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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3> 빛과 소금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고 산 위에 모여든 무리에게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鹽)이 되고, 세상을 밝히는 빛(光)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산상수훈, 마 5:13-16). 내가 졸업한 제물포 고등학교의 모표(帽標)는 세 개의 소금의 결정 위에 등대(燈臺)모양의 고(高)자를 얹은 형상이었다. 이에 따라 교훈도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었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빛과 소금에 깊은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다.1. 먼저 빛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예수님은 “너희도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마 5:16)고 하셨다. 빛의 첫 번째 특징은 당연히 밝음이다. 햇빛이 대표적이다. 햇빛은 물론, 촛불이나 등잔불까지, 크고 작은 모든 빛은 어둠을 몰아 냄으로써 사물을 식별할 수 있게 해 준다. 빛이 없으면 실족(失足)한다. 폭풍우 치는 캄캄한 바다에서 배에게 비추는 한 줄기 등대 빛은 그야말로 생명 줄이다. 빛의 또 다른 특징은 따듯함이다. 한 겨울 햇빛은 햇볕, 곧 양지(陽地)를 만들어 사람이나 짐승들을 모여들게 만든다. 그래서 상대방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정책을 햇볕정책이라고 부른다. 햇빛은 젖은 것을 말려 곰팡이 등을 죽이는 방부, 살균 작용도 한다. 농수산물이나 옷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햇빛에 잘 말려야 한다. 햇빛은 치료 작용도 한다. 내가 1994년 개복 수술을 받은 후 2년 가까이 복부에 장루(腸瘻)를 차고 지낼 때,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 부위를 햇빛에 쪼이곤 했었다. 그러면 장루의 색갈이 신속하게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한 발 더 나가면 햇빛은 생명이다. 요즘 우리 집 옥상에 심은 채소가 무럭무럭 자란다. 햇볕이 잘 들기 때문이다. 햇볕이 안 드는 지하실 같은 데에선 아무리 물을 잘 주어도 식물이 죽는다. 또한 일광욕은 우리 몸에 필요한 비타민 D를 생합성 해 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햇빛은 식물이나 동물에게 공히 생명이다. 햇빛은 표백 작용도 한다. 얼룩이 진 흰 옷을 빨아서 그늘에서 말리면 얼룩이 잘 안 없어진다. 그러나 햇볕에 널어 놓으면 신기하게도 말끔하게 없어진다. 빛은 얼룩뿐 아니라 사람의 죄를 들어냄으로써 죄를 없애준다. 죄는 대개 어둔 밤에 짓는다. 그래서 죄는 어둠의 자식이다. 밝은 곳에서는 사람이 죄를 잘 짓지 않는다.밝은 새벽부터 술 마시고 죄짓는 사람은 없다. 밤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어두운 곳에 밝은 조명을 해 놓으면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없어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교회 기도는 밝은 새벽에 시작되고 술집은 어둔 저녁에 문을 연다. 지금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몸을 돌려 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다. 2. 다음으로 소금에 대해 생각해 본다.소금의 대표적인 작용은 방부(防腐)작용이다. 소금은 음식을 썩지 않게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마 5:13).”처럼 성경은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의 방부 역할을 하라고 가르친다. 소금의 미덕은 겸손과 절제에도 있어 보인다. 소금은 배추의 숨을 죽여 부드럽게(겸손하게) 만들어 주지만, 과(過)하면 고혈압을 유발하기 때문에 최소량만 사용하여야 한다. 요즘 내가 새삼 주목하는 것은 소금의 조미제(調味劑)로서의 역할이다. 음식이 싱거우면 맛이 없다. 적당량의 소금을 넣어야 비로소 음식 맛이 제대로 난다. 그런 의미에서 소금은 가장 기본적인 조미제이다. 고 홍문화 교수님은 1952년 1월, 피난지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세상의 소금이니…. 세상에 들끓는 온갖 싱거움과 오탁(汚濁)을 도맡아 조미(調味)하고 방부하여 주려무나!” (축하시, ‘소금에 붙이는 독백’ 중에서). 아! 전쟁 중에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재주껏 살아 남으라’가 아니라 ‘세상을 썩지 않게, 세상을 살 맛 나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차원 높은 격려를 하신 고매한 가르치심에 가슴이 울린다. 빛과 소금은 크리스찬의 영원한 사명일 것이다.
2020-07-15 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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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2> 객(客)과 빈(賓)
종가(宗家)에서는 종종 객과 빈을 달리 대접한다고 한다. 오래 전 경주 김씨 17대 종손(宗孫)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객이나 빈은 둘 다 종가를 찾아 온 손님이지만, 객은 과객(過客)의 용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주인의 사전(事前) 초청을 받지 않고 지나가다 방문한 나그네 급 손님을 말한다.반면에 빈은 주인의 초청을 받고 온 손님을 말한다. 손님이 종가에 들어서면 종부(宗婦)는 객에게는 식혜를, 빈에게는 수정과(水正果)를 대접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식혜는 손님을 맞는 순간 항아리에서 한 그릇 떠 내 오면 그만이지만, 수정과는 손님이 오기 전에 미리 곶감을 한 두 개 집어 넣고 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떠 와야 하기 때문이란다. 아무리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첫번째 사명으로 삼는 종가라 하더라도 갑자기 들이닥친 객에게는 식혜를 떠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혹시 종가를 방문할 경우, 식혜가 나오나 수정과가 나오나를 보면 내가 객인지 빈인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식혜가 나온다면 ‘아! 나는 그저 객이구나’ 깨닫고 알아서 처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요즘도 초청 받은 손님인 빈은 각종 행사장에서 내빈(來賓), 내빈(內賓) 또는 외빈(外賓)으로 불리며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다. 접수 테이블의 안내인들이 가장 큰 임무는 빈을 정중히 안내하는 일이다. 빈을 객으로 오인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눈치 빠르게 빈을 식별하여 꽃 장식을 윗 주머니에 달아 드린 다음 빈 전용의 지정석으로 안내해야 한다.그러나 객에게는 대개 꽃을 달아주지 않으며 단 아래(壇下)있는 일반석에 알아서 앉으라는 안내(?)를 한다. 요컨대 객은 옛날에는 종가에서 수정과를 못 얻어 먹었고, 오늘날에는 행사장에서 빈보다 한 단계 낮은 예우를 받고 있다. 30여년전인 1987년, 1년간 미국 퍼듀대학에 체류했었는데 그 때 내 신분이 영어로 visiting professor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visiting professor를 객원교수(客員敎授)라고 부르고 있었다. 고위층 인사가 일정 기간 미국 대학에 가는 경우 ‘객원교수로 갔다’라는 기사가 언론에 나곤 하였다. ‘객원’ 교수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상대 기관이 대단한 손님으로 모셔갔다는 이미지가 풍긴다. 그러나 내 경우는 퍼듀대학이 나를 대단하게 여겨 모셔 간 것까지는 아니기 때문에 나를 ‘객원교수’라고 표현하는 것은 좀 건방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 신분을 영어 표현대로 방문교수(訪問敎授)라고 표기하였다. 그러나 훗날 종손인 친구로부터 빈과 객에 대해 배우고 나니 ‘객원교수’가 방문교수 못지 않게 매우 적절한 번역어임을 깨닫게 되었다. visiting professor가 상대기관으로부터 정중하게 초청을 받은 빈 급 교수가 아니라, ‘뭐 오시려면 오세요’ 정도의 방문 허락을 받은 객 급 교수를 말하는 용어라면 말이다. 말이 난 김에 교환교수(交換敎授)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 보자. 한 때 교수가 미국에 가면 ‘교환교수로 간다’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다. 교환교수란 문자 그대로 내가 그 대학으로 가는 대신 그 대학에서도 누군가가 우리 대학으로 오는 교환 프로그램(exchange program)에 따라 오고 간 양 쪽 교수를 지칭해야 옳을 것이다.그런데 실은 객원교수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교환교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뭔가 좀 있어 보이려는 허영심의 산물은 아니었을까? 요즘은 그런 용어에 미련을 두는 교수도 좀 줄어든 것 같다. 교수들의 내용이 충실해짐에 따라 이름에 대한 허영이 줄어든 것 같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사족 하나. 어떤 직함 앞에 명예, 겸임, 객원, 초빙 같은 군더더기(?) 수식어가 붙으면, 오히려 수식어가 없는 직함보다 실속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명예’교수가 되고 나서 깨닫는 사실이다. 그나저나 깨끗이 끝나지 않는 코로나 사태가 걱정이다.
2020-07-01 0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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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1> 홍문화 교수님의 미국 유학일기-3
1955년 9월 20일(화) 맑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반측(轉傳反側)하다가 새벽에 일어나 비행장으로 나오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Box Lunch를 사 들고 TWA 를 타고 8시 30분 Chicago로 향발(向發). 도중에 Kansas에 착륙, 잠시 쉬고 다시 Chicago로 향발. 도중에 Swiss 출신이라는 아름다운 여자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무료(無聊)함을 풀다. Chicago에서 저녁을 먹고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Lafayette로 향발. Chicago의 야경 조감(鳥瞰)은 이재장재(異哉壯哉, 이색적이고 웅장함, 필자 주)! Lafayette에 착륙하니 그야말로 한적한 가운데 Prof. Christian이라는 분이 출영 나와 주어서 고마웠다. Purdue Memorial Union Club에서 1박. 불면증이 심해서 고민스럽다. 9월 21일(수) 흐림. 저녁에 비 조금 옴. 약대에 나가 학장 Jankins에게 인사를 하고 몇 사람 교수들을 만나다. 등록 완료. 화학과의 최상섭, 최규원, 김명수 씨 등을 만나다. (후략) 9월 22일(목) 비. 아침 9시에 Prof. Christian의 Radioisotope Technique 강의를 듣다. Dr. Lee와 회담. Karson Master군의 안내로 Prof. Lasco를 만나 방 문제를 의논함. (후략) 9월 23일(금) 흐림. 최상섭 씨 차로 짐을 YMCA로 옮기다. 오늘 Hospital Pharmacy 실습을 하였는데 젊은 이국 남녀 학생과 어울리니 재미있다. 수강 신청 변경을 하다. 9월 24일(토) 맑음. 오전 중에 강의를 듣고 오후부터는 Stadium에서 Pacific College 와의 축구시합을 구경하다. 이와 동시에 약 770명의 Indiana 고교 브라스 밴드(brass band)의 취주(吹奏)를 보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다채롭다는 문자 그대로다. 이렇게도 생을 즐기는 민족이 지구상에 있었던가. 9월 25일(일) 생략9월 26일(월) 맑음. 참 여기 가을도 하늘 높고 공기 맑고 추석 생각이 저절로 나는 가을이로구나. 애 우는 소리를 길 위에서 들으니 영어만 듣던 판에 신기하다. 종일 학교에서 지내다. Particle Size 측정에 관해 문헌 조사를 하다. 9월 27일(화) 비 온 뒤 흐림. 여기 일기는 말짱하다가도 급변해서 비가 온다. (중략) 오후 4시부터는 대학원생 일동이 모여 학장 지도하에 Seminar를 하는데 오늘은 첫날이라 학장이 학생 및 교직원 일동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화학과 도서실에서 한나절을 지냈는데 일본 저널이 수 종 있는 데 놀랐다. 아이젠하와 대통령이 심장병으로 와병하였다고 한다. 9월 28일(수) 맑음. 말은 빨리 되지 않고 당연히 초조하다. 이것이 소위 Home Sick 의 전조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점심을 빼고 도서실에 틀어박혀 Particle Size에 관한 조사를 하노라니 맥이 난다. Prof. Belcastro와 Special Problem 문제를 상의하다. 차차 사람들의 얼굴이 낯익어 간다. 제발 말도 그렇게 되기를. 저녁 오는 길에 식료품점에 들러 포도를 25전어치 사 가지고 와서 맛을 보니 한국 것과는 전연 딴판의 맛을 가지고 있다. (후략) 9월 29일 흐림, 비 조금. 조반도 못 먹고 첫 시간에 나갔다가 10시 반에야 먹었다. 오늘 Instrumentation 실험은 Viscosity 측정인데 Calibration Standard인 Glycerol을 혼합하지 않은 채로 주어서 후에 알고 보니 헛일을 한 것이 되어 기분이 나쁘다. (후략) 9월 30일 맑음. AKF에서 송금이 오지 않아 답답하기에 Prof. Tichenor를 찾아 상의했더니 아직 안 왔다고 하며 35불을 Emergency Loan으로 얻어 주다. 오후 실습에는 세균실험도 못해 본 것 같은 애들과 같이 하려니 답답하였다. (후략)10월 15일. (전략) 저녁 때 임영신 총장(중앙대)에게 학비 부족 호소 편지를 쓰다. 이싱으로 홍교수님의 65년 전 유학일기 소개를 마친다.
2020-06-17 1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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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0> 홍문화 교수님의 미국 유학일기-2
1955년 9월 18일(일) 맑음. 4시 반에 Wake Island에 도착. 태평양전쟁 시의 격전(激戰)을 머리에 그리면서 훈훈한 대기 속에 비를 맞으며 대합실까지 나오니, 이제야 미지(未知)의 세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감이 절실하다. 1시간 후 다시 출발. 도중에 International Date Line 덕으로 또다시 9월 18일(일요일)의 세계를 날면서 오후 4시 30분 Honolulu 착. 표준시간이 자꾸 변경되는 탓인지 시간의 감각이 혼돈되려고 한다. 나의 바른 옆에는 Boston으로 간다는 광동인(廣東人) 부자(父子)가 타고, 왼쪽에는 대만 청년 2인이 미시간 대학으로 간다고 한다. 광동인과는 필담(筆談)을, 대만 청년들과는 일어, 영어로 담소하다. Honolulu 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을 완료. 다시 한 번 신체검사에 check 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무사통과. 통과하고 나니 마음이 풀린 탓인지 오히려 가슴이 설렌다. Sky Room에서 Refreshments 로 특제 50센트짜리 아이스크림을 주문해 먹었더니 참 진미(珍味)다.공항 전체가 싱싱한 화향(花香)에 싸이고 빨갛게 불타는 저녁노을에 비행장 주변의 신호등은 청색으로 무수히 빛나고 화환(花環)을 목에 건 청년 남녀가 왕래할 때마다 무한히 향기를 풍긴다. 아름다운 하와이. 최씨와 헤어져서 나만 7시 30분에 다시 기상(機上)에 몸을 싣고 San Francisco로 향하다. 나의 꿈이여, 나의 희망이여. 암야(暗夜)를 달리는 광시 (光矢, 빛의 화살, 필자 주)와도 같이 우리 비행기는 일직선으로 태평양을 횡단하고 있는 것이다. 9월 19일(월)아침 7시 30분 San Francisco 공항 착. Limousine 차로 약 40분 걸려 시내로 들어오다. 연도(沿道)의 무수한 자동차. 그림 같은 건물들을 바라보매 이제야 참말 미국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공항 대합실 자동 촬영기에서 사진을 찍다. 20불로 2분간에 저절로 찍혀 나오니 신통하다.Chicago행을 TWA Line으로 Reserve하다. 시내 NBC Building, Airline Terminal에서 차를 내려 우선 2, 3 약국에 들러 California 대학 약학대학을 물었더니 얼른 모르고 전화번호 책을 찾는다, 전화를 건다 하는 것을 보니 약대 출신이 아니었던가. California 대학의 Medical Centre는 16층의 웅장한 건물이며 약대는 그 중 7, 8, 9, 10층을 점유하고 있다. Medical Centre는 의대, 치대, 약대, 간호학교로 구성되어 있다. Pharmacy와 Biochemistry의 Professor인 Dr. Eiler와 Pharma. Chem.의 Assit. Prof.인 Lee(이관화), 두 사람의 안내로 약대를 샅샅이 구경하고 교수 식당에서 회식을 하다. 식당에서 Pathology 교수인 한국인 Professor 문(文)씨를 소개받다. 약대 시설의 완비(完備)는 언어를 절(絶)하며, 특히 물리화학적 시설이 완전함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 연구에 붙어 앉아 있는 사람이 별반 보이지 않는 것은 웬일인가. 오후 2시 30분 학장 Daniel 박사를 회견하고 학교를 하직(下直)하고 시내로 돌아와 만보(慢步)로 시내 구경을 하다. 제반 행인이 그리 많지 않음이 이상스럽다. Wild Rogers Hotel 5층에 여장(旅裝)을 풀고 다시 시내로 나와 저녁을 먹고 영화 구경을 하고 9시 반경에 돌아오다. 5전짜리를 집어넣으면 음악이 나오는 기계가 있기에 흥미 삼아 장난하고, 영화관에서는 막간(幕間)에 경품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San Francisco의 야경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며 5색 다채롭다. 중심가의 사람 구경도 굉장하며 풍부한 상품들 모두 낯선 이국(異國)의 유학자의 시선을 끌게 한다. 길을 잃고 한참 헤매다가 돌아와 홀로 침상(寢床)에 누우니 미 대륙 제1야(夜)가 고달프기도 하고 쓸쓸도 하다.
2020-06-03 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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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9> 홍문화 교수님의 미국 유학일기-1
필자는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2020, 서울대 약학역사관)’란 이름의 평전(評傳)을 편찬하면서 홍 교수님의 막내 따님으로부터 손바닥 크기의 수첩 한 권을 기증 받았다. 홍 교수님(당시 만 39세)이 1955년 9월 17일 미국 퍼듀대학교로 유학을 가시면서 적은 메모였다.유학은 겸직하고 있던 중앙대의 주선 및 후원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수첩에는 여의도에서 출발하여 비행기를 다섯 번이나 갈아타며 퍼듀에 도착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여러모로 감동적인 그 내용을 세 번에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1955년 9월 17일(토요일) 새벽에 눈을 뜨니 비바람이 요란하다. 하필 출발 날이 이 모양이어서 못 떠나게 될 것을 자못 근심하면서, 그래도 기상하여 행장(行裝)을 차리노라니 비도 차츰 부슬부슬해지고 환송객 수삼(數三) 인이 찾아오니 이제는 참말 가게 되는가 보다 실감을 가지다.9시 30분 중앙대 차로 우선 AKF에 들러 Dr. & Mrs. Frasers 부처(夫妻)에게 하직을 고하면서 금으로 된 넥타이핀과 산법통종(算法統宗) 한 질을 기념으로 증정하니 나도 기분이 가뜬하고 받는 이도 기분이 좋아하신다. 놀란 것은 고(高)박사(고주석 중대 약대 학장, 필자 주)가 돌연 Visa 관계로 출국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이다.아무튼 나만이라도 떠나야 할 것이므로 반도호텔로 오니 수십 명의 약학 친구 선배 후배들이 전송을 나와서 맞아 준다. 금지환(금반지)을 오른손 약지(藥指)에 꼈더니 악수할 때마 다 옆의 새끼손가락이 압박되어 심히 아파 나중에는 물집이 생기려고 하므로 부득불 좀 헐겁긴 하지만 왼손에 갈아 끼우지 않을 수 없었다.CAT 회사 버스로 비행장 (여의도)으로 나오는 도중에 입국 관계 서류를 집에다 놓고 나온 것이 생각나 대경실색. 삼각지에서 차를 내려 마침 뒤 따라오는 중앙대 짚차를 타고 흑석동으로 왔다가 부랴부랴 비행장으로 나오다. 몽매(夢寐)에 그리던 미국이다. 기쁜 출발이긴 하나 막상 노부모님을 비롯하여 가족 일동, 친지 여러분과 작별하려 하니 기분이 그리 좋지 못하다. 오후 1시 30분 지나 이륙. 다행히 비도 멎고 운해(雲海) 위를 두둥실 떠서 여정 만리의 길을 떠나니 유쾌한 마음과 감상적인 기분이 교대로 일어남을 금할 수 없다.기상(機上)에서 편지를 두 장, 아버님과 주안(장남) 모(母)에게 내다. 처음 타 보는 비행기라 두고두고 신기해야 할 텐데, 타고 몇 분 지나니 벌써 상식이 되어 버리니 이 어인 일인고. 오후 4시 30분경 동경 착. 동경 국제공항은 깨끗하고 아담하다. 출영(出迎) 나온 김영은(金泳垠, 당시 동경대학 유학 중, 후에 서울대 약대 교수, 필자 주) 씨, 노(盧)씨와 더불어 기내에서 서로 알게 된 학생을 데리고 노씨 댁에 일박하며 여로(旅勞)를 풀고 밤 가는 줄도 모르고 김영은 선생과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 꽃을 피우다. 피곤은 하면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으니 과로의 탓뿐일까? 9월 18일(일)흐리고 저녁때는 약간 빗방울이 뿌리다. 김영은씨, 나, 학생 3인은 동경대학을 비롯하여 동경 시내를 대략 일주하고 “아버지는 사람이 좋아”라는 영화도 구경하고 책도 몇 권 구하노라니 어느덧 시간이 되어 Station Hotel에서 부랴부랴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고 하네다(羽田) 비행장으로 나오다. Station Hotel에서 생후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가부끼(歌舞技)와 야구의 방송이 있었다. 비행장에서 다시 P.A.A. 기를 갈아타는데 Baggage가 정량 초과로 136불이나 운임이 부과된 데는 눈깔이 나올 지경이고 밤새도록 기분이 좋지 않다. 물건 자체의 가치도 136불은 못 될 텐데 책이 들어 있는 손가방은 맡기지 말고 들고 오를 것을 등등 우치(愚痴)가 나오나 사실 초과(超過)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돈이 사람의 마음을 이다지도 크게 지배할 줄은 여정에 오르기 전에는 그다지 몰랐던 것이다. 비행기 여행은 딴 것이 아니라 기선 (機船) 항해와 흡사하며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두통이 나다.
2020-05-20 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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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8> 우울증 - 네 자신을 알려 들지 마라
아주 오래 전에 TV에서 본 이야기이다. 평생 우울증 환자를 치료해 온 어떤 명의(名醫)가 노년에 상처(喪妻)를 하고 우울증에 빠졌단다. 그는 자신이 우울증 환자에게 처방해 왔던 약을 먹으며 정신력으로 극복해 보려고 노력 하였다. 그러나 다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내가 잘 알지도 못하고 환자들을 치료해 왔구나” 깨달았다고 한다. 명의도 자기가 경험해 보지 않은 질병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할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나도 십오여 년 전에 우울증으로 몇 해 동안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깨달은 것은 우울증은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혈압을 정신력으로 낮출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람들은 ‘집에만 박혀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친구들도 만나고 하면 점차 좋아지지 않겠나’ 생각한다.이는 우울증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밖으로 나가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병이 바로 우울증이기 때문이다. 내 담당 의사도 나보고 서울대학교 교내의 명상 겸 체조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라고 하였다. 한 번 가 봤더니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그 프로그램이 나에게는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그래서 바로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정신력으로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증상이 아주 가벼운 경우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산보를 하거나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고민거리가 생기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급격히 증상이 심해진다. 그러지 않도록 주위 사람들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내가 아는 한 우울증 환자는 틈만 나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습관을 갖고 있다. 과거를 보면 뭐하고 살았나 싶고,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미래에도 이는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이렇게 살아 뭐하나 싶고, 매사에 의욕이 없어진다. 심하면 극단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나쁜 것은 “네 자신을 알라”고 조언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깊이 성찰함으로써 ‘자신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철학적으로 더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생 자체에 회의를 품고 힘들게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네 자신을 알려고 노력하라’는 말보다 더 가혹한 말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제 분수를 모르고, 마치 영원히 살 사람처럼 일에 몰입(沒入)해서 사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네 자신을 알려 들지 말고 되도록 시선을 밖으로 돌려라’. 이것이 내가 깨달은 우울증의 예방 및 치료법의 하나이다. 내 경우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방법은 손주들과 지내는 것이었다. 나는 마침 아들네 아파트 위 층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아침 저녁으로 손녀들과 봐줄 수 있었다. 그러면 구태여 내 자신을 돌아 보지 않고도 하루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손주들을 보면 저절로 사랑이 샘솟는데, 이 사랑이 우울증에 대한 백신 겸 치료제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럭저럭 한 5년이 지나자 나도 모르게 우울중의 검은 구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을 때 또 하나 괴로웠던 것은 식욕이 없어지는 증상이었다. 먹어야 사니까 나름 열심히 먹는다고 먹는데, 먹다가 밥그릇을 쳐다보면 아직도 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휴, 언제 이걸 다 먹나’ 한숨을 쉴 때가 많았다. 우울증이 회복되자 식욕은 덩달아 회복되었다. 요즘 이런 저런 이유로 혼자 사는 사람이 많다. 혼자 사는 것이 외롭다면 우울증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손주를 비롯한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최선이지만, 문제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 다시 손주들과 떨어져 살게 된 나는 되도록 뉴스를 멀리하려고 노력한다. 뉴스에 우울증 바이러스가 딸려 올까 두려워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끝으로 이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에 불과함을 밝혀 둔다.
2020-05-06 1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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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7> 故 홍문화 교수님의 격려사
지난 3월 말,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란 책이 서울대 약학역사관에서 발간되었다. 이를 기념할 겸, 그리고 코로나 사태로 졸업식도 제대로 못하고 이번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배들을 격려하고자, 1982년 홍문화 교수님 (당시 66세)이 서울대 약대의 교지 『약원』에 써 주신 글 (“약대를 졸업하는 후배에게”)을 소개한다. 시대를 초월한 고매한 가르침에 감동을 금할 수 없다.두려운 존재새 생명이 움트는 봄과 더불어 우리 약학계에 새로운 후배들이 많이 배출된 것을 충심으로 환영하며, 여러분들의 앞날에 무한한 광명과 성공이 있기를 축복하는 바이다. (중략) 우리의 약학계나 나라 전체의 미래가 여러분 두 어깨에 걸려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들이야말로 두려운 존재라고 아니할 수 없다.그래서 옛 사람들이 ‘후생(後生)은 가외(可畏)라’라는 표현, 또는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는 표현을 써서 후배들에게 모든 소망을 걸었던 것이다. (중략) 부디 바라건대, 나이 먹은 기성세대들이 청순한 후배 여러분들에게 기대를 거는 이 간절한 마음을 음미하여 주기 바란다. 대망(大望)에 벅찬 친애하는 후배들이여! 부디 두려운 존재가 되라.일이관지(一以貫之)“그 사람의 행위가 그의 지식보다도 위대할 때 그 지식은 유익하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여러분들이 그 동안 대학에서 배우고 연구한 지식이 많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식을 사회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 여러분들은 약학자(藥學者)이며, 약학이 사회에서 무엇으로 봉사하는 학문인가를 분명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목표나 목적의식 없이 길을 걷는 사람에게 도달이란 있을 수 없다. (중략).위대한 계획이란 장기계획(長期計劃)이다. 당장 눈앞의 조그만 이해 타산에 얽매어 잔재주를 부려서는 아니 된다. 한번 결심하여 이 길이 바로 내가 평생을 걸어야 할 길이라고 작정이 되면 어떠한 곤란과 애로가 있더라도 뚫고 나가는 데에 인생의 보람이 있는 것이다.현자(賢者)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이다. 대학을 나서서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배우는 것의 종말이 아니라, 바야흐로 이제부터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평생을 두고 겸허하게 배우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강자(强者)란 무엇인가? 자기의 정열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의 목표가 설정되면 모든 다른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강자가 되어야 한다. 부자(富者)란 무엇인가? 자기가 뽑은 제비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다. 여러분들은 이미 대학에 들어올 때부터 약학자가 되겠다는 제비를 뽑아 쥐었던 것이다.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재능과 가능성이 있을 것이지만, 훌륭한 약학자가 되기 위하여 모든 정열을 오르지 약학을 위하여 쏟아야 한다. (중략)사람의 한 평생을 논할 때, 평생을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소위 ‘일이관지(一以貫之)’한 사람처럼 숭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대학이라는 학창은 이를테면 사회의 온실이나 비닐하우스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 첫발을 내디디려고 하는 사회는 때로는 풍우가 몰아치고, 때로는 치열한 약육강식의 경쟁이 소용돌이치는 개방사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경제적 독립이다. 이제는 부모의 품을 떠나서 스스로 독립하여야 한다. 그러나 친애하는 후배들이여!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중략)” 먹고 입을 것을 위하여 직장을 선택하지 말고,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길인가를 골라 택하도록 하여라.결어(중략) 우리나라, 우리 민족도 한 번 세계에서 번쩍하게 소리치면서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잘 되어야 한다. 친애하는 후배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앞으로의 성공 여부가 바로 우리나라의 앞날의 운명과 직결된다. (중략) 모든 행운과 신의 가호가 그대들에게 있기를 축원하여 마지않는다.
2020-04-22 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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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6> 보릿고개
최근 아홉 살쯤 된 한 신동(神童)이 ‘보릿고개’란 옛 노래를 부르는 걸 들었다. 보릿고개를 알 리가 없는 아이가 어쩌면 그리 구성지게 잘 부르는지 감탄하였다. 이 노래에는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草根木皮)의 그 시절, 한 많은 보릿고개여~”란 노랫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보릿고개란 보리 수확 하기엔 아직 이른, 그래서 양식이 다 떨어져 먹고 살아 넘기 어려운 1950년대의 음력 4월 경을 말한다.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동네 사람들도 봄이면 초근목피를 먹었다. 쑥 같은 산채(山菜)의 잎을 뜯어 먹는 것은 물론, 냉이, 달래, 무릇처럼 풀의 뿌리, 즉 초근(草根)까지도 캐먹었다. 나도 여러 번 먹어 본 무릇(Scilla scilloides)은 양지 바른 곳에 자생하는 백합과 식물인데 풀잎과 함께 마늘보다 작은 구근(球根) 부위를 쪄 먹는다. 구근은 찌면 갈색으로 변하는데 맛이 아릿하면서도 달짝지근하다. 지금은 별미로도 안 먹을 맛이지만 당시에는 시골에서 제법 애용되는 구황(救荒)식품이었다. 그러고 보면 단군신화에 나오는 마늘은, 누군가의 주장처럼, 실은 무릇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의 껍질, 즉 목피(木皮)로는 봄에 작은 소나무의 웃자란 맨 윗 줄기 부분의 외피를 칼로 벗긴 후 쪄 먹는다. 무릇과 함께 채반에 올려놓고 솥 안에서 물을 끓여 수증기로 찐 다음 흰색 내피 부분을 이빨로 벗겨 먹는다.이걸 우리 동네에서는 송기(松肌)라고 불렀다. 송기는 질겨서 껌처럼 오래 씹어야 겨우 씹히는데, 씹은 다음 아깝다고 삼키면 소화가 안되어 변비에 걸리기 쉽다. 변비에 걸렸을 때 용변 시 힘을 주면 항문이 찢어지기도 한다. 옛말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그래서 생긴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집은 좀 낫게 사는 편이라 무릇과 송기를 별식(別食)삼아 먹었지만, 이걸 계속 먹다가 영양실조로 부황(浮黃)이 나서 죽거나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황이란 오래 굶주려서 살가죽이 들뜨고 붓고 누렇게 되는 병을 말한다. 오래 굶은 사람은 먹을 것을 보면 허겁지겁 먹기 마련이다.그런 사람에게 “좀 천천히 먹어라, 짜구 날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짜구(자귀의 사투리)란 갑자기 너무 먹어서 잘 걷지도 못하고 뒤뚱거리는 상태를 말한다. 나는 사람이 짜구가 난 것은 못 봤지만 개가 짜구가 난 것은 본적이 있다. (당시엔 개도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보릿고개를 경험했던 우리는 지금은 너무나 잘 먹어 비만이 문제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방송마다 맛있는 음식 만들기, 맛 집 소개, 먹고도 살 안 찌기 등에 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 어쩌면 세상이 바뀌어도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최근 윤서인이라는 작가가 어느 신문에 “오랜만에 찾아 온 조국” 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만화를 보았다. 거기에 “세계 최고의 나라라는 미국보다도 더 나은 점이 많은 자랑스러운 조국! 평균수명, 치안, 위생, 수질, 도시 인프라,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의 나라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죽겠어, 힘들어, 정치가 개판, 나라가 개판, 불지옥, 이것도 나라냐, 헬 등 한국이 얼마나 살기 힘든지 성토하는 모습! 저렇게 죽는 소리들을 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 물론 삶이 어려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다같이 죽는 소리를 하는 것이 뭔가 납득이 안돼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는 “예전에는 조국이 잘 살기를 기도했었는데 이제는 조국 국민들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기도해야겠어요”라는 끝말로 만화를 마무리하였다. 그의 끝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어 초근목피를 먹던 사람들이 하나님 은혜로 이만큼 배불리 먹고 살게 되었는데, 감사는커녕 오히려 더 심한 불평불만을 토해내며 살다니, 생각할수록 하나님 앞에 송구하고 민망할 따름이다. 겸손한 자세로 주신 축복을 감사하게 받을 수는 없는 일일까? 언제쯤 우리는 불평불만이라는 새롭고 더 험한 보릿고개를 넘을 수 있을까? 코로나 난리 중에 옷깃을 여미고 기도드린다.
2020-04-08 1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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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5> 인생 네비
요즘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대부분 네비게이터(이하 네비)를 이용해 길을 찾는다. 네비에 중독이 된 나는 심지어 시내에서 우리 집으로 갈 때에도 습관적으로 네비를 켠다. 요즘 네비는 목적지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최단경로)과 가장 편한 길(추천경로)을 보여주며 선택하라고 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네비가 왕도(王道)를 알려주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길을 안내해 주는 인생 네비까지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인공 지능을 연구하는 과학자 중에 인생 네비를 개발하려는 사람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유전적 특성과 그가 처해 있는 환경 등을 입력한 다음 그가 인생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입력하면, 그 목표에 이르게 해주는 왕도가 제시되는 그런 네비를 꿈꿀 것이다. 반대로 유전적 특성과 환경을 입력하면 그 사람의 미래 모습이 제시되는 네비의 개발도 꿈꿀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 네비는 개발될 수도 없고, 개발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유전자 검사를 통해 예컨대 어떤 어린이가 자기가 사십도 되기 전에 죽을 유전적 특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제가 있어서 현재까지 유전자 검사를 극히 제한적인 용도로만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두 번째로 인생은 유전적 요인들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단순한 시나리오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유전자 가위를 통해 유전자를 편집함으로써 인생 자체를 편집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지만, 이 역시 극히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의 하나, 인생 네비가 개발되는 날이 온다면 이는 축복이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대 재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자신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또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인생 네비를 파는 곳이 있다면 비싸도 한번 사용해 보고 싶을 것이다. 내가 약대 2학년이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네 인생의 목표는 정했냐? 나는 스무살에 목표를 정하고 살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그날 그날 살고 있던 나는 그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워낙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를 사신 분이라서 ‘어떻게든지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공부시켜야겠다’는 일념을 가지셨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직업도 몇 가지 없어서 직장을 선택하기가 나보다는 훨씬 쉬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철이 들어 인생의 목표를 정하셨다니, 내가 사는 태도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자괴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내 인생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답은 물론 답 비슷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훗날 깨달은 것이지만 무얼 생각해 보려면 생각에 사용할 재료들이 내면에 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재료들이 내 안에 없었던 것이다. 밀가루 없이 국수를 뽑으려고 한 셈이다. 그렇다면 생각에 사용되는 재료란 무엇일까? 아마 경험과 지식, 그리고 이로부터 얻어지는 지혜 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 재료 하나 없이 그냥 생 고민만 하니 생각이 공상과 망상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요즘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주변에 길을 묻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물론 물어봤자 상대방은 대개 무책임하게 조언하거나,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답할 따름이다.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이 자신의 삶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의 인생을 훈수할 수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위아래를 구분 말고 여기저기 물으라고 권한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묻고 듣는 와중에, 상대방의 조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 마음 속에 지혜가 만들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앞으로도 인생 네비는 유전 특성이나 인공지능이 아니라 각자 마음 속의 지혜를 재료로 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을 것이다.
2020-03-25 1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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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4> 화목자(和睦者)
어려워도 화목한 집이 있고 부유해도 싸우며 사는 집이 있다. 화목한 집엔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싸우는 집엔 불러도 가고 싶지 않다. 아마 복(福)도 화목한 집에만 들어가고 싶을 것이다. 요즘 코로나 19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이다. 3월 1일 주일 아침에는 유례없이 전국 대부분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 다행히 내가 섬기는 온누리 교회는 CGN이라는 TV방송을 통해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심적 고통이 매우 클 것이다. 최근 스마트바이오팜 대표인 심유란 박사가 페이스 북에 쓴 ‘요물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글이 뇌리에 남는다. “서유기에 나오는 이 거울, 세상에 변장하고 숨어있는 요물들을 다 비추어 원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이 거울! 요즘 페북과 위챗을 보면서, 이번 신종코로나는 영락없는 이런 거울이라는 걸 느낀다 (중략).재난 중에 한 몫 건지려는 사람들부터, 니탓 내탓을 넘어 욕심을 드러내는 사람들, 어떻게든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내 잇속만 챙기려는 사람들, 숨겼던 발톱을 서서히 드러내는 사람들,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 평소에 그렇게 순하게 보였음에도 갑자기 돌변하여 온갖 화풀이를 다 하는 사람들, 팩트인지 아닌지 가리지도 않고 무작정 욕부터 하는 사람들... 참말로 요지경이다.그 가운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 드러내지 않고 재난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 확연하게 대조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원래 인간과 함께 자연에 존재했던 바이러스인데 어느 날 갑자기 "거울"로 변이하여 인간세상의 천라만상을 보여주고 있다. (중략)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물이지만 이처럼 인간에게 겸손함을 가르쳐준다. 인간의 오만은 어디까지일까?”윗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난리 상황에서도 세상이 자기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툭탁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사심 없이 나라를 위해 이런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십중팔구 나쁜 사람이거나 아니면 생각이 짧은 바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이미 자기 신념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그러나 하늘 아래 하나님 말씀 외에 불변의 진리가 어디 있으며, 누가 그 진리를 확신하겠는가? 예컨대 한 때 경부 고속도로 건설을 강력 반대했던 정치 지도자들의 신념도 시대착오였음이 들어난 바 있지 않은가?나는 각종 회의에 참석하였을 때 내 주장을 강력히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내 식견이 부족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지만, 우유부단한 내 성격 탓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사실 회의에서 논쟁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잘 들어보면 이 주장도 일리가 있고 저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어느 의견을 택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 주제를 놓고도 쉽게 흥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 때로는 신기해 보인다.서로 얼굴을 붉힐 정도로 논쟁이 가열되는 낌새가 보이면 나는 얼른 유머와 농담 등을 구사해 양측의 열기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 사실 어떤 일의 성패는 회의에서 어느 쪽 의견을 선택했느냐 보다, 얼마나 화기애애하게 결론을 냈느냐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런 나를 가끔 ‘회색분자’라고 놀리지만, 나는 회색분자의 역할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이런 역할을 하려 들어서는 아무 결론도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가난해도 화목한 집안이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그리고 싸우는 사람은 많아도 화목을 도모하는 사람이 의외로 적다는 생각에서 화목자(和睦者) 역할을 자임해 보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성의 냉철함보다 사랑의 따듯함이 백배천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불평, 불만, 비난, 조소, 조롱 보다는 감사, 위로, 격려, 응원, 후원, 화합이 특히 크리스찬에게 합당한 성품임을 깨닫는다. 지금은 전염병과 싸우고 있는 분들과 다툴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분들을 기도와 물질로 응원 후원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2020-03-11 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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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3> 깜깜함
요즘 서울의 밤은 너무 밝다. 최근 LED등이 보급되면서 불야성(不夜城)이 될 정도로 밤이 밝아졌다. 주택가도 예외가 아니다. 한밤 중에도 별이 안 보이고 전등을 꺼도 방안이 보일 정도로 밖이 밝다. 빛이 너무 흔해졌다는 느낌이다.가끔 손주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는 별이 쏟아질 정도로 밤이 깜깜했었단다’ 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그러나 요즘 애들은 어른들이 “나 때는 말이야” 라고 말할라치면, “Latte is a horse요?” 라고 한단다. 이 유행어는 ‘나 때’를 Latte로, ‘말’을 horse(馬)로 바꾼 말로 ‘이제 옛날 이야기 좀 그만 하세요’라는 의미로 쓰인단다. 우리 손주들은 그러지 않겠지만, 그래도 말 대신 글로 옛날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내가 살던 김포군 검단면 당하리에는 1973년에서야 전기가 들어왔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그 때까지 우리 동네의 밤은 문자 그대로 칠흑(漆黑)같이 깜깜할 때가 많았다. 우리 집의 조명 기구는 주먹 크기만한 흰색 사기 등잔뿐이었다. 솜으로 가늘게 꼬아 만든 심지가 하나 드리워져 있는 등잔의 연료는 석유였다.등잔 심지에 불을 붙이면 성냥 불 하나보다도 어두운 불빛이 간신히 등잔 주변을 밝혀주었다. 어떤 사람은 왜 호롱불이나 촛불을 켜지 않았느냐 묻지만 이것들은 평상 시에는 사용할 수 없는 호화 조명기구들이었다. 호롱불은 석유 소비량이 많고, 촛불은 양초가 비싸기 때문이었다. 나는 1960년 중학생 때부터 인천으로 유학을 나가 누님과 자취(自炊)를 하고 살았다. 그러나 대학생일 때까지도 시골집에 오면 언제나 조그만 앉은뱅이 밥상 머리에 등잔불을 켜 놓고 공부를 해야 했다. 때로는 등잔불에 앞 머리카락을 살짝 태워 먹기도 했다. 방이 어둡다 보니 무의식 중에 자꾸 머리를 등잔불 쪽으로 디밀다가 일어나는 사고(?)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매일 밤 그 불빛으로 바느질을 잘만 하셨다. 인천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가끔은 학교가 파한 뒤 반찬 같은 것을 가지러 1시간 여 시외 버스를 타고 시골집으로 가야만 했다. 그 때는 인천에도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반찬이 자주 떨어졌었다. 고등학생일 때의 어느 날, 시골집에 가려고 막차를 타고 종점인 백석에 내려보니 어느새 밖이 칠흑같이 어두워져 있었다. 1시간 사이에 이렇게까지 깜깜해질 줄은 몰랐다. 거기에서부터 우리 시골집까지는 약 오리(五里)가 넘는 먼 거리였다. 막차에서 내린 지라 인천으로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부득이 나는 무서움을 참고 한발 한발 조금씩 발을 떼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큼 가자 우리 동네로 넘어가는 고갯길 앞에 마지막으로 있는 초가집이 나타났다. 천만 다행으로 희미한 등잔불 하나가 사랑방을 밝혀주고 있었다. 여기에서 나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칠흑을 뚫고 산길을 넘어 30분 거리의 우리 집으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가기를 포기하고 이 집에서 ‘하룻밤 재워줍쇼’ 부탁을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시간에 혼자서 고개를 넘는 것은 무리였다. 우선 전혀 앞이 안 보여서 가다가 개울로 떨어져 다칠 우려가 컸다. 다음으로 그 밤길을 나 혼자 걸어가기가 너무나 무서웠다. 게다가 그 산길은 달 밝은 밤에도 혼자 넘기 무서워 일부러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넘던 길이 아니던가? 가끔 산소 사이로 뛰어다니는 여우인지 개 때문에 놀라기도 했던 길이었다. 결국 나는 초가집 사랑방 앞에 서서 이렇게 여쭈었다. “실례합니다. 새텃말에 사는 아무개의 아들인데 하룻밤 재워주시면 안될까요?” 다행이 사랑방 영감님은 흔쾌히 승낙을 해 주셨다. 그래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고향집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 때 그 집 사랑방에 등잔불이 안 켜 있었으면 어쩔 뻔 했나,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밤이 깜깜해야 별이 보이듯이, 어둠의 무서움을 경험한 사람이 빛의 고마움을 잘 알게 마련이다. 어둠은 어둠과의 싸움이 아닌 빛의 도입으로 완벽하게 없앨 수 있다. 크리스찬들이 빛이신 예수를 따르는 이유일 것이다. 할렐루야
2020-02-26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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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2> 세월
어느덧 2019년이 지나고 2020년이 되었다. 세월이 정말 빠르다. 미래가 어느덧 오늘이 되고 오늘은 순식 간에 과거가 된다. 누군가 나이가 먹을수록 세월이 빨라진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느낌이다. 요즘엔 현재의 순간 순간들이 과거라는 진공 공간으로 맹렬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마치 먼지가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러가는 모습이다. 세월이 흐르는 소리도 차창을 열어놓고 달릴 때 운전자 귀에 들리는 바람 소리처럼 요란하게 들린다.인생은 내려야 할 역이 어딘지도 모르는 기차 여행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기차표에 출발 역은 찍혀있지만 내릴 역 이름은 빈칸이다. 승객들은 처음에는 기대에 들떠 차창 가에 매달려 바깥 구경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창가에 매달렸던 승객들도 하나 둘 의자에 내려 앉는다. 그러다 승무원이 불쑥 나타나 내리라고 하면 내려야 한다. 옆 자리에 앉았던 승객이 갑자기 내리라는 싸인을 받고 허둥지둥 내린다. 대개 황당하다는 표정이지만 드물지만 침착하게 내리는 사람도 있다. 승객에게 주어진 시간은 탑승 후 내릴 때까지로 유한(有限)하다. 그 유한한 탑승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대개는 갑자기 내리라는 말을 들을까 봐 전전긍긍하지만, 어떤 사람은 마치 영원히 내리지 않을 사람처럼 유유자적(悠悠自適) 여행을 즐긴다. 인생에서 시간이란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지난 주일 설교 말씀을 적용해 본다. 시간에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있다고 한다. 크로노스는 시계로 측정되는 시간을 말한다. 이 시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다. ‘시간을 아끼라, 기회를 활용하라’는 말은 이 크로노스 시간을 아껴 쓰라는 말일 것이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일(사건) 중심의 시간을 말한다. ‘2시간이 지났다’고 말 하지 않고 ‘예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시각(視角)이다. 오래 살기 보다는 할 일을 다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영원은 시간이 무한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끝까지 지속되는 것이란다. 성경에서 “세월을 아껴라 (redeem the time!)” 라는 말은 사탄에게 뺏긴 ‘영원’을 되찾아 오자는 말이란다. 크로노스 관점에서 보면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니 우리가 더 빨리 뛰어야 한다. 바쁘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에 가면 스프링복(springbok)이란 양 또는 염소 비슷하게 생긴 포유류 동물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스프링복이 가끔 집단으로 낭떨어지에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구 결과 유난히 식욕이 왕성한 이 동물이 집단으로 다니다가 초원을 발견하면 서로 먼저 풀을 뜯어 먹으려고 앞으로 달려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임을 알게 되었다. 서로 경쟁하다 보면 무려 시속 88km에 이르는 과속으로까지 달리게 되는데, 그러다 갑자기 앞에 낭떨어지가 나타나면 뒤에 오는 무리에게 밀려 그대로 집단으로 떨어져 죽게 된다는 것이다. 크로노스에서 시간이 금(金)이라면, 카이로스에서 시간은 사랑이란다. 인간이 모두 회개하고 돌아 오기 전까지 종말을 선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기다림(시간)은 사랑이라는 말씀이다. 모두 회개할 때까지 오래 참으심이 바로 카이로스 시간이라는 것이다. 설교를 들어보니 성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선현들은 시간의 문제를 포함한 인생의 제반 고민 거리들을 이미 오래 전에 심각하게 고찰해 놓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의문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인간의 지혜로는 근본적인 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1991년에 가수로 데뷔했다 곧 묻혀져 미국의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던 양준일이라는 분(51세)이 30년만에 갑자기 인기의 세계로 재 소환된 일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그가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 “과거가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아요”가 귓가에 맴돈다. 흘러간 크로노스 과거에 지배되지 않는 그의 깨달음이 매우 감동적이다. 독자 여러분, 근하신년(謹賀新年)!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한다.
2020-02-12 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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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1> 홍문화 교수님의 서울역 입성기
홍 교수님은 1955년 9월 17일 미국 퍼듀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셨다가 1년만인 1956년 11월 16일 귀국하셨다. 당시 약업신문을 보면 서북항공(Northwest) 편으로 귀국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나 이는 명백한 오보이다. 당시 서울역으로 귀국 환영 차 나간 사람(학생)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홍 교수님은 귀국할 때에 경비 문제도 있었겠지만 여기 저기 구경을 하며 오실 요량으로 비행기 대신 약 3개월이 소요되는 화물선을 타고 오셨다. 그리고 몇 날 몇 시에 서울역에 도착한다고 사전에 전보를 치셨다. 그래서 학생들이 정시에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갈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분들의 증언이 일치된다. 문제는 화물선이 도착한 항구가 부산인지 인천인지가 헷갈리는 것이었다. 그날 서울역에 환영 차 나가셨다는 이상섭 교수님(서울대 약대 8회, 1954년 졸업)께 여쭈었더니 처음에는 부산항이라고 하시더니 다음 날에는 일부러 내게 전화를 거셔서 아무래도 인천항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은방 교수님(서울약대 13회, 1959년 졸업)께 여쭤보니 부산항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 교수님도 서울역에 나가신 분이었다. “한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라는 책의 집필을 담당한 나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난 12월 6일 (2019)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서울대 신약개발 센터에서 제4회 통일약학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 한독약품에 근무하시던 김조형 선배님 (서울대 약대 12회, 1958년 9월 졸업)이 참석하셨다. 인사를 드리고 말씀을 나누다 보니 이 선배님도 그날 서울역으로 홍 교수님 마중을 나갔었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귀가 번쩍 뜨였다. 그 날 11회 (1957년 졸업, 당시 4학년) 선배들과 함께 12회 동기들 (당시 3학년)도 서울역에 나갔다는 것이다. 어둑어둑한 저녁나절이었는데, 무려 40-50명(여학생 15명 정도 포함)에 이르는 학생들이 서울역에 나갔다고 한다. 그 정도로 홍 교수님의 미국 유학은 당시에 대단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나는 곧 늘 궁금했던 사항, 즉 “부산입니까? 인천입니까?”를 여쭈어 보았다. 김 선배님은 간단히 ‘부산’이라고 대답하셨다. 내가 못 미더워 하자 그러면 같이 서울역에 나갔던 지형준 교수에게 한번 더 확인해 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지 교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지 교수님도 한 칼에 ‘부산’이라고 하셨다. 만약에 인천항이었다면 학생들이 인천항까지 환영을 나가지 않았겠냐고 하셨다. 그래서 다음 날 이상섭 교수님께 전화를 드려 다들 ‘부산항’으로 기억하신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럼 내 기억이 잘못된 모양이라고 인천항설을 철회해 주셨다. 지 교수님에 의하면 그날 서울역에 나간 것은 서울대 약대생만이 아니었다. 중앙대 약대 생들도 다수 서울역으로 환영을 나갔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나 하면 미국으로 유학 가실 당시 홍 교수님은 서울대와 중앙대 약대 교수직을 정식으로 겸직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대학 학생들 간에 ‘홍 교수님은 우리 대학 교수님’이라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대에서는 나운용, 김신근(이상 7회), 이상섭(8회) 등의 조교들, 학도호국단의 허백 단장, 지형준 공작부장(지금의 기획부장에 해당), 백덕우 총무부장, 조항연 문예부장 등(이상 11회, 당시 4학년), 그리고 학년 대표인 김조형(12회, 3학년) 과 이은방(13회, 2학년) 등이 나갔다. 중앙대에서는 1회 입학생인 학도호국단의 손동헌 단장을 비롯한 간부 등이 나갔다. 중앙대 학생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는 것이 손동헌 중앙대 명예교수님의 기억이다. 학생들은 입장권을 사서 플랫폼까지 들어갔다 (이상섭 교수님의 기억). 그 때 서울대 학생들과 중앙대 학생들 간에 가벼운 승강이가 일어났다. 경부선 기차가 도착하면 서로 자기들이 먼저 기차에 올라가 선생님께 꽃다발을 드리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서울대 학생 대표가 먼저 꽃다발을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약학사의 뒤안길은 들여다 볼수록 흥미진진하다.
2020-01-29 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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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90> 역설(逆說)
1. 나는 현직 교수일 때 책을 여러 권 썼는데 그때마다 한 글자도 대학원생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임하였을 때인 1983년에는 나도 영어 책의 번역판을 낼 욕심으로 대학원생들에게 일정 분량씩 번역을 해오라고 시킨 적이 있었다.얼마 후 학생들이 가져온 번역을 보니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학생들이 잘 못 써온 부분을 일일이 수정액으로 지우고 다시 써야 했는데, 그게 내가 처음부터 다시 번역하는 것보다 더 시간이 걸리고 번거로웠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어떠한 책을 쓸 경우에도 학생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고 혼자서 시종을 책임지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또 학생들이 제1저자로 발표하는 연구 논문을 쓸 때, 그리고 나의 연구 프로포잘을 쓸 때에도 주로 나 혼자 일의 시종을 주관하였다. 나는 그러는 것이 교수로서, 또 연구자로서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것을 혹시 완벽주의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는데, 학생들이 가져 온 원고나 논문이 웬만했으면 나도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혹사하는 섣부른 완벽주의를 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동료인 K 교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상당 부분을 학생들에게 시키고 있었다. 나는 K교수의 지시 사항을 수행해 내는 학생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이런 업무를 시키는 것이 교수의 정도(正道)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제법 흐른 시점에서 문득 돌아보니 K 교수의 지도를 받은 졸업생들이 번역도, 논문쓰기도, 프로포잘 작성도 내 제자들보다 훨씬 더 잘 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교수 생활을 정도대로 잘 한답시고 고생 고생한 내가 결국은 능력이 떨어지는 졸업생을 배출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시키지 않고 스스로 다 하는 것이 교수의 정도라는 젊었을 때의 내 믿음에 대한 역설(逆說)이 아닐까?2. 나는 온누리 교회에서 제대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2004년 갑자기 장로가 되었다.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내가 장로가 되자마자 같은 공동체에 유일하게 계시던 선배 장로님이 다른 공동체로 옮겨 가는 바람에 졸지에 나는 우리 공동체의 대표 장로의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다. 그 때의 당혹감은 아무리 설명해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교회 일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내가 공동체의 대표가 되고 나니 난감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다행히 교회 일의 모든 것을 빠삭하게 꿰뚫고 있는 J 집사님이 공동체의 총무를 맡아 주었다. 할렐루야! 나와 J 집사님은 대표 장로와 총무로서 4년이나 섬기게 되었는데, 이는 그 동안 우리 공동체의 장로가 나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J 총무님은 특유의 유능하고 성실함으로 그 4년을 한결 같이 섬겨 주셨다. 4년 임기가 끝나가는 어느 날, J집사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장로님이 일일이 참견하셨으면 총무 역할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겁니다. 내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따라 주셨기에 스트레스 안 받고 4년을 총무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내가 일일이 참견하지 않은 이유는 실은 내게 업무에 간섭할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았다고 하니 어찌 내가 놀라지 않았겠는가? 그 때 나는 실력 없음이 오히려 덕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을 깨닫게 되었다. 3. 위키피디아를 보면 역설(paradox)이란 언뜻 보면 일리가 있거나 있는 것처럼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모순되거나 잘못된 결론을 이끌게 하는 논증이나 사고 등을 일컫는다고 한다. 쉽게 말해 우리 인생이 반드시 사람의 논리에 따라 진행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역설은 실은 하나님의 은혜일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 아무 것도 아닌 자를 택하여 쓰시는 하나님 (고전 1: 27-28), 또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8)”는 말씀을 역설과 관련하여 다시 한번 묵상해 본다.
2020-01-15 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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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89> 송도(松都) 약학대학*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에 재 개교한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는 1946년 9월에 3년제의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승격되고, 1948년부터는 4년제 학부과정을 개설하였으나 좌우 분열과 재단의 불안정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마침 개성(開城)의 유지들은 1949년 인삼 등으로 유서 깊은 개성에 새로운 약학대학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개성에는 개성중학 옆에 넓은 약초원과 유리 온실 등을 갖춘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 생약연구소가 있었다. 그래서 경성약전을 개성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일제 강점기에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전국에는 서울대학교와 이화여대에만 약학대학이 있었다.
약대 신설은 송도중학(松都中學, 당시 6년제)이 속해 있는 송도재단이 맡기로 하였다. 송도(松都)는 개성의 옛 이름이다. 송도재단은 서울약학대학의 한구동(韓龜東) 교수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다. 한 교수는 서울약학대학의 홍문화(洪文和), 이왕규(李王圭) 교수 등과 함께 약대 신설에 나섰다. 명목상의 학장은 송도중학의 8대 교장인 황석주(黃錫周) 선생이, 부학장은 한구동 교수, 교무과장은 홍문화 교수가 맡고, 학교 이름은 ‘송도약학대학(松都藥大)’으로 하기로 하였다.
1950년 4월 25일 마침내 문교부 당국으로부터 송도중학에 약대 병설 인가를 받았다. 이에는 당시 개성에 있던 민관식(閔寬植) 박사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최규남(崔奎南) 박사 (송도중학 1회 졸업생) 등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1989년 송도중학에서 발간한 『송도학원 80년사』를 보면, ‘1950년 개성 유지들의 협조로 40만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3월에 송도 약학대학 설립을 인가 받아 40명의 신입생1)을 받았다’고 한다. 1948년 10월 6일자 『자유신문』을 보면 개성 유지(有志)인 김정호, 윤영선, 공성학 씨가 약대를 위해 토지 15만평과 현금 50만원을 희사하였다고 한다. 기존의 송도중학 부지 25만평에 신설 약대 용으로 희사 받은 15만평을 합쳐 총 40만평이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약대의 건물로는 1924년에 지은 건평 388평의 3층 화강석 건물인 송도중학의 박물관(사진1)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1, 2 층에는 각종 식물과 동물의 표본 등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이 학교 졸업생이자 교사이던 석주명(石宙明)2) 씨가 수집한 나비 표본도 있었다.
약대 건물 20m 앞에는 농구장이 있었고, 거기서 10m 떨어진 곳에는 1939년 3월에 지은 112평 규모의 옥외 수영장도 있었다. 건물 앞에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었고, 그 옆에 기숙사가 3동 있었다. 송도약대는 이 임시 교사에 부랴부랴 강의실, 실험실 및 도서실 등을 만들고 전국에서 40명3)의 신입생을 선발해 놓고, 1950년 6월 26일에 입학식을 열기로 하였다.
홍문화 교수는 인쇄소에서 가지고 온 개교식 프로그램과 입학식장을 점검한 다음 개성을 떠나 홍 교수의 주소지인 인천의 주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월 25일 아침 서울역에서 이왕규 교수와 함께 개성 행 기차표를 끊으려다가 북한의 남침을 알게 되어 개성 행을 포기하였다.
이로써 송도약대는 역사의 물결 속에 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 근현대사의 뒷 페이지에 비감(悲感)이 서리지 않을 날은 언제 올 수 있을지 잠시 옷깃을 여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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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과 달리 생물 등 과학 수업을 하는 건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음.
2) 후에 개성에 있는 생약연구소를 거쳐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으로 근무.
3) 송도중학 32회 졸업생인 임정상(林正相) 등.
* 이 글은 송도중학 32회 졸업생인 허강(許江) 선생(전 문교부 편수관)의 증언 (2019.10.29 청취)과 『한국약업사(韓國藥業史)』, 『송도학원 80년사』, 송도중학교 홈페이지, 『서울대약대100년사』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2020-01-01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