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약국] <140> 식재료 페어링의 원칙
음식에는 어울리는 짝이 있고 어울리지 않는 짝이 있다. 과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가능한 식재료 조합은 1,000조 개 이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사용하는 레시피는 수백만 개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들 중 상당수가 중복이다. 요리를 할 때 아무 원칙 없이 임의로 식재료를 조합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제일 흔하게 식재료를 페어링하는 방법 하나는 제철에 나는 로컬 식재료를 함께 쓰는 것이다. 동일한 토양에서 비슷한 시기 수확한 농산물을 함께 쓴다니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좀처럼 지키기 어려운 원칙이기도 하다. 식당 원산지 표시나 식품 뒷면 원재료만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철이 다른 식재료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곳에서 생산된 식재료를 섞어 쓰는 게 일반적이다. 식당 메뉴를 바꾸지 않으려면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지역 제철 식재료를 쓴다는 원칙이 반드시 과학적으로 사실로 증명된 것도 아니다. 동일한 조건, 같은 땅에서 자란 식물도 종이 다르면 맛이 다르다. 토양의 미네랄이 식물로 전부 흡수되지 않을뿐더러 식물의 풍미 물질은 식물 그 자체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음식궁합에 대한 속설도 사실과 다르다. 시금치와 두부를 함께 먹으면 결석이 생긴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시금치 속 수산이 두부 칼슘과 결합하면 흡수가 덜 되긴 하지만 신장결석이 잘 생기는 사람에게는 장점이 될 수 있다. 수산이 흡수되지 않으니 신장결석 위험이 줄어든다. 그래서 신장결석을 주의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시금치를 먹을 때 우유나 두부처럼 칼슘이 풍부한 식품을 곁들여 먹는 게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당근과 오이를 함께 먹으면 안 된다는 설도 마찬가지로 틀렸다. 당근 속에 비타민C를 분해하는 효소가 들어있지만 이런 효소는 대부분의 채소에 들어있다. 심지어 오이에도 들어있다. 그래서 당근, 오이를 자르거나 갈면 세포 속의 비타민C 분해 효소가 흘러나와 비타민C가 파괴된다.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당근, 오이에 비타민C 함량이 그리 높지 않다. 냉장고에 오래 보관하거나 가열 조리하는 과정에서도 비타민 함량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비타민C 하나 먹으려고 채소를 먹는 것도 아니고 김밥에 당근과 오이를 함께 넣는다고 영양학적 대위기가 오는 것도 아니다.팩트체크를 중요시하지 않던 시절 만들어진 속설에 불과한 음식궁합 이야기는 무시하는 게 최선이다. 식사의 즐거움을 스스로 반감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음식 조합에 더 중요한 관건은 특정 식재료와 다른 식재료를 조합할 때 맛이 어울리는가이다. 지역 식문화는 여러 조합 중 맛이 어울리는 것들을 찾아내면서 만들어진다. 수많은 사람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만들어낸 조합이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맛의 조합, 멕시코에서는 멕시코인 특유의 풍미 조합을 맛볼 수 있다.나라 안에서도 지역별로 풍미의 결이 다르다. 이러한 풍미 조합에는 어떤 과학적 원칙이 숨어있을까? 네트워크 과학에 정통한 연구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공통의 원칙은 없는 걸로 보인다. 서유럽 국가에서는 동일한 풍미 요소를 공유하는 짝을 선호하고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공통적 풍미를 피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두 방향 모두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하다. 예를 들어 치즈와 구운 닭고기에는 공통 향미성분이 무려 62가지 들어있다. 치킨 파르미지아노가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다.반대로 참치김밥과 커피에는 비린내를 풍기는 아민이 공통으로 들어있어서 함께 먹으면 불쾌하다. 동서양이 식재료를 주고받으면서 이런 차이점도 일부 희석되는 경향이 있다. 동아시아 요리에서는 감칠맛 요소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식재료를 짝 짓는다는 주장도 있다.풍미 조합에 대한 과학자들의 연구는 이제 막 시작 단계이다. 하지만 뭔가 일리가 있긴 한 것 같다. 초콜릿과 오이, 블루베리와 고추냉이, 오이와 레모네이드, 캐러멜 크림과 간장과 같은 추천 조합을 맛보면 의외로 잘 어울린다. IBM 슈퍼컴퓨터 왓슨이 제안하는 벨기에 베이컨 푸딩, 딸기와 버섯을 곁들인 베트남 사과 케밥과 같은 요리도 상상을 뛰어넘는 조합이지만 놀랍게 어울린다. 이러한 새로운 조합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토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져온 지역별 식재료 페어링의 규칙에도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2023-09-21 13:52 |
[약사·약국] <139> 다이어트 신약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정도로 논란이 뜨거운 약이 있었나 싶다. 오젬픽, 위고비 이야기다. 체중 감량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들 신약에 대한 뉴욕타임즈 기사에 일주일 동안 댓글이 무려 1,700개 달렸다. 오젬픽을 사용하면서 음식 소음이 사라졌다는 사람이 많다는 기사에도 댓글이 1,400개 달렸다.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툭하면 음식 생각이 나는 걸 음식 소음Food noise이라고 부른다. 식욕 조절이 잘 되지 않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긴 설명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이해가능한 말이다.기사에 댓글이 이렇게 많이 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약으로 살을 뺀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베프가 오젬픽을 쓰고 있는데 반대 의견을 제시해도 되겠냐는 독자의 질문에 답한 칼럼에 댓글이 1,100개나 달릴 정도이다.약을 통한 체중 감량에 대한 부정적 시선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약으로 살을 빼는 건 마치 운동선수가 도핑하는 것처럼 반칙으로 보인다. 게다가 기존의 다이어트 보조제는 대체로 부작용이 심각한 경우가 많았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룬 나비약처럼 환각, 중독 문제를 일으키는 중추신경 흥분제가 그동안 주류였기 때문이다. 오젬픽, 위고비의 약성분인 세마글루티드와 같은 약물이 신약이니까 아직 부작용을 모른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전문가도 많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과거의 시선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판을 바라보려고 하는 게 아닌가 질문해봐야 한다.지난 8월 24일 미국 마운트 시나이 의대 교수 캐롤라인 메서는 세계적 의료정보 사이트 메드스케이프에 오젬픽 사용 고려가 무모한 게 아니라는 칼럼을 썼다. 메서는 우선 오젬픽은 출시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GLP-1 유사체는 약으로 사용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같은 계열의 약물 중 제일 먼저 사용된 바이에타가 미국 FDA에서 신약으로 승인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2005년 4월이다. 부작용에 대한 모니터링은 계속해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축적된 장기간 유익과 부작용에 대한 자료가 상당한 수준이란 이야기다. 메서는 췌장염 부작용에 대해 우려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식단으로든 수술이나 신약으로든 체중을 줄이면 담석증을 유발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췌장염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장기간 단식하거나 단기간에 체중을 감량하면 간에서 담즙으로 콜레스테롤을 더 많이 배출하여 담석증 위험이 커진다. 췌장과 담낭은 공통의 통로인 담관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담석으로 관이 막히면 췌장염이 생길 수 있다. 췌장염 위험이 조금 증가할 수 있지만 약 자체보다는 체중 감량으로 인한 것이며 대체로 약 사용을 막을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메서는 다이어트 신약 인기로 당뇨병 환자들이 제대로 약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일축한다. 오젬픽과 위고비는 동일 약성분이다. 당뇨치료제일 때는 오젬픽, 비만치료제로는 위고비라는 이름으로 용량을 달리하여 판매되고 있을 뿐이다. 약으로 살을 빼려는 사람 때문에 약품 공급이 부족해져 당뇨병 환자가 곤란을 겪는다는 주장의 근거이다. 하지만 메서는 비만인 사람이 이들 약을 써서 당뇨병, 심혈관계 질환 위험을 낮출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만성질환의 예방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왜 정작 실제로 그런 예방효과를 내는 약이 나오니까 못 쓰게 하냐는 말이다. 멈추어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이들 약을 셀럽과 인플루언서들이 쓰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많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약을 사용하여 얻게 되는 유익을 간과할 수 없다. 약으로 살 뺀다는 비난 댓글에 당신이 이 약을 써보기라도 했냐며 약 사용 뒤 다른 만성질환 약을 줄여서 오히려 사용 중인 약의 개수가 줄었다고 반박하는 댓글이 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 국내에는 오젬픽, 위고비와 같은 약이 본격적으로 공급되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 촉발될 논란에 대해 미리 생각해볼 점이 많다. 분량 제한으로 지면에서 다루지 못한 더 자세한 내용은 새 책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소식의 과학>에서 읽어주시길!
2023-08-30 11:34 |
[약사·약국] <138> 폭염과 약 이야기
여름이면 기후 변화가 몸으로 느껴진다. 세계 곳곳에서 폭염, 가뭄, 산불, 폭우와 같은 기상 이변으로 인한 피해 소식이 이어진다. 온열질환자도 매년 증가 추세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5월 20일부터 8월 2일까지 확인된 온열질환자는 1,385명으로 작년 같은 기간 대비 29.0% 증가했다. 8월은 특히 주의가 필요한 달이다. 월별로 보면 무더위가 절정에 달하는 8월에 가장 많은 온열질환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2020년 8월에는 월평균의 3.5배에 달하는 3,841명이 온열질환으로 병의원을 찾았다. 더위가 왜 건강 문제를 일으킬까? 체온이 지나치게 올라가면 열로 인해 뇌를 비롯한 여러 인체 기관들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날씨가 더우면 인체가 어떻게든 체온을 낮추려고 애쓰는 이유이다. 하나는 피부 쪽 모세혈관을 확장시키고 피부 쪽 혈액 순환을 늘려 열을 발산하는 것이다. 더운 날 얼굴이 빨갛게 보이는 것은 이로 인한 현상이다.두 번째는 땀을 흘려서 열을 식히는 방법이다. 땀이 기화하면서 피부의 열을 빼앗아 주변 혈액의 온도를 낮추고 이 혈액이 다시 인체 내부로 순환하면서 열기를 식힌다. 하지만 요즘처럼 고온다습할 때는 이런 인체의 보호 기능만으로 부족하다. 외부 온도가 너무 높으면 열을 발산하기보다 흡수하기 쉽다. 게다가 습도가 높아서 땀이 잘 날아가질 않으니 내부 온도를 낮추기가 매우 어렵다.이렇게 체온 조절 기능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우리는 쉽게 피로를 느낀다. 활동을 중지하고 더위를 피해 몸을 식히라는 뇌의 경고 메시지이다. 이를 무시하고 과도한 활동을 하거나 계속하여 열기에 노출되면 신장, 심장, 장, 뇌와 같은 장기가 손상되고 심하게는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특히 노인, 어린이, 만성질환자가 더 위험하다.폭염에 노출되면 어떻게든 혈액 순환을 늘려 체온을 조절해보려다가 심장에 무리가 가기 쉽다. 상황이 더 악화하여 뇌마저 과열되고 산소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체온 조절 중추인 시상하부도 손을 놔버린다. 가장 심한 형태의 열손상인 열사병까지 가게 되면 땀도 더 이상 흘리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서 의식 소실, 섬망과 같은 증상마저 나타난다. 불행히도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에는 약이 없다. 얼음물, 냉찜질 등 물리적 수단을 동원하여 뜨거운 몸을 빠르게 식혀주어야 장기 손상을 막을 수 있다.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 잘 모를 때는 119에 신고하여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온열질환은 예방이 더 중요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물을 충분히 마시고, 시원하게 지내고, 더운 시간에는 쉬면 예방할 수 있다. 날씨가 더울 때는 그만큼 물을 더 마셔야 한다.땀으로 인한 수분 손실이 있으므로 신체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좋다. 땀으로 염분과 미네랄이 소실되기는 하지만 매우 소량이다. 염분 섭취는 이미 충분하며 차고 넘친다. 식사를 통해 필요 이상으로 염분을 섭취하고 있으므로 특별히 소금을 더 먹을 필요는 없다. 물만 마셔도 된다.시원하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다. 폭염에 야외활동과 작업은 자제해야 한다. 기후 변화로 인해 온열질환자와 사망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더위에도 무리한 작업을 강요하는 일터가 있지는 않은지 사회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실내에서는 커튼, 블라인드를 사용해서 가능한 한 햇빛을 막아줘야 하며 외출 시에는 가볍고, 색이 옅고, 헐렁한 옷을 입어서 열이 쉽게 발산되도록 해주는 게 좋다. 무엇보다도 냉방기기를 적절히 사용하는 게 필수적이다. 집에 에어컨이 있을 때는 에어컨을 틀어주고, 없는 경우는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에어컨으로 온도를 낮춘 공간에 머물면 온열질환 위험이 감소한다.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서는 쇼핑몰이나 공공도서관을 하루 3-4시간 정도 방문하는 것도 권장한다. 집에 냉방기기가 없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무더위쉼터를 제공하고 접근하기 쉽게 만드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기후 변화에 대해서도 그로 인한 온열 질환에 대해서도 사회가 다함께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이 많다.
2023-08-17 07:38 |
[약사·약국] <137> 발효식품 팩트체크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주던 시절이 있었다. “서양 사람의 혓바닥에는 전혀 발달돼있지 않은 맛난 맛 – 곧 발효미 지각미역이 우리 한국사람에게 가장 발달돼있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과거 큰 인기를 끌었던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 1987년 8월 7일자에 나오는 글이다. 서양 음식에는 발효식품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한국인의 밥반찬은 대부분 발효식품이므로 한국인의 발효미 감지능력이 세계 최고라는 주장이 1985년부터 1997년까지 다섯 번 이상 반복됐다.근거 없는 주장이다. 학계 추산에 따르면 세계인이 소비하는 음식의 1/3은 발효식품이다. 된장, 간장, 김치만 발효식품이 아니다. 빵, 맥주, 와인, 치즈는 전부 발효식품이다. 피클, 사워크라우트 같은 채소절임도 발효식품이다. 초리조, 살라미 같은 육가공품도 발효식품이다. 카카오를 초콜릿으로 만드는 과정에도 발효가 필수적이다.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유기산과 알코올은 음식의 보존성을 향상시킨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발효는 음식을 오래 보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오래 둔 음식이 상한 줄 알았는데 먹어보니 탈나지 않고 오히려 맛이 좋아지는 발견을 통해 만들기 시작한 발효식품도 많았을 것이다. 발효식품은 세계 전역에서 두루 먹어 왔다. 동아시아 전역에 발효 생선, 발효 콩 식문화가 나타난다.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에도 다양한 발효식품과 소스가 있다. 한국인의 발효미 감지능력이 가장 발달돼있다는 주장 역시 과학적 근거가 전무하다. 특별히 한국인의 신맛, 짠맛 감지 능력이 뛰어나다는 연구 결과는 없다. 그런데도 1990년대 사람들은 이규태 칼럼에 반복되는 틀린 이야기에 별일 없이 넘어갔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시절이었으니 우리가 최고라는 말이 솔깃했을 법하다. 하지만 숨겨진 또 하나의 이유는 발효의 냄새다. 방송에서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즐겁게 먹는 장면이 종종 비춰지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안 그랬다. 한국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 장류, 젓갈, 김치와 같은 발효식품을 맛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흔했다. 먹어보면 얼마나 맛있는데 저걸 모르나 싶었을 거다. 하지만 후천적으로 배워서 얻는 입맛이며 정확히 말해 냄새에 대한 선호도이다. 냄새를 더 잘 맡거나 감지하는 게 아니다. 대학시절 내 친구는 1996년 LA 공항 식당에서 샐러드에 끼얹은 블루치즈 드레싱을 처음 맛보고 그 냄새에 질려 이틀 동안 음식을 제대로 입에 대지 못했다.발효된 음식의 냄새가 부패한 음식 냄새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아마도 그런 혐오의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먹어보고 별탈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고 또한 냄새에 자주 노출되어 익숙해지면 거부감이 줄어들고 맛을 즐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적으로 특정 발효식품 냄새를 극복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유럽인이라고 전부 치즈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치즈 혐오에 대한 연구로 이그노벨상을 탄 장-피에르 로예트에 따르면 프랑스인 11.5%가 치즈 냄새를 혐오한다. 치즈가 상한 음식으로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음식이 아닌 어떤 것으로 보일 정도라는 거다.하지만 막상 먹고 나면 발효식품이 속에 더 편안하다. 미생물에게 소화의 일부를 외주로 주어 미리 음식의 일부를 소화시킨 뒤여서 그럴 수 있다. 흥미롭게도 발효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fermentation은 끓인다는 뜻의 라틴어 fervere에서 왔다. 발효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스로 인한 거품이 액체가 끓을 때와 비슷하게 보이는 데서 착안한 말이다. 발효식품은 원래 음식보다 소화가 잘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우유를 마시면 속이 불편한 유당불내증이 있는 사람도 대개 요거트나 치즈는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유당이 전부 발효되는 것은 아니고 일부 남아있어서 유당불내증이 심한 사람은 치즈나 요거트를 먹어도 배가 아플 수 있다.) 미생물 발효로 비타민, 항산화물질, 항염증물질 등의 건강에 유익한 기능성 성분이 생겨난다. 2021년에는 발효식품을 자주 먹으면 장내 미생물군집의 다양성을 늘리고 염증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우리만 발효식품을 먹는 건 아니지만 다양한 발효식품이 세계인의 건강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2023-07-26 10:19 |
[약사·약국] <136> 팜므파탈과 약 이야기
아름다운 여성의 미모에 눈이 먼 고위직 남성이 기밀을 누설한다. 스릴러 영화에 흔하게 등장하는 장면이다. 일부 과학자는 이렇게 남성이 미녀에게 빠지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설명한다. 매력적인 자손을 남기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단 이야기다.물론 모두가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은 생존이나 번식과 관계없는 독립적 현상이라는 반론이다. 이런 논쟁을 생각하면 항생제 미노사이클린이 떠오른다. 2013년 일본 연구 결과 이 약을 복용 중에는 미모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는 경향을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연구 논문의 제목 자체가 <미세교세포 억제제 미노사이클린이 인간의 경제 교류에서 미인계 위험을 줄인다>이다. 남성 98명을 대상으로 한 이 실험에서 연구진은 4일 동안 참가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는 미노사이클린(200mg/일)을, 나머지 그룹에는 위약을 주었다. 나흘 뒤 참가자들에게 1300엔을 주고 여성의 사진을 컴퓨터 화면으로 보여주면서 사진 속 여성에게 얼마를 맡길 것인가 물어봤다. 돈을 맡긴 뒤에는 사진 속 여성의 신뢰도와 매력도를 평가하도록 했다. 남성이 여성에게 맡긴 금액에 세 배를 곱한 금액이 총액이 되고 여성의 결정에 따라 금액을 둘이 나눠가질 수 있다는 설명이 주어졌다. 8명의 여성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일대일 신뢰게임을 8회 반복했다. 하지만 남성 참가자들 모르게 배신이 예정되어 있었다. 사전에 모든 여성이 돈을 독식하기로 결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실험 결과 남성 참가자들은 확실히 여성의 미모에 흔들렸다. 위약을 복용한 사람의 경우 여성의 외모가 매력적일 경우 평균적으로 자기 돈의 66%를 맡겼고 매력적이지 않을 경우 절반을 맡겼다. 미노사이클린을 복용한 참가자의 경우 이런 차이가 줄어들었다. 약을 복용한 사람들은 외모가 매력적이든 덜 매력적이든 주어진 돈의 절반 정도만 맡기겠다고 답했다. 약을 먹지 않은 남성은 외모에 기만당하는 경향이 나타났지만 미노사이클린을 나흘 복용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다.항생제로서 미노사이클린은 일반적으로 여드름이나 피부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되는 약이다. 그런데 미노사이클린은 중추신경계에도 영향을 주어 조현병, 우울증 증상을 완화시키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약물은 뇌에서 신경을 보호하는 작용과 항염 작용이 있어서 치매, 다발성 경화증, 척수 손상 등에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또한 흥분하지 않고 좀 더 차분히 결정을 내리도록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노사이클린이 남성이 미인계에 흔들리지 않게 도와주는 정확한 기전은 모르지만 아마도 이 약물이 뇌의 미세교세포 활성을 억제하고 뇌에서 도파민, 글루탐산과 같은 신경전달물질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이 연구는 뇌의 미세교세포가 사람의 정신활동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약물이 미세교세포의 기능을 조절하는 데 효과를 낼 수 있느냐를 보기 위해 진행된 것이다. 팜므 파탈의 유혹을 피하려면 미노사이클린을 먹으라는 걸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약이 부작용으로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가령 파킨슨병 치료제인 레보도파를 복용 중에 일부 환자는 도박이나 성적 충동이 증가하여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본인이 이에 대해 인지하지 못할 수 있어서 약 복용 사실을 아는 주변 사람들이 모니터링해줄 필요가 있다. 여드름 증상이 심할 때 먹는 치료약으로 쓰이는 이소트레티노인 복용 중에 드물지만 우울증 증상이 나타나거나 기존의 우울증 증상이 악화될 수 있다. 드물지만 공격적이거나 과격한 행동을 보이고 감정이 불안정해지는 경우도 생긴다. 매우 드물지만 자살충동이 생기는 사람도 있다. 이 약을 복용 중일 때도 마찬가지로 본인과 주변 사람들이 이러한 감정, 행동 변화를 모니터링하고 문제가 느껴지면 즉시 의사, 약사와 상담해야 한다. 드물지만 반드시 알아둬야 할 부작용이다.
2023-07-13 10:14 |
[약사·약국] <135> 비건 아이스크림 이야기
호기심에 비건 아이스크림 두 가지를 맛봤다. 초콜릿 푸딩 아이스크림은 입에서 부드럽고 촉촉하면서도 끈적하게 녹아내렸다. 예전에 야자경화유를 넣어 만든 아이스크림에 비하면 정말 많이 바뀌었다. 야자경화유를 넣은 아이스크림은 유크림으로 만든 것과 향도 다르지만 혀에 닿을 때 녹지 않고 미끈거리는 느낌이 강해서 차이를 알아내기 쉽다. 하지만 내가 맛본 비건 초콜릿 푸딩 아이스크림은 눈감고 비교 시식한다면 유크림을 넣은 보통 아이스크림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미와 식감이 비슷했다. 잔탄검, 구아검, 카라기난 같은 안정제(증점다당류)를 넣어 점도를 높여준 덕분이다.비건 소르베는 실망스러웠다. 크리미한 식감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달았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고 난 뒤의 두통이 마치 설탕 때문인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의아하다. 아이스크림에는 본래 원유나 유가공품이 원료로 들어간다. 법적으로 유지방분 6% 이상, 유고형분 16% 이상이어야 아이스크림이다. 유지방이 10-16%로 더 높은 제품도 있다.샤베트(Sherbet)에는 유지방이 들어가진 않지만 유고형분이 2% 이상이어야 한다. 샤베트는 소르베와 아이스크림의 중간이다. 소르베(Sorbet)에는 우유나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는다. 원래 그렇다. 말하자면 소르베는 물에 과일 맛을 내서 얼린 형태이다. 특별히 의도하지 않아도 비건이다. 과일과 신맛 성분, 감미료를 물에 더해서 얼려낼 뿐이니까 말이다.만약 비건 소르베가 맛이 없다면 비건이라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소르베를 제대로 못 만들어서 맛이 없는 거다. 비건 베이글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베이글에는 동물성 재료가 필요하지 않다. 밀가루, 물, 소금, 이스트 정도면 충분하다. 구울 때 갈색이 좀더 진해지도록 반죽 표면에 기름을 바르기도 하고 단맛을 더하기 위해 설탕, 몰트 시럽, 콘 시럽 같은 감미료를 넣기도 한다. 이때 설탕 대신 꿀을 넣으면 엄밀히 말해 비건 베이글이 될 수 없다. 꿀은 햄이나 베이컨처럼 동물을 희생하여 얻는 음식은 아니지만 우유나 버터처럼 동물에 의해 만들어진 음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건이라고 모두가 꿀을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꿀은 벌이 벌을 위해서 모은 것이지 사람을 위한 음식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꿀을 먹지 않는 비건이 대다수이다.엄격한 기준에 맞춰 비건 식품을 만드는 건 언뜻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지만 뒤집어 보면 의외로 쉬운 일이기도 하다. 이삼십 년 전만 해도 고기를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식탁에는 고기가 헤엄친 듯한 국, 고기보다 어육과 밀가루가 더 많이 들어있는 소시지가 놓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동물성 식재료를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게 대다수의 사람에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건 소르베나 비건 베이글처럼 음식 앞에 비건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맛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원래부터 비건에 가까운 음식을 비건으로 만든다고 맛에서 커다란 차이가 나타날 가능성은 낮다.건강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트랜스 지방이 악의 축으로 지목되자 트랜스 지방이 들어있지 않은 사탕이 시장에 나왔던 걸 기억하자. 사탕에는 원래 지방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원래 비건에 가까운 소르베나 베이글을 비건으로 만들어 먹는다고 건강에 더 유익할 리도 없다. 사람의 식단은 유연하다. 마사이족처럼 육류와 유제품만 먹고도 살 수도 있고 인도 구자라트 주 사람처럼 채식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건강을 위해 그런 식단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나 사회의 문화적 전통 때문에 음식 선택의 폭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비건 식품이 늘어나고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건 좋은 일이다. 환경과 동물을 보호하자는 메시지도 좋다. 하지만 비건이 건강한 식생활의 유일한 정답인 것처럼 말해서는 곤란하다. 잡식동물인 사람에게 건강한 식생활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능하다.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되 음식 선택에 완전무결한 정답은 없다는 걸 기억하자.
2023-06-28 09:31 |
[약사·약국] <134> 우유대체품에 대한 고민
미래에는 알약으로 식사를 대신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하지만 불필요한 일이다. 칼로리를 계산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성인이 하루에 섭취해야 하는 열량을 2000kcal라고 가정한다면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중 열량 밀도가 제일 높은 지방으로 환산해도 222g이 필요하다. 지방으로 1그램 알약을 만들어도 하루 200알 넘게 먹어야 한단 얘기다. 식사대용식의 주류가 알약이 아닌 음료가 되는 이유이다. 하루에 알약 200알을 삼킨다는 건 생각만 해도 고역이지만 동일 열량을 음료로 섭취하는 건 어렵지 않다.전에는 그런 대용식의 기본이 우유였다. 하지만 요즘은 선택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 두유, 아몬드, 귀리, 헤이즐넛, 완두콩으로 만든 대체우유 중에 골라 마실 수 있다. 씨리얼을 말아먹기도 좋고 커피에 타서 마시기도 괜찮다. 바리스타용으로 나온 제품을 뜨겁게 거품 내어 커피에 올리면 식물성 카페 라떼가 된다. 귀리우유는 이렇게 커피에 우유 대신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여 미국에서 대인기를 끌었다.특히 뉴욕의 하이엔드 커피샵부터 공략한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다. 음식의 세계에서 뭔가가 쿨하고 트렌디하게 보이는 건 확산에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다. 우유 대신 대체우유를 마시면 북유럽 감성에 빠져든다고? 그럴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귀리우유와 완두콩우유 브랜드가 모두 스웨덴에서 시작했으며 제조사들이 그런 사실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원래 스웨덴은 우유에 대한 사랑으로 유명한 나라다. 스웨덴인 한 명이 1년에 마시는 우유가 90리터, 유제품을 다 합하면 섭취량이 300kg이 넘는다. 이렇게 우유 소비가 많으니 그만큼 건강이나 환경 문제에도 예민하다. 2014년 10월 하루에 우유를 3잔 이상 마시면 사망 위험이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것도 스웨덴 연구팀이다.물론 이런 식의 관찰 연구로는 인과관계를 알 수 없다. 우유와 사망률에 별 연관성이 없다는 연구 결과도 다수 있다. 우유가 완전식품이라며 모두에게 권장하던 과거와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우유가 건강에 해로운 식품도 아니다. 우유와 유제품은 건강 식단의 구성요소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닌 식품이다.하지만 환경 면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온실가스 배출이나 물 소비 면에서 우유보다 대체우유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작다. 소에게 사료를 먹여 젖을 짜는 방식보다는 사람이 곡물로 만든 음료를 직접 먹는 방식이 식품 생산에 소모되는 에너지 비용 면에서 더 나은 선택이다.다만 모든 식물성 대체우유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동일하진 않다. 아몬드밀크는 생산 과정에서 배출하는 온실 가스가 매우 적지만 물이 많이 소비된다. 귀리, 콩과 같은 곡물은 온실가스 배출량, 물 소비량이 적은 편이고 추운 지역, 덜 비옥한 땅에서도 재배하기 쉽다. 환경 면에서는 귀리, 콩으로 만든 대체우유가 더 나은 선택이다.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픈 사람도 있다. 성인이 되면 우유 속 유당을 분해하는 소화효소가 잘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유당을 분해하거나 제거한 우유를 마시면 그런 증상이 덜하다. 두유, 귀리우유, 완두콩우유 같은 대체우유를 마시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대체우유는 곡물이 주성분이므로 우유와 영양 구성이 동일하진 않다. 식물성 대체우유에 칼슘, 비타민을 강화하는 이유다. 뒤집어 생각하면 칼로리나 영양성분을 조절하기 쉽다는 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흰 우유는 무지방, 저지방, 일반 우유처럼 지방 함량에 따라 열량이 달라지는 정도이지만 대체우유는 나에게 맞는 영양 구성에 가까운 종류를 골라 마실 수 있다. 단백질 섭취를 늘리고 싶다면 두유, 장 건강 면에서는 베타글루칸 같은 식이섬유가 풍부한 귀리우유가 좋다. 베타글루칸과 같은 수용성 섬유질은 장에서 콜레스테롤 재흡수를 막고 혈당을 천천히 높이며 배변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다.지구상 인류 대부분이 유당불내증인데도 전 세계 80억 인구 중 60억 이상이 우유 또는 유제품을 소비한다는 건 우유에 그만큼 영양학적 이점이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지구 환경을 보존하려면 지금처럼 우유를 많이 소비하기 어려운 것도 맞다. 우유와 대체우유의 공존 속에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많다.
2023-06-23 02:51 |
[약사·약국] <133> 약은 다 똑같지 않다
겉모양으로 약을 판단하지 말자. 25년 전 어느 날 내가 입에 거품을 물고서 몸으로 배운 교훈이다. 약국에서 발포정을 씹어 삼켰던 것이다. 변명하자면, 향긋한 과일향의 납작한 알약은 새내기 약사였던 내 눈에는 츄어블 비타민제처럼 보였다. 미리 물에 녹여서 마시는 대신 알약을 씹어 삼키고 물을 마시면 마찬가지일 듯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발포정 속 탄산수소나트륨은 위산과 만나 쉴 새 없이 이산화탄소 기체를 만들어냈고, 꿉꿉한 거품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입 속을 채웠다. 약국에 누가 오기라도 할까 걱정하며 물을 더 마셔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입 속 거품이 전부 사라지기까지는 삼사 분 정도 시간이 더 걸렸다.그날 내가 발포정을 씹었던 건 약간의 게으름과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약을 삼키기 어려워서 부득이하게 씹어 삼키거나 가루로 만들어 먹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알약을 갈아 먹어도 될까? 답은 약마다 다르다. 코팅하지 않은 일반 정제는 가루로 만들거나 씹어 먹어도 무방하다. (대신 맛은 보장할 수 없다.)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골다공증 약처럼 식도 점막을 손상시킬 수 있는 알약은 씹거나 입에서 천천히 녹여 먹어서는 곤란하다. 서서히 약성분을 방출하도록 특별히 설계된 알약은 쪼개 먹으면 안 된다. 약성분이 한 번에 너무 많이 흡수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장에서 녹도록 특수하게 코팅한 알약도 갈면 안 된다. 그대로 복용해야 한다. 알약을 삼키기 어려울 때는 자르거나 갈아서 복용해도 되는지 약사에게 물어보는 게 좋다.가루약을 복용할 때도 주의가 필요하다. 가루를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시는 방식은 위험하다. 식도로 들어가야 할 가루약이 기도로 들어가면 호흡 곤란이나 흡인성 폐렴을 일으킬 수 있다. 가루약은 복용 직전에 소량의 물에 타서 복용하는 게 좋다. 구강붕해정, 구강용해필름처럼 입에서 바로 녹는 약, 물 없이 사용 가능한 약도 있다. (다만 이들 제형이라고 약물 흡수가 더 빠른 건 아니다.) 알약을 삼키기 어려운 경우 붙이는 패치, 좌약, 또는 주사제를 쓸 수도 있다.약을 물 대신 차나 커피와 함께 복용해도 될까? 답은 그때그때 다르다. 반드시 맹물이 아니어도 된다. 물 대신 다른 음료를 마셔도 괜찮다. 역삼투압 정수기로 거른 물이나 미네랄워터만큼이나 보리차나 옥수수차도 무방하다. 약을 위장까지 시원하게 쓸어내려 보내기 위해 한 컵을 쭈욱 마시면 된다. 너무 뜨겁거나 차가운 음료는 한 번에 마시기 어려우니 피해야 한다.홍차나 커피와 같은 카페인 음료는 어떨까? 이 경우도 대체로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몇몇 예외가 있다. 복합진통제, 감기약처럼 카페인이 들어있는 약을 커피와 같은 카페인 음료와 함께 먹으면 한 번에 너무 많은 카페인을 섭취하게 되어 부작용이 심해질 수 있다. 커피를 여러 잔 마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하거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메스꺼운 증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갑상선 호르몬제와 골다공증 약도 커피, 홍차, 콜라는 피하는 게 좋다. 이들 약은 카페인 음료와 함께 복용하면 흡수가 줄어들어서 약효가 떨어진다.약을 과일 주스와 함께 마시는 것도 대개 무방하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고지혈증 치료제로 사용되는 스타틴 계열의 약을 복용 중일 때 자몽주스는 금기다. 자몽 속의 쓴맛 성분이 알약 한 알의 부작용을 2.5알 복용했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높이기 때문이다. 자몽주스를 약과 다른 시간대에 마시는 것도 안 된다. 자몽주스가 약에 미치는 효과는 72시간까지 지속된다. 반대로 자몽, 오렌지 및 사과주스는 항히스타민제 펙소페나딘의 흡수를 방해하여 효과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앞서 스타틴의 경우와는 반대로 알약을 한 알 먹었는데, 효과가 반 알로 줄어들게 된다. 유기음이온 운반체(OATP)를 통한 약물 흡수를 저해하기 때문이다.복잡해서 머리 아프다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쓸 약에 대해서만 알아 두면 충분하고, 잘 모를 땐 물어보면 된다. 약은 다 똑같지 않다. 저마다 사용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약마다 그에 맞게 대해 주자. 용법과 주의사항을 잘 알고 쓰는 게 입에 거품을 무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다.
2023-05-31 08:46 |
[약사·약국] <132> 효소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요리는 본래 불로 익히는 행위를 말한다. 가열 과정에서 꼬인 단백질은 풀리고 변성되고 전분은 물을 흡수하여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되면 소화효소가 접근하기 쉬워지므로 소화가 더 쉬워진다. 결국 어떤 식재료를 요리한다는 건 소화라는 업무의 일부를 불에게 외주로 맡기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발효는 미생물에게 소화 과정의 일부를 외주로 맡기는 것이다.잘 발효시킨 음식을 먹고 속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미 미생물에 의해 일부 소화가 일어난 뒤이기 때문이다.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가 불로 가열하는 것보다 소화하기 더 쉬운 결과물로 이어질 때도 있다. 삶은 콩을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더부룩하며 배에 가스가 찬다. 콩 속에 들어있는 소화하기 어려운 탄수화물 때문이다.인체의 소화효소로는 분해하여 흡수할 수 없으니 이들 난소화성 탄수화물은 대장까지 그대로 내려간다. 장내 미생물이 이들 탄수화물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스와 복통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콩을 발효시켜 만든 된장, 간장과 같은 식품은 이런 문제를 훨씬 적게 일으킨다. 발효로 만드는 과정에서 미생물에 의해 난소화성 탄수화물이 분해되었기 때문이다. 콩을 소화할 수 있는 미생물과 효소에게 외주를 주어 사람이 더 소화하기 쉬운 식품을 만들어낸 셈이다.발효와 효소는 다르다. 발효는 식재료에 유산균, 이스트(이걸 효소와 발음이 비슷한 효모로 번역하지만 않았더라면 덜 헷갈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와 같은 살아있는 미생물을 넣어 식재료 속 유기물을 분해시키는 과정이다. 효소는 이들 미생물이 식재료 속 유기물을 분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다. 효소는 미생물에게만 있는 도구가 아니다.모든 효소가 소화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생명체에는 생명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다양한 효소를 만들어낸다. 미생물이 아닌 원물에 들어있는 효소를 이용해서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도 한다. 군고구마가 생고구마보다 맛이 달고 속에 편안하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고구마에 들어있는 다당류 분해효소와 관련된다.녹말 자체는 아무 맛이 없다. 하지만 고구마 속 효소가 녹말을 당으로 쪼개주면 단맛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군고구마는 효소가 활성화하여 일하기 좋은 온도(50~60℃)에서 천천히 가열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그러니 원물보다 더 달콤하고 풍미가 진하다. 밥을 입에 넣고 여러 번 씹으면 단맛이 느껴지는 것도 다당류 분해효소 덕분이다. 사람의 침 속에는 알파-아밀레이스, 고구마에는 베타-아밀레이스라고 불리는 효소가 들어있다. 이름은 달라도 하는 일은 비슷하다.곡물에 미생물을 넣어 배양하여 만든다는 곡물 효소도 꾸준한 인기다. 콩을 발효시켜 된장을 만드는 것처럼 현미, 메밀, 보리 등의 곡물에도 미생물을 넣어서 발효시키면 날것보다야 소화가 더 잘 된다. 미생물에게 미리 일부 소화를 시켜둔 셈이니까 말이다. 발효 과정에서 미생물이 비타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김치 속 유산균이 원래보다 1.5~2배로 많은 비타민B군을 생성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만 미네랄은 다른 이야기다. 철분, 칼슘,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은 기본적으로 흙 속의 금속 성분이다. 이들은 발효로 만들어낼 수 없다. 발효 과정에서 원물로 사용된 곡물 속에서 미네랄 흡수를 방해하는 피트산이 줄어들 수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누군가 발효로 미네랄 함량을 높였다고 말한다면 신빙성을 의심하는 게 좋다.곡물효소 제품 중에는 식이섬유나 유산균, 프락토올리고당을 추가로 배합한 것들도 있다. 먹고 나서 변비가 덜 생긴다는 경험담은 이렇게 추가한 성분들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곡물효소를 먹는다고 해서 효소를 보충할 수는 없다. 효소는 덩치가 커다란 단백질이다. 장 점막을 통과해서 체내로 들여올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미생물이 효소를 통해 곡물을 분해해서 만들어낸 당류, 비타민은 흡수할 수 있지만 그런 과정에서 사용한 도구인 효소는 인체가 그대로 들여올 수 없다. 전부 다 아미노산으로 쪼개서 소화, 흡수한다. 효소의 운명은 그걸로 끝이다. 그냥 인체가 필요한 데 쓴다. 효소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장에서 소화를 일부 돕는 정도 외의 다른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특정 제품이 체내 효소를 보충해준다는 식으로 광고한다면 과장된 것으로 여기고 거르는 좋은 이유다. 잊지 말자. 스토리가 좋다고 다 사실은 아니다.
2023-05-17 09:32 |
[약사·약국] <131> 썩지 않는 햄버거의 진실
썩지 않는 햄버거는 거의 매년 화제가 된다. 2012년 JTBC <미각스캔들> 방송에서 다룬 적이 있다. 2019년에는 아이슬란드 남부의 한 숙박시설에서 10년 전에 사서 보관한 햄버거와 감자튀김이 상하지 않았다는 뉴스가 국내 여러 방송에 소개됐다.과거에 일부 전문가는 보존료를 넣어서 안 상하는 게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햄버거가 이렇게 오랫동안 상하지 않는 것은 수분 제거로 인한 현상일 뿐이다. 보존료 없이도 수분을 충분히 제거하면 식품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생명체는 성장을 위해 물을 필요로 한다. 인체의 절반 이상은 수분이다. 수분이 부족하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음식을 부패시키는 미생물도 마찬가지다. 수분 없이는 세균이나 곰팡이도 성장할 수 없다.감기약 시럽과 같은 설탕 시럽의 경우에는 수분이 있긴 하지만 고농도의 설탕에 붙잡혀 있어서 미생물이 이용가능한 수분이 없다. 그래서 시럽은 별도의 보존제 없이도 장기간 보존이 가능하다. (냉장고에 시럽을 넣었다가 꺼냈다가 하면 이런 과정에서 응결된 물 때문에 시럽의 일부가 희석되어 세균 번식이 일어날 수 있다. 따로 표시가 없는 한 시럽은 실온 보관이 원칙이다.)건조는 인류가 식품을 보관하기 위해 사용한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봄나물은 냉장고에 둬도 장기 보관하기 어렵지만 생으로 말리거나 끓는 물에 삶거나 데친 다음 건조하여 묵나물로 만들면 겨울에도 나물을 즐길 수 있다. 예부터 정월 대보름에 묵나물을 삶아 먹을 수 있었던 것도 건조 기술을 활용한 덕분인 것이다. 그냥 말리기도 하지만 삶거나 데쳐주면 식물 세포 속의 산화 효소를 불활성화하여 갈변과 항산화물질의 파괴를 막아준다.하지만 가열 과정에서 나물 속의 비타민과 항산화물질이 파괴될 수도 있다. 온도가 너무 높아지지 않도록 55-70°C에서 가열하면서 열풍 건조하는 방법이 자주 쓰인다. 과일을 말릴 때 갈변을 막기 위해 황 화합물을 뿌려 주기도 한다.식품을 건조할 때 갈변을 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녹차는 가열하여 갈변 효소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건조하지만 우롱차, 홍차를 만들 때는 갈변 효소의 반응을 이용하여 색깔과 향을 낸다. 이렇게 하여 잎을 말려주면 차를 오랫동안 보관하며 마실 수 있게 된다. 녹차를 가열 건조할 때도 수증기로 찌느냐 뜨거운 가마솥에서 덖어주느냐에 따라 색깔과 향이 달라진다.음식을 건조할 때 표면을 너무 빠르게 말리면 겉이 딱딱해지면서 속의 수분은 대부분 그대로 남게 된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빵을 구울 때는 이렇게 말리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식품을 오래 저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조할 때는 너무 빠르게 겉면을 말려서는 안 된다. 식품 속 수분이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고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식품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수분의 이동은 열전도에 비하면 매우 느린 편이어서 고르게 수분을 제거하여 건조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수분을 날려 건조한 식품은 원래보다 영양소 함량이 높아진다. 가끔 방송에서 열 배, 스무 배라며 호들갑 떠는 것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저 물이 빠져나간 만큼 영양소 밀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적은 양을 먹어도 고열량을 섭취할 수 있으며 무게는 상대적으로 가벼우니 길을 걷는 도보 여행자들에게 건조식품은 훌륭한 비상식품이 된다.대신 칼로리가 높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말린 망고 같은 과일을 집에 두고 먹을 때 자칫하면 평소 먹을 과일 양의 여러 배 칼로리를 한 번에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조식품은 원래의 영양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 풍미가 좋으며 오랫동안 두고 즐길 수 있어 오랫동안 인류의 사랑을 받아왔다. 햄버거가 상하지 않는다는 뉴스를 보고 놀라는 일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
2023-04-26 09:19 |
[약사·약국] <130> SNS와 건강
유튜브 쇼츠와 같은 짧은 동영상이 계속 인기다. 보고 있으면 허무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간 때우기에 이보다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보의 질은 떨어지는 동영상이 많다. 60초 이내 짧은 동영상 소셜 미디어의 원조격인 틱톡에서 인기몰이 중인 것톡이 그렇다. 것톡(guttok)이란 장(gut) 건강에 대한 틱톡(tiktok) 동영상을 말한다. #guttok으로 장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는 짧은 동영상 조회수가 무려 8억8천만 뷰가 넘는다.것톡 동영상은 대체로 복통, 가스, 변비, 설사 같은 과민성 대장 증후군 증상을 다룬 게 많다. 이전에 그런 증상으로 고생했다는 인플루언서가 나와서 알로에 베라 주스, 올리브유 같은 특정 식품을 먹고 씻은 듯이 나았다며 씩 웃는다. 이삼십 초 밖에 안 되는 짧은 동영상인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심지어 광고 홍보성 동영상인데도 이끌린다. 장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블랙 워터라는 음료를 들고 나와서 이 제품이 치아에 안전한지 보자는 동영상 조회수가 무려 1,000만이다.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게 세다. 2011년에 의사이며 영양사인 크리스틴 게브스타트가 블랙 워터에는 특별한 효과가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그런 전문가의 팩트 체크는 부질없다. 소셜 미디어 셀럽의 한마디에 묻혀 버린다. 나는 2014년에 첫 책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에서 해독주스에 기대할 만한 실제 해독 효과가 없다고 썼다. 영국 BBC에서 디톡스 다이어트의 효과가 없다는 걸 증명하는 실험을 방송했고 영국 영양사 협회에서 ‘해독 다이어트가 마케팅을 위해 만들어낸 거짓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고 썼다. 해독은 해독주스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몸의 간과 신장에서 하는 일이다. 솔직히 그런 글을 쓰면 뭐하나 싶다. 디톡스는 2023년 현재도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 인스타그램에만 봐도 디톡스 태그로 79만, 디톡스주스로 12만 7천, 디톡스워터로 4만4천 개의 게시물이 올라있다.별 효과가 없을 것 같은 제품도 인플루언서가 집어들면 즉시 화제가 된다. 누구든 카톡, 틱톡,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으로 정보를 퍼나르고 공유할 수 있는 시대이다. 하지만 이런 미디어 기술이 진보했다고 팩트체크 기술까지 좋아진 건 아니다.2021년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가짜 정보가 범람하자 틱톡은 관련 동영상에 코로나19백신 정보를 클릭해볼 수 있도록 배너를 붙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영국의 씽크탱크 전략대화연구소(Institute for Strategic Dialogue)에서 조사한 결과 실제로 배너가 붙은 동영상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백신에 관한 동영상 6천 개 중 58%에는 배너가 붙지 않았다.소셜 미디어는 정보를 유포하는 데는 혁신적 기술 발전일지 몰라도 팩트 체크 면에서는 기존 언론 매체보다 나은 점이 없다. 그 결과 SNS에는 키가 173cm였던 성인이 특정 제품을 먹고 180cm로 컸다는 식의 영상 광고가 버젓이 돌아다닌다. 여드름, 탈모, 불면증 따위는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동영상부터 자신의 물광 피부, S라인 몸매 비결이 특정 제품인 것처럼 증언하는 인플루언서들의 포스팅까지 다양한 형태의 광고가 시선을 자극한다.필요하니까 속는다. 하수구가 막혀서 고생하는 사람은 하수구를 뚫는다는 제품 홍보 포스팅에 속기 쉽고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사람은 늘 반신반의하면서도 새로운 다이어트 제품에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냥 사진과 텍스트만이 아니라 동영상으로 보고 목소리를 듣다보면 대상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것톡이 인기를 끄는 것은 아무한테나 꺼내기 힘든 장 건강 이야기를 대중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변비로 고생하다보니 그저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기만 하면 장 건강에 좋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그렇다고 굳이 인플루언서가 추천하는 제품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다. 적게 먹으면 변비가 생기기 쉽다. 해결책은 쉽다. 음식을 충분히 먹거나 섬유질이 풍부한 과일, 채소 섭취량을 늘리면 된다. 전보다 적게 먹는 쪽으로 식습관을 바꾸는 중이라면 전보다 화장실을 가는 횟수가 줄어드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 기억하자. 건강에 관한 한 정답이 있는데 따르기 싫다고 신비로운 해결책을 찾아 헤매는 건 굳이 안 써도 될 돈만 낭비하는 길이다.
2023-04-12 09:33 |
[약사·약국] <129> 잠과 음식 이야기
상추는 졸음 유발의 누명을 쓴 대표적 음식이다. 200여 년 전에 이미 상추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1800년 <승정원 일기>에는 사람들은 상추가 졸린다고 하는데 의서에는 잠이 잘 안 온다고 쓰여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결론은 ‘알 수 없다’였다. 상추를 먹으면 졸린지 그렇지 않은지 불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현대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상추는 졸음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생종이 아닌 재배종이기 때문이다.
야생의 상추는 졸음을 유발한다. 야생상추에는 진정 효과가 있는 락투신, 락투코피크린과 같은 성분이 들어있다. 2009년 4월 <BMJ 케이스 리포트>에는 이들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 야생상추를 먹었다가 응급실에 실려 간 이란인들의 사례가 실렸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상추는 야생상추와는 다른 종이다. 야생상추를 지금의 상추로 육종하는 과정에서 쓴맛 성분이 크게 줄어들었고, 따라서 졸음, 진정 효과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승정원 일기>에서 ‘알 수 없음’이란 결론을 내린 것을 보면 이미 조선 시대에 재배하던 상추도 야생상추와 성분상 차이가 컸던 듯하다. 상추 자체의 졸음 유발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보니 아마도 어떤 음식과 함께 먹느냐에 따라 진정 효과에 대해 상반되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음식 속 어떤 성분이 졸음을 유발하며 어떤 성분이 잠을 깨우는가는 아직 불분명하다. 2016년 스크립스(Scripps) 연구소 실험 결과 단백질, 염분이 초파리에서 식후 졸음을 유발했다. 사람에게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심증만 있을 뿐이다. 과식한 뒤에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목이 마르다. 짜게 먹고 잤기 때문이다. (소금과 단백질이 문제인지 아니면 과식이 자체가 문제인지 둘 다 문제인지 아직 알 수 없다. 후속 연구를 기다린다.) 밤에 잠이 안 온다고 일부러 음식을 짜게 먹진 마시길. 2019년 초파리 연구에서는 초파리에게 고염식을 주면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MSG가 졸음을 유발한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 않다. MSG를 먹어도 뇌 속으로 거의 들어가지 못한다. 글루탐산은 우리 뇌에서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다. 식사로 섭취한 글루탐산은 혈관-뇌 장벽을 통과해 들어갈 수 없다. 1960년대 중국음식증후군에 대한 논란이 시작된 이후 60년 동안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MSG 때문에 졸리거나 두통이 생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추와 MSG는 억울하게 범인으로 누명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상추나 MSG를 단독으로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른 음식과 함께 먹기 마련이다. 이들을 먹고 졸린 이유는 그저 음식을 먹고 난 뒤의 졸음, 즉 식곤증일 가능성이 높다.
잠이 안 온다고 술을 마시면 수면의 질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술을 한두 잔 마시면 빨리 잠드는 데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알코올은 정상적인 수면 패턴을 깨뜨린다. 처음에는 졸음을 유발해서 깊은 잠에 빠지는 듯하다가 나중에는 알코올이 대사되면서 뇌가 과잉으로 활성화한다.
이에 더해 알코올은 저혈당을 유발하여 악몽을 꾸게 할 수도 있다. 알코올은 이뇨제로도 작용한다. 술 마신 날 자다가 한밤중에 자다 깨는 이유가 이렇게 여러 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고 자는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위험하다. 숙면하지 못하니 더 과음하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침에도 개운치 않다. 그러니 커피를 더 찾게 되고 그 결과 밤에 잠을 청하기 더 어려워진다. 숙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면 오후에는 커피와 카페인 음료를 피하는 게 좋다.
자기 전 흡연도 수면의 질을 떨어뜨린다. 니코틴 부작용으로 생생한 꿈 또는 악몽을 꾸게 될 수 있다. 너무 배가 고파도 잠이 오지 않지만 과식도 숙면에는 방해가 된다. 반대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다음날 과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루 섭취 칼로리가 400-500kcal까지 늘어날 수 있는데 특히 지방 섭취가 늘어난다. 2016년 연구에서는 섬유질이 적고 지방, 당분 함량이 높은 식사를 할수록 수면의 질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숙면에 필요한 것은 특정 음식이나 영양성분이 아니라 균형 잡힌 전체 식습관이다.
2023-03-30 09:12 |
[약사·약국] <128> 제로칼로리 식품 정말 위험한가?
에리스리톨이 심장마비, 뇌졸중과 연관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난 2월 27일 권위있는 학술지 <네이처 메디신>에 실린 논문이다. 관련 뉴스를 보고 ‘그럼 그렇지’ 제로칼로리 음료를 더는 마시지 말아야 하겠다며 다짐하는 글도 인터넷 커뮤니티에 여럿 올라왔다. 하지만 그런 결심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살펴볼 점이 있다.
우선 <네이처 메디신>에 실린 논문의 제목 ‘인공감미료 에리스리톨’이란 표현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에리스리톨은 자연에 존재하는 당알코올이다. 과일, 채소, 발효식품에도 들어있다. 수박, 멜론, 포도, 간장, 와인에도 에리스리톨이 들어있다. <솔직한 식품>의 저자 이한승 박사는 그러니 인공감미료가 아니라 설탕대체재라고 써야 맞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안 먹어도 우리 몸에서 소량의 에리스리톨이 만들어진다. 심혈관 질환 또는 당뇨병으로 인해 인체에 과도한 산화적 스트레스가 가해지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에리스리톨이 더 많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번 연구 결과에서 나타난 상관관계가 실은 역 인과관계(reverse causality)일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번 연구 참가자들은 이미 위험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평균 연령 65세에 이미 고혈압인 사람이 72.2%, 당뇨병 환자가 22%였으며 심근경색 전력이 있는 사람도 46.3%나 됐다. 게다가 평균 체질량지수(BMI)가 29.2로 과체중, 비만인 참가자가 많았다. 따로 섭취하지 않아도 에리스리톨 혈중 수치가 높게 나올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단 얘기다. 에리스리톨 수치가 높은 게 심혈관 질환 위험을 높인 게 아니라 심혈관 질환이 에리스리톨 수치를 높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식물에서 추출하는 식으로는 대량 생산이 어려우므로 에리스리톨은 미생물을 이용해서 만든다. 포도당 시럽을 발효해서 만들기 때문에 수소첨가반응으로 제조 가능한 다른 당알코올보다 값도 비싼 편이다. 설탕의 70-80% 감미도인데 시판 가격은 설탕의 4-5배에 달한다. (소비자 가격 기준 설탕 1kg은 2천원, 에리스리톨 1kg은 1만원대에 형성되어 있다.) 에리스리톨은 다른 당알코올과 마찬가지로 녹을 때 열을 빼앗아서 서늘한 느낌이 든다.
국내에서 에리스리톨은 제로쿠키, 제로소주, 제로칼로리 음료에 사용된다. 칼로리는 거의 제로(0.4kcal/g)이면서 열에 대한 안정성이 높아 열에 불안정한 아스파탐 같은 대체감미료보다 과자 굽기에 유리하다. 설탕 대신 에리스리톨을 써도 결과물의 부피와 물성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도 커다란 장점이다. 에리스리톨은 솔비톨, 말티톨 같은 다른 당알코올과 달리 분자 덩치가 작고 흡수가 잘 되어서 복부팽만, 설사 부작용이 덜하다는 장점도 있다. 80%가 장에서 흡수되고 장내에 남은 20%도 미생물이 발효시킬 수 없어서 거의 대부분 그대로 체외로 배출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봐야할 것은 양의 문제이다. 이번 연구에서 에리스리톨이 혈전증을 증가시키거나 혈액 응고를 유발한다는 것을 동물실험을 통해 발견하긴 했다. 하지만 투여량이 지나치게 많았다. 연구에서 사람 8명 대상으로 하루 30그램을 주었을 때 동물실험에서 위험했던 수준 혈중 농도( 45 μM)가 2일 정도 지속되었다. 이 정도면 국내에 판매 중인 제로 쿠키로는 하루 750그램을 먹어야 섭취 가능한 양이다. 쿠키 하나를 14그램으로 잡으면 53.5개에 해당한다.
요즘 인기 있는 제로 소주에도 에리스리톨이 사용된다. 정확한 함량은 비공개여서 알 수 없으나 소주 한 병에 과당 1.5그램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에리스리톨로 대체하면 약 2그램 안팎으로 추정된다. 실험에서 사용한 만큼이 되려면 하루 소주 15병을 마셔야 한단 얘기다. 물론 이 정도면 대체감미료보다 알코올 때문에 사망할 위험이 크다. 음료 중에는 제로칼로리 사이다에 에리스리톨이 사용된 제품이 있다. 하지만 역시 함유량이 많지 않다. 제품에 따라 250ml 30캔(천연사이다 제로) 또는 500ml 30병(스프라이트 제로)을 마셔야 이번 실험에 사용한 양과 동일한 정도이다.
아쉽게도 이번 연구 결과를 다룬 국내 언론 대다수의 기사 내용과 제목은 불필요한 두려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번 연구 때문에 패닉에 빠질 이유는 없다. 그저 뉴욕 타임스 기사 제목 정도면 충분하다. “설탕 대체재와 심장 문제 상관성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 전문가들 '걱정마라.' Study Suggests Possible Link Between Sugar Substitute and Heart Issues. Experts Say, Don’t Panic.”
2023-03-15 09:50 |
[약사·약국] <127>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
차를 운전해서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도로를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평균 경사도 29.3%로(16.33°) 기네스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뉴질랜드 두네딘의 볼드윈 스트리트보다 더 경사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눈길이었다. 차가 가다가 설 때마다 불안했다. 하지만 의아했다. 왜 숨이 차지? 나는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고 있을 뿐이고 힘을 쓰는 건 내가 아니라 자동차 엔진일 텐데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꿈이었으니까. 그렇다. 나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나는 평소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꿈을 꾸는 건 2~3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그런데 며칠 전 이렇게 생생하게 꿈을 꾼 이유는 뭘까? 음주로 인한 저혈당이 왔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 뒤에 와인을 세 잔 마시고 잤고 이로 인해 혈당이 떨어지다가 결국 새벽4시쯤 가벼운 저혈당이 왔다. 이걸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프리스타일 리브레라는 연속 당 측정기를 사용 중이었기 때문이다. 내돈내산으로 제조기업과는 아무 관계 없이 쓴 글이라는 점을 우선 밝힌다.
내가 사용한 연속 당측정 시스템은 무채혈 방식이다. 자세히 보면 제품명이 연속 혈당 측정 시스템이 아니라 연속 당 측정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혈액이 아니라 피하지방 세포간질액의 당 수치를 측정하기 때문이다. 세포간질액이란 세포와 세포 사이이 체액을 이루는 액체를 말한다. 혈액으로부터 받은 산소와 영양분을 세포로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세포간질액의 당 수치를 보면 혈당치를 제대로 예측할 수 있다. 직접 혈당을 측정하는 건 아니고 세포간질액을 통해 간접적으로 혈당치를 확인하는 방식이지만 믿을 만하다는 이야기다.
센서 착용은 쉬운 편이다. 자세한 사용방법은 제품 설명서에 나와 있지만 여기서 몇 가지 주요점을 살펴보자. 센서는 14일 동안 작동한다. 센서를 부착하면 한 시간 동안의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센서는 1분마다 당 수치를 측정하고 15분마다 이를 저장한다. NFC 기능을 지원하는 스마트폰에 앱을 설치한 다음 센서 가까이에 대면 신호음이 들리거나 진동이 느껴진다. 이 때 스마트폰으로 그 시점의 측정치와 함께 전에 저장된 당 수치가 함께 전송된다. 센서는 최대 8시간까지만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어서 최소한 8시간에 한 번은 이런 식으로 스캔을 해줘야 한다. 특히 취침 전에 스마트폰으로 한 번 스캔을 하는 게 좋다.
당 측정을 위한 센서에는 바늘이 들어가지 않는다. 위팔 뒤쪽 피부에 500원 동전보다 조금 크고 동전 2.5개를 겹친 두께의 센서를 삽입기구의 도움을 받아 부착하도록 되어 있다. 삽입기구를 보면 길고 가는 바늘이 하나 보이는데 이 바늘은 당 측정을 위한 더 가느다란 필라멘트가 피부 아래까지 삽입되도록 돕는 가이드 역할이다. 삽입기구와 함께 다시 빠져 나오는 거라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불행히도 설명서에서 이런 디테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바늘이 센서와 함께 내 위팔에 남아있는 줄 알고 두려움에 떨면서 찾아본 결과 확인한 정보이다. 팔에 필라멘트만 삽입된 상태라는 걸 알고 나니 통증이 사라졌다.
이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당뇨 환자를 위한 것이며 제조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사용을 권하지 않는다. 나는 당뇨가 없다. 직업상 연속 당측정 시스템을 써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한 번 테스트해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매일 손가락 끝을 바늘로 찔러 핏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은 당뇨 환자에게도 괴로운 일이다. 채혈하지 않고 피부에 부착한 센서로 당을 측정하면 아프지 않다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다.
이에 더해 24시간 연속 당 수치를 그래프로 보여주니까 더 쉽고 분명하게 자신의 혈당치 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다. 내가 이번에 경험한 것처럼 말이다. 음주가 저혈당을 유발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다가 저혈당으로 악몽을 몸소 체험하는 것은 그런 지식과는 또 다른 일이었다. 스마트폰, 스마트워치,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이용한 디지털 헬스케어라는 말을 들어도 솔직히 별 감흥이 없었다. 경험하고 나니 다르다. 건강과 관련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행동을 바꾸는 데 제일 어려운 것 하나가 인과성을 납득시키는 일 아닌가. 이제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개인이 스스로 그런 인과성을 이해하고 건강을 관리하게 되는 그런 시대가 왔다. 그렇다면 약사로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봐야 할 때다.
2023-02-22 09:24 |
[약사·약국] <126> 건강기능식품 소비기한 이야기
기한이라고 다 같은 기한이 아니다. 원래부터 약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약에 표시된 기한은 사용기한이다. 사용기한이 지난 약은 판매도 할 수 없지만 사용해서도 안 된다. 유통기한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식품에도 유통기한이 아니라 소비기한이 표시된다. 그렇다면 건강기능식품은? 건강기능식품도 식품이다. 이제부터는 건강기능식품에도 소비기한이 표시된다.
소비기한이란 식품에 표시된 보관방법에 따라 보관할 경우 먹어도 안전에 이상이 없는 기한을 말한다. 유통기한은 80년대의 유산이다. 그때는 냉장 유통, 진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식품이 지금보다는 쉽게 상했다. 지금은 다르다. 냉장고에 개봉하지 않고 넣어둔 식품은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멀쩡할 때가 많다. 음모론에 끌리는 사람은 요즘 식품에 전보다 보존제를 많이 넣어서 그런 거라고 의심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식품의 제조, 유통, 보관 기술이 좋아졌을 뿐이다. 소비기한은 품질변화시점까지 기간을 100%라고 하면 그 80-90%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유통기한은 식품 품질변화시점까지의 60-70%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유통기한을 버리고 소비기한을 채택한 것은 혼란을 막기 위함이다. 유통기한은 영업자 중심의 표시제이다. 파는 사람은 더 이상 팔 수 없는 기한이다. 하지만 소비자 관점에서 유통기한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다수는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처럼 생각한다. 유통기한만 지나면 버리는 사람이 많단 얘기다. 소비자에게 유통기한의 의미를 일일이 설명하기보다 그냥 용어를 바꾸는 게 이번 변화의 핵심이다. 소비기한은 소비자 중심의 표시제이다. 명시된 기간까지만 소비하고 그 날짜가 지나면 버리라는 거다.
정리해보자. 약은 사용기한, 건강기능식품은 소비기한이다. 용어가 다르지만 소비자 관점에서 의미는 같다. 기한이 지나면 버리면 된다. 약은 환경을 생각하여 그냥 버리면 안 되고 약국이나 보건소에 가져다 줘야 한다. 언론 보도와 블로그에는 보건소나 약국, 주민센터에 비치된 별도의 전용수거함에 버리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약국에 그런 전용수거함을 갖춘 곳은 드물다. 건강기능식품은 식품이니까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도 될 것 같은데 막상 찾아보면 정확한 규정이 없다. 우리 대부분은 환경에 예민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둔감한 사람들이다. 포장지나 용기에서 알약만 꺼내서 봉투에 따로 담아 버리는 것조차 귀찮아한다. 사용기한이 지난 약이나 소비기한이 지난 건강기능식품을 버리고 나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폐기에는 과정이 필요하며 비용이 든다. 불필요한 폐기를 줄이기 위해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바꾼 건 잘한 일이다. 이제는 그래도 발생하는 약품과 건강기능식품 폐기를 어떻게 제대로 다룰 것인가 논의해야 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맘껏 소비만 하고 지르면서 살던 시절은 잊자. 자고 일어나면 언제 또 감기약, 해열제조차 구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조금 꺼림칙하면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버리기 전에 정말 버리는 게 맞나 고민이 필요하다.
이번에 변경된 소비기한은 건강기능식품에 해당한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약은 사용기한이다. 그런 약의 사용기한을 설정할 때는 장기보존시험과 가속시험 결과를 사용한다. 장기보존시험은 의약품의 저장조건에서 사용기간을 설정하기 위해 실제로 오래 보관시 안정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가속시험은 그런 저장조건을 벗어나 단기간에 조금 더 가혹한 조건에서 안정성이 어떤지 보는 거다. 가속시험 결과와 다르게 장기보존을 해보면 오랫동안 별다른 변화없이 약효를 유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코로나19로 의약품 품절대란에 시달린 세계 각국에서 정부가 나서서 일부 의약품의 사용기한을 연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온도,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보관한 약품은 사용기한 이후 15년이 지나도 사용에 문제가 없었다는 미국 FDA 연구 결과를 참고할 만하다. 약이나 건강기능식품은 주방이나 화장실처럼 습도가 높은 곳을 피해 직사광선이 닿지 않는 선반에 보관하는 게 좋다. 약의 사용기한이나 건강기능식품의 소비기한은 모두 개봉하기 전의 이야기다. 개별 포장된 제품을 제외하고는 개봉 뒤에는 기한이 줄어들 수 있다. 보관과 기한 문제에 더 진지한 관심을 갖자. 아껴야 잘 산다.
2023-02-08 10: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