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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8> ‘하였다’와 ‘되었다’
요즘 매스컴에서 우리말을 사용하는 습관 중 내 생각과 맞지 않아 듣거나 보기에 거북함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중 하나가 약춘 269 “자동사, 타동사, 수동태” (2019.3.13)에서 언급한 바 있는 대로 ‘되었다’ 라고 쓰는 것이 옳은 것 같은데 ‘하였다’라고 쓰는 경우이다. 매스컴에서 발견되는 그런 사례들을 모아 보았다. 먼저 약춘 269에서 소개했던 사례들을 다시 한번 적어 보면, 1) 영화가 개봉(開封)했다 (개봉되었다), 2) 영화가 상연(上演)했다 (상연되었다), 3) 경제 성장률이 둔화(鈍化)했다 (둔화되었다), 4) 이 달 말에 계약이 종료(終了) 한다 (종료된다), 5) 한반도가 분단(分斷)했다 (분단되었다), 6) 추모제가 엄수(嚴守? 嚴修? 둘 다 약간 거북함)하였다 (엄수되었다), 7) 애국가 봉창으로 시작하였다 (시작되었다), 감기가 시작했다 하면 판콜! (시작됐다), 8) 불신감이 확산(擴散)하고 있다 (확산되고 있다), 9) 한진그룹은 약사면허를 대여(貸與)하여 약국을 개설하였다 (대여받아, 또는 빌려서), 10) 갈등은 본격화(本格化)할 전망이다 (본격화될), 11) 흥행이 쭉 이어가길 바란다 (이어지길), 12) 평화는 군이 강할 때 지속(持續)한다 (지속된다), 13) 그 전집 중 1책이 전(傳)하지 않는다 (전해지지), 14) 그 사고로 세 명의 행인이 부상(負傷)하였다 (부상을 당했다, 부상을 입었다), 15) 화재가 발생(發生)하였다 (사전을 보니 ‘발생되었다’와 ‘발생하였다’가 둘 다 맞는 듯하다) 등이 있다. 약춘 269를 쓴 이후도 그런 사례들은 끊임없이 발견되었다. 그런 사례들을 추가해 보면 다음과 같다. 16) 약국, 처방전은 슬슬 회복(回復)하는데… 오히려 매출은… (회복되는데), 경제가 회복할 것으로 전망된다 (회복될), 17) 앙드레 김은 1977년 디자이너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授與)했으며 (수여 받았으며), 18) 추경이 제때에 통과(通過)하지 않으면... (통과되지), 19) 언제쯤이면 산업의 과학화가 실현(實現)할까? (실현될까), 20) 김 약사는 지난 6일 개막(開幕)한 학술대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개막된), 21) 시장이 포화(飽和)한 서울보다는 경기도의 시장이 더 커가는 추세다 (포화된, 커지는), 22) 중국산을 한국 등 다른 나라 제품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이 가속(加速)하는 분위기 (가속되는), 지반 공사로 원형훼손이 가속할 것이다 (가속될), 23) 상황이 갈수록 악화(惡化)하면서 현지에선 병상 부족 사태까지… (악화되면서). NASH는 지방간이 악화해 간세포 손상을 유발하는 질병이다 (악화되어). 24) 덕수궁 석조전 역시 피격(被擊)했지만 미술관 지하창고는 멀쩡했다 (피격됐지만), 25) 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발족(發足)하자 헌법 소송이 제기됐다(발족되자), 26) 폭우로 제방이 붕괴(崩壞)하면서… (붕괴되면서), 27) 최근 시리아 내전이 격화(激化)하면서 (격화되면서), 28) 디즈니 테마파크가 지난 달에 재개장(再開場)하였다 (재개장되었다). 이처럼 ‘되었다’라고 해야 할 경우에 ‘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매스컴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느낌이다. 하도 사례가 많아 문법이 바뀐 것을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또 내가 이런 현상을 걱정하는 것이 부질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신경 쓰지 마세요” 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내가 과민하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는 ‘요즘 기자들이 한자를 잘 몰라서 그래요’라며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내 말이 맞는다는 것이다. 과연 내 생각이 맞는 것인지 기회가 닿는 대로 한글 학자들에게 물어 봐야겠다. 아울러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를 바로 잡도록 노력해 달라고 부탁도 해 볼 생각이다.코로나19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이 와중에 한가한 이야기를 꺼내 송구스럽다.
2020-10-07 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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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7> 팩트체크 (1). 위액(胃液)의 pH
첨단과학의 시대에도 ‘잘못된 기초 지식’을 바탕 삼아 진행되고 있는 연구들이 적지 않다. 이는 진실의 탑을 모래 위에 세우려 드는 것처럼 결국은 헛수고가 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약제학 영역에서도 그런 ‘잘못된 기초 지식’이 몇 가지 눈에 띈다. 오늘은 ‘위액(胃液)은 늘 산성(酸性)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팩트 체크를 해 보고자 한다.사람이 정제(錠劑)를 복용하면 정제가 처음 만나는 환경이 위액이다. 먹은 약이 약효를 나타내려면 1) 정제 중에 들어 있는 약물(藥物, 약효 성분)이 일단 위액 속으로 용출(溶出), 즉 녹아 나온 후, 2) 위의 유문(幽門)을 통과해 소장(小腸)으로 내려가야 하고, 3) 거기에서 소장 표면을 덮고 있는 소장상피세포(小腸上皮細胞)를 통과해서 혈액 중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순차적인 과정을 흡수(吸收)라고 부르는데, 흡수의 첫 단계가 약물이 위액에서 용출되는 과정인 것이다. 약물이 위액에 빨리 용출되기 위해서는 정제 속에 들어 있는 약물이 위액에 잘 녹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염기성(鹽基性, 또는 알칼리성) 약물은 산성(酸性)인 물에 빨리 녹고 알칼리성 물에는 잘 녹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액의 산성도(酸性度, pH)는 정제를 복용하였을 때 함유된 약물이 용출(溶出)되는 속도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위액의 산성도(pH)는 약물의 용출속도, 즉 흡수 및 약효 발현 속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위액의 pH는 얼마일까? 모든 교과서는 ‘위액의 pH는 위에서 분비되는 염산(鹽酸) 때문에 1~2’라고 쓰고 있다. 내가 쓴 생물약제학 교과서에도 공복 시에는 1.2~1.8, 식후에는 3.5~5.0이라고 하였다. 약사 면허 시험에서도 1~2라고 답해야 정답으로 인정해 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에 의하면 이는 늘 옳은 것은 아니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위액의 pH는 인종(人種, race)과 나이(age)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미국인의 경우 무염산증(無鹽酸症, achlorhydria)인 사람이 20-40세는 12.5%, 40-60세는 26.2%, 60세 이상은 31.5%에 이른다. 나이가 들수록 위액의 pH가 산성이 아니라 중성 내지는 약알칼리성인 미국인이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일본인에게 이런 경향이 현저하였다. 무염산증 환자의 빈도가 각각의 연령대에서 52.5%, 81.6%, 90%에 이르는 것이다. 일본 젊은이의 절반 이상, 그리고 40대 이상의 대부분이 무염산증을 보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어떨까? 조사 결과 각 연령대에서 40.9%, 46.2%, 57%가 무염산증이었다. 일본인 보다는 적지만 미국인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특히 고령자가 무염산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기성 약물(정제)은 미국인에게는 일반적으로는 효과가 잘 (빨리, 강하게) 나타나겠지만 특히 고령의 일본 노인에서는 약효가 잘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위액이 산성(미국인)일 때는 약이 잘 (빨리, 많이) 녹지만 산이 없는 경우, 즉 액성이 중성이나 약알칼리성인 고령자의 위액 중에서는 염기성인 약물이 잘 안 녹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우리나라 사람들도, 일본 사람들보다는 덜 하지만, 역시 고령이 될수록 무염산증인 사람이 적지 않아 염기성 약물의 약효가 잘 안 나타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고령자에게 염기성 약물을 투여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세 나라의 정제에 대한 용출 시험이 다르게 규정되어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각 나라의 약전(藥典)을 보면 미국은 정제의 용출시험액으로 pH 1.2 액을, 우리나라는 pH 1.2, 4.0, 6.8 및 증류수를, 일본은 염기성 약물에 대해서는 pH 1.2, 3~5, 6.8 액 및 증류수를, 산성 약물에 대해서는 pH 1.2, 5.5~6.5, 6.7~7.5 및 증류수를 사용 하도록 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액의 pH는 언제나 1~2’라는 고정 관념을 갖고 신약개발이나 정제의 처방설계에 임해서는 안될 것이다.
2020-09-16 1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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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6> 경성약전의 독일어 교수 조희순
경성약학전문학교(1930~1946, 경성약전)의 역대 교수 총 14명 중 한국인 교수는 독일어의 조희순(曹喜淳), 생약학의 도봉섭(都逢涉)과 심학진(沈鶴鎭), 그리고 영어의 배상하(裵相河) 등 4명이었다. 조희순은 1930.4~1933.12, 도봉섭은 1930.5~1942.10, 심학진은 1934.10~1941.12에 교수로 근무한 기록이 있지만 배상하는 1935년경 교수로 재직한 사실 이외에는 자료가 없다. 이하 조희순 교수에 대한 김봉희의 논문 (조희순의 문학연구, 현대문학이론 연구 55집, 2013)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조희순은 1905년 3월 경남 김해에서 아버지 조정환과 어머니 송정희 사이에서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여동생은 조희복이다. 그의 아버지는 사범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경북의 청송, 경산, 영천 군수를 거쳐 ‘대정 생명보험주식회사’와 ‘동부위생조합장’등을 역임한 사업가이다.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부유한 환경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대구고등보통학교 4년을 다니다가 일본으로 가 야마구찌(山中)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독문과에 진학한 다음 23세가 되던 1929년에 졸업(문학사)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의 주소는 경성 혜화동이었다. 그는 최준영과 결혼(시기 불명)하여 아들 조관현을 낳았다.‘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이하 ‘100년사’)에 따르면 조희순은 1930년 4월에 한국인 최초의 경성약전 교수로 부임하여 1933년 12월까지 3년 8개월간 독일어를 가르쳤다. 그는 소박하면서 소탈한 성격을 지닌 애연가(愛煙家) 였다.그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이하 경성여의전) 강교사(講敎師)도 겸하였다. 그러나 1936년 2월에 발간된 ‘삼천리’ 제8권 2호에 그가 경성여자의학강습소의 교무주임이라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경성약전과 경성여의전을 그만 두고 언제부터인가 그 강습소에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학생들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기골이 장대한 조희순 교수를 ‘노서아 양복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00년사). 야마구찌 고등학교에 다니는 3년 동안 로맨스 많은 학교 생활을 보냈다고 술회 (동아일보 1930.10.7)할만큼 그는 낭만적인 문학도의 기질을 보였던 것 같다. 동경유학에서 돌아 온 그는 1929년 12월을 거쳐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신문과 잡지 매체를 통해 활발한 문단 활동을 하였다. 그는 원래 이름인 조희순(曹喜淳) 대신 하인리히 하이네의 이름을 따 하인리(河仁里) 또는 조희순(曹希醇)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작가비평은 항상 실증주의적 입장에 섰고, 문예비평은 대부분 독일 문단의 동향을 알려주었으며, 공연비평은 표현주의와 자연주의를 수용했다고 한다. 해외문학파 출신의 김진섭, 유치진 등과 1931년 7월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한 그는 한국 근대 초기에 독일 극문학을 한국에 소개하여 다양한 신극(新劇)운동에 힘썼던 평론가 중의 한 명이었다.그의 문단활동은 1936년 7월에 멈춰 있다. 1939년 ‘문예월간’ 문인 소식란에 ‘공생약업(共生藥業) 주식회사’의 이사라고 나와 있는데, 그 회사 설립에 대주주로 동참하고 감사이사를 겸임한 것으로 보인다. 광복 전 ‘하인리 실업’이라는 회사도 운영했는데 무슨 사업을 하는 회사인지는 불명이다. 1947년 이승만의 도미외교에 100만원이라는 거금의 후원금을 기부하였다. 1952년 12월 20일 ‘조선전업(현 한국전력)’의 부사장 자격으로 한미(韓美) 전력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후 ‘조선전업’에서 이름을 바꾼 남선전기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는데 그 후의 행적은 불명이다.
2020-09-02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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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5> 사과, 배, 복숭아
지금의 내 생각, 내 주장이 후세에도 옳을지 확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옛날에 경부 고속도를 만들 때 왜 막대한 돈을 들여 쓸데없는 고속도로를 만드냐고 강력히 반대한 정치 지도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 올해로 도입 20년을 맞은 의약분업도 2000년 당시에는 반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경부 고속도로와 의약분업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한 때의 주장이나 신념이 나중에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간이 시공(時空)을 뛰어 넘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기란 자고(自古)로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워낙 인간의 지식이 제한적인데다가, 코로나 19와 같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 사태를 예측할 능력이 없을뿐더러, 그 나마의 주장이나 신념도 자신의 고정 관념이나 선입관에 의해 왜곡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섣부른 주장이나 정책은 자칫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등 역사에 큰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떤 주장을 펴기에 앞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으며, 또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또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다 바보, 미친 사람 또는 나쁜 사람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그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더욱 안 된다. 반대 의견도 한번 더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과도 조화롭게 공존할 생각을 해야 한다. 어차피 나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힘있는 사람이나 단체일수록 정책을 수립하거나 주장을 하기에 앞서 신중, 겸손한 태도를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 있다.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도 많다. 이에 대해 고 하용조 목사님은 ‘사과, 배, 복숭아가 다 한 바구니에 들어 있는 과일’이라고 하였다. 내가 속한 교단만 정통이라며 다른 교단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일 것이다. 사과와 배와 복숭아가 서로 나만 맛있는 과일이라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우리 말에 ‘우리’라는 말이 있다. 전에 ‘우리라는 우리’라는 글(약창춘추 99, 2012.4.11)을 쓴 바 있지만, ‘우리’라는 말에는 영어로 ‘we’라는 의미도 있고, 또 ‘돼지우리’의 용례처럼 우리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울타리를 친 공간 (cage)이라는 의미도 있다. 우리(we)는 같은 우리(cage)에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cage)는 넓을수록 살기에 좋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우리의 cage를 스스로 좁히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 이마에 바보, 미친 사람 또는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어 우리의 cage밖으로 내 쫓는 것이 바로 그런 행위가 아닌가 한다. 또 지나친 갑(甲)질도 을(乙)들을 cage밖으로 내모는 행위일 것이다. 이렇게 나가면 cage 안에 있는 남아 있는 우리(we)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울타리 밖으로 쫓겨난 군중들의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we)가 적진(敵陣) 속의 포로처럼 역(逆)으로 낙인 찍히고 을(乙)의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른다.이런 경고는 에멀젼(emulsion, 乳濁液)의 전상(轉相, phase transition)이라는 현상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수중유 (水中油, o/w, 물 중에 작은 기름방울이 분산되어 있는 상태)형 에멀젼의 외상(外相)에 기름을 조금씩 추가해 나가면 어느 순간 에멀젼의 내외상이 뒤집혀(轉相) 유중수(油中水, w/o)형 에멀젼이 된다. 즉 밖(외상)에 있던 물이 내상(內相)에 갇혀 고립되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는 것처럼, 완강하게 주장하기에 앞서 남의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들어보자. 그리고 적극적으로 포용함으로써 남과 내가 하나 되는 노력을 해보자. 우리(cage)를 넓혀 살기 좋은 우리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자. 사과와 배, 복숭아 모두 다 맛있는 과일 아닌가! 서로 ‘있을 때’ 잘하자.
2020-08-19 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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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4> 언택트 시대의 동창회
나는 금년 2월, 서울대약대 동창회 상임위원회에서 2년 임기의 동창회장직 제안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지난 4년간 28회 졸업생인 C회장님이 회를 잘 이끌어 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29회 이후의 후배가 회장을 맡는 것이 순리(順理)였다. 그런데 다들 고사하는 바람에 어찌어찌 하다가 오히려 3년이나 선배(25회)인 내게 불똥(?)이 튄 것이다. 아무 걱정(?) 없이 동창회에 참석해 온 나로서는 불의(不意)의 일격(一擊)을 당한 느낌이었다.물론 더 나이 먹기 전에 동창회를 위해 미력을 보태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임자보다 선배로서, 또 모교 교수 출신으로서 회장을 맡는 것이 아무래도 쑥스럽고 거북스러웠다. 더구나 여기저기가 몸이 불편한 나에게는 아무래도 무리 같았다. 그래서 몇 번 고사(固辭) 하였지만 결국은 피할 수가 없었다.마음을 정하였지만 정식으로 회장에 취임하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회칙에 따르자면 회장은 반드시 2월에 열게 되어 있는 정기총회에서 선출해야 한다. 그러나 마침 시작된 코로나 19의 유행 때문에 전국적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어서 회원들이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대면(對面) 총회를 열 수 없었다. 부득이 코로나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정기 총회를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 사태는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언제 총회를 열 수 있을지 전혀 기약(期約)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회무 공백을 피하기 위하여 부득이 3월 1일부터 회장 직무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내가 정식으로 회장으로 처신해야 되는지 여부를 잘 알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6월 5일에 열린 2020년도 제1차 상임위원회는 정기 총회를 서면(書面)총회로 대체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이는 제약바이오협회 등 여러 단체에서 이미 서면총회로 대면총회를 대체하고 있는 추세를 따른 것이었다. 사실 서면총회가 법적으로 대면총회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사상 초유의 비상사태에 달리 뾰족한 대안도 없었다. 어떤 이사는 서면총회 대신 온라인 총회를 열자고 제안하였지만 온라인이 오히려 더 번거로울 수도 있다는 의견에 따라 최종적으로 서면총회를 선택하였다. 서면 총회를 준비해 보니 종래의 대면 총회를 준비하는 것보다 오히려 힘이 더 들었다. 주소가 있는 수천 명(2748명)의 동문들께 회의 자료 (결산 및 감사보고, 사업계획 및 예산안, 회장 등 임원개선안)를 프린트 하여 우송하는 일, 각 동기회장님들을 비롯한 동문들께 찬반 의견을 제시해 주십사 휴대폰 문자를 보내는 일, 동문들의 회신을 정리하는 일, 서면총회 진행 상황 및 결과에 대하여 감사위원회의 감사를 받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면총회의 결과를 다시 각 동문님들께 우편으로 알려드리는 일 등이 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정식 회장도 아닌 사람이 이 과정을 진행하려니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하나에 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25대 동창회가 출범하였으나 정작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동창회는 ‘동창 간의 만남’을 통한 친목 도모를 주된 활동 목표로 삼아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19의 유행으로 야기된 소위 언택트(untact, 사람들이 콘택트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말) 시대에는 그 ‘만남’ 자체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언택트가 뉴노멀(new normal)이 된 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과연 무슨 일을 해야 좋을까가 동창회의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나는 우선 동창회 홈페이지의 구축, 동창회보의 내실화 등 온라인 및 오프라인 소통의 활성화를 당면 과제로 삼을까 한다. 아울러 저서 등 동문들의 각종 업적을 수집 정리 및 전시하는 일도 구상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걱정되는 바가 하나 둘이 아니다. 하루 바삐 사태가 종식되기를 기원하며 이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는 바이다.
2020-08-05 0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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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3> 빛과 소금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고 산 위에 모여든 무리에게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鹽)이 되고, 세상을 밝히는 빛(光)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산상수훈, 마 5:13-16). 내가 졸업한 제물포 고등학교의 모표(帽標)는 세 개의 소금의 결정 위에 등대(燈臺)모양의 고(高)자를 얹은 형상이었다. 이에 따라 교훈도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었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빛과 소금에 깊은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다.1. 먼저 빛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예수님은 “너희도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마 5:16)고 하셨다. 빛의 첫 번째 특징은 당연히 밝음이다. 햇빛이 대표적이다. 햇빛은 물론, 촛불이나 등잔불까지, 크고 작은 모든 빛은 어둠을 몰아 냄으로써 사물을 식별할 수 있게 해 준다. 빛이 없으면 실족(失足)한다. 폭풍우 치는 캄캄한 바다에서 배에게 비추는 한 줄기 등대 빛은 그야말로 생명 줄이다. 빛의 또 다른 특징은 따듯함이다. 한 겨울 햇빛은 햇볕, 곧 양지(陽地)를 만들어 사람이나 짐승들을 모여들게 만든다. 그래서 상대방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정책을 햇볕정책이라고 부른다. 햇빛은 젖은 것을 말려 곰팡이 등을 죽이는 방부, 살균 작용도 한다. 농수산물이나 옷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햇빛에 잘 말려야 한다. 햇빛은 치료 작용도 한다. 내가 1994년 개복 수술을 받은 후 2년 가까이 복부에 장루(腸瘻)를 차고 지낼 때,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 부위를 햇빛에 쪼이곤 했었다. 그러면 장루의 색갈이 신속하게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한 발 더 나가면 햇빛은 생명이다. 요즘 우리 집 옥상에 심은 채소가 무럭무럭 자란다. 햇볕이 잘 들기 때문이다. 햇볕이 안 드는 지하실 같은 데에선 아무리 물을 잘 주어도 식물이 죽는다. 또한 일광욕은 우리 몸에 필요한 비타민 D를 생합성 해 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햇빛은 식물이나 동물에게 공히 생명이다. 햇빛은 표백 작용도 한다. 얼룩이 진 흰 옷을 빨아서 그늘에서 말리면 얼룩이 잘 안 없어진다. 그러나 햇볕에 널어 놓으면 신기하게도 말끔하게 없어진다. 빛은 얼룩뿐 아니라 사람의 죄를 들어냄으로써 죄를 없애준다. 죄는 대개 어둔 밤에 짓는다. 그래서 죄는 어둠의 자식이다. 밝은 곳에서는 사람이 죄를 잘 짓지 않는다.밝은 새벽부터 술 마시고 죄짓는 사람은 없다. 밤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어두운 곳에 밝은 조명을 해 놓으면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없어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교회 기도는 밝은 새벽에 시작되고 술집은 어둔 저녁에 문을 연다. 지금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몸을 돌려 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다. 2. 다음으로 소금에 대해 생각해 본다.소금의 대표적인 작용은 방부(防腐)작용이다. 소금은 음식을 썩지 않게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마 5:13).”처럼 성경은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의 방부 역할을 하라고 가르친다. 소금의 미덕은 겸손과 절제에도 있어 보인다. 소금은 배추의 숨을 죽여 부드럽게(겸손하게) 만들어 주지만, 과(過)하면 고혈압을 유발하기 때문에 최소량만 사용하여야 한다. 요즘 내가 새삼 주목하는 것은 소금의 조미제(調味劑)로서의 역할이다. 음식이 싱거우면 맛이 없다. 적당량의 소금을 넣어야 비로소 음식 맛이 제대로 난다. 그런 의미에서 소금은 가장 기본적인 조미제이다. 고 홍문화 교수님은 1952년 1월, 피난지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세상의 소금이니…. 세상에 들끓는 온갖 싱거움과 오탁(汚濁)을 도맡아 조미(調味)하고 방부하여 주려무나!” (축하시, ‘소금에 붙이는 독백’ 중에서). 아! 전쟁 중에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재주껏 살아 남으라’가 아니라 ‘세상을 썩지 않게, 세상을 살 맛 나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차원 높은 격려를 하신 고매한 가르치심에 가슴이 울린다. 빛과 소금은 크리스찬의 영원한 사명일 것이다.
2020-07-15 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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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2> 객(客)과 빈(賓)
종가(宗家)에서는 종종 객과 빈을 달리 대접한다고 한다. 오래 전 경주 김씨 17대 종손(宗孫)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객이나 빈은 둘 다 종가를 찾아 온 손님이지만, 객은 과객(過客)의 용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주인의 사전(事前) 초청을 받지 않고 지나가다 방문한 나그네 급 손님을 말한다.반면에 빈은 주인의 초청을 받고 온 손님을 말한다. 손님이 종가에 들어서면 종부(宗婦)는 객에게는 식혜를, 빈에게는 수정과(水正果)를 대접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식혜는 손님을 맞는 순간 항아리에서 한 그릇 떠 내 오면 그만이지만, 수정과는 손님이 오기 전에 미리 곶감을 한 두 개 집어 넣고 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떠 와야 하기 때문이란다. 아무리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첫번째 사명으로 삼는 종가라 하더라도 갑자기 들이닥친 객에게는 식혜를 떠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혹시 종가를 방문할 경우, 식혜가 나오나 수정과가 나오나를 보면 내가 객인지 빈인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식혜가 나온다면 ‘아! 나는 그저 객이구나’ 깨닫고 알아서 처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요즘도 초청 받은 손님인 빈은 각종 행사장에서 내빈(來賓), 내빈(內賓) 또는 외빈(外賓)으로 불리며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다. 접수 테이블의 안내인들이 가장 큰 임무는 빈을 정중히 안내하는 일이다. 빈을 객으로 오인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눈치 빠르게 빈을 식별하여 꽃 장식을 윗 주머니에 달아 드린 다음 빈 전용의 지정석으로 안내해야 한다.그러나 객에게는 대개 꽃을 달아주지 않으며 단 아래(壇下)있는 일반석에 알아서 앉으라는 안내(?)를 한다. 요컨대 객은 옛날에는 종가에서 수정과를 못 얻어 먹었고, 오늘날에는 행사장에서 빈보다 한 단계 낮은 예우를 받고 있다. 30여년전인 1987년, 1년간 미국 퍼듀대학에 체류했었는데 그 때 내 신분이 영어로 visiting professor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visiting professor를 객원교수(客員敎授)라고 부르고 있었다. 고위층 인사가 일정 기간 미국 대학에 가는 경우 ‘객원교수로 갔다’라는 기사가 언론에 나곤 하였다. ‘객원’ 교수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상대 기관이 대단한 손님으로 모셔갔다는 이미지가 풍긴다. 그러나 내 경우는 퍼듀대학이 나를 대단하게 여겨 모셔 간 것까지는 아니기 때문에 나를 ‘객원교수’라고 표현하는 것은 좀 건방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 신분을 영어 표현대로 방문교수(訪問敎授)라고 표기하였다. 그러나 훗날 종손인 친구로부터 빈과 객에 대해 배우고 나니 ‘객원교수’가 방문교수 못지 않게 매우 적절한 번역어임을 깨닫게 되었다. visiting professor가 상대기관으로부터 정중하게 초청을 받은 빈 급 교수가 아니라, ‘뭐 오시려면 오세요’ 정도의 방문 허락을 받은 객 급 교수를 말하는 용어라면 말이다. 말이 난 김에 교환교수(交換敎授)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 보자. 한 때 교수가 미국에 가면 ‘교환교수로 간다’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다. 교환교수란 문자 그대로 내가 그 대학으로 가는 대신 그 대학에서도 누군가가 우리 대학으로 오는 교환 프로그램(exchange program)에 따라 오고 간 양 쪽 교수를 지칭해야 옳을 것이다.그런데 실은 객원교수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교환교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뭔가 좀 있어 보이려는 허영심의 산물은 아니었을까? 요즘은 그런 용어에 미련을 두는 교수도 좀 줄어든 것 같다. 교수들의 내용이 충실해짐에 따라 이름에 대한 허영이 줄어든 것 같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사족 하나. 어떤 직함 앞에 명예, 겸임, 객원, 초빙 같은 군더더기(?) 수식어가 붙으면, 오히려 수식어가 없는 직함보다 실속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명예’교수가 되고 나서 깨닫는 사실이다. 그나저나 깨끗이 끝나지 않는 코로나 사태가 걱정이다.
2020-07-01 0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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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1> 홍문화 교수님의 미국 유학일기-3
1955년 9월 20일(화) 맑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반측(轉傳反側)하다가 새벽에 일어나 비행장으로 나오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Box Lunch를 사 들고 TWA 를 타고 8시 30분 Chicago로 향발(向發). 도중에 Kansas에 착륙, 잠시 쉬고 다시 Chicago로 향발. 도중에 Swiss 출신이라는 아름다운 여자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무료(無聊)함을 풀다. Chicago에서 저녁을 먹고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Lafayette로 향발. Chicago의 야경 조감(鳥瞰)은 이재장재(異哉壯哉, 이색적이고 웅장함, 필자 주)! Lafayette에 착륙하니 그야말로 한적한 가운데 Prof. Christian이라는 분이 출영 나와 주어서 고마웠다. Purdue Memorial Union Club에서 1박. 불면증이 심해서 고민스럽다. 9월 21일(수) 흐림. 저녁에 비 조금 옴. 약대에 나가 학장 Jankins에게 인사를 하고 몇 사람 교수들을 만나다. 등록 완료. 화학과의 최상섭, 최규원, 김명수 씨 등을 만나다. (후략) 9월 22일(목) 비. 아침 9시에 Prof. Christian의 Radioisotope Technique 강의를 듣다. Dr. Lee와 회담. Karson Master군의 안내로 Prof. Lasco를 만나 방 문제를 의논함. (후략) 9월 23일(금) 흐림. 최상섭 씨 차로 짐을 YMCA로 옮기다. 오늘 Hospital Pharmacy 실습을 하였는데 젊은 이국 남녀 학생과 어울리니 재미있다. 수강 신청 변경을 하다. 9월 24일(토) 맑음. 오전 중에 강의를 듣고 오후부터는 Stadium에서 Pacific College 와의 축구시합을 구경하다. 이와 동시에 약 770명의 Indiana 고교 브라스 밴드(brass band)의 취주(吹奏)를 보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다채롭다는 문자 그대로다. 이렇게도 생을 즐기는 민족이 지구상에 있었던가. 9월 25일(일) 생략9월 26일(월) 맑음. 참 여기 가을도 하늘 높고 공기 맑고 추석 생각이 저절로 나는 가을이로구나. 애 우는 소리를 길 위에서 들으니 영어만 듣던 판에 신기하다. 종일 학교에서 지내다. Particle Size 측정에 관해 문헌 조사를 하다. 9월 27일(화) 비 온 뒤 흐림. 여기 일기는 말짱하다가도 급변해서 비가 온다. (중략) 오후 4시부터는 대학원생 일동이 모여 학장 지도하에 Seminar를 하는데 오늘은 첫날이라 학장이 학생 및 교직원 일동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화학과 도서실에서 한나절을 지냈는데 일본 저널이 수 종 있는 데 놀랐다. 아이젠하와 대통령이 심장병으로 와병하였다고 한다. 9월 28일(수) 맑음. 말은 빨리 되지 않고 당연히 초조하다. 이것이 소위 Home Sick 의 전조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점심을 빼고 도서실에 틀어박혀 Particle Size에 관한 조사를 하노라니 맥이 난다. Prof. Belcastro와 Special Problem 문제를 상의하다. 차차 사람들의 얼굴이 낯익어 간다. 제발 말도 그렇게 되기를. 저녁 오는 길에 식료품점에 들러 포도를 25전어치 사 가지고 와서 맛을 보니 한국 것과는 전연 딴판의 맛을 가지고 있다. (후략) 9월 29일 흐림, 비 조금. 조반도 못 먹고 첫 시간에 나갔다가 10시 반에야 먹었다. 오늘 Instrumentation 실험은 Viscosity 측정인데 Calibration Standard인 Glycerol을 혼합하지 않은 채로 주어서 후에 알고 보니 헛일을 한 것이 되어 기분이 나쁘다. (후략) 9월 30일 맑음. AKF에서 송금이 오지 않아 답답하기에 Prof. Tichenor를 찾아 상의했더니 아직 안 왔다고 하며 35불을 Emergency Loan으로 얻어 주다. 오후 실습에는 세균실험도 못해 본 것 같은 애들과 같이 하려니 답답하였다. (후략)10월 15일. (전략) 저녁 때 임영신 총장(중앙대)에게 학비 부족 호소 편지를 쓰다. 이싱으로 홍교수님의 65년 전 유학일기 소개를 마친다.
2020-06-17 1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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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0> 홍문화 교수님의 미국 유학일기-2
1955년 9월 18일(일) 맑음. 4시 반에 Wake Island에 도착. 태평양전쟁 시의 격전(激戰)을 머리에 그리면서 훈훈한 대기 속에 비를 맞으며 대합실까지 나오니, 이제야 미지(未知)의 세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감이 절실하다. 1시간 후 다시 출발. 도중에 International Date Line 덕으로 또다시 9월 18일(일요일)의 세계를 날면서 오후 4시 30분 Honolulu 착. 표준시간이 자꾸 변경되는 탓인지 시간의 감각이 혼돈되려고 한다. 나의 바른 옆에는 Boston으로 간다는 광동인(廣東人) 부자(父子)가 타고, 왼쪽에는 대만 청년 2인이 미시간 대학으로 간다고 한다. 광동인과는 필담(筆談)을, 대만 청년들과는 일어, 영어로 담소하다. Honolulu 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을 완료. 다시 한 번 신체검사에 check 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무사통과. 통과하고 나니 마음이 풀린 탓인지 오히려 가슴이 설렌다. Sky Room에서 Refreshments 로 특제 50센트짜리 아이스크림을 주문해 먹었더니 참 진미(珍味)다.공항 전체가 싱싱한 화향(花香)에 싸이고 빨갛게 불타는 저녁노을에 비행장 주변의 신호등은 청색으로 무수히 빛나고 화환(花環)을 목에 건 청년 남녀가 왕래할 때마다 무한히 향기를 풍긴다. 아름다운 하와이. 최씨와 헤어져서 나만 7시 30분에 다시 기상(機上)에 몸을 싣고 San Francisco로 향하다. 나의 꿈이여, 나의 희망이여. 암야(暗夜)를 달리는 광시 (光矢, 빛의 화살, 필자 주)와도 같이 우리 비행기는 일직선으로 태평양을 횡단하고 있는 것이다. 9월 19일(월)아침 7시 30분 San Francisco 공항 착. Limousine 차로 약 40분 걸려 시내로 들어오다. 연도(沿道)의 무수한 자동차. 그림 같은 건물들을 바라보매 이제야 참말 미국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공항 대합실 자동 촬영기에서 사진을 찍다. 20불로 2분간에 저절로 찍혀 나오니 신통하다.Chicago행을 TWA Line으로 Reserve하다. 시내 NBC Building, Airline Terminal에서 차를 내려 우선 2, 3 약국에 들러 California 대학 약학대학을 물었더니 얼른 모르고 전화번호 책을 찾는다, 전화를 건다 하는 것을 보니 약대 출신이 아니었던가. California 대학의 Medical Centre는 16층의 웅장한 건물이며 약대는 그 중 7, 8, 9, 10층을 점유하고 있다. Medical Centre는 의대, 치대, 약대, 간호학교로 구성되어 있다. Pharmacy와 Biochemistry의 Professor인 Dr. Eiler와 Pharma. Chem.의 Assit. Prof.인 Lee(이관화), 두 사람의 안내로 약대를 샅샅이 구경하고 교수 식당에서 회식을 하다. 식당에서 Pathology 교수인 한국인 Professor 문(文)씨를 소개받다. 약대 시설의 완비(完備)는 언어를 절(絶)하며, 특히 물리화학적 시설이 완전함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 연구에 붙어 앉아 있는 사람이 별반 보이지 않는 것은 웬일인가. 오후 2시 30분 학장 Daniel 박사를 회견하고 학교를 하직(下直)하고 시내로 돌아와 만보(慢步)로 시내 구경을 하다. 제반 행인이 그리 많지 않음이 이상스럽다. Wild Rogers Hotel 5층에 여장(旅裝)을 풀고 다시 시내로 나와 저녁을 먹고 영화 구경을 하고 9시 반경에 돌아오다. 5전짜리를 집어넣으면 음악이 나오는 기계가 있기에 흥미 삼아 장난하고, 영화관에서는 막간(幕間)에 경품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San Francisco의 야경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며 5색 다채롭다. 중심가의 사람 구경도 굉장하며 풍부한 상품들 모두 낯선 이국(異國)의 유학자의 시선을 끌게 한다. 길을 잃고 한참 헤매다가 돌아와 홀로 침상(寢床)에 누우니 미 대륙 제1야(夜)가 고달프기도 하고 쓸쓸도 하다.
2020-06-03 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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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9> 홍문화 교수님의 미국 유학일기-1
필자는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2020, 서울대 약학역사관)’란 이름의 평전(評傳)을 편찬하면서 홍 교수님의 막내 따님으로부터 손바닥 크기의 수첩 한 권을 기증 받았다. 홍 교수님(당시 만 39세)이 1955년 9월 17일 미국 퍼듀대학교로 유학을 가시면서 적은 메모였다.유학은 겸직하고 있던 중앙대의 주선 및 후원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수첩에는 여의도에서 출발하여 비행기를 다섯 번이나 갈아타며 퍼듀에 도착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여러모로 감동적인 그 내용을 세 번에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1955년 9월 17일(토요일) 새벽에 눈을 뜨니 비바람이 요란하다. 하필 출발 날이 이 모양이어서 못 떠나게 될 것을 자못 근심하면서, 그래도 기상하여 행장(行裝)을 차리노라니 비도 차츰 부슬부슬해지고 환송객 수삼(數三) 인이 찾아오니 이제는 참말 가게 되는가 보다 실감을 가지다.9시 30분 중앙대 차로 우선 AKF에 들러 Dr. & Mrs. Frasers 부처(夫妻)에게 하직을 고하면서 금으로 된 넥타이핀과 산법통종(算法統宗) 한 질을 기념으로 증정하니 나도 기분이 가뜬하고 받는 이도 기분이 좋아하신다. 놀란 것은 고(高)박사(고주석 중대 약대 학장, 필자 주)가 돌연 Visa 관계로 출국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이다.아무튼 나만이라도 떠나야 할 것이므로 반도호텔로 오니 수십 명의 약학 친구 선배 후배들이 전송을 나와서 맞아 준다. 금지환(금반지)을 오른손 약지(藥指)에 꼈더니 악수할 때마 다 옆의 새끼손가락이 압박되어 심히 아파 나중에는 물집이 생기려고 하므로 부득불 좀 헐겁긴 하지만 왼손에 갈아 끼우지 않을 수 없었다.CAT 회사 버스로 비행장 (여의도)으로 나오는 도중에 입국 관계 서류를 집에다 놓고 나온 것이 생각나 대경실색. 삼각지에서 차를 내려 마침 뒤 따라오는 중앙대 짚차를 타고 흑석동으로 왔다가 부랴부랴 비행장으로 나오다. 몽매(夢寐)에 그리던 미국이다. 기쁜 출발이긴 하나 막상 노부모님을 비롯하여 가족 일동, 친지 여러분과 작별하려 하니 기분이 그리 좋지 못하다. 오후 1시 30분 지나 이륙. 다행히 비도 멎고 운해(雲海) 위를 두둥실 떠서 여정 만리의 길을 떠나니 유쾌한 마음과 감상적인 기분이 교대로 일어남을 금할 수 없다.기상(機上)에서 편지를 두 장, 아버님과 주안(장남) 모(母)에게 내다. 처음 타 보는 비행기라 두고두고 신기해야 할 텐데, 타고 몇 분 지나니 벌써 상식이 되어 버리니 이 어인 일인고. 오후 4시 30분경 동경 착. 동경 국제공항은 깨끗하고 아담하다. 출영(出迎) 나온 김영은(金泳垠, 당시 동경대학 유학 중, 후에 서울대 약대 교수, 필자 주) 씨, 노(盧)씨와 더불어 기내에서 서로 알게 된 학생을 데리고 노씨 댁에 일박하며 여로(旅勞)를 풀고 밤 가는 줄도 모르고 김영은 선생과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 꽃을 피우다. 피곤은 하면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으니 과로의 탓뿐일까? 9월 18일(일)흐리고 저녁때는 약간 빗방울이 뿌리다. 김영은씨, 나, 학생 3인은 동경대학을 비롯하여 동경 시내를 대략 일주하고 “아버지는 사람이 좋아”라는 영화도 구경하고 책도 몇 권 구하노라니 어느덧 시간이 되어 Station Hotel에서 부랴부랴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고 하네다(羽田) 비행장으로 나오다. Station Hotel에서 생후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가부끼(歌舞技)와 야구의 방송이 있었다. 비행장에서 다시 P.A.A. 기를 갈아타는데 Baggage가 정량 초과로 136불이나 운임이 부과된 데는 눈깔이 나올 지경이고 밤새도록 기분이 좋지 않다. 물건 자체의 가치도 136불은 못 될 텐데 책이 들어 있는 손가방은 맡기지 말고 들고 오를 것을 등등 우치(愚痴)가 나오나 사실 초과(超過)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돈이 사람의 마음을 이다지도 크게 지배할 줄은 여정에 오르기 전에는 그다지 몰랐던 것이다. 비행기 여행은 딴 것이 아니라 기선 (機船) 항해와 흡사하며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두통이 나다.
2020-05-20 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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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8> 우울증 - 네 자신을 알려 들지 마라
아주 오래 전에 TV에서 본 이야기이다. 평생 우울증 환자를 치료해 온 어떤 명의(名醫)가 노년에 상처(喪妻)를 하고 우울증에 빠졌단다. 그는 자신이 우울증 환자에게 처방해 왔던 약을 먹으며 정신력으로 극복해 보려고 노력 하였다. 그러나 다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내가 잘 알지도 못하고 환자들을 치료해 왔구나” 깨달았다고 한다. 명의도 자기가 경험해 보지 않은 질병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할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나도 십오여 년 전에 우울증으로 몇 해 동안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깨달은 것은 우울증은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혈압을 정신력으로 낮출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람들은 ‘집에만 박혀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친구들도 만나고 하면 점차 좋아지지 않겠나’ 생각한다.이는 우울증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밖으로 나가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병이 바로 우울증이기 때문이다. 내 담당 의사도 나보고 서울대학교 교내의 명상 겸 체조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라고 하였다. 한 번 가 봤더니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그 프로그램이 나에게는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그래서 바로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정신력으로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증상이 아주 가벼운 경우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산보를 하거나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고민거리가 생기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급격히 증상이 심해진다. 그러지 않도록 주위 사람들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내가 아는 한 우울증 환자는 틈만 나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습관을 갖고 있다. 과거를 보면 뭐하고 살았나 싶고,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미래에도 이는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이렇게 살아 뭐하나 싶고, 매사에 의욕이 없어진다. 심하면 극단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나쁜 것은 “네 자신을 알라”고 조언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깊이 성찰함으로써 ‘자신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철학적으로 더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생 자체에 회의를 품고 힘들게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네 자신을 알려고 노력하라’는 말보다 더 가혹한 말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제 분수를 모르고, 마치 영원히 살 사람처럼 일에 몰입(沒入)해서 사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네 자신을 알려 들지 말고 되도록 시선을 밖으로 돌려라’. 이것이 내가 깨달은 우울증의 예방 및 치료법의 하나이다. 내 경우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방법은 손주들과 지내는 것이었다. 나는 마침 아들네 아파트 위 층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아침 저녁으로 손녀들과 봐줄 수 있었다. 그러면 구태여 내 자신을 돌아 보지 않고도 하루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손주들을 보면 저절로 사랑이 샘솟는데, 이 사랑이 우울증에 대한 백신 겸 치료제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럭저럭 한 5년이 지나자 나도 모르게 우울중의 검은 구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을 때 또 하나 괴로웠던 것은 식욕이 없어지는 증상이었다. 먹어야 사니까 나름 열심히 먹는다고 먹는데, 먹다가 밥그릇을 쳐다보면 아직도 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휴, 언제 이걸 다 먹나’ 한숨을 쉴 때가 많았다. 우울증이 회복되자 식욕은 덩달아 회복되었다. 요즘 이런 저런 이유로 혼자 사는 사람이 많다. 혼자 사는 것이 외롭다면 우울증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손주를 비롯한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최선이지만, 문제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 다시 손주들과 떨어져 살게 된 나는 되도록 뉴스를 멀리하려고 노력한다. 뉴스에 우울증 바이러스가 딸려 올까 두려워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끝으로 이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에 불과함을 밝혀 둔다.
2020-05-06 1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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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7> 故 홍문화 교수님의 격려사
지난 3월 말,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란 책이 서울대 약학역사관에서 발간되었다. 이를 기념할 겸, 그리고 코로나 사태로 졸업식도 제대로 못하고 이번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배들을 격려하고자, 1982년 홍문화 교수님 (당시 66세)이 서울대 약대의 교지 『약원』에 써 주신 글 (“약대를 졸업하는 후배에게”)을 소개한다. 시대를 초월한 고매한 가르침에 감동을 금할 수 없다.두려운 존재새 생명이 움트는 봄과 더불어 우리 약학계에 새로운 후배들이 많이 배출된 것을 충심으로 환영하며, 여러분들의 앞날에 무한한 광명과 성공이 있기를 축복하는 바이다. (중략) 우리의 약학계나 나라 전체의 미래가 여러분 두 어깨에 걸려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들이야말로 두려운 존재라고 아니할 수 없다.그래서 옛 사람들이 ‘후생(後生)은 가외(可畏)라’라는 표현, 또는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는 표현을 써서 후배들에게 모든 소망을 걸었던 것이다. (중략) 부디 바라건대, 나이 먹은 기성세대들이 청순한 후배 여러분들에게 기대를 거는 이 간절한 마음을 음미하여 주기 바란다. 대망(大望)에 벅찬 친애하는 후배들이여! 부디 두려운 존재가 되라.일이관지(一以貫之)“그 사람의 행위가 그의 지식보다도 위대할 때 그 지식은 유익하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여러분들이 그 동안 대학에서 배우고 연구한 지식이 많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식을 사회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 여러분들은 약학자(藥學者)이며, 약학이 사회에서 무엇으로 봉사하는 학문인가를 분명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목표나 목적의식 없이 길을 걷는 사람에게 도달이란 있을 수 없다. (중략).위대한 계획이란 장기계획(長期計劃)이다. 당장 눈앞의 조그만 이해 타산에 얽매어 잔재주를 부려서는 아니 된다. 한번 결심하여 이 길이 바로 내가 평생을 걸어야 할 길이라고 작정이 되면 어떠한 곤란과 애로가 있더라도 뚫고 나가는 데에 인생의 보람이 있는 것이다.현자(賢者)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이다. 대학을 나서서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배우는 것의 종말이 아니라, 바야흐로 이제부터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평생을 두고 겸허하게 배우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강자(强者)란 무엇인가? 자기의 정열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의 목표가 설정되면 모든 다른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강자가 되어야 한다. 부자(富者)란 무엇인가? 자기가 뽑은 제비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다. 여러분들은 이미 대학에 들어올 때부터 약학자가 되겠다는 제비를 뽑아 쥐었던 것이다.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재능과 가능성이 있을 것이지만, 훌륭한 약학자가 되기 위하여 모든 정열을 오르지 약학을 위하여 쏟아야 한다. (중략)사람의 한 평생을 논할 때, 평생을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소위 ‘일이관지(一以貫之)’한 사람처럼 숭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대학이라는 학창은 이를테면 사회의 온실이나 비닐하우스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 첫발을 내디디려고 하는 사회는 때로는 풍우가 몰아치고, 때로는 치열한 약육강식의 경쟁이 소용돌이치는 개방사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경제적 독립이다. 이제는 부모의 품을 떠나서 스스로 독립하여야 한다. 그러나 친애하는 후배들이여!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중략)” 먹고 입을 것을 위하여 직장을 선택하지 말고,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길인가를 골라 택하도록 하여라.결어(중략) 우리나라, 우리 민족도 한 번 세계에서 번쩍하게 소리치면서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잘 되어야 한다. 친애하는 후배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앞으로의 성공 여부가 바로 우리나라의 앞날의 운명과 직결된다. (중략) 모든 행운과 신의 가호가 그대들에게 있기를 축원하여 마지않는다.
2020-04-22 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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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6> 보릿고개
최근 아홉 살쯤 된 한 신동(神童)이 ‘보릿고개’란 옛 노래를 부르는 걸 들었다. 보릿고개를 알 리가 없는 아이가 어쩌면 그리 구성지게 잘 부르는지 감탄하였다. 이 노래에는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草根木皮)의 그 시절, 한 많은 보릿고개여~”란 노랫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보릿고개란 보리 수확 하기엔 아직 이른, 그래서 양식이 다 떨어져 먹고 살아 넘기 어려운 1950년대의 음력 4월 경을 말한다.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동네 사람들도 봄이면 초근목피를 먹었다. 쑥 같은 산채(山菜)의 잎을 뜯어 먹는 것은 물론, 냉이, 달래, 무릇처럼 풀의 뿌리, 즉 초근(草根)까지도 캐먹었다. 나도 여러 번 먹어 본 무릇(Scilla scilloides)은 양지 바른 곳에 자생하는 백합과 식물인데 풀잎과 함께 마늘보다 작은 구근(球根) 부위를 쪄 먹는다. 구근은 찌면 갈색으로 변하는데 맛이 아릿하면서도 달짝지근하다. 지금은 별미로도 안 먹을 맛이지만 당시에는 시골에서 제법 애용되는 구황(救荒)식품이었다. 그러고 보면 단군신화에 나오는 마늘은, 누군가의 주장처럼, 실은 무릇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의 껍질, 즉 목피(木皮)로는 봄에 작은 소나무의 웃자란 맨 윗 줄기 부분의 외피를 칼로 벗긴 후 쪄 먹는다. 무릇과 함께 채반에 올려놓고 솥 안에서 물을 끓여 수증기로 찐 다음 흰색 내피 부분을 이빨로 벗겨 먹는다.이걸 우리 동네에서는 송기(松肌)라고 불렀다. 송기는 질겨서 껌처럼 오래 씹어야 겨우 씹히는데, 씹은 다음 아깝다고 삼키면 소화가 안되어 변비에 걸리기 쉽다. 변비에 걸렸을 때 용변 시 힘을 주면 항문이 찢어지기도 한다. 옛말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그래서 생긴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집은 좀 낫게 사는 편이라 무릇과 송기를 별식(別食)삼아 먹었지만, 이걸 계속 먹다가 영양실조로 부황(浮黃)이 나서 죽거나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황이란 오래 굶주려서 살가죽이 들뜨고 붓고 누렇게 되는 병을 말한다. 오래 굶은 사람은 먹을 것을 보면 허겁지겁 먹기 마련이다.그런 사람에게 “좀 천천히 먹어라, 짜구 날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짜구(자귀의 사투리)란 갑자기 너무 먹어서 잘 걷지도 못하고 뒤뚱거리는 상태를 말한다. 나는 사람이 짜구가 난 것은 못 봤지만 개가 짜구가 난 것은 본적이 있다. (당시엔 개도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보릿고개를 경험했던 우리는 지금은 너무나 잘 먹어 비만이 문제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방송마다 맛있는 음식 만들기, 맛 집 소개, 먹고도 살 안 찌기 등에 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 어쩌면 세상이 바뀌어도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최근 윤서인이라는 작가가 어느 신문에 “오랜만에 찾아 온 조국” 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만화를 보았다. 거기에 “세계 최고의 나라라는 미국보다도 더 나은 점이 많은 자랑스러운 조국! 평균수명, 치안, 위생, 수질, 도시 인프라,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의 나라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죽겠어, 힘들어, 정치가 개판, 나라가 개판, 불지옥, 이것도 나라냐, 헬 등 한국이 얼마나 살기 힘든지 성토하는 모습! 저렇게 죽는 소리들을 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 물론 삶이 어려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다같이 죽는 소리를 하는 것이 뭔가 납득이 안돼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는 “예전에는 조국이 잘 살기를 기도했었는데 이제는 조국 국민들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기도해야겠어요”라는 끝말로 만화를 마무리하였다. 그의 끝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어 초근목피를 먹던 사람들이 하나님 은혜로 이만큼 배불리 먹고 살게 되었는데, 감사는커녕 오히려 더 심한 불평불만을 토해내며 살다니, 생각할수록 하나님 앞에 송구하고 민망할 따름이다. 겸손한 자세로 주신 축복을 감사하게 받을 수는 없는 일일까? 언제쯤 우리는 불평불만이라는 새롭고 더 험한 보릿고개를 넘을 수 있을까? 코로나 난리 중에 옷깃을 여미고 기도드린다.
2020-04-08 1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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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5> 인생 네비
요즘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대부분 네비게이터(이하 네비)를 이용해 길을 찾는다. 네비에 중독이 된 나는 심지어 시내에서 우리 집으로 갈 때에도 습관적으로 네비를 켠다. 요즘 네비는 목적지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최단경로)과 가장 편한 길(추천경로)을 보여주며 선택하라고 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네비가 왕도(王道)를 알려주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길을 안내해 주는 인생 네비까지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인공 지능을 연구하는 과학자 중에 인생 네비를 개발하려는 사람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유전적 특성과 그가 처해 있는 환경 등을 입력한 다음 그가 인생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입력하면, 그 목표에 이르게 해주는 왕도가 제시되는 그런 네비를 꿈꿀 것이다. 반대로 유전적 특성과 환경을 입력하면 그 사람의 미래 모습이 제시되는 네비의 개발도 꿈꿀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 네비는 개발될 수도 없고, 개발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유전자 검사를 통해 예컨대 어떤 어린이가 자기가 사십도 되기 전에 죽을 유전적 특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제가 있어서 현재까지 유전자 검사를 극히 제한적인 용도로만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두 번째로 인생은 유전적 요인들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단순한 시나리오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유전자 가위를 통해 유전자를 편집함으로써 인생 자체를 편집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지만, 이 역시 극히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의 하나, 인생 네비가 개발되는 날이 온다면 이는 축복이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대 재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자신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또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인생 네비를 파는 곳이 있다면 비싸도 한번 사용해 보고 싶을 것이다. 내가 약대 2학년이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네 인생의 목표는 정했냐? 나는 스무살에 목표를 정하고 살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그날 그날 살고 있던 나는 그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워낙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를 사신 분이라서 ‘어떻게든지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공부시켜야겠다’는 일념을 가지셨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직업도 몇 가지 없어서 직장을 선택하기가 나보다는 훨씬 쉬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철이 들어 인생의 목표를 정하셨다니, 내가 사는 태도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자괴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내 인생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답은 물론 답 비슷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훗날 깨달은 것이지만 무얼 생각해 보려면 생각에 사용할 재료들이 내면에 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재료들이 내 안에 없었던 것이다. 밀가루 없이 국수를 뽑으려고 한 셈이다. 그렇다면 생각에 사용되는 재료란 무엇일까? 아마 경험과 지식, 그리고 이로부터 얻어지는 지혜 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 재료 하나 없이 그냥 생 고민만 하니 생각이 공상과 망상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요즘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주변에 길을 묻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물론 물어봤자 상대방은 대개 무책임하게 조언하거나,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답할 따름이다.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이 자신의 삶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의 인생을 훈수할 수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위아래를 구분 말고 여기저기 물으라고 권한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묻고 듣는 와중에, 상대방의 조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 마음 속에 지혜가 만들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앞으로도 인생 네비는 유전 특성이나 인공지능이 아니라 각자 마음 속의 지혜를 재료로 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을 것이다.
2020-03-25 1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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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4> 화목자(和睦者)
어려워도 화목한 집이 있고 부유해도 싸우며 사는 집이 있다. 화목한 집엔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싸우는 집엔 불러도 가고 싶지 않다. 아마 복(福)도 화목한 집에만 들어가고 싶을 것이다. 요즘 코로나 19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이다. 3월 1일 주일 아침에는 유례없이 전국 대부분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 다행히 내가 섬기는 온누리 교회는 CGN이라는 TV방송을 통해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심적 고통이 매우 클 것이다. 최근 스마트바이오팜 대표인 심유란 박사가 페이스 북에 쓴 ‘요물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글이 뇌리에 남는다. “서유기에 나오는 이 거울, 세상에 변장하고 숨어있는 요물들을 다 비추어 원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이 거울! 요즘 페북과 위챗을 보면서, 이번 신종코로나는 영락없는 이런 거울이라는 걸 느낀다 (중략).재난 중에 한 몫 건지려는 사람들부터, 니탓 내탓을 넘어 욕심을 드러내는 사람들, 어떻게든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내 잇속만 챙기려는 사람들, 숨겼던 발톱을 서서히 드러내는 사람들,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 평소에 그렇게 순하게 보였음에도 갑자기 돌변하여 온갖 화풀이를 다 하는 사람들, 팩트인지 아닌지 가리지도 않고 무작정 욕부터 하는 사람들... 참말로 요지경이다.그 가운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 드러내지 않고 재난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 확연하게 대조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원래 인간과 함께 자연에 존재했던 바이러스인데 어느 날 갑자기 "거울"로 변이하여 인간세상의 천라만상을 보여주고 있다. (중략)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물이지만 이처럼 인간에게 겸손함을 가르쳐준다. 인간의 오만은 어디까지일까?”윗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난리 상황에서도 세상이 자기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툭탁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사심 없이 나라를 위해 이런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십중팔구 나쁜 사람이거나 아니면 생각이 짧은 바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이미 자기 신념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그러나 하늘 아래 하나님 말씀 외에 불변의 진리가 어디 있으며, 누가 그 진리를 확신하겠는가? 예컨대 한 때 경부 고속도로 건설을 강력 반대했던 정치 지도자들의 신념도 시대착오였음이 들어난 바 있지 않은가?나는 각종 회의에 참석하였을 때 내 주장을 강력히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내 식견이 부족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지만, 우유부단한 내 성격 탓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사실 회의에서 논쟁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잘 들어보면 이 주장도 일리가 있고 저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어느 의견을 택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 주제를 놓고도 쉽게 흥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 때로는 신기해 보인다.서로 얼굴을 붉힐 정도로 논쟁이 가열되는 낌새가 보이면 나는 얼른 유머와 농담 등을 구사해 양측의 열기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 사실 어떤 일의 성패는 회의에서 어느 쪽 의견을 선택했느냐 보다, 얼마나 화기애애하게 결론을 냈느냐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런 나를 가끔 ‘회색분자’라고 놀리지만, 나는 회색분자의 역할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이런 역할을 하려 들어서는 아무 결론도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가난해도 화목한 집안이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그리고 싸우는 사람은 많아도 화목을 도모하는 사람이 의외로 적다는 생각에서 화목자(和睦者) 역할을 자임해 보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성의 냉철함보다 사랑의 따듯함이 백배천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불평, 불만, 비난, 조소, 조롱 보다는 감사, 위로, 격려, 응원, 후원, 화합이 특히 크리스찬에게 합당한 성품임을 깨닫는다. 지금은 전염병과 싸우고 있는 분들과 다툴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분들을 기도와 물질로 응원 후원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2020-03-11 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