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361> 약학사회지 제5호
2014년 창립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가 발행하는 ‘약학사회지(藥學史會誌)’ 제5호가 지난 10월 발간됐다. 이번 5호에는 원보(原報) 2편, 단보(短報) 1편, 원로 녹취록 2편, 약학사 관련 회고 4편과 ‘약학사 관련 도서 소개’, ‘약학사 관련 국내 및 일본 논문 소개’, ‘회무 및 정보’ 등이 실려 있다. 이하에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1. 논문
(1)원보인 ‘1950년대 의약품 신문광고와 여성 의약 문화’(이영남, 충북대학교 명예교수)에는 의약품 구매나 소비에 소극적이었던 한국 여성이 일제강점기에서 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적극적인 소비자로 바뀐 과정이 서술돼 있다.
(2)두번째 원보인 ‘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의 역사’(박혜영 이화여대 명예교수 외 2인)에는, 1945년 제1회 입학생을 모집한 이화여대 약학대학의 역사와 발전상이 소개돼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화여대 약대의 역사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의미가 큰 논문이다.
(3)단보인 ‘천연물화학 연구의 개척자 우린근 박사’(이은방 서울대 명예교수)에는 1940년부터 서울대학교 생약연구소(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천연물과학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연구소의 발전을 주도했던 고 우린근 교수의 공적이 실려 있다.
2. 녹취록
(1)첫 번째로 서울대 이상섭 명예교수의 ‘냉전기 동구권 학회 참석기’가 실려 있다. 1981년 불가리아에서 열린 학회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한 이야기인데, 서울대 김진웅, 주승재 교수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상섭 교수는 1954년 서울대 약대를 8회로 졸업한 원로이다. 이 녹취록은 약학사회지 제4권에 실린 고 손동헌 교수에 이어 두 번째로 실린 ‘약계 원로의구술사’이다.
(2)두번째는 ‘광복 후 혼란기에 학교를 지켜내다: 서정규 서울약학대학 4년제 제1회 졸업생의 회고’라는 제목의 녹취록인데, 심창구, 김진웅, 주승재 교수가 서정규 님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서정규 님은 1948년 서울약학대학 전문부를 제1회로 졸업한 후 1950년 다시 4년제 학부를 제1회로 졸업한 특이한 학력의 소유자이다. 이 녹취록에는 일제(日帝)로부터 광복 후 학교(사립 서울약학대학)의 혼란상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학교를 미군정에 팔아 넘기고 일본으로 도주하려 했던 일본인 교장 타마무시(玉蟲)에 맞서 당시 학생과 동문 등이 어떻게 학교를 지켜냈는가 하는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안타깝게도 서정규 님은 약학사회지 제5권 발간 도중에 작고하셨다.
3. 약학사 관련 회고
여기에는 (1)‘임상약학 도입 배경과 Pharm. D. 양성에 대한 소회’(김종국 서울대 명예교수) (2)‘한국 신농약1호, KH502의 개발 배경 및 과정’(황기준, 전북대 명예교수) (3)‘우리나라 약학교육 발전에 공헌한 한국약학교육협의회 설립 10년에 붙여’(문애리 덕성여대 교수) (4) ‘서울약학대학 전문부 졸업(1회)후 화공업계에 투신한 나의 아버지 김선봉’(김형순, 김선봉 님의 아들)의 글이 실렸다. 애통하게도 김종국 교수님도 이 글을 마지막으로 작고하셨다.
4. 약학사 관련 도서 소개
지난 1년간 국내에서 발간된 약학사 관련 도서 중 ‘한국약학교육협의회 10년’(한국약학교육협의회), ‘한국약제학회50년사’(한국약제학회), ‘역사가 묻고 화학이 답하다’(장홍제), ‘도핑의 과학: 경기장을 뒤흔든 금지된 약물의 비밀’(최강),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전사(前史)’(심창구)등의 내용이 소개돼 있다.
5.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된 약학사 관련 논문 소개
국내 논문 3편과 일본 약사학회지에 실린 논문 1편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6. 회무 및 정보
약학사분과학회 뉴스레터 8호를 전재(轉載)함으로써 분과학회의 올해 활동을 알 수 있게 했다.
7. 끝으로 분과학회의 정관과 ‘약학사회지’의 투고 규정이 실렸다.
제한된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발간된 약학사회지의 일독을 권고드린다. 아울러 약학사와 관련해 약계 제현의 투고 및 제언을 부탁드린다.
2022-12-28 15:56 |
[기고] <360> '일본의 풍속' - 삶 속의 작은 깨달음14
1979~1982년, 일본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 몇 가지를 적어 본다.
성 풍속이 문란해 보였다
당시 대로변 극장에 포르노 영화 간판이 걸려있는 곳이 많았다.사람들은 별로 거리낌(?) 없이 포르노 극장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서점에 가면 주간지 비슷한 잡지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펼쳐보면 거의 예외 없이 앞뒤 화보에 여성의 누드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은 태연하게 그런 잡지들을 사 보고 있었다. 하도 태연스러워서, 원래 그들의 태도가 맞는 것이고,우리처럼 쉬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었나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모습들이 결코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였다
처음 동네 은행에 갔을 때문에 들어서는데 여러 명이 큰 소리로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나는 내 뒤에 vip고객이 들어오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 바로 나를 보고 인사를 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일본인은 왜 이렇게 친절할까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일본인은 남을 매우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사무라이 시대였는데, 칼을 차고 지내다 보니 서로 말이 친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총을 차고 사는 미국인들이 처음 본 사람에게 하이!와 탱큐!를 남발(?)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한다. 일본말에 욕이 별로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나는 ‘사람을 무서워하는 나라, 일본’ 이라는 주제로 십여 편의 글을 ‘약창춘추’에 썼고, 같은 주제로 2번 정도 일본 전문가들 모임에서 강연을 한 바 있는데, 많은 사람이 내 주장에 동의해 주었다. 나는 요즘도 ‘칼 찬 사람에 대한 무서움’으로 일본 문화를 해석해 보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데, 다소 견강부회(牽强附會)도 있을지 모르겠다.
매사에 정교하였다
일본인들은 예컨대 도로 공사를 하면 공사가 끝나는 대로 바로 도로를 복구하였다. 또 인도와 집 사이 빈 공간도 옛날에 어머니가 부뚜막 바르듯 정교하게 마무리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파내는 공사 따로, 복구하는 공사 따로 함으로써 도로를 오랫동안 파헤쳐 놓던 시절이었다.
요즘 우리동네에 인도를 파고 배수관을 묻는 공사를 하는 걸 보니 우리도 관을 묻자마자 바로 인도를 복구할뿐더러 마무리도 일본 못지않게 정교하게 하는 것이었다. 대단한 변화에 새삼 감동을 느꼈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이 아마 이런 것인 모양이다.
숨막히는 사회라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일본 동경대 약대 학생들은 4학년이 되면 각자 여러 연구실에 배정되어 1년 동안 연구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때부터 학생들은 그 연구실 교수의 문하생으로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 같았다.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집에도 그 학생들의 명단이 실릴 정도였다.
회사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대개 교수의 추천서를 받는다. 그러지 않고 뽑으면 앞으로 교수가 졸업생을 보내주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한다. 회사가 직원을 승진시키거나 해외에 유학을 보낼 때에도 학생 시절의 지도교수와 상의하는 절차를 거친다. 또 회사가 직원을 대학원에 보낼 때에도 고위 상사가 직원을 데리고 교수를 찾아가 잘 지도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한다. 직원을 대학원에 보내는 것이 마치 특혜를 베푸는 것처럼 생각하던 우리나라 회사와는 정반대의 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사회의 치밀한 짜임새를 답답해하고, 오히려 우리나라의 적당한(?) 거침을 좋아하는 일본 사람도 적지 않아 보였다. 맨날 검토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본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처럼 독재해서라도 일을 시원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사람도 만나 보았다.
일본에서는 고고하기만 하던 교수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일본의 회사원들이 우리나라로 출장 오고 싶어함에 놀란 적도 있었다. 이는 일본 사회의 숨 막힘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는 본능의 표현 같았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우리와 너무 다른 일본이었다.
2022-12-16 16:52 |
[기고] <359> 커피믹스 개발의 주역 조항연 약사
2022년 11월 5일, 경북 봉화에 있는 아연 광산의 수직 갱도에 9일이나 갇혀 있던 광원(鑛員) 둘이 걸어서 생환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들은 인스턴트 믹스 커피의 대명사인 ‘커피믹스’를 먹으며 버텼다고 한다. ‘봉화의 기적’을 일으킬 정도로 ‘커피믹스’는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올해 11월 8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한국을 빛낸 발명품’의 하나로 커피믹스가 선정된 바 있다고 한다. 즉 2017년 특허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커피믹스가 훈민정음, 금속활자, 온돌, 거북선에 이어 ‘한국을 빛낸 발명품’ 제5위로 선정되고, 이태리 타월과 첨성대가 6~7위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커피믹스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필자는 커피믹스를 인류 문화사에 주목할 만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
커피믹스의 위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커피믹스를 누가 발명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다행히 필자가 서울대 약대 동창회보 제100호(2022년호)를 편집하는 중에, 1957년 서울대 약대를 제11회로 졸업하고 당시 동서식품㈜의 생산담당 기술자였던 조항연 약사가 커피믹스의 개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흥분되는 마음을 억누르고 필자가 파악한 커피믹스의 개발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아이디어가 떠오르다
조항연 약사가 회사에 다니던 어느 날 등산이나 낚시를 하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먹일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커피 1술, 크림 1술, 설탕 1술을 섞어서 봉지에 담아 5봉짜리 포장물을 만들어보니 담배갑 1개 크기가 되었다. ‘이거 잘 하면 좀 팔리겠네’라는 생각이 들어 1봉지를 개봉하여 컵에 쏟은 다음 더운 물을 붓고 차 숟갈로 저어보았는데, 몇 번을 시도해도 깨끗이 용해되지 않고 무언가 불용물이 표면에 뜨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커피의 산성 때문에 커피크림 성분 중의 하나인 '카제인 나트륨'이 '카제인'으로 석출되어 표면에 뜬 것이었다. 이런 때는 '약산의 염'을 조금 넣어주면 완충제 작용을 하여 카제인이 석출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약대에서 배운 것이 생각난 것이었다. 그래서 소량의 인산 나트륨, 인산 칼륨 등을 봉지에 넣어 섞은 다음, 더운 물에 넣어보았더니 과연 부유물이 생기지 않고 깨끗하게 녹았다.
2. 파우치(pouch bag)형 커피믹스의 출현
초기의 커피믹스는 네모난 파우치 봉투에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봉지 포장기 몇 대를 돌려 생산 공급하였으나, 순식간에 제품이 인기를 끌어 판매량이 엄청나게 증가하는 바람에 이런 구식 포장으로는 판매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적당한 포장설비를 찾던 중에 1초에 10봉을 포장하는 포장기가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당장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 포장기 회사를 찾아 갔다. 정말 분당 600포라는 경이로운 속도로 설탕을 포장하는 기계였다. 그 자리에서 포장기 구입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3. 막대(stick bag)형 커피믹스의 출현
세월이 조금 지나면서 회사 내의 마케팅 및 판매부서로부터 커피믹스도 시판 설탕의 포장처럼 막대형으로 포장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국제포장전시회에 다녀봐도 막대형 포장은 전부 기껏해야 3~4줄로 포장하는 기계뿐이었다.
할 수 없이 발전성이 보이는 국내의 모 기계제작소와 상호 협력하여 세계 최초로 10줄짜리 포장기를 개발하였다. 이 포장기의 능률은 기존의 외국제 보다 3배나 높았다. 16년 전인 2006년의 일이다.
·부언
조항연 약사는 커피믹스가 동서식품과 동료들의 협력으로 개발된 품목이므로 본인이 단독개발자로 기록되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였다. 그러나 대학 동기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커피믹스 개발의 실질적인 주역이었음은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본인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 바이다.
2022-11-24 22:47 |
[기고] <358> '교수가 되다' - 삶 속의 작은 깨달음13
18) 하나님 은혜로 서울대 약대 조교수가 되다
학위를 받고는 곧장 귀국하였다. 1982년 9월이었다. 할 일도 없는 나는 틈틈이 모교의 약제학연구실에 나가 실험실 후배들을 지도하곤 하였다. 약제학실에는 K,L 교수님이 재직하고 계셨고, 몇 년 전 정년퇴직하신 우종학 교수님의 후임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그때가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어려워 신임 교수 채용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어 있었다. 다음 해인 1983년이 되자 다행히 신임교수 채용이 재개되었다. 나는 약제학 전공에 원서를 냈다.
나는 원래 약품분석실에서 석사를 하였고 박사 학위는 일본에서 하였기 때문에 약제학연구실과 특별한 연고가 없었다. 또 내가 도쿄대학에서 공부할 때 일시 도쿄대학에 오신 L교수님께서 “약제학 전공 신임교수 채용 1순위는 L군이야”라고 말씀하신 바도 있어서 내가 채용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L군이란 당시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약물동태학을 전공한 L선배였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L선배가 원서를 내지 않았다. 내게는 기적과 같은 행운이었다. 그래서 나 말고 약제학에 원서를 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지만 결국 내가 신임 조교수로 선정되었다. 만약에 그때 L선배가 원서를 냈더라면 십중팔구 나는 선정되지 못했을 것이다. L선배로 하여금 원서를 내지 않게 하심으로 내가 선정되게 역사(役事)해 주신 하나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여러모로 부족한 나를 채용해 주신 두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훗날 L선배도 마음이 변해 약제학이 아닌 다른 전공에 지원하여 교수가 되었다. 이 일을 통해 역시 인생은 하나님 은혜로 풀리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19) 교수로서 첫발을 떼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83년 2월 25일 서울대학교로부터 약학대학 제약학과 조교수 임용 예정 통보를 받았고, 3월 30일 문교부 장관 명의로 조교수 14호봉 발령을 받았다. 임용 기간은 1986년 3월 29일까지의 3년이었다. 드디어 김포 검단면 당하리 새텃말의 촌놈이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것이다. 그 후 재임용과 부교수, 교수로의 승진을 거쳐 2013년 8월까지 30년 6개월 동안 교수직에 봉직하였다.
나는 주로 약물동태학(pharmacokinetics)과 생물약제학(biopharmacutics), 그리고 약물송달학(drug delivery)분야에 대해 강의하고 연구하였는데, 비교적 새로운 내용이라 매우 재미있었다.
나는 대학원 학생들의 연구 결과를 되도록 학술지에 발표하도록 지도하였다. 1987년에는 C군의 석사 학위 논문을 J. Pharm. Sci.(76, 784-787(1987))에 실었다. 각종 테오필린 정제의시험관내 용출(溶出)속도를 측정하면 사람에게 투여한 후의 타액(唾液, saliva) 중 농도를 예측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타액 중 농도가 혈중 농도와 비례함은 이미 우리가 밝힌 바 있으니, 결국 용출 속도를 측정하면 혈중 농도를 예측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내가 교수가 되어 지도한 논문 중 최초로 권위 있는 국제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이었다.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 보지 못하던 시절이라 매우 기뻤다.
당시에는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려면, 타이프라이터로 친 원고와 손으로 그린 그림 (Figure)과 표(Table) 각 3부를 딱딱한 종이 사이에 끼워서 등기 우편으로 편집장에게 보내야 했다. 그리고 편집장의 회신을 연애 편지 답장 기다리듯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오랜 세월(보통 한 두 달)을 기다려 마침내 편집장의 편지가 우편함에 도달하면 두근거리는 마음,두려운 마음으로조심 조심봉투를 뜯는다.
편지 첫 줄이 가장 중요했다. “I am pleased to”로 시작되면 채택된 것이고, “I regret”이면 거절된 것이었다. 문장이 좀 길어도 ‘수정후 게재 또는 재심사’라고 쓰여 있으면 잘 수정 보완하면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느낌이 생생하지만, 다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2022-10-27 20:13 |
[기고] <357> '유학 중 연구실 안팎' - 삶 속의 작은 깨달음12
(16) 자기 연구 주제에 대한 주인 정신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자기가 연구할 주제를 스스로 정해 제안하게 하셨다. 학생은 전 교실원 앞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의 주제와 배경 그리고 의의를 발표해 지도교수의 승락을 받아야 했다. 독창성이 없거나 의미가 없는 주제는 교수님을 설득할 수 없었다. 학생이 발표를 잘 해도 대개는 ‘네 제안에 문제가 많은데 잘 극복할 자신이 있으면 한번 해보라’고 소극적인 승낙을 해주실 뿐이었다.
나중에 내가 교수가 되고 보니 이 방법은 지도교수로서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우선 만의 하나 과제가 잘 진행되지 않아도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학생 본인이 져야 했다. 자기가 제안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도쿄 대학생들은 자기 연구 주제에 대해 주인정신을 가지고 그 가치를 관리하는 것 같았다. 가끔 두 세명이 모이면, 서로 ‘네 연구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대답하는 모습을 여러번 봤다. 또 학생들은 남보다 더 많은 논문을 쓰려고 경쟁하였다. 당시(1970년대 후반)의 일본 약학계는 외국잡지에 많은 논문을 내려고 열을 올릴 때였다. 교수님은 갯수나 늘리려고 논문은 써선 안된다고 한가한(?) 잔소리를 하셔도 될 정도였다.
내가 나중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해 보니 당시의 서울대 대학원생들에게는 자기 과제에 대한 주인정신이 부족하였다. 세미나 시간에 “너는 왜 이 연구를 하고 있는가?” 물었더니 “교수님이 시키셨잖아요?”라고 대답하는 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또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려는 의지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요즘 서울대 대학원생들은 국제학술지 중에서도 매우 저명한 학술지에만 투고하려고한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17) 결혼식 피로연의 초대가수가 되다
도쿄대제제학 교실의 대학원 학생들은 매주 금요일 오후에는 교수실에 모여 교수님과 함께 술을 마시며 논다. 그 정도로 교수님은 술을 좋아하셨다. 일종의 다과회 겸 친목회인데 이런 모임을 콤파라고 불렀다. 그 콤파에서 술이 좀 들어가면 영락없이 노래부르기를 시작한다. 아직 가라오케는 없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는 했지만 노래를 썩 잘 부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보고는 한국 가요를 불러 보라고 했다. 나는 ‘가슴아프게’ 같은 한국 가요들을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사과정 남학생 하나가 나보고 자기 결혼식 피로연에 와서 축가를 불러 달라고 했다. 나는 우리나라 식으로 시끌벅적한 피로연이라면 뭐 못 부를 것도 없겠지 생각하고 그러마 수락하였다. 그러나 당일 피로연장에 가보고 큰 일이 벌어진 걸 깨달았다.
알고 보니 일본의 피로연은 마치 우리나라의 국경일처럼 매우 엄숙하게 진행되는 행사였던 것이다. 피로연장에 들어가기 전에 방명록에 붓글씨 서명을 해야 할 때부터 긴장되기 시작하였다. 피로연장에 들어가 하객용 지정석에 앉아 보니 인쇄된 식순지가 놓여 있었다. 내 축가 순서는 중매인 인사와 명사(名士)들의 축사 다음이었다. 나는 피로연 분위기가 이처럼 경직된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식장을 한바퀴 둘러보니 홀 맨 앞 긴 테이블 중앙에 중매인(나까오또) 부부가, 그 좌우에 신랑 신부가, 그리고 그 좌우에 축사를 할 몇 분이 앉아 있었다. 양가 부모는 의외로 일반 하객석에 앉아 있었다. 피로연은 코스 식사와 함께 진행되었는데, 나는 긴장되어 제대로 음식을 즐길 수도 없었다. 마침내 내 순서가 되었을 때,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최무룡씨가 불렀던 ‘단둘이 가봤으면’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흰구름이 피어오른’으로 시작되는 가요였다. 일부러 일본인들이 모르는 노래를 선택한 것이었다. 덕분에 어찌어찌 내 순서를 마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내가 무식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내 노래 평판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지 6개월 후, 다른 학생의 피로연에서 또 한번 축가를 부르게 되었다. 이 초대가수 사건은 오랫동안 내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대로 나가다 당황하는 꿈을 아직도 꿀 때가 있다.
아 옛날이여!
2022-10-13 09:31 |
[기고] <356> '박사 학위를 받다' - 삶 속의 작은 깨달음11
(15) 이온대 화합물의 소장 흡수
박사 과정 첫 번째 과제인 이 주제에 대해서는 교토(Kyoto)대학의 세자키(Sezaki) 교수팀이 활발히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극성(極性)을 띠고 있는 양(陽)이온성 약물에 음(陰)이온성 물질을 첨가하면 극성이 낮은이온대 화합물(ion-pair complex, IP complex)을 형성하기 때문에 약물의 소장 투과(흡수)성이 높아진다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나는우선 IP complex의 참분배계수(分配係數) 등을 정확히 구하여 IP complex형성이 약물의 소장 흡수에 미치는 영향을 정량적으로 파악하기로 하였다. 참분배계수를 구하는 논문이 유명 학술지에 발표된 적이 있었지만, 모두 ‘IP complex는 유기용매 층으로만 분배된다’는 근거 없는 가정(假定) 위에 세운 수식(數式)을 이용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부정확한 방법이었다. 나는 IP complex가 물 층으로도 분배될 수 있다는 보편적인 가정 위에 수식(數式)을 세우고자 하였다.
몇 달 동안 자나깨나 수식 생각에 얼이 빠져 지냈다. 그러던 1980년 5월의 어느 날, 유학생을 위한 야외 파티 참석 중에 영감(靈感)이 떠올라 급히 연구실로 달려가 마침내 정확한 수식을 세울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간단한 수식이었지만 오랫동안의 고민이 풀려 날아갈 듯 기뻤다. 소정(所定)의 분배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이 수식에 따라 플롯하여 이온대 화합물의 참분배계수를 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를 Int. J. Pharmaceut. 8(1981)에 발표하였다. 내가 제1저자로 발표한 최초의 국제학술지 논문이었다.
(16) 신장 배설 기능의 예측
위 논문을 쓴 후에 ‘내인성(內因性) 물질인 N-methylnicotinamide, NMN)을 마커로 하여신장의 염기성 약물 배설(腎排泄)능력을 예측할 수 있는가’라는 가설을 검증하는 것으로 연구 주제를 바꾸었다. 실험적 신장해를 유발시킨 쥐의 신세뇨관(腎細尿管)에 PE-10이라는 매우 가는 카테터를 삽입하고 3H 라벨을 한 모델 약물(tetraethylammonium, TEA)을 정맥주사한 다음, 시간에 따라 채취한 혈액과 요(尿)중의 TEA 및 NMN의 농도를 측정함으로써 두 물질의 신배설클리어런스(CLr)를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실험 결과, 신장해시 두 물질의 CLr가 같이 변동(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로부터 NMN을 이용하여 염기성 약물의 신배설을 예측할 수 있음을 J. Pharmacokin. Biopharm. 12(1984) 등에 발표할 수 있었다.
약물의 신배설을 예측하는 종래의 방법은 신부전(腎不全) 환자에게 PAH라고 하는 화학물질을 주사한 후 이 물질의 신배설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개발한 방법은 원래 우리 몸에 존재하는 물질인 NMN의 혈중 및 요중 농도를 단 한 번씩만 측정하면 되기 때문에 안전이나 시간 면에서 종래의 방법에 비해 장점이 많다. 내 방법을 사람에게까지 적용해 보지 못하고 연구를 끝낸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다.
나는 또 ‘신장 기능이 나빠지면 신장의 혈류(腎血流)가 느려진다’는 기존의 보고들이 틀렸음도 밝혔다. 즉 쥐의 신장으로 들어가는 신동맥과 신장에서 나오는 신정맥 혈중의 약물 농도, 그리고 이 약물의 요중 배설속도를 실측해 본 결과, 신장이 나빠지면 신장에서 요로의 약물 추출률(腎抽出率)이 낮아지지 신장의 혈류가 느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박사과정 3년을 통하여 총 7편의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 연구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연구 결과 중 ‘염기성(鹽基性) 약물의 신장 배설 기능의 예측’에 관한 부분을 정리하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1982년 9월 30일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게는 박사학위 가운을 입고 찍은 사진이 없다. 그것은 도쿄대학에 졸업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각자 약대 행정실에 가서 박사 학위기(學位記)를 받으면 그것으로 ‘졸업 끝’이었다. 졸업! 조금은 허망한 이벤트였다.
2022-09-29 12:31 |
[기고] <355> '박사 과정을 시작하며'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10
(13) 박사과정 입학
유학을 갔지만 6개월 후에 박사과정 입학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생화학이었다. 대학 다닐 때 학장이셨던 K교수님으로부터 효소(酵素)한 챕터밖에 배운 것이 없어서 걱정이 되었다. 할 수 없이 일본어로 된 생화학책 하나를 사서 열심히 공부했더니 다행히 합격되었다.
마침내 1979년 9월1일, 나의 박사 과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제제학(製劑學) 교실의 교수님은 하나노(花野?)셨다. 드물게 도쿄대학 출신이 아닌 교수님은 약주를 좋아하고 학생들과 담소하기를 좋아하셨다. 매주 목요일 오후면 얼음 덩어리를 넣은 위스키 잔을 흔들며 실험실로 오시곤 했다. 그럴 기미가 보이면 약삭빠른 일본 학생들은 황급히 집으로 도망쳤다. 교수님께 한번 걸리면 두세 시간 붙잡히는 것은 예사였기 때문이다. 대신 애꿎은 나와 타이완 출신 유학생이 교수님과 대작(對酌)해 드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간에 교수님의 인생관이나 학문관(學問觀) 같은 좋은 말씀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예컨대 “일본의 지도자는 미국과 소련(당시) 사이에 전쟁이 나면 언제 어느 편으로 어느 정도 가담해야 일본 국익에 도움이 될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제제학 교실에는 교수님 밑에 조교수 1명, 조수(助手) 2명과 교무직원 1명이 팀을 이루고 있었다. 조교수로는 훗날 도쿄대학 병원약제부장(교수)을 거쳐 일본약제사회 회장을 역임한 이가(伊賀立二) 박사가, 조수로는 니시가키(西坦) 박사와 스기야마(衫山雄一) 박사가 있었다.
스기야마 박사는 나중에 도쿄대 교수 겸 세계적인 학자가 된 대단한 학구열의 소유자로 시종일관 학생들을 다그쳤다. 나는 니시가키박사 밑에서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학문에 대한 실력이나 열정은 스기야마만 못했지만 인품이 점잖았다. 실력이 부족하고 기(氣)가 약한 내가 스기야마 대신 니시가키의 지도를 받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 같다.
(14) 와신상담(臥薪嘗膽)과 명예회복
박사과정에 들어가자마자 서울대 석사과정에서 수행한 연구를 발표해 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도쿄대학에 와 보니 서울대와의 실력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나는데다가, 특히 내 석사학위 논문의 수준이 형편없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발표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1~2주간의 괴로운 나날을 보낸 후 안면몰수(顔面沒收)하고 발표를 하였다. 그런데 막상 발표를 마치고 나니 교수님이나 대학원생 중 질문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질문할 가치도 없다는 것 같았다. 나는 평생 이때의 창피함을 잊지 않고 와신상담해 왔다.
하나노 교수님은 박사 과정 과제로 이온 대 화합물(ion-pair complex)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하셨다. Chemical Abstract을 찾아보니 이 키워드가 들어 있는 논문은 제목만 해도 수십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이 중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공부를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심하던 어느 날, 교수님은 ‘이온 대 화합물과 생체 흡수’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2차 지시를 하셨다. 이 주제에 한정해서 조사해 보니 그림이 좀 그려지는 것 같았다.
과제를 받은 지 석 달쯤 지났을 때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교실 세미나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나는 이온 대 화합물의 흡수에 대한 기존 학설을 몇 개로 분류한 다음 각 학설을 그림과 함께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물론 발표하는 연습도 성실히 하였다. 발표를 마치고 둘러보니 청중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다들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대학원 후배이자 뒷날 도호쿠(東北)대학 약학부 교수를 역임한 데라사키(寺崎) 박사는 지금도 그날의 내 발표에 감동하였다고 말하고 다닌다.
이 발표를 통해 석사 논문 발표로 구겨진 내 명예(?)를 상당 부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훗날 세계적인 학자가 된 스기야마 등 당시의 동료와 평생 학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교류할 수 있었다. 할렐루야!
2022-09-14 16:18 |
[기고] <354> '일본 유학을 떠나다'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9
(11) 유학의 길이 보이다
영진약품에 다닐 때 대학 동기이자 약대 조교인 C군이 일본 문부성(文部省) 장학생 시험에 붙어 도쿄 대학으로 유학 가는 것을 보았다. 우연히 유학가는 방법을 발견한 나는 그 길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험은 정식 조교(助敎) 발령을 받은 사람만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었다. 당시 약대 전체에 조교 TO가 3~4명밖에 없어 조교 발령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나는 1년이상 대학원 분석실에서 백의종군하며 기다린 끝에 1977년 12월 9일 조교 발령을 받았다.
다음 해인 1978년 문부성 시험에 원서를 냈다. 시험 당일, 시험 장소인 한국외국어대학교에 가 보니 전국에서 응시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인하대 출신인 이종 사촌 동생도 와 있었다. 집안에 소문이 날 걸 생각해서라도 시험에 꼭 붙어야만 했다. 시험과목은 일어, 역사, 상식이었다. 다행히 얼마 후 발표된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 더구나 내가 이과(理科)에서 1등이란다. ‘목표가 있으면 길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마침내 장학금을 받으며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박사학위를 공부할 곳으로 도쿄(東京)대학 제제학(製劑學) 교실을 지원하였다. 석사학위를 받은 약품분석학에서 제제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이다. 제제학이란 약효가 잘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제제(製劑)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영진약품 근무 시 그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12) 천식(喘息)의 나라 일본
1979년 4월 9일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난생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유학생 일행은 모두 33인이었다. 아내와 두 아들은 일단 두고 가기로 하였다. 도쿄 나리타(成田) 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고마바(駒場) 캠퍼스에 있는 도쿄대학 기숙사(瞭)에 도착하였다.
약 석 달이 지나 도쿄 생활에 조금 감(感)이 잡혔을 때, 이타바시(阪橋)구 시무라사카우에(志村阪上)역 근처에 있는 다이쪼소(大長莊)라고 하는 2층짜리 허름한 아파트 하나를 빌려 가족을 불러들였다. 집세는 월 4만엔 정도였는데,당 시 월 17만엔인 내 장학금에 비추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당시 엔:원 환율은 약 3:1이었다. 문부성 장학생은 고맙게도 학교 수업료와 각종 세금 일체를 면제받았다.
일본에서 아파트란 우리나라의 연립주택 비슷한 다세대(多世帶) 주택을 말한다. 이 아파트는 훗날 유학생인 C군, S군을 비롯하여 모교에서 도쿄대학을 방문하는 교수님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1층에 있는 우리 아파트는 6조(다다미 6장) 크기의 방 하나에 조그만 부엌과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다다미는 낡았고, 벽에서는 종이흙(紙粘土) 부스러기가 끊임없이 떨어지는 오래된 아파트였다. 고온다습(高溫多濕)한 도쿄 날씨에 1층 방이라 더욱 습기가 많았다. 당시에는 일본에도 아파트나 학교에 에어컨이 없었다.
결국 이 집에서 산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두 아들이 모두 천식에 걸렸다. 알고 보니 일본은 소아(小兒)천식의 나라였다. 아이들이 모여 놀다가 천식 발작을 일으키면 스스로 동네 의원에 가서 현관에 설치되어 있는 분무기를 입에 대고 천식약을 흡입할 정도로 소아 천식이 만연(蔓延)하고 있었다. 두 아이의 천식은 일본에 사는 3년 6개월 동안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혔다. 세월이 갈수록 발작이 심해져 한밤중에 아이를 들쳐 업고 응급실로 뛰어간 적도 몇 번 있었다. 구청으로부터 아이 당 매달 4만엔씩의 위로금을 받을 정도였다. 아이들때문에 라도 한시바삐 일본을 떠나고 싶었다.
학교까지는 미타(三田)선이라는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편도에 1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다. 점심과 저녁은 학교 구내식당이나 아까몽(赤門)밖에 있는 모리카와(森川)식당에서 사 먹었다. 아직도 문을 열고 있는 모리야 식당의 400엔짜리 참치덮밥은 정말 맛있었다.
좀 비싸더라도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정했더라면 통학 시간도 절약되고, 점심과 저녁을 집에서 먹을 수 있어 오히려 경제적이었을 텐데, 이를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2022-08-25 21:50 |
[기고] <353> '학교 연구실에서'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8
(10) 박사 학위의 위력을 깨닫다.
영진약품에 다니던 어느 날, 대학 동기K의 약혼식에 갔다가 한 초등학교 여교사를 만났다.충청도 공주(公州)에서였다.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1975년 11월 2일, 종로 5가에 있는 이화예식장에서 결혼하였다. 그때 나와 아내는 만 27세였다. 그리고 수유동 화계사 아래 작은 기와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이 집은 초등학교 졸업 후 줄곧 떠돌이였던 내가 ‘이제는 서울에 거점(據点)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가 그해 7월에 사주신 집이었다. 삼백만 원 정도에 샀는데, 그 집이 오늘날 내가 서울에 집을 갖고 살 수 있는 기본 자산이 되었다. 우리는 출가(出嫁)한 누님댁 등에 흩어져 살고 있던 동생들(여동생 2, 남동생 1)을 불러들여 함께 살았다. 그때는 그게 장남의 도리였다.
그 집에서 뚝섬 경마장 옆에 있던 영진약품에 출근하려면 새벽에 버스를 타고 왕십리까지 간 다음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회사에 도착해보면 가끔 양복 단추가 떨어져 있을 정도로 승객이 많았다. 여성인 차장(車掌)이 버스에 사람이 못 타게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퇴근해 집에 오면 거의 컴컴한 밤이었다.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적정법(滴定法)에 의한 앰피실린의 정량’이라는 논문을 써서 1976년 2월 26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불행히도 학위 과정 중 지도(指導)교수님의 지도를 거의 받지 못했다. 1947년에 경성약전(京城藥專)을 졸업하신 지도교수님은 실험에 사용할 시약도 사 주지 못하셨다. 그래도 나는 교수님이 나를 신뢰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였다.
3년 가까이 회사에 다녀보니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77년 사표를 냈다. 회사는 처음엔 만류하였지만, 내 결심이 확고함을 알고는 끝내 양해해 주셨다. 퇴사 후 바로 서울대 약품분석화학 전공 박사과정에 풀타임 학생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지도교수님이 나보고 본인의 지도 학생인 Y선배님의 박사학위 논문 실험을 수행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Y선배님이 모 제약회사의 영업부장이라 학교에 나오기 어려웠던 때문이었다.
1977년 7월 낙성대 근처의 작은 기와집으로 이사를 왔다. 700만 원을 주고 산 집인데, 1년 전만 해도 400만 원이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나중에 혹시 서울대 교수가 될 생각이라면 서울대 바로 앞에 진(陣)을 치고 사는 것이 유리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신기하게도 정말로 나는 1983년 이 집에서 서울대 교수가 되었고, 훗날 집 앞에 낙성대 전철역이 생기는 바람에 집값도 많이 올랐다(1988년 4천만원).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오니 두 아들을 비롯한 4식구가 살 길이 만만치 않았다. 쌀은 농부인 아버지가 대주셨지만, 생활비는 매달 Y선배님이 실험 수고비 조로 주는 3만 원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고도의 절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는 하루에 10원도 쓰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출퇴근은 학교 버스로 하고, 점심은 도시락을 싸가 먹었다. 이렇게 지내도 마음이 가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Y선배님의 실험 주제는 ‘자근(紫根) 성분시코닌(shikonin)의 변색(變色) 지시약 특성에 관한 연구’였다. 시코닌의 이성체(異性體)인 알카닌(alkannin)이 pH에 따라 변색한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어서 그리 독창성이 큰 연구는 아니었다. 우선 자근으로부터 시코닌의 결정을 얻어야 했는데 이게 영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냉장고를 열어 보니 벤젠 추출액 중에 시코닌의 침상(針狀) 결정이 예쁘게 생겨 있었다. 기뻐서 사진을 찍으며 흥분했던 추억이 새롭다.
이로써 시코닌을 산-염기(酸-鹽基) 적정시의 변색 지시약으로 쓸 수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논문으로 Y선배님은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 학위로 얼마 후 신설된 지방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당시의 박사 학위 위력은 이처럼 신묘(神妙)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아야겠다는 내 결심도 더욱 굳어만 갔다.
2022-08-11 14:03 |
[기고] <352> '회사에서'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7
(9) 평가기술이 제조기술이다
제대 후 대학원에 복학하여 약품분석 연구실에 나갔다. 당시 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며 대학원에 다닐 수 있을까’였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영진약품에 다니는 2년 선배 J가 학교로 찾아와, ‘영진약품에 취직하면 대학원에 다니게 해 준다’며 입사를 권유하였다. 이 말에 바로 영진약품을 찾아가 취직하였다. 1974년 7월 2일이었다.
입사부터 하고 얼마 후에 김생기 사장님의 면접을 보았다. 10분간 면접을 마치고 나오니 C 부장님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현금 20만원이 들어 있었다. 20만원이면 당시 한 달 봉급(6만원)의 3배가 넘는 거금이었다. 놀라서 웬 돈이냐고 했더니 “그냥 학비에 보태 쓰라”고 했다. 아마 사장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모습이 기특해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 돈의 일부로 흑백 TV를 사서 시골의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우리집이 월남전에서 돌아온 선배댁에 이어 동네 두 번째로 TV가 있는 집이 되었다. 그때의 흐뭇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1975년) 회사는 앰피실린이라는 항생물질을 함유한 펜브렉스라고 하는 분말 시럽제를 제조 판매하고 있었다. 복용 시 물을 넣어 흔들어 녹인 후 어린이에게 투여하는 약이었다. 나는 이 약 중의 앰피실린 함량(含量)을 정량(定量) 분석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늘 하던대로 시럽제에 물을 넣어 실험대 선반에 올려 놓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이 약 고유의 핑크 색이 점점 엷어지는 것이었다. 이를 상사에게 보고하였더니 회사에 난리가 났다. 그리고 내게 그 원인을 신속히 찾아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이 시럽제에는 첨가제(添加劑)가 20가지나 들어 있어서 탈색(脫色)의 원인을 밝히기가쉽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탈색이 일어났다는 것은 환원제(還元劑)의 혼입(混入) 때문일 것 같았다. 그래서 시럽제의 원료를 칭량(稱量)하는 원료실에 가보니 첨가제 중의 하나인 sodium sulfate(SS)통 옆에 환원제인 sodium thiosulfate(ST)통이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제조시에 SS대신 착오로 ST를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 실험실로 돌아와 SS 대신 ST를 넣어 시럽제를 조제하고 물을 넣어 보았더니 앞서 발견한 것과 똑 같은 탈색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다시 원료실에 가 살펴보았더니 예상대로 SS는 장부보다 많이, 그리고 ST는 장부보다 모자라게 남아 있었다. SS 대신 ST를 잘못 첨가한 것이 탈색의 원인이었던 것이다.이 사고의 원인을 명쾌하게 밝혀낸 공로로 나는 다음해인 76년 1월 4일 ‘제1회 창의상(創意賞)’을 받게 되었다. 상금이 무려 10만원이나 되었다. 다음 해(1977년)에도 나홀로 이 상을 또 받아 좀 민망하였다.
사장님은 처음부터 평사원인 나를 간부회의에 참석시킬 정도로 예뻐하셨다. 회의에 참석해 보니 간부들은 사장님이 무서워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 물정을 몰랐던 몰랐던 나는 의견이 있으면 그냥 발언을 하였다. 그 결과 준(準)사원 채용이 공정해지는 등 내 의견이 업무에 반영된 사례도 몇 건 있었다. 아무튼 영진약품 시절은 철부지인 내가 일생을 통해 가장 자신감있게 지내던 시절이었다.
1976년에 시험과(試驗課)를 떠나 연구과(硏究課)의 주임 대리로 승진하였지만 사원 1명, 보조원 1명이 부하의 전부였다. 이 때 일본에서 팔리고 있던 어린이 생약(生藥) 감기약인 ‘남천(南天) 시럽’을 모방해 만들라는 지시를 받아 시행착오 끝에 당시 보건원의 제품허가를 받아냈다. 요즘 말로 제네릭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든 시럽제의 품질, 즉 유효성과 안전성을 평가하는 방법을 알 수 없어 답답하였다. 당시 회사에는 그런 기술을 가르쳐 주는 선배가 없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하여 ‘좋은 약을 만드는 기술이란, 어떤 약이 좋은 약인지 평가(評價)하는 기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훗날 내가 약제학을 대하는 기본 정신 자세가 되었다.
2022-07-27 21:19 |
[기고] <351> '군대에서'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6
(8) 부조리와 세월에 대한 인내를 배우다.
대학 졸업 후 석사 과정에 들어가 1학기를 마칠 즈음인 6월 20일 원주 38사단의 신병교육대에 입소하였다. 7월 2일 군번(65023447)을 받고 8월 15일까지 6주간 신병 훈련을 받았다. 내가 받은 M1 소총, 판쵸 우의(雨衣), 군복, 훈련화 등은 다 내게 너무 컸다. 구보 때 신발이 맞지 않아 발에 피가 나는 날도 적지 않았다. 워낙 더운 때라 다른 훈련병들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6주 후 훈련소 문을 나설 때는 모두 가슴 뜨거운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진짜 사나이’가 된 기분이었을까?
훈련소를 떠나 기차를 타고 천리길 사천(泗川)에 가서 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하였다. 항공학교는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부대였다. 거기서 12주 동안 육군 항공기 정비 기술을 배웠다. 부대 안에 공군 사관학교(空士)를 졸업하여 파일럿트 자격까지 딴 목사님이 담임을 맡은 교회가 있었다. 처음 들은 설교 주제는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였다. 감동적인 이 설교는 훗날 내가 크리스챤이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1971년 10월 16일 육군항공학교를 졸업(111기)하고 다시 진해에 있는 육군수송학교에 가서 14주 동안 추가로 항공기 정비 교육을 받았다. 수송학교는 항공학교와 딴판으로 말할 수 없이 부패한 부대였다. 입학 첫날 교육생들을 모아 놓고 ‘돈은 중대(中隊) 본부에 맡겨야 안전하다’고 협박하여 돈을 갈취하였다. 일과(日課) 후에는 아무 말 없이 매일 빵 1개씩을 주었다. 그리고 월말에 한 푼의 봉급도 주지 않았다. 내가 먹은 빵값을 빼고 나면 줄 돈이 안 남는다고 했다.
수송학교의 저녁 점호(點呼)는 더 가관(可觀)이었다. 각종 기합이 따르는 점호는 공포의 시간이었는데, 부대 내 PX에서 막걸리를 사 마신 사람은 점호에서 빼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군대가 썩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남북 간에 전쟁이 나면 국군이 어느 쪽을 향해 총을 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각종 부패가 이 정도로 척결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1971년 12월 11일 수송학교를 졸업(10기)하였다. 그 중 18명이 원주에 있는 항공기 정비 중대로 배치되었다. 나는 경남 사천과 진해를 돌아 다시 원주로 돌아온 것이다. 항공기 정비 중대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고참(古參), 즉 항공학교 선배(104기)들의 괴롭힘이었다. 그들로부터 제대할 때까지 개인당 약 500대의 빳다를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참 못된 사람들이었다.
빳다가 아니더라도 군생활은 충분히 고되었다. 부대원 전원이 매일 낮에 2시간, 밤에 2시간씩 활주로 보초를 서야만 했다. 게다가 나는 비행기 정비 시간과 경비 등의 통계를 내는 정비소대(整備小隊) 서무로서의 기본 업무 외에, 산더미 같은 비행기 정비 매뉴얼(영어)을 번역하는 일, 군수지원사령부로부터 의약품을 수령하여 부대원들에게 나눠주는 일까지 했다. 일 잘 한다고 평이 나면 점점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은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는 요령을 피우지 않고 모든 일을 성실하게 하였다. 유격 훈련도 두 번이나 받았다. 그 와중에 천하의 농땡이가 모범사병 표창을 받는 코메디도 보았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1월 21일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를 시행하였다. 부대에서는 일반국민들에 앞서 부재자 투표를 하였다. 그런데 투표용지를 보니 “나는 대통령의 중요 정책을 (1) 지지한다( ), (2) 반대한다( )”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되어 있었다, 헌법 개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고 있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그래도 결국 국민 91. 9%의 투표, 91. 5%의 찬성으로 유신헌법이 확정되고 제4공화국이 출범되었다.
군 생활 중인 1972년 김포 시골집에 전기가 들어오고, 1973년에 지붕이 기와로 바뀌었다. 1974년 5월 2일 정확히 34개월만에 병장으로 만기 제대하였다. 군대는 내게 온갖 부조리와 세월을 인내하는 법을 가르쳐 준 곳이었다.
2022-07-13 11:42 |
[기고] <350> 삶 속의 작은 깨달음 5
(7) 대학에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1967년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인천에 있던 집을 파셨다. 그때부터 인천과 서울에서 가정교사 입주, 자취, 친척집을 전전하며 학교에 다녔다. 주 3~5회 가정교사를 해서 학비와 용돈을 벌었다. 무대는 주로 인천이었지만 서울 서교동의 한 교회 종탑방에서 입주 과외를 하기도 했다. 가정교사 자리가 없는 방학에는 그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시골집에서 보냈다. 지루한 생활이었다.
학기 중에는 인천이나 부평에서 경인선을 타고 연건동에 있는 약대까지 통학하였다. 서울역에서 내린 다음 미아리행 20번 시내버스를 타고 동숭동 대학본부 앞에서 내려, 길을 건너 의대를 지나 약대까지 가는데 1시간 반 이상이 걸렸다. 아침마다 헐레벌떡 달려가도 지각하는 날이 많았다. 월~목요일에는 아침 9시부터 8시간의 수업이 있었고, 토요일에는 9시부터 5시간의 수업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가정교사를 가야 했다. 그래서 당시 세시봉 같은 음악 다방이 인기였다는 소리는 훨씬 훗날에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통학과 가정교사에 지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배우는 학과목들도 암기 과목이 많아 재미가 없었다. 약용식물학이나 생약학 등이 특히 그랬다. 게다가 ‘노는 것은 대학가서 놀아라’ 하신 고3 때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청개구리처럼 잘 들은 것도 잘못이었다. 물론 진짜 이유는 내가 철이 덜 든 탓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편집부장이 되어 교지인 ‘약원(藥苑)’ 제15호를 편집 발간하였다. 이때 싸게 해 준다는 브로커 말에 넘어가 을지로5가에 있는 조그만 출판사와 덜컥 계약을 하였다.계약 후 방문해 보니 말이 출판사이지 대중가요 가사집 같은 소책자나 만들 수 있는 매우 영세한 곳이었다. 영어와 한자, 그리고 화학구조식이 많은 약원 같은 책의 출판은 애당초 그 출판사 분수에 넘치는 일이었다. 예컨대 조판을 하려면 납으로 주조된 활자판에서 정확한 활자를 골라내야 하는데 문선공들이 영어나 한자를 잘 몰라 쩔쩔매기 일쑤였다. 그래서 계획보다 한참 늦게서야 조판이 완성되었다. 나는 그 무거운 납판들을 리어카에 싣고 손수 을지로 입구에 있는 ‘청풍인쇄소’까지 끌고 갔다. 일을 서두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인쇄소는 500부도 안되는 책의 인쇄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윤전기 옆의 종이 더미 틈 속에서 밤을 지새며 잠시 우리 책을 인쇄에 걸어달라고 애원을 했다.
나는 편집부장이라는 학생회 임원 자격으로 3선개헌 반대 데모에도 참여하였다. 그때는 해마다 휴교령이 내릴 정도로 데모가 심하였다. 휴교령이 내리면 학생들은 전국 각지로 무전여행(無錢旅行)을 떠났다. 나도 친구들과 무주 구천동에 다녀오는 호사를 누려봤다.
이런 식으로 지냈는데도, 1971년 2월 졸업할 때 보니 내 성적이 제약학과 40명 중 5등이었다. 의외로 성적이 좋아서 놀랐다. 다른 친구들은 나보다도 공부를 안 한 모양이었다. 당시는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라는 노래가 약대에 유행할 때였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의 약대 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한다. 교수들의 강의내용이 충실해진 데다가, 공부를 안 하고는 배겨날 수 없는 시대가 된 덕분일 것이다.
막상 졸업을 앞두고 보니,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일찍이 20세에 인생의 방향을 정하셨다는 아버지 말씀이 충격이 되어 머리에 맴돌았지만, 일단 대학원에 진학해 시간을 벌어보기로 하였다. 전공으로는 당시 미국에서 미생물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신 K교수님의 연구실을 택하고 싶었지만, 동기인 C군이 먼저 지원했다고 해서 포기하였다. 대신 1학년 때부터 낯이 익은 약품분석학 연구실을 택하였다. 그때 미생물 연구실로 갔으면 내 인생은 어찌 되었을까?
돌이켜 보니 역시 대학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젊었을 때 열심히 공부한 걸 후회하는 사람을 내 평생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는 것 같다.
2022-06-22 12:10 |
[기고] <349> 삶 속의 작은 깨달음4
(5) 선생님이 잘 가르쳐야 한다.
양영학원에 다니며 눈만 뜨면 공부하는 생활을 3개월 정도 해서 12월이 되니, 이제 시험 범위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항을 다 알게 되었다. 특히 여태껏 나를 괴롭혔던 수학에 100% 자신이 생겼다. 그것은 전적으로 학원의 수학 선생님의 덕분이었다. 어찌나 간단 명쾌하게 잘 가르쳐 주시는지 듣고 보는 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그분은 소수(少數)의 전형적인 문제를 정선(精選)하여 풀고 그 문제 유형(類型)을 기억하도록 가르치셨다. 이 선생님을 통해 선생님의 역할이 정말 지대(至大)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그 선생님을 통해서 왜 내가 고등학교 때 수학을 잘 못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는 미처 소화(消化)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를 풀게 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때 수학의 요령을 깨달은 덕분에 대학에 들어가서 가정교사를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학생이 왜 수학을 잘 못하는지 내 경험에 비추어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 급소를 찔러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었다. 그 학원에서는 수학 외에 국어나 화학도 잘 가르쳤다. 국어의 독해(讀解)는 유명한 소설가가 가르쳐 주셨고, 화학은 ‘완전화학’이라는 참고서를 쓴 김종대 육사 교수께서 가르치셨다. 김 교수님은 늘 ‘화학은 당량(當量)입니다’ 라고 강조해 주신 덕분에 화학의 원리(原理)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자 화학의 잡다한 지식이 간결하게 정리되었다. 특히 수학이나 과학은 원리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부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양영학원은 내 일생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6) 서울대 약대 수석 입학 - 자신감을 부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
내가 졸업한 제물포고등학교(제고)는 매년 11월경 재학생은 물론 졸업한 재수생들에게도 모의고사를 치르게 하여, 그 성적을 보고 입시 지도를 해 주었다. 나도 1966년 11월, 제고 재학생들과 함께 모의고사를 보았다. 그 결과 총 350여 명 중에서 20여 등의 성적을 받았다. 이는 미처 못다 배운 ‘일반사회’ 과목 성적을 빼고 보면 전교에서 10위 안에 드는 뛰어난 성적이었다. 고3 때 담임이셨던 K 선생님으로부터 ‘그 정도면 서울대 아무 과(科)에 지원해도 다 합격하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당시에는 그 정도로 좋은 성적이면 대개 서울대 공대를 지원하던 시절이었다. 공대 화공과가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공대에 관심이 없는 나는 서울대 약대 제약학과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약대에서 무얼 배우는지,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고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고등학교가 합격 가능성만을 척도 삼아 입시 지도를 하고 있었다. 제약학과를 선택한 것은 학과 이름이 그럴듯해 보여서였다.
서울대 약대에 응시하여 수학, 영어, 국어, 화학, 일반사회의 다섯 과목 시험을 보았다. 시험 후 집에 가서 신문에 난 모범답안과 맞추어 보았더니 수학은 주관식 10문제 중 기하 문제를 제외한 9문제를 풀었는데 다 맞았고, 화학과 일반사회는 모두 100점이었다. 국어와 영어는 좀 어려운 편이었다. 며칠 지나자 각종 신문에 내가 서울대 약대에 내가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시험을 잘 봐서 떨어지지 않을 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수석이라니!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수석으로 합격하자, 내가 9월 이전에 6개월간 다녔던 세종학원은 ‘축, 서울대 약대 수석합격, 심창구’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학원 건물 옥상에서부터 지상에 이르기까지 위아래로 내걸었고, 4개월 정도 다닌 양영학원에서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에 SKY 대학 합격자들을 모아 놓고 축하식을 열어 주었다. 그 식에서 수석합격 기념 금반지도 받았다. 모두 추억 속에만 있는 장면이다. 당시 카메라가 없었던 때문이다.
이 수석 입학이라는 사건을 통해 거의 처음으로 나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제 와 돌아보니 내가 인천중학교나 연세대 의대에 떨어진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介入)이셨다.
2022-06-08 22:04 |
[기고] <348> 삶 속의 작은 깨달음3
제물포고(제고)는 다녀볼수록 훌륭한 학교였다. ‘양심(良心)은 민족의 소금, 학식(學識)은 사회의 등불’을 교훈으로 갖고 있는 학교였다. 모자에 달린 모표(帽標)도 소금 결정 3개 위에 등대가 서 있는 모습이었다. 도서관은 완전 개가식(開架式)으로 늘 열려 있었고, 시험은 무감독(無監督)하에서시행되었다.이런 명예로운 제도하에서 공부하는 것이 제고 학생들의 큰 자부심이었다. 제고에서 배운 양심이 평생 내 삶의 방부제가 되었다.
제고는 1학년이 300명이고 이과(理科)가 세 반으로 총 240명이었는데, 입학 후 첫 시험에서 나는 이과에서 110등 정도를 하였다. 기분이 좋았다. 130명 정도의 수재들을 제친 것이 아닌가! ‘한번 해 볼 만한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고에는 공부뿐이 아니라 글이나 그림 또는 음악 등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학생들이 많았다. 당시 교지인 ‘춘추(春秋)’에 실린 글을 읽어보면, 어떻게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이렇게 유식하고 멋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제고에 다니는 동안 나는 성적도 그저 그렇고 인천중학교 출신이 아니어서 친한 친구도 별로 없어 전반적으로 약간 주눅이 들어 지냈던 것 같다.
(4) 대학입시 낙방(落榜):다른 길이 열리기 시작하다
제고 졸업 시 전교 60등 정도를 했다. 그때 동기생 11명이 연세대 의대에 응시했는데 9명이 붙고 나를 포함한 2명이 떨어졌다. 내가 떨어진 것은 수학 때문이었다. 수학은 고등학교 때 내 등수를 떨어뜨린 주범이기도 했다.
나는 재수하기로 하고 서울의 세종로 네거리에 있는 세종학원에 등록하였다. 돈만 내면 누구나 다닐 수 있는 학원이었지만 강사 선생님들의 강의 수준은 괜찮았다. 특히 ‘정통고문 교실’이라는 참고서의 저자인 하희주 선생님의 문법 강의가 재미있었다. ‘이’모음역행동화, 히아투스 현상, 움라우트 현상 등이 재미있어 앞으로 국어를 전공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수준은 내 기대치보다 많이 낮았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명문학원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그해 9월에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양영학원에서 4명 정도의 편입생을 뽑는다는 공고가 났다. 얼른 응시 원서를 내고, 시험 당일에 종로1가 낙원동에 있는 양영학원 건물에 가 보니 와! 수백 명의 응시자가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기가 질린 상태에서 2~3시간에 걸쳐 영어와 수학 시험을 치렀는데, 놀랍게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은 그 일을 지금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양영학원에 들어가 보니 소문대로 수업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1지망으로 서울대 의대에 지원했다가 성적이 약간 모자라 2지망인 서울대 치대로 밀려 합격한 사람도 여럿 있을 정도로 학생들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학 시험이 있었다. 수준이 높다는 학생들도 대부분 30~40점을 맞을 정도로 문제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L이라고 하는 경기여고를 나온 삼수생이 90점을 맞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런 어려운 문제에서 90점을 맞는 사람도 있다니,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독한 마음을 먹고 온종일 오직 공부만 하였다.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시간이 아까워, 학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청계천 변의 사설 독서실에서 먹고 자면서 오직 학원에만 다녔다. 잠은 독서실의 의자 서너 개를 붙여 놓고 잤다. 그때 부실해진 허리가 지금껏 나를 괴롭히고 있지만, 원 없이 공부해 본 시절이었다.
밥은 근처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사 먹었다. 한 끼에 30원 하는 잡채밥을 사 먹었는데 한 달치 식권을 한꺼번에 사면 한 끼에 25원으로 할인해 주었다. 그런 잡채밥도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고, 한 끼는 골목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호떡 2~3개를 사 먹었다. 지나보니 미련스러웠지만, 워낙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시는 아버지께 ‘돈을 주십사’ 말씀드리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2022-05-25 20:17 |
[기고] <347> 삶 속의 작은 깨달음2
(2)불합격에 낙심하지 마라, 축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1960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 있는 인천중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길영희 선생님이 교장으로 계시는 이 학교는 인천은 물론 경기, 충청도의 인재들이 몰려드는 최고의 명문 공립 중학교였다. 그런 학교에 나와 동창 2명(L군, N군)이 겁도 없이 원서를 냈다. 내가 3명 중에 가장 성적이 좋았다. 입학시험날, 시험지를 받아보니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내 시험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나는 우리 세 명이 다 떨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셋 중 가장 성적이 안 좋은 L군만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담임이셨던 K선생님이 자신의 조카인 L군의 성적을 ‘전교 1등’으로 조작해 무시험으로 합격하게 한 결과였다. 인중에는 국민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한 학생은 무시험으로 입학을 시켜주는 특이한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인천중학교에 입학한 L군은 두 번 연거푸 낙제한 끝에 결국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만약 그때 담임선생님이 나를 전교 1등으로 만들어 내가 무시험으로 합격하였다면 내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모르기는 해도 결말이 L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그때 나를 전교 1등으로 만들어 주지 않은 담임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감당치 못할 일류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3)꿈을 갖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인천중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한 나는 같은 인천에 있는 사립 D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학교는 간단한 면접만으로 신입생을 뽑았다. 그 무렵 아버지는 ‘인천여상고’에 다니는 누님과 나의 공부를 위해 인천시 금곡동에 허름한 기와집 한 채를 사주셨다. 나는 그 집에서 누님이 해주는 밥을 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 집은 워낙 지대가 낮은 곳에 있는 낡은 집이라 부엌 바닥은 물론 연탄아궁이 속까지 물이 고여 연탄불이 꺼지는 날이 많았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 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년 이상을 살았다.
D중학교의 한 반은 정원이 80명을 넘는 콩나물시루였다. 나는 첫 시험에서 84명 중 50여 등을 하였다. 아무리 시골 학교 출신이긴 하지만 국민학교 때 반에서 3~4등을 하던 나에게 이 등수는 충격이었다.
당시 1살 위인 외사촌 형이 인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가끔 십정동에 있는 외갓집에 가면 그로부터 인천중학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들을수록 그 학교가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그 학교에 딸린 제물포고등학교(제고)로 진학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 꿈을 갖고 중학교 3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더니 졸업 시에 우등상을 받게 되었다. 1학년 첫 시험에서 반에서 50여 등 하던 촌놈이 졸업 때에는 500여 명 중에서 5등 안에 들어 우등상을 받은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3학년 담임선생님께 “제고로 진학하고 싶습니다”고 했더니 “D중학교에 딸린 D고등학교로 진학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 뭐하러 제고로 가려느냐?”며 입학원서를 써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미 제고에 대해 흔들릴 수 없는 환상을 갖게 된 나는 아버지를 동원(?)하여 제고 입학원서를 써 받았다.
그런데 그해인 1963년부터 고등학교 입시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입시제도가 ‘학교별 입시’로부터, 모든 응시생이 같은 시험 문제를 푸는 ‘연합고사’로 바뀌었다. 기존의 학교별 입시는 아무래도 제고에 딸린 인천중학교 졸업생들에게 유리한 제도였다. 그다음으로 그 해부터 제고의 입학 정원이 240명에서 300명으로 늘어났다. 나는 이처럼 유리한 변화에 힘입어 꿈에도 그리던 제고에 합격하였다.
외사촌 형을 통해 제고의 꿈을 갖게 해 주시고, 나의 제고 합격을 위해 입시 제도와 입학 정원까지 늘려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 이로써 인생에서 꿈을 갖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다.
2022-05-12 0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