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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38> 효도는 도(道)이다
효도는 도(道)이다 이번 설에는 사정이 있어 처음으로 성묘를 가지 못했다. 해마다 당연하게 해오던 일을 하지 못하니 며칠이 지나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던 중 신문에서 중국의 한 물류업체가 춘절(春節)에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대리 세배’를 해주는 유료 서비스 상품을 내놓았다가 거센 비판 끝에 철회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웃지 못할 이야기 같았지만,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았다. 요즘 세상은 성묘(省墓)는 커녕 살아 계신 부모님께 세배하는 일조차 부담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다. 손주들이 학원 때문에 조부모를 찾아 뵙기 어렵다는 등 현실적 이유도 있지만, 이면(裏面)에는 세배나 성묘를 굳이 해야 할 일로 여기지 않는 인식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자손을 사랑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자손은 그냥 예뻐서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자식 사랑은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와 조부모를 사랑(恭敬)하는 효도(孝道)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예전에는 효도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였지만 오늘날에는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 숙제처럼 억지로 실천해야 하는 덕목(德目)이 되었다. 아마 효도에 ‘길 도(道)’ 자를 쓰는 이유도 서도(書道)나 태권도처럼 도(道)를 닦듯 고되게 훈련하지 않으면 효(孝)를 행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왜 자식 사랑은 쉬운데 효도, 즉 부모 공경은 이리 어려울까? 자연을 보면 그 이치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식물도 동물도 새끼 때는 다 예쁘다. 봄의 새싹은 생기와 향기로 가득하지만,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푸르름을 잃고 단풍이 된다. 물론 단풍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마지막 불꽃 같은 애처로움이 묻어 있다. 닭이나 개 같은 동물들도 병어리나 강아지 때가 제일 예쁘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아기는 다 예뻐서 보면 머리를 쓰다듬고 싶고 품에 안고 싶어지지만 노인을 만나면 저절로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흔히 사람이 죽었을 때, ‘자식은 가슴에 묻고 부모는 땅에 묻는다’는 말이 이 상황을 웅변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만약에 창조주께서 이 세상을 거꾸로 만들어 놓으셨으면 어찌 되었을까? 즉 아기가 노인처럼 추하게 태어나고 노인이 나이가 들수록 아기처럼 아름다워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 부모들이 아기를 기꺼이 품지 않아 오래전에 인류가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자식들이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작별의 슬픔에 괴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식을 땅에 묻고 부모를 가슴에 묻는 효도 과잉의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아기가 아름답게 태어나고 노년에 모습이 추해지는 것은 인류의 번성과 행복을 위한 창조주의 배려인 것이다. 섭리가 그렇다면 사람은 왜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는가? 그것은 효도가 사람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가르쳤지만 이제는 힘없이 늙고 아픈 부모를 배려하고 공경하는 일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인간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자식 사랑과 부모에 대한 효도는 부모 자식 간의 마땅한 도리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내 말의 의미를 모든 자식들도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분명하게 깨달을 것이다. 세상의 기존 질서들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무질서화의 이 와중(渦中)에서 어떤 도리를 보존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가려내기 쉽지 않지만 나는 효도가 몇 가지 지킬 가치가 있는 도리의 하나라고 확신한다. 기존의 모든 도리를 부정하면 인간 사회의 기본 질서가 뿌리부터 흔들릴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도리는 곧 닥쳐올 AI로봇 시대에 인류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생명줄이 될지도 모르겠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공경(효도)이 균형을 이루는 세상, 가족사진 속에 조부모가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세상, 학원보다 성묘와 세배가 뒤로 밀리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우리 손주의 손주들이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설날 손주들에게 세배를 받고 세뱃돈을 주는 기쁨이 세세년년(世世年年) 지속되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3-04 0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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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437> 사라진 고향의 이름 (2)
사라진 것은 동네 이름만이 아니었다. 우리 동네의 이곳저곳에 붙어있던 기무골, 장안이, 미루터, 각굴, 됨빼미, 사나다리, 초당골짜기 같은 다양한 이름도 함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이름들은 동네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 곳에 드나들면서 그곳의 지리적 특징에 따라 자연스레 그리 붙였을 것이다. 이런 이름들은 동네 이름들과는 달리 행정지도 같은 곳에도 등장한 적이 없으니 앞으로도 영원히 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흔적도 없어진 그 이름들이 그립고 애처러워 짧은 기억을 더듬어 몇 자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역시 챗지피티의 설명을 인용하지만, 설명의 타당성은 ‘믿거나 말거나’이다.먼저 동네 뒤쪽에 있는 동남향의 낮은 언덕을 ‘기무골’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에 볕이 잘 들어서였는지 산소 몇 기가 있었다. 쳇지피티는 김씨 집안과의 관련성을 제시했지만 우리 동네가 이씨 집성촌인 점을 생각해 보면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 김이 자주 서려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동네에서 독쟁이로 가려면 ‘장안이 고개’라는, 높지는 않지만 좀 긴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고갯길 좌우에 있는 나무들 때문에 늘 어둑어둑해서 넘을 때마다 웬지 약간 무서운 느낌이 드는 고갯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 때에는 그 고개를 넘다가 귀신이나 여우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곤 했었다. 챗지피티는 ‘장안이 고개’는 “독쟁이 같은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인도하는 고갯길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 고개 너머에 ‘독쟁이’라는 동네가 있긴 했지만, 작은 동네에 불과했기에 이 해석에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 ‘각굴’은 “이름 그대로 꺾이고 각(角)진 골짜기다. 물길이 한 번에 내려가지 않고 방향을 틀며 흐르는 곳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됨빼미’는 “깊고 눅진한 저지대, 즉 물이 잘 고이고 땅이 무른 곳으로, 논이나 습지로 쓰인 땅”이라고 한다. 이 설명은 실제 상황과 딱 맞는 것 같다. 이처럼 땅 이름들은 그 땅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설명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나다리’는 “둑을 넘거나 골짜기를 가로지르며 오르내리던 험한 통로로, 짐을 지거나 나이가 든 이들이 늘 조심해야 할 곳”이란다. 실제로 논 아래 작은 개울은 ‘작은 사나다리’, 멀리 큰 논 밑에 있는 개울을 ‘큰 사나다리’라고 불렸다. 마지막으로 ‘초당골짜기’는 풀로 엮은 작은 움막이 있던 골짜기”라고 한다. 움막을 본 기억은 없지만, 더 전에 그런 집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초당골짜기에는 물이 풍부해서 동네 여자들이 바가지로 물을 퍼서 빨래를 할 수 있는 우물이 있었다. 물이 흘러 넘쳐 만들어진 논에는 미나리, 그리고 돗자리를 만드는 재료가 되는 왕골이 저절로 자라곤 했다. 동네 앞 논이 많은 곳에 ‘방아다리’라고 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방아나 다리를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더 옛날에는 물레방아가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처럼 동네 구석 구석에 이름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농민들의 삶이 땅에 가까웠다는 뜻일 것이다. 지난번 글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삼바지, 한둘, 매밭이란 동네 이름을 이번에 추가하기로 한다. 장안이 고개를 넘어서 좀 더 가면 ‘삼바지(삼받이)’라는 동네와 ‘한둘’이라는 동네가 나오는데, 삼바지에는 한약방이, 한둘에는 한의원이 하나씩 있었다. “‘삼바지’는 길과 골이 세 갈래로 갈라지거나 모이는 마을이고, ‘한둘’은 집이 한두 채 있는 동네였을 것”이라고 한다. ‘매밭’이라는 동네는 기무골 뒷산을 넘으면 나오는데, 이는 “풀을 매며 일군 밭이라는 뜻으로, 김포 검단처럼 물과 땅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던 곳에서는, 매밭이 곧 개간의 시작점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곳에 매(罵)가 많이 날아와서 매밭이라고 불렀나 생각했었다. 이런 동네 안 이름들과 동네 이름들을 함께 놓고 보면, 하나의 공간 구조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사라진 지명들을 다시 불러보면 우리가 어떻게 땅을 이해하고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아, 인걸(人傑)은 물론이고, 산천마저 의구(依舊)하지 않구나.<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2-18 0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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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36> 사라진 고향의 이름 (1)
사라진 고향의 이름 (1) 내 고향은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당하리 신기(新基) 부락이다. 동네 사람들은 ‘신기’ 보다는 ‘새텃말’이라고 불렀다. 우리 동네는 1995년 1월에 인천광역시 서구에 편입되었고, 금년 7월부터인가 검단구로 바뀐다고 한다. 그 새텃말이 2015년 검단 신도시 개발 공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불도저가 산과 개울, 밭, 논 등을 밀어 부쳐 광활한 평야를 만들더니 그 위에 엄청난 규모의 고층 아파트 단지를 만들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도 이런 상전벽해가 없다. 논과 밭은 물론 내가 살던 집마저 흔적없이 사라졌다. 다행히 수용(收容)을 피해 하나 남은 작은 선산(先山)에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모셨다. 거기 산소에 갈 때면 멀리 보이는 옛 동네를 바라보며 ‘저기쯤이 우리집 자리일까?’ 하며 허허로운 마음을 달랜다. 고향이 사라지니 자연히 동네 이름들도 잊혀져간다. 이미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동네 주변에는 둑실, 고꾸랑굴, 보무굴, 바랫벌, 괭메이, 매밭, 족조리, 바리미, 독쟁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갖고 있는 마을(부락)들이 있었다. 이런 이름은 누가 뜻을 세워 지은 것이 아니라, 세월과 함께 저절로 그리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 이름의 상당수는 ‘새텃말’이 ‘신기(新基)로 바뀐 것처럼 왜정 때 엉터리 한자어로 바뀌었다. 이들 동네가 왜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평생 궁금하였지만, 내 짧은 실력으로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었다. 이때 문득 전지전능(?)한 비서인 챗지피티에게 가볍게 물었더니, 요샛말로 신박하게도 척척 답변을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챗지피티는 몰라도 아는 척하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일단 이 정도의 답변을 들은 것도 큰 수확이었다. 기쁜 마음에 그 답변을 정리하여 이하에 소개한다. 챗지피티에 의하면 새텃말의 앞 동네인 ‘둑실’은 “방죽을 쌓아 물을 다스리던 마을의 중심이었다. 둑에서 논농사가 시작되었으니 ‘둑실’은 공동체의 생존을 지탱하는 핵심 공간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둑실에 큰 둑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더 옛날에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둑실의 왼쪽 건너편 깊은 곳에는 ‘고꾸랑골’이라고 하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지세(地勢)가 갑자기 꺼지고 급해져 발을 헛디디면 고꾸라질 것 같은 동네”라는 의미라고 한다. 둑실 오른쪽 산너머에 있는 ‘보무굴’은 “낮은 물막이 시설인 ‘보’가 있었거나 무너졌던 골짜기를 가리키는 이름”이란다. 또 우리 동네를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넓게 펼쳐진 ‘바랫벌’은 “작은 평야처럼 보이는 들판으로, 김포평야 특유의 저습지(低濕地) 농경 환경을 정확히 전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나는 ‘멀리까지 바라다 보이는 들판’이라는 의미의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바랫벌이 옛날에는 ‘저습지’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동네 우측 뒤에 있는 ‘괭메이(광명 光明)’라는 동네는 “괭이로 일군 밭을 뜻하는 이름으로, 논보다 앞선 개간의 기억을 품고 있다”고 한다. ‘괭메이’의 옆 동네인 ‘매밭’은 “매가 많이 날던 밭”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 동네 뒤에 있는 됭고개(된고개,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면 ‘족조리(족저, 足低))’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이는 “둑과 들 사이에 물길이 좁아지며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로, “족조리처럼 오므라든 지형에서 물고기를 잡고 물을 가두던 풍경이 연상된다”고 한다. 글쎄, 쉽게 동의는 안되지만 달리 떠 오르는 생각도 없다. 족조리 우측 멀리 있는 ‘바리미 (발산, 發山)’라는 동네는 들판과 구릉이 맞닿는 끝자락에 있었는데, 이는 “넓은 벌의 가장자리이자 생활권의 경계를 알려주는 지명”이란다. 끝으로 우리 동네 좌측 산너머에 있는 ‘독쟁이’는 내 짐작대로 “옹기 독을 만들던 마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지명(地名)은 오랫동안 거기에 살아온 사람들이 땅의 특징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옛 지명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가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왔는지 기억나게 하는 일이다. 고향이 사라지고 지명마저 잊혀지니 아련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2-04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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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35> ‘제약산업학’ 교과서
우리나라의 약학 교육은 일제 치하인 1915년 설립된 조선약학강습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주된 교육 목표였던 의약품의 조제는 그 후 나라가 독립되고 중진국을 거쳐 선진국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점차 제약, 용약(用藥, 임상약학), 창약(創藥, 신약개발)으로 진화되었다. 이에 맞추어 교과목에 새로운 학문이 추가되면서 약학교육의 정체성이 불투명해질 정도로 학과목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약학교육의 개선은1967년 내가 약학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약학계의 묵은 과제가 되어 있었다. 약학 교육의 정체성 문제는 사실 제약, 용약, 창약이라는 세 분야를 망라하여 가르치려고 하는 과욕에서 야기된 것이다. 따라서 욕심을 줄여서 제약, 용약, 창약에 공통으로 필요한 지식만을 엄선하여 교육하는 외에 달리 해결책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약춘 342). 문제는 필요한 지식만을 엄선해서 커리큘럼을 개선하는 방법론이다. 그동안에는 약대 교수들이 모여, 기존의 학과목들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선을 시도해 왔는데, 교수들의 과목 이기주의와 제한된 안목 때문에 의미 있는 개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제는 약대 교수들의 비중을 대폭 줄인 범약계 인사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논의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이때 1) 우선 기존의 구태의연한 학과목들을 과감하게 분해하여 생긴 지식의 요소들을 전부 한 통에 넣는다. 2) 새 시대에 요구되는 지식들을 이 통에 추가한 후 균질하게 섞는다. 3) 제약, 용약, 창약에 공통으로 필요한 핵심 지식 요소들만을 건져 내 체계적으로 꿰어 새로운 학과목들(커리큘럼)을 만든다,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여러 모양의 구슬(지식)들을 꿰어 아름다운 목걸이(학과목)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해 보인다. 최근 나는 벌써 2013년에 ‘제약산업학(製藥産業學, Pharmaceutical Industry)’이라는 새로운 교재가 발간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책은 약학의 3대 목표를 추구하는데 필요한 최신의 공통 지식들을 종합적, 체계적으로 꿰고 있어, 마치 필요한 구슬들이 잘 꿰어진 아름다운 목걸이 같아 보였다. 이 책은 제약산업 및 의약품개발의 개요, 신약개발 후보 선정, 유효성 및 신약의 체내동태 평가, 비임상시험, 의약품의 지식재산권, 합성신약의 연구개발, 천연물 신약 및 개량신약의 개발, 바이오의약품, 백신과 혈액제제, 유전자 및 세포기반 치료제, GMP, 원료의약품 및 완제의약품의 개발, 신약의 허가, 국제공통기술문서(CTD) 작성개요, 신약의 기준 및 시험방법 설정, ICH 가이드라인과 각국의 허가제도, 시판 후 안전관리, 산업전략, 의약품마케팅, 국내신약개발사례 등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대표 저자인 이봉용 박사는 머리말을 통해 “약학대학 6년제 학제개편에 따라 제약 및 공직, 연구직 등의 직무수행에 필요한 지식을 약학대학의 핵심교육과정(산업약학)에 포함하게 되었다. 이 ‘제약산업학’은 산업현장에서 의약품의 제품기획, 연구, 개발, 생산, 허가, 유통 등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실질적이고 종합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저술되었다. 특히 다른 약학전공서적들과의 중복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세부 기술이나 방법의 나열을 지양하고 이론적 서술보다 의약품 개발 현장에서 바로 활용될 수 있는 총체적 지식을 학습하도록 구성하였다. 또 각종 허가 규정 및 개발 프로세스와 의약품의 해외 허가제도도 소개하였다. 이 책의 저술에 참여한 산업계, 관계 및 학계의 여러 전문가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하였다. 2025년에 발간된 제4개정판(대표저자: 이봉용, 김애리)에는 제약바이오산업의 연구개발, 시장 동향과 국내 신약 연구개발 사례 등이 추가되어 있다. 끝으로 ‘제약산업학’은 제약, 용약, 창약이라는 3대 목표에 공통으로 필요한 지식을 망라하여 체계적으로 다룸으로써, 기존의 학과목수를 줄이고 커리큘럼을 개혁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의 선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미 제약산업계에 종사하는 분들께서 제약 및 창약 등 약학의 전모를 통찰하는 데에도 큰 참고가 될 것이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1-21 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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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34> 사람을 무서워하는 나라, 일본(15) - 미래형 동사를 잘 안 쓰는 일본어.
사람을 무서워하는 나라, 일본(15) - 미래형 동사를 잘 안 쓰는 일본어 일본어에는 신기하게도 미래형 동사가 없다. 예컨대 ‘내일 가겠습니다’라는 의미로 말을 할 때 ‘아시다 이끼마스(明日 行きます)’라고 한다. 여기에서 ‘이끼마스’는 ‘간다’라는 의미의 현재형 동사이다. 또 ‘먹겠습니다’라고 할 때도 ‘먹습니다’라는 의미의 현재형 동사를 써서 ‘다베마스(食べます)라고 하고, ‘갖고 오겠습니다’라고 할 때에도 현재형인 ‘못데기마스(持って来ます)’를 사용한다. 왜 이처럼 미래를 현재형 동사로 말할까? 챗지피티에게 물어보니, 일본어에서는 ‘시간’보다 ‘상황·확정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설명이다. 나는 그 이유를 내 지론(持論)대로 일본인들이 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어디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가겠습니다’라고 미래형으로 대답하면, 명령에 즉시 순종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우려가 있는데, 그게 두려워서 ‘네 갑니다’라고 하는 현재형 동사로 대답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디에 가서 무언가 부탁했을 때 ‘네, 고객님’이라는 대답 대신 ‘잠깐만이요’라는 말을 들으면 살짝 기분이 나빠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형을 써서 미래를 말하는 경우가 있다. 옛날에 중국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았다. 기다리던 손님이 지쳐 독촉을 하면, 종업원은 예외없이 ‘네네 지금 나가요’라고 대답한다. 물론 그 대답은 대개 거짓말로 그 후로도 십중팔구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만약 이때 종업원이 솔직하게 ‘대충 10분 정도 기다리시면 음식이 나갈 겁니다’라고 미래형 동사를 써서 대답을 한다면, 아마 손님은 ‘아니 여태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란 말이냐?’라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업원은 거짓말이지만 ‘네네 금방 나갑니다’라고 현재형 동사로 대답함으로써 손님의 독촉에 즉각 순종(順從)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현재형 동사를 써서 대답하는 어법(語法)이 생겼을 것이라는 말이다. 무례할 정도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말버릇이 있을 정도이면, 사무라이가 활보해서 유난히 사람을 두려워했던 일본에서는 오죽 말을 조심해서 했겠는가? 그래서 ‘어디 좀 다녀와라’라는 명령을 들으면 ‘네네 지금 갑니다’라는 즉각적인 순종의 의미로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 동사인 ‘行きます(갑니다)’라고 대답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일본에 비하면 우리는 대개 동사의 현재형과 미래형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사용한다. 고 이어령 선생은 우리말의 특징의 하나로, 과거와 미래의 어느 날을 가리키는 용어가 별도로 정해져 있다는 점을 들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과거의 날을 가리키는 어제, 그제 (그저께), 긋그제(긋그저께)가 있고, 미래를 가리키는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라는 말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동사의 미래형이 없는 일본어에도 우리말처럼 내일(あした)이나 모레(あさって) 등 미래를 가리키는 고유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기사 어제나 내일 같은 시간 명사를 함께 쓰지 않으면, 상대방이 현재를 말하고 있는지 미래를 말하고 있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 영어에는 우리말이나 일본어와 달리 내일(tomorrow)이나 어제(yesterday)에 해당되는 단어는 있지만, 그제, 긋그제, 모레, 글피, 그글피에 해당하는 단어는 없다. 이런 면으로 보면 우리말과 일본어가 영어보다 더 발전한 언어 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어령 선생은, 과거와 미래를 가리키는 우리의 말(어제, 그제, 모레 등)이 다 순수한 우리말인데 유독 ‘내일(來日)’만은 한자어를 쓰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고 하였다. 이는 ‘내일은 체험된 시간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날을 생각 속에서 미리 불러온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미래를 현재형 동사로 서술하는 일본어의 습관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본인’의 특성에서 연유(緣由)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6-01-07 0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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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33> 관용
사람들은 일상(日常)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거짓말을 듣거나 한다. 거짓말에는 명백히 사실이 아닌 ‘완전한 거짓말’,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반쯤은 거짓인 말’, 그리고 다만 접대용으로 하는 빈말, 그리고 하나마나 한 말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바로 정상이에요”라고 하는 하산객의 말은 등산객을 격려하기 십중팔구 거짓말이지만 올라가기 힘들어 하는 등산객에게 잠시 위로가 된다. 축구 경기에서 우리 팀이 아직 지고 있을 때 “아직 시간 충분합니다”라고 하는 해설도 대개는 거짓말이다. 그저 시청자를 위로하기 위한 립써비스일 뿐이다. 옛날에는 거짓말이었던 표현이 시대가 바뀜에 따라 거의 참말이 된 경우도 있다. 노인네가 죽고 싶다고 하고, 처녀가 시집 안 가겠다는 말’은 과거에는 대개 거짓말이었는데 지금은 참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로 ‘거짓말과 참말’의 경계가 무너진 사례라 하겠다. 맞는 말이지만 ‘하나마나 한 말’도 있다. “축구에서 첫 골을 넣은 팀이 이길 확률이 높습니다”라든지 “권투에서는 되도록 안 맞고 상대방을 가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코멘트가 그런 예이다. 지극히 당연한, 하나마나 한 말이지만 할말이 없다고 가만있는 해설자보다는 듣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유익이 있다. “방금의 실수를 잊고 경기에 임해야 한다”는 등의 말은 거의 실효성이 없는 말이다. 잊으란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말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선수를 위로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분골쇄신하겠습니다” 같은 정치가의 공언은 거의 백퍼센트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도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겠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일부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하면 전혀 무의미 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거짓말을 평생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직접적인 거짓말은 아니지만 무심코 교통 신호를 위반하거나,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고 차선을 변경하고, 터널에서 전조등을 켜지 않고, 길거리에 침을 뱉거나 담뱃재를 털고, 누군가에게 가족의 취업을 부정 청탁하는 일 등도 실수(失手)라기 보다는 일종의 거짓말이다. 만약에 이런 거짓까지 완벽하게 찾아내 벌을 주는 AI가 발전한다고 하면 일생을 감옥에 가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해서 거짓말이나 실수를 조금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종종 자신의 거짓말이나 실수에는 관대하나 타인의 잘못에는 가혹한 판단을 한다. 이런 도덕적 판단의 불균형으로 사회의 긴장이 날로 증폭된다. 요즘은 가짜뉴스의 극심한 범람, 작은 실언이나 실수에도 큰 비난이 따라붙는 현상 때문에 사람들이 지나치게 예민해지고 공격적이 되었다. 사람들이 점점 관용(寬容)을 잃어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타인의 거짓말과 잘못을 자기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조금 관대하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관용은 불법이나 악(惡)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불완전함을 이해하는 감정적 여유다. 서로를 엄격한 기준에 몰아넣는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분열과 피로를 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체 사진을 찍을 때마다 “파이팅”을 외칠 정도로 싸우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지나치게 싸움을 예찬하고, 경쟁을 강조하며, 상대를 이겨야 한다는 논리로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에는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자”는 예비군의 구호(口號)가 체제 유지의 원동력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남을 공격하기보다 서로의 실수를 감싸는 방식으로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서로 사람답게 사는 길일 것 같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거짓말과 잘못은 불가피한 약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와 상대방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관용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파이팅!을 외치며 살아야 하나? 새해에는 관용을 통해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하고 편안한 곳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12-24 0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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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32> 약학교육학회의 출범
약학교육학회의 출범2025년 11월 21일. 대한약사회 강당에서 한국약학교육학회가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축사를 맡게 된 것을 계기로 나는 1967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한 이후 줄곧 품어 온 약학교육에 대한 생각의 일부를 전하고자 한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첫째는 “왜 이렇게 학과목이 많고 수업시간이 많은가?”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이렇게 많이 배웠는데도 졸업할 때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였다. 교수 생활과 정년퇴임을 거치며 오래 고민한 끝에 그 원인이 약학교육의 지향점이 한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러 방향을 동시에 추구해 왔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즉, 약학이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 제약학, 용약학, 창약학이라는 성격이 다른 세 가지 교육목표가 동시에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약학교육의 첫 번째 목표는 국가 제약산업 기반 조성을 위해 필수적이었던 ‘제약학(製藥學)’ 교육이었다. 두 번째 목표는 약물 사용을 위한 ‘용약학(用藥學)’, 즉 임상약학(臨床藥學) 교육이었다. 약국과 병원 현장에서의 약사 역할을 생각하면 약물의 적정한 사용을 위한 이 교육은 필수적이었다. 약학대학을 6년제로 전환한 명분 역시 임상약학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세 번째는 국가 보건의료산업 발전과 함께 필요성이 커진 ‘창약학(創藥學)’, 즉 신약개발(新藥開發) 관련 교육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지향점이 다르지만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약학의 핵심 영역이 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복합적인 목표를 제한된 교육 기간 안에 모두 충실하게 담아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3대 목표를 체계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마스터플랜 없이 필요할 때마다 과목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커리큘럼이 구성되다 보니 교육과정은 점점 복잡해졌고 학생들은 약학의 목표가 무엇인지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약학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라도 커리큘럼 정비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핵심은 3대 목표를 교육연한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재편하는 것이다. 3대 목표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제한된 기간에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공통적으로 필요한 ‘핵심공통지식(核心共通知識)’만을 엄선하여 교육해야 한다. 이때 내용이 빠지거나 중복되지 않도록 정밀하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구태의연한 과목은 과감히 폐지해야 한다. 약사국가시험 과목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는 이제 유효하지 않다. 핵심공통지식을 선정한 뒤에는 6년 동안 학년별로 교육의 깊이를 단계적(段階的 深化)으로 높여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졸업 후 제약·용약·창약 중 어느 분야로 진출할지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될 것이다. 최근 약학대학 교수들의 연구는 눈부신 발전을 이어가고 있지만 일부 연구는 약학의 3대 목표와 방향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새 커리큘럼에 따라 신임 교수를 채용해 나간다면 이러한 문제는 점차 해소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점은 교수와 학생들의 정기적인 약업현장 견학(見學)을 제도화하자는 것이다. 약국, 병원, 제약공장, 연구기관, 규제기관 등 약업의 다양한 현장이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교수는 생동감 있는 강의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학생들의 진로를 제대로 지도하기도 어렵게 된다. 학생들 역시 견학을 통해 자신이 어떤 진로를 선택할지 더 깊이 고민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약학교육평가원이 대학 평가 시 현장견학 여부를 반영하면 좋겠다. 새로 출범하는 약학교육학회가 약학교육의 방향성을 재정립하고 효과적인 교육모델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 약업계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졸업생뿐 아니라 교육학자들도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약대 교수만이 교육 전문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특히 커리큘럼 개혁에서는 교육학 전문가의 기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새 학회에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12-10 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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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31> 규제가 진흥이다
규제가 진흥이다올해로 한국FDC규제과학회(회장 이의경)가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 학회의 전신인 ’한국의약품법규학회’의 창립회장인 나로서 특히 감개무량한 일이다. 이 학회는 규제기관과 피규제기관인 산업계 사이의 비생산적인 불통과 오해를 해소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규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2005년 출범되었다. 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은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에 이은 제3의 과학이다. 순수과학이 ‘왜’를 묻고, 응용과학이 ‘어떻게’를 탐구한다면, 규제과학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Which)’를 고민한다. 일본에서는 규제과학을 ‘평가과학(評價科學)’이라 부르는데, 약효와 부작용을 저울질하여 의약품의 가치를 평가하고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기준을 세운다는 점을 표현한 명칭이다. 약학을 평가과학의 대표적 학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의약품 안전성은 지난 세기의 비극적 사건들로부터 얻은 교훈의 결실이다. 탈리도마이드 참사가 대표적인 사건이다. 수많은 기형아가 태어나고 죽은 그 사건 이후, 제약회사는 “당시 규제기관이 요구한 모든 자료를 제출했다”고 항변했다. 문제는 자료를 요구한 규제 자체가 부실했다는 데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교훈으로부터 전 세계적으로 의약품 안전에 관한 법규가 정비되어 오늘날의 안전한 의약품 제도가 마련되었다. 예컨대 의약품의 체내 흡수·분포·대사·배설(ADME) 과정을 분자 수준에서 규명하게 된 것은 관련 규제의 적용 덕분이었다. 만약에 생체이용률과 생물학적동등성(BE)의 개념이 제도화되지 않았다면, 제네릭 의약품이 정당한 지위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BE 시험 제도의 정착이 제네릭을 장려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건강기능식품 산업 또한 관리제도가 정비되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다. 규제가 지나치게 부실했다면 오히려 산업은 신뢰를 잃고 위축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규제는 진흥이다”라는 말은 결코 역설이 아니다. 철로 없이 달리는 기차를 상상할 수 없듯이, 규제 없는 산업 발전은 존재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규제의 유무가 아니라, 규제의 품질이다. 의미가 명확하고, 기존 규제와 조화를 이루며, 시대를 선도하는 규제가 바로 산업을 진흥시킬 수 있는 좋은 규제이다. 좋은 규제를 만들려면 우선 규제기관의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실력 없는 선생의 밑에서 우수한 제자가 배출될 수 없는 것처럼, 규제기관의 전문성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관련 산업이 성장할 수 없다. 규제기관의 지나친 순환보직은 전문성을 저해한다. 규제는 서두르지 말고 충분한 토론과 숙의를 거쳐 만들어야 한다. 요식적인 ‘입법예고’만으로는 좋은 규제가 태어나기 어렵다. 충분히 듣고, 연구 검토하여 현장에 적용 가능한 합리적 규제를 찾기 위한 ‘끝장 토론’이 필요하다. 제조 과정이 품질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규제는GMP정신과 일맥 상통한다. 즉 제정 과정이 투명하고 과학적일 때 신뢰할 수 있는 결과물(규제)이 나올 수 있다. 좋은 규제가 태어날 수 있는 제도적 토양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인식 하에 2005년 의약품법규학회가 창립되었다. 규제기관과 산업계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론의 장에서 함께 규제의 품질을 향상시켜보자는 취지에서였다. 이정석, 권경희 박사의 헌신, 그리고 전인구 차기 회장 등의 리더십이 학회의 초기 성장과 조직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학회가 나아갈 방향은 미래지향적이고 고품질인 규제의 창출이다. 예컨대 관련 법규의 향후 지향점, 의약품 조제 후 유효기간 설정, 생물의약품의 유사성 평가와 국제 조화 등 선제적으로 연구해야 할 규제는 매우 다양하다. 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건강기능식품을 ‘건강기능보조제’로 명칭을 바꾸는 방안 등 현행 규정의 정비도 검토해야 한다. 창립 20년, 학회는 이제 성년이 되었다. 규제과학은 단순히 규제 절차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잣대를 세우는 평가과학이다. 잘 만들어진 규제는 족쇄가 아니라 진흥의 길라잡이다. 우리 학회가 앞으로도 세계적 수준의 규제가 만들어지고 시행될 수 있도록 돕는 공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11-26 1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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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30> 근엄하지 않은 아버지
며칠 전 둘째 아들로부터 ‘실(實)없는 소리, 아재개그, 허튼 소리, 유머가 많은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부모가 근엄한 훈계를 많이 하는 가정이 별로 화목해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일종의 훈계공포증 때문에 부모와 함께 있기를 힘들어 한다. 사실 훈계의 효과도 의문이다. 훈계의 내용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자식도 많고, 부모가 꼭 옳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나친 훈계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 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국민학교에 다닐 때 집에 들어서면 우선 엄마부터 찾았다. 엄마는 늘 따듯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버지는 내심 안 계셨으면 하고 바란 적이 많았다. 젊으셨을 때의 아버지는 자주 이것 저것 지적하고 나무라셨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몸과 마음이 좀 불편했다. 그럼 나는 우리 두 아들에게 어떤 아버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궁금한 나머지 애들이 중학생 정도가 되었을 때 물어봤다. “너희들은 내가 집에 있는 게 좋으냐, 없는 게 좋으냐?” 고.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내가 집에 있는 게 더 좋다고 대답해 주었다.지금은 늙어서 근엄할 힘도 없지만, 나는 평생 아이들에게 근엄해서 불편한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배경에 두 개의 그림이 있다. 하나는6촌 형님 세 분이 당신들의 아버지(내게 5촌 당숙 아저씨)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우리집에 오신 그림이다. 인천에서부터 김포 우리집까지 제법 먼 비포장 길을 네 분이 마치 친구처럼 사이 좋게 타고 오셨다. 이 장면은 1950~60년대의 봉건 시대에 가히 충격적일 정도로 멋있었다. 나도 나중에 꼭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두번째 그림은 1960년대 당시 인기 대중 잡지인 ‘아리랑’ 에서 본 화보였다. 유명한 남자 배우인 김동원씨가 아들인 가수 김세환씨와 마치 친구 사이처럼 다정하게 당구를 치는 모습이었다. 당구를 치러 다니면 아버지에게 혼나던 시절이었으니, 이 화보가 얼마나 충격적이었겠는가?이런 계기들을 통하여 나는 이 분들(아저씨와 김동원씨)을 새 시대의 아버지 상(像)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영향이었을까? 지금껏 나는 아이들에게 근엄한 훈계 따위를 해오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내가 자식들에게 너무 근엄하지 않다고 아내가 가끔 불평할 정도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애들은 훈계를 안 해도 건전하게 잘 성장하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들, 며느리, 손주들과 실없는 유머와 헛소리, 또는 아재개그를 주고받으며 지낸다. 솔직히 가끔은 애들이 부모를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 서운할 때도 있지만, 나는 둘째 아들의 말처럼 아버지의 비근엄주의가 대를 이어 흘러가기를 희망한다. 둘째 아들이 전해준 다른 명언 세 개를 추가한다. 하나. 우리나라 운동 팀이 국제 시합을 할 때 중계 방송을 너무 객관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팀 반칙에는 관대하고 상대방 반칙에는 엄격하게, 다소 주관적으로 중계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 있다는 것이다.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해가 간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와 다투게 되면 아들은 지나친 객관성을 버리고 내 편을 들어 줄 것 같은 안도감(?)도 들었다. 자식과 부모 사이가 꼭 객관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아들은 대선 투표하러 갈 때 부부 간에 서로 따른 후보를 찍으려면 아예 투표소에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 후 우리 부부는 투표하러 가기 전에 굳이 갈 필요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한다. 참고로 우리 가족은 정치 문제를 가지고 대화하지 않는다. 대화가 많다고 꼭 좋은 게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셋. 누가 제 3자를 평할 때에 ‘사람은 착해‘ 한다면, 그 사람이 무능해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착해 빠져서는 이 험한 세상을 못 산다’ 고 하지만, 나는 우리 손주들이 시집 장가 갈 때에 ‘폭삭 속았수다’ 의 애순이 아빠처럼 착한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11-12 0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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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29> 건강기능보조제
2002년 「건강기능식품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건강기능식품’이라는 개념이 제도화되었다¹. 그 이전에는 영유아 조제식, 체중조절식, 특수질환자용 특수영양식품 등 일부만 관리되었으나, 1990년대 이후 비타민·무기질·오메가-3 등 건강보조용 제품이 급증하면서 제도적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정부가 미국의 Dietary Supplement Health and Education Act(DSHEA, 1994)²와 일본의 특정보건용식품(FOSHU) 제도³를 참고해 별도의 관리 체계를 마련한 것이다. ‘건강기능식품’이라는 명칭은 대상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식품’이라 하면 일상적으로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는 밥, 채소, 과일 등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건강기능식품은 외관(外觀)이 정제, 캡슐제, 앰플제 등 의약품 제제와 유사하다. 또 철분·비타민 A·오메가-3 등 고용량 섭취 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성분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철분 과다 섭취 시 간 손상이나 변비가 발생할 수 있고, 비타민 A는 임산부가 과량 섭취 시 태아 기형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가 보고되어 있는 것처럼, 건강기능식품의 외관과 작용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섭취하는 ‘식품’과는 거리가 멀다. 건강기능식품은 식품보다는 ‘제제(製劑)’에 가까운 특성을 보인다 따라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큰 ‘건강기능식품’보다는 ‘건강기능보조제’라는 명칭이 더 적절하지 않은가 싶다. 건강은 본래 균형 잡힌 식사, 운동, 수면, 절제된 음주와 금연, 긍정적인 생활습관에서 비롯된다. ‘보조제’라는 용어에는 이러한 생활습관으로 충족되지 못하는 부분을 메워주는 조연(助演), 즉 주(主)가 아니라 보조(補助)라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 그러나 이를 ‘(건강기능)식품’으로 규정하는 순간 소비자는 이를 건강을 지켜주는 주연으로 오해하기 쉽다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보조제’로 개념을 정한 용어가 주류를 이룬다. 미국은 ‘Dietary Supplement(식이보충제)’라고 명명하여 ‘보충(supplement)’이라는 성격을 분명히 하였고², 일본 역시 ‘특정보건용식품(FOSHU)’을 통해 특정 목적에 한해 보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를 강조하였다³. 반면 우리나라의 ‘건강기능식품’은 ‘기능성’을 강조하면서도 ‘식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소비자에게 의약품 수준의 효능을 기대하게 만들거나 반대로 간식(間食)처럼 남용하게 할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만약에 ‘보조제’라는 이름을 사용할 경우 소비자는 “이것이 밥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기업 역시 무분별한 과대광고가 아닌 보조적 역할을 중심으로 홍보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의료인 또한 환자와 소비자에게 보조제의 올바른 위치를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만성질환 환자가 여러 약물을 복용할 때에 ‘건강기능식품’이라는 명칭보다는 ‘건강기능보조제’라는 명칭이 약물과 상호작용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인상을 주는 데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우려 때문에 제조 및 판매업자들이 ‘보조제’ 대신 ‘식품’이라는 이름을 선호할 것이다. 요컨대 ‘건강기능식품’이라는 부정확한 명칭을 ‘건강기능보조제’라는 솔직하고 정확한 이름으로 바꾸기를 제안한다. 명칭의 변화는 단순한 언어적 조정에 그치지 않고, 국민 인식을 개선하고, 과잉 섭취를 방지하며, 궁극적으로 국민 건강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보건복지부, 「건강기능식품에 관한 법률」, 2002.2. U.S. Congress, Dietary Supplement Health and Education Act (DSHEA), Public Law 103-417, 1994.3. Ministry of Health, Labour and Welfare (Japan), Foods for Specified Health Uses (FOSHU) 제도 자료, 1991.<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11-03 0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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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28> 칠전팔기(七顚八起)
칠전팔기, 일곱 번 쓰러져도 여덟 번 일어선다는 이 짧은 말은 삶의 불씨처럼 우리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며칠 전 TV에서 하지마비(下肢痲痺)라는 절망을 껴안고도 초인적인 재활을 하여 장애인 역도선수로 거듭난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보았다. 그의 땀과 눈물에 젖은 칠전팔기 이야기는 희망의 씨앗이 되어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또 오래 전 링 위에서 네 번 쓰러졌다가 다섯 번째에 KO 역전승을 거둔 챔피언 홍수환 선수의 이야기 역시 세월을 넘어 아직도 생각이 난다.링컨은 수많은 낙선(落選)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어 분열된 나라를 이끌었고, 에디슨은 수천 번의 실패를 딛고 인류 문명을 바꿀 전구(電球)를 발명하여 세상을 밝게 만들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에는 좌절 끝에 피어난 꽃이 적지 않다. 그 꽃의 향기는 오늘도 시들지 않고, 아직 땅에 쓰러져 있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건넨다.그러나 사실 현실은 냉혹하다. 끝내 일어나지 못한 이들의 숫자가, 일어난 이들보다 훨씬 더 많다. 홍수환 선수 이후, 다시는 네 번의 쓰러짐 후에 다섯 번째의 공격으로 승리를 쟁취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넉다운된 삶을 다시 세우려 애쓰지만 4전5기, 7전8기의 기적은 아무에게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칠전팔기의 주인공에게 보내는 우리의 박수는 단순한 환호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운명의 경계에서 울려 퍼지는 깊은 존경이다.배려와 친절에 관한 미담(美談)도 많다. 한국 제약 산업의 선구자인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1895~1971) 박사는 소년 시절 독립정신을 품고 미국 유학을 꿈꿨지만 가난해서 길이 막막했다. 마침 한국에 선교사로 와 있던 미국인 목사가 그의 총명함과 성실함을 알아보고 직접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유 박사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뒤 귀국해 유한양행을 창립했고 한국 제약 산업과 교육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낯선 타국인의 작은 배려가 한 청년을 나라의 큰 인물로 성장시킨 사례이다.미국 시골의 여관 종업원인 어떤 청년이 비 오는 날 낯선 나그네에게 자기 방을 내어주며 묵어 갈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그 나그네는 뉴욕에서 사업을 하는 큰 부자였다. 훗날 그는 그 청년에게 뉴욕의 큰 호텔 경영을 맡겼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느끼게 된다.그러나 정작 현실은 이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배려와 친절을 베풀고도 오히려 보상은커녕 상처받는 경우도 많다. 일평생 봉사하고 가진 것을 나누었지만 끝내 마음의 보답을 받지 못하고 잊혀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아마 그래서 위에서 예를 든 미담(美談)이 더욱 귀하고 애틋하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사람들은 칠전팔기에 성공한 이들, 또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을 주목한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그들을 집중 조명한다. 그러나 아직 행운을 잡지 못한 사람이나 좌절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한 이들에게는 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일등만 주목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풍자(諷刺)가 유행했겠는가?칠전팔기는 분명 아름다운 덕목(德目)이지만 아직 일어서지 못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끈기가 부족하다, 성실하지 못하다’는 둥 섣부른 입방아를 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가혹한 일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다 말 못할 사정이 있고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사실 칠전팔기와 행운은 노력 보다는 기적의 결과인 결과가 더 많다. 말기암 환자가 거짓말처럼 회복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는 그런 기적이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 그 비밀을 알지 못한다. 그 비밀은 우리의 이해 범위 저 바깥에, 하나님의 주관 영역에 있는 모양이다. 정부와 사회는 의료보험 등의 사회보장 제도를 통해 아직 재기하지 못한 사람들, 행운을 잡지 못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손을 더 내밀어야 한다. 말하기 민망하지만 우리들도 그래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같은 공동체’의 식구라는 이름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다.<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10-15 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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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27> 바이오의약품 체내동태 워크숍
바이오의약품 체내동태 워크숍 2025년 8월 22일, 제7차 <PK Bootcamp@SNU> 워크숍이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신약개발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이 워크숍은 2018년 약물동태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Dr. Yuichi Sugiyama 교수(일본 동경대 약학부, RIKEN 연구소, Josai 국제대학)의 도움으로 시작되어, 지난 7년간 국내 연구자들의 역량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 워크숍은 참가자들의 피드백을 반영하며 난이도를 조절하고 맞춤형 주제를 선정하는 과정을 거쳐, 국내 약물동태학 분야의 핵심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올해 워크숍은 13명의 국내 교육팀이 상반기부터 자체적으로 준비한 강의 자료와 실전 문제로 구성되었는데, 바이오의약품 개발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20개 제약업체에서 32명, 8개 정부 출연 연구소 및 규제 기관에서 15명, 19개 대학교 연구실에서 73명 등 총 120명이 교육에 참여했다. 워크숍 교육팀은 2018년부터 팀을 이끌어온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정석재, 이우인 교수를 비롯해 다양한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기존 멤버인 안성훈 교수(강원대학교), 구태성 교수(충남대학교), 맹한주 교수(가천대학교), 신소영 교수(중앙대학교), 이경륜 박사(한국생명공학연구원), 윤인수 교수(부산대학교), 채윤지 교수(우석대학교), 이종화 박사(안전성평가연구소)에다가, 올해 새롭게 최영희, 홍은진 교수(동국대학교 약학대학)와 정유성 박사(서울대학교 약학대학)가 합류해 교육의 전문성을 높일 수 있었다. 이번 워크숍에서는 바이오의약품의 개요, 약물동태학적 특성, 제약 현장 적용 사례, 그리고 약리활성 타겟과의 작용에 의한 약물동태(TMDD, target-mediated drug disposition) 모델링을 통한 임상시험 설계 전략 등 매우 흥미롭고 심도 있는 주제를 다루었다. 이론 교육과 함께 조별 실전 데이터 분석 활동을 병행함으로써 참가자들의 이해도를 높였으며, 특히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 약물동태 파라미터를 직접 산출하고 이를 활용하여 항체의약품의 혈중농도 프로파일을 구현하는 PK Simulator app을 제작하여 교육에 활용하였다. 교육과정의 마지막 순서로 서울대 약대 박사 과정 학생이면서 GC녹십자 연구원인 곽희천이 '바이오의약품 약물동태 연구의 실전 분석 세미나'를 진행하여 참석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서울대 약대 미래 선도(先導) 글로벌 리더 약학교육 연구단과 한국 비임상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이번 프로그램은 대학원생들에게는 교육뿐만 아니라 제약산업 현장 연구자들과 활발한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서울대 약대 강건욱 학장은 축사를 통해 "이 프로그램은 신약 개발이라는 목표 아래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특히 현장에 계신 연구자들께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이번 워크숍이 바이오 신약 개발 현장에서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약물동태 워크숍은 해를 거듭하며 재참가하는 제약산업 현장 연구자들이 늘고 있다. 참가자들의 적극적인 질의 응답과 토론, 그리고 높은 설문조사 만족도로 미루어 앞으로의 워크숍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워크숍 측은 워크숍의 실질적인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매년 8월에 열리고 있는 대면 (對面) 교육 동영상을 제작해 참가자들에게 온라인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바이오의약품의 개발은 전세계적으로 매우 핫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바이오의약품은 화학의약품과 달리 분자량이 매우 크고 화학적 구성도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신약개발에 필수 과정인 체내동태를 연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나는 1980년대에 약물동태학, 생물약제학, 약물송달학이라는 약제학의 3대 분야 교과서를 저술했지만, 이제는 약제학 연구의 대상을 화학의약품이 아닌 생물의약품으로 돌려야 할 시기임을 절감한다. 이번에 ‘바이오의약품의 체내동태’라는 시의적절한 주제로 워크숍을 연 후배들의 모습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이 워크숍에 대한 상세 정보는 https://www.pkbootcampsnu.com/을 참조하기 바란다.<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09-24 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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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26> 집들이, 카페 문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결혼해 새 살림을 차리면 이웃이나 친지를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른바 ‘집들이’인데, ‘집들이’란 ‘집에 들어감’ 또는 ‘남을 집에 들임’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집들이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축복하고 공동체와의 유대(紐帶)를 확인하는 우리나라의 문화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신혼부부가 집들이 초청을 하지 않으면, 신랑 친구 몇 명이 작당(作黨)하여 사전 연락도 없이 신혼집(혹은 신혼방)에 들이닥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가서는 식사는 물론 술과 노래, 춤으로 신혼부부를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민폐(民弊)를 심하게 끼칠수록 “우리는 정말 친한 친구 사이”라고 자랑하던 시절이었다. 집들이는 신혼부부의 당연한 통과의례(通過儀禮)였다. 그때는 돌잔치, 생일잔치, 회갑연 같은 집안 행사도 모두 집에서 치렀다. 이런 행사들 또한 모두 일종의 집들이였다. 이러한 문화의 배경에는 (1) 대부분의 여성이 가정주부로 집을 지키고 있었고, (2) 외부에서 잔치를 치를 경제적 여유가 없었으며, (3)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家父長的) 인식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 곧 내가 신혼이던 시절부터 1980년대까지는 부모님의 생신이나 아이들의 돌날이면 예외 없이 친척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들었다. 20평 남짓한 집(주택)의 방과 마루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아내는 밤새 준비한 갈비찜, 잡채, 떡, 국 등을 원형 자개상에 연신 올려야 했다. 잔치가 끝나면 몇몇 손님은 꼭 주무시고 가셨는데, 우리는 요와 이불을 펴드리며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까지 드려야 공식 행사의 제1부가 끝났다. 설거지는 그 이후의 몫이었다. 오늘날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일반화되고, 경제적 여유도 늘면서 가정주부를 혹사(酷使)시키는 집들이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집들이 문화는 사라졌다. 이제 각종 잔치는 행사 전문 외부 업소나 식당에서 치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발이라도 맞추듯 때마침 여기저기 카페가 들어섰다. 경치 좋은 산기슭이나 물가에는 어김없이 카페가 들어섰다. 카페의 시설과 분위기는 웬만한 집보다 오히려 낫다. 사람들은 이제 손님을 집 대신 카페에서 만나려 든다. 집들이에서는 집주인이 바빠 손님과 대화할 틈이 없다. 사실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도 그런 민폐(民弊)성 집들이에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반면에 카페에서는 초청자와 손님 모두가 부담없이 만날 수 있고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니 특히 여성들이 카페를 선호하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어쩌면 카페는 여성들에게 해방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집들이는 일본처럼 사람(남)을 두려워하는 나라에서는 태어날 수 없는 문화로, 우리처럼 ‘남’을 두려워하지않는 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카페 문화가 꽃피고 있다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도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즉 사람을 조금은 두려워하는 사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교회 식구들과 근처 카페에 갔더니, 대기자가 너무 많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분위기가 특별히 좋은 곳도 아닌데 사람이 이렇게 많이 오다니 놀라웠다. 그날 내가 깨달은 것은, 소소한 수다 떨기를 통해 서로 정을 나누고 축복하는 집들이 정신이 카페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카페를 선호하게 되었다는 걱정은 기우(杞憂) 같았다. 다행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카페 문화는 옛날식 집들이가 현대판으로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기 연예인 두 명이 일반 가정집 초인종을 누르고 “저녁 식사 같이 하실까요?”라고 묻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나라에서는 애초에 있을 수 없는 프로그램일 것이다. 우리 방송에서도 실제로 대문을 열어주는 집은 매우 드물었다. 아무래도 이 프로그램은 집들이 문화를 거부하고 카페 문화를 받아들인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09-10 1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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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25> 원로 약사 공장장 10인의 회고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는 지난 2025년 5월 30일 오후 1:20부터 5:30까지 원로 약사공장장 10분을 모시고 좌담회를 하였다. 장소는 서울대 약대 21동 2층 소회의실이었고, 좌담회의 주제는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제약공장들의 초기 상황과 그 후의 발전과정에 대한 회고였다. 이 좌담회는 약학사분과학회의 연례 행사인 ‘약학사 사랑방 모임’의 세번째 행사였다. 좌담회의 녹취록(錄取錄)은 금년 말에 발간될 ‘약학사회지’ 제8권에 실을 예정이다. 이 좌담회에는 백우현, 이남복, 유한용, 홍우일, 문영일, 김태성, 김재환, 윤병호, 차봉진, 이삼수 등 10인의 원로 공장장들과 김진웅(약학사분과학회장), 주승재(약학사회지 편집부위원장) 및 필자 (심창구, 분과학회 명예회장)가 참석하였다. 나는 이 좌담회의 기획에 이어 진행을 담당하였다. 좌담회에 참석하신 분들은 오랫동안 청계약품, 동화약품, 유유산업, 일동제약, 유한양행, 영진약품, 한독약품, 대웅제약, 일양약품, 동아제약, LG 생명과학, CJ, 셀트리온, 태준제약, 보령제약 등 주요 제약회사의 공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신 원로들이다. 만 89~64세이신 이 분들로부터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제약기술의 발전 과정에 대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1960년 대 중반의 우리나라의 제약기술은 연탄불로 과립을 건조하는 회사가 있을 정도로 시설이나 수준이 전근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0여년만인 2010년대 이후에는 GMP 규정에 따라, 또 일부 회사는 스마트 팩토리라는 첨단 시설을 이용하여, 우수한 품질의 의약품을 생산할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는 의약품 생산기술 및 관리 제도의 발전, 제약 설비의 강화 및 공장의 신축, 외국 제약기업과의 합작, 기술제휴 등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모든 과정을 앞장서 견인한 사람들이 바로 약사 기술자들이었다. 이분들의 수고의 덕분으로 우리 국민이 한국전쟁 이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양질의 국산 의약품을 사용하여 건강을 지킬 수 있었다. 이 녹취록에는 이 분들이 국산 의약품의 생산 및 개발 과정, 특히 생산 현장에서 기술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해 온 과정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녹취록을 통해 당시 (여)약사의 취직, 승진 및 이직(離職), 기술직에 대한 회사 내 인식, 약사의 공장 기피 현상 등 제약산업을 둘러싼 사회상(社會相)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 좌담회를 마치면서 나는 우선, 우리나라의 제약산업 기술이 50여년 사이에 정말로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을 실감했다. 즉, 1977년 보건복지부 고시(告示)를 통해 GMP 기준을 제정하였고, 2014년 PIC/S(의약품실사상호협력기구)에 가입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GMP 기준서를 유럽 GMP 수준으로 정비하였다. 이를 통해 원료의약품의 GMP를 강화하고, 밸리데이션(공정 검증) 요건 등을 신설 또는 강화했으며, 또 스마트 공장의 건설, 생산라인의 자동화, 밸리데이션 전문가 확보, 품질 보증(QA) 및 문서 관리의 강화 등을 통해 제약공장의 설비 및 품질관리 레벨을 한 층 높였던 것이다. 둘째, 좌담회에 참석하신 바로 이 분들이 이 변화의 주역(主役)임을 새삼 깨닫고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셋째, 이 분들의 선구자적 경륜을 본받아 국산 의약품의 품질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향상시켜야 되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넷째, 이 좌담회의 녹취록을 통해 우리나라의 제약기술의 발전 과정을 한국약업사(韓國藥業史)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기게 됨에 큰 보람을 느낀다. 끝으로, 고령자와 재택 환자가 엄청나게 늘어나 돌봄 환자에 대한 의약품의 안전 관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오늘날, ‘약은 약사에게’라는 광고를 재개(再開)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약은 약사가 다루는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를 다시 한번 간결 명확하게 국민들 뇌리(腦裏)에 심어 주어야 할 적기(適期)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08-27 0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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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24> 백우현 박사님
백우현 박사님 지난 7월 20일 동창회를 통해 약수(若水) 백우현(白于玹) 박사께서 소천하셨다는 비보(悲報)를 들었다. 병세가 만만치 않음은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빠른 진행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지난 5월 30일 백 박사님을 포함한 원로 제약공장 10분을 모시고 “우리나라 제약공장의 초창기 발전사(가제)”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사전에 백 박사님께 전화를 걸어 그날 와 주십사 부탁을 드렸더니, “요즘 다리에 힘이 없어 통 외출을 안하고 있지만 심박사가 오라면 가야지” 하시며 오겠다고 하셨다. “정 불편하시면 카카오 택시를 보내 드릴까요?” 여쭈었더니 ‘나도 부를 줄 안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다. 5월 30일 12시에 모든 참석자가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 모였는데, 백 박사님은 지팡이를 짚고 몹시 수척해지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평소에 남달리 건강하셨던 분이라 다들 깜짝 놀랐다. 식사 후 서울대 약대 21동 소회의실로 옮겨 오후 6시까지 논스톱으로 좌담회를 진행했는데, 백 박사님은 본인의 공장 생활을 포함한 제약계의 시대상을 상세하게 회고해 주셨다. 나아가 다른 분들의 회고담도 미동도 않고 경청하시면서 중간 중간에 ‘그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하시며 코멘트를 해 주셨다. 백 박사님은 그날 참석자 중 최고령(만 89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이셨다. 이날 좌담회의 내용은 곧 나올 ‘약학사회지 제8권’을 통해 약학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6월 25일, 교회에 다녀와 쉬고 있다가 백 박사님의 전화를 받았다.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지금 나를 만나러 와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웬만하면 ‘와라’ 하실 분이 아닌데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급히 차를 몰아 병실로 갔더니 좀 더 창백해지신 백 박사님이 며느님과 간병인과 함께 계셨다. 백 박사님은 ‘옆의 환자가 신경 쓰이니 밖의 휴게실로 나가자’며 휠체어에 태워 달라 하셨다. 며느님과 간병인은 ‘곧 의사가 회진 와서 어제의 검사 결과를 알려줄 시간이니 그냥 병실에 계시라’고 했지만, 백 박사님은 약간의 신경질까지 내시면서 끝내 휴게실로 나가셨다. 휴게실에서 백 박사님은 “나는 아무 미련이나 원망, 또는 불안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냥 심박사가 보고 싶어 불렀다. 또 한 분 만나고 싶은 분은 보령제약의 김승호 회장님이다. 며칠 후 퇴원하면 요양병원으로 갈 예정이다” 등의 말씀을 하셨다. 다른 말씀은 없었다. 잠시 후 저녁 식사 시간이라 간병인의 부름을 받고 병실로 들어가시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월 20일, 부음을 들은 것이다. 백 박사님은 2023년 3월 펴낸 회고록 약로여정(藥路旅程, 서울대학교 약학역사관 발행) 98-99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나와의 관계를 설명하셨다. “전략.~ 나의 사회생활을 되돌아보면 심창구 명예교수(모교 25회)는 나에게 많은 도움과 조언을 주었고 나는 그의 영향을 받은 점이 많았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2003년 심교수가 식약청장 재직 시 나를 기술자문관으로 위촉하여 활동하게 해 줬고 평양제약 방문도 그의 추천으로 갔었다. ‘종합 실용 의약용어사전’과 ‘팜텍’ 발간에 즈음해서는 많은 도움과 조언을 해 줬으며, 내가 서울대 발전기금에 기부할 때도 그의 자문을 받았다. 심 교수는 내가 주관하는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서 축하와 격려를 해 주었다. 내가 보령제약에 재직 시의 일이다. 심창구 교수가 직장암 수술을 받고 퇴원했을 때 나와 같이 있는 연구소의 성열익(심 교수의 고교 동기생) 박사와 함께 심 교수 내외분을 모시고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심 교수는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고 고마워하니 오히려 내가 무안할 정도다. 나는 필요할 때면 수시로 심 교수의 조언을 구했고, 그럴 때마다 올바른 판단으로 자문해 주었다. 나는 심교수가 정년 퇴임 후 우리나라 약학사 발굴과 정립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우리나라 약계의 보석 같은 존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백 박사님의 과분한 사랑에 감읍하며 영원한 안식을 기원드린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08-06 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