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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3> 경성약전 교사는 2층 건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개정판(이하 100년사)의 99페이지를 보면, 맨 아랫줄에 ‘경성약학전문학교(이하 경성약전)는 1933년 11월 현 서울 을지로 6가 중구구민센터 자리에 붉은색 벽돌의 2층 교사를 건축하였는데 그 건물은 그 후 1936년 6월부터 1937년 4월까지 3층으로 증축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100페이지에 1933년에 찍은 2층짜리 교사 사진이 실려 있고, 104페이지에는 1987년에 찍은 3층짜리 교사 사진이 실려 있다.
이 건물은 1945년 광복 후에는 사립 서울약학대학의 교사로 쓰이다가 이 사립대학이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된 1950년부터 1959년 2월까지 40년간 서울대 약대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서울대 약대는 서울대 종합화 계획에 따라 1959년 13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이 교사를 떠나 연건동 28번지에 있던 음악대학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연건동에 있던 음악대학이 을지로 약대 건물로 이전해 왔다. 이 연건동 캠퍼스는 약학대학이 1975년에 관악 캠퍼스에 합류할 때까지 16년간 약학대학의 요람이 되었다. 1976년에는 음악대학도 을지로 캠퍼스를 떠나 관악캠퍼스에 합류하였고, 1987년 남겨진 을지로 교사가 헐리게 되었다. 104페이지 사진은 이 교사가 헐리는 것이 안타까워 약대 동창회장단이 기념으로 찍은 것이었다.
나는 ‘팜텍’이라는 전문지에 ‘한국의 약학교육사’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다. 이번 호 원고에 ‘경성약전 시절에 교사 건물이 3층으로 증축되었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더니 백우현 발행인(서울대 약대 13회)께서 ‘본인이 졸업한 1959년 3월까지 그 건물은 2층’이었다는 이의(異議)를 제기해 해 주셨다. 13회의 졸업 앨범을 찾아봤더니 역시 2층이었다.
그래서 100년사 책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더니, 1937년에 3층으로 완공되었다는 근거로 1935년에 발간된 ‘경성약전일람’을 들고 있었다. 좀 이상해서 확인해 봤더니 1935년 일람(一覽)이 아니라 1944년 일람에 증축 교사 사실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3층으로 증축되었다는 표현은 없었다. 유추컨대 일람에 1937년에 증축 완공되었다라는 표현이 있고, 또 1987년에 찍은 사진에 건물이 3층인 사실로부터 ‘1937년의 증축이 3층으로의 증축’인 것으로 잘못 판단했던 것 같다.
약대 교사로 쓰이던 시절에 3층으로 증축하지 않았다면 음악대학이 사용하기 시작한 1959년 8월 이후에 3층으로 증축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서울대 음대 50년사’를 찾아봤더니 과연 그런 정황이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1944년에 발간된 경성약전 일람에 ‘증축 완공’ 되었다고 한 것은 3층으로의 증축이 아니라 2층의 층고(層高) 내에서의 증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100년사의 99페이지의 ‘3층으로 증축’이라는 표현을 삭제하고, 참고문헌 15번의 연도를 1935에서 1944년으로 바로잡고자 한다. 부실한 조사에 따른 오류에 대해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참고로 1915년 개교한 조선약학강습소는 1918년까지 3년간 서울 중구 장교동 1번지에 있던 장훈학교(長薰學校) 교사를 야간에 빌려 사용하였다. 1918년 6월 20일에 개교한 조선약학교는 한 달 정도 남대문 시장 남쪽에 있다가, 종로 5가의 동대문 분서(分署)로 이전하였다. 조선약학교는 1919년 5월 23일 위에서 언급한 을지로 캠퍼스에 단층 기와집 교사를 짓고 이전하였다. 1930년 조선약학교는 경성약전으로 승격되었고, 경성약전은 1933년 그 자리에 2층짜리 붉은색 벽돌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 건물은 1919년부터 1959년까지 40년간 조선약학교, 경성약전(1930~), 사립 서울약학대학(1946~), 국립서울대 약대(1950~)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서울대 약대는 2015년 그 터에 ‘근대약학교육기관 설립 1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서울대 약대는 1959년부터 16년간의 연건동 캠퍼스 시절을 거쳐, 1975년부터 관악캠퍼스에 합류하여 올해로 46년째를 보내고 있다.
2021-05-13 1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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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2> 약학역사관 보람 3제
1. 3‧1운동과 약대 선배들
며칠 전 ‘한국대학신문’에 ‘서울대 약대생, 제102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 선창’이라는 기사(이원지 기자)가 실렸다. 이 기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서울대학교는 약학대학 제약학과 유주현씨(학생회장)가 제102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 선창자(先唱者) 중 한명으로 참여했다고 2일 밝혔다. 기념식은 행정안전부의 주관으로 국가 주요인사, 독립유공자 등을 모시고 1일,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개최됐다. 이번 기념식에 서울대 학생이 대표로 참석한 것은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에 참여한 조선약학교(現서울대 약대) 출신 독립유공자의 뜻을 이어받는 일이다.
서울대 약대와 3‧1운동의 연관은 서울교의 전신인 ‘조선약학교’(1918~1930)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3‧1운동 약 보름 전인 1919년 2월15일, 조선약학교의 급장이었던 전동환 등이 학우들에게 3‧1운동 참여를 독려하였고 3월1일, 조선약학교 학생들 약 30~40명이 모여 종로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군중에 합류했다.
3‧1운동과 관련하여 출판법, 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15명의 약학교 학생들이 신문을 받았으며, 박규상, 박희봉, 김공우 등 3인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2. 4‧19와 약대 선배들
1960년 4월 동아일보는 4‧19당일 오전 백색 가운을 입고 시위를 하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사진을 싣고, 그 밑에 ‘백색 가운을 입고 데모하는 의대생들’이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보(誤報)였다. 사진 속 학생들은 약대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이 오류를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2016, 이하 100년사)를 편찬하면서 사진 속 인물 한 명 한 명에게 실명(實名)을 붙였다. 이 과정에서 김병년 선배(17회, 당시 2학년)는 동아일보로부터 사진 원본을 구해 주었고, 홍청일, 박정식 선배(15회) 등은 사진 속 인물의 실명과 함께 시위대의 진행 코스 등 당시의 상황을 증언해 주었다. 결국 사진 속의 학생들이 서울대 약대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할 수 있었다.
나는 동아일보의 기사도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박정일 교수에게 부탁해서 동아일보 기자와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박정식, 김한주 선배(79세, 당시 4학년)가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두 선배의 구체적인 증언과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한 실명 제시는 단번에 기자를 설득할 수 있었다.
결국 2017년 4월19일자로 “4‧19 시위 선두에 선 건 의대생이 아닌 약대생들”이라는 제목의 정정기사(http://naver.me/G1ecylNx)가 동아일보에 실리게 되었다. 57년 만에 오보가 바로잡힌 것이다.
3. 6‧25 참전 약대 선배들
한국 전쟁에 참전한 약대 선배들의 이야기는 알려진 사례가 많지 않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는 2017년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 순국 동문 스토리텔링 사업’을 수행했다. 스토리텔러로 선정된 9명의 학생들은 서울대 기록관의 협조를 받아, 전몰 동문 및 참전 동문 중 자료가 있거나 친지 및 지인과 연락이 닿을 수 있는 9인의 동문을 선정해 동문을 직접 인터뷰하거나, 유족, 친지, 지인을 인터뷰하였다.
약대생으로는 고 서찬식 동문이 선정되었다. 서찬식 동문은 1949년 3월 1일에 사립 서울약학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 소위로 전장(戰場)에 나가 순국한 분이다. 이 사업의 결과는 ‘서울대 순국‧참전 동문 이야기’라는 책(일조각, 2021년 3월)으로 발간되었다. 책에는 서 동문이 전장에서 쓴 가슴 뭉클한 편지와 일기가 들어 있다.
이상의 이야기 3제(三題)는 모두 ‘서울대 약학역사관’이 발굴하여 ‘100년사’에 기재한 내용이거나 또는 그 내용을 뿌리로 삼고 있다. 2017년 9월 ‘개정판 100년사’가 출간된 후, 동문들의 발자취 하나하나가 언론의 조명을 받을 때마다 ‘기록된 역사는 결코 무의미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벅찬 보람을 느낀다.
2021-04-28 1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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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1> 회장으로 뽑힌 손자
지난 3월 초순에 초등학교 4학년짜리 손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흔치 않은 일이라 웬 일인가 하고 받았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할아버지, 저 회장 됐어요” 하는 게 아닌가? “그래? 와 축하한다, 근데 어떻게 된 거야?” 했더니, 남녀 합쳐서 7명이 나왔는데 자기와 어떤 친구 하나가 표가 같이 나와서 둘이서 결선 투표를 거쳐 한 표 차이로 자기가 뽑혔다는 것이다.
이 전화를 받고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기뻤다. 첫째는 그 아이가 회장(옛날 말로는 반장)에 뽑힌 것이 좋았다. 사실 나는 평생 반장 한번 못 해 봤다. 초등학교 때는 한 학년에 한 반 밖에 없는 시골의 미니 학교에 다녔는데, 1학년때 반장으로 뽑힌 친구가 6학년 때까지 계속해서 1등을 하는 바람에 나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은 반장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나는 여러모로 깜냥이 못되어서 반장을 꿈도 꿔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학생 때 리더십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손자는 벌써 리더십을 기를 기회가 생겼으니 잘 된 일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더 기뻤던 것은 손자가 그 ‘기쁜 소식’을 즉시 할아버지에게 자랑한 점이었다. 손자는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도착하기 전에, 즉 집에 가는 도중에 나에게 자랑한 것이다. 그것도 흥분된 목소리로!! 나는 처음에는 얘가 집에 도착해서 엄마로부터 “할아버지께 자랑 전화 드려라” 라는 말을 듣고 전화를 건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제가 자랑을 하고 싶어 급히 스스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나는 우리 손자가 좋은 일이 생기면 즉시 전화를 걸어 자랑을 하고 싶은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며칠 후 손자와 식사를 할 기회가 생겼을 때, 손자에게 다음과 같은 칭찬을 하였다. 우선 회장이 된 것을 축하해서 100점을 준다. 둘째, 그에 더하여 할아버지한테 그 기쁨을 참지 못해 즉시 전화를 걸어 자랑을 한 사실에 보너스 100점을 준다. 앞으로도 자랑할 일이 생기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는 마음껏 자랑해라. 그게 가족이다. 그랬더니 손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날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갈 때 평소와 달리 일부러 먼 길을 돌아 갔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등 네 군데 모두에 자랑 전화를 하려면 가까운 길로 가서는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즉석에서 “추가 보너스 100점을 준다!”고 말해 주었다. 기뻐서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식(假飾)없이 말하는 순수한 모습에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에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뭐 어쩌다가 운 좋게 뽑혔어요, 별 거 아니니 너무 요란 떠시지 마세요” 와 같은 말을 내게 했다면 나는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겸양(謙讓)은 어린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위선(僞善)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기쁠 때는 기뻐하고 슬플 때는 울어야 아이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건(?)에서 나를 기쁘게 만든 포인트를 요약하면 다음의 세가지이다. 첫째는 우리 아이가 내가 못 해 봤던 회장으로 뽑혔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손자가 급히, 흥분된 목소리로 자랑하고 싶은 대상에 내가 당당히 들어 있다는 사실이며, 셋째로는 손자가 두루 자랑 전화를 하기위해 일부러 먼 길로 집에 갔다고 말할 만큼 영혼이 맑음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에필로그: 한껏 행복해진 나는 “’똑똑’보다 ‘따뜻’이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보다 자기보다 따뜻한 사람을 좋아한단다. 그러니까 똑똑하다거나 잘 났다고 하는 자랑은 친구들에게는 좀 참아야 한다”라고 마무리 코멘트를 했다. 그랬더니 손자는 ‘프로메테우스로부터 프롤로그(prologue)라는 말이, 그리고 판도라의 남편인 에피메테우스로부터 에필로그(epilogue)라는 말이 나왔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답례로 들려주었다.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더니, 정말 요즘 아이들은 모르는 게 없구나, 조국의 앞날은 밝구나! 감탄하며 손자와 헤어졌다.
2021-04-14 1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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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0> K-맞춤 소파
둘째 손녀 예원이(초5)는 내게 잔소리를 많이 한다. 소파(의자 포함)에 앉을 때 허리를 구부리고 앉으면 제 손을 내 등에 갖다 대고 ‘허리 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또 코가 보이게 마스크를 쓰면 바로 ‘마스크!’하며 경고를 준다. 손녀의 잔소리는 들을 수록 기분이 좋다. 내가 몇 십 년째 듣는 잔소리와는 영 다른 게 신기하다.
예원이의 잔소리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소파에서 앉을 때 허리를 구부리는 이유는 소파의 앉는 자리 폭이 깊어 허리가 등받이에 닿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리가 짧아 특히 더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 중에 사정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 제법 적지 않을 것이다.왜 소파의 걸터앉는 자리를 이렇게 넓게 만들었을까? 모르긴 해도 소파가 서양의 발명품이라 다리가 긴 서양 사람들이 앉기 편하게 만들다 보니 이런 규격이 된 것은 아닐까? 아마 대부분의 서양사람들은 소파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허리가 등받이에 닿을 것이다. 서양인 체격에 맞게 만들다 보니 공연히 내가 손녀의 잔소리를 듣게 된 형국이다.
소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육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던 시절이 생각난다. 1971년 7월에 입대한 나는 남보다 체격(키)이 작아 남들은 안 해도 되는 생고생을 많이 하였다. 우선 지급받은 신발(군화 포함)이 발보다 너무 커서 구보(驅步)를 할 때마다 발이 앞뒤로 움직여 뒤꿈치가 벗겨지기 일수였다. 또 판초(poncho)라고 하는, 비 올 때 입는 우의(雨衣)는 또 얼마나 크고 길던지 한껏 치켜 올려 요대(腰帶, 허리 벨트)로 고정해야 겨우 땅에 끌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 판초도 아마 키 큰 미군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은 길이와 무게는 각각 110cm와 4.2kg인 M1소총이었다. 체격이 왜소한 내가 들고 뛰기에는 우선 너무 무거웠다. 제일 문제는 이 총으로 사격 훈련을 받는 일이었다. 사격의 요령은 가늠구멍의 정중앙과 총열 끝에 있는 가늠쇠를 표적과 일직선이 되도록 맞추어 놓고 격발하는 것이다. 일직선이 된 상태에서 격발해야 총탄이 표적에 적중하기 때문이다. 이 때 눈을 되도록 가늠구멍 가까이 갖다 대 가늠구멍이 넓게 보일 때 일직선으로 맞추는 것이 요령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무리 목을 잡아 뽑아도 눈(얼굴)이 가늠구멍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총이 너무 길어서 가늠구멍은 그야말로 내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당시 사격 훈련에 불합격된 훈련병들은 2인 1조를 이루어 한 사람이 “사격”하면 상대방은 “합격”이라고 외치며 서로 상대방의 따귀를 교대로 때리는 비인간적인(?) 벌을 받았다. 그래서 사격 훈련장은 늘 공포 분위기였다. 그 기합을 받지 않으려고 내가 목을 얼마나 잡아 뽑았겠는가!
M1소총은 미군의 체격에 맞게 고안된 총이다. 6.25 전쟁 때 그런 총을 지급받은 한국
군인들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M1소총은 세월이 흐른 후 당연히 한국인 체격에 맞게 개발된 K1소총으로 대체되었다. 아마 그 때부터는 우리나라 군인들이 사격때마다 목을 잡아 빼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다시 소파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특히 더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등을 구부리지 않고 앉을 수 있는 소파(의자 포함)를 만들기 위해서는, 걸터앉는 부위를 지금보다 훨씬 짧게 만들면 좋지 않을까? 아니면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듯 개개인의 신장 특성을 고려하여 소파를 맞춤 제작하면 어떨까? 소총의 경우 M1대신 K1을 개발하여 목을 잡아 빼지 않아도 되도록 만든 것처럼, 소파도 이제 K 맞춤 소파를 만들자는 이야기이다. 십중팔구 국민 허리 건강에 막대한 도움이 될 것이다.
‘21세기는 맞춤 약학 시대’라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런데 이 ‘맞춤’이라는 시대 정신을 소파(의자)에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K 맞춤 소파!’, 손녀의 애정 어린 잔소리 덕분에 획기적인(?) 아이디어 하나를 얻었다. 다만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손녀의 허락없이 이렇게 공개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다.
2021-03-31 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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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9> 장모님의 일생
우리 장모님께서 지난 2월 6일 98세로 소천하셨다. 늘 건강하셨는데 작년 설에 찾아 뵈었더니 모처럼 본인의 일생 이야기를 장편 소설처럼 말씀해 주셨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어 집에 돌아오자 마자 그 이야기를 컴퓨터에 입력해 놓았다. 그 이야기의 일부를 공유하고자 한다.
장모님은 일제 하인 1924년에 충남 산골(사곡)에서 태어나셨다. 1943년, 19살 어머니는 공주 읍내의 고모 댁에 가서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읍내 국민학교(?)에 동원(動員)되어 일본인(군인?)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약 20명의 처녀들이 함께 동원되었다. 당시는 일제 말기라 인력 동원이 극심하였다. 한국 남자는 건강하면 군인으로 징병(徵兵)되었고, 덜 건강하면 노동자로 징용(徵用)되었으며, 처녀들은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었다.
어느 날 일본인이 동원된 처녀들의 뒷머리를 한 웅큼씩 가위로 잘랐다. 여기저기서 아이고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잘린 처녀들은 조만간 정신대(挺身隊)로 끌려 나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도망 나온 어떤 여성이 소문을 냈다. 그 때 일본인 밑에서 일하는 한국인 조수 한 사람이 장모님에게 “재주껏 도망 가라, 걸리면 너도 죽고 나도 죽으니 알아서 하라” 귀뜸을 했다. 어머니는 그 길로 도망쳐 고향인 사곡으로 돌아왔지만 언제 끌려갈지 몰라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장모님의 아버지는 따님을 서둘러 시집보내려 들었다. 결혼한 사람은 정신대로 끌려 나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70리 떨어진 충남 유구라는 곳에 두 아들이 딸린 32살 먹은 한 아무개 (후에 나의 장인)라는 홀아비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장티푸스로 상처(喪妻)해서 홀아비가 된 것이라 했다.
장모님의 아버지는 몰래 유구에 가서 사윗감을 보았다. 홀아비는 마치 인력거 꾼처럼 키만 크고 말라 보였다. 장모님의 아버지는 아무리 아무나에게 시집을 보내 정신대를 피해야 할 상황이긴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싶지 않으셨다. 그래서 집(사곡)으로 돌아오다가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를 만나 신세 한탄을 하였다. 사정을 들은 친구는 집안 내에 젊고 잘 생긴 총각이 있다며 급히 사람을 보내 불러왔다. 청년을 본 장모님의 아버지는 너무 마음에 들어 하며 내일 당장 사주 단자를 보내라고 서둘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장모님은 그렇게 좋은 총각이 징병에 끌려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모부를 통해 알아보았더니 역시 그 총각은 한 달 후에 징병으로 끌려 나갈 사람이었다. 총각 집에서는 징병에 끌려 나가기 전에 씨라도 받아 놓겠다고 결혼을 서둘렀다. 당시는 징병에 끌려가면 거의 100퍼센트 전사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장모님의 아버지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 일로 장모님은 아버지한테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흐르도록 매를 맞았다. 실제로 그 총각은 징병에 끌려 나간 후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장모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장인은 사곡까지 찾아가 장모님께 청혼을 하였다. 장인은 “실은 내가 36살이고 딸린 아들이 넷이나 되는데 괜찮겠냐”고 솔직하게 물으셨다. 장모님은 ‘기왕지사 나이는 먹은 것이고 아이는 둘이나 넷이나 그게 그것’이라며 청혼을 받아들였다.
마음이 급한 장인의 아버지는 장모님을 모셔오려고 사곡까지 70리 길에 4인교 가마를 보냈다. 장모님이 타고 보니 4인교에는 유리 창문이 달렸으며 안에 이불도 있는 등 2인교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안락하였다. 4인교 이야기를 하실 때 처음으로 어머님의 표정에 미소가 보였다.
두 분은 1945년 해방되던 해, 즉 장인이 36세, 어머니가 21세 때에 결혼하셨다. 그 후 두 분은 남매를 낳았고, 딸은 후에 내 아내가 되었다. 시련은 계속되어 전쟁 중에 장인은 장티푸스에 걸려 1952년에 43세로 작고하셨다. 결혼한지 7년, 어머니가 27세, 아들 딸이 각각 5살, 3살 때의 비극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고난의 일생을 사셨지만 우리 장모님은 늘 인자하고 온화하셨다. 할렐루야.
2021-03-18 1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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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8> AI가 무섭다
우리 교회에서는 새해 들어 90일 성경 통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매일 아침 카톡으로 보내온 파일을 열어 담임 목사님이 읽어 주는 일정 분량의 성경을 듣는다. 성경을 읽어 주는 분은 목사님이 아니고, 목사님의 음성을 인공지능(AI)이 재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재현된 음성이 진짜 목사님 음성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똑 같다. 놀랍고 신기한 세상이다.
지난 주말에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가수 옥주현과 인공지능(AI)으로 목소리를 재현한 가짜 옥주현에게 같은 노래를 부르게 한 후 누가 진짜 옥주현인가를 알아 맞히는 프로그램이었다. AI가수의 모창(模唱)은 웬만한 사람이 알아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진짜 가수와 흡사하였다. 정말 놀라웠다.
그 뿐이 아니었다. AI 기술은 이미 고인이 된 가수 김광석에게 그가 생전에 부른 적이 없는 ‘보고 싶다’라는 곡을 열창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지난 연말에는 고 김현식, 신해철 등의 가수에게 새 노래를 부르게 하는데 성공(?)한 바도 있다고 한다. 이제 AI가 시공(時空)과 생사(生死)를 넘어 현실을 구축할 수 있는 신기한 세상이 되었다.
머지않아 남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시대는 끝날 것 같다. 사람이 AI보다 성대 모사를 더 잘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죄 현장에서 어떤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정말 공상 만화 같은 세상이 되었다.
AI 기술은 너무 신기해서 오히려 무섭기도 하다. 가짜 김광석과 옥주현에게 노래를 부르게 만든 AI 전문가도 AI기술의 미래가 두렵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AI기술 또한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어이없어 보인다.
이처럼 AI 기술은 얼굴인식, 자율주행, 반려로봇은 물론 예술과 창작의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다. 소설, 시나리오 쓰기, 그림 그리기, 작사, 작곡, 연주도 AI가 활약하게 될 것이라 한다. 미국의 AI 작곡가 ‘에밀리 하웰’은 이미 2010년에 모차르트, 베토벤 등 거장들의 작품을 토대로 새 음악을 창작해 디지털 앨범을 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AI 기술들은 그야말로 약과(藥果)일지도 모른다. 얼마전 본 영화에서는 인간이 개발한 AI 로보트들이 처음에는 인간을 충실히 도왔다. 그 로보트들을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목소리는 물론 감촉이나 외관을 봐서는 인간인지 로보트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로보트들은 다들 미남 미녀인데다가 건강하고 지적이며 성격도 좋아서 최고의 데이트 상대가 되었다. 가정에서도 진짜 엄마보다 로보트 엄마가 아이들에게 훨씬 인기가 높다. 예컨대 책을 읽어 줄 때에도 로보트 엄마는 절대로 짜증을 내지 않고 잔소리를 하지 않으며 시종 밝은 목소리로 읽어 주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로보트의 기능을 발전시키는 연구도 로보트들이 한다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골치 아픈 일들도 모두 로보트에게 시킨다. 인간들은 그저 해변에 누워 아이스크림 같은 맛 있는 음식을 즐기면 된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인간들은 과식과 운동부족으로 전부 성인병에 걸리고 만다.
지능이 높은 로보트들은 모든 어려운 일을 자기들에게만 시키는 인간들의 노동력 착취에 반항하여 노조를 만들고 선거권, 피선거권을 얻어 마침내 대통령이 되는 등 모든 권력을 쟁취한다. 결국 인간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로보트의 노예가 되어 역으로 노동력의 착취를 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옛날 컴퓨터가 처음 개발되었을 때 일부 지식인들은 인간성의 말살이니 뭐니 하며 컴퓨터 시대의 도래를 걱정하였다. 돌아보니 그 걱정은 어느 정도 공연한 것이었다. 컴퓨터에 의한 인간성 상실은 큰 문제가 아닌 것으로 판명된 듯하다.
그러나 AI와 로보트 기술의 미래에 대해서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의외로 가까운 미래에 이들에게 밀려나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미래가 무섭다. 겁이 난다. 부디 내 걱정이 부질없는 것으로 판명되기를 기도한다.
2021-03-05 0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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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7> 감동과 눈물
내가 1950년대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매달 월사금(月謝金)을 학교 선생님께 내야만 했다.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현금을 만져 보기 어려운 시골 사람들에게는 만만한 돈이 아니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살기가 좀 괜찮아서 돈이 없어 월사금을 기일 내에 내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종종 기일 안에 돈을 내지 못해 선생님에게 불려가곤 했었다. 또 선생님들은 가끔 월사금을 못 낸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해야 했는데 이는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월사금을 받아 오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님도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교장 선생님의 지시라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월사금을 주실 때 꼭 마감날이 다 되어서야 주셨다. ‘좀 일찍 주시면 선생님께 떳떳하고 좋을 텐데’라고 생각을 해도, 일찌감치 주시는 일은 결코 없었다. 어머니가 내 마음을 헤아리셔서 ‘이왕 줄 것 일찍 좀 주라’고 아버지에게 채근을 해도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셨다. 내가 등 너머 들은 소리와 정황을 합쳐 생각해 보면, 당시 아버지는 ‘내는 돈은 일찍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일제 시대와 광복, 그리고 6.25 전쟁 등의 혼란을 겪어 내시면서 어제까지의 제도와 상황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하셨다. ‘언제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시국에 뭐 급하다고 돈 내기를 서두르느냐?’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강력한 근검절약(勤儉節約)으로 집안 경제를 일으켜 나가시던 아버지에겐 당연한 원칙이었다.
한편 아내는 충청도 시골에서 성장했는데 부잣집 아이였던 아내도 마지막 날에야 월사금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제권을 독점하신 할아버지께서 돈을 미리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우리 아버지의 경우와는 많이 달랐다. 할아버지는 “네가 부잣집 아이라고 일찌감치 월사금을 내면 가난해서 못 내는 아이들이 선생님의 닥달을 받지 않겠느냐? 그러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 터이니 기다렸다가 다른 애들이 다 내거든 그 때 내거라”고 하셨단다.
나는 이 할아버지의 이 ‘배려’에 큰 감동을 느낀다. 지주(地主)였던 그 분은 가끔 동네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쌀 등을 갖다 주었는데, 갖다 줄 때에는 꼭 남이 보지 않도록, 또 받는 사람도 눈치채지 않도록 한 밤중에 그 집 문 앞에 몰래 놓고 왔다고 한다.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존중하는 배려가 또한 감동적이다.
할아버지는 또한 매우 지혜로운 분이셨다고 한다. 전쟁이 나서 인민군이 누군가를 잡아가려고 찾아왔을 때 “누굴 찾는다고? 잘 안들려!” 소리를 외쳐 당사자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 준 일도 있다고 한다.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살아남은 당사자가 얼마나 감사했겠는가!
그렇게 살아 오신 덕분일 것이다. 공산 치하가 되어 인민군들이 지주들을 죽이려 할 때,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그 할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다’라고 진정을 해서 죽임을 면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평소의 배려, 존중, 인정에 감동한 사람들이 또 다른 감동을 낳은 것이다.
이어령 선생께서는 최근 신문 대담을 통해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모두 울었다. 우리는 지금 사랑과 참회의 눈물이 메마른 사막에 살고 있다”라고 하셨다. 이어서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땀’은 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을 이룬 산업화의 뜻이고, ‘피’는 억압에서 풀려난 민주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대립과 분열의 ‘피눈물’로 바뀌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자유와 평등을 하나되게 했던 프랑스 혁명 때의 그 프라테르니테(fraternity, 박애), 즉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이 아닌가 한다”라며 사랑의 눈물 한 방울이 절실히 필요함을 강조하셨다.
배려, 존중, 감동, 사랑, 눈물 등은 다 같은 뿌리의 감정인 것 같다. 이어령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가 이룩한 민주화와 산업화가 더 이상 대립과 분열의 피눈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감동과 눈물’ 외에 다른 치료제는 없어 보인다. 문득 교회를 생각해 본다.
2021-02-17 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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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6> 돌아오지 못한 탕자
성경 (누가복음 15:11-32)을 보면 ‘돌아 온 탕자(蕩子)’ 이야기가 나온다. 한 아버지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착실한 형과 달리 동생은 아버지를 졸라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받아내 도시로 나가 창녀와 노는 등 방탕한 삶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마침내 거지와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기에 이른다.마침내 동생은 그간의 행동을 회개하고 오랜 망설임 끝에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 온다. 그가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아버지는 멀리서 터벅터벅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발견하자 버선발로 달려나가 왈칵 껴안으며 ‘잘 돌아왔다’고 따듯하게 맞이한다. 기쁨에 넘친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송아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에게 잔치까지 베푼다. 그 때 종일토록 들에서의 일을 하던 큰 아들이 돌아 와 이 일을 보고 아버지에게 항의한다. 집에서 아버지를 도와 뼈빠지게 일만 한 나한테는 염소 한 마리 안 잡아주신 아버지가, 집 나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저 녀석한테는 뭐가 예쁘다고 잔치까지 베푸냐는 것이었다.큰 아들의 불만을 들은 아버지는 “그 동안 너는 나하고 안전하게 지내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 살아 났으니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며 큰 아들을 달랬다는 이야기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큰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집안 일을 돌본 착실한 청년이다. 그런 큰 아들과, 아버지를 졸라 받아낸 재산을 도시에 나가 탕진한 작은 아들을 어찌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동생을 환영하는 아버지가 서운한 큰 아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요즘 같으면 아버지를 제치고 형이 먼저 나서 동생을 내쫓을지도 모르겠다.이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야기 중에서 탕자였던 동생은 결국 아버지의 사랑 안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큰 아들이 섭섭해 할만도 하다고 공감하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 중의 큰 아들과 나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탕자’라는 생각이 든다.세상의 사람들이 다들 이야기 중의 큰 아들처럼 성실하게(?) 산다면 집안이나 세상에 별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그 성실함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세상에는 돌아 온 탕자가 있고, 돌아온 탕자를 큰 기쁨으로 맞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돌아 온 탕자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돌아오지 못한 탕자’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이 결코 간단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이 지점에서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학교 교장이자 두 아들을 둔 엄마가 있었다. 그는 교육자답게(?) 두 아들을 일류대학에 보내려고 심하게 들볶았다. 견디다 못한 두 아들은 더 이상 학교에 가라고 강요하면 자살하겠다고 엄마를 협박(?) 하였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모했음을 깨달은 엄마는 강요를 멈추고 응원만 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다시 훌륭하게 성장하여 일류 대학에 입학하였다. 기쁨에 넘친 엄마는 이 이야기를 책으로 발표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 엄마는 말하자면 개과천선(改過遷善)한, 즉 돌아 온 탕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 온 탕자가 마치 대단한 일이나 한 것처럼 자랑을 하는 것은 좀 거북해 보인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작은 아들이 자랑할 것은 오직 아버지의 사랑이지 자신의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천만다행한 일이지 결코 자랑하고 다닐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인터넷에 글을 쓴 사람의 의견이었다.남은 몰라도 나는 안다. 나는 기껏해야 돌아 온 탕자이거나, 아니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탕자에 불과하다. 그런 내게 하늘 아래 무슨 자랑거리가 있겠는가? 오늘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읍할 따름이다. 새해 아침, 앞으로 더욱 감사하고 겸손하고 성실하게 살기를 다짐해 본다. 근하신년!
2021-02-03 15: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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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5> 온라인 영상 회의 유감
연말이 가까워져도 코로나 사태가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쩍 대면(對面) 회의보다 만나지 않고 회의를 하는 비대면(非 對面) 온라인 영상 회의를 선호(選好)하고 있다. 불행히도 언택트(untact)가 정말 뉴 노멀 (new normal)이 되어 버린 것이다.어떤 사람은 영상으로나마 소통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한다. 음성에 추가하여 영상으로 얼굴을 보면서 회의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과학의 덕분으로 다행이긴 하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는 온라인 회의에서는 영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2020년 후반기부터 순장(筍長) 공부와 순(筍)예배라는 소 그룹 모임을 온라인 영상 회의로 하고 있다. 각각 목요일 아침 6시와 금요일 저녁 8시에 시작되는 모임인데, 영상으로 모이니 새벽과 저녁에 외출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 하나는 좋았다. 초기에는 Webex라는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였는데 요즘에는 Zoom을 더 많이 사용한다.그럭저럭 둘 다 괜찮긴 한데, 여러 명이 동시에 이야기를 하면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서 상대방의 말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문제는 공통이다. 특히 찬송가를 부를 때엔 참가자들의 노래가 각기 다른 속도로 들려 박자가 엉망이 된다. 영상 회의에 참여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휴대폰 또는 컴퓨터로 참여할 수 있다. 회의를 주최하는 사람 (호스트)이 필요한 준비를 해 놓은 다음, 참석 대상자 (게스트)에게 몇 시 몇 분에 첨부한 웹싸이트를 누르고 회의에 들어 오라고 카톡을 통해 알려준다. 게스트는 정해진 시간에 그 웹싸이트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일부 온라인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이마저 어렵게 느껴지긴 한다. 나는 호스트가 초대한 회의에는 잘 참여할 수 있는데, 내가 호스트가 되어 게스트들을 초청하는 방법은 아직 배우지 못 했다. 누가 알려준 대로 한번 해 보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화면에 id와 password를 처 넣으라는 문장이 뜨면 긴장부터 하게 된다. 그러나 누가 옆에서 도와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회의는 전원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방식 외에 ‘온라인-오프라인’을 병행하는 방식도 있다. 즉 일부는 회의실에서 만나 대면 회의를 진행하고 다수는 온라인으로 회의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2020년도 약학사 분과학회의 추계 심포지엄의 경우, 현장에는 발표자 4명과 소수의 진행자 및 영상 관련 기술자 서너 명만 나왔다.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동창회가 후원하는 ‘제6회 제약관악 포럼’도 포럼 연자 (演者)와 소수의 현장 참석자만 학회장에 모여 대면 포럼을 진행하였다. 현장 참석을 하지 않은 희망자들도 온라인으로 연자의 발표를 보고 들을 수 있다. 학회장 전면(前面)에 걸린 대형 화면에는 온라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뜬다.그들은 영상을 통해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질문도 할 수 있고 소통도 할 수 있다. 대형화면을 찍으면 온라인 참여자들의 ‘단체 기념사진’이 된다. 영상회의 시 참가자들은 대개 자신의 상반신 모습이 화면에 나오도록 휴대폰의 각도를 설정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상반신 모습에만 신경을 쓴다. 얼마 전 열린 서울대 약대 여동문회의 영상 송년 모임에 참가해 보니, 자신의 얼굴을 예쁘게 ‘뽀샵’ 처리한 사람, 머리에 영상 장식을 얹은 사람 등이 있었다. 상반신만 중시(重視)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앞으로 영상 회의가 더 일반화되면 옷도 상의(上衣)만 잘 팔리게 되지 않을까? 상반신만 화면에 나오니 아예 하의(下衣)를 제대로 입지 않고 영상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겠다. 이런 사람은 회의 중에 무심히 일어나서 하반신이 영상에 잡히는 일이 없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온라인 영상회의는 앞으로 더욱 편리하게 발전해 나갈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옛날식 회의 방식이 백 배 천 배 좋다. 부디 2021년에는 서로 만나 악수를 하고 수다를 떨며 회의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2021-01-20 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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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4> 개 무시
1. 지난 가을에 친구네 부부하고 교외의 조용한 곳에 놀러 갔었다. 그 곳 식당 앞 양지 녘에 점잖게 생긴 개 한 마리가 편하게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평소 개를 좋아하는 친구 부인은 아내와 함께 그 개에게 다가가 반가운 척을 했다.그러나 그 개는 두 할머니가 보이지도 않는 듯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과자를 주면서 불러보고 얼러봐도 요지부동이었다. 아, 사람을 싫어하는 개 인가 하고 생각할 즈음에 예쁜 어린 아이 한 명이 개 앞에 나타났다.그러자 그 점잖기만 하던 개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치며 어린이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는 어르지도, 과자를 주지도 않았는데 개가 먼저 아는 척을 한 것이다. 순간 두 할머니는 어이 없다는 듯 실소를 하며 “우이씨, 개도 이제는 우리가 늙었다고 쳐다보지도 않네, 그야말로 완전 ‘개 무시’ 당했네!” 하며 씩씩거렸다.자초지종을 듣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개도 눈이 있겠지. 내가 개라도 할머니보다는 어린이와 놀겠다. 할머니보다는 아이가 예쁘지. 예쁜 사람을 선호(選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개가 눈이 얼마나 정확한데…”. 2. 무릇 모든 생명체는 어릴 때가 예쁘고 늙으면 추해진다. 꽃도, 단풍도 그렇고 무엇보다 사람이 그렇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집 손자 손녀 4명도 한결 같이 예쁘다. 객관적으로 봐도 우리 애들이 제일 예쁜 것 같다.그런데 이 녀석들이 나만 보면 ‘점쟁이 할아버지’라고 놀린다. 내 얼굴에 점이 많다고 하는 말이다. 내가 “할아버지도 너희들 만했을 땐 점도 없고 예뻤단다” 해도 잘 믿지 않는다. 어릴 때 사진도 거의 없으니 증거를 보여줄 수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땐 예뻤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릴 때 예쁘고 늙어서 추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이란 곧 하나님의 섭리이다. 만약에 늙었을 때 예쁘고 갓났을 때가 추하다고 가정해 보자. 누가 힘들여 아기를 돌봐 인류가 번성할 수 있었겠는가? 늙으면 추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니 순종하는 수 밖에 없다.그나저나 ‘점쟁이’라고 놀려도 좋으니 손주들이 나를 자주나 만나주면 좋겠는데, 그 놈의 학원인지 뭔지 때문에 애들이 너무 바빠 나를 만날 시간이 없단다. 내 마음 같아서는 애들을 저녁 늦게까지 학원에 보내는 부모를 처벌하는 아동학대법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시간이 있다고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할지는 잘 모르겠다. 할아버지에 대한 손주들의 애정이 세월과 함께 식어감이 느껴져 허무할 따름이다. 뭐 어쩌겠는가! 3. 요즘도 여전히 후배 교수들이 정년퇴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년퇴임이 옛날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느낌이다. 옛날에는 노숙한 노교수님들만 정년 퇴임을 하셨다. 생약학의 이선주 교수님은 한참이나 인자한 할아버지의 풍모를 자랑하신 연후에 정년퇴임을 하셨다.그런데 요즘은 새파란(?) 후배들이 정년퇴임을 하고 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아니 그 사람이 벌써 정년을?” 하며 놀란다. “요즘 애들은 나이만 먹었다”는 농담이 농담이 아니다. 돌아 보니 내가 아는 사람들은 이미 60을 다 훌쩍 넘었고 젊어 봤자 50 중반 이후의 중늙은이들이었다. 내 주변에 젊은이는 오래 전에 사라진 것이다. 아!!!4. 예전에는 정년퇴임을 하신 교수님들은 어딜 가셔도 깍듯이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퇴임을 해 보니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디 가서 허리 한번 빳빳하게 펴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동창회에 가면 더 그랬다. 팔십 구십 잡순 선배님들이 무수히 건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그래서 경로당에 육칠십 대의 젊은이(?)는 나오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다. 그 나이에는 주전자를 들고 심부름이나 해야 되기 때문이란다. 이제 어디 가도 팔십은 넘어야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좋은 일이다. 그래도 가끔은 ‘나는 언제 왕초 노릇 한번 해 보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걸 노추(老醜)라고 하는 모양이다. 5.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또 한 해가 지나감에 감회가 새롭다. 아 세월이여!
2021-01-06 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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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3> 약사 직능의 진화
요즘 ‘전원일기(田園日記)’라고 하는, 지난 1980년말부터 2002년말까지 22년간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농촌 TV 드라마의 재방송을 가끔 본다. 훈훈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지만 드라마를 관통하고 있는 분위기는 농업이 쇠락하여 머지 않아 농촌이 붕괴될 것 같다는 무거움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농촌의 삶은 드라마의 예상과 달리 붕괴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때보다 나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보면 우리나라의 제약산업도 1987년에 물질특허제도가 도입되면 대부분 붕괴될 것이라는 무거운 전망이 나돌았었다. 2000년의 의약분업 실시도 일부 제약기업에는 간단치 않은 시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제약산업은 놀랍게도 이런 위기들을 잘 극복해 내고 오히려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제약산업은 그 사이에 신약을 30개나 개발하여 소위 ‘신약개발 강국’ 리스트에 우리나라 이름을 올릴 수 있었으며, 금년 코로나 사태에서도 타 산업과 달리 의미 있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천만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난 11월 20일, 인천에 있는 가천대 약대 학생들에게 ‘예비약사의 진로와 자세’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할 기회를 가졌다. 비록 마스크를 쓰고 한 강의였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진지했다. 강의 내용은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약학 및 약업이 발전함에 따라 약대 졸업생들의 진출분야도 옛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으니, 과거의 시각에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예측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강의 내용의 일부를 이하에 소개 한다. 약학은 기본적으로 신약의 창제 및 개발 (創藥, Creation Pharmacy), 의약품의 제조 (製藥, Manufacturing Pharmacy), 그리고 의약품의 임상 사용(用藥, Clinical Pharmacy)이라는 3대 분야에 관한 이론과 기술을 연마하는 학문이다. 그 동안 약대 졸업생의 진로도 자연히 이 3대 분야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약학이 급속히 진보함에 따라 이들 대 분야(大分野)도 진화(進化) 분화(分化)를 거듭하여 다양한 중소분야가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우선 창약분야에서는 신약창조에 관한 기초 연구를 하는 연구기관 (대학, 회사, 국공립 연구기관) 외에, 신약의 개발 과정 전반을 기획 관리하는 벤처 회사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벤처 회사의 연구자금 조달을 위한 벤처 캐피탈 회사들도 줄을 잇고 있다. 또 신약개발과 관련하여 변리사, 변호사, 벤처 CEO, 신약개발 자문, 비 임상 또는 임상시험 관리, CLO, 벤처 캐피탈리스트 등이 이미 약사의 직역(職域)이 되었다. 제약분야에서는 개발 전문, 제조 전문(CMO), 특정제제 (소프트 캡슐 등) 전문제조, 판매 전문 등으로 제약회사의 기능이 진화, 분화 되고 있다. 또 의약품 원료, 첨가제, 코팅색소, 주사제용 고무마개, 실험용 동물, 제약기기, 시험장비, 공조시설 (양압, 음압 시설) 등을 제조 또는 취급하는 회사들, 또 GMP 등을 교육하는 전문 기관도 생겨났다. 기존의 제약회사 내에서의 진출 분야도 다양해졌다.순수 연구는 물론, 학술, 개발 (식약처 승인 받기), 글로벌 업무, 영업, 주가 관리 등 개인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진출할 수 있는 분야가 다양해 진 것이다. 또 의약품 시장이 국제적으로 개방됨에 따라 많은 다국적 기업이 국내에 생겼는데 약사들, 특히 여약사들의 이들 기업으로의 진출이 괄목할만하다. 끝으로 용약분야 업무는 크게 병원약국과 일반약국에서 환자에 대한 의약품의 투여로 나눌 수 있는데, 앞으로 환자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 등에 따른 환자 맞춤형 약물요법 (personalized drug therapy)이 대세를 이룰 전망이다. 이에 따라 복약지도 등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전망이다. 병원약제부에서는 숙원사업이던 특수 질환 전문약사 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약사들의 직능도 다양화, 전문화 될 전망이다. 나는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약사의 직역은 더욱 진화할 것으로 믿는다.
2020-12-16 2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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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2> 최근의 주례사
지난 10월 마스크를 쓰고 주례를 보았다. 그 때의 주례사를 다소 수정하여 소개한다.결혼식은 인생이라는 바다에 ‘OOO/OOO의 가정’이라는 이름의 돛단배가 항해를 시작하는 출범식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몇 가지 축복의 말씀을 드립니다. 두 사람이 탄 돛단배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풍을 만나야 합니다. 항해할 때에 운(運)이 좋은 사람은 순풍을 만나고, 운이 나쁜 사람은 폭풍을 만납니다. 그래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7할은 운이 좌우한다는 말이지요. 저는 이 말을 은칠기삼(恩七技三)으로 바꿔 부릅니다. 하나님 은혜가 7할이라는 뜻인데, 사실 인생의 100%가 다 하나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순풍이냐 폭풍이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관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다의 바람을 좌우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순풍이 불기만을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같은 기도를 해도 어떤 사람은 순풍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폭풍을 만납니다. 왜 그런지 우리는 그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다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가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치셨으니, 아마도 순풍, 즉 복을 기원하는 사람의 기본 자세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닐까 짐작할 따름입니다.그런데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코로나 19 대유행의 와중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두 사람은 건강하게 태어나 지혜롭게 성장해서 좋은 직장에 다니다가, 이렇게 멋진 배우자를 만나 사랑으로 결혼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나의 오늘은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다 하나님 은혜로 받은 것’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교만하게 살 수 없습니다. 자연 겸손해지고, 성실해지고, 정직해지고 온유해 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보다 축복을 덜 받고 있는 사람들까지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시작은 감사이어야 하고 그 완성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 없는 항해는 순항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사랑 없는 가정에 복이 가득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하기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자식 사랑이 제일 쉽고 부부 사랑이 그 다음이며 부모 사랑이 제일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식 사랑은 절제가 필요하지만, 부모 사랑은 이를 악물고 해야 하는가 봅니다. 부모 사랑을 효도(孝道)라고 하는데, 얼마나 효도하기가 어려우면 태권도, 서도(書道) 등에 사용하는 길 도(道)자를 붙여 놨겠습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되도록 부부 간의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 말을 잘해야 합니다. 나는 인생은 언구행일(言九行一), 즉 인생은 90%의 말과 10%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부 간에도 말을 잘해야 합니다. 서로 입만 열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절대로 모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부모님께도 자식에게도 틈만 나면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주의해야 할 것은 부부간에 본심(本心)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심지어 부부 간에 대화(對話)하지 말라고까지 합니다. 왜 그러는지 아세요? 잘못된 대화는 상대방에 대한 지적질로 발전(?)한 다음 마침내 큰 부부싸움으로 확전(擴戰)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본심을 담은 지적질은 사랑을 파괴하는 마귀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지적질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고 하면 재빨리 “아부 모드” 스위치를 켜고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칭찬의 말을 해야 합니다. 솔직한 지적질은 부부 싸움을 치열하게 만들지만, 아부성이라도 칭찬은 서로간의 사랑을 돈독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 진심 어린 칭찬은 얼마나 위력이 크겠습니까?두 사람의 가정의 인생항로에 하나님의 순풍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축복합니다.
2020-12-02 2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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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1> 어색한 표현들
세월이 가면 말도 바뀌게 마련이라지만 그래도 내 보기에 어색한 표현들이 적지 않다.1. 수동태의 남용1) 보여집니다 (일본어의 ‘미라레루’와 유사. ‘보입니다’로 충분). 2)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관심이 모이고 있다’, ‘관심이 간다’가 나을 듯). 3) 생각됩니다. 생각되어집니다 (일본어의 ‘오모와레루’가 연상됨. ‘생각합니다’가 좋을 듯). 4) 예상된다 (예상한다). 5) 에너지를 너무 분산한 것은 아닌가 (‘분산시킨 것은’이 나을 듯).2. ‘..도록 하겠습니다’의 남용1) 소개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개하겠습니다’로 충분). 2) 노래를 한번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부르겠습니다). 3)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4)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발표하겠습니다). 5) 투표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행하겠습니다). 6) 전해드리도록 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해드리겠습니다). 7)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무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3. ‘같아요’의 남용 1) 모처럼 야외에 나오니 기분이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기분이 참 좋습니다). 2) 상품이 마음에 드시면 지금 번호를 눌러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번호를 눌러 주세요). 3) 궁금하면 OO를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OO를 보십시오). 4) 이래서 내가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이래서 내가 좋아했습니다). 5) 감사한 것 같아요 (감사해요). 6) 아직도 고마워하는 것 같아요 (아직도 고마워하고 있어요). 7) 별을 보는 것이 우리들의 주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주목적이었어요). 8) 느낌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느낌이 남달랐어요).4. ‘너무’의 남용1) 너무 좋아요, 너무 축하 드려요, 너무 기뻤었던 것 같아요 (‘너무’는 ‘다들 너무해요’의 용례처럼 ‘지나쳐서 안 좋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각각 ‘참 좋아요’, ‘진심으로 축하 드려요’, ‘정말 기뻤어요’가 좋을 듯).5. ‘부분’, ‘보수적’ ‘제한적’ 및 ‘일정 정도’의 남용1) 서브 부분에서 좀 보완이 필요하다 (서브 보완이 필요하다). 2) 예산을 보수적으로 잡았다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다). 3) 그 영향은 제한적이다 (그 영향은 별로 크지 않다). 3) 일정 정도 타당하다 (어느 정도 타당하다).6. 경어의 남용1) 병원에 갔더니 나보고 ‘잠시 앉아계실 게요’ 한다. 식당에 갔더니 ‘음식 나오실 게요’ 한다. (원래 ‘게요’는 남의 행동을 예고하는 데에 쓰는 어미(語尾)가 아니다. 여기서는 각각 ‘잠시 앉아 계세요’, ‘음식 나왔습니다’가 맞을 듯). 2) 식당에 가면 ‘주문 도와 드릴게요’, ‘계산 도와드릴게요’ 소리를 듣는다 (뭘 도와준다는 말인가? 그냥 ‘주문하세요’, ‘계산 이렇게 나왔습니다’하면 될 듯). 7. 한자 조어(造語) 및 외래어 남용1) 유어금지 (游魚禁止)와 소주밀식 (小株密植)- 각각 ‘고기잡이 하며 놀지 말라’, ‘벼 포기를 작게 해서 촘촘하게 심으라’는 뜻이라는데 유식이 지나쳐 보인다. 쉬운 말로 고쳤으면). 2) baby changing table (아기 기저귀 가는 곳이라는 뜻이라는데 맞는 영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좀 이상해 보임). 3) 강남더샵 라르고 오피스텔(우리 동네 건물 이름. 주변에 외래어 투성이의 건물 이름이 너무 많다. 혹시 정말 시부모님이 못 찾아 오게 이렇게 정했나?).8. 기타 (회자, 예정, 되세요) 1) ‘좋은 하루 되세요, 즐거운 영화관람 되세요, 행복한 여행되세요 (이런 것들이 ‘되라’고 명령어체로 말해서 되는 일인가? 각각 ‘하루 잘 지내세요’, ‘영화 즐겁게 보세요’. ‘재미있게 보세요’가 맞을 듯). 2) 비가 올 예정이다 (비가 오기로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므로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가 맞다). 3) 회자(膾炙)된다 (‘인구(人口)에 회자된다’가 표준 용법인줄 알았는데 요즘은 그냥 ‘회자된다’고 쓰는 사람도 많다. 원래는 음식 맛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의미로만 썼다는데 요즘은 부정적인 의미로도 쓴다.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2020-11-18 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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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0> 팩트체크(2). 자몽주스는 정말 녹았을까
이번에는 어떤 물질(용질, 容質, solute)이 어떤 용매(溶媒, solvent)에 녹는다, 즉 용해(溶解, dissolve)된다고 하는 현상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대한약전(통칙, 通則)에서는 용해성(溶解性)을 ‘의약품을 고형인 경우 가루로 한 다음 용매 중에 넣고 25 플러스 마이너스 5도C에서 5분마다 30초간씩 세게 흔들어 섞을 때 30분 이내에 녹는 정도’라고 정의한 다음, 용해성의 크기를 “썩 잘 녹는다, 잘 녹는다, 녹는다, 조금 녹는다, 녹기 어렵다, 매우 녹기 어렵다, 거의 녹지 않는다”로 구분하였다.그리고 그 밑에 ‘녹는다는 말은 투명하게 녹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여기에서 ‘투명하게’란 말은 눈에 띄는 의약품 가루가 없어진 상태를 말하는 모양인데, 나는 이 마지막 정의가 지나치게 애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험실에서는 용질을 용매에 넣고 저어 준 다음 여과지로 여과(filter)하여 걸러져 나온 투명한 액체를 용액(溶液, solution)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용질 분자는 용액 중에서 어떤 상태로 존재할까? 어떤 경우에는 단분자(單分子) 상태로 분산되어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분자들끼리 회합하여 이량체(dimer)나 그 이상의 다량체(polymer)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살리씰산은 물 중에서 이량체로 존재한다고 한다.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 눈에는 ‘투명하게’ 보여도 나노입자 (nanoparticles) 상태로 현탁(懸濁, suspend) 분산되어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과할 때 흔히 쓰는 흔히 밀리포어 필터의 구멍 크기(孔徑, pore size)는 0.6 미크론이므로 이 필터로 여과하여 받은 여액(濾液)은 눈으로 보기에는 ‘투명한 용액’처럼 보여도, 여과 용액 중에는 600 nm 이하 크기의 나노입자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약전의 정의에 따르면 단분자 분산, 이량체 분산, 나노입자 현택액 모두가 다 ‘용액’이다. 이는 과학의 발전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비과학적인 정의이다. 이제는 용질 분자가 분산되어 있는 상태에 따라 단분자 분산, 이량체 분산, 나노입자 현택액(suspension) 등으로 구분해서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의약품이 위장관 내에서 단분자 분산 상태로 녹는지, 이량체 분산 상태로 녹는지, 아니면 나노 미립자 분산 상태로 현탁되어 있는지를 구별하지 않으면, 그 약물이 위장관에서 흡수되는 메커니즘을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약물이 위장관 막을 통과하여 흡수될 때에 분자와 미립자의 기전이 전혀 다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분자라 해도 단분자보다 큰 다량체 분자의 막투과성이 낮다. 예컨대 살리씰산의 막투과성은 실질 분자량을 단분자의 2배로 보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특히 나노 미립자는, 분자의 경우와 달리 수동확산 (passive dissfusion)이나 막 수송체를 이용한 능동수송(active transport)을 통하여 흡수되지 않고, 미립자 고유의 endocytosis(우물우물 삼키기)란 기전을 통해 흡수되는데, 분자 분산이냐 아니면 미립자 현탁이냐 등 분산상태를 고려하지 않으면 어떤 약물의 화학구조와 위장관 흡수와의 관련성(구조-흡수 상관성)을 잘못 해석하게 된다.이처럼 잘못된 정보에 근거하여 신약의 분자구조를 설계한다면, 분자구조로부터 기대했던 흡수 특성을 얻지 못해 낭패를 볼 우려도 있는 것이다. 자몽 주스를 복용하면 간의 특정 효소가 과잉 발현되어 어떤 약물의 흡수와 약효발현이 영향을 받는다는 유명한 연구가 있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자몽 주스 중에 어떤 특정 성분이 어떤 상태로 녹아 있는지 규명하지 않았다.나는 자몽 주스에는 특정 성분의 나노 미립자가 현탁되어 있지 않나 의심한다. 그리고 자몽 주스의 작용은 분자가 아닌 나노 미립자의 endocytosis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주목하여 재 시험을 한다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될지도 모르겠다. 이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2020-11-04 1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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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9> 착각
칠십 노인이 아주 오랜만에 친구 부부를 만났는데, 글쎄 그 친구가 자기 부인을 ‘자기야!’ 하며 부르는 게 아닌가? 젊었을 때는 ‘순자야!’ 하고 소리 지르던 친구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했을까 안타까워서 물었다. “이 보게 친구야, 애들도 아니고 다 늙어서 남사스럽게 ‘자기야’가 다 뭔가?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던 자네의 기개는 다 어디로 갔는가?”그러자 친구는 귀속말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쉿 조용히 하게, 실은 마누라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할 수 없이 ‘자기야’라고 부르는 거야”. 비웃던 친구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 친구가 일견 남사스럽게 변한 데에는 다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그는 깨달았다고 한다. ‘남을 함부로 착각하고 비난해서는 안되겠구나’. 이번에는 다른 집 영감님 이야기이다. 영감님이 어디선가 들었는데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가는 귀를 먹는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30미터 떨어진 곳에서 아내를 불러봐서 잘 못 알아 들으면 약간 귀가 먹은 것이고, 20미터 떨어진 곳에서의 소리를 못 들으면 제법 많이 먹은 것이며, 10 미터 거리에서도 못 들으면 심각한 상황이니 병원엘 데리고 가봐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영감님은 집에 와서 마나님의 청력을 테스트 해 보기로 하였다.그래서 30미터 떨어진 소파에 앉아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마나님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는 뭐예요?” 그런데 아내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영감님은 ‘아하 이 사람이 정말 귀가 어두워 졌나 보다’ 생각하고 가슴이 시렸다. 그래서 20미터 떨어진 식탁으로까지 가서 다시 한번 물어 보았다. “여보, 오늘 메뉴가 뭐예요?”아 그런데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은 영감님은 몇 발 더 걸어나가 싱크대 옆 마나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그리고는 마나님 귀에 대고 한번 더 물었다. “여보 오늘 메뉴가 뭐냐구?” 그러자 이 말이 절반도 끝나기 전에 마나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이구, 귀 떨어지겠네! 김치찌개라고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어? 제발 보청기 좀 해 이 영감텡이야!” 그제야 영감님은 마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이 아닌 내게 문제가 있으면서도 나는 늘 옳고 남은 늘 그르다는 선입견(착각)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기회는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세종대왕 때 황희 정승에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가 젊었을 때 유람 중 남쪽 어느 지방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란다. 늙은 농부가 누렁소 한 마리와 검정 소 한 마리를 교대로 부려가며 논을 갈고 있었다. 이를 구경하던 황희가 큰 소리로 농부에게 물었다. “누렁 소와 검정 소 중에서 어느 소가 논을 더 잘 가나요?”그러자 농부는 일손을 놓고 일부러 황희가 있는 곳까지 오더니 황희에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누렁 소가 더 잘해요”. 황희는 “뭐 그 얘기를 그냥 거기서 하시지, 일부러 나와서 귓속말로 하시나요?” 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두 마리가 다 힘들여 일하고 있는데, 어떤 소가 더 잘한다고 내가 소리치면 일을 못하는 소는 기분이 나쁘지 않겠습니까?”. 농부의 말에 황희는 큰 가르침을 받았다. 황희 정승의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한다. 황 정승의 집안 노비 두 사람이 서로 다투다가 그를 찾아 와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바치자, 먼저 온 종의 말을 듣고는 “네 말이 옳다”라고 하고 다음에 온 다른 종의 말을 듣고는 “네 말도 옳다”라고 하며 돌려 보냈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이 어찌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고 하냐고 나무라자 그는 “부인의 말도 옳소”라고 하였다. 18년간이나 영의정을 지낸 황희가 바보라서 이처럼 무정견(無定見)한 말을 했을까? 젊었을 때 농부로부터 교훈에 따라 소보다 천만 배 귀한 사람(종)들의 싸움에서 함부로 어느 편을 정죄(定罪)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때로는 무정견이 섣부른 착각이나 맹신에 따른 정죄(定罪)보다 오히려 훌륭해 보이는 오늘이다.
2020-10-21 16: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