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약국] <20> 감기약 바로 알기
연중 이맘때면 가장 관심이 가는 약은 역시 감기약이다. 감기는 약 먹으면 일주일, 안 먹으면 7일이라는 말처럼 감기약은 증상을 완화시킬 뿐 원인을 치료하거나 앓는 기간을 단축하지 못한다. 감기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다.
200종이 넘는 원인 바이러스를 상대하는 약을 만들기도 어렵지만 거금을 들여 약을 개발한다고 해도 시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 비싼 신약에 지갑을 열 소비자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요즘은 감기 초기에 잡으라는 약 광고도 많다. 그런 광고는 누가 나와서 말하든 과대광고다. 종합감기약에는 감기를 초기에 잡을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래도 증상 완화를 위해 먹긴 먹어야 할 수 있지만 부작용을 조심해야 한다.
졸음, 구강 건조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주의사항이 은근히 많다. 특히 고혈압, 당뇨병, 전립선 비대증과 같은 만성질환이 있는 경우, 조심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을 겪을 수 있다.
캐나다 약국에서 일할 때 당뇨병 환자가 약국에 오면 감기약 시럽에 설탕이 들어 있을까봐 걱정하며 물어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당뇨에 감기약을 주의해야 하는 것은 감기약 시럽에 설탕이 들어있어서가 아니다.
설탕시럽이라고 해도 약으로 섭취하는 설탕의 양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시럽에 설탕이 충분히 들어가면 다른 보존제가 필요 없다. 합성 보존제라는 말만 들어도 공포심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설탕시럽제가 딱이다.)
주의가 필요한 것은 감기약 성분 때문에 나도 모르게 혈당이 올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 감기약 속의 막힌 코를 뚫어주는 비충혈제거약 성분은 혈당을 높이고, 이에 더해 말초혈액순환이 잘 안 되는 당뇨환자들에게 혈관계 합병증을 높일 위험이 있다.
고혈압에도 비충혈제거약이 문제가 된다. 이 약은 혈관을 수축시켜서 막힌 코를 뚫어준다. 정상 혈압인 경우, 감기약 속의 비충혈제거약 정도로는 혈압에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고혈압인 경우 감기약 때문에 혈압이 오를 수 있다.
항고혈압 약은 대체로 혈관을 확장시켜서 혈압을 낮춰주는데, 이와 정반대로 혈관을 수축시키는 코 감기약이 애써 복용하는 혈압강하제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셈이다.
고혈압이나 당뇨가 있으면 코가 막혀도 참고만 살아야 한다는 건가? 그렇진 않다. 콧속에 분무하는 스프레이 타입의 비충혈제거약을 쓰면 된다. (단 3-5일 이상 연속으로 쓰면 반동성 비충혈이라는 부작용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소금물 농도를 3%로 진하게 만든 비강 분무액을도 도움이 된다. 이런 약들은 콧속에서만 주로 작용하여 혈압이나 혈당에 미치는 영향이 적고 그만큼 고혈압이나 당뇨병 환자에게도 안전하다.
전립선 비대증이 있는 중장년 남성도 감기약을 조심해야 한다. 감기약 속에는 비충혈제거약에 더해 항히스타민제도 들어있다. 두 약이 모두 소변 배출을 방해한다. 전립선비대증으로 전립선이 요도를 막고 있어서 본래 소변이 시원치 않은데, 약으로 아예 막혀 버리면 감기약 때문에 응급실행을 경험할 수 있다.
항히스타민제 때문에 졸음이 오니까 밤에 감기약을 먹고 바로 드러눕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게 하면 비충혈제거약 때문에 악몽을 꾸거나 자다 깰 수 있다.
끝으로 감기약 속 진통제도 조심해야 한다. 두통약, 감기약, 근육통약 등의 다양한 약에 동일한 진통제 성분(아세트아미노펜)이 들어있다. 모르고 함께 복용하면 아세트아미노펜 과잉으로 간독성 부작용을 겪을 위험이 커진다.
감기약 하나만 해도 알아두어야 할 지식이 이렇게 많다. 복잡한 내용을 어떻게 다 기억할까 고민될 수 있다. 하지만 명쾌한 해결책이 있다. 나만의 단골 약국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앓고 있는 질환, 먹고 있는 처방약, 비처방약의 종류, 부작용, 복용 방법 등을 세부적으로 아는 약사와 상담한다면 감기약을 먹는 게 나을지, 안 먹는 게 나을지, 복용한다면 어떤 약을 선택하는 게 좋을지 현명한 선택이 가능하다.
2018-10-24 09:40 |
[약사·약국] <19> 혼동치 말아야 할 포도와 자몽 이야기
약에 대한 잘못된 정보 중에서도 유독 잘 사라지지 않고 계속 돌고 도는 이야기가 포도와 음식의 상호작용이다. 포도 또는 포도주스와 약을 함께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불량 지식이 왜 대한민국에서 계속 회자되는 것일까? 번역 오류 때문이다.
자몽은 포르투갈에서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생각되는 단어이다.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용어자료집(1997)에서는 자몽을 일본어투 생활 용어로 간주하여 그레이프푸르트로 사용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7음절에 영어단어 그대로와 다를 바 없는 그레이프프루트를 실생활에서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전히 자몽을 많이 쓴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기는데, 그레이프프루트라는 말과 생소하다보니 이 단어를 보면 grape fruit, 즉 포도와 과일을 붙여써야 하는 걸 띄워쓴 걸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하는 사람이 종종 나오는 것이다. 영어자료를 읽다가 grapefruit이 나오면 포도 과일로 생각하고는, ‘아하 포도에 대한 이야기구나’라고 짐작하는 식이다.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킨 원죄는 영어권 화자들에게 있다. 그들이 애초에 자몽을 영어로 Grapefruit로 부른 게 자몽과 포도가 닮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에서 하나하나 떼어 마트에 진열된 자몽에서는 포도와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자몽을 멀리서 보면 과일 여러 개가 나무에 달린 모습이 마치 포도송이처럼 보인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그레이프프루트이다. 이름의 유래는 이해할만한데 문제는 이게 헷갈린다는 거다.
영어로 된 자료를 번역하다보면 누군가는 Grapefruit를 포도로 착각하여 옮기는 사람이 나오고 그러다보니 약과 음식의 상호작용에 대한 글 중에는 자몽과 약의 상호작용을 포도와 약의 상호작용으로 잘못 쓴 것들이 종종 눈에 띈다.
면역억제제 타크로리무스 예전 약 사용설명서에는 이 약을 투여받는 동안 포도주스를 먹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있었다. 다행히 최근에는 포도주스가 아니라 자몽주스로 정정되었지만 아직도 인터넷에는 예전 버전의 복약정보가 돌아다닌다.
식약처마저 가끔 잘못된 자료를 내놓는다. 포도주스를 고지혈증약(스타틴 계열), 고혈압약(칼슘 채널 차단제)와 함께 복용하면 부작용 위험이 커진다는 것이다. 물론 번역 오류다. 포도주스가 아니라 자몽주스의 상호작용이다.
식약처에서 2011년에 발간한 자료집 <약물의 효능에 영향을 미치는 과일주스>에는 제대로 나와있다. “포도주스가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인 플루비프로펜의 CYP2C9을 통한 대사를 저해한다는 일부 연구결과들이 보고되고 있으나, 인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에서 인지할만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보고는 없으며, 국내 의약품 허가사항에서 포도주스와의 병용투여에 대한 규제사항이 현재까지는 없다.” 정확한 설명이다.
포도주스도 드물게 약과 상호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도나 종류면에서 비교적 가벼운 수준이다. 나는 캐나다에서 약사로 일하는 동안 한번도 포도주스와 약의 상호작용에 대해 환자에게 주의를 준 적이 없고, 다른 약사가 그렇게 설명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몽주스에 대해서는 자주 이야기한다.
자몽 또는 자몽주스는 일부 약과 심각한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자몽 주스 속 나린긴, 나린게닌과 같은 플라보노이느 성분이 장에서 약물분해효소인 CYP3A4를 억제하여 약의 혈중 농도를 높이며, 이런 효과는 주스를 마시고 나서도 72시간까지 지속된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기 위해 일부 스타틴 계열의 약을 복용 중이거나 고혈압 때문에 일부 칼슘 채널 차단약을 복용 중일 때는 자몽이나 자몽주스를 피하는 게 좋다. 이런 권고사항을 무시하고 자몽주스를 과하게 마셨다가는 스타틴으로 인한 근육 독성과 같은 약의 부작용이 크게 증가할 수 있다.
참고로, 다른 과일 중에서는 라임, 포멜로의 경우도 주의가 필요하지만, 포도, 레몬, 크렌베리에는 임상적으로 유의할 만한 CYP3A4 관련 약물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없다.
반대로 펙소페나딘과 같은 일부 항히스타민제는 자몽주스 또는 오렌지주스로 인해 흡수가 저해되어 약효가 떨어질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끝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이 모든 이야기는 포도가 아니라 자몽 즉 그레이프프루트에 대한 것이다.
2018-10-10 09:40 |
[약사·약국] <18> 코 세척 제대로 하는 법
코를 세척하는 사람 수가 부쩍 늘고 있다. 연예인들이 코 세척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TV에 여러 차례 방송된 덕분이다. 한쪽에서 얻은 인지도와 권위가 전혀 무관한 다른 분야로 확산하는 현상이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자신에게 친숙한 것을 선호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를 탓하기만 할 수도 없다. 약사 입장에서야 이런 대중적 유행을 기회로 삼아 코를 제대로 세척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설명하는 게 더 건설적이다.
먼저 코 세척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대답은 ‘그렇다’이다. 여름엔 더워서 고생이라면 가을부터는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비강 점막을 자극하는 게 또 다른 고통이다. 콧속에서 점액이 수분을 잃어 딱딱하게 굳고 끈끈해질 때 느껴지는 뻑뻑함과 은근한 통증은 그야말로 환절기 짜증유발자다.
이럴 때는 사실 식염수를 콧속에 뿌려주기만 해도, 비강 점막을 촉촉하게 하여 자극감, 건조감을 줄여주고 코막힘, 콧물, 재채기 등의 비염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네티 팟(neti pot)이나 주사기와 같은 기구를 이용하여 콧속을 세척해주면 비강에서 딱딱하게 말라붙은 점액을 제거하고 끈끈한 점액에 수분을 더해주어 섬모에 의한 청소를 쉽게 해준다. 또한 알레르기의 원인이 되는 항원물질을 씻어내어 비염 증상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다.
비강을 세척할 때는 멸균생리식염수처럼 우리 몸의 체액 농도와 동일하게 맞추어진 용액을 쓰는 게 좋다. 맹물 대신 소금물을 쓰는 이유가 살균을 위한 것은 아니다. 0.9% 정도의 소금으로는 살균은커녕 세균 번식을 막기도 어렵다.
체액에 농도를 맞춘 생리식염수를 쓰는 건 순전히 자극을 줄이기 위함이다. 콧속에 들어가면 맹물이 훨씬 더 자극적이다. 수영장에서 코에 물 들어간 경험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코가 심하게 막혔을 때는 생리식염수보다 고농도의 소금물을 써야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
약국에서 3% 농도로 맞춘 비강분무액(일반의약품)을 구해 쓸 수도 있고 또는 코 세척기에 넣는 물의 용량은 그대로 두고 코세척 전용분말을 2-3팩 넣어 농도를 진하게 해줘도 된다.
미리 제조된 멸균생리식염수를 사다 써도 되지만 자원절약과 환경보호를 생각하면 깨끗한 물에 분말을 타서 만들어 쓰는 게 낫다. 마실 수 있는 물이라고 코 세척을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위장으로 들어간 물은 위산에 의한 살균을 거치지만 코로 들어간 물이 미생물에 오염될 경우는 그런 방어 장치를 거치지 않아 매우 위험하다.
2011년 미국 루이지애나에서 오염된 수돗물로 코 세척을 했다가 아메바 감염으로 2명이 사망하여 충격을 줬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미국 FDA는 3-5분 끓여서 미지근하게 식혀 쓰거나 또는 깨끗한 용기에 24시간까지 보관하여 쓰도록 권장한다.
물론 수돗물 품질관리가 확실한 지역에서는 수돗물을 써도 무방하고, 중공사막, 역삼투압 방식으로 정수된 물이나 끓였다가 식힌 물을 쓰는 것도 좋다. 같은 이유로 코 세척 용액을 만들 때도 넣는 분말도 그냥 식용소금이 아니라 멸균 처리된 전용분말을 써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코 세척액에 사용되는 농도의 소금으로는 미생물 오염이나 번식을 막을 수 없다. 코 세척액을 한 번에 만들어두고 나눠 쓰는 건 물론이고 약국에서 구입한 멸균생리식염수를 오래 두고 쓰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한다. 끝으로, 기구가 오염되어도 미생물 감염 위험이 있으므로 사용 뒤에는 항상 기구를 깨끗한 물로 세척한 뒤 건조한 상태로 보관해야 한다.
코 세척액이 심각한 부작용을 끼치는 경우는 드물다. 가볍게 따끔거리거나 화끈거리는 정도다. 너무 자주 쓰면 자극감이 심해질 수 있으니 아무리 시원하더라도 하루에 한두 번 정도로 사용을 제한하는 게 좋다.
또한 평소에 사용할 때는 고개를 어깨 쪽으로 눕혀서 위쪽 콧구멍에서 아래쪽 콧구멍으로 세척액이 흘러내리는 방식으로 사용하여야 액체가 입안으로 흘러들어오거나 사레들리는 걸 방지할 수 있다.
너무 차갑거나 너무 뜨거운 물은 자극이 심하고 비강 점막 손상 위험이 있으니 상온 또는 미지근한 물을 사용하는 게 좋다. 코 세척 하나로도 이렇게 할 이야기가 많다니, 약사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수다스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2018-09-19 09:40 |
[약사·약국] <17> 술 마신 뒤 타이레놀 정말 안될까
술 마신 뒤 타이레놀은 절대 안 된다는 말은 사실일까? 당연히 그렇다고 믿어왔다면 글을 끝까지 읽어보자. 먼저 정답부터 공개하면 사실이 아니다. 술 마신 뒤 타이레놀을 먹어도 될 때가 있고, 약 복용을 피해야 할 때가 있다.
술을 얼마나 마시느냐, 마신 뒤 어느 시점에 약을 복용하느냐, 술을 얼마나 자주 마시느냐, 타이레놀을 얼마나 자주 복용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아세트아미노펜이라는 성분명보다 타이레놀이란 상품명에 익숙한 분들을 위해 글에서 상품명을 쓰기로 한다.)
이야기는 복잡하다. 타이레놀은 간에서 크게 두 가지 경로를 거쳐 대사, 배설된다. 약이 대사된다고 하면 어렵게 느낄 수 있지만, 쉽게 말하면 간에서 약을 청소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타이레놀은 글루쿠론산이나 황산처럼 물에 잘 녹는 물질에 결합시켜(conjugation) 소변으로 내보내거나 또는 간의 대사효소(CYP2E1)에 의해 산화시킨 다음 글루타치온을 붙여 내보낸다.
문제는 이때 산화반응으로 만들어지는 NAPQI(N-acetyl-p-benzoquinoneimine)라는 물질이 강한 독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다행히 건강한 성인이 타이레놀을 하루 최대 복용량인 4000mg 이하로 복용할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95%)이 무해한 글루쿠론산, 황산 결합형으로 배설된다.
하지만 나머지 소량은 들어온 그대로 빠져나가거나 독성물질인 NAPQI로 변하는 단계를 거친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은 간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니 대사효소가 더 많이 만들어지는데 이런 상황에서 타이레놀을 복용하면 이로 인해 독성물질도 더 많이 만들어진다. 하루 세 잔 이상 술을 마시는 만성 음주자의 경우 특히 위험하다.
그런데 술을 마신 직후에 타이레놀을 복용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때는 반대로 독성물질이 더 적게 생성된다. 타이레놀과 알코올이 간의 대사효소를 두고 경쟁할 때 간 대사효소의 선택을 받는 것은 주로 알코올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간이 알코올 해독에 바빠 타이레놀은 거들떠보지 않는 셈이다. 술 마신 직후 타이레놀 복용은 괜찮을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술 마신 다음날 머리가 아프다고 두통약을 찾을 때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알코올을 제거하고 난 뒤에도 간 대사효소는 증가된 상태를 잠시 유지한다. 이때 타이레놀이 들어오면 독성물질이 평소보다 더 많이 생긴다.
술이 깨고 나서 18-24시간 동안은 이러한 일시적 독성물질 증가가 계속된다. 개인 차가 있지만 평균적으로 소주 한 잔을 마시면 깨는 데 1시간이 걸린다고 할 때, 소주 3잔을 마시고 3-4시간이 지난 시점부터 하루 동안은 타이레놀 복용시 독성물질이 더 많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루 3잔 이상 술 마시는 사람에게 타이레놀을 피하도록 권하는 이유다. 다른 두통약도 쓰기 곤란한 건 마찬가지다. 하루 3잔 이상 술을 마실 경우 아스피린을 비롯한 소염진통제를 복용하면 위장관 출혈과 같은 부작용 위험이 높아진다. 약을 복용 중일 때는 알코올 섭취를 최소화하는 게 최선이다. 몸이 약에 집중하도록 하자.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는 불평도 나올 수 있다. ‘술 마시고 타이레놀 먹어도 되나요’는 짧은 질문이지만 답은 이렇게 길고 복잡하다. 약국에서 이 모든 걸 설명할 시간적 여유도 없지만 이 모든 세부사항을 포함하여 답하는 게 반드시 유익하지도 않다.
남성의 91.3퍼센트가 술을 마셔서 이 분야 세계 7위인 나라에서는 술과 타이레놀은 함께 하면 안 된다는 간결한 설명이 훨씬 효과적이다. 술 마신 다음날 어쩌다 한 번 두통약 한두 알을 복용하는 건 몰라도, 그런 일을 자주 반복하거나 심지어 음주 뒤에 습관적으로 타이레놀을 복용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술과 타이레놀은 멀리 두는 게 안전하다.
대다수가 타이레놀이란 상품명에만 익숙하고 아세트아미노펜이란 성분명을 잘 모르는 것도 문제다. 아세트아미노펜은 타이레놀에만 들어있는 성분이 아니다. 종합감기약에도 들어있고, 근육통약에도 근육이완제와 함께 들어있으며, 배 아플 때 먹는 약에도 진경제와 함께 아세트아미노펜이 들어있다. 나도 모르게 복용하는 아세트아미노펜의 양이 합하면 하루 최대량인 4000mg을 넘어가기 쉬워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친숙한 약일수록 더 잘 알아둬야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2018-09-05 09:40 |
[약사·약국] <16> 알고보면 할 말이 많은 제산제 이야기
제산제는 알고 보면 가장 오래된 약이다. 6000년 전에 이미 수메르인이 우유, 페퍼민트잎, 탄산염을 소화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중 탄산염, 즉 탄산수소나트륨(베이킹 소다)이 바로 제산제 성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위산 과다로 인한 소화불량 증상을 겪는 사람은 많았나보다.
나트륨 과잉 섭취에 민감한 요즘에 와서는 베이킹 소다를 제산제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북미에는 아직도 소화불량에 베이킹 소다를 사용하는 집이 꽤 있다. 하지만 베이킹 소다를 제산제 대용으로 사용하는 게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드물긴 하지만 과식 뒤에 베이킹 소다를 삼키면 위산과 반응하여 생겨나는 이산화탄소 가스로 인해 위장이 부풀어올라 터져버릴 수 있다.
(1979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지의 편집장 윌리엄 그레이브스가 이로 인해 죽을 뻔했다가 7번의 수술 끝에 살아남은 사건이 유명하다. 이후 1983년부터 베이킹 소다에 과식으로 배가 꽉 찼을 때는 섭취를 금하는 경고문이 붙었다.)
제산제가 지금처럼 약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건 19세기에 이르러서다. 1809년 북아일랜드의 의사 제임스 머레이 경이 수산화마그네슘 성분 제산제를 처음 발명하여 치료에 사용했다. 하지만 제산제의 발명가로 세간에 더 잘 알려진 사람은 1873년 미국에서 수산화마그네슘 제산제 특허를 받아 판매한 약사 찰스 헨리 필립스이다.
우유빛깔 액체에 걸맞는 밀크 오브 마그네시아라는 이름을 붙여 그가 시장에 내놓은 액상형 제산제는 공전의 히트 상품이 되었고, 회사는 바뀌었지만 지금까지도 북미에서 같은 이름으로 판매 중이다.
제산제는 역사가 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흔히 사용하는 약이다. 하지만 제산제가 정확히 어떤 약이며, 어떻게 사용해야 최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제산제는 위산을 중화하여 속쓰림과 소화불량 증상을 경감시켜주는 약이다.
위산과다로 인한 문제가 있을 때 사용되는 다른 약들(PPI, H2 차단제)은 위산의 분비를 줄여주지만 제산제는 이미 분비된 위산과 직접 반응해서 효과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제산제는 불이 나지 않게 막아주는 약이 아니라 이미 나버린 불을 꺼주는 약이다.
제산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굳이 알고 먹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이다. 약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나면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공복에 제산제를 복용하면 효과가 금방 사라진다. 제산제는 위산과 맞닥뜨려 효과를 나타내는 약이므로 위 안에 머무르는 동안에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식후에는 음식이 소화를 위해 위장에 오래 머문다. 음식과 함께 제산제도 천천히 내려가므로, 제산제의 효과가 더 오래 지속된다. 식후 1시간 이내에 복용하면 제산제의 효과가 3시간까지 지속된다. (공복에 속이 쓰릴 때는 어떡하냐고? 그때는 제산제가 아니라 밥을 먹어야 한다. 빈속에 속이 쓰리다는 건 배고프단 이야기다.)
술 마시기 전에 제산제를 미리 먹으면 덜 취한다는 이야기도 잘못된 음주 상식이다. 제산제는 위벽에 코팅을 해주는 약이 아니라 위산과 직접 반응해서 중화시키는 약이다. 게다가 제산제를 음주 전에 미리 먹으면 장으로 금방 내려가 버린다. 술 마신 다음날 쓰린 속을 가라앉히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술 마시기 전에 미리 제산제를 복용해서는 아무 효과가 없다.
건강한 성인이라면 제산제 속 알루미늄 성분이 체내로 흡수될까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제산제는 전신으로 흡수되는 비율이 낮다. 제산제 속 칼슘은 90%가 그대로 빠져나가고, 나머지 10%가 전신에 흡수된다.
마그네슘은 15~30%, 알루미늄은 17~30%가 흡수되지만 이마저도 신장으로 배출된다. 신장기능이 정상인 사람에게 제산제 때문에 알루미늄이 축적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신부전 또는 신장기능이 저하된 사람은 제산제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약을 고를 때에도 약사와 상담하는 게 안전하다.
제산제와 약물 상호작용으로 악명 높은 약이기도 하다. 제산제가 다른 약성분의 흡수를 방해하는 경우, 복용 간격을 최소 2시간 이상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2주 동안 지속적으로 약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속쓰림 또는 소화불량이 증상이 지속되는 경우에는 의사와 상담해야 한다. 친숙한 약일수록 우리가 잘 모르는 알아두면 유용한 지식이 참 많다.
2018-08-22 09:40 |
[약사·약국] <15> 혈압약 불순물 사태 뒤돌아보기
지난 7월 초 떠들썩했던 뉴스의 헤드라인을 다시 보자. 중국 원료의약품 제조사인 제지앙 화하이에서 공급한 발사르탄 혈압약 성분에 불순물이 검출되어 유럽의약품청(EMA)이 검토 중이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 성분이 함유된 혈압약을 리콜중이다. 유럽의약품청이 내놓은 보도 자료의 첫머리에 발암물질이란 말은 없다. 식약처에서 낸 보도자료 제목도 비슷하다. “식약처, 불순물 함유 우려 고혈압 치료제 잠정 판매 중지”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아야 하는 매체들의 관점에서 불순물이라는 단어는 수위가 약하다. 최대한 충격적인 표현을 헤드라인으로 끌어내는 게 좋다. 결국 불순물 혈압약이라는 말 대신 ‘발암물질’ 혈압약이 뉴스를 뒤덮었다. 사실 자체는 틀림이 없다. 제지앙화하이의 발표에 따르면 발사르탄 원료의약품 제조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N-니트로소디메틸아민(NDMA)이란 불순물이 생성됐다. NDMA는 2A군 발암물질이 맞다. 그런데 막상 유럽 의약청에서 7월 5일 처음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환자들에게 “다음번에 처방약을 타러 가면 약이 다른 발사르탄 의약품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캐나다에서는 7월 10일, 미국에서는 7월 13일에 해당 불순물 함유 제품 리콜 조치를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혈압약에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는 뉴스가 뜬 것치고는 대응이 덜 긴박해 보인다. 이유는 7월 19일 유럽의약품청에서 추가 발표한 내용에서 알 수 있다. 불순물이 발견된 항고혈압약을 복용하더라도 즉각적 위험은 없다는 것이다. 약을 복용 중이던 사람이 갑자기 약을 끊으면 겪게 될 위험이 훨씬 더 크다. 심장 발작이나 뇌졸중을 겪은 뒤에 재발 방지를 위해 약을 복용 중인 사람들이 약을 임의로 중단하는 것은 특히 위험하다. 각국 정부에서 문제의 처방약을 스스로 끊지 말고 우선 병의원이나 약국을 방문하도록 권고한 이유다. 이번에 검출된 NDMA 자체는 생활상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물질이다. 수돗물 염소 소독 과정에서 생성될 수도 있고, 햄, 소시지와 같은 가공육, 염장생선이나 젓갈에도 들어있다. 맥주, 위스키처럼 몰트를 써서 만든 주류에서도 검출되고, 김치에도 들어있다. 음식 속의 알킬아민이 위산과 반응하여 NDMA를 형성하기도 한다. 고농도로 노출되면 발암 위험이 있으나 일상에서 우리가 접하게 되는 NDMA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양이다. 식품 속 NDMA의 함량이 이미 낮은 수준이지만 더욱 낮게 만들기 위한 저감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문제가 된 혈압약 원료 속 불순물로 검출된 NDMA의 함량이 얼마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유럽 의약청(EMA)에서 조사 중이다. 대한민국 식약처도 제지앙화하이의 발사르탄에 대해 발암 가능물질 N-니트로소디메틸아민(NDMA)의 검출량과 인체 위해성 여부를 평가·분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식약처에 불순물 분석 방법이 없다는 식의 오보가 있었지만 NDMA 성분 분석 방법에 대한 검증(validation)이 필요했을 뿐이다. 식약처는 지난 7월 18일 중앙약사심의위원회를 통해 NDMA 시험방법에 대한 검증을 완료하고 분석에 들어갔다. 그동안 해당 약을 복용한 환자들에게 어떤 영향이 있었는가에 대한 과학적 결론을 내리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보도된 내용을 참고하면, 혈압약 속 NDMA의 양은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NDMA 양에 비해 매우 적은 양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이번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 직접 연구한 결과는 없지만, 발사르탄과 같은 계열의 ARB 혈압약을 복용할 경우 암 위험이 증가하는지에 대한 14만 8334명을 대상으로 한 19건의 연구를 메타 분석한 결과 암 발병률에 위약과 차이가 없었다. 뉴스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유럽의약품청에서 내놓은 헤드라인은 정확했다. 각국 정부에서 문제의 원료를 쓴 혈압약 리콜에 들어간?것은 약에서 발견되지 말아야 할 '불순물이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들어있는 양이나 그로 인한 위해성의 정도에 관계없이, 들어있어서는 안될 불순물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었으니 리콜 조치가 필요하다. 실제 위해성을 크게 우려해서라기보다 장기적으로 불필요한 노출을 막기 위한 예방적 조치이다. 그렇다. 건강 뉴스는 헤드라인만 읽지 말고 본문을 읽어야, 기왕이면 제대로 쓴 기사를 읽어야 유익하다. 사실 모든 뉴스가 그렇다.
2018-08-08 09:29 |
[약사·약국] <14> 냄새나는 약 메트포르민 이야기
냄새 때문에 입에 넣기 힘들었던 알약을 떠올려보자. 우선 생각나는 건 비타민이다. 종합비타민제나 비타민B 컴플렉스에는 티아민, 즉 비타민B1이 들어있는데, 화학 구조상 황이 들어있어서 특유의 불쾌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냄새에 관한 한 티아민보다 더 악명 높은 약은 2형 당뇨병 환자의 치료에 흔히 사용되는 메트포르민(metformin)이다. 이 약이 악취가 심해 많은 환자들이 복용을 주저하거나 중단하는 경우가 있다.
2010년 2월 의사와 약사가 공동으로 참여한 연구 보고가 내과 전문저널인 ‘Annals of Internal Medicine’에 실렸다. 메트포르민의 악취가 해당 치료제의 빈번한 부작용으로 알려진 메스꺼움(nauseated)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이었다. 연구진은 환자들이 메트포르민에 대해 왜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 했으나 이와 관련된 연구 보고서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지금까지 많은 환자들이 메트포르민이 그들을 메스껍게 한다는 점을 느꼈을 것이나 당연한 반응 혹은 개인차로 치부해 간과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메트포르민이 일부 환자들에 생선 비린내와 땀에 쩔은 양말 냄새 같은 악취를 풍겨 보통 식후 바로 복용하는 환자들을 괴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보고서의 저자 앨런 펠레티에는 메트포르민의 독특한 악취가 환자들이 복용을 중단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으므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서방정 제제로 메트포르민을 별 문제 없이 여러 해 동안 복용한 성인 당뇨 환자가 속방정으로 제형을 교체하자마자 복용을 중단한 경우를 예로 들었다.
펠레티에는 “속방성 제제가 생선 썩은 냄새를 풍겨 환자를 메스껍게 만들었다”고 강조하고 서서히 용해되는 서방정의 경우 코팅이 되어 있으므로 냄새 문제가 덜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메트포르민의 암모니아 비슷한 냄새는 약성분 자체로 인한 것이므로, 냄새를 덮을 수는 있어도 제거할 수는 없다. 비슷한 다른 예로 고혈압이나 심장기능부전에 사용되는 이뇨제 스피로노락톤에서도 박하 또는 민트 같은 냄새가 난다.
항고혈압약 딜티아젬에서는 플라스틱 같은 냄새가 나고, 페니실린과 세팔로스포린 계열의 항생제에서도 유황 냄새가 난다. 그중에서도 악명 높은 세팔렉신의 경우 달걀 썩는 냄새가 아주 고약하다. 사이클로스포린 같은 면역억제제도 불쾌한 냄새가 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런 냄새가 약성분 자체의 화학구조로 인한 것이므로, 약효와는 관계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펠레티에가 사례로 든 환자의 경우처럼 냄새 때문에 환자가 약 복용을 중단하면 문제가 된다.
메트포르민의 악취에 대한 환자들의 반응을 더 깊이 있게 연구한 후속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메트포르민은 냄새 때문에 복용을 포기하기에는 장점이 많은 약이다. 메트포르민은 인슐린 감수성을 높이며 간에서 포도당이 과다하게 생합성되는 것을 막아 혈당을 떨어뜨린다. 또한 근육에서 포도당 흡수 및 이용을 늘려준다.
메트포르민은 인슐린 분비를 촉진시키지 않으며 저혈당과 체중 증가와 같은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는 면에서도 설포닐우레아와 같은 다른 경구용 혈당강하제보다 낫다고 볼 수 있다. 메트포르민은 지방산의 산화를 억제하고 혈액 내 지방(TG)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감소시킨다. 메트포르민이 비만이나 대사 증후군이 동반된 당뇨병의 경우에 1차 선택약으로 사용되는 이유다. 흥미롭게도 메트포르민이 암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어서 이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다수의 연구에서 2형 당뇨 환자는 다양한 암(간, 췌장, 자궁내막, 대장, 직장, 유방, 방광암) 발생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메트포르민을 장기 복용한 당뇨 환자를 추적한 연구에서 암 발생률과 암으로 인한 사망률 감소가 관찰됐다.
하지만 아직 무작위 임상시험에서 인과 관계가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메트포르민에 정말 암의 예방 또는 치료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다양한 연구가 현재 진행 중이다.
염증과 산화 손상을 줄이고 칼로리 제한 다이어트 비슷한 효과를 나타내는 메트포르민에 실제 수명 연장 효과가 있을지도 관심의 초점이다. 장수나 암 예방을 목적으로 이 약을 복용해야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로 효과가 분명하게 증명된 연구 결과는 아직 없지만, 냄새 때문에 약을 포기하려던 당뇨환자들에게는 용기를 줄만한 상황인 셈이다.
2018-07-18 09:40 |
[약사·약국] <13> 알약 쉽게 삼키는 법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약 먹을 때 제대로 삼키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알약을 삼키기란 알고 보면 만만치 않은 일이다. 뭔가를 삼킨다는 건 목과 입의 근육 25쌍이 협조적으로 움직여줘야만 가능한 복잡한 동작이다. 게다가 알약은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켜야 하니 심리적 부담이 더 크다.
2013년 유럽임상약리학지에 실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럽 성인의 37.4%가 알약과 캡슐을 삼키기 어려워하며, 전체 응답자 중 9.4%가 이로 인해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도 상황은 비슷하여, 성인의 40%가 알약 삼키기를 어려워하며 다섯 명에 한 명은 알약을 앞에 두고 약이 안 넘어가면 어쩌나 걱정에 빠져 주저한다.
어떻게 하면 알약을 더 쉽게 삼킬 수 있을까? 먼저 기억할 점 하나는 고개를 너무 뒤로 젖히지 말라는 것이다. 약을 삼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고개를 있는 힘껏 뒤로 젖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하지만 이렇게 고개를 뒤로 하면 삼키기는 더 어려워진다. 생각해보라. 밥 먹을 때 식탁에서 밥이 안 넘어간다고 고개를 뒤로 젖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나.
물을 입에 넣으려면 고개를 뒤로 해야 하지만, 입에 넣은 물과 알약을 삼킬 때는 고개를 앞으로 조금 숙이면 더 잘 넘어간다. 고개를 지나치게 뒤로 기울이면 알약이 기도로 잘못 넘어가거나 식도 점막을 뚫고 들어갈 위험성이 높아진다.
이 방법은 특히 캡슐에 효과적이다. 물보다 가벼운 캡슐은 고개를 뒤로 젖히면 치아 쪽으로 둥둥 뜨게 되므로 넘기기 힘들다. 2014년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 고개를 살짝 숙이고 캡슐을 삼키는 방법에 대해 참가자의 88.6%가 삼키기가 더 수월해졌다고 응답했다.
독일 연구진은 정제를 혀 위에 올린 다음 물병을 입에 대고 물을 쭉 빨아들이면서 알약을 동시에 삼키는 방법도 실험했다. 이 경우에도 참가자에서 59.7%가 목넘김이 수월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때 타이밍을 제대로 못 맞추거나 고개를 너무 뒤로 젖히면 알약이 목에 걸려 위험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알약을 입에 넣기 전 물 한 두 모금으로 입안과 목을 적셔주면 더 부드럽게 삼킬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알약을 혀에 미리 올려둘 때는 앞쪽 가운데 부분에 두면 넘기기 좋다. 알약이 혀 안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면 구역질이 날 수 있어서 주의해야 한다.
이에 더해 영국 국가보건서비스(NHS)는 알약보다 작은 크기의 젤리나 사탕으로 삼키는 동작을 연습해보거나 알약을 요거트나 과일 퓨레와 함께 먹는 방법도 도움이 된다고 추천한다. 일반 정제라면 깨물어 먹거나 부숴 먹는 것도 무방하지만, 서방형 제제나 장용정처럼 특수하게 설계된 알약은 반드시 그대로 삼켜야 한다.
약사와 상담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한편 평소에 약을 잘 삼키던 사람이 갑자기 알약 복용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반드시 원인을 체크해보아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연하곤란을 경험하기도 하며, 뇌졸중, 치매, 파킨슨병과 같은 질환으로 인해 알약뿐만 아니라 음식을 삼키는 데도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물을 충분히 마시는 것도 중요하다. 알약이 멈추지 않고 얼른 위까지 전달되게 하려면 물을 200ml 이상 쭈욱 마셔야 한다. 뜨거운 물은 곤란하다. 입으로 호호 불면서 조금씩 마시는 물로는 알약을 시원하게 내려 보내기 어렵고 약이 중도에 멈춰 설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너무 차가운 물도 피하는 게 좋다.
약 때문에 평소보다 물을 더 많이 마셔야 할 때도 있다. 약사가 특정한 약을 복용 중에 물을 많이 마시라고 당신에게 권고한다면, 그건 하루 6-8잔 정도의 물을 마시라는 의미이다. 물론 물 여덟 잔을 단번에 마시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루 중 여러 번에 나누어 마시면 된다.
항생제와 같은 일부 약 성분이 소변으로 빠져 나갈 때 결정을 만들어 통증을 유발하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다. 물을 많이 마시면 소변양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소변 중 약성분이 희석되어 요로에서 이들 약이 결정으로 굳는 걸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
약 먹고 물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약효가 줄어들거나 약효 지속시간이 줄어들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소변에서 희석될 뿐 약의 혈중 농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물 한 잔에 알약을 삼키는 데도 이렇게 할 말이 많다. 알쓸신약 이야기는 계속된다.
2018-07-04 09:40 |
[약사·약국] <12> 새로운 감기 치료 물질
지난 5월 중순 ‘역사상 첫 감기치료제가 나올지도 모른다’, ‘감기 완치 기술이 나왔다’는 놀라운 소식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신약에 대한 많은 뉴스가 그렇듯, 과장된 감이 없지 않았다. 관련 연구결과를 실은 논문이 네이처 화학이라는 학술지에 발표되긴 했지만 아직 신약이라기보다는 기초연구 단계의 신물질에 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감기약과는 다른 식으로 작용하는 물질의 발견이란 면에서 주목할 만했다.
감기는 약 먹으면 일주일, 안 먹으면 7일 간다는 말처럼 현존하는 감기약은 모두 증상을 완화하는 대증요법에 불과하다. 감기의 원인이 바이러스를 퇴치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된 신물질은 감기 바이러스가 증식하는 걸 막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화제가 된 것이다.
약국에서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가 감기 원인 치료약은 왜 없냐는 거다. 답은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종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200종이 넘는 변종이 있다. 감기환자 전체의 30-50%에서 발견되는 리노바이러스만 해도 혈청형(serotype)이 100가지가 넘는다. 이렇게 다양한 바이러스에 대해 일일이 백신을 만들 수도 없는 데다 변이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어려움이 가중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대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는 인체 세포 내에 있는 물질을 이용해서 바이러스를 막으려고 시도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영국 임페리얼 컬리지 연구팀에서 이번에 발표한 실험 결과도, 감기 바이러스가 인간의 체내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증식하는 데 이용하는 인간 세포 안의 단백질 N-미리스토일트랜스페라제(NMT)를 표적으로 하는 신물질(IMP-1088)에 대한 것이었다.
감기 바이러스는 자체 공장을 운영하는 대신에 숙주 인체 세포의 NMT라는 효소를 납치하여 자신의 단백질 피각(capsid)을 만들어낸다. 감기 바이러스의 주류를 이루는 리노바이러스를 포함하여 피코르나바이러스과에 속하는 바이러스는 공통적으로 NMT를 납치하여 이용한다. 때문에 IMP-1088은 다양한 리노바이러스 변종에 효과가 있다.
이 신물질의 개발과정도 흥미롭다. 원래 IMP-1088은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연구되고 있었다. 처음부터 신물질을 합성하기보다는 이미 찾아둔 말라리아 원충 속 NMT 효소를 억제하는 물질을 비슷한 구조를 가진 인체세포 속 NMT 효소를 막는 용도로 변형시키는 더 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연구진은 원래의 물질보다 효력이 1000배 이상 강하여 적은 양으로도 바이러스 증식을 억제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신물질을 개발했다.
감기 바이러스 자체 대신 바이러스가 이용하는 숙주 인간 세포를 표적으로 하는 치료제는 전에도 개발을 시도한 바 있지만 대부분 인체에 해를 끼치는 부작용 문제로 인해 실패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IMP-1088은 인간 세포를 대상으로 진행한 시험관 실험에서 사람 세포에 대한 독성 없이 항바이러스 효과를 나타냈다. 바이러스가 아닌 인체 세포의 효소를 표적으로 한 덕분에 내성 문제도 피해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신물질의 단점은 아직 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구는 아직 초기단계이며 이제 겨우 실험실에서 배양세포를 대상으로 연구한 단계에서는 인체에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임상 시험에서 효과가 입증될 수 있을 것인가는 더 큰 장벽이다.
2000년대 초반 감기치료 항바이러스 신약으로 기대를 불러모았던 루핀트리버와 피코버가 임상시험에서 효과를 입증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을 떠올려봐도 갈 길이 멀다. IMP-1088 역시, 감기 바이러스 감염 후 3시간 이내에 신속하게 투여할수록 효과가 커서 스프레이 형태로 연구 개발 중이지만 실제 임상시험에 들어갈 수 있을지, 감기치료 효과를 입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성공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IMP-1088이 이 모든 장벽을 넘어 감기치료 신약으로 개발에 성공한다면, 옆에서 자꾸 재채기하는 감기환자 때문에 불안한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될 듯하다.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에만 기대기보다는 지금 가능한 예방 방법을 사용하는 게 현명한 태도일 거다.
비록 감기를 뿌리 뽑는 약은 아직 없지만, 수시로 손을 씻고, 감기에 걸리면 가급적 집에서 쉬고, 재채기할 때는 사람이 없는 쪽으로 팔이나 옷소매에 대고 기침하는 걸 습관으로만 해도 어느 정도 예방이 가능하다. 틈만 나면 약국에서 떠들고 싶은 이야기다.
2018-06-20 09:40 |
[약사·약국] <11> 새로운 편두통 약 이야기
지난 5월 17일에 미국 FDA에서 편두통 치료가 아니라 예방에 효과가 있는 예방약, 에레누맙을 최초로 승인했다. 편두통이 사회적 비용이 워낙 큰 질환이고 이제껏 미국에서 편두통 예방 용도로 승인된 약이 없었기에 세계적으로 큰 뉴스였다.
편두통 유병률은 국내 성인 인구의 6%, 세계적으로는 이보다 높은 12-14%으로 환자 수가 많은데다가 사회적 비용이 큰 질환이다. 통증 자체도 긴장성 두통보다 훨씬 더 심하고 메스꺼움, 구토, 현기증 등의 증상이 함께 나타난다. 업무와 일상 활동을 제대로 이어나가기 어렵다.
이로 인한 비용이 미국에서만 14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편두통 예방약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모두 허가 사항 외 사용(off-label use)이었고, 여러 나라에서 승인 사용해온 피조티펜 같은 약에는 졸음, 체중 증가와 같은 부작용이 심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번에 미국FDA에서 승인된 에레누맙은 처음부터 편두통 예방을 목적으로 개발한 약이며, 기존 약과 비교하여 알려진 부작용이 경미한 편이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비용이 상당하다.
아직 국내 승인과 출시는 기다려봐야겠지만, 미국에서 약값이 1년에 미화6,900달러, 원화로 740만원 정도 든다. 이렇게 고가인 것은 이 약이 단일클론항체로 만들어진 바이오의약품이기 때문이다. 펜처럼 생긴 피하주사 장치로 인슐린을 주사하듯 환자 본인이 위팔, 복부, 대퇴부 등의 부위에 한 달에 한 번 주사한다.
편두통 발생 빈도나 발생 일수를 50% 이상 줄여주면 예방약으로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는데, 6개월 동안의 임상시험에서 에레누맙 70mg 투여군, 140mg 투여군, 위약군을 비교해본 결과 편두통 일수가 매월 평균 8.3일에서 각각 3.2일, 3.7일, 1.8일씩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플라시보를 주사해도 1.8일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효과가 아주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편두통 일수에 더해 증상이 완화되거나 두통약에 대한 반응이 좋아진다는 추가적 이점이 있었고, 약이 아주 잘 듣는 경우 6개월 동안 편두통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보고도 있다. 물론, 비교적 짧은 기간에 한정된 결과이므로 장기적 예방 효과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에레누맙은 편두통 빈도를 줄여주는 약이기 때문에 두통이 생기면 치료제를 따로 복용해야 한다.
에레누맙이 효과 면에서 대단한 약은 아니지만, 주목 받는 것은 이 약이 편두통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줄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에레누맙은 편두통 발작이 시작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CGRP(칼시토닌 유전자 관련 펩타이드, calcitonin gene-related peptide) 수용체를 차단하는 항체이다. 수용체가 아닌 CGRP 자체를 표적으로 하여 그 작용을 막는 프레마네주맙, 갈카네주맙도 편두통 예방약으로 개발되어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1985년부터 여러 연구를 통해 편두통 환자의 CGRP 수치가 상승했다가 수마트립탄과 같은 편두통약으로 증상이 가라앉으면 다시 정상수준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CGRP를 표적으로 하는 편두통 예방약의 개발로 이어졌다. 하지만 에레누맙이 승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들 약이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에레누맙은 뇌-혈관 장벽을 통과해서 들어가기엔 너무 거대한 단백질 분자(150kDa)이다. 덩치 큰 단일클론항체가 뇌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게 많은 연구자들이 편두통약으로서 CGRP차단항체 개발을 포기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아주 적은 양이라도 항체가 뇌-혈관 장벽을 통과해서 뇌간으로 들어가야만 약효를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CGRP의 작용을 차단하는 에레누맙과 같은 약이 편두통 예방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은 뇌 바깥에서 이들 펩타이드가 삼차신경을 과잉으로 활성화하고 혈관을 확장시키는 것을 막는 것만으로도 편두통의 불씨를 꺼뜨릴 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반면 CGRP 차단제로도 편두통 예방효과가 중간 정도 밖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편두통의 발병기전이 그만큼 복잡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앞으로 CGRP를 표적으로 하는 편두통약이 늘어나고, 후속 연구가 더 많이 진행되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매우 고가인데다, 부작용에 대한 자료 축적이 필요한 신약이서 모든 사람을 위한 약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약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약임에는 분명하다. 공부하자.
2018-06-06 09:40 |
[약사·약국] <10> 공부 잘하는 약 논쟁
운동선수가 도핑테스트를 하듯 수험생도 시험을 치르기 전 약물 검사를 받아야 할 시대가 올 것인가? 농담 같지만 곧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2008년 1월 과학저널 네이처에서 전세계 60개국 1,400명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한 결과, 5명 중 1명 꼴로 질환 치료가 아니라 집중력과 기억력 향상을 목적으로 메틸페니데이트, 모나피닐, 베타차단제와 같은 약물을 복용해본 것으로 나타났다.
메틸페니데이트와 같은 중추신경흥분제에 대한 논란은 일단 뒤로 하고 최근 몇 년 사이 화제가 된 모다피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참고로, 앞서 언급한 네이처 설문조사에서 약물 유경험자의 44%가 이 약을 복용했다고 답했다.
모다피닐은 원래 낮 시간에 과다하게 졸리고, 마치 졸도하듯이 수면발작이 오는 기면증 치료에 사용되는 약이다. 몇 년 전부터 이 약이 해외 대학생들 사이에서 공부 잘하는 약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영국에서는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만 구할 수 있는 약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런 약을 복용하는 대학생의 수가 늘어나면서 학교 측에서 이러한 약물 남용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기사가 여러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모다피닐이 효과가 있긴 있는 것 같다. 24건의 최근 연구를 연구자들이 종합 분석한 결과, 모다피닐은 주의력을 향상시키고 학습과 기억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약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맥락과 상황을 파악하여 유연하게 행동하는 뇌의 ‘실행 기능’(executive function)에 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약은 뇌 속의 여러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주는데, 예를 들어 도파민 시스템에 영향을 주어서 기민성을 높일 수 있고, 노르에피네프린에 영향을 주어 집중하는 데 도움을 주고, 히스타민에 영향을 주어서 졸리지 않게 할 수 있다. 항히스타민제 복용 시 졸릴 수 있는 것과 반대가 되는 약리 작용이다.
부작용 없는 약은 없다. 모다피닐의 경우에도 여러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원래부터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경우 이 약을 먹고 나서 창의력이 도리어 낮아지는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고, 두통, 불면증, 신경이 예민해지고 짜증이 나거나 불안증, 구역감 등이 부작용으로 보고되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 졸리거나 코가 막히거나 설사를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남용 및 중독성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메틸페니데이트, 암페타민과 같은 중추신경흥분제에 비하면 모다피닐은 비교적 안전한 편으로 보인다. 특히 중독 현상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 약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가 짧은 기간 복용하는 상황만을 가정한 것으로, 장기 복용했을 경우의 위험성은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의사와 상담 없이 인터넷으로 불법 구매하여 약을 복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 경우 약 자체의 부작용도 문제가 되지만 알약 속에 실제로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다는 문제 또한 심각하다.
요즘은 정말 세계가 비슷하게 돌아간다.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압박감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도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해있다. 네이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수험생뿐만 아니라 50-60대까지 전 연령대에 걸쳐 약물 남용 비율이 비슷하게 나타난다.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지나친 경쟁을 유발하는 사회 분위기와 체계를 바꿔나가지 않고는 상황을 개선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모다피닐과 같은 약의 사용을 허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면 공정한 경쟁을 위해, 부작용을 막기 위해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인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몇 년 전, 미국에서 가난한 지역에 살고 있는 학생들에게 환경을 개선해줄 수 없으니 공부 잘하는 약이라도 처방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새로운 약이 개발되고, 기존 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머리 아프더라도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행히 그런 사회적 토론은 약의 도움 없이 가능하다.
2018-05-23 09:40 |
[약사·약국] <9> 이대로 좋은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 사람 휴대폰 화면이 살짝 눈에 들어온다. 녹색창에 약 이름을 검색 중인가보다. 인터넷으로 약에 대한 정보를 찾는 사람 수는 최소 백만 명 이상이다.
네이버 한 군데에서만도 타이레놀정 조회수가 106만 뷰, 소론도정 94만 뷰, 페니라민정이 84만 뷰에 이른다. 상위권에 든 약들은 일주일에 조회수가 5천-1만씩 늘어난다. 하지만 과연 소비자들이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약에 대한 정보는 어려운 의약학 용어로 가득한 전문가 버전뿐이다. 엄청난 양의 정보가 단순히 나열되어 있다. 타이레놀정에는 메트헤모글로빈혈증이 있을 경우, 이 약의 복용을 즉각 중지하고 의사, 치과의사, 약사와 상의하라는 지시문이 나온다.
소론도정에는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으로 ‘중심성 장액성 맥락망막증’이 등장한다. 설명을 읽으라는 말인가, 아니면 어차피 읽어도 모를 말이니 포기하라는 뜻인가. 읽는 이가 내용을 이해하느냐 마느냐에 제조사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게 정답일 것이다.
해외 의약정보 사이트에서 전문가 버전과 환자 버전을 나누어 환자용 정보에는 쉬운 말로, 보기 쉽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약 복용 뒤에 혹시라도 시력에 이상이 있을 경우 병원이나 약국에 문의하라는 설명은 있어도, 중심성 장액성 맥락망막증과 같은 난해한 부작용을 열거하진 않는다.
하지만 국내 의약정보 사이트는 일반 대중에게도 날것 그대로의 전문용어를 강요한다. 일이십 개의 부작용을 나열하고 부작용 각각마다 다시 6-7가지 세부사항을 나열하면서도 정작 환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정보의 중요도나 부작용의 빈도에 따라 가중치가 표시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인터넷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 영화, 책에 대해 찾아볼 때와 약에 대한 정보를 찾을 때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흔히 나타나는 가벼운 약 부작용으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인지, 드물지만 심각한 부작용으로 증상을 경험하는 즉시 의사, 약사에게 알려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
106만 명의 사람이 궁금해서 찾아본 타이레놀정 의약품 정보에는 정작 음식과 함께 복용해야 하는지, 음식과 관계없이 복용 가능한 약인지와 같은 기본 사항이 빠져있다.
건강정보 이해능력(health literacy)이 낮을수록 질병, 건강악화, 응급치료, 입원의 위험이 높아진다. 2015년 일본 연구팀의 발표에 따르면, 건강정보 이해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흡연, 지나친 음주, 운동 부족과 같은 해로운 습관을 가질 확률이 낮으며 따라서 건강을 유지할 가능성이 더 높다.
약도 마찬가지다. 내가 왜 이 약을 복용하는지, 약을 어떻게 복용해야 가장 효과적인지, 약의 부작용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런 경우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 알면 꾸준히 약을 복용하는데 도움이 된다. 치료 목적을 모르고, 부작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속으로 키울수록 약 복용을 제대로 하기 어렵고, 이로 인해 문제가 터질 위험은 높아진다.
숫자만 봐도 겁을 먹는 사람들도 많다. 건강 정보에 숫자만 더해져도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수가 40% 이상 증가한다. 그림, 도표, 그래프와 같은 식으로 시각화한 인포그래픽스가 인기를 끄는 시대에 약 사용 설명서만 텍스트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전문용어로 가득한 약 설명서는 치우고, 이해하기 쉬운 약 설명서로 바꿔야 할 때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금도, 제약회사들이 자사의 약을 광고하기 위해 만든 홈페이지에는 소비자들이 보기 쉽게 정리된 정보가 한가득이다.
나 하나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더 사람이 지식을 공유하고, 지식을 찾기 쉬워질수록 사회는 질적으로 변화한다. 지식의 공유는 심지어 그 사회의 패러다임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저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지식 혁명이다. 더 쉬운 상담, 더 보기 쉬운 자료로 약과 건강에 대한 정보를 대중과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아마 언젠가는 약업계의 혁명도 찾아올 것이다.
2018-05-09 09:40 |
[약사·약국] <8> 약사용과 시간
때에 맞는 말이 아름다운 것처럼, 약 사용도 시간이 중요하다. 특정 항암제를 아침에 주는 것과 저녁에 주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알아보려고, 진행성 난소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5년 동안 생존율을 비교 연구했다.
한쪽은 아침 6시에 A 항암제(독소루비신)를 투여하고 저녁 6시에 B(시스플라틴) 항암제를, 다른 쪽은 순서를 바꾸어서 B를 아침에, A를 저녁에 투여했다. 같은 약을 동일 용량으로 투여하면서 시간대별로 순서만 바꾸어 준 것이다.
그런데 아침에 A, 저녁에 B를 투여한 사람들은 5년 뒤 44%가 생존했지만, 순서를 반대로 하여 약을 준 경우는 생존율이 11%에 불과했다. 약을 먹는 시간만 다르게 했는데 커다란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독소루비신을 아침에 투여했을 때 백혈구 감소 부작용이 덜한 것과 연관된 것으로 추측된다.
아직 항암제와 투여 시간에 따른 효과 및 부작용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한 것인지는 더 많은 후속 연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특정한 약을 언제 사용하느냐에 따라 약효와 부작용에 차이가 나타나는 사례는 많다.
예를 들어, 테오필린을 함유한 천식약(유니필)은 저녁 식사 뒤에 복용하는 게 좋다. 이른 아침에 저하된 폐 기능으로 인해 천식증상이 악화될 때 약물 혈중 농도가 최고치에 이르게 되어 제때 약효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폐 기능뿐만 아니라 혈압, 혈당치도 24시간 주기적으로 변한다. 인간은 낮에 주로 먹고 활동하며, 밤에 자는 것처럼 생체시계를 따라 변화하는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을 가지고 있다. 앞서 천식의 경우를 예로 든 것처럼 질병의 증상도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에 따라 항고혈압약을 아침에 복용하는 게 유익한 경우가 있고 저녁에 복용하는 게 나은 경우가 있다.
보통 혈압을 떨어뜨리는 약은 매일 아침에 복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만성신장질환 등으로 밤중에도 떨어지지 않는 환자의 경우 고혈압치료약을 자기 전에 복용하도록 권하는 경우가 있다.
서방형 칼슘채널차단제처럼 저녁에 자기 전에 복용하여 아침녘에 최대 효과를 나타내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된 항고혈압약도 있다. 이런 약을 복약 상담할 때는 환자가 복용 시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반드시 점검해봐야 한다.
감염성 질환의 치료에 있어서도 약과 시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단순포진 바이러스 감염에 의해 생기는 구순포진(cold sore)이 자주 나타나는 경우 항바이러스제 크림을 쓰면 증상 지속기간이 0.5일 정도 단축되는데, 이 때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약을 증상 초기 1시간 내에 신속하게 발라줘야 한다.
요즘 매스컴에 화제로 자주 오르는 대상포진의 경우도 증상이 나타나고 72시간 내에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면 통증과 증상지속기간을 줄일 수 있지만 이보다 늦게 쓰면 효과가 떨어진다.
약 사용이 빠를수록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캐나다에서는 어린이 중이염에 항생제를 쓰는 경우, 나이가 2살 이상인 경우에는 48-72시간 정도 지켜보는 방법(wait and see)이 종종 사용된다.
처방을 받고 나서 잠시 기다렸다가 약을 탈 것인지 보호자가 결정하라는 것인데, 염증이 저절로 나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항생제 사용을 줄이기 위한 조치이다. 감기나 비염 증상에 무조건 처음부터 항생제를 쓰지 않고 1주일 정도 기다렸다가 증상이 계속 악화되거나 좋지 않을 때에 한하여 사용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약과 시간의 관계에 관한 한 여전히 모르는 게 더 많다. 장기간 약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특정한 약을 복용하고 나서 하루 뒤, 일주일 뒤, 한 달 뒤에 어떤 증상 변화가 나타날 수 있으며, 어떤 부작용을 경험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정보이다.
가령 금연을 계획 중인 사람이 금연보조제 복용 1, 2, 3주에 무엇을 경험할지 미리 알면 약 복용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까지 이러한 정보는 시간 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약 사용 초기에 나타나는 부작용과 장기간 사용시 나타나는 부작용, 복용 기간과 관계없이 가능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정리가 부족하다.
약 사용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환자들의 네트워크가 발전하면서 약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 있을 것인가, 미래 언젠가는 약효와 부작용에 대한 정보를 시간 순으로 정리해서 볼 수 있을 것인가. 시간만이 답을 알려줄 것이다.
2018-04-25 09:40 |
[약사·약국] <7> 역발상의 당뇨약
아껴야 잘 산다고 뭐든 버리려고 내놓으면 다시 들고 오는 사람이 있다. 우리 몸이 딱 그렇다. 인체는 당을 아주 소중히 여긴다. 신장에서 걸러서 소변에 버려지는 포도당을 남김없이 100% 재흡수한다. 이렇게 하여 버리지 않고 다시 거둬들이는 포도당이 하루에 180그램이다.
칼로리로 치면 밥 두 공기 반에 해당하는 양이다. 칼로리 과잉을 걱정하는 현대인에게는 버리고 싶은 유혹이 생길만한 분량이지만, 식량이 부족하던 과거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체가 매일 이만큼의 포도당을 소변으로 버리고 다녔다면 생존이 가능했을까 싶은 분량이다.
신장 사구체에서 걸러진 포도당은 근위 세뇨관에서 다시 재흡수된다. 이때 80-90%는 SGLT2라는 수송체 분자를 통해, 나머지 10-20%는 SGLT1를 통해 재흡수된다. 혈당이 증가하여 재흡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면 소변으로 포도당이 흘러나간다.
보통 혈당이 180-200mg/dL에 이르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문제는 당뇨병에 걸렸을 때다. 이 경우 핏속에 돌아다니는 당이 워낙 많으니까 소변으로 걸러져나가는 포도당의 양도 늘어나는데, 인체는 여기에 나쁜 방향으로 적응한다.
더 많이 버려지는 포도당을 어떻게든 다시 들고 오려고 재흡수 수송체 SGLT2를 더 많이 만들어낸다. 높은 혈당치를 낮추기 위해 어떻게든 핏속의 포도당을 덜어내면 좋으련만, 아끼는 데 익숙한 우리 몸은 어떻게든 포도당을 다시 들고 오려고 애쓰는 셈이다.
SGLT2 억제제는 인체가 소변으로 버린 당을 다시 가지고 들어오는 걸 막아서 혈당치를 떨어뜨리는 약이다. 소변 속 당의 양은 도리어 많아지니까 역발상처럼 들리지만, 췌장에서 분비하는 인슐린의 작용과 관계없이 혈당을 낮춘다는 장점이 있다.
이에 더해 체중을 감소시키고 혈압도 약간 떨어진다. 체중이 감소하는 것은 이 약을 복용하면 평소보다 소변으로 버리는 당의 양이 늘어나기 때문인데, 포도당의 양으로 치면 하루 70그램, 칼로리로 환산하면 280kcal 정도가 된다. 하루 밥 한 공기만큼을 줄이게 되는 셈으로 체중이 2-3kg 감소하지만 그 이상 줄어들진 않는다. 이에 더해 늘어난 소변 속 당으로 인해 삼투성 이뇨제와 같은 효과가 나타나 혈압도 조금 낮아진다.
신약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약 무슨 약이냐, 당장 나도 그 약을 써봐야겠다 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새로운 약일수록 임상 경험과 부작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SGLT2 억제제에는 소변량 증가와 소변횟수 증가, 생식기 진균 감염, 요로 세균 감염과 같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소변으로 배출되는 포도당이 미생물 감염 위험을 높일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드물지만 당뇨병성 케톤산혈증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이 약을 써도 별 효과를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들 약은 신장에 작용해서 효과를 나타내는 약이다보니 신장기능이 심하게 저하된 환자들에게는 효과를 나타내기 어렵다. 당뇨병환자, 특히 혈당조절이 어렵거나 심혈관질환을 동시에 가진 환자에서는 원래 감염과 궤양 위험이 높다.
그런데 SGLT2억제제 중에서도 카나글리플로진에 의한 발가락 절단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 이러한 부작용이 명확하게 약물에 의한 것인지 인과관계는 아직 분명치 않다. 다파글리플로진와 엠파글리플로진 등 다른 SGLT2억제제를 이용한 임상시험에서는 이러한 위험이 높아지지 않았다.
아직 임상 자료가 축적되지 않은 만큼, 다른 SGLT2억제제에서도 동일한 위험이 높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SGLT2 억제제의 개발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더 숨어있다. 역발상처럼 당뇨를 심하게 만들어서 당뇨병을 치료하는 이 약이 개발된 것은, 드물지만 유전적 변이로 SGLT2 수송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심한 당뇨를 경험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 덕분이다.
이들에 대한 수십 년의 추적 연구 결과 소변 속 당 배출 외에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나 합병증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를 당뇨병 치료의 타겟으로 삼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신약의 개발만큼 다양한 학문 간의 협력과 융합이 필요한 분야도 없다. 알약 하나를 삼킬 때야말로 우리가 서로 생명을 빚지고 도와가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가장 좋은 순간이다.
2018-04-11 09:40 |
[약사·약국] <6> 타이레놀서방정 퇴출의 진실
얼마 전 유럽에서 아세트아미노펜(상품명:타이레놀) 서방정의 판매가 중지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대한민국 식약처는 3월 13일자로 안전성 서한을 배포했고, 미디어에 관련 뉴스가 쏟아졌다.
대부분의 기사는 정확한 사실을 보도했지만, 팩트에 기자의 상상력을 더한 일부 기사는 대중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중에서도 편의점 타이레놀은 안전하다, 서방정은 오용 위험성이 크다는 식의 기사는 명백한 오보였다.
우선 사실만 짚어보자. 유럽집행위원회(EC)가 아세트아미노펜 함유 서방형 제제의 유익성-위해성 검토 결과, 위험성이 유익성을 상회한다고 판단하여 판매 중지를 결정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비슷한 뉴스를 여러 번 들었던 기억이 든다.
이번에 유럽집행위원회가 EU 회원국 전체에 법적 구속력을 갖는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20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2016년 6월 30일 스웨덴 독극물정보센터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했고, 2017년 9월 약물감시 위험평가 위원회(PRAC)가 문제를 검토하여 권고안을 내놓았으며, 제약회사들이 재고를 요청함에 따라 다시 한 번 문제를 조사한 뒤에 원래의 권고안을 확정한 게 지난 해 12월이었다. 이 때마다 뉴스에 아세트아미노펜 서방정에 대한 이야기가 오르내렸다.
이제 오보를 하나하나 따져보자. 일부 매체는 약효가 느리게 나타나 과잉 복용할 위험이 커서 이번에 유럽에서 서방정을 퇴출했다고 보도했다. 일리 있게 들리지만 잘못된 추정이다. 아세트아미노펜 서방정은 절반은 빨리 녹고 절반은 서서히 방출되는 방식의 방출제어형(modified-release) 제제다.
골관절염 환자 403명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이중맹검 임상시험에서 아세트아미노펜 서방정(665mg)을 2정씩 하루 3회 투여했을 때와 일반정제(500mg)을 2정씩 하루 4회 투여했을 때 통증 완화 효과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약효가 적다고 생각해서 서방정을 과잉복용할 위험이 크다고 말할 근거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편의점 타이레놀은 안전하다는 기사는 오보 중의 오보였다. 이번에 유럽에서 아세트아미노펜 서방정이 퇴출된 것은 서방정이 일반정제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다. 약국은 아세트아미노펜 일반정제와 서방정을 모두 취급하며, 편의점에는 일반정제만 있다.
일반정제이든 서방정이든 아세트아미노펜은 정해진 용법대로 복용하면 안전하고, 이를 넘어서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다. 애초에 쟁점은 누군가가 약을 과잉복용하여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치료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에 문제를 제기한 곳이 스웨덴 독극물정보센터였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식약처 안전성 서한은 이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서방형 제제의 약물 방출 방식이 일반 제제와 상이하여 과다 투여시 실현가능하거나 표준화된 관리 방법이 확립되지 아니하여 위험성이 유익성을 상회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쉽게 말해 약물 중독으로 응급실에 입원한 환자를 치료할 때 그 환자가 과용한 약이 서방형이냐 일반정제냐에 따라 흡수패턴과 약효지속시간이 달라지고 따라서 치료 방식도 달리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이를 효과적으로 구별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아세트아미노펜 중독 치료의 표준 프로토콜이 일반정제를 삼킨 경우만을 염두에 두고 세워졌다는 것 또한 문제로 지적됐다. 식약처가 안전성 서한에서 보충 설명한 내용도 사실이다. ‘아세트아미노펜’ 함유 서방형 제제는 현재 미국, 캐나다 등 외국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유럽 의약품청(EMA)는 권장량에 맞게 적절하게 복용하였을 경우 아세트아미노펜 복용으로 인한 유익성이 위험성을 상회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유럽 의약품청에서 이번에 서방정을 퇴출하기로 했지만, 이미 약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은 원래 용법에 따라 안전하게 소진해도 된다고 권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방정 퇴출은 알약을 더 꺼내기 어렵게 안전 포장한 것과 마찬가지다. 복용회수가 적은 서방정이 더 편리할 수 있겠지만, 오남용시 치료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그 편의성을 희생한 셈이다.
가벼운 두통에 서방정보다 일반정제가 낫다. 한 알에 들어있는 아세트아미노펜의 함량이 625mg으로 하루 최대 6정까지만 복용하도록 되어있어서 한 알에 500mg이 들어있어 하루 최대 8정까지 복용하도록 하는 일반 필름코팅 정제와는 차이가 있다.
동일 약성분이 들어있는 감기약, 근육통약, 해열진통제를 중복 복용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약국에는 이런 주의점을 설명해주는 약사가 있고, 편의점에는 없다. 이것이야말로 유럽발 아세트아미노펜 서방정 퇴출 뉴스에 숨은 진실이다.
2018-03-28 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