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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8> 약제학의 변신 (2) – 약물송달학에서 분자약제학까지
환자가 어떤 약물의 제제(製劑)를 먹으면, 위장관 내에서 약물이 제제로부터 방출 (放出, release)된 후 흡수, 분포, 대사, 배설(ADME)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약효가 나타났다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 과정이 적지 않은 인자들에 의해 영향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예컨대 정제(錠劑, tablets)로부터 약물이 방출되어 나오는 속도는 정제를 제조하기 위해 첨가한 첨가제의 종류와 구성 비율, 그리고 제조 조건 등에 따라 달라진다. 또 방출된 약물이 인체에서 흡수된 후 대사 과정을 이겨내고 약효의 발현 부위인 병소(病巢)에 까지 도달(분포)하는 과정에는 약물 분자의 크기, 하전(荷電) 및 지용성(脂溶性) 같은 약물 측의 성질뿐만 아니라, 위장관 운동, 약물의 각종 세포막 투과 속도, 혈류, 혈장 단백과 약물 간의 결합, 소장 및 간에 존재하는 효소 들에 의한 약물의 대사, 약물의 조직결합, 타겟 부위 세포 표면 수용체(受容體, receptor)와 약물 간의 결합 같은 생체 측 인자들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약물의 체외 배설과정도 마찬가지이다. 한번 소장에서 약물이 흡수되는 과정을 살펴 보자. 소장 상피세포에는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물질 등을 적극적으로 흡인하는 막수송체(단백질)뿐만 아니라, 몸에 해로운 물질은 흡수되지 않도록 세포 밖으로 퍼내는 배출 펌프(단백질)도 다양하게 발현되어 있다. 이 단백질들은 입을 통해 위장관에 도달한 각종 영양물질이나 약물 분자를 선택적으로 인식하여 필요한 물질이면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불필요한 물질이면 적극적으로 흡수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약물의 대사와 분포, 그리고 배설도 약물을 분자 수준(분자량, 하전, 구조 등의 특성)에서 선택적으로 인식하는 각종 단백질의 작용에 의해 콘트롤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약물의 ADME를 분자적 수준에서 이해하지 않고서는 약제학의 목표인 ‘바람직한 약물 송달’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21세기가 되면서 약제학의 영역에 분자적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게 되었다. 이는 때마침 발달한 분자생물학(分子生物學, molecular biology)에 힘입은 바 크다. 약제학에 분자적 또는 분자생물학적 개념을 도입한 학문을 ‘분자약제학(分子藥劑學)’이라고 부른다. 이제 약제학은 생물약제학 또는 약물동태학이라는 옷에 이어 분자약제학이라는 최신 유행의 새 옷을 입게 되었다. 최근 발간된 ‘Molecular Pharmaceutics’라는 국제 잡지의 impact factor 값은 2009년도에 5.4로 매우 높은 편이었다. 이는 오늘날 분자약제학이 얼마나 유행인가를 한마디로 보여 준다. 이미 일본 약대의 ‘약제학 교실’은 대부분 시류(時流)를 좇아 ‘약제학’이라는 전통적인 이름을 버리고 ‘분자약제학 교실’ 과 같은 세련된 (?) 이름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하였다. 머지 않아 ‘약제학’은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일제(日帝)의 잔재(殘在)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 현재 약대에서 약제학을 전공하고 있는 교수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학부나 대학원 시절에 배우지 않은 내용을 연구하거나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나만해도 현재 막수송(膜輸送)을 주요 연구 과제로 삼고 있지만, 이는 나의 학부 시절은 물론 80년대 초 동경대학에 유학할 때에도 배워보지 못했던 개념이다. 그래서 약제학자들은 유난히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이처럼 과학의 발전을 끊임없이 담아내고 변신을 거듭한 덕분에 오늘날까지 약제학이 약학 내에 확실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몇몇 약대 교과목들이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변신을 거부한 결과, 오늘날 많은 학생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다. 그렇다. 약제학을 살린 것은 변화이었다. 조제학에서 시작된 약제학은 이제 ‘분자약제학’으로 진화, 변화하여 꽃 피고 있는 것이다.
2011-05-25 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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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7> 약제학의 변신 (1) – 조제학에서 약물송달학까지
잠시 일본에 대한 글의 연재를 뒤로 미루고, 약제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왜 다른 분야와 달리 다양한 학문명으로 분화 또는 진화해 오게 되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 것인가? 등에 대한 글을 써 보고자 한다. 약제학이란 이름 안에는 조제학 (調劑學), 제제학 (製劑學), 제제공학 (製劑工學), 생물약제학 (生物藥劑學), 약물동태학 (藥物動態學), 물리약학 (物理藥學), 약물송달학 (藥物送達學) 및 분자약제학 (分子藥劑學) 같은 다양한 이름의 학문 들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도대체 약제학이란 학문 영역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우선 일반인은 약제학이라고 하면 약에 쓰이는 재료에 관한 학문, 즉 약재학 (약材학)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약제학이라고 할 때의 劑자는 약제학 또는 조제학 (調劑學)이라고 할 때 이외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한자이기 때문에 이처럼 오해하기 딱 좋은 글자인 것이다. 영어에서 약제학에 해당하는 ‘pharmaceutics’도 미국의 일반인에게 뉴앙스가 퍼뜩 오지 않는 어려운 단어라고 한다. 옛날에는 약물의 양이 약효를 결정짓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확한 양의 약을 조제하는 기술인 조제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약을 혼합할 때의 배합 변화 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이에 의해 약의 양이 줄어들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일정한 양의 약을 복용하기 위해서는 정제, 캡슐제 같은 제제(製劑, preparations)를 만드는 것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결과 제제학 (製劑學)이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제약 산업의 초기에는 약의 함량을 속이지 않기와 기술적으로 정확한 함량의 제제를 만들기가 좋은 제약회사의 상징이었다. 1970년대 어느 회사의 광고는 ‘함량이 약효를 보증합니다’라는 카피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예컨대 정제를 찍을 때의 압축 압력이나 현탁제를 만들 때의 교반 조건 등에 따라서도 약효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로부터 제제공학 (製劑工學)이라는 학문이 탄생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함량이 같더라도 부형제가 달라지면 약효가 달라지거나 또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페니토인 정제 제조 시 어떤 부형제를 다른 부형제로 변경하였을 뿐인데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한 사건으로부터, 부형제에 따라 정제로부터 약물의 방출 (放出, release)이 달라질 수 있고, 이에 따라 약의 위장관 흡수가 달라지며, 뒤이어 약효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약물의 혈중 또는 특정 부위 중 농도 추이는 약물의 흡수, 분포, 대사 및 배설 (ADME) 과정에 의해 결정 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 ADME기전을 연구하는 생물약제학 (生物藥劑學, biopharmaceutics)이라는 학문이 탄생하게 되었다. 약물의 혈중 또는 특정 부위 중 농도 추이에 따라 달라지는 약효를 어떤 모델에 대입하여 수학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욕심에서 약물동태학 (藥物動態學, pharmacokinetics)이라는 학문이 탄생 되었다. 생물약제학과 약물동태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마침 발달하기 시작한 HPLC기술에 의해 매우 낮은 약물의 혈중 농도를 경시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약물의 분자특성 및 제제특성을 이용하여 약물의 생체 내 ADME를 적절하게 제어 (制御, control)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물리약학 (物理藥學, physical pharmacy, 또는 물리약제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게 되었고 이런 모든 인자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인식에서 약물송달학이 탄생하게 되었다.이렇게 보면 약제학 영역의 모든 학문은 한결같이 ‘바람직한 약물 송달 (ideal drug delivery)’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시대의 지식 수준 또는 과학 수준에 따라, 이상적인 약물 송달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접근법을 새로운 학문의 이름으로 정했을 따름인 것이다.
2011-05-11 1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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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6> 일본인의 본심
30년 전 동경대학 유학 시절, 가끔 학교 앞 불고기 집에 점심을 먹으러 다녔다. 하루는 일본인 학생과 함께 갔는데, 식당 주인이 내게 살며시 다가 와 묻는 것이었다. ‘혹시 저 일본인 학생과 친구 관계이냐?’고. 듣고 보니 글쎄 진정한 의미에서 친구라고 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주인의 얼굴이 밝아지면서, ‘역시 그렇지요?’ 하면서 자기는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 교포인데, 그렇게 오래 살아도 일본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오랫동안 사귀어도 속 마음을 주지 않기 때문에 참된 친구가 되기 어렵다는 말을 덧붙였다. 과연 일본 사람은 속마음을 잘 주지 않는가? 이 질문을 생각하다 보니, 문득 일본어에는 속마음 또는 본심을 뜻하는 혼네 (本音, ほん-ね)라는 말과 함께 겉으로 내세우는 말, 즉 겉마음을 뜻하는 다테마에 (建前, たてまえ) 란 말이 따로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마음에 속마음과 겉마음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속마음과 다른 겉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경우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왜 특히 일본어에 겉마음이란 별도의 단어가 필요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 사회는 특히 본심을 드러내고 살기에 두려운 사회였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사람이 사는 사회 중에 본심을 다 드러내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사회는 없을 것이지만, 사무라이의 나라, 칼의 나라였던 일본은 그 중에서도 정도가 심했던 나라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속마음을 드러내기 어려워하는 현상은 정치를 보면 그대로 나타난다. 최근 일본의 간총리와 관방장관은 한반도 유사시 우리나라에 ‘자위대를 파견해야 한다, 아니다’를 가지고 엇갈린 의견을 표명하였다. 수상과 장관이 서로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지만, 일본에서는 보통으로 있는 일이다. 내가 일본에 있던 1980년대 초 당시 새로 선출된 스즈끼 수상은 ‘수상으로 선출되면 우선 미국에 인사부터 가는’ 관례대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미국 대통령을 만난 그는 미국과 일본은 동맹 관계에 있다라는 말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회담을 끝내고 나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는 자기가 말한 동맹이란 말에는 군사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미국측은 당연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반발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에 있던 외무상이 한 말씀 하였다. 내용인즉 ‘수상의 외교적 무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군사적 의미를 배제한 동맹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상의 말에 감히 장관이 엿을 먹여?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해프닝이었다. 외무상의 발언을 듣고 난 미국 대통령 등은 도대체 누구의 말이 본심인지 헷갈리게 되었다. 그럼 이 경우 일본의 본심은 무엇이었을까? 내 판단으로는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 말을 하는 것이 다 본심이다. 즉 두 가지 상반된 말을 해 놓고 여론 또는 판세 (判勢)가 어떻게 흘러 가는가를 두고 보다가, 나중에 어느 한 쪽으로 대세가 결정되면, 그 때 가서 ‘그거 봐라, 그래서 전에 아무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며 대세를 쫓는 명문으로 삼으려는 생각이 진짜 본심이라는 것이다.1979년 일본 유학 시절, 지도교수인 하나노 교수님은, 일본 수상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미국과 소련 (당시)이 전쟁을 하게 되면 일본이 언제 어느 편으로 어느 정도 가담하는 것이 가장 일본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를 판단할 능력이라고 하였다. 미국과 혈맹이라면서 무조건 미국 편만을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가졌던 나에게는 일본의 본심에 대한 놀라운 발견이었다. 한민족, 즉 ‘의리의 사나이 돌쇠’의 후예인 그 식당 주인은 2가지 애드벌룬을 띄워놓고 판세가 흘러 가는 것을 지켜 보는 일본 사람을 친구로 삼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2011-04-20 0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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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5> 꼼꼼한 것은 쪼잔한 것이 아니다
부지런함과 함께 일본인의 특성 중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꼼꼼함이다. 유학 시절, 내가 다니는 동경대학과 치바대학의 약대생 간에 야구 시합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합을 알리는 팜플렛을 보니 야구부 선수들에게 숙소인 여관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이 실려 있었다. 각종 주의 사항, 예컨대 베개의 사용 방법이라든지, ‘10시 넘어 자지 않을 경우에는 전등 덮개를 이렇게 내려서 이웃의 취침을 방해하지 말아라’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주의사항들이 만화와 함께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1981년엔가 테라사끼 (현 東北대학 교수)라는 대학원 후배와 단 둘이 구마모또 (熊本)에서 열리는 일본약학회에 참석하러 간 적이 있었다. 나와 단둘이 가는 여행인데도 그는 동경에서부터 구마모또에 이르기까지의 전 여정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타이핑 한 다음 복사본 한 부를 내게 전해 주었다. 거기에는 예컨대 기차, 버스, 배 등 모든 교통수단의 시간표, 요금 및 탑승 소요시간, 그리고 어느 고장에 가면 어느 찻집이 유명하니 그 집에서 얼마를 내고 몇 분간 차를 즐기자는 등에 이르기까지, 여행 전반에 관한 시시콜콜한 정보와 계획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여행 도중 히로시마 어딘가를 지날 때 경치가 하도 좋길래 ‘여기에서 좀 더 쉬었다 가자’고 했더니, 그는 일정표를 꺼내 보면서 ‘여기서는 10분간 쉬게 계획되어 있으니 그냥 가자”는 것이었다. 그 융통머리 없음에 나는 그만 반항할 기력을 완전히 잃었다. 일본인의 꼼꼼함을 소름끼치도록 느끼면서.그 다음해에는 오오사까 (大阪)에서 열리는 약학회에 논문을 발표하러 갈 일이 생겼다. 나는 내가 발표할 논문에 대한 슬라이드를 한 부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 방 조수 (우리의 조교수에 해당)가 나더러 한 부를 더 만들라는 것이었다. 왜냐고 물었더니 내가 슬라이드를 분실할 경우를 대비해서 한 부는 자기가 가지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더 놀란 것은 각자 다른 차를 타고 가자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만약에 우리 둘 중 누군가에게 교통 사고가 생기면 나머지 한 사람이라도 가서 발표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아! 결국 우리는 각자 슬라이드 한 부씩을 갖고 서로 다른 차를 타고 오오사카에 갈 수 밖에 없었다. 2004년 겨울의 어느 날 앞서 말한 테라사끼 교수가 내게 2005년도 11월에 선정하는 미국약학회 (AAPS)의 펠로우에 신청해 보라고 권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전에 제출해서 성공했던 서류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 주었다. 나는 그 파일을 열어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성실하게, 아니 꼼꼼하게 정리된 신청서였다. 연구 논문을 비롯한 연구 관련 각종 이력은 말할 것도 없고, 예컨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제목으로 강연하였는데, 그 때 약 몇 명의 청중이 참석했으며, 그들의 신분은 주로 교수 및 대학원생이었다’는 식으로 그의 연구 관련 활동에 관한 모든 사항이 더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내게 당부하기를, 좋은 논문 2-3편 쓰는 것 이상의 정성으로 신청서를 작성하라고 하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 신청서를 모방하였다. 내가 2005년도에 AAPS의 펠로우로 선정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교수의 덕택이었다. 예전에 ‘맞아 죽을 각오로 쓴 한국인’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일본 기술자가 한국인 기술자에게 어떤 기술을 전수하려고 할 때, 10가지 사항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 사람이 7~8가지를 설명한 시점에서 한국 사람들은, ‘대충 감 잡았다’느니, 또는 ‘원칙만 알면 되었지 꼭 10가지를 고대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등 궁시렁거리면서 엉덩이를 들썩거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인은 융통성이 없고 너무 고지식하다’고 한단다. ‘쪼잔하다’고 비웃는 사람도 있단다. 과연 그럴까? KTX사고가 빈발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며, 일본 사람의 꼼꼼함을 다시 생각해 본다.
2011-04-06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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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4> 동일본 대지진
일본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지난 3월 11일 규모 9.0의 대강진과 10m가 넘는 쓰나미가 동일본을 덮쳤다. 너무나 비극적인 재난에 두려움과 함께 일본과 일본인에게 간절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더구나 이번 지진의 피해를 많이 본 센다이 (仙台)시는 내가 다음 번 글에서 소개하려는 동북대학의 테라사끼 교수가 사는 곳이다. 테라사끼 교수는 내가 금년 5월 1일에 우리대학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특강을 부탁해 놓은 상태이었는데, 그날 이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간신히 3월 15일 오후에 일본의 다른 교수와의 통화를 통해 그 가족이 안전하다는 간접적인 소식을 들어 그나마 조금 안심하고 있다. 이렇듯 심란한 마음으로 지내던 중 3월 14일 중앙일보를 펴 드니 일본인이 이런 대 재앙을 만나서도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는 모습에 놀랐다는 기사가 크게 실려 있었다. 신문에 의하면 놀랄만한 일은 ① 대피소의 양보 (우동 10그릇, 50명이 서로 “먼저 드시죠”), ② 남 탓은 안 한다 (원망하거나 항의하는 모습 TV에 안 보여), ③ 재앙 앞 손잡기 (의원들 정쟁 중단 … 작업복 입고 현장으로), ④ 침착하고 냉정 (일본 전역에서 약탈 보고 한 건도 없어), ⑤ 남을 먼저 생각 (“내가 울면 더 큰 피해자에게 폐 된다”)의 다섯 가지이었다. 나는 이 기사를 쓴 기자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일본인의 훌륭함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우리 아들은 일본 사람들은 마치 로봇 같다고 하였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칭 일본 전문가인 나로서는 어느 정도 예상되는 일이었다. 일본인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내 주장, 즉 ‘일본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한다’라는 설을 강변하기는 좀 그렇지만, 일본사람들은 중앙일보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남에게 메이와쿠(迷惑, ‘남에게 끼치는 폐’를 뜻하는 일본말)를 끼치지 않는 것을 교육의 제1조로 삼고 있다. 그 교육, 그 정신으로 사는 나라가 일본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위에 말한 다섯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일본 시리즈 첫 편인 약창춘추 67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 히트한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같은 광고 카피는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카피이다. ‘개구장이’란 남에게 메이와꾸를 끼치는 아이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남에게 폐를 끼치는 아이라도 좋다고? 일본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소리인 것이다. 최근 나는 일본 사람들이 “사람 (人)”이라는 표현을 쓸 때에는 내가 아닌 ‘남’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일본 사람들은 ‘사람 (人, 히또)에게 메이와꾸를 끼치면 안된다’고 할 때의 사람이란 실은 남을 가르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남이 아닌 나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위기에 처했을 때에 ‘사람 살려!’ 하거나, 남에게 맞았을 때 ‘어 이놈이 사람 치네’, 또는 ‘사람 잡을 놈이네’ 라고 할 때의 ‘사람’이란 실질적으로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 이란 표현을 써서 인간이나 인류라는 거대한 집단을 거론하지만 실제로는 ‘나’라는 존재를 크게 보이게 하려고 사용하는 표현인 것이다. 아무튼 나를 인간이라는 집단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우리와 달리, 남을 인간의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타적 (利他的)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각설 (却說)하고,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진심으로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일본을 돕는 일이다. 위안부 할머니도 돕겠다고 나선 마당에 행여 정부나 국민이 과거의 감정에 억매여 돕기에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본을 우리의 사랑으로 감동시키자. 일본을 격려하고 돕는 일은 실은 우리의 그릇을 키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일본인들에게 간절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일본 파이팅!
2011-03-16 0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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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3> 미리미리 정신
1979년 4월 일본 유학을 가 보니 다음해 4월에 열릴 일본약학회 학술대회에 제출할 논문 초록을 그 해 11월말까지 마감하고 있었다. 그 초록집은 80년 1월에 내 책상에까지 배달되었다. 학회가 열리기 며칠 전에야 겨우 초록 마감을 한 후, 온갖 난리를 쳐서 학회 당일 날 아침에야 잉크 냄새도 가시지 않은 초록집을 현장에서 받아 볼 수 있던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작년 가을 외국에서 스기야마라는 동경대학 교수를 만났더니, 조만간 열릴 자기의 정년 퇴임 기념 국제 심포지엄에 나보고 연자 (演者)로 와달란다. “영광입니다” 라고 승락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심포지엄은 올해가 아닌 내년 즉 2012년 1월에 열리는 것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일본 신문기자가 걱정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축구장 건설을 완료하고 모의시합까지 해 본 상태이었다. 그는 뒤늦게 시작한 공사 탓에 언제 공사가 끝날지 모르는 우리나라가 과연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고 월드컵을 제대로 개최할 수 있을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비록 난리법석을 피우긴 했지만, 우리는 개최일 직전에 모든 공사를 끝내고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지 않았는가? 1980년대 여름에 설악산에 ‘대명 콘도’라는 데가 문을 열었다고 해서 대학원생들과 교실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가보니 정식 오프닝 날은 다음날 아침 10시이었다. 저녁이 되어 우리가 방에서 자려고 하는데 ‘실례합니다’ 소리가 들리더니, 승낙할 사이도 없이 인부들이 들이 닥쳤다. 문틀에 니스 칠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어이가 없어하는 우리를 보고 한 수를 더 뜨는 것이었다. 일당을 줄 테니 실외 수영장 바닥에 깔 타일을 좀 날라 달란다. 세상에! 아무리 상황이 다급해도 그렇지, 어떻게 투숙객에게까지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을까? 다음날 아침에 오프닝 행사를 하기는 다 틀려 보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9시 30분, 공사는 기적같이 완료되었고, 속초 시장님 등 귀빈을 모신 10시의 오프닝은 무사히 개최될 수 있었다. 내가 섬기는 ‘온누리 교회’는 몇 년 전부터 ‘러브소나타’라는 전도 행사를 일본 각지에서 개최하고 있다. 이 행사는 한국과 일본에서 수천~수만명이 참석하는, 일본의 기독교 사상 유례가 없는 큰 행사로 기획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이 행사를 준비하는 일본측 관련 당사자들이 내내 난감해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행사가 내일 모레로 코 앞까지 닥쳤는데도 행사장 예약이나 호텔방 배정, 그리고 식사 예약 등이 제대로 완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준비가 적어도 몇 달 전에 끝나 있어야 안심이 되는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행사 당일까지도 난리 법석을 떠는 우리의 행사 준비 태도는 공포 그 자체이었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은 밤을 새워 행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것 않던 모든 준비가 기적처럼 완료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모든 행사를 미리미리 준비한다. 그리고 그 준비에 의해 행사가 성공했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일까? 일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지 않는다. 일본인의 ‘미리미리’ 정신은 역시 사람을 두려워하는 그들의 문화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부실한 준비로 사람을 맞는 것이 두려운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닥쳐서 난리치는 버릇은 고쳐야겠다. 혹자는 우긴다. 그래도 우리는 공사 부진으로 실내 수영장 지붕을 미쳐 다 덮지 못한 상태에서 2004년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여 망신을 산 그리스보단 낫다고. 제발 그러지 말자. 사람이 두려워서이건 어쨌던 일본의 ‘미리미리’ 정신은 배울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2011-03-02 0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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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2> 일본에서는 길을 묻지 마라
일본 사람들은 욕은커녕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매우 두려워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란 담대한(?) 광고 카피가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 제1조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소심한(?) 내용이다. 애가 잘못하면 엄마가 애를 데리고 와서 반드시 사과를 시키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에서는 학생들이 여행을 가면 못 간 사람을 위해 반드시 선물을 산다. 비록 우리가 보기에는 누구 코에 붙이려나 싶을 정도로 작긴 하지만. 일본어에서 선물을 토산품 (土産品)이라 쓰고 오미아게 (おみあげ)라고 하는데, 이는 (젓가락으로) 집어 올려 보여 줄만큼 작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 작은 선물 한 개를 입에 넣으며 설사 맛이 없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아, 오이시이 (아, 맛있다)’ !. 내 경험에 의하면 일본에서 아파트 (우리의 연립주택)나 만숀 (우리의 아파트)으로 이사를 가면 바로이웃집 들에 과자 같은 간단한 선물을 접시에 담아 돌려야 한다. 그 선물을 받은 이웃집들도 거의 그 즉시로 비슷하거나 약간 작은 크기의 답례품을 이사 온 집에 보내야 한다. 일종의 전입신고와 답례로 아름다운 풍속이라 할만 하다. 그런데 나는 어딘가 이들이 서로 이웃을 두려워하고 잇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 동경대 대학원생 시절, 후지산으로 교실 여행을 가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정해진 여관까지 개별적으로 가서 정해진 시간에 만나는 것이었다. 과 대표가 단체로 표를 사서 배나 비행기를 탈 때 일일이 나누어 주며 인원수를 세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여행보다는 성숙되어 보였다. 개별 출발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가는 방법을 모르는 나는 지도 교수님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출발에 앞서 지도책부터 사시는 것이었다. 나는 가다가 길을 모르겠으면 차 유리창을 내리고 ‘아저씨, xx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소리치면 될 것을 뭐 하러 지도책을 사나 생각하였다. 우리나라는 그러면 되는 나라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함부로 길을 묻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을 세워 놓고 길을 묻는 것은 일본인에게는 대단한 실례이자 민폐인 모양이다. 길을 묻다가 운이 나쁘면 칼을 맞는 시절도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분위기이니 일본에 지도책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지도책을 사보면 될 걸 왜 묻느냐’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 자동차 운전자의 60%가 GPS를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GPS 이용률이다. 묻기 두려워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통계인 것 같다. 일본 서점에는 외국의 먹거리 볼거리까지를 상세하게 설명한 책들이 무수히 많다. 우리가 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세하다. 솔직히 우리나라에 관한 정보도 일본책에 더 상세하게 나와 있다. 또 일본의 길거리에는 친절한 길 안내가 넘친다. 일본에서는 길을 잃거든 누구에게 묻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주위를 둘러 보라는 말이 있다. 반드시 눈이 닿는 곳에 길을 안내하는 안내문이 있다고 한다. 이 모두가 묻기를 두려워하는 일본인의 특성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 길 안내판은 아직도 멀었다. 막상 예컨대 ‘사당사거리’를 찾아 그 곳에 가보면 그곳이 사당사거리라는 표지가 잘 안 보인다. 그래 늘 신경질이 나던 터에 GPS가 나왔다. 그러니 자연히 이용률이 높아질 수 밖에. 우리나라 운전자의 GPS 이용률이 50%로 세계 두번째로 높단다. 일본은 묻기가 두려워서, 우리는 기존의 길안내가 부실해서 GPS를 많이 이용하는 것 같다. 요즘은 스마트폰까지 길 안내를 해준다. 이래저래 점점 남에게 길을 묻지 못 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어디 도로뿐이랴? 인생길 물을 데도 없어지고 있으니 웃을까 울까 물을 데가 없구나.
2011-02-16 0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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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1> 일본어에는 욕이 없다
일본 말에는 욕이 없다. 기껏해야 ‘바카야로 (ばかやろ, 바보자식)’ 정도가 있는데, 이 정도는 우리나라에서는 욕 축에 끼지도 못한다. 우리나라 욕들은 얼마나 얼큰하고 걸쭉한가? 내가 꿈에도 그리던 제물포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실망했던 것은 그 선망의 대상이던 동료들이 일상의 대화 중에 욕을 섞어 쓰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서울대 학생들도 마찬가지이었다. 군대 시절은 말해 무엇 하리오. 고참의 말은 욕이 절반은 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친한 친구 사이일수록 욕을 많이 주고 받는다. 욕을 안 하면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찌 욕뿐인가? ‘쪼끄만 놈, 쪼다, 바보, 돌대가리, 병신’ 같은, 상대방에게 인격적인 상처를 주는 험악한 말들이 태평스레 사용된다. 일본 사람은 어떠한가? 우리와 정반대이다. 욕은 커녕 행여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까 봐 정말로 곱고 예의 바른 말만을 사용한다. 친구 간에도 그렇다. 모르긴 해도 아마 일본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왜 우리말에는 욕이 많고, 우리말과 문법이 매우 비슷한 일본어에는 왜 욕이 없을까?내 생각에는 일본엔 우리와 달리 사무라이의 칼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반격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험한 말을 내 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칼을 차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 (남)이 무서웠다. 상대방이 좋아할만한 말만 골라 해도 돌아설 때 등골이 서늘해질 판이었다. 그래서 일본말은 예의 바르고 고와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과거 일본에서는 욕을 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진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다가가 찔러 죽이면 그만이다. 괜히 욕으로 상대방의 성질을 돋구어 선제 공격을 당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말이란, 최대한 예의 바르고 부드럽게, 그것도 되도록 낮은 목소리로 해야 하는 도구인 것이다. 일본에선 길거리 싸움도 드물다. 왜 그럴까? 칼의 나라 일본에서의 싸움이란 ‘죽고 살기’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우리처럼 말싸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인은 웬만해서는 남과 싸우지 않는다. 하긴 욕이 없으니 말싸움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보고 남과 싸우되 절대로 욕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답답해서 차라리 싸움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욕과 싸움은 불가분 (不可分)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어엔 욕이 없다. 그러니 싸울 수가 없다. 안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못 싸우는 것이다.우리는 싸움을 해도 상대방을 죽이기 까지는 않는다. 요즘엔 세상이 험해져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주로 말로 싸우고 기껏해야 주먹을 쓴다. 재미있는 것은 누구든 먼저 코피를 흘린 사람이 진 것이라는 불문률도 있다. 물론 말로 싸운다고 해도 말의 상당 부분은 욕이다. 한번 우리나라 시장판에서의 싸움을 보라. 싸움의 실체는 서로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핏대를 세워가며 구경꾼들에게 설명하는 여론전 (與論戰)이다. 이 때 걸쭉한 욕을 섞어 상대방의 나쁜 점을 강조해야 구경꾼의 여론을 내게 유리하게 돌릴 수 있다. 무엇보다 그래야 내 스트레스도 풀린다. 1987년에 미국 퍼듀 대학에 방문교수로 가 있을 때 어떤 미국 여학생이 내게 자기 남자 친구가 연구실 안에 있느냐고 물었다. “아까 나가더라”라고 했더니, 그녀 왈 “I will kill him”이란다. 이제 미국도 제법 안전한 나라가 되었나 보다. 누구나 총을 차고 다니는 서부영화 시대이었다면 ‘죽이겠다’는 말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총칼을 쓰던 나라의 말이 곱고, 안전했던 나라의 말이 거칠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인가? 말은 어쩌면 인격의 절반 이상이다. 그러니 고운 말을 배우자. 일본말에서 배우자.우리가 더 안전한 나라이었다는 어설픈 역사적 배경 따위는 다 잊어 버리자.
2011-01-31 1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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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0> 장기판의 졸(卒)
일본어에 오야붕 (おやぶん)과 꼬붕 (こぶん)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각각 왕초와 똘마니에 해당하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오야붕이 꼬붕을 함부로 대하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야붕과 꼬붕의 관계는 어미닭과 병아리의 관계인 것 같다. 다만 병아리들이 칼을 차고 있다고 상상하기 바란다. 어미닭은 병아리들을 품는다. 그러나 결코 병아리들이 깔려 죽을 정도로 낮게 품지는 않는다. 병아리들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병아리들의 안전 때문만은 아니다. 실은 병아리들이 무섭기 때문이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낮게 깔고 앉으면 병아리는 참다 못해 칼을 꺼내 어미닭을 찌를 수도 있다. 어미닭은 병아리들의 이런 특성을 잘 안다. 그래서 병아리들을 품되 늘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도록 조심하며 품는 것이다.일본 유학시절 일본 학생과 대만 학생이 각자 자기 나라의 장기 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대만의 장기 룰은 우리와 거의 같았다. 그런데 일본 장기에서는 내 졸 (卒)도 상대방에게 잡히면 바로 그 자리에서 적군이 되어 나를 공격하는 공격수가 되는 것이었다. 배신이 일상 (日常)이 되어 있다고 할까? 내게는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졸이 상대방의 상 (象)이나 마 (馬)를 먹고 죽으면 장렬하게 잘 싸우다 죽은 것으로 치부한다. 졸을 함부로 사지 (死地)로 내보낸다. 상이나 먹고 죽으라고! 그래서 우리말에는 ‘누굴 장기판의 졸로 보느냐?’ 란 말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런 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졸도 상대방에게 잡히면 칼을 돌려 나를 찌를 수 있기 때문에 만만하기만 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졸을 함부로 죽음판으로 내몰 수가 없다. 배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 배신의 가능성 때문에 일본에서는 장기판의 졸도 제법 존중받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꼬붕은 물론 오야붕을 섬긴다. 하지만 오야붕이 지나치게 무시하면 칼을 꺼내 오야붕을 찌를 수 있다. 마치 병아리가 어미닭을 찌르듯, 또는 장기판의 졸이 배신의 칼을 돌려대듯. 오야붕은 꼬붕들의 이런 특성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무작정 꼬붕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꼬붕들을 부려먹되 구슬리며 부려 먹는다. 결코 꼬붕들이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무작정 깔고 앉지 않는다. 결코 장기판의 한국식 졸로만 보지는 않는 것이다.내가 서울약대에 다닐 때, 약대의 각 연구실 체제는 2-3명의 교수가 한 주임교수의 밑에 놓여있는 소위 교실제이었다. 이 제도는 약대 캠퍼스가 관악으로 옮겨질 때까지 오랫동안 약대의 연구실 문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는 실은 일본의 대학들을 흉내 낸 것이었다. 즉 일제 치하에서 해방이 되어 학교를 급히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서울대학교는 한 연구실에 2-3명의 교수를 소속시키면서 가장 연장자를 주임교수로 임명한 것이다. 이 교실의 주임교수는 일본 대학의 주임교수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연구실 내의 후배 교수들 위에 군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본의 주임교수가 어미닭처럼 후배 교수들을 조심해서 품는 것은 미쳐 보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늘 후배 교수들이 건방지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단지 2-3년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주임교수 자리를 놓친 후배 교수들은 주임교수에 대해 ‘언제부터 자기가 주임교수이었나?’ 하는 불만을 갖게 되었고, 결국 주임교수라는 어미닭을 따르지 않았다. 세월이 감에 따라 교실제는 교수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나쁜 제도로 치부되어 1990년대부터 급속도로 붕괴되었고, 마침내 조교수든 정교수든 모든 교수가 1:1로 대등한 권한을 갖는 오늘날의 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꼬붕에 대한 배려가 없는 오야붕 제도의 사필귀정 (事必歸正)이라고나 할까? 사람을 장기판의 한국식 졸로 보는 사회는 결코 오래 갈 수 없는 법이다. 칼의 나라 일본에서 배우는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2011-01-12 0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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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9>고노마에와 도오모 (요전번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칼을 차고 살던 나라인 일본에는 농담이 별로 없다. 윗사람에게 대한 농담은 윗사람이 기분 나빠하는 순간 공포를 부르기 때문이다. 즉 네가 나한테 농담할 군번이냐? 는 식으로 화를 내거나, 심지어 칼을 빼들면 바로 난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함부로 농담을 해선 안된다. 특히 윗 사람에게는… ‘나라’라는 도시에 가면 옛날 무사들이 차를 마시던 곳이 있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찻집의 천정이 매우 낮아 안으로 들어 가려면 거의 기어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천정이 높으면 차를 마시던 상대방이 갑자기 칼을 뽑아들 수 있으므로 긴장을 풀고 차를 즐길 수 없기 때문에, 일부러 천정을 낮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칼을 뽑으려다가도 팔꿈치가 천정에 닿아 칼을 다 뽑을 수 없도록 말이다. 이런 방이라야 비로소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늘 칼을 의식하며 살수 밖에 없었던 일본이 안쓰러워지는 대목이다. 뼈대 있는 일본인의 집안을 보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일본도를 모셔놓은 경우가 적지 않다. 마치 우리나라 양반이 청자나 백자를 잘 모셔 놓은 것처럼. 이처럼 칼은 일본인의 생활 습관이나 문화와 깊숙이 관련되어 보인다.칼은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것이다. 일본인이 얼마나 칼을 무서워했는지는 일본인의 인사 습관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은 남과 헤어질 때, 조금 과장을 섞으면, 대여섯 번은 굽실거린 후에야 헤어진다. 왜 그럴까? 한번 칼을 찬 사무라이와 헤어지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돌아 설 때, 사무라이가 찬 칼이 자꾸 마음에 걸리지 않겠는가? 뒤가 근지럽다. 그래서 슬쩍 돌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순간 사무라이와 눈이 마주친다. 민망하다. 그 민망함을 감추려 서둘러 굽실거리며 ‘도오모 (저, 참..)’, ‘시츠레이 시마쓰 (실례합니다)’ 또는 ‘사요나라 (안녕)’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 가려는데 아무래도 뒤가 또 켕긴다. 나도 모르게 다시 돌아보다가 또 눈이 마주친다. 또 굽실…. 이를 대여섯번 쯤 반복하면 이젠 제법 사무라이와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뒤돌아 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칼 때문인지 자고로 일본 사람들은 남에게 정말 친절하다. 예의 바르다. 말도 참 곱다. 그런 일본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인사말은 ‘안녕하십니까?’가 아니다. 우선 ‘고노마에와 도오모 (요전번에 정말로)’ 라고 말해야 한다. 그 뒤는 우물우물하면 된다. 요전번에 감사했는지, 아니면 미안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감사할 일이나 미안해 할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그런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부터 밝혀두는 일이다. 생각이 잘 안 나더라도 일단 조건반사적으로 이 말부터 해두고 보는 것이다. 일본어에 서툴던 시절, 나는 ‘요전번에 뭐?’ 냐고 되물어 상대방을 당황케 한 기억이 있다. 일본인을 만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고노마에와 도오모’ 부터 읊어 두기 바란다. 권력자가 백성의 인권을 존중하게 되는 것은 백성이 두렵기 때문이지, 권력자의 자비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 사람과 미국 사람이 친절하고 남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특별히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백성들이 칼과 총을 무서워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과거에는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던 총과 칼이 오늘날에는 오히려 인권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 셈은 아닐까? 요컨대, 친절함, 고운 말, 예의, 그리고 민주주의는 총과 칼 끝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총칼의 역설인 셈이다. 새해부터는 총과 칼이 아니라도 약자가 보호되고 인권이 엄중하게 존중되는 그런 지구촌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0-12-22 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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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8> ‘이리 오너라’와 ‘스미마셍’의 차이
우리나라 사람은 남을 부를 때 “여보세요”라고 부른다. 아마 ‘여기 좀 보세요’라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일본 사람은 뭐라고 부를까? 답은 ‘스미마셍’이다. ‘미안합니다’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남을 부르는 것이 미안한 일인 것이다. 왜 그럴까? 내 생각엔 일본인들이 칼을 차고 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칼을 차고 가는 사람을 불러 세운다고 생각해 보라. 어찌 겁이 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부를 때 ‘미안합니다’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그것도 기어들어가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우리나라 사람은 예컨대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 뵙고 싶을 때, “선생님, 조만간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말할까? “우깡아와세떼 이따다끼마쓰” 또는 “오자마사세떼 이따다끼마쓰”라고 말한다. “저로 하여금 찾아 뵙게 해 주십시오” 또는 “저로 하여금 폐를 끼치게 해 주십시오” 라는 뜻이다. 한국식으로 ‘찾아 뵙겠다’는 직설적인 표현은 일본에서는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우려가 있는 일방적이고 도전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도록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일본 음식점은 예컨대 3일간 쉴 경우, 우리처럼 ‘3일간 휴업’이라는 대담한 글귀를 입구에 써 붙이지 못한다. 대신, ‘3일간 쉬게 해 주십시오’라고 써 붙인다. 여름 휴가철에 일본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를 본 한국 사람은 대개 ‘자기가 쉬려면 그냥 쉬면 되지, 꼭 손님 허락을 받아야 쉴 것처럼 저렇게 위선적인 글귀를 써 붙이나’ 하며 못마땅해 한다. 남의 집을 방문해서 문간에서 주인을 부르는 말도 우리와 너무 다르다. 일본에서는 “시츠레이시마쓰” 이다. ‘실례합니다’란 표현이다. 문을 열어주어 집안에 들어 갈 때에도 ‘오소레이리마쓰’, 즉 ‘황송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남의 집에 들어 가는 일이 ‘실례’이며 ‘황송한’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떠했는가? 조선시대에는 남의 집 대문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리오너라’ 라고. 조금 배포가 약한 사람은 ‘계십니까?’ 라고 외쳤다. 어떻게 남의 집 문 앞에서 소리를 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만큼 조선이 안전한 나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저녁에 우리 집으로 마실을 오는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실례합니다”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어이 참 달도 밝다’ 라든지 ‘비가 오시려나’ 라든지, 아니면 ‘저놈의 개는 왜 괜히 짖고 지랄이야’ 라고 큰 소리를 내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불쑥 들어 왔다. 우리 집에 개를 빼고는 그들을 해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본과 엄청나게 다른 대목이다.일본어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유난히 수동태를 많이 쓴다는 것이다. ‘선생님 언제 학교에 나오십니까?’ 라고 묻는 대신, ‘언제 학교에 보이십니까 (이쯔 오미에니 나리마쓰까?’ 라고 여쭙는다. 감히 선생님 보고 언제 학교에 ‘오시냐?’고 직설적으로 묻지 못하고. ‘내 눈에 언제 보이시게 되느냐’고 간접적으로 겨우 묻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생각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나는’ 이라는 주어는 슬며시 빼고 그냥 ‘이렇게 생각된다 (오모와레루)’는 수동태적인 표현을 훨씬 많이 쓴다. 역시 직설적인 표현이 상대방을 자극할까 두려워 하는 모습이다. 우리말과 일본어는 달리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오너라’와 ‘스미마셍’, ‘직설적으로 말하기와 돌려말하기’, 그리고 ‘능동태로 말하기와 수동태로 말하기’ 같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과거에 일본은 칼을 차고 사는 불안한 나라이었던 반면,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나라이었음에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2010-12-08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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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7> 창피했던 공항 소동
1979년 4월 9일 일본 문부성 초청 장학생 33인 중의 한 명으로 선발된 나는 동경행 비행기를 탔다. 동경대학에서의 유학 생활 3년 반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이런 저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을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았다. 일례로 1983년 11월 ‘신일본기’라는 글을 약업신문에 발표한 적도 있다. 여기서는 그 글 중 ‘일본은 사람을 무서워하는 나라’라는 주장 부분을 조금 확장해서 써 보기로 한다. 1980년 겨울, 어느 일요일, 아버지 회갑 잔치에 참석하러 가족과 함께 일시 귀국했다가 동경으로 돌아 가는 길이었다. 장소는 당시 국제공항인 김포공항. 나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KAL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려고 줄을 서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일본 사람들이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금요일 저녁에 워커힐에 와서 도박을 하고 일요일 저녁 비행기로 동경에 돌아가야 하는 샐러리맨 들이었다. 그런데 무슨 사정이 생겨 비행기가 뜨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월요일에 출근을 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카운터에 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묻기도 하고 항의도 하느라 웅성거리는 것이었다. 문제는 카운터 직원들의 태도였다. 승객들의 질문과 항의에 지친 그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버렸다. 당시 그들의 서비스 수준은 그 정도이었던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화가 나 있었다. 그 때 성미 급한 한 한국인 남자가 카운터를 훌쩍 뛰어 넘어 안으로 들어 갔다. 그러고는 ‘이 XX 들 다 어디 갔지?’ 하면서 항공사 직원을 찾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사람이 항공사 직원인줄 알았던 모양이다. 단체로 몰려 가더니 항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언제 비행기가 떠나느냐? 만약 오늘 못 가면 무슨 대책을 세워주고, 안내라도 제대로 해 주어야 할 것 아니냐?’ 는 내용이었다. 카운터 안쪽에 있던 한국인 남자는 처음에는 짧은 일본어로 나름대로 상황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내자 드디어 그는 자제력을 잃었다. “야, 이XX들아, 왜 떠들어? 나도 승객이야 임마, 내 나한테 시비야? 그리고 여기가 일본이냐? 여기가 너희 나라야? 왜 떠들어? 내가 일본 가서 이렇게 떠든 적 있냐? 조용히 해, 이 XX 들아”. 한국 남자의 우렁차고 걸쭉한 욕설에 공항 카운터 앞은 한 순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무리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저게 욕이구나 하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나는 우선 창피하였다. 일본 사람들, 심지어 관공서에 근무하는 일본 사람들마저도 얼마나 간 빼먹으려 들 듯 친절한지를 1년간 충격으로 경험했던 나로서는, 정말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KAL의 서비스는 무슨 꼴이며, 게다가 직원도 아닌 사람이 카운터를 뛰어 넘어가 상스런 욕설까지 퍼붓다니, 이게 무슨 나라 망신이란 말인가? 그런데 묘한 것은,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문 일본 사람의 모습에 한편으로 대한남아 (大韓男兒)의 기개 (氣槪)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부끄럽지만 당시에는 극복할 수 없었던 유치한 민족적 열등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이 때부터 나는 “일본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사람은 특히 한국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 쿠데타나 월드컵은 물론, 때로는 사람마저 거칠고 무례하게 몰아치는 한국 사람이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일본의 어린이 교육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라’라는 소심한 내용으로 시작되지만, 우리는 내 새끼가 ‘기죽지 않고 크기만’을 바란다.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란 광고 카피도 같은 맥락은 아닐까? 일본의 교육이 꼭 옳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조금은 사람을 무서워할 줄 아는 그런 민족이 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옛날 이야기이긴 하지만, 공항에서의 난동은 분명 부끄러운 일이었다.
2010-11-24 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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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6> 명강의
내가 섬기는 ‘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님은 설교를 잘 하시기로 유명하다. 나는 그 분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설교를 잘 할 수 있을까 감탄하곤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목사님들이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는 교인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길 잃은 양들을 구원하고픈 간절한 마음이 결여된 설교는 호소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설교 기법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목사님의 설교는 듣기에 편안하고, 쉽고, 위선적이지 않으며 요점이 분명하기 때문에 누구나 어느덧 빨려 들게 되는 것이다. 일부 목사님들 가식적인 어투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나에게 하목사님의 어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번째로는 무엇보다도 설교하는 내용 자체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목사님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하신다. 설교의 내용이 워낙 뛰어나고 멋 있는 분이기 때문에 명설교가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학교에서의 강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학생에 대한 사랑, 강의 기법, 그리고 깊은 전공 지식이 없이는 명강의를 할 수 없다. 학생들이 강의에 집중하지 않자 눈물을 흘리시던 고등학교 때 물리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 눈물이 사랑임을 깨달은 학생들이 그 후 진지한 자세로 수업을 들었음은 말 할 나위도 없다. 학생에 대한 사랑도 없고, 깊은 전공 지식도 없이 오직 유창한 언변 (강의기법) 만으로 강의를 하면, 청중을 잠시 현혹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감동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2008년 4월 4일 우리대학의 학장으로부터 ‘우수강의상’을 받았다. 영광이다. 당시 부상으로 돈(100만원)까지 받았다. 학생들로부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은 “약제학” 강의를 담당한 3교수 중에서 내가 가장 연장자인 까닭에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영광이다. 연구만 중시하는 대학의 현 세태에서, 강의를 잘 한다고 주는 이 상의 이름이 매우 훌륭하지 아니한가?. 아무쪼록 2008년 범 서울대적으로 생긴 이 상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금년 11월에는 우연히 서울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주최하는 바이오 대중강좌-‘생활속의 생명공학’에 강사로 위촉되었다. 중고등학생을 비롯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강좌에는 공대, 농생대, 의대, 치대, 자연대, 수의대 교수 등 모두 10명의 교수가 참여한다. 우연히 위촉되었다고 했지만, 약대의 누군가가 나를 평생교육원에 추천하였을 것이고, 그 추천은 어쩌면 “우수강의상”수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평생교육원의 담당자는 나에게 수강자가 일반인이니 강의를 쉽고 재미있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쉽고 재미있게’라!. 말하자면 ‘명강의’를 해야 한다는 말인 것 같은데, 이게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인가?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코 적지 않은 강사료에 눈이 멀어 덜컥 강의를 맡기로 승락하였다. 걱정은 그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고 했던가? 돈에 눈이 멀면 언제나 수심이 생기는 법이다. 아무튼 나는 ‘맞춤약학-당신에게만 딱 맞는 약을 맞추어 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겠노라 회신하고야 말았다. 조교수 시절, 강의 전날 술을 드시지 못하는 노교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그 교수님은 강의하기가 두려우셨던 것이다. 걱정이 되셨던 것이다. 나도 그렇다. 30년 가까이 해 온 강의이지만 막상 다시 하려면 늘 두렵다. 더구나 서울대 학생들의 똘망한 눈빛을 마주 보며 강의하기란, 준비가 허술했다간, 진땀이 나는 일이다. 과연 나는 이번 대중강좌에서 명강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청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철저히 준비하고, 편안한 어투로 강의를 해야지, 다짐을 해본다. 성령님 도와 주시옵소서.
2010-11-03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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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5> "이 놈의 문이 미쳤나"와 알았시유
충청도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쉽사리 남에게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으면, 자기들은 사과할 일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단다. 심지어 그들은 쉽게 사과하는 사람을 가벼운 사람이라고 낮추어 보기도 한다.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서울 여자가 충청도로 시집을 가서 살면서, 옆집에 사는 나이 들은 목수에게 부탁해 방의 문을 제작해 달았다. 그런데 이 문이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목수에게 문이 맞지 않는다고 얘기 했더니, 그 목수가 와서 한다는 말이, “이 놈의 문이 미쳤나? 안 맞고 지랄이여” 했단다. 나는 충청도 출신 아내와의 경험을 통해 이 정도면 충청도에서는 나름대로 심심한 사과의 말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루는 그 새댁이 목수 집에 놀러 가서 목수 부인이 부치면서 권하는 부침개를 먹어 보았더니 맛이 일품이었다. 다만 부침개가 너무 커서 볼품이 좀 없길래 “할머니, 아주 맛 있네요. 근데 조금 조그맣게 만들면 더 예쁘고 좋겠다. 그치요?” 했다. 그랬더니 충청도 할머니 대답하시기를, “내비둬유, 부침개가 무신 미쓰 코리아 나가남유? 맛만 있으면 됐지” 하더란다. 식약청 재직시 업무 관계로 어떤 여성과 대화를 하다가, 내가 놀라면서 그 사람에게 “고향이 충청도시지요?” 라고 소리친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나보고 어떻게 아셨냐고 되물었다.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긴요, 똑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과 35년 이상 살아 봤으니까 알지요”. 그 사람은 부부 싸움을 하면 언제나 남편이 먼저 사과하지 절대로 자신이 먼저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자신은 애초부터 사과할만한 일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난 “앗 이 사람이 충청도 출신이구나” 고 깨달았던 것이다. 충청도 사람의 세 번째 특징은 맥 빠지는 말을 잘 한다는 것이다. 코미디언 김학래씨한테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충청도 사람이 경영하는 식당에 들어간 서울 손님이 주인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이 집 뭐가 맛 있어요?” 그랬더니 돌아온 주인의 대답은, “밖에서 사 잡숫는 게 다 그렇지유 뭐” 였단다. 솔직한 대답인지는 몰라도 손님으로선 맥 빠지는 대답이다. 충청도 사람은 남들처럼 “다 맛 있어유” 라는 위선적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골의 길거리에서 쌈이나 야채를 뜯어 팔고 있는 충청도 할머니에게 “이거 얼마예요?” 하고 물으면, “줄만큼 줘유” 라고 대답한단다. 1000원 드리면 되냐고 되 물으면, “놔둬유, 집에 소나 먹이게” 라고 대답한다. 할머니 생각에 3000원은 받을 요량이었던 것이다. 성미 급한 서울 아줌마는 제 스스로 값을 올려 결국 3000원에 물건을 산다. 충청도 사람은 결코 자신의 입으로 야박스럽게 ‘3000원’을 부르지 않는다. 오직 “놔 둬유” 이 한마디로 받을 값을 다 받는 것이다.다른 지방 사람이 충청도 사람과 협상을 하면서 흔히 오해하는 것이 “알았시유”란다. 예컨대 경상도 사람이 무언가 열심히 주장을 하면 충청도 사람은 “알았시유” 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경상도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인 줄로 생각하고 회담을 끝낸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충청도 사람이 딴 소리를 한다. 왜 이제 와서 딴 소리냐고 추궁을 하면, “내가 알았다고 했지 언제 한다고 그랬남유?” 란다. 이에 성미 급한 경상도 사람은 “그래 니 잘 묵고 잘 살아라” 며 협상 테이블을 뒤엎는다. 심지어 자신에게 유리하게 합의했던 사항마저도 다 상대방에게 줘 버리고 자리를 턴다. 이렇게 보면 충청도 사람은, 천상 외교관이 적격인 것 같다. 우리나라 첫 유엔 사무총장으로 충청도 청주 출신 반기문씨가 뽑힌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그저 웃자고 해 본 이야기이다.
2010-10-13 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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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4> 교수님이 시키는데 어떻게 못 한다고 해유?
충청도 공주 출신의 아내와 35년 이상을 살다 보니 어느덧 충청도 사람의 기질에 관해 반 전문가가 된 느낌이다. 내가 파악한 충청도 사람의 기질을 한번 기록해 보고자 한다. 다만 이 글을 너무 진지하게 읽지는 마시길 바란다. 그저 다년간 아내를 관찰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편견에 가득 찬 재담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 우선 충청도 사람은 겉으로 온순하고 예절이 바르지만, 실상은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다. 오래 전 대학원 석사 과정 제자 중에 충청도 출신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실험실에 들어가 그 학생을 불렀더니, 즉시 내게 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편 옷걸이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지도 교수가 부르시니 상의부터 단정하게 입고 오려는 의도이었다. 그 학생의 예절에 감탄을 하면서 어떤 실험을 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학생은 물론 ‘예’하고 대답하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다시 그 학생을 불러 내가 지시한 실험을 했냐고 물었더니, 그 학생 왈 ‘하지 않았습니다’이었다. 내가 왜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더니 자기 생각에 그 실험은 잘 될 것 같지 않아 안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럼 지시할 당시에 그렇게 대답을 해야지, 하겠다고 해 놓고 안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야단을 쳤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하시는 말씀, “교수님이 시키시는데 어떻게 못 한다고 해유?” 이란다. 기가 막혔다.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 되는 것도 같고…, 아무튼 그 사건 이후 ‘충청도 학생은 말을 잘 듣지 않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은 그 후 아내와의 결혼 생활 연수가 늘어 갈수록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우리 대학을 11년 전에 정년 퇴직하신 김낙두 명예교수님은 충청도 출신답게 유순해 보이신다. 그러나 많은 후배 제자들은 김교수님의 고집이 전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루는 김교수님이 재임하실 때 내가 “충청도 사람은 고집이 세답니다” 했더니, “나도 충청도 사람인데 별로 고집이 안 센데..” 하셨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 모르셨어요? 선생님께 한번 말씀을 드리려면 선생님 머리부터 붙잡고 좌우로 흔드시지 못하게 하면서 말씀 드려야지, 한번 고개를 좌우로 저으시면 그 후에는 아무리 잘 말씀 드려도 안 된다는 사실을 남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 드렸더니, 얼굴이 빨개지시도록 웃으시며 수긍하셨다. 재학시절 학생들이 학점을 고쳐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끝내 고쳐 주시지 않았던 유일한 분이 충청도 출신인 김교수님이셨던 것이다.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일제 때의 독립투사는 충청도 출신에 많은 것 같다.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신채호 선생 등이 다 충청도 출신이시다. 그렇다면 이는 “말을 잘 안 듣는 충청도 기질”과 일맥상통하는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독립투쟁보다 더 “말을 안 듣는 행위”가 어디에 있겠는가? 역시 근거는 없지만 36년간의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우리나라가 신속히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제 하에서 다른 도 사람들은 겉이나 속이 어느 정도 일본화 될 수 밖에 없었지만 충청도인의 속은 그리 간단히 변하지 않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마치 손 힘으로 눌렸던 용수철이 손을 떼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오는 것처럼, 일제가 물러나자 마자 원래의 충청도인, 즉 원래의 한국인으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내가 오늘날까지 그야말로 대과없이 교수 생활과 공직 생활을 해 올 수 있었던 것도, 범사에 고집스럽게 바른 길만 가기를 강조했던 아내의 충청도 기질 덕이라고 생각한다. 공주 (公州) 출신의 공주 (公主)여! 감사합니다.
2010-09-29 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