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386> ‘나의 학문 나의 삶’
심창구 교수. © 약업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협의회(명교협)는 최근 학문 후속세대를 위한 ‘나의 학문, 나의 삶’이라는 책을 매년 발간하고 있다. 나는 운 좋게도 2021년에 발간된 제4권에 내 이야기를 쓰는 기회를 얻었다. 모두 6명의 명예교수가 자기 이야기를 쓴 책이다. 내 글의 제목은 ‘한 칸씩 오른 사다리길’이었다. 오늘은 명교협 이장무 이사장이 쓴 발간사에 이어 내가 쓴 ‘책머리에’를 소개하기로 한다.평생을 학문 연구와 인재양성에 진력하여 학문의 지표가 된 서 울대학교 명예교수님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나의 학 문, 나의 삶』 제4권이 발간되는 경사를 맞이했습니다. 책자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귀한 시간을 내셔서 주옥같은 원고를 집필해 주신 김안제, 이승재, 최종고, 추광영, 허승일, 심창구 교수님과 이 발간 사업을 총괄한 본 협의회 사회봉사위원회 이흥식 위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중략)이번에 발간되는 제4권도 지적 자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제4차 산업혁명과 극심한 기후변화, 그리고 코로나19 대유행병 등으로 엄청난 변화의 파고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 변화를 꿰뚫어 보고 도전하며, 미래를 조망하는 혜안이 필요합니다.이 책에는 인문학, 언론정보학, 역사교육학, 법학, 제약학과 환경계획학 분야에서 최정상의 위치에 오른 학자들이 어떠한 계기로 학문의 길을 택하고, 학문의 어려움을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학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그 고뇌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사의 기본 원칙을 다루는 학문에 일평생 정진한 석학들의 이야기에서 변화의 시대에 대응하는 혜안을 얻기 바랍니다.이 책의 내용은 개인 석학들이 전공 분야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담은 생생한 증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분들의 학문 과 삶은 “국가의 동량을 양성한다.”라는 목표로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과 6· 25 전쟁으로 거의 폐허가 된 우리나라를 세계적 수 준의 문화 선진국으로,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일으켜 세운 서울 대학교의 자랑스러운 역사의 부분들입니다. (중략) 명예교수님들의 학문과 삶에는 많은 ‘과거’가 녹아 있습니다. 지금 그 과거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이유는, 이 과거가 학문 후속 세대의 앞으로의 삶과 학문에 선한 영향을 끼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이하는 내가 책에 쓴 머리말이다.물고기에는 뒷부분에 꼬리와 지느러미가 있습니다. 이들의 움직임을 통해 물고기가 헤엄쳐 나갈 방향과 추진력이 생깁니다. 하늘을 나는 연에 붙어 있는 꼬리도 연이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늘 위로 잘 올라가도록 중심을 잡아줍니다. 이 책에 실린 명예교수님들의 학문과 삶에 관한 고백이, 마치 물고기의 꼬리처럼, 또 연의 꼬리처럼, 사랑하는 학문후속세대가 삶과 학문의 방향을 정립할 때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우리가 과거를 반추(反芻)하는 까닭은 과거는 현재를 거쳐 미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학문 후속 세대 여러분은 선배들의 학문과 삶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을 얻기 바랍니다. 명예교수님들이 애써 글을 써 주신 소망이 거기에 있습니다.선배 세대의 인생을 읽을 때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놓고 읽어야 내용이 선명해집니다. 이 책의 필자인 명예 교수님들은 모두 우리나라 전후(戰後)의 혼란기를 살아 내셨습니다. 지금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당시에는 엄청난 고뇌 또는 보람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그러나 선배 세대의 학문과 삶이 언제까지나 후속세대의 시각(視角)을 결정해서도 안됩니다. 올챙이 때의 꼬리를 떼어내야 개구리가 도약(跳躍)할 수 있는 것처럼, 새 세대는 시대에 합당한 진취적인 기상(氣像)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선배님들의 행적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하시기 바랍니다.아무쪼록 이 책이 학문 후속세대의 학문과 삶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여러분의 학문과 삶을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이 책은 명교협을 통해 구독할 수 있다.
2024-01-17 15:05 |
[기고] <385> 약학사(藥學史) 연구 그리고 사다리 인생
심창구 교수. © 약업신문교수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우연한 기회에 한국약학사 연구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운 좋게 2015년 서울대 약대의 ‘가산약학역사관’ 개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현재 명예관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갖고 있다.그 후 『한국 약학의 아버지 녹암 한구동』(2016), 『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2016) 중 약학대학의 전사(前史), 『한국약학사』 (2017), 『서울대학교약학대학100년사』(2017),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2020) 등을 편저술하였으며, 대한약학회 내에 ‘약학사분과학회’를 창립(2014)하여 ‘근대약학교육기관 설립 100주년 기념심포지엄(2015)’을 비롯하여 매년 2회의 약학사 심포지엄(현재까지 총 19회)을 개최하였고, 2018년 이래 연 1회 『약학사회지』를 발간해 오고 있다.약학역사관의 개관 빛 서울대약대100년사의 저술은 당시 이봉진 학장의 획기적인 결단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학장은 약학역사관 개관을 위하여 전담 직원을 채용해 주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근대약학 교육사를 처음으로 정리할 수 있었음에 큰 보람을 느낀다.2007년부터는 약업신문에 격주로 ‘약창춘추’라는 칼럼을 쓰고 있다. 현재 384회를 넘었는데, 그간의 글을 두 권의 수필집으로 묶어냈다. 나머지 글도 조만간 3, 4권으로 묶어내야 할 것 같다. 2012년에는 『새로운 약은 어떻게 창조되나』라는, 일본 교토 대학 교수들이 쓴 약학 입문서를 번역하였는데 2023년 현재 놀랍게도13쇄를 찍었다. 13쇄 인쇄는 전공서적으로는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왜 이 책이 이리 잘 팔리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할 때가 많다.2013년 정년 후 약 5년간은 대웅제약에서 고문 겸 사외이사로 근무하였다. 거기서도 학술서적 발간 시 교정 및 편집을 도왔다. 2020년부터는 2년간 서울대 약대 25대 동창회장을 맡아 동창회보 98호 및 99호의 기획 및 편집을 주도하였다. 26대 원희목 동창회장의 부탁으로 제100호 및 101호 동창회보의 편집도 돕고 있다. 나는 동창회보를 통해서도 되도록 선배님들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약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노력하였다.몇년간은 서울 대학교 ‘명예교수회보’의 발간을 돕기도 했다. 이제 와 돌아보니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이 그나마 내가 제일 잘 하고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며 지낼 수 있는 지금의 내 상황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솔직히 별로 명민(明敏)하지 못하고, 왜소(矮小)하며 병약(病弱)한 내가, 요만큼이나마 바시락거리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나 고비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길로 나를 인도하셨다. 예컨대 일류중학교인 인천중학교 입시에 떨어지게 하신 것은 특별한 배려이셨다. 만약에 내가 인천중학교에 합격하였다면, 나는 재학 중 낙제 선상에서 헤매는 낙오자(落伍者)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여파로 인생에서 낙오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인천중학교에 낙방(落榜)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동산중학교를 거쳐 제물포고등학교 입시에 도전, 입학하게 하신 것은, 우선 사다리 한 칸을 올라간 다음, 그곳을 발판삼아 다시 다음 칸에 도전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배려였다. 사다리 한 칸을 오르고 나면 그 위에 또 한 칸이 있음을 깨닫는다. 사다리의 위 칸은 언제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나의 인생길은 이처럼 딱 한 칸 위의 새로운 비전을 보고 한 칸씩 오른 사다리 길이었다.‘한 칸씩 오르기’는 천재(天才)나 수재(秀才)가 택하기에는 답답한 방법이다. 그들은 한 번에 몇 칸씩도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한 칸씩 올라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의 ‘한 칸씩 오르기’ 방법론이 천재나 수재가 아닌 후배들에게 혹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
2023-12-27 09:49 |
[기고] <384> 손녀의 근검절약
우리 아버지의 근검 절약 (약춘 280)은 이미 설명한 바 있는 대로 그 수준이 올림픽 금메달 감이셨다. 일단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그 돈이 땀에 절을 때까지 결코 손을 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셨다. 또 아무개는 가방을 3대째 쓰고 있다는데 너희들은 벌써 또 가방을 사 달래냐고 나무라시기도 하였다.중학교 때 교모(校帽)를 새로 사달라고 말씀드리자 ‘머리 위에 얹어 놓고 다니는 모자가 왜 해지느냐?’고 야단 치셨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에 대해 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근검절약을 하셨고, 또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을 도와주시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아버지 덕분에 자식들도 어느 정도 근검절약이 몸에 배긴 하였지만 도저히 아버지를 따라 갈 수는 없었다. 내 아들이자 아버지의 두 손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증손주, 그러니까 나의 4손주 중 한 명이 아버지의 마음에 꼭 들만큼 근검절약 정신을 타고 났다.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다면 엄청 기뻐하셨을 것이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큰 아들의 세 딸 중 둘째 아이인 예원이가 오늘의 주인공인데, 2년전인가 아들네에 들렀더니 초등확교 5학년인 예원이가 동네 수퍼 마켓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따라 가 보았더니, 그동안 모아 놓은 쿠폰으로 가위를 받아오는 것이 아닌가?며느리한테 물어봤더니 예원이의 알뜰생활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원 플러스 원이 아니면 물건을 사지 않고, 쇠고기를 산 후 돼지 고기를 사려고 하면 ‘고기 종류는 한가지만 사면되지, 뭐하러 두 가지나 사냐’고 엄마를 질책(?)하더란다. 그래서 아들은 며느리가 시장에 갈 때 예원이가 따라붙으면 안심이 된단다. 그 애가 엄마의 과소비(?)를 적절히 견제해 주기 때문이다.한번은 아내가, 즉 예원이의 할머니가 호랑이 콩을 살 때 깐 콩을 사 왔다가 예원이한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이유는 깐 콩은 안 깐 콩보다 훨씬 비싼데, 안 깐 콩을 사와서 집에서 까면 될 걸 뭐하러 비싼 돈을 주고 깐 콩을 사냐고 했단다. 그 후로 우리집은 호랑이 콩을 살 때마다 예원이한테 혼날까 봐 안 깐 콩만을 사고 있다. 안 깐 콩을 두 자루 사오면 주로 내가 그걸 깐다. 물론 예원이가 함께 있을 때는 예원이도 도와준다.맛있는 음식을 사주러 음식점에 데리고 가면 예원이는 할아버지가 놀랄까 봐 계산이 얼마가 나오는지 미리 귀뜸해 준다. 최근에 세 손녀에게 스테이크를 사 주려고 VIPS라는 양식당에 데리고 갔더니, 주문하기 전에 자기들끼리 뭔가 숙덕거렸다. 무슨 일일까 잠시 기다렸더니 ‘스테이크가 너무 비싸서 셋이서 한 개만 먹고 두 개는 싼 메뉴로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돈을 절약하려고 머리를 맞댄 손녀들이 기특해서 감동을 받았다. 문득 10여년전 내가 정년 퇴직을 앞두고 직원들에게 점심 한끼를 대접한 일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왕 얻어먹는 거 비싼 걸로 먹어야지’ 하면서 일식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간 나는 기분이 영 언짢았다. 그들의 얌체 근성을 본 것 같아서였다. 그 때 나는 ‘다시는 이런 호의를 베풀지 말아야겠다’ 고 결심(?)하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 손녀들의 마음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할아버지가 과용하지 않도록 배려를 해 주다니! 아무래도 우리 손녀들, 특히 예원이는 증조할아버지의 근검절약 유전자를 그대로 받은 것 같다.자랑을 조금 더 하자면 예원이는 식성도 남 다르다. 설렁탕을 사주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은 후 빈 그릇을 머리 위에서 뒤집어 보여준다. 또 아이답지 않게 장어구이를 좋아하고, 게장이라면 양념과 간장을 가리지 않는다. 제 부모를 따라 미국에 1년간 가 있을 때, 햄버거를 계속 사주니까 “엄마, 이건 음식이 아니잖아” 하며 울먹거렸단다. 어쩌면 식성도 내 맘에 꼭 드는지 모르겠다.
2023-12-15 09:49 |
[기고] <383> COVID-19 팬데믹과 범약계의 대응
지난 11월 10일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는 위 제목으로 개최한 심포지엄의 내용을 소개한다.1. 식약처: 식약처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실시하였는데, 특히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치료제·백신, 진단기기 등 의료제품의 신속한 허가·심사와 더불어 안정적인 유통 및 공급, 국산 제품 개발 지원 활동에 총력을 다하였다.먼저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의 신속한 허가·심사를 위한 전담팀을 조직하여 베클루리주 등 치료제 3건, 코미나티주 등 백신 13건, 126건의 진단시약을 신속하게 허가하였고, 위기 상황에 필요한 의료제품을 품목 허가 이전에 긴급하게 도입 공급하는 ‘긴급사용승인’ 제도를 운영하여 팍스로비드 등 5건의 치료제와 코미나티 등 1건의 백신, 16건의 진단시약을 심사하였다.또 코로나 치료제 백신의 개발을 지원하여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 3번째로 자국의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 진단시약을 동시에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공중보건 위기대응 의료제품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치료제, 백신, 마스크, 진단시약 등의 신속한 허가·심사, 긴급한 사용과 안정적 공급을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식약처 사전상담과 정지원 과장)2. 대한약사회: 약국, 약사의 역할은 기존의 약물 치료관리 중심에서 지역사회 팬데믹 확산 방지와 예방, 치료 지속 보장, 제한된 의약품 및 방역물품에 대한 분배와 수급 관리 지원으로 확장되었다.초기인 2020년에는 약국을 중심으로 공적 마스크의 수급 안정화를 주도했고, 전국 12개 권역별 생활치료센터와 분회조직을 연계하여 의약품 조제 서비스를 지원했다. 정부 예방접종 대응 지침에 약사 인력을 백신관리 담당자로 포함하도록 명시했다.경구용 치료제가 공급된 2022년에는 자가검사키트 소분 판매, 경구용 치료제 조제 및 유통 관리를 지원했다. 또 감염병 유행 정도에 따라 약국이 자율적으로 비상 체계로 전환 관리할 수 있도록 ‘지역약국 약사 및 종사자 감염 대비 약국업무 연속성 계획(BCP)’을 정부 지침으로 채택되게 했다. 전국 약국에 비접촉식 체온측정기를 보급, 설치했고, 공공심야약국 운영 시범사업 예산을 확보하여 취약시간대 국민의 의약품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했다. (전 대한약사회 김대진 상근 이사)3. 병원약사회: 정부는 2021년 1월 28일 중앙 예방접종센터와 권역 예방접종센터를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병원약사를 배치할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그러자 예방접종센터를 담당하는 의료기관이 자체적으로 약사를 배치하였다. 2021년 2월 26일 최초로 의료기관에 백신이 입고되고, 특히 2020년 유통 중 독감 백신이 상온에 노출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병원약사들은 백신의 안전한 보관 및 관리를 위해 권역 예방접종센터에 UPS(Uninterrupted Power Supply) 설비를 갖추고 초저온 냉동고와 냉장고 및 냉장 소분실을 마련하여 지역 예방접종센터로 전달할 백신을 소분하였다. 지역 예방접종센터에서 직접 백신을 조제하기도 했다.이번 사태를 통하여 병원약사가 새로운 감염병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대체 불가능한 필수존재임이 입증되었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 황은정 약제부장) 4. 제약바이오협회: 정부는 ‘20년~’22년 3년간 치료제 및 백신 개발에 총 4,281억원의 예산을 편성하고 1798억원을 집행하였다. 그 결과 치료제 5개사 7개 과제, 백신 9개사 12개 과제의 임상 비임상 시험이 지원되었고, 1개의 국산 치료제와 1개의 국산 백신이 개발되었다. 코로나 초기에는 긴급사용승인 절차를 거쳐 아스트라제네카와 얀센 백신이, 이후에는 화이자와 모더나 mRNA 백신 등 백신 4종이, 그리고 팍스로비드, 이부실드 등 치료제 5종이 수입되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엄승인 정책총괄본부장)결론: 이번 심포지엄을 계기로 COVID-19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한 범약계의 노력이 매우 잘 정리되었다. 앞으로 다시 올지 모르는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서 이번의 경험을 좀 더 충실하게 정리한 백서의 발간이 필요해 보인다.
2023-11-22 09:49 |
[기고] <382> 믿음의 성장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 믿음을 갖기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 내 경우에는 그랬다. 나의 죄성(罪性) 때문일 것이다.내가 원주에서 군대 졸병(卒兵)으로 근무하던 1972년, 주일마다 사령부에 있는 군부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가면서 길거리에서 호빵도 사 먹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졸병에게는 괴롭기만 한 내무반 생활을 잠시나나 피할 수 있었다. 그때가 교회 생활의 시작이었다.군 교회에 나간 첫날 우리 부대 고참병이 하는 대표기도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 졸병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나아가 세계 정세 전반에 대한 기도를 하였다. 나는 속으로 “졸병 주제에 오지랖이 너무 넓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그 고참병의 평소의 언행을 잘 아는 나로서는 그의 미사여구(美辭麗句) 기도가 별로 ‘은혜롭게 들리지 않았다.나는 내 믿음이 약해서 기도가 은혜롭게 들리지 않나 보다 생각했다. 그 때부터 나는 교회에 가면 “저도 하나님을 잘 믿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요. 하나님, 제 믿음이 굳건해 주도록 역사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렸다.그 후 34개월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제약회사에 취직했다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서울대 교수가 된 지 11년 후인 1994년, 직장암 3.5기로 대수술을 받은 후 병상에 누워있는데, 문득 군대 시절에 내가 드린 그 기도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내가 처한 지금의 상황이 “제 믿음을 굳건하게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드린 그 기도의 응답인가 싶어 순간 모골(毛骨)이 송연(松煙)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기도가 그냥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는 말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그 때부터 “하나님, 송구하지만 제 믿음은 제가 어떻게 해 볼 테니까 이런 시련을 통해 굳건하게 만들어 주지는 마십시오”라고 기도를 바꾸어 드리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비록 한 웅큼도 되지 않는 믿음이지만 그래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 상태에서 이 고난을 맞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믿지 않는 상황에서였다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몇 년 간에 걸친 방사선 조사와 항암제 주사 등의 투병을 하는 동안 암이 재발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좀 덜 하며 지낼 수 있었다. 특히 불안해서 잠을 못 자는 일이 전혀 없었다.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때 왜 내가 다른 환자들보다 덜 불안해했고 잠을 잘 잤으며, 위문하러 온 사람들을 만나면 앞장서 우스운 소리를 할 수 있었는지 되돌아본다. 그때마다의 결론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믿음이 생기면 과거가 해석된다”고 하신 고 하용조 목사님 말씀이 생각난다.2004년에는 교회가 장로 직분을 주셨다. 무자격자에게 넘치는 직분이었다. 그 덕분에 겉으로나마 교회를 통한 믿음 생활을 충실하게 하게 되었다. 장로 직분은 믿음이 부실한 나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로라고 저절로 믿음이 굳어지지는 않았다. 때때로 무엇을 어떻게 믿는 것이 믿음의 본질일까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많았다.그 때 마침 “성격의 맥을 잡아라” 라는 시리즈 강의를 두 번 들을 수 있었다. 강사는 ‘수많은 별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일정한 궤도를 규칙적으로 돌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별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요즘 방송을 보니 우주의 확장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끝을 영원히 볼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조막만한 나의 도량(度量)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절대자 즉 하나님의 역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사람이 어찌 그 크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믿음을 위한 마지막 카드’로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할렐루야!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믿음이 선명해지는 것 같아 기쁘다.
2023-11-13 17:22 |
[기고] <381>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 80년사 발간
지난 2023년 10월 13일, ‘서울대학교 천연물과학연구소 80년사(이하 천과연 80년사)’ 발간 기념회가 서울대 약대 20동에서 열렸다. 서울대 약학역사관이 발행한 이 책에는 서울대 약대 이상국 학장의 발간사, 천과연 오동찬 소장의 서론에 이어 국립중앙박물관 박주영 학예사(전 서울대 약학역사관 학예사) 등이 쓴 1. 천과연의 현황, 2. 생약연구소 및 3. 천과연 시절의 역사가 나온다. 그 뒤에 도판목록, 역대 소장 및 전현직 교수명단, 연구실 소개, 역대 연구성과 목록 등이 실려 있다. 총 388쪽의 이 책의 가격은 2만원이다. 천과연의 역사는 1939년 12월 27일 출범한 경성제국대학(경성제대)의 부속 생약연구소(이하 생약연구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연구소의 모태(母胎)는 다시 1936년 경기도 개성에 개소(開所)된 경기도립 약용식물연구소와 1938년 개소된 경성제국대학 약초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내에 설립된 연구소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생약연구소에서 많은 일본인과 한국인(조선인)들이 인삼을 비롯한 한약재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생약연구소의 초대 소장은 경성제대 의학부 약리학 제2강좌의 스기하라 노리유키(杉原德行) 교수였다. 그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영국, 미국 등에 유학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26년 경성제대 의학부 교수로 임명된 사람이다.광복 이후에는 오진섭(경성제대 의학부)을 비롯한 우린근(경성약전), 한구동(조선약학교) 등이 바톤을 이어가며 연구소를 정상화시켰다. 생약연구소의 이름은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 생약연구소’로, 1992년 3월에는 ‘서울대학교 천연물과학연구소’로 바뀌었다.2001년 9월 서울대학교의 학제 개편에 따라 천과연의 주관기관이 약학대학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천과연 교수들의 소속기관도 2001년 11 월 1일부로 약학대학 제약학과로 변경되었다.최근 국내에서 약학의 역사와 관련된 책자들이 잇달아 발간되고 있어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혹시 이런 흐름에 서울대 약학역사관과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의 그간의 노력이 일조(一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에 이상국 서울대 약대 학장의 발간사를 다소 가감하여 소개한다. ‘천과연 80년사’를 발간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1939년 12월 27일 개성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를 모태로 출발한 천과연은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천연물/생약 연구의 가장 오래되고 최고 수준의 연구소로서 설립 초기부터 생약을 비롯한 천연물로부터 생리활성 물질의 탐색 및 천연물 신약개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초기 태동기와 광복 및 한국전쟁 등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연구소를 지키고자 노력한 선배 교수님들의 크나큰 헌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천과연은 생약연구소(1946~1991)에서 천연물과학연구소(1992~현재)로 그 이름을 바꾸면서 연구소재를 확장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천과연은 우리나라 약학분야에서 초기의 연구를 선도한 기관입니다. 천과연은 약학 도입 초기에 접하기 힘들었던 최첨단 분석기기를 도입하여 많은 연구자에게 제공하였습니다.또한 WHO 생약피임제 개발연구 중점연구소, UNESCO 동남아지역 천연물화학 연구센터, WHO 전통약물연구협력 기관 등으로 지정 받음으로써 국제적인 지명도를 높여 왔습니다. 한편 신동의약(新東醫藥)개발 주관연구 기관, 천연물신약 연구개발 전문기관으로 지정 받는 등 주요 대형 국가 연구과제를 수행함으로써 국내 최고의 천연물연구 중심기관의 위상을 굳건히 하였습니다.또한 우리 천과연이 보존하고 있는 한약 표본(일명 이시도야 石戶谷勉 콜렉션 포함하여 1만 5,000여 종)은 1930년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수집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 유통되고 있는 한약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표본입니다.천과연은 서울대학교 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향하는 목표가 뚜렷한 연구소로 앞으로도 천연물 관련 연구 및 교육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 나갈 것입니다.
2023-10-26 21:49 |
[기고] <380> ‘사람을 두려워하는 나라, 일본’의 마무리
나는 1979년부터 1982년까지 3년반 동안의 동경대학 유학과 그 후 40년간의 교류를 통하여, 일본 문화는 일본 사람들이 사람(人 = 남)을 두려워하는 바탕 위에 형성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아마 사무라이의 칼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약창춘추’를 통하여 약 15편의 글로 이런 주장을 펴 왔는데, 오늘은 그 내용을 요약해 보고자 한다. 아마추어의 서투른 일본론이라 일부 견강부회(牽强附會)나 침소봉대(針小棒大), 또는 지나친 단순화도 있을 것이지만, 내가 본 일본 사람, 또는 일본문화의 특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1. 사람이 친절하고 말이 곱다 일본어에는 욕이 없다. 서로 만나면 저번에 신세진 것에 대한 감사부터 표한다. 은혜를 모르는 나쁜 사람으로 오해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2. 능동태 대신 수동태나 특수 사역동사 등을 써서 복잡하게 말한다 ‘생각합니다’ 대신 ‘생각됩니다’, ‘찾아뵙겠습니다’ 대신 ‘찾아뵙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다. 여름 휴가 가는 주인이 자기 식당 문에 ‘3일간 쉬게 해 주십시오’라고 쓴 안내문을 붙인다. 내가 주어가 되는 능동적 표현을 하기에는 사람들, 즉 남들이 두렵기 때문이다.3. 식당에서 도시락을 시켜먹고, 쟁반에 담아 내온 음식을 그대로 놓고 먹는다 상대방 음식과 내 음식이 확실히 구분되어야 상대방에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찌개처럼 같이 먹는 음식을 싫어한다. 사무라이가 먹는 찌개에 숟가락을 넣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젓가락도 끝이 상대방을 향하지 않게 옆으로 놓아야 한다. 무가가 될 우려가 있어 쇠젓가락을 쓰지 못하고 나무 젓가락만 쓴다.4. 매우 보수적인 나라가 되었다급격한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다. 가게의 이전이나 확장도 잘 안 한다. 남들을 자극하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화폐에 나오는 인물을 정하는데도 몇 년씩 눈치를 본다. 5. 민주주의가 발달하였다칼이 두렵기 때문에 상대방이 왜소하고 힘이 없어도 존중하고 배려할 수밖에 없었다. 오야붕도 꼬붕을 깔고 앉지 않고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 품는다. 장기판의 졸(卒)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잡히는 순간 상대방의 졸이 되어 나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6. No라고 말하지 못한다 일본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대놓고 거절하기 두려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외교 시 상반되는 2개의 주장을 애드벌룬처럼 띄워 놓고 대세가 기우는 쪽을 선택한다. 미국과 소련 간에 전쟁이 나면 언제 어느 쪽으로 어느 정도 가담하는 것이 일본 국익에 가장 좋을까를 판단하는 것이 일본 수상에게 요구되는 첫번째 덕목이라고 하였다.7. 매뉴얼 공화국이 되었다수시로 범사에 대한 매뉴얼을 업데이트하고, 철저하게 그 매뉴얼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매뉴얼대로 했다면 면책(免責) 된다. 융통성은 금물이다.8. 미리미리 준비한다행사 전에 준비 다 해 놓고 예행연습까지 해 봐야 한다. 실패 시 책임 추궁이 무섭기 때문이다. 2002 한일월드컵 때 한일간의 사전 준비가 현격하게 차이났다.9. 긴장과 질서의 나라가 되었다 명함, 제복, 다도(茶道), 선물 등 범사에 엄격한 질서가 있다. 국익을 위해 입을 다물라 하면 모두 입을 다무는 전체주의적 긴장이 보인다.10. 여러 신(神)을 믿는다.사람에 의지하기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사나 절에 가서 기도할 때, 종을 쳐서 신을 깨워 놓고 기도할 정도로 신도 제대로 믿지 않는다. 일본은 우리와 같이 극동(極東)에 위치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문화 근본이 우리와 매우 다르다. 즉 일본은 사람을 두려워하나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한일 문화의 차이를 낳은 것은 아닐까? 한 나라의 문화를 다른 나라의 잣대로 함부로 우수하거나 열등하다고 평가해선 안된다. 문화는 각 나라마다의 환경과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유익하고 현명한 일이다.
2023-10-19 09:46 |
[기고] <379> 노년을 사는 지혜
오늘은 그 동안 단편적으로 언급해 해 온 ‘노년을 사는 지혜’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마침 이 주제로 교회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 것이 계기가 되었다. 결론은 ‘노인이 빠지기 쉬운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지혜라는 것인데, 그 위험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1. 자기 중심 사고의 위험성 사자와 소가 결혼해서, 소는 사자에게 가장 부드러운 풀을, 사자는 소에게 가장 맛있는 토끼 고기를 갖다 바쳤지만, 서로 이것들을 먹지 않았다. 각자 최선을 다해 상대방을 섬겼지만 이런 반응에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약춘 177). 내 생각에 최선이 상대방에게는 최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2. 선입견의 위험성 스포츠카로 시골길을 달리던 사람이 자기 차를 추월하는 닭을 발견하고, 닭주인에게 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그 닭을 팔라고 했다. 그러나 닭 주인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팔 수 없다고 했다. 차 주인은 닭 주인이 지나친 욕심쟁이라고 생각하며 ‘왜 못 파냐’고 따졌다. 닭 주인은, ‘너무 빨라 잡을 수가 있어야 팔지요’ 했단다 (약춘 359). 다 사정이 있는 것이다. 선입견으로 정죄하지 마라.3. 확신의 위험성산아제한이 진리이던 시절이 있었다. 확신에 찬 주장은 때로는 교만이다. 확신과 주장에 앞서 겸손할 일이다 (약춘 201).4. 솔직함의 위험성결혼해서 60년을 해로(偕老)하는 비결을 묻는 젊은이에게 영감님이 대답했다. 둘이 멕시코로 신혼 여행을 떠났었지. 각자 당나귀를 타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아내를 태운 당나귀가 우습게 봤는지 아내를 떨어뜨리는 거야. 떨어진 아내는 그냥 ‘하나’한 다음 다시 당나귀를 타더군. 그런데 당나귀가 다시 아내를 떨어뜨리는 거야. 이번에도 아내는 그냥 ‘둘’하고는 다시 당나귀를 탔어. 그런데 이놈이 세번째로 아내를 떨어뜨리는 거야. 그러자 아내는 조용히 가방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그 당나귀를 쏴 죽이는 거야. 그래서 내가 놀라서 여보, 그렇다고 쏴 죽이는 건 너무 한 것 아니오? 했지. 그랬더니 아내는 나를 보고 조용히 ‘하나’ 하는 게 아닌가? 그 때부터 나는 아내가 하는 일에 내 의견을 말하지 않게 되었지. 그게 비결이지 뭐 (약춘 61). 부부간에 솔직할 필요가 없다. “여보,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하겠어요? 라고 묻는 아내의 질문에 솔직하게 말하면 끝장이다 (약춘 269).한 영감님이 자신의 차에 아내를 태우고 신호등을 건너다 저쪽에서 오는 차와 충돌 사고를 낼 뻔했다. 상대방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이 바보 쪼다야, 운전 좀 제대로 해” 외쳤다. 이 말을 들은 아내가 “당신 잘 아는 사람이예요? 어쩜 그렇게 당신을 정확하게 알지?” 라고 솔직하게 물었다. 영감님은 속으로 울었단다 (약춘 213).5. 신속한 반응의 위험성 한 아주머니가 약국에 아이를 업고 들어왔다. 아이의 머리를 짚어 본 약사는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하셨어요?” 질책했다. 아주머니는 의아한 얼굴로 “아픈 애는 집에 있는데요” 했다 (약춘 275). 성급하게 입을 연 약사는 그만 머쓱해졌다. 나이 먹어 눈과 귀가 어두워지는 것은 이제 좀 덜 보고 덜 들으라는 의미란다. 장모님 말씀이다. 노인의 입도 좀 느려지면 어떨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입으로 실황 중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6. 비교양(非敎養)의 위험성하나님의 섭리는 내리사랑이다. 자식과 손주는 예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살기도 바쁘다. 치사랑은 없다. 그래서 노인은 혼자 노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그 기술을 교양이라고 한다 (약춘 123).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그 교양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으면 좋겠다 (약춘 281).7. ‘우리’를 좁히는 위험성남을 왕따 시키면 결국 나도 왕따를 당하게 된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우리’ 밖으로 밀어내다 보면 어느 날 나만 좁아진 ‘우리’ 속에 고립된다. 사람은, 특히 노인은 사랑의 언행으로 남을 포용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넓어진 ‘우리’ 안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노년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
2023-10-11 09:38 |
[기고] <378> 약학대학 원로교수 20인의 회고록
2023년 9월 5일,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는 운영위원회를 열어 지난 7월 31일 발간된 ‘한국약학교육의 발자취(동명사)’의 출판을 자축하였다. 이 책에는 402페이지에 걸쳐 20개 약학대학을 정년퇴직한 교수 20분의 회고담 (인터뷰 형식)이 실렸다. 이날 자축연에는 이 사업을 지원한 대한약학회의 홍진태 전회장과 이미옥 현회장도 참석하였다. 나는 분과학회의 명예회장으로서 이 책의 머리에 다음과 같은 축사를 쓴 바 있다.민속박물관에 가 보면 옛날에 흔하게 볼 수 있던 지게, 호미, 삽, 멍에나 등잔 같은 물건들이 ‘선조들의 유물’로까지 대접받아 전시되어 있음에 놀라게 됩니다. 구 세대에게는 눈길을 줄 필요도 없을 정도로 평범했던 이런 물건들이 얼마 지나지 않은 오늘날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지금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물건들도 세월이 흐르면 귀중한 유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제가 학부와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물건들도 이미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교복, 정성분석 실습용 실험상자, 가리방, 철필(鐵筆), 등사기(謄寫機), 프린트물, 청사진(靑寫眞), 논문 발표 용 괘도(卦圖), 슬라이드, 빔 프로젝터, OHP 등 잠시 꼽아봐도 사라진 품목이 수십가지에 이릅니다. 추억이 서린 이런 물품들은 이미 웬만한 박물관에 가서도 만나보기 쉽지 않게 된 것이 현실입니다.약계의 여러 선배님들의 행적도 기록으로 남은 것이 매우 드문 실정입니다. 저는 2020년 고 홍문화 교수님 평전(評傳)을 쓴 바 있는데, 이는 당대 최고의 명사(名士)이셨던 홍교수님이 후학들로부터 완벽(?)하게 잊혀지고 있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에 한 일이었습니다.잘 아시는 대로 약학사분과학회는 2014년 창립된 이래 2022년말까지 총 18회의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2018년부터 매년 ‘약학사회지’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저는 약학사회지의 창간사에서 “우리의 약학사 연구 현황은 연구의 첫 재료가 되는, 과거에 대한 기록과 자료의 집적(集積) 단계에서부터 매우 빈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늘 자료와 기록의 빈약함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둘러보면 우리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안에 대한 기록과 자료 수집을 소홀히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약학사분과학회는 이와 같은 반성에서 탄생된 학회입니다”라고 하며 모든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이처럼 약학사분과학회는 고려나 조선시대 같은 먼 과거의 약학사를 연구함에 앞서 아직 증언을 해 줄 사람이 생존해 있는 최근세 및 현재의 약학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왔습니다. 이 책의 발간도 분과학회의 이러한 철학과 신조(信條)에 따른 것입니다.이 책은 전적으로 약학사분과학회의 2대 회장인 김진웅 명예교수의 기획과 진두지휘로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20개 약학대학의 원로 교수 한 분씩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각 인터뷰를 주선하고 내용을 정리하여 원고를 보내주신 각 대학 학장실의 협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비록 체제의 통일성에 부족함이 없지 않지만, 이 책은 세월이 지날수록 우리나라 근 현대 약학 교육의 역사 자료로써 그 가치를 더해 갈 것입니다. 일견(一見) 평범한 기록도 결코 그 끝이 평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회고록이 지속적으로 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기록 남기기’ 작업이 교육 연구계를 넘어 범(凡)약계로 확산되기를 기원합니다.끝으로 이 책의 발간 취지를 적극 이해하시고 물심 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으신 홍진태 대한약학회 회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 심창구이 날 자축연에서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책이 매우 읽기 쉽고 예쁘게 편집되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염정록 명예교수가 써준 제자(題字)도 책의 품위를 높여주었다. 이 책을 구독하고 싶으신 분은 김진웅 분과학회장에게 연락하시기 바란다.
2023-09-21 13:54 |
[기고] <377> 블루마운틴
일본문부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1979년 4월의 어느 날, 모처럼 커피를 마실까 해서 학교 앞에 있는 낏사텐(喫茶店)이라고 하는 고히쇼프(coffee shop)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연세가 지긋한 영감님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젊은 여성 종업원이 주문을 받는 우리나라와 상황이 달랐다. 나는 ‘고히’를 주문 하였다. 일본에서는 커피를 고히(コヒ)라고 한다. 그런데 주문을 받은 영감님이 ‘알겠습니다’ 하지 않고 그냥 서 있는 것이었다. 내 일본어가 짧던 시절이라 약간 당황한 끝에 알게 된 사실은, 그 집에서 파는 모든 차(茶)들이 다 커피류(類)이기 때문에 손님은 그 중 어떤 커피, 또는 어떤 브랜드의 커피를 원하는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커피와 차 등을 파는 곳을 다방(茶房)이라고 불렀다. 다방이 커피 숍을 거쳐 카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다방에 가면 의례 젊은 여성이 손님에게 와서 차 주문을 받았고, 잠시 후 손님 자리에까지 차를 날라다 주었다. 다방에서는 커피, 모닝 커피(커피 + 계란 노른자), 홍차, 위티(홍차 + 위스키 몇 방울), 계란 반숙, 쌍화차, 특쌍화차(쌍화차 + 계란 노른자) 등을 팔았다. 커피의 종류는 한 가지뿐이었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그냥 ‘커피’ 라고만 주문하면 되었다.다방에서 근무하는 여성을 흔히 레지(lady)라고 불렀고, 카운터에 앉아 있는 CEO 급(?) 여성을 얼굴 마담 또는 가오 마담(가오는 일본말로 얼굴, 顔)이라고 불렀다. 그 땐 왜 그렇게 사장이 흔했는지, 종업원들은 나이가 좀 든 남자 손님을 예외없이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이는 남자 손님들의 허세를 노려 비싼 차(예, 특쌍화차)를 팔고자 하는 상술(商術)의 일환이었다. 더 유능한 레지는 사장님으로 불러 비싼 차를 얻어 마심으로써 다방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었다. 최백호씨의 힛트곡인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노랫말처럼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레지나 마담과 객쩍은 농담을 주고받는 사장님들이 많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이런 다방 밖에 모르던 내가 동경의 커피숍에 가서 ‘커피 주세요’라고 주문한 것은 당연한 귀결(歸結)이다. 낏사텐에서는 실로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팔고 있었다. 홋또(hot coffee), 아이스(iced coffee), 아메리카노 외에도, 한두 번 들어서는 외워지지도 않을 외국어로 된 다양한 브랜드의 원두 커피 들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 가서 ‘커피’를 달라고 했으니, 마치 식당에 가서 “식사 주세요”라고 주문한 꼴이 되었다. 내 주문을 받은 영감님이 잠시 당황했을 만도 하였다.이때 나는 커피 브랜드 이름 하나는 외워둬야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딱 하나 외운 것이 블루마운틴이었다. 그러나 블루마운틴은 제법 비싼 고급품이어서 그후로도 실제로 마셔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래도 어디 가서 좀 아는 척할 필요가 있을 때 이 이름을 언급하면 좀 먹히는 것을 느꼈다. 블루마운틴은 내가 그런 용도로 써먹는 이름이었다.나는 그날 이후 되도록 영감님이 써브하는 낏사텐은 가지 않았다. 분위기 탓인지 웬지 커피 맛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경대학 근처에 젊은 여성이 근무하는 커피숍은 없었다. 그때 일본은 벌써 커피숍이 젊은 여성을 채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고임금 시대에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차선책(次善策)(?)으로 나와 연구실 동료들은 할머니가 써브하는 커피숍에 가 보았다. 다들 그래도 영감님 숍보다는 분위기가 낫다고 하였다. (아무튼 남자들이란….) 하긴 그런 곳도 서너번 밖에 못 가 보았다.1990년초에 일본 최남단 시코쿠(四國)에 있는 도꾸시마(德島)대에 2개월간 객원교수로 가 있을 때, 마침 한달간 연구차 나오신 김종국 교수님과 커피숍을 찾아 다녀 보았다. 지방의 작은 도시인 거기에서도 젊은 여성이 근무하는 커피숍은 없었다. 가끔 낏사텐도 카페도 아닌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가보고 싶을 때가 있다. 나이 탓일 것이다.
2023-08-30 11:40 |
[기고] <376> 원로 군진약사(軍陣藥師)들의 회고담: 군인의 약도 약사에게!
군진(軍陣) 내에서 무자격자에 의해 의약품이 취급되는 사례가 아직도 적지 않은 현실에서, 과거의 군진약사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앞으로 군진 약사 제도의 나아갈 바를 모색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건군(建軍) 이래 국군 장병들이 어떠한 제도 아래에서 약제 서비스를 받아왔으며, 그 과정에서 약사들이 어떤 역할을 해 왔는가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조사 보고된 바가 없다.이에 대한약학회 약학사 분과학회는 우선 원로 군진약사들의 회고를 통하여 군대 내 약사들의 역할에 대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2023년 3월 17일 오전 11시~오후 2시에 지하철 교대역 부근에 있는 채미가라는 한정식 집에서 군진약사 좌담회를 열었다.이 좌담회에는 5명의 원로(元老) 군진약사, 즉 박종호(서울대 10회, 육군 의정병과장, 대령), 김진우(서울대 12회, 해군 약제관, 대위), 유용근(서울대 12회, 공군 약제관, 대위), 이강추(서울대 12회, 육군 약제관, 대위)와 이은방(서울대 13회, 공군 약제관, 중위)님이 참석하였다.좌담회 진행은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회장 김진웅)의 명예회장인 심창구(필자)와 운영위원인 신영호(이상 서울대 25회)가 맡았다. 현장 녹음은 서울대 약학역사관 김유진 학예사가, 이를 나중에 문자로 푸는 작업은 박주영 전 학예사가 담당해 주었다. 관련 자료의 검색은 김진웅 회장과 주승재 편집부위원장이 도와주었다.이번 좌담회 (2023, 3,17) 및 후속 작업을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약제 장교의 역사는 1947년 7월 경성약전을 17회로 졸업한 김시태, 허용, 황정섭 선배님으로부터 시작되어 1948년 6월 (사립)서울약학대학 3년제 전문부를 1회로 졸업한 김두환 님 등으로 이어진다.2. 1953년에는 서울대 약대 남자 졸업생(10회)의 거의 전원인 50명이 약제 장교로 의무 징병(徵兵)되어 비교적 단기간의 교육 후 중위로 임관되어 약제 및 의약품 수급 업무를 담당하였다.3. 약제 장교 제도는 건국 초기 약대 졸업생들의 약무(藥務) 능력을 함양시킴으로써 이들이 전역(戰役) 후 약무 및 약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 특히 1년여의 미국 유학 기회를 얻은 다수의 해군 약제관들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전역 후 국제 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4. 1955년부터 서울대학교 이외의 약학대학으로부터도 약학대학 졸업생이 많이 배출되자 약제 장교를 징병하지 않고 모병(募兵)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약대 졸업생 중 소수의 인원만이 약제 장교(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5. 1961년부터 약대 졸업생들이 신설된 ROTC 장교를 선호(選好)하면서 군대 내 약제 장교의 수가 더욱 줄어들었다. ROTC 장교는 약제 장교에 비해 복무 기간이 짧아 인기가 있었지만 임관 후 약제 장교로 보임(補任)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6. 약학대학 재학 중 또는 졸업 후 입대한 사병(士兵)들도 약제 병과(兵科)를 부여받지 못하는 반면에 약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병들이 약제 업무를 담당하는 등 군대 내 약제 업무가 무자격자에 의해 수행되는 난맥상(亂脈相)이 점차 문제로 드러났다. 그러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간인 약사를 채용하여 약제 업무를 담당하게 하는 6급 약무직 군무원(軍務員) 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군무원 지원자가 부족하자 2023년부터 국방부는 군무원 직급(職級)을 5급으로 상향하고 31명의 군무원 공채 공고를 내기에 이르렀다.약사에 의한 의약품 관리와 조제는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 권리이다. 국군 장병들에 대한 의약품의 조제 및 관리도 전문가인 약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 좌담회를 통하여 군진약사의 역할이 매우 엄중하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아무쪼록 이 좌담회를 계기로 국군 장병들에 대한 약제 및 관리 써비스의 질이 획기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 군진약사 제도가 마련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3-08-17 07:40 |
[기고] <375> AAPS 펠로우 – 작은 깨달음 (26)
나는 3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20개의 국제 학술대회를 조직하거나 좌장을 맡았고, Pharmaceutical Research, J. Pharm. Sci., DMPK, Biopharm. & Drug Dispos. 를 포함한 12개의 국내외 학술지의 편집위원(editorial board member)으로 활동하였다. 처음으로 편집위원이 되었을 경우, 뭐나 된 것 같아 스스로 대견해했던 추억이 새롭다. 이는 양적으로나마 제법 많은 수의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나는 업적에 비해 상복(賞福)도 많았다. 40개에 가까운 상을 받았는데, 그중 2005년 11월 6일, 미국 Nashiville(Tennessee)에서 열린 미국약학회(AAPS) 총회에서 약물대사 및 동태학 분야의 펠로우(fellow,) 상을 수상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내가 식약청장을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와 있던 2005년 2월, 도쿄대학 유학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온 후배인 도호쿠(東北)대학의 테라사키 교수와 홋카이도(北海道)대학의 하라시마 교수가 우리 부부를 초청하였다. 두 대학에서 세미나가 끝난 후, 두 사람은 각각 우리에게 삿포로와 센다이를 구경시켜 주었다. 특히 센다이(仙台)에서 마츠시마(松島)만을 유람한 일, 그리고 센다이(仙台) 아키호(秋保) 온천 지역에 있는 기요미즈 호텔에서 눈 내리는 날 최고급 노천탕을 즐긴 일이 기억에 남는다.그때 테라사키 교수가 내게 ‘AAPS' 펠로우를 신청해 보라’고 권유하였다. 내가 생각도 못 해 본 일이라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내가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으니 꼭 신청하라고 몇 번에 걸쳐 강권하였다. 그러면서 자기가 AAPS 펠로우를 신청할 때 작성한 컴퓨터 파일을 참고하라며 주었다. 그러면서 좋은 논문 2~3 편을 쓰는 정성으로 신청서를 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나중에 파일을 열어보니, 그가 발표한 각종 논문 및 학회 발표 사항, 그리고 그것들이 가져온 반향 등이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예컨대 언제 누구를 대상으로 발표한 강연에 몇 명의 청중이 모였으며 그들의 반응이 어땠는지까지가 빠짐없이 기술되어 있었다.신청서 작성의 노하우를 깨달은 나는 곧 작업에 착수하였다. 고맙게도 내 연구실의 포닥인 C 박사(현 D대 약대 교수)가 오랜 기간에 걸쳐 이 작업을 도와주었다. 이로써 내 일생의 연구 관련 활동을 상세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신청서에는 AAPS 펠로우 세 사람의 추천서를 첨부하게 되어 있는데, 도쿄대학의 스기야마 교수, 호시(Hoshi, 星) 약과대학의 나가이 교수, 교토대학의 하시다 교수가 추천서를 써 주었다. 이 분들은 당시 일본 약제학계의 3대 거목이었다. 이 분들이 추천서를 쓰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의례적인 추천서가 아니라 내 연구 전체를 면밀히 검토하여 주요 연구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을 하는 장문(長文)의 추천서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들 서류를 총괄하여 AAPS에 신청하는 글을 쓰는 일은 미시간(Michigan)대학교 약대의 아미돈(G. Amidon) 교수가 해 주었다.2년 가까이 이와 같은 작업을 한 끝에 마침내 학회의 심사를 통과하였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로써 나는 성균관대 약대의 L 교수와 서울대의 K 교수에 이어 국내 세번째로 AAPS의 펠로우가 되었다. 미국 인맥이 부족한 내가 미국약학회의 펠로우로 선정된 일은 자다가 생각해도 대견한 일이었다. 이 상을 받을 때는 아내도 동행하였다.한국과학기술한림원(KAST)에는 1998.11에 정회원으로 피촉되었고, 2005년 11에 종신회원이 되었다. AAPS의 펠로우가 되기 훨씬 전이었다. 2008. 10에는 일본약물동태학회(JSSX)의 펠로우로도 선정되었다. 참, 내가 받은 40개의 상에는 시골 초등학교 졸업시에 받은 민의원(民議員)상과 약대 수석 입학으로 받은 총장상도 들어있다. 아득한 추억 속에 들어 있는 이런 상들이 내 인생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는지 가끔 생각해 본다.
2023-07-26 10:17 |
[기고] <374> 김종국 교수님 1주기
지난 7월 2일 오후 3시, 삼성역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국화룸에서 고 김종국 교수님의 1주기 추모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도전의 승부사’라는 김교수님의 유고 자서전의 발간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고인의 제자들과 지인들로 성황(?)을 이룬 이 모임은, 결국 고인의 삶의 성공을 증명해 주는 자리가 되었다.600 페이지가 넘는 자서전 중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고인이 평소에 써 놓으셨던 글들이었고 나머지는 문하생들의 회고담이었다. 책의 머리말은 ‘후손들 보아라’로 시작하는 ‘나의 삶, 나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오랫동안 편찮으신 상태에서 후손들에게 꼭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음을 전하는 글이었다. 나이 탓일까? 교수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자서전에는 교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인천에서 보낸 어린 시절, 한국전쟁, 대학생 시절, 미국 유학 및 서울대 약대 교수 시절 전반에 걸친 경험과 관찰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개인사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천의 역사 및 서울대 약대 역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인천연구원’에 참고 자료로 보내도록 조치하였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약학역사관(관장, 주승재 교수)’의 출판사업의 일환으로 발간되었다. 책의 안쪽 날개에는 김교수님의 정년퇴임 기념식 동영상 QR코드를 실음으로써 누구든지 휴대폰으로 김교수님의 육성과 동영상을 듣고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내 의견에 따른 것인데, 사모님도 매우 좋아하셔서 안도하였다.이날 행사는 한국약제학회에 1억원을 기부하겠다는 아드님의 경과 보고에 이어 문하생들의 회고담이 있었고, 뒤이어 약계 인사들의 추모 순서가 있었다.나도 잠시 기회를 얻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세월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무섭게 세월을 빨아들여 벌써 김교수님이 작고하신 지 1년이 지났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나신 김교수님의 위대한 발자취가 단지 과거라는 이름 하나로 추억 속에 잠기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허망하다.교수님과 내 연구실은 약대 21동 위아래 층에 위치하고 있어서 교수님은 빈번하게 내 연구실에 오셔서 담배를 피고 가시곤 했다. 때로는 “교수님, 이제 그만 가 주세요. 저 바빠요” 할 정도로 자주 오셨다. 또 교수님과 나는 약제학과 물리약학전공 대학원생들의 ‘약학연습’이라는 세미나 강의를 공동으로 지도하였는데, 교수님은 과학 현상을 더 할 나위 없이 쉽게 설명하셨다.예컨대 “마이크로스피어(microsphere)? 그거 어렵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다. 냄비에 물을 끓여 놓고 계란을 깨 흰자위를 집어넣고 젓가락으로 막 저어주면 생기는 것이 마이크로스피어다”라고 일갈하셨다. 그 간명한 설명에 나와 모든 학생들은 감탄하곤 하였다.내가 모교 교수가 된 1983년 이후 일본 동경대학에서 본 것을 참고하여 약제학실과 물리약학실 사이에 ‘제물정기전(劑物定期戰)’이라는 체육대회를 창설하였다. 처음에는 봄 가을로 개최하다가 나중에는 가을에만 개최하였다. 이 정기전은 약제학실과 물리약학실 대학원생은 물론 졸업생까지 전부 참석하는 일종의 홈커밍데이의 성격을 띄었다. 혹자는 나와 김교수님이 모두 제물포(濟物浦) 고등학교 출신 (각 10회와 5회 졸업)이라 이런 이름을 붙였나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리약학 출신들은 제물전이라는 용어 대신 물제전(物劑戰)이라는 이름을 애용하였는데, 이는 마치 연고전과 고연전이라는 명칭 싸움 같은 것이었다.이 제물전에서는 하루 종일 주로 축구, 농구, 배구, 달리기, 탁구 등의 게임을 했는데, 달리기와 탁구 종목에서만큼은 내가 늘 김교수님을 이길 수 있었다. 축구 등에서 전반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던 약제학실 입장에서는 김교수님은 고마우신 적수(敵手)이셨다. 시합 후 실험실이나 야외에서 돼지 고기 바비큐를 함께 즐기던 추억도 생생하다. 당시 이 체육대회는 약대의 다른 군소 전공 대학원생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끝으로 사모님이 강건하게 잘 지내고 계심에 감사드린다고 인사하며 회고담을 마쳤다.김교수님의 영면을 간절히 기원한다.
2023-07-13 10:17 |
[기고] <373> 식약청으로의 외출 - 작은 깨달음 (25)
2003년 2월 어느 날 나는 자곡동 집에서 설사약을 먹고 한창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1994년 직장암 수술 후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장(腸) 내시경 검사를 위한 준비였다.그때 청와대라고 하는 곳에서 전화가 왔다. 식품의약품안전청장(식약청장)을 맡을 용의가 있냐는 내용이었다. 놀란 나는 우선 내가 공직을 맡기엔 건강이 부실하다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잘 생각해 보라고 하기에 ‘내일 다시 통화하자’고 대답하였다.다음 날 D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더니 다행히 장(腸)에 이상은 없었다. 그래서 바로 천문우 학장님을 찾아 뵙고 어찌하는 것이 좋겠나 상의 드렸다. 학장님은 망설임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이어서 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님을 찾아 뵀다. 나는 목사님은 당연히 사양하라고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목사님도 한 칼에 “하세요”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청와대에서 두 번째 전화가 왔을 때 나는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사실 나는 정부에서 나같은 문외한(門外漢)을 공직(公職)으로 부르는 데에 매우 놀랐다. 나와 식약청 업무의 관련성은, 생동성(生動性)시험에 대한 약간의 전문성, 대한약사회 약사연수교육위원장(1992년) 경력, 한약분쟁(韓-藥 紛爭) 참여(1993년 3월 KBS ‘여의도 법정’ 출연 등) 경력, ‘의약분업 실시를 위한 의-약-정(醫藥政) 협상’(2000년 10월)에 약계 9인 대표 중 1인으로 참여한 경력 정도에 불과했다.나는 공직을 희망해 본 적도 없었다. 교수가 현안에 너무 많이 참여하면 바보요, 너무 피하면 비겁한 사람이다. 그런 내가 위에 언급한 몇 가지 현안에 참여하게 된 것은 실은 주변의 요청을 거절 못하는 내 유약한 성격의 탓이지, 공직으로의 외도(外道) 목표를 갖고 있어서가 절대 아니었다.혹자(或者)는 나를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멤버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비슷한 모임에도 기웃거려 본 적이 없다. 암 수술을 받고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인데 어찌 딴 생각을 했겠는가?아무튼 이런 경과를 거쳐 2003년 3월 3일부터 제5대 식약청장으로 봉직하게 되었다. 식약청 사상 최초로 내부에서 차장을 임명한 일, 만두소 사건, 감기약 사건 등을 거치면서 특히 복지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당시는 규제철폐(規制撤廢)가 만능의 열쇠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잘 정비된 규제는 기차의 철로처럼 관련 산업을 진흥시키는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나는 식약청이 정부 부서 중 최초로 ‘전자정부(電子政府) 사업’에 도전하도록 독려하였다. 전자정부야 말로 식약청 업무의 질을 업그레이드하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의 결과, 예컨대 전국 각지에서 수입 유통되고 있는 식품 등의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IMF 와중에 탄생한 식약청은 아직 인큐베이터에 들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호소하여 행정안전부로부터 적지 않은 수의 증원을 받아냈고, 식약청을 오송 단지로 이전하여 부지를 넓게 잡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또 1973년에 없어진 ‘약의 날’을 30년 만인 2003년에 제17회 약의 날로 부활시켰다. 이 ‘약의 날’은 2021년에 ‘국가기념일’로 승격되었는데, 나는 ‘약의 날’을 부활시킨 공로로 2021년 약의 날 (11.18)에 이 행사를 주관하는 7개 약계 단체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내가 무엇보다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식약청 재임 중 어떤 비굴한 결정이나 언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총리 주재 회의에서도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은 해프닝(?)도 있었다. 2004년 9월 1일, 1년 반 동안의 식약청 생활을 마치고 학교로 복귀하였다.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평안한 가운데 대학원 학생들과 연구 생활을 재개하였다. 민망하게도 그해 12월에는 온누리교회의 장로가 되었다.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지만, 식약청장과 장로는 정말 그런 사건들이었다.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배할 따름이다.
2023-06-28 09:32 |
[기고] <372> 가족의 수난사 - 작은 깨달음 (24)
아내와 두 아들의 고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내가 수술을 받기 7년 전인 1987년, 기침을 자주 하던 아내는 서울대병원에서 폐기관지가 작은 돌들에 의해 막혀 폐포(肺胞)가 쭈그러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외과 의사는 방치하면 폐암으로 진행될 우려가 크니 쭈그러진 폐 부위를 절제하자고 했다.그러나 기관지내과의 김영환 교수는 기관지 내시경을 통해 돌을 빼는 시도를 해보자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내시경을 사용하여 일부 돌을 빼낼 수 있었다. 기적이었다.신기한 것은 내시경 전날밤 아내의 꿈에 예수님 같은 분이 나타나 아내의 가슴 위에 손을 펴며 이제 다 낳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님은 우리가 일본에서 살던 집의 지점토(紙粘土) 벽지 부스러기와 곰팡이가 기관지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돌을 형성한 것 같다고 추정하였다.1년 후 X레이 결과 폐포는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폐포가 펴지지 않았으면 폐를 절제해야 할 상황이었다. 김 교수님은 아내 생명의 은인이다. 만약에 외과의사의 의견대로 폐를 절제했더라면 아내는 십중팔구 수술 후유증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두 아들은 나의 일본 유학 시절에 천식으로 큰 고생을 하다가, 내가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1982년 이후 많이 좋아졌었다. 그런데 1988년 퍼듀대학에 함께 가 있을 때 초등학생이던 큰 아이가 어쩌다 포이즌 아이비와 접촉한 후 아토피 증상이 심해졌다. 고등학교 때는 옴 몸이 가려워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아이가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그 상황 속에서도 큰 아이는 1995년에 서울대 약대에 합격하였다. 내가 1994년 수술 이후 암 투병을 하는 와중에, 더구나 잠시도 긁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가려움 속에서 이뤄낸 결과였다.그 애는 학부 졸업 후 약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스테로이드 과용으로 인해 오른쪽 눈의 망막이 박리(剝離)되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서울대 병원 안과에 4개월간 입원하여 망막을 붙이는 여러 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실패하여 온 가족이 깊은 낙심에 빠지게 되었다.그 때 미국 FDA에 근무하는 대학 동기이자 믿음의 친구인 박찬효 박사의 주선으로 2000년 12월 2일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에 가서 망막을 붙이는 수술을 받았다. 결과는 대성공으로 이로써 한쪽 눈 실명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우리 아이의 망막을 위해 함께 기도해준 서울대 안과 최장기 입원 환자(권사) 한 분도 우리 아이의 회복 소식을 듣고 존스 홉킨스 병원으로 달려와 망막을 붙였다. 기도의 위력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시력을 회복한 큰 아이는 2005년에 결혼하여 예쁜 딸 셋을 낳고, 현재 인천에 신설된 모 약대에 교수로 근무 중이다. 그가 스스로 자동차 운전을 하고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제야 가장이 된 것 같다’고 기뻐하였다.그는 뉴욕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내 대학 동기 김용진 약사를 찾아간 일도 신기한 일이었다. 김약사의 추천으로 홍삼 엑스를 대량으로 장기간 복용한 결과 얼마 후 그는 그 지긋지긋하던 아토피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명의 내 친구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 은혜로 아토피와 망막 박리라는 겹 고난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형보다 가족의 관심을 덜 받을 수밖에 없었던 환경 속에서 둘째 아들도 1997년 고려대학교에 합격하였다. 졸업 후 입소한 훈련소에서는 천식이 발견되어 병역면제 판정을 받고 사흘만에 귀가하였다. 그러나 그때 이회창 대선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가 이슈가 되자 병무청으로부터 재검(再檢) 통지를 받게 되었다.이에 그는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공부에 몰입하여 자격증을 딴 후 병역 특례 게임 회사에 취직함으로써 대체복무의 길을 선택한 하였다. 이 회사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그를 게임회사를 창업하게 만들었는데, 이 회사는 초기의 엄청난 실패를 잘 극복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에게 적지 않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극복하게 역사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린다.
2023-06-23 02: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