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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6> 타이레놀서방정 퇴출의 진실
얼마 전 유럽에서 아세트아미노펜(상품명:타이레놀) 서방정의 판매가 중지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대한민국 식약처는 3월 13일자로 안전성 서한을 배포했고, 미디어에 관련 뉴스가 쏟아졌다.
대부분의 기사는 정확한 사실을 보도했지만, 팩트에 기자의 상상력을 더한 일부 기사는 대중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중에서도 편의점 타이레놀은 안전하다, 서방정은 오용 위험성이 크다는 식의 기사는 명백한 오보였다.
우선 사실만 짚어보자. 유럽집행위원회(EC)가 아세트아미노펜 함유 서방형 제제의 유익성-위해성 검토 결과, 위험성이 유익성을 상회한다고 판단하여 판매 중지를 결정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비슷한 뉴스를 여러 번 들었던 기억이 든다.
이번에 유럽집행위원회가 EU 회원국 전체에 법적 구속력을 갖는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20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2016년 6월 30일 스웨덴 독극물정보센터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했고, 2017년 9월 약물감시 위험평가 위원회(PRAC)가 문제를 검토하여 권고안을 내놓았으며, 제약회사들이 재고를 요청함에 따라 다시 한 번 문제를 조사한 뒤에 원래의 권고안을 확정한 게 지난 해 12월이었다. 이 때마다 뉴스에 아세트아미노펜 서방정에 대한 이야기가 오르내렸다.
이제 오보를 하나하나 따져보자. 일부 매체는 약효가 느리게 나타나 과잉 복용할 위험이 커서 이번에 유럽에서 서방정을 퇴출했다고 보도했다. 일리 있게 들리지만 잘못된 추정이다. 아세트아미노펜 서방정은 절반은 빨리 녹고 절반은 서서히 방출되는 방식의 방출제어형(modified-release) 제제다.
골관절염 환자 403명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이중맹검 임상시험에서 아세트아미노펜 서방정(665mg)을 2정씩 하루 3회 투여했을 때와 일반정제(500mg)을 2정씩 하루 4회 투여했을 때 통증 완화 효과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약효가 적다고 생각해서 서방정을 과잉복용할 위험이 크다고 말할 근거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편의점 타이레놀은 안전하다는 기사는 오보 중의 오보였다. 이번에 유럽에서 아세트아미노펜 서방정이 퇴출된 것은 서방정이 일반정제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다. 약국은 아세트아미노펜 일반정제와 서방정을 모두 취급하며, 편의점에는 일반정제만 있다.
일반정제이든 서방정이든 아세트아미노펜은 정해진 용법대로 복용하면 안전하고, 이를 넘어서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다. 애초에 쟁점은 누군가가 약을 과잉복용하여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치료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에 문제를 제기한 곳이 스웨덴 독극물정보센터였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식약처 안전성 서한은 이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서방형 제제의 약물 방출 방식이 일반 제제와 상이하여 과다 투여시 실현가능하거나 표준화된 관리 방법이 확립되지 아니하여 위험성이 유익성을 상회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쉽게 말해 약물 중독으로 응급실에 입원한 환자를 치료할 때 그 환자가 과용한 약이 서방형이냐 일반정제냐에 따라 흡수패턴과 약효지속시간이 달라지고 따라서 치료 방식도 달리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이를 효과적으로 구별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아세트아미노펜 중독 치료의 표준 프로토콜이 일반정제를 삼킨 경우만을 염두에 두고 세워졌다는 것 또한 문제로 지적됐다. 식약처가 안전성 서한에서 보충 설명한 내용도 사실이다. ‘아세트아미노펜’ 함유 서방형 제제는 현재 미국, 캐나다 등 외국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유럽 의약품청(EMA)는 권장량에 맞게 적절하게 복용하였을 경우 아세트아미노펜 복용으로 인한 유익성이 위험성을 상회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유럽 의약품청에서 이번에 서방정을 퇴출하기로 했지만, 이미 약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은 원래 용법에 따라 안전하게 소진해도 된다고 권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방정 퇴출은 알약을 더 꺼내기 어렵게 안전 포장한 것과 마찬가지다. 복용회수가 적은 서방정이 더 편리할 수 있겠지만, 오남용시 치료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그 편의성을 희생한 셈이다.
가벼운 두통에 서방정보다 일반정제가 낫다. 한 알에 들어있는 아세트아미노펜의 함량이 625mg으로 하루 최대 6정까지만 복용하도록 되어있어서 한 알에 500mg이 들어있어 하루 최대 8정까지 복용하도록 하는 일반 필름코팅 정제와는 차이가 있다.
동일 약성분이 들어있는 감기약, 근육통약, 해열진통제를 중복 복용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약국에는 이런 주의점을 설명해주는 약사가 있고, 편의점에는 없다. 이것이야말로 유럽발 아세트아미노펜 서방정 퇴출 뉴스에 숨은 진실이다.
2018-03-28 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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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5> 약과 공감
약은 음식과 다르다. 음식은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다. 맛, 향, 식감, 모양새 등의 여러 관점에서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쉽다. 약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약에 대한 느낌이나 경험에 대해서는 공감하기가 참 어렵다. 약사로 일한 지 벌써 21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항우울제로 사용되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를 복용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직접 체험해 본 적이 없다.
항고혈압약, 이뇨제, 고지혈증 치료제나 당뇨병 치료제를 복용해 볼 기회도 없었다. 그런 약들이 작용하는 원리와 부작용을 배우고 약을 복용해본 환자들을 상담해본 게 고작이다.
약을 복용한 뒤에 이런저런 느낌이 있었다며, 혹시 약 부작용인지 물어올 때마다 되새겨보는 사실이다. 나는 그 약을 복용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우선 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보아야 한다. 공감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용설명서에는 약 부작용이 깨알같이 적혀있지만, 환자가 호소하는 부작용이 리스트에 빠져있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이 때는 약이 작용하는 기전에 대한 지식이 환자의 경험을 잘 듣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드름이 많이 난 10대 청소년이 알레르기 비염 복합제를 먹고 얼굴에 피지가 늘어났다며 약 부작용인지 물어본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약이 음식과 같다면 그냥 약을 한 알 먹고 몇 시간이 지나면 얼굴이 기름지게 되는지 여드름 면포 수가 늘어나는지 볼 수도 있겠지만, 약 부작용이 누구에게나 나타날 가능성도 낮을뿐더러, 부작용이 있는지 보겠다고 알레르기비염이 없는 사람이 약을 먹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약성분과 작용기전을 알면 추론이 가능하다. 복합제 속에 들어있는 슈도에페드린은 교감신경 흥분제이다. 수용체에 직접 작용하기도 하지만 저장된 노르에피네프린을 밀어내는 간접적 방식으로 작용한다. 약으로 교감신경이 흥분되면 땀 분비가 촉진되고 땀구멍도 커진다.
약 복용 후에 거울을 보면 땀구멍이 유난히 커 보인다는 이야기가 간혹 들리는 이유다. 드물지만 약 복용 뒤에 식은땀이 나는 것도 비슷한 기전이다. 하지만 피지 분비는 주로 성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 피지분비가 늘어난 건지, 아니면 땀구멍이 커져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약의 작용기전은 부작용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다.
전립선 비대증 증상완화를 위해 알파차단제를 복용 중인 환자가 눈에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이 경우에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일단 부작용 리스트 상에 시력 감소 또는 흐려보임과 같은 시각이상 증상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눈에 느낌이 이상하다는 식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약사로서 우리의 역할은 나열된 부작용 중에서 환자가 이야기하는 증상을 찾는 게 아니다. 우선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정말 약의 부작용인지, 그냥 느낌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나중 일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약리에 대한 이해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전립선비대증에 사용되는 알파차단제는 홍채에 있는 알파수용체에도 작용하여 홍채의 수축을 방해하는 홍채긴장저하증후군이라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환자가 호소한 불편감이 홍채 근육이 느슨해진 것과 관련되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일단 눈에 부작용이 보고된 바 있는 약이라면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
새로운 약이 정부에서 신약 승인을 받고 시장에 출시되기까지 많은 임상시험과 연구를 거쳐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의 효과가 아닌 부작용을 모두 알기에는 임상시험 참여자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효과는 100명 중에 절반 이상에게 나타나는지 보는 것이라면 부작용은 만 명, 십만 명 중에 한 명에게만 나타나도 부작용이다. 부작용에 대한 지나친 걱정으로 약 복용을 기피하는 환자들이 걱정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약을 열심히 복용 중인 환자가 약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할 때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약을 상담할 때 약사는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기억해야 한다. 상담의 기본은 공감이다.
2018-03-14 0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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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4> 피린계특이체질
“피린계 특이체질”이란 정확히 무슨 뜻일까? 간단해보이지만 의외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우선 피린계 약물이 무슨 뜻인지부터가 애매하다. 피린계 약물은 아미노피린, 안티피린, 이소프로필 안티피린처럼 피린으로 끝나는 진통제를 통칭하는 용어다.
피라졸론이라는 화학구조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피라졸론 계열 진통제라고 불러야 더 정확한 명칭이지만, 발음이 어렵다보니 대신 피린계 약물이라는 말로 굳어졌다.
안티피린은 피린계 약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약이다. 1884년 독일의 화학자 루트비히 크노르가 개발한 것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화학 합성된 진통제이다. 그런데 안티피린은 본래 일반명이 아니라 상품명이다.
해열제를 뜻하는 영단어 antipyretic에 약 이름이라는 걸 표시하는 -ine을 합쳐서 만든 상품명이다. (이 약의 국제일반명INN은 phenazone이다.) 1929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동인의 <동업자>라는 소설에 안티피린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인공 홍선생은 철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의사인척 하고 다닌다.
“약은 역시 안티피린과 위산뿐이엇습니다. 어떠한 병에든 食前藥(식전약)으로 안티피린, 食後藥(식후약)으로 위산이엇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안티피린이 상당히 잘 알려진 약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 설피린(다이피론), 아미노피린과 같은 약이 많이 쓰였는데, 피린으로 끝나는 약들이 워낙 인기가 좋아서인지 나중에는 피린계 소염진통제가 들어있지 않은 약에도 끝에 피린이라는 말을 붙여 팔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피린계 소염진통제가 들어있든 들어있지 않든 약 이름에 피린이 들어있는 것들이 많았다. 원래부터 비공식 용어였던 ‘피린계 약물’이 더욱 두루뭉술한 말이 되고 만 셈이다.
자신이 피린계 약물 특이체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실제로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약국이나 병원에 가서 자신이 피린계 특이체질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피린계 약물을 복용 후에 피부 발진 또는 두드러기가 생기거나 또는 천식, 만성 비염과 같은 질환이 악화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정말 피린계 특이체질이라면 그 한 가지 계열의 약에만 과민한 것이다. 따라서 피린계가 아닌 다른 계열의 소염진통제는 복용해도 무탈해야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환자 본인은 피린계 약물 특이체질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피린계가 아닌 다른 소염진통제를 복용해도 같은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가성 알레르기 반응이다.
가성 알레르기 반응은 알레르기와 증상은 비슷하지만 진짜 알레르기로 인한 ‘면역 반응’이 아니다. 때문에 ‘가성’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소염진통제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가성 알레르기 반응은 약에 의해 COX-1 효소가 억제되면서 반대로 염증성 물질인 류코트리엔이 축적되어서 생겨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두드러기가 나거나 만성 호흡기질환이 악화된다. 가성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면 아세트아미노펜처럼 COX-1 억제 효과가 미약한 약은 대체로 별 문제없이 복용할 수 있고, 세레콕시브처럼 COX-1은 건드리지 않고 COX-2만을 선택적으로 억제하는 약도 복용이 가능하다.
드물지만 진짜 피린계 약물에 특이체질인 사람도 있다. 이들이 모르고 피린계 약성분이 들어있는 알약을 복용했다가는 몇 분 만에 두드러기와 안면부종, 구역, 구토, 저혈압에 심하게는 기절하거나 아나필락시스와 같은 응급상황을 경험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건 정말 면역반응이다. 따라서 피린계 약물이 아닌 다른 계열의 소염진통제를 사용했을 때는 아무 반응 없이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집에서 시험해볼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특정계열의 소염진통제에만 진짜 알레르기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 소염진통제에 가성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는 것인지 판별은 알레르기 전문의가 상주하는 병원에서만 가능하다. 진단을 받고 나서는 자신이 그러한 알레르기가 있는 환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카드를 항상 소지하고 다녀야 한다.
피린계 특이체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정말 피린계 약물에 알레르기인지 아니면 일반적 소염진통제에 가성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다. 누군가 피린계 특이체질이란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귀를 쫑긋 세워야할 이유다.
2018-02-28 0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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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3> 탈리도마이드의 부활
1957년에 독일에서 탈리도마이드라는 새로운 수면제가 시판됐다. 동물 실험 결과 이 약은 아주 안전해보였기에 처방 없이 구입이 가능한 일반약으로 판매되었다.
과거 언론에 보도된 기록을 보면, 당시 이 약이 수면 효과는 뛰어나면서도 다음날 몽롱해지는 부작용이 없어서, 잠에서 깬 뒤에도 머리가 말끔하다는 이유로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유럽 각국에서 매일 밤 이 백만 명이 탈리도마이드를 먹고 잘 정도였다. 그런데 탈리도마이드(상품명: 콘테르간)가 출시되고 나서 당시 서독의 손과 발이 없이 태어나는 기형아 출생률이 백만 명에 한 명에서 천 명에 2명꼴로 크게 늘어났다.
마침내 1961년 11월에 이 약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밝혀졌다. 이미 늦었다. 세계 전역에서 피해자 수가 10,000명에 달했다. (주로 영국, 독일에 피해가 컸고, 일본의 경우도 300명이 넘었다. 다행히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 약이 시판되지 않았다.)
탈리도마이드 사태가 벌어진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약품 규제는 지금보다 느슨했다. 특히 독일 의약품 시장은 개방적이어서 약품의 효능이나 안전성에 대해 자세한 증거 자료를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탈리도마이드의 경우, 생쥐를 대상으로한 독성 실험 결과로만 보면 대단히 안전해보였다. 생쥐에게 체중1kg당 5000mg을 먹여도 죽지 않을 정도라니, 소금의 치사량과 비교하면 1600배를 투여해도 될 정도로 안전한 약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원숭이 실험에서는 임신 초기 투여시 예외 없이 기형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때는 늦었다. 역사상 최악의 약화사고로 불리는 탈리도마이드 사건은 이미 벌어진 뒤였다.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몇 년이 지나 놀라운 반전이 생겼다. 한센병과 다발성 골수종과 암등의 치료에 이 약이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1964년 예루살렘의 한 대학병원에서 한센병 치료 과정에서 심한 피부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탈리도마이드를 처방하였더니 증상이 놀랍게 향상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탈리도마이드가 비록 악명 높은 약물이었지만 진통효과가 높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고, 대상이 남자환자였기 때문에 시험 삼아 투여해보았더니 의외로 상당한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워낙 큰 문제를 일으켰던 약이라 공식 승인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1998년에 미국 FDA는 탈리도마이드(상품명: 탈로미드)를 한센병환자의 합병증 치료제로 승인했다.
임산부나 가임기 여성에게는 사용하지 않으며, 남성이 복용 시에는 반드시 피임하도록 하는 조건이었다. 물론 여전히 세계보건기구에서는 가급적 탈리도마이드보다는 다른 약을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뒤이어 2006년에는 탈리도마이드가 항암제로 승인됐다. 탈리도마이드가 태아의 기형을 유발하는 기전을 알게 된 덕분이었다. 이 약은 임신 초기 태아의 팔과 다리가 생성되는 시기에 필요한 새로운 모세혈관이 만들어지는 것을 억제하는 효과(혈관신생억제효과)가 있어, 손과 발이 결손되는 기형을 유발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암세포는 빠르게 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주변에 신생혈관을 만들어서 영양을 공급받으려는 성질이 있고 이렇게 주위에 모세혈관이 새로 생기는 걸 막으면 암세포 사멸을 유도할 수 있다. 엄마 뱃속 태아에게는 엄청난 비극을 일으킬 수 있는 약 부작용을 역으로 항암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의 비극을 잊을 수는 없다. 새로 승인된 용도로 사용될 경우에도 탈리도마이드 이용에는 여러 제한이 따른다.
여성은 복용에 앞서 4주 전부터 복용 4주 뒤까지 최소 두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피임해야하고 남성도 복용 시점부터 4주 동안 성관계를 가질 경우 반드시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 부작용에 대한 지식이 없었을 때는 몰라도, 이제 알고 있는 이상 최대한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부작용 없이 효과만 강력한 완벽한 약은 세상에 없다. 그렇기에 약의 사용은 항상 저울질에 따른다. 치료 상의 유익이 부작용의 위험보다 훨씬 더 클 경우에는 부작용을 알면서도 사용해야 할 경우가 있다.(항암제로서 탈리도마이드) 반대로 치명적 부작용 위험이 예상될 경우라면, 효과가 있더라도 해당 약의 사용을 피해야 한다.(수면제로서 탈리도마이드) 비극을 야기한 탈리도마이드의 부활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다.
2018-02-14 0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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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2> 약학은 과학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동안 항생제는 끝까지 약을 복용하는 게 상식이었다. 캐나다 약국에 근무할 때로 되돌아가보면, 항생제 조제 시에는 항상 약병에 “끝까지 복용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보조라벨 스티커를 붙이곤 했다.
중도하차하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생길 위험이 커질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지난 2017년 7월에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리뷰 논문이 영국의학저널(British Medical Journal)에 실렸다. 항생제를 끝까지 복용하라는 것은 잘못이며, 도리어 내성을 키울 수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논문의 저자인 영국 브라이튼 서섹스 의대 마틴 르웰린 교수는 감염성 질환의 전문가이며, 그의 주장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반드시 끝까지 치료해야 하는 결핵 같은 질병은 예외지만, 다수의 감염성 질환은 항생제를 오래 복용할수록 내성균이 출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지적한다.
가령 대장균이나 황색포도상구균은 평소에도 우리 몸 여기저기에 살고 있지만 감염병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들 세균이 원래 거주지를 떠나 장, 요도, 핏속과 같은 다른 곳으로 침투할 때 문제가 생기고, 항생제가 필요하다.
항생제를 오래 쓴다고 세균을 모조리 박멸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세균이 항생제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성을 갖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 르웰린 교수는 입원 환자의 경우라면 병원에서 항생제를 중단해도 좋을지 검사결과에 따라 결정할 수 있지만, 통원 환자는 증상이 좋아지면 항생제 복용을 중단하는 게 낫다는 매우 과감한 주장을 펼쳤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이들 연구진이 너무 앞서 갔다고 생각한다. 항생제를 가급적 짧은 기간 사용하는 게 내성균 발생을 막는 데 도움이 되긴 할 테지만 복용기간을 제대로 정하려면 환자의 증상 완화 외에도 더 확실한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각각의 감염성 질환에 대해 최적의 항생제 사용기간을 정하기 위한 과학적 근거가 아직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다 나은 것 같다는 환자의 주관적 판단으로 약 복용을 멈추는 게 낫다는 르웰린 교수의 주장에도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반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문가들이 항생제 치료기간이 가능한 한 짧을수록 좋다는 점에 동의한다.
항생제를 실제로 복용해야 하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복잡하다.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머리가 아플 수 있다. 그러니 간단히 정리해보자. 병원에 찾아가서 항생제를 더 달라고 조를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증상이 좋아졌다며 내 맘대로 항생제를 끊는 것도 곤란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항생제가 아직 남아있는데 의사가 이제 그만 먹어도 좋다고 권고할 수 있다. 그 때는 안심하고 약을 끊어도 된다. 약을 끊어서 내성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할 필요 없다. 다시 캐나다 약국 이야기로 돌아가서, 항생제 약병에 붙이는 보조라벨에도 실은 “처방 의사가 다르게 지시하지 않는 한”이라는 추가문구가 더 들어있다.
독감의 전파에 대해서도 전과는 다른 이야기가 들린다. 얼마 전 미국 메릴랜드 대학에서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재채기뿐만 아니라 그냥 숨을 쉬고 있을 때도 옆 사람에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다고 한다. 전에는 재채기나 오염된 표면에 접촉을 통해서만 독감 바이러스 전염이 된다고 믿었는데, 그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러한 연구결과가 독감 예방주사를 맞고, 손을 열심히 씻고, 기침하는 사람들 옆에 있는 걸 피하는 것만으로 독감을 예방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며, 독감의 전파를 막기 위해서는 독감에 걸린 사람들이 가급적 집에서 쉬고 공공장소에 가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도 굳이 바깥에 나가야만 한다면 (기침을 하든, 안 하든 간에) 마스크를 착용하는 게 낫다는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한 번의 연구 결과로 가이드라인을 바꿀 수 있지는 않지만, 후속 연구에 대해 눈여겨볼만하다.
약학은 과학이다. 그리고 과학은 진보한다. 수십 년 전에는 옳다고 믿었던 지식이 여전히 옳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잘못된 믿음에 불과했던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약대를 졸업한 뒤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지식을 최신의 과학지견에 맞추어 업데이트해야 하는 이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환자는 21세기의 과학지식으로 돕는 게 맞다.
2018-01-31 0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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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 디지털 알약
정재훈 약사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년간 약사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방송과 글을 통해 약과 음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 <정재훈의 식탐>이 있다.
시간 참 빨리도 흐른다. 디지털 알약이라는 장치가 의료기기로서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승인을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2012년 7월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2015년 9월에는 오츠카제약에서 조현병 치료제인 아리피프라졸 정제에 이 센서를 탑재하여 FDA에 신약 승인을 신청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는가 했더니 마침내 작년 11월에는 승인을 받았다는 발표가 나왔다.
디지털 알약은 쉽게 말해 일반 정제에 약 자체에 모래알 크기의 아주 작은 센서를 붙여서 만든 정제이다. 알약을 삼키면 약성분이 녹는 동시에 구리, 마그네슘, 실리콘으로 만든 센서가 위액과 반응하여 전기 신호를 만들어낸다.
환자의 왼쪽 가슴에 붙여둔 웨어러블 패치가 이 신호를 잡아서 스마트폰 앱으로 기록을 전송한다. 약 복용날짜와 시간은 이렇게 자동적으로 기록되지만, 여기에 더해 환자는 자신의 기분을 추가할 수 있고, 그 날의 휴식시간과 활동량도 함께 기록이 가능하다.
환자가 약을 복용한 날과 복용하지 않은 날 환자의 기분, 휴식시간, 활동량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앱을 통해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제약회사들이 디지털 알약 개발에 앞장서 나서는 것은 의사가 처방해준 대로 약을 복용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어마어마한 사회적, 의료적 비용 때문이다. IMS헬스(현 IQVIA)의 2013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환자들이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아서 생기는 재정적 손실은 연간 1050억 달러(약 111조70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FDA가 조현병 치료제에서 디지털 알약을 처음 승인한 것도 같은 이유다. 조현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은 환자의 병이 깊어져 입원이나 응급실 방문과 같은 추가적 의료비용이 종종 발생한다.
사실 매일 습관적으로 약을 복용하다보면, 약을 복용했는지 안 했는지 본인 스스로도 혼동하기 쉽다. 차를 주차한 다음 문을 잠궜는지 안 잠궜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것과 비슷하다.
디지털알약은 약을 잊지않고 복용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당장 사생활 침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환자는 앱을 통해 알약 복용 추적 기능을 공유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 의사에 더해서 가족 구성원 등 추가로 4명, 도합 5명까지 환자가 약복용을 하는 시간과 날짜에 대한 데이터 접근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다.
물론 환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환자가 데이터 공유를 즉시 차단할 수도 있도록 되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브라더처럼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해외 언론매체들은 디지털 알약으로 첫발을 내딛은 새로운 의약체계가 생물의학적 빅브라더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쏟아냈다.
디지털 알약이 환자로 하여금 강압적으로 약을 복용하도록 하게 만드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보험사에서 환자가 약복용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적용할 수도 있을 텐데, 좋게 보면 환자의 복약이행률을 높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 환자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막는 게 아니냐는 반론도 제기할 만하다. 첫 번째로 승인된 디지털 알약이 하필 약 복용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은 조현병 치료제인 것도 논란거리다.
다른 한 편으로, 약이 몸에서 어떤 작용을 하며 불규칙한 약복용이 자신을 어떤 위험에 빠뜨리는지를 환자에게 이해시키는 방법으로 복약이행률을 높이려는 연구자들도 있다. 환자가 약이 필요한 이유를 알고 나면 더 잘 복용할 거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또한 사람이 아닌 기계장치를 통해서 이뤄진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존 무어 박사가 개발한 첨비(Chumby)라는 장치는 HIV 치료약이 어떻게 바이러스와 싸우는지 동영상으로 보여주면서 환자가 제때 약을 복용하도록 도와준다.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나도 모르게 시간이 지나면 어느 날엔가 새로운 기술이 우리 생활 속 깊숙이 들어와 있을 것이다. 전화기를 하나씩 들고 다니는 건 꿈속의 이야기였던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는데, 이제는 그 전화기가 우리의 얼굴과 지문을 인식하고, 말을 알아듣는 시대다.
비트코인으로 널리 알려진 블록체인 기술을 의약품 배송체계와 의약정보 관리에 활용하려는 시도가 벌써부터 활발하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은 없다. 내가 가만히 있든 말든 세상은 변해간다. 약사로서 우리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멈추어 생각해보아야 할 때다.
2018-01-17 09: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