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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33> 틀렸거나 비겁한 표현들
매스컴에 사용된 말이나 글이 바르지 못한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 가끔 속내를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말이나 글도 눈에 띈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1.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뜻의 회자(膾炙)라는 말은 ‘인구(人口)에 회자된다’, ‘사람 입에 회자된다’와 같이 사용해야 옳은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엔 그냥 ‘회자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기에 사전을 찾아 보니 이것도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적혀 있다. 그래도 나에게는 그냥 ‘회자된다’는 좀 거북하다.
2. 누군가 훈장을 받았을 때 ‘아무개가 훈장을 수여하였다’고 표현한 기사를 보았다. 수여(授與)는 남에게 주는 것이므로 그냥 ‘받았다’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3. ‘무슨 영화가 무슨 극장에서 개봉한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개봉(開封)이란 새 영화를 처음 상영한다는 의미의 타동사(他動詞)이니, ‘개봉된다’ 처럼 수동태(受動態)를 사용하여 표현해야 할 것이다.
4. ‘염두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던데, 염두(念頭)란 ‘마음속’이란 의미이므로 ‘염두에 두다’가 맞는 표현이다. ‘염두한다’는 틀린 표현 같다.
5. 어떤 현직(現職)에 있는 사람을 주례자로 모셔 놓고, 무슨 직을 ‘역임한 아무개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는 사회자가 있다. 역임(歷任)은 과거에 어떤 직위를 지냈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현직에 잘 있는 사람에게 ‘역임했다’는 표현을 써선 안 된다. 소개받는 사람이 현 직장에서 방금 쫓겨났나 화들짝 놀랄지도 모른다.
6. 젊은이 중에 ‘어이가 없다’를 ‘어의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단다. ‘어이’를 어의(語義)의 잘못으로 생각했나? 아무튼 어이없는 일이다. ‘어이없다’는 ‘어처구니없다’와 같은 말로,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는 뜻이다.
7. 대화 중에 ‘부분’이란 단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예컨대 “대화 중에 부분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부분’은 고쳐야 할 ‘부분’이다”라는 식이다. 여기에서 뒤의 두 ‘부분’은 사용하지 말아야 할 표현이다.
8. 물건을 산 후 계산대로 가면 점원이 “계산 도와드릴까요?“ 묻는다. 나는 속으로 ‘도와주긴 뭘 도와줘, 나도 계산할 수 있는데’ 하는 마음이 든다. 예의 바르게 말하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표현은 좀 마음에 안 든다.
9. 음식점에서 ‘냉면 나오셨습니다’ 하는 소리도 듣는데 이것도 이상하다. 냉면이 무슨 상전이나 되나? 이건 그냥 ‘냉면 나왔습니다’ 하면 족할 일이다.
10. 방송에서 인터뷰할 때, ‘바람도 시원하고 경치도 참 좋은 것 같아요’ 식으로 대답하는 사람이 많은데, 좋으면 좋은 거지 ‘좋은 것 같아요’는 또 뭔가? 자기가 좋은지 안 좋은지도 모르나 그런 생각이 든다. 아니면 나중에 누군가가 ‘나는 안 좋던대~’라고 시비(?)를 걸어 오면, ‘그래서 나도 좋다고는 안 했어요, 좋은 것 같다고만 했지’라고 변명할 여지를 남겨 놓으려 한 걸까? 그렇다면 좋아하는 주체인 ‘내가’가 빠진 ‘좋아 보여요’는 좀 비겁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11. ‘보여진다’는 그냥 ‘보인다’고 하면 될 표현이다. 구태여 수동태로 쓸 필요가 없는 말이다.
12. ‘생각된다’, ‘전망된다’, ‘예상된다’, ‘느껴진다’와 같은 수동태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일본어의 특징이기도 한 수동태 표현은 1) 표현 중에 ‘내’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얼핏 들으면 예의 바르고 부드럽게 들린다. 2) 그러나 나는 가만 있는데 저절로 그렇게 생각되고, 전망되고, 예상되고, 느껴진 것이므로, 혹시 ‘나중에 그게 아닌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는 변명의 느낌이 있다.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처럼 비겁한 느낌을 풍긴다. 3) 마지막으로 수동태는 ‘내 생각과 상관없이 어차피 그리 된다’는 표현 양식이므로 보기에 따라서는 능동태보다 훨씬 더 강력한 표현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수동태는 자기의 강력한 주장을 교묘하게 위장하는 ‘비겁한’ 표현 양식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던 생각할수록 말은 참 신비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2017-10-11 0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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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32> 세계의 표준으로 삼음직한 우리의 문화
1. 우리나라 식당에는 세계적으로 내세울만한 문화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주 메뉴에 딸려 나오는 반찬의 가짓수가 엄청 많다.
특히 전라도 식당엘 가면 수많은 반찬 접시가 겹쳐 놓여 식탁 바닥이 안 보일 정도이다. 놀랍게도 그 반찬들은 전부 다 공짜로 무한 리필 된다.
게다가 식사 후에는 ‘셀프’라는 이름의 공짜 커피까지 준다. 나는 식당에서 주는 이 공짜 커피가 세상 커피 중에서 제일 맛있다.
어떤 식당은 손님이 나갈 때 카운터에서 박하 사탕까지 공짜로 준다. 우리나라 식당은 이처럼 인심이 넘쳐나는 장소이다.
반면에 외국의 식당엘 가면 반찬도 두세 가지 밖에 안 주지만 추가로 더 달라고 부탁하면 여지 없이 별도 요금을 징수(?)한다. 심지어 물도 돈을 받는 곳이 많다. 한번은 북경에 있는 식당에 가서 밥을 시켜 놓고 물을 좀 달랬더니 신이 나서 생수병을 들고 오는 것이었다.
웬일인가 했더니 물도 공짜가 아니고 매상을 올리는 상품이었던 것이다. 외국 식당에서 공짜 커피란 언감생심(焉敢生心) 상상도 할 수 없는 메뉴이다. 우선 대부분의 식당이 커피 자체를 취급하지 않는다. 혹시 취급한다고 해도 반드시 비싼 별도 요금을 내야만 한잔 얻어 마실 수 있다. 아무리 비싼 음식을 주문했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반찬이건 커피건 간에 일절 공짜가 없는 외국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땐 종종 야박함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너희들 인생 이런 식으로 살지 말라”고 마음 속으로 나무란다.
외국과 달리 별별 걸 다 공짜로 주는 우리나라 식당에서는 ‘사람 사는 맛, 즉 인심’이 느껴진다. 공짜 인심이 풍요로운 우리나라의 식당 문화가 세계의 표준이 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다.
2. 두 번째로 언급할 것은 우리나라의 인터넷 서비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도 대개 초고속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에 가보면 사정이 다르다. 얼마 전까지 미국의 호텔은 숙박객에게 인터넷 사용료를 받았다.
또 호텔로부터 무슨 비밀번호인지 패스워드인지를 받아 입력하지 않으면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다. 인터넷 속도도 대개 속이 터질 정도로 느리다. 호텔이 비싸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나는 인터넷 사용료를 받는 외국 호텔의 조짠함에 분노(?)를 느낀다.
그래서 “너희들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차라리 호텔비를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인터넷은 제발 공짜로 제공해라. 너희들 대한민국엘 한번 가봐라. 어디 인터넷 사용료를 받는 곳이 있나”라고 역시 속으로 욕을 해 본다. 우리나라의 빠르고 공짜인 인터넷 서비스가 세계의 표준이 되었으면 좋겠다.
3. 세 번째로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의 배달 문화이다. 우리는 거의 모든 상품을 집안에 앉아서 구매할 수 있다. 전화나 인터넷으로 물품을 주문하면 퀵서비스와 같은 배달을 통해 신속하게 집으로 배달되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티브이를 통한 홈쇼핑 사업이 성황을 이루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배달 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덕분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배달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산속이나 해수욕장에서 자장면을 주문해도 배달이 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가히 ‘배달의 민족’이다.
주문한 음식을 먹고 난 다음에는 빈 그릇을 집이나 문 앞에 내다 놓기만 하면 상황 끝이다. 얼마나 편리한가! 아내의 홈쇼핑 중독만 방지할 묘책이 있다면, 우리의 배달 문화는 문자 그대로 세계 최고이다. 우리의 배달 문화 역시 세계에 전파할만한 가치가 있는 우리 문화가 아닐까?
과거에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직 선진국의 문물들뿐이었다. 풍족하게 사는 선진국 사람들이 하는 언행은 모든 것이 다 멋져 보였다. 그래서 머리카락 물들이기, 길거리에서 키스하기, 혼전 순결 가벼이 여기기 같은 별로 대단할 것 없는 그들의 문화마저 우리의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와 돌이켜 보니, 오히려 세계에 전파하고 싶은 우리의 문화들이 이것 저것 눈에 띄기 시작한다. 어찌 공짜 거피, 인터넷과 배달뿐이겠는가?
문득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들기도 하는 요즈음이다.
2017-09-2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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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31> 일꾼의 정의(正義)와 농장 주인의 정의
어느 농장 주인이 일당(日當) 10만원에 일꾼들을 모집하였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일꾼 몇 명이 나타나자 주인은 계약 조건을 이야기 하고 일을 시켰다. 그런데 그 뒤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심지어 오후 5시에도 일꾼 몇 명이 일을 하게 해 달라며 나타났다.
주인은 이들도 받아들여 일을 시켰다. 오후 7시, 날이 저물자 주인은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불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먼저 왔거나 나중에 왔거나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일꾼들에게 똑같이 10만원씩을 지불하였다.
그러자 새벽 5시부터 일한 일꾼들부터 “우리는 새벽부터 뼈빠지게 일을 해서 10만원을 받는데, 나중에 온 저 사람들은 몇 시간 일하지 않고도 10만원을 받다니 불공평 하지 않은가?”하며 주인에게 항의하는 것이었다. 성경(마태 20, 1-8)에 나오는 예화(例話)이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일찍 온 일꾼들이 그런 불평을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 처하면 그런 불만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주인의 반응은 우리의 생각과 영 달랐다.
주인은 “내가 새벽부터 온 당신들에게 주기로 한 일당은 10만원이었고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도 후하게 일당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내 처분에 달린 일이 아닌가? 일찍 온 당신들은 새벽부터 일자리를 얻어 일당 걱정 없이 하루를 마음 편하게 보낼 수 있었지만, 늦게 온 일꾼들은 일자리를 못 구해 오후 늦게까지 걱정을 하다가 겨우 일자리를 얻어 일당을 벌게 된 것 아닌가? 내가 그 사람들에게 후하게 일당을 주었다고 당신들이 불평을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대꾸하였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주인이 있을 수 있을까? 동서고금을 통해 실제로 이러한 주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이 농장 주인처럼 세상의 정의보다 훨씬 높은 가치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농장 주인과 같은 정의를 갖고 살게 된다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란 찬송가(438장) 가사처럼 ‘죽어서 가는 저 세상이 아닌 바로 이 세상이 천국’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란 말을 듣는다. 아침 일찍 온 일꾼의 마음이나, 지난 주 약창춘추 230호에서 소개한 ‘돌아 온 탕자(蕩子)’를 환영하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나타내는 형의 마음이나 다 ‘배 아픈 걸 못 참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오래 전에 은사 한 분이 내게 “당신이 잘 되면 누가 진심으로 좋아할 것 같소? 아마 부인, 부모, 자식 정도 밖에 없을 것이요. 형제? 아닐 겁니다. 친구는 더욱 아닙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지만 이내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다. 좀 확장해 보자면 이런 류의 시기와 질투는 인간의 본성인 것 같기도 하다.
오래 전 한 해외 주재 고급 공무원이 교민들에게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있었다. 워낙 잘 가르쳐서 큰 인기를 끌 즈음, 어떤 교민이 정부에 투서를 하였다. ‘공무원이 특정 종교에 대해 강의를 해도 되겠냐?’고.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 공무원은 난감(難堪)하였다.
그래서 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를 찾아 ‘어찌 하면 좋겠느냐’고 조언을 구하였다. 하 목사는 의외로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그럼 일단 그만 두시죠”. 그 공무원은 그 조언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가 예상했던 목사님의 조언은 “믿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니 굽히지 말고 그 길을 계속 가세요” 이었던 것이다. 갈등을 피하라는 목사님의 조언을 따른 그 공무원은 마침내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
사실 인생을 조금만 긴 눈으로 보면 작은 정의에 근거한 시기, 질투 또는 갈등보다는 농장 주인과 같은 (또는 하 목사와 같은) 넉넉한 마음 씀씀이, 즉 큰 정의(大義)가 오히려 더 귀한 열매를 맺는 경우가 많음을 깨닫게 된다.
오 주여! 제 안목, 제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2017-09-0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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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30> 형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
지난 6월 25일 충북 보은에 있는 작은 시골 교회인 노티교회에 아웃리치를 다녀 왔다. 그 교회의 교인 수는 30명도 채 안 되지만 그나마 해마다 교인의 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연로한 교인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기 때문이다. 나는 9년째 그 교회를 지키고 계신 여자 목사님께 감사한 마음과 빚진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나누고 돌아 왔다.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모시며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작은 아들은 제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졸라 결국 그 재산을 받아 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도 얼마 되지 않아 재산을 허랑방탕(虛浪放蕩) 다 탕진하고 밥도 못 먹는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춥고 배고파서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 가고 싶었지만 큰 소리치고 나온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또 아버지한테 야단 맞을 것이 두려워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언제 돌아 오려나 매일 같이 동구 밖을 내다보며 노심초사 기다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서 작은 아들이 초라하고 지친 모습으로 머뭇머뭇 돌아오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워서 맨발로 뛰어 나가 얼싸 안으며 “잘 왔다, 이 녀석아, 정말 잘 왔어” 하며 환영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소까지 잡아 동네 사람들과 큰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였습니다.
그 때 밭에 나가 일하고 있던 큰 아들이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이 돌아 온 것이 기뻐서 큰 잔치를 베푼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은 동생이 돌아 온 것이 기쁘기에 앞서 큰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가 섭섭해졌습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아버지, 어째 이러십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여태껏 뼈빠지게 아버지 농사 일을 도와드렸지만, 언제 저한테 수고했다고 닭 한번 잡아 주신적이 있습니까? 근데 제 몫 다 챙겨 갖고 나가 실컷 놀다가 거지 신세가 되어 돌아온 저 녀석이 뭐가 예쁘다고 소까지 잡고 이 잔치를 벌이십니까? 아버지 너무하십니다”라고 볼멘 소리를 하였습니다.
단단히 삐친 것입니다. 형이 생각할 때에는 우선 동생을 몽둥이 찜질을 해놓고 환영을 하던지 말던지 해야 마땅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그 동안 나와 쭉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니? 그리고 내 것이 다 네 것이잖니? (그래서 너는 밥을 주리거나 마음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네 동생은 죽다가 살아 났고, 우리는 잃었던 아이를 다시 찾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느냐? 어찌 잔치를 벌이지 않을 수 있겠냐?”
여러분은 누구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형입니까? 아버지입니까? 아마 대부분은 형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사실 형의 입장에서 동생한테 뭐가 예쁜 구석이 있겠습니까? 예쁜 게 아니라 밉기만 하겠지요.
우리의 형제에 대한 사랑은 이 형과 비슷한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형제간에 사랑은 커녕 오히려 시기와 질투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신혼부부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차 재벌이 될 계획을 갖고 있다면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만 낳으라고 하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성경(누가복음)에 나오는 예화(例話) 입니다. 성경은 돌아 온 작은 아들 즉 탕자(蕩子)를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마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놀라운 가르침 아닙니까? 성경을 보면 이와 같은 놀라운 가르침이 무궁무진합니다.
왼손이 한 착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 누가 추위에 떨며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벗어 주어라, 5리를 가달라고 하거든 10리를 가 주어라.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쪽 뺨도 내 주어라, 예배당에 오기 전에 너와 다툰 사람과 화해부터 하여라, 원수를 사랑하라 등등을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동생을 시기하는 형의 마음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고귀한 사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놀라운 가르침을 주시는 분입니다.]
2017-08-2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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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9> 초당림과 산림녹화
지난 6월 30일부터 이틀간 대학 동기 부부 13명이 전남 강진에 있는 초당림(草堂林) 견학을 다녀 왔다. 수서역에서 기차(SRT)를 타고 나주에 내려 초당대학교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초당림을 향하였다. 가고 오는 길에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던 다산초당(茶山草堂), 김영랑 시인의 생가(生家), 청자 박물관 및 초당대학교의 안경 박물관도 구경하였다.
초당림은 백제약품의 명예회장이신 김기운 선생이 50년 전인 1967년 강진군 칠량면 일대의 산 약 300만 평을 매입하여 조림(造林)한 국내 최대의 조림지이다. 광대한 산에는 편백, 리키테다, 백합나무 등이 이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산 자락에 세워진 제재소에서는 재목으로 자라난 나무들을 가공하고 있었다.
우리들을 안내해 준 분은 김기운 선생의 아들인 김동구 회장(백제약품)이었다. 안내를 위해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온 그는 조선대 약대를 졸업한 약사이지만 약보다 나무에 대한 애정이 더 커 보였다. 산림청에 나무에 대한 강의도 나갈 정도로 나무 하나 하나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였다. 우리들은 오랜 세월 조림을 해 온 그분들의 열정과 안목과 애국심에 감동하였다.
과거 우리나라의 산들은 모두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1950년대는 물론이고, 대학에 다녔던 1960년대 말까지도 그랬다. 당시 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메아리’란 동요(1954년 유치환 작사)에, “벌거벗은 붉은 산에 살 수 없어 갔다오. (후렴)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란 가사가 나올 정도이었다.
그랬던 우리나라 산들이 요즘에는 어디를 가나 숲으로 덮여 있다. 도시 개발 등으로 인하여 산림의 면적은 줄어들었지만, 단위 면적당 산림의 밀도는 수십 수백 배 높아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산림녹화(山林綠化)에 성공한 것이다.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전문가들에 의해 그 답이 이미 나와 있을 터이지만 이하 내가 생각하는 성공의 원인을 적어 보기로 한다.
첫째는 누구나 인정하듯 정부의 식목(植木) 장려 덕분이다. 돌아 보면 1960년대 후반까지도 내 고향 김포 검단면 사람들은 집집마다 때때로 산으로 동원되어 나무를 심었다. 나도 하루 종일 나무를 심은 후 이장 댁 마당에 줄을 서서 일당(日當)을 받던 생각이 난다. 그 정도로 정부, 특히 박정희 정부는 식목 장려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나는 산이 푸르러진 것이 오직 식목의 장려 덕분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연료 혁명, 즉 연탄의 기여가 오히려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생각한다. 시골에까지 연탄이 보급되기 전인 1960년대까지는 시골에서는 으레 산의 나무를 잘라다 취사 및 난방을 하였다. 도시에서도 가로수마저 몰래 잘라다 땔 정도로 그 때는 나무가 우리나라 가정의 주된 연료이었다.
그러나 자기집에서 땔 나무를 자신의 산에서 베어 올 수 있는 집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대개는 몰래 남의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오는 일종의 ‘서리’를 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 앞 동네는 이름마저 ‘나무서리’이었다. 이처럼 나무서리를 하지 않으면 취사나 난방을 할 수 없던 시절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가 되자 농로(農路)가 정비되어 시골까지 연탄을 배달하는 트럭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곧 연료 혁명이 일어났다. 너도 나도 나무대신 연탄을 때기 시작한 것이다. 나무꾼을 사서 나무서리를 하는 것보다 연탄을 사서 쓰는 것이 더 편하고 쌌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시골도 더 이상 나무를 베지 않고 연탄을 사용하게 되었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혁명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연탄 보급을 우리나라 산림녹화의 일등공신이라고 믿는다. 물론 연탄의 부작용도 많았다. 도시의 골목길은 연탄재투성이였고, 겨울의 대기(大氣)는 일산화탄소에 절어 있었다. 방에 스며든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사람이 죽는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리 멀지도 않은 시절의 이야기이다. 산림녹화 만세, 초당림 만세!!
2017-08-0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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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8> 두려운 미래 기술
며칠 전, 미래 기술과 생명 윤리에 대한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머지 않아 인공지능이나 로봇, 유전자 조작 같은 미래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할 것인데 그 때가 되면 매우 심각한 생명 관련 윤리 문제 발생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그 때 들은 이야기를 포함하여 몇 가지 생각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인공지능의 위력은 이미 알파고의 바둑 실력에서 입증된 바 있다. 사람이 운전할 필요가 없는 인공지능 자동차도 곧 실용화 될 전망이다. 인공지능이 장착된 로봇도 진화를 반복하고 있다. 사람이 설정한 명령 프로그램대로 사람대신 어려운 작업을 해 주는 서비스 로봇은 이미 여러 종류 개발되어 있다.
앞으로는 무슨 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까지 스스로 판단해서 일을 하는 노동 로봇도 개발될 것이다. 또 국경에 배치되어 스스로 적의 동향을 관측하고 필요 시 전투를 하여 적을 물리치는 군사 로봇도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희로애락 등 7가지 감정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감성 로봇도 오래 전부터 개발되고 있다. 사람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피부와 외모가 사람과 닮은 로봇도 만들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가 사귀고 있는 상대가 진짜 사람인지 로봇인지 좀처럼 알 수 없어 답답해 하기도 한다.
벌써 어느 나라에서는 체온과 피부 촉감이 진짜 사람과 비슷하고 섹스 기술이 사람보다 월등한 인공 지능 섹스 로봇(여성)을 약 1,700만원에 팔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결혼 대신 ‘섹스 로봇’을 구입하는 남자들이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어떤 영화를 보니까 인공지능 노동 로봇들이 어느 날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가혹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중에는 로봇의 지능이 더욱 진화하여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쟁취하더니 마침내 로봇이 대통령으로까지 선출되었다.
이는 일하기 싫어하는 인간들이 인공지능 노동 로봇을 사람의 수보다 훨씬 많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때쯤이면 고도의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하는 연구 자체를 로봇이 담당하게 된다.
의사의 영역도 이미 인공지능에게 빼앗기기 시작하였다. 이미 IBM사는 인공지능 의사인 왓슨(Watson)을 개발하였다. 2년 전 일본 동경대 의대 병원에 도입된 왓슨은 60세 여성을 진찰한 뒤 10분만에 ‘희귀성 백혈병’이라는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수천 환자의 유전자 특성과 2,000만개의 논문을 비교 분석한 결론이었는데, 이는 사람 의사들이라면 적어도 2주는 걸릴 방대한 작업이었다. 국내에서도 길병원에 이어 부산대 병원이 지난 2월부터 왓슨을 진료에 투입하였다고 한다. 권위를 잃어가는 것은 의사뿐만이 아닐 것이다. 인공지능 목사나 인공지능 스님이 출현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유전자 가위 기술’은 세계 3위라 할 정도로 그 수준이 높다. 장차 이 기술을 이용하면 마치 옷감을 재단하듯 유전자의 나쁜 특성 부위를 잘라내고 좋은 특성을 갖고 있는 부분을 갖다 붙일 수 있다. 그 날이 오면 세상은 온통 좋은 유전 특성을 가진 사람들, 즉 건강하고 인물 좋고 머리 좋고, 성격 좋은 사람들로만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가 삽입되고, 인간 지능을 가지며, 인간 감정을 가진 로봇은 섹스 파트너일 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 된다. 사람이 자식을 낳듯 로봇도 자식을 만든다. 마치 창조주가 인간을 만드셨듯이 인간 또는 로봇이 로봇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로보사피엔스(Robo-Sapiens)가 자연산 인간 즉 호모사피엔스의 직업을 빼앗고 마침내 인간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의 통제 하에서 사용될 수만 있다면 ‘미래 기술’은 인간에게 막대한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환자의 유전자 특성을 파악하여 그 환자에게 최적의 약물을 투여하는 ‘맞춤약학’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윤리라는 통제의 틀을 넘어서는 순간, 미래 기술은 기관사 없이 천길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는 기관차처럼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을 안겨 줄 우려가 있다. 미래가 무서워진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수호해야겠다는 심정이 절박해진다.
2017-07-1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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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7> 여자들은 좋겠다
지난 5월 10여년의 아파트 살이를 청산하고 자곡동 옛터에 새 집을 짓고 이사하였다. 이삿짐을 싸면서 아내에게 제발 이것 저것 좀 버리고 가자고 애원(?)해 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다 필요한 것이라 버릴 수 없다’고 퇴짜를 놓는다.
우리 집에는 청소도 잘 안 하면서 청소 도구가 대여섯 개나 되고, 요리도 별로 안 하면서 조리 도구와 그릇이 부엌 가득하다. 옷은 옷장이 모자라 여기 저기 걸려 있고 구두는 신발장이 모자라 복도에 쌓여 있다.
선글라스와 모자도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옷이건 뭐건 그저 서너 개씩만 있으면 족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아내만 그런 것이 아닌 모양이다. 여자들은 대개 다 그렇다고 한다. 여자들은 70이 넘어서도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많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부럽다. 나이 먹어서도 물건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실 물건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우월하다. 우선 여자의 평균 수명이 남자보다 길다.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남녀간의 게임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일부 고루한(?) 남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자가 더 우수하다는 사례 몇 가지를 들어 보기로 한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훨씬 많은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쇼핑 (홈 쇼핑 포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백화점에도 잘 가고 남대문 시장에도 잘 간다. 무언가 좀 싸게 사와 가지고는 ‘돈 벌었다’고 자랑이다.
사지 않는 것이 가장 돈을 버는 것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반면에 남자들은 쇼핑을 싫어한다. 부인 따라 시장 가는 걸 가장 싫어한다. 내 옷을 사준다고 해도 싫어한다. 오랜 시간을 소비 한 후 결국은 아내의 취향대로 내 옷이 선택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여자들은 TV 연속극 시청을 즐긴다. 그러나 남자들은 뉴스나 스포츠 중계는 보지만 연속극은 잘 보지 않는다. 그래서 저녁이면 여자들은 연속극 시청을 즐기지만 남자들은 심심해서 몸을 비튼다.
어느 교육학자는 ‘남자가 연속극을 잘 안 보는 이유는 섬세한 감정의 기복 등 연속극의 흐름을 이해할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란다. 남자는 그저 단순하게 ‘몇 대 몇’ 으로 승부가 나는 축구 같은 스포츠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자에게 연속극은 맨날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이지만, 여자들에게는 ‘지금 중요한 순간이니 조용히 해’라고 할 정도로 매회의 내용이 명백하게 다른 모양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잔소리를 잘 한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두 말하면 잔소리’이다. 잔소리 말고 수다를 떠는 능력면에서도 남자는 여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여자들끼리 모여 1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눠 놓고서도 헤어질 때는 "자세한 이야기는 카톡으로 하자”고 하는 여자도 있다.
화제도 다양하다. 남자들에게는 깜도 안 되는 주제를 가지고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집 앞 카페는 아침부터 낮까지 젊은 엄마들로 붐빈다. 길 건너 어린이 집에 아이를 맡겨 놓은 엄마들이 거기에서 모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사교성도 뛰어나다. 아침 저녁 산보 길에 두세 명이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것은 여자들뿐이다. 남자들은 누가 소개해 주지 않으면 말을 잘 걸지 못 한다. 그래서 동네 노인정이나 마을회관에도 온통 여자들뿐이다.
할머니들은 거기서 밥도 해 먹고 화투도 치며 논다. 그러나 영감님들은 눈에 띠지 않는다. 남들과 어울리는 기술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억지로 가 봤자 십중팔구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 동네에서 조차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사실 남자들의 사교성 없음은 고령 사회의 큰 문제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여자의 우월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할아버지는 잘 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죽하면 ‘할아버지는 왜 있는 거지?’ 묻는 손자가 있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까?
“모든 면에서 우월한 여성들이시여, 부디 남성들, 특히 늙은 남성들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의 바람이다.
2017-07-05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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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6> 명예교수들의 현장 체험
지난 5월 10일, 일락회(一樂會)라는 모임을 통해 JW중외제약의 당진 공장을 견학하였다. 일락회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전국 약학대학 명예교수들의 모임인데, 중앙대 손동헌 명예교수님의 뒤를 이어 지금은 서울대의 이은방 명예교수님이 회장을 맡고 있다. 회원은 140명 정도이며, 주요 사업으로 봄 가을로 연 2회 정도 제약관련 산업 현장을 견학하고 1-2회 뉴스레터도 발간하고 있다.
이번 춘계 견학에는 일락회 회원 23분(남자 10명, 여자 13명)이 참가하였다. 일정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0일 아침 9시 30분에 서울 강남의 지하철 3호선 양재역 2번 출구에 모여 회사가 마련해 준 버스를 타고 10시 40분경 공장에 도착, 11시까지 회사를 소개하는 홍보영상을 관람한 후 12시까지 수액제 생산 공장을 견학하였다.
참가자들은 모두 엄청난 규모와 최신식 설비에 감탄하였다. 공장 견학을 마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당진 포구에 있는 식당에 가서 맛있는 회 정식을 먹으며 담소 하였다. 이어 오후 1시에 버스를 타고 심훈 기념관과 솔뫼 성지를 둘러 보았다. 이 때 회사가 주선해 준 문화관광해설사의 상세한 해설이 특히 유익하였다.
구경을 마치고 3시 40분쯤 다시 버스를 타고 양재역으로 돌아오니 오후 5시 30분경이 되었다. 다른 때의 견학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구성으로 진행된다. 매 견학 때마다 회사 측의 배려(교통편, 식사 등 제공)로 참가자들은 매우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견학 일이 마치 소풍날처럼 기다려진다고 한다.
견학을 갈 때마다 확인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제약 기술이 어느덧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발전해 있을 줄은 몰랐다고 놀라는 분들이 적지 않다.
문득 약학대학의 현직 교수들은 이런 발전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현장에 가서 보지 않으면 그 흐름을 놓칠 정도로 빠르기 발전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제약 기술이기 때문이다.
사실 명예교수들이 현장의 발전 흐름을 놓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들은 이미 현직에서 한발 물러선 퇴직 교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직 교수들을 생각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교수가 흐름을 모르면 학생 교육에 대한 방향과 수준에 심각한 오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잘못 가르칠 우려가 크다는 말이다.
약학의 현장은 제약 공장뿐이 아니다. 제약 회사 내에도 연구소, 개발부, 국내외영업 부서 등이 다 현장이다. 또 병원약제부, 개업약국, 의약품 안전관리(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사회약학 분야(의약품심사평가원 등) 등도 다 현장이다.
학생들에게 앞으로 약학이 나아갈 방향을 올바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약대 교수들이 이런 현장에 대한 최소한의 현장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노파심 같지만 특히 최근의 약학대학 교수들의 현장 체험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약학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타학과 출신 약대 교수들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심각해 보인다. 요즈음의 교수들은 당장 코 앞에 닥친 연구가 바빠서 현장 체험의 필요성을 느낄 경황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현장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면 교육은 물론이고 교수의 연구 자체도 점점 현실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좋은 강의와 연구를 위해서도 현장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안하고자 한다. 각 약학대학마다 모든 교수들의 현장 체험을 의무화, 정례화 해 주었으면 좋겠다. 즉 모든 교수들이 매년 약학의 각 현장에서 적어도 일주일 정도씩 연수를 받게 제도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마침 약학계에는 한국약학대학교육협의회(약교협)가 있고, 그 산하에 약학교육평가원(약평원)도 있다. 두 단체가 힘을 모으면 모든 현직 약대 교수들의 현장 체험을 정례화, 의무화 할 수 있을 것이다. 뜻만 있으면 길은 얼마든지 열릴 것이다.
일락회 견학을 주선하며 느낀 노파심(老婆心)의 일단을 피력해 보았다.
2017-06-2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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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5> 제6회 신풍호월 학술상
지난 5월 8일 오후 5시 제6회 신풍호월(新豊湖月)학술상 시상식이 서울대학교 호암 교수회관 2층 마로니에 홀에서 개최되었다.
이 상은 신풍제약(新豊製藥)의 창업주인 송암 고 장용택 회장(서울약대 13회 졸업, 작년 2월 28일 작고)이 선친이신 호월(湖月) 고 장창보 회장의 숭고한 의약보국(醫藥報國)정신을 기리기 위해 신풍제약 창립 50주년인 2012년에 제정한 상이다.
이 상은 매년 신약 개발 및 약학 연구에 공로가 있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연구자를 수상자로 선정하여 시상(상금 3000만원)해 오고 있다.
이 상은 지난 5회까지는 매년 1명씩에게 시상하였는데, 올 해에는 특이하게 2명이 시상하게 되었다. 쉽지 않은 기업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뜻 깊은 상을 제정하여 시상해 오고 있는 신풍제약에 약학인의 한 사람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세상에는 훌륭한 분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그 날 고 장용택 회장의 아들인 신풍제약의 장원준 사장은 시상에 앞서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희망찬 오월을 맞이하여 ‘제6회 신풍호월 학술상’ 시상식을 개최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바쁘신 데도 불구하고, 오늘 시상식 자리에 참석해주신, 신희영 부총장님과 총동창회 박승희 부회장님, 그리고 내외 귀빈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오늘 수상자로 선정되신 이상국 교수님과 이호영 교수님의 연구업적을 높이 치하하며,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또한 엄정하고 공정한 심사절차를 통해 수상자를 선정해 주신 서울대 약대 이봉진 학장님과 심사위원회에도 깊이 감사 드립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연구역량이 세계 어느 대학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연구결과와 논문 등을 통해 이미 입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국내제약사들의 신약개발 과정을 보면 다양한 산학협력을 통해 목표를 공유하고 공동 개발해 나가는 구조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울대 약대의 독자적인 연구 결과가 제약산업으로 연계되어 우리나라의 제약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혁신 신약의 개발을 통해 인류 건강의 증진에도 크게 기여 할 것으로 믿습니다. 송암 장용택회장님께서 ‘신풍 호월 학술상’을 제정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연장과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신약개발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신풍 호월 학술상’이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만개한 봄 꽃처럼 그 기운이 더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중략) 끝으로 재단법인 관악회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무궁한 발전과 모든 분들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한편 이날 이상국 교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수상 소감을 발표하였다. “(전략) 오늘 이상은 제가 지금까지 받은 상 중에서 제일 큰 상입니다. 영광스럽고 감사합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상들은 대개 그 동안의 업적이나 성취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주어지는데, 이와 달리 이 상에는 미래에 대한 당부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앞으로 신약개발에 대하여 계속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이 상에는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도 신풍제약을 일구어 오신 창업주를 비롯한 회사의 역사와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하여 이 상을 수상하며 신약개발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됩니다. (후략)”
또 다른 수상자인 이호영 교수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발표하였다. “우선 이런 큰 상을 받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제가 귀국한 지 이제 6년이 지났는데 이 상이 귀국 후 처음 받는 상이라 제게 더욱 의미가 큽니다. (중략). 무엇보다 별 힘든 내색 없이 묵묵히 제 지도를 따라 연구에 매진해 온 저희 연구실의 학생 및 연구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큰 상을 받는 오늘이 마침 어버이날인데 이번 수상을 통해 어머니께 작은 효도를 해 드린 것 같아 더욱 기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연구를 하고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수상자들을 축하드리며 신풍제약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린다.
2017-06-0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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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4> 서울대 약대생들의 한국전쟁 참전
1950년 6월 초 대한민국 정부는 사립 서울약학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곧 6•25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공산 치하에 들어가는 바람에 부득이 9•28수복 직후인 1950년 9월 30일에 편입 조치가 시행되었다. 동시에 문교부는 한구동(韓龜東) 교수를 국립 서울 약대의 임시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서울대학교에 편입된 약학대학이 한창 개교 준비에 바쁠 때에 전세(戰勢)가 다시 역전되어 1951년 1월 약학대학도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1•4후퇴). 이 때 한구동 교수가 꼼꼼히 실험기구와 책들을 챙겨 운반한 덕분에 약학대학은 부산 피난 시절에도 비교적 충실한 실험실습 교육을 할 수 있었다.
6•25전쟁에는 일부 서울대 약대 재학생들도 참전하였다. 송득규(宋得奎, 1924년 5월 19일생, 함북)는 1948년 서울약학대학에 입학하여 전쟁 당시 약학대학 3학년생이었다. 그는 1950년 7월 육군 제3사단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가 1950년 10월 3일 전사하였다.
그의 이름과 사진은 약학대학의 『단기 4283년 학생사진첩』에 54번 학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의 위패(12-7-043)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져 있으며, 그의 이름은 전쟁 기념관의 전사자 명비(銘碑, 025-ㄱ-036)에 새겨져 있다.
박원종(朴源鍾, 1931년 5월 18일생, 경남 진주)은 진주중학교를 마치고 1950년 서울약학대학에 입학하여 당시 1학년생이었다. 그는 진주의 고위 행정관료였던 아버지가 인민재판을 통해 피해를 입자 전쟁에 참전할 뜻을 밝히고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은 이상섭 명예교수(서울대 8회)의 회고이다.
약학대학생들 중에도 참전한 사람이 꽤 있었어요. 박원종은 자기 아버지 원수를 갚는다고 보병학교에 지원을 했을 거에요. 보병학교라는 것은 단기장교 양성기관이에요. 정규 사관학교는 4년이 걸리는데 보병학교는 입교해서 몇 주 교육시키고는 바로 소위로 임관(任官)해서 전선(戰線)으로 내보냈어요.
그래서 그때 육군 소위(小尉)로 임관된 사람들을 소모품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때 징병된 사병들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해서 소대장이 앞장서지 않으면 전투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소대장인 소위들이 앞장을 섰다가 총알받이가 되는 상황이었거든요.
박원종은 제6사단 2연대 소속 육군 소위로 참전하였다가 1951년 5월 18일 가평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이름과 사진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단기 4287년 학생사진첩』에 35번 학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정부는 그를 국립서울현충원(33-1512)에 안장하였고, 전쟁기념관은 그의 이름을 전사자 명비(銘碑, 116-ㅇ-055)에 새겨 놓았다.
또한 1949년 입학하여 당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2학년생이었던 서찬식(徐燦植, 1931년 1월 2일생, 대전)은 제9사단 육군 중위로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1951년 5월 9일 육군 제3이동외과병원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그를 국립서울현충원(33-1008)에 안장하고, 전쟁기념관은 그의 이름을 전사자 명비(120-ㅂ-091)에 새겨 놓았다 [이상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참조].
다음 달은 보훈(報勳)의 달이다. 모든 참전 용사의 뜻이 다 고귀하지만, 특히 당시 입대를 연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 입대하여 전투 중 목숨을 잃은 약대 선배들의 높은 충절은 아무리 높이 기려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들의 신원(身元) 파악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오늘 모습이 마냥 부끄럽기만 하다.
(정정) 약춘 222에 소개한 ‘압착식물표본’은 고 도봉섭 교수가 구입한 것이 아니라, 경성약전의 일본인 교수(아마도 구다니)가 광복에 의해 쫓겨가면서 놓고 간 것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중 이 책을 도교수의 회기동 자택 마루 밑에 숨겨 두고 피난을 갔다 와 보니 누군가가 집어가서 벽지 등으로 사용하려고 하기에 놀란 도교수의 부인이 돈을 주고 재 구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책의 표지 등이 일부 훼손되었다고 한다 (이상, 도교수의 며느리인 양제경 선생의 회고임).
2017-05-2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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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3> 그건 약대생들이었다! 57년만에 바로 잡은 4.19 기사
2017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A12면에는 ‘4.19 시위 선두에 선 건 의대생 아닌 약대생들’이라는 제하(題下)의 기사가 실렸다(http://naver.me/G1ecylNx).
이 기사에는 ‘19일 4.19혁명 57주년, 당시 서울대 약학과 70여명, 경무대 철문 앞까지 대열 이끌어, 흰색 가운 입은 탓에 의대생 오인’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었다.
내용은 57년전인 1960년 4월 19일, 당시 서울대 약대 4학년 학생이던 김한주씨와 박정식씨(79세)가 서울대 약대생들과 함께 참여한 4.19시위에 관한 회고이었다.
이번 기사는 4.19 시위에 참가했던 서울대 약대 선배들 (1957~1960년 입학생들, 15-18회 졸업생들)에게는 물론 나처럼 약학사(藥學史)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감격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이는 잘못된 기사에 대한 무려 57년 만의 정정(訂正)이기 때문이다.
1960년 4월 20일, 동아일보는 석간(夕刊)에 19일 오전 백색 가운을 입고 시위를 하는 서울 약대생들의 사진을 싣고 그 밑에 ‘백색 까운을 입고 데모하는 의대생들’이라고 잘못된 설명을 달았다. 이 오보(誤報)가 드디어 바로잡힌 것이니 어찌 감격적이지 않겠는가.
나는 기회가 되는대로 이 오보(誤報)를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백년사 (2016)’를 편찬하면서 시위에 참가하였던 선배들의 기억을 빌려 동아일보 사진 속의 인물 한 명 한 명에 약대생의 실명(實名)을 붙여나갔다.
이 과정에서 김병년 선배 (17회, 당시 2학년)는 동아일보로부터 사진 원본을 구해 주었고, 홍청일, 박정식 선배 (15회) 등은 사진 속 인물의 실명을 확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위대의 진행 코스 등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증언해 주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신문에 실린 시위 사진의 주인공들이 서울약대생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상기 ‘백년사’ 참조).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동아일보로 하여금 당시의 오보(誤報)에 대한 ‘정정’을 받느냐 이었다. 역사를 바로잡으려면 동아일보 측의 정정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정 요청 방법을 몰라 고심만 하고 있을 때에 서울대 가산약학역사관장인 박정일 교수가 서울대에 출입하는 동아일보 기자와의 만남을 주선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4월 13일(목) 12시 동아일보 김동혁 기자와 박정식, 김한주 선배의 역사적인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장소는 약학역사관 자료실이었다. 두 선배는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고와 인터뷰에 임하였다.
특히 제주시에 거주하는 김한주 선배는 57년만에 역사가 바로 잡힌다는 설레임에 당일 아침 급거 상경하였다. 그는 ‘민주혁명의 기록 (1960년 6월, 동아일보사)’이라는 화보와 ‘월간 사상계(1960년 6월호)’의 권내 부록인 ‘피의 화요일’ 이라는 화보를 갖고 상경하였다. 이들 자료는 현재 약학역사관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4.19 시위에는 서울대 약대 외에 성균관대 약대 등의 약대 학생들도 가운을 입고 참여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대 약대생들의 시위에 관한 기록이나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기록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2017-05-1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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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2> 서울대 약학역사관에 가시면 ‘압착 식물도감’을 보세요
2015년 6월 12일에 개관한 서울대학교의 가산약학역사관에는 100여년에 이르는 서울대약대의 역사 정리되어 있다. 역사관을 방문하고 서명을 남긴 사람은 지금까지 대략 760명에 이른다. 물론 서명을 남기지 않고 관람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문득 역사관을 방문한 사람들이 어떤 전시물에 흥미를 느꼈을까 궁금해 졌다. 물론 전시된 자료 하나 하나가 다 소중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압착 식물도감(植物圖鑑)인 Physiotypia Plantarum Austriacarum DER NATURSELBSTDRUCK이란 책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보면 우선 그 크기(가로 39, 세로 55.5, 두께 5 cm 정도)에 압도된다. 이는 일반적인 4*6배판(19.4 x 26.4) 넓이의 4.2배가 넘는 크기이다. 두 번째로는 이 책의 출판 년도에 놀라게 된다. 이 책은 1855~6년 오스트리아 왕조의 비엔나에서 총 5권으로 발간되었는데 이 시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말기인 철종 시대에 해당된다.
그 시기에 이처럼 멋진 식물도감을 출판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로 놀라운 것은 이 책의 인쇄 방법이다. 설명문(http://www.georgeglazer.com/prints/nathist/botanical/sepiaferns-main.html)을 보면 이 책은 식물 표본을 수증기를 이용하여 원형 그대로 압착한 다음 이를 동판(銅板)에 음각(陰刻)하여 세피아(sepia, 적갈색) 잉크로 인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인쇄 기법을 Nature-printing 기법이라고 한다.
이 책의 각 권에는 오늘날의 분류법에 따라 분류된 식물 표본 100종이 인쇄되어 있는데, 그림을 보면 마치 각 식물이 자연적인 모습 그대로 지면(紙面) 위에 압착되어 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각 식물의 선(線)이 과학적으로 정교할 뿐만 아니라 식물의 자연 그대로의 예술적 아름다움이 그대로 살아 있다. 이와 같은 양치류(羊齒類) 표본 책자는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하는 장식품이었다고 한다.
이 책에 대해서는 “도봉섭 탄생 백주년 기념자료집(2003년 10월, 가산약학역사관 소장)”에도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또 약사공론 1972년 6월 19일자 13면에도 이 책과 관련하여 동덕여자대학교 약학대학의 고 도상학 교수(생약학)가 언급한 내용이 실려 있다.
도상학 교수는 그 기사에서 자신의 아버지이자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의 식물학 교수였던 도봉섭 교수가 이 책을 고가(高價)로 구입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도상학 교수가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아 20여년째 보존하고 있던 이 책은 그가 작고한 이후인 2015년 10월 26일 서울대 약대(학장 이봉진)에 기증되었다. 이날 열린 ‘도봉섭 교수 관련 자료 기증식(서울대 약대 21동 교수회의실)’에서는 이 책 외에 도봉섭 교수가 소장했던 76여점(생약학 분야 단행본, 논문 자료, 식물도감 등)의 자료도 함께 기증되었다.
도봉섭 교수의 장녀인 도정인, 차녀인 도정애(이대 약대 명예교수, 생약학), 자부(고 도상학 교수의 부인)인 양제경 (약사), 장손인 도의종 선생 등이 이 기증식에 참석하였다.
사실 이보다 14년 전인 2001년 6월 19일에도 도봉섭 교수의 소장 자료가 서울대 약대(학장 천문우)에 기증된 바 있다. 이 때 도정애 교수는 조선약학회지, 조선약학잡지, 조선약학석보, 일본약학잡지, 조선박물학회지 및 80여권의 책자를 기증하였다.
아무쪼록 이러한 자료들의 가치가 앞으로 후학들에 의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2017-04-19 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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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1> 일본 교수 정년퇴임 기념행사 참관기
지난3월 8~11일 일본 교토(京都)대학 약제학 전공의 하시다(橋田 充)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 국제심포지엄 및 퇴임 기념 축하회에 참석하였다. 내게주어진 역할은 심포지엄 advisor 및 좌장이었다. 감사하게도여비와 숙식비를 제공받았다. 오늘은 그 행사 참관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8일(수) 저녁에는 교토역에 붙어 있는 그란비아 호텔에서 심포지엄의 좌장 및 연자 들의 저녁 식사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에는 미국 UCSF의 베네트(Leslie Z. Benet), 캔사스 대학의 보차드(Ronald T.Borchardt), 그리고 전 FDA의 샤(VinoidP. Shah) 박사 등 4명이, 홍콩대학의빈센트 리(Vincent H.L. Lee) 교수, 그리고 내가 초청을 받았다.
둘째 날인 9일(목)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포지엄이 열렸다. 장소는 Kyoto Research Park 내 4호관이었다. 첫 세션에서는 ‘약물송달과 약과학의 전망’이라는 주제로 빈센트 리, 하시다, 샤 박사 등이 강연하였다. 점심 시간에는 2개의 별도 방에서 유료 런천(luncheon) 세미나가 열렸다. 나를 포함한 연자와 좌장들은 2층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점심 식사 후 열린 두 번째 세션에서는 ‘생물약제학과 약물동태학’을 주제로 ‘세포배양과 약과학(보차드)’ 등 세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어 20분간의 커피 브레이크 후 세 번째 세션이 열렸는데, 여기에서는폴리머릭 미셀, 엑소좀, 나노메디슨 등 ‘약물송달과 물질과학’에 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뒤 5시부터 1시간동안 우리나라의 3편을 포함한 총 37편의 연구 결과가 2층 로비에서 포스터로 발표되었다.
6시 30분부터는 옆 건물에서 2시간 동안 참석자들을 위한 리셉션이 열렸다. 리셉션은 영어로진행되었다. 참석자들은 초밥 등을 서서 먹으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이자리에서 나는 “옛날에는 나이 먹은 노교수들이 정년 퇴임하더니, 요즘에는 하시다 교수처럼 젊은 교수들이 정년퇴임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나는 1991년 한국의 약학회에서 하시다 교수를 처음 만난 이후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라고 덕담을 하였다. 나 이외에 보차드, 빈센트 리, 리켄(理硏)의 스기야마 교수 등도 축사를 하였다.
셋째 날인 10일(금)에는 아침 9시부터 열린 네 번째 세션에서는 ‘약물송달기술을 이용한 재생 치료(타바타)’, ‘세포시트(cell sheet) 조직공학 및 임상적용(오카노)’, ‘스마트 마이크로 머신의 생물의료에의 응용(고니시)’ 등이 큰 관심을 끌었다.
20분간의 커피 브레이크 뒤에 열린 마지막 세션에서는 ‘약과학의 최전선(베네트)’, ‘약물대사와수송체 관련 과학(스기야마)’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나는 일본 교수와 함께 이 세션의 좌장을 맡았다. 이날 낮 12시 10분, 230여명이 등록한 이 심포지엄의 막이 내렸다.
그날 저녁 6시, 정년퇴직기념축하회가 그란비아 호텔에서 열렸다. 하시다 교수 부부(부인은기모노 복장)가 금색 병풍이 펼쳐져 있는 단상 우측에 나란히 앉았다. 첫 순서는 은사인 무라니시 명예교수의 축사이었다.
그가 단상으로 올라오자, 하시다 부부는 일어서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무라니시 교수는하시다 교수의 옛날 대학원 생활 등을 회고 하였다. 이어 베네트 교수와 다나베미쯔비시 제약회사 회장이 비슷한 성격의 축사를 하였다. 뒤이어 야지마 명예교수의 건배사가 있은 다음 식사가 시작되었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참석자들은 식사가 시작되자 이리저리로 옮겨 다니며 서로 인사를 나누곤 하였다. 참석자 자리에는 하시다 교수의 정년퇴직 기념지(記念誌)가 놓여 있었다. 그 책에는 하시다 교수의 연구 업적 외에 나를 비롯한 12명(일본인 1명)의 축하 편지와 추억의 사진들이 인쇄되어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다시 4명의 축사와 연구실 대표의기념품 및 꽃다발 증정, 그리고 하시다 교수의 짧은 감사 인사를 끝으로 3일 간에 걸친 퇴임 기념 행사가 모두 끝났다.
2017-04-05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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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0> 입학식 특강
지난 3월 2일 서울대학교 입학식 날 오후, 나는 약학대학 신입생들에게 ‘어떤 자세로 대학 생활을 시작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게 되었다. 올해로 3년째 하는 특강인데, 지난 두 해에는 ‘21세기는 맞춤약학 시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었다.
참고로 올해 약대 신입생 68명 중 38명이 남학생으로, 이와 같은 남초(男超) 현상은 여초(女超) 현상이 일어난 1979년 이래 38년만의 일이라고 한다.
특강의 내용은 그 동안 ‘약창춘추’를 통해 밝혀 온 나의 주장을 정리한 것이었다. 예컨대 ‘나의 오늘은 하나님 은혜의 결과로 받은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고 정직하며 겸손하고 성실하게 살아라’, ‘인생은 미스터리이다, 복을 주시고 안 주시고는 하나님의 처분에 달렸다’, ‘참된 의미의 성공을 추구하며 살자’, ‘인생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잘못된 방향으로의 1등이 가장 나쁜 것이다’, ‘자기 앞에 놓여진 사다리를 착실히 오르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인생을 좀 길게 보라’, ‘친구를 잘 사귀어라’, ‘남의 의견을 경청하라’, ‘솔직한 지적은 관계를 해친다’, ‘인생의 가치는 사랑에 있다’와 같은 내용이었다.
근사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하였지만,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노교수의 잔소리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사랑과 정성을 다 해 강의하였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다음날(3월 3일) 아침 중앙일보를 보니 “서울대 단어 지워라, 성낙인 총장의 쓴 소리, 입학식서 ‘특권의식 비판’ 축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성 총장님은 3월 2일의 입학식에서 ‘오늘 이후 서울대학교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라, 그러지 않으면 오늘 입학식이 여러분 인생의 최고의 날로 그치고 그 이후는 오늘보다 못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축사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울대 졸업생들이 그간 우리나라 최고의 파워 엘리트로 각계각층에서 활약해 왔지만 최근 그들의 모습은 부끄러운 측면이 많다. 서울대란 이름에 도취되면 오만하고 특권의식에 빠져 출세를 위해 편법을 동원하고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다’고도 했다고 한다.
나는 총장님의 축사 내용이 내가 그날 오후 약대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특강 내용과 상당 부분 같은데 놀랐다. 예컨대 나는 ‘남을 딛고 남의 위에 군림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고 완벽한 실패이다. 갑(甲)질은 실패한 사람의 행패에 다름 아니다. 일생을 통하여 연약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일으켜 세웠는가가 참된 성공의 한 지표가 될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는데, 이 부분이 총장님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았다. 나도 총장님처럼 최근 매스컴에 자주 회자되는 서울대 동문들의 추태(?)를 떠 올리며 이 말을 했었다.
나는 그날 서울대 학생이라면 시험칠 때 커닝 따위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직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실 서울대는 정직, 겸손, 성실, 환경, 교통, 질서, 예의 등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의 모범이 되어야 마땅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서울대학교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 갈 바 이상향(유토피아)을 미리 보여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국민들은 서울대 학생이나 졸업생들이 서울대를 자랑하고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반면에 세금의 지원을 받고 공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서 남을 딛고 일어서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서울대 출신이 있다면, 사람들은 이런 서울대인들의 자랑질(?)을 용납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서울대 출신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한다.
서울대를 예로 들었지만 세상의 모든 ‘잘 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잘 나감이 주변의 수많은 ‘을(乙)’들의 자의반 타의반 협조(?)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고, 을(乙)들과 더불어 더욱 겸손, 성실, 정직하게 살기로 다짐하여야 한다.
지금 나라는 촛불과 태극기로 혼돈의 와중이다. 이런 때일수록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부터 회개하여야 한다. “돌이키면(회개) 살아나리라”란 우리 교회의 금년도 구호는 “돌이키지 않으면 죽으리라”라는 절박함을 경고하고 있다.
2017-03-22 0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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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9> ‘한국제약기술교육원’ 및 ‘팜텍’의 10주년을 축하드리며
지난 2월 15일 안양에서 한국제약기술교육원(이하 교육원)의 창립 10주년 기념식이 조촐하게 열렸다. 이 자리에 우리나라의 제약기술 전문가 20여명이 모여 지난 10년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자축하며 식사를 나누었다.
나는 외람되게도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축하의 말씀을 드렸다. 이 기념식은 우리나라 제약기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벤트이기에 그 때 드린 말씀을 이하에 옮겨보기로 한다. (이하 축사 전재)
제약기술•GMP 전문교육기관인 ‘한국제약기술교육원’이 2007년 창립된 지 올해로 10주년을 맞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아울러 교육원의 창립과 동시에 창간된 GMP•제약기술 전문지인 ‘팜텍’이 창간 10주년을 맞이한 것도 축하 드립니다.
이 교육원은 창립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제약기술 수준의 향상을 위하여 전문가들의 강의를 통한 강의(講義) 교육과 실습(實習) 교육, 그리고 팜텍과 같은 정기 간행물 및 서적 발간을 통한 지상(紙上) 교육을 실시하여 왔습니다.
교육원은 지난 10년 동안 212회 426일에 걸쳐 6,731명에게 제약산업 전 기술분야(297 과목)에 대한 강의(실습 27회 포함)를 하였습니다. 그 동안 초빙된 전문가 강사만도 205인에 이릅니다. 이 강의는 해를 거듭할수록 제약기술인들의 큰 호응을 받아 지난해에는 역대 최대의 인원(940명)이 수강을 하였습니다.
또한 교육원은 한국PDA와 공동으로 GMP 자료집인 「ICH Q7 Q&A - 원료의약품 GMP 해설서」(2012) 및 「Global GMP Q&A - 국제기구•주요국 GMP 해설서」(2015)를 발간하였으며, 한편으로 10년간 연 4회에 걸쳐 총 36권(Vol. 10, No.1)의 「팜텍」을 발간해 왔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에서는 30여 년 전부터 ‘팜테크재팬’이라는 GMP•제약기술 전문지가 월간으로 발간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팜테크재팬의 높은 수준에 감탄하며 부러워만 하고 있을 때에, 백우현 박사님(한국제약기술교육원 원장•한국PDA 회장)은 과감하게 팜텍을 창간하셨습니다. 제약기술서 불모의 이 땅에 개척자의 사명감으로 밀알 하나를 심은 것입니다.
그 동안 팜텍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국내 전문가를 필진(筆陣)으로 적극 발굴하여 우리나라의 제약기술 향상에 필요한 글들을 집필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팜텍은 이제 외국 잡지의 논문을 번역해 싣는 모방잡지의 수준을 뛰어 넘어 우리나라 기술자들의 독창성 있는 논문을 싣는 품격 있는 잡지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제약기술의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팜텍이라는 우리 나름의 제약기술•GMP 잡지를 갖게 된 것은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백우현 박사님을 비롯한 편집위원님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일입니다.
백우현 박사님은 2011년에는 ‘의약용어사전(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을 만들어내셨습니다. 그 때 저는 축사를 통하여 “이 사전이 발간됨으로써 비로소 우리나라의 체면(體面)이 서게 되었다”라는 말씀을 드린 바가 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백우현 박사님은 팜텍의 발간을 통하여 우리나라 제약기술계의 체면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나라 식약처는 2014년 PIC/S 가입에 이어 작년에 ICH 회원국이 되는 쾌거를 이룩하였습니다. 이러한 쾌거를 이룰 수 있었던 바탕에는 우리나라 제약기술 및 의약품 안전관리 기술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제약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 오신 제약기술자 여러분들과 팜텍 및 교육원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약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과 함께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앞으로 교육원과 팜텍이 더욱 더 질과 양의 면에서 세계 최고의 전문지로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의약품 안전관리 선진국이 되어야 할 우리나라의 제약기술계가 마땅히 품어야 할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교육원 및 팜텍의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2017-03-08 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