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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38> 우리나라 의료경험기 9 – 암환자와 가족들을 혹하게 하는 민간요법
“ 이거 효험이 있다고 하니 한 번 해 보렴.”
7월 어느 날 무더웠던 한낮, 외삼촌이 카톡 메시지를 보내셨다. 메시지에는 부추와 요구르트로 말기 췌장암 환자가 완치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블로그가 연결되어 있었다 – 블로거의 할아버지가 서울대 병원에서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 중이었는데 매일 노지 부추와 요구르트를 믹서에 함께 넣고 갈아서 마셨더니 암이 다 없어졌더라는 이야기였다.
증거에 입각한 치료 (evidence-based medicine)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나는 검증되지 않은 방법을 이용하는 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항암치료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결정하신 어머니는 한 번 해 보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고지식한 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 부추와 요구르트는 음식이니 적어도 해는 끼치지 않을 것 아니야. 그러니 한 번 해 볼까? 어머니는 나와 같이 나가서 재료를 사오고 싶어 하셨다. 아마 노지 부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들을 믿고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런데, 난 걱정이 되었다. 체중이 거의 10 kg이나 빠지고 물도 잘 드시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바깥 날씨가 너무 뜨거우니 열기가 좀 식는 저녁무렵에 나가서 사오는 게 좋지 않을까? 어머니도 이 계획에 동의하셨다.
기운이 없으신 어머니는 저녁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주무셨다. 그동안 난 그 블로그를 다시 찬찬히 읽어 보며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환자인 할아버지는 항암주사 치료를 받는 동안 노지 부추와 요구르트 요법을 쓰고 계셨구나. 가만 있자. 항암주사를 맞는 동안은 면역기능이 떨어지니까 익히지 않은 생야채나 생과일을 먹으면 안 되잖아?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항암주사를 맞는 동안 생야채인 부추를 계속 드시고 계셨네?! 그럼 심각한 감염에 걸릴 수 있을텐데…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떤 의도로 썼는지 모르지만 말기암 환자와 가족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아닌가.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거짓말을 하다니!! 지금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화가 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꽤 인기가 있는지 수없이 많은 블로그와 카페에서 인용하고 있다.그런데,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친척과 친구들로부터 소개받은 민간요법은 단지 부추와 요구르트에 국한되지 않았다 – 말기 폐암 환자가 시도해서 폐암이 완치되었다는, 우유와 계란은 피하고 감자, 고구마와 야채만을 이용한 식단 (그런데, 우유와 계란이 암세포를 더 잘 자라게 한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올리브유에 볶은 토마토 (다른 기름에 볶으면 효과가 없단다), 어떤 말기암 환자를 완치시켰다는 쑥과 비름나물 요법 등등. 소개해 주신 분들의 정성을 생각해서 모두 다 한 번씩은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물도 마시기 힘든 췌장암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결국은 내가 다 소비해야만 했다.그래도, 차가버섯은 어머니께서 가장 오랫동안 시도해 본 것이었다. 친한 친구분이 러시아에서 제조된 차가버섯 가루를 사오시면서 너무나 간곡하게 권유하셨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차가버섯 상품들은 면역강화, 항암효과 등을 광고하고 있었는데 꽤 인기있는 건강기능식품으로 보였다. 문헌을 검색해 보니 차가버섯의 항암작용을 보고한 논문들이 좀 있었다. 주로 러시아, 중국, 우리나라 등에서 발표한 논문들로 모두 배양된 암세포를 이용하거나 쥐 등 동물을 이용한 실험결과들이었다. 하지만, 암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에게 항암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차가버섯은 여러가지 제제로 팔리고 있었다 - 버섯 자체로 파는 것도 있었고 캡슐로 되어 복용이 편리한 것도 있었으며 친구분이 사오신 것처럼 가루로 된 제제를 물에 타서 복용하는 것도 있었다. 직업이 약사인지라, 차가버섯 가루 물을 만드는 일은 내가 도맡았다. 그런데, 만들 때마다 항상 궁금한 점 몇 개 있었다.
1)얼마나 많은 양의 물에 얼마나 많은 양의 버섯가루를 넣아야 할까?
2)얼마의 양을 얼마나 자주 드려야 하나?
어떤 물질이 약으로 효과를 내려면 적절한 용량과 횟수로 복용해야 한다. 너무 적게 복용하면 효과가 없고 너무 많이 복용하면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허가받은 약들은 임상시험 결과에 따라 효과는 최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용량과 횟수로 사용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효과를 최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용량과 횟수는 암세포 배양시험나 동물시험에서는 알 수 없고 반드시 임상시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암세포 배양시험이나 동물시험은 효과를 입증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사용하는 용량보다 훨씬 많은 용량 - 보통 몇 배 이상 - 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적절한 용량과 복용횟수는 대상 환자에 따라서, 또, 제형에 따라서도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같은 항암제라도 대장암환자냐 췌장암환자냐에 따라 용량과 횟수가 다를 수 있다.
또, 같은 종류의 암을 가진 환자라도 제형에 따라 흡수 속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효과를 최대화하고 부작용은 최소화하는 용량과 복용 횟수는 제형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차가버섯을 가공하능 방법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제형이라도 제조사에 따라 주요 성분의 함량이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제조사마다 알맞은 용량과 횟수가 다를 수 있다. 차가버섯의 알려진 부작용으로는 신장결석이 있다. 문헌보고에 의하면 일본의 한 간암환자가 차가버섯 가루를 하루에 찻숫갈 4-5술의 용량으로 6개월 동안 복용해서 발생한 신장결석때문에 신장투석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이는 차가버섯에는 물에 잘 녹지 않는 옥잘레이트 (oxalate)라는 성분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식품이라 안전한 줄 알았지만 너무 많이 복용하면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따라서, 신장결석 등의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머니께 너무 많이 드리지도 너무 자주 드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런데, 차가버섯은 임상시험 연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난 차가버섯 가루물을 어떤 농도로 만들어서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자주 드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차가버섯 가루 상품의 설명서에는 얼마의 양을 얼마의 물에 녹여 얼마의 양으로 얼마나 자주 복용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임상시험의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지시를 따랐어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다행히, 차가버섯 가루물은 어머니에게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어머니께 뭔가를 해 드리고 있다는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을 빼고는 어머니에게는 아무런 효과를 찾을 수도 없었다. 약으로 허가를 받으면 상업적으로 더 큰 돈을 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가버섯이 민간요법에 머무르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필자소개>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8-05-04 0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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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37> 우리나라 의료 경험기 8 – 의사소통 수단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의무기록
“의무기록에
모든 정보가 다 있으니 이를 그대로 다른 병원에 주면 돼요.”
담당의사는 자신있게 말했다. 그런데, 막상 서울대 병원에서 의무기록을 받아 보았을때 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의료진이 작성한 기록이 부정확, 불명확, 비논리적이어서 전문가들이 보아도 이해하기 어렵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서울삼성병원으로 옮겼을 때 담당의사가 서울대 병원 의사나
다른 의사가 쓴 기록은 읽지도 않고 검사결과만 보았나 보다.
병원에서 의사들이 기록하는, 소위 차트라고 불리는 것은 SOAP
노트 (note)이다. SOAP은 여기서는 비누가 아니라 Subjective, Objective, Assessment, Plan의 첫 글자로 노트를 구성하는 네 부분을 각각 지칭하는 약자이다. Subjective (주관적) 부분에는
환자가 의사에게 호소하는 것 - 예를 들면, 증상 – 을, Objective (객관적)
부분에서는 의사가 관찰한 것 – 예를 들면, 검사결과 - 을 기록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정보 – 환자의
주관적인 것과 의사가 관찰하고 검사한 객관적인 것 –을 바탕으로 환자의 상태를 평가 (Assessment) – 진단 – 하고, 이에 따라 계획 (Plan)을 세운다. 이처럼 SOAP 노트는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평가하고 계획을 짜는 논리적인 글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작성자의 임상적
사고과정 (clinical reasoning)을 알 수 있다.
SOAP 노트는
작성자와 다른 의료진과의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보통, 환자를 오랜 기간동안 여러 번에 걸쳐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예: 재진) 작성자는 SOAP노트를 통해 과거의 환자 상태와 치료 방법에 대한 정보를 얻음으로써 현재 환자 상태와 치료에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환자를 다른 의료진에게 진료의뢰할 경우, SOAP 노트는 그 동안의
환자 상태와 치료를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그래서, 난 환자를 보기 전에
내가 이전에 쓴 SOAP 노트와 다른 의사들이 쓴 SOAP 노트를
반드시 읽어 본다.
이처럼 SOAP 노트는 임상에서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기 때문에 SOAP 노트에 담긴 정보는 정확해야 한다. 또, 명확하게 기재하여 오해의 소지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작성자의 임상적 사고과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노트가 부정확, 불명확하거나
작성자의 사고과정을 이해할 수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환자의 상태와 치료 방법에 대해 오해할 수 있어 환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어머니가 담당의사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날이었던 7월 6일에 쓰여진 의사의 SOAP 노트를
살펴보자.
담당의사의 7월6일자 SOAP 노트
먼저, Subjective부분 - S)라고 시작하는 부분 – 을 보자. 단 두 줄로 되어 있다는 것이 먼저 눈에
띈다.
“Indigestion
Epig pain after food 3MA wt loss
7 kg DM: - anorexia –“
또 하나 특징은 문장이 아닌 단어만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아는 어머니의 상태와 그날의 기억을 통해 해석해 보기로 한다.
소화불량 (indigestion)
윗배 (epig = epigastric) 통증(pain) 음식을 먹은 다음 (after food) 3 개월 (month의 약자로 보통은 mo를 쓴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아 MA는 month를 말하는 것 같다) 체중감소 (wt loss = weight loss) 7kg. DM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DM은
일반적으로는 당뇨병 – diabetes mellitus – 의 약자로 쓰지만 어머니는 당뇨병이 없었으므로
여기서는 다른 뜻인 것 같다). 식욕부진 (anorexia).
이를 바탕으로 담당의사가 의도했다고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들어 보면 환자는 지난 3개월동안 음식을 먹은 뒤 상복부 통증이 있어 왔고 이로 인해 체중이 7kg빠졌으며 식욕도 떨어졌다.
담당의사가 영어로 썼으니 영어문장으로 바꾸어 보면, The patient complains of epigastric pain
particularly after eating, which has been ongoing over the last 3 months. During this time, she has lost 7 kg and
developed anorexia.
문장으로 쓰니 훨씬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단어들만 나열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어볼 때 작성자 자신조차도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국에서 내가 본 모든 SOAP 노트들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도 문장으로 작성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정확할까? 우리나라 의료경험기 7에서 기술했듯이 7월 6일 방문에서 어머니가 의사에게 호소한 것들은 1) 항암제를 맞은 후
속이 더 안 좋아져서 더 이상 맞고 싶지 않다; 2) 거리가 멀어서 병원을 바꾸고 싶다; 그리고 3) 진통제, 위장관
운동 촉진제, 췌장효소제를 충분히 달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음, Objective부분을 살펴본다. 담당의사는
Objective 부분에 세 가지 검사 (CT, 간과 췌장
조직, 췌장암 지표) 결과와 어머니가 2주전에 맞은 항암제 이름과 용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7월 6일 당일 어머니는 혈구수 측정 (Complete Blood Count -
CBC) 등의 새로운 혈액 검사를 받았고, 담당의사가 그 결과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빠져있다. 또, 미국의 SOAP 노트에는Objective 부분에 검사 결과 뿐만 아니라 바이탈과 촉진, 청진 등으로 의사가 수행하는
physical exam이라 불리는 검사결과도 함께 기록하지만 이 둘은 하지 않았으므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복수가 있었기 때문에 복부 physical exam을 해서 그 결과를 기록해 놓았으면
재진 때나 다른 의료진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 평가와 계획 부분은 함께 묶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노트에서도 Assessment
& Plan로 함께 묶어 놓았듯이 둘은 논리적으로 서로 밀접히 연결되기 때문이다. 먼저, A)로 시작하는 평가 부분을 보자.
“panc Ca
body 53mm with liver 2017. 6. 22
GemAbrax
PV invasion with E. varix
Ascites SAAG 3.8-1.4”
이를 Subjective부분에서 썼던 방법으로 풀어보면 환자는 췌장 (panc = pancreas)의 몸 (body)
부분에 크기 53 mm의 암 (Ca = cancer)이
있으며 이는 간 (liver)으로 전이되고 간문맥 (PV =
portal vein)으로도 침윤 (invasion)되어 식도에는 정맥류 (E. varix = esophageal varices)가 발생되어 있다. 그리고, 복수 (ascites)가 있으며 혈청과 복수 알부민 농도 차이 (SAAG =
serum to ascites albumin gradient)는 2.4 (= 3.8-1.4)였다. 또, 환자는
2017년 6월 22일에
Gemcitabine과 Abraxane을 맞았다.
P)로 시작하는
계획 부분을 보면
“Reject
chemo Tx BSC 진단서”
이는 아마도 “환자는
항암치료 (chemo Tx)를 거부했고 진단서를 달라고 요청했다” (BSC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인 것 같다.
평가부분에는 Objective부분에 들어가야 할 검사결과 (SAAG)가 들어 있어 혼동을 준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문제점
요약 (problem representation)이 들어가야 하는데 빠져 있다는 것이다. 임상 사고과정에 관한 이론 (clinical reasoning theory)에 의하면 주관적, 객관적
정보를 바탕으로 문제점을 어떻게 요약하느냐에 따라 진단과 치료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이 문제점을 요약하는 능력은 비유하자면 흩어져 있는 여러 그림 조각들 (즉, 주관적, 객관적인
정보)을 하나로 묶어 보여줄 수 능력이다. 그런데, 주관적, 객관적인 정보에는 시그널도 있지만 노이즈도 많다.
왜냐하면, 환자가 호소하는 것들과 모든 검사 결과가 다 진단과 치료에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그널만을 골라 내서 이를 종합적으로 묶어 요약해 낼 수
있는 능력 – problem representation - 은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임상적 기술 (skill)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학교 의과대학 레지던트 교과과정에서는 clinical reasoning과목과 임상 수련과정을 통해 문제점 요약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연습시킨다. 그리고,
SOAP 노트의 평가 부분을 쓸 때에는 문제점 요약을 반드시 포함시키도록 한다.
또, 계획은 평가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평가에 따라 논리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트의 평가 부분에서 암의 진행 정도를 언급하고 있는데, 계획
부분에서는 환자의 항암제 치료에 대한 결정과 진단서 발급 요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평가가 계획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 또, 계획
부분에는 어떤 치료와 처방을 했는지, 환자 교육, 재진 계획
등도 기록해야 한다. 특히, 치료와 처방에 대한 기록은 작성자 본인 뿐만 아니라 환자를 보는 다른 의사들에게 치료 계획을 세우는 데 중요한
정보가 된다. 담당의사는 당일
진통제, 위장관 운동촉진제, 췌장 효소제 등을 처방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또, 복수에 관한 환자 교육도 빠져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읽어 보면
환자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진단서만 받고 간 줄 알 것이다.
어머니가 호소한 것과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문제점을 요약해 보았다.
P) 특별한
기저 질환은 없었지만 2주 전에 간 전이성 췌장암 진단을 받고 gemcitabine과
Abraxane을 시작한 73세의 여성 환자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면서 더 이상의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집이 멀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싶다며 의무기록를 요청한다 (또는
요청함).
73-year old woman with no significant past
medical history who was diagnosed with pancreatic cancer with liver metastasis
(stage IV) and received the first dose of the first cycle of gemcitabline and
Abraxane 2 weeks ago refuses additional chemotherapy due to intolerance and
requests medical records to transfer to another hospital due to long travel to
the clinic.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계획을 다시 써 보면
P) 1. 항암치료를
중단한다. 대신 증상완화치료를
계속 진행한다:
- Tramadol
(진통제 이름) 25 mg 1 정 통증이 있을
때 매 6시간마다
-
Mosapride (위장관 촉진제 이름) 5
mg 1정 식전 30분전 하루 세 번
- 췌장 효소제 1 정 음식과 함께 하루 세 번
2. 체중이
24시간동안 1-2 kg 증가하면 병원에 연락하라고 교육함.
3. 병원 전원
요구에 따라 진단서 발급해 줌.
영어로 바꾸어 보면
P) 1. Stop chemotherapy. Continue supportive care:
- Continue tramadol 25 mg PO Q6h PRN for pain
- Start mosapride 5 mg PO TID 30 min before each
meal
- Start pancreatic enzyme formulation 1 tablet
TID with each meal
2. Patient educated to seek medical attention if
body weight increases by 1-2 kg over a 24-hour period.
3. Issued medical records per patient’s wish to
transfer to another hospital.
어머니는 외래로 담당의사를 세 번 만났기 때문에 다른 – 6월 22일과 6월 15일 -SOAP 노트도 읽을 수 있었다. 이 두 노트를 보고 왜 7월
6일자 노트에 어머니가 호소한 것들이 Subjective 부분에
기록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6월 22일자 노트
6월 15일자 노트
놀랍게도, 빨간 박스로 표시된 Subjective 부분인
“Epig pain after food 3MA wt loss 7 kg DM: - anorexia –“은 7월
6일자 노트와 단어 하나 바뀌지 않고 똑같다. 즉, 이 부분은 6월15일 이후 계속 복사와 붙이기를 반복한 것이다! 검사 결과나 진단은 바뀌지 않으니 복사와
붙이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아 왔고 이해하지만 방문때마다 달라질 수 있는 환자의 호소를 기록하는 Subjective
부분을 복사와 붙이기를 하는 것은 처음 본다. 이렇게 복사와 붙이기를 계속 할 것이면 환자를 다시 볼 필요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재진부터는 검사한
다음 그냥 돌려 보내고 초진 때 환자가 호소한 것을 이용해서 평가하고 치료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부정확하고, 불명확하고 비논리적인 문제점들은
단지 담당의사의 SOAP노트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이 블로그에서 따로 다루겠지만,
인턴이나 레지던트가 쓴 노트들도 비슷한 문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머니 병환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우리과 교수 하나가 내게 다른 의사의 의견 (second opinion)을
받아 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자기한테 한국에서 받은 의무기록을 보내면 우리학교 병원의 종양내과 의사를 연결해 주겠다고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서울대 병원에서
받은 의무기록을 안 보내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 이 SOAP
노트들을 보면서 이를 발행한 병원의 수준을 어떻게 보았을까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기 때문이다.
양질의 의료에는 양질의 기록도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을 포함한 많은 미국 병원들이 의료진 평가
도구의 하나로 의료진이 작성한 SOAP 노트를 본다. 또, 양질의 기록은 양질의
의료진을 배출하는 데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학생들과 수련하는 사람들은 선배들이 작성한 SOAP 노트를 읽으면서
그들의 임상적 사고과정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양질의 기록을 위해 병원과 학교들이 교육을 강화하고 제도적인
뒷받침을 해야 할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의무기록은 어머니의 허락을 미리 받아 올립니다.)
<필자소개>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
-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8-04-09 1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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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36> 우리나라 의료 경험기 7 – 환자를 고려하지 못하는 의사소통기술
<36>우리나라 의료 경험기 7 – 환자를 고려하지 못하는 의사소통기술
학회참석 때문에 한 주동안 담당의사가 환자를 보지 못해서 그런지 서울대 병원 췌담도암 클리닉은 환자로 붐볐다. 환자 수로 보아 진료예약 시간보다 1시간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을 텐데 모니터를 보니 고작 약 15분만 지연되고 있었다. 대기실에는 동네병원처럼 바이탈을 측정하고 환자의 상태를 묻는 간호사가 없었다. 대신 담당의사에게 배정된 7번 진료실에 차례가 된 환자를 간호사가 진료실로 들이고 있었다.
오늘은 어머니 치료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어머니는 항암제 치료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결심하셨고 우리는 병원을 옮기기로 했기 때문에 의사가 몇 가지 조언을 해 주길 기대했다. 먼저, 어머니는 내가 문헌을 보고 말씀드린 자료에 따라 결심을 하셨기 때문에, 난 오랫동안 췌장암 환자를 치료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항암제 치료의 득과 실에 대한 의사의 조언을 기대했다. 그리고, 췌장암이 진행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합병증들에 대한 대처방법에 대해 듣고 싶었다.
어머니는 이미 복수가 좀 있었고 암이 진행함에 따라 복수가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집에서 모니터하며 어느 경우에 응급실로 모시고 가야 하는 지 궁금했다. 또, 췌장암이 커지면 담관을 막기 때문에 담즙이 배출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황달이 생기고, 치명적일 수도 있는 담관염이 발생할 수 있다. 일시적인 방편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치료로는 담관에 스텐트를 삽입하여 뚫어주거나 외부에서 간에 직접 관을 넣어서 담즙을 빼는 방법이 있다. 병원을 옮긴다면 이런 시술을 잘 하는 병원으로 옮기고 싶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조언도 듣고 싶었다.
의사: “어서 오세요.”
인사는 하는데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같이 온 나와 동생에게는 눈길하나 주지 않았고 앉으라고 하지도 않는다. 환자 보호자이거니 했겠지만 환자가 모르거나 환자를 보충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 가려면 환자보호자가 구체적으로 누군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난 클리닉에서 환자보호자를 처음 보면 항상 이름과 환자와의 관계를 묻는다. 또, 함께 앉아서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마주치고 대화해야 상대방이 좀 더 편하게 느끼기 때문에 의자가 부족하면 난 다른 방에서 의자를 가져온다.
의사: ” 오늘 한 혈액검사는 괜찮던데 항암제 맞고 좀 어떻셨어요?”
여전히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어머니: “항암제 맞고 속이 불편해서 잘 먹을 수가 없었고 또 힘들었어요. 계속 맞으면 제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더 맞지 않으려고요.”
의사: ”항암치료를 받지 않으면 급격히 나빠질텐데. 환자가 싫다면 어쩔 수 없죠.”
필자 :”’급격히’라 하면 얼마나 빨리를 말씀하시는 거죠?”
의사:”한 3개월?”
“한 3개월?”이라고 대수로운 것이 아니란 듯이 이야기하는 의사의 대답에 나는 분개했다 - 이봐요, 어머니는 몇 주전까지 건강하다고 생각하시던 분이예요. 이런 분에게 당신이 지금 한 말이 얼마나 충격적이겠어요? 말기암 환자를 많이 봐와서 어머니도 그런 환자 중 하나라고 생각했겠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고요. 또, 환자 가족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고요. 그렇다면, 이들을 고려하면서 전해 줘야 할게 아니예요? 환자 손을 잡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고 적어도 환자와 눈을 마주치면서, 그렇게 단답식 문제에 대답하듯이 “한 3개월?”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항암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약 3개월 정도밖에 시간이 남은 것 같지 않은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잖아요! 또, 힘들겠지만 항암제 치료를 받으면 기대 수명이 연장되고 암의 진행에 따른 통증도 좀 덜 한 것 같으니 다시 한번 고려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냐고도요! – 이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어머니를 봐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병원을 옮기려고 한다니 의사는 어차피 항암제 치료를 받지 않을 거면 서울대 병원은 더 이상 올 필요없다고 이야기한다. 병원을 옮기는데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 줄 테니 의무과에서 그동안의 차트와 함께 받아 가란다. 그리고는 진통제를 처방해 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서 무슨 약을 드시고 계셨는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가 위장관 운동 촉진제와 췌장효소제를 함께 처방해 달라고 요구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췌장암 진행에 따른 여러 합병증에 대한 대처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어서 내가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담도 스텐트 시술도 서울대 병원에서 굳이 할 필요가 없으니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하라고 한다. 또, 식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체중이 줄어야 하는데 오히려 1-2 kg 늘게 되면 복수가 커져서 그럴 수 있으니 체중을 매일 재라고 한다.
이게 다였다. 그나마 내가 이것 저것 물어봐서 5분이나 걸렸지 비전문가 보호자를 동반했다면 3분이면 끝났을 진료였다. 이런 식의 진료이니 환자가 그렇게 많아도 고작 15분만 지연된 것이었다. 이렇게 짧은 진료시간에다가 환자와의 의사소통기술이 부족하니 많은 환자들이 병상태와 치료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을 것 같았다.
진료실 문을 닫고 나왔을 때 동생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어머니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어머니가 희망을 잃을까하는 것이었다. 말기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완치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은 어머니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환자를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통증 조절, 합병증에 따른 증상 완화, 심리 안정 등등. 특히, 어머니는 통증에 대해 크게 두려워 하셨고 마음도 우울해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와 같은 환자를 도와줄 수 있는 완화치료와 전문심리상담사 서비스가 있는 병원들에 대한 정보를 줌으로써 계속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를 기대했었다. 이렇게 계속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앞으로 닥쳐올 어려움을 헤쳐 가는 데에 환자와 가족에게 모두 큰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자와의 마지막 만남일 지 모르는 데도 진료가 끝났을 때 잘 가라거나 잘 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도 하지 않던 의료기술자에게 이런 것을 기대하던 내가 우리나라 의료현실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필자소개>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
-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8-03-08 0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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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35>우리나라 의료 경험기 6 – 동네 의원과 3차병원 긴밀한 협력 뒷받침할 제도 필요
어머니는 지난해 6월22일에 췌장암 진단을 받은 뒤 담당의사와의 재진 예정일인 7월 6일까지 2주 동안 동네의원을 4번이나 방문해야 했다. 첫 두 번은 서울대 병원에서 빼먹고 처방해 주지 않은 진통제와 위장관 운동 촉진제를 받으러 갔었고, 나머지 두 번은 항암제 부작용으로 생긴 방광염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동네의원을 이용하기로 한 이유는 서울대 병원이 차로 한 시간이상 걸리는 데다 외래진료를 받으러 가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또, 미국의 경우 진통제와 위장관 운동 촉진제 처방과 방광염 치료는 암전문의가 아닌 일차의료 제공자 (primary care provider)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동네의원에서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의사를 만나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당일 진료를 원하는 경우에도 전화를 해서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당일 진료를 받고 싶지만 예약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응급 클리닉 (urgent care clinic), 예약을 받지 않고 진료를 하는 Walk-in 클리닉, 또는 병원 응급실 (emergency department)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응급 클리닉과 walk-in 클리닉은 많지 않은데다 병원 응급실처럼 대기 시간이 매우 길다. 반면, 우리나라 동네의원은 예약이 필요없고 당일 진료를 위한 대기 시간도 길지 않아서 이용하기가 매우 편리했다.
동네의원의 시설과 진료순서는 내 클리닉이 있는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가정의학과나 내가 진료를 받는 Kaiser 병원과 많이 달랐다. 아파트 주변 상가 2층에 위치한 동네의원은 소화기 내과 전문의 두 명이 동업하여 연 것인데 실내가 깨끗했고 조명, 나무 바닥 등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웠다. 사실, 저소득층에게 의료를 제공하는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은 시에서 운영하는데다, 내 클리닉은 지은 지 50년도 넘은 벽돌 건물안에 있기 때문에 최근에 만들어진 동네의원과 시설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겠지만 – 참고로, 이 벽돌 건물은, 1980년대 초 세계 최초로 에이즈 환자를 입원, 치료했던 자부심이 넘치는 곳이다 – 공공기관이 아닌 사기업이 운영하는 Kaiser 병원의 인테리어도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인터넷으로 광고하는 다른 동네의원들의 사진을 보니 다 적어도 이 수준의 인테리어를 하고 있어서 상당히 놀랐는데 이렇게 꾸미지 않으면 환자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국 병원에서의 진료순서는 접수 → 대기 → 간호사 → 의사 순이다. 즉, 접수를 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면 담당 간호사가 호명한다. 담당 간호사는 환자를 진찰실 (exam room)로 데리고 가서 체온, 혈압, 맥박, 호흡수, 통증 정도 등 소위 바이탈 (vital)을 측정하고 방문 이유, 약물 알러지 (allergy) 여부 등을 묻고 모두 차트에 기록한다. 간호사가 진찰실에서 나가면 좀 있다가 의사가 와서 진료하고 차트에 기록한다. 일반적으로 미국 병원에는 진찰실이 여러 개 있고 의사는 한 진찰실에서 환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있는 진찰실로 돌아다닌다. 그런데, 진찰실에서 간호사가 문진하고 바이탈을 측정하면 환자의 개인정보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환자에게 노출되지 않는다. 그런데, 시설과 돈이 충분치 않은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에서는 진찰실이 부족해서 간호사가 간호사실이나 복도에서 바이탈을 측정하고 그 다음 의사가 와서 환자를 자신의 진찰실로 직접 데리고 간다. 하지만, 간호사실과 복도는 대기실과는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개인정보를 보호할 수 있다.
우리나라 동네의원의 진료순서에서는 간호사 문진과 바이탈 측정 단계가 없었다. 대신, 환자가 원하면 스스로 측정할 수 있도록 대기실에 자동 혈압측정계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측정계는 고정된 커프 (cuff)에 팔을 밀어 넣어 혈압을 측정하도록 되어 있는 방식으로, 혈압을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혈압은 커프 사이즈와 환자의 측정 자세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이 자동혈압측정계는 커프 사이즈를 팔의 크기에 따라 조정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자세에서 혈압을 측정해야 하는지 모르는 환자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환자 스스로 측정한 혈압이 부정확할 가능성이 높다. 또, 환자가 스스로 측정하면 누가 그것을 차트에 기록하는지도 의문이다. 그런데, 이 방식의 혈압계는 3차의료기관인 서울대 병원과 서울삼성병원의 외래 진료 대기실에서도 비치된 것으로 보아 환자 스스로 혈압을 측정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널리 이용되는 방법인 것 같다.
의사가 환자를 보기 전에 간호사가 먼저 바이탈을 측정하고 방문이유, 약물 알러지 등을 기록하면 의사는 좀 더 효율적으로 환자를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내 클리닉의 예를 들면, 혈압이 높거나 맥박이 빠르거나 해서 바이탈에 이상이 있는 환자가 있는 경우, 간호사는 내가 환자를 데리러 갈 때 항상 미리 알려 주는데 이는 내가 환자에게 무엇을 물어 볼 지, 진찰실에서 혈압을 다시 측정할 지 등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 또, 간호사가 차트에 기록한 방문이유를 보고 이전에 비슷한 이유로 방문했는지, 그렇다면 어떤 치료를 받았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차트에서 미리 찾아 보고 환자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바이탈은 환자 치료에 꼭 필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 고혈압 환자에게는 당연히 혈압이 필요한 정보이고, 어머니처럼 방광염 증상으로 방문한 경우에는 체온이 중요하다. 특히, 어머니는 항암제를 최근에 맞았었기 때문에 방광염 증상과 함께 체온이 높다면 응급실로 보내야 한다. 그런데, 방광염으로 두 번 방문하는 동안 간호사는 한 번도 체온을 측정하지 않았다. 의사도 두 번째 방문에서야 체온을 측정했다 (다행이 정상체온이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눈길을 끈 것은 각종 광고였다. 각종 건강검진 광고부터 마늘주사, 미백주사 등의 광고가 포스터 형태로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의료수가가 낮아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아마도 이런 상품들을 팔아야 하는 모양이다. 또, 진료시간 안내 광고도 눈에 띠었는데 난 그 엄청난 근무시간에 놀랐다: 평일에는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7시, 토요일에는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4시반, 그리고 심지어, 주요 명절, 석가탄신일, 성탄절만을 제외한 공휴일에도 오전 9시에서 오후 1시까지 환자를 받고 있었다.
전세계 IT산업을 선도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조차 병원에서는 아직도 간호사나 의사가 환자를 호명하여 진찰실로 데리고 가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동네의원이든 종합병원이든, 순서가 되면, 대기실에 걸려 있는 모니터에 환자 이름과 진찰실 번호가 나타나기 때문에 환자가 스스로 해당 진찰실로 가면 되었다. 호명하면서 서로 인사하고 하고 안부도 묻고 하는 인간적인 관계보다는 편리함이 우선인 듯 하여 좀 씁쓸했다.
알콜만으로는 제거할 수 없는 병원균 (예를 들어, Clostridium difficile)이 있기 때문에 의사와 환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미국 병원의 진찰실에는 비누를 쓸 수 있는 개수대가 비치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동네병원과 대학병원의 진찰실에는 개수대가 없어서 의아했다. 아마도 우리나라 의사들은 촉진을 거의 안 하기 때문에 개수대가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3차병원 외래진료 의사들과는 달리 동네병원 의사는 매우 친절했다. 특히, 어머니의 위염을 진단한 의사는 자신이 좀 더 빨리 3차병원으로 진료의뢰를 내지 못한 데에 대한 자책감이 있었는지 어머니 손도 잡아 주고 질문에 자세하게 대답을 해 주는 등 매우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자기 어머니라면 항암제 치료를 받게 할 것이라면서 항암제를 적극 권했다. 뿐만 아니라, 복수에 대해 묻자 무료로 복부 초음파 검사를 직접 해 주기도 했다. 이런 태도는 어머니 치료로 만난 3차병원의 의사들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대부분의 3차병원 의사들은, 제발로 걸어오는 환자들 수가 충분히 많다고 생각해서인지 사무적이고 퉁명스러운데다 어떨 때는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동네병원의 약 사용에서 의아하게 느낀 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3차 병원 의사들에게도 똑같이 발견한 문제였기 때문에 동네병원만의 문제라기 보다는 우리나라 의료교육 자체의 문제로 보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컬럼에서 다루기로 한다).
암과 같은 중병으로 3차병원에서 진료를 받더라도 경미한 질환은 접근이 편하고 더 친절한 동네의원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안전하고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동네 의원에서 수행한 검사결과와 처방한 약의 목록이 3차병원 의사에게 전달되고, 3차병원의 검사결과와 처방한 약의 목록이 동네 의원에 전달되는 등, 동네 의원과 3차병원간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이 부족해서 환자나 보호자가 이를 대신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환자나 보호자는 의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지 잘 모를 것 같다. 따라서, 환자의 치료가 동네에 기반한 일차의료제공자 중심으로 이뤄어지면서 3차병원과의 협력을 뒤받침할 수 있는 의료 제도로 개선해 나간다면 중환자라도 방광염같이 간단한 질병이면 굳이 번거롭게 3차병원을 이용할 필요가 없이 동네병원을 좀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소개>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
-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8-02-08 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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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34>우리나라 의료 경험기 5 – 필요할 때 입원하기 어렵고 환자 중심과는 거리가 먼 대학 병원 응급실
“얘야, 내 소변 좀 봐 줄래? 거품이 좀 많은 것 같아.”
“소변 보실 때 아프셨어요?”
“아프지는 않았는데 좀 불편했어.”
어머니의 열을 재어 보니 첫번째는 38도, 두번째는38.4도였다. 이틀전 항암제를 맞으셨기 때문에 면역세포인 호중구 부족에 의한 발열 (febrile neutropenia)이 우려되었고, 간호사가 체온이 38도를 넘으면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했었기에 서울대 응급실로 달려갔다.
미국 병원의 응급실은 기다리는 시간이 길기로 악명이 높다. 나도 발목을 삐어서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는데 두어 시간을 기다려서야 의사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비교했을때 난 빨리 진료를 받은 축에 속한다). 그래서, 서울대 응급실에서도 오래 기다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도착한지 30분 이내에 빨리 진료를 받을 수 있어서 놀랐다. 알고보니 확장 공사로 인해 그 규모와 서비스가 많이 줄어서 근처 병원 응급실로 환자들을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자가 적었던 것이다.
접수를 하자 보호자 1명만 보안을 거쳐 응급실 안으로 들어갈도록 허용하고 있었다. 미국 병원의 응급실과는 달리 출입할 수 있는 보호자 수를 제한하고 있는 것은 몇 년전 전국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메르스 (MERS – 이유를 모르겠지만 영어를 독일어 발음하듯이 읽는다) 감염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보안을 거쳐야만 하는 통로외에도 접수 대기실과 응급실을 연결하는 통로가 하나 더 있었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누구나 응급실로 들어 올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병원 보안요원이 정기적으로 응급실안을 돌아 다니면서 보호자 수를 세고 있었다).
보안을 통과하고나서 의사를 보기 전에 두 명의 간호사를 차례로 만나야 했다. 응급실문 바로 앞에 있던 첫번째 간호사에게 증상을 설명했더니 응급실 내부에 있는 두번째 간호사에게 보내졌다. 설명 간호사라는 명패를 가지고 있어서 무엇을 설명해 주려나 기대했었는데 아무런 설명없이 첫번째 간호사처럼 증상만 물었다. 그리고는 응급실안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안내했다. 왜 같은 것을 두 번, 서로 다른 두 명의 간호사에게 설명하도록 만들어 놓았을까?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좀 기다리자 인턴으로 보이는 의사가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와서 어머니 이름을 호명하고는 들어 가버렸다. 진료실에 들어가 보니 담당의사와 어머니를 호명했던 인턴으로 보이는 의사가 앉아 있었다. 굳이 진료실 밖으로까지 나와서 호명했으니 차라리 환자와 보호자에게 먼저 인사하고 함께 진료실로 들어갔다면 환자와 보호자가 좀 더 따뜻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담당의사는 자신에 대한 아무런 소개도 없이 증상을 먼저 물어 보았다 (문화의 차이일지도 모르겠지만 미국의 경우, 이름과 직책 – 예를 들어, 오늘 응급실 담당의사인 누구 - 을 환자에게 먼저 알려 주는데 이런 문화에 익숙해져서인지 이것이 좀 더 직업인답게 여겨진다). 그리고서는 진찰을 하기 위해 어머니에게 묻지도 않고 갑자기 겉옷을 올리려고 하였다. 담당의사는 여자였지만 인턴이 남자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난처해하셨다. 그 때 의사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노크도 없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서 더욱 부끄러워하셨다. 의료진의 행동으로 보아 이들은 환자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환자는 인턴이 아닌 응급실 담당의사를 만나러 온 것이다. 왜냐하면, 치료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담당의사이지 수련인 신분인 인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료 중에는 신체부위를 포함한 환자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정보가 노출될 수 있다. 따라서, 담당의사는 진료를 시작하기 전에 환자에게 치료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사람인 인턴이 함께 있어도 되는지에 대해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난 수련인이 있을때 환자에게 수련인이 함께 있어도 되는지 항상 묻는다. 그런데, 서울대 병원 응급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다른 의료기관에서도 수련인이 함께 있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서울대 병원에서 진단과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담당의사는 어머니 차트를 미리 읽어보지 않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차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인 언제 어떤 항암제를 투여 받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또, 현재 어떤 약을 복용하고 있는 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환자의 차트를 미리 읽지 않고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에 대해 물어 보지 않는 것은 응급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병원 외래 방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료방식이었다. 차트는 환자의 질병과 치료 상태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고, 환자가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은 진료와 치료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 응급실에 오기 전에 항생제나 해열제를 먹었으면 검사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 이런 진료방식은 생소한 것이었다.
담당의사가 피검사, 요검사, 흉부 엑스레이 검사를 요구해서 다시 응급실내 대기실로 나왔다. 대기실은 마치 외래 진료하는 곳처럼 채혈구역, 흉부 엑스레이 구역 등 여러 검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환자는 각각의 검사구역으로 스스로 이동해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가 검사를 받았다. 이는 우리대학 병원과 Kaiser 병원 응급실과는 좀 다른 방식이었다. 이들 병원에서는 응급실에 들어가게 되면 환자는 응급실내 병실 하나를 배정받는다. 이 병실로 간호사가 방문해서 채혈하고 의사가 직접 와서 진단, 상담한다. 즉, 만약 검사실에서 검사가 필요하면 간호사나 병원 담당자가 와서 환자를 직접 이송한다.
다시 말하면, 환자가 스스로 검사를 위해 이동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아마 병원 일손이 충분치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불안정할 수 있는 응급실 환자의 특성상 안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스스로 이동하는 동안 넘어질 수 있고, 전염성이 강한 감염 환자는 대기실에 있는 동안 다른 환자들을 감염시킬 수 있다. 그래서, 감염을 막기 위해서는 동반 보호자 수를 제한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개별 병실에 환자를 배정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확장된 서울대 병원 응급실이 이런 구조를 가졌으면 좋겠다).
대기실에는 의자만 있고 침대는 없어서 기운이 떨어지신 어머니가 눕고 싶어도 누울 수 없어 매우 힘들어 하셨다. 또, 드신 것이 별로 없어서 소변이 잘 나오지 않아 요검사가 지연되었다. 그런데, 응급실의 화장실은 좁고 무엇보다 문턱이 있어 수액이 걸린 바퀴달린 이동 기구를 들고 나기가 불편했다.
담당간호사는 정기적으로 순회하면서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혈압 등 바이탈을 측정했는데 매우 친절했다. 어머니가 5시간동안 여러 번 시도해도 소변을 받을 수 없자 결국 간호사가 관을 이용해 소변을 채취해야 했다.
다행히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다. 담당의사는 호중구감소증은 항암제 주사후 약 1주일 이후에 나타나므로 호중구감소에 의한 감염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의한 발열 같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는 해열제인 아세트아미노펜 (acetaminophen)을 처방해 주었다. 그런데, 항암제를 맞을 때, 호중구 감소의 시기를 미리 알려 주었더라면 응급실에 오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진료가 끝날 즈음 담당의사가 준 조언은 충격적이었다.
“다음부터는 열이 나면 집 근처 병원의 응급실로 가세요. 저희 병원에는 입원할 병실이 없기 때문에 어차피 저희도 이 근처 다른 병원으로 입원을 주선해 줄 수밖에 없거든요.”
서울대 병원은 어머니를 중증 암환자로 진단한 주치의가 있고 이틀전 항암제 치료를 제공한 병원이다. 그런데, 이런 병원이 어머니가 급한 상황이 왔을 때 치료를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또 하나 기가 막힌 이야기를 서울대 병원 응급실에 같이 갔던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동생은 응급실 접수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응급실에 도착한 것은 토요일 오후 7시쯤이었다. 약 한 시간 뒤에 20대의 정신질환을 앓는 것으로 보이는 환자가 보호자와 함께 응급실 대기실로 들어왔다. 이 환자는 응급실에 오기전에 벌써 보호자와의 동의하에 의료진과 입원하기로 합의한 것 같았다. 그런데, 병원에 온 환자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입원하기 싫다고 바닥에 눕는 등 떼를 쓰기 시작했다. 이에 입원을 권유한 의료진이 달려오고, 보호자와 함께 무려 4시간에 걸친 설득 끝에 환자는 다시 입원을 동의했다. 마침내 일이 해결된 듯 했는데 갑자기 큰 걸림돌이 하나 나타났다. 원무과에서 입원을 거부한 것이다.
이유는 보호자와 환자의 관계에 대한 서류가 미비하다는 것. 의료진이 나서고 보호자가 다음날 아침에 제출하겠다고 해도 지금 당장 서류가 없기 때문에 입원이 안된다는 것이다.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그 환자는 결국 입원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아마 그 환자와 보호자는 다시 이 병원으로 입원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원무과는 의료진과 환자를 지원하는 부서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서울대 병원에서는 가장 힘이 센 부서처럼 보였다.
응급실을 통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없고, 환자가 아닌 원무과가 중심인 병원이라면 더 이상 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주 뒤 어머니 담당교수를 외래로 만날 때 그동안의 진단 기록을 받아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필자소개>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
-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8-01-04 1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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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33> 우리나라 의료경험기 4 – 여러 직역간 협력, 시스템에 의존하는 병원 의료로 개선해야
서울대 병원 췌장암/담도암 센터의 담당의사와의 진료에서 일어난 문제는 환자에게 치료의 득과
실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주지 못한 의사소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처방한 항암제의 부작용과 영양공급에
대한 환자 교육이 부실했으며, 췌장암이 진행되며 나타난 불편한 증상을 줄여 주려는 처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항암제는 신체의 여러 장기에 영향을 끼쳐 다양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또, 독성이 강하여 치명적인
부작용도 일으킬 수 있다. 어머니가
맞으신 항암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gemcitabine 이고 다른 하나는 nab-cisplatin이다. 어머니는 항암주사를 단 한번밖에 맞지
않으셨지만 여러 부작용을 겪으셨다. 먼저, 췌장암 진단을 받기 전부터 나타났던 증상 중 소화가 안 되고 속에 뭔가 고여있는 듯한 증상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항암제가 위와 장의 점막세포를 파괴하기 때문에 일어난 부작용이다. 또, 방광과 요도 점막세포가
약화됨에 따라 요도염에 걸려 치료받으셔야 했다.
또, 피부에 발진이 생겼으며, 항암제를
맞은 3주 후부터는 머리카락도 많이 빠졌다.
항암제 부작용을 줄이거나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약을 사용하거나 생활습관을 바꿔야 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암제를 시작하기 전에 항암제에 대한 교육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서울대 병원으로부터 부작용에 대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에게 병원 차원에서 제공하는 암환자 교육이 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담당의사 진료실은 어머니에게 이를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받은 교육이라고는 항암제 주사실 간호사가 말해 준 내용으로 열이 나서 체온이 38도
이상 오르면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것과 췌장암과 항암제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담은 소책자가 전부였다.
췌장암은 심한 소화불량을 일으켜 체중이 심하게 감소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암이다. 어머니가 췌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벌써 7 kg이나 몸무게가 빠져 있었고, 식사로는 소량의 죽만을 드시고 계신
상태였다. 따라서, 영양공급이 중요하건만 어머니는 이에 대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3분 진료라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의료현실에서 의사가 질병과 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병원 차원으로, 설명 간호사를 통하여 암환자 교육을 제공하는 것 같다. 이렇게 여러 직역이 다양한 역할을 맡을 경우에는 원활한 환자치료를 위해서
전산 등의 시스템을 이용한 직역간의 긴밀한 의사소통이 중요한데 서울대 병원에서는 이 점이 잘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또, 문제를
발견했을 때 해결하려는 노력도 부족해 보였다.
어머니와 동생에 따르면 항암제 주사실 간호사는 어머니가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고 항암주사를 맞으러 온 것에 대해 놀란
것처럼 보였지만 의사에게 알리거나 암관련 교육에 대한 시간과 장소 등의 정보를 전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췌장암과 항암제에 대한 소책자는 제약회사가 만들었는데 그림이 많고 중요한 점을 잘 요약해 놓아서 환자 교육용으로 적절했다. 그런데, 항암제 주사실 간호사가 소책자만을 주었다는 것으로 보아
서울대 병원은 이런 좋은 환자 교육 자료를 제대로 이용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효과적인 환자 교육을 위해서는 말과 문자 두 가지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즉, 눈과
귀 모두를 활용해야만 좀 더 효과적인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말로 함께 전달해야만
환자의 이해가 부족한 부분이 어디인지 알 수 있고 이에 대해 보충설명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약에 대한 설명의
경우 간호사보다는 약사를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진단을 받았을 때는 췌장암이 간으로 퍼지는 등 많이 진행된 상태여서 어머니는 이미 여러 불편한 증상으로 힘들어 하고 계셨다. 조직검사를 받기 전부터 윗배가 불편하고
속이 꽉 찬 느낌의 증상때문에 3분의 1공기 정도의 죽을
하루에 두세 번만 드시고 계셨다. 또, 등이 불편하고 아파서 잠도 잘 못 주무실 정도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이런 증상에
대해 처방받은 것이라고는 담당의사를 외래로 만나기 이틀전, 조직검사하고 퇴원할 때 받은 진통제 울트라셋
(트라마돌/아세트아미노펜 복합제) 7일분이 전부였다.
그런데, 담당의사는 그 다음 주에 학회를 참석해야 해서 2주 뒤에나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동안 진통제는 아껴
먹고, 소화불량은 참고 지내야 하나? 답답했다.
어머니의 증상과 자료를 조사해 보니 위장관 운동 촉진제와 췌장효소제가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다음날 난 어머니를
모시고 처음 위염의 진단을 내린 동네 병원을 찾아가서 위장관 운동 촉진제인 metoclopramide, 췌장
효소제, 그리고 14일분의 울트라셋을 처방받아 왔다. 이 약들 덕분에 어머니의 소화불량 증상은
좀 줄어 들었으며 통증을 잘 조절할 수 있었다.
난 임상경험이 있으니 이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환자 보호자인 경우 참 난감했을 것 같다.
췌장암 진단을 확진하는 날이어서 아마도 의사는 진단과 항암제 치료에만 신경을 쓴 것 같다. 또, 많은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것 저것 물어볼 시간과 여유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병원과 같이 정신없이 바쁘고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개인에게
의존하게 되면 실수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를 시스템의 관점에서 풀어야 하고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의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다른
직역과 협력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암으로 인한 불편한 증상에 대한 약물치료를 전문적으로 수련받은 약사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이 약사로 하여금 항암제 처방을 처음
받은 모든 암 환자들의 약을 검토 확인하게 한다면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전이성 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완화치료팀과 협진으로 치료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또 하나는 비슷한
진단을 받은 환자에게 공통적으로 쓸 수 있는 처방전을 쓰는 것이다. 이를 미국에서는 오더세트 (order
set)이라고 불린다.
예를
들어, 췌장암 진단을 받은 환자용 항암제 처방전에는 위장관 운동 촉진제, 췌장효소제, 진통제를 반드시 포함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의사가 컴퓨터에서 이 처방전을 열 때마다 이런 약들이 자동으로 들어가게 된다. 만약 의사가 이 중 필요하지 않은 약이 있다고 판단하면 이를 처방전에서
빼기만 하면 된다. 또, 이 처방전에 암교육이 포함되어 있으면 이를 잊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
짧았지만 의사 환자와의 의사소통, 다른 직역과의 협력, 시스템 등에서 많은 개선점을 찾을 수 있었던 진료였다.
<필자소개>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
-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8-01-03 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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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32>귀순한 북한 군인과 환자 개인정보 보호
귀순한
북한 군인과 환자 개인정보 보호.
1997년 패션디자이너였던 베르사체 (Versace)가 총을 맞고 마이애미 (Miami)의 잭슨 미모리얼
병원 (Jackson Memorial Hospital)에 입원했다. 그런데, 유명인이다 보니 사람들의
호기심을 꽤 자극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직접 치료에 참여하지 않았던 의사 간호사 등 10여명이 병원 전산 시스템을 이용하여 베르사체의 의무기록을 조회해 보았다고 한다.이를 발견한 병원의 결정은 단호했다 –
모두 해고. 이는
내가 잭슨 미모리얼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수련받을 때 환자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교육의 일부로 들은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HIPPA라고 불리는 환자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을 어기면 중한 처벌을 받는다. 병원과 개인은 건당 최대 5만불 (우리돈으로 약 5500만원), 연간
최대 150만불 (우리돈으로 약 16억원)의 벌금을 내야 하고 경우에 따라 형사소송도 각오해야 한다. 뿐만 아니다. 연구자의 경우 연구경력이 끝날 수도 있다.
몇 년전 우리학교 교수가 잠시 커피샵에 들르는 동안 차 트렁크에
넣어 둔 노트북을 도둑맞은 적이 있다. 노트북에 저장된 화일들중에는 연구용으로 받아 둔 환자 정보가
들어 있었는데, 그 노트북은 encryption이 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 노트북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노트북에 저장된 환자정보에 접근할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교수는 학교로부터 연구할 수 있는 권한이 정지되었으며 정부로부터 연구자금 지원 자격도 박탈당했다. 또, 학교도 관련된 수천명의
환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사과해야 했다.
이 사건 이후 학교는 개인용이건 업무용이건 학교 캠퍼스내에서 사용하는 모든 컴퓨터와 노트북을 encryption시켜야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정책을 바꾸고, encryption 프로그램을 학생을 비롯하여 교수, 스태프에게 무료로 배포해 주고 있다.
그럼 환자 개인정보가 엄격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는 것은 매우 개인적인
정보다. 사람에 따라 좀 다르겠지만
이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를 아무에게나 공유하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또, 병원이 보관하고 있는
정보 중에는 민감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성병에 걸린 기록이라든지, 정신병력 등이다. 그런데,
민감한 내용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정보는 민감한 것이다라는 가정하에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환자 개인정보는 악용될 수도 있다.
병력에 대한 정보가 보험회사에 알려지면 마케팅에 사용될 수 있고, 병원비를
지불하는 데에 이용했던 신용카드가 도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나에 관련된 민감한 정보를
내 동의없이 제 삼자와 공유할 수 있다면 환자는 병원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을 것이고 이는 치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따라서,
병원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 성공적인 치료를 위해도 환자 개인정보 보호는 중요하다.
병원에 보관된 환자 개인정보는 민감하고 악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할 때에는 “최소한으로 필요한 만큼만 (minimum necessary)”이라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이는 불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지 말고 치료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이용하며, 환자정보에 접근하는 사람들의 수도 환자치료에
꼭 필요한 사람들만으로 제한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즉, 이 원칙에 따르면, 환자치료에 직접 관계되지 않는 사람들은 환자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유명한 사람일지라도 입원했을 때 미국 병원에서 하는
브리핑은 병의 치료에 관련된 일반적인 내용만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빌 클린턴이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받았을 때 병원에서 알려준 정보는 수술의 일반적인 이야기뿐이었고, 클린턴의 검사 사진이나 수치는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또, 병원에서 사망한 경우 가족들의 허락없이는 병원이 언론매체에게 사인을 공개하지 않는다.
며칠 전 귀순하다 총격을 당하여 수술을 받은 북한 병사의 상태에 대한 병원의 브리핑에서
환자 개인정보를 너무 많이 알려 주지 않았느냐 여부가 논란이 되는 모양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최소한으로
필요한 만큼만”의 원칙을 적용시키면 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수혈받은 혈액양이
12000 cc였는지, 회충이 있었는지, 소장이 똥으로 차 있었는지, 먹은 게 옥수수였는지,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서 총알이 몸 어디를 관통했는지 등등의 내용을 환자치료에 직접 관련되지 않은 일반국민들이
반드시 알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된다.
치료에 직접 참여하고 있지 않는 나로서는 병사의 상태가 안정한지 불안정한지가 가장 필요한 정보 같고, 그 외의 정보는 알더라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몰라도 그만이다. 물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어떤 정보는 안보에 귀중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군의 식량난을
알려 주는 옥수수 식단, 회충 감염과 같은 정보조차도 개인정보를 보호하면서 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 의료기관이 안보정보기관에 먼저 알리고 이 안보정보기관이 첩보를 통해 얻은 것으로 해서 국민에게
알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국민의 알 권리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 것 같다. 국회의원과 같이
선출직 정치인이라면 임기를 별 탈없이 마칠 수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 후보의 건강 정보를 대략적으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 경우에도 후보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북한군 병사는 정치인이 아니다. 또, 건강보험료와 세금으로
치료를 받기 때문에 이를 부담하는 국민으로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건강보험료
혜택을 받는 모든 국민의 의무기록이 누구에게나 공개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내가 알리기 싫은 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크니까.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온 몸을 바쳐 어려운 환자들의 목숨을 살려 온 중증외상센터에 근무하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다. 이들의
사명감, 헌신이 없었다면 그 북한 병사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중증외상센터의 중요성과 지원에 대하여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참 고무적이다. 더불어, 환자의 개인정보는 최소한으로
필요한 만큼의 원칙에 따라 공개되어야 하는 점도 함께 환기되었으면 좋겠다.
<필자 소개>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
-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7-11-29 0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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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31>우리나라 의료 경험기 3 – 환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주어 결정을 도와야
“오빠, 엄마 오늘 항암제 맞으셨어.”
공항으로 나를 마중나온 동생이 전한 말이다. 그 날 오전, 어머니, 동생, 그리고 사촌동생은 조직검사 결과를 들으러 서울대 병원 췌장/담도암센터의 담당의사를 만났다. 내가 같이 갈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천에 도착하는 비행기가오후 늦게 도착하기 떄문에 참석할 수 없었다.
“생각할시간을 좀 달라고 부탁하라고 그랬잖니?”
“의사가너무 강력히 권해서… 엄마가 부작용때문에 안 맞고 싶다고 해도 일단 시작해 보고 부작용이 심하면 그 때 중단해도 된다면서 권유했어. 환자들이 처음에는 괜찮다가 대개 세 사이클이 지나면 힘들어 한다고 하고. 또, 엄마보다나이 많은 환자들도 다 맞는다고 하고.”
그런데, 어머니는 항암치료를 끝까지 주저하셨나 보다. 수납할 때 안 맞겠다고 하셨더니 항암주사를 벌써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안 맞으면 보험적용이 안 되어 약값 80만원을 모두 내야 된다고 해서 결국 맞으셨다고 한다. 보험 적용된 약가는 5만원이었으니 75만원을 절약하기 위해 확신이 서지 않은 주사를 맞은셈이다.
“의사가뭐라고 하던?”
“암이 많이퍼져 있대 – 간에도 전이되었고 복수도 차 있고… 그런데 이때까지 아무 증상도 느끼지 못했냐고 물었어.”
난 의아했다. 증상을 일찍 느끼지 못한 것이 지금 치료여부를 결정하는 데에 무슨 도움이될까?
“의사가예후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주었니? 항암을하지 않으면 얼마나 여생이 남아 있는지, 또 항암을 하면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는지. “
“아니.”
“그러면, 항암제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서는?”
“그냥, 세 사이클이 지나면 좀 힘들어 질 거라고만 했어.”
3분도 안되는 진료시간이었다는데 정작 중요한 정보는 전하지 않고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는 듯한 질문으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다니...
“엄마, 많이 충격받으신 것 같아.”
암이란 진단은 누구에게나 큰 충격일 것이다. 어머니의 경우, 아무 지병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지난 번 컬럼에서 소개한 책 <진단이후의 삶>에서는암과 같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할 때에, 의사는 진단명을 말한 다음 환자가 말할 때까지 5분이고 10분이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권한다. 즉, 환자가받아들일 시간을 충분히 주라는 것이다.
또, 이런 충격 상태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난 미국에서 출발하기전에 어머니와 동생에게 항암치료를 받을 지에 대해 바로 결정하지 말고 대신 1-2 주 시간을 좀 달라고부탁하라고 당부해 두었다. 집이나자동차 같은 물건도 시간을 가지고 이것 저것 조사하고 비교한 다음에 산다. 하물며 사람의 생명이 걸린암의 경우, 더구나 항암제 치료로 수명의 연장이 크지 않은 전이성 췌장암의 경우에는 치료 방법을 선택하는데에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질병이든지 치료를 결정할 때에는 치료방법의 득과 실을 잘 따져봐야 한다. 암 치료의 득은 치료를 받지 않을 때에 비해 기대되는 수명 연장이라고할 수 있다. 따라서, 득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치료를 받지 않으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또 치료를 받으면 얼마나 수명이 길어지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전이성 췌장암의 경우, 항암치료를하지 않을 경우 기대 수명은 약 3-6개월이고 항암치료를 받으면 3-6개월더 수명이 연장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치료의실은 부작용이다. 고려해야 할내용에는 부작용의 종류, 치료를 중단했을 경우 부작용이 사라지는지, 또, 부작용의 예방 및 치료법과 삶의 질에 대한 영향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두 가지항암제를 맞으셨는데 그 중 paclitaxel이일으킬 수 있는 손발저림 등의 신경독성은 항암제를 중단해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또 다른 항암제인 gemcitabine은백혈구 등 면역세포를 만드는 것을 줄여 심각한 감염을 일으킬 수 있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며칠 입원해야 한다. 또, 감염 위험 떄문에 항암제로 치료받고 있는 동안에는 여러 사람이모이는 곳을 피해야 한다. 어머니는노인 복지관을 다니시는 것을 매우 좋아하셨는데 항암치료를 하게 되면 이를 그만 두셔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가치관 - 무엇이 중요한지- 도 치료를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다. 치료로 인해 수명이 얼마 늘어나지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오래 사는 것이중요하면 치료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 나의고모부 한 분은 전이성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가족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사는 것이 중요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항암치료를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셔서 영양제를 항암제라고 속이고 주어야 할 정도였지만, 치료를 받으러 가는날에는 벌떡 일어나 병원에 가셨다고 한다. 또, 본인에게 중요한 일이 예정되어 있는 경우 – 가족의 결혼 등등 - 도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의사가 환자에게 진단명 및 치료의 득과 실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방식에는 문화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미국에서는 이런 정보를 환자에게 직접 전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것 같지 않다. 대신 환자 가족들이 이런 정보를 받는다. 그런데,환자 가족들은 “충격을 받을까봐” 이 정보를환자에게 숨긴다. 그래서, 어머니가 후에 입원하셨던 호스피스의 상담 전문 간호사에 따르면 여명이 60일미만이어야만 입원할 수 있는 호스피스 환자들조차도 상당수는 여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못하고 입원한다고 한다. 그리고, 진단명이나 여명에대한 정보를 직접 환자에게 알려준 의사는 가족들에게 철천지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환자가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가족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암이라는진단으로 충격을 받으신 어머니를 뵐 때 마음이 무척 아팠다. 여기에 여명과 실에 비해 얻는 것이 크지 않은 치료에 대한 정보까지 전해충격을 더한다는 것은 어쩌면 참 가혹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난 환자가 주체가 되어치료를 결정해야 하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환자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치료에 대한 결정은 가족이 아닌 환자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이기때문이다. 그런데, 진단명과 치료의 득과 실에 대한 정보없이는 자신의 남은 삶에 대한 결정하기 힘들다.
이는 치료를 받을지, 어떤 치료법을 받을 지에 대해서만 국한된 결정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정리할 지에 대한 계획도 포함된다. 유산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부터 가보고싶은 곳과 세상을 떠나기 전에 풀어야 할 관계가 있는 사람과의 만남 등 삶을 어떻게 정리할 지에 대한 계획은 진단명과 치료의 득과 실에 대한 정보없이는합리적으로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현실적으로도 환자에게 진단명과 치료에 관련된 득과 실을 끝까지 완전히 숨기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병원을 전전하고 가족들이 자기를 피해 상의하거나 쉬쉬하는 것을 보면 환자는 자신이 위중한 병을 앓고 있다는것과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환자가 충격받을 것을우려한다면 의사는 환자에게 환자와 가족 중 누구에게 진단명과 치료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좋겠냐고 묻고 그에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환자가 자신이 직접 듣는 것을 거부하더라도 환자에게 숨기는 것이 아니고 그 뜻을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로부터 여명이나 치료의 득실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말씀드릴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여명이 아직 2-3년은남은 것으로 생각하셔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어머니가 당신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치료의 득과 실을 따져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아들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며칠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신 어머니는 항암치료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결정하셨다. 부작용을감수해도 몇 년 더 살 수 있다면 항암치료를 받겠지만, 몇 개월 더 살려고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하셨다. 아들로서는 아쉽지만 어머니다운 용기있는 결정이었다.
<필자소개>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
-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7-11-17 1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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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30> 우리나라 의료 경험기 2 – 진단 이후의 삶 (Life After the Diagnosis)
우리나라 의료 경험기 2 – 진단 이후의 삶 (Life After the Diagnosis)
어머니가 췌장암의 진단을 받을 때 내
마음을 가장 무겁게 만든 것은 예후 (prognosis)였다. 암이 주변에 퍼지지 않은 단계의 환자들조차 5년 생존율은 30%를 넘지 못하며, 어머니처럼 다른 장기로 전이된 경우에는 5년 생존율이 고작 3%다. 그래서, 미국의 국립 암 센터는 2017년에 약53,000여명의 췌장암 환자가 새로 발생하여 전체 암 중 발생건 수로 12위를 차지하겠지만, 약 43,000여명이 사망하여 사망자 수로는 3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을 정도다.
주변으로 퍼지지 않은 췌장암의 경우 수술도
고려할 수 있으나 어머니처럼 전이된 경우에는 항암제가 주로 쓰인다. 이전에는
gemcitabine 단독요법이 많이 쓰였지만 지금은 4가지 약을 함께 쓰는 FOLFIRINOX요법이나 두 가지 약 - gemcitabine과 nab-paclitaxel – 을 쓰는 요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FOLFIRINOX요법은
leucovorin (FOLinic acid), 5-Fluorouracil, IRINotecan,
OXaloplastin이라는 약을 함께 쓰는 방법이다. 임상시험에 의하면, 이 요법은 gemcitabine 단독
요법보다 평균 수명 (정확히는 median survival지만 간단히 평균 수명으로 한다)을 약 7개월에서 11개월로 늘린다. 그러나, 부작용으로 심한 신경통증 (sensory neuropathy)과 설사가 gemcitabine 단독요법에 비해 훨씬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면역세포인 호중구 (neutrophil) 수 부족으로 인한 감염에 의해 발생하는 발열 (febrile
neutropenia) 위험도 더 크다.
Gemcitabine과 nab-paclitaxel의 두 약을 함께 쓰는 요법은 gemcitabine 단독요법에 비해 평균 수명을 약 7개월에서 8.5개월로
늘린다. 하지만, 호중구수 부족으로 인한 감염에 의해 발생하는 발열 (febrile
neutropenia), 피로 (fatigue), 말초 신경 손상에 의한 통증 (peripheral neuropathy), 설사 등의 부작용을 더 많이 일으킨다.
항암제 치료를 받지 않을 경우, 다른 장기로
전이된 췌장암 환자의 기대 수명은 3-6개월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항암제 치료를 하면
평균적으로 3-6개월 정도 생존 기간이 늘어난다고 할 수 있다. 대신 그 댓가로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는 부작용을 겪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3-6개월 더 살기 위해 부작용의 위험을 무릅써야 할 만큼 항암제 치료가 가치있는
것일까?
한국으로 떠나기 전 운이 좋게도, 같이 일하는 의대 생리학 교수인 이고르 미트로비치 (Dr. Igor
Mitrovic)의 소개로 우리학교 병원의 완화의료팀 (palliative care service)
주임교수인 스티브 팬틸라트 (Dr. Steve Pantilat)를 만날 수 있었다. 스티브는 완화치료라는 분야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들을 치료할 때 새로운 접근 방법을 이용한 의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고르가 소개를 해 주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한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은 데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의사라면 매우 바쁠 것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고르가
이메일을 보낸 바로 그 날 오후 4시반에 시간이 되니 만날 수 있다는 답장을 받았다.
스티브는 날 따뜻하게 맞아 주면서 어머니가
췌장암에 걸려서 매우 유감 (I am so sorry that your mother has pancreatic
cancer)이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필자:
어머니에게 어떤 치료방법이 좋을까요?
스티브: 우선 환자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What is most
important to you?), 환자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What do you hope for?),
또 환자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What worries you most?) 알아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처음에는 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환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바라는 것, 걱정하는 것이 치료방법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곧이어 영양공급에 대한 질문에 관한 대답으로부터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필자:
암환자는 영양이 중요하잖아요.
어머니에게 어떤 것을 드려야 할까요?
스티브: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것을 주세요. 어머니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시면 아이스크림을 주시면 됩니다.
항암치료를 받던 안 받던 남은 삶이
길지 않으니 그동안 좋아하는 것을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치료방법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기대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것을 바라고 중요하게 여기면 항암제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거나 부작용을 두려워하면 항암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즉, 환자
중심적으로 치료 방법을 선택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언과 더불어 스티브는 자기가
최근에 쓴 책, <진단 이후의 삶: 중병을 가지고도 잘 사는 것에 대한 전문가의 조언 (Life
after the Diagnosis: Expert Advice on Living Well with Serious Illness)>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이 책은 스티브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 수천여 명을 돌보면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쓴 것으로 제목 그대로 중병 진단을 받은 이후 삶이 어떻게 변화하며 삶을 마무리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래서,
진단 이후 신체적, 심리적인 변화, 항암제, 방사선, 수술, 시술
등의 혜택, 간과되는 부작용, 통증 및 구토 등의 조절 방법, 임종 등의 의학적인 문제를 다룰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dignity), 희망, 가족, 친구들과 나누어야
할 대화, 간병인 구하는 방법, 연명치료 동의서 작성 요령
등에 대해서도 조언하고 있다.
어머니 삶의 마지막 8주를 함께 지내는 동안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스티브의 책이었다. 솔직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지엽적인 것에만 신경을 써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을 것 같다. 또, 내 의도와는 다르게 어머니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치료방법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고통없이 죽음을 맞기 원한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장수를 누리다가 어느 날 잠자는 중에 조용히 세상을 떠나길 바라는 것 같다. 하지만,
스티브는 이런 행운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고, 우리 대부분은 어느 날 중병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은 뒤에 죽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삶의 마지막 단계를 맞은 환자들을 돌보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의 책은 이런 현실에 맞닥칠 때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도록 조언하는 실용서라고 할 수 있다. 환자와 그 가족들 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필자소개>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
-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7-09-29 1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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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29> 우리나라 의료시스템 경험기 1 - 검사 수치가 아닌 환자를 치료해야
“날벼락이야.”
어머니 말씀이다. 건강하시던, 아무런 만성 질환이 없으시던 어머니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췌장암 4기의 진단을 받았으니 필자 역시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다.
필자는 학교로부터 장기휴가를 받아 진단 직후부터 한국에서 어머니와 지내며 병원, 약국에 가실 때마다 환자 보호자로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고 있다. 그런데, 한때 익숙했던 의료시스템이었지만, 2001년에 미국으로 떠난지 16년만이라 그런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또, 전혀 다른 미국 의료시스템에 익숙해져서 더더욱 그렇다.
이 시리즈를 통해 미국 의료시스템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약사이자 약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의 관점으로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접하게 된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소화가 안된다고 느끼기 시작한 때는 3월말 쯤이었다. 속이 쓰리거나 아픈 것은 아니었으나 평소에 즐겨 드시던 음식들의 소화가 잘 안되는 것이 1주일 이상 지속되자 동네 병원을 방문하셨다. 위염의 진단을 받으시고 위산 억제제인 라베프라졸 (rabeprazole) 등이 처방된 약을 받으셨다. 4주를 드셔도 별 차도가 없으시자 의사의 권유로 위내시경을 하셨다. 결과는 심하지 않은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 그래서, 같은 약들을 4주 더 복용하셨다. 하지만,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으며 등이 불편한 새로운 증상이 시작되었고 체중도 6 kg이 감소하자 의사는 어머니에게 큰 병원에 가 보시도록 진료의뢰서를 써 주었다.
5월말, 어머니는 서울대병원 소화기 내과 김모 교수와 처음 만났다. 이때, 어머니와 동생은 진료의뢰서 외에도 내시경 필름과 복용했던 약들의 리스트도 준비해 갔다.
필자는 그 때 아직 미국에 있었으므로 어머니와 동생이 김 모 교수를 만나고 온 뒤에 연락했다.
필자: “ 어머니, 의사가 뭐래요?”
어머니: “소화 기능 저하래.”
필자: “그래서 무슨 약 주었어요?”
어머니: “이게 받은 약이야.”
약 리스트
포리부틴 서방정 (trimebutine) 300 mg 하루 두 번: 위 운동 촉진시켜 음식물을 빨리 내려 가게 함.
복합파자임이중정 (Phazyme complex) 하루 세 번: 소화 효소제
에트라빌정 10 mg (amitriptyline) 하루 두 번: 진통제
알비스디정 (ranitidine 84 mg/tripotassium bismuth dicitrate 100 mg/sucralfate 300 mg) 하루 두 번: 위산 분비 억제제/위벽 보호제
필자: “아니, 진짜 이렇게 줬어요?”
어머니: “응. 위내시경 필름을 보더니 위염이 약간 있다면서 의사가 이거 4주만 먹으면 낫는대.”
동생: “그래서, 아무 다른 검사도 안했고 재진 예약도 안 해 줬어.”
필자: “복용했던 약 리스트는 보여주셨어요?”
동생: “응. 그냥 훓어보더니 그게 끝이었어. 뭐 이런 거 가지고 대학병원에 오냐는 투였어.”
무엇보다도 놀랐던 것은 위산 분비 억제제의 처방이었다. 어머니가 동네 병원에서 받아 복용했던 라베프라졸은 위산 억제제 중 가장 강력한 계열인 수소 펌프 억제제 (proton pump inhibitor)에 속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라베프라졸을 하루에 한 번 복용하셨으므로 만약 위염이나 소화불량이 원인인데 차도가 없었다면 하루에 두 번 복용하도록 처방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치료방법이다.
하지만, 의사는 수소 펌프 억제제 대신 이보다 위산 분비 억제 효과가 약한 히스타민 수용체 2형 길항제 계열인 라니티딘 (ranitidine)을 처방했다. 뿐만 아니라, 용량도 150 mg 하루 두 번씩 쓸 수 있음에도 약 반 정도의 용량을 처방했을 뿐이다. 강한 약을 썼는데도 효과가 없었는데 더 약한 약을, 그것도 적은 용량으로 처방하다니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Don’t treat the number but treat the patient.
검사 수치를 치료하지 말고 환자를 치료하라는 말이다. 임상에서 검사를 많이 하다 보니 검사 수치가 이상하면 여기에 치료의 촛점이 맞춰진다. 비정상인 검사 수치를 정상으로 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환자다. 많은 경우, 환자의 증상, 환자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아마도 서울대 병원 의사는 내시경 필름상으로 보이는 약한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에 맞는 약을 처방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어머니가 아무런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히스타민 수용체 2형 길항제 계열의 약을 쓰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더 센 약을 8주동안 복용하고도 호전되지 않았지 않은가? 또 체중이 6 kg이나 감소하였고. 그러면, 아무리 내시경 필름 상으로는 심하지 않은 위염이라 하더라도 환자의 증상과 그간 어떤 약을 복용했는지 등을 고려해서 다른 질환을 의심해야 하지 않았을까? 미국에서 인턴이나 레지던트가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은 보았지만 경험이 풍부한 교수가, 그것도 국내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병원의 교수가 검사 결과만 의존하고 환자를 고려하지 않다니 참 믿기 어려운 일이다.
처방해 준 약을 3주 동안 복용했음에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자 어머니는 다시 진료 예약을 했다.
필자: “의사가 뭐래요?”
어머니: “이상하다 그러면서 약을 바꿔 줬어.”
새 처방전
포리부틴 서방정 (trimebutine) 300 mg 하루 두 번: 먼저 방문때 받은 약과 같음.
복합파자임이중정 (Phazyme complex) 하루 세 번: 먼저 방문때 받은 약과 같음.
에트라빌정 10 mg (amitriptyline) 하루 두 번: 먼저 방문때 받은 약과 같음.
스토가정 10 mg (lafutidine) 하루 두 번: 위산 분비 억제제
글립타이드정 200 mg (sulglycotide) 하루 세 번: 위산 제거와 위점막 보호
스토가정은 다른 종류의 히스타민 수용체 2형 길항제 계열의 약이다. 만약 위염이 원인인데 히스타민 수용체 2형 길항제 계열의 약으로 호전되지 않았다면 더 센 약 – 수소 펌프 억제제 – 로 처방해 주어야지 같은 계열의 약으로 바꾸다니? 너무 궁금해서 임상 시험 논문을 찾아 보았다. 그런데, 먼저 쓴 약으로 잘 듣지 않은 환자들에게 새로 처방한 약이 더 효과가 좋았다는 임상 시험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동생: “내가 엄마가 체중이 계속 줄고 등이 아파서 잠도 못 주무시고 호전되지않으니까 무슨 검사라고 하는게 좋지 않겠냐고 하니까 의사는 등이 아픈 것과는 크게 상관없어 보이지만 확인차원에서 복부 초음파를 하자고 했어. 그래서, 내일 복부 초음파 하기로 예약했어.”
초음파 검사 결과 어머니는 췌장과 간에 종양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었고 CT와 조직검사를 통해 간으로 전이된 췌장암으로 확진되었다. 만약 어머니의 증상이 호전되지 않아 걱정되던 동생이 무슨 검사라도 하자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췌장암 진단이 이루어지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처럼 환자를 고려하지 않고 검사결과에만 의존하면 임상적 판단이 일반인보다도 못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약력>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본 칼럼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 있음을 밝힙니다>
2017-09-07 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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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28> 드럭 머거 (Drug muggers) – 근거로 포장한 상술
드럭 머거 (Drug muggers) – 근거로 포장한 상술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드럭 머거 (drug muggers)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이에 의하면 “200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수지 코헨이라는 약사가 '드럭 머거(drug muggers•영양소를 빼앗는 강도 짓을 하는 약)'라는 개념을 만들고, 책을 발간해 학계에 화제를 몰고 왔다”고 한다. 미국 약대에서 10년간 임상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약사로서 클리닉에서 일하기는 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개념이라 여러 자료를 조사해 보았다.
먼저, “학계에 화제를 몰고 왔다”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인 것 같다. 일단 수지 코헨이라는 약사는 “드럭 머거”라는 책을 발간하기는 했지만 학술지에 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적은 없는 분이다. 뿐만 아니라, 드럭 머거를 주제로 한 학술 논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연구 결과나 주장을 꼭 학술지에 발표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책이 출판될 때는 다른 전문가들에 의한 심사 과정 (peer-review)이 없기 때문에 검증이 되지 않은 결과나 주장도 쉽게 실릴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다음, 드럭 머거라는 개념을 만든 수지 코헨 약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수지 코헨은 1989년 체인 약국에서 약사로서 경력을 시작해서 플로리다 주의 Academy of Pharmacy Practice 에서 수여하는 Practitioner Merit Award를 받고 신문에 컬럼을 쓰는 등 잘 알려진 약사다. 또, 그는 현재 컬럼비아대학교 의대 교수로 있는 닥터 오즈 (Dr. Mehmet Oz)가 진행하는 인기 토크 쇼인 닥터 오즈 쇼 (Dr. Oz Show)에 약사로서 여러 번 출연한 적이 있다. 유튜브에 있는 동영상을 보면 닥터 오즈 쇼에서 드럭 머거에 대해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약의 사용법에 대해 약사로서 환자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수지 코헨은 현재까지 6종의 책을 발간했다. 코헨이 자신의 웹사이트에 쓴 표어“나는 자연 치료를 사랑합니다 (I love natural medicine!)”처럼 그가 쓴 책들은 모두 자연 치료, 천연 약물에 대한 것들이다. 또, 그의 웹사이트는 자신이 쓴 책들과 비타민제들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것이 목적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점은 수지 코헨 뿐만 아니라 닥터 오즈도 자연 치료와 천연 약물을 소비자들에게 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을 소비자에게 권하는 것은 의료 윤리에 반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10명의 컬럼비아대 의대 교수들이 학교에 닥터 오즈를 해고하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그러면, 미국 의약학계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드럭 머거가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일간지에 실리고 대한약사회가 수지 코헨을 초청하여 심포지엄을 열 정도로 화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한 제약회사가 종합비타민제의 판촉을 위해 드럭 머거에 대한 학술행사들을 2014년부터 지원해 오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일반의약품으로 드럭 머거를 방지하는 것이 약국에서의 임상약학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도 한 몫하고 있는 것 같다. 수지 코헨의 드럭 머거라는 개념은 만성질환의 치료에 이용하는 일부 약들을 장기간 복용하면 영양소의 결핍을 초래하기 때문에 이 약들을 복용할 때에는 결핍되는 영양소도 함께 복용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키 포인트는 만성질환 치료를 위한 약을 복용할 때 결핍되는 영양소도 함께 복용한다는 것인데, 이 점이 제약회사가 지원하는 학술행사의 요점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드럭 머거와 관련된 여러 행사의 연사로 나온 한 약사는 “비타민과 미네랄 등의 보조제 섭취가 필요하고, 특히 치료제를 장기복용하는 만성질환자들에게는 고용량의 비타민과 미네랄이 필수"라고 강조하고 있다.
드럭 머거의 대표적인 예 – 치료약과 결핍되는 영양소 – 로는 이뇨제와 칼륨과 비타민 B1, 메트포르민과 비타민 B12, 스타틴과 코엔자임Q10, 베타 차단제와 멜라토닌 등이 있다. 이 약들이 열거된 영양소를 결핍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약들을 복용하고 있는 환자들이 모두 결핍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영양소의 혈중 농도가 낮다고 반드시 질병으로 진행되거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메트포르민과 비타민 B12의 예를 들어 보자. 당뇨병 치료약으로 널리 쓰이는 메트포르민을 오래 복용하면 비타민 B12 결핍 (vitamin B12 deficiency)과 그에 따른 빈혈 (vitamin B12 deficiency anemia)이 생길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행된 임상연구에 의하면 메트포르민을 복용하고 있는 799명의 환자 중 9.5%만이 혈중 비타민 B12의 농도가 연구에서의 기준치 (300 pg/ml)보다 낮았다. 그리고, 단 2명의 환자 (0.3%)만이 비타민 B12 결핍에 의한 빈혈이었다. 따라서, 메트포르민을 복용하는 모든 환자들이 비타민 B12를 함께 복용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2017년 미국 당뇨병 학회 치료지침에서는 메트포르민을 복용하는 환자의B12 결핍에 대한 정기적인 검사와 모니터링만을 권고하고 있다.
또, 어떤 환자는 영양소의 보충이 위험할 수 있다. 이뇨제는 칼륨의 배출을 증가시켜 저칼륨혈증 (hypokalemia)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뇨제를 복용하고 있는 많은 환자들은 혈중 칼륨 농도를 높이는 약인 안지오텐신 전환 효소 억제제, 안지오텐신 수용체 차단제, 알도스테론 차단제 등을 함께 복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뇨제를 복용하고 있더라도 혈중 칼륨을 증가시키는 여러 약을 함께 복용하면 고칼륨혈증로 인한 병원 입원률이 증가한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따라서, 이런 환자들이 칼륨 보충제를 복용하면 생명에 지장에 줄 수 있는 부정맥을 일으킬 수 있는 고칼륨혈증의 위험이 증가한다. 그러므로, 칼륨 보충제는 이뇨제를 복용하고 있는 모든 환자들이 아닌, 검사를 통해 필요성이 확인된 환자들만 복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결핍을 보충해 주는 것이 효과가 있는지 의문인 영양소들도 있다. 스타틴과 코엔자임Q10이 좋은 예다. 스타틴은 우리 몸의 세포안에서 에너지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코엔자임Q10을 결핍시켜 근육에 관련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하지만, 코엔자임Q10을 함께 복용한다고 해서 스타틴에 의한 근육 부작용의 가능성이 줄어들거나 스타틴에 의한 근육 부작용을 치료할 수 있다는 확실한 임상시험 증거는 아직까지는 없다. 따라서, 미국 보건성이 제공하는 환자들을 위한 정보에서는 코엔자임Q10이 스타틴에 의한 근육 부작용을 줄이는지에 대해 아직 충분히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타틴을 복용하는 모든 환자에게 코엔자임Q10의 복용을 권하는 것은 근거중심이 아니다.
근거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임상시험 결과가 필요하다. 즉, 위약군과 비교할 때 만성질환치료제를 복용하고 있는 환자들의 영양소 결핍에 의한 부작용의 발생률을 낮췄다는 임상시험결과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데이타없이 약을 이용하는 것은 임상약학이 아니고 단지 상술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럭 머거를 미국 약학 대학에서 가르치지 않고 의약학계가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근거 중심의 약사 (pharmacy practice)가 진정한 임상약학이며 우리나라 약국에서도 임상약학이 제대로 정착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필자약력>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7-08-02 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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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27> 일본식으로 약학교육제도를 바꾸자는 주장에 대해
우리나라 약학대학 교육제도가 2+4년제로 바뀐 지 5년이
조금 넘었지만 정착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제도를 다시 바꾸자고 하니 계속 혼란만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약학대학 쪽에서는 통6년제로 바꾸자고 하고 제약업계 쪽에서는 일본식 4+2년제를 모델로
삼자고 한다. 그리고, 이 일본식 모델에 대해 약대의 일부
기초과학 전공 교수들도 찬성하고 있는 것 같다.
제약업계 쪽 설명은 6년제를 도입한 후 약대 졸업생의 대부분이
임상약사를 지향하는 편중이 일어나 신약개발을 담당할
제약기업에서의 약학전공자가 태부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하는 것처럼, 6년제 과정 도중 4년을 이수한 시점에서 약과학자를 지향하는 사람은
임상약학 실무 교육을 이수하지 않고 약학사로 졸업하도록 하자고 한다. 즉, 4년은 약과학자 교육을
중심으로 하고 임상약사를 지향하는 사람은 2년을 추가해서 임상약학에 관련된 과목과 실습을 하자는 내용이다. 또, 현행 2+4약대 학제가 이공계 대학의 학부교육을 황폐화시키고 있으므로 약대 입학생을 처음부터 선발하면 이공계 학과의
황폐화를 막고, 신약개발과 임상약학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단 우리나라 현 약대교육제도가 임상약학에 편중되어 있다는 과장은 차치하고라도 일본식 제도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약과학자와 약사의 양성은 완전히 다른 교육목적(educational goals)을 갖기 때문에 교육과정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약대의 교육목적은 약사양성이다. 이는 의대의 교육목적이 의사양성이고 치과대학의 교육목적이 치과의사의 양성인
것과 같다. 그리고, 이 교육목적은 세계 어느나라를 가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약사의 직능은 약과학자의
직능과 아주 다르다. 직능이 다른
데 어떻게 같은 과정으로 4년간 교육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신약개발에 필요한 기초의학자가 부족하니 의과대학 4년은 기초의학자 교육을 중심으로 하고, 임상의사를 지향하는 사람은
병원에서 수련을 2-3년 더 하게 하자는 것과 같다.
일본은 제약산업에서는 미국과 겨루는 선진국이지만 약사의 임상능력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UCSF약대는 일본의 약대들과 교류가 많은 편이라 일본 약대 교수들과도
많이 만나 보았고 여름마다 우리학교 병원으로 실습 온 일본 약대 교환학생들을 지난 8년간 계속 가르쳐
왔다. 일본 약대교수들은 대부분
기초과학 전공자들이며 약대교육과정도 연구와 산업중심이다. 그리고, 일본 약대 졸업반
학생들의 임상능력은 같은 학년의 우리학교 학생들과 차이가 난다. 또, 국제 임상약학 학술지에
발표한 일본 논문의 수도 미국에 비하면 크게 적다.
이는 아마도 미국과 일본의 약사양성 과정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원이 적은 우리나라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신약을 개발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약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신약을 만들어도 그 약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면 소용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컬럼에서 여러
번 지적했듯이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약이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이는 의약품 사용 제도 전반의 문제점에 기인한다고 생각하지만 효과적이고
안전한 약의 사용을 도모해야 할 약사들과 이들을 배출하는 약학대학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약대교육은 단순히 임상약학이니 기초약학이니 하는 좁은 관점이 아니라 양질의 약사 양성이라는 보다 큰 범위의 프로그램적인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다른 전문직종 대학들은
모두 전문 직종의 양성이라는 프로그램 관점에서 교육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과대학은 양질의
의사 양성을 위해 교육하고 있지 기초 의학자나 심장내과 임상의의 배출을 위해 교육하지 않는다. 기초 의학자나 심장내과 임상의는 일단 의대를 졸업한 후 다른 소정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약대의 교육프로그램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질의
약사를 배출하는 것이 우선이고 이후의 경력은 졸업후 과정을 거쳐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약대가 2+4년제라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시작한 이후 이공계 학부생들이 약대로 이탈하여 이공계 교육이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이 문제점은 현 약대교육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이공계 학부의 정원을 늘리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현 약대교육제도하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약대로 진학할 수 없기
때문에, 현 이공계학과 입학생들 일부는 처음부터 약대로의 진학을 목적으로 들어온 학생들이고 많은 경우
결국 떠날 것이다. 이들이 떠날
것을 고려한 정원 조정이 아직 시행되지 않았다면, 교육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주어야 한다.
둘째,
미국의 대학처럼 pre-medicine 등 약대나 의대로의 진학을 목적으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만을 위한 과정을 따로 설치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들은 특별한 학과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약대나 의대로 이탈한다고
해도 이공계 전공 학부생 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세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약대입시에서 PEET의 비중을 낮추고 다른 요소의 배점을 늘려야
한다. 우리나라 약대 입시에서 PEET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 크다. PEET와 비슷한 것으로 미국에는PCAT (Pharmacy College Admissions Test)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UCSF약대의 경우 PCAT 성적을 입학지원에 요구하긴 하지만 이는 지원자가 약대 교육과정을 따라 갈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데
참고자료로만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험성적은 그 날의 운, 컨디션 등 여러 요소가 영향을 끼치고,
PCAT 성적이 높은 학생이 양질의 약사가 된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또, 교육과정을 따라오는 데
중요한 성실성은 PCAT 성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 대신, 전공 성적은 성실성도
알려주는 지표이기 때문에 전공성적을 PCAT보다 좀 더 중요하게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전공성적이
차지하는 비중이 PEET보다 낮은 약학대학들이 많다. 이 비중이 낮기 때문에 학생들이 학부 전공 수업보다는 PEET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국 등
약사직능 관련 경험 여부와 추천서를 입시성적에 크게 반영해야 한다. 약대는 직업학교이므로 약사라는 직능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이를 자신의 경력으로
삼겠다는 학생들을 입학시켜야 한다. 따라서, 약대에 입학하기 전에 제약회사나 지역 또는 병원 약국에서 자원봉사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약사 직능 경험을 요구하게 되면 안정적인 노후 등을 이유로 면허증을 얻고자 하는
무분별한 지원을 줄일 것이다. 또, 직장인이 약대에 지원하고 싶으면 직장에 다니면서도 약사직능 경험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약사에 뜻이 있는
사람들만이 지원하게 될 것이다.
또, 현재 대부분의 우리나라 약대들은 추천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반면 미국 약대들은 적어도 추천서 3장을 요구하며 그 중 하나는 반드시 약사일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옆에서 지켜본 사람만큼 지원자를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추천서는
가장 중요한 입시자료다. 그래서, 학교에서 추천자에게 전화를 걸어서까지
지원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볼 정도다.
물론, 추천서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추천서가 조작될 위험이 있어 입학사정에 사용하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추천서 조작여부는 입학면접에서 추천서
내용의 구체적인 사항을 물어봄으로써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 약사 직능 경험과 추천서를
요구하고 심화인터뷰를 시행하면 학교가 입학사정 평가에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이 늘어난다. 하지만, 이 시간과 노력은
학교의 미래를 위한 투자다. 왜냐하면, 학교의 가장 큰 자산은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필자약력>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7-07-04 1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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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26> 환자가 복용하고 있는 약을 확인하기 힘든 우리나라 의료제도
2주일 전 어머니께서 무릎이 안 좋으시다고 정형외과에 다녀오셨고 지난 주에는 발에 물혹 (cyst)이 생겨서 큰 병원에 다녀 오셨다고 하신다. 복숭아뼈 근처에 생긴 모양인데 주사로 물혹을 좀 뽑아 내는 처치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물혹을 말리는 약을 받아 오셔서 드시는 중이란다.
필자 : 무슨 약을 받으셨어요?
어머니 : 물빼는 약으로 쎄넥스 캡슐 100 mg과 소화제로 엘버스정 이렇게 받아 왔어. 의사 선생님이 약을 하루에 두 번씩 일단 일주일 먹고 다시 보자고 했어. 그런데, 이주 전에 정형외과에서 받아온 약이 있는데 약국에 물어보니 쎄넥스 캡슐과 적응증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건 안 먹고 있어.
필자 : 그 약이름이 뭐예요?
어머니 ; 아크로정.
쎄넥스 캡슐과 아크로정은 각각 셀레콕시브 (celecoxib)와 아세클로페낙 (aceclofenac)을 성분으로 하는 비스테로이드성 진통제다. 환자가 쉽게 알아듣도록 설명하려 했겠지만 비스테로이드성 진통제는 물 빼는 약이 아니고 통증 경감을 목적으로 널리 쓰인다. 비스테로이드성 진통제는 통증 경감에 비교적 효과적이기는 하나 위장관 출혈, 혈압 상승 등 여러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이들은 널리 사용되기 때문에 시판되는 약들 중 위장관 출혈을 가장 많이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래서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
어머니의 경우 물혹 시술 후에 통증완화라는 적응증이 있으므로 쎄넥스 캡슐의 사용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통증이 없다면 굳이 복용할 필요가 없으므로 매일 두번씩 복용하기보다는 필요할 때 – 즉, 통증이 있을 때 - 하루 두 번까지 복용하는 것이 좀 더 약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사례에서 나타난 가장 큰 문제점은 서로 다른 의사에 의해 중복처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즉, 물혹 시술을 한 큰 병원 의사는 어머니가 일주일 전에 정형외과에서 아세클로페낙을 처방받은 줄 모르고 이와 비슷한 쎄넥스 캡슐을 처방했다. 만약 약사에게 두 약에 대해 묻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비슷한 약 두 종류를 복용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노인인데다 위염 병력이 있기 때문에 위장관 출혈 위험이 다른 사람보다 좀 높을 수 있다. 따라서, 두 약을 동시에 복용했으면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다.
환자가 현재 무슨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 아는 것은 정확한 진단과 안전하고 효과적인 처방에 가장 필요한 정보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환자가 의료기관을 방문할 때마다 현재 무슨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를 환자본인이나 약국으로부터 반드시 확인해서 환자 차트에 적게 되어 있다. 이를 “medication reconciliatio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의 사용에 가장 기초가 되기 때문에 의료기관이 medication reconciliation을 하지 않고 보험을 청구하면 메디케어와 같은 공보험로부터 받는 보험지급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그런데, medication reconciliation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만약 병원차트에 환자가 복용하고 있는 약에 대한 기록이 있다면 환자가 집에서 복용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서 이에 따라 기록을 개정 (update)해야 한다 (서로 비교한 다음 개정한다고 해서 reconciliation – 화해 – 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환자가 자신이 복용하고 있는 약을 잘 모르면 약국에 전화해서 알아본 다음 개정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환자가 약을 각각 어떻게 복용하고 있는지도 구체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나도 초진이건 재진이건 클리닉을 방문하는 모든 환자에게 이 작업을 하는데 여기에 적어도 5분은 걸리고, 환자가 복용하고 있는 약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우에는 20-30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보통 15-20분이 진료시간에 할당되지만 환자가 많은 약을 복용하거나 복용하고 있는 약을 잘 모르는 경우에는 이 정도의 진료시간으로 medication reconciliation, 진단, 치료를 모두 충분히 하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약사에게 medication reconciliation 작업에 도움을 청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내가 받는 협진의뢰 중 상당부분을 medication reconciliation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보험수가 등을 이유로 3분 진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진료시간이 아주 짧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주치의라고도 불리는 일차의료제공자 (primary care provider)가 환자 케어를 주관하고 조정한다. 즉, 주치의는 환자 케어의 일종의 허브 (hub)이기 때문에 주치의는 환자가 어떤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에 기록을 보관하고 있어 이를 다른 의사들과 이를 공유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주치의 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고 환자들이 독립적으로 여러 의사를 만날 수 있는데다 의사들끼리 환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제도가 미흡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계열의 약을 중복 사용하거나, 같이 쓸 경우 건강에 위해를 일으킬 수 있는 약을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을까? 진료시간을 현실화시키고 일차의료제공자 제도 등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현재 우리나라 의료제도와 의학교육제도로는 이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국민건강보험이 환자들의 모든 보험처방기록을 보관하고 있고 약국이 이 기록을 접근할 수 있는 것 같으니 이를 이용하면 어떨까? 즉, 약국은 새로 내린 처방약과 그동안의 보험처방기록을 대조하고 만약 문제가 있으면 의료기관에 알리고 대안을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일부 약국에서 자발적으로 중복처방에 대해 병원과 상의해서 처방을 조정하고 있는 것 같으나 어머니의 예에서 보듯이 모든 약국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약국이 중복처방 조정 업무에 대한 보상을 받도록 한다면 더 많은 약국들이 참여할 것이다. 양질의 복약지도를 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도 함께 고려해야 하므로 보험처방기록을 검토하는 것은 약국으로서도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약국이 보험처방기록을 검토하고 의료기관에 알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는 약국과 의료기관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의료기관과 약국의 관계가 현재와 같이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는 수평적인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의 사용은 어느 직역 혼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직종 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필자약력>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7-06-08 0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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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25> 대한의사협회가 만든 성분명 처방에 대한 동영상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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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경제적 혜택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제네릭 약 제도를 생각해야
우연히 대한의사협회가 만든 성분명 처방에 대한 동영상을 보았다. 이 동영상에서는 두 개의 제네릭 약의 예을 이용하여 성분명 처방을 문제삼고
있다. 이 동영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예로 삼은 두 약들이 현행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판정 기준에서
벗어나서 허가받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데 이를 마치 과학적인 사실인양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cEYebu8For0
이 동영상은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더 근본적으로는 신뢰구간에
따라 임상 시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만들어졌다.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결과를 제대로 해석할 줄도 모르면서 그간 제네릭
약을 사용해 온 것도 걱정스럽지만, 신뢰구간에 따라 임상 시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은 더 걱정스럽다. 왜냐하면, 이는 근거 중심 의학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근거 중심의 의학이 우리나라에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성분명 처방은 의사가 처방전에 성분명을 반드시 기입하도록 하는 제도다. 캐나다에서 수행되고 있는 이 제도를 도입하자고 하는 쪽은 약사 단체인데, 이는 현행 제도하에서 약국의 재고부담이 너무 큰 데에 기인한다. 즉, 현행 제도는 의사가 상품명을
처방했을 경우 성분은 같지만 상품명이 다른 약으로 대체조제를 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으면 약사는 그 상품만을 환자에게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의사가 한미약품이 제조 판매하는 한미아스피린 장용정 100 mg을
처방하면 약국은 경동약품의 경동아스피린 장용정은 물론이고 아스피린을 최초로 만든 바이엘사가 제조한 상품조차도 환자에게 교부할 수 없다.
약국이 시장에 나와 있는 모든 아스피린
상품을 비치하고 있어야만 환자가 가지고 오는 모든 아스피린 처방을 조제 교부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약국이 비치하지 않은 상품을
처방받아 오는 환자는 그 상품을 비치하고 있는 다른 약국을 찾아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의사가 어떤
상품을 지정하고 처방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
제약회사와 의사간의 뒷거래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성분명 처방 제도에서는 약국이 한 성분에 대해 몇 개의 상품만을 비치 하면 되므로 약국의 재고 부담이 적다. 또, 환자가
어느 약국을 가더라도 처방된 약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환자의 불편함이 줄어든다. 하지만, 역시 특정 제약회사와
약사간의 뒷거래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럼 어떻게 제도를 개선해야 할까?
제네릭 약을 쓰는 유일한 이유는 싼 가격이므로 환자가 경제적인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효과와 안전성을 평가하기 위해 많은 임상 시험을 거쳐 허가받는 오리지널 약과는 달리 제네릭 약은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만으로
허가를 받는다. 즉, 엄밀히 말하면 제네릭 약은 그 효과와 안전성을 임상시험을 통해 검증받은 적이 없고 단지 성분, 용량, 제형이 오리지널과 같으니 효과와 안전성이 비슷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쓰는 약이다.
그런데, 신약개발 단계에서 가장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임상시험들을 생략했으므로 제네릭 약은 오리지널보다 가격이 싸야
한다. 만약 제네릭 약의 가격이
오리지널 약의 가격과 비슷하다면 제네릭 약을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제네릭 약은
오리지널 약과 비교했을 때 가격이 크게 차이 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가격이 같거나 아예 더 비싸다.
이는 미국의 오리지널 약과 제네릭 약의 가격과 비교해 보면 극명하게 들어난다. 예를 들어, 2016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고지혈증 치료제로 널리 쓰이는 아토바스타틴 10
mg으로 허가받은 제네릭 상품은 모두 86개가 있는데, 오리지널
약인 리피토의 보험약가인 663원과 동일한 보험약가를 받는 제네릭 상품의 수는 전체 80%인 69개에 달한다. 반면 미국은 단 10개 회사만이
아토바스타틴 10 mg 제네릭 약 허가를 받았는데, 오리지널
약의 가격은 약 $9이지만 제네릭 약가는 고작 $0.7에
불과하다 (www.costco.com 참조).
또, 우리나라에서 텔미사르탄이란 고혈압 치료제의 경우, 오리지널 약인 미카르디스 정 40 mg의 2016년 보험약가는 418원인 반면 현대약품이 만든 제네릭 약인 미텔리스정 40 mg은 이보다 비싼 426원이다. 반면 미국의 경우, 오리지널 약가는 $7.1이고 제네릭 약가는 $0.8이다 (이는 결국 우리나라 건강보험 가입자들 돈으로 제네릭
약을 만드는 제약회사들을 보조해 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리지널 약에 비해
가격에 아무런 잇점이 없는 제네릭 약을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현행 제도는 효과와 안전성에 대한 임상 시험 증거도 없는 제네릭 약에 대해 상품명을 허용하고 처방전에 "대체조제 불가"를 기입하면 바꿀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의학적으로 필요한 경우
오리지널 약 처방을 제네릭 약으로 바꾸는 것을 제한할 수는 있어도, 제네릭 약 상품을 의사의 허가 없이
다른 제네릭 약 상품이나 오리지널 약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의사가 제네릭 약을
처방할 경우, 환자의 동의하에 약사가 오리지널 약이나 약가가 같거나 싼 동일 성분의 제네릭 약으로 바꿀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 (물론, 건강보험 혜택의 공평함을
위해, 환자가 오리지널 약을 원할 경우 제네릭 약가와의 차액만큼은 환자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성분명 처방 제도로 바꾸더라도 마찬가지다. 의사가 처방한 제네릭 상품보다 가격이
같거나 더 싼 제네릭 약으로만 환자의 동의하에 약사가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환자가 오리지널 약을
원한다면 비싸더라도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함은 물론이다. 또 어떤 제도로 하든 약사가 약을 교부할 때 제조회사와 로트 넘버에 대한
정보를 환자에게 제공해서 추후에 의사, 환자, 다른 약사들도
환자가 어떤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이렇게 하면 제조과정에
인한 오류로 약화사고가 발생했을 때 교부받은 환자들을 추적할 수 있는 잇점도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제네릭 약을 씀으로써 받는 유일한 혜택은 오리지널 약에 비해 싼 가격이다. 현행 보험약가와 대체조제 제도로는 이 혜택을 환자들이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제네릭 약을 쓰는 혜택을
충분히 받게 하려면 환자가 오리지널 약과 제네릭 약에 대한 선택권을 갖게 하여야 한다. 즉, 환자에게 오리지널 약과 제네릭 약의 가격 차이에 대한 정보를 주고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환자 중심적인 제도이며, 제약회사와 의사 또는 약사와의 뒷거래를 방지할 수 방법이기도 하다.
<필자약력>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7-05-02 0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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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약학] <24> 인공지능과 미국의 의학과 약학교육
최근 대한의학회의 E-뉴스레터에 실려 의약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기고문에서는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의학교육이
개편되고 있다고 전하며 우리나라 의학교육도 이에 뒤지지 않게 대대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공지능 시대가 교육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면서 그 예로,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은 2019년부터 뒤집어진 교실 (flipped classroom)을 모든 수업에 적용하고 임상실습을 과정 초기부터 도입하며 3-4학년에는 집중적이고 심화된 학습과 연구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한다고 전하고, 이런 교육과정의
변화의 이유로 인공지능을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좋은 연구를 통해 의미있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의학교육의 경쟁 내용이 될 것이다. 하버드의대는 그것을 의식하고 변화해 나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이 기고문에서 다루는 두 가지 이슈 중 인공지능과 의약학 직능 변화에 대해서는 지난 달 컬럼에서 다루었다. 이번
주에는 또 다른 이슈인 미국의 의약학교육의 개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많은 미국의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은 현재 교과과정을 개편하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UCSF)의 의과대학도 ‘BRIDGES 교과과정이라
불리는 새로운 교과과정을 2016년 가을학기부터 도입했고, 약학대학은 2018년 가을학기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UCSF의과대학은 존스 홉킨스 의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의대와 함께 미국내 의과대학 중 연구분야에서 공동 3위, 일차의료분야에서도 3위로 선정되는 등 미국내에서 가장 좋은 의과대학 중 하나다(두 분야에서 모두 3위이내인 학교는 UCSF 의과대학이
유일하다).한 학년 학생 수 150여명에 의대 전체 교수 숫자 (full time)만 2400명이 넘는다.
우리학교 의과대학은 의학교육분야도 선도하고 있는데 (전임부학장이자 명예교수인 David Irby, 현재 부학장인 Catherine Lucey,
Patricia O’Sullivan 등 의학교육분야에 쟁쟁한 교수들이 많다), 학교내에
의학교육 및 관련연구만 담당하는 교원과 스태프가 100명이 넘을 정도다.난 작년에 의과대학이 주관하는 Teaching Scholars Program에 참여하여
의학교육과 연구만을 담당하는 교원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또, 약학대학의 교과과정 개편에도 Working Group의 일원으로 참여하였고, Education Policy Committee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하고 있기 때문에 의과대학의 새로운 BRIDGES 교과과정과 약학대학의 새 교과과정이 왜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어떻게 디자인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의과대학의 BRIDGES 교과과정 홈페이지에서 개편의 이유를 밝히고 있듯이 의학과학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교육과정으로는 환자
치료 결과에 큰 개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교과과정의 목적은 환자에게 더 안전하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를 양성하는 것이다. 의학 지식만으로 안전하고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1학년부터clinical
microsystem clerkship이라는 임상수련 과정을 시작하고 의료시스템 개선에 대한 과제를 함께 수행함으로써 환자와 의료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높이며 의료시스템 개선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그리고, 안전하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직역과의 협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약대생, 간호대생, 치대생, 물리치료과 학생들과의 협력교육 (interprofessional education)을 강화하여 1학년때부터
시작하고 있다. 또,의학교육 분야 (domains of science)를 교육과학 (educational science), 임상과학 (clinical
science), 사회과학 (social & behavioral science), 역학 (epidemiology & population science), 생물의학 (biomedical science), 시스템과학 (systems
science) 등 여섯 개의 분야로 분류하고, 각 분야에서 배워야 할 지식과 기술 (knowledge & skills)의 단계를 기본 핵심 (core),
중급 (enhanced), 고급 (advanced)으로
나누어 모든 학생들이 각 분야의 기본 핵심 지식과 기술을 갖추도록 했으며, 분야별 중급 및 고급 지식과
기술은 학생의 선호과 장래 원하는 경력에 따라 다르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의학과학의 분야 (Domains of Science) (출처: www.ucsf.edu)
교육방법에서도 뒤집어진 교실 (flipped classroom)과 같은 교육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를 의학교육에 적용하고, polleverywhere 등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UCSF 약대가
새로운 교과과정에서 추구하는 방향도 1학년부터 clinical
microsystem clerkship의 도입과 다른 직역과의 협력교육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의과대학과 비슷한 점이 많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여름방학을 없애고
대신 계속 교과과정을 진행하여 3년안에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모두 이수할 수 있도록 하여 학생들이 1년 빨리 자신의 경력을 시작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 졸업생의 60%이상은
레지던시 등 졸업후 과정을 밟기 때문에 새로운 3년 교육과정은 이들이 원하는 경력을 빨리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기초과학과
임상과학 과목들을 하나로 묶는 block 교과과정을 도입할 계획이다.
Block 교과과정에서는 과목들이 심순환기, 호흡기 등 장기별로 분류되고 이에 관련된 기초와 임상과학 과목들이 하나로 합쳐진다. 예를 들어, 심순환기 block에서는 심순환기와 관련된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과 심순환기 질병에 쓰이는 약의 유기화학, 약리학, 약동력학, 약물치료학을
함께 교육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약대의 교육과정에는 각 과목에 배정된 학점수가 적기 때문에 학생들은 졸업이수학점을 채우기 위해 학기마다 많은 과목을 들어야 했다. 많은 과목을 들으면, 이론적으로는 다양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지만, 교습과 평가가 암기
위주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시험만 많고 기억에는 남지 않는 문제가 있다.즉, 학생들이 배움 자체보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이수하는 것에 집중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 의과대학에서 1950년대부터
사용해 온 block 교육과정은
– 약대는 교육개편이 왠지 좀 느리다 –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며
학생들의 학습에 좀 더 효율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UCSF 약대의 새로운 교육과정에서는 암기보다 비판적 사고와 문제풀이
능력을 중점적으로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시험 성적보다는 배움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그럼 원래의 이슈였던 인공지능이 미국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의 새로운 교육과정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내가 아는 한 인공지능은 적어도 우리학교 교육과정 개편에 큰 관계가 없다. 의과대학의 BRIDGES 교과과정 개편의 이유에서 인공지능은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우리학교의 새로운 교육과정에 대한 수많은 회의와 토론에서
난 한번도 인공지능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앞서 말했듯이 교육과정 개편의 동기는 안전하고 양질의 의료와 약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와 약사를 길러내는 것이다. 사실,
인공지능이 의사와 약사를 완전히 대체하여 의사와 약사가 “인공지능이 지시하는 대로” 환자를 치료한다면 사회적으로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의사와 약사를 길러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또, “제대로
된 좋은 연구를 통해 의미 있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연구능력을 의미하는 데 이는 임상교육이
목적인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의 교육목적보다는 연구 대학원의 교육목적에 더 잘 부합된다.인공지능이 눈부시게 많은 발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역할에 대해 좀 과장된 면이 있는 것 같다. 인공지능에 대해 대비하고 이를 교육과정에 반영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의료와 약료의 질을 좀 더
높이기 위해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의 교육과정을 평가하고 개선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필자약력>
-서울대약대 대학원 졸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부교수
2017-04-05 1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