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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45> 자동선(紫洞仙) <제25話>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했다. 영천군과 자동선의 사랑 얘기도 송도를 넘어 한양에까지 봄바람에 꽃향기 날아들 듯 장악원에도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송악산 유람 때 등산객들에 눈에 띄어 퍼져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송도(현 개성)는 중국으로 사신들이 오고가는 길목이어서 늘 왕래하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발 없는 말이 어느새 영천군의 본가에 영천군과 자동선의 연리지(連理枝) 얘기가 소문이 아닌 사실로 알려졌다. 안국방(현 안국동) 영천군댁에선 자동선이 올 것을 대비하여 사랑채 옆에 방을 더 꾸몄다. 자동선의 이름은 이곳 한양에서도 익히 알려진 이름이다. 그 자동선이 영천군의 부실(副室)이 되어 온다는 소식이 퍼지자 묘한 분위기다. 특히 장악원 분위기에 새로운 바람이 일어날 조짐이다. 한양에서 가장 확실하고 큰 손님을 잃지는 않을까 조심스런 분위기다.
사실 왕실 후손들은 할 일이 없다. 신분이 높아 그들이 할 일이 사회에는 없기 때문이다. 요즘말로 백수다. 그러다보니 자칫 주색(酒色)에 빠지기 쉽다. 아름답게 뻗은 뿔 때문에 가시덤불에 걸려 사자먹이가 된 사슴 우화처럼 때로는 빼어난 재능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례는 왕족과 서얼일 것이다. 전자는 너무 높은 신분 때문이고 후자는 어머니의 낮은 신분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 못하는 사례다.
조선시대 사회상이다. 세종의 셋째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양가집 재모(才貌)가 뛰어난 소녀 10명을 뽑아 시문(詩文)을 5~6년 가르치며 세월을 보낸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남들은 먹고 살기 어려워 동분서주 하는데 할 일이 없어 멀뚱히 있는 것도 쉽지 않은 태도다.
그래서 그들은 예술이나 종교 등에 심취하지 않으면 자칫 주색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영천군도 그 부류에 속하는 조선 최고의 신분인 왕족이다. 그림에 재주가 뛰어났으나 신분의 제약으로 행동에 자유롭지 못했음을 여자에 관심이 갔음이어라... 젊음의 격정(激情)을 시(詩)와 미(美)로 카타르시스 시켰을 것이다.
안평대군은 시·서·화에 능하여 3절(三絶)로 불리었다. 그의 글씨는 중국에까지 명성이 높아 황제들이 사신을 통해 얻어가려고 청까지 넣었다는 얘기까지 전해졌다.
그의 글씨는 《몽유도원도 발문》이 대표적 작품이다. 그는 또한 예술에 뛰어나 제자격인 10인의 궁희(宮姬)들에게 열정을 쏟았다. ‘가벼운 비단으로 달을 덮은 듯 / 푸른 띠로 길게 산을 두르듯 / 미풍에 점점 흩어지더니 / 오히려 작은 연못을 적시네 ’ 10인 궁녀 중 옥녀(玉女)의 《무제》다.
어느 특정인을 연모하는 듯한 시다. 재색을 갖춘 젊은 여인 10명이 한 곳에 모여 시를 쓰고 뛰어난 예술 감수성이 탁월한 왕족 밑에서 같은 공간에서 생활을 했다면 그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상사별곡(相思別曲)의 천일야화도 탄생했으리라...
더욱이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양가집 딸들이 옥골선풍 헌헌장부인 안평대군과 시문학을 공부했다면 문학사에 경천동지 할 사건이다. 하지만 남녀칠세부동석 엄격한 신분사회에 그런 일이 있었다. 그것이 역사다.
한편 영천군과 사가정이 송도에 내려올 때는 두 사람이었는데 한양으로 올라갈 때는 세필의 나귀에 이삿짐을 실은 부담마(負擔馬) 두 필까지 나귀만도 다섯 필로 늘어났다.
일행이 천수원을 통과하게 되자 사가정이 “영천군 나으리, 여기가 천수원이예요! 돌아오는 길에 청교월(靑郊月)에 들린다는 약속은 어쩌시렵니까?” 라고 말하자 영천군은 고개를 휙 돌리며 “에이 사람도 짓궂기도 하네...”라며 나귀엉덩이에 채찍질을 하였다.
사가정은 크게 웃으며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읊었다. ‘청교의 버들은 가슴 아프게 푸른데 / 자하동의 안개는 마냥 흡족하구나...’ 자동선은 아무 말도 없이 행복에 겨운 미소만 짓고 있다.
한때는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명기였으나 이젠 한 사내의 여자로 충실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듯 하여 보였다. 자동선은 영천군의 부실이 되어 현모양처로 변신하여 아들딸 낳고 행복한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아마도 중국사신 장녕과 김식을 통해 자동선에 대한 명성을 들은 사신들은 조선의 송도에 왔다 그녀를 품으려는 꿈에 부풀었다 허탕을 쳤을 게다. 그들은 자동선을 중국의 4대 미녀인 양귀비·서시·초선·왕소군의 장점만 닮은 세기의 미녀 팬이 되었을 것이다.
동방예의지국의 빼어난 명기에 그들은 넋을 잃었다. 그러나 자동선은 왕실의 여자다 되었으니 옛 명성을 되새김질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였다.
한편 동갑내기 사가정은 심심하면 불러서 갔던 영천군이 이젠 오매불망 했었던 자동선을 품에 넣었으니 불려가지 않고 사가독서에 열중할 것을 다짐하며 시 한 수를 읊는다. ‘이름난 명승지는 말을 자주 멈추던 곳/ 담 무너진 나무숲엔 두견새만 우노나 / 늙은이들 마주치면 저마다 묻기를 / 조선은 어느 해에 한양으로 옮겨갔소...’ 시인다운 세월의 표현이다.
송도는 고려의 도읍지이나 지금은 조선시대다. 권력이 휩쓸고 간 옛 도읍지의 산천은 옛날 그대로이나 민심은 옛날이 아니다. 사가정은 한양에 왔어도 빼어난 송도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져 끝없는 시상(詩想)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그는 문득 안평대군의 10인 궁희 중 금연(金蓮)이 쓴 《무제》 시를 떠올렸다. ‘산아래 차가운 안개 쌓여 / 궁궐나무가로 비껴 날아가네 / 바람 부니 저절로 움직여 / 기우는 달 푸른 하늘에 가득하네 ’다.
왜 갑자기 이 시를 떠올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본인의 심정이 허허로웠을 터다. 영천군은 자동선을 데리고 왔는데 자신은 사랑하는 제일청을 송도에 두고 올 수 밖에 없는 신세를 잠시나마 떠올렸을 것이 아닐까? 역시 신분의 차이를 생각했을 것이 자명하다.
2019-03-27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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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44> 자동선(紫洞仙) <제24話>
예성강 저녁노을에 사가정은 넋을 잃었다. 조선팔도에 그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별로 없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송도 매력에 빠졌다. 백악(白岳)에 걸려있는 구름과 북산에 서리는 연기와 비는 한 폭의 산수화다. 또한 장단의 절벽과 박연폭포는 웅장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 바로 그 자체다.
사가정은 제일청의 곁에 그냥 이곳에 주저앉고 싶다. ‘작은 내 깊숙한데 버들가지 날리고 / 가랑비 맑게 개니 풀은 연기처럼 피어오르네 / 손님이 가든 머무르든 상관하지 않고 술동이 하나 놓고 아름다운 대자연과 마주하네’ 이제현의 《청교 靑郊의 손님배웅》이다.
사실 사가정이 팔도유람을 할 때는 빛과 그림자 같이 술이 따랐다. 높은 벼슬을 했음에도 형식과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영혼의 소유자다.
그의 해학집 《태평한화골계집》엔 아래와 같은 익살이 실렸다. ‘극락이라도 삼해주(三亥酒)가 없다면 가지 않겠다.’라고 쓰여 있다. 그가 얼마나 술을 사랑하나를 적나라하게 포효하는지 딱 맞는 시(詩)라 하겠다.
사가정은 허탈하다. 영천군과 자동선의 연리지 작전이 마무리 되어서다. 사가정은 제일청의 집에서 밤낮없이 술이다.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제일청이 “사가정 나으리, 자동선의 반살미 상을 차릴 준비를 해야겠어요. 장인이 되가지고 술만 퍼마시면 어떻게 해요?” 장인 소리에 사가정이 손에 들렸던 술잔을 탕하고 술상에 놓으며 “장인이란 소리가 무슨 소리요?”라고 따져 물었다. “나으리와 제가 만리장성을 쌓았으니 부부요! 내가 자동선이 어머니이니 사가정 나으리가 영천군 나으리 장인이지 뭐겠어요?” 제일청의 표정은 웃음기도 없는 단호한 말투다.
사가정이 처음 보는 그녀의 단호한 말투와 표정이다. 사가정도 제일청이 영천군과 자동선이 오후에 받을 반살미 상 차리는데 오며가며 심부름으로 거들었다. 송도의 가을 날씨는 한양과 다르다. 한낮엔 따가운 햇살이 아침저녁으론 제법 싸늘하다. 오후가 조금 지나자 영천군과 자동선이 손을 맞잡고 제일청의 집에 도착하였다. “어서 오시게. 영천군 사위...” 영천군은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며칠 전까지도 퇴기로 아랫것 취급을 했는데 자동선과 약식결혼식을 치르고 놀러가는 기분으로 왔는데 사위소리를 들으니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일청과 자동선은 수양 모녀 관계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반살미 상은 산해진미로 눈을 의심할 정도다. “내 이런 영광스런 날이 언제고 오리라 믿고 산해진미를 항상 준비해 놓고 있었다네! 내 딸 자동선이 어디 보통 여자인가 중국 사신들까지 목을 매고 수청을 간청했으나 번번이 뛰어난 기지와 지혜로 그들의 체면을 지켜주면서 정조를 지켜 오늘날 영천군 나으리를 지아비로 섬기게 되었소이다. 자 어서 앉아 맛있는 술과 안주가 준비됐으니 마음껏 드시게... 화촉동방은 잘 치렀겠지 자동선아?” 영천군 옆에 앉아 있던 자동선이 부끄러워 농익은 가을 석류 알 같이 얼굴이 붉어져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부끄러워 말거라. 여자라면 한번은 겪는 즐거움이니라...” 제일청이 한술 더 떠 준다. “하하하, 영천군 나으리께선 천하재색 자동선 신부의 옷을 잘 벗기셨지요? 옷 벗기는 차례야 여러 번 해 보셨을 터이니 거칠 것이 없으셨겠지요?” 사가정이 너스레를 떨어도 영천군은 묵묵부답이다.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사가정은 읽고 있다. 자동선 만이 귓불까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지 못하고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사내들 앞에서 언제 어디서고 당당했던 자동선이다. 그런데 지금은 영천군과 화촉동방을 치르고는 부끄러워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8년 동안 고이 간직했던 정조를 아낌없이 받치고 아쉬움과 해방감에 영혼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안식처를 찾았다는 의미일 터다. ‘떠나시던 길 하염없이 보느라고 / 사립도 닫지 않고 / 밤 깊도록 기다리고 있다가 / 찬 이슬에 옷 다 젖었다오. / 임 계신 양산관에는 / 고운 꽃이 얼마나 피였기에 / 날마다 보느라고 / 돌아오실 줄 모르시나요.’ 양사기(楊士奇) 풍천부사 애첩의 《님 기다리며》다.
당시 조선의 여자들은 시집가면 00댁 또는 애기씨로 불렀다. 시의 주인공은 양사기의 첩이므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아 ‘첩’으로 표기 되었다. 조선 사회는 철저한 남존여비 시대이고 남녀칠세부동석의 사회로 시집가면 친정에서 떨어져 나온다.
자동선도 재색과 학문이 높은 기녀신분에선 뭇 사내들이 잠자리를 갈망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흠모의 대상이었으나 영천군의 여자가 된 이상 철저한 한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 사실 한양엔 송도보다 재색을 겸한 여자들이 많다.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으나 이젠 규율이 엄격한 왕실의 여자가 된 이상 과거는 깡그리 잊고 영천군의 여자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 되었다.
화촉동방을 치룬 하룻밤이 그녀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제일청의 집에서 반살미 상을 후하게 받은 새신랑 부부는 집으로 다시 돌아와 내일 한양으로 떠날 채비에 부산하다. 오늘따라 휘영청 뜬 달이 대낮같이 밝다.
자동선은 만감이 교차되었다. 왕손의 첩이 됐으니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범한 사내의 여자가 됐으면 지아비만 잘 섬기면 되나 왕손의 여자가 됐으니 가릴 것도 지켜야 할 예의범절도 많을 것이 뻔해 송도에서 마지막 밤은 뜬눈으로 지새웠다.
영천군도 화촉동방을 치를 때와는 다르게 술기운에 한번 즐기고는 밤새 몸을 뒤척이었다. 한양에 가서 종친들과 일어날 일들에 대해 미리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하다. 아마도 이 밤이 영원히 밝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것이다.
2019-03-20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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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43> 자동선(紫洞仙) <제23話>
동기(童妓) 자하(紫霞)가 며칠 전부터 시장을 오가며 각종 혼숫감을 사들인다. 자동선은 일가친척이 없다. 수양어미 제일청과 동기 자하가 가장 가까운 관계다. 자동선은 영천군과 부부가 될 것을 대비하여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
호박 관자를 받고 마음을 굳혔다. 비록 양가 부모와 친척들을 모셔 놓은 자리가 아니더라도 조촐히 결혼식을 올린 뒤 초야를 치르려는 속내다. 그렇게라도 해야 18년 동안을 고이 간직했던 정조를 아낌없이 줄 수 있어서다.
숱한 사내들이 금은보화로 회유했으나 지금껏 어렵사리 지켜온 정조를 떳떳이 바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동선은 영천군이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해올 경우를 위해 결혼준비를 하고 있다. ‘이웃집 찾아가서 서너번 부르자 / 아이가 나와서 주인 안계시다 말하네 / 막대 짚고 꽃 찾아가지 않았으면 / 거문고 끼고서 술꾼 찾아 가겠지...’ 조선전기 문인 성희(成禧)의 딸 성씨(成氏)의 《꽃 찾아가지 않았으면》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은 결혼을 하면 남편이 외도할까 걱정이 태산인 것 같다. 오다가다 예쁜 여인이 지나가면 반사적으로 힐끗힐끗 쳐다본다. 동물적이다. 동물적이란 원시시대에 사냥감을 보고 달려 나가는 맹수의 본능과 같은 것이다. 그 본능이 없으면 맹수는 먹이를 놓친다.
남자에게 예쁜 여인이 지나갈 때 무관심은 맹수에게 사냥의 본능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이라 할 것이라 할까? 지금 이 시에서 꽃은 여자를 지칭함일 게다. 어쩌면 자동선과 숱한 사내들이 자신의 정조를 노렸으나 끝까지 지켜 이제 평생을 맡길 수 있다고 판단한 영천군에게 화촉동방을 허락하였다.
사실 기녀의 몸이야 어차피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재화(花代)가 필요하여 노류장화의 길을 택하였으니 사람을 가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지만 더러는 자동선 같이 화대보다는 사람을 고르는 기녀도 있다. 황진이가 그러했고 지금 자동선이 대표적이다.
화대를 내는 사내가 아니고 화대를 받는 여자가 사내를 선택하는 기막힌 경우다. 자동선이 18년 동안 고이 간직해 온 초야권을 영천군에게 넘겼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론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이다. 평범한 사내가 아니여서다. 임금의 조카요 효령대군의 자제가 아닌가! 그리고 자신은 노류장화로 불리는 기녀가 아니던가! 아무리 노래와 가무에 뛰어나고 학식이 높아도 기녀는 노류장화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동선은 호박관자를 받고서야 꼭꼭 감가 두었던 정조를 아낌없이 바치려 하는 것이다. 결혼식은 자신의 집에서 한다. 결혼식에 필요한 혼수품은 자신이 틈틈이 오늘과 같은 경사스런 일이 생기면 지체 없이 치르려고 준비해 놓았으며 식장은 내실이다.
영천군은 제일청의 안내로 내실로 들어섰다. 자동선은 녹의홍상(綠衣紅裳)에 머리엔 족두리를 썼고 얼굴엔 연지곤지를 찍어 완연한 신부차림새다. 이때 자동선이 속삭였다. “나으리께서 입으실 사모관대를 마련했으니 초례복(醮禮服)으로 갈아입으시고 소녀의 배례를 받아주시옵소서...” 드디어 영천군이 자동선의 초야권을 허락받는 순간이다.
영천군의 화촉동방은 순간적으로 치러졌을 것이다. 아마 하룻밤이 일향(一晌:짧은 순간)처럼 지나갔을 터다. 자동선은 18년을 고이 간직했던 동정(童貞)이 한순간에 무너졌으며 영천군은 30여년에 처음으로 기가 막힌 여인의 사랑을 맛보았을 것이다.
영천군과 자동선의 첫날밤이 조선의 밤을 지배하는 여인 중의 여인이 그의 품에 있음이다. 밤이 짧다. 조금 전에 자동선을 품었는데 동창으로 어느새 여명이 들어오고 조금 있자 사가정의 인기척이 났다. ‘봄밤이 짧아 해 뜬 후에 일어나니 / 천자는 그때부터 늦잠만 자더라’ 사가정은 짜증 섞인 어조로 백락천의 《장한가》(長恨歌) 중에서 일부를 소리쳐 낭송하였다. 그리고 “제일청이 새신랑 부부를 위해 반살미상(갓 결혼한 신랑신부 초대상)을 차려 준다니 어서 준비하시고 갑시다.”라고 외쳤다.
사가정이 월하빙인으로 영천군과 자동선이 맺어져 화촉동방을 치렀는데 그도 남자로 은근한 질투로 속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한양을 넘어 명나라에까지 소문이 그 이름이 자자하여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꼭 찾아와 수청 들기를 간청으로 안되면 위협까지 했으나 끝까지 지킨 정조를 영천군한테 바쳤으니 사내로서 질투를 넘어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터다.
사실 영천군과 사가정의 풍류와 멋을 즐김은 조선팔도에서 둘째가라면 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사양을 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사가정은 언제 어디서나 영천군이 먼저다. 학식이나 재능으로만 보면 사가정이 영천군 보다 한발 앞설 것이다. 그러나 사가정은 언제나 뒷전에 섰다. 지금 화촉동방에서 꿀맛 같은 사랑의 미봉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영천군과 자동선의 소원성취가 이뤄진 것도 사가정의 희생에서 꽃 피어진 경사다.
영천군도 그림엔 능하지만 대인관계에선 사가정이 스승격이다. 더욱이 영천군은 왕손으로 한양에선 거칠 것이 없다. 옥골선풍에 헌헌장부로 왕손이 아니더라도 사내가 예쁜 여인이 지나가면 힐끗힐끗 쳐다보듯 여인들도 영천군을 도둑시선으로 훔쳐볼 사내다.
영천군은 좀처럼 신혼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자동선의 체취에 취해버렸다 자동선의 몸에선 야릇한 향기가 피어났다. 밤새 방사를 거듭해도 피곤하지 않으며 하면 할수록 힘이 솟고 더욱 짙은 향기가 피어올랐다.
동창이 밝자 자동선은 일어나 꿀물부터 대령하였다. 흡족한 표정이다. 영천군도 자동선이 살포시 일어날 때 깨어있었다. 그러나 잠든척하며 자동선의 행동을 살폈다. 자동선도 밤새 시달렸으니 피곤할 것이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는 순간 영천군의 손이 와 끌어당겼다. 그들은 밤샘도 부족한 듯 다시 뜨겁게 한 몸이 되었다.
2019-03-13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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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42> 자동선(紫洞仙) <제22話>
얼떨결에 내실로 떠밀려 들어온 영천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를 먼저 들여보내고 뒷물을 하고 여자는 들어오리라 생각해서다. 영천군은 피곤하다. 요 며칠사이에 송악산을 두 번이나 오르내렸으며 자동선을 품으려고 온갖 묘수를 다 써 봤으나 번번이 헛수고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동선의 내실에 들어왔다. 여자의 방에 남자 혼자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남자는 온갖 상념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영천군은 그러하지 않다. 자동선의 내실은 의외로 단조롭다. 네 벽이 모두 하얀 백합처럼 흰 종이로 되었으며 남향의 벽엔 성명미상의 그림 《원앙》이 걸려있을 뿐이다. 머리맡엔 자리끼까지 준비가 되었다.
영천군은 옷도 벗지 않은 채 벌러덩 누웠다. 화촉동방을 상상하고 있다. 그런데 영천군은 자리에 눕자 금방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영천군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동창이 밝아오고 있을 때다. 옷도 입은 채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을 땐 자동선이 옆에서 “너무 피곤하게 주무셔서 소녀 그냥 이렇게 옆에서 밤새 지켜드렸나이다! 목이 타실 거예요. 어서 자리끼를 드시지요.” 자동선은 영천군이 일찍 잠에 빠져 오히려 아쉬운 밤을 보냈다는 말투다. “허허 그랬느냐? 내 너무 피곤해서 네가 들어오는 것도 몰랐느니라.” 남자체면이다.
밖에서 두런두런 사가정과 제일청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영천군 나으리, 일어나셨는지요? 사가정이 옵니다.”라고 문안을 알렸다. 툇돌엔 영천군 신발과 자동선의 신발이 나란히 놓였다.
사가정과 제일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젠 됐다는 표정이다. “밖에 누가 오셨어요?” 자동선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다. “자동선아! 영천군 나으리 잘 모시고 잤느냐?”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소녀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망측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자동선이 뿌루퉁한 표정으로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집은 대궐 뒤의 막바지 골목 / 내 남편은 광명문의 젊은 파수꾼 / 여자의 마음은 일월같이 밝아서 / 생사를 걸고 섬겨 오는 내 낭군이오 / 패물을 돌리자니 눈물이 거침없어 / 시집 전에 못 만난 것 한스럽구려.’ 중국 장적(張籍)시인의 《절부음》(節婦吟)이다.
자동선도 마음이 타긴 영천군과 다를 바 없다. 영천군이 조바심을 내면서 자기를 원하는 표정은 역력한데 딱 부러지는 언행이 없어 몸을 열수가 없는 것이다. 낭랑18세의 보배 같은 몸을 선 듯 내어놓기가 무섭고 두려울 터다. 사내들은 여자가 한번 몸을 주면 자기 전유물처럼 행동하고 염치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 속성이 있다. 그런 사내들을 자동선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명나라 사신 김식이 껄떡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자리에서 위기일발로 벗어나 영천군에게 왔으나 내 여자가 되어달라는 아무런 징표를 내어놓고 있지 않아 자동선도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사내들은 다 같은 족속들이야’하는 마음이 차츰 굳어가는 즈음 사가정과 제일청이 다시 찾아왔다.
사가정과 제일청은 싱글벙글 이다. 엊저녁에 뜨거운 살을 마음껏 섞은 흡족한 표정이 역력하다. “사가정 나으리, 사가정 나으리는 항상 즐거운 표정이세요?” 자동선이 샘이 나고 부럽다는 말투다. “그러하느냐? 나야 어디를 가나 술과 여자가 있어 얼굴 짱그리고 속을 태울 여유가 없단다. 그런데 너는 어찌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을 보니 영천군 나으리와 화촉동방을 못 치룬 눈치로구나?” “사가정 나으리, 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니까? 소녀를 어찌 보시고 청교방 창기와 같이 보시는지요? 소녀 매우 섭섭하옵나이다.” “아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내가 사과하느니라...” 그랬다. 자동선의 마음은 영천군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초야를 치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영천군은 자동선의 마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가정은 자동선이 방문을 열어놓고 나간 열린 문으로 내실로 들어갔다. “영천군 나으리 아직도 호박관자를 자동선에게 주지 않았습니까?” “글쎄. 그게...” 영천군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다. 당황하는 표정이 뚜렷하다. “자동선을 청교월 창녀 정도로 생각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자동선은 조선팔도 한양을 넘어 중국 사신들까지 품지 못해 속을 태우는 명기라기보다 여자사대부라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어서 기회를 봐서 호박관자를 주시면서 평생을 책임진다는 약속을 하셔야 몸을 내어 놓을 것입니다. ” 그때서야 영천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두 사내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자동선과 제일청이 들어왔다. 자동선의 손엔 술병이 들였고 제일청의 손엔 거문고가 들였다. 사내들에게 술이 최고이며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데에는 술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 분이 무슨 얘기를 그토록 달콤하게 하시나이까?” 가시가 돋친 제일청의 말투다. 이틀사이에 《송악도》(松岳圖)를 두 폭을 그리는 사이 자동선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을 터인데 아직도 호박관자를 주지 않았느냐는 질책이 섞인 어투다.
술과 거문고를 보자 두 사내 표정이 밝아졌다. 영천군의 표정이 더욱 환하게 피어났다. 자동선을 보자 영천군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쉽고 원망스런 표정 같기도 하다. 자신은 고단한데다 술에 취해 금방 잠에 들어 깼을 때는 옆에 자동선이 마치 등신불(等身佛·사람 키와 같이 만든 불상)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밤새 지켜만 보았냐는 표정이다.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어지고 / 땅에선 한 나무 가지가 되어지고 / 설사 하늘과 땅이 다할 때가 있어도 / 알뜰한 우리사랑 끊길 줄이 있으랴...’ 제일청의 신기에 가까운 거문고 음률과 사가정의 시낭송에 영천군과 자동선의 뜨악했던 정서가 봄눈 녹듯 녹고 진달래 피듯 하나가 되었다. 영천군이 호박관자를 자동선의 가슴에 달자 자동선은 감격에 못 이겨 사내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이제 몸을 맡겨도 된다는 안도의 울음일 게다.
2019-03-06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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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41> 자동선(紫洞仙) <제21話>
세상의 아름다움은 미녀로 귀결된다. 여인의 아름다움에서 세상은 시작되어 여인의 아름다움으로 끝이 난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아름다움을 표시(상징)하는 방식(디자인, 패션)이 다를 뿐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을 대중화한다.
지금 자동선의 의식주(衣食住)는 당시 조선사회가 최고로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가졌다. 그것은 신윤복(申潤福·1758~1813)의 《미인도》가 잘 나타내고 있다. ‘가슴에 그득 서린 일만 가지 봄 운을 담아 / 붓 끝으로 능히 인물의 참 모습을 나타내었다.’ 얼마나 감탄스런 표현인가? 봄기운이란 겨우내 동토(凍土)에서 웅크리고 있던 삼라만상들이 서로 다투어 세상으로 나옴을 뜻하는 것일 게다. 또한 붓끝으로 여인의 극치의 아름다움을 구현함을 말하였을 것이다.
지금 영천군 손을 잡고 있는 자동선이 신윤복의 《미인도》에 나오는 미인이 살아나온 주인공은 아닐까? 사가정과 제일청은 영천군과 자동선이 한시라도 빨리 화촉동방에서 만리장성을 쌓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을 것이 자명하다.
열쇠는 자동선이 가지고 있다. “영천군 나으리! 아직도 소첩이 명나라 사신 김식한테 갔다 너무 늦게 와서 화가 나셨는지요?” 영천군이 자동선의 활짝 핀 함박꽃 빛의 얼굴로 예쁜 짓을 해 보여도 어딘가 그늘이 있어 보여 속이 타는 목소리다. “아니다. 내 너를 보니 너무 기뻐 어떻게 기쁨을 표시할까 궁리중이란다. 잠시만 기다리려무나...” 영천군 특유의 여인 포로작전이다.
서둘러 오느라 자동선은 숨이 찬 목소리며 두 볼은 발그레하게 상기된 채다. “영천군 나으리, 사실은 소첩이 오지 못할 뻔 했었나이다. 그 영감택이 비취노리개를 가슴에 달아주며 수작을 걸어와서 위기를 겨우 넘겼어요. 마침 비취기생이 있어 비취주인은 따로 있다고 하여 그 기생에게 비취를 넘겨주고 어렵게 빠져나왔나이다.” 자동선은 위기일발로 중국사신의 품에서 힘겹게 빠져나와 준 것도 몰라준다는 섭섭함이 묻어있는 말투다.
바로 그때다. “자자.. 사랑하는 남녀사이엔 체면 같은 것은 없어야 진정한 사랑의 관계랍니다. 이제 영천군 나으리와 자동선 미인도 자존심 버리고 백년가약을 맺을 준비나 하소서!” 언제나 분위기는 사가정이 잡았다. ‘어젯밤 산매화가 한 송이 피어났건만 / 산속의 늙은 중은 꺾을 줄을 모르네 / 이제 나이도 젊고 다정한 그대가 / 덩굴 옆으로 달려와 사랑을 묻노라...’ 여기서 늙은 중은 명나라 사신 김식을 알레고리 했을 것이다.
사가정의 시는 계속 되었다. ‘한스럽다. 신선이 옥퉁소를 불어서 / 인간의 이별수를 깨뜨려 주지 못함이 / 산에 온지 사흘에 아직도 못 올랐으니 / 봄바람이 어찌 그다지도 무정하냐 / 어느 날 말을 타고 흥진 속에 파묻히면 / 발에 비쳐있던 그 달은 누가 알아주랴...’ 너무 비싸게 굴지 말고 어서 영천군을 모시라는 일침이다.
시낭송을 마친 사가정은 “자 이제 우리 소임은 끝이 났으니 자리를 뜹시다.”라고 제일청을 감싸 밖으로 나갔다. 단둘이 남자 영천군이 입을 열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이젠 사내가 속이 타는 목소리다. 자동선은 묵묵부답이다. 대답이 없으면 묵시적 동의다.
침묵이 한동안 흐른 뒤 “미천한 소녀가 어찌 영천군 나으리의 말씀에 대꾸를 하겠나이까? 처분만을 기다릴 뿐이옵니다!”라고 영천군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 영천군은 채용신(蔡龍臣)의 《팔도미인》의 예쁜 부분만을 선택하여 탄생한 자동선을 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자동선은 채용신이 그린 《팔도미인》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4대 미인들의 장점만을 골라 삼신할머니가 점지 한 빼어난 재색(才色)이다. 그런데 지금 영천군은 인내와 끈기로 자동선을 품었다. 사가정의 충실한 월하빙인의 역할에 제일청의 수고로움이 만들어 낸 세기의 연리지 작전이었다.
자동선의 울음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영천군은 두 어깨를 들썩이며 섧게 통곡하는 자동선의 상체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다.
어떠한 분위기에서도 뛰어난 해학과 기지로 웃음과 부드러운 분위기로 바꾸어 놓는 사가정도 없어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울음을 끊이지 않는 자동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묘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밤은 깊어만 갔다. 자정이 훌쩍 지났다. 이게 웬일일까? 자동선이 섧게 울다 그만 지쳐 영천군 품에 안겨 잠이 들어버렸다. 가늘게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다. 영천군은 오늘저녁이야 말로 오매불망 했던 자동선과 화촉동방을 치룰수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그 꿈이 문턱까지 갔다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노류장화라 해도 명나라 사신의 수청까지 거부하고 온 자동선을 잠들어 있는 것을 겁간(劫姦)을 할 처지는 아니다. 며칠 동안 사가정과 제일청의 월하빙인 한 것도 있으며 더욱이 두 폭의 그림까지 그려줘 환심을 얻어놨는데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겁간을 한다면 왕손으로 체면이 서지 않아서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어미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자듯 잠을 잔 자동선이 잠시 후 눈을 번쩍 뜨며 “영천군 나으리, 아직 가시지 않고 계셨나이까?”라고 방긋 웃음까지 웃으며 양 볼에 흘린 침을 손으로 쓰윽 닦으며 일어났다.
그 웃음이 영천군의 마음을 또 흔들어 놓았다. “너무 늦으셨어요. 내실로 들어가셔서 주무세요. 소첩은 동기(童妓) 자화(紫霞)와 자고 아침에 다시 오겠나이다.” 자동선은 영천군을 자신의 내실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영천군의 코엔 자동선에게서 풍겼던 싫지 않은 야릇한 암내가 지워지지 않았다.
2019-02-27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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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40> 자동선(紫洞仙) <제20話>
그들은 말 대신 손을 잡았다. “밤공기가 차옵니다.”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가듯 제일청이 사가정을 품어 내실로 들어갔다. 사가정은 제 내실인 냥 들어가자마자 벌러덩 자빠진다. “사가정 나으리, 잠이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소첩이 준비한 해장국을 드시고 자동선 집으로 가셔야 되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제 한숨 자야지... 너도 이리 오너라! 또 자동선 집으로 간다는 말이냐?” 천하의 사가정이 술을 더 마시지 않고 잠을 자겠단다.
지금쯤 영천군과 자동선은 화촉동방을 치르고 있을 것으로 사가정은 생각하고 있다. “제일청아! 너나 가려무나. 나는 여기서 한숨 자야겠다.” 제일청이 끓인 해장국과 술병이 있는데도 사가정이 본 척도 않는다. 영천군 월하빙인 노릇하느라 너무 지친 듯하다.
하지만 제일청의 등살을 이겨낼 사가정이 못된다. 해장국과 술병을 비운 사가정은 제일청을 앞세워 자동선 집으로 향하였다. 영천군도 마침 해장국을 먹고 차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영천군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여 있다. 사가정이 상상했던 엊저녁에 뜨겁고 아름다운 화촉동방을 치르지 못했던 것이다. “영천군 나으리, 어젯밤 잘 주무셨는지요?” 사가정의 깍듯한 아침인사다. “허허허, 그러했소이다!” 기분이 착 가라 앉은 목소리다.
사가정이 그동안 영천군한테 기분이 나쁠 때 듣던 그 목소리다. “사가정 나으리 오셨어요?” 자동선의 목소리는 영천군과는 정반대로 경쾌하고 기분좋은 목소리다. 그녀의 표정은 흡사 무지개 빛깔 같다. “소첩 영천군 나으리의 기분을 푸시게 《자하동》(紫霞洞)곡을 불러드리겠나이다.” ‘집은 송산(송악산) 자하동에 있고 / 은구름 중화당에 서로 접해있네 / 오늘의 기영회 소식 즐겨 듣고 / 한 잔 불로주 드리려 왔소 / 한 잔 마시면 천년 더 사시리니 / 한 잔 들고 또 한 잔 드시라. 여러 손님들...’ 고려문인 채홍철(蔡洪哲)의 무제(無題)다.
제일청의 거문고 음률은 송도에선 적수가 없다. 퇴기로 물러나 있으나 중요 연회석엔 제일청이 초청되어 거문고 솜씨를 뽐낸다. 젊었을 때는 미색과 노래와 춤으로 명기로 떨치더니 이제 나이 들어 청교방 뒷골목에서 장죽에 엽초나 태우고 있을 신세이나 뛰어난 거문고 음률로 오히려 격조 높은 노년을 즐기고 있다.
사가정과 관계를 맺은 것도 거문고가 매개체가 되었다. 사가정의 시에 제일청의 거문고가 만나면 꾀꼬리가 춤을 춘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청교방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이젠 사가정이 송도에 발길이 뜸해지자 그 우스갯소리가 사라지자 제일청의 거문고 인기마저 시들해졌다.
그런데 지금 그 절정의 음률이 되살아났다. 자동선이 춤을 추고 사가정의 시낭송과 제일청의 거문고에 영천군은 천국에 온 듯 넋을 빼앗겼다. 자동선과 아름다운 화촉동방을 못치뤄 침울해 하는 영천군을 위한 단독 연회다.
단독 연회가 끝이 났어도 영천군 특유의 환한 얼굴이 아니다. 사가정은 언제나 영천군 앞에서는 기쁨과 행복감을 만들어주는 어릿광대를 자임해왔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해주어야 자신도 즐겁고 죽마고우로서 소임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제일청의 거문고 솜씨는 젊어서 한창 절정일 때 보다 음률이 더 아름답소이다. 그동안 기명(妓名)만 알았지 성씨조차 몰랐네요. 성씨가 무엇이요?” “예 사가정 나으리, 소첩의 성씨는 여(呂)씨 옵니다.” “여씨라... 입구자 두 개를 포개 놓은 여씨 말이요?” “예. 사가정 나으리. 그러하옵니다.” “허허! 거참 제일청은 윗 입보다는 아랫입이 크구만. 그렇지 제일청?”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척 보면 알지 그런 것도 모르는 풍류객이 어디 있소이까? 여자가 윗 입구보다 아래 입구가 더 크지 않소...” “사가정 나으리는 못 당해! 소첩이 당했네요.” 영천군은 이때서야 박장대소를 하면서 다시 자동선의 손을 꼭 잡았다.
자동선은 춤을 추어 숨소리가 아직도 높다. 사가정의 입담은 계속 되었다. “옛날에 소금장수와 고추장사가 있었는데 두 남자가 배 한척씩 판돈을 평양 명기한테 몽땅 털렸대. 그 입이 자네와는 비교가 안 되게 커서 배 한척씩 거뜬히 들어갔다는 얘기야...” 폭소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아무튼 사가정 나으리는 못 당해요. 소첩은 두 손을 다 들었어요.” “이 사람아. 손만 들어 다행이네 발까지 번쩍 들고 달려들면 어쩌자는 거야? 그 무서운 꼴을 안보니 다행이야. 내가 내친김에 얘기하나 더 하지. 옛날 어느 마을에 꽃 같은 처녀가 있는데 두 청년으로부터 청혼을 받아 부모가 딸에게 의사를 물었더니 두 청년을 모두 남편으로 삼겠다는 거야. 부모가 깜짝 놀라 물었더니 밥은 동쪽에서 먹고 잠은 서쪽에서 자면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소위 동가식(東家食)·서가숙(西家宿)이야기다. 사가정은 중국고전 《소림광기》(笑林廣記)에 나온다는 얘기로 끝을 맺었다. 그때서야 영천군은 오매불망 자동선의 꿈속에서 벗어나 잠시 파안대소 하였다.
영천군의 파안대소엔 자조의 표정이 섞였다. 자동선은 잡혀있던 손을 빼 스스로 영천군 손을 잡았다. 어차피 허락할 몸, 너무 속을 썩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다. 영천군의 손은 체구에 비해 작고 비단결 같다. 자동선 손이 오히려 더 억세 보였다.
이때서야 비로소 영천군의 얼굴에 그늘이 걷혔다. 사가정도 얼굴에 웃음기가 생겼다. 영천군의 표정이 어두우면 사가정은 이심전심으로 그늘이 생긴다. 자동선을 보기 위해 한양에서 송도까지 왔으나 꼬박 이틀이 지난 뒤 이제 겨우 손을 잡고 따뜻한 정을 나눌 분위기가 되어서다.
자동선과 영천군이 잘 되어야 자신도 제일청과 오랜만에 재회의 회포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사가정은 언제고 손을 내밀면 품에 안길 제일청이 있어 밤이 기다려지는 사내다.
하지만 영천군과 자동선은 그런 사이가 아니다. 영천군은 영천군대로 왕손의 체면을 중시하고 있으며 자동선은 그녀대로 명기(名妓)의 위신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체면과 위신을 조금씩 내려 놓으려하고 있다.
2019-02-20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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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39> 자동선(紫洞仙) <제19話>
삼현육각(三絃六角)의 풍악소리와 휘황찬란하게 켜진 등불에 자동선은 잠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푸른 녹음에 젖었던 싱그러움이 삽시간에 적응이 쉽지 않았으며 영천군과 사가정의 넉넉한 풍류 분위기가 아직도 몸에서 떠나지 않은 상태다. “자동선이 납시었습니다.” 이방의 보고에 흥청대던 분위기가 갑자기 멈추는 듯하였다.
명나라 사신 김식(金湜)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자동선을 맞았다. “네가 자동선이냐?” 명나라 사신은 대국의 체면도 잊은 듯 자동선의 손을 덥석 잡으며 기쁨에 넘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네 소녀 조선국 기녀 자동선이라 하옵니다.” 추호도 떨림이 없는 대답에 김식이 오히려 주춤하였다.
고개를 조아리며 다소곳한 음성으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조선국 기녀란 또렷한 응답에 상국의 사신이 되려 움찔 했던 것이다. ‘요것 봐라. 기생주제에 조선국이란 나라이름까지 들먹이는 맹랑한 계집...’이란 입속말을 하며 손에 힘을 주어 잡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네가 중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자동선이냐?” “예 사신 나으리, 명나라에까지 소녀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는 말씀은 소녀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국엔 자동선은 소녀 하나뿐이옵니다...” 너무도 당당한 대답이다. “중국 사신 장녕이란 한림학사를 알고 있느냐?” “소녀 중국 분을 여러분을 모셨음으로 어느 분이 장녕이었는지 송구스러우나 장담할 수는 없사옵니다.” 김식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내일 저녁엔 귀국해야 하는데 밤은 오늘 뿐이다. 그런데 맹랑한 자동선과 잠자리를 하려면 오늘밤만으론 불가능해 보여서다. 비록 기생이지만 반듯한 언행이 어느 정경부인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소녀 손을 놓으셔야 사신 어른께 술을 권해드리지요...” 김식은 자리에 앉아서도 자동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자동선의 손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중국여자와 이웃 속방(屬邦)국가 여자들과 다르게 김식은 평온함을 느꼈다. ‘자동선이야 말로 진정한 여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이 처음이 아니다. 올 때 마다 조선여자들과 잠자리를 했으나 자동선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 여자들과 전혀 다른 느낌이다. 꼭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은 여자다.
밤은 속절없이 깊어갔다. 김식의 언행은 점점 노골적으로 나왔다. ‘삼월이라 조선 땅엔 꽃이 활짝 피어나 / 꽃 속에서 그대 만나 거나하게 취했네 / 멀다한들 그다지 먼 나라가 아니니 / 오늘 갔다 내일 또 올 수도 있다네...’ 김식은 행여 외국인이라 깊은 정이 들어 헤어지면 걱정이 될까 미리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다는 것까지 예고하였다.
하지만 이 구렁이 같은 늙은 떼 놈의 속셈을 모를 자동선이 아니다. ‘산 속에 사는 중이 달빛이 탐이 나 / 물과 함께 달빛도 병에 담아 왔소 / 절에 돌아와 병을 기울려 보니 / 달은 간데없고 병에는 물뿐이어라...’ 이규보의 시 《무제》(無題)다. 자동선은 늙은 네가 나를 아무리 탐내도 나는 달빛과 같은 여자이니 헛물켜지 말라는 일침이다.
그러나 노련하고 끈질긴 김식이 쉽게 물러설 리가 없다. 손은 어느새 뱀이 혀를 날름대듯 자동선의 속곳 밑을 이곳저곳을 오고가고 있었다. 사내 손은 불같이 뜨겁고 징그럽다. 자동선은 계속 옆에 앉아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려하였다. “허허! 너는 내 옆에 그냥 앉아 있거라. 춤이야 딴 아이한테 추라고 하렴...” 김식이 육십은 넘어 보이고 머리까지 백발이나 사신으로 다니면서 주지육림의 대접을 받아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피부다.
김식의 행동은 대담하다. 하지만 상국(上國) 사신이라 누구하나 감히 충고나 예의를 지키라고 말 한마디 못하는 분위기다. “내 너에게 선물 하나를 해야겠다.” 라고 말한 김식은 호주머니에서 비취(翡翠)노리개 한 쌍을 꺼내 자동선의 가슴에 달아주었다. “아니옵니다!”라고 매몰차게 말을 한 자동선은 당나라 시인 장적(張籍)의 《절부음》(節婦吟)을 읊었다. ‘그대 아시 듯 소첩은 남편 있는 몸 / 어쩌자고 쌍명주를 정표로 주오 / 따뜻한 그 애정 사무치게 고마워 / 붉은 비단 저고리에 살짝 차보오...’라고 읊고는 말을 이었다. “이 비취는 주인이 따로 있사옵니다. 여기있는 기녀 중 소첩보다 더 예쁜 비취가 있사옵니다. 그 여인을 불러 따뜻한 가슴에 달아주시옵소서!” 말을 마친 자동선은 가슴에 달린 비취를 빼 김식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동선은 김식에게 큰 절을 하고 자리에서 떠났다. “저런 버릇없는 계집을 봤나! 어디 명나라 사신 앞이 어떤 자리라고...” 송도 유수는 안절부절못하였다. “아니요. 괜찮소이다. 자동선을 돌아가게 그냥 놔두시오... 동방예의지국다운 절부요. 내 부끄럽소. 남편이 있는 여자를...” 김식도 자동선의 똑 부러진 언행이 기분 나쁘지 않고 보호해 주고 싶은 여자로 보였던 것이다.
이때다. 비취가 나타났다. “소첩이 비취옵니다.” 자동선에게 성정이 흐려진 김식은 비취도 예뻐 보였다. “오! 네가 비취냐? 이제 이 비취 주인이 나타났구나...” 김식은 앞뒤 안 가리고 비취를 품었다.
자동선은 집으로 뛰 듯 걸었다. 영천군과 사가정은 여전히 술판이다. “나으리들! 소녀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국익을 위해 잠시 자리를 떴을 뿐 되레 너의 절도 있는 언행에 박수를 보내주어야겠구나.” 사가정의 분위기 통솔 능력은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영천군은 졸다 마시다 하고 있었다. “영천군 나으리! 소녀 자동선이 다녀왔습니다.” 자동선이란 말에 영천군은 놀란 토끼모양 반짝 눈을 떴다.
어느새 닭이 홰를 치며 새벽을 알린다. “자동선은 영천군을 모셔라! 나는 객사로 가련다...” 사가정은 반쯤 남은 술잔에 술을 마저 마시고 일어나 나왔다. 달은 샛별에 가려 아름다움을 잃었다. 저만치 희미하게 여인이 보였다. 제일청이다.
2019-02-13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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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38> 자동선(紫洞仙) <제18話>
문밖에서 갑자기 나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동선이 끌고 온 나귀다. 자동선은 벌써 송악산 유람을 위해 나귀를 끌고 객사로 영천군과 사가정을 모시러 온 것이다. 아직 어둠이 덜 걷힌 상태다. 술국을 끓여 두 사내에게 대접하려는 속내다. “나으리들 일어나셨는지요?” 제일청의 목소리다. “게 누구요? 이렇게 새벽 일찍이?” 사가정은 제일청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이다. “예. 나으리 청교월에 제일청입니다. 자동선이 술국을 끓여 놓고 나으리들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자동선이란 말에 영천군은 천둥에 놀란 아기 노루 모양 발딱 일어났다.
두 사내는 자동선의 내실로 안내되었다. 내실 안엔 처음 들어갔다. 자동선도 내실에 사내를 안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더욱이 두 사내를 동시에 스스로 안내한 것은 자신도 놀라워하고 있다. 어쩌다 기생이 되어 사내를 접대하게 되었을 때도 술좌석에서 헤어졌으며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영천군과 사가정이 자동선의 내실에서 술국을 먹고 있다. 그것도 자동선이 직접 끓여 해장술과 함께 먹이고 있는 것이다. 경천동지 할 사건이다. 생애 최초 자동선의 마음을 휘어잡은 두 사내다. 한 사내는 옥골선풍 헌헌장부의 품위로 자동선의 마음을 샀으며 한 사내는 웃음과 해학으로 자칫 위축될 수도 있는 분위기에서 자존심을 부추겨 주었다.
그동안의 사내들은 자동선을 욕정을 채워주는 고깃덩어리로만 보아주었던 것이다. 자동선은 그런 눈초리가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런데 지금의 두 사내는 자동선을 하나의 인격체를 넘어 재기 넘치는 재녀(才女)로 대하여 더 없이 신나는 표정이다.
이제 해장 술국이 끝나면 제2차 송악산 유람 길에 오르려 한다. 오늘도 두 남자와 두 여자가 산행에 나섰다. 송악산은 어제 봐도 명산이고 오늘 또 봐도 변함없는 명산이다. 그런데 사내들은 각각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다. 특히 영천군은 자동선의 자태에 넋을 빼앗긴 눈치다. 사가정은 자동선의 비위를 맞춰가며 영천군과 가까워지길 온 신경을 쏟는다. 월하빙인(月下氷人·중매인)이 되었다.
송악산 중턱 즈음 오르자 옥수같은 물이 흐르고 그늘도 넉넉한 바위가 나타났다. 제일청은 재빨리 돗자리를 펴고 술상을 차렸다. “날도 더운데 더 올라가시지 말고 이곳에서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즐기세요!”라며 제일청이 퇴기다운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사가정이 그냥 넘길 리가 없다. “허허 청풍은 있으나 명월은 없지 않느냐?” 하자 자동선이 거들고 나섰다. “참 나으리도 딱 하시네요! 명월은 밤에만 뜨나요? 여기 낮 명월이 두 개나 떴네요? 아직 보지 못하신 모양인데 등하불명이 분명하시군요... 바로 옆에 두둥실 떠 있는데 못 보시고 있으시다니...” “하하하! 내 이제 막 불혹(不惑:40)인데 봉사가 되었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지?” 천하의 사가정이 자동선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겠으나 능청을 떨었다.
이틀사이에 자동선이 농까지 할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몇 백 년은 됐을 소나무 그늘 아래 두 사내와 두 여자는 술판을 벌였다. 무릉도원이요 동천(洞天:신선이 산다는 이상적인 곳)이다. 사내들은 자동선주 몇 잔에 금방 취하였다. 특히 사가정이 일부러 일찍 취한 척 혀꼬부라진 소리를 한다.
오늘은 월하빙인 역할을 제대로 하려는 속내다. “자동선아. 네 스스로 낮달이라 했으니 달을 보고 즐거워 할 사람들의 흥을 돋워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 영리함으로 내 말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술이 있으면 가무가 있어야 하고 계집이 있어야 하는데 낮달이 떴으니 계집은 됐고 가무가 없지 않느냐? 내가 거문고를 말할 것이다. 거문고는 내 입속에 있느니라...” 술판은 점점 무르익어 갔다.
자동선의 춤은 가히 명품이다. 백결(百結:백번을 기웠다는 뜻)선생의 떡방아소리 못지않은 사가정의 입 거문고 음률에 맞춘 자동선의 춤사위는 명품 중 명품이다. 사가정은 신라 자비왕(458~479)사람 백결의 떡방아 소리는 ‘금’ 악기로 켰으나 사가정은 입으로 거문고 소리를 냈다. 거문고 소리에 선녀의 춤을 뺨치는 자동선의 춤사위에 영천군은 넋을 잃었다.
이때다. 자동선이 춤을 멈추며 “영천군 나으리, 오늘도 그림 하나 더 그려 주시지요?” 라며 영천군 귀에 대고 속삭인다. 춤을 추다 갑자기 멈추어 숨이 찬 목소리다. 춤추는 바람에 옷이 헝클어져 겨드랑이 사이로 풍만한 한 쌍의 유방이 영천군 눈에 들어왔다. “영천군 나으리 그리 하시지요! 자동선이 저토록 간청을 하니 소원을 풀어주시지요!” 사가정은 이때다 하고 자동선을 거들었다. 자동선도 제일청에 눈짓을 하여 준비했던 비단을 술상 보에서 꺼냈다.
영천군도 기다렸다는 듯이 비단에 송악산과 송도 고을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송악산을 둘러싼 진봉산·봉명산·천마산·오공산 등을 일필휘지로 그려 나갔다. 영천군의 호탕한 운필에 자동선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사가정 나리, 이 그림에 찬시 한 수 넣어주시지요.”라며 왼쪽 눈을 찡긋 눈웃음을 보냈다.
사가정이 누구인가! 샘물처럼 즉각 시 한 수를 토해냈다. ‘노래는 끝났어도 가락은 끝이 없네 / 지난 일 뜬구름 같아 머리가 비어 있소 / 옛 궁의 낙타가 울어 슬픔이 그윽한데 / 두견새 울어 예여 눈물조차 붉도다.’ 자동선은 그림과 시를 번갈아 감상하며 쏟아지는 감격의 눈물을 억제한다.
그때다. “자동선이 어디 있느냐? 송도 유수께서 급히 너를 찾느니라. 내 말이 들리면 어서 대답하라!” 유수의 이방(吏房)의 숨이 찬 목소리다. 사가정이 나서 이방의 말을 듣는다. “무슨 연유냐?” “자세히는 모르나 명나라 사신이 왔습니다.” 명나라 사신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자동선아, 어서 가서 명나라 사신을 맞아라! 우리는 너의 집에 가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라...” 영천군답게 국익을 먼저 생각하며 분위기를 추슬렀다. 제일청은 재빨리 술판을 정리하고 자동선과 함께 명나라 사신 연회장인 옥촉정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닭 쫓던 개꼴이 된 두 사내는 자하동 자동선 집으로 힘없는 발길을 향하였다.
2019-02-07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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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37> 자동선(紫洞仙) <제17話>
거문고 선율에 맞춰 자동선의 춤은 선녀 같다. 두 사내는 술잔을 든 채 입을 딱 벌리고 자동선의 춤사위에 넋을 잃었다. 제일청의 거문고 솜씨도 뛰어났다. 지금은 제일청이 퇴기로 청교방 거리 뒷전에 물러나 있으나 10년여 전만 해도 송도 한량들이 줄을 섰다.
미색에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거문고면 거문고 못하는 것이 없는데다 잠자리와 인심까지 박절하지 않아 한량들이 부나비처럼 꼬였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지금은 자동선의 심부름과 손님들의 길라잡이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사가정 같이 가뭄에 콩 나듯 예전의 고객이 찾아오면 알뜰히 모았던 주머니 돈까지 탈탈 털어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정이 그리운 것이다. 제일청은 특히 사가정에 애틋한 정을 느끼고 있다. 제일청이 송도유수 진명원(陳明元·가명)에게 수청을 든 지 한 달이 채 안되었을 때 사가정을 맞았다. 그녀는 몸과 마음까지 열어 사내를 맞이한 것은 사가정이 처음이었다. 지금도 헌헌장부에 여자들이 한번 보면 빠져드는 호남이지만 10여 년 전의 모습에선 광채까지 빛나는 옥골선풍이었다. 그 모습에 제일청은 영혼까지 빼앗겼다.
춤과 노래가 곁들인 술판의 여름밤은 짧기만 하다. “이제 돌아가셔서 쉬시지요! 내일 송악산 깊은 곳을 유람하시려면 넉넉한 취침을 하셔야 해요....” 자동선은 영천군과 사가정을 닭 쫓듯 내몰았다.
지난밤도 낮에 찰나적으로 춤사위로 본 자동선의 앙증맞은 엉덩이와 신비하기까지 해 보이는 음문의 꿈만 꾸다 밤을 샜는데 오늘도 닭 쫓던 개 모양 객사로 내어 몰리자 영천군은 부아가 퉁퉁 부어올랐다. “사가정, 우리 꼴이 이게 뭔가? 아무래도 한양으로 돌아가야 할 듯하네...” “영천군 나으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자동선 하나를 못 품고 한양으로 되돌아가자고요? 그것은 아니 됩니다.” 사가정의 말엔 자신감과 자존감이 섞인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풍류객의 넉넉함의 모습이다. ‘송도의 왕기는 이미 사라져 버려서 / 무심한 구름과 잡초만 무성하고 / 성은 있어도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니 / 산천은 같아도 사람은 나그네 뿐이네’ 사가정의 죽마고우 이승소(李承召·1422~1484)의 시다.
영천군은 천하미색 자동선을 오늘밤은 품으려나 하고 기대가 컸으나 헛물만 켠 자신이 너무나 미웠던 것이다. 무심한 달은 휘영청 밝다. 깊은 산 속에선 부엉이까지 울어댔다. 여름이지만 새벽공기는 제법 차갑다. 얼큰하게 취한 몸엔 한기까지 들며 재채기에 소름까지 돋았다. 이처럼 으스스 할 때는 따뜻한 계집이 더욱 그립다.
두 사내 심정이 지금 딱 그러하다. “영천군 나으리, 내일은 꼭 자동선의 마음을 잡으셔야 됩니다.” “어떻게 그 아이의 마음을 잡는다는 거요? 나는 자동선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 가슴이 답답하다는 난감한 표정이다. “장래를 책임지겠다는 징표를 주셔야지요? 기생이 더욱이 천하미색 자동선이 몸을 내어 줄 때 청교방의 기생이나 한양의 장악원 아이들을 생각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영천군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에 검은 구름이 흘러갔다.
두 사내의 갈피 없는 대화는 어느새 새벽을 맞았다. 어젯밤에 마신 술로 속도 쓰리고 잠까지 설쳐 몸이 천근만근이다. 영천군이 더 지쳤다. “나 잠시 눈을 붙여야겠네...” 영천군이 어찌된 영문인지 금방 코를 골았다.
그런데 곧이어 잠꼬대를 하였다. “야 이년아! 내가 누군데 네 년의 콧대가 얼마나 가나 보자!” 자동선에게 하는 소리 같다. 사가정은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여자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는 영천군이 한심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사가정은 밖으로 나왔다. 객사 뒤로 개천이 흐른다. 개천엔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옥수 같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다. 부엉이 울음소리에 두견새 소리까지 요란하다. 한양 북촌과는 판이한 환경이다.
그때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제일청이다. “나으리, 소첩이 술국을 끓여 놨습니다. 영천군 나으리와 함께 오셔서 드시고 자동선에 가서 송악산 나들이를 떠나시죠!” 알뜰한 배려다. “고마우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내 너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데...”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첩이 좋아서 하는 것인데 나으리는 개념치마소서...” 제일청의 갑자기 울음 섞인 목소리다. “왜 무슨 일이 있느냐?” 사가정이 제일청을 품는다.
제일청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가정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영천군이 자동선을 설득하여 한양으로 데려가면 사가정도 따라가면 언제 다시 볼지 몰라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 되어서다.
사가정은 제일청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내 영천군을 모시고 다니는 친구인지라 올라갔다 내 곧 다시 내려올 것이니라. 너무 아쉬워하지 말거라.” 사가정이 제일청의 등을 두드려 겨우 진정시켰다. “주제도 모르고 주책없이 날뛰어 소첩이 밉지요?” “아니니라. 나는 네가 귀엽고 예쁘기만 하니라.” 제일청은 예쁘고 귀엽다는 말에 마음이 진정되는지 울음을 그쳤다. 그러나 속으로 우는지 어깨가 들썩이다 한참 후에 멈추었다.
퇴기에게 귀엽다는 얘기는 결코 칭찬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똑같은 말이라도 누구한테 듣느냐가 중요하다. 지금은 사가정에게 듣는 예쁘고 귀엽다는 말은 제일청에겐 진정으로 하는 말로 들려서다. ‘날은 암담하고 시간은 더디간다. / 좋은 시절 돌아왔으나 옆은 싸늘하다. / 향로 연기는 내 마음 수심같이 끊길 줄 모른다. ’ 술 한 잔 들고 국화를 바라보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여윈 모습이 / 문득 내가 아닌가! / 임은 그리움을 부르고 외로움은 임을 부른다.‘ 이청저의 《안개 엷고 구름 짙은 시름 가득한 긴 오후에》다.
지금 제일청의 마음이 이청조와 닮은 꼴일 게다. 사내들은 같을 것이라 생각하는 제일청이다. 품고 욕정을 채울땐 그들은 입속의 혀라도 빼줄 듯이 말하다가도 떠나면 남이 되는 것이 기방을 찾는 사내들 속성이다. 제일청은 사가정도 그들 중 한 사내일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다.
2019-01-30 0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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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36> 자동선(紫洞仙) <제16話>
송악산은 아름답고 웅장하기까지 하다. 개성(옛 송도)을 내려다봄은 장관이다. 쌍쌍이 앉았다. 몇 백 년은 됨직한 소나무 밑에 두 사내 두 여인이 술잔을 나눈다. 신선이 따로 없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이따금씩 쪽빛 하늘에서 뱃놀이를 하듯 오락가락하며 지루한 여름 한낮을 더욱 여유롭게 만들고 있다. “영천군 나리, 저 아름다운 개성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리면 어떠하신지요?” 술잔이 두어 순배 돌자 사가정이 영천군을 바라보며 정적을 깼다. 소나무 그늘에서 술잔을 기우리며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남자는 남자대로 신나고 가슴이 뻐근한 생각을 했을 것이며 여자는 여자 취향에 맞는 가슴이 뻥 뚫리는 아름다운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말하지 않았다. 개성을 내려다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이에 사가정이 정적을 깼다.
영천군은 아무 말 없이 지필묵을 꺼냈다. 이때다. “자동선아! 영천군께서 그림을 그리시니 너는 거문고 선율에 맞춰 춤을 추거라...” “거문고가 어디 있나이까?” “거문고는 내 입안에 있느니라. 어서 거문고 걱정은 말고 춤이나 추거라...”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속곳 바람의 자동선이 갑자기 불어 온 돌개바람에 엉덩이와 음문까지 보이고 말았다. “어머나 이를 어쩌나!” 자동선은 기겁을 하고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두 사내는 신나고 즐겁다는 듯이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잠자리에서도 보기 쉽지 않은 진짜 보고 싶고 갖고 놀고 싶은 것을 돌개바람이 알아서 해주었으니 얼마나 기분 좋고 신나는 장면이었을까? 자동선의 엉덩이와 음문은 미색(美色)과 재기(才氣) 못지않게 예쁘고 앙증맞았다.
영천군은 벌써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자동선은 오늘따라 팬티를 입지 않았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속곳과 치마만 입고 왔는데 심술궂은 돌개바람이 장난을 치는 소동에 본의 아니게 잠자리에서나 보일 수 있는 비밀스런 곳을 드러냈다.
그런데 두 사내는 비밀스런 두 곳만 본 것이 아니다. 다리를 번쩍 드는 찰나에 사타구니 등에 불긋불긋하게 돋아나 있는 땀띠도 보았던 것이다. 사실 자동선도 엊저녁은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새 아침도 설치고 얼떨결에 팬티를 못 입고 왔던 것이다. “어머니(제일청 지칭) 나 어떻게 창피해서 그대로 못 있겠어요!” 자동선이 헝클어진 치마의 매무새를 다잡으며 석류알처럼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영천군과 사가정을 쳐다보았다. ‘송악산 신령한 사당을 찾아보려고 / 꼭대기에 오르니 전망이 놀랍구나 / 성안의 집들은 벌떼처럼 촘촘하고 / 오가는 사람들은 개미같이 부산하다.’ 사가정의 읊음이 끝나자 “그 시가 사가정의 시요?”라고 영천군이 물었다. “당연하지요. 제 시올시다.” “아니에요. 사가정 풍류객이 읊은 시는 고려시인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 시 이옵니다.” 자동선이 방금 전까지 돌개바람의 심술궂은 장난에 엉덩이와 음문까지 드러내 침울해 있다 시 얘기가 나오자 발랄함을 되찾았다. “역시 자동선은 미색 못지않게 재기와 시문에도 탁월하구나!” 영천군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동선 칭찬에 열을 올렸다.
자동선의 일거수일투족에 정신이 혼미해진 영천군은 애써 마음의 중심을 찾아 허리에 차고 있던 필낭(筆囊)과 묵두(墨斗)를 꺼내 바위에 놓았다. 이때 영천군은 갑자기 생각난 듯 “화선지가 없지 않느냐?”라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서 있던 자동선이 비단치마 한쪽을 부드득 찢어 바위에 펼쳐 놓으며 “영천군 나으리, 소녀 치마에다 그림을 그리시죠...”라고 생긋 웃음까지 보이며 말하였다.
두 사내는 다시 한 번 놀란다. 거침없는 자동선의 행동에 경의까지 표시하는 눈치다. “너는 그렇게 치미를 찢으면 속곳 바람이 아니냐?” 제일청이 되레 백지장 얼굴이 되었다. “괜찮아요. 어머니! 어차피 엉덩이에 음문까지 보였는데 더 숨길게 뭐 있어요?” 자동선은 돌개바람에 엉덩이와 음문이 드러났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대담하기까지 하다. ‘한 떨기 송악산이 하늘 높이 솟았는데 / 노을 진 옛 성터에 잔 연기가 서린다. / 애달프게 옛일은 물어 무삼하리오 / 영화롭던 때와는 경치조차 다른 것을...’ 사가정의 일기가성(一氣呵成)으로 휘갈겨 쓴 영천군의 그림 찬시(贊詩)다.
자동선의 독촉으로 사가정이 흥에 겨워 단숨에 쓴 절창(絶唱)이다. 영천군보다 자동선이 더 좋아한다. “사가정 풍류선비님! 오늘 저녁과 엊저녁 술값은 아니 받을 것이옵니다.” “허허 그럼 자동선 너는 이 사가정에게서 술값을 받으려 했었느냐?” “아니 그게 무슨 해괴한 말씀이신지요? 기생집에 와서 술을 마셨으면 당연히 술값을 내셔야지요! 외상술을 드시려 하셨는지요?” “그것이 아니고 이 사가정은 술값을 내고 기생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없어 그런다..” 이때 옆에 있던 제일청이 자동선에게 눈짓을 하였다.
술값 얘기는 하지 말라는 신호다. 제일청 본인은 사가정의 사내답고 풍부한 해학의 매력에 빠져 맛있는 술과 알뜰히 지킨 몸도 주고 노잣돈까지 두둑이 준 사실을 떠올리는 눈치다. 하지만 자동선이 사가정과 제일청의 하늘과 땅만 아는 비밀스런 과거를 알리 만무하다. 그래도 제일청이 자동선에게 지금처럼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언행을 제지시키기는 처음이라 얼른 말길을 돌려야 했다.
지금까지 제일청의 말을 들어서 일을 그르친 적이 없어서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어 가네요. 집으로 가서 그림 턱을 내겠사오니 어서 하산하시지요.” 자동선은 제일청이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대비했던 치마를 입고 자하동 집으로 영천군과 사가정을 안내하였다. “어머니 고마워요!” 자동선은 제일청의 어느 경우에도 철저한 대비로 위기를 지혜롭게 넘기는 기지에 다신한번 놀란다.
한편 두 사내는 오늘 저녁이야 말로 주지육림의 황홀한 밤을 즐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발걸음이 가볍다.
2019-01-23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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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35> 자동선(紫洞仙) <제15話>
두 사내와 한 여자는 송도유람에 나섰다. 사가정의 제의로 성사되었다. 자동선은 술과 안주를 챙겼다. 그리고 자동선은 나귀에 올랐다. 사가정은 영천군에게 나귀 탈 것을 권하고 싶었으나 아직 효령대군의 자제라는 것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건장한 사내에게 나귀를 타라고 여자인 자동선에게 양보를 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송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송악산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자동선이 길라잡이다. 나귀 위의 자동선은 더 예쁘다. 사가정이 고삐를 잡고 영천군이 뒤따랐다. 제일청도 자동선이 불러 동행을 한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상쾌하다. 여름이지만 오전엔 송도의 날씨는 시원하다.
사가정은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제일청이 따라와서다. 제일청은 비록 이젠 노기(老妓)로 옥골선풍 헌헌장부의 발길은 뚝 끊겨 청교방거리 뒤켠에서조차 밀려났으나 인간미가 넘쳐 옛정을 못잊어 심심치 않게 사내들이 드나들었다. 사가정도 그 중의 한 사내다.
세월의 무게가 실린 아름다움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어찌 보면 한창 때는 자동선을 뛰어넘는 미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월에 밀려 자동선 손님의 뒷바라지에 나섰다.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하더니 빈말이 아니었다. 청교방 거리에서 제일청하면 오가는 사람에게 물어봐도 “저기 저 집이요!” 라고 했는데 지금은 철지난 꽃으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가정에겐 제일청이 철 맞아 한창 피어난 꽃처럼 보였다. 영천군은 나귀에 탄 자동선의 동태만 살피고 사가정은 제일청의 속삭임에 정신이 없다.
송악산으로 가는 길엔 왕윤사(王輪寺)가 있다. 울창한 삼림에 둘러싸인 왕윤사는 한때는 수 백명의 스님들이 거주 했었으나 지금은 대웅전과 초라한 건물 몇 채만이 옛 영화를 대변해 주고 있다.
대웅전에 닿자 자동선이 나귀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대뜸 ‘전각은 황량하고 중은 보이지 않네 / 황금 부처님만이 뉘연히 앉아 있네 / 선탑에 쌓인 먼지를 바람이 쓸어가고 / 어두운 창가에 달이 등불처럼 비친다.’ 용재 성현(慵齋 成俔)의 시다.
사가정이 깜짝 놀라 “네가 어떻게 내 친구 성현의 시를 알고 있었느냐?”라며 자동선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양 나으리는 풍류엔 뛰어난데 기녀들을 너무 낮게 보시는 경향이 있으시네요? 앞으론 그렇게 보지 마세요. 그렇게 했다간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사옵니다. 기녀들을 길가에 핀 한 떨기 꽃으로 보시고 꺾었다 버리면 그만이란 생각은 이젠 버리셔야 하옵니다.” 자동선의 단호한 말투에 천하의 풍류객 사가정도 움찔하였다. 어설피 행동했다간 영천군 나리 앞에서 망신을 당할 것 같아 언행에 신중 신중을 속으로 다짐하였다.
자동선은 단순히 미색으로만 보았는데 높은 인격과 풍부한 학식을 갖추어 웬만한 사대부는 우습게 볼 학기(學妓:학식이 높은 기생)가 아니었던가? 영천군도 성현의 시를 읊는 자동선을 보고는 침착해 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사내들은 충동적이다. 본능이다. 농경사회에서 사냥을 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생태적 본능이 시대가 바뀌어도 본능은 바뀌지 않는다. 시대와 환경에 발전, 진화하여 언행도 바뀔 뿐이다.
두 사내와 두 여자는 짝을 이뤄 어느새 귀산사(龜山寺)에 이르렀다. 왕윤사에 공민왕이 자주 들린 것과 같이 귀산사에 충렬왕이 들려 국태민안의 기도를 올렸다. 산이 깊어 갈수록 송악산 절경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울창한 나무 위에선 꾀꼬리들이 쌍쌍을 이뤄 노래 부르며 사랑을 나누고 있다.
벌써 영천군은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다. 사가정은 어떻게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야했다. 마침 널따란 바위가 나타났다. “제일청아! 우리는 봉우리로 올라가 정상을 보자꾸나! 두 분은 여기서 잠시 쉬었다 올라오시게 하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가정은 제일청의 손을 잡고 달리듯 정상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였다.
영천군도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에 나섰다. “자동선아, 사가정의 말대로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자! 내 어젯밤에 한숨도 못자 피곤해서 더는 못가겠다...” 영천군은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는 바위에 주저앉아 이인로(李仁老)의 《산거》라는 시를 읊었다. ‘봄은 가고 꽃은 아직 남아 있는데 / 하늘은 맑고 골짜기는 그윽하다. / 두견새 소리가 한낮에 들려오니 / 여기가 살기 좋은 곳임을 알았노라...“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되는 듯 자동선 앞에서의 영천군도 도연명이 오얏마을에서 심정인 듯하다.
사가정은 산봉우리에서 영천군을 기다리다 못해 술병을 들고 다시 바위로 내려왔다. “두분께선 서로 보기만 하고 뭘 하고 계십니까?” 젊은이들이 만났으면 한바탕 불꽃을 튕겨야 하지 않나요?“ 자동선은 사가정의 말에 즉각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해괴한 말씀이세요? 이 대명천지에...“ 그러나 사가정이 누구인가! 한 치도 물러설 리 없다. ”허허 하늘이 맺어준 배필 같으오...“ 사가정은 말과 동시에 술잔을 연천군에게 건넸다.
연천군은 마침 목이 탈 때다. “허허 자동선이 눈치도 빠르고 웃어른을 모실 줄 아는 현숙한 여인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알았나 보네. 이 어른이 어떤 어른인지 아느냐? 세종임금의 손자이시고 효령대군의 자제분이시다. 정성껏 잘 모셔야 하느니라!” 세종임금의 손자라는 말에 깜짝 놀란 듯 발딱 일어나 큰절을 올린다. “소녀 어르신을 몰라 뵈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시옵소서...” “아니니라. 내가 밝히지 않은 죄가 더 크니라!” 옆에 있는 사가정의 표정이 밝아졌다. 영천군이 그 어느때 보다도 표정이 밝아서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피로한 표정이 역력했는데 그런 기미가 온데간데없어졌다. 영천군은 자동선이 따른 술잔을 받아 마시고 그녀의 손을 덥썩 잡고 산봉우리를 향해 뛰듯 걷는다. 산봉우리에 올라가선 무슨 일을 결심한 눈치다.
2019-01-16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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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34> 자동선(紫洞仙) <제14話>
객사(客舍)로 돌아온 두 사내는 새벽녘이 되어도 잠을 못 이룬다. 영천군이 더 심하다. 사가정은 먼 산사에서 새벽종이 울리자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영천군은 아직도 뜬눈인 채다. 자동선이 눈앞에서 어른거려서다. 마음 같아서는 팔을 뻗어 와락 껴안아 내 여자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으나 사나이 체면 때문에 참고 또 참았던 것이다.
그것이 아쉬웠다. 참기는 왜 참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밤을 꼬박 새면서 후회할 것을 하는 생각에 이젠 눈이 뻑뻑하고 자신이 미워졌다. 천하의 영천군이 송도에 와서 한양에서 부리던 그 기개가 다 어디에 가고 일개 계집 앞에서 주눅이 들어 언행(言行)을 삼갔던 왕손이 아닌가? 낮에 일어났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던 것을 되돌아 보다 깜빡 잠이 들었다.
꿈에 자동선이 나타났다. 그녀는 이승에 살고 있는 선녀 같다. 지금껏 조선 팔도를 유람하면서 예쁘다는 여인을 다 품어봤으나 자동선 만한 미색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슬이 은하수를 씻어 달빛이 둥그니 / 금잔에 가득한 술이 오히려 차갑도다 / 자하동 한가락에 사람은 옥 같이 밝고 / 촛불 아래 즐거운 밤은 끝이 없어라’ 고려 시인 권부(權溥)의 《자하동》시를 읊는 것이다. 너무나 생생한 모습이다.
자하동은 미모도 지금껏 보아왔던 그 어떤 여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미색을 지녔을 뿐만이 아니라 해박한 시문(詩文)에 대한 지식은 사가정과 견주어도 조금도 뒤지지 않을 듯 보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밤이 영천군은 너무 길었다. 선녀 같은 자동선을 품었던들 여름밤은 마른하늘의 번개처럼 일향(촌음)인 듯 지나갔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밤이 너무 길다. 사가정은 더운지 물건이 보일락 말락 하게 바지를 내리고 두 다리를 있는 대로 벌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 천하가 제 세상이다. 그가 가는 곳엔 늘 술과 계집이 기다리고 있다. 풍부한 해학과 옥골선풍 헌헌장부의 용모에 계집들은 그가 나타나면 자지러지며 오금을 못 편다.
영천군은 은근히 사가정이 부럽고 질투가 났다. 그리고 그가 이웃에 살고 있어 보고 싶고 아쉬울 때 부르면 언제나 만날 수 있다는 데에 고마운 마음이 발동하였다. “자식 잘생기고 풍류까지 즐기니 계집들이 사족을 못써...” 영천군은 입속말을 하면서 주모가 갖다 놓은 자리끼를 단숨에 들이켰다.
동창(東窓)으로 여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천군은 사가정이 깰 것을 기다리다 못해 발길로 등을 툭 쳤다. 마침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이 사람아,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게...” 하지만 사가정은 들은 척도 않는다. 코를 더 세게 골며 헛소리까지 하였다. “자동선아, 너는 이 어른을 잘 모셔야 하느니라. 이 어른이 어떤 어른인지 네가 알기나 하느냐? 한양에 부잣집 아드님이 아니고 효령대군의 다섯째 아드님이신 영천군이셔. 네가 잘 모시면 당장 한양으로 올라 갈 행운 녀가 되는 거야. 하하하...” 영천군은 생각지도 않았던 사가정의 잠꼬대에 흥이 솟았다. 사가정은 잠을 자면서도 나를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고맙기가 그지없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사가정! 이제 잠은 그만 자고 일어나게!” 이번엔 엉덩이를 차는 게 아니라 코를 잡아끌었다. 몸이 단 음성이다. 사실 사가정은 잠은 벌써 깨어있었다. 자동선에 몸이 달아오른 영천군이 어떻게 하나 보기위해 자는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내는 집 뒤 실개천으로 가 세수를 하고 자동선 집으로 향했다. 술국을 끓여 달라는 배짱이다. 사가정이 늘 앞장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동선이 사립문 앞에서 서성대며 두 사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천군 나으리 소인이 뭐라 했습니까? 자동선이 틀림없이 술국을 끓여 놓고 나으리를 기다릴 것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가정이 기세등등하여 마치 제집 들어가듯 내실로 들어갔다. 외출했다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기세다.
역시 천하 풍류객 사가정답다. 영천군은 갑자기 사가정이 부러웠다. 사내로 태어나 저토록 당당히 천하를 주름잡고 다니는 사가정이 갑자기 미워지기도 하였다. 사내의 경쟁 심리다. 왕손의 후예라 언제 어디서고 왕실의 체면을 구겨선 안 되고 시정잡배와 어울려 품위를 잃어서도 안 되었다. 지금도 그는 왕손이 아닌 한양의 부잣집 아들이 되어있다.
사가정이 꾸민 연극이다. 방안에 들어서자 정갈하게 끓여진 술국 두 그릇이 준비되었고 그 옆엔 엊저녁에 마신 자동선주도 한 병 놓였다. 해장술이다. “역시 자동선이다!” 두 사내 입속말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들은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술국과 자동선주를 비웠다.
술국을 먹고 자동선주 한 병을 다 비운 그들은 엊저녁에 마신 술이 다 깨기도 전에 다시 취했다. 두 사내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다시 널브러졌다. 사가정은 객사에서 보다 더 크게 코를 골았다. 영천군은 오뉴월 소나기처럼 잠이 쏟아졌으나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때다. “한양 나으리 어르신들! 술국을 다 드셨나요?” 자동선이 술국 상을 가지러 들어왔다. “어머머... 이 어르신들을 봐. 여기가 객사인 줄 아시나 봐!” 자동선이 사가정 얼굴에 냉수를 뿌려 일으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동선이 술국 상 앞에서 거문고를 켜면서 이곡(李穀)의 《자하동》 시를 읊었다. 사가정이 눈을 뜨자 자동선은 켜던 거문고를 놓고 너울너울 춤까지 추기 시작하였다.
영천군은 자동선의 춤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춤을 바라 볼 뿐이다. ‘초당에 잠을 깨니 낙화가 한가하다 / 발을 걷고 보니 여기 저기 청산이라 / 청산은 나를 웃네 나들이도 아니하고 / 언제든지 책속에만 파묻혀 있다고...“ 자동선의 다리가 번쩍 들릴 때 오얏꽃 보다도 더 흰 엉덩이가 희끗희끗 드러났다.
팬티가 없는 속곳 바람이다. 여름이라 그러하려니 생각했으나 자동선의 치밀한 상술로 보였다. 신이 나서 노루모양 껑충 뛰었을 때는 거웃과 음문까지도 살짝 얼굴을 드러냈다. 예쁘고 신비해 보이기까지 한 음문이다. 수많은 사내들의 욕정을 채워주었을 음문은 사내 손길 한번 안 닿은 듯이 깨끗해 보였다.
두 사내는 동시에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자동선은 지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직업본색을 풍기고 있다. 아무튼 두 사내는 빙의에 걸린 듯 박수를 치면서 자동선 매력에 빠져들었다.
2019-01-09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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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33> 자동선(紫洞仙) <제13話>
영천군과 사가정의 걸음이 빠르다. 사가정이 앞장을 섰다. 조선팔도를 제집 정원처럼 드나들었던 사가정의 발길에 영천군은 벅차다. “이 사람아, 천천히 가시게! 내가 숨이 차서 따라갈 수가 없네...” “자동선을 한시라도 빨리 보시려면 더 빨리 걸으셔야 하지요...” “아 참! 우리가 타고 왔던 말은 어찌하였소?” “네 나으리, 목단춘에게 맡기어 며칠 잘 먹이라 했나이다.” “그거 참 잘했소이다. 그런데 제일청한테 안내하라 했으면 좋을 뻔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사내 둘이 가서 아무렴 조선제일의 미녀라 해도 설득을 못하겠는지요?” 두 사내가 얘기를 주고받으며 오는 사이에 어느새 멀리서나마 자동선의 집이 보였다.
영천군은 자동선의 집만 보아도 자동선을 본 듯 가슴이 뛰었다. 이젠 영천군이 앞에 서서 뛰다시피 한다. 숨이 차서 천천히 가자던 영천군이 자동선의 집을 보니 힘이 저절로 솟는지 사가정(四佳亭·서거정 호)을 제치고 앞에서 총총 걸음으로 달린다. “천천히 가시죠. 영천군 나으리...” 하지만 영천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동선의 집을 향해 젖먹이가 어미를 보고 본능적으로 달려가듯 줄달음을 쳤다.
사실 영천군은 사가정 보다 힘이 좋다. 허우대도 좋을 뿐만이 아니라 왕손의 후예답게 옥골선풍에 헌헌장부다. 사가정도 어디에 나가도 빠지지 않는다. 풍부한 학식에 넘치는 해학과 풍류에 여자들이 한번 보면 그 넓은 품에 안기고 싶어 안달하는 호남아다.
지금 그들이 자동선을 보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어 뛰듯 걷는다. “게 누구 없느냐?” 영천군이 우렁찬 목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몇 번을 소리 높여 주인을 찾았으나 안에서는 아무소식이 없다. “게 아무도 없느냐?” 이번에 사가정이 대나무로 촘촘히 만든 대문을 발길로 차면서 외쳤다.
그때서야 “게 누구기에 남의 집 대문을 발길로 차며 법석을 떠시오?”라며 열 서넛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가 얼굴을 삐죽이 내밀었다. “여기가 자동선의 집이더냐?” 영천군이 숨 가쁘게 물었다. “그렇소만 댁은 누구시오?” 당돌한 소녀의 대꾸다. “우리는 한양에서 온 영천군과 사가정인데 자동선을 보러 왔느니라.” “아-예, 그런데 자동선 아씨께선 지금 집에 안계십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셨다 다시 오셔야합니다. 우리 아씨께선 예약을 하지 않으시면 만나지 않으십니다. 더욱이 지금 아씨께선 산책중이십니다...” “우리가 들어가서 기다리면 아니 되겠느냐?” “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아씨가 안 계실 땐 절대로 남자를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시게 하십니다. 어서 돌아가셔서 내일 오시면 소녀가 아씨한테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말을 마친 소녀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 사내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별수 없이 다시 제일청 집으로 갔다. 다시 술판이 대낮부터 벌어졌다. 대취했던 두 사내는 새벽녘에 깨어났다. 그들은 집 뒤 실개천으로 가 세수를 하고 목이 타 실컷 물을 마시고 방으로 들어와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때다. “벌써 떠나시려고요? 그렇게는 아니 되옵니다. 이 제일청에 와서 술국을 안 드시고 가시는 손님은 없습니다. 소첩이 일찌감치 술국을 끓여 놨으니 시원하게 드시고 가세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술국과 기장이 섞인 밥도 함께 차려졌다. ‘여섯 골이 망망한 채 산과 바다가 가려 / 올라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들었더니 / 이제사 와 보니 뜬소문은 잘못이라 / 티끌세상과 몇 걸음 사이 밖에 아니네’ 고려시인 최집균(崔執均)의 무제(無題)다.
두 사내는 다시 자동선 집에 닿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내가 동시에 ‘게 누구 없느냐?“라고 집주인을 찾았다. 네댓 번을 부르자 선녀로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자동선이다. ”어서 들어오시죠. 어제 오셨던 한양에서 오신 손님이 아니신지요? 어제는 소첩이 뒷산으로 산보를 하면서 시(詩) 공부하느라 결례를 했사오니 널리 양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똑 떨어지는 말투다.
자동선은 두 사내를 아랫목에 앉히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소녀 자동선이라 하옵니다. 먼 한양에서 미천한 소녀를 보러 이곳까지 오신데 대해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그래. 네가 진정 자동선이냐? 이 분은 효령대군 다섯 번째 아드님인 영천군이시고 나는 사가정이라 하느니라...” “어머 소첩이 평소 존경했던 두 분을 제 집에서 뵙다니 꿈만 같사옵니다. 앵두(동기 가명)야! 술상을 어서 봐 오너라!” 앵두는 준비했던 술상을 자동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고 들어왔다. “이 술은 소첩이 담은 자동선주(紫洞仙酒)입니다. 담근 지 3년차로 독하오니 천천히 조금씩 드세요!” 두 사내를 술상 맞은편에 앉히고 자동선은 술을 연거푸 따랐다.
사가정은 술에 취하고 영천군은 자동선의 아름다움에 포로가 되었다. “자동선아, 이 자하동에 숨은 얘기가 있을 듯하다. 네 이름도 거기에 연유가 있는 것이 아니더냐?” “역시 풍류객 사가정 어른이셔? 그러하옵니다. 고려 때 대학자 채홍철(蔡洪哲) 어른께서 자하동에 정자 중화당(中和堂)을 짓고 국가 원로들을 모셔 기영회(耆英會)를 열었는데 어느 날 자하선인이 나타나 원로들에게 헌수 술잔을 올리며 《자하동곡》을 부르셨다 하옵니다.” “그래? 자동선 너는 역사에도 높은 지식을 갖고 있구나! 그 선인이 불렀다는 《자하동곡》을 불러 줄 수 있겠느냐?” “그러하옵니다.《자하동곡》은 현재 악부(樂府)에 가사가 전해오는 것을 소녀가 잘은 못 부르나 불러 보겠나이다.” 낭랑한 목소리에 영천군은 아랫도리가 팽창됨을 느꼈다. ‘집은 송악산 자하동에 있어서 / 안개구름이 중화당에 잇달았네! / 오늘 기영회 기쁜 모임 있다기에 / 몸소 찾아와 연수배를 올리노라’ 노래보다 술에 더 마음을 두는 사가정도 자동선의 노래에 가슴이 흔들렸다.
두 사내는 동시에 탄복하였다. 그러하면서도 서로 다른 여인을 떠올렸다. 연천군은 《자하동곡》을 부른 자동선과 열락의 장면을 생각했으며 사가정은 제일청과 주지육림의 꿈같은 과거를 회상하였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두 나으리께선 밤이 깊었는데 술만 드시면 어떡하죠? 객사로 가실 채비를 하셔야지요!” 영천군은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객사로 가라니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내는 자동선 집에서 나와 객사로 발길을 옮겼다. 통음한 술도 번쩍 깼다.
2019-01-02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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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32> 자동선(紫洞仙) <제12話>
청교방 거리 이웃엔 노기(老妓)들이 많다. 색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사가정엔 노기가 경영하는 청루가 더 좋다. 사가정은 노기 제일청(第一靑)이 있다는 청루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천하의 풍류객답다.
조선 천지 어디를 가도 그는 기가 죽는 법이 없다. “누구세요?” 솜털이 아직 보송보송한 동기다. “사가정이 왔다 일러라!” 사가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가정 나리!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 오셨습니까?” 몇 년 만에 남편과 재회하는 부인같이 맨발의 반색이다.
청루 춘망(春望)의 제일청이다. 목단춘과 언니 동생하며 지내는 사이지만 젊었을 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자다. 제일청이 두 살 아래다. 미모는 제일청이 앞서지만 시재나 노래와 춤엔 목단춘에 뒤진다. 불려가는 연회석도 뚜렷이 구별이 되었다.
제일청은 젊은 층들이 술 마시고 한바탕 객고 푸는데 단골이고 목단춘은 품위 있고 방사엔 거리가 있는 연회장이 주 고객이었다. 사가정도 삼십대 한창 펄펄 날 때 제일청과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때 인상이 깊어 세월이 십 수 년이 흘렀는데도 여인은 기억이 살아있다.
기생은 이십대가 지나면 환갑이라 하여 노기 취급으로 청루일선에서 물러난다. 지금 제일청도 그런 신세다. 사가정은 당대 대학자이며 천하의 풍류객이다. 그가 노기인 제일청을 잊지 않고 물어물어 찾아왔으니 반길 수밖에 없다.
사내들은 철지난 꽃은 찾지 않는다. 봄이 되면 봄꽃을 여름엔 여름꽃이 피어나고 가을이 찾아오면 가을꽃들이 화려하게 벌나비들을 영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한양을 넘어 이곳 송도(현 개성)까지 명성이 자자한 사가정이 찾아왔으니 제일청은 죽었다 다시 살아온 남편인 냥 맨발로 뛰어나와 맞았다.
그들은 내실로 안내되어 술상을 받았다. “아니 저 족자는 십 수 년 전에 내가 써준 시가 아니더냐?” “예 그러하옵니다. 나리께서 취중에 소첩에게 《노기》(老妓)란 시 한 수를 써 주셨기에 그 시가 마음에 들어 족자를 만들어 가보로 소중하게 보관 중이옵니다.” “그랬느냐?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멋지게 써줄 것을 아쉽구나... 그건 그렇고 이 분한테 정중하게 인사를 올려라! 한양에서 지체 높고 돈도 참으로 많으신 어르신이니라... 그리고 나으리 제가 쓴 《노기》란 시를 한번 읽어 보시죠...” 영천군은 사가정이 하라는 대로 족자의 시를 보았다. ‘예쁘던 그 얼굴 꽃 진 나뭇가지로 변해 / 아름답던 옛 모습 그 누가 알아보랴 / 노래와 춤만이 예와 같이 연연하여 / 가련한 그 재주만 아직 늙지 않았네’ 사가정의 필체가 분명하였다.
술잔이 네댓 순배 돌 즈음 제일청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리, 웬일로 이 외진 소첩의 집까지 찾아오셨는지요? 혹 주류천하 길에 노자가 떨어져 오셨는지요?” 눈치 빠른 노기는 한 눈에 사가정의 속내를 알아보았다. “하하하! 제일청은 독심술까지 익혔으니 사내들이 사족을 못 썼어! 너의 예리한 독심술은 늙지 않았구나...” 연천군은 두 연놈의 흥겨운 언행에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다.
그랬다. 십 수 년 전에 친구들과 대동강 수양버들 뱃놀이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제일청에 잠시 들렸었다. 그때도 노자가 떨어져 제 돈을 맡겨 놓은 듯이 요구하였다. 그런데 제일청도 초면인데도 아무조건도 없이 두둑한 노자를 대주었다. 그래서 사가정은 그때 노자를 받아간 징표로 시 《노기》를 써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십 수 년 후에 혼자도 아닌 일행과 함께 혜성처럼 얼굴을 드러냈다.
그래도 제일청은 싫은 표정이 아니다. 기쁨에 흥겨워 부엌으로 드나들며 술과 안주 나르기에 바쁘다. 여름밤은 술 마시기에 딱 좋은 밤이다. “그런데 제일청아! 나는 네가 있어 좋은데 우리 어른을 모실 명기(名妓)가 있어야겠구나! 어디서 네가 불러오거라...” “송도에서 으뜸가는 명기가 있기는 하오나 이 밤에 올지요? 자동선(紫洞仙)이란 명기지요. 이제 겨우 17살인데 중국 사신이 보고는 자기나라 4대 미녀인 양귀비·서시·초선·왕소군보다도 절색이라고 칭찬이 중국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아이예요.” 영천군이 제일청의 말을 듣고 있다 벌떡 일어나며 “내가 돈은 얼마든지 줄 터이니 그 아이를 지금 당장 데려다 주게”라고 말을 하고는 눈가에 특유의 미소를 띠었다.
제일청은 영천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 밤에 어떻게 자동선을 불러오겠사옵니까. 소첩이 오라면 마지못해 오긴 오겠으나 이 밤엔 아니 되옵니다. 내일 두 어른께서 자하동(紫霞洞)자택으로 자동선을 찾아가시면 틀림없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일청은 두 사내 사이에서 얘기를 주고받으며 노기답게 여름밤을 흥미롭게 넘겨주었다. ‘사내의 마음이자 계집의 마음이라 / 이별의 눈물이 흘러 옷깃이 젖는다 / 주머니가 빈 털털 가진 것이 없어서 / 시 한수 써 갈겨 천금을 탕감하네!’ “내 돈이 없어 지난번 같이 시로 술값을 대신 하려네. 지필묵을 가져다주게나.” 사가정의 일필휘지는 거칠 것이 없었다. 제일청은 사가정이 돈이 없다는 소리에 섭섭한 표정이 아닌 기다렸다는 듯이 지필묵을 탁자 밑에서 꺼내 내어밀었다.
준비 된 행동이다. “이제 두 번째 가보가 생겼사옵니다. 선비님...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 영천군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술값도 안주고 잠까지 잤는데 그까짓 시 한수 써 준 것이 저토록 고마울 수가... 얼마나 뜨겁고 속 깊은 정을 나누었으면 저렇게 고맙고 헤어지기 싫어할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제일청은 괴나리봇짐을 사가정이 챙기자 벽장에서 돈 꾸러미를 꺼내 통째로 내주며 “이제 얼마 안 되나 용채에 보태어 쓰세요.”라고 말을 마치고 정중히 사립문 밖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뜨겁고 정중한 이별 배웅을 받은 사가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하 동쪽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한편 영천군은 사가정과 제일청의 오래간만에 재회하는 부부 같은 모습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가정이 원망스럽다. 누구보다 자기 성정을 잘 아는 그가 여보란 듯이 제일청과의 수작이 눈꼴이 사나웠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도 풍류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겠으나 사가정엔 앞자리를 내어준다.
지금도 그러하다. 사가정이 자신 앞에서 미안해하는 표정도 없이 제일청의 엉덩이를 만지며 술을 마시는 꼴이 그가 아니었으면 술잔이 날아가도 열 번은 날아갈 분위기다. 그러나 영천군은 자동선을 만날 생각에 여타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2018-12-26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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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31> 자동선(紫洞仙) <제11話>
오늘따라 달이 휘영청 밝다. 숲속의 오두막집의 달밤은 마치 선계(仙界)같다. 목단춘은 잠이 안와 다시 부엌으로 나가 술상을 차려 들어왔다. 사가정은 이미 깊은 잠에 빠졌다. “사람도... 내 비록 철지난 꽃이지만 여자 방까지 들어와서 잠에 빠지다니...”목단춘은 자신을 석녀(石女)취급하는 사가정이 몹시 못마땅한 표정이다.
목단춘은 감정이 몹시 상한 듯 술상을 팽개치듯 사가정 머리맡에 놓고 “그냥 주무실 거예요?” 건넛방에 듣지는 못하지만 노모가 있어 소곤대듯 말했으나 울림이 있고 항의조 목소리다. 사가정은 거짓잠이다. 한양에서 오느라 피곤한데다 술까지 마셔 녹초가 된 채 잠든 척 하고 있다.
정말로 방사하고 싶은 것이다. 목단춘이 옆에 오면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듯 날름 끌어당겨 단숨에 거사를 치르려 한다. 하지만 목단춘이 누구인가! 그런 사가정의 속내를 꿰뚫고 있다. “나으리, 술 한잔 더 하셔야지요? 이 좋은 밤에 잠만 주무시면 어떻게 하온지요?” 목단춘은 사가정이 스스로 일어나 술상 앞에 앉으리란 확신을 갖고 있다. “한양선비님 한잔 더 하시고 달구경을 하고도 그것(방사)은 넉넉하오니 어서 일어나시어요....” 목단춘이 술 주전자에 술잔에 술을 쪼르륵 하고 옥구슬 구르는 소리를 내며 따른다.
아니다 다를까 목단춘의 예상은 정확하였다. 술 따르는 소리에 사가정은 놀란 토끼 모양 발딱 일어났다. “목이 타시죠? 한양선비님! 우선 한잔 드시죠?” 목단춘은 술잔을 사가정에게 건넸다. 그런데 그녀의 손이 청교월에서와 다르게 파르르 떨렸다.
색정(色情)이 발동하기 시작했다는 징표다. 여자의 본능이다. 여자는 마음에 드는 사내가 나타나면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말을 한다. 지금 목단춘이 사가정을 보고 첫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청교월에서는 퇴기로서의 처신이었고 자신의 내실에선 여자로서 사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가슴도 뛰고 꽁꽁 닫혔던 음문에도 어느새 애액이 촉촉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유방도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다.
전에 없었던 몸의 변화다. 고목이 새봄을 맞아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형국이다. 얼굴도 화덕을 안은 듯 확확 달아오른다. 사내를 당장 끌어안아 욕정을 채우고 싶다. 그러나 10여년을 참고 지켰던 정절(貞節)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몸은 점점 더 사내 곁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사가정은 의외로 차분하고 사내구실 할 의사가 없어 보여 다행이다. 바로 그 순간이다. 사가정이 술 한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목단춘의 손을 덥썩 잡으며 ‘고운 여인의 발을 걷어 올리고 / 조용히 앉아 눈썹을 찌푸리네 / 예쁜 뺨이 눈물로 젖어 있음은 / 누구를 원망하기 때문인고...’ 이태백의 《원정》(怨情)이다.
목단춘이 질 리 없다. ‘길가에 휘늘어진 버들가지 / 봄바람에 불려 나부끼네 / 내 마음은 애가 끊겨도 / 그대 심정 어찌 알 수 있으랴...’ 사가정은 다시 한 번 탄복하였다. 그러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서로 모닥불 같은 정염을 숨기고 있다. 체면이다.
하지만 용솟음치는 시흥(詩興)은 숨길 수가 없다. ‘장안의 봄은 저물어 가는데 ’ 수레들이 시끄럽게 지나가네 / 모두들 모란이 피는 때라 말하며 / 저마다 꽃을 사들고 가네...‘백곽천의 《매화》(買花)다. 노골적 잠자리 요구다.
사내들은 충동적인 동시에 즉흥적이다. 지금 사가정이 그 상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노모 박씨가 자정 즈음에 거르지 않고 뒷간에 가는 버릇이다. 노모는 뒷간에 가는 길에 딸의 방문을 예외 없이 열어보고 간다.
지금이 딱 그 시간대다. 목단춘은 기생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독서와 시작(詩作)에 열중이다. 그녀도 가난한 향반(鄕班)집 무남독녀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열다섯에 생계형 기녀가 되었다.
신동소리를 들으며 아버지 무릎위에서 사서삼경과 삼국지·서유기·금병매 등 중국의 기서 등을 읽어 풍부한 교양을 갖춰 젊었을 땐 빼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이곳저곳 높고 귀한 연회석에 하루가 멀다 하고 불려 다녔다.
품위 있는 높은 교양으로 한양의 사대부들과도 교분이 두텁고 넓다. 지금 사가정과 수창도 오랜 지기지우(知己之友)모양 거침이 없다. “이제 술 한 잔을 더 하시니 시흥이 용솟음치실 것이옵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방에서 무엇을 하시겠어요? 달구경을 하고 들어와도 사랑은 넉넉하옵니다.” 목단춘이 사가정의 팔을 잡아끌어 밖으로 나왔다.
집 주위엔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집 뒤엔 실개천이 있는데 며칠 전에 온 비로 옥수 같은 물이 넘쳐흐른다. 옥수 같은 물 위로 낙화한 복사꽃이 두둥실 어디론가 흘러간다. 사가정은 문득 도연명(陶淵明:365~427)을 떠올렸다. ‘세월이 사람을 내던지고 가버리니 / 뜻을 품고서도 펼칠 수가 없다 / 이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처량해져 / 날이 밝도록 진정되지 않는다.’ 그의 《잡시》다.
지금 목단춘이 꼭 도연명의 심정일 게다. 사가정은 말없이 앞장서는 목단춘을 따라 걸으며 상념에 빠져든다. 한참 걸어 오르자 넓은 절터가 나타났다. 드문드문 서 있는 탑 위로 달빛이 교교히 드리워 신기하면서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무성하게 우거진 소나무 그늘에 넓은 절터는 좁아져 보였다. “한양 선비님! 이 절은 고려 말까진 수백 명에 가까운 스님들이 밤낮으로 독경을 했었다는데 이젠 폐허가 됐사옵니다. 소첩은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이곳을 찾곤 하나이다.” “혼자 오느냐?” “예 선비님, 이 늙은 노기는 호랑이도 물어가지 않습니다...” “에끼 이 사람아! 그 무슨 섭섭한 말을 하느냐? 내 눈에 지금 자네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는구나!” 사가정의 뜨거운 손이 목단춘의 허리를 휘어 감는다. “어느새 밤이 깊었네요! 내려가셔서 잠시 눈을 붙이셔야 또 떠나시지요...” 그들은 손에 손 잡고 총총히 집으로 내려 왔다.
어느새 멀지 않은 산사에서 새벽종이 울려온다. “선비님, 벌써 날이 밝아오네요. 그것은 다음에 오시면 그것부터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목단춘은 사가정의 손을 잡아 자신의 치마 속에 비밀스럽게 있는 음문에 갖다 댄다. 거웃에 가려져 있는 음문엔 애액이 손에 감촉 되었다. 손으로만 느끼고 떠나가라는 신호다. ‘가소서 가소서 평안히 가소서 / 잊으리 잊으리 영원히 잊으리’ 란 알쏭달쏭한 시 한 절을 남기고 목단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립문 안으로 사라졌다.
2018-12-19 09: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