, 1912-1948)에 의해 1943년 6월에 처음 만들어지지요. 당시 인원은 20명이었습니다. 남성 수용자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들이 대부분 직업 음악가들로 이루어졌던 데에 반해, 여성 오케스트라의 단원들 중 음악 전공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악기 구성의 균형도 맞지 않았는데, 1943년 12월 수용소에 이송되어 첼로 주자로 참여하게 된 라스커(A. Lasker-Wallfisch, 1925- )에 따르면, 그녀가 처음 오케스트라에 들어갔을 때, 그녀가 유일한 첼로 주자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을 불평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성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경우, 노동과 연습 및 연주를 병행해야 했던 남성 오케스트라 단원들과는 달리, 노동은 면제되었으며, 나무 바닥과 난로가 갖춰진 별도의 건물에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스실에서 사망할 확률이 다른 수용자들보다 현저하게 적었지요.
이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진 후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출중한 실력을 갖춘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마 로제(A. Rosé, 1906-1944). 빈 출신인 그녀는 유명한 음악가 집안의 일원이었지요. 그녀의 아버지 아놀트 로제(A. Rosé, 1863-1946)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오랜 기간 재임한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어머니 유스티네 말러(J. Mahler, 1868-1938)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 Mahler, 1860-1911)의 여동생이었습니다. 큰아버지 에두아르트(E. Rosé, 1859-1943)는 뛰어난 첼리스트였고, 알마의 오빠 알프레드(A. Rosé, 1902-1975)는 지휘자, 작곡가인 동시에 피아니스트였지요.
사실, 알마는 어쩌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1938년에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빈 필에서 쫓겨난 아놀트, 그리고 알마는 1939년 런던으로 피신하는 데에 성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마는 같은 해 11월, 음악회를 위해 네덜란드로 향합니다. 이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지 석 달이 되었을 때였는데, 아마 알마는 당시 네덜란드가 중립 정책을 고수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심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당시 70대 중반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30대였던 알마가 그녀의 커리어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고픈 마음이 컸으리라 예상할 수 있고요.
빈에서 런던으로 피신했을 당시의 로제 부녀. 알마가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으로 보입니다.
(사진: Gustav Mahler–Alfred Rosé Collection, Music Library, Western University, London, Canada)
그러나,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어 갔고, 결국 알마는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로 피신하려다 체포되고 맙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여성 오케스트라를 이끌게 된 알마는 오케스트라를 엄격하게 훈련시키며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단원들 중 전공자도 별로 없었고, 악기 구성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데다, 서로의 언어도 다 달라 의사 소통에 어려움까지 있었지만, 알마의 노력으로 오케스트라는 점차 성장하게 됩니다. 인원도 늘었고요. 알마는 편곡 작업도 직접 담당하였으며, 레퍼토리도 점차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단원들이 노동에서 면제된 것도, 그들에게 악기 보호를 위해 나무 바닥에 난로가 딸린 공간이 마련된 것도 알마 덕분이었습니다.
이 오케스트라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업무는 수용자들이 노동을 하러 갈 때, 그리고 노동을 마치고 올 때 행진곡 등을 연주하는 일이었으며, 일요일마다 나치 간부들을 위한 음악회에서 연주해야 했습니다. 알마와 라스커 같은 실력있는 연주자들은 독주 연주도 했고요. 또, 당일에 가스실로 향할 환자들 구역에서 연주를 해야만 했는데, 이는 청중들과 연주자들 모두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상황에서 연주해야 했던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고된 노동을 하러 현장으로 향하던 수용자들은 어떤 기분으로 이들의 음악을 들었을까요? 또, 잔인한 나치 간부들이 음악을 즐겨 들으며 감동받는 모습을 보며, 연주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름다운 음악을 둘러싼 참혹한 현실은 우리의 마음을 먹먹하게 합니다.
오케스트라가 계속 유지되어 쓰임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곧 생존을 의미했습니다. 오케스트라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생존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었지요. 알마의 노력으로 오케스트라 단원 수는 1944년에 5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알마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더라도 카피스트(Copyist)처럼 오케스트라와 관련된 일을 할 사람을 영입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더 살리고자 노력했지요. 또, 아파서 결국 가스실로 갈 운명에 처했던 단원들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엄격한 알마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두고 아버지 아놀트가 들어도 되겠다는 말도 했던 것을 보면,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1944년 4월 초, 알마는 갑자기 고열과 두통 및 복통 증세를 보이다 사망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 추정될 뿐, 이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다른 지휘자가 알마의 뒤를 이었지만, 오케스트라는 점차 쇠퇴해가고 결국 11월 해체되지요. 알마의 죽음과 함께 단원들은 자신들이 이제 가스실로 향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에는 많은 단원들이 전쟁이 끝나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생존하였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완벽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연주 도중 나치 간부들이 잡담을 하는 등 태도가 좋지 않으면, 연주를 중단하고 “이렇게 연주할 수는 없다”고 일갈할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높은 자존심을 유지하였던 알마. 음악을 통해 많은 생명을 구원한 위대한 예술가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억될 것입니다.
추천음반: 알마의 음반은 단 하나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매우 아쉽지만, 그녀가 활동하던 시기를 감안하면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음반은 1920년대 후반 아버지 아놀트와 함께 바흐(J. S. Bach, 1685-1750)의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녹음한 음반입니다. 부녀의 바이올린 음색이 닮아있는 것이 흥미롭지요. 그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아름답지만 동시에 먹먹하게 다가오는 이 협주곡의 느린 악장을 감상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0WMPUcXsrqY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1-08-13 09: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