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약국] <151> 진통제 사용을 줄이는 방법
정재훈 약사. © 약업신문진통제 복용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 운동을 하면 된다. 운동이 일반적 통증뿐만 아니라 암과 관련된 통증에 대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최신 연구 결과가 2024년 2월 12일 학술지 <캔서>에 실렸다.암 관련 통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암으로 투병 중인 사람은 수술, 방사선 치료, 화학 요법, 장기간의 약물 치료로 인한 부작용 등 치료 자체로 인한 통증을 겪을 수 있다. 종양이 신경을 압박할 때처럼 종양 자체로 인한 통증을 겪을 수도 있다.2016년 메타분석 연구 결과, 약 항암치료 중인 사람의 55%, 항암치료를 마친 사람의 40%가 환자가 통증으로 고생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통증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심하면 항암치료를 중단하게 만들 수 있다. 통증을 잘 관리해야 치료를 계속할 수 있으므로 암으로 투병 중인 사람에게 통증 관리는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진통제와 같은 약을 너무 많이 먹고 싶지 않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이럴 경우에 운동이 진통제 사용량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번 연구는 6만 명이 넘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운동과 통증의 관계를 들여다봤다. 이들 중 암 병력이 있는 사람은 10,651명, 암에 걸린 적이 없는 사람은 51,439명이었다. 암 진단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주당 150분 이상의 중강도 활동 또는 주당 75분 이상의 고강도 운동을 한 참가자들은 운동하지 않거나 적게 한 사람들보다 통증을 호소할 확률이 16% 낮았다. 운동은 특히 중간 정도에서 심한 정도의 통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다. 운동을 하면 통증이 덜 느껴지는 효과는 암 병력이 있든 그렇지 않든 거의 동일하게 나타났다.참가자의 연령대가 70-80대이므로 이번 연구 결과를 젊은 층에까지 적용하기는 어렵다. 이번 연구는 관찰 연구이므로 인과관계를 도출하기 어렵다는 한계점도 있다. 하지만 운동이 통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여럿이다.노르웨이 성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연구에서 운동하는 사람의 만성 통증의 유병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10-38%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운동은 목 통증, 요통, 골관절염, 근막통, 섬유근육통과 같은 다양한 통증을 완화하는 데 효과적이다. 다만 75건의 연구를 메타분석한 2019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얼마큼 운동을 해야 효과가 있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운동이 통증 조절에 어떻게 도움을 주는가는 아직 확실치 않다. 하지만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운동은 통증 부위에서 사람의 통증 역치를 높일 수 있다. 쉽게 말해 뇌에서 통증의 인식을 억제하는 과정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운동이 중추신경계에서 통증을 억제하는 경로를 활성화함으로써 통증을 완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2023년 캐나다 연구에 따르면 12주 이상 운동을 계속하면 만성 통증으로 고생 중인 사람의 뇌 기능이 향상되고 통증을 줄이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면 염증을 줄이고 혈류가 개선된다. 이런 효과도 운동이 통증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심리적 요인도 운동이 통증을 낮추는 효과의 숨은 이유일지 모른다. 암 진단을 받아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통증 역치가 낮아질 수 있다. 이럴 때 운동은 기분을 나아지게 하고 스트레스를 줄여주어 통증에 더 잘 버틸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신체적으로 활동적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더 활동적이다. 혼자 있으면 더 아프다. 운동을 하면서 사회적 지원을 느끼면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모임에 참여하면 피로감, 통증과 같은 암의 부정적인 효과와 끝없이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사회적 연대의 도움을 받게 된다. 게다가 이렇게 함께 운동하는 모임에 참여하면 탄력을 받아 활동량을 더 늘릴 수 있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자전거 타는 사람을 만나면 자전거를 더 많이 타게 되고 산책하는 사람을 만나면 산책할 일이 늘어난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활동적인 사람들과 만나게 될 때 전보다 더 활동적이 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물론 질환의 정도에 따라 운동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운동한다면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 운동은 진통제 사용량을 줄이면서도 통증을 관리하는 데 훌륭한 해결책이다.
2024-03-18 09:57 |
[약사·약국] <150> 광고보다는 연구를
정재훈 약사. © 약업신문신약 개발에는 약물 재창출(Drug Repurposing)이란 방법이 있다. 이미 시판되고 있으며 안전성이 입증된 약물이나 임상시험에서 안전성이 검증되었지만 효능이 충분하지 않아서 개발이 중단된 약물에 숨겨진 새로운 효능을 찾아내는 것이다. 기침약 성분인 덱스트로메토르판을 이용한 항우울제 개량 신약, 과거 수면제, 입덧약으로 사용되었다가 기형 유발로 퇴출되었다가 항암제로 다시 출시된 탈리도마이드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렇게 기존 약물의 새로운 효능을 찾아내는 일이 반드시 성공적이지는 않다.암 치료에 좋다는 주장이 나왔던 강아지 구충제 펜벤다졸의 효과는 기대 이하였다. 코로나19가 창궐하던 시기에는 약물 재창출을 이용하여 기존 약물 중에서 효과가 있는 약을 찾으려는 연구가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효과가 없었다. 트럼프가 코로나19 예방용으로 복용했다는 말라리아치료제(하이드록시클로로퀸)는 2020년 저명한 학술지 랜싯과 뉴잉글랜드의학저널에서 관련 논문 자체가 철회됐다. 구충제 이버멕틴이 코로나19에 효과가 있다는 주장은 사기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 와중에 특허가 만료된 저렴한 간장약 성분이 코로나19 감염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022년 12월 네이처에 게재된 영국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우루소데옥시콜산(UDCA)에 대한 연구인데 이전의 다른 연구들과 비교하면 꼼꼼하게 잘 진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UDCA가 코로나19 감염에 효과를 내는 기전은 이 약물이 사람 세포 표면의 ACE2 수용체를 더 적게 만들어지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 ACE2 수용체는 코로나바이러스(SARS-CoV-2)가 사람 세포로 들어오는 관문과 같다. 문 자체가 없으면 세포 속으로 바이러스가 들어오기 어려우니 감염이 줄어들 수 있다. 연구진은 간세포의 재생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UDCA가 FXR이라고 불리는 전사인자의 신호를 감소시켜서 세포 표면의 ACE2 수용체 수를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코로나19가 세계인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맹위를 떨치자 연구진은 UDCA가 세포 표면의 ACE2 수용체를 줄이면 감염 위험도 낮출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하며 여러 실험을 진행했다.우선 시험관 수준에서 세포를 코로나바이러스로 감염시켜본 결과 UDCA에 노출시킨 세포가 확실히 덜 감염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서 동물 실험에서도 UDCA를 투여한 햄스터가 그렇지 않은 쪽보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덜 감염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UDCA 투여군 햄스터 9마리 중 6마리가 감염되지 않은데 반해 투여하지 않은 쪽은 6마리가 모두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이렇게 된 것은 세포 표면의 ACE2 수용체가 적게 발현된 것과 관련된다. 실제로 UDCA를 투여한 생쥐와 햄스터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콧속에 ACE2가 더 적었다.연구진은 계속해서 사람에게는 어떤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다. 장기 기증이 되었지만 이식이 거부된 폐를 사용하여 한쪽에는 UDCA를 주입하고 다른 한 쪽에는 약물 없이 폐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양액만 넣어줬다. 실험 결과 약물을 투여한 쪽 폐는 ACE2 수용체 숫자도 감소했고 코로나바이러스에 노출시켜도 감염이 덜했다. 연구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8명의 건강한 자원자에게 5일 동안 UDCA를 투여하고 약물 사용 중일 때와 휴약기간 중의 ACE2를 비교하여 UDCA 사용 중에 실제로 콧속의 ACE2 수용체 수가 줄어든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19에 감염된 1,096명의 간 질환자를 대상으로 자료를 분석하여 그들 중 UDCA를 사용 중이었던 환자가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입원하거나 응급실에서 치료받거나 사망할 가능성이 낮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이미 특허가 만료된 저렴한 간장약 성분 UDCA에 이런 긍정적 효과가 있다면 좋은 일이다. 코로나19 예방에 위생 수칙을 잘 지키고 백신을 맞는 게 제일 중요하지만 면역기능이 저하된 사람에게는 UDCA가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 이듬해인 2024년에는 UDCA가 코로나19 감염을 줄이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임상시험을 통해서 효과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코로나19 예방이나 위험 감소 차원에서 UDCA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연구진이 설명을 덧붙인 이유다. 그럼 뭐하나. 우리의 종편 채널 TV프로그램에서는 이미 UDCA 코로나19의 효과를 다루면서 UDCA가 얼마나 좋은 약인지 떠들고 있다. 한국의 제약회사가 이런 식으로 광고와 홍보에만 앞서가기보다 신약 연구에 더 많은 힘을 쏟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그저 아쉽기만 하다.
2024-02-28 09:29 |
[약사·약국] <149> 채소, 생으로 또는 익혀서
정재훈 약사. © 약업신문요리해서 먹는 게 좋은가 날것 그대로가 좋은가. 정답은 없다. 각각 장단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셀러리 같은 채소를 가열하면 비타민C처럼 열에 불안정한 영양물질은 줄어든다. 하지만 다른 항산화물질 2009년 식품 과학 저널에 실린 연구에서는 셀러리를 굽거나 전자레인지 또는 압력솥으로 가열 조리하면 항산화능(antioxidant capacity)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반면에 비트, 깍지콩(그린빈)은 가열 조리해도 항산화능이 유지됐다. 2018년 국내 연구에서도 가열 조리시 채소 속의 비타민C는 감소했지만 브로콜리, 감자, 당근, 양파의 비타민K는 오히려 가열 조리시 증가했다. 연구진의 추측에 따르면 이는 아마도 엽록체 속에 붙잡혀 있는 비타민K가 가열 조리를 통해 단단한 식물세포벽이 느슨해지면서 더 많이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익히면 영양소도 파괴된다는 통념과 달리 비타민K는 비교적 열에 안정적이어서 가열 조리로 파괴되지 않는다.채소를 익히면 항산화물질이 증가하는 현상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가열 조리하면 생채소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항산화물질이 생겨나기도 한다. 가열 조리가 항산화물질을 망가뜨리는 효소를 정지시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날것 그대로의 시금치는 폴리페놀과 같은 항산화 물질이 산화효소에 의해 신선도를 잃을수록 감소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하지만 삶거나 찐 경우에는 산화효소의 기능이 정지되고 수분은 줄어들어 시금치 속의 항산화물질 함량이 높아진다. 이런 이유로 시금치 생것과 시금치 통조림의 영양소 함량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든다. 신선도를 잃을수록 생 시금치의 영양소 수치가 떨어지지만 익힌 상태에서는 효소 기능이 정지되어 그런 영양소 감소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식물 세포 속에는 항산화물질뿐만 아니라 산화효소가 함께 들어있는 것일까? 채소 자체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먹기만 하는 사람이 자주 망각하는 사실이지만 채소가 사람에게 먹히려고 항산화물질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조리 방법에 따라 영양소 손실율이 달라지기도 한다. 채소 속에 엽산을 더 많이 보존하고 싶다면 삶는 것보다 찌는 게 낫다. 시금치, 브로콜리를 찌면 엽산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지만 삶으면 그 함량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다. 이렇게 되는 것은 가열 조리 중에 엽산이 물에 녹아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2002년 영국 연구에서 삶을 때 소실된 엽산은 대부분 채소를 삶은 물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금치된장국을 끓일 때처럼 국물도 다 먹는 경우에는 엽산 손실을 걱정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비타민C처럼 열에 불안정하며 물에 잘 녹는 물질은 가급적 더 낮은 온도에서 채소가 물과 접촉하는 시간을 줄여주는 조리 방식이 낫다. 전자레인지로 조리하거나 수증기로 찌는 방식이 삶을 때보다 비타민C 보존율이 높다. 속설과 달리 전자레인지로 채소를 요리하는 것은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편리하다. 생마늘이 좋은가 익혀 먹는 게 좋은가. 둘 다 좋다. 생마늘에는 알린(alliin)이란 항산화물질이 들어있다. 마늘을 다지거나 잘게 자르면 알리나아제라는 효소에 의해 알린이 알리신이라는 생리활성물질로 바뀐다. 알리신은 심장질환, 암 발생 위험을 낮추는 등의 건강에 유익한 효과와 많이 연결되는 물질이다. 마늘을 조리할 때는 다지거나 잘게 썰자마자 사용하는 것보다는 효소가 일을 하도록 4-5분 기다렸다가 조리하는 게 낫다는 건 알리신이 더 많이 생길 여지를 두자는 의미이다.그런데 왜 마늘을 익혀 먹어도 좋다는 건가. 알리신이 다는 아니기 때문이다. 마늘을 저장, 숙성하거나 가열 조리하면 SAC(S-allyl cysteine)란 생리활성물질이 생겨난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식품자원부 연구에 따르면 마늘을 끓는 물에 1시간 동안 익히면 SAC 함량이 생마늘의 3.3배로 증가했다. SAC 역시 마늘이 건강에 유익한 이유 중 하나로 생각되는 물질이다. 생채소로 먹으면 유리한 성분도 있고 요리해서 먹으면 좋은 성분도 있다.하지만 그런 성분 하나보다는 전체로서의 음식이 더 중요하다. 익히든 말든 채소는 내가 먹기 좋은 방식으로 맛있게 먹는 게 최고다.
2024-02-16 10:46 |
[약사·약국] <148> 항산화제의 양면성
정재훈 약사. © 약업신문항산화제는 건강에 좋고 산화물질은 해롭다는 생각은 옛날 이야기다. 이제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왜 그런가? 실제 그림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세포속 DNA 분자가 활성산소종으로 인해 손상되면 암세포가 생성된다. 항산화제는 활성산소종이 그러한 변이를 일으키는 것을 막아 암으로부터 세포를 보호해주는 효과를 낸다.이를 입증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비타민C가 항암 효과가 있다, 비타민E가 유방암 전이를 막아줄 수 있다는 등의 연구 논문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항산화제 섭취가 반드시 유익하기만 하다고 볼 수는 없다. 최근에는 항산화제가 일부 암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추측에 힘을 더해주는 사람 대상 연구 결과가 여럿 발표되었다. 동물 실험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인기 있는 항산화제 글루타치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글루타치온은 글리신, 시스테인, 글루탐산의 세 가지 아미노산으로 이뤄진 펩타이드이다. 수용성의 항산화물질이다. 글루타치온은 수용성이어서 인지질로 구성된 세포막을 뚫지 못한다. 쉽게 말해 물과 기름이 섞이길 싫어하는 원리다.글루타치온을 캡슐로 먹든, 필름으로 입에서 녹이든, 주사로 정맥 혈관에 직접 주입하든 간에 항산화제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과학자가 많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혈액 속으로 글루타치온을 넣어줘도 세포 속으로 잘 들어가지 못한다. 글루타치온을 각각의 아미노산으로 쪼개어 준 뒤에 이를 세포 속에서 다시 글루타치온으로 합성하는 방식이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분해 뒤에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세포 속 글루타치온을 유의미하게 끌어올리는 게 쉽지는 않다.2021년 9월 보건의료연구원은 백옥 주사로 불리는 글루타치온 주사의 효과와 관련하여 근거가 부족하며 투여 후 피부 톤이 유의미하게 변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반면에 중대한 부작용으로 아나필락시스성 쇼크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그래도 글루타치온을 쓰면 효과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며 이런 효과를 플라세보 효과로 설명하긴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약이라고 생각하고 쓰면 그렇게 효과를 느끼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임상시험을 할 때 항상 플라세보와 비교를 하는 거다. 다행히 과학자들이 연구를 안 하는 건 아니며 실제로 일부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글루타치온 1000mg을 3주 동안 경구 투여했더니 비만한 사람의 인슐린 민감성이 좋아졌다는 2021년 캐나다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연구는 소규모로 진행된다는 한계가 있다. 이 연구도 비만이면서 당뇨인 사람 10명, 당뇨가 없는 비만인 10명, 다 합해서 20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글루타치온이 세포 속으로 잘 흡수되지 않는다고 하여 NAC(N-아세틸시스테인) 섭취를 추천하기도 한다. 비싸게 판매되는 글루타치온보다 NAC가 비용이 적게 들면서 세포 속 글루타치온 수치를 끌어올리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글루타치온을 인위적으로 끌어 올리는 게 정말 유익하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2019년 프랑스 연구에서 동물 실험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오히려 암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폐에서 항산화물질을 못 만들어내도록 한 생쥐에게 NAC를 먹인 결과 늙은 쥐의 폐에서 선암(Adenocarcinoma) 발생이 증가한 것이다.과거에도 NAC와 같은 항산화제가 동물의 종양이 더 빠르게 커지도록 만든다는 연구 결과는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암 자체가 생길 위험이 증가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NAC가 불안정한 물질이라 제대로 효과를 못냈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NAC 투여 동물의 폐에서는 분명히 항산화제로 인한 산화적 손상 보호 효과가 나타났다. 세포 노화를 막아주는 효과도 있었다. NAC의 항산화 효과가 한쪽에서는 이렇게 유익한 효과를 냈지만 반대쪽에서는 암 위험을 높이는 부작용을 낸 것이다. 노화세포가 생기는 걸 막아준 덕분에 폐 손상은 줄어들었지만 반대로 세포가 노화하면서 성장을 멈춰 암을 예방하는 효과가 줄어들었다는 게 연구진의 추측이다. 그러니 잊지 말자. 우리 몸은 항산화제만 잔뜩 넣어주면 되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항산화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만 한 물질이 아니다. 건강에 중요한 것은 복잡미묘한 균형이다.
2024-01-26 09:24 |
[약사·약국] <147> 장내 미생물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
정재훈 약사. © 약업신문장내 세균 다양성이 해로운 병원균이 필요로 하는 영양분을 차단해서 보호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난 12월 15일 저명한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린 옥스퍼드 대학 연구 결과이다. 전에도 장내 세균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사람의 장 건강에 유익하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 인간의 장은 수백 종의 다양한 박테리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을 집합적으로 장내 마이크로바이옴이라고 부른다.이들 다양한 미생물이 인체에 제공하는 유익 중 하나는 해로운 감염을 일으킬 수 있는 침입하는 병원성 미생물에 대해 장을 보호하는 것이다. 마치 숲에 자라는 나무가 다양하면 그 숲의 생태계가 더 튼튼한 것과 비슷하다.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이 덜한 신생아의 경우에는 감염에 더 취약하다. 생후 12개월 미만의 아기에게 벌꿀을 먹이면 안 되는 이유이다. 벌꿀 속에 들어있는 보툴리누스균의 포자가 아기의 장속에서 깨어나 자라면 근육 마비와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의 경우에는 꿀을 먹고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일이 극히 드물다. 장내에 이미 살고 있는 다양한 미생물이 보툴리누스균 포자가 깨어나 자라서 독소를 만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장내 미생물 군집이 감염성 미생물로부터 장을 보호하는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불분명했다. 특정 박테리아가 다른 박테리아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여부도 확실치 않았다. 이번 옥스퍼드 대학 연구 결과는 이렇게 되는 것이 기존 장내 미생물이 병원균이 먹고 자랄 영양소를 먹어치워 버리기 때문이라고 알려준다.옥스포드 대학의 연구자들은 100가지 다른 장내 박테리아 균주를 개별적으로 또는 조합으로 하여 두 가지 유해한 박테리아 병원균인 폐렴막대균(Klebsiella pneumoniae)와 살모넬라 엔테리카(Salmonella enterica)의 성장이 어떤 경우에 더 줄어드는지 평가했다. 연구 결과 개별적으로 장내 박테리아를 넣어주었을 경우에는 병원균이 퍼지는 걸 막는 능력이 매우 부족했다. 병원균 차단 효과는 50종까지 다양한 균종이 함께 배양될 때 훨씬 강해졌다.개별 장내 박테리아와 배양했을 때보다 병원균의 성장은 최대 1000배 더 강하게 억제됐다. 이러한 보호 효과는 이들 박테리아가 시험관에서 함께 배양되었든 실험 시작 시점에 장내 세균이 없었던 무균 생쥐의 장 속에서 배양되었든 관계없이 나타났다. 장내 미생물이 하나가 아닌 공동체로서 다양하게 존재할 때 병원균으로부터 인간의 장을 보호하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그러나 개별 박테리아의 구성이 중요하긴 했다. 다양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구성원이 뭔가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되는 것은 장내 미생물 군집이 장내 보호효과를 내는 기전과 관련된다. 이번 연구 결과는 기존 장내 세균이 병원균이 필요로 하는 영양분을 소비함으로써 병원균의 성장을 차단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구진은 다양한 박테리아의 게놈을 분석하여 병원균과 유사한 단백질 구성을 가진 균종이 병원균 차단효과가 크다는 걸 알아냈다.연구진은 또한 대사 프로파일링을 통해 차단효과를 내는 균종이 병원균과 비슷한 영양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쉽게 말해 장내에 병원균이 들어오면 먹이를 두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병원균과 비슷한 식성을 가진 기존 장내 세균 공동체가 병원균을 밀어낸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대장균 균주와 영양분 필요가 제일 많이 중복되는 미생물 공동체는 보호효과가 낮은 공동체보다 대장균 번식을 줄이는 데 최대 100배 더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이번 연구 결과를 구체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2021년 스탠포드 대학 연구에 따르면 발효식품을 자주 먹으면 장내 미생물 다양성을 늘릴 수 있다. 김치, 요거트, 된장, 청국장 다 좋다. 그런데 이런 발효식품을 먹을 때 발효식품에서 들어온 미생물은 새로 발견된 것들의 5%에 불과했다. 장에서 새로 발견된 다양한 미생물 대부분은 발효식품에서 온 게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어딘가에서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장에서 감지되지 못할 정도로 수가 적었던 게 늘어난 것인지 불분명하다. 아마도 2023년 오스트리아 그라츠 공과대학 연구가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이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장내 미생물 상당수는 과일, 채소에서 온 것이다. 과일, 채소, 발효식품을 즐겨 먹자.
2024-01-17 15:07 |
[약사·약국] <146> 지하철을 향해 뛰는 게 나은가?
정재훈 약사. © 약업신문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은 암 발생 위험이 낮다. 2016년 미국과 유럽의 성인 144만 명을 대상으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여가 시간에 걷기, 달리기, 수영과 같은 운동을 자주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간암, 폐암, 위암, 자궁내막암, 대장암과 같은 다양한 암 위험이 낮게 나타났다.연구자들은 분석에 사용한 26종의 암 중 13종이 운동을 자주 하는 사람에게 덜 발생했고 비만도나 흡연 여부에 관계없이 같은 패턴이 관찰됐다고 밝혔다. 물론 그런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해서 새해에는 운동을 더 해보겠다는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는다.그렇다면 지하철을 타려고 뛰는 걸로도 암 위험을 낮출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3분씩 버스나 지하철을 타려고 뛰는 정도의 활동으로도 암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난 7월 미국의학협회 종양학 학술지(JAMA Oncology)에 실린 연구 결과이다. 연구자들은 운동을 전혀하지 않는다고 답한 22,398명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활동 데이터를 분석하여 간헐적 고강도 신체활동(Vigorous Intermittent Lifestyle Physical Activity, VILPA)이 암 위험 감소와 관련되는지 살펴봤다. 간헐적 고강도 신체활동이란 버스나 지하철을 타기 위해 뛰거나 계단을 뛰어 오르는 것처럼 일상에서 1-2분 짧지만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쉽게 말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해도 느릿느릿 걷는 사람과 얼른 타려고 뛰는 사람의 암 위험을 비교한 연구였다. 이렇게 살펴본 결과 하루 3-4분 정도 고강도 신체활동을 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암 발생이 17~18% 낮게 나타났다. 운동을 자주 하는 사람에게 덜 생기는 암은 위험 감소가 더 컸다. 그런 암 발생은 4.5분 이상 간헐적 고강도 신체활동을 한 사람에게 31-32% 더 낮았다.이 연구 결과는 스마트워치처럼 차고 다니는 활동측정기로 얻은 자료를 분석한 것이므로 단순히 설문조사 자료를 사용한 연구보다 좀 더 믿을 만하다. 헬스장에 운동하러 가는 대신 지하철을 타러 뛰면 된다니 고무적이기도 하다. 잠깐 빠르게 뛰는 정도의 일상 활동으로도 염증을 줄이고 면역체계에 긍정적 영향을 주어 이같은 암 예방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는 게 연구진의 추측이다. 앞서 다른 연구에서도 숨이 차도록 호흡을 증가시키는 격렬한 운동이 암 위험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가 여럿 존재했다.이번 연구는 따로 운동하지 않아도 평상시 일상 활동의 강도를 잠깐잠깐 늘려 주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동일 연구팀이 2022년 <네이처 메디신>에 발표한 이전 연구에서 성인 25,241명의 가속도계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하루에 최소 4분 이상 활기차게 움직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암이나 다른 원인으로 조기에 사망할 확률이 약 30%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이번 연구 결과는 사망 위험 감소에 더해 암이 발생할 위험도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이렇게 활동 강도를 늘리는 시간은 하루 3분에서 4분 정도가 최적으로 나타났다. 3-4분을 연속으로 활동 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1-2분 정도의 활동이 합해서 하루 3-4분이 되면 된다.그렇다고 열심히 운동하던 사람들이 그만두고 지하철 탈 때 뛰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연구로 인과관계를 알 수 없다. 손목에 차는 가속도계의 정확도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상에서 격렬한 활동이 위험한 면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열차나 버스를 향해 뛰어가다가 넘어지면 손해가 크다. 낙상으로 입원하게 되면 누워있는 동안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평소 건강한 사람이라면 1-2분 짧게 뛰는 정도로 무리가 가는 일은 드물지만 갑작스러운 활동량 증가로 심장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특히 심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위험할 수 있다. 현실은 복잡하다. 활동량을 늘리면 유익하다는 것은 간단한 사실이지만 이를 현실에 적용할 때는 여러 요소를 고려해서 자신에게 맞는 해결책을 찾는 게 좋다.
2023-12-27 09:46 |
[약사·약국] <145> 새로운 우울증 치료제 이야기
시간이 흐르면 전에 잘 모르던 것을 알게 된다. 1970년대부터 MSG가 뇌에서 흥분독소로 작용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글루탐산염(glutamate)이 뇌에서 흥분성 신경전달물질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연구하면 할수록 MSG가 뇌에 해를 입힐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사람의 뇌는 그리 만만하지 않다. 뇌는 글루탐산염을 스스로 만들어서 쓴다. 먹어서 섭취한 글루탐산은 혈관-뇌 장벽(Blood-Brain Barrier)을 거의 통과하지 못하므로 뇌세포에 해를 줄 수 없다. 뇌는 바보가 아니다. 글루탐산염은 뇌 입장에서 중요한 물질이므로 직접 만들어 쓴다.사실 뇌에서 가장 풍부한 유리 아미노산이 글루탐산이다. 하루 MSG 150,000mg을 매일 6주까지 먹은 사람에게도 간혹 메스꺼움이 나타나는 정도로 가벼운 부작용에 그쳤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라면 한 봉지에 들어있는 MSG가 50~100mg이다. 하루 라면 스프로 치면 1,500~3,000개 분량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그 정도로 많은 MSG를 먹도록 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게 놀랍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먹어도 뇌 관련 부작용이 없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음에도 MSG가 흥분독소라는 주장을 꺾지 않는 이들이 있다. 놀랍지 않다. 사실이 밝혀져도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은 인류 역사상 늘 존재해 왔다.우울증 환자의 대뇌피질에서는 글루탐산염 수치가 낮게 나타난다. 먹어서 적당량의 글루탐산염을 뇌로 보낼 수 있다면 우울증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루탐산염을 그런 용도로는 개발할 수 없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뇌가 바깥의 글루탐산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다른 길을 찾았다. 글루탐산염이 가서 결합하는 곳 중 하나인 후시냅스 NMDA 수용체에 대항제(antagonist)로 작용하는 약을 찾아나선 것이다.그 중 하나가 덱스트로메토르판(줄여서 DM)이라는 기침약 성분이다. 1958년 미국 FDA에서 기침을 억제하는 약으로 승인된 약이니 역사가 제법 길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종합감기약이나 기침감기약에도 이 성분이 들어있다. 이 약물은 뇌신경세포에서 글루탐산염이 더 많이 방출되도록 하여 우울증 증상을 완화해주는 효과가 있다. (정확한 기전은 아직 불분명하며 여러 기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하지만 평소에 감기약을 먹고 기분이 나아지기는 어렵다. DM은 CYP2D6라는 약물대사효소에 의해 빠르게 약효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때 약물의 대사를 방해하는 다른 약물을 함께 넣어준다면 약효 지속시간을 늘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기초해 만든 신약이 2022년 8월 미국에서 승인됐다. 기존의 우울증 치료약 중 하나인 부프로피온을 DM과 함께 묶어 서서히 방출되도록 만든 제형으로 DM의 효과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만든 약이다.기침약 성분을 이용한 개량신약 복합제의 장점은 우울증 증상이 빠르게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우울증 치료제는 부분적으로 효과가 나타나는 데 1-2주 이상 시간이 걸리며 최대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4-6주가 걸린다. 이에 반해 DM/부프로피온 복합제(Auvelity)의 경우 임상시험에서 약을 먹고 1주일 만에 효과가 나타났다. 뇌 신경세포 간 연결을 회복시키며 작용 기전이 기존 약물과 다른 부분이 있어서 현재 우울증 치료약이 잘 듣지 않는 치료 저항성 우울증 환자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아직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임상 연구가 부족하며 국내에서는 승인되지 않은 약이다.아직도 구충제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양 믿음을 거두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구충제가 신비의 명약이지만 돈이 안 되니까 정보를 숨긴다는 음모론도 횡행한다. 하지만 구충제에 정말 기생충 박멸 이상의 효과가 있다면 제약회사가 방치할 이유가 없다. 65년 된 기침약 성분(DM)도 새로 효과를 밝혀내기만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개량신약을 만들어 출시한다. 구충제에 대해 조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기대한 만큼의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밝혀진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맹목적 믿음인지 되돌아보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아마도 세상은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2023-12-15 09:45 |
[약사·약국] <144> 코감기약 성분이 퇴출 기로에 선 이유
효과없는 걸 효과없다고 하는 데 20년이 걸렸다. 코감기약 이야기다. 지난 9월 미국FDA 자문위원회는 코막힘 완화에 사용되어온 먹는 감기약 성분 페닐에프린이 효과없다는 만장일치 결론을 내렸다.페닐에프린은 미국에서 지난 50여 년 동안 의사의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판매되어온 약이다. 미국에서 이 성분이 들어있는 약만 최소 250종에 작년 판매액이 2조 3천억 원(18억 달러)에 이른다. 국내 유통 중인 감기약 중에도 이 성분이 들어있는 제품이 상당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론이 도출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이 문제는 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우선 기억해야할 점은 미국에서 판매 중인 일반의약품이 생각보다 매우 느슨한 잣대에 따라 승인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미국 식품의약청(FDA)이 창설된 후 초창기에는 약의 효과는 물론이고 안전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규제가 이뤄지지 않았다.1937년 항생제 물약에 독성 용매를 사용하여 사망자가 107명이나 발생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나서야 1938년 식품-의약품-화장품 규제법령(Food, Drug, and Cosmetic Act)이 의회에서 통과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주로 약품의 안전성에 방점을 찍고 효과는 뒷전으로 밀렸다. 1962년 입덧완화약, 수면제로 판매되던 탈리도마이드로 인해 만 명이 넘는 기형아가 태어나는 비극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개정안이 나온다. 안전성에 더해서 의약품이 반드시 효과가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규제는 여전히 느슨했다. 2006년부터 페닐에프린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미국 플로리다 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약사인 레슬리 헨델레스는 1970년대 초 기준에 못 미치는 일부 약품이 퇴출된 걸 제외하면 “지난 50년 동안 효과가 없다고 시장에서 퇴출된 약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헨델레스가 페닐에프린의 효과에 대해 처음 의문을 제기했던 때만 해도 결론은 지금과 달랐다. 2007년 12월 미국 FDA 자문위원회는 페닐에프린 10mg이 코막힘 완화에 효과가 있다고 찬성 11대 반대 1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페닐에프린에 대한 임상연구 자료가 부족하니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며 더 고용량인 25mg이 효과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제약회사 연구에 따르면 40mg으로 용량을 네 배로 늘려도 효과가 없었다. 정확히 말해 딱 플라세보(위약)만큼만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2007년에는 효과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인가.당시에는 비강기도 저항이라는 방법으로 코에서 공기 흐름이 어떤지 보는 방식을 약효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약효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 것은 환자의 증상 완화를 척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기계적으로 콧속 공기 흐름을 보면 약간의 효과가 있어보였지만 환자 입장에서 코막힘 증상 완화 정도는 약을 먹었을 때나 가짜약을 먹었을 때가 별 차이가 없었단 얘기다. 이렇게 되는 것은 페닐에프린이 먹는 약으로서 흡수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장에서 이미 대사되어 실제로 전신흡수되는 약효 성분은 38% 밖에 되지 않는다. 코에 직접 뿌리는 약일 때나 수술시 저혈압을 치료하기 위해 주사로 사용할 때는 효과적이지만 먹는 약으로 사용할 때는 별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다.그렇다고 집에 있는 페닐에프린 함유 감기약을 버려야 하는 건 아니다. 효과가 없을 뿐 안전하긴 하다. 나도 이 글을 쓰기 전에 페닐에프린과 아세트아미노펜을 함유한 감기약을 여러 번 테스트해봤다. 아주 약간 코가 덜 막히는 느낌은 있지만 미미하다. 다만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이 들어있으니 진통 효과는 난다.아직 최종 결론이 난 건 아니지만 이제야 겨우 페닐에프린이 퇴출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FDA 인력이 확대되고 일반의약품도 처방약처럼 효과와 안전성에 대해 더 엄격한 검증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다음 타자는 어떤 약 성분이 될지 지켜봐야할 일이다.이번 기회에 하나 더 기억할 점이 있다. 미국은 건강기능식품에 대해서도 아주 느슨한 기준을 가진 나라이다. 미국FDA는 식이보충제를 따로 승인하지 않는다. 1994년 식이보충제에 대한 법안이 통과되고 나서부터는 질병을 치료, 진단, 예방, 치유한다는 문구만 안 들어가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식 문구는 효과와 안전성을 입증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도 미국FDA를 내세워 제품을 홍보하는 국내 광고가 넘쳐난다. 그런 제품은 믿고 걸러도 된다.
2023-11-22 09:52 |
[약사·약국] <143> 찌르지 않는 당측정기가 가져올 변화
건강한 사람도 혈당치를 모니터링하는 시대가 눈앞이다. 앞서 칼럼에서 다룬 것처럼 연속당측정기는 500원 동전 크기의 센서를 팔뚝에 붙이면 세포와 세포 사이의 액체성분 속 당수치를 24시간 스마트폰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기이다. 세계적으로 연속당측정기 시장을 양분하는 덱스콤과 애벗, 두 회사가 모두 당뇨를 넘어 일반 성인의 건강관리용으로 영역 확장을 위해 전략을 수립해나가고 있다.이들 연속당측정기가 편리하긴 하지만 얇은 필라멘트가 피부 속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도 사라질 날이 올 것 같다. 블룸버그 통신 보도에 따르면 애플이 올해 2월 피부를 찌르지 않고도 연속으로 혈당을 측정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서 큰 진전을 이뤘다고 한다. 여러 파장의 레이저를 피부로 쬐어 포도당이 흡수한 후 센서로 반사되는 빛의 양을 통해 당수치를 추정하는 방식이다. 스마트워치로 가능한 수준까지 기기가 작아지려면 아직 여러 해가 걸릴 것으로 예상되지만 만약 이런 비침습적 연속당측정기가 현실화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모두가 당수치를 들여다보면서 식사하는 게 트렌드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당뇨가 아닌 사람이 당수치를 확인하면 어디에 좋을까? 제일 쉽게 떠오르는 것은 다이어트와 체중 관리이다. 음식을 먹고 혈당이 급격하게 오르는 혈당 스파이크를 겪게 되면 췌장에서 혈당을 떨어뜨리기 위해 과도한 인슐린이 분비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체중 증가가 유발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빈속에 과일주스를 마시고 나면 오히려 더 배가 고파지는 것처럼 과잉 인슐린이 다시 허기가 지도록 해 더 많은 음식을 찾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이 지나치게 단순하며 혈당 스파이크가 체중 증가로 이어진다고 볼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다양한 다이어트에 실제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는 일련의 연구를 수행한 케빈 홀과 같은 권위있는 연구자들의 지적이다.당뇨병이 있는 사람은 심혈관계 질환 위험도 높아진다. 핏속에 너무 많은 포도당이 돌아다니면 혈관내피를 손상시킬 위험도 크고 전체적으로 심장에도 무리가 가기 때문이다. 당뇨가 없는 사람의 경우에도 혈당치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심혈관계 질환 위험과 연관되므로 연속당수치측정기로 혈당을 모니터링하면 이러한 위험을 낮출 수 있을 거라는 게 연속당수치 사용을 옹호하는 쪽 주장이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의 경우에 혈당치와 심혈관계 질환 사이의 관계는 상관관계일 뿐, 아직까지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연속 당측정기의 사용이 일반인에게로 확장되면 지금은 분명치 않은 문제의 답을 더 명확히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과일에 당분이 들어있어서 먹으면 살찌고 건강에 좋지 않다는데 먹어도 되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다. 과일에 당분이 들어있긴 하지만 당 섭취를 걱정하여 안 먹기에는 과일로 인한 건강상 유익이 더 많다. 세계 여러 나라의 당뇨협회에서도 당분 때문에 과일을 피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많이 홍보한다.그렇다면 과일을 언제 먹는 게 좋은가. 식후에 과일이 식전보다 혈당을 더 천천히 끌어 올린다. 다른 음식으로 인해 위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과일 속 섬유질도 당분이 천천히 흡수되도록 한다. 그래서 식전에도 소량의 과일을 먹는 것으로는 혈당치가 크게 요동치지 않을 수 있다.다만 양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을 먹는 것보다는 식후에 조금씩 나눠서 먹는 게 좋고 특히 빈속에 간식으로 과일을 먹을 때는 양을 조절하는 게 혈당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 이 정도가 이제까지 가능했던 답변이다.그런데 이제는 더 정확히 혈당치에 과일이 미치는 개인적 영향을 알아보는 방법이 생겼다. 연속당측정기를 착용한 상태에서 과일을 먹어보면 되는 것이다. 앱을 이용해서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어떤 식으로 혈당이 변화했는지 데이터를 입력하면 그 패턴을 분석해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식단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서비스도 여럿 생겨났다. 비침습적으로 당수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기가 스마트워치 수준으로 작아지면 관련 서비스뿐만 아니라 이를 이용한 연구도 더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헬스케어 전문가라면 찌르지 않고 혈당치를 재는 기기가 언제 나올 것인가 추측하는 것보다는 나올 거라는 걸 기정 사실로 여기고 그 다음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2023-11-13 17:25 |
[약사·약국] <142> 누트로픽 이야기
음식은 먹는 사람을 반영한다. 누트로픽이 딱 그렇다. 누트로픽은 뇌의 인지기능을 향상시켜 준다는 다양한 보충제를 말한다. 뇌기능을 향상시켜주는 음식이나 식품성분은 전에도 있었다. 커피와 카페인 음료가 대표적이다. 그럼 누트로픽은 뭐가 다른가?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사람의 몸을 컴퓨터 소프트웨어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식품 트렌드라는 거다. 인체도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계속 업데이트하면 더 좋아질 거라고 믿는 이른바 바이오해커가 찾는 식이보충제다. 요즘에는 암호화폐 투자자로, 전에는 페이스북, 스카이프, 에어비앤비가 뜨기도 전에 거금을 투자한 것으로 유명한 안드레센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가 일찍이 2015년 누트로픽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적이 있다.누트로픽은 말하자면 실리콘 밸리의 관점으로 본 뇌기능 향상물질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대다수의 사람이 비슷한 눈으로 식품을 바라보는 것 같다. 1970년대 초 누트로픽이란 용어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주로 인지기능을 향상시키는 약물을 의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식품으로 영역이 확장됐다. 2000년대 에너지드링크가 인기를 끌 때도 누트로픽이란 말이 함께 사용됐다. 미국에서는 원조 누트로픽인 카페인에 비타민B12를 하루 필요량의 40배나 되는 고용량으로 추가한 제품이 출시되기도 했다. 그렇게 마시면 뇌기능이 더 향상될 거라는 게 업체의 설명이었다. 국내에서도 올해 수능을 앞두고 누트로픽이 화제가 됐다. 일명 공부 잘하는 약 또는 스마트 드럭이라고 부르는 ADHD 치료제 처방이 강남 3구(강남,송파,서초)와 노원에서 제일 많이 처방됐다는 것이었다. 이런 뉴스를 보면 부작용 걱정으로 그런 약을 쓰기는 싫지만 그래도 뭔가 뇌기능이 향상되는 걸 먹고는 싶은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사람이나 승진을 기다리는 직장인이라면 식품 중에 비슷한 효과가 있는 건 없을까 찾아보게 된다. 누트로픽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은행잎 추출물, 비타민B복합제, 인삼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홍경천(로디올라), 테아닌, 티로신, 콜린 같은 생소한 것들, 아유르베다에서 사용한다는 약초들까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아직 국내에 허가되지 않은 것들이 많지만 인터넷 직구로 구입하여 섭취하고 있다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여럿이다. 그렇다면 누트로픽의 효과는 어느 정도일까? 효과가 없진 않을 것 같은데 아직 명확한 근거는 부족하다. 이 분야의 절대강자 카페인을 놓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카페인은 주의력과 집중력을 향상시킨다. 일부에서는 카페인은 각성제이므로 엄밀히 말해 누트로픽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장기적으로 뇌기능을 향상시키면서도 피로,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을 줄 수 있어야 누트로픽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누트로픽으로 효과가 충분히 입증된 물질이 거의 없다. 아직 카페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물질이 없어서 카페인을 누트로픽에서 배제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이유다. 실제로 미국 편의점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능성 음료에는 2X, 3X로 표시된 것들이 많다. 카페인을 기존 제품보다 2배, 3배로 넣었다는 뜻이다. 여러 신체기관 중 뇌가 플라시보 효과에 제일 취약하다. 비싼 약이라고 얘기해주면 파킨슨병 치료제의 약효가 28%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머리가 좋아지는 약이나 음식이라고 말해주면 먹고 나서 왠지 뇌 기능이 향상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쉽다. 경험담만 듣고 누트로픽에 지갑을 열기는 어려운 이유다. 시간이 지나고 연구 결과가 좀 더 쌓이면 지금보다 선택이 쉬워질 듯하다. 하지만 지금도 뇌 기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건강에 유익한 식단이 뇌 건강에도 유익하다. 독서는 집중력, 사고력을 향상시키고 불안을 완화하며 노화로 인한 인지기능을 늦춰주는 데 도움이 된다. 운동은 뇌유래 신경영양인자(BDNF)의 분비를 증가시킨다. 새롭게 유행하는 뭔가를 먹거나 비용을 따로 들이지 않아도 뇌 기능 향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2023-10-26 21:51 |
[약사·약국] <141> 지구온난화와 알레르기
매년 가을이면 알레르기가 심해진다는 사람이 많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미국 천식 알레르기 재단(Asthma and Allergy Foundation of America)에 따르면 기후 변화로 인해 알레르기 시즌은 거의 두 배 더 길어지고 강도도 더 세졌다.국내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최근 20년간 알레르기 비염 환자가 18배 증가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19년까지 20년간 국내 알레르기 비염 환자는 18배 증가했고 성인의 18.8%가 알레르기 비염 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도 초에 5%였던 알레르기 환자 비율은 2010년대 25%까지 급증했다.지구 온난화로 기온이 높게 유지되는 기간이 늘어나면 식물이 성장하여 알레르기 원인 물질인 꽃가루를 날리기에는 더 좋은 조건이 된다. 실제로 국립기상과학원과 대한소아알레르기호흡기학회가 1997년부터 전국 12개 지점에서 측정한 결과를 보면 꽃가루 농도는 계속하여 높아지고 있다. 전에는 알레르기하면 봄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돼지풀, 단풍잎돼지풀처럼 가을에 꽃가루를 날리는 식물이 급증하면서 가을철 알레르기 비염 증상으로 고생하는 사람 수도 늘고 있다. 공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면 식물은 꽃가루를 더 많이 날린다. “올해 알레르기는 최악”이란 말이 나오는 게 그저 느낌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 알레르기 비염 환자는 지구 온난화의 여파를 눈과 코로 체험하는 것이다.알레르기 비염과 감기, 독감, 코로나19와 같은 감염성 질환은 증상이 비슷하지만 다르다. 알레르기가 원인일 때는 미열, 통증 같은 증상은 없다. 눈, 코, 목, 귀가 간지럽고 피부에 발진이나 두드러기가 생기기도 한다. 감기는 1-2주면 지나가지만 알레르기는 원인물질에 노출되는 동안 지속된다. 원인물질이 연중 내내 존재한다면 알레르기 증상도 365일 계속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증상이 악화되거나 너무 오래 갈 경우에는 가까운 병의원을 방문해야 한다.감기와 알레르기 비염은 약도 다르다. 알레르기 비염일 때는 졸음을 덜 유발하는 2세대 항히스타민제(로라타딘, 세티리진), 졸음을 유발하지 않는 3세대 항히스타민제(펙소페나딘)를 사용하지만 이들 약물은 감기에는 별 소용이 없다. 이들 약물은 혈액-뇌 장벽을 잘 통과하지 못하여 중추신경계로 들어가지 않는다.같은 이유로 재채기를 유발하는 뇌의 연수에 도달하지 못하므로 감기 증상에 거의 효과가 없다. 그래서 감기약에는 주로 1세대 항히스타민제가 들어있다. 항히스타민제라고 하여 다 같은 약이 아니다. 감기약을 자몽 주스와 함께 먹으면 효과가 떨어진다는 설명이 기사나 동영상에서 자주 보인다. 모두 틀린 얘기다. 감기약 속의 1세대 항히스타민제 성분은 과일 주스와 아무 상호작용이 없다. 주스와 함께 먹으면 효과가 떨어지는 항히스타민제는 딱 하나 펙소페나딘뿐이다. 이 약물은 오렌지주스, 자몽주스, 또는 사과주스와 함께 먹으면 흡수가 크게 저해된다. 펙소페나딘 성분의 약(알레그라)을 먹을 때만 과일주스를 피하면 된다.코에 뿌리는 스테로이드 성분의 약을 처방받아 사용하면 재채기, 콧물, 코막힘 같은 증상뿐만 아니라 눈과 관련된 증상(가려움증, 충혈, 눈물 증가)도 줄일 수 있다. 코가 막힐 때 사용하는 비충혈제거 스프레이 중에도 항히스타민제가 들어있는 경우에는 눈과 관련한 알레르기 증상에도 도움이 된다. 크로몰린 성분 안약을 꾸준히 사용하거나 항히스타민제 성분 안약을 사용하는 것도 좋다. 비충혈제거약이 들어있는 스프레이는 너무 자주 연속해서 쓰면 오히려 코막힘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 증상이 심하거나 약을 써도 효과가 없을 경우는 의사, 약사와 상담해야 한다. 알레르기 증상을 줄이려면 꽃가루가 심하게 날리는 날에는 환기를 피하고 실내에 머무는 게 알레르기 증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개나 고양이 털에 알레르기가 있다면 이들 반려동물과 접촉을 피하는 게 좋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야 한다면 최소한 침실에는 반려동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게 유익하다. 동일한 약을 원래 쓰던 만큼 써도 효과가 떨어지는 건 내성이 생겨서라기보다 알레르기 원인물질이 늘어나서일 가능성이 높다. 알레르기 약을 적게 쓰려면 지구 온난화를 막아야 한다는 건 다소 거창하지만 맞는 말이다.
2023-10-11 09:34 |
[약사·약국] <140> 식재료 페어링의 원칙
음식에는 어울리는 짝이 있고 어울리지 않는 짝이 있다. 과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가능한 식재료 조합은 1,000조 개 이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사용하는 레시피는 수백만 개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들 중 상당수가 중복이다. 요리를 할 때 아무 원칙 없이 임의로 식재료를 조합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제일 흔하게 식재료를 페어링하는 방법 하나는 제철에 나는 로컬 식재료를 함께 쓰는 것이다. 동일한 토양에서 비슷한 시기 수확한 농산물을 함께 쓴다니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좀처럼 지키기 어려운 원칙이기도 하다. 식당 원산지 표시나 식품 뒷면 원재료만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철이 다른 식재료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곳에서 생산된 식재료를 섞어 쓰는 게 일반적이다. 식당 메뉴를 바꾸지 않으려면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지역 제철 식재료를 쓴다는 원칙이 반드시 과학적으로 사실로 증명된 것도 아니다. 동일한 조건, 같은 땅에서 자란 식물도 종이 다르면 맛이 다르다. 토양의 미네랄이 식물로 전부 흡수되지 않을뿐더러 식물의 풍미 물질은 식물 그 자체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음식궁합에 대한 속설도 사실과 다르다. 시금치와 두부를 함께 먹으면 결석이 생긴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시금치 속 수산이 두부 칼슘과 결합하면 흡수가 덜 되긴 하지만 신장결석이 잘 생기는 사람에게는 장점이 될 수 있다. 수산이 흡수되지 않으니 신장결석 위험이 줄어든다. 그래서 신장결석을 주의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시금치를 먹을 때 우유나 두부처럼 칼슘이 풍부한 식품을 곁들여 먹는 게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당근과 오이를 함께 먹으면 안 된다는 설도 마찬가지로 틀렸다. 당근 속에 비타민C를 분해하는 효소가 들어있지만 이런 효소는 대부분의 채소에 들어있다. 심지어 오이에도 들어있다. 그래서 당근, 오이를 자르거나 갈면 세포 속의 비타민C 분해 효소가 흘러나와 비타민C가 파괴된다.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당근, 오이에 비타민C 함량이 그리 높지 않다. 냉장고에 오래 보관하거나 가열 조리하는 과정에서도 비타민 함량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비타민C 하나 먹으려고 채소를 먹는 것도 아니고 김밥에 당근과 오이를 함께 넣는다고 영양학적 대위기가 오는 것도 아니다.팩트체크를 중요시하지 않던 시절 만들어진 속설에 불과한 음식궁합 이야기는 무시하는 게 최선이다. 식사의 즐거움을 스스로 반감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음식 조합에 더 중요한 관건은 특정 식재료와 다른 식재료를 조합할 때 맛이 어울리는가이다. 지역 식문화는 여러 조합 중 맛이 어울리는 것들을 찾아내면서 만들어진다. 수많은 사람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만들어낸 조합이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맛의 조합, 멕시코에서는 멕시코인 특유의 풍미 조합을 맛볼 수 있다.나라 안에서도 지역별로 풍미의 결이 다르다. 이러한 풍미 조합에는 어떤 과학적 원칙이 숨어있을까? 네트워크 과학에 정통한 연구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공통의 원칙은 없는 걸로 보인다. 서유럽 국가에서는 동일한 풍미 요소를 공유하는 짝을 선호하고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공통적 풍미를 피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두 방향 모두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하다. 예를 들어 치즈와 구운 닭고기에는 공통 향미성분이 무려 62가지 들어있다. 치킨 파르미지아노가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다.반대로 참치김밥과 커피에는 비린내를 풍기는 아민이 공통으로 들어있어서 함께 먹으면 불쾌하다. 동서양이 식재료를 주고받으면서 이런 차이점도 일부 희석되는 경향이 있다. 동아시아 요리에서는 감칠맛 요소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식재료를 짝 짓는다는 주장도 있다.풍미 조합에 대한 과학자들의 연구는 이제 막 시작 단계이다. 하지만 뭔가 일리가 있긴 한 것 같다. 초콜릿과 오이, 블루베리와 고추냉이, 오이와 레모네이드, 캐러멜 크림과 간장과 같은 추천 조합을 맛보면 의외로 잘 어울린다. IBM 슈퍼컴퓨터 왓슨이 제안하는 벨기에 베이컨 푸딩, 딸기와 버섯을 곁들인 베트남 사과 케밥과 같은 요리도 상상을 뛰어넘는 조합이지만 놀랍게 어울린다. 이러한 새로운 조합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토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져온 지역별 식재료 페어링의 규칙에도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2023-09-21 13:52 |
[약사·약국] <139> 다이어트 신약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정도로 논란이 뜨거운 약이 있었나 싶다. 오젬픽, 위고비 이야기다. 체중 감량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들 신약에 대한 뉴욕타임즈 기사에 일주일 동안 댓글이 무려 1,700개 달렸다. 오젬픽을 사용하면서 음식 소음이 사라졌다는 사람이 많다는 기사에도 댓글이 1,400개 달렸다.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툭하면 음식 생각이 나는 걸 음식 소음Food noise이라고 부른다. 식욕 조절이 잘 되지 않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긴 설명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이해가능한 말이다.기사에 댓글이 이렇게 많이 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약으로 살을 뺀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베프가 오젬픽을 쓰고 있는데 반대 의견을 제시해도 되겠냐는 독자의 질문에 답한 칼럼에 댓글이 1,100개나 달릴 정도이다.약을 통한 체중 감량에 대한 부정적 시선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약으로 살을 빼는 건 마치 운동선수가 도핑하는 것처럼 반칙으로 보인다. 게다가 기존의 다이어트 보조제는 대체로 부작용이 심각한 경우가 많았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룬 나비약처럼 환각, 중독 문제를 일으키는 중추신경 흥분제가 그동안 주류였기 때문이다. 오젬픽, 위고비의 약성분인 세마글루티드와 같은 약물이 신약이니까 아직 부작용을 모른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전문가도 많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과거의 시선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판을 바라보려고 하는 게 아닌가 질문해봐야 한다.지난 8월 24일 미국 마운트 시나이 의대 교수 캐롤라인 메서는 세계적 의료정보 사이트 메드스케이프에 오젬픽 사용 고려가 무모한 게 아니라는 칼럼을 썼다. 메서는 우선 오젬픽은 출시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GLP-1 유사체는 약으로 사용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같은 계열의 약물 중 제일 먼저 사용된 바이에타가 미국 FDA에서 신약으로 승인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2005년 4월이다. 부작용에 대한 모니터링은 계속해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축적된 장기간 유익과 부작용에 대한 자료가 상당한 수준이란 이야기다. 메서는 췌장염 부작용에 대해 우려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식단으로든 수술이나 신약으로든 체중을 줄이면 담석증을 유발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췌장염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장기간 단식하거나 단기간에 체중을 감량하면 간에서 담즙으로 콜레스테롤을 더 많이 배출하여 담석증 위험이 커진다. 췌장과 담낭은 공통의 통로인 담관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담석으로 관이 막히면 췌장염이 생길 수 있다. 췌장염 위험이 조금 증가할 수 있지만 약 자체보다는 체중 감량으로 인한 것이며 대체로 약 사용을 막을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메서는 다이어트 신약 인기로 당뇨병 환자들이 제대로 약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일축한다. 오젬픽과 위고비는 동일 약성분이다. 당뇨치료제일 때는 오젬픽, 비만치료제로는 위고비라는 이름으로 용량을 달리하여 판매되고 있을 뿐이다. 약으로 살을 빼려는 사람 때문에 약품 공급이 부족해져 당뇨병 환자가 곤란을 겪는다는 주장의 근거이다. 하지만 메서는 비만인 사람이 이들 약을 써서 당뇨병, 심혈관계 질환 위험을 낮출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만성질환의 예방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왜 정작 실제로 그런 예방효과를 내는 약이 나오니까 못 쓰게 하냐는 말이다. 멈추어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이들 약을 셀럽과 인플루언서들이 쓰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많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약을 사용하여 얻게 되는 유익을 간과할 수 없다. 약으로 살 뺀다는 비난 댓글에 당신이 이 약을 써보기라도 했냐며 약 사용 뒤 다른 만성질환 약을 줄여서 오히려 사용 중인 약의 개수가 줄었다고 반박하는 댓글이 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 국내에는 오젬픽, 위고비와 같은 약이 본격적으로 공급되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 촉발될 논란에 대해 미리 생각해볼 점이 많다. 분량 제한으로 지면에서 다루지 못한 더 자세한 내용은 새 책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소식의 과학>에서 읽어주시길!
2023-08-30 11:34 |
[약사·약국] <138> 폭염과 약 이야기
여름이면 기후 변화가 몸으로 느껴진다. 세계 곳곳에서 폭염, 가뭄, 산불, 폭우와 같은 기상 이변으로 인한 피해 소식이 이어진다. 온열질환자도 매년 증가 추세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5월 20일부터 8월 2일까지 확인된 온열질환자는 1,385명으로 작년 같은 기간 대비 29.0% 증가했다. 8월은 특히 주의가 필요한 달이다. 월별로 보면 무더위가 절정에 달하는 8월에 가장 많은 온열질환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2020년 8월에는 월평균의 3.5배에 달하는 3,841명이 온열질환으로 병의원을 찾았다. 더위가 왜 건강 문제를 일으킬까? 체온이 지나치게 올라가면 열로 인해 뇌를 비롯한 여러 인체 기관들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날씨가 더우면 인체가 어떻게든 체온을 낮추려고 애쓰는 이유이다. 하나는 피부 쪽 모세혈관을 확장시키고 피부 쪽 혈액 순환을 늘려 열을 발산하는 것이다. 더운 날 얼굴이 빨갛게 보이는 것은 이로 인한 현상이다.두 번째는 땀을 흘려서 열을 식히는 방법이다. 땀이 기화하면서 피부의 열을 빼앗아 주변 혈액의 온도를 낮추고 이 혈액이 다시 인체 내부로 순환하면서 열기를 식힌다. 하지만 요즘처럼 고온다습할 때는 이런 인체의 보호 기능만으로 부족하다. 외부 온도가 너무 높으면 열을 발산하기보다 흡수하기 쉽다. 게다가 습도가 높아서 땀이 잘 날아가질 않으니 내부 온도를 낮추기가 매우 어렵다.이렇게 체온 조절 기능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우리는 쉽게 피로를 느낀다. 활동을 중지하고 더위를 피해 몸을 식히라는 뇌의 경고 메시지이다. 이를 무시하고 과도한 활동을 하거나 계속하여 열기에 노출되면 신장, 심장, 장, 뇌와 같은 장기가 손상되고 심하게는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특히 노인, 어린이, 만성질환자가 더 위험하다.폭염에 노출되면 어떻게든 혈액 순환을 늘려 체온을 조절해보려다가 심장에 무리가 가기 쉽다. 상황이 더 악화하여 뇌마저 과열되고 산소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체온 조절 중추인 시상하부도 손을 놔버린다. 가장 심한 형태의 열손상인 열사병까지 가게 되면 땀도 더 이상 흘리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서 의식 소실, 섬망과 같은 증상마저 나타난다. 불행히도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에는 약이 없다. 얼음물, 냉찜질 등 물리적 수단을 동원하여 뜨거운 몸을 빠르게 식혀주어야 장기 손상을 막을 수 있다.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 잘 모를 때는 119에 신고하여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온열질환은 예방이 더 중요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물을 충분히 마시고, 시원하게 지내고, 더운 시간에는 쉬면 예방할 수 있다. 날씨가 더울 때는 그만큼 물을 더 마셔야 한다.땀으로 인한 수분 손실이 있으므로 신체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좋다. 땀으로 염분과 미네랄이 소실되기는 하지만 매우 소량이다. 염분 섭취는 이미 충분하며 차고 넘친다. 식사를 통해 필요 이상으로 염분을 섭취하고 있으므로 특별히 소금을 더 먹을 필요는 없다. 물만 마셔도 된다.시원하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다. 폭염에 야외활동과 작업은 자제해야 한다. 기후 변화로 인해 온열질환자와 사망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더위에도 무리한 작업을 강요하는 일터가 있지는 않은지 사회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실내에서는 커튼, 블라인드를 사용해서 가능한 한 햇빛을 막아줘야 하며 외출 시에는 가볍고, 색이 옅고, 헐렁한 옷을 입어서 열이 쉽게 발산되도록 해주는 게 좋다. 무엇보다도 냉방기기를 적절히 사용하는 게 필수적이다. 집에 에어컨이 있을 때는 에어컨을 틀어주고, 없는 경우는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에어컨으로 온도를 낮춘 공간에 머물면 온열질환 위험이 감소한다.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서는 쇼핑몰이나 공공도서관을 하루 3-4시간 정도 방문하는 것도 권장한다. 집에 냉방기기가 없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무더위쉼터를 제공하고 접근하기 쉽게 만드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기후 변화에 대해서도 그로 인한 온열 질환에 대해서도 사회가 다함께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이 많다.
2023-08-17 07:38 |
[약사·약국] <137> 발효식품 팩트체크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주던 시절이 있었다. “서양 사람의 혓바닥에는 전혀 발달돼있지 않은 맛난 맛 – 곧 발효미 지각미역이 우리 한국사람에게 가장 발달돼있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과거 큰 인기를 끌었던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 1987년 8월 7일자에 나오는 글이다. 서양 음식에는 발효식품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한국인의 밥반찬은 대부분 발효식품이므로 한국인의 발효미 감지능력이 세계 최고라는 주장이 1985년부터 1997년까지 다섯 번 이상 반복됐다.근거 없는 주장이다. 학계 추산에 따르면 세계인이 소비하는 음식의 1/3은 발효식품이다. 된장, 간장, 김치만 발효식품이 아니다. 빵, 맥주, 와인, 치즈는 전부 발효식품이다. 피클, 사워크라우트 같은 채소절임도 발효식품이다. 초리조, 살라미 같은 육가공품도 발효식품이다. 카카오를 초콜릿으로 만드는 과정에도 발효가 필수적이다.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유기산과 알코올은 음식의 보존성을 향상시킨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발효는 음식을 오래 보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오래 둔 음식이 상한 줄 알았는데 먹어보니 탈나지 않고 오히려 맛이 좋아지는 발견을 통해 만들기 시작한 발효식품도 많았을 것이다. 발효식품은 세계 전역에서 두루 먹어 왔다. 동아시아 전역에 발효 생선, 발효 콩 식문화가 나타난다.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에도 다양한 발효식품과 소스가 있다. 한국인의 발효미 감지능력이 가장 발달돼있다는 주장 역시 과학적 근거가 전무하다. 특별히 한국인의 신맛, 짠맛 감지 능력이 뛰어나다는 연구 결과는 없다. 그런데도 1990년대 사람들은 이규태 칼럼에 반복되는 틀린 이야기에 별일 없이 넘어갔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시절이었으니 우리가 최고라는 말이 솔깃했을 법하다. 하지만 숨겨진 또 하나의 이유는 발효의 냄새다. 방송에서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즐겁게 먹는 장면이 종종 비춰지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안 그랬다. 한국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 장류, 젓갈, 김치와 같은 발효식품을 맛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흔했다. 먹어보면 얼마나 맛있는데 저걸 모르나 싶었을 거다. 하지만 후천적으로 배워서 얻는 입맛이며 정확히 말해 냄새에 대한 선호도이다. 냄새를 더 잘 맡거나 감지하는 게 아니다. 대학시절 내 친구는 1996년 LA 공항 식당에서 샐러드에 끼얹은 블루치즈 드레싱을 처음 맛보고 그 냄새에 질려 이틀 동안 음식을 제대로 입에 대지 못했다.발효된 음식의 냄새가 부패한 음식 냄새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아마도 그런 혐오의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먹어보고 별탈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고 또한 냄새에 자주 노출되어 익숙해지면 거부감이 줄어들고 맛을 즐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적으로 특정 발효식품 냄새를 극복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유럽인이라고 전부 치즈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치즈 혐오에 대한 연구로 이그노벨상을 탄 장-피에르 로예트에 따르면 프랑스인 11.5%가 치즈 냄새를 혐오한다. 치즈가 상한 음식으로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음식이 아닌 어떤 것으로 보일 정도라는 거다.하지만 막상 먹고 나면 발효식품이 속에 더 편안하다. 미생물에게 소화의 일부를 외주로 주어 미리 음식의 일부를 소화시킨 뒤여서 그럴 수 있다. 흥미롭게도 발효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fermentation은 끓인다는 뜻의 라틴어 fervere에서 왔다. 발효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스로 인한 거품이 액체가 끓을 때와 비슷하게 보이는 데서 착안한 말이다. 발효식품은 원래 음식보다 소화가 잘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우유를 마시면 속이 불편한 유당불내증이 있는 사람도 대개 요거트나 치즈는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유당이 전부 발효되는 것은 아니고 일부 남아있어서 유당불내증이 심한 사람은 치즈나 요거트를 먹어도 배가 아플 수 있다.) 미생물 발효로 비타민, 항산화물질, 항염증물질 등의 건강에 유익한 기능성 성분이 생겨난다. 2021년에는 발효식품을 자주 먹으면 장내 미생물군집의 다양성을 늘리고 염증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우리만 발효식품을 먹는 건 아니지만 다양한 발효식품이 세계인의 건강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2023-07-26 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