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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3> 깜깜함
요즘 서울의 밤은 너무 밝다. 최근 LED등이 보급되면서 불야성(不夜城)이 될 정도로 밤이 밝아졌다. 주택가도 예외가 아니다. 한밤 중에도 별이 안 보이고 전등을 꺼도 방안이 보일 정도로 밖이 밝다. 빛이 너무 흔해졌다는 느낌이다.가끔 손주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는 별이 쏟아질 정도로 밤이 깜깜했었단다’ 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그러나 요즘 애들은 어른들이 “나 때는 말이야” 라고 말할라치면, “Latte is a horse요?” 라고 한단다. 이 유행어는 ‘나 때’를 Latte로, ‘말’을 horse(馬)로 바꾼 말로 ‘이제 옛날 이야기 좀 그만 하세요’라는 의미로 쓰인단다. 우리 손주들은 그러지 않겠지만, 그래도 말 대신 글로 옛날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내가 살던 김포군 검단면 당하리에는 1973년에서야 전기가 들어왔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그 때까지 우리 동네의 밤은 문자 그대로 칠흑(漆黑)같이 깜깜할 때가 많았다. 우리 집의 조명 기구는 주먹 크기만한 흰색 사기 등잔뿐이었다. 솜으로 가늘게 꼬아 만든 심지가 하나 드리워져 있는 등잔의 연료는 석유였다.등잔 심지에 불을 붙이면 성냥 불 하나보다도 어두운 불빛이 간신히 등잔 주변을 밝혀주었다. 어떤 사람은 왜 호롱불이나 촛불을 켜지 않았느냐 묻지만 이것들은 평상 시에는 사용할 수 없는 호화 조명기구들이었다. 호롱불은 석유 소비량이 많고, 촛불은 양초가 비싸기 때문이었다. 나는 1960년 중학생 때부터 인천으로 유학을 나가 누님과 자취(自炊)를 하고 살았다. 그러나 대학생일 때까지도 시골집에 오면 언제나 조그만 앉은뱅이 밥상 머리에 등잔불을 켜 놓고 공부를 해야 했다. 때로는 등잔불에 앞 머리카락을 살짝 태워 먹기도 했다. 방이 어둡다 보니 무의식 중에 자꾸 머리를 등잔불 쪽으로 디밀다가 일어나는 사고(?)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매일 밤 그 불빛으로 바느질을 잘만 하셨다. 인천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가끔은 학교가 파한 뒤 반찬 같은 것을 가지러 1시간 여 시외 버스를 타고 시골집으로 가야만 했다. 그 때는 인천에도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반찬이 자주 떨어졌었다. 고등학생일 때의 어느 날, 시골집에 가려고 막차를 타고 종점인 백석에 내려보니 어느새 밖이 칠흑같이 어두워져 있었다. 1시간 사이에 이렇게까지 깜깜해질 줄은 몰랐다. 거기에서부터 우리 시골집까지는 약 오리(五里)가 넘는 먼 거리였다. 막차에서 내린 지라 인천으로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부득이 나는 무서움을 참고 한발 한발 조금씩 발을 떼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큼 가자 우리 동네로 넘어가는 고갯길 앞에 마지막으로 있는 초가집이 나타났다. 천만 다행으로 희미한 등잔불 하나가 사랑방을 밝혀주고 있었다. 여기에서 나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칠흑을 뚫고 산길을 넘어 30분 거리의 우리 집으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가기를 포기하고 이 집에서 ‘하룻밤 재워줍쇼’ 부탁을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시간에 혼자서 고개를 넘는 것은 무리였다. 우선 전혀 앞이 안 보여서 가다가 개울로 떨어져 다칠 우려가 컸다. 다음으로 그 밤길을 나 혼자 걸어가기가 너무나 무서웠다. 게다가 그 산길은 달 밝은 밤에도 혼자 넘기 무서워 일부러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넘던 길이 아니던가? 가끔 산소 사이로 뛰어다니는 여우인지 개 때문에 놀라기도 했던 길이었다. 결국 나는 초가집 사랑방 앞에 서서 이렇게 여쭈었다. “실례합니다. 새텃말에 사는 아무개의 아들인데 하룻밤 재워주시면 안될까요?” 다행이 사랑방 영감님은 흔쾌히 승낙을 해 주셨다. 그래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고향집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 때 그 집 사랑방에 등잔불이 안 켜 있었으면 어쩔 뻔 했나,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밤이 깜깜해야 별이 보이듯이, 어둠의 무서움을 경험한 사람이 빛의 고마움을 잘 알게 마련이다. 어둠은 어둠과의 싸움이 아닌 빛의 도입으로 완벽하게 없앨 수 있다. 크리스찬들이 빛이신 예수를 따르는 이유일 것이다. 할렐루야
2020-02-26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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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2> 세월
어느덧 2019년이 지나고 2020년이 되었다. 세월이 정말 빠르다. 미래가 어느덧 오늘이 되고 오늘은 순식 간에 과거가 된다. 누군가 나이가 먹을수록 세월이 빨라진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느낌이다. 요즘엔 현재의 순간 순간들이 과거라는 진공 공간으로 맹렬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마치 먼지가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러가는 모습이다. 세월이 흐르는 소리도 차창을 열어놓고 달릴 때 운전자 귀에 들리는 바람 소리처럼 요란하게 들린다.인생은 내려야 할 역이 어딘지도 모르는 기차 여행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기차표에 출발 역은 찍혀있지만 내릴 역 이름은 빈칸이다. 승객들은 처음에는 기대에 들떠 차창 가에 매달려 바깥 구경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창가에 매달렸던 승객들도 하나 둘 의자에 내려 앉는다. 그러다 승무원이 불쑥 나타나 내리라고 하면 내려야 한다. 옆 자리에 앉았던 승객이 갑자기 내리라는 싸인을 받고 허둥지둥 내린다. 대개 황당하다는 표정이지만 드물지만 침착하게 내리는 사람도 있다. 승객에게 주어진 시간은 탑승 후 내릴 때까지로 유한(有限)하다. 그 유한한 탑승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대개는 갑자기 내리라는 말을 들을까 봐 전전긍긍하지만, 어떤 사람은 마치 영원히 내리지 않을 사람처럼 유유자적(悠悠自適) 여행을 즐긴다. 인생에서 시간이란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지난 주일 설교 말씀을 적용해 본다. 시간에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있다고 한다. 크로노스는 시계로 측정되는 시간을 말한다. 이 시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다. ‘시간을 아끼라, 기회를 활용하라’는 말은 이 크로노스 시간을 아껴 쓰라는 말일 것이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일(사건) 중심의 시간을 말한다. ‘2시간이 지났다’고 말 하지 않고 ‘예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시각(視角)이다. 오래 살기 보다는 할 일을 다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영원은 시간이 무한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끝까지 지속되는 것이란다. 성경에서 “세월을 아껴라 (redeem the time!)” 라는 말은 사탄에게 뺏긴 ‘영원’을 되찾아 오자는 말이란다. 크로노스 관점에서 보면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니 우리가 더 빨리 뛰어야 한다. 바쁘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에 가면 스프링복(springbok)이란 양 또는 염소 비슷하게 생긴 포유류 동물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스프링복이 가끔 집단으로 낭떨어지에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구 결과 유난히 식욕이 왕성한 이 동물이 집단으로 다니다가 초원을 발견하면 서로 먼저 풀을 뜯어 먹으려고 앞으로 달려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임을 알게 되었다. 서로 경쟁하다 보면 무려 시속 88km에 이르는 과속으로까지 달리게 되는데, 그러다 갑자기 앞에 낭떨어지가 나타나면 뒤에 오는 무리에게 밀려 그대로 집단으로 떨어져 죽게 된다는 것이다. 크로노스에서 시간이 금(金)이라면, 카이로스에서 시간은 사랑이란다. 인간이 모두 회개하고 돌아 오기 전까지 종말을 선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기다림(시간)은 사랑이라는 말씀이다. 모두 회개할 때까지 오래 참으심이 바로 카이로스 시간이라는 것이다. 설교를 들어보니 성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선현들은 시간의 문제를 포함한 인생의 제반 고민 거리들을 이미 오래 전에 심각하게 고찰해 놓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의문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인간의 지혜로는 근본적인 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1991년에 가수로 데뷔했다 곧 묻혀져 미국의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던 양준일이라는 분(51세)이 30년만에 갑자기 인기의 세계로 재 소환된 일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그가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 “과거가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아요”가 귓가에 맴돈다. 흘러간 크로노스 과거에 지배되지 않는 그의 깨달음이 매우 감동적이다. 독자 여러분, 근하신년(謹賀新年)!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한다.
2020-02-12 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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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1> 홍문화 교수님의 서울역 입성기
홍 교수님은 1955년 9월 17일 미국 퍼듀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셨다가 1년만인 1956년 11월 16일 귀국하셨다. 당시 약업신문을 보면 서북항공(Northwest) 편으로 귀국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나 이는 명백한 오보이다. 당시 서울역으로 귀국 환영 차 나간 사람(학생)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홍 교수님은 귀국할 때에 경비 문제도 있었겠지만 여기 저기 구경을 하며 오실 요량으로 비행기 대신 약 3개월이 소요되는 화물선을 타고 오셨다. 그리고 몇 날 몇 시에 서울역에 도착한다고 사전에 전보를 치셨다. 그래서 학생들이 정시에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갈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분들의 증언이 일치된다. 문제는 화물선이 도착한 항구가 부산인지 인천인지가 헷갈리는 것이었다. 그날 서울역에 환영 차 나가셨다는 이상섭 교수님(서울대 약대 8회, 1954년 졸업)께 여쭈었더니 처음에는 부산항이라고 하시더니 다음 날에는 일부러 내게 전화를 거셔서 아무래도 인천항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은방 교수님(서울약대 13회, 1959년 졸업)께 여쭤보니 부산항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 교수님도 서울역에 나가신 분이었다. “한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라는 책의 집필을 담당한 나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난 12월 6일 (2019)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서울대 신약개발 센터에서 제4회 통일약학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 한독약품에 근무하시던 김조형 선배님 (서울대 약대 12회, 1958년 9월 졸업)이 참석하셨다. 인사를 드리고 말씀을 나누다 보니 이 선배님도 그날 서울역으로 홍 교수님 마중을 나갔었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귀가 번쩍 뜨였다. 그 날 11회 (1957년 졸업, 당시 4학년) 선배들과 함께 12회 동기들 (당시 3학년)도 서울역에 나갔다는 것이다. 어둑어둑한 저녁나절이었는데, 무려 40-50명(여학생 15명 정도 포함)에 이르는 학생들이 서울역에 나갔다고 한다. 그 정도로 홍 교수님의 미국 유학은 당시에 대단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나는 곧 늘 궁금했던 사항, 즉 “부산입니까? 인천입니까?”를 여쭈어 보았다. 김 선배님은 간단히 ‘부산’이라고 대답하셨다. 내가 못 미더워 하자 그러면 같이 서울역에 나갔던 지형준 교수에게 한번 더 확인해 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지 교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지 교수님도 한 칼에 ‘부산’이라고 하셨다. 만약에 인천항이었다면 학생들이 인천항까지 환영을 나가지 않았겠냐고 하셨다. 그래서 다음 날 이상섭 교수님께 전화를 드려 다들 ‘부산항’으로 기억하신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럼 내 기억이 잘못된 모양이라고 인천항설을 철회해 주셨다. 지 교수님에 의하면 그날 서울역에 나간 것은 서울대 약대생만이 아니었다. 중앙대 약대 생들도 다수 서울역으로 환영을 나갔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나 하면 미국으로 유학 가실 당시 홍 교수님은 서울대와 중앙대 약대 교수직을 정식으로 겸직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대학 학생들 간에 ‘홍 교수님은 우리 대학 교수님’이라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대에서는 나운용, 김신근(이상 7회), 이상섭(8회) 등의 조교들, 학도호국단의 허백 단장, 지형준 공작부장(지금의 기획부장에 해당), 백덕우 총무부장, 조항연 문예부장 등(이상 11회, 당시 4학년), 그리고 학년 대표인 김조형(12회, 3학년) 과 이은방(13회, 2학년) 등이 나갔다. 중앙대에서는 1회 입학생인 학도호국단의 손동헌 단장을 비롯한 간부 등이 나갔다. 중앙대 학생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는 것이 손동헌 중앙대 명예교수님의 기억이다. 학생들은 입장권을 사서 플랫폼까지 들어갔다 (이상섭 교수님의 기억). 그 때 서울대 학생들과 중앙대 학생들 간에 가벼운 승강이가 일어났다. 경부선 기차가 도착하면 서로 자기들이 먼저 기차에 올라가 선생님께 꽃다발을 드리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서울대 학생 대표가 먼저 꽃다발을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약학사의 뒤안길은 들여다 볼수록 흥미진진하다.
2020-01-29 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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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0> 역설(逆說)
1. 나는 현직 교수일 때 책을 여러 권 썼는데 그때마다 한 글자도 대학원생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임하였을 때인 1983년에는 나도 영어 책의 번역판을 낼 욕심으로 대학원생들에게 일정 분량씩 번역을 해오라고 시킨 적이 있었다.얼마 후 학생들이 가져온 번역을 보니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학생들이 잘 못 써온 부분을 일일이 수정액으로 지우고 다시 써야 했는데, 그게 내가 처음부터 다시 번역하는 것보다 더 시간이 걸리고 번거로웠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어떠한 책을 쓸 경우에도 학생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고 혼자서 시종을 책임지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또 학생들이 제1저자로 발표하는 연구 논문을 쓸 때, 그리고 나의 연구 프로포잘을 쓸 때에도 주로 나 혼자 일의 시종을 주관하였다. 나는 그러는 것이 교수로서, 또 연구자로서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것을 혹시 완벽주의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는데, 학생들이 가져 온 원고나 논문이 웬만했으면 나도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혹사하는 섣부른 완벽주의를 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동료인 K 교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상당 부분을 학생들에게 시키고 있었다. 나는 K교수의 지시 사항을 수행해 내는 학생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이런 업무를 시키는 것이 교수의 정도(正道)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제법 흐른 시점에서 문득 돌아보니 K 교수의 지도를 받은 졸업생들이 번역도, 논문쓰기도, 프로포잘 작성도 내 제자들보다 훨씬 더 잘 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교수 생활을 정도대로 잘 한답시고 고생 고생한 내가 결국은 능력이 떨어지는 졸업생을 배출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시키지 않고 스스로 다 하는 것이 교수의 정도라는 젊었을 때의 내 믿음에 대한 역설(逆說)이 아닐까?2. 나는 온누리 교회에서 제대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2004년 갑자기 장로가 되었다.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내가 장로가 되자마자 같은 공동체에 유일하게 계시던 선배 장로님이 다른 공동체로 옮겨 가는 바람에 졸지에 나는 우리 공동체의 대표 장로의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다. 그 때의 당혹감은 아무리 설명해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교회 일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내가 공동체의 대표가 되고 나니 난감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다행히 교회 일의 모든 것을 빠삭하게 꿰뚫고 있는 J 집사님이 공동체의 총무를 맡아 주었다. 할렐루야! 나와 J 집사님은 대표 장로와 총무로서 4년이나 섬기게 되었는데, 이는 그 동안 우리 공동체의 장로가 나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J 총무님은 특유의 유능하고 성실함으로 그 4년을 한결 같이 섬겨 주셨다. 4년 임기가 끝나가는 어느 날, J집사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장로님이 일일이 참견하셨으면 총무 역할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겁니다. 내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따라 주셨기에 스트레스 안 받고 4년을 총무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내가 일일이 참견하지 않은 이유는 실은 내게 업무에 간섭할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았다고 하니 어찌 내가 놀라지 않았겠는가? 그 때 나는 실력 없음이 오히려 덕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을 깨닫게 되었다. 3. 위키피디아를 보면 역설(paradox)이란 언뜻 보면 일리가 있거나 있는 것처럼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모순되거나 잘못된 결론을 이끌게 하는 논증이나 사고 등을 일컫는다고 한다. 쉽게 말해 우리 인생이 반드시 사람의 논리에 따라 진행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역설은 실은 하나님의 은혜일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 아무 것도 아닌 자를 택하여 쓰시는 하나님 (고전 1: 27-28), 또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8)”는 말씀을 역설과 관련하여 다시 한번 묵상해 본다.
2020-01-15 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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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9> 송도(松都) 약학대학*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에 재 개교한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는 1946년 9월에 3년제의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승격되고, 1948년부터는 4년제 학부과정을 개설하였으나 좌우 분열과 재단의 불안정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마침 개성(開城)의 유지들은 1949년 인삼 등으로 유서 깊은 개성에 새로운 약학대학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개성에는 개성중학 옆에 넓은 약초원과 유리 온실 등을 갖춘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 생약연구소가 있었다. 그래서 경성약전을 개성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일제 강점기에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전국에는 서울대학교와 이화여대에만 약학대학이 있었다.
약대 신설은 송도중학(松都中學, 당시 6년제)이 속해 있는 송도재단이 맡기로 하였다. 송도(松都)는 개성의 옛 이름이다. 송도재단은 서울약학대학의 한구동(韓龜東) 교수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다. 한 교수는 서울약학대학의 홍문화(洪文和), 이왕규(李王圭) 교수 등과 함께 약대 신설에 나섰다. 명목상의 학장은 송도중학의 8대 교장인 황석주(黃錫周) 선생이, 부학장은 한구동 교수, 교무과장은 홍문화 교수가 맡고, 학교 이름은 ‘송도약학대학(松都藥大)’으로 하기로 하였다.
1950년 4월 25일 마침내 문교부 당국으로부터 송도중학에 약대 병설 인가를 받았다. 이에는 당시 개성에 있던 민관식(閔寬植) 박사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최규남(崔奎南) 박사 (송도중학 1회 졸업생) 등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1989년 송도중학에서 발간한 『송도학원 80년사』를 보면, ‘1950년 개성 유지들의 협조로 40만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3월에 송도 약학대학 설립을 인가 받아 40명의 신입생1)을 받았다’고 한다. 1948년 10월 6일자 『자유신문』을 보면 개성 유지(有志)인 김정호, 윤영선, 공성학 씨가 약대를 위해 토지 15만평과 현금 50만원을 희사하였다고 한다. 기존의 송도중학 부지 25만평에 신설 약대 용으로 희사 받은 15만평을 합쳐 총 40만평이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약대의 건물로는 1924년에 지은 건평 388평의 3층 화강석 건물인 송도중학의 박물관(사진1)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1, 2 층에는 각종 식물과 동물의 표본 등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이 학교 졸업생이자 교사이던 석주명(石宙明)2) 씨가 수집한 나비 표본도 있었다.
약대 건물 20m 앞에는 농구장이 있었고, 거기서 10m 떨어진 곳에는 1939년 3월에 지은 112평 규모의 옥외 수영장도 있었다. 건물 앞에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었고, 그 옆에 기숙사가 3동 있었다. 송도약대는 이 임시 교사에 부랴부랴 강의실, 실험실 및 도서실 등을 만들고 전국에서 40명3)의 신입생을 선발해 놓고, 1950년 6월 26일에 입학식을 열기로 하였다.
홍문화 교수는 인쇄소에서 가지고 온 개교식 프로그램과 입학식장을 점검한 다음 개성을 떠나 홍 교수의 주소지인 인천의 주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월 25일 아침 서울역에서 이왕규 교수와 함께 개성 행 기차표를 끊으려다가 북한의 남침을 알게 되어 개성 행을 포기하였다.
이로써 송도약대는 역사의 물결 속에 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 근현대사의 뒷 페이지에 비감(悲感)이 서리지 않을 날은 언제 올 수 있을지 잠시 옷깃을 여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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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과 달리 생물 등 과학 수업을 하는 건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음.
2) 후에 개성에 있는 생약연구소를 거쳐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으로 근무.
3) 송도중학 32회 졸업생인 임정상(林正相) 등.
* 이 글은 송도중학 32회 졸업생인 허강(許江) 선생(전 문교부 편수관)의 증언 (2019.10.29 청취)과 『한국약업사(韓國藥業史)』, 『송도학원 80년사』, 송도중학교 홈페이지, 『서울대약대100년사』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2020-01-0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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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8> 손주를 보여줘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가 주말에 내려 오기로 한 서울 손주를 맞기 위해서 토요일 하루 종일 집안 구석 구석을 청소해 놓았다. 그 때 며느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애가 바빠서 내일 못 찾아 뵙겠다’는 내용이었다.
할아버지는 “알았다. 다음에 와라”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그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얼마 전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그 할아버지가 써 보낸 사연이란다.
나이가 들수록 손주와 노는 것 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재미도 보람도 손주보기가 최고이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손주는 노인네의 항우울제이고 우황청심환이다.
손주의 유일한 문제는 마약처럼 중독성, 의존성이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손주를 안보면 금단현상이 나타난다.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지고 우울해진다. 심하면 위에 소개한 할아버지처럼 울게 되기도 한다.
나는 요즘 젊은 부부를 만나면 “부모님께 대한 가장 확실한 효도는 손주를 자주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적어도 내 경우는 분명히 그렇다. 아들 며느리를 보는 것도 물론 좋지만 손주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문제는 아들 며느리가 손주들을 실컷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들을 잘 만날 수 없는 데에는 세 가지쯤 되는 이유가 있다.
1. 우선 아이들이 바쁘다. 학교 갔다 오면 학원에 가거나 집에서 과외 공부를 받아야 한다. 때로는 이게 아동학대가 아니고 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우는 것이 정말 많다.
그래서 애들이 할아버지와 놀아 줄(?) 짬이 거의 없는 것이다. 제발 아이들이 방과 후 수업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2. 둘째로 행여 짬이 있더라도 손주들 입장에서 할아버지와 노는 것은 별 재미가 없을 것이다. 나도 국민학교 다닐 때 할아버지가 맨날 “너 오늘 학교에서 무얼 배웠니?”, “네 학교 교장 선생님 이름이 뭐랬지?” 같은 질문을 하시는 것이 지루하고 귀찮았다.
또 옛날에 어머니가 교수가 된 나만 보면 “밥은 먹었냐?”고 물으셔서, 하루는 “그럼 굶고 다닐까 봐요?” 하고 짜증을 냈던 기억이 있다.
아들에게 “오늘 강의는 잘 했느냐?”고 물으실 실력이 없는 어머니가 ‘밥 먹었냐?’ 말고 뭘 더 물으실 수 있었겠는가? 말 한마다 걸어 보려고 하셨던 어머니에게 불효막심했던 내 짜증이 두고 두고 후회스럽다.
3. 세 번째로 아들 며느리는 내가 손주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아들 며느리의 탓이 아니다. 그 나이에는 거의 누구나 부모님이 손주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깨닫지 못한다.
그런 아들 며느리도 나이가 더 먹어 손주를 보게 되면, 틀림없이 내 마음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나도 젊었을 때는 잘 몰랐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께 손주들을 잘 보여드리지 못 했다.
우리 내외는 비교적 자주 부모님을 찾아 뵈었지만, 이제 와 보니 부모님은 우리보다 손주가 더 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이를 잘 잘 헤아리지 못한 불효가 이제 와 몹시 송구스럽다.
고 홍문화 교수님은 아놀드 토인비 박사의 주장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신 바 있다. “동물들은 태어나서 바로 본능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사람의 본능은 보잘것없어서 그냥 내버려 주면 이 세상에 살아 남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에겐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에는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 교육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교육이고, 가정 교육의 핵심은 조부모의 무르팍 교육이다”.
나는 우리 손주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성장했다는 자존감을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줄 아는 아이들은 이 세상의 웬만한 시험을 능히 이겨낼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곱 살짜리 손녀에게 음식을 주며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아이는 “먹을 만 한데요” 라며, 할아버지 무르팍에서 큰 손녀다운 대답을 하였다. 하하하, 이러니 어찌 내가 손주들을 예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19-12-1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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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7> 이목구비(耳目口鼻)
일본 사람들은 동경(東京)을 영어로 쓸 때 Tokyo라고 쓴다. 우리 생각에는 Dokyo가 좀 더 사실에 가까운 표기 같아 보이는데 일본인 생각은 다른 것이다. 오래 전 동경대학에 유학 할 때 비슷한 의문이 생겨서 클라스메이트에게 이 발음을 확인해 본 적이 있었다.
즉 한번은 “토-쿄”라고 하고 한번은 “또-꾜”라고 말하며 어떻게 들리냐고 물었더니 두 발음이 똑 같이 들린다는 것이었다.
몇 번씩 테스트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격음(激音, 크, 프, 트 등과 같은 거센 소리)과 경음(硬音, 끄, 뜨, 쁘 등과 같은 된소리)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들에게는 토-쿄나 또-꾜나 그게 다 그거인 것이다. 그러나 둘을 명백하게 다르게 듣는 우리에겐 토-쿄가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다.
우리도 못 듣는 음이 많다. 일본어에는 탁음(濁音, 다꾸옹)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잘 듣지 못한다. 한번은 일본에서 동영(東映)라는 상점을 찾아가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에이가 어딘가요?’ 물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잘 모르겠단다.
이번에는 그 때 거기서 유치원 다니던 큰애가 물었다. 그러자 그 일본 사람은 금방 ‘아, 도”에이? 조기 보이는 곳이네요‘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귀에는 ‘도’나 ‘도”’나 그게 그거였지만 일본인 귀에는 둘은 전혀 다른 발음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영어의 th나 v, z 발음 등을 잘 못하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몇 번씩 들어 봐도 귀로도 입으로도 구분이 안 된다. 예전에 C 교수가 런던에 가서 zoo 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왜 유대인(Jew)을 찾느냐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대충 비슷하게 발음했으면 알아서 들어야지 그렇게 못 알아 듣냐고 할 수 도 있겠지만, 나도 미국인이 틀린 한국어 발음으로 내게 뭘 묻는데 도저히 못 알아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못 알아듣는 걸 서로 비웃거나 나무랄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던 어떤 장로님이 청력을 잃고 가장 괴로운 것은 찬양을 부를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음의 높낮이가 잘 안 들리니 자연히 음치 비슷하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말도 노래도 잘 들려야 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각장애인이 언어 장애인인 경우가 많은 것도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최근에 그 장로님으로부터 들었는데 갑자기 들리지 않는 상황이 오면 긴급 상황으로 생각하고 빨리 이비인후과에 가야 한단다. 빨리 가서 조치를 받으면 청력의 상당 부분을 되돌릴 수 있지만 저절로 회복되겠지 하고 시간을 끌면 치명적으로 청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들리니까 이런 정보도 금방 입수할 수 있었다.
새삼 귀와 입은 긴밀하게 협력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둘은 동업자라고 할까? 함께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는 관계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귀와 입이 얼굴이라는 한 동네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도 알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가깝기로 치면 입과 코처럼 가까운 사이도 없을 것이다. 최근 아내 친구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냄새를 잘 못 맡게 된 이후로 영 커피 맛을 모르게 되었고 한다. 그래서 입에서의 맛도 코에서 향을 잘 맡아주어야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 눈은 또 왜 얼굴에 있을까? 아마도 그 답은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라는 속담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요즘 국론이 갈라져 서로 내 주장만 옳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분명 많건만, 그런 사람들은 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라며 자신들만 애국자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참된 리더십은 공감(compassion)에서 나온다고 한다. 공감은 아픔(passion)을 함께(com)하는 것이란다. 공감의 말을 하려면 우선 듣고 보고 맡아봐야 한다. 그래서 말이 험한 사람을 보면 눈, 코, 귀에 이상이 있나 의심이 든다.
한 동네에 모여 사는 이목구비(耳目口鼻)여! 서로 합력하여 선(善)을 이룰지어다.
2019-12-0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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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6> 흔들리는 기준(基準)
군대에 가면 정렬을 시킬 때 한 사람에게 오른쪽 손을 높이 치켜들고 큰 소리로 ‘기준!’ 이라고 외치게 한다. 그러면 그 사람, 즉 기준병(基準兵)은 신속히 자리를 잡고 오른쪽 팔을 들어 기준!을 외친 후 그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어야 한다. 기준병이 왔다 갔다 하면 군인들이 오(伍)와 열(列)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생동성(생물학적 동등성)시험은 복제 의약품(제네릭 의약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시험이다. 이 시험의 골자는 오리지날 약과 제네릭을 사람(피험자)에게 투여하였을 때 두 약의 혈중농도가 동등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나는 1983년 서울대 약대 조교수로 부임한 이래 일본의 ‘의약품연구’라는 잡지를 구독하며 ‘생동성시험’에 관해 공부하고 있었다.
1986년, 제약회사에 다니는 홍 아무개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 온 것을 계기로 생동성 시험에 소요되는 시간, 장소, 비용 등을 알아보기 위한 파이롯 연구를 시작하였다.
제네릭 시료로는 I제약의 라니티딘 정제를, 오리지날 시료로는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의 잔탁을 택하였다.
공부를 철저히 해 놓은 탓으로 파이롯 연구는 성공적이었다. 이 때부터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생동성 시험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게 되었다. 나중에는 대학원생의 도움을 받아 생동성 판정 통계 프로그램인 ‘K-BE Test’를 개발하여 식약청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생동성 시험을 한 사람치고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은 사람을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 프로그램의 사용료를 받기로 했다면 돈 좀 벌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생동성 시험을 궤도에 오르게 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한 일은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동성 시험에서 복제약을 시험약(test drug)이라고 부르고, 복제 대상이 되는 오리지날 약을 대조약(reference drug)이라고 부른다. 오리지날 약, 즉 대조약의 품질이 복제해야 할 ‘기준’이 되는 것이다.
피험자들에게 복제약(제네릭)과 대조약을 투여하여 두 약의 혈중 농도가 통계학적으로 같게 나오면 두 약은 ‘동등’하다는 판정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대조약의 품질이 늘 일정하지 않고 흔들린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용출시험을 해 보니 대조약의 용출양상이 뱃치 별 또는 롯트 별로 변동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기준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조약을 투여하였을 때의 혈중농도가 일정해야 제네릭을 이에 맞추는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2003년 식약청장이 된 나는 고민 끝에 일본의 관료로 평생 생동성 연구만 해 온 A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본에서도 대조약의 용출 특성이 롯트 별로 다르던가요?” 물었더니 ‘매우 그렇다’는 것이었다. 놀란 나는 “그럼 어떤 롯트를 대조약으로 삼나요?” 물었더니, ‘임의의 세 롯트를 택하여 용출시험을 해서 중간 특성을 보이는 롯트를 대조약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그건 일종의 눈가림 밖에 안되지 않나요? 실제로는 여러 롯트에 대해 용출시험을 한 다음, 제네릭과 가장 비슷한 용출거동을 보이는 롯트가 중간에 오도록 대조약 세 롯트를 임의로 선택한 것처럼 서류를 꾸미는 술수를 막을 수 없지 않나요?” 물었더니,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와 A박사는 생동성 시험보다는 용출시험이 훨씬 더 정밀하며 실용적인 의미가 있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용출 양상이 동등한 두 약은 반드시 혈중 농도가 동일할 것이기 때문에 오리지날과 제네릭의 용출특성이 동일함을 입증하면 두 약의 생동성은 충분히 보증된다고 믿었다.
용출 양상이 롯트별로 ‘흔들리는’ 대조약에 제네릭의 품질을 맞추라는 것은 움직이는 과녁을 맞추기 보다 더 어려운 일일뿐더러 과학적 합리성도 없는 일이다. 이때부터 오리지날 약의 용출특성의 변동을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 기존의 모든 기준들이 흔들린다. 성경의 창조질서마저 도전 받는다. 기준은 잘못 정해져도, 또 흔들려도 안 된다. 큰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두가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기준’이 그리운 오늘이다.
2019-11-2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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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5> 한끼 줍쇼
JTBC 방송에서 2016년부터 주 1회 방송하고 있는 ‘한끼 줍쇼’란 TV 프로그램이 있다. 방송국의 설명에 의하면 이 프로그램은 ‘정글과도 같은 예능 생태계에서 국민 MC라 불렸던 두 남자가 저녁 한끼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은 다큐멘타리’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경규씨와 강호동씨 두 사람이 각각 인기 연예인 한 명씩을 동반하고 불쑥 어느 동네를 찾아가 아무런 사전 양해 없이 어느 집의 초인종을 눌러 “저녁 한끼 같이 먹으면 안될까요?”라고 묻는다.
당연히 적지 않은 집이 ‘청소가 안 되어 있다’거나 ‘이미 식사를 마쳤다’라는 이유를 대면서 요청을 거절하거나 사양한다. 그러다 마침 여건이 되는 집은, 두 사람을 들어 오게 해서 식사를 같이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일정 시간 안에 승낙을 받지 못하면 발길을 돌려야 한다고 하나, 그런 사례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이 이 프로그램의 개요이다.
나는 이 방송을 보면서 세상에 이런 프로그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세상이 먹고 살만해 지고, 또 방송이라고는 하지만,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집을 찾아가 느닷없이 “한끼 줍쇼” 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출연하는 두 MC가 워낙 유명하고 능숙하니까 그 말을 꺼내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겐 벨을 누르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내 생각에는 이런 방송은 우리나라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에서 이처럼 남에게 무례하게 해도 생명의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 말고 달리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예컨대 미국이나 일본에서 느닷없이 남의 집 대문의 벨을 누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요즘은 좀 달라졌겠지만 총과 칼을 휴대하고 살던 시대라면 그건 ‘날 죽여 달라’고 죽음을 자청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미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에게는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겁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심지어 초대를 받은 집에 들어 갈 때에도 “익슈큐즈 미”라든가 “오소레 이리마스”와 같이 실례를 용서해 달라는 ‘양해의 말씀’을 드리고 나서 들어가는 그들이다.
일본에서는 남을 부르는 것 자체가 엄청 겁나는 일이다 그래서 ‘여보세요’라고 부르지 못하고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이라고 한다. 그것도 작은 목소리로! 일본인에게 ‘여보세요’는 ‘여기를 봐라 (Look at me!)’와 같은 무례한 명령으로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떠했는가? 옛날 양반은 남의 집 대문에 서서 “이리 오너라”라고 외쳤다. 그것도 큰 소리로!! 그만큼 우리나라는 안전한 나라였다.
옛날부터 우리는 남의 집에 들어갈 땐 인기척을 내야 한다고 배웠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저녁이면 전깃불도 없는 컴컴한 사랑방에 화로를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와 둘이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 때 바깥 마당 쪽에서 인기척이 나며 동네 할아버지가 우리 집으로 말(마실)을 오신다. 그 할아버지는 대개 “어이 참 달이 밝네, 보름이 얼마 안 남았나”, 또는 “저놈의 개는 동네 사람도 못 알아 보고 짖네”라고 하시며 나타나신다.
때로는 말을 하는 대신 “칵 퇴!” 하며 가래침을 뱉는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아 오늘은 됭고개 밑 영감님이 오시는구나’하고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겐 이 인기척이 외국의 ‘익스큐즈 미’나 ‘오소레 이리마스’에 해당하는 ‘양해 구하기’였던 셈이다.
내가 30대일 때에는 친구 집에 무단(無斷) 방문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흥이 오르면 ‘우리 집에 가자’고 호기를 부려야 멋진 사내였다. 심지어 신혼부부 집에 쳐들어가 밤새 술을 마시고 이불에 실례까지 저지르고 아침에 도망 나온 무용담(?)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한끼 줍쇼’란 이처럼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또 다소(?) 무례해도 안전했던 우리나라의 과거를 배경 삼아 탄생한 프로그램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인(萬人)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일상화된 오늘, 이 프로그램은 배경을 잘 못 잡은 인물 사진처럼 어색해 보인다.
2019-11-0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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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4> 사람 살려
길을 가다가 실수로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미국 사람들은 “Help me!”, 일본 사람들은 “다스께떼!”, 중국 사람들은 “救命!”이라고 외칠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알다시피 우리는 “사람 살려!” 라고 외친다. 미국 사람들은 ‘나’를 강조하고, 일본과 중국 사람은 누구를 살려달라는지 불투명한 채로 살려달라고 외치는데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라고 외치는 것이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만 ‘내’가 아닌 ‘사람’을 살리라고 외칠까? 나는 이게 오랫동안 궁금하였다.
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구덩이에 빠진 것이 ‘나’라는 개인이라기 보다 우리 모두가 소속되어 있는 ‘사람(인간)’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일원(一員)이 빠진 것이니 심각하게 생각해서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비록 하찮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나를 봐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집단의 존귀성을 생각해서 나를 살리라는 설득 같다는 말이다. ‘나’의 문제를 ‘인간’이라는 집단의 문제로 확대함으로써 궁지를 벗어나려는 전략(?)이 엿보인다.
이 대목에서 문뜩 맹꽁이가 생각난다. 맹꽁이는 건드릴수록 배를 크게 부풀리는데, 이는 십중팔구 ‘내 덩치가 이처럼 크니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상대방에게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동물은 몰라도 사람은 그 모습을 우스꽝스러워 할 뿐 더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 살려’라고 안하고 사람 살리라고 과장해서 외친다고 해서 지나가던 사람이 더 긴박하게 구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사람 살려’로 부터 맹꽁이의 배 부풀리기와 유사한 허장성세(虛張聲勢)가 느껴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람’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쓰고 있나를 관찰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현상들이 더 발견된다. 예컨대 시장에서 두 사람이 삿대질을 하며 싸움 (실은 말다툼)을 하고 있는 상황을 떠 올려보자. 말다툼이 조금 더 격해지면 십중팔구 서로 밀치거나 멱살을 잡으려는 듯한 동작으로 발전한다.
그러면 그 중 한 사람이 “어어! 이러다 사람 치겠네!” 하고 소리친다. 이때도 ‘나’를 강조하지 않고 ‘사람’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그냥 ‘나’가 아니라 ‘사람’의 하나인데, 네가 사람이면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칠 수 있느냐’는 고상한 논리를 펴는 것이다.
여담(餘談)이지만 전통적인 우리네 싸움은 육탄전이 아니다. 서로 구경꾼들에게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설명함으로써 여론이 나에게 유리하도록 홍보하는 여론전(與論戰)인 것이 시장 싸움의 특징이다.
그래서 시장에서의 싸움은 늘 시끄럽다. 홍보전이기 때문에 목소리 큰 사람이 유리하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허위 과대 비방도 나온다. “이놈이 제 아버지한테도 막 덤비는 놈이예요”라는 식이다. 상대방이 ‘사람’같지도 않은 막 돼먹은 X이라고 결정타를 먹여 여론을 내 편으로 돌리려는 의도이다.
다시 여담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싸움은 대개 말싸움이기 때문에 시끄럽지만, 미국이나 일본 사람들의 싸움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입으로 싸우지 않고 살인 무기인 총이나 칼로 싸우기 때문에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말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총이나 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훨씬 실리적이다.
그래서일까? 영어와 일본어에는 우리말에서와 같은 ‘얼큰한’ 욕들이 없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보고 “싸우되 절대로 욕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다들 속이 터져서 1-2분 안에 차라리 싸움을 그만두고 말 것이다.
고 홍문화 교수님은 아놀드 토인비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동물들은 본능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식욕, 성욕 등 극히 초보적인 본능 밖에 갖지 못하고 태어나기 때문에 태어난 그대로는 이 세상에 살아 남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가정, 학교, 사회에서의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람 살려’는 우리에게 ‘나’라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9-10-1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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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3> 이등병, 병기수입, 조의
1. 이등병, 일등병
군대에 들어가 보니 사병들의 계급을 부르는 호칭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대 후 소정의 훈련을 받고 나면 계급장에 작대기 하나를 달아주며 ‘이병(二兵) 또는 이등병(二等兵)’이라고 부른다.
다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작대기 한 개를 더 달아주며 이번에는 ‘일병(一兵) 또는 일등병(一等兵)’이라고 부른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작대기가 3개, 4개가 되면 각각 ‘상병(上兵)’과 ‘병장(兵長)’으로 부르는데, 내게는 특히 이병과 일병이라는 호칭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작대기 하나를 일병, 작대기 두 개를 이병으로 불렀으면 헷갈리지도 않고 좋았을 텐데 왜 각각을 이병, 일병으로 부르게 되었을까 내내 궁금하였다.
이 의문은 군대에서 만난 강(姜) 아무개라는 한자 달인(?)을 통해 풀렸다.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군대 계급을 중국 군대에서 배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 이, 삼, 사’를 ‘이, 얼, 산, 시’라고 부르기 때문에, 계급도 당연히 이병, 일병 식으로 부른다고 한다.
우리 군대도 이 중국식 계급 이름에 따라 이병, 일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도 작대기 3개, 4개를 각각 상병(上兵)과 병장(兵長)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럼 왜 우리는 1, 2, 3, 4를 중국처럼 이얼산시로 부르지 않고 일이삼사로 부르게 되었는가? 처음부터 이일삼사로 불렀으면 계급장에 대한 혼동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강아무개는 이는 중국에서 한자를 들여 올 때 착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입할 때 정품(正品)을 들여와야 혼란이 없는 것은 물건만이 아닌 모양이다.
2. 병기(兵器)수입?
사병(士兵)으로 입대하면 특히 훈련소 시절에는 매일 같이 ‘병기수입’을 해야 한다. 일과 후 저녁 시간에 내무반의 침상에 앉아 총을 분해해서 녹을 닦아내고 기름을 칠하는 작업을 병기수입이라고 부르는데, 총을 병기라고 부르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수입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3년 내내 궁금하였다.
이 궁금증은 훗날 일본어를 배우면서 저절로 풀렸다. 여기서 말하는 수입이란 일본어의 ‘手入れ(데이레)’에서 어미れ를 떼고 앞 부분인 手入만을 남겨 부른 것이었다. 우리 군대에 남아있는 일본어의 잔재(殘滓)이었다. 일본어 ‘데이레’는 우리말로 ‘손질’이다.
그러므로 병기수입은 ‘병기손질’, 나아가서는 ‘총 손질’로 바꾸면 더 좋을 말이었다. 지금도 군대에서 병기수입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여담(餘談)이지만 군대에서는 한자 단어 쓰기를 너무 좋아한다. ‘극장 갈 사람 모여라’ 하면 될 것을 꼭 ‘극장 관람자 집합!’ 이라고 소리친다. 목욕 갈 사람을 모을 때도 ‘목욕 집합!’ 이라고 외친다.
한자를 쓰면 글자수가 줄어 간단해지긴 하지만 때로는 지나쳐서 거북한 경우도 많았다. 행여 한자를 써야 유식해 보여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길 바란다.
3. 조의(吊儀)와 조의(弔儀)
다시 강아무개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사람이 죽어 조화를 보낼 때 ‘조의’라고 써 보내는데 이 글자는 고인이 어떻게 죽었냐에 따라 한자를 구분해서 써야 한단다. 수건 건(巾)자가 들어 있는 吊儀는 수건까지 깔아 놓고 나름 복 있는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단어란다.
반면에 글자에 활(弓)이 들어 있는 弔儀는 전쟁에서 활 맞아 죽는 등 비명에 죽은 사람에 대해 사용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고인이 어떤 죽음을 맞이했나’부터 살펴 본 후에 ‘조’자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면 가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내 유식(?)을 자랑하는데, 누군가가 요즘에는 두 한자를 구분하지 않고 써도 된다고 귀뜸해 주었다. 네이버 한자 사전에도 吊는 弔의 속자(俗字)라고 나온다. 그래서인지 국어 사전에 弔儀는 나와도 吊儀는 잘 나오지 않는다. 내가 유식한 건지, 오히려 무식(無識)한 건지 헷갈리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강아무개가 군대에서 가르쳐 준 한자 지식은 몇 가지 더 있지만, 까딱하면 유식 사이로 나의 무식이 삐져 나올까 두려워 이쯤에서 글을 닫는다.
2019-10-0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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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2> 홍문화 교수님 추모 책자 발간을 준비하며
나는 요즘 고 홍문화(洪文和) 교수님 추모 책자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대 약대의 ‘한국약학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이다.
홍교수님은 1916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1934년 19세의 나이에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에 입학하셨다. 1937년 경성약전을 수석으로 졸업하신 후 3년간 주안에 있던 제염시험소 소장으로 근무하신 것을 제외하면 평생의 대부분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로 지내셨다.
홍교수님은 “나의 가장 짧은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신 적이 있다. “(전략) 살다 보니 육십오년 어느덧 지났다네. (중략) 삼십에 철들어 시험관과 책 들고 분필로 썼다 지웠다 삼십년을 지나면서 박사, 교수, 소장, 학장, 원장, 회장 지냈노라 하였으나 그 흔한 노벨상도 못 타고 남이 한 말 받아 판 것 말고 무엇이 남았는가. 일차대전 총소리에 태어나 삼일독립만세, 중일전쟁, 이차대전, 팔일오, 육이오, 사일구, 오일륙, 십이륙, 숱하게 겪었건만 이십에 알았다던 인생이 갈수록 모르게 되어가니. 하나님이시여! 인류에게 평안을 내리소서 빌 수 밖에 없구나. 내일 모르는 세상에 백세를 사는 지혜랍시고 아는 소리 모르는 소리 지껄이다 보면 하루가 지나가고. 이래도 좋은가 나의 인생.” 이 글은 홍교수님이, 그리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어려운 시대를 통과해 오늘에 이르렀는지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홍교수님은 서울대 약대 교수로 재직 중 2년반 동안 국립보건연구원장 직을 지내신 후 서울대 생약연구소 교수로 임명 받아 10년간 재직하셨는데, 그때 가장 많은 공부를 했다고 회고하셨다. 그 기간에 ‘한방 처방의 통계학적 연구’ 등 한약의 과학화에 기여하는 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셨는데, 이 논문들의 특징은 대부분 공저(共著)가 아니고 단독 저술이라는 점이다. 이는 문헌 복사나 데이터 처리 같은 연구의 전 과정을 본인 스스로 하셨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홍교수님은 6.25 전쟁 중에 졸업하는 약대 학생들에게 ‘소금에 붙이는 독백’이라는 유명한 축하 시를 주셨다. 졸업생들에게 ‘소금처럼 세상의 방부제(防腐劑)가 되고 나아가 세상을 살 맛나게 만드는 조미제(調味劑)가 되거라’고 격려하신 것이다.
홍교수님은 약사 사회에 대해서도 ‘약사 십계 (藥師十戒)’ 같은 글의 연재 (약업신문)를 통하여 과학정신에 기반한 좋은 약사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일깨워주셨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건강 전도사를 자처하며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를 통하여 합리적인 사고와 생활을 해야 한다고 계몽하셨다. 수많은 건강 관련 저서를 남기셨고 수많은 강연을 하셨다. 1994년의 경우 총 500회의 강연을 하셨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같은 열정은 엉터리 건강법이 범람했던 시대에 약학자로서 방관할 수 없는 사명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홍교수님은 미술, 조각, 서예, 음악, 문학, 철학 등 약학 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남이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셨다. 홍교수님의 업적을 살피다 보면, 시대가 낳은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연상된다. 그러나 홍교수님이 남기신 두 개의 수첩을 보면 전혀 다른 감동을 받게 된다.
수첩 하나는 약대 학장이실 때 3년간 본부 학장회의에 참석하여 기록한 메모장이다. 거기에는 거의 매주 열린 회의에서 총장님이 지시한 사항은 물론, 참석 대상자 중 불참자의 이름과 사유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또 다른 수첩은 외국 여행을 가실 때마다 영어로 기록한 메모장인데 거기에는 비행기 출발 및 도착 시간, 비행기 좌석 번호, 숙박한 호텔의 이름 및 방 번호 등 사소한(?) 사항들이 그야말로 깨알같이 적혀 있다. 이를 보면 홍교수님의 그 많은 성취가 결코 재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대하(大河) 홍문화 교수님은 2007년에 향년 91세로 영면하셨다. 우리가 홍 교수님을 약학계의 영원한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19-09-1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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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1> 아버지의 정리정돈
아버지의 근검절약에 이은 두 번째 좌우명(座右銘)은 정리정돈(整理整頓)이었다. 아버지의 하루 일과는 아침 일찍 바깥마당과 안마당을 쓰시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비질 소리에 식구들이 아침 잠을 깨는 날도 많았다.
오후에 군청에서 퇴근하시면 자전거를 바깥 마당에 세워 놓으신 채로 마당을 다 쓸고 나서야 대문을 넘어 오셨다. 집안에 들어 오셔서도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는 것들을 정리하기 전에는 옷을 갈아 입지 않으셨다.
멀리서 아버지가 퇴근해 오시는 기척이 나면 나는 부리나케 주변을 정리하고 공부를 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한 말씀 들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아버지의 정리정돈은 용모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구들이 외출 할 때마다 머리와 복장은 단정한지, 구두는 잘 닦았는지 등을 늘 살펴주셨다. 노년에는 내 자동차의 세차 상태도 자주 지적하셨다.
“깜깜한 밤에도 금방 찾을 수 있도록 늘 정해진 자리에 물건을 놓아라”. 그게 아버지의 정리정돈 기준이었다. 아버지는, 좀 불경스러운 표현이지만, 늘 ‘정리정돈’을 노래 부르듯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느 아내들이 다 그러하듯, 아버지의 말씀을 그다지 괘념치 않으셨다. 어머니는 당신의 라이프 스타일, 즉 ‘사람이 좀 어질러 놓고 살면 어떠냐’고 생각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아버지의 문제는 잘 정리해 놓으신 물건을 나중에 어디에 두었는지 종종 기억해내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정리’란 대개 물건을 잘 안 보이는 깊은 곳에 두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장소를 금방 생각해 내기 어려우셨던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는 어머니의 반격을 받으신다. “내가 둔 대로 그냥 놔 두었으면 금방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치워서 못 찾게 만드느냐?”어머니의 질책에 난감해 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어느새 나도 정리정돈이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올바른 생활태도라고 신봉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백분의 일 수준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나도 어질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게 된 것이다. 특히 신기한 것은 나도 정리를 해 놓고는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부전자전 (父傳子傳)! 사실 정리란 아버지나 나처럼 기억력이 좋지 못한 사람이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자구책으로 생활화한 습관일지도 모르겠다. 정리마저 해 놓지 않으면 끝내 찾지 못하고 기억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 생긴 버릇이라는 말이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 C 교수님 방에 가 봤더니 큰 탁자 위에 온갖 책과 서류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그 교수님은 “지금 정리 중이야” 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묻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본인도 그 혼란스러운 상태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 산더미는 그 교수님이 정년 퇴임할 때까지 없어지지도, 그 크기가 줄어들지도 않았다. 쌓아놓고 사는 것은 그 분의 습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분들은 그 산더미 속에서 본인이 필요한 것을 용케도 찾아낸다. 아마 그분들은 구태여 정리 정돈해 놓지 않아도 다 찾을 수 있는 기억력이 뛰어난 분들일 것이다.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리정돈은 근검절약과 세트를 이루는 생활습관이 아닐까 한다. 정리정돈을 잘 해 놓으면 이미 있는 물건을 또 사는 낭비를 막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고관리를 잘 하면 물자의 낭비를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근검절약이 아니라 낭비가 미덕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공휴일을 많이 만들어야 사람들이 돈을 많이 쓰고, 그래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말도 들린다. 맞는 말이니까 하는 것이겠지만 평생을 근검절약, 정리정돈을 모토로 삼아 사신 아버지를 회상할 때, 아무래도 낭비와 어질러 놓음에 대해 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심플 라이프! 실천은 못하고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추구하게 되는 나의 좌우명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새삼 그리워진다.
2019-09-0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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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0> 아버지의 근검절약
우리 아버지의 첫 번째 인생 철학은 내가 보기에는 ‘근검절약(勤儉節約)’이었다. 넉넉하지 못한 농촌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근면하게 일하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는 것만이 잘 사는 비결이라고 믿으셨던 것 같다.
40대까지 군청에 다니셨던 아버지는, 당시 대부분의 시골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농사 및 집안 일을 돌 본 후 출근하셨고, 퇴근 후에도 저녁 늦게까지 같은 일을 돌보셨다.
우리 집에서는, 제법 잘 살게 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하루 한끼는 김치죽을 쑤어 먹었는데, 이는 묵은 김치를 활용하여 밥의 양을 늘리는 아이디어였다. 나는 괜찮았지만 할아버지는 김치죽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소천(所天)하시기 한참 전 어느 날 “내가 나이 먹어보니 김치죽을 먹어서는 영 기운이 나질 않는구나. 그걸 모르고 전에 할아버지께 계속해서 김치 죽을 드린 것이 죄송하구나”하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아무개 집안은 가방을 하나 사서 삼대(三代)가 썼다더라”는 식의 교훈을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한번은 내가 중학생 때에 학생모자를 새로 사주십사 말씀 드렸더니 “머리에 가만히 얹어 놓고 다니는 모자가 어째가 헤지느냐?”고 질책하셨다.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었다. 당시 학생 모자는 검은색 천으로 만들고 검은 색 비닐 챙을 달은 조잡한 물건이었지만 머리 위에 얌전히 얹고만 다녔다면 그렇게 빨리 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시로 의자 대신 깔고 앉고, 챙을 잡고 던지고 장난치는 바람에 모자가 빨리 망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유구무언 (有口無言)! 새 모자 사기 실패! 범사가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는 본인부터 철저한 본을 보이시는 분이셨다. 예컨대 아버지는 평생 돈 내는 이발소에는 다니지 않으셨다. 시골 앞 동네에 이발사 한 분이 있었는데 우리 가족이 일년 내내 필요할 때 이발을 하고 가을에 곡식 일정량을 주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다.
순회 공연처럼 이 이발사가 우리 동네에 오면 동네 사람들이 차례로 와서 머리를 깎곤 했었다. 마침 머리가 길었는데 이발사가 안 오는 때에는 오리 (五里)도 더 되는 산골까지 이발사 집을 찾아가 이발을 하고 와야만 했다. 나는 이발사 집을 찾아가서 이발하는 것이 특히 싫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나는 대학생 때 담배를 피웠지만 특히 아버지가 모르시도록 조심하였다. 이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건방져 보일까 봐’가 아니라, ‘버는 것도 별로 없는 학생이 담배를 사서 피우는 낭비를 한다고 야단 맞을까 봐’ 때문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제약회사에 취직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오신 일이 있었다. 모처럼 두 분께 점심 식사를 대접하려고 대중 음식점에 모시고 들어 갔는데, 벽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보신 아버지가 이내 “무슨 점심이 저리 비싸냐? 다른 집에 가면 훨씬 싼데… ” 하며 앞장 서 나가시는 것이었다. 이런 절약 정신 때문에 아버지가 칠십이 되시기 전까지맛 있는 음식도 제대로 사드릴 수 없었다.
부모님이 계신 시골집에 가는 것은 늘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경인선을 타고 부평에서 내려 시외 버스를 타고 장기리라는 곳에 내린 다음 오~십리 시골길을 한 40분 이상 터벅터벅 걸어야만 갈 수 있었다.
결혼 후 한 번은 아내와 서너 살짜리 두 아들과 함께 장기리에서 택시를 탔다. 어린 애들이 걷기에는 날씨가 너무 더웠고, 부모님께 드리려고 산 수박이 손이 끊어지게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택시가 시골집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행여 아버지가 보시면 ‘젊은 놈이 벌써부터 택시나 타고 다니며 돈 낭비를 한다’고 걱정을 하실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골 집에서 택시가 보이기 시작할 것 같은 지점에서 택시에서 내려 집에까지 걸어 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택시를 탄 것은 그 때 한번뿐이었다.
아버지는 이처럼 근검절약의 본을 보이셨지만 결코 남에게 인색하지는 않으셨다. 2년 전 98세로 소천하신 아버지가 요즘의 내 생활을 보신다면 얼마나 지적하실 게 많을까 때때로 생각해 본다.
2019-08-2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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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79>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의 고마움
“자고 일어나 눈을 뜨면 사물이 저절로 보이고, 물을 마시면 저절로 오줌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 동안 눈과 신장이 수고를 해주는 덕택에 사물을 보고 소변을 봤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 했어요. 그래서 눈과 신장의 노고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온누리 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가 오래 당뇨를 앓아 온 몸에 이상이 생긴 시점에서 한 말이다.
나도 나이를 좀 먹으니 안 아픈 데가 어딘가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 쑤신다. 무릎과 허리가 아프고, 잘 안보이고 덜 들리며 소변도 잘 안 나온다.
젊었을 때에는 내 몸에 무릎, 허리, 눈, 귀, 전립선이 어디 있는지 의식도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 이들 기관이 시원찮아지니까 이들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존재들 덕분에 우리가 무사히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돌아보면 그런 존재들은 무수히 많다. 우선 공기가 그렇다.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면 제일 부러운 게 맑은 공기다. 공기가 달다. 하늘에 먼지 한 점 없는 날이 많다. 늘 그러니까 거기 사는 사람들은 하늘에 맑은 공기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며 지낸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기에 예민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이 맑은지, 공기는 어떤지부터 살핀다. 미세먼지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어쩌다 공기가 맑은 날에는 창문을 열어 놓고 심호흡을 하게 된다. 사람이 공기를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옛날에는 우리도 공기를 인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제와 보니 그 때가 바로 공기에 감사하며 살아야 할 시절이었다.
우리 몸과 공기 외에도 감사해야 할 존재는 무수히 많다. 지구, 태양, 별들이 우주 내에서 자기 위치를 유지하며 규칙적인 운행을 하는 바람에 일출과 일몰, 그리고 사계절의 순환이 기가 막힐 정도로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또 물이 뜨거우면 끓고 차가우면 얼며, 사과가 중력에 의해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등의 자연법칙이 시공(時空)에 관계없이 지켜지고 있음도 감사한 일이다. 만약에 이런 자연 법칙들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인류의 과학과 문명은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또 생명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질서, 그리고 같은 땅에 뿌려도 씨에 따라 참외와 수박이 달리 열리는 종(種)의 규칙도 너무나 신비하고 감사하다.
사람이 두발로 설 수 있고 뛰고 걸을 수 있는 것도 기적이며,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출몰하고 전개되는 덕분에 우리가 무심히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모두 엄청나게 감사한 일들이다.
나아가 우리에게 나라가 있고, 가정과 가족이 있다는 사실도 매우 감사한 일이다. 만약 지금 내가 이들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내가 지금 그 안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만약에 이들이, 마치 잔소리하는 노년의 아내처럼, 내게 무거운 존재감으로 느껴진다면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의식되지 않는 존재가 진정 고마운 존재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앞으로는 이제까지 잘 의식하지 못한 존재 중에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며 살 작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일월성신 (日月星辰),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된다. 이 대목에 이르면 늘 연극 무대가 연상된다. 연극 감독은 모든 세팅을 완료해 놓고 배우들을 무대에 세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법칙과 환경을 준비해 놓으신 뒤에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돌아 보면세상이라는 무대에 존재하는 사물과 제도 중에 내가 수고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할렐루야!
2019-08-07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