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51> 은사님 회고 2-임기흥 교수님
1967년 대학 1학년 때 임기흥 교수님의 약용식물학 첫 수업 시, 어떤 식물의 전초(全草) 그림을 그려내라는 숙제를 받았다. 나는 공책에다가 볼펜으로 대충 그려서 제출하였다. 며칠 후 공책을 되돌려 받아보니 “너는 도대체 학교엘 다니려고 하느냐?” 라는 교수님의 코멘트가 큰 글씨로 쓰여 있었다. 나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알고 보니 정태현 (鄭台鉉) 식물도감의 해당 식물 그림 위에 유산지 (硫酸紙, tracing paper)를 대고 4H 연필로 모사(模寫)해야 하는 것이었다.
임교수님은 일요일마다 근교의 산으로 약용식물 채집을 나가셨는데, 그 때마다 학생들 보고 “오기 싫은 사람은 안 와도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참석하지 않으면 학점을 안 줄 것 같은 불안감을 조성하셨다. 막상 참석해 보면 교수님은 앞장 서 올라가시면서 ‘이건 무슨 풀인데 뭐에 쓴다’고 설명을 하시는데, 내가 겨우 따라 잡으면 벌써 설명을 마치시고 다시 저만치 멀리 올라가시곤 하였다.
식물 분류가 전공이던 교수님은 약용식물학 강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여지껏 논문을 쓸 때 계속성 초본을 continuous plants, 불계속성 초본을 uncontinuous plants라고 이름 붙여 왔는데, 최근에 알고 보니 불계속성은 영어로 uncontinuous가 아니라 discontinuous이더군, 하하하” 하시는 것이었다. 1968년경 임교수님은 육수학회(陸水學會)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셨다. 이 학회는 1982년에도 존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임교수님은 우리가 학부 재학 중일 때에 박사 학위가 없으셨다. 당시에는 박사 학위가 없는 교수님이 더 많았다. 언젠가 약화학 전공의 채동규 교수님이 강의 중에 “임교수님이 논문을 써서 제출하였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 심사를 하지” 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말인지 몰라 학위를 줄 수 없다는 말씀 같았다. 그 정도로 임교수님은 한글로 글을 쓰시는 것이 서투셨다. 교지(校誌)인 약원(藥苑)에 실린 교수님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있는데, 마침표가 글 맨 끝에 단 한 개만 있을 정도로 문장이 끝나지 않고 줄줄이 연결되어 있는 등, 아닌 게 아니라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었다.
임교수님은 1916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만주에 있는 봉천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만주의과대학 약학전문부를 졸업한 후, 의예과 생물학 교실의 조교를 역임하였다. 그 후 광복 때 남하하여 서울대 사범대 강사로 지내던 중 김기우 약대 학장의 배려로 1949년초부터 약대 전임강사가 되셨다. 이처럼 임교수님은 만주에서 공부를 하셔서 중국어는 완벽하지만 우리말, 특히 글은 매우 서투셨던 것이다.
임교수님은 1968년 서울대학교 졸업식 (아마도 2월)에서 그토록 간절히 원하시던 약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는데, 그 해 10월 28일 연건동 약대에서 열린 대한약학회 총회 및 학술대회에서 그논문을 구두로 발표하시고 나와서 혈압으로 쓰려져 작고하셨다. 1916년 생이시니까 그 때 겨우 만 52세이셨다. 두 형님도 다 혈압으로 먼저 작고하셨다고 한다.
한번은 조윤상 교수님 (당시 조교?)이 무슨 일인가로 청량리에 있는 임교수님 댁 (철도청 관사를 불하받음)에 심부름을 가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댁에 전화가 없는 교수님이 많아서 용건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가서 보니 교수님은 안 계시고 사모님만 계셨는데, 사모님은 사과 궤짝 위에 종이를 펴 놓고 아드님이 볼 참고서인 전과지도서 (全科, 전과목 참고서)를 빌려다 하나하나 베끼고 계셨다고 한다. 조 교수님은 그 절약 정신과 함께 자식 교육을 위한 정성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임교수님에 대한 회고담은 1983년 11월 1일자 ‘서울대학교 동창회보’ 제68호 6페이지에 실린 바 있다. 임교수님의 제자인 고 정보섭 교수님가 쓰신 글이다. 이 글의 일부 사항은 그 글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임교수님도, 제자인 정교수님도 이미 오래 전에 작고하셨으니, 세월의 무정함이 새삼스럽다.
2018-06-20 09:38 |
[기고] <250> 은사님 회고 1 - 이왕규 교수님
정성분석화학 및 실험을 담당하셨던 이왕규 교수님은 왕년의 별명이 왕수(王水)일 정도로 성격이 엄격한 분이셨단다. 그러나 교수님은 적어도 나에게는 인자하셨다. 교수님은 전교생의 이름을 다 외우고 계셨을 정도로 깐깐한 분이셨다.
4.19 혁명 때에는 학생과장이셨는데, 시위에 참가한 약대생들을 전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하신 일을 자랑스러워 하셨다. 시위에 참가했다가 총에 맞아 죽은 대학생들이 많았던 때이었다.
나는 1971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분석화학 전공 (지도교수 이왕규)에 진학하였다. 한 학기 정도 수업을 받다가 입대하여 3년간의 군대를 마치고 영진약품 연구과에 취직하면서 대학원에 복학하였다. 그 후 소위 파트로 대학원에 다니면서 석사 학위 논문을 썼는데 선생님께 한번도 지도를 받지 않고 혼자서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러니 논문 수준이 오죽했을까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나는 1976년 종로구 연건동 소재 서울약대 2호관 강의실에서 열린 대한약학회에서 그 논문을 발표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슬라이드가 나오지 않아서 궤도를 이용해서 논문을 발표하였다. 즉 큰 모조지에 매직 펜으로 연구 내용을 쓰거나 그린 후 종이를 한장 한장 넘겨가며 발표를 하는 방식이었다.
1976~7년 경의 어느 날 이교수님은 영진약품에 다니고 있던 나에게 생약연구소 우원식 교수님 방에 조교로 가라고 추천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아내와 상의 끝에 그 자리를 사양하였다. 그 후 1978년에 결국 이 교수님 연구실의 조교가 되어 1979년 문부성 시험을 보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 때 우교수님 방에 조교로 갔으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교수님은 내 연구에 직접적인 지도를 해 주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교수님으로부터 인생을 길게 보는 안목을 배웠다. 내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 갔을 때 입학 동기생이 10명이나 되었다. 나는 이 많은 사람들이 훗날 다 어떻게 풀릴 수 있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교수님은 ‘그냥 꾸준히 있다 보면 다들 스스로 떨어져 나간다. 그냥 기다려라’고 말씀 하셨다. 훗날 보니 정말 다들 이런 저런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여 끝까지 학계에 남은 사람은 3명 밖에 안 되었다.
내가 일본 유학 전인 대학원 학생이던 시절에 선생님 따님이 조선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후에 식사 장소에 가보니 각종 음식들이 다라이 같이 생긴 큰 그릇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요즘 말로 뷔페이지만 당시에는 바이킹 요리라고 불렀다. 그렇게 많은 음식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1983년 3월 서울약대에 약제학 전공 조교수로 부임한 후 몇 년 안되었을 때, 아드님이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 교수님이 나를 불러 함진 아비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명색이 조교수인 내가 어떻게 함을 지고 갈 수 있나 불만이었다. 대학 동기인 염정록 조교수 (중대 약대)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으나 그는 사정이 있어 못 간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혼자 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신부 댁에서 보내 준 차에 타고 있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함은 이미 차에 실려 있었다. 청담동 신부 댁에 도착해 저녁 대접을 잘 받고 사례비도 두둑하게 받았다. 그 때 비로소 혼자 가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교수님은 1987년 5월 조기 명예퇴직을 하셨다. 미국으로 이민간 따님이 손주를 봐 달라고 하는 데다가, 본인이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을 하는 데에 한계를 느끼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당시 정월이면 아내와 함께 청파동에 있는 교수님 댁에 가서 세배를 드리곤 하였는데 그 때 사모님으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이교수님은 관악캠퍼스 21동 약학관 103호 강의실에서 고별강연을 하셨다. 나는 그 강연내용을 전부 메모해서 약대 교지인 약원(藥苑, 29 호)에 실었다. 왜정 때인 경성약전 시절, 주석산 결정을 만드는 작업반에 감독으로 동원되어 나갔던 이야기, 신설 개성 약대 개교 전날 6.25 전쟁이 발발하여 가지 못한 이야기 등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선생님이 때때로 그립다.
2018-06-06 09:38 |
[기고] <249> 제8회 약학사(藥學史) 심포지엄
지난 4월 20일 (금) 오후 3:40~5:40에 서울 삼성동 코엑스 홀 318B에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의 제8회 약학사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약학사분과학회는 2014년 4월 18일 ‘한국약학의 역사 I’이라는 주제로 창립 심포지엄을 개최한 이래, 2017년 봄을 제외한 매년 봄 가을에 심포지엄을 개최해 오고 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1) 북한의 약학교육과 약사제도 (전 함흥약학대학 박태춘 교원), 2) 약인(藥人) 이을호(李乙浩) (충북대자연대 이영남 명예교수), 3) 한국약학사 관련문헌 소개 (서울대약대 김진웅 교수)가 발표되었다.
박태춘 교수의 발표 내용을 약업신문 기사에서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의 일반적인 교육 제도를 보면, 5세 미만 어린이들은 탁아소에 다닌다. 5세가 되면 유치원(2년)을 거쳐 인민학교(4년) 또는 고등중학교(6년)에 진학한다. 그 후 대부분은 군복무(10년)를 하거나 사회에 나가 경제 활동을 하며, 1~2%만이 대학교(4~6년)에 진학한다.
그 중 약학교육기관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1969년 창립된 함흥약학대학은 6년제로 구성돼 있으며, 연간 4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사리원 동약(東藥)대학은 4년제로, 연간 약 100명의 학생들을 배출한다. 이 외에 의학대학 내 약학부가 전국에 10개 있는데, 각각 50명씩 연간 총 500여명의 약제사를 배출한다.
약학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곧 약제사 자격 취득을 의미한다. 이후 3년의 실습 과정을 거쳐 각 부서에 배치 받는다. 함흥약학대학에서 실제적인 약학을 가르치는 학부는 교무부학장 산하 교무과에 소속돼있는 합성학부(합성과), 제약학부(항생소과, 생물약품과), 약제학부(약제과, 동약과) 및 의료기구학부(의료기구과) 등이다.
함흥제약연구소의 연구사, 함흥약학대학의 교원․연구원, 제약공장의 기술 일군, 병원의 약무(藥務) 일군 등은 나름대로의 약학 연구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구 제목과 관계없이 돈이 될 수 있는 약품을 만들어 팔아 식량을 구입하고 있다.
박태춘 교수는 앞으로 10년 내로 남북한이 통일되며, 통일 이후에는 교육과 보건의료 약학 분야의 민간 교류 활성화, 남한 약대 교수들의 북한 약대 초빙강의 등이 이뤄질 것으로 내다 보았다.
박교수의 예언이 맞으려는지 지난 4월 28일에는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두 번째 주제인 이을호 선생은 1930년에 경성약학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1933년 3월에 졸업하여 약제사 면허를 취득한 분으로, 그 후 향리인 전남 영광군 남천리에서 호연당 약국을 열어 활약을 하다가, 뒤이어 전남대 문리대에서 조교수 부교수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면서 철학 특히 다산 정약용을 연구하는 다산학 분야의 대가(大家)가 된 분이다.
발표자인 이영남 교수는 서울약대를 졸업하고 충북대 미생물학과 교수로 정년퇴직한 후, 서울시립대 국사학과에 입학하여 학사 학위를 받고 다시 동 대학원에 진학하여 약학사 등을 공부하고 있는 분이다.
세 번째 주제는 흩어져 있는 우리나라 약학사 관련 자료의 리스트를 만들고 있는 김진웅 교수가 중간 보고 성격으로 발표를 한 것이다. 약학사 관련 책자 등에 대해서 사진을 함께 보임으로써 청중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서울대 약대 김진웅 교수는 약학사 분과학회의 총무로서 분과학회의 실질적인 살림을 맡고 있는 분이다.
한편 약학사 분과학회는 금년 말에 가칭 ‘한국약학사 저널’을 창간할 계획이다. 이 저널에는 우리나라 약학사에 관한 원저 논문은 물론, 이미 다른 매체에 발표 된 약학사 관련 자료 (글이나 사진 포함)도 분야와 형식에 구분 않고 실을 예정이다. 약계에 계신 모든 분들의 적극적인 자료 기증과 함께, 저널 발간에 대한 재정 후원도 부탁 드린다.
끝으로 이번 심포지엄을 재정으로 후원해 주신 하나제약과, 참석자 전원에게 기념품(코아네 코마스크)을 기증해 주신 일동생활건강 (사장 김중효)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2018-05-23 09:38 |
[기고] <248> 내리 사랑
연녹색 나뭇잎에 기분이 상쾌해지는 봄이다. 봄은 아마 네 계절 중 가장 “볼만’하다고 해서 ‘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봄이 볼만한 것은 꽃도 나무도 이 때 어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그 어린 모습이 예쁘기 때문이다. 어린 모습이 예쁜 것은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강아지가 개보다 귀엽고, 어린이가 어른보다 예쁘다.
반면에 늙거나 오래된 것은 사람, 동식물, 물건을 막론하고 솔직히 말해서 대체로 추하다. 얼마 전 모처럼 당구장엘 가봤더니 손님이라고는 몽땅 노인들뿐이었는데, 분위기가 좀 ‘거시기’하였다. 60대에도 경로당에 가기 싫어하셨던 어머니 마음이 대번 이해되었다.
사람이나 동물은 자기 자식(새끼)을 엄청 예뻐한다. 부모에게는 새끼가 정말로 예쁘게 보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자식은 다 예쁘고, 늙으면 다 추해지도록 프로그램 해 놓으셨을까? 만약 아기가 팔구십 늙은이의 추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어땠을까?
아마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기 쉽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로 종족을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또한 사람이 늙어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의 모습이 갓 태어난 아기처럼 가장 예쁘도록 프로그램화 놓으셨다면, 자식들은 부모와의 헤어짐을 지나치게 가슴 아파하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모습을 추하게 만들어 놓으신 이유는, 부모와의 이별을 쿨하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종족의 보존’과 ‘쿨한 이별’을 위하여, 태어날 때 가장 예쁘고, 떠날 때 가장 추한 모습이 되게 만드신 하나님의 프로그래밍(섭리)에 감사 드린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쁜 새끼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부모의 본능이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부모로부터 자식으로의 ‘내리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 사랑을 지나치게 자랑할 일은 아니다.
반면에 자식의 부모 사랑, 즉 효도는 물을 상류로 역류(逆流)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효도는 인간의 본능이 아닌 모양이다. 나이 먹어 추한 모습으로 바뀐 부모를 예쁜 어린 새끼 사랑하듯 사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어느 정도는 억지로 해야 한다.
효도(孝道)! 오죽하면 효(孝)하기가 도(道)를 닦는 만큼이나 어렵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므로 누구라도 부모를 자식의 반의 반만큼, 아니 자신이 매일 산보시키고 목욕시키는 애완견의 반의 반만큼만 챙겨드리는 사람은, 온 천지의 효자 칭송을 받아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세태는 꼭 그렇지도 않지만, 지금까지는 자식들이 섭섭해지기 시작할 때쯤이면 손주들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쓸쓸한 늙은이에게 천만 다행한 일이다. ‘내리사랑의 법칙’에 따라 자 손주들이 자식보다 훨씬 더 예쁘다. 손주들은 재롱을 떨어주고 아직 자식처럼 덤비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손주들도 머지 않아 할머니 할아버지 품을 떠난다. 그래도 자식보다는 손주들이 더 오랫동안 사랑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착각이라 해도 관계없다.
손주가 자식보다 더 예쁘므로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자주 손주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는 요즘 손주들이 학원을 다니느라 너무 바빠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놀아 줄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국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인데, 정치지도자 중 이 측면을 고려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내가 만약 집권하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다.
나는 가끔 자식들이 섭섭해지면 ‘나는 부모님께 잘 했는가’ 되돌아 본다. 늘 편찮다고 하시던 어머니를 귀찮아 하고, 부모님께 말대꾸 한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자꾸 부모님이 그리워진다. 곧 자식들에 대한 섭섭함이 중화(中和)된다.
어린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늙은 부모님을 귀찮아 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자 원죄(原罪)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성경을 비롯한 모든 도덕이, 자식 사랑은 억제하고 부모 사랑은 억지로라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내리사랑’은 이러한 모습으로 반복되며 또 다음 세대(世代)로 흘러 내려 갈 모양이다. 예쁜 봄은 언제나 짧았다.
2018-05-09 09:38 |
[기고] <247> 참고 견딤 위에 세워진 사랑
1. A장로는 50세 중반에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체육교사 직을 사직하고 부인인 B권사와 함께 아프리카에 있는 보츠와나라는 나라에 선교사로 떠났다.
1년만에 혼자서 일시 귀국한 그는 “그 곳이 너무 덥고 힘들어 빨리 돌아 가고 싶지 않은데 B권사가 자꾸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고 고백하였다. 그 때까지 나는 선교사는 ‘예수에 미쳐서, 그리고 자기가 좋아서’ 나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나는 A 장로의 말을 듣고 그들도 가기 싫은데 참고 가는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때부터 나는 그 분들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A 장로 내외분이 부탁한 대로 두 분이 현지에서 사역하는 모습의 사진을 화장실 변기 맞은 편에 붙여 놓고, 변기에 앉을 때마다 기도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분들과 20년도 넘게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자랑거리이다. 그러나 말로만 예수를 믿는 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2. 여수에 있는 애양원(愛養院)은 고 손양원(孫良源) 목사님이 한센병 환자들을 섬기던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1948년 여순반란 사건 때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C 등의 고등학생들에 의해 두 아들을 잃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C는 군경에 붙잡혀 사형장으로 끌려 가게 되었는데, 손목사님은 “이 아이를 죽이면 내 아들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이 아이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 사람 되게 하겠습니다”라며 살려주기를 애원하였다.
덕분에 C는 목숨을 건졌고 손목사의 양자(養子)까지 되었다. 손 목사의 딸은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은 몰라도, 살인범을 오빠라고 부르게까지는 하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대 들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성경에 원수를 용서까지만 하라고 했더냐?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더냐?’며 끝내 C를 양자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딸은 골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꺼이 꺼이 소리 죽여 우는 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그제서야 딸은 아버지도 두 아들을 잃은 말할 수 없이 큰 슬픔과 분노를 참으며 C를 양자 삼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애양원을 떠나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던 손목사는 끝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던 날 인민군에 의해 피살당했다. 그의 장례식 때 상주를 맡은 이는 살인범이자 수양 아들인 C 였다. 훗날 C의 아들은 긴 방황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약춘 212 참조).
3. 한국전쟁 때 3살이었던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김포에서 평택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어느 추운 겨울날, 어느 집의 비좁은 방에 들어 가 밤을 지새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밤새 벽의 냉기를 자신의 등으로 막고 나를 안고 앉아 계셨다고 한다. 방이 좁아 눕지도 못 하였단다.
이 일로 인해 어머니는 그 후 상당히 오랫동안 몸이 편치 않으셨다. 또 한번은 주안 염전 근처에 임자 없는 밀가루 자루가 쌓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삼십리 길을 달려 가 몇 자루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날라 오신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깨와 허리가 끊어지게 아팠지만, 오직 자식과 식구를 먹일 욕심으로 그 고통을 참아내신 것이다. 어머니의 그 욕심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4. 사랑을 위한 참고 견딤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견줄 것이 있을까? 신성(神性)과 함께 인성(人性)을 가지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날 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막 14:36)”라고 기도하였다.
예수님도 십자가가 두려우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밤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는 새 계명을 주셨다. 아!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의 두려움을 견뎌내신 것이다.
A장로님, 손목사님, 우리 어머니,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 어렵고 힘듬을 ‘참고 견뎌 내’ 세운 고귀한 것이었다. 돌아 보면 세상에 이와 같은 사랑이 적지 않음을 발견하고 감동하게 된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2018-04-25 09:38 |
[기고] <246> 故 김기우 학장의 가족사
김기우(金基禹)는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專) 출신은 아니지만 독학으로 조선약제사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위생시험소에 근무하다가, 1941년 금강제약 전용순(全用淳) 사장의 후원으로 동경제국대학 약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중도 귀국하여, 광복 후 당시 경성약전에서 사립 대학으로 승격된 서울약대의 교수 (1949.1~1949.12) 및 학장 서리를 (1949.1~1950.3?)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약학대학 100년사).
최근 서울약대 김진웅 교수가 발굴한 자료에 의하면, 김교수는 1911년 11월 26일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남면(南面) 수우리(修隅里) 58번지 (본적)에서 출생하였고, 1950년 7월 16일 자택인 종로구 관훈동 84번지 11호에서 납치되었다.
부인 박보렴(朴寶奩) 여사는 14살 연상으로 1897년 11월 8일생인데 1950년 7월 30일에 역시 자택에서 인민군 3명에 의해 납치되었다. 당시 박여사는 60세로 대한여자국민당 부위원장이었다. 이는 김기우 교수의 장남인 김우종(金宇鐘)이 1956년 6월 19일 대한적십자사에 제출한 ‘피납치인 신고서’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이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보면, 경남 진주군 진주면 평안동 77번지를 본적으로 하는 박여사는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혀 23세인 1919년 1월 2일 기소유예 판결을 받았다.
2017년 어느 날 서울대 가산약학역사관의 장윤이 학예사가 김기우 교수의 손녀딸 (Alison Kim Flageul)이 프랑스 보르도에 살고 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를 보았다. 이에 김진웅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Alison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연락을 주고 받은 후 프랑스로 ‘서울대 약대 100년사’ 한 권을 보냈다.
마침 딸 Alison을 보러 갔던 미국에 사는 Alison의 어머니 (김기우 교수의 며느리) 장유경이 그 책에 실린 김기우 교수의 이야기를 읽고, 3월 8일 김진웅 교수에게 한글로 쓴 이메일을 보내 왔다. 장유경을 통해 알게 된 김기우 교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기우 교수는 김우종(金宇鐘)을 아들로 두었다. 김우종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 공대 화공과에 입학, 1958년 화공과를 우수한 성적 (총장상)으로 졸업(12회)한 다음 1959년에 도미(渡美)하여 Carnegie Mellon에서 화공학 박사 및 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35년간 Stony Brook University에서 응용수학과 교수 및 Graduate Studies의 Director로 근무한 후 2004년 뇌암으로 작고하였다. 1981년쯤 김우종 부부는 미국 적십자사로부터 어머니(박보렴)가 평양에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찾아 뵈려고 준비하던 중, 어머니가 작고하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아버지(김기우)소식은 언젠가 중국에 계시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전부이었다.
장유경은 이화여중 1학년 때(13세)인 1963년에 미국 줄리어드에 유학하였다. 이는 당시 장안의 화제이었다. 졸업 후 그녀는 25년간 Stony Brook School에서 교편을 잡았다. 현재는 은퇴하여 뉴욕과 플로리다를 오가며 살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연세대 상대 학장을 지낸 장희창 교수로 그 역시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김기우 교수에게는 김우종 교수가 낳은 손자 손녀가 있다. 손자인 Jason Kim은 Princeton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Stony Brook 대학 병원의 비뇨기과 의사 겸 Women’s Pelvic Health and Continence Center의 Co-Director로 근무하고 있다. 그와 한국인 부인 사이에 돌맞이 아들이 있다.
손녀인 Alison은 Jason의 동생으로 Harvard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 갔다가 와인 사업을 하는 프랑스인 남편과 결혼하여 2남 (10살 8살)을 두었다.
3월 16일, Alison이 감사의 뜻으로 남편 회사 Chateau Brillette의 와인을 보내 왔다. 지구촌을 감싸 도는 역사의 물결에 감회가 깊다.
2018-04-11 09:38 |
[기고] <245> 서열(序列)과 질서
몇 해 전 재미있는 건배사를 하나 배웠다. 그것은 잔을 들고 짧게 “얘들아, 마시자” 라고 외치는 것이다. 참석자들이 이에 호응하여 “예, 형님”, 또는 “예, 오빠”라고 외치면 상황 끝이다.
그러면 참석자들, 특히 “얘들아!”하며 건배사를 외친 사람은 자기가 무슨 조폭(조직폭력단)의 우두머리 (그들 말로 ‘형님’)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야릇한 쾌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얘들아”를 외치고 다닌다..
1967년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학생이 갑자기 강의실 단상에 올라가더니 ‘나는 여러분과 입학 동기이지만 이런 저런 사유로 몇 살 더 먹었으니, 나를 야! 자! 하며 부르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하였다. 그 후 우리들은 그를 ‘형’이라고 부름으로써 오늘날까지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처럼 사람을 만나면 누가 형 (또는 언니)이고 동생인지 서열부터 정해야 한다. 서열이 결정되면 연하(年下)인 사람은 연상(年上)인 사람을 ‘형님’ 또는 ‘선배님’ 이라고 부르며 대우를 해야 한다. 만약 연하인 사람이 슬슬 반말을 트려고 나오면 연상인 사람은 금방 심기가 불편해 진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도 좋은 방향으로 진전되지 못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우두머리나 형으로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진짜 나이보다 몇 살 더 먹었다고 속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다가 운 나쁘게 주민등록증이 공개되어 진짜 나이가 들통(?)나면, 예외없이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그렇다’고 둘러댄다.
나는 한 해 재수(再修)해서 대학에 들어 갔기 때문에 고등학교 1년 후배들하고 같은 학년이 되었다. 후배들은 고래(古來)로 당연한 관습에 따라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1살 빠른 7살에 초등학교에 들어 갔기 때문에 일부 후배와 나이가 같았다.
어떤 후배는 나보다 생일이 빨라 실제로는 그가 몇 달 ‘형’인 경우도 있었다. 그런 후배들이 나를 ‘형’이라고 부를 때면 은근히 마음이 거북하였다. 그래서 그런 후배들하고는 지금까지 서로 야! 자! 하지 않고 올림 말도 내림 말도 아닌, 문자 그대로 ‘반말’을 사용하기로 하는 등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고 있다.
서열이 중요한 것은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부모 자식 간에는 물론이고, 형제 남매 간, 동서 간 등에도 서로 서열에 합당한 말을 사용하여야 한다. 가족 간에는 나이에 앞서 어떤 관계인가가 서열을 결정짓는다. 자식은 부모님께 경어를 써야 하고, 제수(弟嫂)는 나이 적은 형수(兄嫂)에게도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집안이 제대로 돌아 가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서열이 가장 엄격한 곳은 아무래도 군대와 직장이다. 거기에서는 나이가 아니라 누가 계급이 높으냐, 누가 상사(上司)이냐가 서열을 결정한다. 그렇다고 나이나 관계 등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내가 사병으로 군에 복무할 때, 이종사촌 동생의 친구가 우리 부대에 ROTC 소위로 부임하였다. 당연히 나는 그를 상사로 모셨지만, 그는 나를 제 친구의 형님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다. 그 죄(?)로 그는 지금까지 내 기억에 인간성이 별로인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서열 사회, 즉 누가 형이냐, 어른이냐, 상사이냐에 따라 사람의 서열이 결정되는 사회는 일견 불합리해 보인다.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한데, 왜 자식은 부모에게 경어를 써야 하고, 동생은 형의 말을 들어야 하며, 왜 젊은이는 어르신에게 공손해야 하고, 부하는 상사를 깍듯이 모셔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일까? 사회의 서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그런데 세상살기는 전에 비해 오히려 더 각박해졌다. 오죽하면 나이 좀 먹었다고 젊은이를 훈계하다가는 큰 화를 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겠는가? 비굴하게 살아야만 안전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돌이켜 보면 적절한 서열은 우리 사회의 질서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질서의 파괴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면, 서열 파괴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얘들아, 안 그러냐?”
2018-03-28 09:06 |
[기고] <244> 대학원 신입생들에게
얼마 전 서울대학교 약학과 석박사 과정 신입생들에게 강의(2월 28일)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학생 중에 타 학과 출신도 많은 점을 고려해서 그들에게 약과학자로서의 책임감과 자긍심을 불어 넣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은 ‘바담 풍(風)’ 하면서도 학생들에게는 ‘바람 풍’ 하기를 바라던 훈장님과 같은 처지이지만, 용기를 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강의를 준비하였다.
1. 인생을 조금 긴 안목(眼目)으로 바라 보라 – 젊을 때는 1~2년이 긴 세월로 느껴진다. 그래서 빠른 시일 내에 성취를 이루고자 조바심을 내기 쉽다. 그러나 나이 70이 되어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1~2년 정도는 인생에서 그리 긴 시간이 아닐 수 있더라. 그러니 행여 출발이 남보다 1~2년 늦었더라도 너무 초조해 하거나 배우기를 포기하지 마라.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실은 전혀 늦지 않은 경우가 많음을 믿어라.
2. 생명 현상의 본질적인 의문에 도전하라 – 일생을 걸고 해명할 가치가 있는, 예컨대 생명 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 도전하라. 때로는 저널을 덮고 혼자 생명의 신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 기성 연구자들과 다른 시각에서 생명을 바라보라. 석사 과정 때부터 자기 연구 주제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젊을수록 자연과학 전반에 대한 건강한 상식을 갖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3.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야 한다 – 서울 약대 연구진이 국제 저널에 발표하는 연구 논문은 그 수(數)로는 이미 세계 최고이다. 이제는 연구의 질(質)을 높이는 것이 과제이다. 앞으로 여러분은 질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지 않으면 스스로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충분히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 자신감을 가져라. 여러분은 장차 외형적으로는 권위 있는 국제학회에 특별강연 연자로 초청받는 연구자로 성장하여야 한다.
4. 머리만 쓰지 말고 수고를 아끼지 마라 – 꾀 많은 연구자는 흔히 실험이라는 수고를 아끼려 든다. 우직한 연구자가 10번 반복 측정할 때에, 꾀돌이 연구자는 3번만 측정해도 결론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고를 아끼면 결과의 재현성(再現性, reproducibility)이 낮아지고, 덩달아 결론의 설득력도 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손이 게으른 자는 결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법이다.
5. 연구 윤리를 지켜라 – 세계적인 학자가 되려는 야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논문 발표가 급해도 생명의 존엄성을 허술히 생각하거나, 또 불확실한 실험 데이터를 발표해서는 안 된다. 데이터를 조작해서, 또는 생명윤리를 지키지 않아서, 저 높은 곳에서 나락으로 추락한 스타 연구자들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라. 욕심이 지나치면 죄를 낳는 법이다.
6. 초고령화(超高齡化) 시대를 상정하라 – 2017년 Lancet 2월호를 보면 2030년대에는 우리나라 남녀의 평균 수명이 90세를 넘게 된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초고령화 시대에 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나라 인구 중 일상생활기능이 저하된 노인이 차지 하는 비중이 엄청나게 커진다는 말이다. 여러분의 연구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선도하거나 또는 적어도 그 변화에 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연구는 현실에서 외면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7.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라 –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런 생활 중에서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한다. 나는 연구에만 몰두하고 나머지 인생 문제는 남이 다 해결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절대 오지 않는다. 여러분은 아무리 바빠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다 하며 살아야 한다.
때를 놓쳐 끝내 결혼을 하지 못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가정을 이루지 못하면 오히려 계속 연구에 몰입하려는 초심을 지키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라. 결혼과 육아는 사람이 마땅히 거쳐가야 하는 하는 필수 과정이다. ‘결혼하라!’ 이는 내가 가장 확신을 갖고 젊은이에게 권하는 말이다.
2018-03-14 09:38 |
[기고] <243> 하목사님
2011년 8월에 소천하신 온누리 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은 유연하고 푸근한 분이셨다.
1. 그럼 그만 두세요
외교관인 M 집사는 뉴욕에 근무할 때 교민들을 상대로 ‘성경의 맥을 잡아라’라는 주제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었다. 인기가 매우 높았는데 어느 날, 교민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공무원이 특정 종교에 대한 강의를 해도 되느냐? 일과 후에 한다고는 하지만 강의 준비로 일과 시간을 뺏길 것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고민에 빠진 M 집사는 얼마 후 하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하 목사님은 “그럼 그만 두시죠”라고 대답했단다. ‘믿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니 흔들리지 말고 밀고 나가라’ 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M집사는 예상 외의 대답에 몹시 놀랐다. 뒤이어 감동과 마음의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 결국 M 집사는 나중에 더욱 유명한 성경공부 강사가 되었고 현재는 목사가 되었다.
2. 너무 뜨거우면 데어요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하던 L교수가 장로 피택(被擇)을 권고 받고 하 목사님에게 말했다. “저는 믿음이 뜨겁지 못해 장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자 하 목사님은 “너무 믿음이 뜨거우면 옆의 사람들이 데어요” 하였다.
L 교수는 다시 “저는 병원 의사라 바빠서 교회에 자주 나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사양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하 목사님은 “교회 오지 마세요, 그냥 병원에서 사역하세요” 했단다. L 교수는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그 후 교회의 대표적인 장로가 되었다.
3. 그냥 주고 나오세요
교회의 원로 장로님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사업을 하던 그 분은 하 목사님의 부탁으로 가까운 섬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몇 년간 온갖 수고를 다 해 드디어 교회를 지을 땅을 확보하였다.
그런데 막상 교회를 지으려 하자 그 섬의 다른 교단 책임자들이 찾아 와, ‘이 섬에 온누리 교회를 세우면 우리 교단 교회들이 살아 남을 수 없을 것 같으니 제발 교회 건립을 취소해 달라’고 하였단다. 그래서 장로님은 하 목사님을 찾아가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하 목사님은, “그럼 그냥 포기하고 나오시죠” 하더란다. ‘아니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생을 해서 마련한 땅인데, 그냥 포기하고 나오라니?’ 장로님은 어이가 없어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할 수 없어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섬을 나왔다.
그랬는데 그 후 어느 날 그 교단에서 사람들이 장로님을 찾아 와, ‘제발 원래 계획대로 온누리 교회를 세워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웬일인가 알고 보니 ‘만약 이 섬에 온누리 교회를 못 세우게 하면, 우리들도 기존의 교회에 안 나겠다’고 섬 주민들의 반발하였던 모양이다. 결국 장로님은 기존의 교단과 아무런 갈등 없이 그 섬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4. 세미나하지 마세요
생전 하 목사님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다. “여러분, 교회 현관에 누가 X을 싸 놓았거든, 근본적인 재발 방지대책 세운다고 세미나 하지 마세요. 그냥 본 사람이 조용히 치우세요”
지금까지도 울림이 있는 말씀이었다.
5. 그 놈이 그 놈
어느 날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이 온누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사회자는 무심코 버릇대로 “오늘 설교는 하용조 목사님이 하시겠다”고 소개하였다.
뒤이어 강단에 선 이 목사님은, “방금 사회자가 나를 하용조라고 잘못 소개했는데, 뭐 괜찮습니다. 다 그 놈이 그 놈입니다” 하였다. 그 말에 참석자들은 박장대소하였다. 이동원 목사의 아량과 재치, 두 사람의 격의 없는 우정과 마음 그릇의 크기가 감동을 주는 해프닝이었다.
이처럼 유연하고 푸근해서 사람들을 다가 오게 만들던 하 목사님이 새록새록 그립다.
그 분의 병세가 깊어졌을 때 내게 두 번 전화를 주셨다. 한번은 일본에서, 한번은 세브란스 병원에서였다. 두 번 다 내게 하신 말씀은 “책을 쓰세요” 뿐이었다. 신앙 간증 같은 책을 쓰라는 말씀 같았지만, 나는 당황해서 “네?” 소리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껏 감히 그런 책을 쓸 수 없는 내가 부끄럽고 죄스러울 따름이다.
2018-02-28 09:38 |
[기고] <242> 혼자서도 잘 산다구요?
누구나 늙을수록 누군가 함께 놀아주길 바란다. 여기에서 ‘누군가’란 단연 손주, 자식, 며느리, 사위 같은 가족을 말한다. 젊어서는 혼자 사는 게 좋을 때가 많다. 혼자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혼밥’ ‘혼술’을 즐기는 젊은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이가 모르는 게 한가지 있다. 늙으면 본의 아니게 몸이 아프고, 우울해지고, 외로움을 타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도 그랬었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말씀하시면 ‘또 시작이신가’하고 귀찮게만 생각했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나는 참 무심한 자식이었다.
의사도 자신이 병을 앓아 보고 나서야 환자를 살갑게 치료한다고 한다. 비로소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가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노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얼마 전 유행하던 노래에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란 가사가 있다. 늙은이는 젊어 봐서 젊은이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젊은이는 늙어보지 못해서 늙은이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내용이다.
아무튼 늙은이는 이런 저런 이유로 누군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식보고 그래 달라고 하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우선 젊을수록 바쁜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손주들도 학원 다니느라 할아버지 할머니와 놀아 줄 시간이 없어졌다. 어쩔 수 없이 늙은이는 스스로 자신의 아픔과 외로움을 감당해 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대개 교양(敎養)있는 사람일수록 자식에게 덜 의존하려고 노력한다. 교양이란 음악 미술 영화의 감상, 독서, 산책 등처럼 혼자 잘 노는 기술을 말한다. 이런 기술, 즉 교양이 없을수록 자식들이 싫어한다. 자식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늙은이에게 교양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늙은이는 누구나 교양 있게 늙다가 품위 있게 죽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천부적으로 교양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옛날 시어머니가 흔히 했던 며느리 괴롭히기도 어쩌면 심심해서, 외로워서, 즉 교양이 없어서 할 수 밖에 없었던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소위 교양이 있는 (척 하는) 사람은 이런 행동을 자제하지만, 아무리 교양이 있어도 더 나이를 먹어 몸이 아프거나 우울증 등이 생기면, 내심 자식들이 안 놀아주나 바라게 된다.
다만 겉으로 괜찮은 척, 교양 있는 척, 위선을 떨고 있어서 남들이 잘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아무튼 혼밥, 혼술은 특히 늙어서는 절대 피하고 싶은 못된 생활양식이다.
자식, 특히 손주를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무지하게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식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더니 우리 부부도 정말 아들딸보다 손주가 더 예쁘다. 내리사랑은 하나님의 섭리인 듯 하다.
함께 살며 수시로 손주들의 재롱을 즐기는 우리 부부지만, 우리도 몸이 아플 때면 자식이 그리워진다. 하물며 가족과 가정도 없이 평생을 혼자 사는 독거노인의 삶은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응급 시 119에 전화 걸어줄 사람, 아플 때 병원에 데려다 줄 사람도 없는 노년을 산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다. 그것은 결코 교양 있는 삶이 아니다.
요즘 비혼(非婚)이 무슨 풍조(風潮)처럼 되어 있지만 20-30년 후, 나는 사회가 독거노인 생활의 어려움을 심각하게 인식한 다음에는 다시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하는 시대로 돌아 오게 되리라 믿는다.
2030년이 되면 인류 최초로 평균수명이 90세가 되는 나라가 출현한단다. 그리고 그 나라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란다. 작년에 Lancet이라는 의학잡지에 실린 내용이다. 머지않아 인생의 대부분은 늙은이로서 살게 될 모양이다.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결혼해서 가족과 함께 늙어가기 바란다.
우리 부부도 교양 있게, 자식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인생 말년을 잘 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우리도 어느덧 자식의 따듯한 말과 사랑의 기도가 그리운 나이가 되었다. 늙을수록 자식들, 특히 손주들을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다.
2018-02-14 09:38 |
[기고] <241> 13년만의 걷기, 그리고 구세주
2001년 경미한 보행 장애를 겪고 있던 3살짜리 여아 (A양)가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서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수 차례 입원치료를 받고 국내외 병원을 전전했으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20세가 된 2012년 7월, 전처럼 재활치료를 받던 중 물리치료사 윤씨로부터 “뇌병변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다시 진찰을 받았다.
의료진은 MRI 사진 등을 보더니 이 병은 ‘뇌성마비가 아니라 도파 반응성 근육긴장이상’이라고 했다. 즉 신경전달 물질과 관련된 효소의 이상으로 주로 소아에게 나타나는 소위 ‘세가와병’이라는 인데, 소량의 도파민을 투여하면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고 대구 병원과는 다른 진단을 내린 것이다.
새로운 진단에 따라 도파민을 투여 받은 A양은 투여 개시 단 1주일만에 스스로 걷게 되었다. 13년을 못 걷던 사람이 1주일 만에 기적적으로 걷게 되다니 기적이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지난 13년간이 누워지낸 세월이 억울하게 생각된 A양과 A양의 아버지는 대구의 그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 당시의 의료 기술로는 세가와 병이라고 진단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 “환자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환자 가족은 이 결정을 수용했다고 한다. 이상은 2017년 12월 6일자 한국일보 기사를 가감한 것이다.
13년 누워있던 세월을 어찌 1억원에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100억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이 판결은 환자의 삶을 너무 낮게 평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구의 그 병원도 고의(故意)로 오진(誤診)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의료수준으로 세가와 병인 줄 알기 어려워 그리 진단한 것이라니 크게 나무랄 수도 없는 법적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A양에게 있어서 세가와 병이라고 새로운 진단을 내려 준 의료진은 구세주(救世主)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당신의 병은 뇌성마비가 아닌 것 같으니 다른 데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보라’고 말해 준 물리치료사는 환자를 구세주 앞으로 인도한 복음(福音)의 전도자였던 셈이다.
이 세상의 의료진은, 극히 일부 악덕(惡德)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환자의 치유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모두 선(善)한 의도로 환자 치료에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A양의 경우처럼 어느 의료진을 만나느냐에 따라 병을 고치느냐 못 고치느냐가 극명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환자를 다른 의료진이나 다른 의료기관으로 보내는 것이 선한 의도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가 치료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환자를 붙잡아 둔 결과, 환자의 생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면 그 의료진의 고집은 더 이상 선의(善意)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문외한(門外漢)들이 어떤 환자에게 섣부른 조언을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그 조언 때문에 환자가 더 좋은 진료를 받을 기회를 늦추거나 잃게 되었다면 그 조언은 결과적으로 악(惡)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지어 의료진까지도, 환자의 질병이나 건강에 관해 조언을 하거나 의술을 베풀 때에는 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행여 나 때문에 환자가 더 좋은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TV를 보면 건강에 대해 지나치게 단정적인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행여 그들의 조언 때문에 시청자들의 건강이 훼손되지 않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며칠 전 교회에서 ‘왜 예수님만을 구세주라 하는가?’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나에게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영육(靈肉)을 살려 줄 진정한 구세주 단 한 명이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선한 의지를 가진, 그러나 환자를 살릴 능력이 모자라는 의료진을 모두 구세주라 할 수는 없다는 말씀이다.
새 해 아침, 물리치료사의 복음을 경청했던 A양처럼, 나를 구세주 앞으로 인도하는 진정한 복음에 더욱 귀와 마음을 열고 살기를 다짐해 본다. 근하신년(謹賀新年)
2018-01-31 09:38 |
[기고] <240> ‘식후 30분’ 무용론 유감
2017년 9월 27일 서울대병원은 그 동안 ‘식후 30분’에 먹으라던 약의 복용 규정을 ‘식사 직후’로 바꾸기로 했다고 밝혔다. ‘식후 30분’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며, 식약처의 허가사항에도 ‘30분’이라는 기준은 없기 때문이란다.
나는 환자가 정확히 식후 30분에 약을 복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 자신도 식후 30분 맞추려다가 복용을 잊어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서울대 병원의 조치가 ‘30분 지키려다가 복용을 잊어먹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조치일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식사 직후나 식후 30분이 정말로 약물의 흡수면에서 동일하다는 인식이 보편화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특히 약물요법의 최적화를 공부하는 약학인들이 이렇게 인식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음식물을 먹으면 우선 위내용배출시간(胃內容排出時間, gastric emptying time: 위 안에 들어있는 물질이 소장으로 내려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연장된다. 음식물을 반죽하고 소화시키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 연장되면 식사 직후에 먹은 약이 위장 내에 오래 머무르기 때문에 약에 따라서는 위액에 의해 분해된다. 또 약의 흡수부위인 소장(小腸)에 늦게 도달하기 때문에 약효가 늦게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타이레놀 정은 굶고 먹으면 30분 이전에 최고 혈중농도가 나타나지만 아침 식사 후에 복용하면 2시간이 지나서야 최고혈중농도가 나타난다.
식사, 특히 밥을 먹으면 위장관 내액(內液)이 밥의 연화(軟化) 과정에 사용되기 때문에, 약물의 붕해(崩解, 부스러짐)나 용해(溶解, 녹음)에 사용될 위장관 내액이 부족해져 약물의 흡수가 지연될 우려가 있다. 또 음식물은 위장관 내용물의 점도(점도, viscosity)도 증가시킨다.
그러면 위장관 내에서 약물의 확산속도(擴散, disffusion)가 낮아져 약물의 흡수가 낮아지기도 한다. 마치 물이 들어 있는 비이커에 잉크 한방울을 떨어트리면 금방 확산되어 비이커 기벽(器壁)에까지 잉크가 도달하지만, 비이커에 죽을 담아 놓은 경우에는 좀처럼 비이커 기벽에까지 잉크가 퍼지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밥을 먹은 직후의 소장 안의 상태는 비이커에 죽을 담아 놓은 상태와 비슷해 지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약물이 흡수 부위인 소장벽에까지 확산되지 못하고 분해되거나 대변으로 나가기 쉽게 된다. 즉 흡수의 속도와 양이 감소하는 것이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도 흡수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고(高)지방식을 하면 담즙분비가 촉진되기 때문에 담즙에 의해 녹는 grisefulvin(먹는 무좀약)같은 약물의 흡수를 촉진한다. 일반적으로 설탕은 약물의 흡수를 지연시킨다. 술은 위장관 혈류를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용해를 촉진하기 때문에 어떤 약물의 약효를 빠르고 강하게 만들어 준다.
자몽 주스를 계속해서 마시는 사람이 고혈압약을 먹으면 주스를 안 마신 사람보다 4배 이상 혈중약물농도가 높아진다. 자몽 주스가 약물을 분해하는 효소의 역가를 낮추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첨언하자면 음식물뿐만 아니라 제제(製劑)를 만들 때 어떤 첨가제를 얼마나 사용했느냐에 따라 약의 흡수가 현저하게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약의 성분과 함량이 같다고 해도 제제 설계에 따라 약효에 차이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주목하여 이런 변동요인들을 엄격하게 컨트롤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제제학 또는 약제학(藥劑學)이라고 한다.
요컨대 ‘식후 30분’은 ‘식사 직후’와 위장관 내 상황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약물의 흡수에 차이를 보인다고 생각해야 한다. 엄격한 척 30분을 고집하다 약 먹기를 잊어먹는 문제가 더 심각하기 때문에 서울대 병원이 ‘식후 30분’을 ‘식사 직후’로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이 가지만, 이를 모든 약, 모든 음식에 대해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진리’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이번 조치가 행여 약학이나 약물요법학 발전에 역행하는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2018-01-17 09:38 |
[기고] <239> 아버지
1. 어렸을 때 집 근처에 있는 국민학교에 다녔던 박동규(서울대 명예교수)는 어느 날 하교(下校) 길에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 손을 잡고 오면서 아들은 오늘 쪽지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다고 자랑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대견해서 길 옆에 있는 빵집에 데리고 들어 가 빵 한 개를 사 주셨다.
얼마 후 아들은 하교 길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다. 그날은 쪽지 시험에서 100점을 못 맞아 다소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아버지 손을 잡지 못하고 몇 발자국 뒤에서 아버지를 따르면서 저번에 아버지가 빵을 사 주셨던 가게를 흘깃거렸다. 그 때 아버지가 물으셨다. “얘야 오늘은 왜 아버지 손을 잡지 않고 빵도 사달라지 않느냐?” 아들은 머뭇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오늘은 100점을 못 맞았거든요.”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서서 아들에게 다가 왔다. 그리고는 와락 아들을 껴 안으며 “얘야,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언제 100점을 맞아야 너를 예뻐하고 빵을 사준다고 했더냐? 너는 100점을 맞던 못 맞던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 하시면서 빵집으로 데리고 들어 가 빵을 사 주셨다. 아들은 울었다.
박동규가 장성(長成)하여 서울대학교 강사가 된 어느 날, 하루 종일 강의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가는 시내 버스를 탔다. 버스 안은 언제나처럼 퇴근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그 때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 보니 아버지였다. 의외였다. 아버지는 ‘서울 시내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버스를 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우연이냐’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가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자꾸 아들의 배를 만지시는 것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왜 그러시나 몰랐다. 잠시 후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번 정거장에서 내리자고 하셨다. 아직 집에 가려면 다섯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데 말이다.
둘이 내리자 아버지는 “너 배 고프지? 집에 가려면 아직 머니 우리 여기서 같이 국수 한 그릇씩 먹고 가자. 내 주머니에 잔치국수 사줄 돈이 있구나” 하시며 국수를 사 주셨다. 아버지는 아들의 홀쭉한 배를 만져 보시고 아들이 배 고프다는 걸 아신 것이었다. 아버지가 사 주시는 국수를 먹으며 아들은 그만 울고 말았다고 한다.
위 두 이야기는 80이 넘은 박동규 교수가 어떤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아버지 박목월 시인을 회고한 이야기이다. 박동규 교수는 늘 이와 같은 따듯한 이야기로 듣는 이의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어 준다. 그는 늘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그의 가슴은 상당 부분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추억으로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박동규 교수의 가슴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2. 우리 아버지의 사랑은 박목월 시인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고 평생을 근면, 검소, 정리, 정돈하는 삶을 사셨다. 덕분에 나는 담배를 숨어서 피워야 했고, 처자식과 함께 시골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갈 때 택시를 타더라도 아버지 눈에 띄지 않도록 멀리서 내려서 걸었다.
젊은 놈이 담배 값이나 택시비로 돈을 낭비한다고 걱정하실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또 아버지는 깜깜한 밤에라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물건을 잘 정리 정돈해 두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덕분에 나도 정리하는 버릇이 몸에 배었다.
내가 대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네 인생의 방향을 정했느냐?”고 물으셨다. 당신은 이미 스무 살 때 정했었노라고 하셨다. 그날 그날 대충 살고 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때부터 나도 인생의 진로를 고민해 보기 시작하였다.
삶으로 인생을 가르쳐주신 우리 아버지가 지난 11월 13일, 98세를 일기(一期)로 소천(召天)하셨다. 돌아보면 죄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남은 몰라도 나는 안다. 나는 솔직히 불효자이었다.
그나마 2014년에 세례를 받게 해 드린 일, 그리고 마지막 6개월을 우리 집에서 다시 모신 일 등이 작은 위로가 된다. 소천하신 순간 나는 아버지 귀에 말씀 드렸다. 아버지,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2018-01-03 09:30 |
[기고] <238> ‘한국약학사’ 발간에 붙여
지난 2017년 10월말에 ‘한국약학사’라는 책을 약업신문사를 통하여 발간하였다. 이 책은 내가 2013년 한국약학교육협의회(이하 약교협)의 김대경 이사장(현 중앙대 약대 교수)의 부탁을 받아 40여명의 전문가로 필진을 구성하여 집필 제출한 보고서를 책으로 인쇄한 것이다.
2013년 막상 한국약학사 집필 작업에 들어가 보니 우선 ‘약학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부터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약학을 ‘약학대학을 중심으로 수행된 교육과 연구’로 좁게 보기 보다는, 제약기업에서의 신약개발 연구는 물론, 약과 관련된 모든 제도와 기술 및 연구까지를 포함해서 넓게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약학의 범위를 이처럼 넓게 잡고 보니, 기존의 약학사에 대한 선행연구 결과물에만 의지해서는 도저히 「한국약학사」를 집필할 수 없었다. 이는 대부분의 선행연구가 신약개발이나 제약산업을 부실하게 다루는 등 그 관심 범위가 이 책의 범위보다 훨씬 좁기 때문이었다.
천만 다행으로 책의 범위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제약산업과 신약개발의 역사 등을 집필해 줄 수 있는 탁월한 국내외 전문가들을 집필진으로 모실 수 있었다.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단군신화에서 현대 약학까지: 시대별로 보는 한국 약학의 발자취(제1장), 약학교육 및 연구 활동(제2장), 한국약업 100년(제3장), 신약개발의 역사(제4장)의 4개 장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3장과 4장에는 각각 ‘한국제약기술발달사’와 ‘신약개발사’를 첨부하였다.
각 장은 주승재(1), 김진웅(2), 이종운(3), 여재천(4) 님 등이 각각 총괄 집필하였다. 그리고 각 장의 세부 내용은 주경식, 이덕규, 정규혁, 류종훈, 윤기동, 서영거, 문애리, 오유경, 강삼식, 양현옥, 이현선, 이선경, 한효경, 김병각, 홍청일, 안해영, 이범진, 안창호, 한용해, 이은방, 권순경, 이덕규, 백우현, 장문호, 고광호, 이강추, 반재복, 이종욱, 이봉용 님 및 각 제약회사(한미약품, 유유제약, 일동제약, 신풍제약, 동아제약, 대웅제약, CJ 제일제당, 한국유나이트 제약, 종근당)의 신약개발 담당자님들이 집필해 주었다. 주승재님은 발간위원으로서 원고 전반의 오류를 면밀히 점검하였고, 김현정님은 발간위원 회의 업무 전반을 챙겨주었다. 나와 서울대 약대의 김진웅 교수는 발간 작업 전반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솔직히 이 책은 여러 면에서 부족한 점이 적지 않음을 고백한다. 모름지기 역사서란 단순히 과거의 자료를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시대정신을 읽고 미래에 대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 자체도 충실하게 정리해 놓지 못하였다. 변명 같지만 이는 2013년 11월에 약교협에 제출한 ‘한국약학사’ 보고서를, 2017년 어느 날 느닷없이 책으로 발간하게 된 데에 기인하는 바 적지 않다. 즉 갑작스러운 발간으로 인하여 최근 4년간의 약학사가 비어 있고, 완벽한 책자로의 편집에도 만전을 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의 탄생을 바라보는 나의 소감은 기쁨과 함께 부끄러움이다. 다만 바라는 것은 이 책이 앞으로 완벽한 한국약학사가 발간될 때까지만이라도 우리나라 약학사 정리에 조그마한 징검다리 역할을 감당해 주는 것뿐이다.
끝으로 「한국약학사」의 발간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업을 의뢰하고 후원해주신 약교협의 역대 이사장님들(김대경, 이범진, 정규혁님)의 결단과 재정 후원에 감사 드린다.
또한 광고 협찬을 해 주신 8개 회사 (녹십자, 대웅제약, 동아제약, 동화약품, 보령제약, 유한양행, 종근당, 한미약품) 및 관계자 여러분, 표지 디자인 및 원고 교정작업을 도와주신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출판 작업을 주관하여 주신 약업신문사의 노고에 깊이 감사 드린다.
크고 작은 하나의 작품은 실로 여러분의 노고의 결과물임을 실감하게 된다.
2017-12-20 09:38 |
[기고] <237> 종교약학
일본약사학회(日本藥史學會)가 발행하는 ‘약사학잡지(藥史學雜誌)”의 최근호(Vol. 52, No.1, 2017, 71~73쪽)를 보니, 오쿠다 준(奧田 潤) 교수가 쓴 “인문사회약학 1. 종교약학”이란 제목의 논문이 눈을 끈다.
‘종교약학’은 다양한 인문약학 과목이 개설되어 있는 일본의 약대에서도 생소한 과목이다.
오쿠다 교수는 오래 전 메이조(名城)대학 약학부를 퇴임한 명예교수로 퇴임 전에 제자 한 명에게 윤리학 전공으로 약학박사 학위를 줄 정도로 인문약학(人文藥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분이다. 이하에 그의 논문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1. 종교약학이란?
원래 일본에서는 약을 물질(物質)로 보고, 약학을 물질인 약의 성질, 제조, 분석, 조제, 위생, 약리 및 응용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연과학계 학문으로 여겨 왔다. 그래서 약학을 ‘기초약학(基礎藥學)’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다가 2006년부터 약학교육이 4년제에서 6년제로 바뀌면서 약제사가 의료 팀의 일원으로 환자와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는 것을 고려하여, 상기한 ‘기초약학’ 외에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윤리, 약사학(藥史學), 심리학, 사회약학, 약사법규, 커뮤니케이션 등의 과목도 개설하였다.
저자는 인간성이 더욱 풍부한 약제사를 길러내기 위해서 무슨 과목을 더 추가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2012년부터 인문과학(human science)과 사회과학(social science) 중에서 약학과 관련 있는 항목을 뽑아 이에 ‘인문사회약학(人文社會藥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앞으로의 약학교육은 ‘기초약학’과 ‘인문사회약학’이라는 두 기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종교약학 각론
여러 종교에서는 신(神), 부처, 인물, 약물 및 관련 사상(事象)을 통해 사람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내용의 키워드 또는 골자(骨子)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불교: (1)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과 약사여래 본원경(本願經), (2) 사천왕사(四天王寺)와 시약원(施藥院), (3) 법륭사의 약사여래상과 약물관계 기록, (4) 고승 감진(鑑眞)과 동대사 정창원(正倉院)의 약 장부(藥帳), (5) 고승 영서(榮西)와 차(茶), (6) 서대사(西大寺)의 풍심단(豊心丹), (7) 주방국분사(周防國分寺)의 약사여래상과 약병(藥壺)
2) 기독교: (1) 다미안(약사)과 코스마스(의사) – AD 300년경 아랍 (현 터키)의 쌍둥이 형제로 태어난 두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가 병에 걸리면 치료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303년, 기독교를 탄압하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아디누스에 의해 체포되어 익사형, 화형, 화살형 등을 차례로 받았으나 매번 기적적으로 살아 났다.
끝내 단두형으로 죽었을 때에는 그들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 가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사후에 이스탄불이나 로마 등지에 성자로 추대된 이 두 사람을 추모하는 웅장한 교회가 건립되었다. 이 두 사람을 의약분업의 마중 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 중세유럽의 수도원 약국과 약사.
(3) 영국에서 평화와 자유로운 신앙을 찾아 아메리카로 온 셰이커 교도들은 뉴욕의 뉴레바논에서 약초를 재배하였다.
(4) 약사가 된 예수 그림이 유럽에 98점 있다고 한다. 독일 하이델베르그 성에 있는 약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5) 동경대 약대 교수와 일본약제사회 회장을 역임한 이시다떼(石館守三) 박사는 기독교 교인으로서 의약분업을 촉구하는 포스터에 “사랑은 모든 것을 완성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종교는 보상(補償), 통합, 창조와 같은 일반적인 기능 외에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을 부여함으로써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학문의 탄생은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약사에게 ‘종교약학’을 교육하는 것은, 환자를 더욱 사랑해야 하는 변화된 환경에 약사를 적응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일 것이다.
일본의 종교약학 교육! 우리에겐 무엇을 시사하는지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2017-12-06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