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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3> 기독교는 예수교
기독교(基督敎)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이다. 기독(基督)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 (Christ)’의 한자(漢字) 음역(音譯)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본시(本是)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몸소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일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상숭배, 즉 타락의 길을 걸었다. 직접 보고 들어야 믿기 쉬운데, 하나님을 볼 수도,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던 탓이 컸을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 인성(人性)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 들으면 유일신(神)인 하나님을 잘 믿겠기 기대하셨을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을 믿기 쉽게 해 주실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쓰신 마지막 카드라고 하는 말도 있다. 신이자 사람인 예수님을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더 이상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정신이 번쩍 드는 대목이다.
그럼 예수님을 보고 들은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잘 믿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우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득이 자신의 신성(神性)을 보이시기 위해 적지 않은 기적을 보이셨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자를 고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보이셨다. 그래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열두 제자마저 기적을 볼 때만 놀랄 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잘 믿지 못하였다. 오죽하면 수제자 격인 베드로가 “주(主)는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칭찬하셨겠는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러나 제자 도마는 부활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내가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며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어쩌면 그의 의심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의심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돼라”고 하셨다. 그 순간 도마는 즉각 무릎을 꿇으며 “예수님은 내 주시며 내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 깨달음이 얼마나 크고 놀라웠던지 그 후 도마는 멀고 먼 인도에까지 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힌두교의 나라 인도의 기독교 신자의 수는 현재 3900만명에 이르는데, 그 씨를 도마가 뿌린 것이라고 한다. 인도 남서부 최대의 도시인 첸나이(인구 672만)에 가면 그의 무덤과 그를 기리는 성도마 성당이 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기독교는, 베드로나 도마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과 성품을 갖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기독교 교인은 그분의 가르침대로 서로 사랑해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기독교 교인들의 입에서 교만, 비난, 저주, 멸시, 조롱이 사라지고, 대신 겸손, 위로, 격려, 포용, 용서 등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말이 넘쳐흐르길 소망한다. 빛이 세상을 밝고 따듯하게 만들 듯, 또 소금이 음식을 맛있게 조미(調味)하듯, 사랑만이 세상을 밝고 따듯하며 살 맛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교회에 사랑이 넘칠 때 그때 비로소 세상의 사랑과 신뢰를 받아,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작은 등불이 되기를 염원한다.
이상, 잘 알지도 못하며 감히 내 생각을 적어 보았다. 독자 제현의 관용을 부탁드린다.
2021-10-13 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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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2> 부정부패의 추억
과거에는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했었다. 내가 아는 사례만 하더라도 다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중 몇 가지만을 소개해 본다.
88올림픽 전에 ‘이경규의 양심 냉장고’란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옥상에서 도로를 관찰하다가 빨강 신호등에서 정지선을 지키는 차를 발견하면 뛰어나가 칭찬을 하며 냉장고를 선물로 주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상당 시간을 관찰해도 아무도 냉장고를 타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며칠 전 TV에 나온 터키 여성이, 터키에서는 노란 신호가 들어오면 차들이 더 빨리 달리는데, 한국에서는 다 멈추더라며 부러워하는 것을 보았다. 아직도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는 운전자가 많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나라가 되었다. 또 예전에는 운전면허증 뒤에 5,000원짜리 지폐를 끼워 놓고 다니는 운전자가 많았다. 교통경찰이 차를 세웠을 때 면허증을 제시하면, 그 돈을 빼 가고 교통위반을 눈감아 주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관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런 관행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때에는 시험 중 커닝하는 학생이 많았다. 앞이나 옆 사람의 답안지 보기는 초보적인 커닝이었다. 쪽지에 깨알 같이 메모를 해 와서 답을 적는 사람, 옆 사람과 답안지를 바꿔 답을 쓰는 사람, 심지어 대리시험을 치르는 사람도 있었다. 교수들의 학점 관리도 엉망이었다. 자기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고 A 학점을 준 교수도 있었다. 학점이 불량해서 졸업을 못 하게 된 학생이 읍소(泣訴)하여 거의 모든 교수로부터 A 학점을 받아낸 일도 있었다. 제자 사랑(?)이 지나쳐 제자들에게 약사고시 예상 문제를 누설했다가 서울대 학생들로부터 약사고시 보이콧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 대학마저 도덕적 불감증을 앓던 시절이었다.
동사무소 같은 관공서에 가면 민원인이 너무 많아 자기 차례가 오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 소위 급행료를 담당자에게 몰래 주면 내 일을 남보다 먼저 처리해 주곤 하였다. 1979년 일본 유학을 하러 가려고 여권 발급을 신청하였더니 신원조회를 담당하는 경찰이 찾아와 급행료를 받아 간 일도 있었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대기 번호를 받아 순서대로 일을 볼 수 있게 되어, 급행료를 주는 관행은 완벽하게 없어졌다. 관공서의 업무가 자동화되어 민원인이 오랫동안 기다리는 일이 없어진 덕분도 있을 것이지만, 아무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군대의 부패가 심했다. 은사 고 김신근 교수님이 6.25 전쟁 직후 약제 장교로 근무할 때, 하루는 옷에 생기는 이를 방제(防除)하는 DDT라는 약이 한 드럼 왔으니 인수증에 서명하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약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부대까지 내려오는 도중에 이리저리 다 없어지고 하나도 안 남았다고 하더란다.
내가 50년 전에 경험한 군대도 크고 작은 부정과 부패가 만연(蔓延)했었다. 무언가 부정한 수를 써서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이 있었고, 군대에 가서도 요령을 피워 고된 훈련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장하라고 나온 무를 주고 막걸리를 받아먹는 사례나, 뇌물을 주고 휴가를 가는 정도는 애교에 가까웠다. 더 상세한 이야기는 국격(國格)의 손상 우려가 있어 생략하기로 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참외 서리, 수박 서리, 나무 서리는 무용담의 소재가 되거나 심지어 아름다운 풍습으로 추억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명백한 도둑질로 인식되게 되었다.
부정과 부패는, 최근의 아프가니스탄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나라를 붕괴시킨다. 나라가 붕괴될 상황에 이르면 부정과 부패는 더욱 기승(氣勝)을 부린다. 부정부패와 붕괴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가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지금, 과거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부정부패가 사라지고 법을 잘 지키는 나라가 되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기적이고,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다. 이제 과거의 도덕적 기준으로 살 생각을 하다가는 언제 법의 신세를 지거나 패가망신을 당할지 모른다. 뉴스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2021-09-23 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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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1> 싹싹한 사람
며칠 전 대학 동기 셋이서 점심을 먹는데 한 친구가 나보고 “바쁘세요?’라고 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왜 자기 술잔에 술을 따라주지 않느냐, 안 바쁘면 술 좀 따르라는 농담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상대방이 같이 마시거나 최소한 술잔을 채워 주기 바란다. 그러나 나처럼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은 ‘마시고 싶으면 혼자 마시면 되지 왜 꼭 상대방을 끌어들이려 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당연히 상대방의 술잔이 비었는지 안 비었는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술 마시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나 같은 사람은 남에 대한 배려(配慮)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며칠 전, 큰아들네가 세 손녀를 데리고 우리집에 왔을 때, 아들이 고기를 굽던 나를 돕다가 살짝 손을 데었다. 그 순간 둘째 손녀가 번개같이 냉장고로 달려가 아이스 팩을 꺼내 아빠 팔에 대주었다. 그 민첩함에 놀란 내가 ”냉장고에 아이스 팩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지? “하고 물었더니, ‘냉장고에 뭐라도 찬 물건이 있을 것 같아 달려가 문을 열었더니 마침 이게 있길래 가져온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나와 아내는 손녀의 배려심과 기민함에 감동하였다.
유난히 아내에게 잘하는 사람이 있다. 모 대학의 C 교수와 부부 동반 식사를 할 때마다 아내는 그 교수의 배려에 감탄한다. 그는 맛있는 반찬을 우리 앞으로 밀어 놓는다. 혹시 술을 마시게 되면 급히 약국에 가서 간장약을 사다 먹인다.
둘째 손녀와 C 교수처럼 배려심 깊은 성품을 우리말로 ‘싹싹하다’라고 한다. 그 싹싹함은 타고나는 것 같다. 손녀가 셋이 있어도 둘째가 제일 싹싹한 걸 봐도 그렇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런 성품을 타고나지 못했다. 밥을 먹어도 내가 먹는 데 정신이 팔려 맛있는 반찬을 상대방 앞으로 밀어준 적이 없는 것 같다. 둘러보니 자랄 때 우리 식구들이 다 그다지 싹싹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싹싹한 남자들 하고 오래 사귀면 가끔 부작용이 생긴다. 특히 부부 동반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더욱 그렇다. 결국 아내로부터 당신도 저 사람한테 좀 배우라는 잔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지나치게 싹싹한 사람하고 여행을 갈 때는 아내와 동행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나 같은 사람하고 여행을 하는 남자는 부인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된다. 나보다는 자기 남편이 나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친구에게 득(得)이 되는 사람이다.
나는 성장하면서도 싹싹함을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길래 평생 아내가, 자기에게 내가 잘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내가 하도 그러길래 한번은 내가 “결혼해서 사는 동안 내가 우연히, 또는 실수로라도 당신한테 잘한 적이 없었느냐?” 물었다. 그랬더니 아내는 단칼에 ‘없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기가 막혀서 “그렇다면 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처럼 초지일관(初志一貫), 완벽하게 잘못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며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요즘 아내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큰 손녀로부터 “할아버지, 나한테 하는 절반만 할머니한테 해봐, 그럼 훌륭한 사람이라고 텔레비전에 나오게 될 거야”라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아내를 포함한 타인에게 좀 더 싹싹하고 배려심 있는 언행(言行)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나도 상대방이 그리해주면 기분이 좋아지고 안 그러면 서운해지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들 며느리가 ‘어떻게 지내세요’ 안부 전화해주면 기쁘고, 어쩌다 빵이라도 사다 주면 흐뭇해진다. 며칠 전 옥상에서 내려올 때 큰 손녀로부터 ”할아버지, 계단 조심해“소리를 들었을 때도 기분이 좋았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이런 것 같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이렇다. 나도 이제 아내로부터 싹싹한 사람이라는 평을 한번 들어 봐야겠다. 친구들로부터 ‘너만 혼자 점수를 따면 우린 어떻하냐’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다. 친구보다는 아내이니, 앞으로 더 자주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해야겠다.
어차피 달리 살 방도(方途)도 없지 않은가?
2021-09-08 1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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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0> 지금은 오디션 시대
요즘 티브이에서 트로트 가수 오디션(audition)이 한창이다. 수많은 가수 지망생과 무명 가수들이 출전하는데, 그중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많다. 나는 그 중 김태연이라는 9살 먹은 소녀 가수에 흠뻑 빠져 있다. 솔직히 이들이, 이들을 심사하러 나와 있는 원로 가수들보다도 훨씬 노래를 잘 부르는 경우도 많다. 어떤 심사위원은 출전자가 자기보다 노래를 더 잘 부른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가수로 선발되는 사람은 얼마나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문득 내가 현직 교수일 때가 생각난다. 조교수직 공채에 응모한 젊은 학자들의 공개 발표를 심사할 때마다, 과연 내가 저 사람들을 심사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옛날이니까 내가 교수가 되었지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겠구나 생각할 때도 많았다. 그런 오디션 같은 경쟁을 통과해야 교수로 채용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게 뽑힌 교수들의 실력이 예전과 다를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동네에 있는 작은 음식점들이 코로나 때문에 연쇄적으로 문을 닫고 있어 걱정이다. 그런데 앞 동네에 있는 막국수 집은 코로나 이전보다 더 장사가 잘된다. 맛이 있다고 소문이 나서이다. 점심때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좀 늦게 가면 재료가 떨어졌다고 손님을 받지 않는다. 이처럼 코로나 상황을 맞이하여 맛이 없는 집과 맛집의 운명이 극명(克明)하게 갈리고 있다. 이제 음식점도 맛의 오디션을 통과해야만 살아남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처럼 지금은 가(可)히 오디션 시대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무한경쟁이고, 그 결과로 실력자만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제 아마추어의 시대는 지나갔다. 프로페셔널, 즉 전문가만 살아남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력 배양에 목숨을 건다. 세대 간 경쟁도 치열해졌다. 요즘 젊은이와 어린이들을 보면, 어떻게 그런 높은 실력을 갖추게 되었는지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는 우리 국민 특유의 경쟁적인 학구열 덕분일 것이다. 그 결과로 이제 젊은 학자, 신인 가수, 새로 연 식당 등이 소위 원로들을 밀어내고 있다. 자연스러운 귀결(歸結)이다. 오직 실력만이 대접받는 시대가 되었다. 원로나 고참이라는 사실만으로는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당사자들은 힘들어졌지만, 젊은 학자들의 실력이 향상되고, 어린 신인 가수들이 노래를 잘 부르고, 새로운 맛집이 생기는 것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젊은 전문가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은 국가적으로 좋은 일이다. 그런 나라의 미래가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밝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는 지극히 희망적이다. 물론 우리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된다는 전제 아래에서의 전망(展望)이다.
이쯤에서 우리 같은 소위 ‘어르신’ 세대의 역할을 한번 생각해 본다. 어르신들은 자고(自古)로 젊은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못 미더워한다. 옛날부터 그랬다. 공자님도 당신의 시대를 말세(末世)라고 했단다. 어르신의 또 다른 특징은 나라 걱정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자기 경험에서 우러난 걱정이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를 노파심(老婆心)이라고 폄하(貶下)한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이다.
2세 경영자들은 대체로 창업주의 간섭 때문에 힘들어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제발 자기를 믿고 맡겨 달라고 호소한다. 실제로 창업주의 전적인 신뢰와 위임 덕분에 회사를 크게 발전시킨 2세도 적지 않다. 창업주가 골프에 전념해야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말이 농담만은 아닌 모양이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마치 대장간의 쇠처럼, 오디션이라는 담금질을 통해 단련되었다. 그들의 전문 지식과 능력이 어르신 못지않은 분야가 많다. 그러니 이제 그들을 믿고 그들에게 조국의 앞날을 맡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세월이 흐르니 안 맡길 도리도 없다.
이 지점에서 젊은 세대에게 하나 부탁한다. 주연(主演) 자리를 넘겨받았으니, 범사(凡事)에 어르신의 조언(助言)을 구하라는 것이다. 어르신들은 그걸 좋아한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하지 않던가!
2021-08-25 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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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9> 약학사회지 4호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가 발행하는 ‘약학사회지’ 제4호가 지난 7월 12일 발간되었다. 생일인 3월 2일보다 4개월 정도 늦은 탄생이었다. 그래도 1~3호보다는 많이 빠르게 출간된 셈이다. 3호가 나오자마자 서두른 덕분이다. 이번 4호는 논문(3편), 녹취록(3편), 약학사 관련 도서 소개, 국내외 다른 학회지 게재 약학사 논문 소개, 회무 및 정보로 구성되어 있다.
논문으로는 ’전문약사제도 법제화 의의와 발전 방향 및 병원 임상약학의 발전과정’ (이영희 아주대 병원약제부장), ‘서울대학교병원 약제부 업무와 교육의 역사: 1980년대 이후 변화사항 중심으로’ (조윤숙 서울대 병원약제부장 외 4인),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인 약업자의 판매활동’ (손일선 도쿄대학 대학원 특별연구원)의 3편이 실렸다. 바쁜 가운데도 귀중한 논문을 써 주신 저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녹취록으로는 ‘효성여자대학교-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대학의 역사” (우미희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외 2인), ‘손동헌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1회 졸업생 및 명예교수의 월남과 약학 일생’ (약학사회지 편집팀), ‘한국전쟁으로 잃어버린 꿈: 송도약학대학 입학예정자 3인(윤영자, 김옥균, 손정자)의 구술채록’ (이영남, 주승재, 박주영 녹취)이 실렸다.
첫 번째 녹취록은 1953년에 효성여자대학교 약학과로 개교한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대학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특히 녹취록을 싣는 기념으로 개교 당시 대명동 캠퍼스에서 교복을 입고 있는 약학과 1회 졸업생 5명의 사진을 이번호의 표지에 실었다.
두 번째 녹취록은 지난 6월 15일 갑자기 소천하신 손동헌 교수님의 월남과 약학인생에 관한 것이다. 이 녹취는 약학사분과학회의 주력사업 중 하나인 ‘약계 원로 구술사 정리’의 첫 순서로, 2020년 7월 28일 1차 녹취 뒤 2021년 1월 22일 및 2월 18일에 다시 손교수님과 만나 2회에 걸친 보완 작업을 하였다.
손 교수님은 이 녹취 과정에 매우 정열적으로 협조해 주셨다. 약학사회지 편집위원회는 녹취록 끝에 QR코드를 실음으로써 누구든지 휴대전화를 갖다 대면 인터뷰 당시의 손교수님의 육성을 들을 수 있게 하였다. 송구스럽게도 손 교수님은 녹취가 끝났을 때 거금(200만원)을 약학사분과학회에 희사해 주셨다.
녹취에는 정기화, 손의동, 주승재 교수님과 필자가 함께 하였다. 손 교수님은 몇 시간에 걸친 녹취에도 불구하고 전혀 피로의 기색 없이 건강이 넘치셨다. 최근 손 교수님을 황망히 보내 드리고 나니, 그때 녹취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에 작은 위로를 느낀다. 아울러 약계 원로들에 대한 녹취를 서둘러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 녹취를 할 때 호암교수회관에서 객실 사용, 식사 및 음료 다과 제공 등의 제반 편의를 제공해 주신 서울대 약대 오유경 교수 (당시 호암교수회관 관장)의 배려에 깊이 감사드린다.
세 번째 녹취록은 1950년 개성에 신설된 송도(松都)약학대학에 합격하였으나 개교일인 6월 26일을 하루 앞두고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 입학이 무산된 ‘입학예정자 3인’에 관한 것이다. 녹취는 이영남, 주승재 교수님이 2020년 7월과 11월에 세 차례에 걸쳐 시행하였다. 하마터면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한 ‘당사자’의 생생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기쁘다.
송도약학대학 이야기는 필자가 ‘서울대약대100년사’에 정리해 놓은 바가 있는데, 그 후 2019년 10월 29일 인천에 있는 송도 중고등학교를 방문하여 그 학교가 바로 송도약학대학을 신설했던 학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약창춘추 289 참조).
‘약학사 관련 도서 소개’에서는 ‘약국에는 없는 의약품 이야기’, ‘우아한 방어, ‘약의 역사’, ‘감염의 전장에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약제학연구실 70년사’와 ‘24시간 국민 곁을 지켰던 약사들의 137일간의 기록’을 소개하였다.
마지막으로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된 약학사 관련 논문 소개도 매우 흥미롭고 유익하다.
독자 제현의 약학사회지 일독을 권고드린다.
2021-08-11 1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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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8> 느림의 미학: 나잇값
어머니세요?
내가 근무하던 부대에는 ‘마리아 상사’라는 분이 있었다. “이누무 OO들 말이야, 말을 들어 먹지 않고 말이야” 식으로 말끝마다 ‘말이야’를 붙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마리아’라는 별명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사병들에게 엄청 무서운 상사였다. 휴가를 마친 사병들이 귀대할 땐 대개 그의 집에 들러 조그만 선물(뇌물)을 바치고 들어와야 마음이 편해질 정도였다. 그의 집은 선물 받기에 편리하게 부대 철조망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1973년인가 나도 정기 휴가를 다녀오면서 조그만 떡 보따리를 하나를 들고 그의 집을 찾았다. 저녁나절이었다. 마리아 상사가 들어오라고 해서 어둑어둑한 방으로 들어갔는데, 조금 앉아 있자니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그만 밥상을 들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어머님 되십니까?” 인사를 하였다. 그건 대단히 예절 바른 행동이었다. 그런데 마리아 상사가 “아냐, 우리 마누라야”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난 이제 죽었구나’ 하는 낭패감이 엄습하였다. 부인을 어머니냐고 묻다니!!!! 내가 싸~한 분위기의 그 자리를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지금껏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 나는 ‘한 박자 천천히 반응하자’를 생활의 모토로 삼게 되었다.
결혼해야지?
오래간만에 제자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각별한 친근감을 표시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한번은 오랜만에 만난 제자에게 그런 마음으로 “너 결혼 해야지?”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제자 왈 “지난번에 딸 낳았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하는 것이 아닌가? 괜히 친근감을 보이려다 망했구나 하는 민망함을 느꼈다. 또 한번은 우연히 만난 제자가 “교수님, 저 어디 다니는지 또 모르시죠?” 하는 것이 아닌가. 약대 교수들은 제자를 만나면 “너 요새 어디 다니냐?”고 묻는 습관이 있다. 약대 졸업생들이 특히 회사를 잘 옮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따로 물어볼 말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의 공격성 질문을 듣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아마 내가 과거에도 그에게 같은 질문을 했던 모양이다. 사실 교수들은 제자가 어디 다니고 있다고 대답을 해도 건성으로 듣기 때문에 그 대답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수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이후 나는 제자들에게 ‘어디 다니냐’고 묻지 않는다.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텐데 공연히 물었다가 다음번 만났을 때 공연히 제자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까 두렵기 때문이다. 기억 못 할 일은 아예 묻지도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아픈 애는 집에 있는데요?
친구가 병아리 개업 약사 시절에 경험한 일이라며 들려준 이야기이다. 하루는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약국에 들어섰다. 아이가 매우 아파서 약을 지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고 ‘아니 아이가 이렇게 아플 때까지 왜 가만 계셨어요?’ 하며 아주머니를 나무랐다. 그랬더니 아주머니 왈 “얘는 하나도 안 아픈 애예요, 아픈 애는 집에 있는데요.” 하는 게 아닌가. 순간 친구는 ‘망했구나’ 싶었다고 한다. 민망했다고 한다.
그 후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은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상대방이 다 말해 주게 되어 있다. 괜히 성급하게 먼저 아는 척하다가 망신을 당하지 말자.’
그 교훈 덕분이었을까? 그 친구는 약국으로 성공해서 노년을 잘 지내고 있다.
에필로그
나이가 들수록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린다. 장모님은 이는 나이가 들수록 덜 보고 덜 들으라는 창조주의 섭리라고 하셨다. 나이가 들면 몸의 동작도 느려진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차에서 너무 느리게 내리셔서 짜증이 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내 동작이 그렇게 되었다. 느려지는 것도 장모님 말씀대로 창조주의 섭리라고 생각해 본다.
점잖은 사람, 즉 결코 젊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이 보고 듣고, 너무 빨리 반응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내가 바로 그렇다. 그래서 틈틈이 다짐해 본다. ‘덜 보고 덜 듣고,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하자’. 혹시 이게 나잇값 하며 사는 방법은 아닐까?
2021-07-28 1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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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7> 진정한 소통의 기술, 감동
초등학교 때 친했던 영수와 철수가 오랜만에 만났다. 그동안 영수는 서울의 일류 대학을 졸업했지만 철수는 중학교에도 가보지 못하였다. 둘은 반가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문득 철수가 물었다. “영수야, 뉴스에서 시크릿이라고 나오던데 그게 무슨 소리냐? 너는 영어를 배웠을 테니까 좀 가르쳐 주라”, 그러자 영수가 대답하였다. “철수야, 그건 비밀이야, 비밀”. 그러자 철수는 약간 기분이 나빠져 이렇게 말했다. “얌마, 그게 무슨 비밀이냐?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 줘!”. 그랬는데도 영수는 다시 “야, 정말 비밀이라니까 그러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한 철수는 “너 정말 이렇게 나올래? 내가 중학교도 못 다녔다고 무시하는 거냐?”. 결국 영수와 철수는 시크릿(secret) 때문에 대판 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둘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시크릿이다.
미국의 부잣집 청년이 최고급 스포츠카를 뽑은 기념으로 시골길을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옆을 보니 수탉 하나가 감히 자기 차를 추월해 달리는 것이 아닌가? 살짝 기분이 상한 청년은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랬더니 수탉도 속도를 내서 더 멀리 앞서 달리는 바람에 따라잡을 수 없었다. 엑셀러레이터를 최고로 세게 밟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시골 수탉에게 모욕을 당한 청년은 마을로 들어 가 그 닭의 주인을 찾았다. 그리고 대뜸 그 닭을 자신에게 팔라고 하였다. 값을 비싸게 처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닭 주인은 다른 닭은 몰라도 그 닭만큼은 팔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청년은 ‘100만원을 줄 테니 닭을 내 놓으라’고 했다. 그래도 주인은 막무가내였다. 청년은 닭 주인의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별 수 없이 ‘그럼 달라는 대로 줄 테니 팔라’고까지 했다. 그래도 주인은 요지부동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청년은 ‘도대체 왜 안 파는 거냐?’고 씩씩거리며 따졌다. 그러자 닭주인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에휴, 나도 팔고야 싶지요, 근데 도대체 잡을 수가 있어야 팔든지 말든지 하지요” 하는 것이었다. 아하, 그랬구나! 청년은 지금도 그 닭을 사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결혼식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되었을 때 신랑의 어머니가 시동생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 동안 우리 아이의 취직 등 여러가지로 돌봐 주셔서 정말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시동생에게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옆자리에 앉은 손아래 동서에게도 같은 인사를 하였다. 그 테이블에 있던 주례와 하객 두 세명이 보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위의 세 이야기 중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철수와 영수는 사실 둘 다 아무 잘못이 없지만 말 하는 기술이 모자라 오해를 하게 되었다. 잘못이 없어도 싸움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청년은 수탉 주인이 닭을 비싸게 팔 욕심으로 ‘안 판다’고 고집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닭 주인의 한숨 섞인 대답을 듣고는 금방 상황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성급하게 화부터 낸 것에 민망함을 느꼈다. 가짜 뉴스에 성급히 분개하거나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성급한 반응, 특히 젊지 않은 사람의 성급한 반응은 좀 추해 보인다. 한발짝 느린 반응이 점잖아 보이는 요즘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앞의 두 이야기와 차원이 다른 실화(實話)이다. 이 해프닝을 통하여 우선 시동생이 조카를 정말 잘 보살펴 주었구나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세상에 시동생의 선행이 감동적이다. 다음으로 남들 앞에서 손아래 사람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형수님도 감동이다. 아무리 시동생 내외가 잘 보살펴 주었더라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하기란 용기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이 인사로 형수와 시동생 집안 간에 아름다운 소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감동은 말하는 기술이나 성격의 완급과는 차원이 다른 탁월한 소통 수단이 된다. 문득 감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 본다.
2021-07-14 1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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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6> 어느 약대생의 6.25 전쟁 순국 일기
1949년 3월 1일마침내 사립 서울약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이전에는 경성약학전문학교라는 이름이었으나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개명되었고, 그해 10월 초에 개강해 수업을 시작한 곳이다. 원래 전문대였기 때문에 3년 학제를 따르고 있었지만, 작년에 기존 전문부에 1년을 더해 4년을 공부할 수 있는 학부로 개편되었다고 한다.1950년 6월 25일장충동 부민관 건물에 새로 개관한 국립극장에서 약대 친구인 박찬수와 연극을 보기로 했기에 아침에 집을 나섰다. 찬수는 오늘따라 유난히 표정이 심각해 보여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전쟁이 났다고 했다. 으레 그렇듯 38선 쪽에서 벌어지는 자잘한 교전을 큰 전쟁으로 잘못 알고 겁을 먹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극장에 갔는데, 굳게 닫힌 문에 쉰다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가 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전쟁이 났다고 떠들어 대면서도 국군이 이기고 있으니 다들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1950년 6월 26일아버지께서는 “찬식아, 전쟁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다. 국군은 계속 밀리고 있고, 지금 대통령은 대전에 가 있다”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정보는 지금까지 틀린 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버지께서 “넌 잠시 피난 가 있는 것이 어떻겠냐.”라고 물어보셨다. 아버지께서는 어쩌실 것인지 여쭤 보았더니 “어린 자식들을 네 엄마에게만 맡기고 내가 어떻게 가겠냐.”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나도 피난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1950년 8월 16일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사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날마다 공산주의를 찬양하며 팔에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는 김 아저씨와 같은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아마 공산주의가 뭐냐고 물어보면 대답도 제대로 못 할 것이다. 우리 집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부르주아’인지라 인민군의 감시도 굉장히 심하고, 이미 재산도 많이 빼앗겼다. 오늘은 총 든 인민군 셋이 와서 아버지를 데려갔다. 3일 뒤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문득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1950년 12월 25일믿기지 않지만 내일이 입대일이란다. 내일이면 완전히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는 게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 정체 모를 두려움이 스멀스멀 엄습해 오는 듯하다.1951년 1월 15일요즘 육군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훈련은 정말 힘들다. 처음에는 억울하다는 생각만 들었지만, 내 조국과 내 가족을 내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순간 사명감이 앞섰다. 그리고 가끔은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했다.1951년 2월 15일전세가 좋아지고 있다. 며칠 전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울을 수복한 후, 잠시 시간을 내어 지프를 타고 이전에 살던 서울 집을 방문했다. 다들 피난을 가 있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1950년 4월 18일오늘도 전장에 나갔다. 여기가 지옥이구나 싶었다. 여기저기서 포탄이 떨어졌고, 동료들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죽도록 무서웠지만 뭣 모르는 아이들을 이끌고 전투를 진행해야 하는 소위인지라 무서운 티를 내지 못했다. 한창 전투를 하다 보면, 나와 내 전우들을 죽이려는 인민군복 입은 상대가 그저 악마로 보였다. 왜 전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이유를 찾기 전에 눈 앞의 분노가 그것을 가려버리고 만다. 전쟁통에 혼자 깨어 있으면 오히려 그게 머저리다. 전쟁은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별것 없다. 전쟁은 ….1951년 4월 29일놀랍도록 전쟁에 익숙해지고 있다. 내기 죽으면 누군가 오래오래 슬퍼해 주었으면 좋겠다. 엄마, 이제는 좀 쉬고 싶어. 지치는 것도 지긋지긋해.아, 슬프다. 서찬식 님은 1951년 5월 9일 제3이동외과 병원에서 순국하셨다. 그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 오래 남기를 바라본다. 그의 바람처럼!이상은 ‘서울대 순국 참전 동문 이야기 (일조각, 2021, 45-63)’에서 발췌한 것이다.
2021-06-23 1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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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5> 제13회 약학사 심포지엄
대한약학회 약학사 분과학회는 지난 4월 22일 오후, 서울 양재동 소재 더케이 호텔에서 제13회 약학사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올해에도 작년에 이어 온라인으로 개최하였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크고 작은 약학관련 사항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약학사 심포지엄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이번에 발표된 세 강연의 요지를 소개한다.1. KIST 도핑콘트롤센터(DCC)의 역사
DCC 원장을 역임한 권오승 책임연구원이 DCC의 역사를 개관하였다. DCC는 1984년 석박사 연구원 30여명과 GC와 HPLC 등의 오래된 장비들을 모태로 출범하였다. 그 후 GC/MSD 등의 기기 등이 보완된 후인 1986년 9월 현판식을 거행하였다. 1980년대에는 장비, 인력 및 연구비 지원이 원활하였으나, 그 후 장비의 노후화 및 도핑 분석 이외 분야로의 업무 확대에 따라 국제 올림픽위원회 (IOC)의 공인을 받지 못하는 시련기를 보내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11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14인천 아시안게임’, 및 ‘18평창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의 도핑업무를 담당함으로써 안정기를 맞았다. 2015년부터는 랩 자동화 시스템(LIMS)을 도입함으로써 도핑 업무가 한층 신속, 정확해졌다. DCC는 1987년 9월 세계 15번째로 IOC의 공인을, 2004년 1월에는 WADA(World Anti-Doping Agency)의 공인을 받았다. WADA는 1999년에 설립된 공인업무 담당 기구이다. 현재 WADA의 공인을 받은 나라는 24개국에 불과하다. ‘18평창 올림픽’에서는 3,230개의 혈액 및 뇨 시료 분석하여 총 21건의 도핑 양성 시료를 검출하였다. 이 때 IOC는 DCC가 ‘올림픽 실험실의 모델을 제시’하였다고 극찬하였다.
DCC의 발전에는 권오승 박사처럼 약학을 배경으로 한 연구자들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2. 의약품의 관점에서 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의 역사
심평원의 전문 자문위원인 강신정 박사가 의약품의 관점에서 심평원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의 효시는 1977년 시행된 직장의료보험이다. 당시의 직장의료보험은 전국의료보험협의회(협의회)와 486개의 직장 의료보험조합으로 구성되었다. 협의회 내에 설치된 진료비심사위원회가 진료비의 심사 및 지급업무를 담당하였다. 1979년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사업이 시행되면서 공, 교의료보험관리공단이 설립되자 이 공단의 진료비 심사결과와 기존 조직인 협의회의 심사 결과 사이에 일관성이 결여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1981년부터 ‘진료비 공동심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진료비 심사의 일관성을 도모하였으나, 1988년 보험자 조직으로부터 독립된 진료비 심사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89년에는 제약협회에서 수행하던 급여의약품 등재 및 약가 산정 업무가 의료보험연합회 (협의회의 새 이름)로 이관되었다. 2000년에 국민건강보험법이 제정되고, 진료비를 심사하는 독립기관인 심평원이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의료보험연합회에서 수행하던 진료비의 심사, 급여의약품 등재 및 약가 산정 업무가 심평원으로 승계되었다. 3. 과학수사와 함께 한 약학
숙명여대 약대를 졸업한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근무하여 원장을 역임한 정희선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석좌교수가 국과수의 역사를 소개하였다. 올해로 설립 66주년을 맞는 국과수는 1967년에 의약품 중 메사돈의 함유여부를 판단하는 크로마토그라피법을, 1980년대 후반에는 소변에서, 1990년대에는 모발에서 마약 복용여부를 판정하는 방법을 확립하는 등 내실 있는 발전을 거듭하였다. 범죄 수사와 법과학 분야에서 약학을 근간으로 한 법독성학(Forensic Toxicology)의 역할은 막중하다. 약과 독물에 대한 약리학적 지식과 함께 이들의 인체에서의 흡수 분포 대사 배설에 관한 약학적 지식과 고도의 전문성은 사람의 사인(死因) 규명 및 약물 복용 여부 판정 등의 과학수사에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연자는 과학수사의 실제를 실례를 들어가며 소개하였다.
2021-06-10 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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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4> 학원 유감
1979년 일본에 유학 가 보니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책을 많이 읽고 있었다. 신문이든 만화책이든 틈나는 대로 아무거라도 읽는 것 같았다. 그 때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것은 당연한 귀결(歸結)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학문에 있어서도 우리보다 많이 앞서 있었다. 그런데 앞선 일본 학생들이 우리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으니, 해가 갈수록 한일(韓日) 간의 격차가 더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기적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선진국의 일원(一員)이 되었다. 최빈국이었던 나라가 이처럼 단기간(短期間) 내에 선진국이 된 전례가 없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는 정부와 국민들의 노력도 큰 기여를 했겠지만, 그런 노력을 한 나라가 우리나라만은 아님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발전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임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의 통로 중 하나는 교육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은 못 먹어도 아이들은 학교에 보낼 정도로 높은 교육열을 갖고 있었다. 아이가 공부를 잘 하면 장차 경제적 또는 사회적으로 극적인 신분 상승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부터 전 국민은 자식들 공부에 목숨을 걸었다. 세월과 함께 공부 잘하기 경쟁이 불붙었고 마침내 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은 정권의 정통성을 보완하고자 과외 (課外) 공부를 일체 불허(不許)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당시 그 정책은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공부를 더 하겠다는 것을 나라가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과외 불허 정책은 폐지되었다.
과외가 허용되자 다시 과외 열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이 공부를 더 해서 지식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국민의 지식 수준이 높아질수록 나라가 잘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학생들은 거의 다 시중의 학원(學院)에서 과외 공부를 한다. 얼핏 학원에서 배우는 수준을 보면 우리 세대가 기절할 정도로 높다. 교육의 내용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용성이 높아졌다. 예컨대 초등학생이라도 몇 년간 영어 학원에 다니면 제법 회화를 할 정도로 가르친다. 영어 점수를 100점을 맞아도 미국 사람과 영어 한마디 할 줄 몰랐던 우리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
요컨대 오늘 날 학원에서의 과외 공부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실력을 대폭 향상시키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미래는 매우 밝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된다면’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학원 다니기의 과열’은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우선 학원에 다니는 아이와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의 학력차(學力差)가 너무 크다는 문제가 있다. 이는 학교에서 교사가 수업 수준을 정하기 어렵다는 기술적인 문제 외에도,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불공평(不公平)이라는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두번째로는 학원 공부 때문에 아이들이 제대로 뛰어놀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는 아이들의 발육이나 건강 상의 문제를 일으킬 우려가 크다. ‘체력이 국력’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어릴 때의 발육과 건강이 평생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것임을 생각하면 이는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세번째 문제는 학원 때문에 아이들이 가족과 보낼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아이는 물론 어른들의 정서에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 특히 손주들과 노는 것을 노년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는 나 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에겐 학원 때문에 손주들을 못 만난다는 것은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맥이 빠지는 일이다.
우리 손주들도 학원에 다니느라 엄청 바쁘다. 그래서 정부에 청원(請願)을 내고 싶다. 지나친 학원 보내기를 금지하여 손주들을 가정,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돌려 보내 달라고. 심야 또는 주말에까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은 학대가 분명하니 최소한 이것 만이라도 법으로 금지해 주기 바란다. 진심이다.
2021-05-26 1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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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3> 경성약전 교사는 2층 건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개정판(이하 100년사)의 99페이지를 보면, 맨 아랫줄에 ‘경성약학전문학교(이하 경성약전)는 1933년 11월 현 서울 을지로 6가 중구구민센터 자리에 붉은색 벽돌의 2층 교사를 건축하였는데 그 건물은 그 후 1936년 6월부터 1937년 4월까지 3층으로 증축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100페이지에 1933년에 찍은 2층짜리 교사 사진이 실려 있고, 104페이지에는 1987년에 찍은 3층짜리 교사 사진이 실려 있다.
이 건물은 1945년 광복 후에는 사립 서울약학대학의 교사로 쓰이다가 이 사립대학이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된 1950년부터 1959년 2월까지 40년간 서울대 약대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서울대 약대는 서울대 종합화 계획에 따라 1959년 13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이 교사를 떠나 연건동 28번지에 있던 음악대학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연건동에 있던 음악대학이 을지로 약대 건물로 이전해 왔다. 이 연건동 캠퍼스는 약학대학이 1975년에 관악 캠퍼스에 합류할 때까지 16년간 약학대학의 요람이 되었다. 1976년에는 음악대학도 을지로 캠퍼스를 떠나 관악캠퍼스에 합류하였고, 1987년 남겨진 을지로 교사가 헐리게 되었다. 104페이지 사진은 이 교사가 헐리는 것이 안타까워 약대 동창회장단이 기념으로 찍은 것이었다.
나는 ‘팜텍’이라는 전문지에 ‘한국의 약학교육사’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다. 이번 호 원고에 ‘경성약전 시절에 교사 건물이 3층으로 증축되었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더니 백우현 발행인(서울대 약대 13회)께서 ‘본인이 졸업한 1959년 3월까지 그 건물은 2층’이었다는 이의(異議)를 제기해 해 주셨다. 13회의 졸업 앨범을 찾아봤더니 역시 2층이었다.
그래서 100년사 책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더니, 1937년에 3층으로 완공되었다는 근거로 1935년에 발간된 ‘경성약전일람’을 들고 있었다. 좀 이상해서 확인해 봤더니 1935년 일람(一覽)이 아니라 1944년 일람에 증축 교사 사실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3층으로 증축되었다는 표현은 없었다. 유추컨대 일람에 1937년에 증축 완공되었다라는 표현이 있고, 또 1987년에 찍은 사진에 건물이 3층인 사실로부터 ‘1937년의 증축이 3층으로의 증축’인 것으로 잘못 판단했던 것 같다.
약대 교사로 쓰이던 시절에 3층으로 증축하지 않았다면 음악대학이 사용하기 시작한 1959년 8월 이후에 3층으로 증축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서울대 음대 50년사’를 찾아봤더니 과연 그런 정황이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1944년에 발간된 경성약전 일람에 ‘증축 완공’ 되었다고 한 것은 3층으로의 증축이 아니라 2층의 층고(層高) 내에서의 증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100년사의 99페이지의 ‘3층으로 증축’이라는 표현을 삭제하고, 참고문헌 15번의 연도를 1935에서 1944년으로 바로잡고자 한다. 부실한 조사에 따른 오류에 대해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참고로 1915년 개교한 조선약학강습소는 1918년까지 3년간 서울 중구 장교동 1번지에 있던 장훈학교(長薰學校) 교사를 야간에 빌려 사용하였다. 1918년 6월 20일에 개교한 조선약학교는 한 달 정도 남대문 시장 남쪽에 있다가, 종로 5가의 동대문 분서(分署)로 이전하였다. 조선약학교는 1919년 5월 23일 위에서 언급한 을지로 캠퍼스에 단층 기와집 교사를 짓고 이전하였다. 1930년 조선약학교는 경성약전으로 승격되었고, 경성약전은 1933년 그 자리에 2층짜리 붉은색 벽돌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 건물은 1919년부터 1959년까지 40년간 조선약학교, 경성약전(1930~), 사립 서울약학대학(1946~), 국립서울대 약대(1950~)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서울대 약대는 2015년 그 터에 ‘근대약학교육기관 설립 1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서울대 약대는 1959년부터 16년간의 연건동 캠퍼스 시절을 거쳐, 1975년부터 관악캠퍼스에 합류하여 올해로 46년째를 보내고 있다.
2021-05-13 1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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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2> 약학역사관 보람 3제
1. 3‧1운동과 약대 선배들
며칠 전 ‘한국대학신문’에 ‘서울대 약대생, 제102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 선창’이라는 기사(이원지 기자)가 실렸다. 이 기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서울대학교는 약학대학 제약학과 유주현씨(학생회장)가 제102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 선창자(先唱者) 중 한명으로 참여했다고 2일 밝혔다. 기념식은 행정안전부의 주관으로 국가 주요인사, 독립유공자 등을 모시고 1일,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개최됐다. 이번 기념식에 서울대 학생이 대표로 참석한 것은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에 참여한 조선약학교(現서울대 약대) 출신 독립유공자의 뜻을 이어받는 일이다.
서울대 약대와 3‧1운동의 연관은 서울교의 전신인 ‘조선약학교’(1918~1930)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3‧1운동 약 보름 전인 1919년 2월15일, 조선약학교의 급장이었던 전동환 등이 학우들에게 3‧1운동 참여를 독려하였고 3월1일, 조선약학교 학생들 약 30~40명이 모여 종로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군중에 합류했다.
3‧1운동과 관련하여 출판법, 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15명의 약학교 학생들이 신문을 받았으며, 박규상, 박희봉, 김공우 등 3인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2. 4‧19와 약대 선배들
1960년 4월 동아일보는 4‧19당일 오전 백색 가운을 입고 시위를 하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사진을 싣고, 그 밑에 ‘백색 가운을 입고 데모하는 의대생들’이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보(誤報)였다. 사진 속 학생들은 약대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이 오류를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2016, 이하 100년사)를 편찬하면서 사진 속 인물 한 명 한 명에게 실명(實名)을 붙였다. 이 과정에서 김병년 선배(17회, 당시 2학년)는 동아일보로부터 사진 원본을 구해 주었고, 홍청일, 박정식 선배(15회) 등은 사진 속 인물의 실명과 함께 시위대의 진행 코스 등 당시의 상황을 증언해 주었다. 결국 사진 속의 학생들이 서울대 약대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할 수 있었다.
나는 동아일보의 기사도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박정일 교수에게 부탁해서 동아일보 기자와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박정식, 김한주 선배(79세, 당시 4학년)가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두 선배의 구체적인 증언과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한 실명 제시는 단번에 기자를 설득할 수 있었다.
결국 2017년 4월19일자로 “4‧19 시위 선두에 선 건 의대생이 아닌 약대생들”이라는 제목의 정정기사(http://naver.me/G1ecylNx)가 동아일보에 실리게 되었다. 57년 만에 오보가 바로잡힌 것이다.
3. 6‧25 참전 약대 선배들
한국 전쟁에 참전한 약대 선배들의 이야기는 알려진 사례가 많지 않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는 2017년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 순국 동문 스토리텔링 사업’을 수행했다. 스토리텔러로 선정된 9명의 학생들은 서울대 기록관의 협조를 받아, 전몰 동문 및 참전 동문 중 자료가 있거나 친지 및 지인과 연락이 닿을 수 있는 9인의 동문을 선정해 동문을 직접 인터뷰하거나, 유족, 친지, 지인을 인터뷰하였다.
약대생으로는 고 서찬식 동문이 선정되었다. 서찬식 동문은 1949년 3월 1일에 사립 서울약학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 소위로 전장(戰場)에 나가 순국한 분이다. 이 사업의 결과는 ‘서울대 순국‧참전 동문 이야기’라는 책(일조각, 2021년 3월)으로 발간되었다. 책에는 서 동문이 전장에서 쓴 가슴 뭉클한 편지와 일기가 들어 있다.
이상의 이야기 3제(三題)는 모두 ‘서울대 약학역사관’이 발굴하여 ‘100년사’에 기재한 내용이거나 또는 그 내용을 뿌리로 삼고 있다. 2017년 9월 ‘개정판 100년사’가 출간된 후, 동문들의 발자취 하나하나가 언론의 조명을 받을 때마다 ‘기록된 역사는 결코 무의미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벅찬 보람을 느낀다.
2021-04-28 1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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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1> 회장으로 뽑힌 손자
지난 3월 초순에 초등학교 4학년짜리 손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흔치 않은 일이라 웬 일인가 하고 받았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할아버지, 저 회장 됐어요” 하는 게 아닌가? “그래? 와 축하한다, 근데 어떻게 된 거야?” 했더니, 남녀 합쳐서 7명이 나왔는데 자기와 어떤 친구 하나가 표가 같이 나와서 둘이서 결선 투표를 거쳐 한 표 차이로 자기가 뽑혔다는 것이다.
이 전화를 받고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기뻤다. 첫째는 그 아이가 회장(옛날 말로는 반장)에 뽑힌 것이 좋았다. 사실 나는 평생 반장 한번 못 해 봤다. 초등학교 때는 한 학년에 한 반 밖에 없는 시골의 미니 학교에 다녔는데, 1학년때 반장으로 뽑힌 친구가 6학년 때까지 계속해서 1등을 하는 바람에 나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은 반장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나는 여러모로 깜냥이 못되어서 반장을 꿈도 꿔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학생 때 리더십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손자는 벌써 리더십을 기를 기회가 생겼으니 잘 된 일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더 기뻤던 것은 손자가 그 ‘기쁜 소식’을 즉시 할아버지에게 자랑한 점이었다. 손자는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도착하기 전에, 즉 집에 가는 도중에 나에게 자랑한 것이다. 그것도 흥분된 목소리로!! 나는 처음에는 얘가 집에 도착해서 엄마로부터 “할아버지께 자랑 전화 드려라” 라는 말을 듣고 전화를 건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제가 자랑을 하고 싶어 급히 스스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나는 우리 손자가 좋은 일이 생기면 즉시 전화를 걸어 자랑을 하고 싶은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며칠 후 손자와 식사를 할 기회가 생겼을 때, 손자에게 다음과 같은 칭찬을 하였다. 우선 회장이 된 것을 축하해서 100점을 준다. 둘째, 그에 더하여 할아버지한테 그 기쁨을 참지 못해 즉시 전화를 걸어 자랑을 한 사실에 보너스 100점을 준다. 앞으로도 자랑할 일이 생기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는 마음껏 자랑해라. 그게 가족이다. 그랬더니 손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날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갈 때 평소와 달리 일부러 먼 길을 돌아 갔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등 네 군데 모두에 자랑 전화를 하려면 가까운 길로 가서는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즉석에서 “추가 보너스 100점을 준다!”고 말해 주었다. 기뻐서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식(假飾)없이 말하는 순수한 모습에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에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뭐 어쩌다가 운 좋게 뽑혔어요, 별 거 아니니 너무 요란 떠시지 마세요” 와 같은 말을 내게 했다면 나는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겸양(謙讓)은 어린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위선(僞善)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기쁠 때는 기뻐하고 슬플 때는 울어야 아이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건(?)에서 나를 기쁘게 만든 포인트를 요약하면 다음의 세가지이다. 첫째는 우리 아이가 내가 못 해 봤던 회장으로 뽑혔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손자가 급히, 흥분된 목소리로 자랑하고 싶은 대상에 내가 당당히 들어 있다는 사실이며, 셋째로는 손자가 두루 자랑 전화를 하기위해 일부러 먼 길로 집에 갔다고 말할 만큼 영혼이 맑음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에필로그: 한껏 행복해진 나는 “’똑똑’보다 ‘따뜻’이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보다 자기보다 따뜻한 사람을 좋아한단다. 그러니까 똑똑하다거나 잘 났다고 하는 자랑은 친구들에게는 좀 참아야 한다”라고 마무리 코멘트를 했다. 그랬더니 손자는 ‘프로메테우스로부터 프롤로그(prologue)라는 말이, 그리고 판도라의 남편인 에피메테우스로부터 에필로그(epilogue)라는 말이 나왔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답례로 들려주었다.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더니, 정말 요즘 아이들은 모르는 게 없구나, 조국의 앞날은 밝구나! 감탄하며 손자와 헤어졌다.
2021-04-14 1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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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0> K-맞춤 소파
둘째 손녀 예원이(초5)는 내게 잔소리를 많이 한다. 소파(의자 포함)에 앉을 때 허리를 구부리고 앉으면 제 손을 내 등에 갖다 대고 ‘허리 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또 코가 보이게 마스크를 쓰면 바로 ‘마스크!’하며 경고를 준다. 손녀의 잔소리는 들을 수록 기분이 좋다. 내가 몇 십 년째 듣는 잔소리와는 영 다른 게 신기하다.
예원이의 잔소리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소파에서 앉을 때 허리를 구부리는 이유는 소파의 앉는 자리 폭이 깊어 허리가 등받이에 닿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리가 짧아 특히 더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 중에 사정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 제법 적지 않을 것이다.왜 소파의 걸터앉는 자리를 이렇게 넓게 만들었을까? 모르긴 해도 소파가 서양의 발명품이라 다리가 긴 서양 사람들이 앉기 편하게 만들다 보니 이런 규격이 된 것은 아닐까? 아마 대부분의 서양사람들은 소파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허리가 등받이에 닿을 것이다. 서양인 체격에 맞게 만들다 보니 공연히 내가 손녀의 잔소리를 듣게 된 형국이다.
소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육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던 시절이 생각난다. 1971년 7월에 입대한 나는 남보다 체격(키)이 작아 남들은 안 해도 되는 생고생을 많이 하였다. 우선 지급받은 신발(군화 포함)이 발보다 너무 커서 구보(驅步)를 할 때마다 발이 앞뒤로 움직여 뒤꿈치가 벗겨지기 일수였다. 또 판초(poncho)라고 하는, 비 올 때 입는 우의(雨衣)는 또 얼마나 크고 길던지 한껏 치켜 올려 요대(腰帶, 허리 벨트)로 고정해야 겨우 땅에 끌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 판초도 아마 키 큰 미군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은 길이와 무게는 각각 110cm와 4.2kg인 M1소총이었다. 체격이 왜소한 내가 들고 뛰기에는 우선 너무 무거웠다. 제일 문제는 이 총으로 사격 훈련을 받는 일이었다. 사격의 요령은 가늠구멍의 정중앙과 총열 끝에 있는 가늠쇠를 표적과 일직선이 되도록 맞추어 놓고 격발하는 것이다. 일직선이 된 상태에서 격발해야 총탄이 표적에 적중하기 때문이다. 이 때 눈을 되도록 가늠구멍 가까이 갖다 대 가늠구멍이 넓게 보일 때 일직선으로 맞추는 것이 요령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무리 목을 잡아 뽑아도 눈(얼굴)이 가늠구멍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총이 너무 길어서 가늠구멍은 그야말로 내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당시 사격 훈련에 불합격된 훈련병들은 2인 1조를 이루어 한 사람이 “사격”하면 상대방은 “합격”이라고 외치며 서로 상대방의 따귀를 교대로 때리는 비인간적인(?) 벌을 받았다. 그래서 사격 훈련장은 늘 공포 분위기였다. 그 기합을 받지 않으려고 내가 목을 얼마나 잡아 뽑았겠는가!
M1소총은 미군의 체격에 맞게 고안된 총이다. 6.25 전쟁 때 그런 총을 지급받은 한국
군인들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M1소총은 세월이 흐른 후 당연히 한국인 체격에 맞게 개발된 K1소총으로 대체되었다. 아마 그 때부터는 우리나라 군인들이 사격때마다 목을 잡아 빼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다시 소파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특히 더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등을 구부리지 않고 앉을 수 있는 소파(의자 포함)를 만들기 위해서는, 걸터앉는 부위를 지금보다 훨씬 짧게 만들면 좋지 않을까? 아니면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듯 개개인의 신장 특성을 고려하여 소파를 맞춤 제작하면 어떨까? 소총의 경우 M1대신 K1을 개발하여 목을 잡아 빼지 않아도 되도록 만든 것처럼, 소파도 이제 K 맞춤 소파를 만들자는 이야기이다. 십중팔구 국민 허리 건강에 막대한 도움이 될 것이다.
‘21세기는 맞춤 약학 시대’라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런데 이 ‘맞춤’이라는 시대 정신을 소파(의자)에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K 맞춤 소파!’, 손녀의 애정 어린 잔소리 덕분에 획기적인(?) 아이디어 하나를 얻었다. 다만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손녀의 허락없이 이렇게 공개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다.
2021-03-31 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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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9> 장모님의 일생
우리 장모님께서 지난 2월 6일 98세로 소천하셨다. 늘 건강하셨는데 작년 설에 찾아 뵈었더니 모처럼 본인의 일생 이야기를 장편 소설처럼 말씀해 주셨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어 집에 돌아오자 마자 그 이야기를 컴퓨터에 입력해 놓았다. 그 이야기의 일부를 공유하고자 한다.
장모님은 일제 하인 1924년에 충남 산골(사곡)에서 태어나셨다. 1943년, 19살 어머니는 공주 읍내의 고모 댁에 가서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읍내 국민학교(?)에 동원(動員)되어 일본인(군인?)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약 20명의 처녀들이 함께 동원되었다. 당시는 일제 말기라 인력 동원이 극심하였다. 한국 남자는 건강하면 군인으로 징병(徵兵)되었고, 덜 건강하면 노동자로 징용(徵用)되었으며, 처녀들은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었다.
어느 날 일본인이 동원된 처녀들의 뒷머리를 한 웅큼씩 가위로 잘랐다. 여기저기서 아이고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잘린 처녀들은 조만간 정신대(挺身隊)로 끌려 나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도망 나온 어떤 여성이 소문을 냈다. 그 때 일본인 밑에서 일하는 한국인 조수 한 사람이 장모님에게 “재주껏 도망 가라, 걸리면 너도 죽고 나도 죽으니 알아서 하라” 귀뜸을 했다. 어머니는 그 길로 도망쳐 고향인 사곡으로 돌아왔지만 언제 끌려갈지 몰라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장모님의 아버지는 따님을 서둘러 시집보내려 들었다. 결혼한 사람은 정신대로 끌려 나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70리 떨어진 충남 유구라는 곳에 두 아들이 딸린 32살 먹은 한 아무개 (후에 나의 장인)라는 홀아비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장티푸스로 상처(喪妻)해서 홀아비가 된 것이라 했다.
장모님의 아버지는 몰래 유구에 가서 사윗감을 보았다. 홀아비는 마치 인력거 꾼처럼 키만 크고 말라 보였다. 장모님의 아버지는 아무리 아무나에게 시집을 보내 정신대를 피해야 할 상황이긴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싶지 않으셨다. 그래서 집(사곡)으로 돌아오다가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를 만나 신세 한탄을 하였다. 사정을 들은 친구는 집안 내에 젊고 잘 생긴 총각이 있다며 급히 사람을 보내 불러왔다. 청년을 본 장모님의 아버지는 너무 마음에 들어 하며 내일 당장 사주 단자를 보내라고 서둘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장모님은 그렇게 좋은 총각이 징병에 끌려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모부를 통해 알아보았더니 역시 그 총각은 한 달 후에 징병으로 끌려 나갈 사람이었다. 총각 집에서는 징병에 끌려 나가기 전에 씨라도 받아 놓겠다고 결혼을 서둘렀다. 당시는 징병에 끌려가면 거의 100퍼센트 전사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장모님의 아버지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 일로 장모님은 아버지한테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흐르도록 매를 맞았다. 실제로 그 총각은 징병에 끌려 나간 후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장모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장인은 사곡까지 찾아가 장모님께 청혼을 하였다. 장인은 “실은 내가 36살이고 딸린 아들이 넷이나 되는데 괜찮겠냐”고 솔직하게 물으셨다. 장모님은 ‘기왕지사 나이는 먹은 것이고 아이는 둘이나 넷이나 그게 그것’이라며 청혼을 받아들였다.
마음이 급한 장인의 아버지는 장모님을 모셔오려고 사곡까지 70리 길에 4인교 가마를 보냈다. 장모님이 타고 보니 4인교에는 유리 창문이 달렸으며 안에 이불도 있는 등 2인교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안락하였다. 4인교 이야기를 하실 때 처음으로 어머님의 표정에 미소가 보였다.
두 분은 1945년 해방되던 해, 즉 장인이 36세, 어머니가 21세 때에 결혼하셨다. 그 후 두 분은 남매를 낳았고, 딸은 후에 내 아내가 되었다. 시련은 계속되어 전쟁 중에 장인은 장티푸스에 걸려 1952년에 43세로 작고하셨다. 결혼한지 7년, 어머니가 27세, 아들 딸이 각각 5살, 3살 때의 비극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고난의 일생을 사셨지만 우리 장모님은 늘 인자하고 온화하셨다. 할렐루야.
2021-03-18 10: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