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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 포커스
“기증Donation의 어제와 오늘, 문화선진국으로 가는 첫걸음”
국력은 칼이 아닌 문화에서 나온다는 ‘문화정치’는 르네상스시대 메디치가의 문화후원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후 선진국의 뮤지엄들은 각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 경제인들의 이름을 가진 기증관(혹은 기증실)을 통해 국가정체성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꿈꾸는 이상을 확상시켰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올해 초부터 불어 닥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통 큰 기부로, 기증문화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이어진 삼성가의 미술애호는 국보급 문화재와 최고가의 근현대 미술품 소장으로 이어져, ‘이건희 컬렉션’ 기증에 고미술 만1천여 점과 근현대미술 2만3천여 점이 각각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중박)과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 등에 지난 4월 기증되었다. 이건희컬렉션이 해시태그가 되어 국중박과 국현의 기획전시 예약이 몇 초 만에 마감되는 ‘기증전시 붐업’ 현상이 일어나면서, 실제 미술시장을 달구는 젊은 MZ세대들의 ‘아트테크’로까지 이어진 것 역시 고무적이고 할 수 있다.
이건희 컬렉션, 유치경쟁을 뒤로하고 결국 ‘종로구 송현동’으로
컬렉션 유치를 위해 나섰던 각 지자체들의 경쟁이 있었지만, 결국 부지는 송현동으로 결정됐다.
얼마 전까지 각 지역 지자체들의 입구에는 ‘한국의 문화예술 랜드마크’를 꿈꾸며 “이건희 컬렉션의 ●●●지역 유치를 환영합니다.”라는 플랜카드가 너도나도 걸려있었다. 문화의 지역확산 운동으로까지 이어지며, 이건희라는 브랜드는 ‘기증문화의 아이콘’에서 ‘지역정치경쟁’의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文化資本)으로까지 환산된 것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같은 국보와 보물, 국민화가라 불리는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박수근의 ‘빨래터’·이중섭의 ‘흰 소’ 등의 대표작들, 모네·샤갈·피카소 등의 국내외 거장들의 작품이 국중박과 국현, 그리고 지방 박물관 등에 기증되면서, 문화예술계는 한국의 ‘기증 르네상스’가 시작됐다며 쾌재를 불렀다.
이에 화답하듯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봄 “별도 기증실이나 특별관 설치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고, 정부 역시 2만3천여 점의 기증품을 통합적으로 연구·관리·전시할 기증관 부지 검토에 들어갔다. 이에 미술계에서는 근대 미술품을 중심으로 한 ‘이건희 미술관(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추진했다. 이를 유치하려는 지방자치단체들의 과열 경쟁은 지역 간 문화불균형 해소문제와 더불어 새로운 문화정치의 현장을 목도케 하였다.
정부의 발표는 지난 6월말쯤 정해지는 듯싶었으나, 유치경쟁 속에서 종착지는 지난 11월 9일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로 확정되었다. 이제 국면은 이를 어떻게 운영하고 활성화 하는가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문화재·미술품 2만3천 여 점이 송현동 부지에 정착한다는 소식에 환희와 탄식(기대·우려)이 오가는 가운데, 각 장르와 시대별 흐름과 맞지 않는 문화재들이 제대로 안착할 수 있도록 앞으로라도 연구 인력을 투입해 내실 있게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건희 효과’로 불티나는 예약시스템, 이슈를 넘어 기증문화 정착으로
이번 기증을 두고 순수한 기업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형태의 사회환원이냐, 상속세 납부기한을 두고 벌인 이벤트냐 등에 다양한 의견들이 오갔지만, 결과적으로 기업의 사회공헌 계획에 따른 문화기부의 측면은 무시할 수 없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명작들이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이름 속에서 새로운 기관의 출연을 목도하게 됐다는 것은 일제강점기로 이분화된 한국미술의 여러 갈래들을 풀어낼 ‘근대미술’연구와도 연계되기 때문이다.
이건희의 기증이 한국 대표 뮤지엄으로 정착할 때까진 운영과 활성화에 있어 다양한 공론장을 거쳐야 하지만,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자리인 송현동 부지가 얼마 전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삼청동 화랑거리 등과 더불어 하나의 ‘서울문화 예술존’으로 연결돼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은 분명하다.
이건희컬렉션의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예약페이지
실제로 이건희컬렉션의 공개이후, 많은 대중들이 이에 열광했고 국현과 국중박의 예매 사이트는 말 그대로 ‘클릭전쟁’을 벌일 만큼 빅 이슈가 되었다. 성황리에 전시를 끝낸 용산 국중박 전시인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은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2021.07.21.~2022.3.13.)’에 비해 짧은 전시기간 탓에 예매번호의 뒷거래 이야기 까지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컬렉션’에 전시됐던 인왕제색도. 이 전시는 아쉽게도 지난 9월 막을 내렸지만, 새로운 기획전에 내년 봄 열릴 예정이다.
그럼에도 고미술과 근현대, 한국과 서양미술을 망라하는 대표작들을 어떻게 연결해서 연구, 전시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시각도 자리한다. 해외에도 시대와 장르를 가로지른 통합형 미술관이 자리하지만, 이는 규모와 인력, 많은 시간이 필요한 장기 프로젝트이다. 이건희 기증관은 제대로 된 운영과 시스템을 갖추어 이후 기증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기증관의 독립적 운영이냐, 타 기관과의 협업(혹은 산하운영)이냐의 문제도 고려할 사항이다.
정부는 2027년 개관목표를 세웠지만, 이 역시 서두를 부분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송현동 부지로 옮긴 것에 대한 지자체의 반발 역시 어떻게 다독이고 가야할 것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문화불균형 문제를 지역의 다른 기증들과 연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기증문화 확산’을 위한 대책마련은 무엇인지 등이 논의돼야 할 때다.
기증문화의 장을 연, 메디치의 우피치컬렉션
삼성가의 미술품 컬렉션이 국내 미술문화 확산에 큰 기여를 한 만큼, 이에 대한 서구의 선구적 사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기증문화는 작품에 대한 사회적 공유의 확산 뿐 아니라, 한 국가의 에술연구의 수준과 지평을 보다 깊고 넓게 확산하기 때문이다. 기증문화하면 떠오르는 집안은 바로 메디치(Medici) 가문이다. 후손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의 정신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남아 세계 관광객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우피치갤러리의 기증 유물들은 피렌체 밖을 나가지 못한다.
15세기 피렌체의 금융업을 쥐고 흔들었던 이 가문은 1569년 코지모 메디치가 토스카나 대공으로 선임되면서 피렌체 주변의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중심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한다. 우피치미술관의 건축물은 원래 토스카나 대공국의 정부청사로 16세기 후반 건립된 것으로, 일부를 미술관으로 사용하다가 메디치가의 컬렉션은 확대되면서 오늘의 전설 같은 컬렉션이 남게 된 것이다.
집안의 모든 유산을 피렌체시에 기부한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자손인 ‘안나’
메디치의 마지막 소장자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1737년 후사가 없던 토스카나 대공국의 마지막 군주 가스토네 데 메디치가 사망하면서 남성 직계가 끊어졌고, 이를 가스토네의 누나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지켜냈다. 빌헬름 2세와 결혼했던 안나는 자식이 없던 탓에, 동생이 죽자 우피치 미술관을 비롯한 메디치 가문이 남긴 유산을 프란츠 1세와 협상하여 국가에 귀속시켰고, 그 컬렉션이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의 소장품들이다. 이렇듯 명문가란 사람이 사라지더라도 기증문화를 통해 정신과 가치를 남기는 것이 아닐까.
삼성가 호암미술관·리움으로 이어지는 발걸음
이건희 효과의 호황 속에서 한동안 빗장을 걸어 잠궜던 고미술 중심의 호암미술관과 한남동 리움 미술관이 재개관하면서 동·서양의 명작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들 예약시스템 역시 오픈되자마자 몇 분 안에 마감돼 버리는 일이 발생 중이다. 그 많은 작품들을 기증하고도 최고 수준의 컬렉션들은 동서양의 명작들을 대거 쏟아내며 많은 이들의 발길을 잡는다. 반 이상이 국내 처음 선보이는 신작 컬렉션이다. 고미술 쪽 컬렉션도 마찬가지, 고려 유물인 국보 ‘금동대탑’과 고려 말 제작된 유일한 팔각합, 김홍도의 ‘군선도’ 등 국보 보물 10여점이 새롭게 빗장을 열었다.
리움 재개관에 다녀온 방탄소년단의 멤버 뷔, 발빠른 예약자들의 전시소개가 인스타그램의 해시테그(#리움재개관 #리움)를 장식중이다.
40주년을 앞둔 호암미술관도 금속미술을 조명하는 신호탄을 알렸다. 국내 유일의 가야금관과 청동검 등 금속을 주제로 한 현대작품 45점을 전시한 것이다. 1년 7개월 만에 문을 연 삼성가의 미술관들이지만, 기획전은 더 오랜만의 일이기에 찾는 이들마다 고무적이라고 말한다. 특히, 방탄소년단(BTS) 멤버 뷔와 제이홈이 리움을 찾은 사진을 공식 SNS에 공개해 많은 MZ세대들의 관심을 끌었다. 재개관한 뮤지엄들과 더불어 새롭게 연 뮤지엄숍 역시 핫플이 됐다.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아트상품들이 ‘나만의 작품’을 소장하려는 MZ세대의 발길을 잡아끌기 때문이다. 기증문화가 이끄는 문화자본의 대중화는 분명 여러 시행착오를 포함하겠지만, 새로운 세대들이 문화를 향한 관심을 견인한 것은 자명해 보인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1-11-19 1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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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
국악과 대중음악의 크로스오버 경연 프로그램인 ‘풍류대장’에는 다양한 전통 성악 장르의 소리꾼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평소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만나기 어려웠던 ‘정가正歌’를 부르는 이들이 등장해 이목을 끌고 있다. 정가는 가곡(歌曲)과 가사(歌詞), 시조(時調)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국악 프롤로그에서는 이전에 가곡 태평가를 소개한 바 있다.
시조를 노랫말로 하는 시조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를 일컫는 ‘시조’는, 시조를 노랫말 삼아 부르는 ‘노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국어사전에는 문학과 음악에서 쓰이는 시조의 뜻풀이가 각각 등재되어 있는데, 음악으로서의 시조는 ‘조선 시대에 확립된 3장 형식의 정형시에 반주 없이 일정한 가락을 붙여 부르는 노래’라 기술하고 있다.
시조에 곡조를 붙여 부르는 노래로는 시조 외에도 가곡이 있다. 가곡 ‘우조 초수대엽’과 시조 ‘동창이~’는 제목과 곡조는 달라도 같은 노랫말을 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희 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조선 후기 남구만의 시조는, 가곡과 시조를 비교하는 예로 음악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관현악 반주에 맞춰 전문 가객들이 주로 부른 가곡에 비해 시조는 선율이 단순하고 반주 없이도 부르는, 대중적인 성악곡이었다. 최근에는 시조도 전문 가객들이 부르고 반주 악기도 다채로워졌지만, 가곡 한 곡을 부르는 데 10분 가까이 걸린다면 시조는 5분이 채 되지 않는다. 이러한 시조의 특성은 여러 지역으로의 보급을 용이하게 했고, 곳곳으로 퍼져나간 시조는 서울․경기 지방의 경제(京制)를 비롯해 충청도의 내포제(內浦制), 전라도의 완제(完制), 경상도의 영제(嶺制) 등으로 지역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가사(歌辭)를 노랫말로 하는 가사(歌詞)
가사(歌辭)는 고려 말 혹은 조선 초에 나타난 것으로 보는 문학 작품의 한 갈래다. 정극인의 ‘상춘곡’, 정철의 ‘관동별곡’ 등이 교과서에 실린 가사 문학 작품들이다. 길이의 제한은 없으나 음보율을 살려 쓴 경우가 많아 운문과 산문의 중간 형태로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형식적인 제약이 적고 내용적 측면에서도 다채롭다. 옛 문헌에는 가사(歌辭)와 가사(歌詞) 등을 혼용해 썼으나 현재는 문학 작품인 가사와 성악곡 가사를 구분해 한자를 달리 쓴다.
이런 가사체의 사설(노랫말)에 곡을 붙여 부르는 노래를 ‘가사(歌詞)’라고 한다. 백구사, 죽지사, 어부사, 황계사, 춘면곡, 상사별곡, 길군악, 권주가, 수양산가, 처사가, 양양가, 매화타령 등 총 12곡이 전해진다. 초장․중장․종장으로 그 틀이 정해져 있어서 같은 가락에 여러 사설을 얹어 부를 수 있는 시조나 가곡과 달리, 가사의 노랫말은 길이가 제각각이고 길며 음악적 구성 또한 다양하다.
대부분 작자 미상이나 ‘어부사’의 경우는 전해오던 시가를 개작해 자신의 문집에 수록한 농암 이현보를 작자로 보는 견해가 많다. 5박자 또는 6박자를 한 주기로 하는 장단을 쓰는데 ‘권주가’는 정해진 장단 없이 자유로운 장단의 반주에 맞춰 부른다. ‘죽지사’와 ‘길군악’에는 ‘노나 너니나루 노나니루 너니루너~’, ‘어히요 이히요 이히요 이히야~’ 등 구음과 같은 입타령 부분이 들어 있다.
한편 국가무형문화재 제41호인 가사는 지난 2016년, 전승과 보급이 시급한 국가긴급보호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를 모티브로 한 창작 시조 '쉬어간들' (여창 박진희) ⓒ국립국악원
판소리와 민요, 민요 중에도 경기․남도․서도 등으로 장르와 지역에 따라 소리꾼이 나뉘어 있는 민속 성악과 달리 가곡과 가사, 시조는 모두 정가 가객들이 부른다. 국악 장르 중에서도 덜 대중적이고 가창자 수도 적다. 하지만 꾸준히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오래전부터 다른 분야와의 협업을 활발히 해온 강권순 명인을 비롯해, 영화 음악으로 이름을 알린 정가 앙상블 소울지기, 공연뿐 아니라 방송에서도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하윤주 등이 모두 정가를 노래하는 이들이다.
최근 아쟁 연주자 진민진은 「아쟁, 정가와 마주 닿다」라는 제목의 음반을 내기도 했다. 원래 정가 반주 악기에 편성되지 않는 아쟁으로 반주 음악을 편곡해 박진희의 노래에 버무렸다. 이러한 시도들이 꾸준히 이어져 이제껏 알지 못했던 우리 노래 정가의 풍류와 멋을 더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1-11-19 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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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코로나가 앞당긴 수많은 것들 중 메타버스에서의 삶이 있다. 현실세계와 유사한 사회, 경제, 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이 온라인 기반의 가상세계는 팬데믹이라는 비대면 환경에서 급성장하며 크게 주목받고 있다. 원시적이기는 했지만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조금씩 경험해 온 것이기에 기성세대들에게도 어려운 개념은 아니다.
메타버스를 이야기할 때 바로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아바타’(제임스 카메론, 2009)는 당시 영화에 혁신적인 기술을 도입해 시각적 충격을 안겨준 작품이다. 반신불수가 된 해병대 출신 ‘제이크 설리’가 판도라 행성에서 아바타를 통해 나비족이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이크가 판도라 행성에서의 삶을 더 현실로 느끼는 것처럼 MZ 세대들은 메타버스에서의 삶이 더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비족이 등장할 때의 테마곡들은 핀란드의 목관악기, 인도네시아 전통악기 등으로 연주되었다. 디지털 이미지로 점철된 판도라 행성이지만 친환경적이고 인간보다 더 생명을 존중하는 나비족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 켈틱 음악을 잘 사용하기로 유명한 제임스 호너의 장기가 이 작품에서도 잘 발휘되어 있다. 신비스런 목소리들이 더해지고 독특한 코드 진행과 함께 점점 더 웅장해지는 나비족의 테마는 이국적이면서 지금 들어도 세련되고 대담하다.
영화의 엔딩곡, ‘I See You’는 골든글로브 주제가상에도 노미네이트되었을 정도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는데, 나비족의 의미심장한 인사말을 제목으로 한 이 곡은 인간의 육신 대신 나비족으로 재탄생하는 제이크의 운명과 네이티리의 사랑이 강렬하고도 서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제임스 호너의 곡은 역시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협업했던 ‘타이타닉’(1998)에서 흘러나왔던 ‘My Heart Will Go On’일 것이다.
드물게 스코어와 OST를 아우를 수 있는 작곡가였던 제임스 호너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음악가로 100편이 넘는 작품에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경비행기 사고로 62세에 사망했지만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를 석권했던 그의 음악성은 계속 살아남아 후배 뮤지션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윤성은의 Pick 무비
쌀쌀한 계절을 따뜻하게 데워줄 로맨틱 코미디, ‘크림’
한동안 극장가에서는 로맨스 영화를 찾기 어려웠다. 언젠가부터 로맨틱 코미디나 로맨틱 멜로드라마는 TV나 웹에서 충분히 소비할 수 있는 장르로 인식되어 왔고, 스크린에서는 보다 시각적 스케일이 큰 작품들이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손실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대작들이 개봉을 연기해왔고, 상대적으로 극장을 잡기 용이해 진 중저예산 영화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이번 달에 개봉일을 잡은 ‘연애 빠진 로맨스’(감독 정가영), ‘장르만 로맨스’(감독 조은지) 등은 아예 제목에 연애담임을 천명한 영화들로, 배우 활동을 겸하는 여성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쩌면 그동안 로맨스 영화들은 소멸되었던 것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헝가리에서 온 정통 로맨틱 코미디, ‘크림’(감독 노라 라코스) 또한 여성감독의 작품으로 달콤쌉싸름한 연애의 여러 가지 맛이 감각적으로 잘 담겨 있다. ‘도라’(비카 케레케스)는 열렬히 사랑했지만 알고 보니 약혼녀가 있었던 ‘다비드’와 헤어진 후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설상가상으로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디저트 카페 ‘크림’까지 파산할 위기에 처하자 도라는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가족 사업을 지원하는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점, 즉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갈등의 플롯은 두 가지다. 도라가 싱글이라는 점, 이 프로젝트에 다비드 부부도 경쟁자로 참여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기본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성을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기 때문에 갈등 또한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무리 없는 선에서 봉합된다.
먼저, 첫 번째 문제는 도라가 친구 커플의 결혼식 때문에 알게 된 치과의사 ‘마르시’, 대배우를 꿈꾸는 이웃집 꼬마 ‘라시카’와 계약 가족을 만들면서 코미디를 유발시키는 요소로 전개된다. 나흘 간의 합숙 테스트 기간동안 마르시는 연신 농담과 장난으로 도라의 진땀을 빼고, 조숙한 라시카는 경쟁 가족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완벽한 가족으로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점점 더 큰 거짓말로 세 사람을 몰아넣는 한편, 도라와 마르시는 위기를 헤쳐나가며 부쩍 가까워진다. 마르시에게 매력을 느끼면서도 이별의 상처와 다비드 부부에 대한 질투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도라의 양면적 감정이 코미디 장르에 얹혀져 생동감 있게 표현된다.
씁쓸한 폭로전 끝에 교훈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두 번째 문제는 다소 상투적으로 느껴지지만 주인공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데 있어서는 깔끔한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연애가 영화처럼 산뜻할 수는 없어도 하나의 사랑을 완전히 떠나보내고 나면 다른 사랑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사실만큼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헝가리 영화라는 생소한 태생은 보편적 경험과 감수성 아래로 금새 사라져 버린다. 부쩍 싸늘해진 바람도 제목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줄 작품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1-11-12 0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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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Curtain Call)
막이 오르면 무대는 미래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우주 비행사를 꿈꾸는 제이와 그녀를 사랑하는 은기가 있다. 제이에겐 오랫동안 꿈꿔왔던 목표가 있다. 우주인으로 1년간 지구 밖에서 머무는 것이다. 어느 날 그 꿈이 현실이 됐다. 제이는 들뜬 목소리로 이 사실을 은기에게 말하지만, 은기는 충격에 휩싸인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 상의도 없이 1년이나 우주로 떠나겠다는 일방적인 통보가 씁쓸했기 때문이다. 결국 말다툼이 벌어지고, 은기를 화가나 집을 나서다 사고를 당한다.
은기가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다. 오늘도 사고에 대한 기억이 그를 진땀나게 만든 것이다. 우주 비행도 포기한 제이는 은기를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해 그를 돌본다. 제이의 노력으로 거의 회복한 은기는 더할 나위 없이 그녀를 아끼고 사랑한다. 그러던 어느날, 초인종이 울린다. 제이를 수거하러 왔다는 날벼락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가방을 들고 들어서는 제이. “나 다녀왔어, 그녀는 내가 당신을 위해 남겨둔 복제인간이야”. 은기가 사랑했던 것은 제이일까, 제이의 분신이었던 복제인간일까.
뮤지컬의 원작은 만화다. 누적 조회수 1억 뷰를 돌파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작가 캐롯의 연재 웹툰을 가져다 다시 무대용 뮤지컬로 각색한 공연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원작 웹툰 ‘이토록 보통의’는 여러 사연과 인물,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딕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뮤지컬에서 활용한 이야기는 그 중 두 번째 단편인 ‘어느 밤 그녀가 우주에서’를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다.
사실 요즘 문화산업에서 웹툰을 활용한 원 소스 멀티 유즈(OSMU)는 다양한 인기 콘텐츠의 출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표적인 흥행 사례로는 영화와의 만남이 있다. ‘신과 함께’다. 주호민 작가의 원작 웹툰은 기발한 발상과 흥미로운 이야기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었는데, 영화로 탈바꿈되며 ‘죄와 벌’, ‘인과 연’ 시리즈로 제작되었고, 두 편 모두 천만 관객을 넘는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모으는 기념비적 성과를 남겼다. 무대로의 변환도 이뤄져 뮤지컬 ‘신과 함께’가 만들어져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웹툰 ‘무한동력’도 비슷하다. 역시 주호민 작가의 원작을 무대용 콘텐츠로 변환시킨 경우로 수려한 선율을 잘 담아내는 뮤지컬 작곡가인 이지혜가 각색에 주요한 역할을 맡아 신선한 화제를 불러모았다. 웹툰과 안방극장의 교류는 한류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며 승승장구할 정도다 ‘미생’, ‘이태원 클라스’, ‘유미의 세포들’, ‘김비서가 왜그럴까’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벅찰 정도로 많은 흥행사례들이 있다.
대부분 웹툰 원작의 흥행 콘텐츠들이 화려함이나 다양함, 이야기의 변주를 통한 익숙하면서도 다시 새로운 감각적 변용에 치중했던 데 비해, 뮤지컬 ‘이토록 보통의’는 여타 작품들과는 차별되는 또 다른 매력을 담아낸다. 비교적 수수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소극장 뮤지컬로의 전환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웹툰 속 이야기를 무대로 고스란히 재연하는데 머물기보다는 한층 부드럽고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친절하게 ‘들려주는’ 느낌을 극대화하고 있어 이색적이다. 덕분에 웹툰을 미리 알고 있는 관객이라도 무대의 이야기에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되는 절묘한 매력을 담아내게 됐다.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이 모니터에서 무대로 바뀌어 구현되며 세세한 부분에서 다소의 변화도 시도됐다. 남자 주인공 은기의 직업이 웹툰에서는 로봇 대여점 주인으로 나오는데 반해 무대에서는 그렇게 구체적이지 않은, 로봇을 수리할 줄 아는 로봇과 관계된 직업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웹툰에서는 차량과 연관된 교통사고로 그려졌던 은기의 사고도 무대에서는 물에 빠지는 듯한 영상으로 대체됐다. 덕분에 뮤지컬에서는 원작보다 몽환적이면서 또 판타지같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웹툰에서는 P로 나왔던 여인의 이름도 무대에서는 J로 바뀌어진 것도 뮤지컬만의 변화된 부분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세트다. 웹툰에서의 공간이 현실적인 장소의 이동으로 그려지고 있다면, 무대는 상당히 상징적이고 미니멀리즘적인 공간과 영상을 다양하게 접목시키고 활용하는 세련됨을 보여준다. 뮤지컬의 변화는 웹툰에서보다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이야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자 매력으로도 작용된다. 효과적인 압축과 생략의 과정이 이뤄졌다고 평가할 만하다.
뮤지컬에 등장하는 배우는 남자 배우와 여배우 각 한 명씩이다. 다만, 요즘 우리나라 뮤지컬들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멀티 캐릭터의 활용이 이 작품에도 간간히 등장해 관객들의 보는 재미를 극대화한다. 특히, 복제인간 로봇이었던 제이는 다리가 고장나 절고 있고, 실제의 제이는 그렇지 않다는 설정은 다소 복잡할 수 있는 극 전개를 따라가는데 효과적인 힌트를 제공해준다.
2021년 앙코르 무대에서 제이역으로는 ‘스페셜 레터’,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청순한 연기로 인기를 누렸던 최연우가 ‘어쩌면 해피엔딩’, ‘블랙 매리포핀스’ 등에서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강혜인과 이지수와 함께 무대를 꾸민다. 꽤나 적절히 어울리는 배역이라고 느껴질 만큼 배우들의 역량이 잘 묻어난다. 은기(웹툰에서의 이름은 홍은기다) 역으로는 ‘여신님이 보고계셔’에서 사랑받았던 손유동과 정휘, 신재범이 등장한다. 특히 최연우와 정휘는 오리지널 캐스트로 참여한 바 있어 앙코르 무대에서 만나는 농익은 캐릭터 묘사가 더 반갑다.
원작자인 캐럿은 뮤지컬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편지로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다가 육성으로 직접 들은 기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편지가 좀 더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아낼 수 있겠지만, 말과 소리로 직접 듣게 되면 아무래도 좀 더 생생한 숨소리에 얹혀 전달되게 마련이다. 공연을 보면 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복제 인간 이야기는 영화 ‘아일랜드’를 통해서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바 있다. 뮤지컬 ‘이토록 보통의’는 ‘아일랜드’와는 조금 결이 다른 우리식 이야기,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아 미래를 보여준다. 극적 반전이 이뤄지는 엔딩은 꽤나 충격적이다. 이 곳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모두 밝힐 수는 없지만, 아마 공연장을 찾는다면 그 충격적인 전개에 다소 놀랄 수도 있을 것 같다. 샤갈의 박물관, 니스의 해변가, 밤하늘의 별자리 등은 마치 순정만화의 한 장면처럼 관객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수많은 박스들로 이뤄진 무대의 풍경은 마치 기억을 담아놓는 머릿속 어딘가의 상자들같다. 재미있는 한국산 창작 뮤지컬이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1-11-12 0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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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아직 연주자들이 입장하지 않은 무대에는 의자와 보면대가 가득합니다. 이윽고 조명이 밝아진 무대 위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입장합니다. 의자에 앉은 단원들이 각자 가볍게 손을 풀다가 악장이 등장하여 음을 맞추고 나면, 콘서트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은 조용히 지휘자가 나오기를 기다리지요. 박수 속에 지휘자가 나오면, 단원들은 잠시 일어나고, 청중들을 향한 지휘자의 인사가 끝나면 다시 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지휘에 맞춰 연주를 시작합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오케스트라 음악회는 이러한 광경으로 시작됩니다. 협연자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연주 내내 무대위에 서 있는 사람은 지휘자 한 명 뿐이지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 광경은 사실 18-19세기의 오케스트라 음악회에서는 그리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대다수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지휘자처럼 서서 연주에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앉아서 연주할 수밖에 없는 첼로 파트 등 일부 파트의 단원들이었지요.
다만,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앉아서 연주하는 것만큼 보편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요. 아쉽게도 어느 오케스트라가 언제까지, 그리고 어떤 파트를 제외하고 서서 연주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풍부하지는 않습니다. 19세기 오케스트라의 연주 관습에 대해 연구하였던 코우리(D. J. Koury, 1926- )의 저서에 따르면, 독일에서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서서 연주하는 관습이 19세기 말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유서깊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였지요.
서서 연주하는 관습은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도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1842년에 열렸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창단 공연에서 단원들이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처럼 서서 연주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반면, 빈에서는 앉아서 연주하는 관습이 일찍이 자리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명한 음악 평론가 한슬릭(E. Hanslick, 1825-1904)도 앉아서 연주하는 관습이 처음으로 자리잡은 곳이 빈일 것이라 추측했지요.
서서 연주하는 관습은 언제 사라지게 된 것일까요? 앞서 언급하였던 자료의 불충분함으로 이를 명확히 밝히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된 주목할만한 기록은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 단원들이 1905년경까지 서서 연주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의 기록이지만,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이 관습이 널리 행해졌던 나라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사라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겠습니다.
또, 이 기록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가 따로 언급된 것을 보면, 아마도 관악기 파트 단원들은 이보다는 먼저 앉아서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도 있고요.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장대한 규모의 작품들이 많아진 것도 서서 연주하는 관습이 점차 사라져가게 한 요인이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서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보면, 이런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다. “다리 아프고 힘들어서 공연 내내 어떻게 서서 연주하지?” 1884년에 독일 마이닝엔의 오케스트라가 서서 연주하는 것을 본 한슬릭도 앉아서 연주하는 것이 힘을 아낄 수 있다며, 이 관습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는 단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부주의함을 방지하고자 하는 일종의 보험일 뿐이라고 폄하했지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가디너의 공연 장면. (출처: jarijuhanikallio.wordpress.com)
그렇다면, 이 관습의 장점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2018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슈만(R. Schumann, 1810-1856)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한 가디너(J. E. Gardiner, 1943- )는 팀파니와 첼로, 그리고 더블 베이스 파트를 제외한 모든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서서 연주하게 하는 파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그보다 몇 해 전에 같은 오케스트라와 멘델스존(F.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의 교향곡들을 연주하며,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 단원들만 서서 연주하게 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행보였지요.
가디너는 이것이 멘델스존이 슈만의 교향곡들을 지휘했을 방식이라고 하면서, 특별히 현악기 파트에서 달라지는 점을 주목하였습니다. 의자가 없으면 단원들이 서로 더 가까이 설 수 있고, 서로를 잘 들을 수 있으며 지휘자를 바라보는 시야도 더 좋아진다고 주장했지요. 단원들은 마치 솔로 연주자들처럼 연주할 수 있다고 하며, 이것이 연주에 추가적인 에너지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 안에서 솔로 연주자들처럼 연주할 수 있다는 발언이 자칫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터뷰를 종합해보면, 현악기 파트 단원들이 서서 연주할 때, 몸을 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이며 연주할 수 있고, 이것이 앉아서 연주할 때와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부여한다고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오케스트라 연주 관습 및 환경은 변화를 거듭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의 크기와 악기 배치, 사용 악기들, 연주 장소, 조율음 등 많은 요소가 변하였지요. 앉아서 연주하는지 혹은 서서 연주하는지의 여부도 많은 변화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관습도 처음부터 당연하지는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되지요.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오케스트라 연주 관습은 어떻게 변해있을지 상상해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습니다. 아울러, 가디너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신선한 행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추천영상: 가디너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슈만 교향곡 2번 중 1악장을 연주한 영상입니다. 대다수의 단원들이 서서 연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상으로 이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신선한데, 당시 연주회장에 있었던 청중들에게 이 시도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가디너의 언급 때문에 생긴 선입견일수도 있겠지만, 한결 자유로워 보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움직임이, 음악을 더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듯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eIz9VJK--A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1-11-05 0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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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 애플의 아이폰과 함께 이 두 단어가 주었던 충격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구매욕을 자극하는 미니멀한 디자인에 mp3 플레이어, 카메라, 전화가 가능한 멀티기기는 지금의 Apple이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디자인은 제품의 영혼’이라고 말하는 스티브 잡스. 애플의 성공은 많은 부분 그의 정신에 기대고 있다. 애플 특유의 패쇄적인 소프트웨어가 주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구매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요소가 디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팟에서부터 아이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디자인은 꾸준히 창의적이며 예술적이다.
창의성, 특히 예술적 창의성은 혁신적인 디자인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하다. 그렇다면 잡스가 없는 지금, 애플은 그들만의 예술적 창의성을 소비자들에게 어떤 형태로 어필하고 있을까? 현재 진행 중인 예술 관련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애플이 그리고 있는 미래의 디자인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Creativity Goes On"이다. 1분 30초 분량의 이 광고는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이어진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순간들을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등 애플 제품을 이용해 담은 것이 인상적이다.
광고는 더 영 에베네져스가 연주한 ‘Asleep at the Parade' 피아노 선율이 깔리며 시작한다. 많은 셀러브리티와 예술가, 일반인의 모습이 등장하는 가운데 그들의 일상에 당연한 듯 함께하는 애플 제품들이 눈길을 끈다.
DJ D-Nice는 아이폰을 통해 격리 클럽에서 생방송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메리칸 발레 씨어터의 안무가는 아이패드를 통해 단원들에게 안무 동작을 보여주고 뉴욕 씨티 발레 단원들은 집에서 온라인을 통해 함께 연습하며 나름대로 집에서 격리 생활을 즐긴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이패드 악보를 보며 색소폰 연주를 하고, 여자아이가 아이패드를 통해 발레를 배우고, 집에서 바이올린을 하는 장면 등이 펼쳐진다.
이어지는 영상과 사진들의 배경에는 ‘창문’이 계속 등장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는 “예술을 통해, 애플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표현하며 물리적인 이동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애플이 소통의 창구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두 번째로 소개할 프로젝트는 [AR]T이다. 기존에 진행 중이던 참여형 세션 ‘Today at apple'의 일환으로 증강현실을 기반으로 한 전시형 프로젝트이다. ’ART'에서 증강현실을 의미하는 ‘Augmented Reality'의 약자 AR을 []로 표기해 프로젝트의 정체성을 간결하게도 잘 드러냈다. 이 작업에는 뉴욕의 현대미술관 뉴 뮤지엄과 7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2.5km에 달하는 거리를 증강현실을 통해 거닐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특별한 체험을 제공한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 샌프란시스코의 에르바 부에나 가든, 뉴욕의 센트럴 파크 내 그랜드 아미 플라자 등의 랜드마크를 AR로 산책하는 것은 코로나 사태로 여행이 제한된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작업에서 작가들은 AR을 기반으로 작품의 핵심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을 재구성하는데 주력했다. 예를 들어 비주얼 아티스트 피필로티 리스트의 “International Liquid Finger Prayer”는 떠다니는 반짝이는 형체를 AR 사용자가 잡으려고 시도하면 튕기듯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노래를 부른다. 비정형적인 작품들로 주목을 받아왔고 1988년부터 1994년까지 뮤직밴드이며 퍼포먼스 그룹인 “Les Reines Prochaines'의 일원으로서 음악과 각별한 관계를 맺어온 그녀답게 비주얼과 음악을 동시에 사로잡은 시도를 눈여겨볼 만하다.
차오 페이의 작품 “Trade Eden"은 관람객의 참여를 보다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작품이다. 자동화된 공장과 유령의 집을 표현하여 AR 사용자들은 새로운 쓸모없는 기계를 상상해내고 포장한 물건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테스트하게 된다.
[AR]T의 전시는 뉴 뮤지엄이 코로나 사태를 맞아 새롭게 시도하는 ‘홈 딜리버리’ 전시와 맥락을 함께하며 이제는 전시를 집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국내에서는 체험이 어렵다고 한다.)
애플이 “Life Goes On"에서 시사한 디지털 기기를 통해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소통의 시대와 [AR]T의 홈 딜리버리형 전시는 디지털과 예술이 공존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했음을 알린다. 전 세계 어디에서든지 원하는 작품을 원하는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시대.
애플은 “우리는 항상 창의성의 힘을 깊이 믿는다. 이제 우리는 창의성, 독창성, 인간성, 그리고 희망을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세계 각지의 사람들로부터 영감 받고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3차원을 뛰어넘어 새로운 차원에서 시도되는 그들의 예술 프로젝트와 소통을 중시하는 애플의 광고는 다음 세대의 예술이 어디로 향해갈지를 보여준다.
소통과 디지털 예술의 결합은 제페토(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증강현실 3D 아바타 서비스)와 같은 메타버스 시장의 확장 속도만 보아도 실감이 난다.
YG, 빅히트, JYP 엔터테인먼트에서도 통 큰 투자를 했다는 것만 봐도 새로운 시장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커져갈 지 알 수 있다. 애플의 증강현실 프로젝트와 제페토에서 볼 수 있듯, 디지털과 엔터테인먼트, 예술계가 점점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전통적인 예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 방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제는 가상현실 공간에서 가상의 내가 예술가가 되기도 하고, 다른 아바타들과 예술가들의 공연을 보는 시대가 도래했다. 또한 “Creativity Goes on” 광고에서 볼 수 있듯 디지털 기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예술을 활용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 시작이지만 앞으로는 언제 어디서든 접하고 서로 의사소통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예술을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으며 사람들이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차원이 한층 확대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1-11-05 0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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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사진제공 : 신시컴퍼니>성장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그 과정을 오롯이 지켜보는 일 또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태어나 사는 동안 우리는 쉼 없이 성장하지만, 독립된 개체로서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보다 중요한 경험이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소중하다. 그런데 지금, 아주 귀한 기회가 가까이에 와있다. 환한 조명 아래 홀로 선 어린 배우가 힘껏 무대 바닥을 구르며 날갯짓을 시작할 때 문득 차오른 눈물은 자연스레 과거와 미래를 연결할 구심점이 된다. 한 소년이 가난과 편견 등 여러 어려움과 맞선 끝에 결국 꿈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 작품,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이야기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올해로 세 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서울 대성 디큐브 아트센터에서 상연되고 있는 이번 시즌 공연은 지난 8월 31일에 개막해 오는 2022년 2월 2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빌리 엘리어트’는 수많은 영화 애호가들로부터 최고라 손꼽힐 만큼 수작이었던 동명 원작 영화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해 왔다. 물론 뮤지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원작 못지않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도 관객들이 작품을 특별히 여길 만한 요소가 가득하다. 뚜렷한 드라마와 희망찬 메시지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아역배우가 주역이 되어 작품 전반을 이끈다는 사실은 타 뮤지컬과 비교했을 때 더욱 확실하게 두드러진 차별점이다.
<사진제공 : 신시컴퍼니>이번 3대 빌리(김시훈·이우진·전강혁·주현준) 역시 전 시즌 빌리들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인재들인데, 직접 무대를 보고 나면 아직 어린 배우들이 이처럼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과연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놀라게 된다. 빌리마다 강점이 워낙 달라서 자연히 각양각색의 빌리를 만나볼 수 있는 재미도 따른다. 이렇게 소중한 빌리들을 필두로 총 58인의 배우가 합심해 이번 ‘빌리 엘리어트’ 무대를 책임진다.
2005년 영국에서 초연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원작 영화감독이었던 스테판 달드리가 연출을 맡고, 작품의 배경이 된 영국 북동부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온 리 홀이 극본을 썼다. 그래서인지 뮤지컬 속에는 신자유주의 정책 아래 혼란했던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담겼다. 파업을 제압하려던 경찰에 맞서 피켓을 들고 공권력에 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처절한 투쟁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남긴다. 여기에 세계적인 팝 가수 엘튼 존도 힘을 보탰다. 일찍이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늘 주목받아온 엘튼 존은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며 그와 꼭 닮은 자신의 유년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뮤지컬 제작에 먼저 의견을 보탠 것도 그였다.
칸 영화제에서 스테판 달드리 감독을 만난 엘튼 존은 ‘빌리 엘리어트’의 뮤지컬 제작을 제안했고, 적극적인 설득 끝에 이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강렬하면서도 신선한 넘버들로 영화를 뮤지컬화 하는데 제 역할을 다한 그는 이 작품 외에도 뮤지컬 ‘라이온 킹’과 ‘아이다’의 작곡 역시 맡은 바 있다. 이렇게 탄생한 뮤지컬은 올리비에 상 5개 부문, 토니어워즈 10개 부문 수상 등 굵직한 수상 이력을 남기며 작품이 가진 힘을 입증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1980년대 중반 영국을 배경으로 발레리노를 꿈꾸게 된 한 탄광촌 소년의 성장기를 그린다. 삶의 기반을 잃을까 두려웠던 더럼 카운티 광부들은 ‘철의 여인’ 대처 정부를 향해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을 선언하고 매일같이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간다. 주인공 빌리 엘리어트의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파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던 아버지와 형,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살던 그가 갑자기 발레에 흥미를 보이게 됐다는 사실은 숨겨야만 했던 비밀이 됐다.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한 권투 대신 빌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발레는 우연이었지만 마치 운명처럼 다가왔다.
<사진제공 : 신시컴퍼니>일찌감치 빌리가 가진 재능을 알아본 윌킨슨 부인이 몰래 개인 레슨을 하면서 그를 왕립 발레 학교에 진학시키려 하나, 이 사실을 안 아버지와 형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입학시험조차 보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어느덧 성탄절이 다가오고, 성과 없이 이어진 파업 또한 그대로인 가운데 빌리는 아무도 없는 회관에서 끝내 다가가지 못한 꿈을 떠올리며 격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런데 이 모습을 빌리의 아버지가 보게 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비록 당면한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이후 가족들이 빌리가 계속 발레를 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돕는 과정을 보며 관객들은 따뜻한 시선으로 모두를 응원하게 된다.
여러 인상적인 장면들 가운데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던 빌리의 모습은 묵직한 탄성을 자아낸다. 작품에서는 발레뿐만 아니라 탭과 힙합, 아크로바틱,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안무를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백조의 호수’가 울려 퍼지면서 어린 빌리가 성인이 된 빌리와 함께 춤추는 대목(‘Dream Ballet’)은 시작과 동시에 힘찬 박수가 터질 만큼 감동적이다. 벅찬 현실을 뒤로한 채 춤 하나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 비로소 자유를 찾는 느낌이라던 ‘Electricity’는 아이의 마음에 완전히 공감하게 만든다. 또 경찰과 노동자들이 서로 대치하는 가운데 평화로운 발레 수업이 진행되는 ‘Solidarity’ 무대도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다. 어색하게 휘청이던 빌리가 어느새 중심을 잡고 제법 괜찮은 프롬나드를 선보이다 넘버가 끝날 무렵 멋진 피루엣으로 마무리 짓는 장면이 정점을 찍는다. 이렇게 각기 다른 상황을 절묘하게 대비하며 빛과 그림자로 고이 엮어낸 종합예술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뭉클한 감상을 이끈다.
날로 성장하는 빌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 역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주는 선물이다. 시간이 흐르고 회차가 거듭될수록 빌리들은 어느새 한층 더 무르익은 무대를 선보인다. 간절한 꿈을 찾아 날개를 활짝 펼친 배우들의 놀라운 가능성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이번 기회에 꼭 ‘빌리 엘리어트’와 함께 해보길 추천한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1-11-01 1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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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에릭코츠(1886~1957) 출처 www.bbc.co.uk:sounds.
영국 라이트 뮤직을 대표하는 작곡가 에릭 코츠( Eric Coates)
'클래식은 진지하다'라는 대중들 속의 인식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이 심미적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어하거나. 바이올린을 전공하던 비엔나 학창시절, '알망드', '지그'같은 바로크 시대의 춤곡들을 분석하고 사유하던 나에게 교수님이 툭 던진 말 " 댄스에 맞춘 음악일 뿐." 춤곡임에도 어렵게 다가갔던 것이다. 진지함말고 대놓고 '가벼운 클래식 음악'은 없단 말인가.게다가 퀄리티까지 갖춘 음악이라면 금상첨화.
라이트 뮤직(Light Music)의 왕이라고 불리는 에릭 코츠(Eric Coates)의 음악은 추천할 가치가 있다. 라이트 뮤직은 말 그대로 덜 진지하고 가벼운 클래식 음악이다. '라이트 뮤직'이라는 단어의 어감에서 저퀄리티에 깊이없는 음악일 것이라고 넘겨짚으면 돌아가신 작곡가 모짜르트, 하이든이 섭섭해 하실 듯.
모짜르트가 작곡한 Ein musikalischer Spass (음악적 농담)를 비롯 다수의 디베르티멘토들이 라이트 뮤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작품성이 뛰어나다. 빈 신년음악회에 주 레퍼토리로 등장하는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의 왈츠를 비롯한 다수의 오페레타들 또한 클래식에서 인정받는 라이트뮤직이다.
에릭 코츠는 1886년생, 영국출신으로 라이트 뮤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명문 왕립음악원출신으로 비올라, 작곡을 공부했던 그는 비올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사중주단을 비롯해서 오케스트라에서 차근차근 연주경력을 쌓았으며 1912년부터 영국의 세계적인 페스티벌 프롬스(Proms)를 일궈낸 헨리 우드의 지휘아래 퀸즈 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다. 엘가, 드뷔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등 당대최고의 작곡가들의 지휘아래 연주했으며 클래식 음악어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올라 주자이면서 동시에 작곡가로써의 활동을 병행했는데 1911년 프롬나드 콘서트에서 발표한 Miniature Suite가 인기를 끌었고 작곡가로써 입지를 점차 갖추며 악단의 비올라주자로 리허설 참석이 힘들어지자 1919년 결국 비올라를 접고 작곡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1920년대에서 부터 1930년대에 걸쳐 가장 비싼 작곡가 중에 한명이었으며 공연활동 뿐 아니라 1920년대에 자리잡은 영국방송의 대중적 파급력을 일찌감치 간파했던 인물이었다. '에릭코츠의 음악과 인생'이라는 책을 쓴 작가 마이클 페인은 그의 저서에서 "영국방송 BBC가 설립되면서 에릭 코츠의 음악활동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고 말한다. 에릭 코츠는 BBC와 함께 수많은 공연과 녹음을 진행했는데 예를 들어 In Town Tonight이라는 BBC 라디오 프로그램의 테마 '나이츠브리지'는 잘 알려져있다.
그의 음악적 특징이라면 역시 명징한 멜로디와 유려한 사운드를 꼽을 수 있다.
귀에 착 감기는 캐치(catchy)한 멜로디는 물론이거니와 정통 클래식에서 쌓은 탄탄한 내공이 작품속에 묻어나온다. 비올라 주자인 만큼 현악기 사운드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균형감있게 현악과 관악의 조화를 이끌어낸다. 명쾌한 오케스트레이션이 돋보이는 것이다. 영국 클래식을 대표하는 작곡가 엘가도 에릭 코츠의 음악에 호감을 갖고 그의 레코드를 사모았다고한다.
에릭 코츠가 오케스트라에서 역할이 한정적인 경우가 많았던 비올라를 연주했던만큼 그 고충을 잘 알았을 터.악기들의 역할이 골고루 안배될 수 있도록 배려한 오케스트레이션이 눈길을 끈다.게다가 군더더기 없고 파악하기 쉬운 구조를 지녔는데 도입부- ABAB -코다와 같은 구조가 대표적인 예다. 작곡가 엘가의 행진곡에서도 이와 같은 구조들을 엿볼 수 있는데 듣는 이로 하여금 멜로디를 자연스럽게 기억시킨다. 또한 그의 음악은 리드믹한 요소가 강조된 경쾌함을 자아내는데 당시 영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이유중에 하나다.
더 타임즈지가 그의 음악에대해 "가볍지만 진정성 있는 음악"이라고 평했는데 서로 엇비슷한 라이트 뮤직이 아닌 주제에 걸맞는 적절한 음악을 내놓을 줄 알았다.
특히 영국스러움이 묻어나는 곡들이 많은데 런던 모음곡( London Suite), 세 엘리자베스(The three Elisabeth)등 수많은 곡들이 영국인의 사랑을 받았다.적십자의 노동자들을 위해 쓴 Calling All Workers 또한 클래식의 대위법이 그만의 방식으로 녹아든 그의 대표작이다. 작가 마이클 페인은 " 차이코프스키, 프랑스 발레학파, 당대 영국의 현대음악등이 에릭 코츠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그의 음악이 가볍지만 진지함이 묻어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깊은 음악적 내공 위에 군더더기를 버리고 가벼움을 추구했던 것이다. 곡도 매우 짧은 편이다. 여러모로 바쁜 이 시대의 현대인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곡가임에 틀림없다.
댐 버스터 행진곡 (The Dambusters March)을 추천한다 .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개막식장으로 향하는 장면에 등장했던 곡이다. 1955년 개봉했던 전쟁영화 Dambusters의 테마곡으로 당초 영화를 위해 쓰여진 곡은 아니었다. 에릭 코츠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참고하여 작곡중이었는데 작품을 끝낼 무렵 영화제작자의 연락을 받게되었다. 영화 제작자는 그의 애국심을 자극하여 결국 영화속에 음악을 담았다.기분이 우울할때나 나른한 권태로움에 빠져있을때 들어보라, 마치 죽은 세포가 살아나는 듯하다.
유튜브 링크: 댐 버스터 행진곡 (The Dambusters March)
https://www.youtube.com/watch?v=wDpdPjf2aSE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1-10-29 0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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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포커스
“2021 가을, 물리적 거리두기와 온라인 시대의 비엔날레 모색”
코로나가 우리 삶으로 다가온 지 2년차가 넘어섰다. 거리두기의 금기를 깨고 이제 전시와 공연들은 공존을 모색하는 ‘위드 코로나’ 시대를 준비 중이다. 비엔날레의 계절인 가을, 연기돼 올해 열린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대구사진비엔날레·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를 포함해,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광주디자인비엔날레,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울산) 등이 성황리에 시민들을 맞이하는 중이다. 코로나에 대한 대처 역시, 부산·대전·창원·금강·여수 등 2020년 비엔날레를 경험해선지 물리적(사회적) 거리두기와 온라인 전시를 대하는 대중들의 눈높이도 확연히 달라졌다.
개막규모 축소, 온라인콘텐츠 확장, 최신 아이디어 실현
전시들은 잇따라 VR·AR 전시를 유튜브와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선보이고, 온라인전시 감상후, 오프라인전시를 예약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가상과 현실을 연결한 전시기법의 확장은 코로나19 확산 상황에 따른 현장관람의 유연한 대처와 더불어 새로운 문화기획시대를 열고 있다. 2년마다 열리는 국제미술제인 비엔날레, 동시대의 다양한 작품을 매개로 관람객과 문화계 주체들이 만나는 대규모 전시행사다. 코로나19로 힘겨웠던 예년과 분위기와 다르게 방역 조치에 있어서도 유연한 대처가 가능해졌다. 온라인 전시 콘텐츠가 대폭 강화됐고, 개막규모는 대폭 축소됐다. 코로나 확산 상황에 따라 현장 관람을 제한하고 온, 오프라인의 동시 활성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예산과 운영에 있어 자금규모가 확대됐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분위기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분위기다. 이 모든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면서 취재한 내용들을 정리했다.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9.8~11.21) <하루하루 탈출한다>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포스터.
디지털 세계로의 탈출을 선택한 미디어시티는 세계 미디어에서 채집한 ‘도피주의’ 속에서 라는 제목으로 우리를 ‘너머의 길’로 초대한다. 2000년 출범이후 전 지구적 디지털·미디어 혁명에 주목해온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디지털·미디어 변화의 물결을 속에서 봉쇄된 도시문제를 직접 꺼내든 것이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에서 방영한 TV 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One Day at a Time)>에 착안한 전시로, 남미계 간호사 싱글맘 페넬로페가 두 아이를 키우며 마주한 문제들을 우리의 일상에 대비시켜 설명하는 방식이다.
답답한 현실로부터의 ‘탈출’은 팬데믹 상황 속 도시 봉쇄가 갖고 온 우리 모두의 염원이 아닐까. 온라인상의 어딘가로 향하는 탈출구, 메타버스라는 무형의 세계에 대해 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은 융마(Yung Ma; 20년전 인 비엔날레의 출범 외국감독)는 “‘탈출=도피주의’는 우리가 세계와 만나고 연결해주는 비평적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세상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로서의 온라인과 오프라인, 미술관과 도시 전역으로까지 확장된 이야기들은 촘촘한 연결망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비엔날레는 퍼포먼스, 온라인 채널, 작가 토크, 유통망 등을 아우르는 스마트폰의 작동논리를 기저로 진행된다.
제9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9.1~10.31) ‘d-Revolution’
‘디자인을 통한 혁명’의 표현으로 과거의 발명에 의한 혁명이 아닌 ‘재발견’, ‘재정립’, ‘재생산’에 주목한다. 2020을 기준으로 변화된 관계의 패러다임을 통해 예측 불가한 미래 불확실성을 강력한 혁명(Revolution)이라 명명했다. 일상변화에 대한 대응과 치유를 비대면, 비접촉 등의 새로운 소통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안에서 정보(Data), 차원(Dimension), 일상(Day), 행위(Doing), 표현(Description)이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혁명적 발견으로 표현되었다. 총감독 김현선은 “모두가 낯선 일상,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일상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일상의 변화에 주목한다.”며 “디자인이 처음 주목한 이로운 쓸모(usefulness)의 개념을 ‘다름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치환했다”고 밝혔다. 환경, 장애, 인종, 젠더, 사상, 문화 등 다름을 이유로 소외된 이들에 대한 존중을 디자인을 통해 실현한 기획이다.
모든 비엔날레들이 그러하듯 본전시-특별전-국제학술행사-인공지능관-체험관 등이 운영 중이며, 50개국 421명 작가, 국내외 기업 1039종 작품을 선보였다. 인공지능관은 인공지능의 패턴과 유사한 DNA 염기서열의 무한히 확장되는 비하이브(Be-Hive) 구조로 구성된 DNA X를 콘셉트로 기획, 광주의 정신성을 AI의 비전 위에서 제시했다. 체험관에서는 이번 행사의 주제인 ‘혁명, 디레볼루션’을 커다란 변화로 인식한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변화에 대한 우리들의 대응이 궁극적으로 인류의 진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는 의미를 담았다.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 속에서 기술과 감성의 의미 있는 콜라보를 디자인을 통해 제시했다는 평이다.
제11회 청주공예비엔날레(9.7~10.17), ‘공생의 도구’
공예 본연의 가치를 ‘공생’에서 찾는 40일간의 대장정은 꽤나 화려하다. 1999년 시작된 공예분야 세계 최초‧최대 축제는 팬데믹 시대 앞에서 ‘공생’를 꺼내 놓았다. 그 서막은 ‘제11회 청주국제공예공모전 시상식’이다. 공모전 수상자들과 비엔날레 참여 작가 등 50명 내외가 참석한 온라인 생중계 방식으로 치러졌다. 대상에는 5,0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되며 대상을 비롯한 총 114점의 작품이 비엔날레 기간 동안 관람객을 만났다.
본전시는 세계 32개국 309명의 작가들이 참여해 ‘공생의 도구’를 주제로 1,192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직관과 랜선 관람을 동시에 살펴보면서 ‘비하인드-위드코로나’ 시대 국제 공예전시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이다. 코로나19로 국내외 관람객의 직접 방문이 제한적인 만큼 본전시를 비롯해 초대국가관, 국제공예공모전, 충북공예워크숍, 크래프트 캠프, 미술관 프로젝트 등 모든 프로그램을 공식 홈페이지(www.okcj.org)를 통해 공유한다.
360도 VR촬영으로 전시장에 온 듯 둘러볼 수 있게 한 VR갤러리는 기본, 모바일 앱 오디오 가이드(큐피커) 운영, 작가의 작업과정 및 인터뷰 영상 등을 도입했다. 새롭게 시도된 <드론 투어>는 시그니처 콘텐츠 되었고, 작가가 재료를 다루는 순간부터 최종 작업에 이르는 과정을 ‘소리’로 특화한 <브이로그 공예> 등이 국제적 비엔날레의 진화를 보여주었다.
제15회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10.14~11.7)에 6개국 12팀 참가
경상일보는 오는 2021년 10월 14일부터 10월 31일까지 제15회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Taehwa River Eco Art Festival · TEAF21)를 개최한다. ‘누구의 눈에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Unhidden/Unseeable)’이라는 제목으로 격변하는 새로운 현상 속에서 시각문화의 역할을 고찰하는 이번 전시는 태화강국가정원 철새공원에서 한국,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인도, 캐나다, 미국 총 6개국, 12팀의 작품을 선보인다. 지난해까지 약 열흘 정도에 머물렀던 전시 기간이 올해부터는 연장되어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국제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해외 협력 큐레이터와 코디네이터가 합류해 COVID19로 현장에 오지 못하는 해외 작가와의 적극적이고 원활한 소통뿐만 아니라 해외 온오프라인 플랫폼을 활용한 전시 홍보를 통해 한층 더 풍부하고 업그레이드된 전시로 외연을 확장한다. 제15회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는 사용자인 주체와 가장 밀접하게 소통하며 매일(또는 매 순간) 새로운 관계를 맺는 ‘집’에 주목하고, 그것이 물리적 공간이든 정신적 상태이든, 각자마다의 ‘집’을 직조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해석을 시도한다. 나아가 중요한 사건 혹은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기약 없는 미래에 상정된 집과의 관계 맺기를 고민함으로써 패러다임의 변화로 요구된, 무한히 변주하는 우리 자신을 살피는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을 기대한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1-10-22 1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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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
지난 9월, 국립국악원 미공개 소장품전이 개막됐다. 국악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 들어서면 두 명의 작곡가 컬렉션을 만나게 된다. 오래 묵은 녹음테이프와 친필 악보가 전시된, 작곡가 백대웅과 이해식의 컬렉션이다.
그들은 같은 해인 1943년에 태어났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학교 국악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같은 방송국에서 피디로 일했다. 그러다 각각 학교로 적을 옮기고 정년까지 후학을 길러내며 연구와 창작 활동으로 전통 음악의 터전을 확장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삶의 궤적만 놓고 보면 참으로 닮은 인생이다.
백대웅의 ‘남도아리랑’
국악과를 졸업하고도 국악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백대웅이 뒤늦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방송국에서 일하며 만정 김소희 명창이 소리하는 모습을 촬영할 때였다. 심청가 한 대목에 그가 마음을 빼앗겼다. 무엇이 마음을 움직였을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명창의 소리를 악보에 옮기기 시작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한 악보를 들고 다시 만정 선생을 찾아갔다. 악보대로 부르는 그의 노래를 듣고 만정 선생은 ‘성음은 호랭이가 싹 물어가 버리고, 길하고 장단은 꼭 맞소.’ 하고 평했다. 명창의 핀잔에 웃음기가 배어있다. 그 인연은 명고수 김명환 선생으로, 또 다른 명인 명창으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대의 명인 명창들을 기록하고 연구하며 그는 본격적으로 국악학자이자 국악 작곡가로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작곡가 백대웅은 원형의 본질을 낱낱이 파헤치고 체화하는 것을 전통의 확장, 혹은 창작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백대웅이 작곡한 곡 중에는 친근한 민요 선율을 차용해 만든 곡들이 많다. 강원도아리랑과 한오백년을 녹여낸 ‘신 관동별곡’, 가야금․대금․해금․장구․징 등 ‘다섯 악기를 위한 몽금포타령’, 가야금 3중주로 연주하는 ‘강강술래 변주곡’ 등 누구나 한 소절쯤 흥얼거릴 수 있는 가락이 악기의 조합에 따라 풍성해지고 담박해진다. 그가 작곡한 음악들은 창작곡이지만 누가 들어도 전통 음악처럼 여겨지고, 또 누구나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국악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남도아리랑’도 그중 하나이다. 수많은 아리랑 중 존재감이 확연한 전라도와 경상도의 대표 아리랑, 진도아리랑과 밀양아리랑을 가져다 ‘남도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두 아리랑의 주선율이 다채로운 빛깔을 품은 한 곡이 되어 가야금에서 피리로, 소금으로, 다시 해금으로 흐른다.
이 곡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의 악단이 함께 세계 최초의 아시아 민족악단을 표방하며 창단한 ‘오케스트라 아시아’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중국 상해오케스트라가 서양 악기로 연주하기도 했다. 이 곡의 여러 가지 버전을 유튜브 채널 ‘정창관의 아리랑’에서 들어볼 수 있다.
국악 관현악 연주 모습(©국립국악원)
이해식의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교편을 잡았던 이해식은 작곡의 꿈을 놓지 않았다. 조금 늦게 국악과에 입학한 그는 작곡 공부에 매진해 여러 차례 공모전에서 입상하기도 하였다. 국악과 양악 모두에서 두각을 보였으나,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방송국에 들어가 10여 년을 프로듀서로 일했다. 그 역시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찾아낸 ‘우리의 소리’를 차곡차곡 비축했다. 이렇게 모은 3,000여 점의 다채로운 시청각 자료들은 그의 방송 프로그램을 살찌우고, 그의 창작 활동에 동력이 되었으며, 그가 정년을 맞이할 즈음에는 후학들을 위한 선물로 국립국악원에 보내졌다.
채록한 민요를 자양분으로 삼았으나 백대웅이 민요의 선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이해식은 리듬에 집중했다. 리듬을 쪼개고 변주하고 반복하며 청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그의 국악 관현악곡 중에는 타악기가 도드라지는 곡들이 흔하다. 타악기와 리듬은 그가 평생 화두로 삼았던 굿, 춤, 바람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가 작곡한 음악의 제목에 ‘춤’ 혹은 ‘바람’이란 단어가 들어간 곡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감상곡으로 실려 있기도 한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에는, 모든 젊은이들이 국악을 쉽게 이해하길 바라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곡이 국악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는 작곡가의 바람이 담겨 있다. 도입부부터 경쾌한 리듬으로 시작해 각 악기가 흥겨움을 더하는 이 곡은 국악방송 누리집에서 동영상으로 감상해볼 수 있다. 2014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작곡가 시리즈의 국립국악관현악단 버전과 2015년 개교 60주년을 맞이한 국립국악고등학교 목멱예술제에서 2학년 학생들이 연주한 영상이 남아 있다.(목멱예술제 영상의 바로 앞 순서는 백대웅의 남도아리랑이다. 지금은 성인이 되었을, 1학년들이 연주한다.)
국악 관현악은 수십여 가지 악기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기 마련인 창작곡에는 관객이 예상치 못한 실험적 요소들이 곁들여지곤 하는데 세계 곳곳의 악기들은 물론, 악기 아닌 것들이 음악의 도구로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작곡가의 상상에서 비롯된 기상천외한 물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재미는, 용감하게 창작 음악 감상에 도전하는 관객에게만 주어지는 덤이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1-10-22 0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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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코로나 때문에 개봉일을 늦춰왔던 ‘007 노 타임 투 다이’(캐리 후쿠나가)가 드디어 지난 달 말 베일을 벗었다. 5편의 시리즈에서 15년이라는 최장기간 동안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아왔던 다니엘 크레이그는 163분이라는 러닝 타임 내내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일반 할리우드 액션 영화들과 큰 차별성이 없다는 이유로 ‘007’ 시리즈만의 감성을 기대했던 팬들은 혹평을 쏟아놓기도 했지만 60년간 유지해왔던 영국발 첩보 영화의 아성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007의 음악은 이제 이 시리즈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내로라하는 당대의 음악 감독들이 저 유명한 007 메인 테마곡을 변주하며 만들어내는 스코어들 외에도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타이틀곡, 영상 디자인은 새로운 007이 개봉할 때 가장 기대되는 것 중 하나다. 시리즈 명성에 걸맞게 존 배리, 폴 매카트니, 루이 암스트롱, 마돈나 등 최고의 뮤지션들이 작곡과 노래에 참여해왔다. 그 중에서도 007 역대 최고 흥행을 기록한 ‘007 스카이폴’(샘 멘데스, 2012)의 타이틀은 최고로 평가받는데, 아델의 걸쭉하면서도 몽환적인 목소리와 영화의 내용을 물, 불 등의 상반된 이미지들과 함께 엮어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007 노 타임 투 타임’의 타이틀곡은 그래미 어워드 5관왕에 빛나는 빌리 아일리시가 맡았는데, 다니엘 크레이그를 보내는 작품이니만큼 어둡고 아련한 느낌이 강조되어 있다. 빌리 아일리시는 이 시리즈 타이틀 트랙을 부른 최연소 가수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배신당한 제임스 본드의 심경을 담은 가사를 깊이 있게 해석해내 OST가 발매되자마자 영국 음원 차트를 휩쓸기도 했다. 영화의 마지막 액션이 섬에서 벌어지는 만큼 바다 심연의 신비스러움과 어두움을 함께 담고 있는 이번 타이틀 영상은 빌리 아일리시의 독특한 음색과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아델의 ‘스카이폴’을 이어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을 007 타이틀곡이 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가난이 우리의 양심까지 갈아먹지 않기를
윤성은의 Pick 무비
‘아버지의 길’
한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이 부당해고를 당했던 전직장을 찾아온다. 당장 밀린 임금을 주지 않으면 들고 온 휘발유를 몸에 붓고 불을 붙이겠다는 여자의 말은 협박보다 절규에 가깝다. 관리자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여자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방금 한 말을 실행한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이 달려들어 큰 화는 면했지만 배고픔 앞에 무너져버린 인간의 존엄성까지 다시 회복시킬 방법은 요원해 보인다. 세르비아 영화, ‘아버지의 길’(감독 스르단 고루보비치)의 첫 신이다.
‘니콜라’(고란 보그단)가 사는 작은 시골 마을에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일용직 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니콜라는 아내의 분신자살 시도로 받은 충격을 달랠 새도 없이 아이들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사회 복지과에서 아이들의 최소 행복 보장권을 내세워 니콜라 부부는 자녀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안된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가난을 빌미로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는 이상한 행정 제도 뒤에는 이것을 악용해 커미션을 가져가는 부패한 공무원들이 있다. 니콜라는 정부에 이의 신청을 하기 위해 300킬로미터나 떨어진 베오그라드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비장한 각오랄 것도 없이 아이들을 지키려는 의지 하나로 망설임 없이 떠난 그의 여정은 예기치 못한 장애들로 험난하기만 하다.
‘아버지의 길’은 먼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전기세조차 낼 수 없는 가장의 무기력함 이면에 그 무엇도 막지 못하는 강한 부성애가 있음을 보여준다. 묵묵히 자기 갈 길만 가는 니콜라의 성격만큼이나 조용하게 진행되는 이 영화가 힘 있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아이들을 찾으려는 아버지의 뚝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길’은 또한, 니콜라의 무모한 사적 여행 가운데 세르비아의 실업 문제를 비롯해 부적절한 행정 체계 및 부도덕한 관료들에 대한 비판을 잘 담고 있다. 제도의 허점과 권력을 이용해 부모 자식을 갈라놓는 파렴치한 이들에게는 어떤 면죄부도 소용이 없어 보인다. 덕분에 관료들의 경직된 태도와 달리 니콜라의 사정을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따뜻하게 다가온다.
‘아버지의 길’의 마지막 신은 전체 서사와 동떨어져 보이지만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의미심장하고 멋지다. 집으로 돌아온 니콜라는 세간살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영영 마을을 떠났다고 여긴 주민들이 조금씩 훔쳐간 것이다. 니콜라는 가가호호를 방문해 그의 물건들을 다시 가져온다. 주민들 또한 순순히 물건을 돌려준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극심한 가난밖에 없을 것이다. 빈곤이 만들어낸 삭막한 풍경들 사이로 인간의 양심만큼은 살아있기를, 세간이 주인을 찾은 것처럼 아이들도 부모에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만드는 작품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1-10-15 0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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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지난달 26일,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지난해 취소됐던 미국 무대 최고의 권위 ‘토니상’이 2년 만에 감격의 막을 올렸다. 그리고 이날 화제가 된 작품은 단연 ‘물랑루즈!’였다. 자그마치 10개의 토니상을 쓸어 담으며 새로운 신화창조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인 CJ ENM은 이 작품의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해 ‘킹키 부츠’에 이어 두 번째 최고 뮤지컬상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물랑루즈!’가 공연되는 뉴욕 맨해튼의 알 허쉬펠드 공연장에 들어서면 감탄이 먼저 터져 나온다. 붉은 조명과 푸른 코끼리, 쉼 없이 돌고 있는 풍차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탓이다. 화려한 의상을 걸친 아름다운 남녀 배우들이 공연장 곳곳을 천천히 거닐며 이국적인 환락가 분위기를 한층 이색적으로 달군다. 히프의 곡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의상을 걸친 야릇한 모습은 정말 그곳이 파리의 클리시 거리라 해도 무색하지 않을 만한 광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무대 한가운데 반짝이고 있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물랑루즈!’다.
영화 ‘물랑루즈!’가 영화가 원작인 뮤지컬-‘무비컬’로 환생했다. 호주 태생의 바즈 루어만이 메가폰을 잡았던 2001년작 빅 스크린용 영화는 니콜 키드만과 이완 맥그리거를 전세계 영화팬들의 연인으로 만들며 글로벌 박스오피스에서 1억 8천만 달러, 우리 돈 2,000억원이 넘는 잭팟을 터트렸다. 그리고 무대용 버전으로 환생한 무비컬 ‘물랑루즈!’는 바로 그 애절하고 가슴시린 사랑 영화를 무대용 콘텐츠로 다시 재연해냈다.
무비컬 ‘물랑루즈!’는 우선 화려한 무대가 압도적이다. 전술했듯이 2층 박스석을 없애고 만든 물랑루즈의 상징인 붉은 풍차나 거대한 푸른 코끼리는 그 모습 그대로 이미 볼거리다.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무대위 세트의 변화도 영화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원래 바즈 루어만은 영화 ‘물랑루즈!’를 구상할 당시 인도의 볼리우드 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대 역시 영화 못지않은 현란한 색채와 이국적인 분위기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별스런 재미도 있다. 뮤지컬 ‘물랑 루즈!’는 ‘무비컬’이자 ‘주크박스 뮤지컬’로서의 이중적인 성격을 모두 지닌 특이한 작품이다. 영화가 원작이니 옛 흥행영화를 무대용 콘텐츠로 다시 활용하는 ‘무비컬’로서의 흥행요인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영화에서 시도됐던 왕년의 인기 음악을 다시 무대로 활용하는 ‘주크박스 뮤지컬’로서의 묘미를 더욱 극대화시켰다. 무대 위 화려한 색채와 볼거리는 바즈 루어만 특유의 영화 속 비주얼을 뮤지컬로 이식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막이 내릴 때까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흥행 팝송들의 선율은 도대체 저 장면에 저 많은 노래들을 담아낼 생각을 어떻게 떠올렸을까 하는 탄성을 내뱉게 한다. 굳이 말하자면 아바의 음악으로 만들어져 전세계적 히트를 기록한 뮤지컬 ‘맘마 미아!’의 보다 영리해진 현대식 버전의 주크박스 뮤지컬이라 평가할 만하다.
덕분에 영화에서 관객들을 웃고 울렸던 노래들 – 엘튼 존의 ‘유어 송’이나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의 주제가인 ‘다이아몬즈 아 어 걸스 베스트 프렌드’, ‘레이디 마말레이드’, ‘컴 왓 메이’ 등의 흥행 넘버들이 무대에서 대형 스피커를 통해 라이브로 불려지는 것은 물론, 시아에서 비욘세, 레이디 가가, 아델, 리한나까지 아우르는 대중음악 히트 넘버들의 연이은 등장은 감히 상상할 수 없던 화려한 팝의 향연을 완성해낸다. 심지어 펀의 ‘위 아 영’이나 폴리스의 ‘록산느’, 마돈나의 ‘머터리얼 걸’을 목 놓아 따라 부르는 관객들의 모습은 여느 팝 콘서트의 열광어린 객석 풍경과 크게 다를 바 없다. 2019년 프리뷰 기간에 뉴욕을 방문해 처음 관극하던 날, 공연장을 나서며 “어떻게 저 많은 노래들의 판권을 확보했을까?”라며 왁자지껄 떠들고 미소 짓는 현지인들에게서 이 작품의 특별함을 여실히 실감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단순히 영화의 스토리를 무대로 옮겨놨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무대는 이미 영화를 본 사람도 다시 즐길 수 있는, 같은 이야기지만 또다시 새로운 OSMU의 흥행 원칙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극작가였던 주인공은 뮤지컬답게 작곡가로 변신했고, 격정적이었던 사악한 공작도 차가운 옴므 파탈로 옷을 갈아입었다. 물랑루즈하면 떠오르는 예술가 뚤루즈 로트랙의 존재감도 꽤나 인상적이다. 16세기 보헤미안이라 불렸던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을 떠올릴 수 있는 적절한 변화와 상상력이 새롭게 가미된 셈이다. 영화나 무대나 똑같은 것은 오직 눈물 떨구게 만드는 엔딩 장면의 감동뿐이다.
많은 무비컬들이 그렇듯, 남녀주인공의 캐스팅에 관한 뒷이야기도 있다. 당연히 처음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완 맥그리거와 니콜 키드먼이 무대에도 등장할까의 여부였다. 실제 두 사람에게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그러나 무대는 결국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스타인 애런 트베이트와 역시 뮤지컬 ‘인 더 하이츠’와 2009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리바이벌 공연에 아니타로 참여해 토니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인기 여배우 카렌 올리보에게 돌아갔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서 피부마져 투명해보였던 니콜 키드만이 열연한 사틴을 남미 출신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가무잡잡한 피부색의 카렌 올리보에게 맡겼다는 파격이다.
피부색과 관계없이 배역을 선정한다는 요즘 브로드웨이 극장가의 컬러 블라인드 오디션이 미친 영향으로, 흑인 ‘유령’이 등장하고, 중국계 ‘빌리’가 무대를 꾸미며, 검은 피부의 ‘신데렐라’가 나오는 파격이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시도된 셈이다. 카렌 올리보가 부르는 ‘스파클링 다이아몬드’나 ‘샹들리에’는 그래서 알고서 들어보면 더 재미있는 이 음반의 쇼스토퍼들이 됐다. 물론 애런 트베이트와 함께 노래하는 ‘유어 송’이나 ‘컴 왓 메이’의 감동도 빼놓을 수 없다.
뮤지컬 ‘물랑 루즈!’는 당분간 뉴욕 관광객들에겐 필수 방문코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CJ ENM이 글로벌 프로듀서로 참여한 덕분에 매출과 수익의 배분은 물론 국내 프로덕션도 내년말 즈음해 발 빠르게 이뤄질 전망이다. 우리 무대에서 주연으로 발탁될 배우들은 누굴까. 이래저래 흥미로운 글로벌 뮤지컬 공연가의 반가운 핫 이슈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대학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1-10-15 0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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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
지난 칼럼에는 다양한 예술가들 중에서도 여성, 장애인, 소수 민족, 성소수자 예술가들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이 사회의 포용성과 다양성을 정립해 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언급했다. 본 칼럼에서는 다양한 계층의 관객을 포용하기 위한 국내·외 예술단체의 기획을 통해 예술이 새롭게 나가야 할 길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국외 사례로 먼저 카네기홀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인 '뮤지컬 커넥션'이 있다. 그 중 자장가 프로젝트는 위탁보육시설, 노숙자 쉼터, 고등학교, 교정시설 거주 중인 부모, 임산부들과 예술가들이 일대일로 팀을 이뤄 자장가를 완성하는 프로그램으로 부모들이 작사, 음악가들이 작곡해 아이를 위한 자장가를 완성한다. 참여 부모들이 음악을 통해 행복감을 느껴 아기에 대한 애정이 건강하게 형성되고 부모와 자녀의 유대감이 강화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국내에서도 2년 전 위성 프로젝트 ‘엄마의 작은 노래’가 진행된 바 있다. 사회참여음악가네트워크, 카네기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함께한 이 프로그램에서는 부모들의 음악적 취향이 반영되어 댄스풍의 자장가, 옹알이 랩 등 자장가의 고정관념을 깬 작품들이 완성되어 참여한 부모들은 물론 참여 음악가들에게도 예술적으로 의미 있는 시도가 되었다.
다음은 이스라엘 필하모니의 'Sulamot' 프로그램이다. 히브리어로 사다리와 음계를 의미하는 Sulamot의 이름에는 음악적 경험을 통해 사회 속에서 성공적인 사다리를 밟아가길 바라는 이스라엘 필하모닉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다.
“사회의 변화를 위한 음악”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운영되는 Sulamot는 음악을 가르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음악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함께 연주하는 시간동안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책임감과 협동심을 키우는 것이 이스라엘 필하모닉이 추구하는 프로그램의 본질이다.
그들의 운영 철칙 중 인상적인 것은 홍보를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오·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사진촬영이 불가하다. 이스라엘 사회의 신념이 듬뿍 반영된 Sulamot는 어린이를 사랑으로 포용하는 자세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음악 교육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아동들의 생활 전반을 지원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실제 사례들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세 번째는 싱가포르 에스플레네이드 공연장의 자페 스펙트럼 아동들을 위한 연극 교육 공연이다, 싱가포르 작가의 창작 동화를 재구성한 연극으로 이 중 일부 회차를 'Playtime! for Sensory Friendly kids'라는 타이틀로 자폐 스펙트럼 아동을 위한 공연으로 재편성했다. 무대와 객석을 일반 공연보다 밝게 하고, 큰 소리에 취약한 아동들을 위한 사운드 레벨 조절, 자유로운 출입을 가능케 한 배려, 소규모 그룹의 관객, 아이들이 놀라거나 당황했을 때 진정할 수 있는 공간을 로비에 따로 만들기 등 공연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상황을 줄이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자폐 스펙트럼 아동들은 공연장에 직접 와서 관람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공연 전체에 깔린 세심한 배려와 즐거웠던 공연 분위기, 성공적인 관람 후기는 모든 아동들이 예술을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 는 가능성을 시사했다.
국내에서도 많은 예술가들이 관객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소수 관객층을 위한 공연들을 지속적으로 기획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많은 공연들이 취소되고 공연예술계 자체가 어려운 이 때 더욱 더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부분이다.
'신나는 예술여행'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추진하는 문화복지 사업으로 지역사회를 찾아가 공연을 하는 국가 지원 사업으로 군부대, 복지관, 정신병동 등 다양한 관객들을 직접 찾아가고 있다. 관람한 몇몇 공연 중에서, 교정시설 수감자들과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의 공연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 중 하나이다.
교정시설에서의 공연은 그나마 모범수들만 접할 수 있었는데 교화를 목적으로 한 연극이라 분위기 자체도 무겁고 분위기도 진지했다. 연극 연출가가 공연 전 날 전화를 걸어와 “기가 많이 뺏기고 힘드실 거예요. 고기 드시고 오세요.”라고 당부했던 것까지 기억이 생생한데, 그만큼 쉬이 접할 수 없는 특별한 공기가 감돈 공연이었다.
열악한 환경의 정신병원의 공연은 다른 의미에서 분위기가 무거워진 공연이었다. 환자들은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어 이렇게나마 공연을 보는 것이 그들 삶의 유일한 낙이라고 관계자는 전했다.
사회에서 잊힌 그들- 특히 교정시설 수감자-을 포용하는 것에 불편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은 사회의 극단에 놓인 사람들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주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사회 전체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특정 계층에만 비교적 편향되어 향유되던 예술이 ‘누구를 위해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는 사회가 현대 예술에 내 준 새로운 숙제이다. 모든 관객층을 포용하는 예술은 어렵지만 다양한 관객을 위한 다양한 형태는 예술계가 질적·양적 모든 차원에서 성장하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소수를 위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이 때, 기존 관객층을 위한 공연이나 기존의 형태를 답습하는 예술의 형태는 비판의 소지도 많아진다. 10년 전만 해도 별탈 없이 넘어갔던 여성에 대한 표현들이 요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소수자가 더 이상 그늘에 가려지지 않는 시대가 된 지금 예술이 사회가 던지는 메시지를 담는 그릇이 되어 다양한 관객층을 포용해 나간다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게 될까.
<필자소개>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1-10-08 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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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표절(剽竊): 다른 사람의 저작물의 일부 또는 전체를 몰래 따다 쓰는 행위.
위조(僞造): 어떤 물건을 속일 목적으로 꾸며 진짜처럼 만듦.
표절과 위조의 정의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이, 이 두 행위는 무척이나 부정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논문 표절이나 위조 화폐와 같은 사건에서 우리는 이 행위들이 사회에 끼치는 큰 해악을 실감하지요. 음악이라는 장르에서도 두 행위는 역시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표절과 위조가 결국에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한 명곡이 있습니다. 바로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의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Requiem, KV 626)입니다. 이 작품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가령, 죽은 자를 위한 미사를 뜻하는 레퀴엠을 작곡하는 과정에서 작곡가 자신이 사망했다는 사실이나 몸이 쇠약해지던 모차르트가 이 레퀴엠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 여겼다는 것, 그리고, 정체를 밝히기 꺼려했던 작품 의뢰자의 존재 등은 이 위대한 작품에 신비로운 아우라를 더해주지요.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 인물의 표절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 시도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름이 알려진 이 인물은 발제크 백작(F. v. Walsegg, 1763-1827). 그는 21세가 채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의 기일에 연주될 레퀴엠을 모차르트에게 의뢰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보면, 보통의 의뢰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독점적으로 소유해 자신의 작품으로 지휘할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음악 애호가이던 그가 종종 행했던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비밀 유지가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 상당한 금액의 지불과 원본 악보를 비밀리에 베끼는 과정이 필수적이었지요. 1791년 7월, 그가 그의 존재를 밝히지 않은 채 모차르트에게 비밀스럽게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했을 때에도, 작곡료의 절반을 미리 지불하였습니다. 또, 원본 이외의 악보를 만들지 않기를 원했다고 하지요.
모차르트는 발제크 백작의 의뢰를 받아들이지만, 당장은 두 개의 오페라, 즉 <마술피리>와 <황제 티토의 자비>의 작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10월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레퀴엠의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하지만, 12월 5일에 너무도 때이른 죽음을 맞이하지요. 그에게서 레퀴엠 원본 악보를 받으려던 발제크 백작의 계획은 당연히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사실, 모차르트의 죽음은 발제크 백작에게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이미 레퀴엠 작곡료의 절반을 받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니,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C. Mozart, 1762-1842)는 그 선금을 돌려주어야 했지만, 당시 모차르트 집안의 가계 상황은 좋지 못했고 콘스탄체는 어떻게든 레퀴엠의 작곡을 마무리짓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 아이블러(J. Eybler, 1765-1846)에게 레퀴엠의 완성을 부탁하였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하였고, 결국 그 작업은 쥐스마이어(F. X. Süssmayer, 1766-1803)에게 맡겨지지요.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에 레퀴엠을 의논한 인물이었음에도 의외로 이 작품을 완성시킬 첫번째 인물로 선택되지 않았는데, 이는 모차르트가 생전에 아이블러를 더 높이 평가했고, 결정적으로 쥐스마이어가 모차르트와는 껄끄러운 사이였던 살리에리(A. Salieri, 1750-1825)의 편에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콘스탄체가 그런 쥐스마이어에게 부탁했다는 사실은 레퀴엠의 완성이 절박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요. 결국,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3개월이 지난 1792년 2월, 쥐스마이어에 의해 레퀴엠은 완성됩니다.
모차르트가 완성한 척 발제크 백작에게 건네진 악보에는 모차르트가 모든 파트를 온전히 완성했던 레퀴엠의 첫 부분과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작품의 다른 부분 등이 뒤섞인 채였습니다. 필적이 모차르트와 유사했던 쥐스마이어는 악보의 첫 페이지에 모차르트의 서명을 위조했는데, 시간을 1792년으로 적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 전해에 사망하였으므로, 이 서명이 위조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알 수 있는데, 모차르트가 사망한 빈에서 5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살았던 발제크 백작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1793년 12월에 자신이 작곡가인 것처럼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지휘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이미 빈에서는 모차르트의 장례식에서 레퀴엠의 일부가, 그리고 1793년 1월에 전체 작품이 연주되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발제크 백작은 모차르트의 죽음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발제크 백작에게 전해진 레퀴엠 악보의 첫 페이지. 이 부분의 악보는 모차르트가 직접 기입하였지만, 오른쪽 상단에 쥐스마이어가 위조한 모차르트의 서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출처: Ö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
발제크 백작의 바램과는 달리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그에게 건네진 악보 외에도 다른 악보가 존재하였고, 아마도 백작이 레퀴엠의 악보를 전적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계약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을 콘스탄체가 사본을 출판사에 보내는 등 백작의 계획은 모차르트의 죽음으로 인해 다 틀어지게 됩니다. 설사 악보가 그에게 건내진 것 하나만 존재했더라도,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갔으니, 그가 원했던 비밀은 어차피 지켜질 수 없었겠지요.
발제크 백작의 모차르트 레퀴엠에 대한 표절 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만일 그의 레퀴엠 제의가 없었더라면, 또, 그가 그의 비밀 계약을 위해 작곡료의 절반을 미리 지급하지 않았더라면, 이 위대한 작품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비록 표절을 시도했지만, 레퀴엠의 작곡을 다른 이가 아닌 모차르트에게 의뢰했던 발제크의 선택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의 탁월한 선택 덕분에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통해 위로와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추천영상: 모차르트의 레퀴엠 작곡은 쥐스마이어가 마무리지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모차르트가 그의 레퀴엠을 직접 완성하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의문은 계속해서 존재하였지요. 그래서, 쥐스마이어의 판본을 보완 및 수정하거나, 더 나아가 그의 흔적을 될 수 있는 한 지워버리려는 시도도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쥐스마이어의 판본은 여전히 가장 널리 연주되는 판본이지요. 추천영상 역시 쥐스마이어의 판본을 사용하고 있는 영상으로,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이었던 1991년, 가디너가 지휘한 공연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jiMQbLheLE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1-10-08 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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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영원불멸의 신화’ 아더왕 전설이 또 한 번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6세기 영국, 혼란했던 시대를 정리할 단 한 명의 영웅은 아무나 주인이 될 수 없다던 보검 ‘엑스칼리버’를 거머쥐고 연이어 승리의 깃발을 올렸다. 영웅이란 존재는 당시 사람들에게 빛이자 희망이었다. 운명처럼 만난 기네비어 이야기나 랜슬럿을 비롯한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나눈 무용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진 이 설화는 서양 판타지 문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하며 끝없는 생명력을 입증했다. 이번에 소개할 뮤지컬 ‘엑스칼리버’ 역시 그 맥을 잇는다.
<사진제공 : EMK>뮤지컬 ‘엑스칼리버’가 지난 8월 17일 재연으로 돌아왔다. 2019년 초연 당시 새로운 대작의 등장을 알리며 압도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뮤지컬 ‘엑스칼리버’는 올 시즌을 맞아 탄탄히 재정비를 마쳤다. 덕분에 마치 새로운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꽤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우선 스토리를 강화해 전체적인 흐름이 훨씬 부드럽고 촘촘하게 전개될 뿐만 아니라, 각 캐릭터가 갖는 성격과 사연도 더 뚜렷해졌다. 상황에 따른 인물들의 감정 변화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여기에 다섯 가지 넘버를 추가하고 기존 넘버들도 다듬으면서 본디 작품이 가지고 있던 웅장함은 살리고 섬세함을 더했다. 그만큼 곳곳에 애정 가득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작품은 오는 11월 7일까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전설의 영웅 아더 역에는 뮤지컬 배우 김준수, 카이, 서은광, 도겸이 캐스팅됐다. 그리고 이지훈·에녹·강태을이 랜슬럿 역을, 신영숙·장은아가 모르가나 역을 맡아 기대를 모은다. 이 밖에도 민영기·손준호(멀린 역), 최서연·이봄소리(기네비어 역), 이상준(울프스탄 역), 이종문·홍경수(엑터 역)가 가세하며 에너지 가득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천지개벽을 알리는 듯한 북소리가 들리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더 펜드라곤왕이 일으켰던 전쟁은 모두를 끔찍한 지옥으로 몰았다. 무자비한 영토싸움 끝에 갈기갈기 찢긴 나라는 수많은 백성의 희생을 대가로 했다. 하지만 잔혹했던 왕이 품은 탐욕은 단지 영토를 빼앗는 데서만 그치지 않았다. 결국 그릇된 욕망으로 탄생한 아들 아더가 뒤늦게나마 아버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바위산에 꽂힌 엑스칼리버를 뽑아 들어야 하는 운명을 지게 된다.
어려서부터 아더와 형제처럼 자라온 친구 랜슬럿과 용맹한 여전사 기네비어도 새로운 왕의 곁을 지키며 눈앞에 닥친 위험을 막아내려 한다. 그 와중에 호시탐탐 침략 기회를 엿보던 색슨족과 아더의 이복 누이 모르가나가 협력해 온갖 술수로 그들을 압박하고, 이 모든 상황을 예감한 마법사 멀린은 왕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슴 아픈 일들을 뒤로 한 채 그가 혼자 걸어야 할 길은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러웠지만,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었기에 더 안쓰럽다. 뮤지컬 ‘엑스칼리버’는 그런 아더왕의 여정을 쭉 지켜본 관객들에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이처럼 흥미로운 모험담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무대로 인해 더욱 빛난다. 거대 규모를 자랑하는 무대 장치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 만큼 실감 나는 연출과 어우러져 극적인 효과를 배가한다. 특히 무서운 기세로 압박하던 색슨족의 진격과 쏟아지는 빗속에서 벌어진 최후 전투는 보기 드문 명장면이다.
<사진제공 : EMK>
등장인물을 색으로 표현한 부분도 재미있다. 모든 캐릭터는 인물이 처한 상황 또는 심리 변화에 따라 의상 색깔을 달리하거나 다양한 색의 조명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존재감을 분명히 한다. 아더의 경우 초반에는 순수하면서도 열정 가득한 청년다운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밝은색 의상을 입지만, 극 중반부터 검은색 의상을 착용하며 인물이 처한 상황의 무게와 분노를 드러낸다. 또 마법사이자 예언가인 멀린은 신비로운 보라색,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야만 했던 흑마법사 모르가나는 초록색, 그리고 잔인무도하면서도 공격적인 색슨족 수장 울프스탄은 빨간색 조명을 써서 각 캐릭터가 가진 이미지를 부각했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각인된 감상은 히트메이커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만든 넘버들과 어우러져 작품이 가진 신비로운 분위기에 흠뻑 젖어 들게 만든다. 그중에서도 아더의 대표 넘버 ‘왕이 된다는 것’과 신곡인 ‘결코 질 수 없는 싸움’, 랜슬럿이 부른 ‘없는 사랑’, 기네비어의 진심이 잘 드러난 ‘붙잡으려 해도’는 특별히 추천하고 싶은 넘버들이다.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지만 미숙한 부분도 많았던 한 청년은 온갖 어려움과 맞선 끝에 결국 진정한 왕으로 거듭났다. 사랑과 우정, 음모와 배신이 얽힌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멋지게 성장한 아더가 더욱더 대단하게 여겨진 까닭은 어쩌면 그 모습이 지금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 당당한 자태로 우뚝 선 그는 오늘날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 평범한 영웅들의 모습 그 자체다. 뮤지컬 ‘엑스칼리버’가 전한 용기와 희망은 많은 이들에게 따스한 격려로 남아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1-10-01 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