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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0> 이매창(李梅窓) <제5話>
‘이화우(梨花雨) 흩날리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 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천고의 절창(絶唱)이다. 매창이 유희경과 헤어진 후 지은 ≪이화우≫다. 그녀의 시비에 실려 있다.
매창이 훌쩍 이승을 떠난 지 400여년이 지났다. 지금 부안은 매창의 신드롬에 걸렸다. 지방 특화다. 매창에겐 신화같은 애기들이 신비롭게 얽혀있다. 16세기 왕조시대에 지방관리인 현감에게 장래 최고 여류 시인될 천재소녀가 있었다. 매창이다. 현감은 소녀의 보호자이자 사내였었다.
지방자치가 활성화됨으로 각 자치단체마다 특화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스토리텔링이 필요해서다. 역사와 문화예술의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부안엔 영원한 연인 매창이 있다. 문인과 풍류객들이 줄을 섰었고 오늘날에도 작가와 연구를 위한 교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 넘는 문화예술 창작과 스토리텔링의 메카(Mecca)다. 매창은 서당에 다닐 때에 향금(香今 )이란 이름으로 다녔다. 당시는 남존여비사상의 사회였으므로 남자로 변장하고 공부하기 위함이였으리라... 아무튼 학동(學童)들이 ≪동문선습≫·≪명심보감≫ 등을 읽고 있을 때 매창은 ≪논어≫와 ≪맹자≫를 읽었다고 한다.
천재소녀는 역시 달랐다. ‘생각 끝에 한숨이요 한숨 끝에 눈물이라/ 눈물로 지어 내내 들어보소 단장사를/ 이리하여 날 속이고 저리하여 날 속이고/ 속이기는 좋거니와 속는 이는 어떠하리...’ 부안 현감의 뜻에 따라 기적에 올리고 수청을 들었다.
현감은 매창을 극진히 사랑했으나 승진하여 한양으로 올라갔다. 사내는 현감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마을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워주었다. 매창은 현감에게 순정을 바친 첫 사내였다. 위의 시는 어느 휘영청 달 밝은 밤에 매창이 현감의 송덕비 앞에서 불렀다는 ≪단장사≫다. 당시 그녀는 10대 후반의 소녀 때다.
사실 사내는 예나 지금이나 그러하지 않았나? 더욱이 왕조시대에 기생을 노류장화나 말하는 꽃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시대다. 매창을 남장을 시켜 가면서 서당에 보내 교육을 시켰다. 매창의 아버지는 아전(衙前)이었다. 비록 지방 말단 벼슬을 하고 있으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딸에게 글공부를 하도록 하였다.
하급관리로서 현감 등의 거드름이 벨이 꼴리고 눈에 몹시 거슬렸을 게다. 아낌없이 사랑을 듬뿍 주었던 아버지는 매창이 10살 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잃은 매창의 삶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다. 천애고아로 똑똑한 매창이 현감의 눈에 번쩍 띄었을 게다.
매창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하여 기적에 들게 하고 그만 동정(童貞)을 빼앗고 말았다. 연민의 정이 늑대 심보로 돌변했으리라...
그 후 매창은 유희경을 만났다. 당시 전라도 일대 현감이었던 이귀(李貴·1557~1633) 등이 호시탐탐 그녀 품기를 목마르게 원했으나 매창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매창은 자신의 신분을 알고 격에 맞지않는 사랑은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천민출신 시인 유희경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들은 한양과 부안이란 거리감이 있었으나 인향만리(人香萬里)의 소문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처지였다. 첫날부터 그들은 헤어졌던 연인이 오랜만에 재회한 듯 질펀한 운우지정을 마음껏 즐겼다. “너의 거문고 솜씨가 신기(神技)에 이르렀다.” “부끄럽사옵니다. 소녀 아직 배우고 있는 중이옵니다.” 매창은 소리를 하면서 춤을 추었다.
유희경은 너울너울 나비처럼 춤추는 매창에게 넋을 빼앗겼다. 왜 진작 만나지 못했을까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들수록 매창의 몸을 더욱 탐닉하였다. 이처럼 매창과 유희경은 첫 만남부터 금슬 좋은 부부 같았으리라...
그들의 만남은 늘 짧은 만남에 긴 여운을 남겼다. 시로 서로 알게 되어 만나면 자연스럽게 시가 나왔다. 내로라하는 한양의 사대부들이 그녀의 사랑과 시를 목메도록 갈망했으나 유희경을 선택했다. 천민의 신분 처지에 시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의 시름을 카타르시스 할 수 있는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맑은 눈 하얀 이에 푸른 눈썹 계랑아/ 홀연히 뜬 구름 따라 너의 간 곳 아득하다/ 꽃다운 넋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그 누군가 너의 옥골 고향 땅에 묻어주리/ 객지의 초상이라 문상객이 다시 없고/ 오로지 경대 남아 옛 향기 그윽하다/ 정미년간 다행히도 서로 만나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눈물 옷을 함빡 적시누나...’ 매창의 죽음 소식을 듣고 유희경이 지은 ≪차임정자도옥진운≫(次任正字悼玉眞韻)이다.
그들이 첫 만남은 유희경이 불혹(不惑)을 갓 넘긴 나이였으며 두 번째 해후는 환갑을 살짝 넘긴 나이때다. 매창의 매력에 빠져 금녀(禁女)의 신조를 스스로 깨고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 유희경은 풍류객으로 숱한 여인을 만났으나 소위 동정(童貞)을 지켰다.
그런데 그 동정을 천재 기녀 매창이 차지하였다. 사실 매창은 유희경이 첫 남자가 아니다. 그녀를 기적에 올리게 하고 수청을 들게 한 현감이 첫 남자였었다. 그때 쓴 시가 ≪단장사≫다.
400년 전의 뜨거운 남녀상렬지사(男女相悅之事)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 윈윈한 효과가 나타났다. 대시인과 천재 기생의 사랑은 만인의 질투를 넘어 그들이 생산해 낸 문화예술과 풍류에 매료되었으리라...
유희경은 풍월향도로 시작하여 삼청시사(三淸詩社)가 되어 평민과 천민이 주류가 되는 소위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대부가 되었다. 주류사회에서 중인이하 계층이 주역의 문학이 태동하는 메카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매창은 조선의 여류문학이 탄생하는데 황진이·김부용(金芙蓉·1820~1869)등과 한 축을 형성하였다.
2016-07-06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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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9> 이매창(李梅窓) <제4話>
노류장화(路柳墻花)라 했다. 기생을 지칭하는 사자성어다. 길가에 핀 아름다운 꽃이니 아무나 꺾을 수 있다는 의미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후기 사회 풍속도다. 남존여비에 남녀칠세부동석의나라에 기생이란 꽃이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었으니 사대부들은 꽃을 골라 욕심껏 꺾을 수 있었으리라...
양반의 나라에 이중성이다. 일곱 살만 되면 같은 자리에 앉으면 안 되는 나라에서 어떻게 아들 딸 낳아 옹기종기 행복한 가정을 꾸렸을까? 억누르면 더 튀고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다.
길가에 주인 없는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데 슬쩍 꺾어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예쁜 여인이 있는데 그냥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스쳐 지나간 사내가 있다면 그 남정네를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랬다. 조선후기 사회에 이매창·이옥봉(1552~1592)·계월향·황진이(1520~1560) 등과 같은 걸출한 기생여류문인이 탄생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곳엔 자연스런 현상으로 삼욕(三欲:식욕·성욕·수면욕)이 꿈틀댄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선 성욕은 외견상으론 금기시 되었다. 밤이면 밤마다 질펀하게 욕망을 불태우면서도 기생집을 나서면 시치미를 뚝 떼었다. 이중성 사회다. 그런 사회 흐름이 조선이었으며 후기에는 그 상황이 더욱 심하였다.
매창이 그런 시대에서 꽃피워진 천재 기생 여류문인이다. ‘배꽃 눈부시게 피고 두견새도 우는 밤/ 뜰에 가득 달빛어려 더욱 서러워라// 꿈에 만나려도 잠마저 오지 않고/ 일어나 매화핀 창가에 기대니 새벽닭이 울어라// 대숲엔 봄이 깊고 날 밝기도 멀었는데/ 사람도 없는 뜨락엔 꽃잎만 흩날려라// 거문고 빗겨 안고 강남 가신 님 노래를 뜯으니/ 끝없는 시름으로 한 편의 시를 이루었어라... ’ ≪규중에서 서러워하네≫다.
매창이 교우한 사내는 유희경 외에도 이귀(李貴·1557~1633)·허균(許筠·1569~1618)등도 있었다. 하지만 뼈가 녹는 운우지정을 만족시켰던 남정네는 유희경뿐이었을 것이다.
이 시는 매창이 유희경을 학수고대 밤마다 기다렸을 심사다. 하지만 유희경은 한양에 올라간 후 풍월향도(風月香徒)에 심취해 있다. 침류대(枕流臺)에는 서출과 천민출신 풍류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신분을 뛰어넘는 교류장으로 사대부들도 있었다.
이수광(李晬光·1563~1628)·신흠(申欽·1566~1628)·임숙영(任叔英·1576~1623)·이정구(李廷龜·1564~1635)·권필(權韠·1569~1612)등 장안에서 뜨르르 하는 사대부들과 문필가들이 참가하여 시(詩會)를 더욱 빛냈다. 부안에서 매창과 황홀한 사랑을 만끽하고 한양으로 올라온 유희경은 풍월향도들과 어울려 신선놀음 같은 풍류에 젖었다.
한편 부안의 매창은 하루하루를 여삼추 같이 보내면서 유희경이 와주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럴 즈음 어느 가을 저녁 무렵이다. 허균이 찾아왔다. 매창이 네 살 연하다. 사랑을 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딱 맞는 짝이다.
하지만 그들은 형이하학 쾌락의 파트너가 아니고 형이상학의 연리지(連理枝)다. “허허허! 친구... 이 좋은 날씨에 집에만 있으면 어떻하나! 어서 나갈 채비를 하소.... 나귀가 대기하고 있소이다.” 그들의 행동에 거침이 없다.
금슬 좋은 부부같이 그들은 변산의 명소인 채석강·적벽강·내소사·개암사·직소폭포 등으로 산책길에 나섰다. 매창은 나귀에 올랐고 허균은 종자(從者·따라 다니는 사람)가 되었다. 점심도 거른 채 주마간산 식으로 직소폭포와 적벽강 등을 구경하고 집으로 왔을 때는 땅거미가 추녀 밑에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피곤하시죠? 사대부 어른...” 깍듯한 예의다. “아니오. 모처럼 빼어난 산천경개를 봤더니 가슴이 펑 뚫리는 기분일세! 이제 술이나 한잔하면 금상첨화일세....” “그렇게 하세요! 오늘 저녁엔 소녀가 손수 빚은 매창주(梅窓酒)를 올리고 거문고와 소리로 분위기를 띄워 드리겠습니다.!” 허균이 매창의 꾀꼬리 같은 음성에 호랑나비의 날갯짓 모양의 춤과 거문고 선율에 넋을 빼앗겼다. “과연 매창이로다!” 춤과 소리가 끝날 때마다 무릎을 치며 탄성을 연발했다.
1601년 7월 23일 밤이다. 허균이 전운판관(轉運判官·양곡을 한양으로 옮기는 직책)으로 부안에 내려온 때다. 매창은 허균의 방에 질녀에게 잠자리를 양보했다.
먼동이 트자 허균은 매창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공무길에 올랐다. 천재 허균은 그날 이후 평생도반(道作·사상을 동행하는 벗)으로 매창을 생각했다. 허균만이 매창을 아끼지 않았다. 시조시인·국문학자 이병기(李秉岐·1891~1968)는 매창을 이렇게 읊었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분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 않는다//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빗겨들고/ 등아래 홀로 앉아 그 누구를 생각하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라삼상(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는지/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매창뜸≫이다.
매창은 기녀의 몸으로 한 사내를 위해 목숨처럼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다. 유희경은 매창과 꿀맛 같은 사랑을 나눈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의병을 모아 전선에 나갔다. 혁혁한 전공을 올려 면천(免賤·천민신분을 벗어남)하여 사대부들과 더욱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유희경은 당시 조선사회에서 비주류(주류·사대부)였으나 풍류객으로 높은 유명세로 주류사회에서도 존경받는 대시인 이였었다. 때문에 매창도 촌은을 위해 정절을 지켰으리라...
풍월향도는 유희경이 좌장(座長)이었다. 풍월향도는 삼청시사(三淸詩社)로 이어져 중인·평민 문학인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시발이 되었다. 어쩌면 유희경이 면천되어 당대에 걸출한 사대부로 제2인생을 살게 된 것도 매창의 숭고한 사랑에 보답하려는 대시인의 지조(志操)였을 것이다.
2016-06-29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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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8> 이매창(李梅窓) <제3話>
풍류객들이 찾지 않는 기생집은 무덤과 같다. 가뭄에 콩나듯 찾아든 사내는 기인(奇人)이나 천출이 대부분이다. 최근의 매창집이 그러하다. 소년전홍(少年前紅·소년과 연상녀의 밀회)의 애숭이가 찾아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매창은 자존심이 상해 안절부절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삼십을 넘긴 매창이지만 아직 난숙한 여자의 절정기의 아름다움이 몸 구석구석에 여전히 남았다. 그런 매창의 은근한 아름다움을 어찌 알고 찾아드는 남정네도 있었다. 그녀는 그런 사내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취한 손님이 명주 저고리 옷자락을 붙잡네/ 손길 따라 명주 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네/ 명주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임이 주신 온정까지도 찢어질까 두려울 뿐이네’ ≪취한 손님에게≫다.
유희경과 꽃잠을 자고 난 후 매창은 수절을 한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매창의 수절 소식은 한양에 까지 갔다. 그런 소문을 유희경만 모를 뿐 풍류객들에겐 공개된 비밀이다. 촌은은 매창을 16년 만에 10일 동안의 꿀 같은 사랑을 나눈 후 한양 생활에 빠져있다.
지난번 16년만의 부안행은 공무가 있어 내려갔던 길에 매창을 극적으로 해우했다. 그 후론 일부러 내려가기란 너무 먼 길이다. 사랑이 식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교통이 워낙 불편하여 한번 가려면 열일 제쳐놓고 가야하는 풍류객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한 길이 아니다.
유희경은 매창을 만나기전엔 독신남이었다. 풍류는 즐겼으나 여자는 탐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순진한 사내였다. 기생한테 동정(童貞)을 떼였던 것이다. 사실 촌은은 풍류객 이전에 장례식 의식에 특히 정통하여 나라의 큰 장례나 사대부집 장례식에 불려다녀 항상 바쁜 몸이다.
하지만 매창은 다르다. 20대에 처음만나 기생의 순정을 바친 후 16년 후인 30대 후반에 극적으로 해후하여 속깊은 사랑을 나눈 후 매창을 수절을 하고 있다. 그녀의 수절 소식은 날이 갈수록 꽃향기처럼 바람을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경계를 허물며 퍼져나갔다.
이젠 한양의 풍류객 사회뿐만이 아니라 돈 잘버는 사회인 중촌(中村·청계천 중심 역관·의관 등 마을)과 사대부들의 마을인 북촌(北村)에까지 매창의 수절소문이 들어갔다.
매창은 거의 매일 독수공방에 거문고와 벗하고 있다. 10살 안팎의 동기(童妓)는 말벗이 되어주지 못했다. 시와 거문고가 유일한 벗이다. 그녀는 현실에선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꿈에서라도 만나게 되길 간절히 희망했으리라... ‘봄이 왔다지만 님은 먼 곳에 계셔/ 경치를 보면서도 마음 가누기 어렵다오/ 짝 잃은 채 아침 화장을 마치고/ 거문고를 뜯으며 달 아래서 운다오/ 바라보는 꽃에도 새 설움이 일고/ 제비 우는 소리에 옛님 생각 솟으니/ 밤마다 님 그리는 꿈만 꾸다가/ 오경 알리는 물시계 소리에 놀라 깬다오...’ ≪옛님을 그리며≫다.
그러면 한양에 있는 유희경의 속내는 어떠하였을까? 남녀의 정이란 이심전심이다. 1607년 헤어진지 16년 만에 극적으로 해우하여 뼈까지 녹일 농염한 사랑을 10일 동안 일장춘몽처럼 지낸 후 몸은 한양에 있어도 마음은 부안의 매창을 맴돌고 있었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한양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나무에 비 뿌릴 때 애가 끊겨라...’ ≪회계랑≫이다. 하지만 마음처럼 달려가긴 너무나 멀고 험난한 길이다.
지금 같으면 한 걸음에 달려가 뼈를 녹일 질펀한 사랑을 했을 터다. 매창의 마음은 더 탔다. 기생이라 하지만 정조를 바친 유희경을 위해 수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귀에 돈 보따리를 싣고 와 사랑을 구걸하는 사내들이 수도 없이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기생 주제에 무슨 수절이냐고 주위에선 코웃음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쑥덕공론에 흔들릴 매창이 아니었다. 그녀는 육체와 정신 즉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의 구분이 분명하였다. 살을 섞는 사랑은 유희경과 하고 정신적인 소위 플라토닉 사랑은 허균(許筠·1569~1618)과 즐겼다. 그런 그녀에게 눈에 차지 않는 사내들이 돈을 싸들고 와 목을 매고 구애를 한들 치마끈을 풀고 속곳을 벗을 리가 없다.
매창은 비몽사몽에 유희경과 대화를 나누었다. “소첩을 언제 한양으로 데려가시렵니까? 소첩을 한양에만 데려다 주시면 당신이 살고 있는 하늘만 바라보고 살 것입니다. 당신이 집에 찾아오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랬다. 그렇게 매창은 유희경이 살고 있는 한양에 오고 싶어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인향만리(人香萬里)라 했으나 한양과 부안은 너무 먼 거리였다. 그녀는 거의 몽유병 환자처럼 행동하기까지 하였다. 유희경을 향한 상사병(相思病)이 였을까? 아무튼 매창은 뭇사내들이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라고 애걸복걸했어도 오직 몸은 촌은을 향해 일편단심이었으며 영혼은 허균을 태양을 향한 해바라기처럼 살아갔다.
그렇게 38년이란 겨우 한 세대를 조금 넘게 살다갔어도 여류문학에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었으며 세상 사내들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도 살아있는 연인처럼 품고 싶어 아쉬워하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빈 방에 외로운 병든 이 몸/외롭고 굶주린 인생 사십이로다/ 묻거니 인생살이 몇 년인가/ 수건 마를 날 없는 마음속 회포여...’ ≪가을에 병들어≫(病中秋思)다. 매창은 천식에 시달렸다.
매창의 마음속에 유희경과 허균, 그리고 백대봉도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으나 정작 그녀가 필요로 할 때 그들은 그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특히 유희경은 한양 침류대(枕流臺)에서 풍월향도(風月香徒·중인·평민 문학동인) 지인들과 세월을 낚고 있으나 매창은 부안에서 한양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평생 한번 운다는 가시나무새 모양 목이 터져라 망부송(望夫頌)을 불렀다. 그러나 망부송에 대한 메아리는 오지 않았다.
2016-06-22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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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7> 이매창(李梅窓) <제2話>
신동은 달랐다. 매창의 10살 때 시(詩)다. ‘걸어서 백운사에 오르니/ 절이 흰 구름 사이에 있네/ 스님이여 흰 구름을 쓸지마소/ 마음은 흰 구름과 함께 한가롭소...’ ≪백운사≫다. 이 시를 어찌 10살짜리 소녀의 시로 볼 수 있을까?
매창(梅窓·1573~1610)은 전북 부안현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서녀(庶女)로 출생했다. 그녀는 천재소녀답게 이름도 다양했으며 자(字) 또한 여러 개였다. 섬초(蟾初)라는 초호(初號)까지 가졌으니 매창이 비록 기녀였으나 당시 유명세를 짐작할 만하다. 매창은 시재(詩材)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가무(歌舞)·현금(玄琴) 등에도 특출났다. 어머니가 관기(官妓)로 추정됐으니 모전여전(母傳女傳)이 아니였을까?
부안의 매창집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1591년 어느 봄날이다. 풍류객 유희경이 남도 유람길에 나섰다. 촌은은 매창의 소문을 듣고 부안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녀의 유명세는 서울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북쪽엔 평양의 황진이(黃眞伊)이고 남쪽에는 부안의 매창이다.
풍류객 유희경이 남쪽의 부안 매창을 먼저 찾아 나섰다. 명월(明月·황진이 妓名)보다 꽃에 나비가 먼저 날아가는 것이다. 달은 하늘 높이 떠 있으니 품기가 쉽지가 않을 터이니 땅에서 매화가 화려하게 피어 그 향기가 서울에까지 날아들 정도이니 얼마나 곱고 아름다울까? 유희경이 그 곱고 아름다운 미녀를 확인하고 싶어 지금 훠이훠이 달려가고 있다.
매창도 마침 곱게 화장을 하고 화장대 앞에서 앞뒤 몸매를 추스르고 있었다. 곱고 예쁘다. 정원에 활짝 핀 매화보다 화려하고 아름답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매창이 정원으로 나왔다. 때마침 호랑나비 한 쌍이 매화꽃을 맴돌고 있었다.
이때다. “여기가 매창의 집 맞느냐?” 큰 목소리로 말을 하고 사립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유희경이다. “댁은 뉘신데 남의 집에 주인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들어오시는지요?” 여차하면 내쫒을 기세다.
“기생집에 손님이 오면 반갑게 맞을 것이지 네 태도가 무례하구나! 들어가서 매창이 나오라 하여라!” “내가 매창인데 선비께서는 유희경 사대부이신지 아니면 백대봉 선비이신지요?” 둘은 한 치도 물러설 태세가 아니다.
“네가 어떻게 유희경과 백대봉을 알고 있느냐?” “한양선비께서 이 부안에 있는 매창을 알고 찾아오셨는데 어찌 한양에 계신 풍류객 유희경 어른과 백대봉 어른을 모르겠습니까?” 유희경이 기가 찼다. “내가 유희경이다. 너의 명성이 한양에까지 자자하여 내가 훠이훠이 달려왔느니라...” 말을 마친 유희경이 매창을 덮석 안아 방으로 들어갔다.
방금 화장을 마친 매창의 모습은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 같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욕심을 부리는 사내 옥경(玉莖)은 벌써 꿈틀대기 시작했다. 눈이 없는 그놈은 성질대로 미녀를 보자 욕심부터 채우는 동물적 생리를 잃지 않았다.
매창의 집엔 술상이 항상 준비되었다. 사실 그들은 얼굴을 맞대긴 처음이나 이름으론 익숙한 구면이다. “나는 너를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느니라!” 술상을 갖다놓은 매창을 향해 유희경이 먼저 입을 떼었다. “소녀도 선비님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사옵니다. 오늘 같은 날이 오길 학수고대하여 왔습니다.” 둘은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말이 척척 맞게 맞장구를 쳤다.
20세 여인과 48세 사내의 동물적 본능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술상 앞의 풍경이다.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글재주 노래솜씨 한양에까지 울렸어라/ 오늘에 사 참 모습을 대하고 보니/ 천상의 선녀가 하강했나 의심되네 하여라...’ 유희경이 매창을 보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 ≪증계랑≫(贈癸娘)이다.
유희경의 수창(酬唱)이 끝나자 밀릴 매창이 아니다. ‘제게는 오래된 쟁(箏)이 있습니다./ 한번 연주하면 백가지 감회가 일지요/ 세상 사람들이 이 곡조를 느끼는 이 없었는데/ 멀리오신 임에게는 제 노래와 음악이 아주 잘 어울립니다.’ 매창의 ≪탄금≫(彈琴)이다.
첫 만남의 남녀사이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 수창일까? “유선비님! 이 술은 청감주(淸 甘酒)라 하옵니다. 독하지 않아 소녀가 즐기며 손님들에게 권하는 명주입니다.” 유희경은 빨리 취해 아까부터 꿈틀대던 옥경을 휘두르며 운우지정을 즐기려는 욕심에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대주가에게 청감주는 물이나 다름없다. 유희경이 술을 마시고 매창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비가 짝을 희롱할 때 너울너울 춤을 추듯 춤을 추었다. 매창의 춤은 옥황상제 앞에서 선녀들이 추는 춤 같이 곱고 우아하다. 그녀의 비밀병기다.
매창의 춤과 노래, 그리고 잠자리가 삼색(色) 소위 삼호(三好)작전이다. 그 삼호에 안 넘어가는 사내는 조선 천지엔 없다. 희끗희끗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매창의 배꽃 같은 속살에 풍류객 유희경은 어느새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참다못한 유희경이 “춤은 그만 추고 술이나 더 내오너라!”라고 벼락 치듯 소리쳤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매창은 빙그레 웃고는 잠시 춤을 멈추며 벽장에서 술병을 꺼내왔다. “이 술은 소녀가 직접 담은 매창주입니다. 매우 독해 아무나 드리지 않는데 유선비님께 특별히 올립니다.” 녹색 병에서 정화수같이 투명한 술이 따라져 나와 대나무가 그려져 있는 백자(白咨)술잔에 고이자 매창이 섬섬옥수로 매화꽃을 띄웠다.
목이 타는 듯이 독한 술이다. 천장이 빙빙 돌고 남심이 날뛰어 더는 참을 수가 없다. 매창도 촌은의 마음을 읽고 술상을 치웠다. 마음뿐이 아닌 몸까지 연리지(連理枝)가 되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천둥번개 치는 소리가 집이 떠나갈 듯 요란하다. 유희경의 요란한 몸짓에 벽에 세워 놓은 거문고가 나뭇등걸처럼 넘어져 등에 떨어졌다. “으악” 소리와 함께 촌은은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운우지정은 중단되지 않았다. 촌은은 열흘간의 남도여행은 매창의 집에서 남가일몽처럼 끝이 났다. 그들은 매화꽃이 아침 햇살에 유난히 아름답게 빛나는 아침에 헤어졌다.
아침에 헤어져 해가 떨어지면 저녁에 다시 만날 수 있는 부부모양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며 이별을 했다. 그 이별이 16년간의 긴 세월이 될 줄은 그들은 까맣게 몰랐다.
2016-06-15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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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6> 이매창(李梅窓) <제1話>
뜬 눈으로 매창(梅窓·1573~1610)이 밤을 샜다. 정원엔 매화꽃의 짙은 향기가 집안을 연기처럼 휘감아 돈다. 1607년 어느 봄날이다. 매창은 매화 중의 매화인 납매(蠟梅)를 유독이 좋아한다.
‘봄날 탓으로 걸린 병이 아니라/ 오로지 님 그리워 생긴 병이라오/ 티끌 덮인 이 세상엔 괴로움도 많지만/ 외로운 학이 되었기에 돌아갈 수도 없구나/ 잘못은 없다지만 뜬소문도 도니/ 여러 사람 입들이 무섭기만 해라/ 시름과 한스러운 날로 그지없으니/ 병난 김에 차라리 사립문 닫으리...’ ≪님 그리워 병났어라≫다. 상사병이다.
매창이 어느덧 34살이 되었다. 기생으론 퇴기(退妓)할 나이다. 그녀는 명기(名妓)로 자는 천향(天香), 아명은 향금(香今), 호는 계생(桂生)·계량(桂良)이나 스스로 매창이라 불러 만인에게 회자 되었다. 첫사랑으로 몸과 마음을 몽땅 바친 유희경(柳希慶·호村陰·1545~1636)은 서울로 올라간지 십 수 년이 흘렀다.
어제 저녁에 찰나적으로 눈을 붙인 꿈속에서 촌은과 질탕한 사랑을 나누었다. 매창의 눈엔 꿈속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녀는 매일 화장을 한다. 늙고 병들어 정절(貞節)를 지키는 기생으로 알려져 손님도 뚝 끊겼다. 매창의 품성을 알아보고 시기(詩妓)로 인정하면서 수창(酬唱·시를 지어 서로 주고받음)할 가뭄에 콩 나듯 찾는 한량을 위해 오늘도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화장이 잘 먹지 않는다. 나이 탓도 있지만 잠을 설쳐 눈까지 푸석푸석하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쇠약해졌다. 머리도 새치가 보였다. 매창은 하던 화장을 멈추고 넋 나간 사람처럼 거울을 응시하였다. 거울 속의 여인은 매창이 아니었다.
꽃과 벌 나비들이 부러워 할 매창이 아니다. ‘몇 해 동안이나 비바람소리를 내었던가/ 여태껏 지녀온 작은 거문고/ 외로운 난새의 노랠랑 뜯지도 말라더니/ 끝내 백두음 가락을 스스로 지어서 읊었거니...’ ≪거문고 타면서≫다.
매창과 유희경은 나이 차이가 많다. 매창이 34살이 되었으니 유희경도 어느덧 62살이 되었으리라... 무려 28살 차이다. 한세대 간격이다. 그녀는 세월의 무게를 보이기 싫어 손님이 없는 날에도 매일 화장을 한다. 화장을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그때다. “여봐라! 안에 누구 없느냐?” 분명 유희경 목소리다. 매창은 경칩에 개구리가 튀어나오듯 사립문을 향해 뛰어 나갔다. 흡사 빙의(憑依)에 걸린 모습이다. “서방님이셨네요!” 매창은 유희경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 있었소?” 유희경은 매창을 어린아이 안 듯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한땀 한땀 수놓은 ≪님 그리워 병났어라≫가 걸려있다.
유희경은 매창을 보자 운우지정을 하고 싶은 정욕이 활화산처럼 솟구쳤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한땀 한땀 수를 놓아 ≪님 그리워 병 났어라≫를 보고 끌어오르는 정욕을 억눌렀다. “이렇게 있지 말고 나가서 구경을 하자꾸나! 이토록 좋은 날씨에 방안에서 뭣을 하겠느냐! 어서 나가자.... 밖에 나귀가 있느니라!” “정말이에요? 서방님?”
매창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 유희경을 정신 나간 사람모양 멀거니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넋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어? 어서 구경 나갈 채비를 하라니깐....” 유희경은 부안의 절경 직소폭포를 구경 시켜주고 운우지정을 할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내일 아침 일찍 한양으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서방님...” 매창은 거울앞에 다시 앉았다. “아니다. 지금 시간이 그렇게 많이 있지 않으니라...” 유희경은 억지로 매창을 일으켜 세워 밖으로 나왔다.
사내는 매창을 번쩍 들어 나귀 등에 태웠다. “서방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매창이 발버둥치는 바람에 나귀 등에서 떨어져 유희경 품에 안겼다. 하마터면 땅바닥에 떨어질 뻔 했다. “아니다. 오늘은 네가 내 상전이니라... 어서 나귀에 올라라...” 유희경은 다시 매창을 나귀 등에 태워 직소폭포로 향하였다.
풍류객 유희경도 직소폭포를 아직 보지 못했던 것이다. 송도삼절로 박연폭포·황진이·서경덕에 견주어 부안의 삼절엔 직소폭포와 매창·유희경을 꼽았다. 평양엔 명월(明月·황진이 호), 부안엔 매창이다. 지금 유희경이 매창을 나귀에 태워 부안의 절경을 찾아 유람하려한다. 하늘은 강낭콩 빛깔로 맑고 대지는 싱그러운 향기를 소녀의 숨결처럼 내뿜고 있었다.
며칠 전의 큰 비로 직소폭포는 장관이다. “어머 서방님 폭포가 장쾌하네요! 며칠 전에 큰비가 왔는데 서방님이 오실 것을 알고 옥황상제께서 비를 내려주셨나 봐요...” 매창은 꿈 많은 사춘기 소녀처럼 기쁨에 넘쳐 울먹인 목소리다.
“매창이 너 이 옥녀탕에서 목욕을 하려무나. 물이 너무 맑아 그냥 보고만 있기가 아쉬우니라.” 사내는 벌건 대낮에 그리스 신화의 비너스보다 더 예쁜 매창의 알몸을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서방님은 그게 말이나 돼요? 어떻게 벌건 대낮에 아녀자가 제정신으로 폭포에서 목욕을 해요!” 매창은 풍류객 유희경 특유의 관음증이 발동했다는 것을 이미 읽고 있었다.
그들은 수정같이 맑은 폭포수에 아쉬운 목욕 대신 손발을 씻고 총총히 집으로 왔다. 유희경의 마음은 바쁘다. 매창도 마찬가지다. 직소폭포야 다음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나 관음증이 발동된 유희경의 육체의 허기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급하다.
해가 아직 서산에 걸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벌써 운우지정에 들어갔다. 폭포수에서 관음증이 발동된 사내는 폭포수처럼 욕정을 퍼부었다. 수절했던 매창의 몸도 장고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듯 현란한 몸짓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영혼의 회포를 푼다. 그러나 그녀의 몸짓은 품위를 잃지 않았다. ‘임 떠난 내일 밤이야 짧고 짧아지더라도/ 임 모신 오늘밤은 길고 길어지소서/ 닭 울음소리 들리고 날은 곧 새려는데/ 두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네’ ≪이별하기 싫어서≫다.
16년 동안 쌓이고 쌓인 정염이 하룻밤 사이에 해소 될 리가 없다. 10일간의 뼈를 녹이는 운우지정은 하룻밤의 남가일몽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길고 영원히 낮이 오지 말기를 기원했던 밤은 밝았다. 매창은 방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차마 유희경의 뒷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그들은 또 기약 없이 헤어졌다.
2016-06-08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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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5> 천재 女流시인 이 옥 봉 <제4話>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있다. 어부들은 시체가 배 근처로 밀려오면 장대로 밀어버렸다. 골치 아픈 일이 싫어서다. 시체를 발견하면 관가에 신고를 해야 하고 전후사정을 말해야 하는 것들이 먹고 살기도 힘겨운데 귀찮은 것이다.
옥봉의 시체가 동해에서 날이 맑은 날엔 조선의 발해만도 보인다는 산동성까지 떠밀려갔다. 명(明)나라 때다. 시체는 기름먹은 종이로 마치 수의를 입듯 칭칭 동여매어져 있었다. 종이를 풀어내자 그 속엔 깨알 같은 쓴 시가 가득 채워져 있다. 천고의 절창으로 칭송받는 ‘강함구몽활(江涵鷗夢闊) 강은 갈매기 꿈을 품어 넓고/ 천입안수장(天入雁愁長) 하늘은 기러기 슬픔에 들어와 멀다.’를 보고 깜작 놀랐을 것이다.
시체엔 신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쓰였다. 시체는 바다를 얼마나 파도와 물살에 밀려 떠돌았는지 몰골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부패되었다.
그때 마침 고위관리가 그곳을 지나다 어부들의 행동을 보고 군사를 시켜 시체를 끌어냈던 것이다. 관리는 옥봉의 시신을 잘 수습하여 양지 바른 곳에 묻게 하고 한지에 있는 시가 너무 뛰어나 그냥 버리기엔 안타까워 필사하여 ≪이옥봉 시집≫을 만들었다. 그 후 관리는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원로대신이 되었다.
그동안 조선은 두 차례 임금이 바뀌어 광해군(1575~1641)에 이어 인조)1595~1649)가 보위에 올랐다. 명나라도 쇄락하여 후금의 호시탐탐 침략을 받고 있었다. 그즈음에 관리는 조선에 사신으로 오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와주었으나 이제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 군사를 보내달라는 황제의 국서를 가지고 온 것이다.
명나라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자 조선의 접빈사(接伴使·외국 사신을 영접하는 임시직 벼슬)들이 환영을 나왔다. 그런데 접반사 일행 중에는 조희일(趙希逸·1575~1638)이 있었다. 명나라 관리는 옥봉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문재에 뛰어났으니 자연스럽게 항아(姮娥·달에 있는 여신)를 뺨칠 천하일색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나라 사신은 자연스럽게 조선에 오게 되자 그동안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공은 혹시 승지 벼슬을 지낸 조원이란 사람을 아시오? 공의 성씨가 조씨이니 행여 아는 사람일수도 있어 묻는 것이요...” 사신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조희일은 주저 없이 “아 예 그분은 저의 가친(家親)이십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가친에 대해 물으시는지요?”라고 말하며 놀라워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가지 아버지에 대해 벼슬까지 알고 왔으니 궁금증이 더해졌던 것이다. 조희일이 놀라는 표정을 짓자 사신은 더욱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그러면 공은 혹 이옥봉이란 여인을 알고 있습니까?” 사신은 더욱 진지하게 물었다. “예 그분은 아버님 소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신께선 그 여인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이번엔 조희일이 더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사신은 그때 필사하여 만든 ≪이옥봉 시집≫을 꺼내 놓았다. 사신과 접반사는 밤새 술을 주거니 받거니 대취하였다. 사실 옥봉은 조원을 따라 여러 곳에서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조원은 삼척·성주 등지에서 부사로 지냈다. 이대 옥봉은 자연스럽게 남편 조원을 따라갔다. 정부인은 한양에 있으며 소실 옥봉은 부임하는 현지에 동행하였다. 그들은 사랑이 서로 애틋했을 것이다. 사내는 조강지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소실은 객지이지만 안방주인의 주역이 될 수 있어서다.
옥봉은 소실로서 2세를 생산하지는 못했으나 여자의 역할과 풍류반려로선 조원에겐 과분한 여자였을 것이다. 특히 문재(文才)에선 오히려 남편을 뛰어넘는 재능을 가졌었다. 하지만 삶은 불행하였다. 미인박명 아닌 ‘여류문재’ 박복이었다. 옥봉은 시문에만 뛰어나지 않았다. 미모도 뛰어났으며 목소리 또한 아름다워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여인이었다.
옥봉은 겨우 불혹(不惑)을 살았다. 결혼을 두 번 했으며 수많은 시를 섰으나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삶도 죽음도 불행했으나 그녀의 시는 불후(不朽)하였다. ‘반평생 시로 궁한 팔자/ 새소리 속에 한해 봄날은 간다./ 미쳐 구르는 버들 솜 봄 눈인냥 나부끼고/ 가벼운 복사꽃 어지런 바람에 쫓긴다.’ 어디에선가 금방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치 세이렌(치명적 아름다운 그리스 신화 주인공) 음성 같다.
비범했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는 여류다. 16세기는 조선 한문학사에서 목릉성세(穆陵盛世·선조시대 문학적 성황을 지칭)로 일컬을만한 문화적 전성기였다. 또한 성리학적으로서도 율곡 이이·퇴계 이황 등이 이룩한 소위 조선 성리학이 융성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 시대에 옥봉이 도도하고 장엄하게 자신의 시 세계를 펼쳤다. ‘절묘 하다는 명예 모두 어린사람이니/ 동방에 모자의 이름이 떨치오./ 그대의 붓이 떨이지면 바람이 놀래고/ 내 시가 이루어지면 귀신을 울리오...’ ≪적자에게 준다≫ (贈嫡子)다. 적자란 조원의 둘째 아들인 조희철 이었을 것이다.
조희철은 초서와 예서에도 능했다고 한다. 그의 글씨가 얼마나 유명했으면 어느 대군의 집에서 겨우 열 살 남짓한 그에게 명정(銘旌)을 써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옥봉이 그를 향해 그대의 글씨는 바람을 놀래고 내 시는 귀신을 울린다 했다. 어린 나이에 예술적 재능을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있는 정실부인의 아들인 조희철과 자신의 신적 재능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귀신도 울린다.’는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701~762)의 시를 지칭하는 일이니 그녀 자신이 시선에 필적하는 시인이란 왕손 후예로서의 도도한 자부심의 표현일 게다. 사실 조원이 옥봉에게 자유롭게 시를 쓰도록 방임했다면 오늘날 후학들이 뛰어난 여류시인이란 절창의 시들이 창작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29번지 1호 경복고등학교 터에는 운강대(雲江臺)란 글씨가 새겨진 바윗돌이 있다. 또 그 옆엔 효자동의 유래가 새겨진 오석비(烏石碑)가 있다. 선조(宣祖·1552~1608)때 승지 벼슬을 지낸 조원의 집터다. 그곳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북쪽엔 북촌(北村), 서쪽엔 서촌(西村)이 있었던 육조를 움직이는 역사의 산실이다.
풍류를 즐긴 이봉은 어느 날 이곳에 와 조원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옥봉을 소실로 부탁했을 게다. 절창이 탄생하게 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하다. 삶은 불행했으나 작품은 불후한 주인공 옥봉은 이역만리에서 끝내 불귀의 객이 되었다. 아마 영혼이라도 오매불망 사랑했던 조원의 곁(산소)을 잠도 못 이룬 채 오늘도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2016-06-01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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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4> 천재 女流시인 이 옥 봉 <제3話>
벌 나비 날아들지 않는 꽃은 번식을 할 수 없다. 향기가 없던지 꿀이 없어 벌 나비가 찾지 않아서다. 옥봉이 조원의 소실 자격을 잃은 지 어언 한 계절이 지났다. 옥봉의 집은 작고 옹색했지만 마당 구석구석엔 꽃을 심었다.
봄엔 연산홍·진달래, 여름엔 장미·금낭화가 계절의 아름다움을 뽐냈으며 가을엔 부용·분꽃, 겨울에는 동백·납매가 계절의 고고함을 알렸다. 울타리는 사철나무로 되어있어 겨울엔 집안의 바람을 막아 안온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였다. 꽃들은 스스로 풍류반려로서 사시사철 몸과 마음을 한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옥봉은 쫓겨난 풍류반려 신세다. ‘평생을 당신 하나 그리며 사노라니/ 사무친 한(恨)이 병이 되어/ 술로도 나을 수 없고/ 약으로도 고칠 수 없어요!/ 날마다 이불 속에서 흘린 눈물/ 얼음 속을 흐르는 물과 같아서/ 밤낮 없이 흐르고 흘러도/ 사람들은 알지 못해요...’ ≪여자마음≫이다.
그랬다. 옥봉의 타는 가슴을 누가 알아 줄 것인가? 남편 조원이 살은 다 발라먹은 닭 뼈다귀 모양 내동댕이 쳐버린 여인을 어느 누가 거들떠보기나 할까? 그녀는 눈물의 세월이다.
강바람은 거세다. 특히 겨울바람은 살을 에는 듯 한 칼바람이다. 옥봉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사랑하는 조원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으면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옥봉은 문득 앙녕대군과 기생 정향(丁香)이 헤어질 때의 시가 떠올랐다. ‘다리 위에 말 세우고 이별 슬퍼 지체하니/ 버드나무 높은 가지 미운생각 이는구나./ 여인은 인연이 엷다고 새 원망 품는데/ 사나이는 성이 깊어 뒷날을 기약하네./ 복숭아꽃 오얏꽃 만발하는 한식 철에/ 자고새 날아드니 해는 이미 지고 있네./ 뜰아래 우뚝 솟은 한그루의 정향수에/ 억지로 춘심 품어 그 한 가지 꺾었도다.’ 칠언율시(七言律詩)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사나이 속내다. 하지만 떠나야 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옥봉은 조원이 양녕대군이 정향을 사랑했듯이 아껴주길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조원은 사랑보다 체면이 더 중요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허례의식이다.
하지만 아내를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한 사대부도 있었다. 왕조국가에서 통치이념으로 어떤 사상을 정했어도 겉으론 따르는 척 하면서 내면엔 다른 사상을 갖듯 여인을 대하는 조선의 사대부들 중 그런 사내들이 존재했었다. 강정일당(姜靜一堂·1772~1832) 남편이 그 중의 한 사내다. 노론 대학자 송치구가 아끼는 사대부 윤광현이 그다.
윤광현은 아내가 작고한지 4년 후에 작품집 ≪정일당유고≫를 간행하여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윤광현은 아내가 죽자 마치 부모가 사망한 것처럼 땅을 치고 통곡했다. 옆에서 이를 본 친구들이 “이 사람아! 남이 보기 민망하이. 사내부가...”라고 핀잔을 주자 “자네들이 내 심정을 어찌 알겠나? 스승이 죽었으니 앞으론 어찌해야 하나! 눈이 없으니 장님 같고 닻이 없으니 배가 어떻게 항해를 해야 하나?”라며 되물었다. 윤광현은 아내 강정일당을 잃고 하늘이 무너진 듯 슬피 울었다.
옥봉을 ‘금시맹약’을 깼다고 내쫓는 조원은 어떠했을까? 사대부들은 사실상 대부분 비슷하다. 특히 잠자리에 들어가서 행동은 동물적 행태다. 낮엔 아내에게 현모양처의 전형적 모습은 원하지만 밤에는 요부를 갈망한다.
낮과 밤의 얼굴이 다른 원초적 본능이다. 아마도 조원 역시 밤엔 옥봉이 그립고 보고 싶을 게다. 그녀에게는 풍류반려의 조건이 모두 있어서다. 아름답고 뛰어난 가무에 뼈를 녹이는 운우지정까지 있지 않은가? 하지만 도덕군자인 냥 체면을 중시하는 사대부이나 잠자리에선 별수 없는 사내였을 것이다.
한편 뚝섬으로 나온 청상과부 옥봉은 밤마다 장고와 북을 치면서 밤을 샜다. 장고와 북을 치지 않고 있을 때는 수창을 하였다. 일인이역을 했다. 혼자 사는 청상과부로 알려지면 사내들이 몰려들까 사전에 방어진을 쳤다. 그래도 어떻게 알았는지 옥봉이 조원에게서 쫓겨났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껄떡이던 사내들이 밤이면 뚝섬 집을 배회하다 발길을 돌린 이들이 수십 명은 족히 되었다.
옥봉의 집은 밤마다 누군가가 와서 장고와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그녀와 수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일인극 모노드라마다. 옥봉은 그렇게 정조를 지키며 망부석처럼 조원이 다시 부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조원은 끝내 소식을 주지 않았다.
옥봉은 낙포의 선녀(仙女:복희씨伏羲氏의 딸 복비宓妃지칭)를 뛰어넘는 아름다음을 가졌다. 그런 옥봉을 조원은 시를 써 금시맹약을 어겼다고 내쫓은 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유다. 진짜 이유는 옥봉이 자신보다 학문이 높아 사내부의 자존심이 구겨졌다는 색다른 주장도 있다.
‘붉은 휘장 너머로 등불이 붉은데/ 자면서도 비단이불 한쪽이 비어있음을 느끼네./ 서리 차가운 새장에선 앵무새 우는데/ 뜨락에 가득한 오동잎 서풍에 지네.’ ≪가을의 슬픔≫이다. 일인이역으로 껄떡이는 사내들을 물리치고 깊은 잠에 빠졌어도 조원 생각뿐이다.
오매불망 운강 생각뿐인 세월은 한강의 물처럼 속절없이 흘러갔다. 헤어지던 전날 밤 뜨겁고 뼈를 녹일 운우지정에도 옥봉의 몸엔 그렇게 원했던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면 창포에 머리감고 분발라 여성의 아름다음을 꽃피워 조원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 꿈으로 옥봉은 조원의 소실이 되었다. 하지만 활화산처럼 용솟음치는 창작에너지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금시맹약’을 깼다. ≪위인송원≫사건(소위 여성필화사건)이다. 시와 가무를 사랑해 풍류반려로 맺은 부부의 연이 시로 인해 헤어졌다.
옥봉은 불꽃같은 시심에 의지하여 지탱해온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오동잎이 바람에 우수수 뜨락에 떨어질 때 그녀는 활활 타는 뜨거운 가슴을 쓸어내리며 달랬다.
초겨울 어느 날 밤 슬프도록 아름답고 구성지게 방문 밖으로 흘러나오던 수창소리가 끊겼다. 싸리문도 잠겼고 앙상한 오동나무 밑에 어젯밤에 내린 비로 촉촉이 젖은 잎이 수북이 쌓였다. 분위기로 보아 며칠은 된듯하다.
2016-05-25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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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 천재 女流시인 이 옥 봉 <제2話>
낮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해가 떨어지자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거세지자 천둥번개까지 요란하다. 이따금씩 벼락 치는 소리도 들렸다. 옥봉은 불안한 표정으로 방안을 오갔다. 결혼 후엔 시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애걸복걸하여 소실로 들어간 자리다.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소실자리를 주었기 때문에 약속을 깼으니 집을 나가라 해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도 조원은 기척이 없다. 자정이 지나 새벽이 되어가도 남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옥봉은 자리에 들수가 없다. 평소 조원의 성격으로 봐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어서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그칠 기세가 아니다. 어둡고 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여명이 동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도 차츰 기세가 꺾여갔다. 그때다. 조원이 들이닥쳤다. 어제 오후부터 밤새 기다린 남편이 들이닥치자 옥봉은 전신이 얼어붙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이렇게 늦었어요?”라고 짜증을 부릴 상황이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보고만 있소? 이리 와서 앉으시오...” 조원의 입에선 술 냄새도 풍기지 않는다.
평소와 너무나 다르다. 옥봉은 남편의 행동에 겁이 났다. 이미 자신이 시를 써서 파주 친척이 누명을 벗고 방면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어서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남편의 맨송맨송한 운우지정이다. 옥봉도 작심하고 온몸의 정기를 모았다. 부부는 여명이 동창으로 들어오고 있는데도 뜨겁게 운우지정을 즐겼다. 옥봉도 첫날밤 보다 더 따뜻하고 뜨겁게 사내물건을 받았다.
지금의 운우지정이 마지막이 될 것으로 생각해서다. 그렇다고 요란한 몸짓으로 사내의 욕정을 북돋우는 여자로 인식되기는 싫었다. 온몸의 기를 옥문(玉門)으로 모았다. 뜨거운 정화수(井華水)같이 잔잔하지만 힘찬 파도가 일 듯 사내 심볼을 조였다. 조원의 자식을 갖고 싶은 욕망이 갑자기 커졌다.
마침 배란기다. 사내도 새벽 욕정이 꿈틀댔다. 하주종일 수창(酬唱)으로 기분이 들떠 있었다. 풍류를 즐기느라 육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그런데 뜻밖에도 옥봉이 뜨겁게 맞아줘 애액(愛液)이 폭포수처럼 나왔다. 옥봉이 기대했던 대로다. 애액은 옥봉의 옥문을 넘어 사타구니에 까지 넘쳐 나왔다.
아이를 가지려는 여자의 본능이다. 여자보다 어머니가 되는 것이 사랑의 파트너인 동시에 소실의 의무이기도 하다. 아들을 낳아 당당하게 소실의 두 가지 의무를 다 하려는 야무진 속내다. 풍류 반려를 뛰어 넘으려는 것이다.
날이 밝자 조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엇에 쫓기듯 방을 빠져 나갔다. 잠자리엔 쪽지 하나가 놓였다. 금시맹약(禁詩盟約)이다. 소실의 의무다. 약속을 어겼다는 통보다. 의무를 어겼으니 소실의 자격이 상실됐다는 얘기다. 옥봉은 파주에 있는 친척에게 써준 시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위인송원≫(爲人訟寃)이다.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얼굴을 씻는 동이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머리를 빗는 물로 기름을 삼아도/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이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郞豈是牽牛:낭기시견우·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오리까.’ 사연인 즉 이러하다.
소를 훔쳤다는 남편이 누명을 쓴 아내의 하소연을 듣고 써준 시다. 마침 칠석날 일어난 사건이다. 견우와 직녀를 활용한 시다. 견우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소를 끌고 갈 수 있겠느냔 것이다. 사또는 화들짝 놀라 누명을 쓴 주인공을 즉각 방면시켰다. 하지만 옥봉은 소실의 자격을 잃어 집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떻게 얻은 소실의 자리인가...
옥봉의 부친 이봉이 조원의 장인 이 준민을 찾아가 자신의 딸이 비록 한번 결혼에 실패했으나 춤과 노래, 시에도 재주가 있어 ‘풍류반려’가 될 만하니 며느리로 받아 줄 것을 애걸복걸하여 얻은 자리다. 그런데 지금 쫓겨나는 신세가 된 가여운 운명이 되었다. 옥봉이 조원의 소실에서 자격을 잃고 다시 청상과부가 되면 아버지 이봉은 가슴앓이를 또 다시 할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하였다. 시를 쓰면 안 된다는 약속을 어겼으니 소실의 자격이 상실되었다. 옥봉은 뚝섬에 우거(寓居)를 마련했다. 일선에는 조원이 옥봉을 소실에서 내쫓은 것은 시 실력이 뒤져서란 얘기도 있다. 남편이 아내, 그것도 소실만 못해 자격지심이 발동하여 내쫓았다는 풍문이다.
옥봉이 조원의 소실이 되기 전에 이미 그녀의 시 실력은 널리 알려져 사내가 알고 있었을 터다. 하지만 장인이 ‘풍류반려’로는 안성맞춤의 여자라고 강력히 권하여 마지못해 맞아들였는데 ’위인송원‘을 써 파주사또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남편의 체면을 깎았다는 이유다. 아녀자는 관가의 일에 참견을 하면 안 된다는 금기시 된 조선시대의 사회 흐름이다.
하지만 옥봉은 샘솟듯 하는 시심의 발로를 주체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집을 나설 때 역시 시 한편을 남겼다. ‘임 그리는 깊은 마음 어이 쉽게 변할 손가/ 다시 또 말하려니 부끄러워요/ 행여나 임께서 내 소식 물으시면/ 옛 화장 그대로 난간에 기대어 있다 전해주오...’ ≪이원≫(離怨) 이별의 슬픔이다.
그랬다. 옥봉은 아버지가 조원의 장인에게 간곡한 부탁으로 소실의 자리에 들어갔으나 그녀는 운강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조원의 소실로 들어가 풍류반려로 살아갈 것을 강력히 권고했으나 옥봉은 거부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조원을 뜨거운 마음으로 사모하고 있었던 처지였었다.
친정에서 아버지가 시회를 열었을 때 첫눈에 사랑의 꽃을 화사하게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쫓겨 나갈 신세가 되었다. 등 떠밀려 내쫓겨 떠나가도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애절한 시다.
비록 몸은 내쫓기는 신세로 떠나가도 마음은 가져가지 않고 두고 간다는 이별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읊었다. 성리학이 지배하는 남존여비사회의 여자의 숙명이다. 아니 소실의 천형(天刑)같은 굴레다. 그러나 옥봉은 자신의 문재(文才)를 썩히지 않았다. 소실의 자리는 잃었어도 샘솟듯 발로하는 시심을 잠재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2016-05-18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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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 천재 女流시인 이 옥 봉 <제1話>
‘돌아온다 약속하시고 어찌 늦으신가요/ 뜰의 매화가 어느새 시들려고 해요/ 나뭇가지위의 까치소리 문득 듣고/ 부질없이 거울 속에서 눈썹 그려요...’ ≪규정≫(閨情)이다. 곁에 없는 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자의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 절창(絶唱)의 시다. 떠나간 님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마음을 적나라하게 나타냈다. 여자의 뜨거운 마음이다.
때는 성리학이 정치적 이념적 토대가 사회를 지배했던 조선시대다. 남존여비사상이 엄격한 사회에서 이옥봉(李玉峰·본명 淑媛·1552~1592)이 시의 주인공이다. 옥봉은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이매창(李梅窓·1573~1610)과 함께 조선의 3대 여류문인으로 꼽히는 역사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녀는 선조(宣祖·1552~1608)때 옥천군수 이봉(李逢·1526~1595)의 서녀로 출생하여 조원(趙瑗·1544~1595·호雲江·자伯玉)의 소실이 되었다. 옥봉은 태어날 때부터 영민하여 수재로 근동에서 소문이 자자하였다. 조강지처의 소생이 아니었으나 출생 때부터 워낙 영민하여 보는 이 마다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었다. “거참 어미를 잘 만났으면 좋았을 터인데... 하필 소실(小室)자식으로 태어나 안타깝다!” 그랬다. 옥봉을 보고 그렇게 이웃들이 아쉬워하는 분위기였다.
조선에서 여자의 사회생활은 사실상 금기시 되었다. 정실의 자녀도 사회활동이 어려운 환경에서 소실의 딸인 옥봉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하지만 옥봉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옥봉은 왕실의 피를 받은 어엿한 후예다. 그녀의 부친 이봉은 양녕대군(1394~1462)의 고손자인 자운(子雲·이봉의 호)이다. 이봉은 풍류를 아는 사대부다. 옥봉은 풍류를 아는 이봉의 DNA를 고스란히 받았다. 옥봉이 사내 대장부로 태어났으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을 인물이 되었을 게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였다.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 하시나요?/ 달비친 사창(紗窓)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몽혼≫(夢魂)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정서다. 몽혼(꿈속의 넋)은 그 원초적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시다. 더욱이 남녀사이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용솟음쳐 나오는 사랑을 한 여인의 시심(詩心)을 빌어 작품이 되었다.
옥봉은 17살에 한 양가집으로 시집을 갔다. 꽃다운 나이다. 지금도 17살이면 세상물정 뿐만이 아니라 남녀사이의 감정을 알고 있어 건드리기만 하면 봇물이 터져 나오듯 사랑의 격정이 터진다. 조혼이 자연스러웠던 16세기에 17살은 가을 석류처럼 성숙한 여인이다.
하지만 옥봉에겐 남자복은 없었다. 시집 간지 일 년도 안 돼 남편을 잃었다. 17살에 과부가 되었다. 청상과부가 된 것이다. 활화산처럼 용솟음치는 정염과 시심(詩心)이 옥봉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첫날밤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청상과부는 친정으로 돌아왔다. 너무 빨리 떠난 사내는 옥봉을 엄마로 만들지 못하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일찍 이승을 떠나간 남편이 그리워졌다.
짧은 결혼생활 때 있었던 운우지정이 어렴풋이 가을하늘에 기러기 떼 같이 선명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직녀가 견우를 애타게 기다리는 숨김없는 여심일 게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정원엔 만화방초가 서로 자태를 뽐내듯이 화려하게 만개하여 꽃마다 벌 나비가 넘나들며 더욱 정원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을 때다.
풍류객 이봉의 집에 유성룡·이항복·정철, 그리고 조원들이 들이닥쳤다. 옥봉은 아버지의 시중을 자연스럽게 들었다. 이봉이 시회(詩會)를 열려는 것이다. 꽃보다 아름답고 샛별보다 더 초롱초롱한 옥봉의 자태에 사내들의 시선이 꽂혔다.
술상이 들어왔다. 옥봉이 들고 들어왔다. 술상을 들고 들어온 옥봉의 몸에선 여자 특유의 몸냄새가 사내들의 코를 자극했다.
옥봉의 몸매는 성숙한 여자의 자태다. “옥봉아! 네가 이 어른들한테 술 한 잔씩 따르렴.” 이봉이 술상을 놓고 나가려는 옥봉의 의사를 물었다. 남녀가 유별한데 스스로 술을 따르겠다고 할 수 없는 옥봉의 마음을 이봉은 알고 있었다. 이봉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섰다. “예 아버님! 소녀가 따라 올리겠습니다.” 옥봉의 얼굴이 갓 피어난 봉선화처럼 상기되었다.
사내들의 시선이 옥봉에게 몰렸다. 유성룡·이항복·정철·조원이 누구인가. 조선 사대부 사회를 주름잡는 선비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사내들이 아니었던가? 사내들의 시선을 독차지 한 옥봉의 시선은 조원에게 멎었다. “이 사람아. 어서 술잔을 비우게!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나” 송강(松江·정철의 호)이 술잔을 비우고 한잔 달라고 조원에게 한 말이다. 이심전심일까 조원도 옥봉의 자태에 넋이 나갔다.
그때 옥봉은 아버지를 비롯해 다섯 사내들의 술잔에 막걸리를 찰랑찰랑하게 따르고 나갈 찰나다. 치마 속에서 흔들리는 엉덩이에 조원의 뜨거운 시선이 와 닿는 것을 옥봉은 느꼈다. “옥봉아! 술 주전자 하나를 더 가져오너라. 이 어른들은 주전자 하나론 감당이 안되느니라...” 옥봉 역시 마음속으로 기다린 분부다. 술을 한잔씩 따르고 나가면서 다시 들어올 명분이 없어서다.
이봉이 주최하는 시회는 감흥과 절제분위기다. 사내들은 막걸리를 마시면서 수창(酬唱·시를 불러 서로 주고받음)을 즐기려 했는데 빼어난 미모의 옥봉을 봄으로 잠자던 남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옥봉이 수차례 술 주전자 심부름을 하는 사이에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두둥실 보름달이 떴다. 거나하게 취한 사내들이 아쉬운 자리를 뜨려 할 때다. “옥봉아! 어르신들 가시련다. 나와서 인사 여쭈어라!” 그때 옥봉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아버지의 하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봉은 어떻게든 조원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다.
분홍치마에 녹색저고리를 입었다. 삼단같은 머리에 홍색댕기를 들였다. 백옥같은 얼굴에 훤칠한 키에 네 사내는 넋이 나갔다. “허-이제 갑시다!” 제일 연장자인 송강이 발길을 재촉했다.
이봉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창이 밝자 이봉은 조원의 집을 찾아갔다. 풍류반려로 맞아 줄 것을 간청하기 위해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애걸복걸하여 소실로 들여보냈다.
2016-05-11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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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 풍류 千一夜話 ≪프롤로그≫
선비와 풍류, 그리고 미녀들의 시가(詩歌)문화와 로맨스 역사를 찾아갑니다. ≪풍류 千一夜話≫에선 신라의 천관녀(天官女)에서 조선의 이옥봉(李玉峰)·이매창(李梅窓)등 지금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얘기와 베일 속에 숨겨졌었던 해학(諧謔)까지 찾아갑니다.
≪美人탐방≫‘제1부’에선 사랑과 역사에 포커스를 맞추었으나 제2부 ≪풍류 千一夜話≫에서는 왕조시대의 엄격한 신분차이로 주위의 눈을 피해 사랑을 싹 틔웠던 사연들을 픽션과 팩트를 융합한 팩션으로 오늘의 정서에 맞도록 재구성합니다.
우리 백의 민족은 풍류와 해학이 풍부하기로 유별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분과 나이도 뛰어 넘는 것이 사랑의 신비한 힘입니다. 사랑은 문화예술의 에너지인 동시에 슬픔과 불행의 모태입니다. 슬픔의 씨앗이 발아되어 신분의 벽을 깨고 역사와 문화예술을 창조해 냅니다. 그리고 행복을 낳습니다.
창작의 몸을 빌어 삶의 무대에 데뷔하였습니다. 중국의 4대 미녀 양귀비·서시·초선·왕조군이 중국 문화예술에서 그랬고 우리의 논개·계월향 등이 남녀상렬지사(男女相悅之詞)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주제인 동시에 원동력입니다.
풍류가 있는 곳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웅호걸과 미녀들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에도 ‘풍류와 미녀’ 그리고 해학이 또한 고려·조선에서 사랑은 어떻게 극적으로 맺어졌으며 그 과정에 창작된 시와 노래를 소개하렵니다.
삶은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엔 삶에서 떼어 버릴 수 없는 목숨 같은 사랑이 있습니다. 신분사회에서 그 벽을 뛰어넘는 사랑은 목숨을 건 행동입니다.
신라엔 성골·진골이란 귀족 간에도 신분의 장벽이 있었으나 사랑 앞엔 그 벽이 모래성처럼 무너졌습니다. 사랑을 빌려주는 고유집단이 신라엔 있었습니다. 얼마나 합리적이고 풍류와 멋이 있었던 사회체제였을까요? 물론 고구려·백제에도 유사한 풍습이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감성은 예나 지금이나 별차이가 없습니다. ≪풍류 千一夜話≫에선 시대성과 공간성을 걷어내고 남녀가 적나라하게 뜨거운 감정을 시와 노래, 그리고 해학으로 토로했었던 문화예술의 당시 주인공을 통해 풍류화 합니다.
사실 우리 선조들도 오늘날 우리들의 감정 흐름과 별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감정을 가감없이 SNS(쇼설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드러내 스트레스로 인한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짐(朕·임금지칭)이 곧 나라였었던 왕조시대는 달랐습니다. 주인공들은 삼국시대와 발해를 관통하지만 고려·조선이 메인 무대입니다. 동서(東西)를 넘나드는 해학과 그 시대 그 나라 사회의 독특한 남녀감정을 오늘의 시대성에 녹아들도록 주인공들의 대화와 시, 노래를 풍류화 합니다. 또한 고대사회에서 남녀상열지사와 오늘날 남녀에서 꽃피우는 로맨스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도 비교해 보렵니다.
고대 중국의 사랑얘기, 서양 궁중의 스캔들, 그리고 가깝고도 멀고 서먹서먹한 미스터리한 일본 남녀들의 애정사도 메인 무대에 재미로 보태렵니다.
섹시란 표현은 아름답고 건강하며 발랄하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하지만 섹시하다면 성적인 표현으로 듣는 경향도 동시에 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예술과 외설의 구분에서도 유사합니다.
≪풍류 千一夜話≫에선 시와 해학, 그리고 은밀하지만 멋스런 그림으로 고대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아름답고 성스럽기 까지 한 사랑의 천일야화를 문학 특유의 상상을 통해 독자제위의 고매한 인격과 감성에 맞는 세상을 보시도록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메인무대는 고려·조선조입니다. 주인공들의 절창(絶唱)의 시들이 시간성과 공간성을 뛰어넘어 오늘의 사회 환경과 남녀 감성에 맞도록 통섭(統攝)의 정서화 할 것입니다. ≪풍류 千一夜話≫의 개념의 차이는 있어도 주인공은 역시 남과 여가 주역입니다. 문화예술의 메카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남과 여 사이에서 발아하여 창조되는 천변만화 같은 인류 최고의 스토리가 펼쳐지는 무대입니다.
동양의 역사가 그러했으며 서양의 역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풍류 千一夜話≫에선 ≪美人탐방≫ 제1부와는 차원이 다른 목숨을 건 사랑, 한편의 시 절창으로 새로운 사랑의 인생이 탄생하는 역사, 신분사회에서 신분의 벽을 허무는 위험천만한 사랑의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인류역사엔 남녀간의 사랑의 강이 도도하게 흘렀고 지금도 쉼없이 뜨겁게 흐르고 있습니다.
2016-05-04 09: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