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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5> 허난설헌(許蘭雪軒) <제12話>
극적인 해후다. 초희와 매곡이 만났다. 한양이 아닌 멀고 먼 임영에서 해후한 것이다. 매곡은 장가를 들어 헌헌장부가 여인의 보살핌으로 옥골선풍(玉骨仙風) 바로 그 모습이 눈이 부시다. “아씨의 옥안(玉顔)이 많이 상하셨네요...” 매곡의 걱정스런 목소리다.
사실 지금 초희의 모습은 태양에 가린 초승달 모습이다. 매곡의 옥골선풍에 초희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다. 하지만 초희의 태도는 초라하지 않고 더욱 빛났다. 사람다운 삶, 빛나는 문장, 그리움 그 모든 것들을 가슴속에 보듬고 살았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눈 흘김 당해도 시어머니 송씨의 모멸적인 폭언에도 초희는 한낱 덧없는 흐름으로 스쳐 보냈다. 눈만 감으면 현실은 속절없이 무화(無化)되고 선연하게 다가오는 선경과 마주해서다.
십 수년 만에 극적인 해우였으나 초희는 나직이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가슴이 바지직 거리며 타들어 갔다. 하지만 초희는 그런 분위기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승에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란 것을 초희는 일찌감치 알았다.
어쩌면 초희는 이승의 삶을 빨리 청산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여 눈만 감으면 다가오는 선경에서 마음껏 꿈과 이상을 펼치려 했을 것이다. ‘소상강 굽이 파초 꽃은 이슬에 젖고/ 아홉 봉우리에 가을빛 짙어 하늘이 푸르네/ 수궁 찬 물결에 용은 밤마다 울고/ 남방 아가씨 영롱한 구슬 구르듯 노래하네/ 짝 잃은 난새와 봉황새는 창오산이 가로 막히고/ 빗 기운이 강에 스며 새벽달 희미하네/ 한가롭게 벼랑위에서 거문고를 뜯으니/ 꽃 같고 달 같은 큰머리의 강아가씨가 우네/ 하늘 은하수는 멀고도 높은데/ 일산과 깃대가 오색 구름 속에 가물거리네/ 문밖에서 어부들이 ’죽지사‘를 부르네/ 은빛 호수에 조각달이 반쯤 걸려 있네’≪소상강 거문고 노래≫다.
짝 잃은 난새와 봉황새는 창오산이 가로막혀 서로 그리워하고 있으면서 마음껏 만나지도 뜨거운 마음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도 못함을 표현한 듯하다. 이미 남의 아내와 낭군이 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사회에선 가문대 가문이 합하는 결혼문화가 상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극소수이긴 하지만 남녀간의사랑을 자유롭게 했던 부류도 있다. 그런 사랑놀이를 사대부들은 남몰래 질탕하게 즐기면서 겉으론 고고함을 드러내는 눈감고 아웅식의 속빈 겉치례 문화였었다.
초희가 대표적 희생양이다. 하늘이 준 본능을 인위적으로 억제해야 하는 사회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관습적 법을 만들어 놓은 사대부들은 밤이면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분 냄새 풍기는 기녀들의 치마폭에 싸여 밤새는 줄 모르고 가면극을 하듯 세월을 낚았다.
서러운 것은 서민들과 여인들이었다. 어릴 때 어버이고 커선 낭군에게, 늙어선 자식에 의지하라는 소위 삼종지덕(三從之德)이란 여인에게 천형 같은 멍에다. 조선사회는 여인들을 개성이나 감정이 없는 사실상 지능로봇 정도로 보려했지 않았나 의구심이 들 정도다.
초희는 십 수년 만에 매곡과 극적으로 해후 했으나 애써 덤덤한 척 하였다. 자칫 지금까지 냉정하게 자신을 지켜왔던 자존심과 평생 쌓아온 서릿발 같은 지적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까 두려웠으리라... ‘봄바람이 화창해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철따라 만물이 잘되니 감회가 새롭네/ 깊은 규방에 묻혀서 그리움을 끊으려 해도/ 그대가 생각나니 심장이 터질 듯 하네/ 한밤이 이슥토록 잠 못 이루더니/ 새벽 닭 울음소리가 꼬끼오 들리네/ 비단 휘장이 빈방에 쳐지고/ 옥계단에는 이끼가 돋았는데/ 깜빡이던 등불도 꺼져 벽을 기대고 앉았노라니/ 비단 이불이 어설퍼 추위가 밑으로 파고드네/ 베틀 소리를 내며 희문금을 짜 보지만/ 무늬는 이뤄지지않고 마음만 어지럽구나/ 인생 운명을 타고난 것이 너무나 차이가 있어/ 남들은 마음껏 즐기지만 이내 몸은 적막이구나’ ≪한스러운 마음을 읊다≫다. (시 옮김 허경진)
세기적 천재 여류시인의 속내다. 초희는 마음이 울적할 때에는 별당을 훌쩍 뛰어 넘어 이승과 저승의 문턱인 꿈나라로 간다. 꿈나라는 선계인 광상산으로 이어지면 이승의 세계를 훨훨 날아 건너간다.
거칠 것이 없는 세상이다. 그곳엔 스승 손곡에게 동생 균과 공부할 때처럼 사랑이 가득한 꿈나라다. 초희는 가슴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앉아 고개도 못 들고 있었던 밀어들을 마음껏 토해냈다.
그곳엔 아버지 허엽과 일 년 전에 금강산에서 큰 야망을 도전하여 보지도 못하고 절명한 오빠 허봉도 있었다. 오매불망 했었던 세상이다. 선녀들이 마중 나오고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시선(詩仙) 이백(李白), 그리고 시불(詩佛) 왕유(王維)까지 있는 꿈에 와 놀았던 유토피아다.
초희는 사실 평소에는 중국의 이청조(李淸照·1081~1141)와 탁문군(卓文君·BC175~BC121), 그리고 황아(黃峨·1498~1569)를 부러워하였다. 그녀들은 시문(時文)등에 뛰어났을 뿐만이 아니라 역경을 딛고 사회생활도 당당히 해냈기 때문이다.
이청조는 송사(宋詞)에 능통했으며 탁문군은 음률(音律)에 정통하였다. 탁문군은 남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새장가를 가려하자 백두음(白頭吟)이란 시를 써 보여 포기시킨 일화를 남겼으며 황아는 경사(經史)에 능통했으며 산곡(散曲)·서찰(書札)에도 유명한 여류 시인으로 ≪양부인악부≫ 4권이 전해진다. 이 같은 조선에 비해 여성들의 사회활동에 비교적 관대했던 중국을 초희는 동경 한 듯해 보인다.
초희는 친정집에서 오랜만에 웃음과 즐거움을 되찾았다. 아들 희윤이와 딸 소현이까지 활짝 핀 백일홍을 두손에 들고 “엄마 빨리와 줘서 고마워...” 하고 달려와 가슴에 안겼다. 남매의 웃음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비몽사몽 꿈의 세상이다.
2016-10-26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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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4> 허난설헌(許蘭雪軒) <제11話>
한강 뱃놀이를 나갔다가 우연히 봉의 모습을 보았다. 수옥(가명)은 첫눈에 반했다. 가슴이 뛰고 발걸음을 옮길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어느새 사타구니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마음 같아선 와락 달려가 활활 타오르는 속마음을 폭포수처럼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어느 첩실의 소생으로 한강놀이에 나갔다 헌헌장부 허봉을 보고 넋을 빼앗겼다.
그 후 그녀는 허봉을 마음속 낭군으로 섬겼다. 눈을 감으면 실제 낭군으로 다가갔고 눈을 뜨면 마음속의 낭군으로 정성껏 받들었다.
수옥이 오늘 임영(현 강릉)에 왔다. 혼자 올 용기가 없어 매곡을 앞세우고 초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희도 어느 여인이 허봉 오빠를 사모한다는 풍문은 들었으나 이곳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베일 속에 있을 그녀가 베일을 훌훌 벗어던지고 직접 낭군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것도 초희가 역시 마음의 낭군으로 생각하고 있는 매곡과 동행을 하고서였다.
초희는 가슴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함을 받던 날 남들이 볼까 가슴조이며 담 밖에서 손만 내밀어 준 동백꽃 꽃다발과 화관을 담 안에서 받은 후 오매불망 그리워했었던 마음 속 낭군을 지척지간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수옥이 한없이 부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금강산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낯설고 물 설은 곳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옥이 찾아 나선 용기다. 하지만 초희는 마음만 불태우고 용기가 없어 성에 차지 않은 김성립과 백년해로를 맺었다.
오빠 허봉은 따뜻한 성정을 가진 남자다. 오빠라기보다 스승같은 존재다. 허봉은 초희의 아들 희윤의 비문을 이렇게 적었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희윤의 아버지 誠立은 나의 매부요 할아버지 첨(瞻)이 나의 벗이로다. 눈물을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哭에 부치노라’ 허봉이 쓴 조카의 비문이다.
그랬다. 이렇듯 눈물이 있고 따뜻한 가슴의 사나이인 것을 수옥은 첫눈에 알아본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원천리 한양에서 허위허위 임영까지 발길을 재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초희는 그런 수옥이 눈물이 나도록 부러웠다. 자신은 숯덩이처럼 가슴을 태우면서도 매곡을 향해 한걸음도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속의 풍속을 고스란히 따르면서 속으로만 불만을 토로해서다. ‘동쪽집 세도가 불길처럼 드세던 날/ 드높은 다락에선/ 풍악소리 울렸지만/ 북쪽 이웃들은 가난에 헐벗으며/ 주린 배를 안고서/ 오두막에 쓰러졌네/ 그러다 하루아침에 집안이 기울어/ 도리어 북쪽 이웃들을 부러워 하니/ 흥하고 망하는 거야 바뀌고 또 바뀌어’ 하늘의 이치를 벗어나기는 어려워라‘ ≪하늘의 이치를 벗어나기는 어려워라≫다.
초희도 역시 여자다. 당시 조선은 엄격한 남존여비의 사회다. 친정집에선 금지옥엽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로 사내(허균)와 별 차이 없이 공부도 할 수 있었다. ≪태평광기≫·≪서유기≫·≪논어≫·≪맹자≫ 등 제자백가의 문학을 공기처럼 마음껏 즐겼으나 시집와선 환경이 360도 바뀌었다. 천재 초희도 세습적 환경에 적응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친정 허엽의 집엔 1만여권의 책이 있었다. 허엽·허성·허봉·허균의 네 부자의 학문세계다. 그 학문세계에서 초희도 헌헌장부들의 꿈과 야망의 도전에서 숨 쉬고 생활하였다. 하지만 시집은 친정집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친정은 욱일승천하는 분위기였으나 시집은 서서히 햇빛이 피해가는 석양녁이다.
초희는 천재답게 현실을 인정하고 별당을 자신의 소우주(小宇宙)로 만들었다. 그곳에선 화관을 쓰고 시를 쓰면서 자신의 세계에서 꿈과 이상을 마음껏 펼쳤다. 그런데 주어진 숙명을 고스란히 인정하면서 살기를 어언 십 수 년 갑자기 그 세월이 원망스럽고 자신이 못났음이 자각되었다.
수옥을 보고서다. 자신이 마음속의 낭군을 찾아온 수옥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리고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소위 천재 소녀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자신의 꿈 하나 이루지 못하고 있는 처지가 초라하고 비루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금강산이 어딘데! 어떻게 가려고...” 수옥의 꿈을 저지하고 싶다.
마음속의 낭군을 만나러 가는 용기 있는 수옥에게 질투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속으로 “오빠는 비록 객지에서 유랑하고 있으나 이승과 저승(지하선)에서 동시에 낭군으로 모시겠다니...” 라고 태산이 날아갈 듯 한숨을 토해냈다. ‘제비처럼 춤추고 꾀꼬리처럼 노래하는데 이름은 막수라네/ 나이 열다섯에 부평후에게 시집 왔다네/ 화려한 집에서 거문고 안고 실컷 타며/ 화관을 즐겨쓰고 옥황께 예를 올렸네/ 구슬집에 달이 밝으면 퉁소 소리에 봉황새가 내려오고/ 창가에 구름이 흩어지면 거울에 새긴 난새도 걷혀졌네/ 아침저녁으로 단 위에 향을 피우건만 학 등에는 찬바람이 일어 어느새 가을일세’ ≪자수궁에서 자며 여관(여도사)에게 바치다≫ 다. (시옮김 허경진)
자신의 결혼생활을 반추한 듯한 시다. 본인이 열다섯 살에 결혼했으나 가슴 조이고 부푼 꿈을 안고 한 사내를 만났지만 실망으로 바뀌었다. 막수(美人지칭)는 바로 자신의 아바타로 등장시킨 듯해 보인다.
초희는 입술을 피가 맺히도록 꼭 깨물고 속으로 다짐한다. 이승을 떠나 광상산 신선세계로 가면 욕심껏 꿈도 키우고 마음껏 이상도 키우며 이루지 못한 사랑도 화려하게 꽃피우리라고... 그러면서 아침을 먹고 서둘러 허봉 오빠가 있는 금강산을 향해 웃음을 얼굴 가득히 담고 힘차게 떠나는 수옥의 뒷모습을 부러운 듯 시선의 끝자락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아씨 빨리 갔다 올께요...” 라고 손을 흔들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수옥을 초희는 뜨거운 눈물로 배웅하였다.
2016-10-19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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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3> 허난설헌(許蘭雪軒) <제10話>
남편과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더 멀어져 갔다. 초희는 그럴 때마다 함 받던 날의 광경이 새록새록 몸서리쳐지도록 그리워졌다. 그때 사랑채에는 둘째 오빠 허봉과 최순치도 함께 있었다. 매곡 최순치도 손곡 이달과 같이 서출(庶出)이다.
매곡이 서출이 아니었으면 아마 허엽이 금지옥엽 초희의 배필로 염두에 두었을 게다. 준수하면서도 칼날처럼 번뜩이는 눈빛, 일자로 다문 입과 오뚝한 코, 분질러지듯 격하지만 반듯한 논조가 사대부의 맞춤처럼 품위가 곱다. 초희도 오빠 허봉과 어울려 수창하는 매곡을 이따금 먼발치에서 봐왔었다. 달려가 뜨거운 마음을 열어 보이고 싶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오매불망 했었던 극적인 조우(遭遇)가 이루어졌다. 함을 받던 날 그들은 이심전심으로 마음을 주고받던 밤 드디어 체온이 담긴 화관과 동백꽃 꽃다발을 받았다.
초희는 그때 번개처럼 다가왔었던 매곡의 열정을 아직도 그 불을 끄지 못하고 있다. 10여년이 가까웠으나 그 불은 더욱 활활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비단 장막으로 추위가 스며들고 아직도 밤이 길게 남았는데/ 텅빈 뜨락에 이슬이 내려 병풍이 더욱 차가워라/ 연꽃은 시들어도 밤새 향기가 퍼지는데/우물가 오동잎이 져서 가을 그림자가 없네/ 물시계 소리만 똑똑 하늬바람에 들려오고/ 발 바깥에 서리가 짙게 내려 밤 벌레소리 구슬프구나/ 베틀에 감긴 무명을 가위로 잘라낸 뒤에/ 옥문관 님의 꿈 깨니 비단 장막이 쓸쓸하네/ 님의 옷 지어내어 먼 길에 부치려니/ 등불이 쓸쓸하게 어두운 벽을 밝히네/ 울음을 삼키며 편지 한 장을 써서/ 날이 밝으면 남쪽 길 가는 역인에게 부치려네/ 옷과 편지 봉해놓고 뜨락을 거니노라니/ 반짝이는 은하수에 새벽 별이 밝구나/ 찬 이불속에서 뒤척이며 잠도 못 이루는데/ 지는 달 만이 다정하게 병풍속을 엿보네’ ≪가을≫이다.
어느 곳에서 몇 살 때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20대 후반 절명하기 전 어느 해 가을 장면이다. 15살에 결혼하여 하루도 고부간에 딸처럼 다정한 모습을 보였거나 금실이 좋은 부부관계가 없었던 초희에겐 결혼생활이 시집살이 하루하루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시집살이에 신물이 날 때마다 초희는 광상산 신선세계로 숨어들거나 화관(花冠)을 쓰고 시의 나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 송씨와 맞서 며느리의 입지를 당당히 높일 수도 있으나 초희에게 그런 용기는 애초부터 있지 않았다. 시어머니 송씨 역시 만만한 가문이 아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봉(葑)·초희(楚姬)·균(筠) 세 남매를 특히 사랑하여 “초당 집안의 세 그루 보배로운 나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정계에서와 문화계에서 허엽의 입지는 사돈관계를 맺은 김첨의 집안과는 격이 한참 높았다.
하지만 시어머니 송씨 가문은 그렇지 않았다. 친정아버지 추파(秋坡) 송기수(宋麒壽·1507~1581)는 퇴계 이황과 절친한 관계였으며 오빠 송응개(宋應漑·1536~1588)는 허봉과 막연한 사이다. 송응개는 1583년 허봉이 갑산으로 귀양 갈 때 함께 보내졌다.
송기수는 1557년 성절사 겸 사은사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이 되었다. 그 후 우의정 이준경의 추천으로 윤원형(尹元衡·?~1565)이 죽자 이조판서에 올랐다. 탄탄한 학문과 고매한 인품으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까지 승진하여 가문의 영광을 이끌었다.
초희의 시어머니 송씨의 안팎은 모두 조선 사대부 집안의 명문가문이다. 그런데 아들 김성립이 성에 차지 않았다. 반면에 며느리가 너무 뛰어나 소위 배가 아프고 속이 뒤틀렸다. 그리하여 고추보다 맵다던 고부간의 사이는 세월이 더 할수록 더더욱 맵게 보였다. 평범한 며느리가 들어와 알뜰한 내조로 남편 김성립이 밖으로 나돌지 않도록 희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희는 그렇지 못했다. 시어머니 송씨는 아들 김성립의 함량 미달은 생각지도 않고 며느리 초희의 뛰어난 시문학이 아들에게 오히려 학문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하여 밖으로 나돌게 된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식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집 남존여비의 온존한 풍습의 아낙으로 살기를 바란 송씨의 생각에 초희는 너무나 먼 거리에ㅔ 있었다. ‘연밥과 가시가 커서 옷을 잡아 끄는데/ 해 지는 물가에 조수는 빠지지 않네/ 연잎으로 머리를 덮어 화관을 하고/ 연꽃으로 띠를 둘러 노리개 삼네/ 연꽃 향기 시들고 비바람 잦은데/ 아리따운 아가씨들 ≪죽지가≫를 부르네/ 돌아올 무렵 횡당 어구에 해는 저버려/ 안개 속에 노 젓는 소리만 삐걱 거리네’ ≪횡당 못가는 노래≫다. (시옮김 허경진)
횡당은 강소성 양주(현 남경) 교외에 있는 뚝(堤防)이다. 장간리(長干里)라는 환락가가 이곳에 있어 남녀간의사랑의 노래가 많이 읊어졌다. 연밥을 따는 관습은 시집 갈 나이의 처녀들이 짝을 찾는 암시로도 많이 쓰였다.
아마도 이 시를 쓸 때의 초희의 심정은 결혼하기 전 집안 풍경인 사랑방에 매곡을 비롯한 오빠 친구들이 많이 오갔을 당시를 반추(反芻)했을 것으로 보인다. 푸르디푸른 젊은 남녀들의 사랑의 감정을 가감 없이 토해내며 인생을 즐겼으면 얼마나 신명 났을까 생각을 하고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을 장면이다.
그러나 천리만리 이국땅에 있는 사랑의 노래를 마음껏 불렀을 장단리를 마음속으로 그리며 시를 썼을 터다. 아니 광산산의 신선세계에서 마음껏 몸과 마음을 위로 받았지 않았을까 보여지기도 한다.
초희는 이승과 신선세계 문턱과 시의 세계를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드나들 수 있는 마법(魔法)같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6-10-12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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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2>허난설헌(許蘭雪軒) <제9話>
오빠 허봉이 금강산에서 유람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초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배다른 큰오빠 허성(許荿·1548~1612)이 있으나 나이가 워낙 차이가 많아 서먹서먹하였다. 하지만 같은 어머니의 오빠 허봉(許葑·1551~1588)과는 오누이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다정한 모습니다.
또한 초희는 허봉으로 인해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1612)과 매곡 최순치를 알게 되었다. 손곡은 동생 허균(許筠·1569~1618)의 스승이었으나 초희도 함께 배웠다. 최순치는 이달의 친구이자 허봉과도 막역한 관계다. 허봉이 손곡을 허균의 사부로 초빙할 때 초희도 동석하도록 배려하였다.
매곡은 손곡과 바늘과 실 관계다. 그들은 모두 서출이다. 허균도 조강지처의 출신이 아니다. 허엽의 조강지처는 청주 한씨다. 세조(世祖·1417~1468)를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수양대군의단종 왕위 찬탈)의 설계자로 권력의 실세로 등장한다.
허엽의 조강지처는 한명회(韓明澮·1415~1487)의 후예다. 한편 후취 김씨는 신라 종성(宗姓·왕실의 성) 명원군 김주원(金周元)의 뿌리다. 허엽의 여자들은 모두 명문대가의 여식이었다. 하지만 김씨(金氏)는 조강지처가 아닌 후취였다. 초희는 어머니 김씨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무엇이 아쉬워 후취가 되었다?” 라며 애석해 하였다. 강릉 김씨는 요조숙녀에 재기(才氣)까지 뛰어나 초희가 언행(言行)을 쏙 뺐다.
초희는 시어머니 송씨(宋氏)의 구박에 조각 같은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오히려 굳은 의지로 화석화(化 石化)된 표정이 더욱 아름답고 신성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속 쌍꺼풀진 눈매에 조금은 솟은 듯한 오뚝한 콧날, 살포시 다물린 입술선이 그림처럼 정갈하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졸함을 풍긴다. 말하거나 웃지 않으면 말간 육색이 자칫 시리도록 차가워 보인다.
요즘 초의 안색에 그늘이 졌다. 1585년 어느 봄날이다. 그의 붓끝에선 시가 탄생한다.‘푸른 바다 물결은 구슬바다 물결에 젖어가고/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부용꽃 스물일곱에 시들어 가고/ 붉게 떨어진 꽃 달밤에 찬서리 맞네’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다. 초희의 27세로 요절하기 3년 전의 시다.
천재는 요절이 숙명인가 보다. 초희는 비몽사몽에 ≪몽유광상산≫을 쓸 때 눈앞에서 최순치가 어른거렸다. 함을 받던 날 새빨간 동백꽃 꽃다발을 주던 장면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남편 김성립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는 사내다. 신분이 맞으면 남편으로 맞이하고 싶었던 상대다. 지금 그의 모습이 김성립 대신 클로즈업 되어 오고 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고부터 그의 헌헌장부 모습이 더욱 자주 등장했다. 함을 받던 날의 화관과 새빨간 동백꽃 꽃다발을 받던 장면이 마치 어제일 같이 생생하다.
천재는 외롭고 질투를 받는다. 초희는 그 도가 어느 천재보다 높았다. 더욱이 남녀칠세부동석의 사대부 나라 조선의 여류 천재는 환경적 제약이 심하였다. 초희의 고독은 그 상상을 본인이 아니면 이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초희는 외롭고 쓸쓸할 때마다 이방(李昉·925~996)의 ≪태평광기≫(太平廣記)를 펼쳤다.
≪태평광기≫엔 꿈과 희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신선(神仙)·여선(女仙)·도술·방사(方士)·신(神)·귀(鬼)·요괴(妖怪) 등 인간이 상상하고 삶의 다양한 스토리들이 있어 천재들의 공상의 메가라 하겠다.
초희도 외롭고 쓸쓸할 때는 서슴없이 ≪태평광기≫로 숨어들었다. 그곳에 가서 여선이 되어 조선의 남존여비 세상에서 기를 펴지 못했던 것을 마음껏 꿈과 이상과 남녀상열지사까지도 욕심껏 투정을 부렸다.
그곳에선 조선사회에서 이상적 사내로 생각하고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고 선망하며 입 밖에도 소리 내보지 못했었던 가슴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가을석류 같이 빨갛게 농익은 사랑이란 말을 주저 없이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사회에선 언감생심 결합이 불가능하였던 매곡과도 정답게 만나 스스럼없이 수창(酬 唱)도 즐겼다. ‘꽃다운 나무는 물이 올라 푸르고/ 궁궁이 싹도 가지런히 돋아났네/ 봄날이라 모두들 꽃피고 아름다운데/ 나만 홀로 자꾸만 서글퍼지네/ 벽에는 오악도를 걸고/ 책상머리엔 참동계를 펼쳐 놓았으니/ 혹시라도 단사를 만들어 내면/ 돌아오는 길에 순 임금을 뵈오리라. ≪순 임금을 뵈오리라≫다. (시옮김 허경진)
순 임금에겐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란 두 왕비가 있었다. 아황과 여영은 요(堯 )임금의 두딸로 순 임금의 됨됨이를 보고 시집보냈다. 아황은 황후가 됐고 여영은 황비가 됐으나 질투하지 않고 금실이 좋았다.
두 자매의 알뜰한 보필로 순 임금은 백성들에게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해주고 전국을 순시 중 창오산(蒼梧山)에서 절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황과 여영은 서둘러 순 임금에게로 달려가 소상(瀟湘)에서 순사(殉死)했다. 저승길도 두 자매는 따라간 것이다.
초희도 시에서 순 임금은 남편 김성립을 비유(比喩)했으리라... 아황과 여영처럼 살뜰한 내조로 남편이 과거에 장원급제 하여 어사화를 복두(幞頭)뒤에 꽂고 행차하는 모습을 오매불망 기원했을 터다. 하지만 꿈은 꿈으로 끝났다. 초희의 별당과 시어머니 송씨의 거처는 같은 담 안의 지척이지만 그녀는 늘 고도(孤島)에 갇혀있는 신세였다.
초희는 고아상산 신선세계로 가더라도 이승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씻지는 못할 것이다. 13년이란 짧은 결혼생활이 너무나 가혹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한다면 멋있는 금실을 꾸릴 대안이 있어서다.
아황과 여영같이 내조를 하여 성공한 남편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높은 학문을 고스란히 전수한다면 과거에 장원급제는 따 놓은 당상으로 ‘아름다운 원앙’을 생각했었을 게다.
2016-10-05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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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1> 허난설헌(許蘭雪軒) <제8話>
결혼을 했어도 남편 김성립 보기가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 어려웠다. 시어머니 송씨 벽이 두꺼워서다. 해가 가고 달이 가도 시어머니의 고집스런 성깔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초희는 자신이 변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비몽사몽에서 본 초나라 장왕과 번희의 관계에서 번희가 되려는 것이다.
하지만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싶은데 높은 벽이 하나둘이 아니다. 시어머니 송씨의 고집스런 성깔을 꺾을 사람은 아들 김성립 뿐인데 어머니 말이라면 껌뻑하고 죽는다.
그런 모자지간 사이에 초희가 끼어들 틈새는 사실상 없었다. 아들과 딸을 마음껏 낳아 집안이 왁자지껄하게 하고 싶으나 남편의 운우지정은 가뭄에 콩 나듯 들르는 것으론 초희의 계획에 턱없이 부족하고 시기(배란기)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영물시(詠物詩) ≪가위≫를 다시 소개한다. ‘뜻이 맞아 두 허리를 합하고/ 다정스레 두 다리를 쳐들었소/ 흔드는 것은 내가 할테니/ 깊고 얕은 건 당신 맘대로...’ 얼마나 뜨겁고 적나라한 운우지정인가? 초희도 여자인지라 신선세계에 가면 송덕봉(1521~1578)와 유희춘(1513~1577) 부부의 금실을 부러워했으리라...
사실 결혼은 서로 어울리는 관계에서 맺어져야 행복하다. 조선 사대부 사화에서 결혼은 가문대 가문이 결합하는 가문의 역사(歷史)다. 양천(陽川) 허씨 허엽과 안동(安東) 김씨 김첨(金瞻)과 사돈관계도 그 범주일 게다. 허엽의 집은 당시 욱일승천하는 기세다. 오허(五許)가문으로 한양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 동인(東仁)에서 허엽의 위치는 절대적이었다. 아들 허성·허봉·허균, 그리고 천재 허초희는 성리학 사대부 사회에서 선망의 대상들이다.
반면에 허엽의 사돈관계인 김첨의 사회적 위치는 허엽에 미치지 못하였다. 안동김씨 전체의 위세를 허엽은 고려했으리라... 안동김씨 집안은 5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한 기문이며 김첨과 허봉은 호당(湖堂)의 동창이다. 이들 사이ㅏ에서 혼담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회분위기에 난설헌이 희생된 결혼이라고 말 할 수도 있는 가문의 결합이었다.
결혼을 하면 신혼의 뜨거운 금실이 식기 전에 아들딸 쑥쑥 낳다보면 세상 시름은 잊게 되었다. 하지만 초희에겐 그런 달콤한 화촉동방(華燭洞房)은 없었다. 천재여류 시인은 광상산 세계로 나들이를 떠났다. 혹 남편과 운우지정을 한 후 찰나적으로 잠이 들면 초희는 예외 없이 광상산 세계로 갔다.
그곳은 꿈이 펼쳐지는 세상이었다. 가는 곳마다 보석이요 정원마다 만화방초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초희는 그곳에서 시를 쓰고 수창(酬唱·시가를 불러 서로 주고받음)을 하면서 재기(才氣)를 마음껏 펼치고 싶다. 하지만 초희는 이승사람이 아니었던가? 초희는 산의 문제만 가지고 골몰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찰나적으로 잠이 들면 광상산의 지하선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기편이 되어 달라고 애걸복걸이다. 지하선은 광산산 세계에서 옥황상제 다음 가문의 고명딸이다. 지하선은 초희에게 은근히 고압 자세다. 초희가 이승을 떠나 광상산으로 오면 깍듯이 언니로 모시고 명문대가 자제로 배필(配匹)도 주선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댔다.
지하선은 허봉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고백이다. 날이 갈수록 지하선의 고백은 심해졌고 협박으로까지 느껴질때도 있었다. 초희는 잠을 청하기가 두려워졌다. 밤을 새 시를 쓸때는 비몽사몽에 지하선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지하선이 나타날 때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난새(상상의 봉활 같은 새)를 타고 백마 한 마리를 끌고 왔다. 허봉을 백마에 태워 가겠다는 시위다. 허봉은 그때 유배지에서 풀려나 금강산을 허기진 몸을 이끌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누비고 있었다.
유배지에서 풀려났으나 서울(한양)에 들어오지 못하는 단서가 붙어 금강산을 유람하고 있었다. ‘낡은 집이라 낮에도 사람이 없고/ 부엉이만 혼자 뽕나무 위에서 우네/ 섬돌에는 차가운 이끼가 끼고/ 빈 다락에는 새들만 깃들었구나/ 전에는 말과 수레들이 몰려들던 곳/ 이제는 여우 토끼 굴이 되었네/ 달관한 분의 말씀을 이제야 알겠으니/ 부귀는 내 구할 바가 아닐세’ ≪부귀를 구하지 않으리라≫다. (시옮김 허경진)
사실 초희는 결혼하기 전엔 사대부집 여인들이 부러워 할 호강을 충분히 누렸으리라... 호강에 충분이란 없을 터이나 초희가 15살에 결혼을 했으니 독신일 때와 한 남자의 여인이 되었을 때 소위 행복이 같을 리가 없다. 그런 생각이 난마처럼 얽혀 있을 때마다 홀연히 지하선이
나타나 초희의 신경을 건드려 놨다.
초희는 묘수로 자지 않고 계속 시를 쓰기로 결심하였다. 잠을 쫓으려는 고육지책이다. 잠시라도 잠이들면 귀신같이 알고 예외 없이 지하선이 나타나 애원이 아닌 이젠 겁을 주는 표정까지 지어보였다. 그래서 초희는 자는 척 하면서도 동시에 시를 쓰는 척도 하였다.
몸이 쇠약한 초희는 잠이 보약인데 며칠 버티지 못했다. 창문으로 쌀쌀한 가을바람이 들어와 가슴을 파고들었다. 창밖의 오동나무잎 떨어지는 소리에 초희 가슴은 더욱 스산하고 외로웠다. 그때다. 천둥번개와 함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비몽사몽(非夢似夢)이다. 초희는 퍼뜩 깨어나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꿈은 꿈이려니 생각하면서도 초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한양에 들어오지 못하고 금강산에서 유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방황하고 있는 오빠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허봉은 그때 승려 지식인 사명당(四溟堂·1544~1610)과도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영마루 나무는 변방 요새를 겹겹이 두르고/ 강물은 동쪽 저 아득한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집 떠나 만리라니 쓸쓸한 노릇/ 수심 깊은 모래톱에서 바라보니 병든 할미새’ 허봉이 갑산에서 초희에게 보낸 ≪누이에게≫다.
초희는 시를 쓰던 붓을 놓고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는 대목에서 숨을 멈추었다. 천둥번개 치며 승천하는 용의 장면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행여 오빠가 돌아가시지나 않았을까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2016-09-28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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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0> 허난설헌(許蘭雪軒) <제7話>
남편 김성립이 바람처럼 들어와 번개같이 사내구실을 하고 나갔다. 마침 치맛바람이여서 사내는 거침없이 욕심만 채우고 쓰다달다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다. 평소엔 속속곳과 단속곳까지 입고 있었으나 바람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오늘따라 치맛바람으로 있었다. 별당이 특이한 위치여서 여름엔 덥고 겨울엔 더 추웠다. 높은 담과 웃자란 오동나무가 더욱 무거운 분위기를 부추겼다.
아랫도리가 축축하고 뻐근하다. 평소 같지 않게 남편의 몸놀림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초희도 성욕이 아침안개처럼 살아나려 할 때 남편은 자기 욕심만 채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남편의 기분을 맞혀주며 오랜만에 자신의 감정도 살려보려 했었으나 허사였다.
그것도 일이라고 등골엔 땀이 흐르고 잠이 사르르 찾아 왔다. 벌써 오경(五更·오전3~5시 사이)이다. 그때다. “언니 재미있었어?” 지하선의 목소리다. 이승까지 내려온 질투 섞인 허기진 음성이다. 비몽사몽 관계다. 초희는 소스라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찰나적인 꿈속에서 초(楚)나라 장왕(壯王·BC614~591)과 번희(樊姬)의 방사장면에 가슴이 뜨겁게 뛰었는데 지하선의 목소리가 왠지 반갑지가 않았다. 남편 김성립이 번개처럼 욕심을 채우는 순간을 본 것이다.
더욱이 초희 자신도 성욕이 비온 뒤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지하선은 놓치지 않고 똑똑히 보았다. 사내 욕정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소나기 같이 식었으나 여자의 성욕은 온돌의 온기모양 피어올라 무궁화 꽃처럼 화려하게 피었다. 석양노을처럼 식어가는 모습을 지하선은 정확하게 보았던 것이다.
이승에서 가장 아름답고 문명(文名)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견줄 상대가 없는 난설헌의 서서히 뜨거워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지하선은 활짝 핀 붉은 장미꽃처럼 피어올랐던 그 모습이 부러웠다. 하루라도 빨리 허봉을 만나 뜨겁고 절박한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고 싶은 것이다.
칠석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결혼식을 미루어 오길 벌써 세 번째다. 금년 칠석날엔 결혼식을 더 미룰 수가 없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면 지하선은 광상산에서 쫓겨날 신세다. 양가 집안과 결혼 당사자끼리도 약속이 되었다. 더욱이 예비신랑 천상일한테는 명문대가집 규수들의 청혼이 줄을 섰다. 또한 천상일로서는 자존심도 버리고 3년씩이나 기다려 준 것이다.
하지만 초희의 입장은 다르다. 지하선의 입장도 오빠의 입장도 아닌 자신의 길을 가려고 마음을 굳혔다. 장왕과 번희의 뜨겁고 아름다운 금실이 부러웠다. 번희가 남편 황제의 사냥에 미친 것을 고치기 위해 사냥해 온 새고기와 짐승고기를 먹지 않기로 하였다.
신혼초엔 남편이 사냥을 좋아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었다. 말 타고 활 잘 쏴야 전장에 나가서 승리할 수 있어 좋아했었던 것이다. 번희의 그런 속 깊은 내조가 초희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황제가 사시사철 사냥에만 온 정열을 쏟아 정무(政務)엔 소홀하여 나라가 위태로울 지경이다. 장왕이 정무에 소홀한 틈을 타 대신들이 날뛰었다. 인사에도 영향이 크다. 바른 말을 하는 충신은 따돌리고 간신들과 친인척을 요직에 앉혀 황제의 총기를 흐리게 하는 것이 번희의 눈에 보였다.
번희는 잠자리에서 눈물로 사냥을 자제할 것을 거듭 호소하였으나 처음엔 믿지 않았다. 번희는 결심을 했다. 새와 짐승고기를 먹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잠자리도 거절하기로 마음 먹었다. 장왕은 사냥해온 짐승고기로 안주를 하고 풍악을 울리며 미녀들의 춤과 노래로 연희를 즐기고는 예외 없이 번희를 찾았다. “오늘은 폐하 소첩 몸에 이상이 생겼어요... 마음에 드는 계집의 방으로 가시면 좋겠네요!” 장왕은 별말 없이 평소에 눈여겨봤던 후궁 방으로 가 몸을 풀고 날이 밝자 사냥에 나섰다.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번희는 잠자리를 거부하였다. 장왕은 화를 버럭 내며 “네년이 나를 거부하렷다!” 번희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장왕의 성정을 꿰뚫고 있어서다. 호랑이 눈을 부라리며 벼락같이 큰소리를 치지만 이튿날 저녁엔 순한 양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장왕은 번희의 섹스포로다.
번희의 방사작전은 적중하였다. 숨이 막히는 운우지정에 장왕의 입이 마치 하마 입처럼 벌어졌다. “짐에겐 황후가 최고요... 아프지 마소... 궁궐에 후궁들이 많이 있으나 여자는 황후뿐이요...” 장왕은 번희가 정말로 몸이 안 좋아 잠자리를 거부한 줄로 알고 있다. 평소엔 안색이 안 좋아 보였을 때도 짜증부리지 않고 순순히 몸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번희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폐하께서 소청의 간청을 들어주시면 소첩의 몸은 아플 일이 없지요!” “그게 무슨 소리요? 짐이 언제 황후의 간청을 안들어 준적이 있소?” “있지요. 지난번 정승 우구자(虞丘子)를 내쫓고 새 정승을 등용하셔야 한다고 했을 때 폐하는 듣는 척도 안하셨지요? 우구자는 충신이 아닌 간신이에요. 폐하가 사냥에 빠져 있을 때 국정을 문란케 했어요! 그 자를 하루 빨리 내치시고 새 정승을 등용하시고 국무에 전념하셔야 합니다.” 번희의 단호한 충언에 장왕은 어머니 앞에 젖먹이가 되었다.
달콤한 번희의 하룻밤 잠자리에 장왕은 딴 사람으로 변했다. 우구자 대신 손숙오(孫淑敖)가 등용되어 국정이 하루가 다르게 평정을 찾았다. 장왕의 사냥도 매일 가다시피 했던 것도 한 달에 한두 번으로 줄었다. 번희의 잠자리 공략에 굴복한 것이다.
그 후 장왕은 춘추오패(春秋五覇)가 되었으며 번희는 주(周)의 왕(宣王)의 강후(姜后), 제(齊)의 환공(桓公)의 위비(衛妃)와 함께 3현비(賢妃)로 추앙 받고 있다.
번희의 봉분은 현재 호북성 고형주성 소문 밖 동북쪽 4km 위치에 있으며 높이가 10m나 돼 그 위용이 대단하다. 초희도 번희와 같이 현비가 되고 싶은 생각으로 경번(景樊)이란 자(字)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초희의 아들 셋에 딸 셋의 친정처럼 명문대가의 꿈은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마 그녀의 화려한 꿈은 이승이 아닌 광산산의 세계에서나 가능할 수 있으리라...
2016-09-21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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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9> 허난설헌(許蘭雪軒) <제6話>
오늘따라 단아하게 화장한 초희가 신선세계 광상산(廣桑山)에 초대되었다. 광상산은 초희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세상이다. 1582년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초여름 어느 날 오후다. 밤새 시를 써 피곤함이 전신을 감싸 돌고 있을 때다. 눈이 감기고 스르르 잠이 들자 초희는 난새(봉황 같은 상상의 새)를 타고 단숨에 광상산에 다다랐다.
천귀남·천상일·지하선이 이승세계의 생활을 궁금해 한다. 특히 난설헌의 결혼생활에 궁금증을 더욱 높였다. 지하선은 방년 꿈 많은 20세다. 결혼날짜를 잡아 놓은 상태로 부부관계 등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난설헌을 롤 모델로 삼으려는 자세다. 지하선은 천상일과 백년해로를 약속하였다. 그런데 정작 결혼식은 아직 미정이다. “언니 사실 저는 이곳 남자가 아닌 언니의 나라 남자를 사모하고 있어요!” 라며 난설헌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초희는 지하선의 귓속말에 기겁을 한다. 너무 놀라운 사실이다.
오빠 허봉을 사랑하고 있다는 애기다. 허봉오빠는 지금 금강산을 유람하고 있다. 지하선은 허봉을 기다리다 지쳐 천상일과 결혼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양가집에서 서둘러 약혼식만 한 상태다. 오빠 허봉을 기다리기 위해 결혼식을 무한으로 미뤄놨는데 양가 어른들의 독촉에 올해를 넘기기 어렵다는 애기다.
초희는 기가 막힌 사연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빠 허봉은 함경도 종성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풀려나 금강산을 유람한다는 소식이 있을 뿐 반년째 연락이 없는 상태다. 그 오빠가 죽기를 학수고대하는 여인이 있다. 사랑이란다.
지하선은 허봉이 난설헌의 오빠인줄 모르는 눈치다. 난설헌은 입이 반쯤 열렸다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허봉이 자기 오빠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알수 없어서다. 사랑은 자유가 아닌가? 자신의 결혼이 가문끼리 결합의 희생물인 것을 잘 알고 있는 초희로선 할 말이 아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다. 초희는 광산산에서 일찍 집으로 오겠다고 마음먹는다. 지하선과 얼굴을 마주하기가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초희가 광상산에 가면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떨어져야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는데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초희는 광산산을 떠날 때 활짝 핀 해당화 한송이를 꺾어 꼭 품에 안고 떠났다. 광상산 정원엔 해당화가 유난히 많다.
광상산에선 초희는 해당화란 별명이 붙었다. 격정적인 정서와는 달리 초희의 표정은 항상 온화하였다. 해당화의 꽃말과 닮았다는 신선세상 사람들의 중론이다. 게다가 해당화까지 좋아하여 별명이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난설헌은 활짝 핀 해당화 한송이를 가슴에 품고 집으로 왔다. ‘어두운 창가에 촛불 나직이 흔들리고/ 반딧불은 높은 지붕을 날아서 넘네요/ 깊은 밤 시름겨워 더욱 쌀쌀한데/ 나뭇잎은 우수수 떨어져 흩날리네요/ 산과 물이 가로막혀 소식도 뜸하니/그지없는 이 시름을 풀길이 없네요/ 청련궁 오라버니를 멀리서 그리노라니/ 산속엔 담쟁이 사이로 달빛만 밝네요’ ≪오라버니 하곡께≫다.
금강산에 있는 오빠를 생각하며 쓴 시인 듯하다. 허봉과는 남매 이전에 스승 같은 오빠다. 그 오빠를 사랑한 여인이 지금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서도 사랑이 힘든데 이승과 저승의 사람들의 사랑이 맺어질 수 있을까 생각에 이르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하선은 허봉과는 일면식도 없는 관계에서 짝사랑하는 여인이다. 집에 돌아온 초희는 고민에 빠졌다. 오빠에 대한 지하선의 짝사랑이 마음에 걸렸다. 초희는 남녀 간 뜨거운 사랑에 목마른 여인이다. 결혼하기 전엔 아버지를 비롯 두 오빠와 동생으로부터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자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집와선 개밥에 도토리가 되었다. 남편 김성립은 언 땅에 오줌 누듯 가뭄에 콩 나듯 들어와 일방적 방사로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만들었으나 모두 헛농사를 지었다. 생각없이 뿌린 씨앗이 정상으로 자랄 수 없듯이 두 아이는 애기무덤의 신세가 되었으며 한 아이는 세상 조차 보지 못했다.
초희는 광상산에서 돌아온 후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살고 있는 세상이 다를 뿐 같은 여자로 지하선 편을 들어야 마땅한 처사다. 그러려면 오빠가 빨리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 초희는 그럴 수는 없다. 허씨네 네 남자(허엽, 허성, 허봉, 허균) 중에서 제일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허봉 오빠가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소중한 사람이다.
3일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샌 어느날 새벽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다. “언니 저 지하선이예요! 언니가 제 편에서 응원을 해주세요! 허봉님을 3년째 기다리고 있어요! 올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석(七夕)날이 지나면 결혼을 하도록 돼 있어요... 언니는 남녀 간의 사랑이 어떤 것이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잖아요...” 너무나 생생한 목소리다.
그때 3일만에 초희는 깜빡 잠이 들었을 찰나였다. “장안 길가에서 서로 만났죠/ 보자마자 좋아져서 정을 주었죠/ 황금 말 채직도 내버려 두고/ 말머리 돌려서 달려갔어요// 기생집 앞에서 서로 만났죠/ 수양버들에다 말을 매었죠/ 비단옷에다 가죽옷까지 웃으며 벗어/ 그것들 잡히고서 신풍주를 마셨죠‘ ≪서로 만나는 노래≫다. (시옮김 허경진)
초희는 낮엔 허봉 오빠 편이 되고 밤엔 지하선 쪽에 서게 되었다. 낮엔 시 쓰기 등으로 눈을 감지 못하나 해가 떨어져 눈을 붙이면 예외 없이 지하선이 나타나 초희를 못살게 졸라댔다. 초희는 또 밤을 낮으로 보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잠을 이루지 못할 땐 초희는 예외 없이 화관을 쓰고 몸매를 정갈하게 다듬고 시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러면 세상의 시름에서 자연스럽게 자유인이 되었다.
2016-09-13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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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8> 허난설헌(許蘭雪軒) <제5話>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던가? 허오문장(許五文章)도 허엽(許曄·1517~1580)의 객사로 서서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대들보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사랑채에 구름처럼 몰려왔던 사대부들이 하나둘 발길이 끊겼다. 사람이 저승으로 간 것도 서러운데 측근들마저 발그림자가 사라지자 건천동 초희의 친정집은 더욱 어둡다. 적막강산이다.
초희는 친정에 가고 싶으나 시어머니 송씨 벽에 번번이 걸렸다. 그럴때마다 초희는 광상산(廣桑山) 선계(仙界)로 갔다. 그곳엔 초희를 반갑게 맞는 천귀남(千貴南·가명)과 천상일(千相逸·가명), 그리고 지하천(池賀仙·가명)이 있다. 천귀남과 천상일은 각각 두 살씩 위라 자연스럽게 오빠가 되었으며 지하선은 세 살이나 어려 동생을 자처 하였다.
그들은 오누이와 자매가 되어 한번 만나면 해가 지는 줄 모른다. 초희가 선계로 자주 외출을 하는 것은 천귀남과 천상일 오빠, 그리고 지하선을 만나기 위함도 있으나 송덕봉(宋德峰·1521~1578) 부부를 만나기 위함이 더 큰 목적이다. 송덕봉의 남편 유희춘(柳希春·1513~1577 호 眉巖)은 책벌레지만 부부금실이 당대에 최고였었다. 그는 호남의 오현(五賢)중의 일원이기도 하다.
초희는 그들 금실이 부러웠다. 이곳 선계에 와서도 그들 부부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원앙부부다. 남편이 아내보다 일년 일찍 이곳 선계에 와서 냇가 버드나무 옆에 아담한 집을 마련하고 아내 송덕봉을 기다렸다. 초희는 미암같이 다정다감한 사내와 하루만 살아도 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미암의 천계(선계)집은 류촌(柳村)이라고 불렀다. 버드나무 집 앞엔 사시사철 수정 같은 물이 그림처럼 흐르고 버들치 등 물고기들이 노닐며 버드나무 위에선 새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겨울인데도 춥지 않고 여름인데도 덥지 않다. 버드나무집엔 만화방초가 사시사철 만개하여 벌나비가 춤을 추었다.
이승과는 딴판의 계절이다. 초희는 이곳에 매료되었다. 이따금씩 천계(天界)에 다녀오면 이승생활이 더 어려워졌다. 남편 김성립을 애타게 기다려지는 것이 아닌 원망의 대상이 되어졌다.
송덕봉의 남편 유희춘과 비교 되어서다. 미암은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도 하고 송덕봉을 극진히 사랑하는 사대부들이 부러워하는 원앙부부다. 미암은 학문도 뛰어났다. 그런데 김성립은 학문도 아내사랑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어머니 송씨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것 외엔 잘하는 것이 없다.
아버지 허엽의 49재가 어제로 끝났다. 초희는 옥인동에서 건천동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외출을 하려면 남편의 허락이 아닌 시어머니의 재가를 얻는 것이 싫어서다. 친정엘 어쩌다 다녀오겠다고 하면 마땅찮은 표정으로 “갔다오렴...”의 말투를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아서다. 목에 가래가 낀 듯 한 쇳소리의 음성에 초희는 온몸이 떨렸다.
아침부터 비가 온다. 봄비 치고는 제법 큰 빗줄기다. ‘아홉 폭 무지개 치마에 가벼운 저고리로/ 학을 타고 찬바람 내며 하늘로 돌아오네/ 요지엔 달빛이 밝고 은하수도 스러졌는데/ 옥퉁소 소리에 삼색구름이 날아오르네’ ≪하늘을 거니는 노래≫다. 아버지의 49재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심정을 선계에서 마음을 푼다. 광상산에 가면 안되는 일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았다.
남편 김성립 주위엔 훌륭한 인물이 많았다. 허봉을 비롯한 대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는 신흠(申欽·1566~1628)등이 그들이다. 신흠은 한방에서 공부를 같이한 동무이기도 하다. 신랑에 비해 신부인 초희의 학문이 월등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그래서 김성립을 놀려먹는 짓궂은 동무들도 있었다.
어느 나른한 봄날이다. 김성립이 지금 공부는 하지 않고 기방에서 기녀와 놀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김성립을 놀려주려는 친구의 거짓말이다. 그때 마침 난설헌의 몸종이 있는 자리였다. 몸종은 쪼르르 달려가 난설헌에게 일러바쳤다. 김성립 친구는 난설헌이 대낮에 공부할 시간에 기방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 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너무나 의외였다.
푸짐하게 차려진 술상이 왔다. 간고등어와 묵은김치 안주에 손도 안댄 소국주(素麯酒)로 정성이 가득 담긴 술상이 나왔다. 술병에는 시 한수가 적혀있었다. ‘낭군께선 본래부터 무신하신 분/ 동접(同接·같은 곳에서 공부하는 동무)들은 어떤 분들이기에 이간질이신가?’ 뒤통수를 치는 재치 발랄한 난설헌만이 할 수 있는 기막힌 응수다. 이 상황을 본 신흠은 여인답지 않은 호방한 난설헌의 기상을 속 깊이 알게 되었다고 토로하였다.
사실 초희에겐 3색(三色)의 세계가 존재한다. 피와 살을 통해 느껴지는 오감(시視·청聽·후嗅·마味·촉觸)의 희로애락의 세계, 시를 통한 사대부 사회에서 얻어지는 성취감의 세계, 그리고 오감을 통해 여과 없이 느껴지는 희로애락의 신선세계가 그것이다.
남편과 시어머니에게서 겪는 세상살이의 고초만 없으면 난설헌의 삶은 지상 최고의 삶이다. 아니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작지만 별당에서 분명한 자기 삶을 영위하는 여류 문인이다. ‘사는집 장간리 마을에 있어/ 장간리 길을 오가곤 했어요/ 꽃가지 꺽어들고 님께 묻기도 했죠/ 내가 더 예쁜가 이 꽃이 예쁜가// 간밤에 남풍이 일어/ 배 깃발 펄럭이며 파수를 향했지요/ 북에서 온 사람을 만나 물으니/ 님께서는 양자강에 계신다 하더군요’ ≪장간리 노래≫다. (시옮김 허경진)
남녀 간의 애틋한 노래다. 난설헌의 문학세계는 이승을 뛰어넘는 신선의 세상이 있는가 하면 지금 읽어도 입이 딱 벌어지는 에로틱한 영물시(詠物詩)도 있다. 남존여비 사대부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소리없는 외침이라고 하겠다.
2016-09-07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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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7> 허난설헌(許蘭雪軒) <제4話>
임금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말하는 작은오빠 허봉을 그미는 피붙이를 넘어 존경하였다. 거침이 없는 말수와 논리 정연한 사물에 대한 사고도 매력적이었으나 헌헌장부 같은 모습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겼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빠 허봉은 12살 위로 때로는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까지 벌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문득문득 ‘오빠가 남이었으면...’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남이면 헌헌장부에게 연심을 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을 찰나적이지만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속내를 들키는 것 같아 가을석류 같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그미는 오빠를 빤히 쳐다보기도 하였다.
허봉은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올 때마다 초희에게 상아빗과 화장품, 그리고 거울 등을 사다주었다. 그럴 때면 그미는 “오빠, 소녀는 어머니가 쓰시는 동백기름을 바르고 창포물에 머리를 감으면 돼요! 명나라 사대부들이 많이 읽은 책을 사다주세요!” 라고 지적 호기심을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럴 때면 허봉은 기쁘면서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초희를 바라보았다. 저 영리하고 재기발랄한 것을 어느 사내가 감당해 낼까 걱정이 앞섰다.
아무튼 허난설헌은 안동김씨 집안의 김성립과 결혼하여 건천동(현 명동 근처) 친정에서 3일을 묵은 후 시집인 옥인동으로 들어갔다. 소위 삼일우귀(三日于歸)의 결혼 제도다. 거문고를 키는 것 보다 붓으로 글쓰기를 즐겼으며 비단에 수놓는 것 보다 말 타고 석성을 달리는 것을 선호했던 그미는 날개 꺾인 봉황이 되어 별당에 갇히게 되었다.
그미의 꿈은 꿈으로 끝날 현실이 되어 버렸다. 초희는 어릴 때 소학·대학·논어·중용 등을 탐독하여 학문의 세계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과거를 봐 장원급제 했었으리라! ‘하늘하늘 창 아래 난초 잎/ 가지와 잎 어찌 그리도 향기로운가/ 하늬바람 한번 스치면/ 시들어 버리니 가을 서리를 슬퍼하노라/ 빼어난 고운 빛 시들어 버려도/ 맑은 향기는 끝내 없어지지 않는구나/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흘러 옷깃이 젖네...’ ≪어리석었어≫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은유했음이다. 꿈 많던 소녀가 별당에 갇힌 신세가 되었으니 그 마음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미는 진정한 조선판 노라이즘, 아니 페미니즘이었을 게다. 적자도 서자도 빈자도 부자도 남자도 여자도 천민도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꿔 왔을 것이다.
아버지 허엽은 화담 서경덕(徐敬德·1489~1546)의 문인으로 도학적 학풍을 이어 받았다. 또한 허엽은 동인 중에서 자유분방한 북인계에 속했으며 김성립은 성리학의 철저한 지킴이 남인계다. 이처럼 가문이 가지고 있는 학풍이 서로 다른 이들이 결혼하였다. 김성립의 안동김씨 집안은 5대가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문으로 시를 쓰는 자유분방한 허난설헌의 집안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결혼은 가문과 가문이 관계를 맺는 풍습으로 결혼 당사자의 생각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허난설헌과 김성립도 그 중의 한 쌍이다. 난설헌이 김성립이 마음에 들지 않듯이 김성립도 난설헌이 결코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을 게다. 여자란 남자 품에 쏙 들어와야 하는데 난설헌은 그런 여자가 아니었었다.
오히려 자신을 능가하는 수준의 여자여서 언제나 버거운 상대였다. 계속 실패했었던 과거도 난설헌이 사망한 뒤 힘겹게 급제하였다. 어머니 송씨의 한을 풀었다. 아마 보기 싫은 시나 쓰는 며느리가 없어져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가문의 경사가 생겼다.
난설헌이 살아있을 때 김성립이 과거에 급제했다면 며느리 구박이 좀 덜 했을 터인데 그것마저 안돼 그미는 시어머니 복도 남편 복도 없는 여자로 결혼생활 13년을 끝냈다. ‘신선께서 알록달록 봉황새를 타고/ 한밤중 조원궁에 내려오셨네/ 붉은 깃발은 바다 구름에 흩날리고/ 예상 우의곡이 봄바람에 울리네/ 요지 봉우리에서 나를 맞으며/ 유하주 한 잔을 권하시더니/ 푸른 옥지팡이를 빌려주시며/ 부용봉에 오르자고 인도하시네...’ ≪부용봉에 오르다≫다. (시 옮김. 허경진)
이렇듯 그미는 결혼생활에서 얻지 못하는 꿈을 눈만 감으면 현실처럼 나타나는 신선세계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곳 신선세계에서 서왕모(西王母)를 만나고 그곳 세상에서 고추보다 매운 시집살이에서 못 이룬 삶의 아름다움과 시의 세계도 마음껏 펼쳤으리라...
하지만 육신이 거처하는 옥인동 시집에선 끝이 없는 갈등이 빚어졌다. 김성립은 초희에게서 얻지 못하는 여자와의 사랑을 제3의 여자한테서 찾았다. 육체의 희열을 넘어 아이까지 낳아 안방으로 들어오는 사건을 일으켰다. 장남인 김성립에겐 대를 이를 중책이 허난설헌에게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가정사다.
하지만 이 또한 초희가 감내 해 내야하는 여자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와중에 아버지 허엽의 비보가 날아든다. 경상북도 감찰사 겸 병마절도사로 임명됐으나 병마로 사퇴하고 귀경길에 상주객관에서 절명(1580년 2월 4일)했다는 절망적인 소식이다.
그미는 서둘러 건천동 친정집으로 갔다. 같은 사대문 안인데 3년 만에 간 친정집이다. 몰라보게 야윈 초희의 모습에 영월댁 김씨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네 곱디고운 선녀 같은 모습은 어디가고 이 몰골이 무엇이냐?” 영월댁 김씨는 남편 사망소식보다 딸의 몰라보게 변한 모습을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어머니 저 괜찮아요! 요즘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요...” 그미는 태연하다. 어머니와 같이 표정을 바꾸면 더욱 놀라실까 의연하게 행동하였다.
그것이 초희의 본래 모습이다. 딸은 어미를 쏙 빼 닮는다. 초희도 강릉김씨를 닮은꼴이다. 딸이 어머니를 보면 자신이 늙은 모습이고 어미가 딸을 보면 자기의 젊은 때 모습이다. 초희네 모녀가 지금 그러하다.
모녀는 서로 입만 보고 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나 궁리하는 표정이다. 모녀는 굳게 닫힌 입을 끝내 열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만 두 볼로 흘려보내고 있다. 그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마른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2016-08-31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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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6> 허난설헌(許蘭雪軒) <제3話>
고부간이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딸 같은 며느리는 없다고 하였다. 너를 딸처럼 사랑하겠다는 시어머니의 말은 달콤한 입발림이라고 세상 여론은 말한다. 그랬다. 16세기 안동김씨 안방마님 송씨(宋氏)와 허난설헌 사이는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
한울타리 안에서 같이 살면 안 되는 관계가 어떻게 얽혀 고부간의 인연을 맺었다. 고부간의 인연은 고추보다 맵고 시지프스처럼 고단한 삶이었다.
부부의 연을 맺은 허난설헌과 김성립과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이름뿐인 부부다. 그들은 사랑이 강물처럼 넘치는 금실 좋은 원앙부부가 되지 못함을 서로 상대방에 책임이 있다는 의식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다.
김성립은 도도하고 학자연하는 그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고분고분한 여필종부(女必從夫)의 사고에 젖은 안동김씨의 전형적 사대부다.
하지만 그미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사회가 인정하는 천재 여류시인이 아니던가?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너무 먼 여인이었을 게다.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기롭더니/ 가을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시 들었네/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난초 내 모습≫이다. 결혼하여 별당에 갇혀 서서히 젊음과 미모가 사라져 가는 자신을 읊은 듯하다. 자유의 영혼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병들어 시들어가는 모습을 은유(隱喩)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고부간의 갈등이 심하면 부부금실이라도 뜨거워야 하는데 허난설헌과 김성립은 금실마저 차가웠다.
그런 부부사이에도 그미는 임신을 하였다. 가뭄에 콩 나듯 바람처럼 들어와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 욕정을 채우는 동시에 남편역할을 하여 그미를 엄마로 만들어 가는 듯하였다. 하지만 임신부까지로만 만들어 주었다.
첫 아이는 그렇게 그미를 엄마로 만들어 주지 못하고 일찌감치 꿈과 행복이 가득한 저 세상으로 먼저 갔다. 손이 귀한 김첨(金瞻·1354~1418)의 가문에도 충격적이었으나 그미에겐 더 큰 상처를 안겼다. 남편은 미워도 자식은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어미의 심정이다.
그미도 그러하다. 데면데면한 남편의 불성실함을 자식에게서 보상 받으려는 생각이 수포로 돌아가서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미도 여자다. 고부간의 갈등 속에서도 슬쩍슬쩍 잠자리에서 남편으로서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었는데 김성립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어머니의 시각에서 질시와 인격을 폄훼하는데 앞장섰다.
열등의식일 게다. 번번이 떨어진 과거 낙방에 자존심이 심히 상했을 것이다. 그미는 학문이 높을 뿐만이 아니라 미모도 출중하다. 희고 긴 목덜미, 희다 못해 사기처럼 빛이 나는 속살, 호수같이 깊고 하늘빛처럼 맑은 눈동자, 오뚝한 코, 오이씨 같은 입, 잘록한 허리 등 어느 한 곳도 균형이 깨지는 부분이 없다. 신윤복의 미인도 그 모습 그대로다. 하늘에서 잠시 이승으로 내려온 선녀다.
어머니 영월댁 김씨는 너무 곱고 예쁜 딸 허난설헌이 자나 깨나 걱정이다. 그에게 맞는 배필이 이승엔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 같은 걱정이 기우이길 바랬는데 김성립이 어느 날 불쑥 허봉과 나타나 사돈지간이 되었다. 집안끼리의 결혼문화다. 걱정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영월댁 김씨는 최희를 시집보내고 몇 달을 가슴앓이를 하였다. 걱정했었던 일들이 기우에 불과하기를 신령님과 조상님들에게 수도 없이 빌었는데 그만 현실이 되어 보름동안은 아예 몸져 누웠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차린 그미는 친정에서 같이 온 함실댁을 통해 편지로 위로를 하였다.
역시 어머니 생각은 딸이다. 그 같은 어머니 생각으로 마음과 괴로울 때마다 그미는 시를 쓰거나 신선세계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 ‘난새를 타고 한밤 중 봉래산에 내려서/ 기린수레 한가롭게 타고 향그린 풀잎을 밟네/ 바닷바람이 불어와 백도화를 꺾었는데/ 옥소반에는 안기의 대추를 가득 따다 담았네’ ≪하늘을 거니는 노래≫다. (시 옮김. 허경진) 이렇듯 그미는 고부간의 갈등이 최고조로 빚어져 시 쓰기로도 카타르시스가 안 될 때는 신선세계로 훠이훠이 여행을 떠났다.
그곳은 갈등이나 번뇌 같은 이승에서의 세상살이에서는 없는 사랑과 꿈과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여서다. 또한 그곳은 그미가 갈 때마다 깍듯한 예의로 여왕처럼 맞아 주었다. 그래서 그미는 일찍이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썼나보다.
아마도 허난설헌은 신선세계에서 무언가 실수를 하여 옥황상제의 명으로 인간세계에 잠시 여행길에 들려 그토록 짧은 삶을 살고 간 것이 아닐까? 인간세계의 27년은 신선세계의 27시간이나 27분쯤 되는 짧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미의 시집살이는 고추보다 매운 세월이었다. 게다가 남편은 비아냥거림까지 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들어온 성립은 아랫목에 벌러덩 자빠지듯 누웠다. 그리고 손으로 턱을 괴고 그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표정이 그윽한 모습의 얼굴이 아닌 ‘네가 그렇게 대단한 여자냐?’하는 얄궂은 태도다. “서방님 뭐가 필요하세요?” 그미는 남편의 표정은 아랑곳 않고 공손한 어투로 예의를 갖추었다. “아니오!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 봤소이다. 아참! 당신 시를 잘 쓰니 나에 대해 시를 써 보시구려...” 그미는 심장이 멎어옴을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별당을 뛰쳐나가 건천동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시어버니한테 짓눌리고 남편에게선 치받쳐 안팎곱사 된 상황에서 친정엘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15년 동안을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워 시집을 보냈는데 지금의 추한 꼴을 보일 그미가 아니다.
어떻게든 관계 개선을 하여 웃음과 꿈이 가득한 행복한 모습의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로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침이슬처럼 맑은 그미의 두 눈에 어느덧 수정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였다. 김성립은 초희의 그런 모습이 신기한 듯 묘한 표정으로 턱을 괸채 바라보고 있다.
2016-08-24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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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5> 허난설헌(許蘭雪軒) <제2話>
옷을 갈아입기 전에 머리단장이 먼저다. 초희는 장미목으로 만든 경대를 앞으로 끌어당긴다. 접이식으로 된 경대 아래 칸엔 촘촘한 참빗과 성근 얼레빗이 있고 위 칸에는 둘째 오라버니 허봉(許篈·1551~1588)이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사가지고 온 상아 얼레빗과 쇠뿔로 만든 참빗도 보였다. 또한 박달나무로 제작된 얼레빗 여러 개가 기름먹은 한지에 쌓여 있다.
함 받을 준비로 건천동 그미네 집은 들뜬 분위기다. 가장인 허엽은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 일어나 담뱃대에 불을 연이어 붙이며 사랑방을 아래위로 오가며 서성댄다.
사위 김성립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문벌이야 안동김씨(安東金氏)면 조선에서 으뜸가는 가문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김성립이 딸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초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다. 초당의 주위엔 내로라하는 집의 헌헌장부들이 줄을 서 청혼을 해 오는데 얼떨결에 김첨(金瞻·1354~1418)네와 사돈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가문이야 조선 제일의 문벌이나 이제 서서히 햇빛이 피해가는 집안 측에 들었다.
반면에 허엽의 집은 일취월장 가세가 대나무 뻗어 나가듯 해마다 다르다. 특히 그미의 문재가 두드러지게 빛나고 있다. 8살에 지었다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은 천재신동이라 칭찬을 해도 부족할 정도다. ‘엎드려 바라오니, 이 대들보를 올린 뒤에 계수나무 꽃은 시들지 말고, 요초는 사시사철 꽃다워지이다. 해가 퍼져 빛을 잃어도 난새 수레를 어거하여 더욱 즐거움 누리시고, 땅과 바다의 빛이 바뀌어도 회오리바람의 수레를 타고 더욱 길이 살며, 은창이 노을에 눌릴 만큼 아래로 구만리 미미한 세계를 내려다보시고, 구슬문이 바다에 다다르면 삼천년 동안 맑고 맑은 뽕나무 밭을 웃으며 바라보게 하시며 삼소(三宵) 해와 별을 돌리시고, 몸으로 구천세계의 바람과 이슬 속에 노니소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의 일부분이다.
이 상량문은 신선세계에 있는 ‘광한전백옥루상량식’에 초희가 초대되어 지은 명문이다. 상량식에 상량문을 써야하는데 마땅한 인물이 없어 초희가 초대되어 단숨에 써내려가 신동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신선세계도 깜짝놀라게 하였다.
허무맹랑한 애기 같으나 초희는 중국 송(宋)나라 이방(李昉)등이 지은 설화집 ≪태평광기≫(太平廣記)를 이미 읽고 신선세계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그미는 이처럼 조숙했다. 그미는 조숙했을 뿐만이 아니라 새와 동물, 초목과 자연, 사물 등을 주제로 하는 영물시(詠物詩)까지 썼다. ‘뜻이 맞아 두 다리를 합하고/ 다정스레 두 다리를 쳐들었소/ 흔드는 것은 내가 할테니/ 깊고 얕은 건 당신 맘대로...’≪가위≫란 시다. 옷감을 마름질하는 가위의 모습과 노골적인 성교의 세부장면을 겹쳐 놓았다. 흡사 ≪금병매≫의 한 부분을 옮겨 놓은듯하다. 천재 여류시인의 문학세계는 이승과 신선의 나라에서 광대 무한한 영혼의 날개를 폈다.
이렇듯 그미는 속세를 떠난 또 하나의 세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봉황이 창공을 날아다니듯 훨훨 누구의 허락도 제지도 당하지 않고 선녀(仙女)들이 살고 있는 신선세계도 마음껏 드나들었다. 그 신선세계를 그미는 마음먹고 눈만 감으면 봉황이 날개를 펴 날면 한 번에 구만리를 날아가듯 훌쩍 이승의 경계를 넘어 꿈과 낭만이 넘치는 신선세계로 가 옥황상제와 담소를 즐기곤 하였다.
천재 여류시인의 특권이자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젊은 부부의 달콤한 삶의 싱그러움을 신선세계에서 찾았던 것 같다. 사실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이 남녀칠세부동석의 절대 규율에 틈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여자는 삼종지의(三從之義)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의 그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미는 아버지 허엽과 두 오빠 허성, 허봉, 그리고 동생 허균으로부터 여자가 아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대접받으며 성장하였다. 하지만 김성립과 부부가 된 이후 그미의 생활은 360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야했다.
감옥이나 다름없는 별당에서 그미(그녀의 애칭)의 생활이다. 자유로운 영혼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신선세계로 여행은 일상처럼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봉황이 단산 굴에서 나오니/ 아홉겹 깃 무늬가 찬란해라/ 덕을 보여주며 천길 높이 날고/ 높은 소리로 산 동쪽에서 울어대네/ 벼나 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네/ 어쩌다 저 오동나무 위에/ 올빼미와 솔개만 깃들어 있단 말인가...’ ≪봉황은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다. (시 옮김 허경진) 봉황은 상상세계의 상상의 새다. 아마 그미는 자신을 봉황에로 메타포(metaphor·은유)한듯하다. 현실세상에서 얻지 못한 욕구불만의 어떤 것을 그미는 신선세계에서 찾았을 것이다.
신부는 신랑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신랑 또한 신부를 뜨거운 가슴으로 맞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성립과 허난설헌은 부부가 되었다. 그미는 족두리도 내려놓지 못한 채 첫날밤을 샜다. 하지만 신랑은 평소 부리던 몸종 달이와 그미가영물시로 표현한 ≪가위≫가 되었다. “도련님 오늘밤이 쇤네는 마직막입니다. 내일 모레 새아씨 오시면 무슨 수로 새서방님이 제 차례가 되겠어요? 새아씨는 문장가에 요조숙녀 같은 미인이라던데...!” 성립은 달이의 풍성하고 오감을 녹이는 육체의 향연에 몇 초도 안 걸려 넋을 잃었다. 결혼하기 며칠 전의 환희다.
그미는 결혼을 했는데 늘 독수공방이다. 오히려 그미는 독수공방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그미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신선세계로 여행을 떠나 선녀들과 춤추고 노래하면서 성리학의 나라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아침 안개처럼 주위를 감싸고 있는 속박을 카타르시스 시켰을 게다.
만약 남편 김성립이 보통 남편과 같이 금실 좋은 부부생활을 했었다면 오늘날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문학세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문화예술은 사랑도 운명도 역경을 딛고 꽃피워지는 창작의 산물이여서다. 허난설헌의 특별한 문화예술의 공간도 성장환경과 결혼 후의 상반된 생활이 꽃피운 시의 세계인 듯하다. 그미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봉황이었었다.
2016-08-17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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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4> 허난설헌(許蘭雪軒) <제1話>
여자에게도 과거제로 국가인재를 등용시켰다면 허난설헌(본명 초희楚姬· 호 난설헌蘭雪軒· 자 경번景樊)이 여자 율곡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 그녀의 천재성으로 보아 과거에 참여했었다면 장원은 따 놓은 당상이 뻔해서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는 9번 과거에서 모두 장원으로 호조좌랑의 첫 벼슬길에 올랐다. 1558년(명종13년) 8월 명경과에 역수책(易數策)으로 장원급제하여 순수사림에서 세상살이로 나왔다. 율곡을 두고 문과 모두에서 장원을 했다하여 구장(九 場)장원, 또는 구도(九度)장원이라고 하여 세상에 회자되었다. 그때 율곡의 나이 27세에 불과하였다.
허난설헌은 하늘을 나는 봉황이었는데 새장에 갇힌 삶을 살았다. 15살에 두 살 연상인 김성립(金誠立·1562~1592)과 1577년(宣祖10년)에 결혼하여 13년을 살다간 짧은 인생에서 주옥같은 시 300여수와 산문·수필 등을 남겼으나 213수 정도만 현재 전해지고 있다.
아마 그미(그녀의 이칭)는 꿈과 낭만이 가득한 선계(仙界)로 갔을 것이다. ‘구슬 꽃 산들바람 속에 파랑새가 날더니/ 서왕모는 기린수레타고 봉래 섬으로 가시네/ 난초 깃발 꽃 배자에다 흰 봉황을 타고/ 웃으며 난간에 기대 요초를 뜯네/ 푸른 무지개 치마가 바람에 날리니/ 옥고리와 노리개가 쟁그랑 소리를 내며 부딪치네/ 달나라 선녀들은 쌍쌍이 거문고를 뜯고/ 계수나무 위에는 봄 구름이 향기러워라/ 동틀 무렵에야 부용각 잔치가 끝나/ 붉은 퉁소 소리에 오색노을이 걷히자/ 이슬 젖은 은하수에 새벽 별이 지네’ ≪신선세계를 바라보며≫다.
천재 여류시인의 너무 짧은 삶이었다. 결혼생활 13년에 임신을 세 번 했으나 후손은 없다. 첫째는 유산을 했고 남매는 어릴 때 어미 곁을 떠나 그미의 장례식엔 상주가 없었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밤마다 서로 따르며 놀고 있을테지/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키네...’ ≪아들 죽음에 곡하다≫다. 자식을 앞세운 어미의 가슴 메어지는 슬픔을 오롯이 담았다.
난설헌은 조선 땅에 태어난 것과 여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등 세 가지를 평생 후회했다고 하였다. 천재 여류시인의 절규다. 그미가 대장부로 태어났던들 성리학의 나라인 남성 주도 조선사회에서 실력에 걸맞은 사대부로 활동을 했을 것이다. 또한 김성립이 아닌 헌헌장부 최순치나 대시인 이달을 빼어 닮은 어느 사대부와 결혼을 했었다면 27세란 그토록 짧은 인생을 그렇게 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난설헌은 일찍 가도 너무 일찍 이승을 떠났다. ‘자주빛 퉁소 소리에 구름이 흩어지자/ 발 밖에는 서리가 차가워 앵무새가 우짖네/ 밤 깊어져 외로운 촛불이 비단 휘장을 비추고/ 이따금 드뭇한 별이 은하수를 넘어가네/ 똑똑 물시계 소리가 서풍에 메아리치고/ 이슬지는 오동나무 가지에선 밤 벌레가 우네/ 명주 손수건에 밤새도록 눈물 적셨으니/ 내일 보면 점점이 붉은 자국이 남았으리라...“ ≪임을 그리며≫다.
난설헌은 결혼은 했어도 평범한 남녀가 꿈꿨던 사랑의 달콤한 삶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난설헌과 김성립은 어울리는 원앙이 되지 못하였다. 안동김씨는 5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문을 이루었다. 하지만 김성립은 수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을 거듭했다.
이 같은 집안 상황에 그미는 시어머니 송(宋)씨와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집안의 절애고도인 별당에 살고 있는 새색시 그미는 남편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다. 위의 시 ≪임을 그리며≫는 읽은 이 마다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하는 시다. 여기서 임이란 남편 김성립을 지칭 했다면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으면 그리운 임으로 형상화 되었을까? 아니면 시의 세계에서 선망하고 가슴 졸이는 어떤 사대부가 대상이었으리라!
그미는 당시 세상에서 알아주는 신동이었다. 8살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을 정도의 세기적 천재로 평가되었다. 석학인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의 삼남삼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컸다.
위로는 큰오빠 허성(許筬), 둘째오빠 허봉(許篈) 아래는 후에 ≪홍길동전≫으로 이름을 날린 허균(許筠)이었다. 허엽은 조강지처 청주 한씨한테서 두 딸과 허성을 얻었고 재취한 강릉 김씨에게서 두 아들과 천재소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허초희를 얻었다. 그의 일가는 뛰어난 문재(文才)로 삼허(三許), 또는 사허(四許)와 오허(五許)로까지 불렸다. 삼허는 아들 삼형제를 지칭함이며 사허는 삼형제와 아버지, 그리고 오허는 천재소녀 초희 까지를 포함한 호칭이었다.
하지만 그미의 결혼생활은 질곡의 나날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이 있을 때 남편의 위로가 있어야 했거늘 김성립은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마마보이였던 것 같다.
시 나부랭이나 쓴다고 남편을 무시하는 듯하는 표정으로 읽은 김성립은 그미를 버거워 했으며 신비롭고 꿈속 같은 신혼 방에도 가뭄에 콩나듯 들려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사내역할을 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천재 여류시인 그미는 시와 선계에서 고추보다 매운 시집살이의 시름과 고독을 달랬다.
고통 속에서도 예술의 꽃은 신비롭고 화려하게 피어났다. ‘오동나무 한 그루가 역양에 자라나/ 차가운 비바람 속에 여러 해를 견뎠네/ 다행이도 보기 드문 장인을 만나/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었네/ 다 만든 뒤 한 곡조를 타 보았건만/ 온 세상에 알아들을 사람이 없네/ 이래서 광릉산 묘한 곡조가/ 끝내 전해지지 않고 말았나 보네’ ≪내 소리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네≫다. (시 옮김 허경진) 성리학 외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하는 남성절대사회에 대한 원망의 시인 듯하다. 성질대로라면 그미는 백마를 타고 삼천리금수강산을 봉황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 본 대로 느낀 대로 시의 세계를 펼쳤을 것이다.
2016-08-10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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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3> 이매창(李梅窓) <제8話>
세월이 흘러갈수록 매창의 이름은 곱고 화려하게 부활한다. 육신은 비록 이승을 떠났어도 영혼은 문화예술계를 더욱 아름답고 뜨겁게 달구고 있다. 살아있을 때는 인향만리(人香萬里), 아닌 재색만리(才色萬里)로 풍류계에 여풍을 일으켰었는데 죽어선 문화예술계를 무지갯빛으로 감싸 안는다. 매창의 신드롬이 거세다.
부안의 풍치 좋고 많은 사람들의 발길 닿는 곳에 매창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대표적인 곳이 매창공원과 성황산(城皇山) 서림공원이다. 그곳엔 여러 개의 시비가 아름다운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화려한 꽃의 아름다움과 꿀에 매료되어 벌나비가 날아들 듯 매창 주위엔 시인 묵객과 권세가들이 끊이지 않았다. 노비시인 유희경, 김제군수 이귀, 전라관찰사 한준겸(韓浚謙·1557~1627), 부안현감 윤선(尹銑·1559~1637), 공주목사 허균, 그리고 천민시인 백대붕(白大鵬·15501592)등이 그녀 주위에서 서성댔다.
인향 때문 이였으리라... 아니 재항(才香)에 취해 풍류객들이 밤마다 주지육림의 풍류를 즐기려 했지 않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마초(남자다움)들의 성정은 크게 변함이 없어서다.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 또한 여자를 사모한 것이 무슨 죄일까?
조선조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성리학의 나라다. 매창이 살았을 때는 임란(1592)이후 남녀칠세부동석의 엄격한 사회규율이 어느 정도 와해되었던 시대다. 그래서인지 중인(中人)들을 비롯한 하층민들도 어느 정도 신분이 상승되는 분위기로 옮아갔다.
유희경, 백대붕 등이 풍월향도(風月香徒)란 시단(詩壇)의 활동도 사회흐름의 변화를 말함이다. 성리학의 나라 사대부 중심사회에서 천민출신들이 중심이 된 시단이 한양에서 버젓이 활동할 수 있을까? 개화바람이다. 그 중심에 유희경과 백대붕 이였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했던 천재여류시인 매창이 불을 질렀다.
매창의 인향은 시와 노래, 그리고 거문고와 춤에서 아침 안개모양 피어났다. 전라감찰사 한준겸의 부임 후 생일잔치에 부안현감 윤선이 매창을 대동하고 참석한다. 매창을 본 유천(柳川·한준겸의 호)은 대뜸 시를 읊는다.
‘두견이 울음소리 어찌나 괴로운지/ 장안의 길 모두 통하지 않네/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천고의 한이러니/ 새벽바람에 실려 오는 피를 토하는 울음소리/ 달빛 밝은 도산의 새벽/ 찬 하늘 은하수도 텅 비었어라/ 외로운 신하는 재배하며 눈물 흘리는데/ 홀로 술마시니 어지러운 구름속에 있는 듯....“ ≪자규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느낌있어≫다.
즐거운 생일잔치에 한양 구중궁궐에 있는 임금에 대한 시(詩)인듯하다. 흥겨워해야 할 분위기에 침울한 잔치다. 부안현감인 윤선이 매창을 데리고 간 것은 관찰사(현 도지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로비를 한 것일 게다. 윤선의 눈치와 유천의 표정을 읽은 매창이 거침이 없다.
‘이곳은 신선이 사는 산과 가까이 접해있고/ 시냇물은 흘러 약수와 통했네/ 벌들은 따뜻한 봄날을 날아다니고/ 돌아온 제비는 맑은 바람에 지저귀네/ 오묘한 춤사위로 꽃 그림자를 흘리게 하고/ 고운 노랫소리는 벽공을 울리지/ 반도 복숭아를 서왕모에게 바치며 장수를 비나니/ 모두 술잔을 들어 축수하리라!’ 역시 매창이다. 유천의 시에 ≪한준겸이 생일잔치에 지은 시에 차운(次韻하면≫에 화답한 폭포수 같은 시다.
아마 윤선은 그날 유천에게 톡톡히 후한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매창이 기생신분이었으나 풍류객들이 오고갔을 것은 자명할 터다. 이름난 기생에게 풍류객들이 아름다운 꽃에 벌나비들이 날아들 듯 모이지 않으면 그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매창에게 사내들이 꼬였다. 유희경이 찾아와 정인(情人)이 된 후 임란이 발발하여 만남이 뜸해졌다. ‘노류장화’라 했다던가! 윤선이 한준겸에게 매창을 소개했듯이 기생의 몸은 자신이 제 몸의 주인이 아니다. 매창은 유희경, 이귀, 허균, 심광세(沈光世·1577~1624), 권필(權韠·1569~1612), 임서(林揟·1570~1624)등과도 시를 주고받았다.
‘대나무 숲에 봄이 깊어 새들이 지저귀는구나/ 눈물로 지워진 화장자국 보일까 휘장으로 창문을 가렸는데/ 거문고 글어다가 상사곡을 연주하니/ 봄바람에 꽃이 떨어지고 제비들은 비켜나네요...’ 매창의 ≪봄날을 원망하며≫다.
이에 심광세 역시 ‘깊은 시름 꿈에서 깨는 경우 많은데/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베개를 흥건히 적셨네/ 땅에 가득 떨어진 꽃잎들 봄빛도 지나가는데/ 발 사이로 가랑비 내리고 향대에 꽂힌 향에서 연기가 비끼네’ ≪계랑의 시에 차운(次韻)하며≫에 심광세가 화답한 시다.
그는 시 말미에 매창을 뛰어난 시기(詩妓)라는 첨언을 빠뜨리지 않았다. 물론 당시 매창은 시기로서 확고한 명성을 누리고 있을 때다.
비록 그들이 사대부와 기녀 사이지만 신분의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 경외(敬畏)하는 남과녀 사이일 게다. 형이상학적인 친구관계일 것이다. 정인(情人)이란 연인관계에 있는 사람, 정사(情事)의 상대란 것인 사전적 의미다.
허균이 이귀는 매창의 정인이라 했다. 소위 애인이란 뜻일 게다. 허균이 이귀가 매창의 정인이라 했으나 정작 매창이 이귀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객관적으론 수절을 할 정도로 사랑을 했던 유희경만이 진정한 정인이 아니었었나 추론을 할 뿐이다. 그녀의 주위엔 풍류를 즐기는 사내들 중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인물들도 허다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살을 섞는다고 모두 정인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진정한 연리지(連理枝)란 관계의 정인이라 호칭할 수 있는 사이일 게다.
매창이 이승을 떠난지 400여년이 지났는데도 문화예술계는 당시보다 더 뜨겁게 르네상스 되는 것은 그녀가 비록 기녀신분이었으나 높은 덕성과 아름다운 성정으로 고고한 인품에 만인이 매료하는 시를 비롯한 노래와 거문고, 그리고 춤사위를 남겼기 때문이다.
육신은 이승을 떠났어도 그녀의 영혼은 문화예술창작 에너지로 더욱 강렬하게 문화예술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매창은 거문고를 함께 묻어 달라 하였다. 평생 반려가 거문고였었다. 오늘도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귀엔 그녀의 아름다운 거문고의 음률이 들릴 것이다. 그녀의묘는 1983년 8월 지방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었다.
2016-07-27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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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2> 이매창(李梅窓) <제7話>
유희경은 매창이 이승을 떠난 후에도 26년이나 풍류를 더 즐겼다. 매창이 그토록 한양으로 오고 싶어 했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설엔 어느 사대부집의 첩살이를 한양에서 했었다는 애기도 있으나 신빙성이 낮다.
한양엔 유희경이 상경을 하면 매창을 살뜰히 보호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한양에서 어느 사대부 첩살이를 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당시 매창의 삶의 태도로 봐서도 어울리지 않는 풍문에 지나지 않는다.
매창은 당시 부안을 나비가 꽃을 훌쩍 떠날 수 없는 특별한 신분이었을 것이다. 모친이 관기였으니 모전여전의 신세는 아니었어도 그에 준하는 위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오매불망 꿈에라도 보고 싶은 유희경을 따라 나설 입장이 못 될 것이다.
‘떠난 정(情) 못 이겨 문 닫고 앉았으니/ 눈물은 속절없이 소매를 적시네/ 이제는 빈방을 찾아올 리 없고/ 가는 비 보슬보슬 해가 저물어...’ ≪임생각≫이다. ‘애 끓는 정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 머리칼이 반 남아 세었구나/ 생각은 정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묘비에 새겨 진 ≪임생각≫등의 애절한 사연들이다.
그랬다. 전쟁으로 사회 기강이 해이해졌으나 매창은 당시 남존여비사회에서 끝없는 자기개발로 몸값을 올렸다. 인향만리로 한번 들으면 오금이 떨어지지 않는 노래와 거문고 소리가 한양에까지 상경했던 것이다.
매창은 시인으로 비록 기녀의 신분이었으나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시인 유희경과 거침없는 수창으로 그 명성이 부안을 넘어 부와 명예의 도시 한양에까지 뜨르르하였다.
허균이 누구인가! 명문사대부 중 명문가의 자제다. 희대의 천재도 매창의 매력에 넋을 빼앗겼다. ‘봉래산(부안의 변산)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 든다오! 내가 시골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것이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다면 나와 그대와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제 송(宋)의 풍류객 진회해(秦淮海)의 진관(秦觀)은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선관(禪觀)을 지내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고 있는 것이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 할지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마음이 서글퍼진다오...’ 계유년 9월에 매창에게 보낸 편지다.
진정으로 매창을 플라토닉 러브한 허균의 애정 어린 속내다. 허균도 유희경과 같이 뼈를 녹이고 영혼까지 혼미해질 사랑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삼각관계의 치정(癡情)에 연루되기 싫었을 터다. 매창은 이귀의 정인 이였었다. 그리고 유희경의 여자로 세상에 알려져 있어 그가 또 다가가 사내역할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게다.
풍류사회에도 지켜야 할 최소한 예의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기생의 신분이지만 매창의 인격을 높이 평가해서이기도 하다. 주위에서 계속 치근덕거리며 사내역할 하기를 원하면 상대해 주지 못하는 매창의 괴로운 마음을 허균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사내다. 허균이 거문고를 뜯는 매창을 독사가 먹이를 채어가듯 와락 끌어안았다. “서방님 이러시면 안돼요! 소첩은 비록 기녀에 불과하나 주인이 있는 몸이니 이 매창주만 드시고 돌아가 주세요...” “아니다. 나도 당당하게 너를 사랑하고 싶으니라...” “교산은 이 매창을 이번만 보고 보지 않을 자신이 있으세요? 그러시면 소첩이...” 하고는 허균의 뜨거운 품에서 빠져나와 다시 노래와 함께 거문고를 뜯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매창의 얼굴이 석류 빛으로 상기되었다. 용광로같이 뜨거운 허균의 품에서 쿵쾅거리는 심장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허균도 이 같은 상황을 이미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산은 끝까지 매창이 수절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도반 10년 동안을 깍듯이 지켰다. 우정이다. 남녀사이에 무슨 우정이 있을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겠으나 허균과 매창은 청자 빛 가을 하늘같이 명징하고 지고한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었다.
사실 그들은 허균이 매창보다 네 살 위이니 생물학적으로 맞춤 운우지정을 만끽할 수 있는 천생 연리지였었다. 허균은 매창을 당나라 원진(元稹·779~831)·백거이(白居易·772~846)·두목(杜牧·803~852)과 시를 주고받은 ≪동심초≫의 원작자 설도(薛濤·768~832)와 비교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라 했으며 한나라 성제의 여인 반첩여(班婕如)의 ≪부채≫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처절하여라 반첩여의 부채여/ 슬프기만 하여라 탁문군(卓文君)의 거문고일세/ 흩날리는 꽃잎은 속절없이 시름만 쌓고/ 시든 난초 볼수록 마음만 상하네...’ 그랬다. 이토록 애절한 사랑을 두 여인의 작품에 속내를 슬쩍 드러냈다.
하지만 허균은 매창의 고고한 인품을 끝까지 지켜 주었다. 그런 허균이 없었다면 한세대 가까이 나이 차이가 있었던 유희경과 매창의 사랑이 그토록 진지하고 숭고하게 유지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안의 삼절을 마음껏 즐기며 유희경은 천수를 풍류화 하였다.
평양을 색향(色香)이라 했다. 평양엔 황진이 외에도 계월향·김부용 등이 있어 한양의 풍류객들을 불러들였다. 유희경도 개성 삼절을 그냥 모르는 척 지나쳤을 리 없을게다. 그는 조선팔도 아름다운 산천경개를 입맛을 보듯 빠짐없이 희롱하면서 인생을 즐겼으리라...
부안엔 매년 4월5일 부안 부풍율회(扶풍風율律會)에서 매창제를 지내고 있다. 매창은 살아서는 풍류객들과 일부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더니 사후엔 부안군을 넘어 전국민의 뜨거운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 있다. 진정한 ‘인향만리’다.
2016-07-20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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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1> 이매창(李梅窓) <제6話>
유희경은 한성부윤에까지 승진하였다. 임진왜란 때 눈부신 공적을 세워 천민의 멍에를 벗겨주었다.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천민은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천민 출신 촌은 유희경은 정2품인 한성부윤까지 올라갔다. 경이로운 신분상승이다. 조선사회에서 신분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다.
오늘날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그리고 흙수저를 조선시대에 사농공상(士農工商)과 대비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황에도 어쩔 수 없이 보이지 않는 신분의 벽이 없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 영역에서 본인의 노력으로 당대에선 물론이고 사후엔 더욱 이름 석자로 역사에 빛낸 여성들이 있다.
조선왕조시대에 기생 신분의 여성이 그들이다. 대표적 인물이 천재기녀 매창이다. 그녀는 기생 신분으로 유희경 한 사내에게만 몸을 내주었다. 흔히 기생을 ‘노류장화’ 즉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주인 없는 꽃이니 오다가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꺾어가도 괜찮다는 식의 사자성어는 매창에겐 적용이 불가능하다.
시 경연을 시켜 잠자리 파트너를 골랐다는 ≪성수총화≫(醒睡叢話)에 나오는 야담 한토막... 김선비와 이선비, 그리고 유도(柳塗)의 시를 들고 매창은 유도의 손을 들어주고 그와 동침했다는 애기다. 유도가 실력이 출중한 김선비와 이선비를 물리치고 매창과 잠자리의 행운을 얻었다.
남존여비사회에서 여자가 남자를 선택한 것이다. 경천 진동할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대부집 여인도 아닌 노류장화에 불과한 기녀가 잠자리 파트너인 사내를 직접 고른 것이다. 야담이지만 남성 중심의 세상에 충격적인 사건이다.
성리학을 국가통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의 사회에서 여성 반란의 쿠데타다. 기녀사회에서 일어난 페미니즘이며 노라이즘이다. 야담이 메타포하고 있는 사실을 후세인들이 해석하는 애기다.
매창에겐 플라토닉 대상의 허균이 있으며 유희경을 알기 전엔 이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와 춤, 거문고에 넋을 잃고 불을 보고 날아드는 부나비 같은 풍류객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매창은 유희경에게 한번 몸을 내어 주고는 어느 사내에게도 마음과 몸을 주지 않았다.
수절이다. ‘옛날부터 임 찾는 것은 때가 있다 했는데/ 시인께선 무슨 일로 이리도 늦으셨던가/ 내 온 것은 임 찾으려는 뜻만이 아니라/시를 논하자는 열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이요...’ 유희경의 ≪너무 늦게 매창을 만나서≫다. 이에 매창이 거침이 없다. ‘임진·계사 두해 동안 왜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 이 몸의 시름과 한이야 그 누구에게 호소하리까/ 거문고 옆에 끼고 외로운 난새의 노래를 뜯으며/ 삼청동에 계실 그대를 서글피 그리워했지요...’ ≪옛날을 더듬으며≫다.
1607년 극적으로 재회하여 그 동안 서로 비록 떨어져 있었어도 임 계신 곳을 향해 밤마다 애달아하였다는 회포다. 특히 매창은 1591년 화촉동방을 떠올리며 수절의 대상인 유희경에게 앙탈이 아닌 순애보적 호소였을 것이다.
16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간 재회다. 그 세월 속에 사회적 환경과 당사자들도 많이 변했다. 매창은 불혹을 향해 달려갔으며 유희경은 회갑을 넘긴 나이다. 마지막 불꽃은 뜨겁고 거칠 것이 없다. “여보 소첩을 한양으로 데려가면 안되겠어요? 삼청동 침류대에서 당신의 풍류의 품격을 한층 높일 수 있지 않을까요?” 유희경의 넓은 가슴을 매창이 파고든다.
한바탕 황홀한 운우지정을 만끽한 남녀는 헤어질 때를 벌써부터 걱정이다. 유희경은 꿀 먹은 벙어리 모양 두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매창의 둔부와 유방을 번갈아 쓰다듬을 뿐 말이 없다. 그의 손을 통해 매창의 아름답고 신비하기까지한 몸뚱이에 입에 침이 말라들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다시 기약도 없이 헤어질 생각을 하니 갑자기 서글퍼져서다. 그들은 16년 만에 재회하여 열흘 동안을 그렇게 하룻밤처럼 사랑놀이를 즐겼을 게다.
매창은 유희경과 극적으로 재회한 후 1610년 한 많은 이승을 떠났다. 매창의 죽음이 알려지자 풍류계가 슬픔에 젖어들었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기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군가 설도(薛濤)의 무덤을 지나려나...’ 허균의 ≪계량의 죽음을 슬퍼하며≫다.
그랬다. 풍류객 교산(蛟山·허균의 호)은 매창을 당나라 설도(768~832)에 비유하였다. 설도와 일란성 쌍둥이 같이 생애가 닮았다. 가족사도 그러했으며 당대에 저명한 시인 묵객(墨客)들과 교류한 것 등이 판에 박은 듯이 닮았다. 설도의 묘는 성도의 사천대학 인근 망강루 공원 서편에 있다. 그녀의 무덤은 두보(杜甫·712~770)의 두보초당과 함께 명소로 꼽히고 있다.
허균은 이처럼 매창을 높이 평가 그녀가 수절을 하도록 배려하였다. 교산이 이토록 무한 신뢰한 것은 그녀가 비록기녀신분이나 섣부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어떤 고매한 인격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산은 10여 년 동안을 도반으로 선을 넘지 않고 지켰으리라...
죽음을 각오하고 수절을 지킨 매창이 훌륭했으나 그녀가 수절을 할 수 있도록 주위에서 보호해 준 남정네들도 그녀 못지않다. 성별을 넘어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분위기다.
오늘날에도 예쁜 여인 있으면 기어코 품고 싶어 하는 것이 사내 심정이다. 그런데 남존여비사회에서 기녀는 욕망을 채우는 ‘풍류반려’로 생각이 대세다. 그런데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매창이 한 사내를 위해 수절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어해 준 것은 허균이 결정적이다.
플라토닉 러브로 세상의 시름을 매창이 카타르시스 할수 있어서다. 그래서 40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오늘날 부안의 삼절(三絶:이매창·유희경·직소폭포)로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답고 숭고하기 까지한 남녀상렬지사다.
2016-07-13 09: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