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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나레연 약사의 필리핀 여행기⑤<完>
돌아오는 비행기서
내 나라의 소중함 느껴
가깝지만 먼 나라 필리핀,
아시아 중심국으로 우뚝 서길
당시에 마침 10월 9일 한글날이었는데, 우리의 한글이 얼마나 훌륭한지 또 한글이 또랑또랑하게 살아있는 이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자꾸 느끼게 됐다. 아무리 세계 공용어가 영어로 변해간다 하지만 제나라 있고 제 국민 있고 제 말이 있어야 결국 대접받는 나라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필리핀인들이 모두 영어를 구사하고 국제 사회에서 훌륭히 의사소통을 잘해서 장차 미래가 밝을 것이라 말하는 이도 있지만 실상은 나라는 작지만 뭐든 자기 것이 고유하게 살아있고 또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그 바탕 위에서 영어도 있고 프랑스어도 있고 일본어도 있고 라틴어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재의 필리핀을 외부에서 본 견해로 이렇다 저렇다 평가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언어나 정치나 경제나 무엇이나 간에 그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우리가 외부에서 느끼고 평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는 직접 필리핀을 가서 느껴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곳의 물가가 우리의 5분의 1에서 10분의 1도 더 되는 경우가 있지만 물가가 저렴하면 사실은 살기에 편한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물가가 저렴한 그런 곳에서 상당기간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아 있다.
따지고 보면 국가가 고유의 정통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좋은 제도나 문물을 받아들여 번성하는 것도 한 방편일 수 는 있을 것이다. 지금 미국도 실상은 그렇게 뒤바뀐 경우에 해당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같이 여행을 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보니 대한민국이 얼마나 괜찮은 나라인지 알겠노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이제껏 많은 비행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난 항상 비행기를 탈 때마다 그 경이로움에 늘 감탄사를 연발하곤 한다. 물론 처음 발명한 라이트 형제에게 늘상 감사함은 물론이다. 어떻게 이 많은 화물과 사람을 태우고 시속 800~1000Km로 구름 위 하늘을 유유히 날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비가 오는 것도 눈이 오는 것도 바람이 부는 것도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도 그저 다 당연한 걸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신비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1981년에 LA에서 영국 맨체스터로 날아 갈 때의 일이다. 누군가 "저 밑이 북극이다!"고 해서 얼른 아래를 내려다보니 희뿌연 눈 같은 것이 온통 가득 찬 평원 위를 날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얼음으로 뒤 덮인 북극의 산하는 특별히 볼 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 가 없었다. 또한 프랑스 상공을 날면서는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며 '저것이 결국 일찍이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든 힘'이려니 하며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날아오르기만 하면 온통 산으로 뒤덮인 우리의 산하와는 너무나 다른 풍경인 것이다. 농경시대의 국가 경쟁력에서 어찌 비교나 될 수 있었겠는가.
오후에 날아오른 필리핀 상공은 쾌청했다. 왼편으로 섬의 끝이 어슴프레 보인다. 넓은 평야가 이어지다가 마치 염전을 좍 깔아놓은 듯한 지역이 방대하게 펼쳐진다. 구불구불 강이 넓게 흘러간다. 고도를 높이자 이내 구름 속으로 풍경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마치 발아래 그린랜드 빙하가 펼쳐지듯 온통 눈 속에 파묻힌 듯한 대 설원이 끝없이 나타난다. 아! 구름송이가 설원처럼 보이다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구름이 눈이 되고 눈이 구름처럼도 되는구나, 하긴 구름에서 눈이 내리지…. 솜 뭉치와 눈 뭉치 같은 구름 송이를 썬 그라스 없이 계속 보자니 눈이 어둑해진다. 마치 처음 비행기를 타 보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노을이 질 때까지 창가의 빈자리에 가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이윽고 태양이 서쪽 하늘로 꼬리를 감추며 불그레한 띠를 붓으로 칠하듯 연출하기 시작한다. 하늘에 올라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그 길이도 길지만 지속 시간도 상당하다. 내가 하늘에 있는 건지 땅에서 하늘을 위로 바라보는 건지 분간이 애매하다. 항상 창가에 앉을 수 는 없겠지만 분명 항공요금의 일부는 저렇게 멋진 구름을 보는 것에 지불해야 한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한국에서 대략 2500여Km 떨어진 필리핀, 사실 미국이나 유럽에 비하면 아주 가까운 거리지만 그래도 우리네 생활 개념으로 보면 머나먼 거리이다. 그 거리를 비행기 날개 짓 하나로 잠깐만에 인천에 도달한다. 그곳의 코코아나무는 여전히 바람에 휘날리고 있을 터이고 리잘공원의 영웅 리잘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도 여전히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을 필리핀! 그리고 리잘이 처형 전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詩 한편을 생각해 보며 어서 빨리 필리핀이 아시아의 중심국으로 우리와 함께 우뚝 설 그날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2006-03-30 1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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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나레연 약사의 필리핀 여행기④
이쯤에서 생각을 한번 정리해 보면, 1940년대 중반에 독립을 하여 50~60년대 까지는 우리보다 월등히 잘 살았던 게 분명한 필리핀이다.
그들은 원래 매장 자원도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였고 일제 식민지와 6.25를 겪으며 초토화된 우리가 폐허에서 맨 주먹으로 살아보고자 발버둥칠 때 저들은 풍부한 자원과 미국의 발달된 제도를 받아들여 상당 수준으로 발전했음이 분명하다.
1970년대까지 정치적으로 우리와 아주 비슷한 군부독재 체제로 내달음 칠 때 그 와중에도 중화학 공업을 기치로 내세우고 하나하나 기틀을 다진 우리와 달리 필리핀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1980년대 이후로 민주화의 길을 밟으며 올림픽을 유치하고 월드컵을 치르면서 나아갈 때 필리핀은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인지 잘은 알 수 없다. 원래 못살던 나라가 지지부진하면 당연 그러려니 할 터이지만 잘 살던 나라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면 ‘왜 그럴까?’하고 생각을 해보게 마련인 것이다.
필리핀 400년 식민 지배에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땅 하늘 들판 나무 아직 풍부히 남은 지하자원, 혼혈에 혼혈이 거듭되긴 했지만 그래도 동양의 얼굴모습, 스페인식 말과 언어 그리고 미국식 간판과 영어, 중국식 생활 방식과 전통, 영국식 생활 습관과 일본식 침략주의 일부 그리고 여성 우대 사상과 상대적으로 빈약한 남성의 파워 등등이 혼합된 필리핀의 문화를 쉽게 얘기하기는 상당히 힘든 게 사실이다.
또 저런 거창한 물음에 답할 위치에 필자가 있지도 않다. 다만 필자는 그냥 여행 후의 느낌을 말할 뿐이지만 이 글이 조금이라도 필리핀인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보다 지하자원도 많고 인구도 많고 먹을 것도 많던 필리핀이 오늘날 동남아의 경제빈국으로 떨어진 결정적 이유는 무엇일까?
식민통치를 장기간 받아 왔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서 일찍이 우리보다 앞섰던 나라인데 말이다. 잘은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 현상유지가 된 나라이기에 우리처럼 절박하지 않아서 그렇지는 않았을까? 자원 없고 그냥은 도저히 먹고살기 힘든 우리는 어떻게든 농경 산업에서 2차산업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공업화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비슷한 군사 독재시기를 거쳤지만 결과는 엄청난 차이로 나타나게 된 것 아닐까?
필리핀을 여행하면서 끝임 없이 이런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마르코스가 20여년 간 독재를 하며 주요 국가 재산을 팔아넘기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현재의 필리핀의 가난을 원인으로 삼기에는 뭔가 허전한 감이 든다. 마르코스 이후에도 많은 지도자를 거쳤지만 아직 이렇다 할 특출한 리더는 나오지 않은 게 아닌지. 리더가 없어도 국민들이 알아서 잘 하면 안 되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여러 복잡한 변수가 혼재하는 것이 국가 발전이겠지만 결국 국가란 땅과 국민과 제도와 사람들의 열정과 습성 등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진다고 볼때 그런 총체적인 역량의 차이가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 본다.
우리도 입만 열면 지도자 타령에 날이 지샌다. 그리고 끝없이 정치 풍토를 욕하고 질타한다. 하지만 우리는 뭔지 모를 국민의 힘 같은 것이 늘상 위기 상황마다 분출됨을 느낀다. 우리의 높은 교육열 덕분에 국민이 모두 근면 명석해서인지 창의력이 풍부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저절로 잘 되고 있는 건지 하느님이 보우하사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여행을 하면서 적어도 우리 대한민국은 너무나도 축복을 받은 나라이고 또 前道가 양양한 나라임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우리가 많은 고난의 역사로 점철된 것은 사실이지만 근세에 와서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기나긴 식민통치를 받은 필리핀이야 말로 고난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난의 동지격인 필리핀의 재도약을 기원해 마지않는다.
반만년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뿐더러 로마의 역사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로마에 비할 바 없는 긴긴 역사를 이루고 있지 않는가? 함께 여행을 하던 다른 분들도 대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2006-03-27 1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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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나레연 약사의 필리핀 여행기③
필리핀의 명암(明暗)-마르코스와 이멜다
독재자에 항거 최초로 재선 성공한 대통령 불구 스스로 파멸
아내 이멜다의 허영심 위해 부정축재 등 비리 일삼게 돼
1940년대 초에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결국 필리핀을 점령하게 된다. 만주와 똑같이
괴뢰 정부를 세운다. 결국 1944년도인가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560척의 전함과 상륙군이 필리핀을 재탈환 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약간의 기간을 거쳐 비로소 필리핀에 첫 자신의 나라가 세워진다. 무려 400여년의 기나긴 식민 통치 기간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바로 독립하여 복구에 열심이던 때에 한국에서는 6.25가 터진다.
당시 타임지 특파원으로 또 종군기자로서 필리핀의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한국을 온다. 그는 6.25 당시 전란의 참상을 겪고 있는 한국의 실상을 본국에 타전한다.
아키노 상원의원은 다 알다시피 독재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마르코스 대통령에 대항하던 야당 지도자로서 오랜 망명생활을 접고 1983년 생명이 위태로운 것을 알고서도 계엄령하의 조국으로 돌아온다.
공항에서 트랩을 내리고 한 발 떼어 놓기가 무섭게 저격수의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이 광경에 대해 필자도 당시 TV 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 된 것을 본적이 있다.
아키노는 필리핀 화폐 500페소에 초상화로 등장한다. 화폐 뒷면에는 타임지 특파원 시절 한국의 참상을 알리고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타전했던 글귀가 일부 소개되어 있다.
나는 일부러 깨끗한 500페소 지폐를 하나 구해 왔다.
一國의 화폐에 이런 글귀가 소개되어진 것도 전무후무한 것이지만 나는 그 글귀를 보면서 ‘아, 이럴수가!’ 하는 뭔지 모를 감동이 뭉클 가슴을 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6.25때 6번째던가…. 많은 참전군을 보낸 나라. 그리고 당시 부족했던 쌀을 많이 한국에 원조해준 나라, 그 필리핀 땅에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며 나는 왠지 모를 눈물이 자꾸 나왔다.
온통 역사라고는 겹겹의 식민지로 얼룩진 나라! 우리의 고난에 비할 바 없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온 나라!
하지만 우리가 결정적으로 어려울 때 우리를 도운나라! 그 나라가 지금 무슨 연유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어렵게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빈부의 격차가 말로 할 수 없는 곳, 도시 빈민들이 고가 도로 밑에 판자 하나로 삶을 영위하고 이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라.
80% 이상이 단일 종교를 갖는 종교 국가지만 이런 문제에는 별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듯한 나라. 어찌 이럴 수 가 있을까 ?
남북한 합친 면적의 1.3배 정도의 크기에 인구는 8500만명 정도의 필리핀, 바나나, 코코아, 쌀 등 풍부한 먹거리에다 철, 구리, 니켈 등 엄청난 지하자원 거기다 최근엔 석유까지….
자원으로 보면야 우리보다 월등한데, 자원 貧國인 우리가 자원이 풍부한 이 나라를 걱정하는 게 어디 논리상으로 맞는 얘긴가?
또 그러니 열강들이 먹이 감으로 노렸겠지. 하지만 1960년대에 우리보다 월등히 잘살던 필리핀은 이제 너무나 살기가 고달파 보인다.
1965년에 집권한 마르코스가 “나라를 다 말아 먹어 그렇다”는 說도 있고 마르코스 실각 후 몇몇 지도자가 거쳐 갔지만 아직 결정적인 리더가 나오지 않아서 그런 것도 같아 보이고….
국민소득 2~3천 달러에 머무르는 이유는 많을 것이다.
고속도로 하나 제 힘으로 못 놓고 자동차 한대 제 힘으로 못 만든다. 당연 열악한 도로 인프라에 도시 매연 또한 상당히 심해서 대체로 도심을 걸어 다니기가 우리는 불편하다.
한편 마르코스 집권과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는 제철소를 세웠다.
선진국에서는 “말도 안된다”며 다 코웃음 쳤던 제철소를 당시 일본의 대일 청구권 자금 일부를 전용하여 포항의 신화를 이룬다(박태준 회고록에서).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대에 겨우 뚫었지만 동시에 조선, 자동차, 중화학 공업에 겁 없이 뛰어 들지 않았든가?
自國의 제철소 없이 新日本 제철이나 US STEEL에서 철판 가져다 자동차 만들면 과연 우리가 그나마 무슨 경쟁력이 있었을까?
철판이 많이 들어가는 造船은 또 어떠한가? 아니 그 외에 뭐는 가능할까?
1960~1970년대에 우리가 그 일을 게을리 했다면 과연 오늘의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을 런지 잘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한국을 만든 것은 단연 세계적 경쟁력을 갖는 포철과 같은 제철소의 설립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기타의 원인은 제외하고 말이다.
헌데 필리핀의 문제는 아무리 봐도 1965년에 집권한 마르코스로부터 시작된다.
그도 집권 초기에는 아주 잘했다고 전해온다. 6년 단임으로 되어있는 대통령 임기를 잘 채우고 필리핀 역사상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이가 바로 마르코스다.
워낙에 우리도 1970년대 초기에 유신독재에 시달려서 물 건너 남의 나라 일에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르코스, 그의 부친은 일찍이 필리핀 상원 의원이었고 그 家門은 스페인 통치 시절부터 금광 채굴권을 가지고 있어 대 부호였다고 한다.
미국의 영향으로 상하원으로 나뉘어 있는 양원제에서 단 24명뿐인 상원 의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상당한 직위인 듯 하다.필리핀 역사에서 세 사람의 머리가 명석한 이를 꼽을 때 마르코스가 포함된다하니 그는 상당한 식견과 통찰력을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던 그가 이멜다를 만나면서부터 일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멜다 여사는 가난한 어느 섬 출신인데, 무작정 마닐라로 상경하여 제 1회 미스마닐라 대회에 출전 2위로 입상, 시상식에서 왕관을 내 동댕이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화려하게 필리핀 사교계에 데뷔한다.
그 후 마르코스를 만나게 되고 그와 결혼(이때 마르코스는 이미 부인이 있었다), 그리고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비록 명문가문 출신은 아니지만 이멜다는 타고난 미모에 배짱을 갖고 있는 등 상당 수준 이상의 멋진 여자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훌륭했던 여성이 왜 필리핀 역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일까?
필리핀 역사상 처음으로 再選에 성공한 마르코스는 결국 한국과 같이 3선 개헌을 단행한다.
결국은 계엄을 선포하고 무력 군사독재를 계속한다. 그리고 부인 이멜다가 해 달라는 것은 뭐든지 다 해주기 시작 한다.
개인 사파리장을 비롯하여 외국 백화점 쇼핑을 통해 수많은 보석 모피 금은보화 등을 싹쓸이한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400년의 식민지 지배도 모자라서 지도자들의 그러한 행태와 함께했던 필리핀 국민들이 결과적으로는 아직은 福이 충분치 않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을듯하다.
그리고 거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은 부정축재-온 나라의 채굴권, 영업권 등을 외국인에게 팔아넘긴 대가-로 충당하게 된다.
예컨대 금광 채굴권은 몇 년 간 얼마, 석유 채굴권은 얼마, 구리광산은 얼마 등의 식이다.
이때 팔아치운 것들 중 세계 최대 최상의 민다나오 진주 양식장은 제주도의 22배에 달하는 크기인데 Mikimoto라는 일본 상표로 지금은 전 세계에 팔려나가고 있다.
그 엄청난 진주 수입이 몽땅 일본 사람의 것이 되고 만 셈인데…. 아니 일본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라고 나라의 國富를 또 일본인한테 넘길 수 있는 것인지….
우리도 IMF 때 알토란같은 기업을 외국에 내다 팔았지 않았든가. 물론 위의 필리핀의 경우와는 좀 다르다고 할 수 는 있겠지만 말이다.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한 이멜다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욕심이 점차 필리핀을 멍들게 하고 있었던 셈이다.
7,107개의 흑진주로 치장한 웨딩드레스. 세계 최고의 부와 화려함을 뒤로한 채 결국 1986년에 마르코스는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을 하게 된다.
2006-03-22 1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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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나레연 약사의 필리핀 여행기②
가톨릭 앞세운 스페인 300여년 식민 통치 뒤이어
美도 40년 간 지배해…아시아의 ‘작은 미국’화
철저한 우민화 정책으로 소진 당한 설움의 민족
여성 상위에 백인 혼혈 동경하는 사회 분위기
솔직히 나는 필리핀의 역사를 잘 모른다.
6.25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병 되었다는 것도 거의 잊은 지 오래고 보라카이해안, 수빅만, 아키노 상원의원, 마르코스 대통령, 물론 이멜다는 기억하지만 그 외에 뭐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내 나라 문제도 만만치 않은데 남의 나라 역사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거야 없는 것이지만, 희한하게도 차 안에서 이것저것 얘기를 듣는데 왠지 모르게 자꾸 우리의 역사와 비교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어느 나라 못지않게 고난의 세월로 얼룩진 역사를 갖고 있다.
대륙의 끝에 돌출된 그 활용 가치 때문에 헤일 수 없이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고 역사상 태평성대를 누린 적이 별로 많지 않은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 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만 본다면 누가 뭐래도 핍박과 가난의 과거가 있고 또 현존하는 유일의 지구상의 분단국가이며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세계사에 고난의 주역으로서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좀더 개인적 문제로까지 들어가면, 마치 ‘과거에 우리 집만 가난했고 남들은 그래도 견딜만은 했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경우다.
왠지 인간은 자신만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고 고생을 많이 하고 어려운 시절을 견뎌 온 것으로 착각하거나 그 생각에서 잘 빠져나오기 힘든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개인 뿐 아니라 국가적 또는 국민전체의 역사에서도 그런 우를 범할 소지가 다분히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튼 아시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필리핀은 일찍부터 열강들이 군침을 흘러내릴만한 충분한 나라였다.
그 첫번째가 1500년대 중기쯤 한창 바다를 돌아다니던 스페인의 마젤란이다. 홍길동처럼 돌아다니던 이 친구의 필리핀이 눈에 띈 건 당연한 결과이다.
해서 1521년3월31일, Samar섬에 십자가를 가져다 내리 꽂는다.
어떤 이는 이렇게 카톨릭을 이곳에 전파하지 않았으면 당시 남부 아시아로 해서 계속 북상하던 무슬림들이 필리핀을 거쳐 한국이나 일본까지 상륙했을 것이라 예측하기도 하는데,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젤란이 첫 발자국을 남긴 이래 5회에 걸쳐 야금야금 함대를 파견한 스페인에 결국 속절없이 필리핀은 당하고 만다.
비슷한 시기 우리나라는 왜구가 한반도를 수년에 걸쳐 침공하지만 이순신을 필두로 우리는 버텨낸다. 이렇다 할 대항조차 변변찮게 하지 못하고 무너진 필리핀!
이때부터 무려 400년에 이르는 기나긴 식민지 시대로 들어간다.
일제 36년 만으로도 지금까지 왈가왈부 잔재의 청산으로 시끄러운 한국은 어찌 보면 참으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전 국민의 80%가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은 결국 스페인이 철저히 필리핀을 식민지화 하기 위한 포석으로 종교를 전파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7000여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수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나라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려니 정신적 통일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일환으로 가톨릭의 전파는 물론 混血정책과 철저한 愚民化 정책까지를 연결시켜 결국 국민 체력을 최대한 약화시키는 데까지 가게 된다.
남자는 될수록 가르치지 않고 힘없는 여자들을 우선 교육시킨다. 또 혼혈아를 최대한 우대
하는 풍토를 조성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혼혈의 경우는 스페인과의 혼혈을 말한다.
해서 지금의 필리핀은 자연스럽게 여성 상위 시대가 유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너도나도 혼혈로 태어나기를 기대하고 하얀 피부색을 끝없이 동경하는 사회가 되고 만다.
이렇게 300여년을 스페인의 통치로 가다보니 필리핀 원주민들은 결국 자신이 누군지 조차 모르게 되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종교가 일률적으로 통제 되다보니 국민들은 그저 스페인 총독이 하라는 대로 살
수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필리핀은 식민통치 300여년이 흐른 뒤인 1900년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독립운동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개화기와 비슷한 시기이다.
스페인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호세 리잘'이라는 걸출한 사람이 중심이 되어 독립 투쟁을 시작 한다.
들은 바로는 그는 상당한 천재로 12개 국어에 능통하였고 안과 의사이자 시인으로 재주가 많았던 사람이다.
결국 파리 강화조약을 통해서 필리핀은 스페인의 기나긴 식민지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그 독립전쟁은 미국의 도움으로 되었기에 결국 독립과 더불어 다시 미국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우리의 ‘8.15 해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과정이다.
이때부터 다시 약 40여년간 미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데 그중 2년은 영국이 잠시 지배권을 갖기도 했고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4년간은 일본군의 지배에 또 들어가게 된다.
아! 정말 속된 표현으로 ‘지겨운 식민의 역사’라 아니할 수 없다.
중국은 15세기 이전에 이미 필리핀에 상륙하여 교역도하고 여러 가지 농경기술도 가르쳐주었다는 데 스페인식의 지배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은 모양이고 미국은 40여년간 지배는 했으나 그 당시 동양권에 하나의 미국 모형을 뿌리 내리기 위해 많은 물적 제도적 원조와 시스템을 심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 교육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작은 미국’을 하나 만든 셈이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 36년간 우리가 고통 받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시기에 필리핀은 미국의 도움 하에 많은 성장을 했음이 틀림없다.
아시아의 첫번째 공화국으로 불리고 민주제도가 제일 먼저 정착된 나라로 기록 된다니 말이다.
2006-03-13 0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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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나레연 약사의 필리핀 여행기 ①
스페인·미국·일본 압제 속 자국어 상실한
'코코넛의 왕국'
공항버스를 타려고 약국에서 집으로 향하는데 내리치는 빗줄기가 장난이 아니다.
‘하필 이때 무슨 태풍이라도 오는 건 아닐까?’ 이러다 오늘 못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치기도 한다.
여행! 언제 들어도 마음이 설레는 말이다. 그것도 참으로 오랜만에 집 사람이랑 같이 가는 거라니….
워낙에 싼 관광 상품이라 적이 근심도 되었다.
필리핀 왕복 항공 요금에도 훨씬 못 미치는 금액으로 4박 5일 여행이라니, 혹 비행기가 너무 낡은 것은 아닐까, 시원찮은 호텔에 식사도 형편없고 터무니없는 선택 관광을 요구하고…. 등등 이거 ‘싼 게 비지떡’이라고 없는 시간에 괜히 시간만 낭비하고 오는 건 아닐지 일말의 불안이 계속 되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게다가 근래 세계 이곳저곳에서 노후 비행기의 추락이 잇따라 일어나고 피해야 할 항공사 까지 나돌고 있으니 여행의 기대감 보다는 불안감이 솔직히 더했고 모처럼의 여행을 잘못 선택한건 아닌지 등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인천공항 50번 탑승구를 따라 필리핀 에어라인을 타보니 생각 보다는 기내가 깨끗하였다. 아! 괜한 걱정을 했나보다. 옆에 앉은 아내도 별 불만은 없어 보였다.
캄캄한 밤하늘을 비교적 쾌적하게 날아가는 비행기는 그간의 모든 불안이 부질없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밤하늘로 실체도 없이 스스르 사라지게 만들고 말았다.
아무것도 안보이던 칠흙같은 어둠 저 밑으로 드디어 불빛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필리핀 마닐라에 들어온 것이다.
도대체 필리핀은 어떤 나라일까?
어둑한 마닐라 거리를 좀 달리니 마닐라 호텔이 나온다.
요즘 인천 자유공원 동상문제로 시끄러운 맥아더가 2차대전 당시 560척의 전함을 이끌고 들어와 사령본부로 사용했다는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열대지역 특유의 칙칙함과 항구의 냄새가 함께 섞여 훅 다가온다. 공항에서와 똑 같이 호텔입구의 X-Ray 검사기를 통과하고 방으로 향한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이는데 뭔가 치안에 문제가 많은 지역인 모양이다.
양말 문화가 있을 리 만무한 이들은 호텔방도 구두 신은채로 들락거린다. 원목 조각으로 깔린 마루가 좀 아깝게 생각되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창 너머로 ‘MS PHILIPPINS’ 라는 글자가 선명한 커다란 크루즈처럼 생긴 배가 바로 코앞에 정박해 있다. 인천 연안부두 같은 항구가 바로 호텔 앞으로 붙어 있었다.
솔직히 이번 여행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단순히 며칠 바람 쐬러 온 것이 전부이다.
그것도 주말 끼고 연휴 끼고 하면 요금이 많이 비싸니 과감히 주중을 택해 날을 잡았다.
그냥 간 여행이니 준비고 뭐고가 있을 리 만무다. 사전에 필리핀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것도 아니고 그저 바람 부는대로 물결치는 대로 갔다 오기로 했다.
워낙 비용도 저렴하니 주면 주는 대로 가자면 가는 대로 일체 불평이나 불만도 제기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다짐한 터였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코코넛 농장인 빌라 에스쿠데로 로 이동 하면서 가이드가 천천히 필리핀의 역사를 풀어 놓는다.
스페인으로부터 300 몇십년 미국으로부터 40여년 십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으로부터 또 몇년 도합 400 여년 가까이 외세의 식민 통치를 겨우 끝낸 필리핀은 그야말로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조차 애매한 민족성의 혼돈 시대를 살고 있는 듯 했다.
말이 400여 년이지 생각을 조금만 돌려보면 우리가 일제의 36년을 거치고도 이렇듯 식민의 후유증이 심각한데 그 열배 가까운 세월을 지배당하고 산 필리핀 민족은 오죽할까.
아무리 살펴보고 살펴봐도 자기 나라말인' 따갈로語'는 간판 하나에도 그 흔적이 없다.
7,000 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극심한 사투리가 많다 하지만 또 아무리 영어를 공용어로 택했다고는 하지만 저토록 철저히 영어 간판만 존재 하다니!!
미국의 어느 허름한 시골 동네를 지나가는 느낌이다.
매캐한 매연을 헤치고 도심을 빠져 나가려하니 우악스런 시멘트 고가도로 바로 밑으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허름한 판자집들이 닥지닥지 끝없이 연결되어 나타난다.
아무리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라지만 또 우리나라도 서울에 판자촌이 없는 게 아니지만 저 심한 매연 구덩이 속에 저렇게 방치되어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니!!
일본인들이 자국의 자동차를 판매하기 위해 건설한 고속도로라는 데를 달려가며 보이는 창밖의 풍경은 끝없는 열대 들판에 군데군데 코코넛 나무가 전부이다.
예전엔 야자수가 휘늘어진 해변을 너무나 멋지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우리에겐 없는 것이 더 좋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헌데 지금은 필리핀의 ‘저 코코넛 나무를 만일 우리의 소나무로 바꿔 놓으면 어찌될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나름대로 다 멋있는 나무지만 아무래도 소나무가 더 좋다고 결론을 내려본다.
물론 코코넛은 어느 한 부위도 버릴 것이 없이 100% 활용된다는 효자 나무이다.
밋밋한 맛의 열매 속의 물(水)은 물론이요, 그 속껍질은 비누로 겉껍질은 자동차나 침대의 속으로 또 뿌리 에서는 감기약의 원료를 만들고 나뭇잎으로는 잘 썩지 않는 지붕을 이으며 그 외 여러 용도로 쓰여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단다.
해서 전세계 코코넛의 40%를 생산하는 필리핀은 나무 하나 하나마다 세금을 물리는 나라라니 가히 코코넛 제국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2006-03-08 1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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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65차 이집트 카이로 FIP 참관기(完)
홍명자(대한약학회 개국약학분과학회 부회장ㆍ워커힐구내약국)
본 학회의 특징이자 전통 중의 하나인 개국약사회 주최의 Continuing Education은 150불의 추가 등록비를 지불해야 하지만 세계 개국약사의 향후 목표를 선도해나가는 프로그램이므로 필자는 매년 참석하여 오고 있었는데, 올해는 처음으로 학회의 공식일정 중간이 아닌 개회식 이전의 Pre-Satellite Program으로 개최되어 워크숍까지의 마지막 일정을 학회 전에 끝을 내었다.
올해의 title은 'Compliance, Adherence or Concordance-Who Cares?'였으며 Concordance라는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번 CED (Continuing Education Development) 프로그램은 미국 ASHP (American Society of Health-System Pharmacists) 가 교육을 주관해서 평생교육 credit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FIP 학회 참석이 미국 약학교육 인증기관인 ACPE (American Council for Pha! rmacy Education)의 공인을 얻어 이 학회에서 받은 credit을 미국은 물론이고 독일, 프랑스, 일본, 그리고 포르투갈이 각각 자기나라 약사회가 인정하는 약사면허 유지 credit으로 상호인증하게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FIP와의 관계에서 이 점이 계속 연구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세계약학연맹의 약학교육 분과위원회에서는 각 국의 환경에 알맞은 약학교육을 유지하면서 세계적으로 상호인증할 수 있는 표준화된 교육의 품질을 도출해내는 방안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이제 2009년부터 우리나라도 약학교육이 2+4제도로 변하게 된 시점에서 약학교육의 커리큘럼을 짜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 약학대학의 교수님들은 이러한 세계적인 추세를 충분히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이번 총회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지난 2년간 세계약학연맹이 산하기구인 국제약학대학 학생협의회와 공동으로 작업하여 마련한 효과적인 환자상담법에 관한 책자를 배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자의 제목은 'Counseling, Concordance, and Communication: Innovative Education for Pharmacists'로 되어 있으며, 기자회견에서도 이 제목을 가지고 브리핑을 하였다.
그러면 이 새로운 'Concordance'라는 단어는 어떤 정의를 갖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요약해, 이전에는 환자와의 상담에서 주로 약사가 환자를 교육하는 것만을 위주로 하는 상태에서 이제는 약사와 환자가 같은 눈높이로 상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의 병의 증상은 보통 그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환자의 말이 존중되어져서 일방적인 교육이 아니라! 환자의 대화를 잘 듣고 1:1로 서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상담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된 내용의 약사의 복약지도 및 환자상담을 효과적으로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이 책자는 대한약사회 뿐만 아니라 약학대학에서도 교육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고 심도가 있다고 본다.
이번 학회를 통해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였던 것은, FIP 전체를 이끌어가는 회장을 계속해서 배출하고 있는 중요한 Section 중의 하나인 Community Pharmacy Section에서 중요한 임원 선출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도 충분한 자격을 지닌 분들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후보로 뛸 수 있도록 대한약사회가 추천은 고사하고 대표자 파견도 안 해주어, 매년 활발한 약국활동을 하고 있는 약사가 10명 이상 참석하며 년 간 00의 회비를 내는 회원 국가로서 투표권도 가질 수 없어서 우리나라는 보드멤버를 선출하는 중요한 투표에 참여를 못하였다.
이제 우리 대한약사회도 약사의 자존심을 세운다는 문제에 있어서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화에 발맞추어 세계화를 선도하고 지원해야할 막중한 사명을 갖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 팀은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최대한 학회에 참여하였으며, 학회참석 이외에도 우리 팀과 동행한 영남대학교의 최병철 교수와 유봉규 교수의 강의도 들으며 우리의 전문지식을 쌓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한편, 바쁘게 진행되는 학회 가운데서도 잠시 틈을 타 유명한 투탄카맨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있는 박물관을 관람 하였는데, 정말 그 큰 규모와 희귀한 유물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 우리 팀 전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모두 참여하여 모든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은 것은, Mary J Berg 교수의 추모식에서 틈틈이 연습한 음악을 정성껏 공연했던 일이었다. Berg교수는 FIP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Acardemic Section의 회장을 지냈으며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IOWA약대에서 110년 만에 종신교수 지명을 받았고 Clinical Pharmacy 분야에서 획기적 공로를 세운여성이다.
FIP의 'Women for Pharmacy Luncheon'의 발기자이기도 한 그녀가 54세의 나이로 급성 동맥 고혈압으로 요절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마련된 추모식에서 우리의 정성이 가득한 무대로 인해, 그녀가 특별히 아꼈던 모임을 성공적으로 잘 이끌어 나가는데, 한 몫을 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보람이 있었고 의미가 깊었던 모임으로 기억한다. 또한 매년 해왔던 'Community Pharmacy Section Dinner'에서도 우리의 노래가락으로 한국의 진수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대한민국 약사들을 세계의 약사들에게 홍보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인종차별이 극심하였던 FIP 학회에서 우리의 음악은 그 장벽을 소리 없이 무너뜨리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한편 매년 FIP를 공식 후원하고 있는 IMS Health가 VIP만을 초대하는 party가 있었는데, 그 파티에서 우리 팀이 항상 민속공연으로 공헌을 해 두었던 덕분에 VIP만 받는 초대를 우리 팀은 전원이 받고 노을이지는 전경을 바라보면서 테라스에서 멋있는 저녁식사를 하였다.
전원 저녁 초대를 해준 Francoise Forissier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IMS Health는 불란서에 본부를 둔, 약학에 관련된 모든 통계를 내고 있는 회사로서 FIP학회를 매년 후원해주고 있는 세계적인 회사이다. 특히 FIP의 개국약학부의 평생교육을 후원하는 회사로서 개국약사들을 의료팀의 일원으로서 실무에서 좀더 실제적이고 적극적으로 환자 치료에 참여시키는 추세를 따라 그 목표를 향해서 나가는데 용기를 주기 위해 2004년에 IMS FIP CPS Prize를 제정하였는데, "How pharmacists can be fully engaged in patient oriented healthcare - aspect of management, change strategy and training" 이라는 논문 제목을 걸어서 1등에게는 8000유로, 2등 2명에게는 각각 4000유로의 상금을 주는데, 그 시상식이 party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진행되어졌다.
1등에는 코스타리카의 Genvanni Vargas Solano가 2등에는 스위스의 Jean-Marc Krahenbuhi, 그리고 나이지리아의 Olanike Adedeji와 Ukamaka Okafor가 각각 수상하였다.
그 수상식을 보면서 필자는 우리도 보다 많은 관심과 준비를 통해 이러한 상에 도전한다면 우리나라의 약사들도 충분히 이러한 상을 수상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또 그러한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 팀은 정기적으로 FIP학회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자동적으로 IMS Health 본부와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IMS Korea의 후원도 받고 있다.
이집트 북부 지중해에 접한 항구 알렉산드리아는 여름 휴양지로서 유럽의 피서객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 클레오파트라, 쥴리어스 시저, 마크 안토니 그리고 옥타비안의 비극이 연출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 해변에 위치한 아름다운 전경이 보이는 식당에서 IMS Health Korea 장정구 사장님의 후원으로 정감 있는 점심시간을 보낸 것은 우리 팀이 귀국하여 다시 제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큰 활력소가 되었다. 다시 한번 지면을 통해서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이 학회의 마지막 highlight인 Closing Dinner Party는 이집트답게 낙조가 떨어지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피라미드 옆에서 낙타의 호위아래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하였는데, 이 저녁파티는 우리의 일행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학회를 알차게 보람있게 참여하고 무사히 끝낸 후, 돌아오는 길에 룩소를 비행기로 가서 그 유명한 카르낙신 전왕가의 계곡에서 어마어마한 왕들의 무덤과 합셉수트 여왕이 건축한 유일한 신전인 장제전, 돌을 깎아서 직접 세운 오벨리스크, 카르낙신전 등을 관광하면서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고 인간의 지혜가 무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FIP학회 장소는 삼바춤으로 대표되는 정열의 나라인 브라질의 Salvador Bahia에서 2006년 8월 25에서 31일에 걸쳐 열린다. 이 곳에서는 지구의 7대 불가사의라고 할 수 있는 20여개의 폭포가 함께 떨어지는 이과수폭포를 관광할 수 있다. 2007년은 우리의 이웃 나라인 만리장성으로 유명한 역사적인 도시인 중국 북경에서 8월 31일에서 9월 6일까지 열린다. 우리 모두 공부도 열심히 하고 관광도 즐기면서 행복한 전문 약사로 거듭나길 바래본다.
2006-03-02 0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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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65차 이집트카이로FIP 참관기(2)
그 다음날은 우리회원 전원이 학회 등록을 마치고 우리가 수강하여야할 강의를 최대한 알차게 듣기 위해 시간표를 짜면서 시간의 낭비를 최소화 하였다. 개회식에서는 그 나라 특유의 고전음악과 춤으로 흥을 돋우었으며 이집트 보사부장관의 환영사가 있었고 과학분야의 최고상인 Host Madsen 메달은 영국의 Stanley Davis교수가 수상하였다.
그리고 FIP의 사무총장인 영국의 Colin Hitchings가 그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뒤를 이어 미국의 Dr. Herry Menase가 임명 되었다. 특별히 현회장인 불란서인 Mr. Jean Parrot의 인사말은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중요한 실질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였다.
한 예로 2004년 12월 26일 동남아에서 쓰나미 (tsunami)로 인해 크나 큰 재해가 닥쳤을 때 온 세계에서 신속하게 많은 구호약품들이 전달되었지만, 전문지! 식을 가진 약사가 부족해 필요한 의약품을 분류하여 적재적소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상당량의 의약품이 그냥 공항에 방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FIP는 이러한 세계적인 재난에 대비한 응급 약학전문 인원을 확보하고 대처하는 기구를 만들어 전세계! 어디에든지 재난이 닥쳤을 때를 대비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위조약의 생산은 지금 선진국에서 조차 큰 문제라며 이것을 FIP 홈페이지 (www.pharmacistcombatcounterfeiting.org)에 게재하고 있다. 또한 FIP가 중점적으로 일을 해 가는것 중의 하나는 WHO에 협력하여 AIDS 퇴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인데, WHO가 2003년 개발도상국 49 나라에 "three by five" 라는 슬로건을 걸고 시작한 사업의 결과로 2005년까지 총 300만명의 AIDS 환자치료의 목표를 세웠었는데 그 결과를 평가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 하였다.
Jean Parrot은 자신도 참여한하여(?) 아프리카 전역에 걸친 전인구 대비 의료요원 수를 조사하였는데 프랑스 같은 선진국은 인구 100만에 의료인 수가 1140명 인데 반해,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나라가 5명 이하에 그치는 등 의약품도 부족하지만, 의료인이 턱없이 부족하여 심각한 상태라는 발표도 하였다.
따라서 AIDS 퇴치의 문제도 의료인이 보충되지 않고는 정말 힘든 상태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회장의 연설 요지는 즉시로 중국어와 일본어 번역문이 나와서 책상에 놓여져 있었다. 그것으로 두 나라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기는 이 불경기에 100만원이 넘는 본 학회등록을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해 주었으니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며 그에 상당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이 든다.
이번 세계약학연맹총회는 "Medicines for all: a human right"이라는 주제가 말하듯이 빈곤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필수 의약품이 제공될 수 있도록 세계보건기구와 함께 선도적인 역할을 다하겠다는 원칙을 선언하였다. 또한 가짜약을 근절하는 데 있어서도 세계약학연맹은 각국의 약사회를 통하여 계도하며 필요한 경우 각국의 약사회는 자국의 정부기관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조된 의약품은 비교적 가짜약으로부터 안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의약품 중 정식으로 국가가 인증하지 않은 기관에서 들여온 것은 거의 가짜약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식 유통기관을 거치지 않은 것은 약사들이 구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 선진국! 들도 이 가짜약의 불법 유통으로 큰 골치를 앓고 있으며, 곧 마약과의 전쟁을 방불하게 될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지금 마약제조업자들이 마약보다 위험하지도 않고 이익이 훨씬 많은 가짜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그 유통량이 세계적으로 어마 어마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이 점에서는 안전한 지역이 아닐 것이므로 약사들 각자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원래 유럽에서 처음 시작된 학회답게 본 학회는 약물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며 그 연구를 수행하는 약학자들에 대한 존경심도 고취시키는 분위기를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최근 미국의 임상약학이 도입되어 개국약사부나 병원약사부에서 환자를 중심으로 하는 임상부분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새로운 약물의 개발, 약물전달시스템, 성에 따른 약물동력학의 차이 등 전반적인 약학연구에 관한 특별 심포지엄도 후원하고 장려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어의 장애를 무릅쓰고 가장 활발하게 연구결과물을 발표하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번 학회에 3편의 논문이 제출되었는데, 이는 많은 약학자들이 제출한 논문들 중에서 까다로운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통과한 것들이다.
1. 부산 지방 식약청: M. J. Kim, K. Chae, D. G. Leem, M. K. Kim, M. H. Shin, J. H. Baek, M. J. Jung, J. Y. Park, J. S. Kim
TITLE: OPTMIZATION OF HPLC METHOD FOR SIMULTANEOUS ANALYSIS OF NIACIN, ANHYDROUS CAFEINE, PYRIDOXINE HYDROCHLORIDE, RIBOFLAVIN AND THIOCTIC ACID IN PHARMACEUTICAL PREPARATION
2. 서울대학병원, 간도 메디칼쎈타: T. Orii, F. Kyoung, S. In J
TITLE; APPROPRIATE OF DRUG INFORMATION THROUGH THE INTERNET
3. 영남대학교 약학대학, 충북대학교 약학대학: B. K. Yoo, M. A. Miah, J. D. Lee
TITLE; PARTIALLY BENZYLATED DECAPEPTIDE OF POLYASPARTIC ACID TO REDUCE AMPHOTERICIN B TOXICITY
이번에 우리 그룹에서는 개국약학 분과학회 부회장으로 있는 영남대학교 약학대학 유봉규 교수의 발표가 눈길을 끌었다. 그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암포테리신비는 신장독성이 매우 강한 약이기 때문에 그 독성을 줄이기 위한 시도가 여러 가지로 시도되고 있다. 암포테리신비를 리포좀에 봉입시키거나 콜레스테롤이나 기타 인지질과 혼합하여 만든 제제는 이미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시판되고 있으나 문제는 이들의 가격이 원래의 암포테리신비보다 수십 배 비싸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 교수의 연구는 아미노산의 일종인 아스파틱산을 이용하여 값이 저렴하면서도 신장독성을 줄이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아스파틱산에 벤질기를 도입하고 10개의 아미노산을 결합시켜서 만든 데카펩타이드와 암포테리신비를 혼합하여 제조하면 신장독성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약이 제조되어 나온다면 암포테리신비를 써야 되는 환자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값진 연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이러한 기대 되는 젊은 연구자들이 마음 놓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도록 주위에서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홍명자(대한약학회 개국약학분과학회 부회장ㆍ워커힐구내약국)
2006-02-27 0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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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65차 이집트카이로FIP 참관기(1)
홍명자(대한약학회 개국약학분과학회 부회장ㆍ워커힐구내약국)
2005 년 세계약학연맹 총회가 9월 2일부터 8일까지 “Medicines for all: a human right" 이라는 주제로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이집트 카이로의 Intercontinental Citystars Heliopolis에서 전세계 92개국이 참여하는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그러나 테러와 홍수의 여파인지 매년 이 학회 참가인원이 3000명 이상인데 비해 이번 카이로에서 열린 학회는 2000여명이 참여하는데 그쳤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한약사회 대표 한 분과 식약청에서 두 분, 서울대학교의 권경희 박사, 그리고 대한약학회 개국약학 분과학회 회원 15명이 참석하였다. 이에 비해 같은 아시아권에 있는 일본, 대만, 중국은 각각 52명, 87명, 60명이 참석하였고 다양한 주제발표를 통해 약학에 관한 자기 나라의 입장을 밝히면서, 세계의 각 나라에서 온 회원들에게 그 나라를 알리려는 노력들이 돋보였다.
이들은 또한 논문발표 수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대만의 경우는 2007년에 FIP가 열리는 중국을 의식해서인지 FIP학회에 갑작스럽게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원의 참석은 물론, 논문발표의 양적인 면에서도 몇 십년간 아시아 국가들 중 두드러진 연구발표를 해왔던 일본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그 비싼 학회가 열리는 호텔에서 리셉션을 개최, 각국 대표들을 초대하여 선물도 주고 대만을 세계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이번 학회가 다른 때와 달랐던 것은 기존에는 전체학회 참가자의 불과 5% 미만에 그쳤던 유색인종의 참가율이 크게 증가하였고, 그 유색인종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일본인들 외에 다양한 국가들에서 참여하여 최근 2, 3년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이 학회가 세계화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이를 보면서 앞으로 대한약사회도 대한약학회와 적극 협력하여 본 학회에의 활발한 참가나 수준 높은 학술 발표를 장려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주고, 대한민국 약학계의 활발한 활동을 홍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학회가 개최 되었던 이집트는 그 유명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있는 고대문명의 발상지이며,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이집트 왕들이 묻혀있는 계곡을 조사하다가 투탕카멘이라는 소년 왕의 무덤을 봉인된 상태로 발견하였고 그 무덤을 파고난 후 그 무덤에 손을 대는 자는 모두 죽으리라고 그 무덤 비문에 쓰인대로 그 무덤을 파는 데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이 죽어서 더욱 유명해진 이집트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94개의 피라미드 중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세계 최대의 건축물인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프왕의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라 학회만 참석하기에는 너무 아쉬울 것 같아 학회참석일정에 특별히 이집트 유적 관광 스케줄을 배려하여 안배가 되었다. 따라서 다들 바쁜 일정을 가진 우리들이지만 하루 먼저 이집트에 도착하여 학회 참석 전에 관광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8월 31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두바이를 거쳐 이집트로 가는데 밖을 내다보니 끝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사하라 사막의 일부이며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한 서사막지역과 그리고 나일강 동쪽으로부터 홍해연안까지 이어진 동사막지역이 있으니 이 광대한 사막지역에 무엇이 묻혀 있을는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거대한 피라미드도 모래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옛날 같으면 쓸모없는 사막으로만 여기던 것이 이제는 대단히 거대한 자원으로까지 보이니, 아마 훗날에는 이 사막의 모래조차도 큰 자원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밤을 새워 달려온 카이로 공항은 아침 햇빛이 찬란하였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카이로시와 인접 해 있는 그 유명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관광을 하였다. 기원전 2700년경에 건설된 쿠프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268만 여개 의2.5톤 내지 10톤의 거대한 화강암을 카이로 남쪽 850Km 떨어진 아스완에서 나일강을 통하여 운반해왔다니 참으로 놀랍고 또한 거대한 스핑크스 석상은 어떻게 조각되었는지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지금도 피라미드의 과학적 건축법이 의문이라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최대의 건조물인 거대한 돌무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혹사당하였을까 하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카이로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젖줄이라는 그 유명한 나일강을 중심으로 흡사 우리나라의 70년대의 모습과 비슷한, 그러나 현대와 고대, 화려함과 단순함이 조화되어 있는 도시였다. 부자와 빈곤층이 뒤섞여있고 기온 때문인지 밤과 낮이 뒤바뀐 좋게 말하면 활기가 넘치고 나쁘게 말하면 시끄럽고 정신이 없는 도시이기도 하였다.
사회 체제가 사회주의에 가까워서 북한과는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이면서도 민주국가처럼 자유로운 도시처럼 보였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서 보니 이슬람의 엄격한 규율이 있는 것 같던 사회가, 밤만 되면 날이 새도록 결혼식 피로연으로 춤과 아랍 특유의 노래로 신명나게 지낸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곧 대통령 선거가 있다는데 후보자는 여럿이 있다고 하면서도, 거리에 걸린 사진은 무슨 구호와 함께 현직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있다. 마치 민주주의 흉내를 내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집트 국토의 대부분이 연간 강수량은 150mm 이하의 사막기후이기 때문에 문명의 발생지인 나일강의 강물에 의존하여 온 국민이 먹고 살며 농사를 짓는다. 얼마나 비가 오지 않으면 빈곤층 사람들은 벽만 두르고 창문도 천장도 없는 곳에서 살고 있으며 심지어 무덤에서도 산다. 이 곳의 무덤은 거의 시내 길가에 있으며 집과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문을 달지 않고 사는데 그렇게 되면 미완성의 집이므로 국가에 세금을 안내기 때문이란다. 인구가 점점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나일강에 의존하여 다른 사막국가와 달리 물에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축복의 땅이다.
나일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집트가 있었을까?
아프리카 전체에서 제일 큰 강인 나일강은 그 근원이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하여 열대초원을 흐르는 백나일과 에티오피아의 산악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들이 모여 이루는 청나일이 수단의 카루툼 남방에서 합류하여 이집트의 젖줄인 나일강이 되어 지중해까지 북으로 흘러간다. 그 전체의 길이가 무려 6690Km이니 태백산맥에서 발원하여 황해로 흘러드는 우리의 자랑인 514km의 한강 길이와 비교하여 약 13 배가 더 긴 셈이다. 그날 저녁 우리는 디너 크루즈를 하였는데, 그 유명한 나일강에서 배를 타고 그 곳에서는 일류무희가 추는 배꼽춤을 비롯한 전통 쇼를 즐기면서 바깥풍경을 즐기는 항해로 카이로의 야경에 도취되었다.
2006-02-20 0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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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미여행기<하>
권오균<前 서울시 의약계장>
아마존 열대정글을 탐험하기 위해 비행기로 꾸스꼬를 출발 호젓한 공항 PUERTO MALDONADO에 도착 나무로 차체를 만들어 쿵덕 쿵덕 소리 내는 버스를 타고 무더운 날씨에 어수선한 시내를 돌아 현지 여행사 사무실에 여행용 가방을 맡기고 아마존 투어에 나섰다.
좁고 길게 만든 모터 카노아를 타고 아마존강 밀림을 2시간 넘게 이리 저리 바라보며 CUZCO AMAZONICO ALBERGUE에 도착 부부가 방갈로 한 채씩 배정 받았다. 밀림이 주위를 빙 둘러 쌓였고 앞마당에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MONKEY ISLAND의 야생 원숭이를 찾아 밀림에 들어가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고 반짝 반짝 작은별 노래를 부르며 손을 치켜 올려 별 모양을 만들고 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원숭이는 찾을 수 없고 무덥기도 하여 그냥 본 것으로 간주 돌아오려는데 높은 나무를 타고 검은색 또는 갈색 원숭이 한 무리가 나타나 흥분된 대면을 하게 되었다. 이놈들은 바나나를 양손에 들고 있으면 나무에서 내려와 꼬리를 나무에 칭칭 감고 몸을 쭉 펴서 한 송이라도 많이 달린 송이를 날남 뺏어 달아나는 걸 보며 너무 신기해 동동 뛰기도 했다.
정글의 울창한 숲 사이를 빠져나와 아마존 강변 모래밭에 왔을 때 강물위로 햇빛이 내려앉는 해지는 현란한 석양을 바라보며 모두 걸음을 멈추고 야 ? ? ? 하며 감탄했다.
저녁은 찰 없는 날아 갈듯 한 쌀밥과 고기 그리고 풍성한 과일로 든든히 먹고 작은 배를 타고 어둑어둑한 아마존강을 엔진을 끄기도 하고 오르내리며 손전등을 켜서 강가에 누워 있는 악어들을 보았다. 우리는 보트에서 먼 동쪽 하늘에 떠 있는 달, 엷은 안개, 잔잔히 흐르는 강물, 울창한 밀림이 어우러진 대자연을 보며 아름다움에 흠뻑 취할 수밖에 없었다.
호텔로 돌아와 광장에 있는 둥근 의자에 둘러앉아 시원한 브라질 맥주를 마시며 남쪽나라 정글에서 밤늦도록 “선구자” “당신이 최고야”를 부르며 춤도 추고 즐겁게 보냈다.
페루 리마 시가지에 운행하는 택시 30% 이상이 대우 마티즈로 멀고 먼 지구 반대편 이곳 거리에 한국에서 제작한 자동차를 쉽게 볼 수 있어 감격스럽고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티즈는 휘발유 냄새만 맞아도 달린다"는 광고가 주효하여 많이 팔게 되었다 한다.
리마에서 버스로 팬 아메리칸 고속도로를 이용 PARACAS 가는 육로변의 풍경은 태평양에서 해변으로 밀려오는 흰 높은 파도가 보이고 흙 사막 모래사막이 펼쳐졌다. 해안사막지역이 끝없이 이어지다가 간혹 개울 상류에 관개지를 건설 사막을 농토로 만들어 옥수수 포도 농사를 하는 지역도 보였다.
판자 집이 즐비한 마을이 있고 공동묘지를 지나가기도 하고 양떼를 몰고 이동하는 누더기를 걸친 양치기도 보였다. 휴게소가 없어 후미진 담벼락에 실례도 하고 도로변 과일가게에서 $20 어치 자두 귤 바나나 등 페루 과일을 구입했는데 18명이 먹고도 남았다.
어두워진 후에 HOTEL PARACAS에 도착 넓은 정원과 담장에 장미 같은 붉은 꽃이 만발하고 나무다리를 걸어 바다로 나가면 여러 대의 보트가 정박해 있고 영화에서 보았던 그림 같은 휴양지였다. 저녁 식사를 하며 젊은 남녀 혼성 전통무용을 감상하고 내일 새벽 물개 섬에 가기 위해 일찍 잠을 청했다.
새벽 5시 두터운 겨울옷으로 갈아입고 찬바람을 맞으며 모터보트로 가는 동안 물개들이 물위로 뛰어 오르며 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신기하고 커다란 지상 그림이 그려진 흙섬을 지나 2시간여를 항해하여 두개의 큰 섬이 나타나 보트가 섬 사이로 접근하자 수백 마리 물개가 에워싸고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 콧구멍을 벌렁 벌렁 거리며 따라 다녔다.
소위 물 반 물개 반으로 동물 자연 서식지 물개 섬이었다. 섬 기슭에도 크고 작은 물개들이 여기 저기 즐비하게 바위에 배를 붙이고 누워 체온을 조절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섬 전체는 바닷새, 팽귄이 빽빽이 앉아 요란하게 지저귀며 검게 뒤덮고 있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섬에서 물새들이 떼 지어 날아올라 은하수 모양을 그리며 먼 바다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날아가는 광경도 정말 장관이었다.
PARACAS에서 버스 타고 이따금 귤농장, 포도농장을 지나치기도 하며 아득한 사막 사이 도로를 달려 작은 마을 나스까에 도착했다. 간단한 체조로 긴장을 풀고 세계 7대 불가사의 나스까 라인을 상공에서 보려고 4인용 또는 6인용 경비행기에 나누어 탑승했다. 이 나스까 평원에 그려져 있는 거미, 나무, 도마뱀, 고래, 개 등 여러 가지 그림과 직선, 삼각형, 사다리꼴의 수많은 곡선과 신비한 무늬는 기하학 천문학 책 같기도 하였다. 경비행기가 자꾸 출렁 출렁거려 힘들었다.
리마로 돌아와 오랜만에 한식으로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이동 로스앤젤스행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4시간을 대기했으나 기관 고장으로 출발이 취소되었다. 기다리는 동안이 지루하여 잡담도 하고 의자에 누워 잠자도 자고 복도를 속보로 걸으며 신체를 단련시키기도 했다.
우리일행은 LAN 칠레항공 안내에 따라 쉐라톤 리마호텔에서 1박 이튿날 로스앤젤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일 인천행 탑승권 5매를 겨우 확보 일행 중 바쁜 사람은 출발하고 남은 사람은 밤 10시가 지나 로스앤젤스 공항 인근 메리어트호텔에 묵었다.
그 시간 식당은 크로스 되고 룸서비스로 치킨 날개 2인분 $50 상당을 주문했는데 손수레로 배달된 치킨, 야채, 빵 등이 넓은 양의 접시에 여러 개에 가득 담겨 있어 이 음식을 어쩌나 걱정하며 허리띠를 풀고 먹어도 다 먹을 수 없었다.
우리일행은 비행기 12회, 경비행기 1회, 배 3회, 산악열차 2회, 여러번 버스 타고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 남미 4국을 15박 16일 관광하고 사뿐히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아! 즐거운 남미 여행이었다.
2005-10-17 0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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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미여행기<중>
권오균<前 서울시 의약계장>
리오의 코르코바도 언덕을 산악열차로 올라 사진으로 보았던 양팔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예수상을 바로 곁에서 바라보고 산 아래 펼쳐진 바다, 해변, 시가지가 함께 어울려 더욱 아름다웠다.
H.STERN 보석박물관도 들리고, 매년 2-3월이면 세계적인 축제 리오 카니발이 성대히 열리는 삼바 축제 광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관람석에 앉기도 하고 화려한 삼바 의상을 빌러 입고 기념 촬영도 했다.
밀가루 같은 고운 모래로 된 꼬빠까바나 해안, 이빠네마 해변을 맨발로 걸어 보고 모래 위에 피부색이 각각인 많은 사람들이 선텐을 하거나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바다에 떠 있는 슈가로프산을 케이블카 타고 올라 맥주를 마시며 보석가루를 흩어 놓은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시내 야경에 취해 오랜 시간 머물고 내려와 아주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차린 부페에서 마음껏 저녁을 먹었다.
삼바쇼 공연장으로 이동 화려한 의상의 많은 무희들이 출연 리오 카니발을 재현한 정열의 삼바춤을 감상하고 그 마지막 프로로 진행하는 나라별 손님 노래자랑 대결에서 사회자가 꼬레아를 호명하니 각시가 제일 먼저 스테이지에 뛰어 올라 아리랑을 부르자 일행도 함께 힘차게 불러 그렇게라도 코리아를 알렸다.
다음날 리오항에서 유람선 타고 바다로 나가니 한국이 건조해 수출한 석유 시추선이 정박해 있고, 세계서 가장 긴 다리가 보이며, 맑고 깨끗하고 조용한 바다에 인수봉 같은 직립 바위섬들이 여기 저기 우뚝 솟아 있고, 길게 쭉 뻗친 모래 해변, 푸른 숲, 잘 정돈된 시가지 풍광이 호주 시드니나 이태리 나포리보다 아름다운 세계 최고 미항이었다.
선상에 앉아 기분 좋은 바닷바람을 맡으며 50도 소주를 마시고 3인조 밴드에 맞추어 유행가를 합창하며 즐겁게 놀았다.
고대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전설 속의 도시 꾸스꼬를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공중에서 내려다 본 안데스산맥은 치솟은 고봉에 가파른 급경사로 깊이 파인 골짜기가 반복되어 한복 치마 주름처럼 한 겹 한 겹 겹겹이 접힌 형상을 하고 있는 거대한 회색 민둥산이었다. 평지가 드물어 높은 산 중턱에 도시를 만들고 비탈진 산 높은 곳까지 밭을 개간하여 감자 옥수수를 심어 놓았다. 건조한 고산지역에 자생하는 나무가 없어 여러 종류 나무를 시험 재배 한 결과 코알라가 잎을 먹는 유카리 나무가 자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유카리를 식목한 지역은 푸른 울창한 숲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꾸스꼬는 포고 3,399m가 넘는 고산지대로 비행장을 나올 때 공기 밀도가 희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계단을 급히 오르거나 뛰면 가슴이 조여드는 통증이 일어나고 눈뜰 힘조차 없어지는 고산병에 시달리게 된다. 우리 일행도 답사 며칠 전부터 술도 먹지 않고 몸 관리하며 조심조심 대비했어도 여러 명이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 산소호흡기 신세를 지기도 했다.
잉카 유적지 ‘태양의 축제’가 열리던 삭사이와만 요세, 제례장 켄코, 미로식 지하도, 거대한 돌을 깍아 만든 성곽은 꾸스꼬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내 아르마스광장 한쪽에 말을 탄 정복자 피로사의 황금 동상이 있고 고풍스러운 성당과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코리칸차 태양신전을 재건축한 고색창연한 산토도밍고 대성당과 유물도 구경했다.
꾸스꼬의 주택이나 건물은 진흙으로 만든 벽돌과 기와로 건축하여 도시 전체가 엷은 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버스로 꾸스꼬를 출발 안데스산의 깎아지른 비탈진 도로를 굽이굽이 돌아 낮은 구릉지로 내려와 아담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은 여러 동의 다양한 형태로 지은 건물이고 정돈된 화단에 화사한 꽃과 식물을 가꾸어 놓았고 지붕이 덮인 넓은 야외 수영장이 딸려 있었다.
호텔 식당 입구 넓은 공간에 큰 화덕이 있어 우리는 장작불을 피우고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인근에는 우리나라 50년대 시골 주택과 같이 흙과 볏집을 이겨서 만든 흙 벽돌로 지은 농가가 뜨문뜨문 있었다.
페루 사람들은 대부분 단신이고 목욕을 하지 않고 여자들은 어깨에서 둔부까지 일자형이고 짧은 통치마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가축에게 여물을 먹이거나 농사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우루밤바에서 강을 따라 버스로 오얀따이땀보 기차역으로 이동 관광열차에 승차해 보니 기차 지붕이 투명하여 푸른 하늘이 환히 보이고 개울에는 물줄기가 휘돌아 흐르고 좁고 험한 협곡 사이로 난 철로를 달려 철마의 종점 아과스과이레스역에 도착했다.
기차역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400m 산을 오르는데 급커브를 26번 뱅글 뱅글 회전하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 신비의 공중 도시 마츄피추에 도착했다.
마츄피추는 스페인 정복자들의 접근이 불가능 하여 파괴 안 된 유일한 곳으로 잉카 시대의 잃어버린 과거가 그대로 남아 숨쉬는 잉카 최고의 유적지였다.
해발 2,280m 산꼭대기에 성벽으로 견고하게 만든 요새로 돌을 다듬어 만든 태양의 신전, 왕녀의 궁전, 태양의 문, 잉카다리, 해시계, 3,000여개 계단이 있고, 집터, 계단식 밭, 지금도 물이 흐르는 양수시설을 볼 수 있었다. 맞은편 산위에도 와이나피츄 유적지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굵은 옥수수를 생산한다는 우루밤바 작은 마을의 가정집을 방문했는데 집은 부엌, 식당, 침실, 상점, 가축 기르는 장소가 한 칸이고 방 안쪽 흙벽을 파낸 공간에 할아버지, 할머니 등 조상의 두골을 넣어 놓고 살고 있었다.
이 같이 비위생적인 주거환경에서 생활해도 전염병이 창궐하지 않는 이유는 아궁이에 나무를 땔 때 나는 연기와 벽에 달라붙은 깜장이가 살균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5-10-12 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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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미여행기<상>
권오균<前 서울시 의약계장>
우리일행은 ‘05.8.11일 CAL에 탑승 인천공항을 출발 로스앤젤스에서 LAN 칠레항공으로 환승 페루 리마를 경유 28시간을 하늘에서 먹고 잠자고 지쳐서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이른 새벽 내렸다.
흰 눈이 쌓인 안데스산에 오르려고 버스를 탔다. 넓은 평원을 지나 한적한 농가식당에서 삶은 돼지고기에 포도주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하고 험한 산악지역에 접어드니 동 광산가는 철길이 있고 간이역 인근에 허름한 광산촌이 보였다. 만년설이 뒤 덥힌 해발 3,100m 안데스산맥 고봉을 가파르고 꾸불꾸불 비탈진 도로를 돌고 돌아 올라갔다.
이곳 스키장은 적설량이 많고 스키어들이 가물가물한 높은 봉우리를 리프트로 올라가 경사가 심한 슬로프를 빠른 속도로 점프하며 활강하는 모습은 매우 멋이 있고 후련해 보였다. 하얀 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야외온천장에는 피로한 여행객들이 설경을 보며 탕 속에서 쉬고 있었다. 눈밭에 목재로 아기자기하게 지어 놓은 아담한 스위스풍 호텔은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산티아고로 돌아와 우리나라 남산 같은 산크리스토발 언덕에 올라 기분 좋은 바람을 쐬면서 시가지 야경을 바라보니 남북으로 길게 뻗쳐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만년설이 녹아 내려온 잿빛 개울물은 시내를 가로 질러 힘차게 흘러가고, 비둘기 배설물로 덧칠한 400여년 된 웅장한 성당이 도시 중심지에 우뚝 서 있었다.
약국은 우리나라 의약분업 이전처럼 번화가 코너 여기저기에 개설 의약품, 건강식품, 의약외품을 판매했다. 대통령 집무실 아래층을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경호원과 이야기도 나누고 운 좋으면 대통령과 마주치기도 하며 사진도 찍고 정원에 있는 의자에 앉아 쉴 수도 있었다. 칠레는 농업국가로 알려져 있어도 산업 가운데 포도 생산 등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0% 내외로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커다란 이슈였던 한·칠레 FTA 체결을 아는 칠레인은 거의 없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동 보카지구에 가니 오래된 낡은 건물, 난립한 가게, 고기 굽는 냄새, 길가에서 무희들과 악사가 어울려 춤추고 노래 불러 대단히 소란스럽고 분주했다. 옛날에도 이 거리는 환락가였는데 그때 남녀가 선술집에 모여 밤 새워 추던 춤이 지금의 탱고로 이어져 탱고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선착장은 오물이 둥둥 떠다니고 바닷물은 시멘트 분말을 풀어놓은 것 같고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항구로 평판이 나쁜데 여행객들이 검은 바다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려고 보트를 타고 돌아보고 있었다. 야간에 극장식 식당에서 와인을 마시며 전통 탱고 쇼를 관람했지만 재미가 별로 없었다. 거리의 주점에서 주민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술에 취해 즐겁게 추는 탱고가 매우 정겨워 보였다.
아르헨티나 대통령궁은 노랑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고 광장에 세워진 동상이나 커다란 고무나무 밑에 각종 정치구호가 어지럽게 적혀있었다. 우측으로 365일 가스불이 타고 있는 장중한 성당과 유럽식 건물, 멀리 일직선상에 백악관을 닮은 국회의사당이 보였다. 레클레타 공동묘지에는 에바페론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가 대부분 묻혀 있는 장소로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 비스듬한 언덕에 있는 광장 옆에 있었다. 바둑판처럼 조성한 공동묘지로 작은 집 같은 석묘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고 일부 묘는 입구 툇마루 같은 공간에 고인의 사진도 걸어 두고 자손이 앉아 기도 할 의자 있고 시건 되어 있었다, 정교하게 조각한 검은색 대리석 묘비는 하나하나 예술품으로 손색이 없었다. 묘지 분위기는 여기가 바로 저승세계 같았다. 일행이 묘지를 나서서 공원을 걷어 가는데 저편 큰 고무나무 밑에서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생 비디오를 계속 틀고 있어 보고 또 보고 눈요기를 충분히 했다.
다음날 부에노스아이레스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거리 양쪽에 즐비하게 늘어선 초라한 가게들의 한글 간판은 모두 너무 낡아 버렸고 동포 같은 주민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여 바라 볼 수 없었다. 내가 알던 인모씨, 이모씨가 20여년 전 이곳으로 이민 왔는데 성공했는지, 아니면 저 영세 가게 주인으로 생활하고 하는지 상상하며 잠시 쓸데없는 상념에 젖기도 했다. 저녁을 아담한 식당에서 우아하게 앉아 먹으려고 기다리는데 한국에서 동행한 여행 안내자가 여권에 기재된 생년월일을 보고 오늘이 내 각시 회갑 날 이라며 축하 케이크를 가져오고 일행이 기쁜 마음으로 회갑연을 베풀어주어 너무 감격하고 감사했다. 이날 저녁 아르헨티나가 가장 번성할 때 건설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변에 위치한 HOTEL EMBAJADOR에서 잤다.
세계 어느 곳보다 아름답고 웅장한 이과수 폭포를 브라질 편에서 바라보니 이쪽저쪽에서 우령찬 소리가 나고 여러 곳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너무나 웅장하여 넋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폭포의 물줄기 275개, 폭이 5km, 최고 낙차가 100m 넘는 세계 최대 폭포로 북미 나이아가라 또는 아프리카 빅토리아 폭포 보다 훨씬 거대하여 견줄 대상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르헨티나 편 이과수를 관광하기 위해 이과수강 다리 중간에 그어 놓은 황색 선이 국경인데 아르헨티나 검문소로 넘어가 입국신고를 하고 한동안 걸어 정글 속을 다니는 꼬마기차를 타고 폭포 상류에 내렸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에 길게 놓인 나무다리가 끝나는 지점에 악마의 숨통이 있었다.
물이 모여 나선형으로 빙빙 돌아 웅장한 소리를 내며 낭떠러지에 쏟아져 내리는 모습에 정신이 아찔하고 몸이 끌어당기는 듯한 신비스런 느낌이 들었다. 자연이 만든 신비하고 멋진 볼거리였다. 이쪽저쪽에서 흐르는 이과수 폭포를 쳐다보며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걸어 이과수강에 내려가 보트를 타려고 구명조끼와 우의를 걸쳐 입었다. 보트가 폭포 쪽으로 다가갈수록 고막이 찢어지는 힘찬 소리에 물거품과 안개가 자욱하고 머리위로 쏟아지는 물벼락을 맞아 옷이 젖어도 스릴에 취해 광기 부리듯 아우성치기도 했다. 빛에 따라 색채가 변하는 물이 품어내는 듯한 무지개가 폭포 아래 이곳저곳 곱게 떠 있어 평생 볼 무지개를 거기서 다 보았다. 돌아 올 때 정글용 트럭을 타고 군인 복장을 한 젊은 안내원의 자연에 대한 열띤 설명을 들으며 긴 숲 터널 길을 달려 분수를 뿜고 있는 정글 속 아담한 식당에서 각종 육류로 요리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2005-10-05 1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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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유럽 및 발틱 3개국 크루스 여행기(完)
노환성(주)에이팜코리아 고문/건국대학교병원약제팀 자문교수
6월 30일(목요일)
이틀간의 긴 항해가 시작된다. 이제는 들리는 항구가 없기 때문에 승객들은 차차 하선할 준비들을 하면서 짐을 꾸려야 하고, 또 갑판위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즐기기도 하기에, 배 안의 모든 시설들은 승객들로 분비고 있다.
쇼핑센터에서는 땡 처리 식의 물건을 대폭 할인하여 파는 행사를 하며, 또 10달러 균일판매를 하는 행사도 있어서, 갖은 모양의 Fashion 시계, 장난감, 그리고 티셔츠 등을 10불에 균일하게 세일하는 이 행사에는 승객들의 발길로 붐볐으며, 마지막 행운을 노리는 승객들로 카지노 "Fortune"에는 빈 기계가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느즈막하게 일어나서 늘 해오던 대로 수영장에서 몸을 푼 후, 10층 뷔페식당에서 L회장부인이 준비해온 컵으로 된 신라면 한 개에 따뜻한 물을 부어, 아내와 나누어 먹으면서 우리의 라면 국물이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을 하면서 아침을 먹었다.
점심은 우아하게 즐기자고 해서 L 회장 부부와 5층에 있는 양식당에서 양정식으로 했다. 태국의 푸켓에서 왔다는 미남 웨이터가 이제 내일이면 이별이라고 하면서 더 살갑게 군다. 점심식사가 끝나갈 무렵인 오후 1시 10분쯤, 웨이터가 유명한 다리를 지나가고 있다고 얘기를 해주어서 모두 10층 갑판으로 올라갔더니 Constellation 호는 덴마크와 스웨덴 두 나라를 연결하고 있어서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총 길이 18Km 다리의 높은 교각 밑을 통과하는 장관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다리위로 간간히 승용차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이는데 바다위로 놓여있는 워낙 높은 다리인지라, 마치 조그만 한 물체가 지나가는 것처럼 작게 보인다.
오후 1시 30분에는 4층의 Meeting Room 에서 여행을 주선한 D 여행사에서 준비해온 영화를 감상했다. 이 배안에 있는 시네마 홀에서 하루에 몇 차례씩 최신 영화를 무료로 상영해주고 있었지만, 이 번 여행 중에는 한 번도 가볼 짬이 없었기에 좀 아쉬웠는데 다행히 여행사에서 한글 자막이 있는 영화를 준비해왔단다.
온종일 항해가 있었던 크루스의 초반에도, 캐서린 헵번의 Summer time을 감상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미국의 록키산맥에서 근무하는 산악구조대의 모험을 그린 영화로 상당히 재미는 있었지만 너무 스토리의 전개가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며, 거대한 록키산맥의 장관을 구경 할 수 있어서, 영화가 끝난 후에 모두들 준비해준 주최측에 고맙다는 박수를 보냈다.
7월 1일(금요일)
마지막 항해가 계속되는 날이다.
우선 당장 사용할 물건만은 hand carry 할 수 있게 남겨두고, 모든 물건을 가방에 넣는 짐을 꾸리는 것이 중요하며, 미리 선실로 배부된 우리 팀만의 color와 번호가 표시된 baggage tag인 짐표를 가방 손잡이에 부착한 후 오늘밤 9시까지 각자의 선실 앞 복도에 내 놓아야한다. 그러면 이 짐들을 객실 담당자들이 1, 2층에 있는 짐 보관소로 옮긴 후 내일 아침 미리 통보된 순서대로 하선하면, 짐들이 내려져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도록 하는데, 한 치의 차질이 없도록 하고 있단다.
원래 크루스 기간 동안에는 일체의 개인적인 팁이 없도록 규정되어있으나, 첫 승선 때 짐을 선실에 올려다 주면 가방 한 개당 1불정도의 팁을 주어도 무방하며, 선실로 식사를 주문하여 먹고자 할 때에는 음식 값은 무료이지만 담당 직원에게 약간의 팁을 주는 것이 팁의 전부이다.
그러나 크루스 기간 중의 전체적인 팁은 모든 승객 한사람 당 하루에 10불씩 계산 된 돈이 승객들의 신용카드에서 자동 지출되도록 되어 있어서, 이 돈으로 식당, 객실 및 기타 근무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모든 크루스 회사에서 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 번 여행에는 1인당 140불씩의 팁이 지출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매일 챙겨주는 과일 써어비스는 물론, 두어 차례 얼음에 재인 샴페인 병도 넣어주는 등 각별하게 Room Service를 해준, 남아프리카 출신의 객실담당 직원에게는 따로 불러서 20불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 주었더니 너무나 고마워한다.
저녁식사를 이 배에서는 마지막으로 우아하게 양식으로 한 후, 4층의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송별 호화 쇼를 즐겼다. 옆 자리에 있는 서구사람들, 심지어는 어린 애들까지도 사회자의 죠오크 에 박장대소를 하지만 우리에겐 언어소통의 문제나 습관의 차이에 때문에 똑 같이 웃어 줄 수는 없어서 서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무대였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7월 2일(토요일)
4시30분에 기상하여 그 동안 늘 해오던 대로 실내 풀장에를 갔더니, 오늘 새로 승선하게 되는 새로운 손님을 위해서 폐쇄를 해놓고 있어서, 아쉬운 대로 사우나에서 샤워를 할 수밖에 없었다. 5시 무렵에 눈에 설지 않는 안개가 자욱한 Dover 항에 입항을 하는데 멀리 보이는 방파제에는 아침 일찍부터 낙시를 하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6시에 서둘러서 뷔페로 아침 식사를 한 후, 비행기 시간관계상 비교적 일찍 하선 하였더니 모든 짐이 잘 정렬이 되어 차질이 없이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이용하여 런던을 향해 북쪽으로 2시간 30분을 달려서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였다. 오후 3시에 영국을 출발해서 암스텔담에서 바꿔 탄 한국행 KLM 865편은 다음날 새벽 4시30분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2005-09-21 1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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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유럽 및 발틱 3개국 크루스 여행기(6)
노환성(주)에이팜코리아 고문/건국대학교병원약제팀 자문교수
* 6월 28일(화요일)
오전 9시에 시골의 조그마한 항구도시 같은 Latvia 국의 Riga 항에 배를 대었다. 배가 정박된 부두는 펄프 원료로 사용되는 원목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곳이어서 안내를 맡은 S 군이 이곳을 찾기가 너무 어려워서,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도착을 했단다.
인구 260만의 Latvia의 수도인 Riga는 독일 사람들이 처음 건설한 도시로서, 90만 명이 살고 있는데 발틱 3개국 가운데 이 나라의 면적이 가장 넓으며,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비교적 서구화된 부자나라로서 요즈음은 많은 소련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는데 실제로 소련사람의 비율이 40%나 되며, 또 이 나라의 경제권까지 쥐고 있어서, Latvia 사람들의 소련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비교적 부자들인 소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물가도 상당히 비싸며, 도로 교통사정도 복잡하지만 이곳 Riga 시민들의 교통수단은 오직 Tram Car 만 있기 때문에 소련당국이 이 도시에 지하철을 건설해주겠다고 제안을 한 바 있었는데, 다시 소련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 올까봐 거절을 한 일이 있다고 하며, 요즈음은 하도 교통이 혼잡해지니까 일부의 Latvia 사람들은 그때 소련의 제의를 거절한 일을 후회하고 있단다.
EU 회원국 중에서 여자 대통령이 있는 나라는 모두 3개국으로 핀란드, 아일랜드에 이어서 이곳 Latvia 의 대통령도 여자인데, 그 녀가 살면서 집무하는 대통령궁이 시민이 늘 이용하는 는 공원 안에 있는 박물관 뒤에 있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지드나 들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며 씁쓸한 기분이 나기도 했다.
이 나라에서 자랑할 만한 것으로는 세 가지를 들 수가 있는데, 첫째는 Minox 카메라로서 이 나라에서 처음 만들었다가 다른 나라로 넘어갔다고 하며, 두 번째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한 곳이란 사실이며, 셋째는 종교개혁 전에 마르틴 루터가 이 도시에 살면서 종교개혁을 구상했던 곳이라는 점이며, 교외의 전나무 숲을 산책하다가 이 나무를 이용한 크리스마스트리의 영감을 얻은 곳도 이 도시라고 했다.
한때는 암울하기만 했던 소련사람들에게 자유로움을 노래해서,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던 한국계의 빅토르 최가 한국에서의 첫 공연을 하기 바로 직전에 이곳 Riga 에서 콘서트를 한 후 한국에 가기 바로 전에, 교통사고로 숨진 곳, 즉 그의 생애 마지막 콘서트를 한곳이 이곳 Riga 라고 해서 우리를 숙연하게 해주었으며, 심수봉이 불렀다는 "백만 송이의 장미"는 원래 이 나라에서 많이 불리워지고 있는 노래인데, 한국에서 따다 부르는 것 이란다.
이 나라에는 200여명의 고려인과 6명의 한국교민이 살고 있으며 점심식사는 한국식당인 "설악산"에서 했는데, 이번 여행 중 가장 맛있는 한식을 맛볼 수 있었던 곳으로 기억되며, 부인이 Latvia 사람인 이 한국식당의 사장은, 또 시내 번화가에 일식집도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를 흐뭇하게 해주었다.
우리 기업으로는 삼성이 막 영업을 시작 하고 있어서 시내에 눈에 익은 큰 광고판을 볼 수 있었으며 LG 도 곳 사무실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저녁 6시에 출항하다.
* 6월 29일(수요일)
좀 일찍 잠이 깨어서 실내 풀에 들어갔더니 수영장의 물이 몹시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아마 이 곳 발틱 해의 바닷물이 파도가 높은 모양이다. 그러나 배가 워낙 커서인지 선실에서는 별로 느끼지 못했었는데 수영장의 물 만큼은 몹시 출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9시에 발틱 해 연안 3개국 중 마지막 기항지인 Lithuania 의 Kleipeda 항에 입항하다. 이 도시는 발틱해 3개국 중 유일하게 스웨덴, 독일, 덴마크 등으로 운항하는 카 훼리가 있는 항구도시이다.
Kleipeda는 194,000명의 시민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인데 특히 재즈를 전공하는 대학이 있는 곳으로서, 이 도시를 찾는 관광객들이 들리는 코스에도 재즈의 연주를 들으면서 맥주 한 병씩을 마시는 Package 관광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한다.
마침 이 나라에서는 한국인 현지 가이드를 구할 수가 없어서, 처음으로 Constellation 배안에서 운영하는 관광프로그람에 참여를 해서, 초등학교 교사가 원래의 직업이라는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영어로 안내되는 반나절의 관광을 했다.
이 도시에서 북쪽으로 30여분 올라가면 Palango 해수욕장이 있는데, 끝이 안 보이는 긴 백사장으로서 북쪽의 발틱 해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데도 이 도시에 사는 젊은이 들은 아랑곳없이 바닷물에서 수영들을 하고 있었다.
원래 이곳의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서 말짱 했던 하늘에 금방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서 비가 내리기도 하는 북유럽의 전형적이 기후 때문에,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는 기간은 불과 몇 달 못 되어서, 여름을 그냥보내기가 아쉬운 시민들이 날씨에 관계없이 여름철에는 바닷물 속에 몸을 담근단다.
Lithuania 의 특산품은 영어로 Amber 라고 불 리우는 보석의 일종인 호박인데 한때는 화폐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이 호박을 보드카에 담갔다가 목이 아플 때에 마시기도 하고 또 타박상에 바를 정도로 이 나라 사람들에겐 친근한 보석이며, 잘 갗 추어진 호박 박물관도 있어서 온갖 종류의 귀한 호박들을 다량 전시해 두고 있었다.
호박의 가격은 천차만별인데 진품과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으로는, 소금물---물 1 cup에 소금 3 teaspoon---에 담가보면 물에 뜨면 진짜이고 가라앉으면 가짜라고 하며, 이 호박을 피부에 문질렀을 때 소나무 향기가 나면 진품이며, 또 다른 방법으로는 불에 태워 보았을 구멍이 생기면서 송진 냄새가 나면 진품이라고 하는데 값비싼 호박으로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여 검사해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이 도시 중심가에 있는 광장의 가운데에 한 소녀의 동상이 서있는데, 1939년 독일이 이 나라를 점령한 후 점령군의 총수인 히틀러가 광장 옆의 3층 건물 베란다에 서서, 이 도시의 청중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다 자기를 바라보며 경청을 하고 있는데, 오직 이 소녀 동상만은 자기에게 등을 돌리고 서있어서, 당장 부하에게 동상을 철거하도록 했었다 는데, 이 나라는 독립을 하자마자 다시 소녀의 동상을 원 상태로 복구시켜 놓았다는 에피소드도 들을 수 있었다.
오후 6시에 Kleipeda 항구를 떠났다.
필자가 어린 시절 항구 도시인 군산에서 살았던 때를 생각해보면, 모든 배가 출항을 할 때에는 항상 긴 뱃고동을 울리며 떠나곤 했는데, 소음공해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탄 이 배는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떠난다.
Kleipeda 가 이번 크루스의 마지막 기항지이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 발틱 해안을 따라 왔던 항로를 다시 거슬러서, 출항지였던 Dover 항까지 이틀에 걸친 긴 항해가 시작되었다.
2005-09-14 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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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유럽 및 발틱 3개국 크루스 여행기(5)
노환성(주)에이팜코리아 고문/건국대학교병원약제팀 자문교수
* 6월26일(일요일)
간밤에 비가 엄청나게 쏟아진 후인지라 날씨가 쌀쌀해져서 마치 초겨울을 방불케 한다. 간밤에 선실로 배달된 Newsletter에도 오늘의 최고 기온이 섭씨 12도에 머물면서 간간히 비도 내릴 것 같다고 해서, 하선 할 때에는 두툼한 겨울용 세타에 우산까지 준비를 해야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도시 전체가 가는 곳 마다 꽃가루---다행히 이 꽃가루는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는 것 이라고, 현지에서 살고 있는 가이드가 설명은 해주었으나 글쎄(?)---마치 겨울에 내리는 눈처럼 휘날렸는데, 어제 밤의 비에 싹 가셔서 다행히도 깨끗한 시가지를 볼 수 있었으나, 오후가 되니까 다시 꽃가루가 날리기 시작해서, 이도시의 특색 한 가지를 꼽으라면 하얗게 휘날리는 꽃가루를 들을 수 있겠다.
어제 오후에 시베리아 횡단 차 이 도시에 들른 한국 L여행사의 여성고객 한분이, 옛날 러시아 황제들의 여름휴양지인 페테르코프에 갔다가 여권을 소매치기 당했는데, 이곳에는 한국의 영사관이 없어서 출국에 필요한 여행증명서를 발부 밭자면, 하는 수 없이 비행기로도 여러 시간이 걸리는 모스크바의 한국대사관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일행과 떨어져야하는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고, 특히 소매치기에 조심 할 것을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버스로 한 시간쯤 걸리는 교외에 러시아 황제들의 여름휴양지였으나 지금은 분수공원으로 더 잘 알려진 페테르코프가 있는데, 10시30분부터 이 분수공원의 분수가 작동을 시작 한다---이곳의 분수공원은 전력을 사용하여 펌프가 물을 품어 올리는 다른 분수대와는 달리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분수가 올라온다는 특징이 있다---고 해서 잠간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근처에 있는 Peter & Paul Church 라는 러시아 정교회의 일요일 아침 예배에 잠간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교회의 특징은 신도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이 모두 서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천주교의 미사 의식과 비슷해보였으나, 신도들이 예배 중에도 계속하여 십자의 성호를 그리며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하는데, 특히 성호를 긋는 순서는 머리, 가슴, 오른쪽, 그리고 왼쪽 어깨의 순서로 천주교와는 약간 다른 것 같았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주장해오던 70년간에 걸친 공산주의시절에는 러시아 정교에 대한 핍박이 여간 심했던 것이 아니었으며, 특히 스탈린 같은 지도자는 모스크바에 있는 유명한 교회를 헐어내고 그 자리에 대중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을 만들기도 했는데, 공산주의가 지나가자 다시 이 자리에 러시아 정교회를 세웠을 정도로 국민들의 신앙심이 참으로 깊다고 했다.
이 도시의 시민들도 요즈음 유행하는 웰빙 바람이 불어서 많은 시민들이 주말만 되면 우리의 주말농장과 비슷한 "다차"라는 이름의 별장으로 나가서 주말을 보내기 때문에 이때는 도시 전체가 한산할 정도라고 한다.
분수공원 안에도 곳곳에서 트럼펫이나 바이오린 등으로 관광객들을 향하여 연주를 하고 있는 뮤지션들이 있었는데, 우리 일행이 앞을 지나가면 어김없이 애국가를 연주하곤 해서 이 들이 어떻게 관광객의 국적을 구별 하는지를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더니, 자기들 안내인이 살짝 알려주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이 들은 주로 외모를 보고서 여행객들의 소속국가를 짐작하는데, 동양 사람들 중에서 일본사람 들은 비교적 키가 작고 가이드를 따라 일사분란하게 이동하며, 중국인들은 비교적 큰소리로 얘기들을 많이 하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단체이지만 잘 흩어져서 다니며 옷차림이 다른 그룹들보다 더 화려하다고 하며, 이런 식으로 예상을 하면 90%는 적중 한다고 해서 모두들 웃고 말았다.
오후 6시에 출항하니까 5시 30분까지 승선을 완료하다. 배가 부두에 묶어 논 긴 밧줄을 풀고 떠날 채비를 하자, 기특하게도 어제 아침에 소련 입국 시에 보였던 하얀 제복의 브라스밴드가 환송 연주를 해주고 있어서, 승객들 모두 갑판에서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발틱해를 따라 남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한다. 오후 11시 40분에 발틱 해의 바다 아래로 떨어지는 장엄한 모습의 태양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았다.
* 6월 27일(월요일) 일출 4시 05분 일몰 10시 53분
간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시간을 한 시간 늦게 가도록 맞추어 놓으면서 모닝콜을 부탁해 놓았는데도 아침이 되면 늘 그 시간에 잠이 깨어져서, 늘 해오던 대로 실내 풀장에서 수영을 한 후 사우나에서 몸을 풀고 뷔페로 아침식사를 하다.
7시경에 Tallin 항에 입항하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발틱해 연안의 3개국 중에서 첫 번째 방문국인 인구 140만의 Estonia의 수도인 Tallin은 조그마한 시골의 항구 같은 모습으로 인구가 40만에 불과한데 그동안 강대국사이에 끼어서, 마치 우리 한국처럼 슬픈 역사를 많이 간직한 나라였지만 작년에 EU에 가입하여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고 있으며, 특히 IT 산업에 중점을 두어서 무선인터넷 가입률만큼은 유럽에서 최고수준에 있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단다.
Tallin은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어 지며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산은 350m 로서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붉은 지붕들의 시가지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우며, 구시가지는 특히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정도로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15-18세기경까지 이 도시가 한자무역의 거점도시 노릇을 해서,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운 Gild 가 들어서 있던 건물들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현재는 그 중 한 채를 Opera House로 이용하고 있는데 발틱해 건너편의 Finland 사람들도 구경을 올 정도로 유명하단다.
구시가지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길옆에 있던 한 뮤지션이 일본민요를 연주해 주어서 우리들을 웃게 만들었는데, 아직 이곳을 찾아오는 한국인은 극히 드물어서 동양인으로는 오직 일본사람들이 가끔 들리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우리 일행을 일본사람으로 예측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모스크바 올림픽 때에 이곳 Tallin에 있는 조정경기장에서 올림픽 조정경기가 개최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는 아마 이 나라가 소련과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은 되지만, 모스크바에서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많은 선수와 임원들이 어떻게 이동을 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 도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야외음악당이 있는데, 30,000명의 합창단이 올라갈 수 있는 무대와 7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으로 된 잔디의 객석으로 되어 있어서, 세계적인 음악인 특히 마이클 잭슨 같은 사람도 이곳에서 공연을 한바 있다고 하며, 이 음악공원 옆에는 이 나라의 국민 작곡가인 구스타프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분의 "나의사랑 / 나의조국" 이라는 곡은 아직도 이 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곡이라고 하며, 한 가지 좀 의아한 것은 이렇게 훌륭한 음악가를 낳은 이 Estonia 국가의 곡조가 Finland 국가와 똑 같으면서 가사만 다르다고 하는 점이다.
이곳 Estonia 에는 한국인이 단 5명이 있는데 한사람은 오늘 우리를 안내한 민속학을 전공하는 S 군이고 나머지 4명은 선교사와 그 가족이라고 하며, 내일의 기항지인 Latvia 국에는 안내할 수 있는 한국인이 없어서 이곳 가이드가 우리 안내를 마친 후에, 5시간이 좋이 걸리는 거리를 고속버스를 타고 Latvia까지 온 후, 배를 타고 온 우리를 마중해서 하루 더 안내를 하겠다고 했다.
저녁 7시에 출항하다.
2005-09-12 0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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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유럽 및 발틱 3개국 크루스 여행기(4)
노환성(주)에이팜코리아 고문/건국대학교병원약제팀 자문교수
* 6월 24일(금요일)
오전 7시 정각에 Finland 의 Helsinki 항에 입항했다.
"일출 4시 20분, 일몰 22시 38분" 이라고 Celebrity Newsletter가 알려주는 대로 오늘은 낮 시간이 가장 긴 날인 하지이며, 따라서 북유럽에서만 볼 수 있는 백야현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날이라고 한다.
이 나라의 의 수도인 헬싱키는 금요일이지만, 매년 하지 날에 거행되는 "꼬꼬"라는 이름의 봉화제 등 백야축제가, 이 도시의 교외 곳곳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이 도시에 살고 있는 많은 시민들이 아침부터 구경들을 떠나가서, 이 도시 전체가 텅 빈 상태가 되어버려 오직 관광객만이 이 도시에서 주인이 되는 특별한 날이라고 하는데, 역시 시내에 차량 통행이 한산하기만 하다.
인구 500만의 이 나라에는 헬싱키에만 54만 명이 살고 있으며 국민소득은 29,000불로서 복지정책이 아주 잘 되어 있어서, 국민 모두가 평등하게 잘 들 살고 있다고 하는데 휴대전화로 유명한 Nokia가 바로 이 나라의 대표적인 산업체로서, 한 때는 이 나라는 노키아가 먹여 살린다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로 이 나라의 대표적인 기업이란다.
누구에게나 핀란드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핀란드식 사우나인데, 이 나라 사람들은 보통, 교외의 경치가 좋은 호숫가 등에 통 나루로 만들어진 사우나시설들을 지어놓고 이용 하는데, 대개는 남녀 공용이며 호숫가 주변에 많이 자생하고 있는 자작나무 가지를 끊어다가 사우나 도중에 서로 등을 쓸어 주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이 사우나를 하는 방법이란다.
특히 이 나라에서 생산되는 자작나무에서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힛트 상품이 된 츄잉 껌의 이름에 들어가는 Xylitol 성분을 추출할 수도 있다고 하며, 자작나무가지를 잘라다가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모습도 볼 수가 있었다.
우리 교민은 겨우 10명 정도인데다가 모두 흩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만 날 볼 수 있는 경우가 드물어서, 인터넷 이외에는 고국의 소식에 접할 길이 드물단다.
이 나라에는 대학이 20개가 있는데 모두 각각 특성화되어 있어서, 우리나라나 일본 같은 유명한 대학이 따로 없으며, 우스개 말이지만 이 나라 사람이 자기 집에 전등불을 갈려고 한다면 세 사람의 인력이 필요한데, 첫 번째 사람은 교환 할 전구를 들고 갈아 끼우는 작업을 해야 하며,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의자에 올라서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의자의 높이를 조정하고 움직이지 않도록 의자를 잡아 주는 역할을 맡으며, 마지막 한 사람은 멀리 떨어져서 제대로 교체작업이 되는지를 확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것은 공과대학출신의 기술자들을 비유해서 하는 얘기란다.
이 도시 주변의 바닷가에서는 카페트를 세탁하는 시민들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1년에 한번 정도로 카페트의 세탁을 해야 하는 시민들을 위해서, 시 당국에서는 바닷가에 세탁장과 건조대 등을 마련해주고 있어서 여자들은 세탁을 하며, 남자는 물이 묻어 무거운 카페트를 들어 운반 해다가 건조대에 널어 주는 일을 담당함으로서, 이 세탁 일에는 온 가족이 동원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바닷물에 세탁을 해도 좋은 이유는, 이곳 바닷물의 소금함량이 적어서 민물과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세탁이 잘 되며, 또 반드시 무공해비누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어서 환경오염에도 별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 도시의 중심가에 위치한 암석교회는 196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주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큰 바위를, 자연 그대로 이용하기위해서 암벽 속을 다이나마이트로 조심스럽게 폭파시켜 동굴을 만든 다음, 700석 규모의 지하 교회로 만든 것으로서 자연채광을 이용하도록 하고 있으며, 총 길이가 22km나 된다는 동선을 이용한 음향조절 장치를 해놓아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찬송가나 세미클래식 등을 은은하게 들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평일에는 보통 오후 5시까지만 일반 공개를 하고 저녁 7시 이후에는 콘써트를 하거나 결혼식장으로 사용한다니 자연을 그대로 이용할 줄 아는 그 들의 마음이 부럽기까지 하다.
이 도시 교외에 시벨리우스 공원이 있는데, Finland의 애국자이자 작곡가인 시벨리우스를 기념하는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과 시벨리우스의 동상이 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의 이 음악가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은 대단한 것 같았으며, 배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핀랜드 사람인 운전기사가 틀어주던 시벨리우스의 필란디아를 들을 수 이었었던 것을 참 좋은 추억이 되었다.
저녁 6시에 헬싱키 항을 떠나 발틱해의 끝에 위치한 소련 령의 생 페테르스부르그 로 향하다. 저녁식사 후 8시 30분부터 대극장에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Elliot Finkel의 신 나는 피아노 연주를 Cerebrity 오케스트라와 협연으로 감상 할 수 있었는데, 이 분은 어제 비행기를 놏쳐서 Stockholm 에서 승선을 못하고, 오늘 다시 Helsingki 로 날라 와서 승선했기에 원래의 스케줄보다도 하루 늦게 콘서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 6월 25일(토요일)
아침 7시에 안개가 자욱한 소련의 San Petersburg(생 페테르스부르크)에 입항하다. 배가 부두에 접안하자 열 두어 명으로 구성된 흰 제복을 입은 브라스밴드가 환영 연주를 시작한다. 무리를 지어 하선하는 승객들이 간이 출입국관리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 잡은 이 들은 승객들의 국적에 따라 그 나라의 곡을 연주하고 있으면, 승객들은 좋아하며 모두 그 들 앞에 놓인 나무상자에 돈을 넣어서 감사를 표하는데, 우리 한국인 그룹이 지나갈 때는 애국가를 연주해주어서 가슴이 뭉클하게 해주었다.
10년 전 북유럽 여행을 하기 위하여 모스크바에 도착, 소련에 처음 입국을 했을 때에는 입국심사를 하는 동안 컴퓨터의 작동이 느린데다가 입국수속을 하는 관리들이 너무나 늦장을 부려서, 무려 두 시간 이상을 에어컨도 잘 가동되지 않는 입국장에서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이번 입국수속을 할 때는 아주 간단히 입국허가를 해주어서, 아마 그 동안 소련 관리들의 의식수준이 많이 바꿔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도시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꼭 두 가지의 주의 사항이 주어지는데, 첫 번째는 "도로를 주행하는 자동차를 조심하시오" 라는 것인데, 이곳은 사람보다는 차가 우선 이라는 생각이 운전자들의 관념이니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특히 주의해야 한단다. 두 번째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유럽의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이 도시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소매치기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단다.
300년 전에 피터대제에 의해서 네바 강과 발틱 해가 마주치는 이 지역에 처음으로 페테르스부르크가 세워졌으며, 공산세력이 한창일 때에는 레닌그라드로 이름을 바꾸어서 부르게 하다가 1991년부터 제 이름인 생 페테르스부르크 라는 원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이 도시는 물의 도시로서 360개의 다리가 모두 각각 모양새가 다르게 만들어졌으며, 다른 서유럽의 도시처럼 건축물도 모두 다르게 지어진 문화와 예술의 도시라고 한다.
매년 6, 7, 8월 3개월만이 관광계절이라는 이 도시에는, 이제는 우리 한국의 관광객을 너무나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필자가 첫 번 이도시를 방문했을 때에는 일본 관광객들만을 봤던 것과는 아주 달라진 현상이며, 사람들이 모이는 곳 마다 거리의 뮤지션들이 연주하는 애국가를 자주 들을 수 있었는데, 어떤 곳을 지나갈 때에는 우리를 보고 일본 국가를 연주해주어서 실소를 자아내게도 했다.
토요일이라 많은 시민들이 네바강가로 나와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등 휴일을 즐기는데, 청소년 들이 모두 카메라를 한 개씩은 꼭 가지고 있지만, 거의 모두 필름이 들어있는 카메라여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과는 아직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이 도시의 청소년 특히 여학생들은 하나같이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짧은 배꼽티를 거의 모두가 입고 있어서, 유행에서 만큼은 대단히 앞서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원래 러시아의 인구는 1억4천만 명으로 이 도시에만 950만 명이 살고 있는데 소련전체의 국민소득 자체는 얼마 안 되지만, 수도인 모스코바와 이 도시 등 두 개의 도시만 생각한다면 국민 소득이 12,000불 정도라고 하니 이 도시의 생활수준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네바 강가에 있는 옛 건물인 피터대제의 겨울 궁전은, 지금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에미르타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관람객이 엄청 많은데다가 그 박물관의 규모도 대단히 커서 한번 길을 잃으면 좀처럼 찾아 나오기 힘들다고 겁을 주었으며, 특히 필자에게는 이름으로만 들어왔던 레오날도다빈치, 라파엘, 미켈란제로, 르느와르 그리고 고갱 등 많은 화가의 그림 들을 실제로 볼 수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
6시경에 귀선하여 양식당에서 정찬으로 저녁식사를 한 후, 저녁에는 언제나 호텔노릇을 해주는 Constellation 호에서 일박하다.
2005-08-31 1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