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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9> 송도(松都) 약학대학*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에 재 개교한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는 1946년 9월에 3년제의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승격되고, 1948년부터는 4년제 학부과정을 개설하였으나 좌우 분열과 재단의 불안정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마침 개성(開城)의 유지들은 1949년 인삼 등으로 유서 깊은 개성에 새로운 약학대학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개성에는 개성중학 옆에 넓은 약초원과 유리 온실 등을 갖춘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 생약연구소가 있었다. 그래서 경성약전을 개성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일제 강점기에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전국에는 서울대학교와 이화여대에만 약학대학이 있었다.
약대 신설은 송도중학(松都中學, 당시 6년제)이 속해 있는 송도재단이 맡기로 하였다. 송도(松都)는 개성의 옛 이름이다. 송도재단은 서울약학대학의 한구동(韓龜東) 교수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다. 한 교수는 서울약학대학의 홍문화(洪文和), 이왕규(李王圭) 교수 등과 함께 약대 신설에 나섰다. 명목상의 학장은 송도중학의 8대 교장인 황석주(黃錫周) 선생이, 부학장은 한구동 교수, 교무과장은 홍문화 교수가 맡고, 학교 이름은 ‘송도약학대학(松都藥大)’으로 하기로 하였다.
1950년 4월 25일 마침내 문교부 당국으로부터 송도중학에 약대 병설 인가를 받았다. 이에는 당시 개성에 있던 민관식(閔寬植) 박사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최규남(崔奎南) 박사 (송도중학 1회 졸업생) 등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1989년 송도중학에서 발간한 『송도학원 80년사』를 보면, ‘1950년 개성 유지들의 협조로 40만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3월에 송도 약학대학 설립을 인가 받아 40명의 신입생1)을 받았다’고 한다. 1948년 10월 6일자 『자유신문』을 보면 개성 유지(有志)인 김정호, 윤영선, 공성학 씨가 약대를 위해 토지 15만평과 현금 50만원을 희사하였다고 한다. 기존의 송도중학 부지 25만평에 신설 약대 용으로 희사 받은 15만평을 합쳐 총 40만평이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약대의 건물로는 1924년에 지은 건평 388평의 3층 화강석 건물인 송도중학의 박물관(사진1)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1, 2 층에는 각종 식물과 동물의 표본 등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이 학교 졸업생이자 교사이던 석주명(石宙明)2) 씨가 수집한 나비 표본도 있었다.
약대 건물 20m 앞에는 농구장이 있었고, 거기서 10m 떨어진 곳에는 1939년 3월에 지은 112평 규모의 옥외 수영장도 있었다. 건물 앞에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었고, 그 옆에 기숙사가 3동 있었다. 송도약대는 이 임시 교사에 부랴부랴 강의실, 실험실 및 도서실 등을 만들고 전국에서 40명3)의 신입생을 선발해 놓고, 1950년 6월 26일에 입학식을 열기로 하였다.
홍문화 교수는 인쇄소에서 가지고 온 개교식 프로그램과 입학식장을 점검한 다음 개성을 떠나 홍 교수의 주소지인 인천의 주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월 25일 아침 서울역에서 이왕규 교수와 함께 개성 행 기차표를 끊으려다가 북한의 남침을 알게 되어 개성 행을 포기하였다.
이로써 송도약대는 역사의 물결 속에 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 근현대사의 뒷 페이지에 비감(悲感)이 서리지 않을 날은 언제 올 수 있을지 잠시 옷깃을 여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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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과 달리 생물 등 과학 수업을 하는 건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음.
2) 후에 개성에 있는 생약연구소를 거쳐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으로 근무.
3) 송도중학 32회 졸업생인 임정상(林正相) 등.
* 이 글은 송도중학 32회 졸업생인 허강(許江) 선생(전 문교부 편수관)의 증언 (2019.10.29 청취)과 『한국약업사(韓國藥業史)』, 『송도학원 80년사』, 송도중학교 홈페이지, 『서울대약대100년사』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2020-01-0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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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8> 손주를 보여줘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가 주말에 내려 오기로 한 서울 손주를 맞기 위해서 토요일 하루 종일 집안 구석 구석을 청소해 놓았다. 그 때 며느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애가 바빠서 내일 못 찾아 뵙겠다’는 내용이었다.
할아버지는 “알았다. 다음에 와라”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그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얼마 전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그 할아버지가 써 보낸 사연이란다.
나이가 들수록 손주와 노는 것 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재미도 보람도 손주보기가 최고이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손주는 노인네의 항우울제이고 우황청심환이다.
손주의 유일한 문제는 마약처럼 중독성, 의존성이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손주를 안보면 금단현상이 나타난다.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지고 우울해진다. 심하면 위에 소개한 할아버지처럼 울게 되기도 한다.
나는 요즘 젊은 부부를 만나면 “부모님께 대한 가장 확실한 효도는 손주를 자주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적어도 내 경우는 분명히 그렇다. 아들 며느리를 보는 것도 물론 좋지만 손주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문제는 아들 며느리가 손주들을 실컷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들을 잘 만날 수 없는 데에는 세 가지쯤 되는 이유가 있다.
1. 우선 아이들이 바쁘다. 학교 갔다 오면 학원에 가거나 집에서 과외 공부를 받아야 한다. 때로는 이게 아동학대가 아니고 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우는 것이 정말 많다.
그래서 애들이 할아버지와 놀아 줄(?) 짬이 거의 없는 것이다. 제발 아이들이 방과 후 수업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2. 둘째로 행여 짬이 있더라도 손주들 입장에서 할아버지와 노는 것은 별 재미가 없을 것이다. 나도 국민학교 다닐 때 할아버지가 맨날 “너 오늘 학교에서 무얼 배웠니?”, “네 학교 교장 선생님 이름이 뭐랬지?” 같은 질문을 하시는 것이 지루하고 귀찮았다.
또 옛날에 어머니가 교수가 된 나만 보면 “밥은 먹었냐?”고 물으셔서, 하루는 “그럼 굶고 다닐까 봐요?” 하고 짜증을 냈던 기억이 있다.
아들에게 “오늘 강의는 잘 했느냐?”고 물으실 실력이 없는 어머니가 ‘밥 먹었냐?’ 말고 뭘 더 물으실 수 있었겠는가? 말 한마다 걸어 보려고 하셨던 어머니에게 불효막심했던 내 짜증이 두고 두고 후회스럽다.
3. 세 번째로 아들 며느리는 내가 손주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아들 며느리의 탓이 아니다. 그 나이에는 거의 누구나 부모님이 손주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깨닫지 못한다.
그런 아들 며느리도 나이가 더 먹어 손주를 보게 되면, 틀림없이 내 마음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나도 젊었을 때는 잘 몰랐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께 손주들을 잘 보여드리지 못 했다.
우리 내외는 비교적 자주 부모님을 찾아 뵈었지만, 이제 와 보니 부모님은 우리보다 손주가 더 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이를 잘 잘 헤아리지 못한 불효가 이제 와 몹시 송구스럽다.
고 홍문화 교수님은 아놀드 토인비 박사의 주장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신 바 있다. “동물들은 태어나서 바로 본능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사람의 본능은 보잘것없어서 그냥 내버려 주면 이 세상에 살아 남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에겐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에는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 교육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교육이고, 가정 교육의 핵심은 조부모의 무르팍 교육이다”.
나는 우리 손주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성장했다는 자존감을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줄 아는 아이들은 이 세상의 웬만한 시험을 능히 이겨낼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곱 살짜리 손녀에게 음식을 주며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아이는 “먹을 만 한데요” 라며, 할아버지 무르팍에서 큰 손녀다운 대답을 하였다. 하하하, 이러니 어찌 내가 손주들을 예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19-12-1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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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7> 이목구비(耳目口鼻)
일본 사람들은 동경(東京)을 영어로 쓸 때 Tokyo라고 쓴다. 우리 생각에는 Dokyo가 좀 더 사실에 가까운 표기 같아 보이는데 일본인 생각은 다른 것이다. 오래 전 동경대학에 유학 할 때 비슷한 의문이 생겨서 클라스메이트에게 이 발음을 확인해 본 적이 있었다.
즉 한번은 “토-쿄”라고 하고 한번은 “또-꾜”라고 말하며 어떻게 들리냐고 물었더니 두 발음이 똑 같이 들린다는 것이었다.
몇 번씩 테스트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격음(激音, 크, 프, 트 등과 같은 거센 소리)과 경음(硬音, 끄, 뜨, 쁘 등과 같은 된소리)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들에게는 토-쿄나 또-꾜나 그게 다 그거인 것이다. 그러나 둘을 명백하게 다르게 듣는 우리에겐 토-쿄가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다.
우리도 못 듣는 음이 많다. 일본어에는 탁음(濁音, 다꾸옹)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잘 듣지 못한다. 한번은 일본에서 동영(東映)라는 상점을 찾아가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에이가 어딘가요?’ 물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잘 모르겠단다.
이번에는 그 때 거기서 유치원 다니던 큰애가 물었다. 그러자 그 일본 사람은 금방 ‘아, 도”에이? 조기 보이는 곳이네요‘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귀에는 ‘도’나 ‘도”’나 그게 그거였지만 일본인 귀에는 둘은 전혀 다른 발음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영어의 th나 v, z 발음 등을 잘 못하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몇 번씩 들어 봐도 귀로도 입으로도 구분이 안 된다. 예전에 C 교수가 런던에 가서 zoo 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왜 유대인(Jew)을 찾느냐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대충 비슷하게 발음했으면 알아서 들어야지 그렇게 못 알아 듣냐고 할 수 도 있겠지만, 나도 미국인이 틀린 한국어 발음으로 내게 뭘 묻는데 도저히 못 알아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못 알아듣는 걸 서로 비웃거나 나무랄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던 어떤 장로님이 청력을 잃고 가장 괴로운 것은 찬양을 부를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음의 높낮이가 잘 안 들리니 자연히 음치 비슷하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말도 노래도 잘 들려야 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각장애인이 언어 장애인인 경우가 많은 것도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최근에 그 장로님으로부터 들었는데 갑자기 들리지 않는 상황이 오면 긴급 상황으로 생각하고 빨리 이비인후과에 가야 한단다. 빨리 가서 조치를 받으면 청력의 상당 부분을 되돌릴 수 있지만 저절로 회복되겠지 하고 시간을 끌면 치명적으로 청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들리니까 이런 정보도 금방 입수할 수 있었다.
새삼 귀와 입은 긴밀하게 협력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둘은 동업자라고 할까? 함께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는 관계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귀와 입이 얼굴이라는 한 동네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도 알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가깝기로 치면 입과 코처럼 가까운 사이도 없을 것이다. 최근 아내 친구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냄새를 잘 못 맡게 된 이후로 영 커피 맛을 모르게 되었고 한다. 그래서 입에서의 맛도 코에서 향을 잘 맡아주어야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 눈은 또 왜 얼굴에 있을까? 아마도 그 답은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라는 속담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요즘 국론이 갈라져 서로 내 주장만 옳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분명 많건만, 그런 사람들은 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라며 자신들만 애국자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참된 리더십은 공감(compassion)에서 나온다고 한다. 공감은 아픔(passion)을 함께(com)하는 것이란다. 공감의 말을 하려면 우선 듣고 보고 맡아봐야 한다. 그래서 말이 험한 사람을 보면 눈, 코, 귀에 이상이 있나 의심이 든다.
한 동네에 모여 사는 이목구비(耳目口鼻)여! 서로 합력하여 선(善)을 이룰지어다.
2019-12-0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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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6> 흔들리는 기준(基準)
군대에 가면 정렬을 시킬 때 한 사람에게 오른쪽 손을 높이 치켜들고 큰 소리로 ‘기준!’ 이라고 외치게 한다. 그러면 그 사람, 즉 기준병(基準兵)은 신속히 자리를 잡고 오른쪽 팔을 들어 기준!을 외친 후 그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어야 한다. 기준병이 왔다 갔다 하면 군인들이 오(伍)와 열(列)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생동성(생물학적 동등성)시험은 복제 의약품(제네릭 의약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시험이다. 이 시험의 골자는 오리지날 약과 제네릭을 사람(피험자)에게 투여하였을 때 두 약의 혈중농도가 동등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나는 1983년 서울대 약대 조교수로 부임한 이래 일본의 ‘의약품연구’라는 잡지를 구독하며 ‘생동성시험’에 관해 공부하고 있었다.
1986년, 제약회사에 다니는 홍 아무개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 온 것을 계기로 생동성 시험에 소요되는 시간, 장소, 비용 등을 알아보기 위한 파이롯 연구를 시작하였다.
제네릭 시료로는 I제약의 라니티딘 정제를, 오리지날 시료로는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의 잔탁을 택하였다.
공부를 철저히 해 놓은 탓으로 파이롯 연구는 성공적이었다. 이 때부터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생동성 시험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게 되었다. 나중에는 대학원생의 도움을 받아 생동성 판정 통계 프로그램인 ‘K-BE Test’를 개발하여 식약청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생동성 시험을 한 사람치고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은 사람을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 프로그램의 사용료를 받기로 했다면 돈 좀 벌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생동성 시험을 궤도에 오르게 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한 일은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동성 시험에서 복제약을 시험약(test drug)이라고 부르고, 복제 대상이 되는 오리지날 약을 대조약(reference drug)이라고 부른다. 오리지날 약, 즉 대조약의 품질이 복제해야 할 ‘기준’이 되는 것이다.
피험자들에게 복제약(제네릭)과 대조약을 투여하여 두 약의 혈중 농도가 통계학적으로 같게 나오면 두 약은 ‘동등’하다는 판정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대조약의 품질이 늘 일정하지 않고 흔들린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용출시험을 해 보니 대조약의 용출양상이 뱃치 별 또는 롯트 별로 변동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기준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조약을 투여하였을 때의 혈중농도가 일정해야 제네릭을 이에 맞추는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2003년 식약청장이 된 나는 고민 끝에 일본의 관료로 평생 생동성 연구만 해 온 A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본에서도 대조약의 용출 특성이 롯트 별로 다르던가요?” 물었더니 ‘매우 그렇다’는 것이었다. 놀란 나는 “그럼 어떤 롯트를 대조약으로 삼나요?” 물었더니, ‘임의의 세 롯트를 택하여 용출시험을 해서 중간 특성을 보이는 롯트를 대조약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그건 일종의 눈가림 밖에 안되지 않나요? 실제로는 여러 롯트에 대해 용출시험을 한 다음, 제네릭과 가장 비슷한 용출거동을 보이는 롯트가 중간에 오도록 대조약 세 롯트를 임의로 선택한 것처럼 서류를 꾸미는 술수를 막을 수 없지 않나요?” 물었더니,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와 A박사는 생동성 시험보다는 용출시험이 훨씬 더 정밀하며 실용적인 의미가 있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용출 양상이 동등한 두 약은 반드시 혈중 농도가 동일할 것이기 때문에 오리지날과 제네릭의 용출특성이 동일함을 입증하면 두 약의 생동성은 충분히 보증된다고 믿었다.
용출 양상이 롯트별로 ‘흔들리는’ 대조약에 제네릭의 품질을 맞추라는 것은 움직이는 과녁을 맞추기 보다 더 어려운 일일뿐더러 과학적 합리성도 없는 일이다. 이때부터 오리지날 약의 용출특성의 변동을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 기존의 모든 기준들이 흔들린다. 성경의 창조질서마저 도전 받는다. 기준은 잘못 정해져도, 또 흔들려도 안 된다. 큰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두가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기준’이 그리운 오늘이다.
2019-11-2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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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5> 한끼 줍쇼
JTBC 방송에서 2016년부터 주 1회 방송하고 있는 ‘한끼 줍쇼’란 TV 프로그램이 있다. 방송국의 설명에 의하면 이 프로그램은 ‘정글과도 같은 예능 생태계에서 국민 MC라 불렸던 두 남자가 저녁 한끼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은 다큐멘타리’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경규씨와 강호동씨 두 사람이 각각 인기 연예인 한 명씩을 동반하고 불쑥 어느 동네를 찾아가 아무런 사전 양해 없이 어느 집의 초인종을 눌러 “저녁 한끼 같이 먹으면 안될까요?”라고 묻는다.
당연히 적지 않은 집이 ‘청소가 안 되어 있다’거나 ‘이미 식사를 마쳤다’라는 이유를 대면서 요청을 거절하거나 사양한다. 그러다 마침 여건이 되는 집은, 두 사람을 들어 오게 해서 식사를 같이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일정 시간 안에 승낙을 받지 못하면 발길을 돌려야 한다고 하나, 그런 사례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이 이 프로그램의 개요이다.
나는 이 방송을 보면서 세상에 이런 프로그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세상이 먹고 살만해 지고, 또 방송이라고는 하지만,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집을 찾아가 느닷없이 “한끼 줍쇼” 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출연하는 두 MC가 워낙 유명하고 능숙하니까 그 말을 꺼내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겐 벨을 누르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내 생각에는 이런 방송은 우리나라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에서 이처럼 남에게 무례하게 해도 생명의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 말고 달리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예컨대 미국이나 일본에서 느닷없이 남의 집 대문의 벨을 누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요즘은 좀 달라졌겠지만 총과 칼을 휴대하고 살던 시대라면 그건 ‘날 죽여 달라’고 죽음을 자청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미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에게는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겁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심지어 초대를 받은 집에 들어 갈 때에도 “익슈큐즈 미”라든가 “오소레 이리마스”와 같이 실례를 용서해 달라는 ‘양해의 말씀’을 드리고 나서 들어가는 그들이다.
일본에서는 남을 부르는 것 자체가 엄청 겁나는 일이다 그래서 ‘여보세요’라고 부르지 못하고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이라고 한다. 그것도 작은 목소리로! 일본인에게 ‘여보세요’는 ‘여기를 봐라 (Look at me!)’와 같은 무례한 명령으로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떠했는가? 옛날 양반은 남의 집 대문에 서서 “이리 오너라”라고 외쳤다. 그것도 큰 소리로!! 그만큼 우리나라는 안전한 나라였다.
옛날부터 우리는 남의 집에 들어갈 땐 인기척을 내야 한다고 배웠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저녁이면 전깃불도 없는 컴컴한 사랑방에 화로를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와 둘이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 때 바깥 마당 쪽에서 인기척이 나며 동네 할아버지가 우리 집으로 말(마실)을 오신다. 그 할아버지는 대개 “어이 참 달이 밝네, 보름이 얼마 안 남았나”, 또는 “저놈의 개는 동네 사람도 못 알아 보고 짖네”라고 하시며 나타나신다.
때로는 말을 하는 대신 “칵 퇴!” 하며 가래침을 뱉는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아 오늘은 됭고개 밑 영감님이 오시는구나’하고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겐 이 인기척이 외국의 ‘익스큐즈 미’나 ‘오소레 이리마스’에 해당하는 ‘양해 구하기’였던 셈이다.
내가 30대일 때에는 친구 집에 무단(無斷) 방문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흥이 오르면 ‘우리 집에 가자’고 호기를 부려야 멋진 사내였다. 심지어 신혼부부 집에 쳐들어가 밤새 술을 마시고 이불에 실례까지 저지르고 아침에 도망 나온 무용담(?)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한끼 줍쇼’란 이처럼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또 다소(?) 무례해도 안전했던 우리나라의 과거를 배경 삼아 탄생한 프로그램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인(萬人)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일상화된 오늘, 이 프로그램은 배경을 잘 못 잡은 인물 사진처럼 어색해 보인다.
2019-11-0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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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4> 사람 살려
길을 가다가 실수로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미국 사람들은 “Help me!”, 일본 사람들은 “다스께떼!”, 중국 사람들은 “救命!”이라고 외칠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알다시피 우리는 “사람 살려!” 라고 외친다. 미국 사람들은 ‘나’를 강조하고, 일본과 중국 사람은 누구를 살려달라는지 불투명한 채로 살려달라고 외치는데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라고 외치는 것이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만 ‘내’가 아닌 ‘사람’을 살리라고 외칠까? 나는 이게 오랫동안 궁금하였다.
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구덩이에 빠진 것이 ‘나’라는 개인이라기 보다 우리 모두가 소속되어 있는 ‘사람(인간)’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일원(一員)이 빠진 것이니 심각하게 생각해서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비록 하찮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나를 봐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집단의 존귀성을 생각해서 나를 살리라는 설득 같다는 말이다. ‘나’의 문제를 ‘인간’이라는 집단의 문제로 확대함으로써 궁지를 벗어나려는 전략(?)이 엿보인다.
이 대목에서 문뜩 맹꽁이가 생각난다. 맹꽁이는 건드릴수록 배를 크게 부풀리는데, 이는 십중팔구 ‘내 덩치가 이처럼 크니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상대방에게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동물은 몰라도 사람은 그 모습을 우스꽝스러워 할 뿐 더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 살려’라고 안하고 사람 살리라고 과장해서 외친다고 해서 지나가던 사람이 더 긴박하게 구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사람 살려’로 부터 맹꽁이의 배 부풀리기와 유사한 허장성세(虛張聲勢)가 느껴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람’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쓰고 있나를 관찰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현상들이 더 발견된다. 예컨대 시장에서 두 사람이 삿대질을 하며 싸움 (실은 말다툼)을 하고 있는 상황을 떠 올려보자. 말다툼이 조금 더 격해지면 십중팔구 서로 밀치거나 멱살을 잡으려는 듯한 동작으로 발전한다.
그러면 그 중 한 사람이 “어어! 이러다 사람 치겠네!” 하고 소리친다. 이때도 ‘나’를 강조하지 않고 ‘사람’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그냥 ‘나’가 아니라 ‘사람’의 하나인데, 네가 사람이면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칠 수 있느냐’는 고상한 논리를 펴는 것이다.
여담(餘談)이지만 전통적인 우리네 싸움은 육탄전이 아니다. 서로 구경꾼들에게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설명함으로써 여론이 나에게 유리하도록 홍보하는 여론전(與論戰)인 것이 시장 싸움의 특징이다.
그래서 시장에서의 싸움은 늘 시끄럽다. 홍보전이기 때문에 목소리 큰 사람이 유리하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허위 과대 비방도 나온다. “이놈이 제 아버지한테도 막 덤비는 놈이예요”라는 식이다. 상대방이 ‘사람’같지도 않은 막 돼먹은 X이라고 결정타를 먹여 여론을 내 편으로 돌리려는 의도이다.
다시 여담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싸움은 대개 말싸움이기 때문에 시끄럽지만, 미국이나 일본 사람들의 싸움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입으로 싸우지 않고 살인 무기인 총이나 칼로 싸우기 때문에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말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총이나 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훨씬 실리적이다.
그래서일까? 영어와 일본어에는 우리말에서와 같은 ‘얼큰한’ 욕들이 없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보고 “싸우되 절대로 욕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다들 속이 터져서 1-2분 안에 차라리 싸움을 그만두고 말 것이다.
고 홍문화 교수님은 아놀드 토인비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동물들은 본능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식욕, 성욕 등 극히 초보적인 본능 밖에 갖지 못하고 태어나기 때문에 태어난 그대로는 이 세상에 살아 남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가정, 학교, 사회에서의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람 살려’는 우리에게 ‘나’라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9-10-1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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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3> 이등병, 병기수입, 조의
1. 이등병, 일등병
군대에 들어가 보니 사병들의 계급을 부르는 호칭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대 후 소정의 훈련을 받고 나면 계급장에 작대기 하나를 달아주며 ‘이병(二兵) 또는 이등병(二等兵)’이라고 부른다.
다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작대기 한 개를 더 달아주며 이번에는 ‘일병(一兵) 또는 일등병(一等兵)’이라고 부른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작대기가 3개, 4개가 되면 각각 ‘상병(上兵)’과 ‘병장(兵長)’으로 부르는데, 내게는 특히 이병과 일병이라는 호칭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작대기 하나를 일병, 작대기 두 개를 이병으로 불렀으면 헷갈리지도 않고 좋았을 텐데 왜 각각을 이병, 일병으로 부르게 되었을까 내내 궁금하였다.
이 의문은 군대에서 만난 강(姜) 아무개라는 한자 달인(?)을 통해 풀렸다.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군대 계급을 중국 군대에서 배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 이, 삼, 사’를 ‘이, 얼, 산, 시’라고 부르기 때문에, 계급도 당연히 이병, 일병 식으로 부른다고 한다.
우리 군대도 이 중국식 계급 이름에 따라 이병, 일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도 작대기 3개, 4개를 각각 상병(上兵)과 병장(兵長)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럼 왜 우리는 1, 2, 3, 4를 중국처럼 이얼산시로 부르지 않고 일이삼사로 부르게 되었는가? 처음부터 이일삼사로 불렀으면 계급장에 대한 혼동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강아무개는 이는 중국에서 한자를 들여 올 때 착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입할 때 정품(正品)을 들여와야 혼란이 없는 것은 물건만이 아닌 모양이다.
2. 병기(兵器)수입?
사병(士兵)으로 입대하면 특히 훈련소 시절에는 매일 같이 ‘병기수입’을 해야 한다. 일과 후 저녁 시간에 내무반의 침상에 앉아 총을 분해해서 녹을 닦아내고 기름을 칠하는 작업을 병기수입이라고 부르는데, 총을 병기라고 부르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수입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3년 내내 궁금하였다.
이 궁금증은 훗날 일본어를 배우면서 저절로 풀렸다. 여기서 말하는 수입이란 일본어의 ‘手入れ(데이레)’에서 어미れ를 떼고 앞 부분인 手入만을 남겨 부른 것이었다. 우리 군대에 남아있는 일본어의 잔재(殘滓)이었다. 일본어 ‘데이레’는 우리말로 ‘손질’이다.
그러므로 병기수입은 ‘병기손질’, 나아가서는 ‘총 손질’로 바꾸면 더 좋을 말이었다. 지금도 군대에서 병기수입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여담(餘談)이지만 군대에서는 한자 단어 쓰기를 너무 좋아한다. ‘극장 갈 사람 모여라’ 하면 될 것을 꼭 ‘극장 관람자 집합!’ 이라고 소리친다. 목욕 갈 사람을 모을 때도 ‘목욕 집합!’ 이라고 외친다.
한자를 쓰면 글자수가 줄어 간단해지긴 하지만 때로는 지나쳐서 거북한 경우도 많았다. 행여 한자를 써야 유식해 보여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길 바란다.
3. 조의(吊儀)와 조의(弔儀)
다시 강아무개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사람이 죽어 조화를 보낼 때 ‘조의’라고 써 보내는데 이 글자는 고인이 어떻게 죽었냐에 따라 한자를 구분해서 써야 한단다. 수건 건(巾)자가 들어 있는 吊儀는 수건까지 깔아 놓고 나름 복 있는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단어란다.
반면에 글자에 활(弓)이 들어 있는 弔儀는 전쟁에서 활 맞아 죽는 등 비명에 죽은 사람에 대해 사용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고인이 어떤 죽음을 맞이했나’부터 살펴 본 후에 ‘조’자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면 가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내 유식(?)을 자랑하는데, 누군가가 요즘에는 두 한자를 구분하지 않고 써도 된다고 귀뜸해 주었다. 네이버 한자 사전에도 吊는 弔의 속자(俗字)라고 나온다. 그래서인지 국어 사전에 弔儀는 나와도 吊儀는 잘 나오지 않는다. 내가 유식한 건지, 오히려 무식(無識)한 건지 헷갈리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강아무개가 군대에서 가르쳐 준 한자 지식은 몇 가지 더 있지만, 까딱하면 유식 사이로 나의 무식이 삐져 나올까 두려워 이쯤에서 글을 닫는다.
2019-10-0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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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2> 홍문화 교수님 추모 책자 발간을 준비하며
나는 요즘 고 홍문화(洪文和) 교수님 추모 책자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대 약대의 ‘한국약학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이다.
홍교수님은 1916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1934년 19세의 나이에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에 입학하셨다. 1937년 경성약전을 수석으로 졸업하신 후 3년간 주안에 있던 제염시험소 소장으로 근무하신 것을 제외하면 평생의 대부분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로 지내셨다.
홍교수님은 “나의 가장 짧은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신 적이 있다. “(전략) 살다 보니 육십오년 어느덧 지났다네. (중략) 삼십에 철들어 시험관과 책 들고 분필로 썼다 지웠다 삼십년을 지나면서 박사, 교수, 소장, 학장, 원장, 회장 지냈노라 하였으나 그 흔한 노벨상도 못 타고 남이 한 말 받아 판 것 말고 무엇이 남았는가. 일차대전 총소리에 태어나 삼일독립만세, 중일전쟁, 이차대전, 팔일오, 육이오, 사일구, 오일륙, 십이륙, 숱하게 겪었건만 이십에 알았다던 인생이 갈수록 모르게 되어가니. 하나님이시여! 인류에게 평안을 내리소서 빌 수 밖에 없구나. 내일 모르는 세상에 백세를 사는 지혜랍시고 아는 소리 모르는 소리 지껄이다 보면 하루가 지나가고. 이래도 좋은가 나의 인생.” 이 글은 홍교수님이, 그리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어려운 시대를 통과해 오늘에 이르렀는지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홍교수님은 서울대 약대 교수로 재직 중 2년반 동안 국립보건연구원장 직을 지내신 후 서울대 생약연구소 교수로 임명 받아 10년간 재직하셨는데, 그때 가장 많은 공부를 했다고 회고하셨다. 그 기간에 ‘한방 처방의 통계학적 연구’ 등 한약의 과학화에 기여하는 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셨는데, 이 논문들의 특징은 대부분 공저(共著)가 아니고 단독 저술이라는 점이다. 이는 문헌 복사나 데이터 처리 같은 연구의 전 과정을 본인 스스로 하셨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홍교수님은 6.25 전쟁 중에 졸업하는 약대 학생들에게 ‘소금에 붙이는 독백’이라는 유명한 축하 시를 주셨다. 졸업생들에게 ‘소금처럼 세상의 방부제(防腐劑)가 되고 나아가 세상을 살 맛나게 만드는 조미제(調味劑)가 되거라’고 격려하신 것이다.
홍교수님은 약사 사회에 대해서도 ‘약사 십계 (藥師十戒)’ 같은 글의 연재 (약업신문)를 통하여 과학정신에 기반한 좋은 약사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일깨워주셨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건강 전도사를 자처하며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를 통하여 합리적인 사고와 생활을 해야 한다고 계몽하셨다. 수많은 건강 관련 저서를 남기셨고 수많은 강연을 하셨다. 1994년의 경우 총 500회의 강연을 하셨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같은 열정은 엉터리 건강법이 범람했던 시대에 약학자로서 방관할 수 없는 사명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홍교수님은 미술, 조각, 서예, 음악, 문학, 철학 등 약학 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남이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셨다. 홍교수님의 업적을 살피다 보면, 시대가 낳은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연상된다. 그러나 홍교수님이 남기신 두 개의 수첩을 보면 전혀 다른 감동을 받게 된다.
수첩 하나는 약대 학장이실 때 3년간 본부 학장회의에 참석하여 기록한 메모장이다. 거기에는 거의 매주 열린 회의에서 총장님이 지시한 사항은 물론, 참석 대상자 중 불참자의 이름과 사유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또 다른 수첩은 외국 여행을 가실 때마다 영어로 기록한 메모장인데 거기에는 비행기 출발 및 도착 시간, 비행기 좌석 번호, 숙박한 호텔의 이름 및 방 번호 등 사소한(?) 사항들이 그야말로 깨알같이 적혀 있다. 이를 보면 홍교수님의 그 많은 성취가 결코 재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대하(大河) 홍문화 교수님은 2007년에 향년 91세로 영면하셨다. 우리가 홍 교수님을 약학계의 영원한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19-09-1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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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1> 아버지의 정리정돈
아버지의 근검절약에 이은 두 번째 좌우명(座右銘)은 정리정돈(整理整頓)이었다. 아버지의 하루 일과는 아침 일찍 바깥마당과 안마당을 쓰시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비질 소리에 식구들이 아침 잠을 깨는 날도 많았다.
오후에 군청에서 퇴근하시면 자전거를 바깥 마당에 세워 놓으신 채로 마당을 다 쓸고 나서야 대문을 넘어 오셨다. 집안에 들어 오셔서도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는 것들을 정리하기 전에는 옷을 갈아 입지 않으셨다.
멀리서 아버지가 퇴근해 오시는 기척이 나면 나는 부리나케 주변을 정리하고 공부를 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한 말씀 들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아버지의 정리정돈은 용모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구들이 외출 할 때마다 머리와 복장은 단정한지, 구두는 잘 닦았는지 등을 늘 살펴주셨다. 노년에는 내 자동차의 세차 상태도 자주 지적하셨다.
“깜깜한 밤에도 금방 찾을 수 있도록 늘 정해진 자리에 물건을 놓아라”. 그게 아버지의 정리정돈 기준이었다. 아버지는, 좀 불경스러운 표현이지만, 늘 ‘정리정돈’을 노래 부르듯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느 아내들이 다 그러하듯, 아버지의 말씀을 그다지 괘념치 않으셨다. 어머니는 당신의 라이프 스타일, 즉 ‘사람이 좀 어질러 놓고 살면 어떠냐’고 생각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아버지의 문제는 잘 정리해 놓으신 물건을 나중에 어디에 두었는지 종종 기억해내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정리’란 대개 물건을 잘 안 보이는 깊은 곳에 두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장소를 금방 생각해 내기 어려우셨던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는 어머니의 반격을 받으신다. “내가 둔 대로 그냥 놔 두었으면 금방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치워서 못 찾게 만드느냐?”어머니의 질책에 난감해 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어느새 나도 정리정돈이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올바른 생활태도라고 신봉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백분의 일 수준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나도 어질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게 된 것이다. 특히 신기한 것은 나도 정리를 해 놓고는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부전자전 (父傳子傳)! 사실 정리란 아버지나 나처럼 기억력이 좋지 못한 사람이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자구책으로 생활화한 습관일지도 모르겠다. 정리마저 해 놓지 않으면 끝내 찾지 못하고 기억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 생긴 버릇이라는 말이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 C 교수님 방에 가 봤더니 큰 탁자 위에 온갖 책과 서류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그 교수님은 “지금 정리 중이야” 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묻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본인도 그 혼란스러운 상태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 산더미는 그 교수님이 정년 퇴임할 때까지 없어지지도, 그 크기가 줄어들지도 않았다. 쌓아놓고 사는 것은 그 분의 습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분들은 그 산더미 속에서 본인이 필요한 것을 용케도 찾아낸다. 아마 그분들은 구태여 정리 정돈해 놓지 않아도 다 찾을 수 있는 기억력이 뛰어난 분들일 것이다.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리정돈은 근검절약과 세트를 이루는 생활습관이 아닐까 한다. 정리정돈을 잘 해 놓으면 이미 있는 물건을 또 사는 낭비를 막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고관리를 잘 하면 물자의 낭비를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근검절약이 아니라 낭비가 미덕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공휴일을 많이 만들어야 사람들이 돈을 많이 쓰고, 그래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말도 들린다. 맞는 말이니까 하는 것이겠지만 평생을 근검절약, 정리정돈을 모토로 삼아 사신 아버지를 회상할 때, 아무래도 낭비와 어질러 놓음에 대해 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심플 라이프! 실천은 못하고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추구하게 되는 나의 좌우명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새삼 그리워진다.
2019-09-0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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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0> 아버지의 근검절약
우리 아버지의 첫 번째 인생 철학은 내가 보기에는 ‘근검절약(勤儉節約)’이었다. 넉넉하지 못한 농촌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근면하게 일하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는 것만이 잘 사는 비결이라고 믿으셨던 것 같다.
40대까지 군청에 다니셨던 아버지는, 당시 대부분의 시골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농사 및 집안 일을 돌 본 후 출근하셨고, 퇴근 후에도 저녁 늦게까지 같은 일을 돌보셨다.
우리 집에서는, 제법 잘 살게 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하루 한끼는 김치죽을 쑤어 먹었는데, 이는 묵은 김치를 활용하여 밥의 양을 늘리는 아이디어였다. 나는 괜찮았지만 할아버지는 김치죽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소천(所天)하시기 한참 전 어느 날 “내가 나이 먹어보니 김치죽을 먹어서는 영 기운이 나질 않는구나. 그걸 모르고 전에 할아버지께 계속해서 김치 죽을 드린 것이 죄송하구나”하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아무개 집안은 가방을 하나 사서 삼대(三代)가 썼다더라”는 식의 교훈을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한번은 내가 중학생 때에 학생모자를 새로 사주십사 말씀 드렸더니 “머리에 가만히 얹어 놓고 다니는 모자가 어째가 헤지느냐?”고 질책하셨다.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었다. 당시 학생 모자는 검은색 천으로 만들고 검은 색 비닐 챙을 달은 조잡한 물건이었지만 머리 위에 얌전히 얹고만 다녔다면 그렇게 빨리 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시로 의자 대신 깔고 앉고, 챙을 잡고 던지고 장난치는 바람에 모자가 빨리 망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유구무언 (有口無言)! 새 모자 사기 실패! 범사가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는 본인부터 철저한 본을 보이시는 분이셨다. 예컨대 아버지는 평생 돈 내는 이발소에는 다니지 않으셨다. 시골 앞 동네에 이발사 한 분이 있었는데 우리 가족이 일년 내내 필요할 때 이발을 하고 가을에 곡식 일정량을 주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다.
순회 공연처럼 이 이발사가 우리 동네에 오면 동네 사람들이 차례로 와서 머리를 깎곤 했었다. 마침 머리가 길었는데 이발사가 안 오는 때에는 오리 (五里)도 더 되는 산골까지 이발사 집을 찾아가 이발을 하고 와야만 했다. 나는 이발사 집을 찾아가서 이발하는 것이 특히 싫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나는 대학생 때 담배를 피웠지만 특히 아버지가 모르시도록 조심하였다. 이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건방져 보일까 봐’가 아니라, ‘버는 것도 별로 없는 학생이 담배를 사서 피우는 낭비를 한다고 야단 맞을까 봐’ 때문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제약회사에 취직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오신 일이 있었다. 모처럼 두 분께 점심 식사를 대접하려고 대중 음식점에 모시고 들어 갔는데, 벽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보신 아버지가 이내 “무슨 점심이 저리 비싸냐? 다른 집에 가면 훨씬 싼데… ” 하며 앞장 서 나가시는 것이었다. 이런 절약 정신 때문에 아버지가 칠십이 되시기 전까지맛 있는 음식도 제대로 사드릴 수 없었다.
부모님이 계신 시골집에 가는 것은 늘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경인선을 타고 부평에서 내려 시외 버스를 타고 장기리라는 곳에 내린 다음 오~십리 시골길을 한 40분 이상 터벅터벅 걸어야만 갈 수 있었다.
결혼 후 한 번은 아내와 서너 살짜리 두 아들과 함께 장기리에서 택시를 탔다. 어린 애들이 걷기에는 날씨가 너무 더웠고, 부모님께 드리려고 산 수박이 손이 끊어지게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택시가 시골집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행여 아버지가 보시면 ‘젊은 놈이 벌써부터 택시나 타고 다니며 돈 낭비를 한다’고 걱정을 하실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골 집에서 택시가 보이기 시작할 것 같은 지점에서 택시에서 내려 집에까지 걸어 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택시를 탄 것은 그 때 한번뿐이었다.
아버지는 이처럼 근검절약의 본을 보이셨지만 결코 남에게 인색하지는 않으셨다. 2년 전 98세로 소천하신 아버지가 요즘의 내 생활을 보신다면 얼마나 지적하실 게 많을까 때때로 생각해 본다.
2019-08-2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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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79>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의 고마움
“자고 일어나 눈을 뜨면 사물이 저절로 보이고, 물을 마시면 저절로 오줌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 동안 눈과 신장이 수고를 해주는 덕택에 사물을 보고 소변을 봤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 했어요. 그래서 눈과 신장의 노고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온누리 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가 오래 당뇨를 앓아 온 몸에 이상이 생긴 시점에서 한 말이다.
나도 나이를 좀 먹으니 안 아픈 데가 어딘가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 쑤신다. 무릎과 허리가 아프고, 잘 안보이고 덜 들리며 소변도 잘 안 나온다.
젊었을 때에는 내 몸에 무릎, 허리, 눈, 귀, 전립선이 어디 있는지 의식도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 이들 기관이 시원찮아지니까 이들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존재들 덕분에 우리가 무사히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돌아보면 그런 존재들은 무수히 많다. 우선 공기가 그렇다.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면 제일 부러운 게 맑은 공기다. 공기가 달다. 하늘에 먼지 한 점 없는 날이 많다. 늘 그러니까 거기 사는 사람들은 하늘에 맑은 공기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며 지낸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기에 예민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이 맑은지, 공기는 어떤지부터 살핀다. 미세먼지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어쩌다 공기가 맑은 날에는 창문을 열어 놓고 심호흡을 하게 된다. 사람이 공기를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옛날에는 우리도 공기를 인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제와 보니 그 때가 바로 공기에 감사하며 살아야 할 시절이었다.
우리 몸과 공기 외에도 감사해야 할 존재는 무수히 많다. 지구, 태양, 별들이 우주 내에서 자기 위치를 유지하며 규칙적인 운행을 하는 바람에 일출과 일몰, 그리고 사계절의 순환이 기가 막힐 정도로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또 물이 뜨거우면 끓고 차가우면 얼며, 사과가 중력에 의해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등의 자연법칙이 시공(時空)에 관계없이 지켜지고 있음도 감사한 일이다. 만약에 이런 자연 법칙들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인류의 과학과 문명은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또 생명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질서, 그리고 같은 땅에 뿌려도 씨에 따라 참외와 수박이 달리 열리는 종(種)의 규칙도 너무나 신비하고 감사하다.
사람이 두발로 설 수 있고 뛰고 걸을 수 있는 것도 기적이며,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출몰하고 전개되는 덕분에 우리가 무심히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모두 엄청나게 감사한 일들이다.
나아가 우리에게 나라가 있고, 가정과 가족이 있다는 사실도 매우 감사한 일이다. 만약 지금 내가 이들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내가 지금 그 안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만약에 이들이, 마치 잔소리하는 노년의 아내처럼, 내게 무거운 존재감으로 느껴진다면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의식되지 않는 존재가 진정 고마운 존재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앞으로는 이제까지 잘 의식하지 못한 존재 중에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며 살 작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일월성신 (日月星辰),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된다. 이 대목에 이르면 늘 연극 무대가 연상된다. 연극 감독은 모든 세팅을 완료해 놓고 배우들을 무대에 세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법칙과 환경을 준비해 놓으신 뒤에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돌아 보면세상이라는 무대에 존재하는 사물과 제도 중에 내가 수고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할렐루야!
2019-08-0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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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78> 젊은이에 건다
지난 64회 현충일 아침, 티브이로 기념식 중계 방송을 보면서 3.1 운동, 독립운동, 6.25 전쟁과 4.19 혁명 같은 우리나라 근 현대사의 변곡점에는 젊은이들의 용감한 참여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젊은이의 혈기(血氣)가 역사를 바꾸는 구동력(驅動力)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우리나라가 오늘날의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된 것은 ‘지금은 늙었지만 그 때는 젊었던’ 사람들의 희생이나 기여 덕분일 것이다.
세상은 엄청 바뀌었다. 과거 우리 세대에게 클리프 리차드나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즈는 서양 우상(偶像)이었다. 그런데 최근 케이팝을 하는 방탄소년단 (BTS)이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하였는데 관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의 BTS가 세계인의 우상이 된 것이다. 한 마디로 기적이다.
잠깐 최근사를 돌아보면 올림픽 개최, 월드컵 축구 4강 진출, 박세리, 박찬호, 추신수, 김연아, 손흥민, 류현민 선수 등의 활약,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등, 우리 세대는 꿈도 못 꾸어 본 기적들이 꼬리를 물어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런 활약을 하는 나라가 최근의 우리나라인 것이다.
내가 1967년에 약대에 입학하여 다닐 때에는 정말 너나 할 것 없이 공부를 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 공대는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수재들만 들어가는 대학이었지만, 공대 학생들도 매일같이 카드 놀이와 술 마시기, 남녀 미팅 등으로 세월을 축내고 있었다. 끊이지 않던 데모와 장기간의 학교 휴업도 학생들의 노는 풍조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대학생들의 전반적인 실력은 형편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우선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한다. 우리 때에 많았던 휴강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 오늘 날의 대학생은 우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실력이 높다.
교수들도 달라졌다. 우리 때의 교수들은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내는 방법 자체를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분들은 대개 전문학교 출신들로 연구와 논문 투고에 대한 경험이 없는 채로 광복 후 갑자기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여년 전부터 서울대 약대 교수들의 논문 발표 실적이 세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또 내가 학교 다닐 때 어떤 교수님은 우리나라에서 신약이 개발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장담(?)을 하셨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가 개발한 신약의 개수가 30개를 넘고 있다. 이게 다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학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교육도 엄청 달라졌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어떤 선생님은 한글 맞춤법을 정확히 모르는 채로 국어를 가르치셨다.
벽지 학교에까지 실력 있는 정교사를 보낼 형편이 못 되었던 시절 탓이다. 또 우리 아들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에는 ‘가장 깊은 바다에 사는 물고기 이름’ 같은 쓸데없는 지식을 암기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요즘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주들을 보니 이제는 학교에서 그런 쓸 데 없는 공부는 시키지 않는 것 같았다. 손주들이 다니고 있는 영어 학원에서도 문법 중심의 죽은 영어 대신 원어민을 통한 살아있는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처럼 높아진 젊은 세대들의 실력은 ‘왕년에 놀기만 했던’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젊은이만 어른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젊은이를 잘 모르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른들은 때로는 젊은이로부터 배워야 할 대목에서도 오히려 젊은이를 가르치려 드는 우(愚)를 범하기도 한다.
오늘날 여러 부분에서 세대 간 갈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는 반증(反證)일 수도 있겠다. 만약에 어른들이 젊은이를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때로는 배움의 대상으로 바라봐 준다면 이 갈등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아무쪼록 실력 있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세계관과 역사관으로 더 좋은 미래를 열고 나가기를 기원한다. 그 때 그 때 젊은이는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2019-07-1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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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77> 사서 기뻤던 물건, 티브이
1972년, ‘여로(旅路)’라고 하는 티브이(TV) 일일연속극이 시청률 70%를 넘기며 전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시골 소읍에 사시던 장모님은 저녁마다 이 연속극을 보러 이웃 마을까지 걸어 다니셨다.
그래서 아직 결혼 전이었던 아내는 어머니를 위해 흑백 티브이 한 대를 사서 안방에 설치하였는데, 그 일이 지금껏 가장 기뻤던 일로 회상된다고 하였다. 당시 컬러 티브이는 아직 나오지 않았던 때였다.
티브이를 사 놓자 장모님이 더 이상 이웃 마을까지 가시지 않아도 되어 좋았지만, 대신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동네 사람들이 아이 어른 구분없이 매일 저녁 처가 댁 안방으로 몰려드는 것이었다. 티브이를 설치한 집은 매우 드물고, 여로를 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저녁 내내 방안에는 동네 개구장이들의 발가락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흑백 티브이를 사드렸던 때가 가장 기뻤던 생각이 난다. 1974년 5월, 만 34개월 간의 육군 사병 생활을 마치고 그 해 7월 영진약품에 특별채용(특채) 되었다. 대학 2년 선배인 장정훈 씨의 주선에 따른 것이었는데, 입사 한 달쯤 뒤 회사의 오너이신 김생기 사장님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사장님은 내게 “자네는 어떤 자세로 회사에 다닐 생각인가?” 물으셨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나는 평소 생각한 대로 “사장님은 영업부 직원이 지난 달보다 매출을 더 올리면 열심히 일한 것으로 평가하시죠? 그러나 저는 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이므로 제제 중에 들어 있는 주성분의 함량을 전임자보다 더 정확하게 분석해 내면 그걸 열심히 일한 것으로 평가받고자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이 다시 물으셨다. “회사에 요구하는 입사 조건이 있나?” 나는 “없습니다. 다만 대학원 석사 과정에 파트 타임으로 다녀야 하니까, 회사가 이를 방해만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당시 특채로 입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저런 입사 조건을 회사에 제시하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대학원을 다니기 위한 방편으로 회사 취직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조건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10여분 정도의 면접을 마치고 사장실 밖으로 나오니 모 부장님이 내게 흰 봉투를 전해주시는 것이었다. 열어보니 현찰 20만원이 들어 있었다. 당시 신입사원 초봉이 6만원이었으니까 20만원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깜짝 놀라 웬 돈이냐고 물었더니, ‘사장님이 장학금으로 주시는 것이니 그냥 받으라’는 것이었다.
사장님이 왜 거금을 주셨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엄하신 사장님 질문에 또박또박 말 대답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구질구질하게 입사 조건을 내걸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드셨던 것 같았다. 나중에 보니 사장님은 감히 말 대꾸를 하는 직원이 없을 정도로 회사 안에서 엄청나게 무서운 존재였다. 그것도 모르고, 아니 몰랐기 때문에 나는 사장님 말씀에 감히 말 대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식해서 득을 본 셈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 돈으로 흑백 티브이 한 대를 사서 티브이 가게로 하여금 시골에 있는 부모님 댁에 설치해 드리도록 하였다. 다행히 그 동네에는 2년 전부터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당시 부모님 댁에는 물론 그 동네에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티브이를 사 보낸다는 말씀을 사전에 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고없이 기사가 들이닥쳐 티브이를 달아드릴 때 부모님이 놀라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 기분이 짜릿하였다. 당시 그 동네에 티브이를 설치한 집은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온 2년 선배 집 하나 밖에 없었다. 우리 집이 첫 번째가 아니고 두 번째가 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막 군대를 제대한 장남이 턱하니 티브이를 설치해 드리는 만족감에 가슴이 벅찼다.
1980년, 일본 유학 중 아버지 회갑연 참석차 귀국해서 컬러 티브이로 바꿔드릴 때까지, 이 흑백 티브이는 부모님에 대한 내 효도의 증표이자 자부심이었다. 부모님 생전에 이와 같은 사드리는 기쁨을 더 많이 누리지 못한 아쉬움에 가슴이 아릿하다.
2019-07-0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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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76> 빛과 소금: 세상을 따듯하고, 맛있게까지 만들어야
내가 1966년에 졸업한 제물포 고등학교의 교훈은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었다. 모자에 붙이는 모표(帽標)도 세 개의 소금 결정 한 가운데에 고(高)자를 등대(燈臺) 모양으로 써서 만들었다(그림 참조).
1954년에 문을 연 이 학교는 이미 5회 졸업생이 서울대에 전체 수석으로 합격한 바 있고, 1966년에는 300명의 졸업생 중 80여명이 서울대에 합격하여 ‘학식’ 면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에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특별히 ‘양심’ 교육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이 학교는 국내 최초로 195년부터 무감독(無監督) 시험 제도를 도입하여 지금까지 실시하고 있다. 무감독 시험이란 교사가 시험지와 답안지를 나눠주고 교실 밖으로 나간 뒤, 시험 종료 10분 전에 돌아와 답안지를 회수하는 제도를 말한다.
첫 무감독 시험에서 전교생 569명 중 무려 53명이 60점 이하를 받아 낙제를 했는데, 이 때 길영희 교장 선생님은 “낙제생 여러분들이야말로 믿음직한 한국의 학도”라며 그들의 정직성을 칭찬했다고 한다.
이 제도는 한 때 대학 입시 경쟁이 과열되면서 내신 성적 형평성과 공정성 문제로 폐지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학생, 학부모, 교사 및 동문이 합심하여 문제점을 보완함으로써 오늘날까지 60년의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10여개 중고교가 이 제도를 따라 하고 있는데, 이에 제물포고 동창회에서는 이 무감독 시험 제도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하려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무감독 시험제와 함께 제물포고가 시행한 또 하나의 양심 교육은 도서관을 완전 개가식 (開架式)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개가식이란 도서관 이용자가 사서(司書)의 도움 없이 자유롭게 서가(書架)에 가서 보고 싶은 책을 꺼내 읽은 후 스스로 되꽂아 놓는 제도를 말한다.
더러 책이 분실되기도 했지만 학교측은 학생들의 양심 훈련을 위해 고집스럽게 이 제도를 지켰다. 이제 와 돌아보니 제물포고는 학식과 양심 (정직) 교육의 파라다이스였다.
양심 교육과 관련해서 떠 오르는 시(詩) 한편이 있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에 고 홍문화(洪文和) 교수님이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졸업 앨범에 써 주신 ‘소금에 붙이는 독백’이라는 격려시(激勵詩)이다.
<소금에 붙이는 독백>
Na의 양성(陽性)과 Cl의 음성(陰性)을
한 가슴에 간직하면서도
전설의 호수처럼 고요한 중성(中性)
환경의 온도야 높거나 말거나
한결같은 용해도를 지키는 절개(節槪).
너!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의 이마에 즐겨 결정(結晶)하는 심사(心事)여
아! 그 이름은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리오
땅에 버리어 밟힐 뿐이니….
세상에 들끓는
온갖 싱거움과 오탁(汚濁)을
도맡아 조미(調味)하고 방부(防腐)해 주려무나!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세 가지 이유로 감동한다. 우선은 중성, 용해도, 결정성, 방부력과 같은 소금의 특성을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승화시키신 교수님의 문학적 천재성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오탁을…방부해 주려무나!”하며 전쟁의 와중(渦中)에서도 졸업생들에게 세상의 방부제가 되라고 정직성을 당부하신 데에 감동한다.
그러나 가장 감동스러운 부분은 “세상의 온갖 싱거움을 도맡아 조미해 달라’고 당부하신 대목이다. 교수님은 제자들에게 소금의 방부 작용에 머물지 말고 소금의 조미 작용까지 배움으로써 ‘세상을 살 맛나는 세상으로 만드는’ 리더가 되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품격 높은 가르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빛과 소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온다. 나는 요즘 이 말씀을, 크리스찬은 1) 빛 (등대)처럼 세상을 밝힘으로 길 안내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따듯함’까지 전파해야 하며, 또 2) 소금처럼 세상을 썩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맛갈스럽게 조미’까지 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고 있다. 할렐루야.
2019-06-1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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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75> 섭섭증 극복하기
사람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참 효자이시네”, “늘 챙겨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제일이야”, “은혜 잊지 않고 삽니다”, “존경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또는 “믿음이 참 좋으시네요” 같은 소리를 들으면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누구나 ‘듣기 좋은 말’을 듣기 좋아한다. 또 좋은 사람이라는 인정(認定)을 받고 싶어 한다. 때로는 아부의 말이 분명한 데도 들으면 기분이 살짝 좋아진다. 나이가 들수록,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것이 없어질수록 더욱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생전의 우리 아버지는 건성으로 인사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해하셨다. 저만치서 고개만 까닥 하고 마는 인사를 제일 싫어하셨다. 아버지는 두 손을 붙잡고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공손하게 여쭈며 확실하게 인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셨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나 정신 활동이 저하되는 것을 본인 스스로 깨닫는다. 자존감(自尊感)이 낮아지고 누가 뭐래지 않아도 자격지심(自激之心)이 들어 주눅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대접하지 않고 무시한다고 삐치고 섭섭해 한다. 섭섭증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이 증상이 반복되면 마음의 상처가 된다. 상처는 누가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받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상처는 자가발전(自家發電)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상처의 자가발전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지혜였을까? 옛 어른들은 고개만 까딱이는 목례(目禮)대신 큰 절 인사 받기를 예절이라는 이름 하에 제도화 해 놓았었다.
어머니는 말년에 병원에 입원하시길 좋아하셨다. 입원이나 해야 친척들이 찾아 오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문안 온 친척들의 염려, 위로의 말을 들으시면 당신의 삶에 대한 인정을 받는 것 같으셨을 것이다. 찾아 온 사람들이 용돈을 쥐어드리면 더욱 좋아하셨다. 반면에 꼭 올 만한 사람이 찾아오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셨다. ‘아무개는 내가 베푼 것이 많으니까 꼭 찾아오겠지’ 하며 꼽고 계시기도 하였다.
나도 큰 병으로 입원해 보니, 친구들이 찾아 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친구들을 보면 ‘아, 내가 크게 잘못 살진 않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히 늙어서 앓아 누웠을 때 가족, 친지, 친구, 세상으로부터 잊혀 가는 과정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래서일까? 요양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 가장 좋아하는 방은, 전망이 좋거나 조용한 방이 아니라, 현관이 잘 보이는 방이라고 한다. 혹시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을 금방 발견할 수 있는 방이 가장 인기가 높다는 것이다.
왕년에 잘 나갔던 사람일수록 말년에 외로움, 섭섭증, 마음의 상처, 우울증 등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모든 부정적인 증상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령(聖靈)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오직 성령을 받아야만 남의 인정이나 이생의 자랑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으면 내가 남에게 인정을 덜 받아도 외로움, 섭섭증, 상처, 우울증으로 고생하지 않게 되고 성격이 온유해진다.
“오직 주의 이름만 이곳에 있습니다”라고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겸손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해질 수 없다. 최소한 ‘겸손한 사람’ 이라는 평판이라도 듣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기 때문이다.
최근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었다. 그분은 신학 대학원 학생 때에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른 학생에게 양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돈을 포기하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고자 하는 자신의 비열한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참으로 겸손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것이 겸손의 극치라고 한다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스스로 달리신 예수님 밖에 안 계시다 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성령을 받아 나에 대한 인정의 욕구, 위장된 겸손의 가식을 벗어버리고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하였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019-06-05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