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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3> 관악 약대의 아버지 김영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현재 세계의 약대 중에서 교수 1인당 발표 논문수가 가장 많은 대학으로 공인 받고 있다. 1915년에 첫걸음을 뗀 조선약학강습소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미미하였던 우리나라의 약학이 이처럼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은, 1975년 8월 서울대 약대를 연건 캠퍼스에서 관악 캠퍼스로 이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1968년에 마련된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에 따르면 당시 서울대학교는 서울, 경기 등지에 분산되어 있던 각 단과대학들을 세 개의 캠퍼스로 모으고자 하였다. 즉 농대(수원 캠퍼스), 의대, 치대, 약대, 간호대, 생약연구소 등(연건 메디컬 캠퍼스)를 제외한 단과대학은 모두 관악산에 마련하는 신 캠퍼스로 모으고자 하였다.
그러나 약대 교수들은 연건 메디컬 캠퍼스를 떠나 관악 캠퍼스로 합류하고 싶었다. 그것은 장소가 비좁아 장래 발전 가능성이 낮은 연건 캠퍼스를 벗어나 광활한 관악 캠퍼스에서 많은 타 학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발전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연건 캠퍼스에 남았다가는 의대의 등살(?)에서 벗어 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시 약대의 김영은(金泳垠) 학장(재임기간 1969.4-1972.9)은 틈만 나면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총장실을 찾아가 ‘총장님, 약대도 관악으로 보내주지 않으려거든 내 학장직을 잘라 주시오’ 하며 강경하게 관악 이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메디컬 캠퍼스의 명분이 워낙 그럴듯하였고, 더구나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이 의대 출신인 한심석(韓沁錫) 박사이었기 때문에, 약대가 메디컬 캠퍼스를 벗어나 관악으로 이전하겠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다.
이 지점에서 때로는 벽창호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이었던 김영은 학장의 성격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그는 또다시 총장실을 방문하여 총장에게 약대의 이전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장실 앞 복도가 시끄러워져 문을 열고 내다 보니 상과대학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려고 몰려오고 있었다. 당시 상과대학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경제학과는 사회대학으로, 경영학과는 경영대학으로 나뉘게 결정되어 있었는데, 이에 결사 반대하는 상대 학생들과 동문들이 총장실로 쳐들어 온 것이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수위 등도 당황한 나머지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김영은 학장이 총장실 문을 열고 나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대성 일갈하였다. “도대체 자네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 난리를 치나? 당장 물러가지 못하나?” 갑작스런 김학장의 위세에 눌린 학생들은 주춤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정신을 차린 수위 등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김영은 학장이 총장실 난입을 막아낸 것이다. 총장은 휴~ 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을 것이다.
며칠이 지난 뒤 김 학장이 다시 총장을 찾았더니, 총장이 먼저 김 학장에게 “약대가 꼭 관악으로 가야겠습니까?” 물었다. 김 학장이 ‘물론입니다’ 대답했더니 총장은 "그럼 건설 본부장을 한번 만나 보세요” 하더란다. 총장은 총장실 점거 사태를 막아 준 김 학장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당시 건설 본부장은 서울대의 관악 이전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히 임명한 월남전 참전 예비역 장군이었는데, 김 학장이 사전에 설득해 놓았기 때문에 약대의 관악 이전에 순순히 찬성하였다.
마침내 1971년 4월에 시작된 1단계 건설 공사에 포함되지 못하였던 약대가, 2단계 건설 공사에 포함되어 1974년 4월에 공사에 착수, 1975년 8월 관악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당시 김영은 학장이 상대 학생들의 총장실 난입을 막아내는 해프닝이 없었다면 서울약대가 연건동을 벗어나 관악으로 이사 올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 김영은 학장을 ‘관악 서울 약대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다.
이상은 며칠 전 당시 학생담당 학생과장이었던 김병각 교수가 김영은 학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내게 전해 준 내용이다. 역사의 뒤안길은 돌아볼수록 흥미진진하다.
2016-12-0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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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2> 대단함과 훌륭함
지난 일요일 점심 식사 모임에 갔더니 내일 모레가 칠순인 한 친구가 아침에 10km 마라톤을 뛰고 왔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친구들은 “정말이냐? 며칠 전도 아니고 바로 오늘 아침에 그 정도 뛰었다면 앓아 들어 눕는 게 마땅하지,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스레 나와 앉아 있을 수가 있느냐, 넌 사람도 아니다” 라며 그 친구를 힐난(?) 하였다.
그러고는 모두들 그 친구 건강의 ‘대단함’에 감탄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이 친구가 진짜 ‘대단하다’고 감탄한 대목은 그가 몇 년 째 매일 저녁 10km 이상을 꾸준히 달려왔다는 사실이다.
끊임없는 꾸준함, 뛰기 싫은 날에도 뛰는 정신력, 달릴 때의 인내력, 이 모든 점에서 그 친구는 남들과 다른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티브이 프로그램에 “생활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재주를 갖고 있는 실로 다양한 분야의 달인들을 소개한다.
예컨대 쌀 한 톨에 여러 글자를 새기는 사람, 종이를 접어 온갖 모형을 만드는 사람, 만두를 빚어 등 너머로 던져 접시에 들어 가게 하는 사람 등 끊임없이 출연시키고 있다. 볼 때마다 “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고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세상에 이런 ‘대단한’ 사람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그런 방면에 타고난 재주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그런 경지에 오를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반복 동작을 하거나 반복 훈련을 해 낼만한 은근과 끈기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대단한’ 사람들을 그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훌륭하다’고 부르기까지는 않는 것 같다. ‘대단하다’와 ‘훌륭하다’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단함’과 ‘훌륭함’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대단함’은 ‘보통’과 ‘훌륭함’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 개념 아닐까 한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보통’이 ‘대단함’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아마 앞에서 언급한 대로 타고난 재주에 더하여 은근과 끈기, 정신력, 노력, 인내력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단함’이 ‘훌륭함’으로 승화(昇華)되기 위해서는 무슨 덕목이 추가로 필요할까?
지난 9월 교회 식구들과 함께 여수에 있는 고 손양원 목사 기념관에 다녀 왔다. 손양원 목사는 1939년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여수의 애양원 교회에 부임하였는데, 1948년 공산주의 반란군에 의해 사범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총살로 잃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국군에 의해 살해범이 체포 되어 총살 당할 상황이 되자 손 목사는 계엄사령관에게 간청하여 그를 살려냈다. 그리고 손 목사는 그를 바로 양자로 삼았다. 막내 딸은 ‘오빠를 죽인 살해범을 살려주는 것 까지는 몰라도 그를 양자로까지 삼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울며 항변하였단다.
손 목사는 그 딸에게 “네가 성경을 잘못 읽었구나.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 용서까지만 하라고 했더냐?” 하며 끝내 살인범을 양자로 삼았다. 손 목사는 1950년 6.25 동란 때 주변의 강권을 물리치고 혼자 남아 한센인들을 지키다가 끝내 48세 나이에 총살을 당해 순교하였다.
내가 보기에 손 목사님은 우리나라에 나타나신 예수님이었다. 손 목사님은 정말 ‘대단한’ 행적을 보이며 살다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단순한 ‘대단함’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피조물인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훌륭’해 질 수 있는지 그 극대치를 보여 주는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거룩한 ‘훌륭함’이었다고 불러도 모자랄 것이다.
그의 ‘거룩한 훌륭함’은 어디에서 어떻게 유래한 것일까? 얼핏 믿음, 감사, 겸손, 정직, 사랑, 희생 같은 단어들이 입술에 맴돌지만 이 모든 단어를 조합해서도 손 목사님의 그 거룩한 ‘훌륭함’은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음을 느낀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훌륭한’ 사람, 나아가 ‘거룩한’ 사람이 간절히 그리워지는 작금의 정국이다.
2016-11-2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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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1> 뭘 알아야 부러워하거나 감탄을 하지
1. 1989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 있는 퍼듀 대학에 가 있을 때 가족과 함께 LA공항에 내린 적이 있다. 귀국 전 미국 서부에 있는 그랜드 캐니언을 구경가는 길이었다. 그 때 그 근처에 사는 대학 동기 A가 차를 가지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였다. 한참을 달려가던 그가 내게 “야, 이 차 느낌이 좀 특별하지 않냐?”고 물었다. 무식한 나는 ‘잘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차가 속도를 낼수록 착 가라 앉는 느낌이 들지 않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길래 다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이 차가 그 유명한 독일제 BMW라는 차인데 가격이 매우 비싸지만 승차감이 최고’라는 사실 등을 자랑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BMW라는 이름도 못 들어 보았으며 승용차의 승차감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촌 놈이었다. 그래서 그 차나 승차감에 대해서 감탄의 말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내가 BMW를 제대로 알아 보았다면, “야, 너 출세했구나, 이런 비싼 차를 타고 다니다니 얼마나 좋니, 정말 부럽다” 이렇게 반응했을 텐데…. 그 때 무식해서 친구를 부러워해 주지 못했던 일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2. 미국에 처음 간 1988년 뉴욕에 사는 친구 B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의 집은 전형적인 미국식 2층 단독주택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자기 집 소개를 마친 그는 우리 가족의 무덤덤한 반응에 다소 실망하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들로부터 “와, 집이 정말 크고 좋다. 이 집 비싸지? 야 너 미국 와서 진짜 출세했구나”와 같은 반응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으로 이민 간 1970년대의 우리나라의 집들은 정말 허름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이처럼 멋진 2층집을 장만한 것은 스스로도 너무나 대견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8년에는 이미 우리나라 집들도 제법 좋아져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집은 다 크고 멋있다는 선입감(?)을 갖고 있었기에 우리 가족은 그의 집에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가용 차를 갖고 있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응, 우리도 차가 하나 있어”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대답하는데 왠지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 가서 온갖 고생 끝에 성공한 동포들에게 있어서 조국 대한민국의 갑작스런 발전은 오직 반가워만 하기에는 무언가 다소 심사가 복잡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B가 자기 집을 보여 주었을 때 조금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했던 것을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3. 1989년 약 1년간의 방문교수 생활을 마치고 미국에서 귀국할 때, 늘 고마웠던 국내의 대학동기 C에게 골프 클럽 한 세트를 사다 주었다. 당시 한국에서 미제 한 세트를 미국 가격으로 사기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 C는 어느 날 내게 ‘머리를 얹어 준다’며 골프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미국의 연습장에서 몇 번 연습을 해 본 이래 처음으로 내가 한국의 골프장에 나간 날이었다. 둘이서 호젓이 골프를 치는데, 어느 순간 C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자기가 ‘이글’을 쳤다며 떠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골프를 치다 보면 규정타 보다 한두 개 적게 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걸 가지고 호들갑을 떠나 생각하였다. ‘이글’이라는 용어도 나는 그 때 처음 들었다.
훨씬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골퍼 들은 이글을 치면 ‘기념패’를 만들거나 기념식수를 하는 것이 관례일 정도로 “이글”을 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C는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이글을 쳤는데도 내가 알아 주지 않더라’고 투덜대곤 하였다. 벌써 오래 전에 고인이 된 C를 생각할 때마다 그 때 마음껏 축하해 주고 널리 친구들에게 자랑을 해주지 못한 것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지나고 보니 뭘 몰라서 부러워하거나 감탄을 해주지 못해 상대방을 서운하게 만들었던 일들이 아쉬움으로 회상된다.
2016-11-0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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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0> 여수 밤바다
지난 9월 마지막 주말에 단체로 여수 관광을 다녀 왔다. 개인적으로 여수를 방문한 적은 두 번 있었지만 단체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절 버스에서 맨 처음 내린 곳은 여수시 만흥동에 있는 ‘여수레일바이크’였다.
레일바이크는 철로 위에 놓인 수레를 4~6명이 함께 페달을 밟아 달리는 기구이다. 처음 타보는 것이었지만 바닷가에 놓인 약 2km의 철길을 왕복하는데 의외로 힘도 들지 않고 무척 재미있었다. 마침 바람도 선선하였다.
요금은 승차인원수에 따라 1인당 2~3만원 정도 하였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이용객이 많았다. 레일바이크를 타고 조금 가는데 어디선가 “이쪽을 보세요” 하는 스피커 들리길래 흠칫 쳐다 보았더니 그 순간 저 만치에 설치되어 있던 자동 카메라가 “찰각” 소리를 내며 우리들을 찍었다.
그 카메라는 레일바이크 마다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정해진 코스를 왕복한 다음 출발지점으로 돌아와 바이크에서 내려보니 아까 자동 카메라가 찍은 사진들이 컴퓨터 화면 위에서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좋은 지점에서 찍어서 그런지 모든 사진이 제법 잘 나왔다. 가격을 물었더니 프린트 한 사진 1장에 5천원이고 액자에 넣으면 1만원이란다. 모처럼의 여행인데 돈 좀 쓰자 마음먹고 액자에 넣은 우리 팀의 사진 3장을 사서 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돈은 냈지만 레일바이크 사진도 모든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부두에 가서 크루즈 여객선을 타고 돌산대교 밑 여수 앞바다를 1시간반에 걸쳐 왕복하였다. 바다는 잔잔하고 여객선은 제법 커서 뱃멀미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갑판에 올라 탑승객들과 테이블에 섞여 앉으니 마침 바람도 시원하고 두루 보이는 야경도 최고이었다.
문득 ‘여수 밤바다’ 라는 노래가 있었던 것 같아 휴대폰으로 찾아 보았다. 버스커버스커라는 신기한(?) 이름의 가수가 부르는 이 노래의 가사는 이랬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중략), 여수 밤바다 이 바람에 걸린 알 수 없는 향기가 있어,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아 아 아 (후략)”. 갑판 위에서 여수 밤바다를 구경하는 데 딱 맞는 분위기의 노래였다.
이 여객선의 탑승료는 어른 1인당 3만4천원이었다. 결코 싸지 않은 요금이었지만 사람들은 ‘돈 낼만 하네’ 하는 표정으로 여수 밤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유람선에서 내린 다음에는 여수해상 케이블카를 탔다. 이 케이블카는 여수 돌산과 육지를 연결하고 있었다. 운임은 편도 1만원, 왕복 1만3천원이었다. 불과 10분 거리도 안 되는 거리에 대한 요금치고는 매우 비싼 금액이었다.
역시 야경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 조명이 없는 곳의 경치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이 케이블카는 보통 주말에는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탈 수 있을 정도로 이용객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요금이 비싸다는 생각은 곧 잊어버리기로 작정하였다.
마지막으로 돌산에 있는 여관 규모의 한 호텔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 가기 전에 저녁부터 시켜 먹었는데, 한정식 비슷하게 나온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역시 소문대로 ‘음식은 전라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 보니 의외로 방이 깨끗하였다.
누군가 이 호텔은 1박에 십만원 정도 하는데 인터넷으로 예약하면 오만원 이하에도 잘 수 있단다.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 관광을 마친 우리 일행은 모두 만족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여수시는 단체 관광객에 대해서는 경비의 일부분을 보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단체로 구경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며 돌아 다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온 관광객도 엄청 많은 걸 보면 아무리 불경기라 해도 준비만 잘 해 놓으면 관광객은 오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예컨대 레일바이크 타는 도중에 사진을 찍어 주는 것은 정말 잘 준비해 놓은 아이디어 같았다. ‘여수에 와서 돈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더니, 과연 여수시는 돈 버는 방법을 잘 아는 도시 같았다.
아무튼 이번 여수 관광은 특별히 좋았다.
2016-10-2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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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9> 회사 맡기기, 물려주기
사례 1 - 외국 서적의 복사판 제작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작지만 나름대로 건실해진 어느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사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초창기에는 회사가 너무 작아서 소위 인재들을 채용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장은 종신고용제 도입을 선언하고 틈틈이 직원들의 직무 교육을 실시하였다. 다른 회사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고생하는 것을 본 직원들은 이 회사를 평생 직장으로 여기며 회사에 충성을 다하게 되었다.
이제 문자 그대로 사장과 직원간에 튼튼한 신뢰 관계가 구축된 것이다. 지금은 사장이 오전 근무해도 회사가 잘 돌아 간다고 한다. 아마 사장이 회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회사는 더 발전할 지도 모른다.
이미 그 회사 직원들은 사장이 자리를 비우면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더 열심히 일하는 회사로 바뀌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출판업계의 사정이 아무리 어려워져도 이 회사는 살아 남을 것으로 믿는다. 사장이 직원을 믿고 마음대로 돌아 다닐 수 있는 회사가 어찌 망할 수 있겠는가?
사례 2 - 우리나라 제약회사의 창업주들은 온갖 역경을 딛고 회사를 이루어 놓은 분들이다. 그분들의 노고는 ‘아무리 존경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덧 제약 환경은 그들이 창업할 때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버렸다.
그들이 창업할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신약개발’이란 화두를 지금은 장삼이사(張三李四)가 가볍게 입에 담는 세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제 창업주들이 고령이 되었다. 이제는 자의반타의반 회사를 2세들에게 넘겨 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창업주들의 입장에서 볼 때 2세들의 경영 능력이 영 미덥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신들처럼 산전수전 다 겪어 보지 않은 2세들이 험난한 경쟁의 격랑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2세에게 회사를 물려 주고도 이런 저런 형태로 회사 경영에 관여하는 창업주들이 많다. 물론 2세들은 창업주의 간섭을 싫어한다. 그들은 새 시대에는 새 감각을 갖고 있는 자신들이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종 창업주와 2세 간에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드물지만 일찌감치 2세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완전히 손을 뗀 창업주도 있다. 대단한 용단이다.
사례 3 - 얼마 전 중견 기업을 경영하는 창업주의 고민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사람의 아들은 회사 계승에 도통 관심이 없는 반면, 딸은 관심도 있고 능력도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회사를 넘겼으면 하고 바라는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는 건실한 회사 오너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을 줄 몰랐다. 그리고 회사를 2세에게 넘겨 줄 때 어느 자식에게 넘겨 줄 것인가 결정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청년들에게 ‘롯데 사태를 봐라, 장치 재벌이 될 생각이 있거든 아들 딸 구별 말고 한 명만 낳아라’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고 다닌다. 회사는 창업도, 물려주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맺음말 – 누구나 번듯한 회사 하나쯤 부모로부터 물려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공상에 빠져 본다. 어느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각자 자신의 꿈을 말해 보라고 하셨다.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자신의 꿈은 재벌 2세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그것도 좋은 꿈이지” 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근데 선생님 문제가 하나 있어요, 아버지가 영 노력을 하시지 않아요” 했단다. 물론 2세 경영의 어려움을 모르는 아이에 대한 우스개 소리이다.
이상에서 직원에게 맡기거나 자식에게 물려 줄 회사도 없는 주제에 창업주의 걱정, 2세의 걱정 등 별 걱정을 다 해 보았다. 문득 어느 부잣집 화재 현장에서 아버지 거지가 아들 거지에게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얘야, 너는 평생 집에 불 날 일이 없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하냐? 이게 다 평생 재산 한푼 모으지 않은 네 아버지 덕인 줄이나 알아라. 알겠냐?”
새삼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6-10-1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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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8> 눈물
1.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의 탄광촌을 방문하여 한국인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위로한 일이 있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던 그들은 대통령을 만나 서러운 눈물을 쏟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대학에 있을 때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 부부의 딸인 학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던 나는 그 학생을 만난 것이 너무 반가웠다. 그러나 정작 그 학생은 너무나 밝고 의연할 뿐 내 관심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 추석 때 티브이를 보니까 김동건씨가 사회를 보는 ‘가요무대’를 방송하고 있었다. 상파울루에 사는 교민들을 위로하는 방송이었다. 브라질 교민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농업이민을 간 분들이다. 초대 가수들은 ‘불효자는 웁니다’, ‘고향무정’ 또는 ‘어머니’ 같은 최루성 가요를 불러대었다.
그런데 교민들 중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객석에 앉은 교민들의 눈물 바다가 연출될 상황이었다. 가수들은 이래도 안 울테냐는 식으로 더욱 슬픈 노래를 불러봤지만 소용없었다. 관객들은 그저 즐겁게 표정으로 고국의 노래를 감상할 뿐이었다. 나는 차라리 K-팝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으면 더 좋았겠네 생각하였다.
3. 왕년의 가수 윤항기씨가 티브이에서 회고하는 내용을 보니, 처음 그룹사운드 키보이스를 결성할 당시 연습할 장소가 없어 고생하다가 영등포에 있는 미군 부대 내에 한 장소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중락, 차도균 등 당시의 멤버들은 매일 용산역에 모여 영등포 연습장소까지 걸어 갔다고 한다. 버스 비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걸어 가는 도중에 담배 꽁초를 발견하면 서로 주워 피우며 걸었다.
하루는 여럿이 걸어 가는데 어디서 딸그락 소리가 계속 들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찾아 보니 차중락씨의 구두 앞창이 걸을 때마다 너덜거리며 부딪히는 소리였다고 한다. 그런 고생을 하면서도 그저 음악이 좋아 매일같이 연습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4. 리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우리 선수들도 과거와 달리 대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밝은 표정으로 다른 나라 선수들을 격려하며 ‘올림픽 게임을 즐겼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국민들도 이제는 금메달 소식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1986년 임춘애 선수가 아시안 게임 육상 중장거리 부문에서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라고 소감을 말했을 때 전 국민이 울던 때와는 딴판이 된 것이다. 참고로 임춘애는 가난은 했지만 라면은 간식으로만 먹었다고 한다.
5. 파독 광부의 딸, 브라질 교민, 윤항기 씨, 임춘애 씨,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이제는 지독하게 어려웠던 그 시절의 눈물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극복한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의 고난과 슬픔은 이미 의연함으로 승화된 듯 하다.
우리는 어느덧 지나온 과거의 눈물 길을 성숙한 시선으로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된 우리들의 모습에 눈물이 난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새삼 감동이 밀려 온다. 그렇다. 우리들은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6. 그런데 감사의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나랏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청년 세대는 취업난, 결혼난, 육아 및 교육난 등 기성세대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른들은 때때로 “요즘 애들은 얼마나 살기 좋아?” 하지만, 많은 청년들은 심지어 옛날보다 오늘날이 더 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젊은 세대에게 눈물을 강조할 생각은 없다. 다만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집중하여 결국은 승리했던 기성세대의 그 열정을 찬양하고 싶은 것이다. 독일이나 브라질, 또는 영등포나 운동장에서 불태웠던 그 열정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 열정이 우리나라 각 분야에서 다시 한번 불타 오르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하나님 우리나라를 보우하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2016-09-2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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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7> 말도 참 안 듣네
어떤 사내 아이가 방에서 놀다가 마루에 계신 아빠에게 물 좀 갖다 달라고 하였다. 아빠는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중이라 ‘네가 갖다 마셔라’ 했다. 그런데 아들은 지지 않고 몇 번씩이나 “아빠 제발 물 좀 갖다 주세요”라고 부탁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끝내 말을 듣지 않는 아들에 화가 난 아빠가 외쳤다. ‘너, 한번 만 더 물을 갖다 달라고 하면 아빠가 달려가서 한대 패준다’. 그러자 그 아들이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아빠 저 때리러 오실 때 물 좀 갖고 오시면 안될까요?” 라고!
이 아이를 보면 ‘말도 참 더럽게(?) 안 듣는 아이구나’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말을 영 안 들어 먹는 사람이 이 아이 말고도 적지 않다. 그런 사례 몇 가지를 이하에 나열해 보고자 한다.
1. 자동차 운전시 자기가 갈 방향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방향 지시등을 켜지 않는 사람이 많다. 혹시 방향 지시등을 켜면 배터리가 소모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그래서 운전자는 누구나 ‘저 차가 그 쪽으로 갈 줄 알았으면 나는 그냥 진행하면 되는 거였는데…’ 하는 상황을 수시로 만나게 된다. 방향 지시등을 켜야 안전하다고 그렇게 강조해도 말을 안 듣는 그들의 고집에 기가 질린다.
2. 건강에 나쁘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기어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다. 나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 전까지 담배를 피웠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흡연은 정말로 백해무익한 것 같다. 건강에 해롭지, 돈 들지, 주머니 지저분해지지, 냄새까지 나서 주변 사람들이 다 싫어하지….
인권침해에 가까울 정도로 궁색한 환경의 지정장소에 가서 흡연하는 모습을 보면 실례지만 그들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남들은 담배 사 피울 돈으로 건강에 좋다는 음식이나 영양제를 사 먹고 있음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3. 흡연가의 흉을 하나만 더 보자. 그들은 대개 운전 중 자기 차 안에 담배 재를 털지 않고 차창을 열고 차밖에 턴다. 흡연자도 담뱃재는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 운전 중 피운 담배 꽁초를 길에다 버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차 밖 도로가 온통 재털이나 쓰레기 통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흡연자 여러분, 재나 꽁초는 반드시 자기 차 안에 버립시다. 우리는 담배 꽁초로 더럽혀진 쓰레기 도로를 달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4. 역사에 관련된 이야기도 하나 해 보고 싶다. 이조(李朝)라고 하면 안되고 조선이라고 해야 한다고 수없이 가르쳐도 습관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많다. 한일합방(강제병합 또는 병탄)이나 해방(광복), 또는 민비(명성왕후)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도 아직 많다.
그 사람들이 고집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고, 바른 용어를 잘 모르고 있거나 과거의 습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리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잘못된 언어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역사학자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역사 이야기를 하는 김에, 중고등학교의 역사 선생님들이 요즘 TV의 인기 강사인 설민석 님처럼 역사를 ‘재미있게’ 강의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추가하고자 한다. 그의 강의를 들으면 암기(暗記)의 대상에 불과했던 역사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 재미있고 잘 외워지기 때문이다.
남들을 비난하다 보니 “그럼 너는 말을 잘 듣고 사냐?”라는 반문(反問)이 귓가를 울린다. 물론 나도 여지없이 ‘말을 참 안 듣는’ 사람의 범주에 들어 간다. 예컨대 ‘운동이 건강에 좋다’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데도 나는 운동을 잘 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게으름 때문이다. 몸이 아플 때에는 ‘이러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싶어 억지로라도 운동을 한다. 그러나 컨디션이 조금만 좋아지면 벌써 방안에서 뒹구는 버릇이 나온다. 건강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한다. 건강이 유전이라는 이야기이다. 동감이다. 마찬가지로 운동하기를 좋아하느냐 여부도 유전이 아닌가 싶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집안인가 보다.
요즘 옆구리가 아픈 탓에 하루 만보(萬步)씩 걷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옆구리가 다 나아도 걷기를 계속할 결심이다.
2016-09-1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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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6> 역사가 미래이다
강아지가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꼬리를 흔드는 이유는? 정답은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몸통이 꼬리를 흔드는 것이 순리(順理)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꼭 순리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영어에도 The tail is wagging the dog이라는 표현이 있다.
내가 육군 항공기 정비부대에 근무할 때 본 OA-1이라는 정찰용 비행기는 비행기의 앞날개가 아니라 방향타(方向舵)라고 부르는 뒷날개(꼬리)가 비행기(몸통)의 비행(飛行) 방향을 결정한다. 조종면에서는 주객이 전도된 비행기인 셈이다.
그런데 꼬리로 몸통의 비행 방향을 조종하는 것은 앞머리를 움직여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조종간을 움직이면 비행기의 기수(機首)가 아니라 꼬리 부분이 움직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숙지하지 않으면 비행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린다.
나는 2013년에 대학을 정년퇴임하기 조금 전부터 우리나라의 약학교육사를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 동안 대한약학회 안에 ‘약학사분과학회’를 만들어 5번의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서울약대 안에 가산약학역사관을 개관하는 일에 일조(一助)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약학사(藥學史)를 연구할 수 있는 작은 둥지 두 개를 마련해 놓은 느낌이다. 최근에는 탁월한 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서울대약대 백년사(百年史)’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백년사를 집필하면서 가끔 ‘역사(歷史)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 결과 ‘역사란 과거사의 단순한 나열(羅列)이 아니라, 과거사에 대한 해석(解釋)’이며, 또한 ‘과거로의 회귀(回歸)가 아니라 미래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뒷날개로 OA-1의 비행방향을 조종하는 것처럼, 과거의 역사로부터 얻은 지혜는 우리의 나아 갈 바 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란 과거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未來)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백년사’를 집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어떤 사건을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다룰 것인 것 하는 문제이었다. 그것은 ‘중요한 사건이 역사에 남는 것이 아니라, 기록에 남은 사건이 역사에 남을 수 있다’는 역설(逆說)의 가능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도 기록으로 남겨 놓지 않으면 후세에 망각되기 쉬운 반면, 지극히 사소한 사건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언급해 놓으면 후세에 중요한 역사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손을 대는 사람은 본의이든 아니든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어려웠던 점은 자료의 부족이었다. 심지어 불과 40년 전의 약대 연건 캠퍼스 전경(全景) 사진도 남아있지 않았다. 솔직히 일제(日帝) 때 보다 광복(光復) 후의 역사 자료가 더 부실해 보였다.
부끄러웠다. 사실 광복 후의 일이 조금 더 잘 기록되어 있었더라면, 겨우 백년에 불과한 약학사 쯤은 ‘연구(硏究)’의 대상이 아니라 단순한 ‘정리(整理)’의 대상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그럼 지금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 예컨대 한약분쟁, 의약분업, 약대 6년제 등을 충실하게 기록해 나가고 있는가?
아마 누구도 이에 대해 자신 있게 ‘예’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기록을 남기고 자료를 모으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선진국이 되었다고 하는 오늘날에 와서도 정부를 비롯한 여러 기관의 정책수립이나 업무수행 행태가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은 미래에 나아갈 바를 제시해주는 방향타(역사서)가 없는 데에 기인하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온고지신(溫故知新)! 역사로부터 미래에 나아갈 방향(비전)을 찾아냄으로써 시행착오를 줄이는 것이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는 첫걸음은 아닐까?
2016-08-3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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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5> 최초의 여성 약학박사 함복순(咸福順)
오늘은 약춘 200(약학박사 1호)에서 다룬 바 있는 함복순 교수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그는 1913년 9월 6일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서 6녀 중 3녀로 태어났다.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던 그는 소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 국문을 깨쳤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성당엘 갔다가 수녀의 권유로 뒤늦게 성당에 있는 소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에게 공부는 너무 쉬워서 언제나 일등을 했고 반장도 하였다. 결국 학기말에 3학년으로 월반하여 5년간 소학교를 다녔다. 졸업(1923년) 후 사립학교 출신으로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들어가기 어려운 경기고등여학교(경기고녀)에 합격하였다.
경기고녀를 졸업(1933년)한 후 수녀가 되기 위해 카멜(carmel)봉쇄 수도원에 지원하였지만 중병을 앓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낙방되었다. 그 후 신부님의 권유로 1933년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들어가) 1934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1937년까지 3년간 가명(加明)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으나,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일본 동경여자약학전문학교에 편지를 보내 입학 허가를 받아 1937~1941년의 4년간 공부를 마치고 졸업하여 약사가 된 다음 귀국하였다. 1941~1948년 서울 국립중앙화학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6.25 전쟁의 와중인 1951.5.31~1952년(정식 면직은 55.1.15) 서울대 약대 전임강사로 봉직하였다.
서울약대의 전임강사까지 되었지만 오랜 꿈인 유럽 유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직 서울대 독일어 교수이었던 독일인으로부터 독일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잡혀 가자, 이번에는 명동 성당에 와있던 프랑스인 공벨 신부에게 3년간 매일같이 가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부산 피난시절, 부산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 파리대학 입학 지원서를 써서 제출하였더니, 프랑스 대사가 차를 보내 데리고 가서 대사관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외교관 특별 보따리 속에 파리대학 입학지원서를 끼워 파리대학에 전달하도록 조치하여 주었다. 그 때는 우편물의 국제 왕래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파리대학으로부터 입학을 허락한다는 회신이 도착하였다. 그는 곧 동경의 요코하마 항으로 가서 프랑스로 가는 Marseillese호라는 배를 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만석이라 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일본 여자 하나가 몸이 아파 예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운 좋게 탈 수 있었다.
배는 상해, 홍콩, 사이공, 싱가포르, 홍해, 수에즈 운하, 지중해를 거쳐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하였다.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대학을 찾았는데, 교수 등의 배려로 1952부터 약대 대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1953년에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55년까지 동 대학 이과대학 생물화학연구실에서 근무하였다. 1957년부터는 다시 동 대학 이과대학원에 입학하여 1961년에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1962년까지 동 대학 이과대학 유기구조화학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2년간(1962.9.15~1964.9.24) 서울대 약대 교수(약효학)를 지내며 교지인 약원(제6호, 1963.3)에 ‘빠리 약대의 약학교육’이라는 글을 남겼다. 1963~1968년에는 미국의 뉴욕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물화학 연구원으로, 1969년에는 미국 콜럼버스 병원에서 임상화학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1985년에 정년퇴직 하였다. 그 후 1년간 Cooper Union 대학에서 영문학을 수강하였다.
만 77세인 1990년 5월에는 일본 유학 시에 만났던 최재방씨와 수유 성당에서 황혼 결혼을 하고, 뉴욕에서 ‘길벗’이라는 문학 동인 활동을 하다가, 1999년 5월 29일 서울에서 심장마비 후유증으로 영면하였다. 유작(遺作)으로 ‘고독을 누리는 시간 (미리내, 2000년 4월 10일)’이라는 수필집을 남겼다. 이 글도 그 책의 ‘나는 왜 혼자 살아 왔나’라는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의 천재성, 학구열 및 개척정신에 심심한 경의를 표하며 이 글을 마친다.
2016-08-1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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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4> 보스의 탄생
지난 7월 7일 일본 동경의 제국호텔에서 열린 나가이 재단(Nagai Foundation) 창립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다녀 왔다. 재단 이사장인 나가이(永井恒司, Nagai Tsuneji) 박사는 약제학 분야를 포함한 약학의 영역에서 적극적인 국제적 활동을 펴 온 일본 약학계의 보스 중 한 사람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 홍문화 박사님 비슷한 분이라고나 할까?
나가이 교수는 동경대학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1년에 호시(星)약과대학에 부임할 때부터 제인(帝人)파마주식회사의 고문으로서 회사와 공동으로 HPC(hydroxyl propyl cellulose)의 새로운 용도 개발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여 HPC의 용도에 관한 특허를 받았고, 회사는 이를 이용하여 3가지 신의약품(아프타치, 리노코트, 사루코트)을 개발하여 시판하게 되었다. 이 업적으로 나가이 교수는 1984년 ‘전국발명상’을 받았고, 1986년 9월 1일 일본인 최초로 FIP의 Hoest-Madsen 메달을 수상하였다.
이때 50년 지기(知己)인 향천대학(香川大學)의 고니시(小西良士) 교수는 FIP상의 수상을 기념하여 재단을 만들라고 제안하였다. 그 해 10월에 호시약과대학의 이사장 주최로 뉴오타니 호텔에서 FIP상 수상 축하 파티가 열렸을 때, 제국제약(帝國製藥)의 아까자와(赤沢) 사장이 많은 액수의 돈을 기부하여 주었다.
이 돈이 재단이 처음으로 받은 기부금 1호이었다. 그러나 이 재단에 자금 면에서 더 큰 도움을 준 것은 제인 파마이었다. 제인 파마는 특허에 대한 공로금을 호시 대학의 구좌로 넣어 주었는데, 호시대학의 구타니 학장은 그 돈 전액을 나가이 재단이 전용(專用)할 수 있는 재산으로 처리하여 주었다.
1986년에 ‘나가이기념국제약학기금’이라는 임의단체(任意團體)로 출범한 이 단체는 그 후 재단법인으로의 변신을 도모(圖謀)하였다. 그 과정에서 문부성의 심사담당관은 ‘국제교류재단은 전국적으로 예가 드물고, 약학영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며, 재단의 설립은 사립대학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각별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나가이 교수는 재단설립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으로, 문부성에 드나들며 심사담당관으로부터 정관 작성에 필요한 조언을 받았다. 1993년 2월 12일에 예비심사를 신청한지 만 1년 후인 1994년 1월 28일에 ‘나가이기념약학국제교류재단’ 이라는 이름으로 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았다.
그 후 법인제도가 전면적으로 개정되고 관할부서가 문부성에서 내각성(內閣省)으로 바뀌면서 2012년 4월 1일부터 공익재단법인(公益財團法人)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의 연혁을 살펴보면 군데군데에서 남의 명예로운 성취를 잘 지켜주려고 하는 일본 사회 전체의 미덕(美德)이 느껴진다.
나가이 박사는 5년전부터 하반신 불수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가이 재단이 후원하는 각종 국제 약학관련 학술행사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있다. 이는 지극 정성으로 남편을 섬기는 부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언제나 남편의 휠체어를 밀면서 나타나는 부인이 실은 나가이 재단의 실질적인 운영자라고 한다. 나가이 이사장은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심포지엄 전날부터 초청연자들과 밤늦도록 식사와 담소를 나누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내가 감탄한 것은 그가 심포지엄 당일 휠체어에 앉은 채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학회장의 맨 앞자리를 굳세게 지키며 모든 강연을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국제학술회의에서 자리를 뜨지 않고 하루 종일 어려운 학술 강연을 듣는 것은 나 같은 젊은(?) 사람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문득 오래 전 서울에서 열린 신약개발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교토대학의 세자키 교수가 머리에 떠올랐다. 당시 정년을 앞두고 있는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종 학회장의 맨 앞자리를 고고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는 중견교수만 되어도 학회장 밖에서 환담(?)이나 즐기던 우리에게 따끔한 자극이 되었다.
보스는 어떤 경위로 탄생하는가? 이번 여행은 이에 대한 귀중한 힌트를 주고 있었다.
2016-07-2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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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3> 울림이 있는 말 한마디
남에게 들은 말 한마디가 내 삶에 긴 울림으로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1. D제약의 L부회장은 ‘도리 없지’란 말을 자주 한다. 이미 엎질러져서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포기할 때 하는 말이다. 지나간 실패를 오래도록 묵상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럴 시간이 있으면 실패를 털고 앞으로 나갈 방도를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도리 없지’는 지나간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사고 방식 소유자의 표현이다. 적지 않은 사람이 실패한 일을 오랫동안 묵상함으로써 낙심(落心)하고 좌절한다. 온누리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은 ‘실패는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한 낙심과 좌절이 더 큰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도리 없지’ 하면서 실패로 인한 낙심과 좌절을 털어버리는 것은 것은 범인(凡人)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L부회장의 ‘도리없지’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의 비범함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우리 둘째 애가 사업을 하다 큰 실패를 경험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가 가장 걱정한 것은 실패보다 그 애의 낙심이었다. 그 때 나도 L부회장처럼 ‘도리 없지’ 생각하며 아들을 진심으로 위로하였다. 마침내 아들은 하나님 은혜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재기에 성공하였다. 할렐루야.
2. 고 하용조 목사님은 늘 ‘잘 나갈 때가 위험한 때’라고 설교 하셨다. ‘스스로 요즘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되면, 위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잘 나가는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대로 교만은 패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권력에 취해 교만을 떨다가 추락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은사 한 분은 ‘당신이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할 사람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될까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잘 될 때 겸손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이 다 싫어한다는 좀 서늘한 경고 말씀이었다. 그러나 겸손은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거죽은 겸손이나 속은 교만인, 즉 위장된 겸손은 더욱 위험하다. 위장된 교만은 곧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마련이고, 더욱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3. 오랜만에 뵌 93세의 박창환 목사님은 내게 “아직도 여기 저기 강의를 하러 다니신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셨다. 나는 정년 퇴직 후에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뜻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의하러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귀한 일이냐’란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큰 울림이 있는 말씀이었다. 나는 박 목사님과 하 목사님의 말씀대로 겸손과 정직이 인생을 바로 이끄는 중요한 나침반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4. 내가 졸업한 제물포 고등학교의 교훈은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다. 또 이 학교 강당에는 유한흥국(流汗興國)이란 붓글씨 족자가 걸려 있었다. 모두 이 학교를 설립한 길영희 교장 선생님의 철학에서 나온 말씀이셨다. 이 학교는 무감독(無監督)시험과 같은 명예제도(honor system)를 실시해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교훈, 족자, 무감독시험제도 등을 통한 이 학교의 가르침, 즉 근면, 성실, 정직은 나를 비롯한 많은 졸업생들의 평생 교훈이 되었다.
나는 이 가르침이 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를 소망한다. 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되는 삶을 살아낼 때, 기독교는 세상에 저절로 전도되고 세상은 성경적으로 바람직하게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5.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네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믿는다’고 자주 말씀 하셨다. 내가 남들보다 착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라고 믿는다는 말씀이셨다. 그 믿음의 말씀 덕분에 나는 책을 산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용돈을 타는 등의 유혹을 참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23년 전에 작고하셨지만, 어머니의 그 말씀은 그 후로도 평생 내 삶의 태도를 가다듬어 주었다. 어머니 그립습니다.
2016-07-1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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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2> 손주 자랑
우리 부부에게는 큰 아들로부터 손녀가 셋, 작은 아들로부터 손자가 하나 있다. 이 네 명의 손주는 우리 부부의 항우울제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 부부의 생명이다. 큰 아들네는 같은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살고 작은 아들네는 4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산다. 덕분에 나는 손주들을 수시로 본다. 큰 아들네 세 손녀는 아침 저녁으로 만날 정도이다. 호강이 아닐 수 없다.
아내와 둘이 만 있으면 몸은 편하다. 그러나 곧 심심해진다. 그러면 몸만 편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힘들어도 애들과 함께 있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일요일마다 가족 전원이 만나는 규칙을 정해서 지키고 있다. 즉 같은 교회에서 각자 예배를 드린 후 전원(10명)이 모여 점심 식사를 한다. 돈이 드는 부작용은 있지만 행복하다.
나는 손주들과 놀 때 눈높이를 맞춘다. 내 눈이 애들보다 높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내 눈높이를 낮추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손주들의 눈이 더 높을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공주 이름 대기, 아이돌 이름 대기, 피아노 치기,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분야에서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인 큰 손녀 예나를 당할 수 없다. 하루는 “예나야, 이제는 할아버지가 예나보다 잘하는 게 하나도 없네” 했더니, 예나 왈, “아니야, 약에 대해서는 할아버지가 더 잘 알잖아?” 하였다. 이제 손녀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다섯 살짜리 손자인 우주는 축구를 잘 한다. 학원에서 축구를 시작하였을 때, 나는 30골을 넣으면 선물을 사주겠다고 덜컥 약속하였다. 평생 한 골도 넣어 본 적이 없는 나는 30골이면 우주가 결코 달성할 수 없는 높은 목표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주는 축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후딱 20골을 넘겼다. 아무래도 이 달 중에는 선물을 사주어야 할 모양이다.
손주들은 내가 저희들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느 날 예나가 “할아버지, 나한테 하듯 할머니에게 한번 해 봐, 그럼 훌륭한 할아버지라고 티브이에 나올 거야”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아내가 기뻐했지만, 나도 내 사랑이 전달된 것에 몹시 기뻤다.
끝으로 예나가 요즘 과학 글짓기 시간에 쓴 글 세 개를 담임 선생님(윤쌤)의 코멘트와 함께 소개한다. 자랑질(?)을 참아 주시길 부탁 드린다.
- 봄 -
봄이 왔습니다. 따듯한 봄이 왔습니다. 추웠던 나무, 꽃, 우리 마음도 봄의 날씨와 향기에 사르르 녹아 갑니다. 꽃이 좋아서 날아가는 나비를 보니 우리도 덩달아 기분이 좋습니다. 봄에 비록 겨울이 샘내서 꽃샘추위가 있어도, 며칠 뒤면 봄 향기가 다시 찾아 옵니다. 꽃들도, 나무도, 나비도, 모두다 봄 색깔에 물들어 즐깁니다.
(심작가님! 정말 봄처럼 아름다운 글이군요. 향기에 사르르 녹는다~는 표현에 윤쌤의 마음도 사르르 녹습니다! 또 봄 색깔에 물들어 즐긴다는 표현은 정말이지 세계 최고입니다!)
- 나 -
나는 나의 주인나를 생각으로 격려해주는 것도 나, 칭찬해 주는 것도 나.나는 내가 뭘 할지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생각한대로 움직인다. 마치 로봇처럼.그럼 나는 로봇일까?나는 생각을 하고, 창작을 하니까 로봇이 아니다. 그럼 나는 뭘까? 아직도 비밀에 꽁꽁 싸여 뭔지 모르는 나.
(어머나, 정말 이 글을 예나가 혼자 쓴 것인가요? 우와~~ 철학자가 쓴 심오한 글보다도 훨씬 훌륭합니다! 감동, 감동, 감동)
- 내가 살고 싶은 집 –
나는 하늘에 있는 구름집을 만들어 보고 싶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집. 그림을 보면 나비날개가 있다. 그 나비날개를 메고 나는 것이다. 길에는 무빙워크가 깔려있는 구름집이다. 이사를 할 때는 바닥에 붙은 끈을 떼면 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누구나 살고 싶은 좋은 집 같기도 하다.
(하하하~~ 어쩜 이토록 아름답고 과학적인 집이 또 있을까요?!!! 하늘에 있는 구름집, 나비날개가 있는 집, 상상만으로도 정말 훌륭하네요~~무빙워크며 끈을 떼어내어 이사를 한다는 구체적인 상상력은 정말 우리 예나 아니면 할 수 없는 생각!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2016-06-2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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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1> 한국인 약학박사 1호 (2)
독일 박사(1962~)
이화여대 약대 출신인 고영수(高英秀)는 1962년 뮌스터 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덕성여대, 이화여대 약대를 거쳐 한양대 식품영양학과에도 재직하였다.
1965년 김영희가 독일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상세한 정보는 불명이다.
이화여대 약대 출신의 서명은(徐明殷)은 1966년 Braunschweig 대학에서 ‘Belladonna Alkaloid에 대한 Vitori 반응의 연구와 Nitro Radical에 관한 연구’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KIST, 경희대를 거쳐 이화여대 약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서울대 약대 출신으로는 1969년 Bonn 대학에서 ‘축합 tannin의 분리 및 합성‘으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안병준(安丙俊, 1962년 졸업, 16회)이 최초이다. 그는 한국화학연구소, 충남대 약대 학장 및 충남대 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서울대 약대 출신으로 두 번째는 1975년 뮨스터 대학 약대에서 ‘소염진통작용이 있는 hydantoin 유도체의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권순경(權順慶, 16회)이 있다. 그는 덕성여대 약대 학장 및 동교 총장서리를 역임하였다.
미국 약학박사(1964~)
미국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고 제일 먼저 귀국한 사람은 김병각(金炳珏, 1953년 부산에서 서울대 약대 입학, 1957년 3월 졸업, 11회)이다. 그는 1961년 9월 미국 시애틀에 있는 University of Washington의 약학대학에 유학하여 ‘Alkaloid production and metabolism of Claviceps Paspali strain Li 189 in submerged culture’라는 논문으로 1964년 8월에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2년간 University of Connecticut에서 포스닥을 하고 1966년 6월에 귀국하여 경희대 약대에 복귀하였다가, 그 해 9월에 서울대 약대 전임강사로 자리를 옮겨 교수로 근무하였다.
미국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두 번째 사람은 1954년 3월에 서울대 약대를 졸업(8회)한 이상섭(李相燮)이다. 그는 1966년 8월에 Wisconsin University 약학대학에서 ‘스테로이드의 미생물학적 분해’라는 연구로 학위를 받고 그 해 9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서울대 약대 학장 및 대한약학회장을 역임하였다.
신제(新制) 서울대학교 약학박사(1967~)
국내에서 최초로 신제(新制)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한덕룡(韓德龍, 1952년 서울대 약대 졸업, 6회) 이다. 그는 1959년 4월 1일에 서울대학교 대학원 약학과 생물화학 전공에 입학하여 1961년까지 소정(所定)의 학과목을 이수(履修)한 후, ‘한국 인진 성분과 그 유도체에 관한 생물화학적 연구’ 라는 논문으로 1967년 8월 30일에 학위를 받았다. 그는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학장 및 대한약학회장을 역임하였다.
신제 박사 2호는 이민화(李民和, 1959년 서울대 약대 졸업, 13회)로 그는 ‘제제의 효율에 관한 연구: Computer를 이용한 1차흡수소실 모델에서의 효율 및 흡수속도 계산’이라는 논문으로 1972년 8월 서울대학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서울대 약대 교수와 서울대 병원약제부장을 역임하였다.
캐나다 박사 (1971~)
캐나다에서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신선호(申善鎬, 1953년 서울대 서울분교에서 약대 입학, 1957년 3월 졸업, 11회)이고, 두 번째는 역시 서울약대 11회 졸업생인 김낙두(金洛斗)이다.
두 사람은 모두 Mannitoba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약리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았다. 신선호는 1971년 학위를 받은 뒤 Queen’s University 의대 교수로 재직하였고, 김낙두는 1972년 2월 ‘Digoxin의 강심작용과 세포 내 분포와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 해 12월에 서울대 약대 조교수로 임명 받았다. 그는 서울대 약대 학장 및 서울대병원 약제부장을 역임하였다.
2016-06-15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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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0> 한국인 약학박사 1호 (1)
일본 약학박사(1944~)
우리나라 사람으로 최초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경성약전 6회 졸업생(1936년 졸업)인 이남순(李南淳)이다. 그는 1936년 동경대학 의학부 약학과 선과(選科)에 진학하여 1944년 2월 5일에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 제목은 ‘개미산 아미드의 반응에 관하여’ 이었다. 이남순은 화평당 약방과 조선매약을 경영한 이동선(李東善)의 장남으로, 조선약학교 설립에 관여한 이응선(李應善)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는 뒤에 서울약대 교수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의 교수 및 초대학장을 역임하였다.
일본에서 두번째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 사람은 경성약전 11회 졸업생(1941년 3월 졸업)인 김영은(金泳垠)이다. 그는 금강제약 전용순(全用淳) 사장의 전적인 후원을 받아 1943년 동경제국대학 약학과 선과(選科)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보다 2년 전인 1941년에 김기우(金基禹)도 전용순의 후원으로 동경제대에 유학을 떠났다. 김기우는 경성약전 출신은 아니나 독학으로 조선약제사 시험에 합격(1930)하여 1931년에 면허를 받은 바 있다.
두 사람은 일제의 전쟁으로 인하여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였는데, 김영은은 광복 후인 195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여 1959년 5월 ‘표지 타액선 홀몬의 연구: 랫트의 여러 조직 호모지네이트에 의한 요드 표지 파로틴의 분해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음으로써 광복 후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김영은은 뒤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교수(생화학)와 학장 및 한국생화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김기우는 1950년에 사립 서울약학대학의 학장서리를 역임하였다.
프랑스 약학박사(1953~)
프랑스에서 최초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 사람은 함복순(咸福順)이다. 그는 동경여자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1953년 파리(솔본느) 대학교로부터 약학박사 학위를, 1962년 동 대학교로부터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63년~1964년에 서울대 약대 교수를 역임한 후, 미국으로 건너 가 뉴욕대학 및 컬럼비아 대학의 생물화학 연구원을 거쳐, 1969년~1985년 Columnus 병원에서 임상화학 연구원으로 정년퇴직 하였다. 그의 약학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Cis-pinone 산 및 그 ester와 그의 유도체의 열분해에 관한 연구’이었다.
국내 약학박사(1962~)
국내에서 최초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경성약전 7회 졸업생(1937년 졸업)으로 당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이던 홍문화(洪文和)이다. 그는 1962년 2월에 구제(舊制) 박사학위 제도에 의해 서울대학교로부터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구제(舊制)박사란 ‘논문박사’라고도 하여 학점을 취득하는 과정 없이 논문만으로 받는 학위를 의미한다. 그의 논문 제목은 ‘분말성 약품의 입자도 측정에 관한 연구’이었다.
이 학위는 1952년 4월 26일 서울대학교가 전쟁 중에 거행된 제6회 졸업식에서 6명에게 최초로 박사 학위(문학2, 의학1, 공학3)를 수여한지 10년만에 약학자에게 수여한 것이었다. 그는 1955년 미국 파이퍼 약학교육재단의 연구비를 받고 미국 퍼듀(Purdue) 대학에 가서 1년간 마틴 (Martin) 교수의 지도로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바 있다. 그는 1966년에 국립보건원장에 취임하여 3년간 봉직한 후 1970년~1981년까지 생약연구소 교수로 근무하였다.
1963년 2월에 한구동(韓龜東, 조선약학교 본과 7회, 1930년 졸업)과 우린근(禹麟根, 경성약전 7회, 1937년 졸업) 교수가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서울대학교로부터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구동의 논문 제목은 ‘Acerginnala Max에서 분리한 신 Tannin Polygagallin의 화학구조’이었고, 우린근의 논문 제목은 ‘Acertannin’의 화학구조’이었다. 한구동은 국립 서울대 약대의 초대 학장, 생약연구소장 및 대한약사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우린근은 서울대 생약연구소장과 서울대 약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2016-06-0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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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9> 내가 보는 훌륭한 사람들
세상에 훌륭한 사람들이 더 많을까? 아니면 나쁜 사람들이 더 많을까? 이런 저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생기는 의문이다.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우선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위인전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시선(視線)을 교회 안으로 돌리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받아들인 고 손양원 목사님과, 조선에 와서 죽임을 당하거나 병들어 죽은 수많은 미국 선교사님들 같은 분들이 떠 오른다. 이런 분들은 사실 나 같은 사람이 함부로 그 성함을 입에 올리기도 송구스러운 훌륭한 분들이다.
이런 분들은 매우 고명한 분들이지만 내가 직접 그분들의 훌륭하심을 목격하지는 못한 분들이다. 반면에 이분들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런 분들 못지 않게 훌륭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많은 걸 요즘 깨닫고 있다.
오래 전, 당시 55세의 나이로 고등학교 교사직을 내려 놓고 부부 동반하여 선교사로 떠나셨던 분이 있었다. 선교지인 아프리카로 떠난 지 1년 뒤 무슨 일 때문에 일시 귀국한 그 분을 만났더니, ‘그 곳이 너무 덥고 힘들어 솔직히 다시 가기 싫지만, 사명감 때문에 다시 돌아간다’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그 때까지 나는 선교사들은 그런데 가서 선교하기를 좋아하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었다.
2년전 캄보디아에 아웃리치를 갔을 때 만난 60대 후반의 선교사 부부도 감동이었다. 선교 자체 보다, 훨씬 젊은 선배 선교사의 지휘에 따르는 모습이 내겐 더 감동이었다. 한 때 괄괄했던 성격을 다 죽이고 어린 선배의 지시를 섬기기가 어찌 쉬웠겠는가? 어쩌면 하나님 섬기기보다 젊은 선배 선교사 섬기기가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내와 함께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같은 교회의 식구 10여명과 함께 모여 소규모 예배를 드린다. 우선 7시에 모여 근처 식당에서 가벼운 식사를 한 다음, 미리 정해 둔 장소로 가서 성경 말씀을 읽고 이를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11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이 예배를 순예배 (筍禮拜)라고 부른다.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식구(食口)라고 정의한다면, 이들이야말로 나의 가장 가까운 식구들이다. 이들보다 더 자주 만나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은 가족 둥에서도 아내 밖에 없으니 말이다. 나는 이처럼 많은 식구들과 매주 모여 밥을 같이 먹는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낀다.
이 순예배 식구들 중에 정말로 보석처럼 빛나는 훌륭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금년 1월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주 토요일에 2시간씩 예배당 청소를 솔선 수범하는 60세의 김집사님, 그리고 연하(年下)인 그를 모시고(?) 열심히 걸레질을 하시는 70대 집사님 내외분, 그리고 주일 예배를 위한 성찬(聖餐) 준비 등 각종 봉사에 적극 협력하는 우리 순 식구들이 모두 보석처럼 빛나는 훌륭한 분들이시다.
봉사란 찡그리며 해도 훌륭한 일인데, 이 분들은 모두 ‘하나님 일은 뺏어서라도 해야 한다’며 늘 싱글벙글하신다. 이처럼 우리 순 식구들이 진정으로 ‘한 식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장님의 섬기는 리더십과 순 구성원들의 겸손한 팔로워십(followership) 덕분이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최근에 우리 순(筍)에 한 초심자가 새로 배정되었다. 그는 낯가림을 좀 하는 편인데 그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하여 한 유명한 음악가 부부가 순예배 때마다 초심자와 자리를 함께 해주고 있다.
그는 그 초심자가 매주 별도로 교육받는 15주간의 성경 공부 시간에도 합석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귀한 영혼 구원이라고 하지만, 한 초심자의 영혼을 위해 매주 이틀씩이나 시간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생각할수록 감동 또 감동이다.
이런 분들의 섬김은 교회의 잡음을 잠잠케 하고, 교회로 하여금 세상의 비난을 이기고 세상에 선(善)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만든다.
인생 후반에 이처럼 훌륭한 분들과 한 식구가 되어 교제하며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크나큰 축복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2016-05-18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