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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0> 한국인 약학박사 1호 (1)
일본 약학박사(1944~)
우리나라 사람으로 최초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경성약전 6회 졸업생(1936년 졸업)인 이남순(李南淳)이다. 그는 1936년 동경대학 의학부 약학과 선과(選科)에 진학하여 1944년 2월 5일에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 제목은 ‘개미산 아미드의 반응에 관하여’ 이었다. 이남순은 화평당 약방과 조선매약을 경영한 이동선(李東善)의 장남으로, 조선약학교 설립에 관여한 이응선(李應善)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는 뒤에 서울약대 교수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의 교수 및 초대학장을 역임하였다.
일본에서 두번째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 사람은 경성약전 11회 졸업생(1941년 3월 졸업)인 김영은(金泳垠)이다. 그는 금강제약 전용순(全用淳) 사장의 전적인 후원을 받아 1943년 동경제국대학 약학과 선과(選科)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보다 2년 전인 1941년에 김기우(金基禹)도 전용순의 후원으로 동경제대에 유학을 떠났다. 김기우는 경성약전 출신은 아니나 독학으로 조선약제사 시험에 합격(1930)하여 1931년에 면허를 받은 바 있다.
두 사람은 일제의 전쟁으로 인하여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였는데, 김영은은 광복 후인 195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여 1959년 5월 ‘표지 타액선 홀몬의 연구: 랫트의 여러 조직 호모지네이트에 의한 요드 표지 파로틴의 분해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음으로써 광복 후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김영은은 뒤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교수(생화학)와 학장 및 한국생화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김기우는 1950년에 사립 서울약학대학의 학장서리를 역임하였다.
프랑스 약학박사(1953~)
프랑스에서 최초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 사람은 함복순(咸福順)이다. 그는 동경여자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1953년 파리(솔본느) 대학교로부터 약학박사 학위를, 1962년 동 대학교로부터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63년~1964년에 서울대 약대 교수를 역임한 후, 미국으로 건너 가 뉴욕대학 및 컬럼비아 대학의 생물화학 연구원을 거쳐, 1969년~1985년 Columnus 병원에서 임상화학 연구원으로 정년퇴직 하였다. 그의 약학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Cis-pinone 산 및 그 ester와 그의 유도체의 열분해에 관한 연구’이었다.
국내 약학박사(1962~)
국내에서 최초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경성약전 7회 졸업생(1937년 졸업)으로 당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이던 홍문화(洪文和)이다. 그는 1962년 2월에 구제(舊制) 박사학위 제도에 의해 서울대학교로부터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구제(舊制)박사란 ‘논문박사’라고도 하여 학점을 취득하는 과정 없이 논문만으로 받는 학위를 의미한다. 그의 논문 제목은 ‘분말성 약품의 입자도 측정에 관한 연구’이었다.
이 학위는 1952년 4월 26일 서울대학교가 전쟁 중에 거행된 제6회 졸업식에서 6명에게 최초로 박사 학위(문학2, 의학1, 공학3)를 수여한지 10년만에 약학자에게 수여한 것이었다. 그는 1955년 미국 파이퍼 약학교육재단의 연구비를 받고 미국 퍼듀(Purdue) 대학에 가서 1년간 마틴 (Martin) 교수의 지도로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바 있다. 그는 1966년에 국립보건원장에 취임하여 3년간 봉직한 후 1970년~1981년까지 생약연구소 교수로 근무하였다.
1963년 2월에 한구동(韓龜東, 조선약학교 본과 7회, 1930년 졸업)과 우린근(禹麟根, 경성약전 7회, 1937년 졸업) 교수가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서울대학교로부터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구동의 논문 제목은 ‘Acerginnala Max에서 분리한 신 Tannin Polygagallin의 화학구조’이었고, 우린근의 논문 제목은 ‘Acertannin’의 화학구조’이었다. 한구동은 국립 서울대 약대의 초대 학장, 생약연구소장 및 대한약사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우린근은 서울대 생약연구소장과 서울대 약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2016-06-0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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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9> 내가 보는 훌륭한 사람들
세상에 훌륭한 사람들이 더 많을까? 아니면 나쁜 사람들이 더 많을까? 이런 저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생기는 의문이다.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우선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위인전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시선(視線)을 교회 안으로 돌리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받아들인 고 손양원 목사님과, 조선에 와서 죽임을 당하거나 병들어 죽은 수많은 미국 선교사님들 같은 분들이 떠 오른다. 이런 분들은 사실 나 같은 사람이 함부로 그 성함을 입에 올리기도 송구스러운 훌륭한 분들이다.
이런 분들은 매우 고명한 분들이지만 내가 직접 그분들의 훌륭하심을 목격하지는 못한 분들이다. 반면에 이분들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런 분들 못지 않게 훌륭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많은 걸 요즘 깨닫고 있다.
오래 전, 당시 55세의 나이로 고등학교 교사직을 내려 놓고 부부 동반하여 선교사로 떠나셨던 분이 있었다. 선교지인 아프리카로 떠난 지 1년 뒤 무슨 일 때문에 일시 귀국한 그 분을 만났더니, ‘그 곳이 너무 덥고 힘들어 솔직히 다시 가기 싫지만, 사명감 때문에 다시 돌아간다’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그 때까지 나는 선교사들은 그런데 가서 선교하기를 좋아하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었다.
2년전 캄보디아에 아웃리치를 갔을 때 만난 60대 후반의 선교사 부부도 감동이었다. 선교 자체 보다, 훨씬 젊은 선배 선교사의 지휘에 따르는 모습이 내겐 더 감동이었다. 한 때 괄괄했던 성격을 다 죽이고 어린 선배의 지시를 섬기기가 어찌 쉬웠겠는가? 어쩌면 하나님 섬기기보다 젊은 선배 선교사 섬기기가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내와 함께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같은 교회의 식구 10여명과 함께 모여 소규모 예배를 드린다. 우선 7시에 모여 근처 식당에서 가벼운 식사를 한 다음, 미리 정해 둔 장소로 가서 성경 말씀을 읽고 이를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11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이 예배를 순예배 (筍禮拜)라고 부른다.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식구(食口)라고 정의한다면, 이들이야말로 나의 가장 가까운 식구들이다. 이들보다 더 자주 만나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은 가족 둥에서도 아내 밖에 없으니 말이다. 나는 이처럼 많은 식구들과 매주 모여 밥을 같이 먹는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낀다.
이 순예배 식구들 중에 정말로 보석처럼 빛나는 훌륭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금년 1월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주 토요일에 2시간씩 예배당 청소를 솔선 수범하는 60세의 김집사님, 그리고 연하(年下)인 그를 모시고(?) 열심히 걸레질을 하시는 70대 집사님 내외분, 그리고 주일 예배를 위한 성찬(聖餐) 준비 등 각종 봉사에 적극 협력하는 우리 순 식구들이 모두 보석처럼 빛나는 훌륭한 분들이시다.
봉사란 찡그리며 해도 훌륭한 일인데, 이 분들은 모두 ‘하나님 일은 뺏어서라도 해야 한다’며 늘 싱글벙글하신다. 이처럼 우리 순 식구들이 진정으로 ‘한 식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장님의 섬기는 리더십과 순 구성원들의 겸손한 팔로워십(followership) 덕분이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최근에 우리 순(筍)에 한 초심자가 새로 배정되었다. 그는 낯가림을 좀 하는 편인데 그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하여 한 유명한 음악가 부부가 순예배 때마다 초심자와 자리를 함께 해주고 있다.
그는 그 초심자가 매주 별도로 교육받는 15주간의 성경 공부 시간에도 합석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귀한 영혼 구원이라고 하지만, 한 초심자의 영혼을 위해 매주 이틀씩이나 시간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생각할수록 감동 또 감동이다.
이런 분들의 섬김은 교회의 잡음을 잠잠케 하고, 교회로 하여금 세상의 비난을 이기고 세상에 선(善)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만든다.
인생 후반에 이처럼 훌륭한 분들과 한 식구가 되어 교제하며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크나큰 축복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2016-05-1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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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8> 가정(家庭) 붕괴의 공포
가정이 붕괴되는 소리가 요란하다. 우선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평균 만 68세인 나의 대학 동기 남자 8가정의 총 15명의 아이들 중 40%(6명 : 남3, 여3)가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의 우리나라 인구 천명당 혼인건수는 지난 45년 동안 가장 낮은 6명이었다고 한다.
직장이 없어 결혼을 못해요: 2012년 OECD국가의 15-29세 청춘 남녀의 평균 고용율은 60%이었고, 우리나라가 40%이었다. 우리나라 청춘 남녀의 60%가 백수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고용된 40% 중 정규직은 그나마 절반 이하이었다고 한다.
취직을 하지 못한 사람은 경제 현실상 결혼을 하기 어렵다. 일본의 경우, 정규직 청춘 남녀의 결혼율은 55%가 넘지만, 비정규직 남녀는 3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남자만의 결혼율을 비교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낮은 고용율이 낮은 결혼율의 주된 원인인 것이다.
결혼하기 싫어요: 그런데 경제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데도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특히 여성이 그렇다. 지난해 지속가능연구소가 전국대학생에 대하여 실시한 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대생의 절반 가량은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고 한다.
또 통계청 사회조사에서도 “결혼을 해야 한다”고 답한 여성이 52.3%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누구나 반드시 결혼을 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절반의 여성이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좋은 직장에 다니는 여성일수록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그들은 지금이 딱 좋은데 골치 아픈 결혼을 왜 하냐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시부모 관계, 출산, 육아는 그냥 골치 아픈 일인가 보다.
여성의 학력과 결혼율은 반비례?: 우리나라 여성의 경우, 학력이 높을수록 결혼율이 낮다고 한다. 즉 고졸 여성의 결혼율을 1로 보았을 때 중졸 이하 여성의 결혼율은 1.61인 반면 대졸 이상 여성의 결혼율은 0.69에 불과하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그 차이가 더 커서 중졸 이하는 1.97, 대졸 이상은 0.59라고 한다. 여성의 학력이 높아질수록 결혼율이 낮아지는 것은, 여성들이 자기보다 동등 이상의 명문 대학 출신, 또는 더 공부를 많이 한 남자를 신랑으로 선택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미 우리나라 여학생의 대학진학률은 남자를 능가하고 있다. 예컨대 2014년의 경우 여학생의 진학률은 74.6%로 남학생의 67.4%보다 훨씬 높았다. 이에 따라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고학력 신랑감의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이것이 여성이 결혼을 결심하기 쉽지 않게 만든 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출산(出産)의 문제: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체출산율은 지속적으로 낮아져 2014년에는 1.21명(1983년, 2.1명)까지 낮아졌다고 한다. 또 2014년 우리나라 초혼자(初婚者)의 평균 연령은 남성이 32.4세, 여성이 29.8세로 10여년 전에 비해 남녀 모두 두 살 가량 많아졌다고 한다.
이렇게 만혼이 증가하면 여성의 30대 이후의 출산, 즉 노산(老産)이 늘어나 추가적인 출산 여지가 감소하게 된다. 아이들이 뛰노는 가정을 점점 보기 어렵게 된다는 말이다.
가정(家庭)의 붕괴는 국가 붕괴의 전조(前兆):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전통적인 개념의 가정은 사회와 국가 구성의 기본 단위이다. 그런데 그 기본단위가 머지않아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결혼율과 출산율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가정은 특권층이나 누리는 사치품이 되고, “여보, 당신”, “엄마, 아빠” “형, 동생, 오빠” 같은 호칭은 극소수가 사용하는 낯 설은 말이 될 지도 모르겠다.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지도자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무섭다. 가정을 살리자. 나라를 살리자!
2016-05-0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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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7> 민간요법 등을 바라보는 시각
TV 특히 케이블 방송을 보면, 산에서 나는 무슨 풀이나 버섯을 꾸준히 먹었더니 어떤 난치병이 감쪽같이 나았다는 민간요법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또 방송에는 잘 안 나오지만, 민간요법이 아닌 유전자치료, 줄기세포 치료, 면역요법 등 현대의약학의 모습을 띠고 있는 치료법으로 난치병을 고친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의약 전문가들은 이런 정보를 들으면 우선 그 정보를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주 오래 전에 민간요법으로 뇌암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난 적이 있었다. 이 기사를 보고 한 의사가 민간요법자에게 찾아가 환자가 뇌암 인지, 또 나중에 뇌암이 완치된 줄은 어떻게 판단했는지 물었다고 한다.
이에 민간요법자는 백약(百藥)을 써도 낫지 않던 두통이 자신의 요법으로 사라진 걸 보면 뇌암이 나은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한다. 이처럼 질병의 진단 및 완치 판정에 대한 근거(evidence)가 부족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의약 전문가의 두 번째 반응은, 설사 그 요법이 특정 환자에게 유효하였다 하더라도, 그 사례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일반화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과학의 기본인 재현성(再現性)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질병에 대하여 사람들이 믿기 힘든 요법에 귀를 기울이는 현상은 그 병에 대하여 현대의약학이 마땅한 치료법을 제시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약학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반성부터 하여야 할 것이다. 병원에서 제공하는 치료만 받으면 반드시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면 어느 암환자가 근거 없는 치료법에 미혹 당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요법을 환자에게 권유하는 것은 범죄 행위가 될 공산이 크다는 사실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미확립 요법을 시행하는 동안 환자가 더 좋은, 잘 확립된 치료를 받을 기회를 놓친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미확립 요법을 시행하는 동안, 나을 수 있었던 병을 불치의 병으로 키우는 결과가 된다면 이보다 더 나쁜 범죄 행위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환자를 상대로 폭리를 취하려는 것이 동기이었다면 그 죄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22년전 직장암 3기 수술을 받았을 때 아내의 정성어린 간호 덕택에 나는 지금껏 좋은 결과를 누리고 있다. 아내는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에서 암환자를 만나면 ‘무엇은 먹지 마라, 무엇은 먹으라’며 정성을 다하여 조언을 한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런 조언을 거의 하지 않는다. 나의 케이스를 섣불리 일반화할 수 없으며, 나의 조언으로 오히려 환자의 병원 치료가 방해를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최근 가까운 사람이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본인과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일본에 가서 중입자 치료를 포함한 최신 치료를 받아 보면 어떻겠느냐는 의견 등의 정보와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당연히 큰 관심을 보인 환자와 달리, 주변에 있는 상당수의 의료진은 반대 내지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직 그런 방법들이 유효하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란다.
이는 실력과 양심을 갖춘 의료진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겠지만, 암 전문의도 막상 자신이 암에 걸리자 민간요법을 사용해 보게 되더라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그러니까 비전문가인 암환자가 새로운 요법에 미혹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거 없는 요법에 휘둘리다가 적절한 치료 기회를 잃는 우(愚)를 범해서도 안되겠지만, 교과서적 논리에 함몰되어 새로운 치료 정보에 스스로 귀를 막는 교만한 사람이 되어 서도 안될 일이다. 생명의 신비는 우리의 논리, 과학의 이해 범위를 뛰어넘어 오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근거 없는 믿음을 하나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왜 암에 걸리는지 잘 모르는 것처럼, 왠지도 모르게 암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치료 기전을 밝혀 보편적인 치료 방법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의약학자들의 몫이다.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병이 낫는 것이다. 그리고 나으면 낫는 것이다!
2016-04-2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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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6> 안전성 신뢰 획득이 우리나라 경제의 활로(活路)?
옛날에 일본 가전제품(家電製品)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신뢰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당시 일제(日製) 소니 티브이는 최고급 티브이의 대명사였다. 어느 해인가는 일본에 여행간 아주머니들이 줄지어 코끼리표 밥솥을 사 들고 오는 모습이 고발성 기사로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그런데 벌써 오래 전부터 해외 시장에서 한국산 티브이가 소니를 능가하는 가격에 팔리고 있다. 일부 한국 사람들은 이것이 정말일까 의아해 한다. 너무 오랫동안 일제를 신앙처럼 신뢰해 왔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어떤 제품이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도 어렵지만, 대신에 한번 신뢰를 얻으면 매우 오랫동안 소비자의 뇌리에 남는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최근 독일 자동차가 연비(燃比)를 속였다는 뉴스를 듣고도 ‘독일 자동차 회사가 정말 그랬을까?’ 하며 여전히 독일차에게 신뢰를 보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얼마 전에 일간지를 보니, 생리대와 분유(粉乳)처럼 안전성이 우선시되는 제품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취지의 글이 있었다. 중국 제품에 대한 신뢰가 낮다 보니 중국인들이 이들 제품을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구입하는 현상을 보고 내린 전망이었다. 중국 시장의 거대함을 생각할 때 대번에 공감이 가는 기사였다.
이 기사는 흔히 첨단 과학기술 제품의 개발과 수출만이 나라 경제를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 사람들은 안전성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소득의 상승속도보다 안전에 대한 소비자의 기대치 상승속도가 더 빠르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지구촌 사람들이 한국의 식품(특히 어린이 식품), 의약품 및 위생용품의 안전성을 무조건 믿게 되는 날, 이들은 더욱 더 한국 제품을 구입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될 것이다. 해외 시장에서 가짜(짝퉁)와 저품질 제품이 범람하면 할수록 이와 같은 현상은 심화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신뢰가 곧 ‘돈’임을 철저히 깨닫고 모든 상품을 정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품질은 정직함만으로 얻어지지는 않는다. 정직과 함께 기술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기술이란 제조하는 기술은 물론, 만의 하나라도 불량품이 만들어질 수 없는 품질관리 기술을 말한다.
그러므로 식약처를 비롯한 정부는 안전성이 중시되는 제품들(생리대, 기저귀, 마스크, 화장지, 유아용품, 식품, 건강기능식품, 유아용 식품 등)에 대해서는 단 한 건의 불량제품도 국내에서 제조 유통될 수 없음을 보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기술이다. 그냥 “한국 제품 믿어 주세요”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한국 제품은 믿을 수 밖에 없는 완벽한 관리 시스템을 통하여 제조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는 간단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첨단 기술 제품을 개발하는 것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소요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한국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믿음이 확립되면, 과거에 우리가 일제 전자제품이나 독일제 자동차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세계의 사람들은 모든 한국 제품의 품질을 신앙처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날이 올 것이다. 비용과 시간을 투입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만 되면 이들 제품의 중국 등지로의 수출은 첨단 기술 제품 이상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제약회사도 신약개발에 여전히 힘을 쏟아야 되겠지만, 기존 의약품의 품질에 대해서도 모든 국민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계속하여야 한다. 아직도 일부 국민들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국산약이 소위 미제 약이나 일제 약보다 품질이 좀 떨어지지 않나 의심한다.
신뢰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제약업계가 배전의 노력으로 품질 보증 시스템을 가동시킨다면 우리나라 의약품은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인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에라도 미꾸라지 한 마리가 호숫물 전체를 흙탕물로 만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다시 한번 챙기고 정비해야 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국산 의약품 파이팅!!
2016-04-0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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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5> 6년제 약대 신입생들의 호흡
지난 3월 2일 서울대 약대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우리나라 근대 약학교육의 역사, 맞춤약학의 동향 등을 소개하고 뒤이어 정직, 감사, 겸손, 성실하게, 그리고 긴 호흡으로 인생을 살라는 잔소리를 추가하였다. 오늘은 ‘긴 호흡’에 대하여 부연 설명하기로 한다.
나는 1971년에 약대를 졸업하고 그 해 6월에 입대하여 1974년에 육군사병으로 제대하였다. 군대에서 34개월이라는 ‘세월’을 흘려 보냈다. 제대 후 영진약품에 입사하였는데 회사는 나에게 연구과를 맡겼다.
어느 날 회사로부터 어린이용 생약 시럽제를 만들어 보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시행착오 끝에 외관상 제법 그럴듯한 시럽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럽제가 과연 제대로 만들어진 것인지, 또 선진국의 제약회사도 나처럼 주물럭 주물럭 해서 시럽제를 만들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제대로 약을 만드는 이론과 기술을 공부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본시 촌놈인 나는 유학을 어떻게 가는 것인지 알지 못 하였다. 아는 사람 중에 유학을 떠난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77년에 대학 동기인 C군이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 이거다’ 싶어 C군에게 길을 물어 보았더니, 우선 서울대학교의 정식 조교 발령을 받은 다음 문부성 장학생 선발 시험에 붙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 조교 발령을 받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이었다. 차라리 교수되는 것이 더 쉽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었다. 나는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대 약대 약품분석실에 들어 갔다. 당시 분석실에는 매우 똑똑한 후배가 방장(房長) 노릇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1년여 무보수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한 끝에 드디어 조교 발령을 받았다. 조교가 되자마자 문부성 장학생 시험 준비에 착수 하였다. 맹렬한 공부 끝에 마침내 그 해 중에 수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드디어 1979년 4월 9일 아내 및 두 아들과 함께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 때 내 나이가 무려(?) 32살 이었다.
내가 일본에 간지 2년 후, 유한양행에 다니던 대학동기 Y군도 같은 방법으로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내가 유학을 떠난 32살도 C군에 비해 2년이나 늦어 마음이 초조하였는데, Y군은 나보다도 2년이나 더 먹은 34살에 유학을 가다니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한 참 지나고 보니 C나 나나 Y나 다 같이 교수 노릇을 하며 늙어가기는 마찬가지이었다. 유학을 떠나던 당시에는 엄청난 차이로 느껴졌던 30살, 32살, 34살이 실은 다 그게 그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조금 긴 시간 스케일로 볼 필요가 있구나 깨닫게 되었다.
6년제 하에서 약대에 들어 온 신입생의 50%는 2년 이상, 나머지 50%는 3년 이상 다른 학과에서 공부를 마친 학생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약대생들은 자신들의 나이가 제법 많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문득 내가 대학에 다니던 때에, 군대 갔다 온 남자 복학생들이 강의실 뒷자리에서 인생의 원로(元老)라도 되는 양 점잔을 떨던 모습이 떠 올랐다.
그래서 그날 나는 신입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여러분들이 다른 학과 학생들보다 몇 살 더 먹은 것은 인생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자신을 다 늙은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초조해 하지 말고 긴 호흡으로 공부하라, 인생에서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고 한다. 그러니 가능하면 대학원에 진학해서 더 깊이 공부하라, 젊었을 때 공부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보지 못 하였다. 지금 우리나라 제약업계는 신약개발이라는 밀물을 맞고 있다. 바로 이 시기에 여러분들의 헌신을 통하여 우리나라가 신약개발 강국의 꿈을 이루길 기원한다’
그러나 신입생들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그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잔소리를 내가 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들을 사랑하는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으면 다행이겠다.
2016-03-2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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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4> 쏘오데스까?와 소통(疏通)
우리 모두는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권력자와 국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노인과 젊은이,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를 비롯한 모든 갑(甲)과 을(乙) 사이에 소통이 잘 되면 오해가 풀리고 서로 이해하게 되며, 마침내 세상의 많은 갈등이 풀리게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소통이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소통의 첫 단계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傾聽)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딴 생각 또는 내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에 남의 말이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속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진다.
우리 손녀는 어쩌다 내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들면 “할아버지 나 그거 벌써 알고 있거든” 하며 내 말을 자른다. 나는 민망해져서 “어떻게 알았어?” 물으면, 책에서 봐서 다 알고 있단다. 이렇게 되면 나는 설명을 계속할 수 없다.
이 경우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손녀와의 대화이니까 괜찮지만, 만약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둘 사이에 소통은 첫 걸음도 떼기 어려울 것이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소통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문제는 경청하는 실제 기술(技術)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일본인의 대화법이 머리에 떠 오른다. 일본 사람은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면 설사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연신 쏘오데스까? (그렇습니까?)와 혼또데스까? (정말입니까?)를 반복해 준다.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창(唱)이나 마당극에서 얼쑤! 하며 추임새를 넣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맞장구를 쳐 주면 말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내 말을 경청하는구나 생각하고 신이 나서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 놓게 된다. 상담전문가에 의하면 사람은 속 마음을 대화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말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화 초장(初場)에 경청해 주지 않으면, 상대방이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단계로 까지 대화가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혹시 일본 사람들의 맞장구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단지 습관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무라이 문화가 빚은 ‘남에 대한 공포감’에서 비롯된 반응일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사무라이가 말씀하시는데 감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자초(自招)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일본인들은 상대방의 말씀 사이사이에 그렇습니까? 정말입니까?를 반복함으로써 ‘어르신 말씀을 계속 잘 듣고 있으니 계속하시옵소서’ 하는 의미로 이런 추임새를 넣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는 ‘쏘오데스까’는 우리 창에서의 신명나는 추임새와 달리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아부(阿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는 사무라이가 없었기 때문에 남, 특히 약자(弱者=乙)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갑은 을의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시간 낭비일 수도 있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경청을 위하여, 그리고 소통을 위하여 우리도 일본인처럼 맞장구를 치거나 우리 고유의 추임새를 장려하는 운동을 펴보기를 제안한다. 당장에 진심으로 맞장구를 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므로, 우선은 기계적 또는 반사적으로 맞장구 치기 운동을 펴 보는 것은 어떨까? 교회의 상담 전문가는 ‘상대방의 말을 고대로 따라 하기’를 제안한다.
예컨대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엄마 나 오늘 선생님이 혼내서 기분 나빴어”라고 하면, 엄마는 일체의 다른 소리를 하지 말고 “오늘 선생님이 혼내서 기분이 나빴구나”라고만 하라는 것이다. “니가 뭘 잘못했길래 혼을 내셨겠지!”라고 말하고 싶더라도 꾹 참고 아이의 말을 그대로 반복해 주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도 그냥 일본 사람처럼 ‘그렇습니까? 그래요? 정말이요?’를 사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삼일절 아침에 일본인 흉내를 내자는 주장이 좀 거시기(?) 하지만 누구 말마따나 배울 건 배워야지 어떠하겠는가? 참고로 나는 아침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이 글을 쓴다.
2016-03-0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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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3> 은칠기삼(恩七技三)
사람들은 성공의 요인으로 운칠기삼(運七技三)을 꼽는다. 성공의 7할은 운(運) 때문이고, 기술(실력 또는 재주)의 기여도는 3할을 넘지 못한다는 생각의 표현이다.
사실 나름대로 성실히 사는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내 친구 한 사람은 두 번이나 가게가 수용(收用)을 당하면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직도 어렵게 살고 있다. 또 어떤 통닭집은 조류 독감이 유행해 문을 닫게 되고, 어떤 구멍가게는 불쑥 옆에 들어 온 대규모 마트 때문에 타격을 입는다. 이처럼 세상에는 운이 없어서 인생이 풀리지 않고, 그래서 억울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로 많다. ‘운칠기삼’이 4자성어로 자리를 잡은 배경일 것이다.
약국의 성패에 있어서도 제일 중요한 건 길새(약국의 위치)라고 한다. 약사의 실력은 그 다음이란다. 화투에서도 손에 쥔 패가 좋은데 지는 사람이 있고, 쥔 패가 나쁜데 뒷장이 잘 붙어 승리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결혼을 하고도 파탄을 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미약하게 시작을 하였지만 창대(昌大)한 결말을 맺기도 한다.
화투에서 뒷장이 잘 붙는 사람, 또 인생이 순조롭게 잘 풀리는 사람을 재수가 좋은 사람, 또는 운(運)이 좋은 사람이라 부른다. 아무래도 화투나 인생은 운(運)이 좋아야(또는 재수가 있어야) 성공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신약개발도 운이 따라야 성공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운이 왜 따르는지를 미리 알지 못한다.
한편 크리스찬들은 운(運)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恩惠)’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은혜로 받았으니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린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찬에게는 운칠기삼이 아니라 은칠기삼(恩七技三)이 더 타당한 말일 것이다. 다만 언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은혜가 왜 임하는지는 크리스찬도 그 비밀을 미리 알지 못한다.
나는 결혼식 주례사에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결혼은 마치 신랑 신부 두 사람이 조그만 나룻배를 저어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와 같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은 합심해 목적지 항구 방향으로 노를 저어야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아무리 합심해 노를 저어도 도중에 태풍을 만나면 배가 뒤집힐 수 있다.
그러므로 항해 중에 순풍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순풍은 두 사람의 능력이나 기술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은혜의 시(時)와 양(量)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비밀’이므로,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성실하게 노를 저으며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일뿐이다. 그야말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두 사람의 인생 항로에 하나님의 축복, 즉 순풍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한다.’ 라고 말한다.
크리스찬은 내 노력으로 받지 않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 즉 은혜라고 믿는다. 나의 성공은 물론, 때때로 자랑하는 외모, 두뇌, 성격, 재산, 배우자, 친구, 출세, 건강 등의 모든 것이 내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은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저절로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믿음이 좋은 크리스찬일수록 범사(凡事)에 미리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을 운이나 요행(僥倖)의 결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 은혜의 결과로 받아 들인다. 또 내 기술(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만에 빠지지 않고 범사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 된다. 사람이 최선을 다 해도 실패할 수 있다는 은혜의 비밀, 즉 은칠기삼(恩七技三)의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만큼 이루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고 함부로 비웃지 않는다. 마침내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다.
새해에도 여전히 지구 도처가 전쟁과 증오로 넘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 마음에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감사의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여야 한다. 그것만이 인류의 평화를 회복하는 근본적인 길일 것이다.
2016-02-2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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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2> 약학진사(藥學進士) 학위는 누구의 아이디어?
하기(夏期)약학강습회가 개최되기 4년 전인 1910년에 이미 대한제국은 근대적인 약학교육을 실시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즉 1910년 2월 7일에 공포된 ‘대한의원부속의학교규칙(내부령 제5호, 관보 제4596호)’에 따르면, 1910년 대한의원부속의학교 내에 정원 10명의 3년제 약학과를 설치하여 근대 약학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학비는 전액 관비(官費)로 지급하고 졸업 시에는 약학진사 칭호를 수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무산(霧散)되었다.
1914년의 하기 강습회는 한국인 이석모(李碩模)에 의해 추진되었지만, 정식 약학 교육 기관인 1915년의 조선약학강습소와 1918년의 조선약학교의 개교에는 모두 일본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한일 강제병합 전인 대한제국 시절에 이와 같은 관립(官立) 약학과 설립 계획이 있었던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일본인 고지마 다까사또(兒島高里)가 조선약학교의 초대 교장인 조중응의 작고를 애도하는 조사(弔辭)가 매일신보(1919년 8월 27일자)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기사를 읽고 대한제국 시절의 약학과(내부령 제5호)도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고지마의 아이디어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지마는 1859년 일본 출생, 1892년 동경제국대학 약학과 졸업, 1908년 대한의원 약제관 초빙을 받은 후 조선총독부 등 근무, 하기강습회 강사 역임 후 1919년부터 5년간 조중응의 뒤를 이어 조선약학교의 2대 교장을 지낸 사람이다. 조사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약학계의 큰 은인(恩人)인 조중응 자작이 흉거(凶去)하였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무어라 할 말을 모르겠다. 이제 겨우 서광(曙光)이 비치는 듯하던 조선의 약학계가 이와 같은 큰 은인을 잃은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다.
13년 전 구한국 정부의 내정이 개혁되어 대관원(大觀院) 안에 병원의학부(病院醫學部)가 생길 때에, 약학에 대해서는 아무 계획이 없는 것이 매우 섭섭하여 내부대신 등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보았으나 약학부를 신설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농상공부대신이던 조중응에게 의논하였더니 그는 내 의견에 적극 동조하여 급히 조의(朝議)를 열어 약학부도 신설하게 조치하였다. 그러나 2년 뒤 한일 병합에 의해 불행히 관제(官制)에 약학부가 없어지게 되었다.
나는 사립(私立)으로라도 약학을 장려하려고 결심하고 조 자작과 의논하였더니 흔쾌히 동의하고 노력해 주었다. 그 결과 소학교의 집을 빌려 야학(夜學)으로 조선약학강습소를 설립(1915년) 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조 자작은 약학교육 발전에 많은 힘을 썼다. 몇 년 후 약학강습소를 조선약학교로 이름을 고치고 (1918년), 훈련원(訓練院) 넓은 마당에 교사를 새로 짓고, 교육 내용을 충실하게 하였다. 학생수도 1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조 자작은 신병 때문에 사양하였지만, 나는 13년의 오랜 역사가 있는 약학계의 은인인 조 자작이 교장을 맡아야 한다고 적극 추천하였다. 작년 (1918년) 섣달에는 여러 번 병문안을 하고 약학계에 대하여 상의를 드렸으나 최근에는 일부러 위문을 하지 않고 속히 쾌차하기만을 기도하였다.
학교 교사의 신축이 완료되었을 때에도 자작이 나은 후에 성대한 개교식을 거행할 생각이었다. 또 혹시 흥분하면 병세에 좋지 않을까 염려되어 학교 신축에 대해서도 보고를 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운명을 하시고 보니 차라리 생전에 13년간이나 고심하신 결과를 보고 드려 기쁘게 해드릴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 자작의 장례를 학교장(學校葬)으로 모시고 싶으나 조선의 기둥 돌이 되시는 분의 일이라 경솔하게 결정할 수 없다. 아무튼 가장 좋은 방법으로 자작을 조상(弔喪)하고, 또 그의 뜻을 이어 끝까지 약학을 발달시킬 결심이다.”
대한제국의 근대 약학 교육기관의 설립 시도가 한국인의 아이디어 이었기를 바라던 나는 적잖이 실망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먼저 깨달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6-02-1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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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1> 시상식(施賞式)
작년 10월 및 11월에 대한약학회 및 FDC법제학회로부터 공로상패를 받았다. 퇴임 후의 상이라 민망함도 있었지만 아무튼 감사하게 잘 받았다. 그런데 상패에 쓰여 있는 글을 읽어 보니 초등학생의 우등상처럼 내용이 애매모호하고 정형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상(賞)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1990년도에 과학기술처에서 주는 ‘우수연구논문상’을 받은 일이 있다. 그 때 시상식장에 들어 갔더니, 주최측이 회의실 같은 곳에 수십 명의 수상자를 몇 줄로 도열시켜 놓고 “아무개 외 몇 명”이라고 이름을 부른 뒤 신속하게 상패를 나누어 주었다. 작은 쟁반처럼 생긴 알루미늄 상패에는 수상자(受賞者)의 이름보다 시상자(施賞者)의 이름이 더 크게 새겨져 있었다. 나누어주는 상패를 받은 나는 웬 일인지 그다지 영광스러운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2001년에도 모처에서 주는 상을 받으러 간 일이 있었다. 시상식이 시작되자 개회사와 명사들의 축사가 장시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작 수상자들에게 대한 시상 순서는 눈 깜박할 사이에 끝나 버렸다. 수상자들의 소감을 듣는 순서도 없었다. 시상식에 뒤이은 만찬에서도 나를 비롯한 수상자들은 시종 뻘쭘한 기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중에 깨닫고 보니 우리나라의 시상식은 대개 상을 주는 사람, 즉 시상자가 주인이고 수상자는 들러리인 경우가 허다(許多)하였다. 주객(主客)이 전도(主客顚倒)된 것이다. 주객전도의 정도는 보통 시상식장에 늘어선 화환의 개수에 비례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행사의 이름부터가 상을 받는 수상식(授賞式)이 아니고 상을 주는 시상식(施賞式)이다. 문득 어디선가 본듯한 글귀가 떠오른다. 원래 훈장이나 상패는 돈 안들이고 백성들을 감동시켜 다스리는 독재자의 수단이었다나?
그런데 2001년도 1월의 어느 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약국신문사 사장이라는 분이 내게 전화를 걸어, 내가 그 신문사에 의해 ‘2000년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어 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런 상 제도가 있는 줄도, 그리고 내가 그 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사장님은 곧장 직원 한 명과 함께 불쑥 내 연구실로 찾아와 상패를 전해 주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상패를 보니 이 상의 시상 날자는 2000년 12월 25일 즉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나중에 돌아보니 이 상에는 다른 상에는 없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우선, 화려한 시상식이 없었다. 신문사 사람 둘과 내가 내 연구실에서 만나 상패를 주고 받은 것이 전부였다. 화환도 박수치는 사람도 없었다. ‘약국신문사’가 이런 방식으로 상을 주는 이유는, 무엇보다 거창한 시상식을 개최할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일지 모른다.
둘째, 상패에 수상자의 공적이 200자 넘는 글자로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지금도 누가 내 공적을 조사해 썼는지 모른다. 다만 느낀 것은 시상자의 정성이다. 셋째, 상패에는 천연색 사진과 함께 내 이름이 큼직하게 인쇄되어 있었지만, 시상자의 이름은 아예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약국신문’이라는 로고만 겸손한 크기로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시상자의 고결한 인격이 느껴진다.
나는 학교를 퇴임할 때에 상당수의 상패를 처분하였다. 그러나 약국신문사의 이 상패만은 지금껏 식탁 위에 모셔놓고 때때로 감동하며 바라보곤 한다. 지금까지 내가 받은 여러 상 중 이 상이 가장 아름답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시상자가 수상자를 찾아와 상을 주고 가는 조촐함, 그래서 시상자가 아닌 수상자가 주인공이 되는 시상식, 상패에 수상자의 구체적 공적을 적는 정성, 무엇보다 시상자의 이름을 상패에 드러내지 않는 파격적인 겸손, 이런 특성을 갖고 있는 이 상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만약에 세상의 소위 높은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상을 줄 때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약국신문사의 이런 마음, 이런 태도를 본 받을 수만 있다면 세상은 한결 아름다워질 것이다. 어찌 상(賞)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랴.
2016-01-2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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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0> 약대 옛 교가(校歌)의 발견
‘서울대 약학역사관’의 장윤이 연구원은 최근 우연한 기회에 중고 서점에서, 1962년 2월 25일에 발간된 서울대약대 동창회 명부를 발견하여 1만원에 구입하였다. 이 책은 가로 15cm, 세로 21.3 cm, 총 84페이지의 작은 책자로 세로 쓰기, 왼쪽 넘겨보기로 제작된 책자이다.
아마도 이 책이 우리 나라 사람이 주축이 되어 발간한 최초의 서울약대 동창회 명부가 아닐까 한다. 이 명부에는 조선약학교, 경성약전, 사립서울약학대학 및 국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일본인 졸업생의 이름은 실려 있지 않다.
이 명부의 발간사는 당시의 한기엽(韓基燁) 동창회장이 썼고, 축사는 한구동 학장이 썼다. 이 책의 도입부에는 한기엽 회장, 한구동 학장 및 이호벽 전 회장의 사진이 실려 있으며, 구 교사(을지로 교사)와 함께 연건동 캠퍼스의 1호관(교수연구실동) 및 2호관(학생관)의 사진도 실려있다. 사진을 보면 당시 2호관은 마무리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62년 11월 준공)
한구동 학장은 축사를 통하여 ‘동창회가 약학대학의 연례 행사인 ‘전국남여중고등학교 연식 정구대회’를 후원해주어 감사하다’고 하였다. 당시 약대가 전국 규모의 연식 정구 대회를 매년 주최하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 대회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식 정구대회이었다고 한다.
약학대학의 옛 교가
이 책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이 책에 김광균(金光均) 작사, 김성태(金聖泰) 작곡의 ‘약학대학의 옛 교가’가 실려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여태껏 그런 교가가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 교가는 1945년의 광복 이후에서 1950년 서울대학교에 편입되기 전, 즉 사립 서울약학대학 시절 아니면, 사립약학대학이 1950년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된 이후 초기의 교가일 것이다.
그러나 사립 서울약학대학 시절이 여러 면에서 혼란스러웠던 사실을 생각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 교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진리의 횃불 두 손에 들고, 성동(城東)벌 고대(高台) 위에 모인 우리들, 배움의 길은 멀고 험하나, 희망에 가득 찬 깃빨 올리자, 희망에 가득 찬 깃빨 날리자.
2. 조국은 우리 것 힘을 합하여, 거치른 황토 밭에 씨를 뿌리자, 장차올 영광의 날 두 품에 안고, 하나의 이름없는 초석(礎石)이 되자.
3. 우리의 갈 길을 누가 막으랴, 장하다 약대(藥大) 500(五百)의 학도,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
가사만 보아도 약학도의 웅지(雄志)가 느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창회 명부에는 가사만 실려 있을 뿐 교가의 악보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의 기술상 악보를 인쇄하기 어려웠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악보를 찾아 이 고색창연한 교가를 다같이 합창해 보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저기를 뒤져보고 몇몇 선배님들께 문의도 드려보았지만 이 교가의 존재 사실조차 아는 분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약사공론에 이 악보를 찾는다는 광고 기사를 부탁 드렸다. 언젠가 악보가 발견될 날을 기대해 본다.
경성약학전문학교 교가
한편 사립 서울약학대학 이전의 경성약학전문학교 시절에도 일본어로 된 교가가 있었다.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산은 움직이지 않고, 한강의 물은 끊이지 않는다. 그 한양의 한 성지(聖地)에 약연(藥硏)의 빛을 우러러 모여든 우리들의 학사(學舍), 반도 문화의 진전에 큰 사명을 짊어지고 청춘에 타오르는 우리 학도들, 자강불식(自强不息)의 교풍 속에 부지런히 힘쓰는 모습 실로 씩씩하다. 아침 해에 비치는 남산의 짙은 녹음, 영구(永久)히 빛나는 우리들의 이상, 자 장래의 큰 희망에 끝없는 행복을 자랑하세.(이 번역은 약학역사관의 조누리 연구원의 초역을, 서울대 인문대학의 사이토 아유미 교수가 감수한 것이다)
아쉽게도 이 교가의 악보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새해에는 새로운 약학사 관련 자료가 더 많이 발굴되기를 기대하며, 근하신년(謹賀新年), 독자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 드린다.
2016-01-1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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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9> 아시아 약제학회(AFPS)
지난 11월 25일부터 27일까지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 AFPS(Asia Federation for Pharmaceutical Sciences)에 다녀 왔다. 요즘엔 외국에 오래 머무는 것이 싫어서 꼭 필요한 최소한의 기간만 있다가 돌아 오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AFPS는 ‘아시아 약학회’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참가자들이 주로 약제학 전공자들이라는 점에서 ‘아시아 약제학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AFPS는 2007년부터 2년마다 개최국을 바꾸어 가며 열리고 있는데, 재작년에는 우리나라 약제학회의 주최로 제주도에서 열린 바 있다. AFPS는 2002년 나와 일본의 스기야마 교수가 시작한 ‘한일(韓日) 약제학 심포지엄’이 기원이다.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 약제학회의 회장이었던 나와 스기야마 교수는, 각국의 약제학자 10명씩이 구두로 발표하는 심포지엄을 2년마다 열기로 합의하였다.
나는 이 합의를 이룬 것이 매우 기뻤다.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자부하며 미국이나 유럽하고만 심포지엄을 열어 왔던 콧대 높은 일본 약제학계가 마침내 우리나라 약제학의 수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고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회 심포지엄은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렸다. 우리 측은 최고 수준의 연자 10명을 선정하는 등 최선의 준비를 하였다. 그 결과 심포지엄은 대성공이었다. 즉 우리 측 연자들의 영어 수준도 매우 높았고 영어 발표도 훌륭하였다. 그 심포지엄은 결국 일본 학자들이 우리나라 약제학의 수준을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보이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연자 풀이 엄청나게 큰 일본과 달리 우리로서는 10명의 연자를 선정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연자 수 10명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연자 수의 상한선이었다. 내가 심포지엄을 매년이 아닌 2년마다 열자고 제안한 것은 이처럼 우리의 연자 동원 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교토에서 2004년에 열린 제2회 한일 약제학 심포지엄도 성공이었다. 1회 때와 마찬가지로 양국으로부터의 참가자 모두가 심포지엄의 내용과 진행에 만족하였다. 당시 식약청장으로 신분이 바뀌어 있던 나는 그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그 후 일본 호시(星)약과대학 학장을 역임한 나가이 교수(Nagai T)는 이 심포지엄을 범 아시아 차원으로 확장하자고 제안하였다. 우리나라 약제학회 임원들은 이 제안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였다. 모처럼 한일 간에 성사된 심포지엄의 수준이 낮아질뿐더러 한일 간의 유대도 느슨해질 우려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일 심포지엄의 한 상대방인 일본측의 대장 나가이 교수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데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시아약제학회(AFPS)는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태동되었다. 2007년의 일이다.
그 동안 AFPS 학회는 처음에 우려했던 대로 과학의 수준이 많이 낮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시아 학회라는 이름 때문에 아시아 각국에 연자를 안배할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일본과 한국 외에 약제학을 수준 높게 연구하는 아시아 나라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충 노는 기분으로 AFPS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나도 그 동안 반쯤은 그런 자세로 AFPS를 바라보곤 하였다.
이런 인식 하에 이번 학회에도 비교적 가벼운 기분으로 참석하여 26일 오후에 ‘나노 의약과 광조사 치료법’이라는 주제로 초청강연을 하였다. 그러나 이 가벼운 기분은 내가 다음 날 오전 중국 베이징 대학의 Zhang Qiang 교수와 태국 출라롱콘 대학의 Pithi Chanvorachote 부교수의 강연 좌장을 맡으면서 완벽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이 두 교수의 연구 수준이 놀랄 만큼 높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태국 교수는 겨우 35세의 약관(弱冠)이었다. 이에 나는 큰 충격을 받고 다소 자만에 빠져 있던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충격을 우리나라 약제학자들에게도 반드시 전달해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국제 학회에 참석하면 언제나 사전에 예기하지 못했던 자극을 받고 돌아오게 된다.
2015-12-3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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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8> 일본약사학회(日本藥史學會)
지난 11월 20일부터 23일까지 일본 나라(奈良)에서 열린 ‘일본약사(藥史)학회 2015년회’ 및 ‘일중한(日中韓) 국제약사(藥史)포럼’에 다녀 왔다. 이은방 명예교수님, 김진웅, 박정일 교수, 이봉진 학장 등은 하루 먼저 19일에 출발하였다.
나는 21일(토)에 열린 년회에서 ‘한국근대약학교육 백년의 역사’에 대해서 구두 강연을 하였고, 그날 오후 포럼에서 좌장을 맡았다. 일본에 의해 시작된 우리나라 근대 약학 교육의 역사를 일본인들 앞에서 발표하게 되어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박정일 교수는 ‘History of Ginseng Research’에 대하여 포스터 발표를 하였다.
21일에는 총 8개의 구두 발표가 있었는데, 모두 10분간 발표에 2분간의 토론시간이 주어졌다. 1980년 대에 일본 DDS학회에 참석하였을 때에도 구두 발표 시간이 총 12분이었다. 그만큼 일본 학회에서는 12분 발표가 보편화된 것 같았다. 백년의 역사를 설명해야 하는 나에게 10분은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발표자 모두는 시간을 엄수하였다.
뒤이어 열린 국제 포럼의 주제는 ‘글로벌 상품으로서의 조선인삼-일본, 중국, 조선에서의 역사-‘이었다. 나는 중국의 肖永芝(Xiao) 교수와 공동으로 좌장을 맡았는데, 사실 일본어로 보는 좌장은 처음이라 약간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20일, 김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 일본약사학회 츠타니 회장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하였다. ‘걱정하실 것 같아 좌장 시나리오를 적어 보내니 참고하시라’는 내용이었다.
시나리오를 살펴보니 좌장을 볼 때 그대로 읽으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좀 안심이 되었다. 간사이 공항에 도착 후 리무진 버스로 1시간여를 달려 ‘나라 호텔’에 도착하였다.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프린트 된 그 시나리오가 내 방에 들어와 있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일본 사람들의 섬세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였다. 덕분에 다음날 좌장 역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나라’는 옛날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 인삼에 관한 한중일 국제 포럼을 여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먼저 게이오(義塾) 대학의 다시로(田代 和生) 명예교수가 ‘일본 에도 시기의 조선인삼의 교역과 국산화’에 대하여 강연을 하였다.
두 번째로는 규슈 대학 인문학부에 유학중인 중국인 여학생 童德琴(Tong, Teqin)이 발표하였다. 그녀의 주제는 ‘명치 초기의 일본의 조선인삼 산업무역정책과 중국시장’이었다. 마지막 연자는 일본에서 태어나 현재 동경이과대학대학원 과학연구교육과의 신창건(愼蒼健) 교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인삼정책 - 전매정책, 무역정책, 유용식물 탐구’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신교수는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도 유창하게 하는, 활달하며 친근감이 가는 학자이었다.
포럼에서 나온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자면,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조선인삼의 인기가 매우 높아 인삼 1근에 요즘 돈으로 몇 천 만원이나 호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조선 인삼을 국산화(일본 국내 재배)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경주하였다.
조선으로부터 인삼 씨앗을 입수하여 여러 농가에서 시험 재배시키는 등의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인삼 재배에 성공하면서 일본은 일본 인삼을 청국으로 수출하게 되었다. 중국 학생의 발표에 의하면 청국이 수입한 인삼의 절반이 일본 인삼이었고, 나머지 절반이 미국 인삼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인삼의 원조인 조선인삼이 차지하는 비율은 수입량의 1% 정도로 매우 미미한 위치로 전락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매우 세밀한 부분에 까지 연구의 폭을 넓히고 있는 일본 약학사 학계의 연구 상황이 몹시 부러웠다.
22일(일)에는 학회 참석자들과 함께 ‘나라’현에 있는 각종 약 관련 박물관을 둘러 보았다. 간판이나 광고지 등 소소한 물건까지 수집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섬세함에 새삼스레 놀랐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우리나라 약학사 연구의 나아갈 바 등에 대하여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2015-12-1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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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7> ‘참 좋은 것 같아요’
오늘은 우리 말 중 좀 이상하고 거북하게 사용되고 있는 표현들을 다루고자 한다.
그런 표현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물건을 사고 계산대에 가서 값을 치르려고 하면 담당 직원이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 ‘계산을 해 보니 얼마입니다’가 아니라 ‘내가 계산하는 것을 도와주겠다?’ “십만 원 되시겠습니다”도 웃기는 표현이다.
학회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이 “지금부터 발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연자를 소개할 때 “아무개를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 ‘시작하겠습니다’와 “소개하겠습니다’가 바른 표현이라고 한다.
“아침식사 됩니다”와 “좋은 하루 되세요”도 좀 이상하다. 각각 ‘아침 식사 준비할 수 있습니다’와 ‘오늘 하루를 잘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뜻일 터인데 좀 더 나은 표현을 찾아 봐야 할 것이다.
유식한 사람들의 토론을 듣다 보면 ‘일정 정도 책임이 있다’라든지, ‘영향력은 제한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그냥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라든지,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하면 더 알기 쉬울 것이다. 최근 대화 중에 ‘나의 지인(知人)’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많은데, 과거에는 그냥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나는 ‘지인’보다는 ‘아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귀에 편하다.
자기의 재능을 ‘십분’ 활용한다는 표현이 있다. 내가 알기로 일본어에서는 ‘充分(충분)’을 간단하게 쓸 때 ‘十分(십분)’ 이라고 쓴다. 일본어에서는 充分의 발음이 十分과 똑같이 ‘쥬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充分’과 ‘十分’의 발음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충분’을 ‘십분’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십분’은 있을 수 없다. ‘충분’만이 옳은 표현이다.
사람 중에 말끝마다 ‘제가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또는 ‘맞는 부분입니다’ 식으로 ‘부분’이라는 표현을 오용 남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의미 전달상 적합하지 않은 ‘부분’에서 사용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또 ‘염두(念頭)하다’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염두에 두다’의 틀린 표현이다.
방송에 나와 인터뷰에 응하면서 “저는 그 때부터 굳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는 식으로 자신의 과거사를 현재형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사를 현재형으로 표현하면 신기하게도 그 사람이 마치 위인이나 영웅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과거사가 역사적인 일처럼 들리기도 한다. 위인전이나 영웅전 같은 전기에서 그런 현재형 표현을 많이 사용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현재형으로 말하는 것은 우선 문법적으로 틀렸고, 대부분의 경우 말하는 사람을 교만하게 보이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피해야 할 일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지만, ‘생각된다’와 ‘느껴진다’는 ‘생각한다’와 ‘느낀다’로 표현해야 맞다. 우리가 이처럼 수동태 표현을 남용하게 된 것은 십중팔구 일본어의 영향이다. 일본인은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다’고 능동태로 표현하는 것을 꺼린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이 ‘된다’고 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진다’고 책임 회피성 표현을 하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수동태로 표현하는 것이 예의였을 것이다.
“단풍 길을 걸으니 기분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처럼 ‘좋은 것 같아요’도 너무 오남용 되고 있는 비겁한 표현이다. “단풍 길을 걸으니 기분이 참 좋네요”하면 될 일인데, “정말 기분 좋은 것 맞나요?”라고 누가 추궁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책임을 회피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일본어의 영향일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느끼고, 이런 것이 좋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매우 비겁한 언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그만큼 험해졌음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평화를 바라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파리 테러의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바이다.
2015-12-0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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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6> 부패의 추억
약 한달 전, 우연한 기회에 1989년에 미국에서 우리 부부에게 세례를 주신 박창환 목사님이 서울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늘 존경해 마지않던 그분과 헤어진 지 무려 26년만의 일이었다. 그 분이 살고 계시다는 장신대 기숙사로 찾아 뵙고 보니 모든 것이 감격이었다.
우선 92세라는 연세에도 여전히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는 것이 놀라웠고, 아직도 일주일에 2-4시간씩 신학생들에게 히브리어와 헬라어 강의를 하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신학 교육이 부실한 남미에 가서 참된 신학교육을 시킬 계획이라는 사실이었다.
감격의 해후를 한 후 내 근황을 보고 드렸더니, “여기 저기 다니면서 특히 약사님들에게 강의를 하신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라고 하셨다. 나는 ‘정년 퇴임 후에도 할 일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라는 말씀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목사님은 곧 이어 내게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강의하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평소 정직을 강조하시던 목사님이지만 다시 한번 목사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은사이신 고 김신근 교수님이 한국동란 때 말단 부대의 약제장교로 근무하던 때의 일이란다. 하루는 상부에서 DDT 한 드럼통을 잘 받았다고 싸인 해서 올려 보내라는 서류가 한 장 도착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드럼통은 보이지 않았다. 위 부대에서 아래 부대로 내려 오는 도중에 여기 저기서 다 빼 돌렸기 때문이었단다.
내가 1971년 육군의 모 특과 학교에 입학한 날, 나와 함께 입학한 졸병 모두는 갖고 있던 돈 전부를 부대 간부에게 뺏겼다. 각자 돈을 소지하고 있으면 고참들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으니 안전하게 중대본부에 맡기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더니 매일 저녁 모두에게 빵을 한 개씩 나누어 주었다. 웬 호사인가 했더니 월말에 피교육생들의 봉급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우리가 받을 봉급에서 먹은 빵 값을 제하니 한 푼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또 희한하게도 그 학교는 피엑스에서 막걸리를 사 마신 사람은 그날 저녁 점호를 면제시켜 주었다. 저녁 점호는 당시의 일과 중 가장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술을 마신 졸병에게 내무반 침상에 누워서 점호를 면제받게 해 주다니, 세상에! 그러니 너도 나도 집으로 술 사 마실 돈을 부치라는 전보를 칠 수 밖에.
또 8-90년대만 하더라도 운전자는 지갑에 면허증과 함께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끼워 넣고 다녀야만 했었다. 교통경찰이 면허증 제시를 요구할 때 지갑을 건네주면 그 오천 원권을 꺼내 갖는 대신 위반 사실을 눈감아 주곤 하였기 때문이다. 교통 경찰을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한 채 살 수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돌아 보면 우리의 과거는 이처럼 온통 부패와 부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또 이런 세태는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개선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가? 이제는 교통경찰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또 동사무소나 구청의 민원 창구에도 과거에 만연했던 급행료가 없어지는 변화가 생겼다. 분명 군대도 지금은 엄청 달라졌을 것이다.
얼마 전 친구가 산행 중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단다. 119에 연락하니 10분도 안되어 대원이 출동하여 산중턱까지 들 것을 들고 와 병원으로 날라 주었다. 친구는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 10만원 정도의 사례비로 주려고 하였지만 119 대원은 끝내 그 사례비를 받지 않았단다. 나도 119에 대하여 이미 20여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바가 있다. 분명 119는 우리나라의 희망이다.
그러고 보면 서민들의 세계는 이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아진 것 같다. 문제는 고위층의 부정 부패는 오히려 더 은밀해지고 그 규모가 커진 느낌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고위층의 부정 부패까지 없앨 수 있을까? 분명 교통 경찰과 119 및 관공서의 성공 사례를 연구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고위층이 스스로 청렴결백 해 질 의지가 있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박 목사님의 말씀이 다시 그리워진다.
2015-11-18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