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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40> 황진이(黃眞伊) <제11話>
한양은 송도와 달랐다. 송도는 색향(色香)으로만 떠들썩하게 알려졌지 실속은 없어보였다. 진이는 번개처럼 시상(詩想)이 떠올랐다. ‘옛절은 쓸쓸히 어구 곁에 있고/ 해질 무렵 교목에 사람들 시름겹도다./ 연기와 놀은 쓸쓸히 스님의 꿈결을 휘감고/ 세월만 첩첩이 깨어진 탑머리에 어렸다./ 누런 봉황새 날아간 뒤 참새 날아들고/ 철죽 꽃 핀 곳에서 소와 양을 치는데/ 송도의 번화했던 날을 추억하니/ 어찌 지금처럼 봄이 가을 같을 줄 생각이나 했으랴...’ 《만월대를 생각하며》다.
한양은 생기가 있다. 고려를 역사의 뒷길로 밀어 붙이고 새 역사를 써가는 조선의 중추다. 경복궁 앞 육조(六曹)거리는 붐볐다. 진이는 옥인동 이사종 집으로 들어온 이후 시간이 있을 때 마다 육조거리를 살폈다. 그때마다 진이는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5~1398)의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를 떠올렸다.
그리고 진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877~943)의 29명의 부인도 동시에 상기시켰다. 경복궁의 위용과 육조거리의 질서 정연함과 활기찬 모습에 고려 초기 개성 모습이 동시에 떠올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나 에 혼란을 느꼈다.
진이는 조선에 태어났어도 고려 여인임을 자부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한양에 와 경복궁과 육조의 거리를 걸어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고려의 여인으로 자부함은 어느 남성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려는 태도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이사종의 소실(小室)로 한양에 와 있지 않은가! 이율배반의 자신의 행동에 전율을 느끼며 서둘러 옥인동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가을 해는 짧았다.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육조거리를 거쳐 청계천까지 둘러보고 집에 왔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매일 다니오?” 이사종의 볼멘소리다. “육조거리와 청계천과 피맛골을 둘러보느라 늦었네요! 미안해요. 서둘러 저녁준비를 하겠어요...” 진이의 옥인동 계약결혼 3년이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한 달 동안 진이는 새로운 세상을 많이 배웠다. 말로만 들었던 소실생활을 자청하여 들어왔다. 짐작은 했었으나 조강지처가 얼마나 당당한 자리이고 소실의 위치가 얼마나 굴욕적 자리인가를 몸소 생활해 보고 있는 것이다. 소실로 들어오란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는데 지금 진이가 이사종의 소실이 되었다는 소문이 한양에 퍼지면 세상 사람들이 여자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수군댈 것이 뻔하다.
세상이치로만 보면 그것이 맞다. 소세양을 비롯한 송도의 거부와 신분은 낮으나 고대광실을 가진 의원이 소실자리를 제의 했을 때에는 콧방귀 뀌었는데 무관직 정삼품에 지나지 않는 선전관(宣傳官)의 소실자리에 들어간 천하의 진이를 비웃으며 빈정댈 것이 뻔하다.
한양 아낙네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귀가 따갑다. “남녀관계란 알 수 없어. 천하의 송도 진이가 한양에까지 와서 이사종의 첩이 될 때에는 뭣이 있겠지? 아마 속궁합이 기가 막히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고관대작의 소실자리도 팽개치고 고작 선전관 소실로 들어갔을 때엔 무엇이 있어도 있어... 이사종이 천하제일의 소리꾼에 허우대야 어느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지! 아마 진이가 그 허우대에 빠졌을 거야...” 빨래터의 아낙들의 얘기가 딱 맞았다.
진이는 이사종의 사회적 지위나 재물에 팔려온 것이 아니라 옥골선풍에 달콤한 밤 자리도 빼 놓을 수도 없다. 화대를 받고 몸을 내줄 때에는 돈 값을 해주기 위해 인형처럼 움직여 주며 코맹맹이 소리도 적당히 내주어 사내의 기쁨을 안기는 기생이었으나 이사종과는 몸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가 아닌가! 그런 관계를 빨래터의 아낙들이 알 리가 없다.
이사종과 진이의 관계는 하늘도 땅도 모르고 오직 당사자인 둘만이 알고 있는 잠자리 비밀이다. 진이의 계약결혼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소세양과 30일의 계양결혼이 그렇게 맺어졌다 헤어졌으며 이사종과의 관계도 역시 약속된 6년 후엔 도한 그렇게 미련 없이 진이는 송도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진이는 삼봉의 《한양찬가》인 《진신도팔경시》에 관심이 끌렸다. 송도엔 《송도팔경》이 있는데 그에 비교가 되어서다. 특히 진이는 《도성궁원》(都城宮苑)에 마음이 끌렸다.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이고/ 구름은 봉래오색을 둘렀구나./ 해마다 정원에는 앵화(鶯花:꾀꼬리 날고 꽃이 만발함) 가득하고/ 세세로 도성사람 놀며 즐기네.’ 송도와는 너무도 다른 풍광이다.
그렇게 진이의 한양생활에서 첩살이는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놀았다. 낮에는 부엌일에서 아이 가정교사 역할에 밤엔 이사종과 속궁합을 맞춰가며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육신은 고달프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달콤한 잠자리의 행복에 낮의 고단함이 묻혔다.
송도에서 진이와 한양에서의 진이는 공주와 무수리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생활이었다. 하지만 진이는 행복하다. 그토록 오매불망했던 이사종을 곁에서 볼 수 있고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마음껏 품을 수 있다는 데에 욕망의 나래를 접었다. “후회하지 않소?” 이사종은 뜨겁게 살을 섞고 나면 꼭 묻는다. “왜 서방님은 후회 하세요?” 진이의 말이 떨어지면 그들은 다시 이합(二合)에 들어갔다.
일합(一合)으로 육체의 허기를 채우고 이합은 더 길고 느긋하게 밀고 당기며 사랑의 진수를 음미하려는 것이다. 진이는 이때마다 옥섬이모가 말해 준 잠자리 기술을 행동으로 옮겼다. “참으로 서방님은 참 잘생기셨어요! 진이의 눈엔 천하의 남정네 중 가장 헌헌장부예요.” 진이의 손이 이사종의 부리를 움켜쥐었다. 이합까지 즐긴 뿌리는 오뉴월 엿가락처럼 쳐졌다.
진이의 손이 닿자 번개를 맞은 듯 놀라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진이는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리어 이사종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사종이 입을 커다랗게 벌려 백합처럼 흰 진이의 탱탱한 젖가슴을 잘 익은 사과를 개물 듯 깊게 물었다. 진이의 몸도 해일처럼 일어나며 출렁이기 시작하였다.
이사종은 일주일에 한 번씩 진이의 방을 찾았다. 조강지처 정씨의 허가 받은 합방이다. 몇 시간의 양해지 밤새 허가는 아니다. 하지만 계약결혼 3년이 부득부득 대가오자 이사종은 조강지처의 눈치는 아랑곳 않고 진이 방에 들어오면 동창이 밝아올 때까지 송도 명월관에서 알몸뚱이로 사랑을 할 때를 연상케 하는 방사(房事)를 즐겼다.
2017-02-08 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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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9> 황진이(黃眞伊) <제10話>
송도팔경 구경 채비에 부산하다. 한양으로 올라가기 전에 팔경을 모두 보지는 못해도 몇몇 곳은 보고 가려는 속내다. 진이는 신이 났는데 옥섬은 시무룩하다. 며칠 전부터는 식사도 거를 때도 있다. 진이가 송도팔경을 구경하고 한양으로 올라가면 옥섬은 다시 퇴기신세로 돌아갈 우려 때문이다.
옥섬은 퇴기생활이 무섭다. 진이가 황진사 딸로 어느 사대부 집 며느리로 들어갔으면 오늘의 고대광실의 명월관에서 살기는커녕 구경도 못할 신세인데 후원을 오가며 행복을 누리는 삶이 깨질까 벌써부터 겁이 나서다.
진이는 옥섬이모의 심정을 익히 알고 있다. “이모 진이가 송도를 떠나 명월관을 없앨까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마음 놓으세요! 명월관은 이모 생전엔 진이가 주인으로 있을 거예요... 진이가 한양에 올라가더라도 이모가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 드리고 갈게요! 진이는 한양에서 3년만 살고 송도로 다시 옵니다!” “진이야, 내가 이 한 몸뚱이를 걱정해서가 아니다. 낭랑(朗朗)18세란 것이 있단다! 이 바닥(기생의 세상)엔 낭랑18세 때 한몫 잡아야 퇴기 때 설움을 당하지 않아. 진이 너도 어느새 낭랑18세를 넘어가고 있어...” 옥섬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와 진이 손등에 떨어졌다. “이모 걱정 말아요! 이 진이만 믿고 지금처럼 사세요.” 옥섬을 끌어안은 진이의 두 눈에서도 비 오듯 눈물이 쏟아졌다.
옥섬을 볼 때마다 진이는 십수 년째 생사를 모르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때다. 팔경 구경 할 채비가 다 되었다는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사종은 옥섬의 눈엣가시다. 이사종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진이가 한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란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사종은 옥섬의 눈에 되도록 띄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밥도 사랑채에서 혼자 먹고 후원에서 주로 낮 시간을 보낸다.
관아의 정무는 명월관에서 출근하여 처리해 되도록 진이와 낮 시간을 보내려 한다. 관아의 아전(衙前:관아의 말단 실무자)들은 제 세상이다. 상전이 정무만 간단히 처리하고 자리를 비우니 눈치 보지 않고 잇속을 차리고 관기(官妓)까지 희롱하면서 노는 재미에 날 새는 줄 모른다.
아침을 먹는 둥 시늉만 하고 이사종과 말에 올라 팔경 구경 길에 올랐다. 이사종도 옥섬의 따가운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어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서방님, 오늘은 우선 팔경을 모두 볼 수 없으니 서강풍설(西江風雪)과 장단석벽(長湍石壁)만 구경하시죠! 이 두 곳이 진이는 팔경 중 제일 마음을 사로잡아요. 팔경은 고려 대학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 《익제난고》에 최초로 나옵니다. 하지만 팔경은 중국의 북송(北宋)화가 송적(宋迪)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유래했어요! 이를 고려 말 개성의 아름다운 여덟 곳에 응용한 것이지요! 한문을 중국에서 들여다 우리 것으로 만들 듯 고사성어 등 각종 문물도 중국의 것을 모방한 것들이 많아요!” 진이의 표정이 상기되기까지 하였다.
소리꾼 이사종은 갑자기 진이의 진지한 표정에 엄숙한 자세를 취한다. “진이는 특히 《서강풍설》에 매료되었어요! 제가 곡을 붙였어요. ‘눈은 강변가의 지붕을 덮었고/ 바람은 포구가의 돛대를 흔들어 놓네/ 정자에 올라가 남창을 열고 보니/ 구름 낀 바다는 아득하기만 하네./ 은실 같은 생선회를 썰어 놓고/ 술 단지 기울여 한 잔 마시네./ 예성강 굽어보며 한 곡 부르니/ 하두강은 애간장 끊어지는 듯 아프리라.’ 이 얼마나 멋과 풍류가 있나요?” 진이의 거문고 반주에 명창 이사종의 노래가 서강풍설의 아름다움에 화룡점정 시켰다.
서강풍설을 구경한 뒤 말 채찍에 힘을 가해 장단석벽을 거쳐 그들은 서둘러 명월관으로 돌아왔다. 어젯밤에도 허리가 아프도록 욕정을 채웠으나 그 밤이 그리워졌다. 진이는 숱한 사내들의 욕정을 채워 주었으나 이사종은 자신이 좋아 계약결혼까지 한 사내이니 마음 놓고 육체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상대다.
더욱이 송도생활 3년은 모든 것을 자신이 대고 한양의 3년은 소실(小室)의 자리로 계약을 맺었다. 이처럼 철저하게 계획된 생활을 하루하루 뜨겁게 보냈다. 그토록 뜨거운 세월은 세 번의 봄과 세 번의 가을을 향하여 이미 유수같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식지 않았다. “내일 한양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한양에 가면 3년은 송도에 올 수 없으니 장단석벽을 한 번 더 보고 떠나면 어떨까요?” 아침을 먹고 관아로 출근하려는 이사종에게 의사를 물었다. 풍덕군수는 엄연히 매일매일 정무가 있는 몸이다. “내 관아로 가서 잠시 정무를 보고 곧 돌아오리다...” 이사종은 말에 올라 바람처럼 사라졌다.
진이는 옥섬이모가 걸렸다. 명월관엔 옥섬이모 말고도 여러 식구가 있다. 한양으로 진이가 올라가면 명월관은 임금 없는 대전(大殿)같이 썰렁해져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퇴기생활을 했었던 옥섬이 더욱 노심초사한다. “이모 걱정하지 마세요. 진이가 이모가 3년 동안 편히 사실 수 있게 모든 준비를 해 두었으니 편히 계세요! 진이가 3년 후 가을에 정확히 송도로 돌아올 거예요! 이 아름다운 송도팔경을 두고 어디로 떠나겠어요...” 진이는 또 장단석벽에 거문고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구름은 산 높이 떠 있는데/ 공중에 눈썹 같은 절벽 열렸네./ 고기와 용은 굴 구비로 굴러가네./ 백리나 푸른빛이 감도네 그려./ 달은 파리한 물속에 잠겼는데/ 꽃은 비단처럼 곱게 쌓였네./ 화려한 배에서 술 마시고 풍악 치며/ 돌고 또 돌아 천 바퀴나 돌았네.’ 오늘따라 진이의 노래가 옥섬의 귀엔 장송곡(葬送曲)처럼 들렸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자 이사종이 돌아왔다. 점심도 거른 채다. 진이가 겸상을 하여 대낮이지만 태상주를 곁들였다. 얼큰하게 달아오른 그들은 송도의 마지막 밤이 되기도 전에 뜨겁게 엉켰다. 진이는 이사종의 움직임에 옥섬이 가르쳐 준대로 몸을 움직였다.
아직 몸은 달아오르지도 않았는데 선수를 쳤다. 숨을 몰아쉬고 콧구멍을 벌름벌름 대며 입을 벌리고 두 다리에 힘을 넣어 뻗기까지 하였다. 이사종이 의아해 하면서도 덩달아 몸을 움직여 주자 진이는 가식이 아닌 송도팔경을 보며 막연히 그리워하였던 신선세계로 빠져들었다.
2017-02-01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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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8> 황진이(黃眞伊) <제9話>
진이가 마련한 집은 그림 같은 풍광이다. 자삼동 동쪽 선죽동 선죽교 이웃에 자리 잡았다. 행랑방이 두 개씩 붙은 솟을대문과 사랑채로 드나드는 샛문을 따로 갖추고 사랑채와 안채와 별채 사이에 담과 중문을 두었으며 사랑채 뒤쪽으론 대숲을 경계로 사당이 모셔졌다. 지체 높은 사대부 집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진이는 이곳에서 손님을 맞는다.
이사종(李士宗)과 계약결혼을 하여 여자노릇을 제대로 해보려는 속내다. 마음에 쏙 드는 사내이니 영혼까지 받쳐 사랑을 불태우려는 것이다. 화대를 받고 몸을 내줄 때는 돈값을 해주어야 하니 억지로 웃고 상대의 성정에 들도록 몸도 움직여 주어야 하지만 내 남자라고 생각한 상대엔 몸과 마음이 기쁨에 넘쳐 영혼까지 콧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다.
이사종과는 관아의 기생시절 풋사랑으로 예비꽃잠(첫날밤)이 있었다. 그때 진이는 이미 이사종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진이가 이사종에게 넋을 잃은 것은 헌헌장부이기도 하지만 소리에 반했기 때문이다.
이사종은 팔도에서 명실 공히 소리를 제일 잘하는 사내다. 몇 십 명이 그와 대결을 청하여도 당당히 응해주었으며 하루 종일도 쉬지 않고 소리를 할 수 있는 풍부한 레퍼토리도 갖고 있었다.
그 소리의 매력에 진이의 영혼이 빨려들었다. 그래서 관기시절 잠시 풋사랑을 나누었으나 못 다한 사랑을 불태우려 하는 것이다. 그들은 풋사랑을 나누고 헤어질 때 사내는 책임 있는 몸으로 진이는 자유인이 되어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지금 진이는 그 약속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이사종은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진이는 자유인이 되었다. 계약결혼은 진이가 먼저 제의하였다. 이사종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즉시 승낙을 했을 것이다.
사실 이사종은 계획적으로 진이에게 접근하였다. 시·서·화 삼절(三絶)에 가무까지 능통한 진이에게 접근하여 사랑은 물론 기예(技藝)대결도 해보고 싶었던 욕망이 꿈틀댔던 것이다. 그런데 진이가 이사종이 천수원(天壽院)에서 유혹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그녀와 인연이 되어 풋사랑을 나눈 후 극적으로 5년 만에 해후하여 일부종사의 사랑을 하는 계약결혼에 들어갔다. “내가 당신을 서방으로 우리 집에서 3년간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3년은 서방님 집에 가서 살도록 하렵니다...” 진이의 표정은 절대자에게 맹세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단호하면서도 어미 앞에서는 어리광스럽게 순진한 눈망울을 보이는 젖먹이 같이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묘한 여인의 얼굴이다.
방금 하늘에서 하강한 선인(仙人)의 모습 그대로였다. 화촉동방은 명월관에서 가장 뒤쪽인 선죽교가 빤히 보이는 별채에 차렸다. 이 방을 화촉동방으로 잡으며 아마 정몽주(鄭夢周:1331~1392)의 ≪단심가≫(丹心歌)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다. 이 시조는 이방원(李芳遠:1367~1422 후에 태종)이 ≪하여가≫(何如歌)를 부르며 정몽주를 회유했으나 ≪단심가≫로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고려의 충신의 길을 걸었다. 정몽주는 그 후 선죽교에서 타살 당하였다.
진이는 그 선죽교를 바라보며 이사종에게 정조(貞操)를 지키리라 마음먹었을 것이다. 이사종은 진이와 풋사랑을 나눈 후 헤어져 한양으로 가 무과에 응시하여 전전관이 되었다. 3년간 전하의 침소 경호에 공로를 인정받아 외직인 풍덕군 군수로 부임하였다.
후원이 내려다보이는 별채엔 남녀의 뜨거운 호흡이 끊이지 않는다. 후원엔 봄꽃들이 만발하였다. 산철죽·모란·연산홍·자목련, 그리고 나무로는 매화·동백·복사꽃·살구꽃 등이 흐드러지게 되었다. 진이는 특히 연산홍과 매화꽃을 사랑하였다. 지금 진이는 이사종과 뜨거운 살을 섞으면서도 창문너머 후원의 꽃들을 연상하고 있다.
이사종의 뜨거운 호흡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진이의 두 팔이 이사종의 등을 끌어안고 그 가파른 흥분을 동시에 타고 올라갔다. “너무 보고 싶었소! 내 영혼은 항상 당신 곁에 있었소!” 진이는 이사종의 입술과 뺨에 두 눈과 입술을 맞추었다. 이사종은 급히 진이를 눕히고 속바지를 벗겼다. 진이는 스스로 저고리 고름과 가슴 띠를 풀었다.
봄날의 환한 햇살 속에서 뼈를 녹이는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은 알몸인 채 까슬까슬한 홑이불을 감고 아랫도리가 얼얼한 채 두 손을 꼭 잡고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내가 왜 풍덕군수가 된지 알겠소?” 이사종이 진이의 불두덩에 손을 얹으며 말하였다. “글쎄요! 사내대장부 속내를 어찌 계집이 짐작하겠어요? 더욱이 한양에 계신 서방님의 속내를 머나먼 송동의 진이가 어찌 상상이나 하겠어요!” 진이의 반응은 의외로 신통치 않았다. “나는 한양에 몸이 있으나 한시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소이다. 한양에 올라가 나는 장가를 들어 아들이 세 살이나 되었소...” 그만하세요. 진이는 이사종 개인을 원할 뿐 그 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6년 동안은 저만 사랑해 주세요. 3년은 저의 집에서 살고 3년은 한양 서방님 집에서 살고 저는 다시 송도로 내려옵니다...“ 이사종이 풍덕 관아로 들어가잔 말을 사전에 막기 위해 6년 후의 계획까지 말하여 버렸다.
사내들은 진이와 뜨거운 살을 섞고 난 후엔 예외 없이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한다. 이사종도 풍덕 관아로 들어오란 말을 할 것이 명약관화해서다. “저는 관아에서 통제하는 관기가 아니에요! 저는 서방님이 저를 다시 찾아오리라 믿고 자유인이 되었어요. 기적에서 나온 지 벌써 3년이 지났어요...” 진이가 아사종의 엉덩이를 다시 끌어 당겼다.
진이가 영업은 하지 않고 이사종에 빠져있자 옥섬이모가 몸이 달았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놔야 자신과 같은 꼴이 되지 않는데 사내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걱정이 태산이다. 옥섬은 퇴기로 청교방거리 뒷방에서 장죽에 담배를 피우며 죽을 날만 기다리다 현학금과의 의동생 신분으로 진이를 만나 생기를 되찾아 살만한데 이 시간이 짧아질까 노심초사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이의 생각은 다르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고 가는고’ 그랬다. 진이도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유인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려한다.
외화내빈의 몸을 파는 기생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진이는 한양으로 가기 전에 송도팔경을 보려한다. 등하불명이라 했듯이 진이는 송도에 살면서 송도팔경 중 단 한곳도 보지 못하여 소리꾼 이사종을 데리고 구경에 나서는 것이다.
태상주를 마시며 천하의 절창 이사종의 노래를 들으며 송도 절경을 구경하면 진이는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적선(謫仙:인간 세상에 귀양 온 신선)이 되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딸을 돌보듯 자신을 보살피는 옥섬이모의 걱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2017-01-25 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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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7> 황진이(黃眞伊) <제8話>
주지스님의 정성어린 보살핌과 간곡한 기도로 진이는 기적적으로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실상암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난 깊은 밤이었다. 그날도 주지스님은 대웅전에서 진이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산사는 바람 한 점 없는 물속처럼 조용하다.
이때다. 조용했던 산사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갑작스런 바람에 나무 위에서 눈꽃을 피웠던 눈들이 바람에 떨어지면서 눈바람이 산사를 삼켜 버릴 듯 요란하다. 여명이 보이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즈음이다. 대웅전에 있던 주지스님이 마당으로 나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같이 소란스런 광경을 몸소 느끼려고 진이가 방에서 나오는 순간 하늘에선 천둥번개가 작렬하였다. 이 광경을 보려고 희미한 눈을 부비다 진이는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이 보인다. 세상이 보여...” 진이는 기도하는 주지스님의 품을 파고들었다. 스님은 이미 알고 있었듯이 진이를 깊고 따뜻하게 품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암자를 떠나가시오!”라고 말을 남기고 품었던 진이를 풀어놓고 주지스님은 다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진이와 덕구는 먼동이 트자 암자에서 내려왔다. 한학금의 의동생 퇴기 옥섬의 집으로 갔다. 옥섬의 집은 청루가 즐비한 청교방 거리에 있다. 현학금이 진이를 황진사에게 주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옥섬은 청교방 거리에 자그마한 집을 얻어 거처하고 있다. 방이 셋인데 하나는 늘 정갈하게 정돈하여 비워두었다.
진이가 언제든지 오면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게 해둔 방이다. “옥섬이모, 진이가 왔어요!” 올 줄 알았다는 옥섬은 덤덤하다.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떴다. “시장하겠다. 아침도 못 먹었을 터인데... 밥부터 먹어라! 애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시래기 국에 감자가 섞인 보리밥이다.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진이가 입을 열었다. “이모, 진이가 전우치(田禹治)를 봤어요. 제가 천둥번개가 작렬하게 칠대 가슴이 떨리고 무서운데도 세상을 보고 싶어 희미한 눈을 부빌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동시에 하늘에서 백마 탄 옥골선풍의 선비가 저에게 ‘진이야, 이제 너는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말하고 사라졌어요.”그가 전우치가 아니고서야 그 밤에 어떻게 그곳에 올 수가 있겠어요? 소문으로 들은 전우치와 똑 같았어요! 이모...“ 진이의 눈에는 지금도 실상암 앞에서의 비몽사몽 장면이 선명하다.
당시 전우치의 도술(道術)애기는 송도에서는 흔한 애기였다. 특히 재령군수 박광우(朴光佑:1495~1545)는 전우치와 친구사이였다. 도술은 혹세무민하다 하여 금기시 되었다. 전우치도 도술을 부린다하여 경계당한 인물이다. 나라에서 사형명령이 떨어진 상태다.
중중(中宗:1506~1544)시대다. 전우치는 친구인 박광우 집에서 목매 자살하였다. 그런데 몇 년 뒤 누군가 박광우를 찾아와 전우치의 지팡이를 달라기에 그를 쳐다보니 전우치였다는 것이다. 또한 서경덕 형제들과 도술 경쟁 등의 애기들이 송도엔 낯설지 않은 화젯거리다.
진이도 아버지 황진사 집에 있을 때 사랑채와 어머니 신씨 등에 오가는 애기들은 귀동냥하여 생소하지 않았는데 실상암에서 극적으로 비몽사몽 상태에서 봤던 것이다. 천재 진이로선 전우치의 애기들이 낯설거나 의문투성이도 아니었다. 아버지 서재의 각종 서책에서 도사(道士)들의 애기를 수없이 접해 익히 알고 있었다.
진이의 기생 입문은 속전속결이었다. 동기(童妓)로 시작하여 2년 사이에 송도와 한야의 한량들이 품고 싶은 미색(美色)에 올랐다. 진이가 열여덟살을 맞는 어느 봄날이다. 고을 유수에게 수청을 들게 되었다. 본인 진이 보다 현학금의 의동생인 옥섬이 더 긴장하였다.
고을 유수의 수청을 잘 들어 좋은 점수를 얻어야 관기(官妓)의 운명도 좋기 때문이다. 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대부집 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서녀가 되어 마침내 기녀(妓女)가 되었으니 한량들 세상의 관심의 여인이 되었다. 고을 수령이 동기들의 초야권을 갖는 것은 이상 할 것도 없다. 진이의 초야권도 그렇게 송도 유수가 태상주(太常酒) 한 잔 마시듯 어느 날 차지하였다.
진이의 기녀생활 삼년 만에 기적에서 나와 자유인으로 한량들의 세계를 주름잡았다. 진ㄴ이 앞에 한량들의 부나비처럼 몰려들었다. 비록 몸을 파는 기생이나 마음에 드는 사내도 있다. 소위 순정이란 것이 있는 것이다. 돈(花代)을 주고 몸은 샀으나 영혼가지 살 수는 없어서다. 숱한 사내들이 진이의 몸뚱이를 사서 육체의 향각을 즐겼으나 시·서·화의 삼절(三絶)을 넘어 노래와 춤, 기예(技藝)까지 능통한 영혼까지 사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사내가 진이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이사종(李士宗)이다. 그는 부도 명예도 없는 소리꾼 낭만파 소위 집시(Gipsy)다. 그 청년에게 진이의 영혼이 넋을 빼앗겼다. 이사종은 어느 고관대작의 서자(庶子)다. 조선의 대표적 옥골선풍에 소리를 잘하는 떠돌이 인생이다. 그런데 그가 같은 서자 출신인 삼당시인 이달(李達ml 없는 사이다. 이달은 허엽의 아들 허봉과 가까운 사이이며 허엽은 후에 진이와 같이 서경덕의 동문수학 관계다.
아무튼 이사종은 진이와 영혼이 통해 명월의 집에서 무상으로 먹고 자는 유일한 사내가 되었다. 손님이 없을 땐 그들은 밤을 새는 신혼부부로 자연스럽게 뜨거운 밤으로 갔다. 옥섬은 걱정이 태산이다. 기생 나이 열여덟이면 절정의 꽃 같은 시절인데 자칫 무일푼의 떠돌이에게 정신이 팔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자신과 같은 신세가 될까 눈앞이 캄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내들과 살을 섞을 때면 진이는 옥섬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네가 뜨거워져야 사내들도 뜨거워진다?”를 실천하여 비록 화대를 받고 몸을 내어 주었지만 제 남자처럼 사랑스런 여인이 되려하는 것이다. 조선판 《소녀경》(素女經)이나 《현묘경》(玄妙經)이 되어 남녀칠세부동석이 아닌 남녀동등사회의 선구자가 되려는 의지다.
지금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어머니 현학금이 열여덟에 거문고의 명인이 되었는데 진이 역시 같은 나이에 그 반열에 올랐다. 진이는 남녀관계를 뛰어넘어 학문의 세계가지 섭렵하여 누구와도 밀리지 않는 역할을 하였다. 고려의 핏줄을 이어받은 진이는 항상 길재(吉再:1353~1419)의 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를 되새기며 미래를 꾸몄다.
2017-01-18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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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6> 황진이(黃眞伊) <제7話>
추풍낙엽처럼 진이의 신분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사대부집 딸에서 서녀(庶女)가 되었다. “너는 다리 밑에서 주어온 계집애야!”로 놀려대던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기생의 어미에서 태어나 그동안 사대부집에 들어와 호의호식하며 컸으니 이제 제자리인 서녀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발단은 이러하다. 지체 높은 사대부집에서 청혼이 들어왔는데 그 자리를 동생인 난이한테 양보하라며 출생의 비밀을 털어놨다. 서녀가 어떻게 사대부집 옥골선풍의 총각의 신부가 될 수 있느냔 것이다. 그때서야 진이도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었다.
집을 나온 진이는 하늘아래 천애고아 신세다. 게다가 진이는 갑작스런 충격으로 앞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뿌옇게 안개가 끼여 상하좌우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진이는 직감으로 경이오빠와 동생난이와 자주 찾았던 실상암쪽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성숙한 처녀의 몸이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온 진이는 해질 무렵 실상암에 도착하였다. 주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진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뒤따라온 발자국 주인공은 실상암까지 따라왔다. 뒤따라오던 주인공은 황진사집을 드나들며 살림살이를 사 나르던 저잣거리 총각이다.
덕구(德玖·가명)다. 그는 비록 사농공상(士農工商)중 상에도 들지 못하는 천민이지만 허우대는 사대부도 부러워 할 헌헌장부다. 진이도 사춘기가 지난 여자로서 사내를 볼 줄 아는 나이가 되자 그가 집안에 오갈 때면 그의 시선이 덕구의 가슴에 가 머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진이가 사대부집 딸에서 서녀로 신분이 바뀌어 집을 내쫓기다시피 하여 나서는 길에 그가 따라온 것이다. 대문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여섯 발자국 뒤에서 따라붙기 시작하여 실상암 관음굴 앞에 도착할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두 사람은 걸었다.
짧은 가을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너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나를 계속 따라오면 어쩌자는 거냐?” “아씨, 아씨를 혼자 두고 제가 어떻게 그냥 돌아갈 수 있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왜 내 걱정을 하느냐! 어서 당장 돌아가거라...” 묵묵부답이다. 진이는 대답이 없자 뒤를 돌아봤다. 사내는 덕구로 대답대신 계속 걸어와 진이의 눈앞에 와 섰다. “돌아가지 않고 내말이 말 같지 않게 들리느냐?” “아씨 제가 돌아가도 될까요?” 둘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사이에 어떻게 알았는지 주지스님이 나왔다.
현암(玄岩·가명) 주지는 비몽사몽에 황진사가 나타나 밖에 좀 나가보게 하고 사라져 밖으로 나와보니 진이와 덕구가 입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암은 사월초파일 등에 황진사가 넉넉한 시주를 하여 인연이 돈독한 관계다. “젊은이들은 날이 저물었으니 안으로 들어가 쉬게나... 지금 다시 마을로 돌아가긴 너무 늦었어! 해가 지면 여긴 맹수들이 날뛰어 여간 위험하지 않아.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게....” 현암 주지스님은 둘을 떠밀다시피 하여 안으로 들여보냈다.
점심도 거른 그들은 주지스님이 준 저녁밥을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아직 어둠이 깔리지 않았는데 벌서 관음굴 쪽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부엉이 울음소리 사이엔 간간이 늑대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산사(山寺)의 밤이다. 진이는 산사의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꿈속을 헤메고 있는 자신같아 손으로 두 뺨을 꼬집어 보았다. 분명한 현실이다. 이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덕구가 “아씨 이 덕구는 문밖에서 잘 터이니 아씨는 편히 주무세요...” 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다. 밤 바람이 차니라! 이곳에서 너도 자려무나...” 다 자란 남녀가 한방에서 잘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진이는 즉흥적으로 한 말이다. “아니 될 말이예요! 이 방에선 진이아씨 혼자 주무시고 소승도 대웅전에서 자렵니다...” 산사의 좁은 공간에서 젊은 남녀의 잠자리를 정리해 주고 주지스님은 대웅전으로 갔다.
사실 덕구도 진이 말대로 못이기는 척 같은 방에서 자고싶다. 하지만 자신이 한 말도 있고 주지스님도 자리를 비워주며 진이 혼자 조용히 편안하게 잘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데 덕구도 마음과는 다르게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엔 별들이 총총하다. 밤바람에 거목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름 모를 산짐승들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덕구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고 소름까지 끼쳤다. 밤바람이 제법 차갑다. 밤이 깊어지자 오슬오슬 추위에도 덕구는 소르르 잠이 왔다.
잠이 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눈이 자꾸 감겼다. 진이를 지키려는 뜨거운 마음에서 산사까지 따라왔는데 산짐승들이 울어대는 깊은 밤에 잠이 들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밀물처럼 밀려드는 좋음엔 속수무책이다.
어느 때쯤인가 덕구의 어깨에 무거운 짐처럼 눌려옴을 느꼈다. “누구얏!” 소리치며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덕구는 순간적으로 산짐승이 자신을 덮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 나다. 잠이 안와서 밤하늘의 별이라도 보고 있으려고 나왔느니라!” 덕구의 어깨에 몸을 의탁했는데 놀라 단발마를 토해냈다.
덕구는 가슴이 뛰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사내가 그만한 일에 그렇게 화들짝 놀래서야?” 진이가 다시 덕구의 어깨에 몸을 의탁하였다. 덕구의 코에 진이한테서 풍겨 나오는 신비스런 향기(仙香)에 넋을 잃을 지경이다.
덕구의 고함소리에 주지스님도 대웅전에서 나왔다. 진이를 가운데로 덕구는 왼쪽에 주지스님은 오른쪽에 앉았다. “이곳은 가을이지만 곧 초겨울이 됩니다. 산사의 암자가 협소하고 불편하시더라도 참고 견디세요! 며칠을 지내보면 곧 적응이 될 겁니다...” 주지스님은 다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진이아씨, 아씨도 방으로 들어가셔서 주무세요. 밤이 깊었습니다.” 덕구는 진이를 떠밀다시피 하여 방으로 들여보냈다.
진이는 덕구 손이 옆구리에 닫자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덕구 역시 옷 속이지만 말랑한 진이 살이 손에 느껴오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밀려왔던 잠이 은하수 밖으로 도망갔다. 진이도 방으로 들어갔으나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하였다. 문밖 덕구도 대웅전 앞을 서성대며 밤을 샜다. 그들은 지금껏 평소의 진이와 덕구가 아님을 동시에 느꼈다.
2017-01-11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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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5> 황진이(黃眞伊) <제6話>
천재는 세상에 쉽게 나오려하지 않았다. 임신 소식을 우서(羽書·서찰)로 황진사에게 알리자 얼굴이 백짓장 같이 질려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장님 기생을 건드려 임신 시켰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직 출사도 제대로 못하였는데 출세 길이 영영 막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황진사는 오자마자 낙태를 권하였다. 하지만 현학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황진사는 겁쟁이에다 철부지였다. 현학금은 황진사가 돌아간 후부터 초승달이 뜨면 추렴을 걷고 섬돌에 내려앉아 그리운 님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빠지고는 하였다.
그녀의 폭넓은 학문의 세계로 아마도 당(唐)의 이단(李端:743~782)의 《초승달에 절함》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주렴을 걷도 초승달을 보고는/ 섬돌에 내려 다소곳이 절하나니/ 속삭이는 하소연은 아무도 못 듣는데/ 북쪽 바람이 치마 띠를 휘날린다.’의 분위기와 너무나 흡사하다.
조선에 당나라 시를 그들의 수준만큼 이해하고 쓰는 소위 삼당시인(三唐詩人:백광훈·최경창·이달)을 존경의 시선으로 볼 정도이니 당시 시 문학이 차지하는 문화예술 수준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이 짐작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사실 왕조시대엔 규방(閨房)문화는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나 상대적으로 기방(妓房)문화는 극소수이지만 힘차게 맥을 이어왔다.
현학금은 보통 기생이 아니었다. 요즘말로 하면 예술가다. 하지만 그녀도 여자였다. 임신을 하고는 엄마가 될 준비에 들어갔다. 황진사와 뼈를 녹인 애틋한 순간에 매몰되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왔다. 가려야 할 음식을 경계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의남초(宜男草:허리에 차면 아들을 낳는다는 약초)를 허리에 차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데 출산할 장소가 문제였다. 하지만 거문고를 타고 노래 부르는 것은 복대를 두르고도 출산 며칠 전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현학금의 옆에는 친정 동생과 이의동생 옥섬이 그림자처럼 있었다. 해산달이 다가오면서 걱정이 현실로 밀려왔다.
출산 며칠 전까지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른 것은 유수와 아전들에게 뇌물을 써 입을 막으려는 술책이었다. 그렇게 하여 몇 주간의 출산휴가를 얻어 박연폭포를 거슬러 올라 실상암 관음굴로 숨어들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출산을 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아이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사흘 밤낮의 산통을 하면서도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양수도 터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궁은 오히려 체면을 지키려는 듯이 조개모양 더욱 오그라들었다.
현학금은 파죽음이 되어 갔으며 친정 동생과 이의동생 옥섬을 본인보다 더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이다. 이때도 현학금은 마음속으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잊지 않았다. 몸은 고달프나 곧 나올 새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출산의 고통으로 인해 잃지 않으려는 치열한 자기 체면이다. ‘미인이 환하고 환하여/ 얼굴이 능소화 같구나./ 운명이지 운명이로다./ 천시(天詩)를 만나 태어났건만/ 아무도 나를 아리땁다 하지 않는구나.’ 조(趙)나라 무령왕의 꿈에서 처녀가 거문고 타는 모습의 장면을 연상한 맹요의 《열녀전》을 애기하는 것일 게다.
비록 지독한 산통으로 정신을 잃을 아찔한 찰나에까지 이르렀으나 중국의 신화 《산해경》의 애기들을 계속 떠 올렸다. 그같이 극락과 연옥을 오가며 뱃속의 아기와 씨름을 하는데 새벽 종소리에 놀란 듯 놀랍게도 지궁이 열리며 툭하고 어미를 떠났다. 박연폭포처럼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며 세상에 신고를 하였다.
진이의 탄생은 관음굴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밤 현학금은 아이를 안고 동생을 따라 관가로 가지 않고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으나 중인(中人)의 악사집으로 체면을 중시하고 분수를 아는 집안이었다.
고려 때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악사(樂士)집안으로 예인(藝人)의 DNA가 전통이다. 현학금이 비록 군왕(郡王)을 잘못만나 비장의 결의로 장님이 되는 비극적인 운명이 되었으나 자존심은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현학금이 기녀신분이나 사대부 못지 않은 문화예술세계를 가졌으며 그 같은 시가(詩歌)의 재능은 진이한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황진사는 출산 며칠 후 현학금 앞에 나타났다. 진이를 데려다 조강지처가 낳은 딸로 키우려는 속내다. 진이의 탄생을 본가 동생과 의이동생, 그리고 유수와 몇몇 아전들만 알 뿐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맹인의 딸로 키우려는 것이냐” 내가 네가 원하는 딸 이상으로 데려다 키울 것이다...“ 한량 아진의 아버지 진정성에 현학금도 계속 버티지 못하고 진이를 품에서 내어주었다. 진이는 보쌈 하듯 칠흑 같은 어둠에 황진사 집으로 옮겨졌다. 조강지처 신씨(申氏)품에 안겨 친딸처럼 쑥쑥 컸다.
진이를 황진사에게 넘긴 이튿날 현학금은 거문고를 메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말만 듣던 금강산을 직접보고 몸소 체험하고 싶은 것이다. 일만 이천 봉 퍌만구암자 골짜기마다 거문고 소리에 맞춰 신명나는 유람을 하려는 속내다.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야 핏덩이를 떼어놓고 떠나는 간장을 녹이는 어미마음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강산은 아름답고 실로 경이롭다.
진이는 현학금의 생각대로 총명하고 아름답게 성장해 주었다. 배다른 동생 난(蘭)이도 “언니 언니”하며 잘 따랐고 두 살 위 오빠 경(敬)이 역시 배다른 동생 티 안내고 슬기롭게 처신하였다. 누가 봐도 의이 좋은 삼남매다. 황진사와 조강지처 신씨도 그 같이 의이 좋은 삼남매 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진이의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키워준 어머니 신씨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진이의 신분이 사대부집 딸에서 서녀로 둔갑되었던 것이다. 맹인 몸에서 출생했으나 범상치 않은 미색(美色)에 영리하기 까지 한 진이에게 천성이 착한 신씨는 배 아파 낳은 자식과 차별 없이 키웠다. 경이와 난이와는 다르게 자고 깨면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는 모습에 겉으론 드너내지 않으나 속으론 키운 보람이 있구나 생각하였다.
진이도 철석같이 신씨가 친 엄마로 알고 15년을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소실로 들어가라는 아버지 황진사의 권고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아버지 소녀 집을 나가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큰절을 넙죽하고 입던 차림 그대로 집을 나와 기생의 길로 들어갈 결심을 굳혔다. 자유인이 되려하는 첫 걸음이다.
2017-01-04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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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4> 황진이(黃眞伊) <제5話>
동쪽 동인문 밖 물가에서 거문고를 타면 아득히 먼 중국의 장강(長江·揚子江의 본명) 이남에서 흑학들이 떼 지어 날아와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춤을 주었다. 현악금(玄鶴琴)이 거문고를 타면 학들이 날아와 춤을 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이의 모친인 진(陳) 현학금의 이름에 대한 유례다.
현학금은 열한 살에 기적(妓籍)에 올라 비파와 가야금을 거쳐 거문고에 빼어난 기량을 보여 열다섯 살에 악사(樂士) 기생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학금은 이때부터 어디를 가든 자신보다 훨씬 큰 거문고를 가로로 메고 다녔다.
현학금의 열아홉 살 단풍이 풍악산(금강산 가을 山名)에 곱게 물든 가을 어느 날이었다. 1504년 연산군(燕山君:1476~1506)의 집권 10년이 되는 해다. 처음엔 성군의 자질을 보였으나 친어머니(폐비 尹氏)의 참극을 안 후 그는 폭군이 되었다. 국정은 팽개치고 원수 갚기와 계집질로 세월을 보냈다. 홍문관을 없애고 정치 논쟁을 금하기 위해 경연(經筵)을 폐지했다.
조선 불교의 산실인 원각사(圓覺寺)는 장악원(掌樂院)으로 바꾸어 기생들의 교육장으로 바꾸었다. 한양에서 마음에 드는 미녀가 모자라자 전국으로 채홍준체찰사 라는 대신과 채홍준사와 채청사라는 급조된 관리들이 송도에까지 내려왔다.
그때 송도 관아엔 현학금도 있었다. 빼어난 미모의 현학금도 여러 미녀들과 새로 설치된 운평에 갇힌 채 자색을 평가 받았다. 현학금은 뛰어난 절색에 거문고의 기예까지 갖추어 최고 점수인 천과흥청이 되었다. 천과흥청과 지과흥청의 미녀는 대궐에 들어가 임금의 성은을 입는다. 임금의 특명이었으므로 고을의 유수조차 미처 손 쓸 겨를이 없었다.
현학금은 경악하였다. 악사기녀로서 은밀하게 자존심을 지켜왔는데 그 자존심이 일순간에 무너짐을 느꼈다. 곰곰이 생각 끝에 의동생 기생 옥섬에게 비상약을 짓게 하였다. 단호한 현학금의 부탁에 옥섬도 거부 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약을 먹은 현학금은 하룻밤 사이에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변하였다.
채홍준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연산군의 마음에 쏙 드는 미녀를 뽑아오면 특별진급이나 두둑한 상금이 걸려있어 현학금이 딱 마음에 들었는데 그만 낭패가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의원을 불러 검사를 해봤으나 장님이 틀림없다는 결론이다. 그들은 현학금의 두 눈을 뒤집어 보기까지 하였다. 채홍준사는 현학금을 체념하고 기적에서 빼내주어 운평에서 나와 집으로 왔다.
현학금은 채홍준사와 채청사들이 한양으로 올라간 후 금강산에 몸을 의탁하였다. 약을 먹고 억지 장님이 되어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사찰로 다니며 걸식을 하면서도 거문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렇게 걸인 악사로 봄엔 금강산, 여름엔 봉래산, 가을엔 풍악산, 겨울엔 개골산 등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6년의 세월을 보냈다.
현학금의 거문고 연주는 신기(神技)에 이르렀다. 그녀는 장님 악사로 소문이 퍼져 관아의 연회 때마다 단골로 초대되었다. 현학그이 초대되었다는 연회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현학금의 천상의 거문고 음률에 세상시름을 실어 보내 화병을 앓던 사람이 낫고 무릎이 내려앉은 앉은뱅이는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현학금의 거문고 기적은 송도의 일상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이다. “현학금 언니, 집에 있으면 뭐해! 병부교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지....”현학금은 이웃아가들의 성화에 못 이겨 병부교 빨래터에 나갔다. 그날도 현학금은 천상의 음률로 거문고를 탔다. 고단한 아낙들의 세상시름을 덜어주기 위함이다. 현학금이 비록 앞을 보지 못할 뿐 마음속으로 천상의 음률에 서경덕이 평생 흠모한 송(宋)의 시인 소옹(邵雍·1011~1077)의 《수미음》(首尾吟)의 일부를 실어 보내고 있다.
그녀는 하늘의 침묵을 대변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요부는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요부가 사랑할 수 있을 때/ 이미 마음을 쓸 때는 마음을 쓰고/말을 가하지 않은 곳엔 말을 가한다./ 사물엔 모두 이치가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하늘이 말하지 않으니 사람이 그것을 대신한다./ 자연 조화의 무한한 말을 대신하는 것이니/요부는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랬다.
현학금은 눈만 보이지 않을 뿐 눈을 뜨고 삼라만상을 보는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눈으로 보지 못하는 세상사를 탁월한 감수성의 발달로 범인들의 수준을 뛰어 넘었다. 게다가 천상의 음률을 타는 거문고의 명인에 절세미인이었다.
이때다. 마침 이곳을 지나는 한량이 있었다. 황진사(黃進士)다. 그의 눈에 현학금이 들어왔다. 황진사는 이미 현학금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송도가 넓다고 하지만 저잣거리에서 나도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금방 전 송도로 퍼져 나갔다.
병부교(兵部橋) 아래의 빨래터 아낙들의 입방아에 올라오면 그 소문은 바로 송도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현학금의 거문고 소문을 황진사가 모를 리 없다. 아낙들의 성화에 현학금은 천상의 음률을 관아의 연회가 아니면 타지 않는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오늘도 현학금은 아낙들의 성화에 떠밀려 병부교 빨래터에 나와 거문고를 탔던 것이다. 현학금의 천상의 거문고 음률에 빨려들었다. 청춘남녀가 만나면 서로의 콤플렉스에 빠진다. 황진사화 현학금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 했으니 그들도 예외 없이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았을 게다.
그때 현학금은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고 임신하여 조선제일의 여류시인이며 송도삼절(서경덕·박연폭포)의 하나인 황진이(黃眞伊)를 낳는 어머니가 되었다. 그들은 이 시(詩)를 떠올렸을 것이다. ‘가시리 가시리 잇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위 증즐가 태평성대(太平聖代)// 날러든 어이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위 증즐가 태평성대// 잡사와 두어리 마는/ 선하면 아니 올세라 위 증즐가 태평성대// 설온님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위 증즐가 태평성대’ 고려가요 《가시리》다. 황진사와 현학금이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헤어질 때 《가시리》의 내용과 별 온도차이가 없을 심정이었을게다..
2016-12-28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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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3> 황진이(黃眞伊) <제4話>
양곡은 젊은 시절에 여색에 빠진 자는 남자가 아니다. 명월이 시재(詩才)와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약속을 하였다. “내가 그 여자와 30일을 동숙(同宿)하고 이별을 못하고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약속을 했으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는데 사대부의 나라에서 친구들에게 한 약속을 선비가 지키지 않았다. 그것도 천재지변이나 연로한 부모의 갑작스런 병고나 몸담고 있는 벼슬길에서 왕명도 아닌 한낱 노류장화(路柳墻花)인 기생으로 사내대장부가 친구들과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쳤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동네 청년들이 이웃집 예쁜 아가씨를 놓고 한 약속이 아니다. 당시 송도 명월의 소문이 한양에까지 퍼져 한량들의 마음이 온통 들떠 있을 때였다.
고려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 넣고 조선을 세운 신흥 사대부들은 체면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국교(國敎)로 대대로 이어오던 불교를 과감히 유교(儒敎)로 교체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과 삼종지덕(三從之德)등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인격체로 규정하여 사회적 제약을 법적(종모법 從母法)으로 또는 도덕적 올가미를 씌워 놓았다.
세계사적으로도 여성의 사회활동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으나 조선은 그 정도가 특히 더 하였다. 그런 역사 속에서 잘 나가는 사대부 양곡이 일개 기생인 명월(本名 황진이 이하 진이)에게 빠져 ‘남아일언중천금’이란 세상에서 일탈하여 약속을 어겼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도 허리 밑엔 별수 없이 약했을 터다. 하지만 지체 높은 양곡이 진이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허리 밑도 봄꽃처럼 피어나는 즐거움도 기쁨이지만 바다 같고 만리장성 같은 문화예술세계에 탄복했을 것이다.
이웃인 일본은 사무라이(武士)의 나라로서 허리 밑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선비의 나라 조선에선 일본과 달리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지 않았던가!
사실 사내들이 여자를 찾는 것은 찰나적이나 마초(macho)의 본능에 충실하려 한다. 색향(色鄕)으로 소문이 난 송도에 가려함은 허리 밑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이 강하다. 양곡도 진이와 30일이란 기간을 정하고 소위 계약 동숙(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이는 평소에 양곡이 생각하였던 노류장화가 아니었다. 계약결혼 마지막 날 시(詩) 한 수에 그의 영혼은 넋을 잃었다.
‘달빛어린 뜨락에 오동잎 다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는데/ 누각이 높아 하늘이 한 척 이요/ 사람이 취해 술이 천 잔이라/ 흐르는 물은 거문고 가락에 맞춰 서늘하고/ 매화는 피리소리에 들어 향기롭구나/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지고 나면/ 그리는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게 뻗치리라.’ 양곡은 진이의 이 시를 듣고 한양의 친구들에게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을 것이다.
진이를 알게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소문으로 떠도는 진이를 직접 만나 뜨거운 살을 섞고 보니 저잣거리에 나도는 풍문이 얼마나 잘못 알려졌음을 알수 있었다. 노류장화나 말하는 꽃이 아닌 지식인 진이라는 것을 알게 됨에 스스로 그녀 앞에 겸손하여 졌음일 게다. 아마도 진이가 한시, 시조에 능통한 자유인으로 남자로 태어났다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조식, 하서 김인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학자 위치에서 경륜(經綸)을 논하며 문화예술세계를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양곡은 그 후 두 번 더 진이를 찾았다.
계약결혼이란 세기적 발상은 조선사회를 경천동지(驚天動地)케 했을게다. 낭만과 문화의 나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여성해방운동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1929)보다 378년 앞섰으며 영화감독 문여송과 소설가 김이연과의 계약결혼보다는 무려 400여년이나 앞선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다. 양곡은 진이의 시·서·화의 삼절(三絶)을 넘어 춤·노래·거문고 등으로 당시 조선이 상국(上國)관계로 있는 중국 문화에도 정통하였던 그녀에게 녹아든 것은 어쩌면 사내로서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진이는 옥섬(진현금 의이동생)으로부터 잠자리 기술도 배웠다. “네가 싸늘하면 사내 역시 싸늘할 것이요. 네가 뜨거우면 사내도 뜨거워 질 것이고 네가 깊어지면 사내 또한 깊어질 것이다. 헛되이 움직이거나 소리를 질러서 힘을 빼지 말고 깊이 숨을 마시며 음기를 몸 전체에 고루 모아 낮은 소리로 한없이 속으로 빨아들이거라... 사내란 겉으론 천하를 움직일 듯 하지만 알고보면 연약하느니라...”라고 꽃잠(첫날밤)의 기술을 가르쳤다.
이토록 진이는 여자로서도 완벽하였으며 학자(지식인)로서까지 조선의 사대부 수준에 손색이 없었다.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 허엽과 동문수학했으나 오히려 그의 학문수준을 훌쩍 뛰어 넘었지 않았나 싶다.
허엽의 딸 허난설헌이 역시 조선시대에 출생하여 남성사회에서 그녀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27년이란 짧은 삶을 마쳤다. 허난설헌은 사대부집 고명딸로 태어나 엄격한 사회적 제약으로 기를 펴지 못했으나 진이는 달랐다.
진이는 과감히 자유를 선택하였다. 양가집 딸에서 어느날 갑자기 얼녀(孼女)로 전략하여 소실의 길 정도를 선택할 수 있었으나 그녀는 과감히 자유인 기생의 길로 들어섰다. 억압의 비단길보다 자유의 자갈밭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녀생활 3년 만에 기적(妓籍)에서 빠져 나와 자유인이 되어 지족선사(知足禪師)·소세양·벽계수(碧溪水)·이생(李生)등을 품어 진이의 세상을 만들었다.
진이의 경륜과 문화예술세계는 외숙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 진현금의 DNA로부터 이어 받은 천부적 예능의 자질은 외숙부가 원천(源泉)이다. 외숙부는 비록 하급 악사였으나 사대부 못지않게 학문이 높았으며 그의 서재엔 만여 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런 가족사를 진이는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그 같은 진이의 세상에 대보름달이 휘영청 뜬 분위기에 남녀칠세부동석과 삼종지덕의 사내들이 불을 본 부나비처럼 하나 둘 날아들었다.
2016-12-21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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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2> 황진이(黃眞伊) <제3話>
양곡과 명월의 말이 나란히 걷는다. 풍악산(금강산의 가을 山名) 유람 길에 올랐다. 잠자리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양곡은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어젯밤의 서너 번의 방사로 기진맥진한 상태다. 명월도 사타구니가 얼얼하여 걷기조차 거북하지만 추호만치도 내색이 없다. 사내에게 지기 싫어서다.
또한 그녀는 사내를 맞을 때마다 우리나라 최초 여왕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여근속(女根谷)에서 백제군을 섬멸한 역사를 상기시켰다.
양곡이 ‘30일 동거’ 후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여 특히 잠자리에 신경 쓰고 있다.
명월은 양곡의 ‘30일 동거’는 허풍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토하고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친구들한테 고백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개성에 온지 30일 후에 개선장군처럼 한양에 나타나 번듯한 요릿집에서 한턱내며 “나는 역시 인간이었다.”라고 일갈 하려는 배포를 무참히 꺾으려는 속내다.
가을의 금강산은 풍악산으로 불린다. 늦 단풍이 붉게 타고 있다. 바람이 쌀쌀하다. 어젯밤에 태상주 술기운에 둘은 밤새는 줄 모르고 욕심껏 육체의 향락을 즐겼음이 지금은 과욕이었다는 것을 둘은 한 몸처럼 느끼고 있다. 그들은 박연폭포에서 점심을 먹고 말고삐를 돌렸다.
명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소녀 엊저녁에 대감께서 너무 깊이 사랑해 주셔서 더는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풍악산은 다음에 구경하시고 오늘은 이만 돌아감이 어떠하실 지요?” “그래도 되겠느냐?” 양곡은 방금 본인이 하려는 말을 명월이 대신 해준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목소리는 쇳소리가 나고 입에선 단내가 풀풀 풍겼다. 자칫하다가는 말 등에서 떨어질 뻔 아찔한 순간까지 있었다. 하지만 박연폭포까지 와서 그냥 바람처럼 떠나갈 명월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물줄기가 골짜기를 갈 듯 뿜어내니/ 용추에 떨어지는 백 길 물소리 우렁차라./ 솟아 내리는 물줄기 쏟아지는 은하수인가 싶고,/ 노한 듯 가로 드리운 물줄기 바로 흰 무지개일세./ 소쿠라지는 물벼락 온 골짜기에 가득하고,/ 물보라는 부서지는 옥인 양 갠 하늘에 사무치네./ 유람객이여, 여산폭포가 낫다는 말은 하지 마오./ 천마산의 박연폭포 우리나라의 으뜸이라오.’ 황진이의 《박연폭포》다.
그들은 풍악산으로 가려다 천마산의 박연폭포 늦가을 단풍에 취하여 있다 귀가 하였다. 그들의 온몸에선 늦가을 단풍향이 향수처럼 풍겨 나왔다. 명월의 특이한 선향(仙香 )과 단풍향이 어우러진 향이 양곡의 가슴을 다시 뜨겁게 달구었다. 방에 들어서자 양곡은 명월을 힘껏 쓸어안았다.
양곡은 내일 한양으로 갈 몸이다. 명월은 양곡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뜨거운 입김엔 어젯밤 열정의 단내가 얼굴을 감쌌다. “명월이 나하고 한양에 가지 않으련? 개성보다 한양이 명월에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장악원(掌樂院)에 들어가 예약연구를 더하여 이론을 만들어 놓으면 후세가 그것을 배우지 않겠느냐?” “소녀를 소실(小室)이 되라는 말씀인가요?” 초롱초롱하면서도 가을 호수같이 평온하였다.
표정이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猛禽類)눈초리로 변하였다. “그런 뜻이 아니고 개성도 좋은 고장이고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이 있어 유명한 도시이긴 하지만 조선의 중심은 역시 대궐이 있는 한양이지. 그곳에 가서 명월의 명성을 더욱 높였으면 하는 생각이지... 내 다른 뜻이 있어 한 말은 아니네!” “뜻은 고마우시나 소녀는 개성의 몸으로 태어나 고려여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렵니다.” 명월의 진지함이 흡사 출사표를 던진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표정이다. “내 알았느니라... 너의 미색과 학식이면 한양에 가면 이곳보다 더 뜨겁고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네 의향을 물어본 것 뿐이니라...” 양곡의 검은 마음을 첫마디에서 알아차렸다.
사내들은 마음에 드는 기생을 노류장화(路柳墻花) 쯤으로 보고 소실로 집에다 앉혀 놓으려는 심보를 명월은 숱한 사내들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쳤던 것이다. 명월의 싸늘한 표정을 등 뒤로 느끼면서 양곡이 지필묵을 주섬주섬 챙겼다. “지금 떠나시려고요?” “가려하느니라...” 양곡답지 않은 풀죽은 목소리다.
명월은 말 등에 실린 거문고를 연두(몸종)에게 가져오라 하여 자신이 곡을 만든 곳을 타며 창을 불렀다. ‘낙양성 동쪽에 핀/ 복사꽃 오얏꽃/ 꽃잎이 날아가면 뒤 집에 떨어지나!/ 낙양에 사는 계집애들은/ 얼굴이 시들까봐/ 떨어지는 꽃잎만 봐도/긴 한숨을 내 쉰다네./ 금년에 핀 꽃지고 나면/ 얼굴 다시 여위리니/ 그 누가 와서 보여주리.’ 이백(李白)의 《늙음을 서러워하며》다.
명월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와 거문고에 떨어졌다. 그때다. 명월을 젖먹이가 어미를 바라보듯 바라본 양곡이 갑자기 지필묵이 싸인 보따리를 들고 “진이야! 나를 예성강까지 배웅을 해주면 어떠하겠느냐?” 라는 말을 등 뒤로 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느새 해는 지고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별들의 하늘엔 벌레 먹은 사과모양의 달이 기우뚱하게 떴다. 말 두 필이 준비되었다. 양곡은 대명천지에 명월관을 나서고 싶지 않아 계획적으로 밤에 길을 나서는 것이다. “대감! 왜 제 기명인 명월을 부르지 않으시고 본명인 진이를 부르셨습니까?” “기명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 궁금하더냐?” “그러하옵니다.” “진이는 기명으로 부르는 것 보다 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려서 내 앞으로는 그리 부르기로 마음먹었느니라... 명월이란 기명은 너무 멋스럽고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워 쉽게 다다가기가 어려우니라. 하늘에 두둥실 떠 있으면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명월을 품을 수 있겠느냐? 앞으론 네 본명을 부르고 내 주위의 친구들에게도 진이로 부르도록 입소문을 낼 것이니라...” 그 후 명월이란 기명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예성강에 그들이 도착하자 나룻배 한 척이 대기하고 있다. “내 한양에 가 정무를 처리하고 곧 다시 올 것이니라.” 진이는 왼손 약지의 은가락지를 뽑아 양곡에게 건넸다. 나룻배의 횃불이 강 건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을 한 진이는 밤이 이슥해서야 명월관에 도착하였다.
2016-12-14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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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1> 황진이 <제2話>
아침을 명월과 겸상하여 그윽하게 마친 양곡은 개성 유람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눈엔 선녀(仙女)같은 명월의 모습이 앞을 가려 아름다운 개성 가을 풍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점심때도 넘기지 못하고 허둥지둥 명월관으로 돌아왔다.
명월은 양곡이 말을 타고 명월관을 나갈 때부터 개성의 절경을 절반도 못보고 말고삐를 되돌릴 것을 생각하고 일찌감치 몸치장을 서둘렀다. 엊저녁엔 선비체면에 소극적으로 명월의 독특한 선향(仙香)이 아침안개처럼 풍기는 몸을 문만 열었을 뿐 오늘은 들소모양 덤벼들 것이 뻔해서다.
명월도 꽃잠(첫날밤)에서 사랑의 지혜를 첫 장면만 보여주었을 뿐 퇴기 옥섬 이모가 가르쳐 준 잠자리 기술을 시작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수한테 들은 “30일을 넘기면 인간이 아니다.”란 약속을 깨도록 하려는 속내다. 명월 자신을 두고 내기를 했다는 데에 체면을 중시하는 사대부들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주려는 심보다.
열린 창문 밖 모과나무 위로 찬란한 가을 햇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다. 명월은 직접 점심상을 들고 들어갔다. 양곡은 명월을 보자 피로했던 표정이 봄꽃같이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송도 팔경을 다 보시지는 못하신 것 같네요?” 명월이 무지개빛 미소를 지으며 점심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며 던지는 말투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그랬느니라... 내 명월과 더 많은 시간을 가지려고 잠시 개성 저잣거리만 보고 돌아왔느니라! 네가 익제(益齊·李齊賢(1287~1369)의 호)의 《송도팔경》을 말하는 모양이구나! 풍류객이 이곳에 오면 첫째는 명월을 보러 오는 것 외엔 송도팔경인 곡령의 개인 봄, 용산의 늦가을, 자하동의 스님찾아 들에서 나그네 보내며, 웅천에서 술계, 용산의 들에서 봄을 찾아, 감포의 어옹, 서강의 배가 아니더냐? 참으로 아름답고 멋이 풍기는 시(詩)로다.”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네가 시를 안다고 하지만 나를 당하지는 못할 것이란 태도다.
명월의 점심상엔 태상주(太常酒:개성의 고급술)와 안주론 잉어찜과 산채, 그리고 요기를 할 두부추탕이 놓여있다. 양곡은 배가 고팠는지 두부추탕을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선비의 체면도 아랑곳 않고 단숨에 먹어치웠다. “천천히 드세요! 체하시면 어찌하시려고 그렇게 서두르세요! 즐거운 밤은 어찌하시려고요...” 여유가 있는 명월의 태도다. 두부추탕을 가을밤이면 양반댁 마님이 은밀히 사랑채로 나갈 때 미리 내보내는 사랑의 묘약으로 통하는 음식이다.
양곡은 그윽한 표정으로 명월을 쳐다본다. 사내가 계집을 보는 표정이 아닌 신뢰와 경의가 섞인 얼굴의 분위기다. 총명한 이마와 조는 듯 고운 눈썹, 그 아래에 눈부시게 희고 검은 두 눈은 비온 뒤 나뭇잎 위에 작은 벌레집처럼 고요하고 깊은 숲속에 핀 작은 꽃 같이 향긋하며 검은 비단 모양 잔바람이 이는 연못의 파문처럼 아련하며 가녀리고 단정한 콧날은 오연하면서도 사랑스럽다.
입술은 적당한 크기로 아물게 꼭 닫혀 얌전하지만 의지가 느껴지고 갸름한 턱은 안아주고 싶도록 연약해 보이며 가늘고 긴 목은 그 곳에 파고들고 싶은 충동으로 벌써부터 가슴이 뛰고 낭심이 허리 밑에서 날뛰고 있다.
명월은 고수다. 학문만 높은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성정도 독심술(讀心術)로 읽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사실 양곡은 두부추탕을 허겁지겁 먹으며 독주인 태상주 몇 잔에 어느새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지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여 겨우 명월을 직접 품게 되었는데 섣불리 서둘렀다 체면을 구길까 마음이 복잡하다.
명월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양곡이 출사표(出師表)를 던진 장수모양 비장한 표정의 긴장된 어투로 “내 실은 한양에 있는 친구들과 내기를 했느니라... 너와의 사랑을 30일을 넘기면 사람이 아니란 장담을 했느니라... 내 그 약속을 꼭 지키리라...”라고 말하는 표정이 자못 진지하고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다. 명월은 원앙 한 쌍이 지나가며 파문을 일으킨 연못 위의 물결 같은 미소를 지여 보일 뿐 입을 떼지 않았다.
가소롭다는 표정이다. 네가 내 품에 들어왔는데 어떻게 내 뜻과는 상관도 없이 네 마음대로 30일 만에 내 품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는 반문 같은 표정으로 양곡을 쳐다봤다. 석가가 수제자 가섭을 보는 눈초리다. 태상주 한 병이 바닥을 드러냈다. 명월도 태상주 두 병의 바닥이 보이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사실 명월은 고금을 통 털어 우리나라 최고의 주선(酒仙)으로 선정되었다. 평생 술과 시와 자기 이상에 취해 평생을 살다가 간 수주 변영로(卞榮魯)가 2위이며 김삿갓 4위, 김시습(金時習) 5위, 임제(林悌) 6위, 임꺽정(林巨正) 8위, 원효(元曉) 10위 등이 겨우 10위권에 들었다.
명월은 15세에 기생이 되고 3년 만에 기적(妓籍)에서 빠져 나왔다. 그 후론 자기 영혼을 찾아 소위 페미니즘적 자유인이 되었다. 그래서 기생이면서 기명인 명월(明月)을 쓰지 않고 진이(眞伊)란 본명으로 끝까지 불리였으며 진이로 파란만장한 40평생을 살았다.
술은 역시 여자나 남자나 꽁꽁 묶어두었던 마음을 열어 놓는다. “이제 주무시죠! 그렇게 시만 쓰고 계실 것입니까?” 명월이 양곡에게 잠자리를 재촉하였다. 창밖의 보름달이 창공에 두둥실 떴다. 양곡이 명월을 힐끗 쳐다 본다. 네가 웬일로 잠자리를 재촉하느냐는 표정이다. 그리고는 기쁨이 넘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하자구나...”로 응수해 왔다.
불이 꺼지자 휘영청 밝은 달빛만이 꿈특대는 남녀의 알몸뚱이를 지켜보고 있다. “어져 내일이야 그릴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이시가 명월이 네 시더냐?” “그러하옵니다! 대감의 시에 비해 졸작 부끄럽습니다.” 그때 대장간의 풀무모양 뜨거운 양곡의 손이 명월의 가슴을 훑고 허리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명월의 두 다리도 견우를 맞으려 자연스럽게 벌어졌으며 허리와 엉덩이도 덩달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때 창밖 뜨락 오동나무 위에서 짝짓기를 하던 접동새가 푸드득 날아갔다.
2016-12-07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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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0> 황진이 <제1話>
올해(1535년)로 명월(明月:황진이 妓名)이 스무 살이 되었다.
기생 된지 만5년이 되는 해다. 명월은 어느새 송도(松都·현 개성)를 넘어 한양의 사대부와 한량들에게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회자 되었다.
상림춘(上林春)·관홍장(冠紅粧)·소춘풍(笑春風)등과 명월이 당대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명실상부한 명기(名妓) 반열에 올랐다.
그 중에서도 명월이 단연 빼어난 미모와 경국지색의 아우라(Aura·고고한 분위기)에 시·서·화·노래·춤·시조 등에 뛰어났으며 고려의 맥을 잇는 거문고의 명인으로 독보적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나라의 이름난 한량등과 풍류를 즐기는 고관대작들도 명월과 풍류를 즐기러 송도로 발길이 바쁘다.
하지만 명월과 만리장성을 쌓으며 화촉동방의 기회를 얻기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개성 유수룰 통해 기회를 잡으려는 눈치 빠른 인사들도 있었다.
당시 개성 유수는 이귀령(李龜齡·1482~1542·字 미지(眉之))이다. 미지는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의 외삼촌으로 여러도에 관찰사를 거쳐 사십대 초반에 개성 유수로 부임하였다. 풍류를 즐기지만 그에겐 어린 동기(童妓)가 있어 명월에게 무리한 접근은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방 토호(土豪)세력을 대하듯 서먹서먹하게 분위기를 잡았다.
그런 와중에 소세양(蘇世讓·1486~1562) 애기가 나왔다. “내 오늘 너를 보자 한 것은 간곡한 부탁이 있어서다.” 명월은 유수의 부탁이란 말에 짐짓 놀라는 표정을 억지로 숨기며 “예, 유수대감! 무슨 말씀이신지 하명 하시지요...” 라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율시(律詩”한시의 한 종류)로 명나라와 일본 사신을 영접하여 문명을 떨치시고 특히 대명외교에 성과를 올려 임금의 총애를 받으시는 분이셔...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으며 효자에다 풍류에도 남달라 화담(花潭:서경덕 호) 스승을 뵈러온다고 했으나 실은 명월의 화려한 소문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내려오셨어...“ 유수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양곡(陽谷:소세양 호)을 치켜세웠다.
목이 타는지 자작으로 술을 따라 단숨에 마신 후 “너도 한 잔 하려무나.”라고 말한 후 스스로 따라 술잔을 건넸다. “아니옵니다. 소녀는 괜찮으니 나머지 말씀을 다 하시지요!” 도도한 태도다. 개성 유수관아(官衙)에서 이토록 허리하나 굽히지 않고 제 말을 다하는 기생을 처음 본 유수는 적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소문대로구나... 참으로 네가 곱구나! 하늘에서 잠시 휴가 내려온 선녀(仙女) 같구나! 내 팔도를 돌아 풍류를 즐겼으나 너 같이 재색(才色)이 뛰어난 여인은 처음 봤느니라! 역시 한양은 물론 중국의 사신들까지 송도를 꼭 들르려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구나...” 유수는 입술이 마르는지 다시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말과는 반대로 유수의 독사 눈초리가 명월의 아래위를 통째로 삼킬 듯 훑었다. 하지만 명월은 그런 정도의 시선엔 마동도 하지 않는다. 이서 본론이나 말하란 눈치다. “사실은 양곡대감께서 명월 너에게 한양 선비들과 내기를 하셨데... 너와 30일을 지내는데 단 하루라도 더 있으면 사람이 아니다 라고 약속을 했다는 거야! 어떻게 하려느냐?” 겨우 말을 마친 유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명월을 보자 욕심이 생겼을게다. 양곡을 소개하다 보니 본인이 먼저 잠자리에 들고 싶은 음심이 발동하여 아랫도리가 팽팽하여 졌을 것이다. 명월은 사내들의 표정을 보고 몸과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어미가 젖먹이의 동태를 보듯 들여다보고 있다.
지금 유수의 옥경(玉莖)이 팽창되어 침을 흘리고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양곡 대감께서 언제 오신다는 것인가요?” 바다 속 같은 침묵이 찰나적이지만 견디기 어려워 명월이 말을 꺼냈다. “벌써 이곳에 와 계시지... 지금 당장 뵐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시죠! 그런데 이곳이 아닌 명월관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게...” 개성 유수가 일개의 기생에게 대하는 태도가 아닌 저명 여류문인을 대하듯 깍듯한 예우다.
명월이 유수가 내준 가마를 타고 명월관으로 와서 준비에 들어갔다. 역시 명월은 평소대로 차림새다. 명월이 명월관에 도착하자 양곡도 들이 닥쳤다. 한양까지 이름이 자자한 시기(詩妓) 명월을 촌음이라도 빨리 보고 싶은 것이다. “과연 명월(明月)이구나... 하늘에 높이 떠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명월... 그 명월을 내 앞에서 직접 보니 눈이 부시구나!” 양곡은 명월을 두 동공에 잡아 두려는 듯이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양곡 대감! 소녀 앉아도 될는지요?” 양곡은 그 사이에 지필묵을 준비하여 시를 쓰고 있었다. “너의 집인데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나는 객이 아니더냐?”
풍루의 달인 양곡은 역시 달랐다. “내 너의 《반달》이란 詩를 쓰고 있느니라...” ‘누가 곤륜산 옥을 깎아 내어/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고/ 견우와 이별한 후에/슬픔에 겨워 벽공을 던졌다오.’ 송설체의 대가답게 힘이 있고 아름답게 티 하나 없는 박속같은 한지에 썼다. “소녀도 양곡대감의 詩를 외우고 있습니다. ‘모랫벌에 뜬 달을 사랑하나니/ 한밤에 술잔 멈추고 앉아보네/ 강물은 씻은 거울처럼 밝게 비치고/ 은하수는 구름한 점 없구나/ 울어대던 귀뚜라미 소리 그치고/ 아득히 들려오는 학의 울음/맑고 텅빈 기운타고 따라오는 듯한데/ 먼지 긴 속세는 멋대로 어지럽네? 명월은 거문고를 타며 양곡의 詩를 천상의 목소리로 낭송하였다.
옥골선풍(玉骨仙風)의 양곡 얼굴에 무지갯빛의 웃음이 피어났다. “역시 명월이구나! 내 하늘에 있는 명월을 품을 수 있다니 내 인생에 절정이로다!” 양곡은 두 팔을 벌려 명월을 뜨겁게 안았다. 쌍나비 등잔의 불을 끄고 얇은 비단 속적삼도 벗고 비녀를 뽑아 머리를 풀어 화장끼 없는 얼굴 모습을 드러냈다.
창문으로 은빛 달빛이 들어와 그녀의 나신을 더욱 신비롭게 빛냈다. 명월은 양곡을 열손가락을 활짝 펴 척추와 등을 부드럽게 쓸어안았다. 그리고 사내를 깊이깊이 받아들였다. 양곡은 명월의 사타구니를 덮은 소담한 체모를 쓸며 꽃(여음)을 토닥이었다.
그 속엔 이미 사내를 맞을 꿀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따가운 가을햇살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뒤엉켜있는 벌거숭이를 내려 쬐고 있었다.
2016-11-30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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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9> 허난설헌(許蘭雪軒) <제16話>
살아서 보다 사후에 더 문명(文名)을 날리는 이가 있다. 여성으론 단연 난설헌이 꼽힌다. 단군 이래 여류문인으로 난설헌 만큼 회자 된 여성은 없는 듯하다. 근·현대에 와 걸출한 여류문인들이 배출됐지만 시대와 사회 환경을 감안해 보면 역시 난설헌의 문학세계는 깊고 광대하다고 하겠다.
스승 손곡 이달(李達·1539~1618)의 문학세계가 고스란히 문화유산이 DNA화 되어 만리장성(萬里長城)과 태산(泰山) 같으며 황하(黃河)처럼 장엄하다. 손곡은 후배 비평가들에 의해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1539~1583)과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1537~1582)과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일컬었다.
이는 한시의 최고 경지라고 인정되는 당나라 시들을 배워 그에 비견되는 시인들이란 의미다. 손곡의 얼굴은 단아하지 못한데다 성격이 호탕하여 절제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세속의 예법까지 익히지 않아 당시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지 못하였다. 고금의 역사와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 애기하기를 즐겼으며 술은 주선 이태백(酒仙 李太白)에게 결코 지지 않을 기호품이다.
그는 세속을 벗어나 풍류천하를 즐겼으며 시로서 위안을 받고 시로 자신을 표현하였다. 그런 그를 반기는 유명인사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이·이황·이산해 등 대학자들과 정사룡·고경명·송상현·정문부 등과도 신불을 떠나 학문을 애기하며 폭넓은 교우생활을 즐겼다.
손곡의 시는 중국에서 더 높이 평가되었다. 명(明)대의 주지번(朱之蕃)은 손곡의 시 《만랑무가》(漫浪舞歌)를 보고 “이 작품이야 말로 이태백에게 견준다 해도 어찌 뒤떨어지겠는가!” 라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석주 권필(石州 權韠·1569~1612)은 《반죽원》(班竹怨)을 보고 “이것을 《청련집》(靑連集·이태백 문집) 가운데 넣는다면 아무리 안목이 높은 사람이라도 쉽게 가려내지 못하리라”고 극찬 하였다.
손곡의 아버지는 고려 문장가 이첨(李詹·1345~1405)의 후손 이수함(李秀咸)이며 어머니는 홍주 관기다. 신분이 다르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이 조선사회다. 학문으로 말하면 중국의 주지번까지 깜짝 놀랄 정도니 출사(出仕)하면 사대부로서 당당한 지위를 누렸으리라...
그의 화려한 문우(文友)가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이 누구인가? 그들이 중국의 성리학을 조선의 성리학으로 한차원 높인 천재학자와 대학자가 아니던가... 그런 손곡의 학문세계가 고스란히 난설헌에게 무지개 빛으로 넘어가 27년 동안 화려하고 장엄하면서도 도도하게 꽃피워졌다. ‘비단 띠 비단치마에 눈물 자국 겹쳤으니/ 해마다 봄 풀을 보며 왕손을 원망해서랍니다./ 아징을 끌어다 《강남곡》을 끝까지 타고 나자/ 빗줄기가 배꽃을 쳐서 낮에도 문 닫았답니다.// 가을 지난 다락에 옥병풍 쓸쓸하고/ 갈대밭에 서리지자 저녁 기러기 내리네요/ 거문고 다 타도록 님은 보이지 않고/ 들판 연못에는/ 연꽃만 떨어지네요’ 님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다. 사랑하는 님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은 동서고금 어디든 다르지 않으리...
세기적 천재여류시인 난설헌도 여인임엔 다름이 없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상대가 있었으리... 그러나 난설헌은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절제로 자신을 굳게 지켰다. 그러다가 이제 이승에서 헛된 꿈을 미련없이 떨쳐버리고 떠나가려 한다. ‘이웃집 벗들과 내기 그네를 뛰었지요/ 띠를 매고 수건 쓰니 신선놀음 같았어요/ 바람차며 오색 그네 줄 하늘로 굴려 오르자/ 댕그랑 노리개 소리가 나며 버들에 먼지가 일었지요// 그네뛰기 마치고는 꽃신을 신었지요/ 숨 가빠 말도 못하고 층계에 섰어요/ 매미 날개 같은 적삼에 땀이 촉촉이 배어/ 떨어진 비녀 주워 달라고 말도 못했어요’ 《그네뛰기 노래》다. (시옮김 허경진)
기방(妓房)문화는 있어도 규방(閨房)문화는 희소(稀少)하다는 조선의 남존여비 사회에 난설헌은 천둥같이 나타난 존재였었다.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허엽의 오문장(五文章) 중 유일하게 여인이기도 하지만 더욱 빛남은 최초 여류시인이라는 데에 있다. 한국 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한세대도 살지 못한 짧은 삶에서 누구도 염두에 두지 못한 큰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훌쩍 이승을 떠나버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추보다 맵다던 고부간의 갈등도 숙제를 다 풀지 못한 학생처럼 아쉬움이 남고 특히 친정어머니 김씨의 처연한 모습이 아침에 불끈 솟은 둥근 해 모양 두둥실 떠올라 가슴이 시리다.
천재들은 그렇게 큰 족적만 남기고 훌쩍 떠나 후세인들이 반갑고 즐거워 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상례인 것 같다. 학문과 풍류로 조선의 사대부들의 가슴에 흠모와 폄훼를 동시에 받는 대상이 되었던 황진이가 고작 40년을 살고 갔다. 난설헌 보다야 13년이나 더 살고 이승생활을 정리했으나 한량들의 가슴엔 영원한 로망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난설헌의 친정집은 건천동(현 명동일대)이다. 이곳은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정인지·노수신, 그리고 임진왜란(1592) 때 큰 활약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유성룡·원균 등도 이곳 출신이다. 난설헌은 여성으론 첫 세기적 천재 여류시인이다.
이처럼 난설헌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환경적 조건 역시 최상류 급에서 살았었다. 가정환경과 유년 시절이 그것이다. 하지만 결혼 후 그 환경은 송두리째 바뀌어졌다. 금지옥엽으로 생활해 왔던 15년의 삶은 신혼첫날부터 바뀌었다. 지옥 같은 별당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시를 쓰고 광상산의 신선세계로 여행이 없었던들 난설헌은 13년이란 결혼생활도 더 짧아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난설헌은 《몽유기》(夢遊記)를 지은 후 1589년 3월 19일 한 많은 감옥 같은 별당 결혼생활을 청산하였다.
난설헌의 문학세계는 현대에 와서 더욱 빛을 낸다. 소설·영화·드라마·뮤지컬 등 전 문학 장르에서 끝없이 재창조되어 한류(韓流)의 스토리텔링이 되어가고 있다. 문화예술창조 에너지의 화수분이다. 그녀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유택에 먼저 간 아들 희윤과 딸 소현의 묘를 앞에 품은 채 영원히 이승과 인연을 끊었다.
2016-11-23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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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8> 허난설헌(許蘭雪軒) <제15話>
그토록 소중하게 다루었던 물건들을 난설헌은 며칠 전부터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설화집 ≪태평광기≫(太平廣記)와 ≪수호전≫(水滸傳)등 어느 책 보다 소중하게 아꼈던 책을 경탁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책갈피엔 쪽지도 하나씩 잊지 않았다. 자신이 이승을 떠난 후에 누구에게 주라는 내용이다.
난설헌에겐 거울과 빗이 여럿 있다. 오라버니 허봉이 중국에 갔을 때 사온 상아 얼레빗과 쇠뿔로 만들어진 참빗, 큰 오빠 허성이 일본 수신사로 다녀오면서 사다 준 매화 문향 장미목 거울, 아버지 허엽이 명나라 진하사(進賀使)로 갔다가 사온 연꽃 장식의 거울, 그리고 어머니가 쓰시다 물려 준 오동나무 거울도 경탁위에 깨끗하게 닦아 올려놨다. 그동안 써놨던 시들도 일부는 서안(書案·책상)에 넣고 나머지는 별당 뒤뜰에서 깊은 밤에 불태웠다.
그리고 내일은 오랜만에 목욕을 하리라 생각한다. 난설헌은 문득 손곡(蓀谷·이달李達의 호)의 ≪학 한 마리≫를 떠올린다.
‘외로운 학 한 마리/ 먼 하늘을 바라보며/ 밤도 차가운데/ 한 발을 들고 섰네/ 저녁 바람이 차갑게/ 대나무 숲에 불어와/ 몸에 가득/ 가을 이슬로 적셨구나.’ 그랬다. 난설헌은 외로운 학 한 마리가 되어 서녁 바람이 차가운데도 두 발 중 한쪽 발은 들고 외롭고 쓸쓸하게 서 있는 형국의 별당 생활이다.
이제 난설헌은 신선의 나라로 가려 한다. 시의 세계와 광상산 신선의 세계를 오가며 별당 생활을 힘겹게 버텼던 이승을 정리하고 훠이훠이 떠나려 마음먹은 것이다. 막상 이승생활을 청산하고 떠나려 하니 정리 할 것도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히 몸부림 쳤던 아들 제헌과 딸 소헌이가 먼저가 있고 아버지 허엽, 오빠 이상으로 존경하였던 허봉까지 일 년전에 이승을 떠났으니 속세(俗世)에 미련을 두고 가슴 조릴 일들이 없다. 다만 자신이 쏙 빼 닮은 친정 어머니가 목에 걸린 생선가시 모양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주체하기 어렵다. 고부간의 갈등이 고추보다 매웠어도 난설헌은 눈물은 절대 흘리지 않았다. 눈물을 쏟고 서러워하면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는 것 같아 난설헌은 입술을 깨물고 허벅지를 꼬집어가면서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눈물이 하늘에서 내리는 오뉴월 장맛비처럼 주체를 할 수 없게 쏟아졌다.
또 스승 손곡의 시 ≪꽃을 보며 더욱 늙음을 느껴≫를 번개처럼 떠올렸다. ‘봄 바람도 또한 공평치 않아/ 온갖 나무 꽃 피워도 사람만은 혼자 늙게 하네/ 억지로 꽃가지 꺾어 희 머리에 꽂아 보았지만/ 흰 머리와 꽃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라...’ (시 옮김 허경진)
난설헌은 손곡의 출생을 알고 있다. 그런 그를 허봉 오빠가 동생 허균의 스승으로 사랑채에 초빙하였다. 그때 난설헌도 아버지의 배려로 같이 공부 할 수 있었다. 손곡은 균의 스승으로 초빙되었지만 난설헌도 아낌없이 가르쳤다. 난설헌은 손곡 가르침을 흡반처럼 빨아들였다. 초롱초롱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총기에 손곡은 난설헌과 고우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난설헌과 손곡은 사반세기(25년) 가까이 나이 차이가 있다. 부녀(父女)같은 분위기에서 동생 균과 같이 공부 하였다.
난설헌이 여류천재라면 균은 조선천하의 천재였다. “누나 나도 이다음에 소설을 쓸 거야!” 난설헌이 ≪수호전≫과 ≪태평광기≫를 읽고 있을 때면 초롱초롱한 두 눈을 반짝이며 누이 난설헌에게 으스대기도 하였다. 그렇게 난설헌이 김성립과 결혼하기 전엔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자랐다. 그때 허봉오빠와 잘 어울려 사랑채에 드나들었던 최순치도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혔다. 난설헌은 그때 이미 결혼을 하면 허봉 오빠와 여러 가지로 닮은 최순치와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거북 등 껍데기보다 견고한 인습에 밀려 난설헌은 안동 김씨와 양천 허씨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이제 난설헌은 그 징검다리역에서 떠나려 서두르고 있다. 그 첫 수순으로 목욕을 하려 한다. 시어머니 송씨가 손자와 함께 이웃집으로 마실을 갔다. 있는 힘을 다해 물을 데워 옹기 자배기에 붓고 몸을 담갔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시집 온지 십수년이 됐으나 남편과 뜨악한 관계로 목욕도 자주하지 못하였다.
오늘 목욕은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 것이다. 손수 물을 데우고 준비를 하였다. 별당과 정주간은 약간의 거리가 있다. 오랜만에 집안이 텅 비었다. 심부름하는 몸종들이 모두 볼일이 있어 외출을 했으며 시어머니 송씨 마저 손자를 업고 이웃집으로 마실을 갔기 때문이다. 언제 그들이 들이 닥칠지 몰라 난설헌은 목욕을 서둘렀다.
목욕통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라 어느새 난설헌의 눈앞에 오색무지개를 꽃 피웠다. 따뜻한 물에 난설헌의 두 눈이 잠들 듯 사르르 잠겼다. 눈앞에 광대한 무한의 세계가 펼쳐졌다. 온몸이 오색구름 위에서 황금마차를 타고 난새와 봉황의 호위를 받으며 옥황상제에게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곳엔 이미 아버지 허엽과 오빠 허봉이 먼저 도착하여 난설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난설헌이 스승 손곡을 통해 배웠던 시성 두보와 시선 이태백도 있었다. 시성과 시선은 활짝 핀 백일홍의 꽃다발을 난설헌에게 건네주었다. 신선세계에서 뜨겁게 환영을 해주자 난설헌은 너무 늦게 온 것이 아닌가 생각까지 들었다. 힘든 이승생활을 공연히 버티느라 애쓴 생각이 아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특히 시성 두보와 시선 이태백을 만나자 이승생활이 허송세월이 되었다 싶게 마음이 쓰였다. “허허, 조선의 천재 여류시인을 이제사 보게 되네... 내 참 무려 800여년이나 기다렸소이다! 난설헌의 백옥루상량문은 우리나라 이하의 상량문과 너무나 닮았소! 나는 이하가 조선의 여자로 환생을 하지 않았나 의심을 했소이다...” 이택백이 흰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어보였다. 진정으로 기쁜 표정이다.
아버지 허엽과 오빠 허봉도 옆에서 눈시울을 적시며 웃음으로 맞았다. 난설헌은 이승에서 8살에 쓴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 생겨진 광한전 옥양문을 쳐다보며 이곳이 오매불망 동경했던 신선세계임을 실감하였다.
2016-11-16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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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7> 허난설헌(許蘭雪軒) <제14話>
중국에서 난설헌의 문명은 가히 폭풍적인 인기다. “천재 여류 시인이다.”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아끼지 않았으며 짝퉁 난설헌이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16세기 중기 때 동아시아 문학세계의 흐름이다. 한자 문화권의 패러다임의 독특한 문예 향기다.
그 주역은 여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황진이(黃眞伊)·이옥봉(李玉峰)·이매창(李梅窓)·허난설헌 등이 주역이다. 가깝고도 먼 일본에선 《겐지이야기》(源氏物語)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978~1016)와 ≪이즈미 시키부 일기≫(和泉式部日記) 작가 이즈미 시키부(978~?) 그리고 와카(和歌)의 달인 오노노 고마치(小野小町·814~880)등도 빼 놓을 수 없는 여류 작가다.
무능거사 이능화(李能和·1869~1943)와 천태산 김태준(金台俊·1905~1850)은 난설헌의 성품을 신선과 같다고 말했으며 무능거사는 조선양반 가문 여류시인 36명을 언급하면서 그녀의 시 26수를 실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하였다. 난설헌의 유선사(遊仙詞)에 나타난 세계관은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이 세계관이 중국 팬들을 열광시켰으리라...
중국과 조선이 당시엔 선진 문화권의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난설헌은 유일하게 유선시 작가다. 그 중에서도 여류 유선시 작가로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천년 고인 요지에서 목왕과 헤어져/ 파랑새로 하여금 유랑을 찾게 하였네/ 밝아오는 하늘에서 피리소리 들려오니/ 시녀들은 모두들 흰 봉화을 탔구나!/ 골짜기와 연못에 아홉용이 잠겨있고/서늘한 오색구름이 부용봉을 물들이네/ 난해 탄 동자를 따라 서쪽으로 오는 길에/ 꽃 앞에서 선 적송자에게 예를 올렸네’ ≪유선사≫(遊仙詞) ➀·➁다.
유선사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신선세계를 그린 그림과 같은 시인데 난설헌은 여성으로 유선시 창작한 유일한 작가다. 일찍이 조선은 물론 시의 나라(唐)에도 유선시를 쓴 여성이 없었는데 난설헌의 신선 재주를 타고 났다는 명성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팬들까지 열광하게 만들었다.
난설헌의 시 세계는 선(仙)과 한(恨)으로 귀결시키고 있는데 그런 평가는 정신적 세계관과 일상적 삶을 요약한 것이며 유선사가 그것을 적나라하게 방증하고 있다. 허균(許筠)의 《학산초담》(鶴山樵談)에는 “누님의 시와 문장은 하늘이 내어서 이룬 것이다. 유선시를 좋아하였는데 시어가 맑고 깨끗해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고... 문장이 기이하고 우뚝한데 그 가운데 사륙문(四六文·네 글자와 여섯 글자로 이룬 對句法)이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다. 백옥루 상량문이 그 대표적으로 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나의 형님(허봉)이 말하길 경번(난설헌字) 글 재주는 배워서는 필수가 없다. 이태백(李太白·701~762)과 이장길(李長吉·790~816 본명 李賀)이 남겨둔 글이라 할만하다”고 극찬하였다.
또한 명(明)나라 조세걸(趙世杰)의 ≪고금여사시집≫(古今女史詩集)에서 유선시와 ≪백옥루상량문≫은 천부(天府)의 기이한 경관을 아로새겼으며 구름과 노을이 아름다운과 화려함을 다투는 듯 하여 정말로 신선이 백옥루를 거니느듯 하다고 극찬했으며 또한 선기(仙奇)는 이태백을 뒤로 물러나서 보게하고 문장은 아름답고 화려함은 강엄(江淹·444~505)역시도 자리를 피하게 만든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과 명나라 대시인들도 조선의 천재여류시인 난설헌의 뛰어난 글재주에 숨 막혀 했다. 유선사 87수를 보고 강엄과 이태백도 뒤로 물러서야 할 처지라 했다. 소위 듣기 좋으라고 한 립서비스로만 보기엔 지나친 비유가 아닌가 싶다. 이태백과 강엄이 누구인가? 당대엔 누구와도 견줄 상대가 없는 대시인들이 아닌가? 더욱이 자국의 대시인들을 이웃나라 조선의 여류시인에게 그들을 비교했으니...
당시 조선의 천재 여류시인 난설헌의 시재(詩材) 얼마나 신기(神技) 같았는지 짐작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동비(東妃)에게 새로 분부하사 술랑(도를 깬 신선)에게 시집 가라시니/ 붉은 난새와 해를 가린 수레가 부상으로 향하네/ 벽도화 앞에서 한번 헤어진지 삼천년이나 되니/ 신선세상의 해와 달이 긴 것이 도리어 한스러워라!/ 푸른 사슴을 타고 봉래산으로 들어가니/ 꽃 아래서 신선들이 얼굴을 펴고 웃네/ 다투어 말하길 그대는 우리 가운데 가려내기 쉽다네/ 북두칠성 표지가 이마에 있다네’ 《유선사》 (시 옮김 허경진) ⑬과 64 다.
《유선사》 87수 중에 네수만 엄선하였다. 오프라인(종이신문)의 한계다. ⓵과⓶의 수, 그리고 ⑬·64 만으론 난설헌의 유선사 세계를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수많은 선인과 광활한 세계와 기이한 선경(仙境), 그리고 상서로운 여러 동물들, 희귀한 보물, 음악과 춤 등 한폭의 화려하고 장엄한 신선세계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시다.
또한 난설헌의 시는 주어진 여성 운명에 반기를 든 자기 삶의 생동한 기록이 된 시적 세계를 창출해 냈으며 사회의식과 국가의식에 자유로운 애정표현과 재혼 및 예교의 속박에서 탈출하려는 적극적 표현이었다. 명나라 반지긍은 ≪취사원창≪(聚沙元倡)에서 ‘백옥루상량문’을 보고는 유선사의 귀재(鬼才) 또는 귀선(鬼仙)이라며 천재시인 이하(李賀)가 환생한 것 같다 하였다.
하지만 중극의 전겸익(錢謙益·1582~1664)는 《열조시집》에서 자신의 나라 시를 표절했다고 폄훼하자 조선의 문인들도 침묵하고 있다 일제히 혹평을 쏟아냈다.
난설헌이 이백(李白·701~762·이태백)의 선시(仙詩)와 선기(仙氣)에 심취하게 된 것은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욕구와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시적 재능을 선계에서 이태백 같이 펼쳐 대리만족을 구했으리라... 유선사는 작품으로서 가치뿐만이 아니라 난설헌의 작가의식의 집약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중 최고의 여류시인과 최초의 유선사 시인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 작품이라고 하겠다.
2016-11-09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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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6>허난설헌(許蘭雪軒) <제13話>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 벼루와 비단 한 폭을 방바닥에 꺼내 펴 놓았다. 그리고 칠색의 금침을 방 한쪽으로 밀어놓고 난설헌은 먹을 갈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붓이 움직이었다.
‘치마폭에 눈물은 떨어지지만/ 모두가 임 때문이 아니었던가/ 막힌 속은 거문고로 풀면 되지만/ ᄄᅠᆯ어지는 저꽃들은 어이하랴, <<무제>>다. 시 한수를 가을 무우 밭에서 무우 뽑듯 쓰고난 난설헌은 머리뒤에 손을 가져가 비녀를 뽑았다. “너 급히 옥봉이 한테 갔다 오너라!,,라고 몸종 옥비(가명)를 향해 시를 쓴 칠색 비단을 둘둘 말아 주면서 독촉 하였다.
옥봉(玉峰 1526~1592)은 난설헌(1563~1589)보다 37살이나 위다. 난설헌과 옥봉은 지체가 다르다. 난설헌은 조선의 으뜸가문인 안동김씨의 며느리인 반면에 옥봉은 조원(趙瑗 1544~1595)의 소실이다. 허지만 그들은 문학 동지 였을 터다. 난설헌의 개혁적 사고로 옥봉을 한 사내의 소실로서가 아닌 시(時)를 쓰는 여류문인으로 생각하고 동류의식에서 위의 시를 보냈으리라...
아마 시의 내용으로 봐 죽음직전의 상황인 듯 하여 보인다. 옥봉의 나이 37살이나 위이면서 난설헌보다 3년을 더 살았다. 난설헌이 27살에 절명 했을 때 옥봉은 63세였다. 환갑을 치르고도 세상을 3년이나 더 보았던 것이다. 당시론 상당히 장수한 삶이었다.
옥봉과 난설헌의 거처는 지금으론 그리 먼 거리가 아니였으나 당시엔 이웃집 가듯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였었다. 그러나 난설헌은 시를 급히 써서 몸종을 통해 옥봉에게 보냈다. 천재는 천재가 이미 알아 보았던 것이다.옥봉이 비록 서녀(庶女)로 태어나 떳떳한 조강지처가 되지 못하고 소실(小室)이 되었지만 그녀는 어엿한 왕실의 피를 받은 후예 였다. 아버지 이봉(李逢1441~1493)은 학문은 뛰어났으나 출사엔 등한히 하였다. 이럿듯 가문으로만 보면 비록 소실에 있지만 난설헌에 꿀릴것이 없는 지체다. 게다가 나이까지 37살이나 위였으니 시인으로 대 선배가 아니였던가?
아마도 난설헌과 옥봉은 처지상 만나지는 못했드라도 서신은 자주 왕래가 가능했으리라... /임 찾아 오는 말의 방울소리에/ 취한 술은 다시 깨어 가슴 아파라/ 시름에 겨운 얼굴 차마 못내놔/ 창가에 눈썹이나 그려 보느니..., 옥봉은 난설헌이 보낸 칠색 비단의 여백에 시 한수를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없이 써 보냈다.
그때 옥봉이 나이 63세 때다. 두 여인의 남편들은 임진왜란때 사망하였다. 남자들 역시 조원이 김성립보다 18살이나 위였으나 사망할때는 같은 해인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세상을 등졌다. 이처럼 여자들은 여자대로 시라는 문학으로 소통을 했으며 남편들은 전장에서 전우(戰友)로서 애국심에 불탔으리라...
난설헌은 공교롭게 이옥봉. 황진이(黃眞伊1511~1551)와 서로 엃여 있다. 황진이는 허엽과 화담서경덕(徐敬德 1489~1546)같은 문하생이며 이옥봉과는 천재 여류시인으로 옥봉이 난설헌의 언니다. 세 여류시인은 또한 공교롭게도 여필종부와 남녀 칠세 부동석 성리학의 사대부 나라에 태어나 주류사회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세 천재여류시인의 시를 소개한다. ‘자주 빛 퉁소 소리에 구름이 흩어지자/ 발 밖에는 서리가 차가워 앵무새가 우짖는데/ 밤 깊어져 외로운 촛불이 비단 휘장을 비추고/ 이따금 드 뭇한 오동나무 가지에선 밤 벌레가 우네/ 명주 손수건에 밤새도록 눈물 적셨으니/ 내일 보면 점점이 붉은 자국이 남았으리라, 난설헌의 <<임을 그리며>>다.(시 옮김 허경준)
‘강가의 어느집 벽옥 난간에 기대선/ 봄 생각에 젖은 미인 눈썹에 시름이 겨워/ 머리 숙여 선골(仙骨) 낭군과 속삭이려는데/ 가벼운 배는 무정하게 여울을 떠나가네, 이옥봉의 <<강행>>(江行)이다.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춘풍(春風)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은님 오신날 밤이 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지이의 <<무제>>다.
세 천재여류시인이 모두 몸과 마음을 몸땅 받쳐 진정으로 사랑하는 님을 그리워한 시다. 그랬다. 하늘은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는 않았나 보다. 세 천재여류시인들은 살아서 보다 사후에 더 유명해져 오늘에도 뭇 사람들로부터 입이 닳도록 회자되고 있다. 그들의 속마음에 꽁꽁 숨겨져 있어 수세대가 지났어도 신기루처럼 꿈과 낭만을 끝없이 피어 낸다.
결국은 사랑이었다. 옥봉은 왕실(王室)의 후예였으나 서녀의 신분으로 소실이 되어 탁월한 시의 세계를 마음껏 펼치지 못했으며 난설헌 역시 조강지처의 자리엔 앉았지만 남편의 무관심과 시어머니의 냉대로 작품활동을 마음 편히 하지 못 하였다.
명월(明月)이란 기명(妓名)으로 더 많이 알려진 황진이 또한 본인이 사랑하려 했었던 사내(서경덕)의 품으로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가 되어 측근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 해야만 하였다.
옥봉과 난설은 조선에서 보다 중국에서 더 문명(文名)을 ᄄᅠᆯ쳤다. 옥봉은 시를 쓰지 않겠다는 ‘금시맹약,(禁詩盟礿)을 쓰고 이봉의 소실이 되었다. 허지만 천척의 억울한 누명을 벗게 한 <<위인송원>>(爲人訟寃)으로 금시맹약을 어겨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난설헌 역시 현모양처보다 천재시인으로 조.중.일의 문화계를 경천동지케 하였다. 황진이 또한 사대부나라에서 지체 높은 대학자에서부터 소리꾼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란 미명아래 섬김이 아닌 파트너만으로 재색(才色)을 방패삼아 더 우월적 지위로 40평생을 자랑스런 여성의 삶을 살았다. 사랑은 그렇게 위대하게도 비참하게도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인가 보다.
2016-11-02 09: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