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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93> 약학의 특성 - 2. 강의
1) 강의가 많았다.내가 1967~1971년에 약대에 다니면서 느꼈던 첫 번째 소감은 강의가 너무 많다는 거였어요. 일주일에 52시간씩이나 수업을 들었으니까요. 월~금요일까지는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8시간씩 강의를 듣거나 실습을 했고 토요일에는 5시간 강의를 들었어요. 수강 신청이란 개념도 없었어요. 마치 고등학교처럼 주 52시간짜리 강의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받았거든요. 강좌명도 무지하게 많았어요. 문화사, 사회과학개론, 영어, 국어, 독일어, 약학라틴어 같은 교양과목들과, 정성분석화학, 정량분석화학, 약용식물학, 생약학, 자연과학개론, 동물학, 화학공학개론, 농약학, 신약학, 물리약학, 천연물화학, 생화학, 위생화학, 식품위생학, 약품미생물학, 약제학, 이론약제학, 무기제약, 유기제약, 통계학, 본초학, 약물학 같은 전공과목들 및 실습과목이 있었어요. 덕분에 재학 중 주워들은 잡다한 지식들이 많았어요. 지식의 깊이는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당시 약대 졸업생들은 ‘모르는 것도 아는 것도 없다’는 평(評?)을 듣곤 했어요. 그때부터 왜 약대에서 이렇게 많은 걸 가르치는 걸까? 이게 늘 미스테리였어요. 다른 학과, 예컨대 화학과(化學科) 같은 데는 약대처럼 과목수가 많지 않다고 들었어요. 아무튼 약대는 정신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강의 과목 수가 너무 많았어요. 오늘날까지 약대에 과목 수가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강의 후반부에서 설명하겠습니다.2) 강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당시의 강의 수준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약학 교육을 담당하게 되면서 부닥친 첫번째 어려움은 교수진의 확보였을 거예요.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가 문을 닫은 후, 잠시 과도기를 거치고 6.25 전쟁 중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이 문을 열었지만, 그 와중에 교수진을 구해야 했으니까요. 경성약전 졸업생들 중에서 교수로 초빙된 된 분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사실 본격적인 연구나, 논문 쓰기를 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분들이시잖아요. 그러니 그분들의 강의 수준이 그다지 높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교과서를 읽어주는 수준의 강의도 있었어요. 게다가 무슨 대단한 이론에 대한 이해보다 단순히 암기해야만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과목들이 많았어요. 에피소드 하나 소개할까요? 동경대학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고 오셔서 3학년 생화학을 강의하시는 교수님이 계셨는데, 1년 내내 효소 한 챕터 밖에 안 가르치셨어요. 덕분에 ”효소는 단백이데이”라는 말씀이 귀에 박혔습니다만, 생화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래저래 학생들은 학교 공부에 염증을 느끼곤 했지요. 일부 학생은 화학과로 전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2013년 정년퇴직을 전후하여 약학대학의 역사를 좀 공부해 보니까 옛날 은사님들께 이러한 불평 불만을 할 상황이 아니더라구요. 경성약전을 나오신 그분들께서 약학 불모지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학문 체계를 세우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강의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은사님들의 노고에 새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김병각, 이상섭, 김낙두 교수님 같은 분들이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강의 내용과 수준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1975년 약대가 관악캠퍼스에 합류한 이후, 즉 많은 약대 졸업생들이 미국, 독일, 일본 등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교수가 된 이후에는 강의 내용과 수준이 급격히 좋아졌어요. 예컨대 1982년에 K 교수가 부임해서 생화학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을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켰어요. 그때부터 약대 학생들의 생화학 실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후로는 물론 다른 교수님들도 다 열심히 강의를 하셔서 약대생들의 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한 10여년전부터는 약대가 연구를 잘하는 대학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헸어요. 옛날 우물안에서 놀던 시절에 비하면 실로 놀라운 발전이지요 (다음호에 계속)
2024-05-16 1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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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92> 약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 1. 서론
심창구 교수. © 약업신문2022년 9월 30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신임 교수 세 분에게 ‘약학이란 어떠한 학문인가?’를 주제로 강의를 한 일이 있었다. 이 분들은 약학대학 학부 출신이 아니었다. 대학에서는 이 분들에게 약학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좀 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그 때의 강의 동영상을 금년 초에 학교로부터 받았다. 화질이 그럭저럭 괜찮기에 페이스북에 올려 보았더니, 짧은 기간 안에 700회에 육박하는 조회수가 나왔다. 이 주제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래서 그 동영상의 음성을 쳇지피티의 도움을 받아 문자화 한 다음, 이를 다소 수정 가감하여 약창춘추에 연재해 보기로 하였다. 연재에 앞서 독자 제현의 양해를 `구하는 바는, 여기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필자의 생각일 뿐이라는 점이다. 감히 약학을 정의하는 것은 필자의 분수에 넘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독자들께서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일람해 주시기 부탁드린다.강의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강의했을 때의 경어체를 그대로 살려 싣기로 한다.1.서론방금 들어보니까 세 분이 발령받은 지 한 달 정도 되었다고 그러는데 학교에서 신임 교수들을 위해서 이와 같은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을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러한 프로그램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분이 이런 강의를 듣기 원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굉장히 바쁘고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을 시기에 이 자리에 와 주신 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사실 제가 그 동안 공사석에서 ‘약학은 이러한 학문이다’라고 얘기를 좀 해왔지만 막상 귀중한 분들의 귀중한 시간을 할애 받아 이야기를 하려니까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걱정이 좀 됩니다. 앞으로의 교육과 연구 방향 정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실 수 있다면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마시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우선 제 소개를 잠시 하면 저는 1967년도에 연건동에 있던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제약학과에 입학해서 1971년도에 졸업했어요. 1967년은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제약학과가 처음으로 생긴 해예요. 그러니까 제가 우리나라에서 제약학과 최고의 고참 선배입니다.서울대 약학대학은 왜정 때인 1915년에 개교한 조선약학교를 거쳐 1930년 경성약학전문학교라는 이름으로 40년간 을지로6가에 있었어요. 그 시절에는 나름대로 교수들이 공부를 잘 가르쳤던 것 같아요. 동경대학 약학과 및 일본의 약학전문학교 출신들이 교수진이었어요. 그러다가 1945년 우리나라가 광복이 되자, 경성약학전문학교는 1946년 사립 서울약학대학을 거쳐 6.25 전쟁 중인 1950년에 국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으로 편입되었어요. 6.25 전쟁 때는 서울대학교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본부가 부산에 있었고, 입학시험도 부산에서 치뤘어요. 그러다가 전황이 좀 안정이 되자 을지로에 있는 약대 건물에 서울대학교 서울 분교가 생겼어요. 그리고 서울 거주자를 대상으로 신입생을 뽑았어요. 신입생들을 학과 구분 없이 이과 2반, 문과 2반으로 나누어 약 6개월 정도 강의를 하다가 9.28 수복 때 부산에 있던 서울대학교가 서울로 오면서 부산 본교 학생들과 서울 분교 학생들이 합치게 되었어요. 1959년 약학대학은 을지로에 있던 건물을 음악대학에 넘겨주고 종로구 연건동으로 옮겨와 거기에서 16년간 있다가 1975년에 관악 캠퍼스로 옮겨왔습니다.나는 연건동에서 공부했어요. 그리고 1979년에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대학에 가서 3년 반 만에 제제학(製劑學) 전공으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고 1983년 3월에 모교 조교수가 되었어요. 당시만 해도 학위를 받으면 바로 조교수가 될 수 있었어요. 지금에 비해 모든 게 수준이 낮았죠. 2003~2004년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하고 학교로 돌아와 .2013년에 정년퇴직해서 지금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약학대학의 상세한 역사는 ‘서울대학교약학대학 100년사 (서울대출판문화원, 2015)’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4-04-11 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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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91> 한 박자 쉬고
심창구 교수. © 약업신문교회에 처음 가는 사람은 목사님이 자꾸 자기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데 기분이 살짝 나빠진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이 내 죄를 어떻게 알았지?’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죄인까지는 아닌데’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평생 죄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죄인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사람을 ‘걸린 죄인과 걸리지 않은 죄인’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걸린 사람은 벌금을 내거나 감옥에 갇혀 있지만, 걸리지 않은 사람은 여기 예배당에 와 있거나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것이다.기독교에서는 늘 죄를 회개하라고 한다. 우선 내가 죄를 지은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빌고, 그 다음에 옛 영혼을 몰아내고 정직하고 정결한 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말씀이지만 실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서 다윗왕이 으뜸으로 꼽힌다. 그는 영적으로나 현실 정치에서 탁월한 균형감각을 가진 왕이었다고 한다. 그 다윗 왕이 우리아라는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를 뺏어 아내로 삼고 우리아를 죽게 만드는 큰 죄를 저질렀다. 그때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와서 다윗왕을 꾸짖으며 죄를 회개하라고 했다. 이에 다윗왕은 자기죄를 즉시 회개하였다고 한다.다윗은 당시의 왕이었다. 지은 죄를 회개하는 대신 꾸짖은 사람 나단을 바로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다윗은 회개하였다. 그런 면에서 다윗을 훌륭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단이 선지자였기 때문에 그 꾸지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예컨대 평범한 목동이 다윗왕을 꾸짖었다면 목동의 생명이 위험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말은 내용보다 누가 말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훌륭하다고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에는 힘이 있다. 그러나 품행이 엉망인 사람이 아무리 명언을 쏟아낸들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그런 면에서 우리는 남의 죄를 나무라기에 앞서 그 말을 할 자격을 갖추는 일이 더 중요해 보인다.자기가 죄인임을 스스로 깨닫고 있는 사람도 누군가로부터 ‘회개하시오’라는 지적을 받으면 우선 불쾌한 마음이 든다. ‘회개를 해도 내가 알아서 할 텐데, 당신이 뭔데 나보고 회개하라고 하냐?’는 반발심도 생긴다. 그래서 남에 대해 ‘지적질’을 하고 싶을 때에는 서두르지 말고 우선 한 박자 쉬면서 나를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덕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나니까 얘기해 준다’거나, ‘내 말이 뭐 틀렸냐?’며 하는 말은 비록 ‘바른 말’ 일지언정 부작용만 일으키기 쉽다. 상대방의 개과천선을 이뤄내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일부러 더 죄를 짓게 만들 우려가 작지 않기 때문이다.고 이어령 선생님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이성이 아니라 따듯한 눈물 한 방울’이라고 하셨다. 그분 말씀대로 냉철한 이성에 근거한 비판, 지적질, 바른 말은 사회 질서를 바로잡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분열을 조장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수백마디 꾸짖음이나 지적질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따듯한 눈물 한 방울이 우리 사회를 따듯하게 만드는데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그분의 말씀에 완전 공감한다. 끝으로 사족(蛇足) 한마디. 세상의 법망(法網)은 미리 쳐 놓은 거미줄과 같아야 할 것이다. 거미줄(법망)이 쳐져 있는 곳으로 지나가려고 하는 벌레는 영락없이 거미줄에 걸리게 마련이다.세상의 법망이 잠자리 채와 같아선 안될 것 같다. 잠자리 채는 들고 있는 아이가 선택한 먹이를 쫒아가 덮쳐 잡는다. 잡힌 벌레는 ‘왜 수많은 먹이 중 하필 나를 잡았느냐’고 투덜댄다. ‘운수가 나빴다’며 자기 행동을 회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잠자리 채를 휘두르는 방식은 세상의 죄를 방지하는 데에 효과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약 60년전 고등학교 일반사회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이다.
2024-04-05 1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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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90> 수금푸
심창구 교수. © 약업신문군대에서 경상도 출신 고참병이 한 신병에게 “야, 수금푸 좀 갖고 온나”라고 명령을 내렸다. 신병은 수금푸가 뭔지 몰라 당황해서 이것 저것 닥치는대로 가져가 봤으나 고참병은 매번 그게 아니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수금푸는 경상도에서 삽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몇 년 전에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름 경상도 방언 좀 안다고 하던 나도 매우 놀랐다. 경상도에서는 선반을 시렁, ‘매우 많다’를 ‘천지삐까리다’, ‘항거 많다’ 또는 ‘쌔빌맀다’라고 한다는 정도까지 알고 있던 나로서도 수금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후 나는 이 말이 어디에서 유래한 말일까 늘 궁금하였다. 그런데 차에 며칠 전 TV를 보는데 한 연예인이 길거리에서 뭔가를 사 먹으면서 이 스쿠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아마 아이스크림을 사는 중이었던 것 같은데, 상인이 큰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듬뿍 떠서 담아주자 연예인이 감탄하면서 ‘와! 한 스쿠푸 잔뜩 주시네요’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이 스쿠푸가 영어로 scoop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떠 올랐다. 즉시 사전을 찾아보니 scoop는 ’아이스크림이나 밀가루 등을 뜰 때 쓰는 작은 국자같이 생긴 숟갈’이라고 나와 있었다. 이 scoop가 어쩌다 경상도에서 스금푸로 바뀐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좀 더 확인을 해 봐야 할 일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외래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발음이 바뀐 사례가 제법 있을 것 같았다.기왕 군대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으니 사병의 계급에 대한 호칭 이야기까지 해보기로 하자. 군대에 들어가면 훈련소를 졸업하면서 계급장을 받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작대기 하나, 그 다음에는 작대기 둘, 그 다음에는 작대기 셋,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작대기 4개가 들어있는 계급장을 받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작대기 하나를 이등병, 둘을 일등병, 셋을 상등병, 넷을 병장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일등병, 이등병, 상등병, 병장 순으로 불러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그래서 여성이나 군대에 가보지 않은 남자들은 계급장을 보고 그 사병의 계급을 제대로 부르기 어려워한다. 나도 이게 늘 이상했는데, 어느 날 중국어에 능통한 동료 사병으로부터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짧게 말하자면 중국에서 일이삼사(一二三四)라는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그 발음을 중국식으로 이얼산시(이일삼사)로 했어야 했는데 누군가의 착오로 일이삼사로 잘못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우리가 이등병, 일등병, 상등병 순으로 부르는 것은, 군대에서만 중국어의 발음인 이얼산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건군 초기에 중국군의 제도를 모방하여 군 제도를 만들다 보니 계급장에서만 이얼산시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제대로(?) 된 발음인 이얼산시를 들여왔더라면 계급장의 호칭에 대한 혼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실수로 잘못 들어온 예를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에는 우리나라에서 콜레라를 호열자(虎列刺)라고 불렀다. 이는 아마 콜레라와 발음이 비슷한 중국어 한자에서 유래했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콜레라와 호열자는 발음의 유사성이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군대 동료의 말이 원래 중국에서는 콜레라를 虎列辣(호열랄)이라고 썼었는데, 누군가가 이 단어를 우리나라에 들여올 때 랄(辣)자 대신 모양이 비슷한 자(刺)자로 잘못 들여와 사용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虎列辣의 중국식 발음은 콜레라에 가깝다고 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사소한 실수 하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잘못(?)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약학 용어 중의 엑기스, 충진, 캅셀도 각각 엑스, 충전, 캡슐의 잘못인데, 꼼꼼하게 따져보면 이런 류의 오류는 천지 삐까리로 많을 것 같다. 만약에 Scoop가 수금푸로 바뀐 것이라면, 이는 이얼산시가 일이삼사가 되고, 호열랄이 호열자로 잘못 바뀐 것 보다는 훨씬 애교 있는 실수가 아닐까?
2024-03-18 0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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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89> 약학사회지 제6권
심창구 교수. © 약업신문작년(2023년)에 창립 9주년을 맞은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회장 김진웅)는 작년 4월 서울대 약대에서 제18회 약학사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심포지엄의 연제는 1. 대한약학회의 학술지인 ‘Archives of Pharmacal Research의 발전사’(이석용 성균관대 약대 교수), 2. ‘일제식민기의 여성약학도’(이영남 충북대 명예교수), 3. ‘해외 약학사학회의 최근 동향’(손일선 일본 약학사학회 국제위원)이었다.이어 11월에는 ‘코로나-19 팬데믹과 범 약계의 대응’이라는 주제 하에 제19회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는데, 여기서는 1. ‘코로나19 의료제품의 신속 허가 및 개발 지원’(정지원 식약처 사전상담과 과장), 2. ‘코로나 19 시대 대한약사회의 역할’(김대진 동국대 약대 교수), 3. ‘코로나 19 극복을 위한 병원약사의 역할’(황은정 양산부산대병원 약제부장), 4. ‘코로나 대응 국내외 제약업계의 활약’(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정책본부장)에 대한 발표와 5. 종합논평(심창구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이 있었다.2024년 초에는 약학사회지 제6권 제1호가 뒤늦게 발간되었다. 이번 호에는 「한국약제학회 학술지의 발전사 (신범수, 신소영, 김채환, 한효경)」, 「한국독성학회지 Toxicological Research의 발전사 (곽미경, 천영진)」 등의 원보와 함께 작년에 처음으로 개최된 ‘약학사 사랑방 좌담회’의 녹취록인 「원로 군진약사들의 회고담」 등이 수재되었다.한국약제학회 학술지인 ‘약제학회지’는 1971년에 창간된 이래 년 4회 발간하다가 2004년부터 연 6회로 증간하였다. 2010년 제40권 제3호부터는 학술지의 이름을 Journal of Pharmaceutical Investigation (JPI)로 바꾸고 전체 내용을 영문으로 발간하였다. JPI는 오랜 노력의 결과로 2021년 Science Citation Index Expanded(SCIE)에 등재되었는데, 2023년에 처음으로 발표된 인용지수(impact factor)가 무려 5.5로 해당분야 국제 학술지 중 상위 20% 이내에 랭크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한편 한국독성학회의 학술지인는 1985년 (사)한국독성학회/한국환경성돌연변이발암원학회의 공식 학술지로 창간된 『한국독성학회지』를 모태로 한다. 이 학술지는 2008년부터 Toxicological Research로 이름을 바꿔 연 4회 발간되고 있다. 이 학술지는 독성학 전반의 학문적 이해와 발전을 도모함을 목표로사람과 동물에 독성을 유발하고 이로 인해 공중보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의약품, 화장품, 생활용품 및 식품첨가물 등 화학물질 독성과 관련된 영역의 연구, 포럼, 종설 등의 논문을 게재한다. 이 학술지는 2005년 1월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로 선정된 이후, SCOPUS 및 PubMed에 등재가 확정됨으로써 국제적 인지도가 크게 향상되었다. 그 결과 2017년 12월 Clarivate Analytics의 Emerging Sources Citation Index(ESCI)에 등재되었고, 2019년부터는 SCIE 등재가 결정되었다. 2022년 발표된 SCIE의 첫 피인용지수(IF)는 3.019였다.이와 같은 약학 관련 학술지의 SCIE 등재는 늘 외국의 국제학술지를 동경해 오던 국내 약학계로서는 꿈만 같은 성취라 하겠다. 다음 번에는 대한약학회의 학술지인 Arch. Pharm. Res.의 SCIE등재에 관한 논문이 투고되기를 기대한다. ‘군진약사 좌담회’는 매우 흥미로우나 이미 약창춘추 376 (2023.8.16)에 소개된 바 있으므로 중복 설명을 생략한다.그 뒤에 일제 시대인 1932년에 발표된 ‘의약분업이 사회에 미칠 영향’이라는 논설(『경성약전 교우회지』, 심창구 번역)과 ‘제5회 아시아팜에 다녀와서: 베트남 전통의약박물관 방문기 (이영남)’가 실려 있고, 이어서 김영식 교수의 ‘헤파린 개발의 역사’, 약학사 관련도서 및 약학사 관련 국내외 논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제약사학회와 우리 약학사분과학회의 소식이 실려 있다.
2024-02-28 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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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88> 아웃리치
심창구 교수. © 약업신문교회에서는 대개 여름마다 시골이나 외국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고 지원하기 위해 아웃리치(outreach)를 떠난다. 벌써 10여년 전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로 아웃 리치를 갔을 때 느낀 일이다. 우리는 의료팀을 대동하고, 안마의자를 사고 소갈비를 재는 등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 준비를 해서 현지에 갔다. 그런데 현지 주민의 호응은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그래서 그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우선 우리나라처럼 의료보험이 매우 잘 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일회성 의료가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안마의자 따위도 마을회관에 더 좋은 물건이 여러 대 설치되어 있어서 주민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웠다. 식생활 수준도 매우 향상되어 있어서 소갈비로는 아이들의 환심도 크게 살 수 없었다. 아이들은 갈비 몇 점을 먹고는 운동장으로 달려 가 공을 찼다. 이제 우리나라는 이런 것들로 주민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의 나라가 아닌 것이다. 몇 년 후 다시 최고의 의료팀을 완비하여 강화도 모처로 아웃리치를 나갔을 때도 상황이 비슷하였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현지 교회 목사님에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할 수 있을까요’ 물어봤다. 즉각 되돌아온 대답은 “연예인이나 데리고 오시죠” 였다.오늘날과 달리 옛날의 교회는 사람들이 호응할만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당시의 아이들은 갈비가 아니라 사탕만 얻어먹어도 좋았고, 어른들은 교회에서 듣고 보는 서양의 신문물이 신기한 것이 좋았다. 당시의 교회는 의료, 교육, 인권 등 다방면에서 선진 문물을 배울 것이 많은 장소였다.어쩌면 제일 중요한 것으로 옛날 교회에는 감동이 있었다. 상놈이 먼저 교회 장로가 되고, 그를 부리던 양반이 그를 섬기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연히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결과 교회는 세상에 대해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오늘날의 교회는 크기는 옛날에 비할 바 없이 커졌지만,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갖는 관심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은 오히려 그 때만 못한 느낌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우선은 교회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신문물이 없어질 정도로 우리나라가 많이 발전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같다.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는 교회를 통해 감동을 받는 일이 적어진 탓도 있을지 모르겠다. 교회가 감동을 주기는커녕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경우도 많아졌다. 게다가 이단(異端) 논란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로 가기를 두렵게 만들었을 것이다.이래저래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지 않게 되고,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게 되었다. 유럽의 교회들이 속속 문을 닫는다는데, 우리의 미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나는 요즘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묵상하고 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할 정도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치셨다. 몸소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통해 이를 가르치셨다. 그 예수님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 아닌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한다면 교회는 사랑의 진원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사랑이 없는 곳에는 미움과 다툼과 정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랑이 없으면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울타리 밖으로 배척한다. 그 결과 울타리 안에 있는 우리(we)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 마침내는 나 혼자 고립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그러나 사랑은 화해와 포용을 통해 우리라는 공동체의 울타리를 점점 더 넓게 만든다. 감히 그 성함을 거론하기도 외람되지만, 고 손양원 목사님은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았다. 그분이 돌보시던 애양원에 나환자들이 모여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새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되자는 것이다. 나는 이 표어가 역사하기를 소망한다. 교회의 사랑이 세상에 퍼져 마침내 온누리가 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이 소망은 참된 기도자들의 간절한 기도가 있는 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웃리치를 묵상하지 말아야겠다.
2024-02-16 0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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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87> 아버지의 이력서
심창구 교수. © 약업신문나는 아버지가 소찬하시기 몇 년 전에 아버지 이력서 1통을 받아 놓았다. 명색이 장남인 내가 아버지께서 젊으셨을 적에 어디서 공부하고 무슨 생각을 하시며 사셨는지 별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이력서는 간단해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중학교 졸업식 사진을 수운회관에서 찍으셨고, 졸업 후에는 삼천포에 가서 건축기사로 근무하셨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시며 사셨는지에 대해서는 차차 여쭤봐야지 하다가 결국 때를 놓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정신이 안 좋아지셨기 때문이었다.이 일을 계기로 세상의 자식들이 부모님의 일생에 대해 얼마나 무심한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대로 사람들에게 부모님의 이력서라도 하나 받아 놓으라고 조언하고 있다. 혹시 효성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가능하면 부모님 자서전을 만들어드리라고 권유해 보기도 한다. 정년퇴임을 앞 둔 아버지를 위해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어떤 아들을 만나서는 그 대견함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기도 했다. 우리 인생은 긴 듯 짧아서, 나도 어느덧 죽음을 베겟 머리에 두고 잠자리에 드는 나이가 되었다. 젊었을 때의 꿈과 기개가 사라져 버린 노인의 바램은 무엇일까? 크리스찬은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산다지만, 나는 이에 더하여 나의 삶이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는다.오늘날 젊은 사람들은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고 산다. 또 자기가 본 적이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가 어쩌다가라도 추모하는 조상의 상한선이 되었다. 본 적도 없는 증조할아버지 이상은 사실상 조상으로 느끼지도 않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아이들에게 그들이 보지도 못한 조상의 생활과 가르침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어쩌다 손주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려다가도 결코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을 것임을 깨닫고 이내 입을 닫는다. 대신 조상의 상한선인 내 이야기라도 제대로 전해 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내가 부모님의 자서전이나 이력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고 홍문화 교수님 때문이었다. 홍 교수님은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만큼 20세기 한 시대를 풍미한 약계 최고의 명사(名士)이셨다. 그런데 그럼 명사를 아는 약학도가 오늘날 아무도 없다. 당대의 영웅호걸도 세월이 흐르면 완전히 잊혀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허망(虛妄)하였다.그래서 홍교수님을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평전을 쓰면서 유족들께 몇 가지 사항을 문의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자손들도 아버지의 젊은 날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실이 많았다. 오히려 그들이 내가 쓴 평전을 보고 아버지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 적지 않다고 했다.‘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를 펴낸 후, 광복 직후의 학장 서리였던 김기우님의 딸들이 감사하다고 연락을 해 왔다. 그동안 아버지의 사진 하나 변변히 없어서 이 책에 실린 아버지 사진을 확대 복사하여 집안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과거에 대한 기록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약학사 연구 과정에서, 경성약전을 졸업한 아버지의 흔적을 문의해 오는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일생을 정성껏 논문으로 작성하여 제출하는 효자, 또 월북한 아버지에 관한 자료를 백방으로 수소문하는 아들도 보았다. 이런 자식들을 둔 고인은 혼이 있다면 필경 고마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생각이 내가 세상의 자식들에게 부모님 이력서를 받아 놓으라 하고 더 나아가서는 부모님 자서전 쓰기를 권장하고 있는 배경인 것이다.아직 나는 틈나는 대로 이런 저런 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언젠가 내 손주들이 철이 들어(?) 혹시 내 글을 읽을 때에, 자기들이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음을 깨닫기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 깨달음이 험한 세상을 사는 그 아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몇 명의 손주들에게라도 작지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만 있다면, 노년의 삶과 말과 글이 마냥 쓸데없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2024-01-26 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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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86> ‘나의 학문 나의 삶’
심창구 교수. © 약업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협의회(명교협)는 최근 학문 후속세대를 위한 ‘나의 학문, 나의 삶’이라는 책을 매년 발간하고 있다. 나는 운 좋게도 2021년에 발간된 제4권에 내 이야기를 쓰는 기회를 얻었다. 모두 6명의 명예교수가 자기 이야기를 쓴 책이다. 내 글의 제목은 ‘한 칸씩 오른 사다리길’이었다. 오늘은 명교협 이장무 이사장이 쓴 발간사에 이어 내가 쓴 ‘책머리에’를 소개하기로 한다.평생을 학문 연구와 인재양성에 진력하여 학문의 지표가 된 서 울대학교 명예교수님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나의 학 문, 나의 삶』 제4권이 발간되는 경사를 맞이했습니다. 책자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귀한 시간을 내셔서 주옥같은 원고를 집필해 주신 김안제, 이승재, 최종고, 추광영, 허승일, 심창구 교수님과 이 발간 사업을 총괄한 본 협의회 사회봉사위원회 이흥식 위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중략)이번에 발간되는 제4권도 지적 자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제4차 산업혁명과 극심한 기후변화, 그리고 코로나19 대유행병 등으로 엄청난 변화의 파고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 변화를 꿰뚫어 보고 도전하며, 미래를 조망하는 혜안이 필요합니다.이 책에는 인문학, 언론정보학, 역사교육학, 법학, 제약학과 환경계획학 분야에서 최정상의 위치에 오른 학자들이 어떠한 계기로 학문의 길을 택하고, 학문의 어려움을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학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그 고뇌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사의 기본 원칙을 다루는 학문에 일평생 정진한 석학들의 이야기에서 변화의 시대에 대응하는 혜안을 얻기 바랍니다.이 책의 내용은 개인 석학들이 전공 분야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담은 생생한 증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분들의 학문 과 삶은 “국가의 동량을 양성한다.”라는 목표로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과 6· 25 전쟁으로 거의 폐허가 된 우리나라를 세계적 수 준의 문화 선진국으로,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일으켜 세운 서울 대학교의 자랑스러운 역사의 부분들입니다. (중략) 명예교수님들의 학문과 삶에는 많은 ‘과거’가 녹아 있습니다. 지금 그 과거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이유는, 이 과거가 학문 후속 세대의 앞으로의 삶과 학문에 선한 영향을 끼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이하는 내가 책에 쓴 머리말이다.물고기에는 뒷부분에 꼬리와 지느러미가 있습니다. 이들의 움직임을 통해 물고기가 헤엄쳐 나갈 방향과 추진력이 생깁니다. 하늘을 나는 연에 붙어 있는 꼬리도 연이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늘 위로 잘 올라가도록 중심을 잡아줍니다. 이 책에 실린 명예교수님들의 학문과 삶에 관한 고백이, 마치 물고기의 꼬리처럼, 또 연의 꼬리처럼, 사랑하는 학문후속세대가 삶과 학문의 방향을 정립할 때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우리가 과거를 반추(反芻)하는 까닭은 과거는 현재를 거쳐 미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학문 후속 세대 여러분은 선배들의 학문과 삶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을 얻기 바랍니다. 명예교수님들이 애써 글을 써 주신 소망이 거기에 있습니다.선배 세대의 인생을 읽을 때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놓고 읽어야 내용이 선명해집니다. 이 책의 필자인 명예 교수님들은 모두 우리나라 전후(戰後)의 혼란기를 살아 내셨습니다. 지금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당시에는 엄청난 고뇌 또는 보람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그러나 선배 세대의 학문과 삶이 언제까지나 후속세대의 시각(視角)을 결정해서도 안됩니다. 올챙이 때의 꼬리를 떼어내야 개구리가 도약(跳躍)할 수 있는 것처럼, 새 세대는 시대에 합당한 진취적인 기상(氣像)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선배님들의 행적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하시기 바랍니다.아무쪼록 이 책이 학문 후속세대의 학문과 삶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여러분의 학문과 삶을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이 책은 명교협을 통해 구독할 수 있다.
2024-01-17 1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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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85> 약학사(藥學史) 연구 그리고 사다리 인생
심창구 교수. © 약업신문교수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우연한 기회에 한국약학사 연구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운 좋게 2015년 서울대 약대의 ‘가산약학역사관’ 개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현재 명예관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갖고 있다.그 후 『한국 약학의 아버지 녹암 한구동』(2016), 『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2016) 중 약학대학의 전사(前史), 『한국약학사』 (2017), 『서울대학교약학대학100년사』(2017),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2020) 등을 편저술하였으며, 대한약학회 내에 ‘약학사분과학회’를 창립(2014)하여 ‘근대약학교육기관 설립 100주년 기념심포지엄(2015)’을 비롯하여 매년 2회의 약학사 심포지엄(현재까지 총 19회)을 개최하였고, 2018년 이래 연 1회 『약학사회지』를 발간해 오고 있다.약학역사관의 개관 빛 서울대약대100년사의 저술은 당시 이봉진 학장의 획기적인 결단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학장은 약학역사관 개관을 위하여 전담 직원을 채용해 주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근대약학 교육사를 처음으로 정리할 수 있었음에 큰 보람을 느낀다.2007년부터는 약업신문에 격주로 ‘약창춘추’라는 칼럼을 쓰고 있다. 현재 384회를 넘었는데, 그간의 글을 두 권의 수필집으로 묶어냈다. 나머지 글도 조만간 3, 4권으로 묶어내야 할 것 같다. 2012년에는 『새로운 약은 어떻게 창조되나』라는, 일본 교토 대학 교수들이 쓴 약학 입문서를 번역하였는데 2023년 현재 놀랍게도13쇄를 찍었다. 13쇄 인쇄는 전공서적으로는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왜 이 책이 이리 잘 팔리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할 때가 많다.2013년 정년 후 약 5년간은 대웅제약에서 고문 겸 사외이사로 근무하였다. 거기서도 학술서적 발간 시 교정 및 편집을 도왔다. 2020년부터는 2년간 서울대 약대 25대 동창회장을 맡아 동창회보 98호 및 99호의 기획 및 편집을 주도하였다. 26대 원희목 동창회장의 부탁으로 제100호 및 101호 동창회보의 편집도 돕고 있다. 나는 동창회보를 통해서도 되도록 선배님들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약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노력하였다.몇년간은 서울 대학교 ‘명예교수회보’의 발간을 돕기도 했다. 이제 와 돌아보니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이 그나마 내가 제일 잘 하고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며 지낼 수 있는 지금의 내 상황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솔직히 별로 명민(明敏)하지 못하고, 왜소(矮小)하며 병약(病弱)한 내가, 요만큼이나마 바시락거리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나 고비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길로 나를 인도하셨다. 예컨대 일류중학교인 인천중학교 입시에 떨어지게 하신 것은 특별한 배려이셨다. 만약에 내가 인천중학교에 합격하였다면, 나는 재학 중 낙제 선상에서 헤매는 낙오자(落伍者)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여파로 인생에서 낙오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인천중학교에 낙방(落榜)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동산중학교를 거쳐 제물포고등학교 입시에 도전, 입학하게 하신 것은, 우선 사다리 한 칸을 올라간 다음, 그곳을 발판삼아 다시 다음 칸에 도전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배려였다. 사다리 한 칸을 오르고 나면 그 위에 또 한 칸이 있음을 깨닫는다. 사다리의 위 칸은 언제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나의 인생길은 이처럼 딱 한 칸 위의 새로운 비전을 보고 한 칸씩 오른 사다리 길이었다.‘한 칸씩 오르기’는 천재(天才)나 수재(秀才)가 택하기에는 답답한 방법이다. 그들은 한 번에 몇 칸씩도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한 칸씩 올라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의 ‘한 칸씩 오르기’ 방법론이 천재나 수재가 아닌 후배들에게 혹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
2023-12-27 0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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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84> 손녀의 근검절약
우리 아버지의 근검 절약 (약춘 280)은 이미 설명한 바 있는 대로 그 수준이 올림픽 금메달 감이셨다. 일단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그 돈이 땀에 절을 때까지 결코 손을 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셨다. 또 아무개는 가방을 3대째 쓰고 있다는데 너희들은 벌써 또 가방을 사 달래냐고 나무라시기도 하였다.중학교 때 교모(校帽)를 새로 사달라고 말씀드리자 ‘머리 위에 얹어 놓고 다니는 모자가 왜 해지느냐?’고 야단 치셨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에 대해 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근검절약을 하셨고, 또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을 도와주시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아버지 덕분에 자식들도 어느 정도 근검절약이 몸에 배긴 하였지만 도저히 아버지를 따라 갈 수는 없었다. 내 아들이자 아버지의 두 손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증손주, 그러니까 나의 4손주 중 한 명이 아버지의 마음에 꼭 들만큼 근검절약 정신을 타고 났다.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다면 엄청 기뻐하셨을 것이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큰 아들의 세 딸 중 둘째 아이인 예원이가 오늘의 주인공인데, 2년전인가 아들네에 들렀더니 초등확교 5학년인 예원이가 동네 수퍼 마켓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따라 가 보았더니, 그동안 모아 놓은 쿠폰으로 가위를 받아오는 것이 아닌가?며느리한테 물어봤더니 예원이의 알뜰생활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원 플러스 원이 아니면 물건을 사지 않고, 쇠고기를 산 후 돼지 고기를 사려고 하면 ‘고기 종류는 한가지만 사면되지, 뭐하러 두 가지나 사냐’고 엄마를 질책(?)하더란다. 그래서 아들은 며느리가 시장에 갈 때 예원이가 따라붙으면 안심이 된단다. 그 애가 엄마의 과소비(?)를 적절히 견제해 주기 때문이다.한번은 아내가, 즉 예원이의 할머니가 호랑이 콩을 살 때 깐 콩을 사 왔다가 예원이한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이유는 깐 콩은 안 깐 콩보다 훨씬 비싼데, 안 깐 콩을 사와서 집에서 까면 될 걸 뭐하러 비싼 돈을 주고 깐 콩을 사냐고 했단다. 그 후로 우리집은 호랑이 콩을 살 때마다 예원이한테 혼날까 봐 안 깐 콩만을 사고 있다. 안 깐 콩을 두 자루 사오면 주로 내가 그걸 깐다. 물론 예원이가 함께 있을 때는 예원이도 도와준다.맛있는 음식을 사주러 음식점에 데리고 가면 예원이는 할아버지가 놀랄까 봐 계산이 얼마가 나오는지 미리 귀뜸해 준다. 최근에 세 손녀에게 스테이크를 사 주려고 VIPS라는 양식당에 데리고 갔더니, 주문하기 전에 자기들끼리 뭔가 숙덕거렸다. 무슨 일일까 잠시 기다렸더니 ‘스테이크가 너무 비싸서 셋이서 한 개만 먹고 두 개는 싼 메뉴로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돈을 절약하려고 머리를 맞댄 손녀들이 기특해서 감동을 받았다. 문득 10여년전 내가 정년 퇴직을 앞두고 직원들에게 점심 한끼를 대접한 일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왕 얻어먹는 거 비싼 걸로 먹어야지’ 하면서 일식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간 나는 기분이 영 언짢았다. 그들의 얌체 근성을 본 것 같아서였다. 그 때 나는 ‘다시는 이런 호의를 베풀지 말아야겠다’ 고 결심(?)하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 손녀들의 마음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할아버지가 과용하지 않도록 배려를 해 주다니! 아무래도 우리 손녀들, 특히 예원이는 증조할아버지의 근검절약 유전자를 그대로 받은 것 같다.자랑을 조금 더 하자면 예원이는 식성도 남 다르다. 설렁탕을 사주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은 후 빈 그릇을 머리 위에서 뒤집어 보여준다. 또 아이답지 않게 장어구이를 좋아하고, 게장이라면 양념과 간장을 가리지 않는다. 제 부모를 따라 미국에 1년간 가 있을 때, 햄버거를 계속 사주니까 “엄마, 이건 음식이 아니잖아” 하며 울먹거렸단다. 어쩌면 식성도 내 맘에 꼭 드는지 모르겠다.
2023-12-15 0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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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83> COVID-19 팬데믹과 범약계의 대응
지난 11월 10일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는 위 제목으로 개최한 심포지엄의 내용을 소개한다.1. 식약처: 식약처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실시하였는데, 특히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치료제·백신, 진단기기 등 의료제품의 신속한 허가·심사와 더불어 안정적인 유통 및 공급, 국산 제품 개발 지원 활동에 총력을 다하였다.먼저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의 신속한 허가·심사를 위한 전담팀을 조직하여 베클루리주 등 치료제 3건, 코미나티주 등 백신 13건, 126건의 진단시약을 신속하게 허가하였고, 위기 상황에 필요한 의료제품을 품목 허가 이전에 긴급하게 도입 공급하는 ‘긴급사용승인’ 제도를 운영하여 팍스로비드 등 5건의 치료제와 코미나티 등 1건의 백신, 16건의 진단시약을 심사하였다.또 코로나 치료제 백신의 개발을 지원하여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 3번째로 자국의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 진단시약을 동시에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공중보건 위기대응 의료제품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치료제, 백신, 마스크, 진단시약 등의 신속한 허가·심사, 긴급한 사용과 안정적 공급을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식약처 사전상담과 정지원 과장)2. 대한약사회: 약국, 약사의 역할은 기존의 약물 치료관리 중심에서 지역사회 팬데믹 확산 방지와 예방, 치료 지속 보장, 제한된 의약품 및 방역물품에 대한 분배와 수급 관리 지원으로 확장되었다.초기인 2020년에는 약국을 중심으로 공적 마스크의 수급 안정화를 주도했고, 전국 12개 권역별 생활치료센터와 분회조직을 연계하여 의약품 조제 서비스를 지원했다. 정부 예방접종 대응 지침에 약사 인력을 백신관리 담당자로 포함하도록 명시했다.경구용 치료제가 공급된 2022년에는 자가검사키트 소분 판매, 경구용 치료제 조제 및 유통 관리를 지원했다. 또 감염병 유행 정도에 따라 약국이 자율적으로 비상 체계로 전환 관리할 수 있도록 ‘지역약국 약사 및 종사자 감염 대비 약국업무 연속성 계획(BCP)’을 정부 지침으로 채택되게 했다. 전국 약국에 비접촉식 체온측정기를 보급, 설치했고, 공공심야약국 운영 시범사업 예산을 확보하여 취약시간대 국민의 의약품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했다. (전 대한약사회 김대진 상근 이사)3. 병원약사회: 정부는 2021년 1월 28일 중앙 예방접종센터와 권역 예방접종센터를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병원약사를 배치할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그러자 예방접종센터를 담당하는 의료기관이 자체적으로 약사를 배치하였다. 2021년 2월 26일 최초로 의료기관에 백신이 입고되고, 특히 2020년 유통 중 독감 백신이 상온에 노출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병원약사들은 백신의 안전한 보관 및 관리를 위해 권역 예방접종센터에 UPS(Uninterrupted Power Supply) 설비를 갖추고 초저온 냉동고와 냉장고 및 냉장 소분실을 마련하여 지역 예방접종센터로 전달할 백신을 소분하였다. 지역 예방접종센터에서 직접 백신을 조제하기도 했다.이번 사태를 통하여 병원약사가 새로운 감염병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대체 불가능한 필수존재임이 입증되었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 황은정 약제부장) 4. 제약바이오협회: 정부는 ‘20년~’22년 3년간 치료제 및 백신 개발에 총 4,281억원의 예산을 편성하고 1798억원을 집행하였다. 그 결과 치료제 5개사 7개 과제, 백신 9개사 12개 과제의 임상 비임상 시험이 지원되었고, 1개의 국산 치료제와 1개의 국산 백신이 개발되었다. 코로나 초기에는 긴급사용승인 절차를 거쳐 아스트라제네카와 얀센 백신이, 이후에는 화이자와 모더나 mRNA 백신 등 백신 4종이, 그리고 팍스로비드, 이부실드 등 치료제 5종이 수입되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엄승인 정책총괄본부장)결론: 이번 심포지엄을 계기로 COVID-19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한 범약계의 노력이 매우 잘 정리되었다. 앞으로 다시 올지 모르는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서 이번의 경험을 좀 더 충실하게 정리한 백서의 발간이 필요해 보인다.
2023-11-22 0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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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82> 믿음의 성장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 믿음을 갖기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 내 경우에는 그랬다. 나의 죄성(罪性) 때문일 것이다.내가 원주에서 군대 졸병(卒兵)으로 근무하던 1972년, 주일마다 사령부에 있는 군부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가면서 길거리에서 호빵도 사 먹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졸병에게는 괴롭기만 한 내무반 생활을 잠시나나 피할 수 있었다. 그때가 교회 생활의 시작이었다.군 교회에 나간 첫날 우리 부대 고참병이 하는 대표기도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 졸병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나아가 세계 정세 전반에 대한 기도를 하였다. 나는 속으로 “졸병 주제에 오지랖이 너무 넓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그 고참병의 평소의 언행을 잘 아는 나로서는 그의 미사여구(美辭麗句) 기도가 별로 ‘은혜롭게 들리지 않았다.나는 내 믿음이 약해서 기도가 은혜롭게 들리지 않나 보다 생각했다. 그 때부터 나는 교회에 가면 “저도 하나님을 잘 믿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요. 하나님, 제 믿음이 굳건해 주도록 역사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렸다.그 후 34개월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제약회사에 취직했다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서울대 교수가 된 지 11년 후인 1994년, 직장암 3.5기로 대수술을 받은 후 병상에 누워있는데, 문득 군대 시절에 내가 드린 그 기도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내가 처한 지금의 상황이 “제 믿음을 굳건하게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드린 그 기도의 응답인가 싶어 순간 모골(毛骨)이 송연(松煙)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기도가 그냥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는 말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그 때부터 “하나님, 송구하지만 제 믿음은 제가 어떻게 해 볼 테니까 이런 시련을 통해 굳건하게 만들어 주지는 마십시오”라고 기도를 바꾸어 드리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비록 한 웅큼도 되지 않는 믿음이지만 그래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 상태에서 이 고난을 맞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믿지 않는 상황에서였다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몇 년 간에 걸친 방사선 조사와 항암제 주사 등의 투병을 하는 동안 암이 재발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좀 덜 하며 지낼 수 있었다. 특히 불안해서 잠을 못 자는 일이 전혀 없었다.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때 왜 내가 다른 환자들보다 덜 불안해했고 잠을 잘 잤으며, 위문하러 온 사람들을 만나면 앞장서 우스운 소리를 할 수 있었는지 되돌아본다. 그때마다의 결론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믿음이 생기면 과거가 해석된다”고 하신 고 하용조 목사님 말씀이 생각난다.2004년에는 교회가 장로 직분을 주셨다. 무자격자에게 넘치는 직분이었다. 그 덕분에 겉으로나마 교회를 통한 믿음 생활을 충실하게 하게 되었다. 장로 직분은 믿음이 부실한 나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로라고 저절로 믿음이 굳어지지는 않았다. 때때로 무엇을 어떻게 믿는 것이 믿음의 본질일까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많았다.그 때 마침 “성격의 맥을 잡아라” 라는 시리즈 강의를 두 번 들을 수 있었다. 강사는 ‘수많은 별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일정한 궤도를 규칙적으로 돌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별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요즘 방송을 보니 우주의 확장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끝을 영원히 볼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조막만한 나의 도량(度量)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절대자 즉 하나님의 역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사람이 어찌 그 크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믿음을 위한 마지막 카드’로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할렐루야!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믿음이 선명해지는 것 같아 기쁘다.
2023-11-13 1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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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81>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 80년사 발간
지난 2023년 10월 13일, ‘서울대학교 천연물과학연구소 80년사(이하 천과연 80년사)’ 발간 기념회가 서울대 약대 20동에서 열렸다. 서울대 약학역사관이 발행한 이 책에는 서울대 약대 이상국 학장의 발간사, 천과연 오동찬 소장의 서론에 이어 국립중앙박물관 박주영 학예사(전 서울대 약학역사관 학예사) 등이 쓴 1. 천과연의 현황, 2. 생약연구소 및 3. 천과연 시절의 역사가 나온다. 그 뒤에 도판목록, 역대 소장 및 전현직 교수명단, 연구실 소개, 역대 연구성과 목록 등이 실려 있다. 총 388쪽의 이 책의 가격은 2만원이다. 천과연의 역사는 1939년 12월 27일 출범한 경성제국대학(경성제대)의 부속 생약연구소(이하 생약연구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연구소의 모태(母胎)는 다시 1936년 경기도 개성에 개소(開所)된 경기도립 약용식물연구소와 1938년 개소된 경성제국대학 약초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내에 설립된 연구소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생약연구소에서 많은 일본인과 한국인(조선인)들이 인삼을 비롯한 한약재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생약연구소의 초대 소장은 경성제대 의학부 약리학 제2강좌의 스기하라 노리유키(杉原德行) 교수였다. 그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영국, 미국 등에 유학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26년 경성제대 의학부 교수로 임명된 사람이다.광복 이후에는 오진섭(경성제대 의학부)을 비롯한 우린근(경성약전), 한구동(조선약학교) 등이 바톤을 이어가며 연구소를 정상화시켰다. 생약연구소의 이름은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 생약연구소’로, 1992년 3월에는 ‘서울대학교 천연물과학연구소’로 바뀌었다.2001년 9월 서울대학교의 학제 개편에 따라 천과연의 주관기관이 약학대학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천과연 교수들의 소속기관도 2001년 11 월 1일부로 약학대학 제약학과로 변경되었다.최근 국내에서 약학의 역사와 관련된 책자들이 잇달아 발간되고 있어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혹시 이런 흐름에 서울대 약학역사관과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의 그간의 노력이 일조(一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에 이상국 서울대 약대 학장의 발간사를 다소 가감하여 소개한다. ‘천과연 80년사’를 발간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1939년 12월 27일 개성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를 모태로 출발한 천과연은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천연물/생약 연구의 가장 오래되고 최고 수준의 연구소로서 설립 초기부터 생약을 비롯한 천연물로부터 생리활성 물질의 탐색 및 천연물 신약개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초기 태동기와 광복 및 한국전쟁 등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연구소를 지키고자 노력한 선배 교수님들의 크나큰 헌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천과연은 생약연구소(1946~1991)에서 천연물과학연구소(1992~현재)로 그 이름을 바꾸면서 연구소재를 확장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천과연은 우리나라 약학분야에서 초기의 연구를 선도한 기관입니다. 천과연은 약학 도입 초기에 접하기 힘들었던 최첨단 분석기기를 도입하여 많은 연구자에게 제공하였습니다.또한 WHO 생약피임제 개발연구 중점연구소, UNESCO 동남아지역 천연물화학 연구센터, WHO 전통약물연구협력 기관 등으로 지정 받음으로써 국제적인 지명도를 높여 왔습니다. 한편 신동의약(新東醫藥)개발 주관연구 기관, 천연물신약 연구개발 전문기관으로 지정 받는 등 주요 대형 국가 연구과제를 수행함으로써 국내 최고의 천연물연구 중심기관의 위상을 굳건히 하였습니다.또한 우리 천과연이 보존하고 있는 한약 표본(일명 이시도야 石戶谷勉 콜렉션 포함하여 1만 5,000여 종)은 1930년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수집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 유통되고 있는 한약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표본입니다.천과연은 서울대학교 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향하는 목표가 뚜렷한 연구소로 앞으로도 천연물 관련 연구 및 교육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 나갈 것입니다.
2023-10-26 2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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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80> ‘사람을 두려워하는 나라, 일본’의 마무리
나는 1979년부터 1982년까지 3년반 동안의 동경대학 유학과 그 후 40년간의 교류를 통하여, 일본 문화는 일본 사람들이 사람(人 = 남)을 두려워하는 바탕 위에 형성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아마 사무라이의 칼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약창춘추’를 통하여 약 15편의 글로 이런 주장을 펴 왔는데, 오늘은 그 내용을 요약해 보고자 한다. 아마추어의 서투른 일본론이라 일부 견강부회(牽强附會)나 침소봉대(針小棒大), 또는 지나친 단순화도 있을 것이지만, 내가 본 일본 사람, 또는 일본문화의 특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1. 사람이 친절하고 말이 곱다 일본어에는 욕이 없다. 서로 만나면 저번에 신세진 것에 대한 감사부터 표한다. 은혜를 모르는 나쁜 사람으로 오해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2. 능동태 대신 수동태나 특수 사역동사 등을 써서 복잡하게 말한다 ‘생각합니다’ 대신 ‘생각됩니다’, ‘찾아뵙겠습니다’ 대신 ‘찾아뵙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다. 여름 휴가 가는 주인이 자기 식당 문에 ‘3일간 쉬게 해 주십시오’라고 쓴 안내문을 붙인다. 내가 주어가 되는 능동적 표현을 하기에는 사람들, 즉 남들이 두렵기 때문이다.3. 식당에서 도시락을 시켜먹고, 쟁반에 담아 내온 음식을 그대로 놓고 먹는다 상대방 음식과 내 음식이 확실히 구분되어야 상대방에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찌개처럼 같이 먹는 음식을 싫어한다. 사무라이가 먹는 찌개에 숟가락을 넣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젓가락도 끝이 상대방을 향하지 않게 옆으로 놓아야 한다. 무가가 될 우려가 있어 쇠젓가락을 쓰지 못하고 나무 젓가락만 쓴다.4. 매우 보수적인 나라가 되었다급격한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다. 가게의 이전이나 확장도 잘 안 한다. 남들을 자극하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화폐에 나오는 인물을 정하는데도 몇 년씩 눈치를 본다. 5. 민주주의가 발달하였다칼이 두렵기 때문에 상대방이 왜소하고 힘이 없어도 존중하고 배려할 수밖에 없었다. 오야붕도 꼬붕을 깔고 앉지 않고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 품는다. 장기판의 졸(卒)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잡히는 순간 상대방의 졸이 되어 나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6. No라고 말하지 못한다 일본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대놓고 거절하기 두려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외교 시 상반되는 2개의 주장을 애드벌룬처럼 띄워 놓고 대세가 기우는 쪽을 선택한다. 미국과 소련 간에 전쟁이 나면 언제 어느 쪽으로 어느 정도 가담하는 것이 일본 국익에 가장 좋을까를 판단하는 것이 일본 수상에게 요구되는 첫번째 덕목이라고 하였다.7. 매뉴얼 공화국이 되었다수시로 범사에 대한 매뉴얼을 업데이트하고, 철저하게 그 매뉴얼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매뉴얼대로 했다면 면책(免責) 된다. 융통성은 금물이다.8. 미리미리 준비한다행사 전에 준비 다 해 놓고 예행연습까지 해 봐야 한다. 실패 시 책임 추궁이 무섭기 때문이다. 2002 한일월드컵 때 한일간의 사전 준비가 현격하게 차이났다.9. 긴장과 질서의 나라가 되었다 명함, 제복, 다도(茶道), 선물 등 범사에 엄격한 질서가 있다. 국익을 위해 입을 다물라 하면 모두 입을 다무는 전체주의적 긴장이 보인다.10. 여러 신(神)을 믿는다.사람에 의지하기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사나 절에 가서 기도할 때, 종을 쳐서 신을 깨워 놓고 기도할 정도로 신도 제대로 믿지 않는다. 일본은 우리와 같이 극동(極東)에 위치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문화 근본이 우리와 매우 다르다. 즉 일본은 사람을 두려워하나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한일 문화의 차이를 낳은 것은 아닐까? 한 나라의 문화를 다른 나라의 잣대로 함부로 우수하거나 열등하다고 평가해선 안된다. 문화는 각 나라마다의 환경과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유익하고 현명한 일이다.
2023-10-19 0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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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79> 노년을 사는 지혜
오늘은 그 동안 단편적으로 언급해 해 온 ‘노년을 사는 지혜’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마침 이 주제로 교회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 것이 계기가 되었다. 결론은 ‘노인이 빠지기 쉬운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지혜라는 것인데, 그 위험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1. 자기 중심 사고의 위험성 사자와 소가 결혼해서, 소는 사자에게 가장 부드러운 풀을, 사자는 소에게 가장 맛있는 토끼 고기를 갖다 바쳤지만, 서로 이것들을 먹지 않았다. 각자 최선을 다해 상대방을 섬겼지만 이런 반응에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약춘 177). 내 생각에 최선이 상대방에게는 최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2. 선입견의 위험성 스포츠카로 시골길을 달리던 사람이 자기 차를 추월하는 닭을 발견하고, 닭주인에게 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그 닭을 팔라고 했다. 그러나 닭 주인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팔 수 없다고 했다. 차 주인은 닭 주인이 지나친 욕심쟁이라고 생각하며 ‘왜 못 파냐’고 따졌다. 닭 주인은, ‘너무 빨라 잡을 수가 있어야 팔지요’ 했단다 (약춘 359). 다 사정이 있는 것이다. 선입견으로 정죄하지 마라.3. 확신의 위험성산아제한이 진리이던 시절이 있었다. 확신에 찬 주장은 때로는 교만이다. 확신과 주장에 앞서 겸손할 일이다 (약춘 201).4. 솔직함의 위험성결혼해서 60년을 해로(偕老)하는 비결을 묻는 젊은이에게 영감님이 대답했다. 둘이 멕시코로 신혼 여행을 떠났었지. 각자 당나귀를 타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아내를 태운 당나귀가 우습게 봤는지 아내를 떨어뜨리는 거야. 떨어진 아내는 그냥 ‘하나’한 다음 다시 당나귀를 타더군. 그런데 당나귀가 다시 아내를 떨어뜨리는 거야. 이번에도 아내는 그냥 ‘둘’하고는 다시 당나귀를 탔어. 그런데 이놈이 세번째로 아내를 떨어뜨리는 거야. 그러자 아내는 조용히 가방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그 당나귀를 쏴 죽이는 거야. 그래서 내가 놀라서 여보, 그렇다고 쏴 죽이는 건 너무 한 것 아니오? 했지. 그랬더니 아내는 나를 보고 조용히 ‘하나’ 하는 게 아닌가? 그 때부터 나는 아내가 하는 일에 내 의견을 말하지 않게 되었지. 그게 비결이지 뭐 (약춘 61). 부부간에 솔직할 필요가 없다. “여보,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하겠어요? 라고 묻는 아내의 질문에 솔직하게 말하면 끝장이다 (약춘 269).한 영감님이 자신의 차에 아내를 태우고 신호등을 건너다 저쪽에서 오는 차와 충돌 사고를 낼 뻔했다. 상대방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이 바보 쪼다야, 운전 좀 제대로 해” 외쳤다. 이 말을 들은 아내가 “당신 잘 아는 사람이예요? 어쩜 그렇게 당신을 정확하게 알지?” 라고 솔직하게 물었다. 영감님은 속으로 울었단다 (약춘 213).5. 신속한 반응의 위험성 한 아주머니가 약국에 아이를 업고 들어왔다. 아이의 머리를 짚어 본 약사는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하셨어요?” 질책했다. 아주머니는 의아한 얼굴로 “아픈 애는 집에 있는데요” 했다 (약춘 275). 성급하게 입을 연 약사는 그만 머쓱해졌다. 나이 먹어 눈과 귀가 어두워지는 것은 이제 좀 덜 보고 덜 들으라는 의미란다. 장모님 말씀이다. 노인의 입도 좀 느려지면 어떨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입으로 실황 중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6. 비교양(非敎養)의 위험성하나님의 섭리는 내리사랑이다. 자식과 손주는 예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살기도 바쁘다. 치사랑은 없다. 그래서 노인은 혼자 노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그 기술을 교양이라고 한다 (약춘 123).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그 교양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으면 좋겠다 (약춘 281).7. ‘우리’를 좁히는 위험성남을 왕따 시키면 결국 나도 왕따를 당하게 된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우리’ 밖으로 밀어내다 보면 어느 날 나만 좁아진 ‘우리’ 속에 고립된다. 사람은, 특히 노인은 사랑의 언행으로 남을 포용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넓어진 ‘우리’ 안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노년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
2023-10-11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