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대·약학] <7> 에디슨과 제1차 세계대전의 악연
7. 에디슨과 제1차 세계대전의 악연살리실산은 버드나무 껍질 속 해열성분인 살리신을 가공해서 만드는 물질이다. 이 물질이 합성된 것은 1838년, 화학이 한창 발전하던 시기다. 이후 살리실산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던 식물 등이 알려지며 살리실산은 여러모로 의학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해열효과 못지 않게 염증을 줄여주는 효과가 탁월했기 때문이다.살리실산은 순수하게 화학적으로도 합성된다. 당시에도 쉽게 구할 수 있던 페놀과 수산화나트륨을 섞고 열을 가해서 만들어냈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도 나오기 전에 이뤄진 이 반응은 여러 가지 학술적, 산업적 의미를 가지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페놀이라는 일반적인 물질에서 생산했다는 점이다. 일종의 석탄 폐기물이 의약품으로 변신하였다. 이후 이 의약품은 독일 바이엘사의 연구를 거쳐 아세틸살리실산, 즉 아스피린으로 진화한다. 해열제에서 시작한 연구가 관절염 치료제를 거쳐 지금까지 사용하는 소염진통제로 변화한 것이다. 이 정도면 연금술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897년의 일이다.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아스피린의 수급에 변화가 생긴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한 이후 페놀을 구하기 어려워져 버린 것이다. 당시 페놀은 영국에서 전략물품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페놀에 질산과 황산을 가하면 피크르산이라는 물질이 되는데 이 물질은 폭발성이 강해서 군수물자로 사용하고 있었다. 화약이 부족하던 당시 영국 입장에서는 페놀을 자체적으로 소비하기에도 바빴다. 다른 나라에 내다 팔 여유는 없었다.질 좋은 영국산 페놀의 유통이 막히면서 곤란해진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다. 이 미국인은 당시 축음기를 개발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축음기 생산 공정에는 페놀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 문제 없이 수입해서 사용하던 페놀의 공급이 막힌 것이다. 심지어 당시 미국은 참전하지도 않은 중립국이었다. 그럼에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은 페놀의 수출을 제한하고 있었다. 물론 중립국인 미국을 통해 독일로 페놀이 들어갈지 모르는 일이고, 그 페놀이 화약으로 돌아오든 바이엘 아스피린으로 바뀌어 독일의 군자금으로 돌아오든 모두 상상조차 싫은 일이었다. 즉, 영국의 페놀 수출 제한은 충분히 합리적인 조치였다.물론 에디슨은 불만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했다. 페놀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영국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에디슨은 자체적으로 공장을 세워 페놀을 생산해버렸다. 이 정도 해줘야 발명왕인가 보다. 그런데 이 재능 넘치는 발명왕은 페놀을 너무 많이 만들어버렸다. 하루에 12톤을 생산했다. 축음기 생산에 필요한 양은 9톤. 즉, 3톤이 남았다. 이 페놀은 버려야만 할까?당시 어쨌든 페놀은 여러모로 필요한 물질이었고 영국발 수출 제한 조치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품귀가 일어났던 물질이다. 에디슨은 이 흐름에 맞춰서 남는 페놀을 팔고 싶어했는데 운명적으로 그에게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미국 내 바이엘 지사에서 일하던 휴고 슈바이처라는 사람이었다. 1915년 7월 1일, 그는 에디슨이 생산한 잉여 페놀을 모두 사가기로 계약했다.난리가 난 것은 그로부터 3주 가량 흐른 7월 24일이었다. 미국 정보 당국이 슈바이처가 사들인 페놀이 독일 본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을 포착한 것이다. 조금 더 조사를 해보니 슈바이처가 에디슨에게 지급한 페놀의 대금 자체가 독일 본국에서 흘러 들어온 활동 자금이었다. 즉, 슈바이처는 중립국인 미국을 거쳐서 전략 물자인 페놀을 수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페놀을 생산한 에디슨으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심지어 이때까지도 미국은 중립국이었으므로 법적인 하자가 전혀 없는 계약이었다.하지만 세상이 법대로만 흘러 가지는 않는 법이다. 같은 뿌리라고 자부하는 영국을 조금 더 응원하던 미국인들은 어쨌든간에 독일에게 도움을 줘버린 에디슨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그 계약도 무효가 되었다. 바이엘사나 독일을 향해 비난이 쏟아진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이후 잘 알다시피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고, 독일은 졌다. 독일이 전쟁을 이기기 위해 갖은 수를 쓰며 노력했건만, 미국까지 참전한 마당에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지금도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스피린 한 통을 보며 독일이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 고민했던 치열함을 잠시 떠올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3-06-13 17:44 |
[약대·약학] <6> 대륙봉쇄령과 아스피린
6. 대륙봉쇄령과 아스피린 버드나무 껍질에 해열 효과가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래전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진짜 효과 있는지는 검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면 될 일들을 굳이 검증하는 까칠한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까다로운 사람들 덕분에 과학이 발전하곤 한다. 에드워드 스톤 (Edward Stone)도 그랬다. 1763년 영국의 성직자 스톤은 사람들을 나누어 한쪽 그룹엔 버드나무 껍질 추출액을 테스트하고 다른 그룹엔 다른 물질을 투여하였다. 이후 그는 버드나무 껍질 추출액에 해열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결과를 정리해 학회에 보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혁신적인 결과를 받아본 학회의 반응은 놀랍게도 미지근했다. 이미 퀴닌(quinine)이라는 해열제가 민간에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다 건너 오는 퀴닌만 믿으면 되는 세상이었고 당시 영국은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스톤의 연구 결과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 바닷길이 막힌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다. 유럽 대륙을 제패하고 기고만장하던 프랑스의 젊은 황제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참패한 후 현실을 깨닫고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트라팔가 해전이 끝난 지 일 년 후인 1806년 11월, 이렇게 바다가 막혔다. 그러나 정작 힘든 것은 프랑스였다. 영국은 어차피 식민지에서 막대한 재화를 끌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해군력이 없는데 프랑스가 어떻게 영국과의 교역을 막는다는 말인가. 프랑스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유럽 대륙이었다. 그렇게 영국은 살찌고, 유럽 대륙은 굶주리는 기이한 시절이 지속되었다. 더 힘든 곳은 독일(당시 프로이센)이었다. 문제의 발단인 프랑스는 그래도 어쨌든 유럽의 지배국가였고 꾸역꾸역 버티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은 교역 없이 살아남기 어려웠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해열제. 영국은 퀴닌을 그럭저럭 쓸 수 있었고, 다른 나라도 밀무역으로 수입해서 쓸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프로이센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치 감독관 바로 앞에서 시험을 보는 학생처럼 프로이센은 아무런 꼼수를 부리지 못했다. 대신 공부를 했다. 독일답다. 독일의 학자들이 공부했던 것은 수많은 문헌들이었다. 퀴닌을 구할 수 없다면 다른 물질로라도 열을 내려야만 했다. 그렇게 참고서적을 훓어보던 중에 학자들의 눈에 띈 것이 스톤의 연구결과였다. 정작 영국의 학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급했던 독일 학자들은 호숫가로 달려가 버드나무 껍질을 벗겼고 적절한 방식으로 추출한 후 신묘하기만 한 해열효과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바다는 풀렸지만 독일 학자들은 다시 퀴닌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안 된다는 격언을 접한 투자자처럼, 해열제도 퀴닌 외에 버드나무 껍질 추출액을 계속해서 연구하려 했다. 그리고 그 연구는 결실을 맺는다. 버드나무 껍질 추출액에서 실제 해열 효과를 보이는 물질, 살리신(salicin)을 찾은 것이다. 이후 살리신은 살리실산(salicylic acid)으로 진화한다. 귀하게 구한 살리신을 가수분해하고 산화반응을 수행해 소염진통효과가 뛰어난 살리실산으로 바꾼 것이다. 나름 그 시절의 의약화학이다. 살리실산에 다시 한 번 변화의 계기가 찾아온 것은 1859년이다. 독일의 화학자 헤르만 콜베(Hermann Kolbe)와 그의 조수 루돌프 슈미트(Rudolf Schmitt)가 순수하게 화학적인 방법으로 살리실산을 만든 것이다. 출발물질은 놀랍게도 석탄 찌꺼기인 페놀과 수산화나트륨, 그리고 이산화탄소였다. 별 볼일 없는 물질과 산업 쓰레기를 이용해 귀하기 짝이 없는 살리실산을 만들어낸 것은 연금술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놀라운 혁신이다. 이제 학자들은 더 이상 살리실산을 얻기 위해 인부들을 모아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내고 산과 염기 등을 이용해 살리신을 추출한 다음, 다시 산과 산화제를 이용해 살리실산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실험실로 가서 알려진 방법에 따라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도 일반화학 시간에 필수로 배우는 이 반응을 콜베-슈미트 반응이라고 부른다. 이 방법이 놀라운 이유는 두 가지 더 있다. 우선 당시는 주기율표도 나와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즉, 원소가 어떻게 결합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의 화학자가 구조식도 없이 유기화합물을 새로이 만들어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독일의 두 화학자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 반응이 가지는 또 다른 의의는 살리실산의 구조를 알아냈다는 점이다. 추출하고 분리해서 하얀 가루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구조를 파악할 수는 없다. 구조는 화학적 분석이나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전혀 다른 방법으로 간단한 물질에서 살리실산을 합성해 버렸다. 그러므로 구조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구조를 안다는 것은 보다 나은 물질로 전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조를 모르는 채로 활성을 올릴 수는 있지만 그래도 장님 코끼리 만지는 수준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생긴 모양을 알고 핵심을 접근할 때 제대로 된 혁신이 나올 것이 당연하다. 이후 사람들은 살리실산의 구조에 기반해 여러 가지 반응을 수행했고 결국 아세틸살리실산이라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오늘날 아스피린이라는 이름으로 접하는 바로 그 의약품의 대명사가 이렇게 태어났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3-05-08 15:22 |
[약대·약학] <5> 각기병
5. 각기병산업혁명과 도시화 이후 인구가 늘어나고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3대 영양소와 같은 개념이 주로 19세기 초에 연구되었고 약간의 혁신도 이뤄졌다. 그러나 당시 분석 기술의 한계로 인해 미량으로 존재하는 필수 영양소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했다. 이 미량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영양소에 대해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였다.비타민B1이 대표적이다. 티아민(Thiamine)이라고도 부르는 이 물질은 자바섬에 근무하던 네덜란드 태생의 군의관이 닭의 사료를 연구해 분리한 물질이다. 잘 도정된 쌀, 즉 쌀겨가 떨어져 나간 사료를 먹은 닭은 각기병으로 시름시름 앓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료를 먹은 닭은 건강했기에 이 군의관 크리스티안 에이크만(Christiaan Eijkman)은 쌀겨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고 이후 노벨상까지 받는다. 나름 성공신화다.그런데 각기병의 해법을 찾아낸 사람이 이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이크만이 각기병의 원인을 찾아내기도 전인 1884년 일본의 한 해군 장교도 각기병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다카기 가네히로라는 일본의 군의관은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해군 장교로 부임해서 본격적으로 각기병을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각기병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시작으로 영양결핍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었다. 일반적인 영양결핍이라면 잘 먹이면 되겠지만 각기병은 이상하게 아무리 잘 먹여도 낫지 않았다. 1883년 훈련 중이던 쓰쿠바호에서는 276명의 선원 중 169명이 각기병을 앓았고 그중 25명이 죽었다. 해결하지 못하면 답이 없었다.다카기는 선원들을 나누어 다양한 음식을 제공했다. 그리고 비교적 쉽게 해결책을 찾았다. 도정을 해서 쌀겨가 떨어져 나간 쌀은 아무리 먹어도 각기병이 나타났다. 하지만 도정을 하지 않은 보리로 밥을 먹였을 때에는 각기병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간단한 해법을 들고서 다카기는 해군들에게 보리밥을 먹이려 했다. 하지만 해군은 맛있고 귀한 쌀밥 대신 맛없고 값싼 보리밥을 먹이려는 시도에 반발했고 오히려 그를 ‘보리밥남작’으로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뭔가 유연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카기에게는 이런 유연함이 있었다.다카기가 제시한 방법은 카레라이스였다. 카레는 인도의 향신료였지만 19세기에는 영국에서 밀가루를 섞어서 카레가루로 판매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유학하던 당시에 영국의 선원들이 카레 스튜를 먹는 것을 유심히 지켜봤던 다카기는 이 요리를 응용해서 카레라이스를 제공하게 했다. 카레의 밀가루는 티아민을 함유하고 있었고 카레라이스에 적당히 보리밥을 섞어도 선원들은 선진국 요리라며 그다지 반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1884년 쓰쿠바호는 장기원정을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14명의 각기병 환자만 발생했다. 이 14명도 심지어 카레라이스를 거부한 선원들이었다. 이처럼 효과가 확실해지자 더 이상 그를 ‘보리밥남작’이라 비아냥거리지도 않았고 그의 해법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간에 살아 돌아오면 고마워하게 마련이다. 이후 일본 해군은 괴혈병을 해결한 영국 해군처럼 극동 아시아를 지배했고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무찌르는 기염을 토한다.각기병에 대한 실질적 해법을 찾았다고 해서 원인까지 규명되는 것은 아니다. 원인을 찾아낸 사람은 앞서 언급한 에이크만이지만, 정작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다른 학자가 티아민을 찾아냈다. 스즈키 우메타로라는 이 학자는 심지어 분리한 물질을 ‘오리자닌’이라는 이름으로 시판까지 했다. 각기병 치료제 연구의 이정표라고도 부를 수 있는 업적이며, 더이상 일본에서 각기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모리 오가이는 독일에서 유학한 육군 군의관이었다. 그가 보기에 해군에서 찾아낸 해법이나 시판 중인 오리자닌은 전혀 답이 아니었다. 그는 독일에서 질병의 원인은 세균 감염이라고 배웠고, 그 세균을 어떻게 확인하고 치료하는지에 대해서도 소상히 연구했다. 그래서 그는 각기병도 ‘각기균’에 의한 감염증이라고 미리 결론 짓고 그 균을 찾기 위해 연구했다. 그 균을 찾아서 백신을 만든다면 군인들이 먹고 싶은 쌀밥 마음껏 먹고 싸울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내다보았다.하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각기균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 그의 고집 아래 일본 육군은 점점 약해져 갔다. 그리고 전선이 길어지고 보급이 어려울수록 그의 판단 착오는 크게 나타났다. 만주에서 벌였던 러일전쟁은 그 결정타였다. 러일전쟁으로 죽은 일본군은 대략 8만 4천 명으로 추산하는데 그중 각기병으로 죽은 사람이 약 2만 7천 명이다. 각기병으로 제대로 싸울 수 없는 군인들까지 감안하면 일본군은 당시 러시아군 외에 각기병과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모리 오가이가 유학을 했던 독일은 당시 감염 이론을 완성하고 많은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어 인류의 건강에 이바지한 나라다. 하지만 모든 질병이 감염증인 것은 아니다. 수십만 년간 진화한 인체의 신비 앞에 당시 과학이 가지는 수준은 기껏해야 걸음마 수준이 아니었을까? 자연 앞에 겸손하지 않았던 모리 오가이와 일본 육군은 혹독하게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가 있다.
2023-04-06 17:29 |
[약대·약학] <4> 괴혈병
<4> 괴혈병
지구가 둥근 것은 그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1522년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의 선단이 실제로 세계일주를 하고 향신료를 가득 가지고 돌아온 것은 역사적인 이벤트였다. 특별한 엔진 없이 바람과 노만으로도 세상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그 끝에 돈이 있었다. 가치 있는 물건을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가는 게 일반적이다. 금을 찾아 황무지를 횡단하듯이, 비트코인을 찾아 쓰레기장을 뒤지듯이 향료를 찾아 사람들은 바다를 가로질렀다.
하지만 그 길은 험했다. 마젤란의 선단도 기세 좋게 다섯 척의 배에 265명이 탑승했던 것과는 달리 돌아올 때는 단 한 척의 배에 18명이 살아 돌아왔을 뿐이었다. 심지어 마젤란도 돌아오지 못하고 필리핀에서 죽었다. 그런데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죽은 마젤란과는 달리 대부분의 선원은 병으로 죽었다. 시름시름 앓다가 이가 빠지고 피를 흘리더니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 있다가 죽었다. 바다로 나갈 때 이런 몹쓸 병이 도질 걸 누가 알았겠는가. 원래 이불 밖은 위험하고, 집 나가면 고생이라지만 정도가 좀 심했다. 대항해시대 선원들을 가장 혹독하게 괴롭혔던 것은 바다도 태풍도 전투도 아닌 선원들의 직업병, 괴혈병이었다.
사실 괴혈병이 꼭 선원들에게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4백년 전 동로마제국 황제의 요청에 따라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야심차게 나섰던 십자군 1차 원정 때에도 비슷한 질병이 발생하긴 했다. 당시는 전쟁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보급로도 무시한 채 신의 뜻을 따라 행군에 나섰다가 쫄쫄 굶은 병사들에게서 이런 질병이 나타났었다. 결국 신의 뜻을 무시하고 같은 기독교 국가들마저 공격하며 약탈했던 것은 숨기고 싶은 과거. 그래도 어쨌든 4백 년이나 지나서 같은 질병이 생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괴혈병 치료에 대한 단서는 정박지에서 나타났다. 중간에 정박할 때 잘 먹으니 안 아팠던 것이다. 그런데 배 타면 다시 아팠다. 배 타기 싫어서 꾀병 부리는 건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해괴하기 짝이 없는 발병 양상 속에 사람들도 계속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알음알음 답을 찾아 나갔는데 제일 먼저 알려진 것은 신선한 과일이었다. 그리고 입소문을 타고 이 노하우는 조금씩 퍼져 나갔다.
그래도 입소문은 입소문일 뿐, 하루 만에 전 세계로 퍼지는 지금의 SNS와는 다르다. 친구에게만 알려주던 비법이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1747년의 일이다. 영국의 군의관 제임스 린드(James Lind)가 선원 열두 명을 여섯 그룹으로 나눴다. 각각의 그룹에는 다른 식단이 주어졌다. 그리고, 입소문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신선한 과일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설정한 나름의 실험군과 대조군은 그 효과를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레몬과 같이 신선한 과일주스를 복용한 그룹에서만 괴혈병이 발병하지 않은 것이다. 이후 괴혈병으로 고생하던 다른 환자들에게도 과일주스를 주자 괴혈병이 사라졌다. 대항해시대 이후 선원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괴혈병에 대한 해결책은 이렇게 간단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노하우는 원천기술이 되어 국력에 이바지한다. 놀랍도록 간단한 이 방법은 이후 검증을 거쳐 영국 해군의 기본 식단이 되었고, 해군은 괴혈병에 대한 걱정 없이 먼 바다를 오랫동안 항해하며 고차원적인 훈련을 진행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바다를 지배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지만, 괴혈병을 정복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고 유럽 대륙을 정복한 후 영국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야심차게 벌였던 트라팔가 해전은 1805년에 일어났는데, 영국 해군의 기동력을 감당하지 못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나폴레옹이 영국 정복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대륙봉쇄령으로 대표되는 경제 정책으로 전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레몬 하나가 이렇게 중요하다. 트라팔가 해전과 관련하여 레몬 때문에 나폴레옹이 몰락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 말이다.
영국 해군이 해법을 찾은 것이 중요한 일이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괴혈병에 대한 원인, 그리고 레몬주스가 괴혈병을 치료하는 기전에 대한 연구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뤄졌다. 헝가리의 생화학자인 센트죄르지(Albert von Szent-Györgyi)는 1920년대 후반 동물에서 괴혈병 모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람 이외 대부분의 동식물은 자체적으로 영양소를 만들어서 레몬주스 없이도 괴혈병을 예방하고 있었다. 사람은 그렇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억지로 사람을 배에 태우거나 굶겨서 괴혈병을 유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기니피그도 사람처럼 괴혈병이 나타났다. 세상 어지간한 동식물이 다 만드는 영양소를 기니피그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안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괴혈병을 연구하는 학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후 센트죄르지는 불쌍한 기니피그에게 동식물에서 추출한 다양한 물질을 테스트하였고 파프리카 등에서 추출한 화합물을 주었을 때 기니피그가 괴혈병에서 회복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물질은 이후 비타민C로 명명되어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다.
1930년대에는 비타민C와 관련한 연구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라이히슈타인이라는 화학자는 설탕 100그램을 다섯 단계만에 비타민C 40그램으로 전환하는 화학공정을 개발했다. ‘라이이슈타인 공정’이라는 이름의 이 생산법은 로슈사에 그대로 기술이전 되었고, 이듬해부터 사람들은 비타민C를 수월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항해를 앞둔 선원들이 썩기 쉽고 무거운 레몬 대신 가벼운 비타민C만 휴대하고 배에 탑승했던 것도 당연하다.
노하우가 과학으로, 다시 기술로 발전해 가는 과정은 경이롭지만 그만큼 오래 걸린다. 그래도 그 시간 동안의 검증이 있었기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니 너무 재촉하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약국에서 쉽게 구입하는 비타민C에는 500년의 역사가 담겨 있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가 있다.
2023-03-08 15:05 |
[약대·약학] <3> 남북전쟁과 모르핀
3. 남북전쟁과 모르핀
아편전쟁만큼 명분 없는 전쟁이 있을까? 원래 싸움에 명분이란 게 별 의미 없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편을 팔기 위한 전쟁은 너무 했다. 영국도 민망했는지 의원들의 투표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251 대 242. 9표 차이로 전쟁은 통과되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은 그렇게 아편을 파는 전쟁에 군대를 동원하였다.
유럽이 오랫동안 중국에서 도자기나 종이, 화약, 비단을 수입하고 동쪽 끝에 위치한 황금의 나라를 동경했으며, 몽골군과 같은 기마대를 두려워하긴 했지만 그건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신대륙에서 가져온 자본력과 산업혁명으로 쌓아 올린 기술력, 수많은 내전을 거치며 축적한 전투력은 청나라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아편전쟁은 그 차이를 확인시켜 준 거대한 시작이었다.
아편의 관점에도 그랬다. 아편전쟁 이전부터 삼각무역으로 생산량이 늘어나던 아편은 전쟁 이후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생산량이 늘어났다. 당시 청나라 성인 열 명 중 한 명이 아편 중독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가가 아편에 취해 있었다. 이후 끝없이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공급도 늘어난다. 청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양귀비를 기르고 아편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청나라를 망가뜨린 아편은 청나라 밖으로 화교들과 함께 빠져 나왔다.
이때 사람들은 묘수를 낸다. 아편을 정제해 진통제로 사용한 것이다. 19세기 중반은 전쟁이 일상적이던 시기였다.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현지인과 싸웠고, 이후에는 자기들끼리 싸웠다. 미국도 남북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던 시기다. 자연스럽게 전투로 인한 부상병도 늘었고 빠르고 효과 좋은 진통제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그런 측면에서 아편은 충분히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이미 대량생산으로 인해 충분히 가격도 내려가 있었기에 더욱 가능성이 컸다.
더군다나 아편의 주성분인 모르핀은 1804년에 이미 분리되어 있었다. 아무리 좋은 아편이라도 모르핀의 함량은 20%를 넘기 어렵다. 따라서 아편을 그대로 진통제로 쓰기는 어려운 노릇. 하지만 모르핀은 가능했다. 그리고 1850년대에는 피하주사기도 개발되었다. 이렇게 모르핀이 담긴 주사기는 참혹한 전투로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는 부상병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다. 제2차 세계대전만 해도 부상병들에게 모르핀을 줄 때는 전투모에 M1, M2와 같은 방식으로 표시를 했다. 모르핀의 과다투여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에는 이런 지식이 없었던 까닭에 아프면 무조건 모르핀을 넣어주었다. 모르핀을 위해 엄살을 부리는 부상병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많은 전쟁과 함께 더 많은 부상병이 나타났고 그들은 상당수 모르핀에 취해 있었다. 당시 ‘군인병(soldier’s disease)’으로 불렀던 질병의 정체는 바로 모르핀 중독이었다.
이후 모르핀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거대한 사건은 모르핀을 끝없이 소비하는 현장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여기에 영향을 받는다. 당시 아편을 공급하던 대표적인 국가인 튀르키예가 제1차 세계대전에 직접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일본은 당장 아편과 모르핀이 필요했기에 자신들이 통치하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양귀비 재배 및 아편 생산을 권장한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터키의 생산량이 다시 회복되자 한반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그냥 풀어버렸다. 당시 우리나라 자료를 보면 ‘주사옥’이나 ‘모루히네’같은 단어들이 신문에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이러한 배경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다른 건 없었다. 다시 우리나라에서 아편을 제조했고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마지막을 위해 아편과 모르핀을 대량 비축하긴 했지만 더 거창한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남겨둔 아편과 모르핀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미군이 나눠서 썼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씁쓸한 느낌이다.
이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아편과 모르핀, 그리고 헤로인과 같은 아편계 마약은 주된 단속의 대상이 된다. 이유는 북한군. 언제 밀고 내려올지 모르는 북한군을 위에 두고 맘 편하게 마약에 빠져 있는 국민들이 못미더웠는지 1957년 마약법을 제정하고 해당 마약을 강력하게 금지시킨다. 그 여파인지 아편계 마약은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편이다. 2021년 대검찰청에서 발간한 마약류 범죄백서에 따르면 마약, 향정신성의약품(향정), 대마로 분류했을 때 우리나라 마약류 범죄유형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향정으로 65.8%이다. 다음은 대마, 23.4%. 마지막이 아편계 진정제나 코카인이 포함된 마약인데 정작 그 비중은 10.8%에 그친다. 그 10.8%에 해당하는 1,745건 중에서도 대부분에 해당하는 1,033건은 ‘밀경’이다. 즉 양귀비를 몰래 재배하다가 걸리는 것이다. 시골에 있는 어르신들이 법을 잘 모르고 약으로 쓰기 위해 양귀비를 기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약류 관리법 상 어쨌든 불법이다. 이런 경미한 사례를 제외하자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다행히도 아편계 마약은 어느 정도 제어하고 있다.
다만 경계를 늦출 수는 없다. 모르핀은 어느덧 헤로인으로 변신해서 사회에 편입되었고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합성 마약인 펜타닐은 최근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 모르핀의 백 배 정도 되는 효능의 물질이다. 그만큼 중독성과 독성도 강해서 관계자들을 떨게 하는, 마약의 끝판왕이기도 하다. 한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가 있다.
2023-02-10 17:02 |
[약대·약학] <2> 천연두에 맞선 독화살
천연두에 맞선 독화살
1492년 콜럼버스가 신항로를 개척하고 일종의 기자회견을 한 이후 유럽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전례없는 부동산 호재에 사람들은 희망에 부풀어 올랐고 향료나 황금을 찾을 수 있다며 자본가와 힘을 합쳐 탐험대를 꾸렸다. 이후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신대륙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이 희망은 절정에 달했다. 탐험대는 현지에서 발견할 황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법률가나 기록원, 종교인까지 대동해 부랴부랴 대서양을 건넜다. 비록 콜럼버스가 가져온 물건 중에 돈 될 만한 것은 거의 없었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30여 년이 지나서 아즈텍이나 잉카 문명을 발견했고 그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황금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약탈했다. 현지에 뿌리내리고 있던 왕국은 이 과정에서 철저히 궤멸되었고, 남아메리카 정복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다. 스페인 정규군이 가서 남아메리카 현지 문명을 무너뜨렸다는 생각이다. 스페인 정규군이 들어간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의 일이다. 그보다 처음 아즈텍이나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사람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민간인 탐험대였다. 민간인이 자본가를 등에 업고 사람들을 아무리 불러 모아봤자 한계가 있다. 실제 잉카를 멸망시킨 피사로의 탐험대는 200명 남짓이었다. 그나마도 모두 전투원이었던 것도 아니고 앞서 언급했듯이 상당수는 자신의 탐험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인력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잉카 제국 10만 원주민을 이겼다.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스페인 탐험대가 총으로 잉카 제국을 쓰러뜨렸다는 생각이다. 당시 탐험대가 총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지금의 총과는 상당히 달랐다. 한 번 총을 쏘고 나면 다시 장전하고 쏘는 데 능숙한 사수도 30초 가량 걸렸다고 한다. 일 분에 두 발이라면 아무래도 핵심 전력이 되긴 어렵다. 물론 발포 소리 때문에 원주민이 놀라긴 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연이어 전투가 계속되면서 적응해 갔다.
오히려 총보다는 칼이 더 무서운 무기였다. 스페인의 칼은 강철로 제련되어 있었던 데 비해, 남미 원주민은 돌을 연결한 막대기나 몽둥이로 싸웠다.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석기, 청동기, 철기로 나누는 것은 보통 도구의 재료다. 이 재료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원의 벽이 있으니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다. 스페인의 남미 정복 당시 두 문명의 전쟁 무기는 석기와 철기의 차이였다. 무기로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무기를 말 위에서 휘둘렀다. 말은 당시 남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동물이었기에 스페인 탐험대의 말은 좋은 무기가 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무기가 좋다고 한들 200명으로 어떻게 10만 명을 이길까. 스페인의 검이 광선검도 아닌데 너무 심하다. 베다가 지쳐 말도 쓰러질 정도의 숫자다. 지금 학자들이 생각하는 요인은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바로 천연두다. 남아메리카 대륙 탐험이 본격적으로 이어지며 유럽인과 남미인의 접촉이 늘어났고 그 과정에서 천연두가 전파되었다. 어느 정도 면역이 있던 유럽인과는 달리 남미인들은 천연두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그렇게 하나둘 전사를 잃었다. 현지인들이 ‘코코리츨리’라고 부르는 이 질병은 하늘이 내린 벌이었고 죽음을 뜻하는 증상이었다.
그래도 이 와중에 유럽인들을 벌벌 떨게 만든 남미인들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활이었다. 대롱에 화살을 넣고 입으로 부는 활이었는데 그 자체의 경쟁력은 약했다. 비슷한 시기 줄의 탄력을 최대한 살려서 먼 거리를 빠르게 공격하는 조선의 활이 훨씬 더 강력했다. 남미의 활에 경쟁력을 더해준 것은 독이었다. 원주민들은 독초를 빻아서 즙을 만들고 화살에 묻히면, 이 화살에 맞은 사냥감이 즉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냥에 쓰던 이 노하우를 스페인 탐험대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밀림 속에서 은밀하게 발사하고 사라지는 이 독화살은 탐험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독화살이 강력하긴 했지만 전체 전황을 바꾸지는 못했다. 사냥이나 암살에 적합한 무기일 뿐 양측이 어우러져 싸우는 난전이나 전면전에 적합한 무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 유럽의 학자들은 이 화살독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잘 죽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죽이는가가 궁금했다. 그리고 독으로 사냥을 했는데 그 사냥감을 먹는 사람들은 왜 멀쩡할까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19세기 후반 독화살의 주요 독성분이 분리된다. 튜보큐라린(Tubocurarine)이라는 이름의 이 물질은 분리해서 보니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혔다. 우선 화합물이 이온으로 존재하는 수용성 물질이라서 먹었을 때 흡수되지 않았다. 즉 화살에 맞은 사냥감은 독이 혈관 속으로 퍼져서 바로 죽겠지만 먹어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냥감을 죽이는 기전도 밝혀졌다. 근육 마비였다. 튜보큐라린은 몸속을 돌며 이온 채널을 교란시키고 근육을 못 움직이게 만들었다. 결국 호흡 근육도 멈추고 사냥감은 죽는다. 그런데 이 기전을 알게 된 의사들이 뜻밖에도 이 물질을 전신 마취에 이용했다. 전신 마취를 위해서는 마취 가스를 삽관해야 하는데 기도 주변의 근육이 이를 방해한다. 그래서 튜보큐라린을 주입하고 근육을 마비시킨 후 재빨리 마취 가스관을 넣어준 것이다. 이후 수술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때는 1942년이었지만, 이러한 수술 중 마취는 지금도 사용하는 방식이다. 독은 약이고 약은 독이라는 말 뒤에 중요한 건 양이라는 말이 따라 나오곤 하는데, 양 못지 않게 용법도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가 있다.
2023-01-26 13:37 |
[약대·약학] <1> 페스트와 생화학무기
연재를 시작하며
백승만교수(경상대 약대)는 요즘 매우 핫 한 작가이다. 지난해 가을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를 출간한 이후 대중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앞서 백 교수가 대학에서 강의한 '전쟁과 질병'을 주제로 한 교양강좌는 매학기 1분내 수강신청이 마감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는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또 전쟁으로 인해 질병이 발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약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 반대로 약이 전쟁과 질병을 부르기도 한 인류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사람들이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고 쉽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가 있다.
백 교수의 전쟁과 질병, 그리고 약에 대한 이야기 <백승만 교수의 '전쟁과 약' 이야기>를 월 2회 약업신문을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
페스트와 생화학무기
코로나19의 대창궐을 통해 6백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오고 전 세계가 멈추는 것을 목격했지만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14세기에 있었던 흑사병으로 유럽에서만 3천만~5천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흑사병은 원래 페스트(pest 또는 plague)로 불러야 맞고, 고대시절부터 여러 차례 인류를 학살했던 질병이지만 1347년부터 이어진 대유행은 유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이 당시의 페스트를 흑사병으로 보통 부른다.
1343년 몽골군은 아시아를 제패하고 유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몽골 기마대가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 지나간다는 소문에 전 유럽은 벌벌 떨었고 항상 다투기만 하던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힘을 합쳐 몽골군에 대항하기로 했다. 유럽의 연합군이 모인 지역은 흑해 연안에 위치한 카파(Caffa)성. 우크라이나 영토였지만 2014년 러시아가 합병한 크림반도 지역이다. 유럽으로서는 가장 동쪽에 위치한 이 곳이 뚫린다면 몽골 기마대의 거침없는 돌격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할 것이 분명했다.
몽골군은 명불허전이었다. 기마대가 공성전에 약하다는 상식을 깨부수기라도 하듯이 다양한 방법으로 성을 공략해 왔다. 하지만 바닷가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 카파성도 전략적 거점으로서 방어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결사항전의 의지로 싸우는 연합군의 방어 속에 두 진영의 대치상태는 3년 간 이어졌다. 그리고 이 처절한 전투의 현장에 또 다른 세력이 등장했다.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었다.
페스트균은 발이 없다. 그러나 쥐벼룩이라는 숙주에 들어가서는 옮겨갈 수 있다. 그래도 쥐벼룩이 가봐야 얼마나 가겠는가. 벼룩이 뛰어 봤자다. 하지만 쥐벼룩이 쥐에 올라타면 이야기가 다르다. 페스트균은 쥐의 몸속에 머물다가 기회를 봐서 사람 몸으로 갈아탄다. 더 멀리 이동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단순히 이동하는 것으로 끝날 리는 없다. 거대한 숙주에 들어온 페스트균은 사람의 몸속에서 번식하며 서서히 본색을 드러낸다. 피로를 유발하고 열이 나는 것까지는 다른 질병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출혈성 반점이 생기고 조직이 검은색을 띄며 괴사하기 시작하면 페스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죽는다.
3년간의 공성전 후 몽골군은 물러났다. 유럽군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때 페스트균도 함께 갔다. 1347년 전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의 시작이다. 이후 페스트균은 사람의 이동경로를 그대로 따라다니며 전 유럽 인구의 1/3을 학살하며 악명을 떨쳤다. 당시 아시아의 피해도 막심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페스트균인지도 모른다.
이후 페스트균의 위세는 높아져만 갔다. 17세기의 런던 페스트나 18세기의 마르세유 대역병처럼 국지적으로 한 지역을 황폐화시킨 적도 있고, 19세기처럼 범유행병이 되어 전 세계를 강타한 적도 있다. 특히 19세기 홍콩을 기점으로 유행한 페스트는 50여 년간 지속됐는데 이후 1894년 페스트균을 찾아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이라고 페스트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페스트균을 전쟁무기로 사용한 것은 아이러니다. 1940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상하이 인근에 일본군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단 한 대로 작전이 이뤄질 리는 없었건만 그래도 그 정체불명의 비행기는 꿋꿋이 저공비행하며 무언가를 뿌리고 갔다. 마루타와 인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관동군 731부대가 페스트균을 살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는 3일 뒤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가 나왔다. 한 달 후에는 사망자가 112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일본군의 예상치보다는 훨씬 낮은 수치였다. 일본군은 시뮬레이션을 거쳐서 1,450명은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고, 이후 이 전략무기를 광범위하게 살포해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자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정작 첫 시험대라고 할 수 있는 작전에서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항생제가 상용화되기 전 페스트의 피해를 최소화한 비결은 결국 적극적인 봉쇄와 방역. 발병자가 나온 지역을 중심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균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이는 20세기 초까지 페스트로 고생했던 경험이 살아 있었기에 가능한 대처였다. 그리고 전쟁을 겪고 있던 극단적인 시기였기에 또 적용가능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페스트라고 하면 과거의 질병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항생제가 개발되어 페스트를 치료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예전만큼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경우도 없다. 하지만 국지적으로는 여전히 페스트가 발생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전문가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지 모른다. 마치 보고된 지 수십 년 지난 코로나바이러스가 별안간 우리에게 치명적으로 변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무기로 사용할 경우는 더 위험하다. 페스트균은 지금도 쉽게 확보할 수 있고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있기에 더욱 치명적인 형태로 변화를 줄 수도 있다. 이미 1970년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인구 500만 명의 대도시에 50킬로그램의 페스트균을 살포할 경우 3만 6천 명이 사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살상력만큼은 끝내주는 균이 페스트균이다. 또한 생물학테러에 사용하려면 해독제도 필요한데, 페스트는 어쨌든 균이므로 항생제를 이용해 해독제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여러모로 사용할 경우 위험한 무기가 될 여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서는 페스트균을 A급 생물테러감염병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한 명의 발병 사례도 없건만 방비태세는 철저하게 준비하는 이유가 다 있다.
2023-01-12 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