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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8> 퍼듀대학 방문 및 교회 출석 - 작은 깨달음 (20)
나는 일본에서 공부할 때 약물체내동태학과 생물약제학을 주로 공부했다. 교수가 된 다음에는 이들과 함께 약제학의 3번째 새 물결인 약물송달학(drug delivery system, DDS)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DDS의 재료가 되는 폴리머(polymer)에 대한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나아가 지구촌의 대표 국가인 미국을 경험하고도 싶었다. 그래서 ‘88 서울올림픽’이 끝나자 마자 당시 우리 약대의 고 유병설 학장님의 추천을 받아 미국 인디애나주 West Lafayette시에 있는 퍼듀대(Purdue) 약대의 박기남 교수 연구실을 연구 차 방문하게 되었다. 서울대 약대 4년 후배인 박교수는 폴리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다.아내와 두 아들이 나와 동행하였다. 부모님을 모시며 두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있던 우리 부부에게 장기간에 걸친 미국 여행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나는 이때 J. Pharm. Sci. 에 논문을 실었던 제자 J 군도 데리고 가고 싶었다. J군은 동아제약 연구소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에게 최신의 폴리머 과학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회사나 그에게 바람직할 것 같았다. 그러나 회사가 J 군의 유학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회사 사정이 여의(如意)치 않았겠지만 아쉬운 일이었다.퍼듀대학에 가 있는 동안, 주중(週中)에는 연구실에 나가 실험을 하고 주말에는 미국 각지로 여행을 다녔다. 실험으로는 효소에 의해 소화되는 팽윤성 하이드로젤(enzyme-digestable swelling hydrogel) 정제를 만들었는데, 내 능력 부족으로 생각만큼 연구가 잘 진전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약 10개월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1989년 시카고에서 열린 CRS(Controlled Release Society) 학회의 프로시딩에 게재하고 구두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연구의 상세한 내용을 정식 논문으로 학회지에 발표하지는 못하였는데, 이 점은 나를 초청해 준 박 교수에게 지금까지 미안하게 생각한다.시카고 학회에 참석해 보니 폴리머 화학자들은 약학자들과 달리 폴리머의 안전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안전성은 폴리머의 기능성이 확인된 다음에 고려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새로운 폴리머의 다양한 기능을 발견해 내고 그 기전을 규명하는 ‘재미(why)’를 연구의 주된 동기로 삼았다. 그러나 나는 인체에 대한 안전성이 부족하여 응용성 (how to apply)이 없는 폴리머에는 애초부터 큰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물론 ‘재미’는 시대를 불문하고 순수과학자(기초과학자)들의 변함없는 연구 동력이다. 그러나 응용과학자마저 ‘재미’에 빠져 ‘결국에는 사용할 수 없는 물질’ 연구에 몰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응용과학자에게는 ‘응용성’이 가장 중요한 연구의 동기인데, DDS용 폴리머의 응용성은 인체에 대한 안전성이 첫번째 관문이 된다. 그래서 나는 제자들에게 늘 안전성을 최우선시 하는 약학 고유의 시각으로 폴리머를 바라봐야 한다고 가르쳤다. 소금(약학자)이 짠 맛(안전성 중시 태도)을 잃으면 무엇에 쓰리요!우리 부부는 미국에 가기 전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퍼듀대학에 가 있는 동안, 아내더러 퍼듀 한인 교회에 나가 보자고 했더니 의외로 순순히 따라주었다. 거기에서 장로회신학대학교(장신대) 학장을 정년퇴직하시고 첫 목회지로 그 교회에 오신 고 박창환 목사님을 만났다. 여러 면에서 훌륭하신 박 목사님을 만나 세례를 받고 믿음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우리 부부에게 크나큰 축복의 시작이었다.그 교회에서 고 김영길 총장님을 비롯하여 N 교수, S 교수 등 한동대 교수님들을 많이 만났는데, 신기하게도 그 분들은 모두 온누리 교회 교인들이었다. 그분들과의 인연으로 1989년 귀국 후 우리 부부는 서빙고에 있는 ‘온누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2004년에 장로가 되었다. 퍼듀대학을 거쳐 온누리 교회로 내 인생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드린다.
2023-04-12 0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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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7> 더블 피크 현상의 발견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19
이번에는 약물을 경구투여(經口投與)하였을 때의 혈중농도 프로필에 2개의 피크(peak)가 나타나는 현상에 관해 연구한 내용을 소개한다.
나는 1988년에 수행한 생동성시험 결과로부터 라니티딘 정제(tablet)를 복용한 지원자의 혈장 중 약물농도-시간 그래프에 2개의 피크가 보이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기존의 약물동태학 이론에 따르면 1개의 피크만 보여야 한다. 실제로 그동안의 논문에는 1개의 패턴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실험에서 나타난 피크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2개였다. 너무나 놀라워서 기존의 문헌들을 면밀하게 살펴보니 예전 논문에도 이런 더블 피크(double peak)를 보이는 사례들이 적잖이 있었다. 다만 그 현상이 현저하지 않아 연구자들이 주목하지 못한 것 같았다.
더블 피크의 패턴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달랐다. 어떤 사람에서는 첫번째 피크가 높았고, 어떤 사람에서는 2번째 피크가 더 높은 식으로 사람에 따라 패턴이 매우 달랐다. 즉 개체간(inter-individual) 변동이 매우 컸다. 그러나 같은 사람에게 1주일 후에 다시 같은 약을 투여했을 때의 피크 패턴은 놀라울 정도로 1주일 전과 같았다. 즉 개체내(intra-individual) 변동은 매우 작았다. 마치 사람마다 자기 고유의 지문(指紋)이 있듯이, 사람마다 고유한 혈중 농도 패턴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1) 경구투여한 라니티딘의 혈중 농도 패턴에 더블피크 현상이 나타나며, (2) 그 패턴은 사람마다 차이가 크지만 1주일 간격을 두고 재 시험하였을 때 나타나는 패턴은 지문(指紋)처럼 사람마다 고유하다는 사실을 학계 최초로 국제저널[J. Pharm. Sci. 78(12)(1989), 990-994 (그림 참조)]에 보고하였다.
더블 피크 현상에 매료된 나는 그 후 S, J, K, L(1990~1992) 등의 석사 논문 연구를 통해 그 기전 규명에 도전하였다. 나는 경구투여시 위액으로 용출된 약물은 2회로 나뉘어 흡수 부위인 소장 상부로 내려가서 흡수되기 때문에 혈중 농도 피크가 2개로 나타나는 것이란 가설을 세웠다. 즉 위내용배출(胃內容排出)의 2상성(二相性) 때문에 더블 피크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이 가설은 쥐의 십이지장에 약물을 두 번으로 나누어 주입하면 2개의 피크가 나타남을 보임으로써 그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러면 왜 약물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혈중 약물 농도 곡선에 피크가 1개 또는 2개로 다르게 나타나는가? 이 의문에 대해서는, 2개의 피크가 나타나는 것이 원칙이지만 각 사람에서의 약물의 흡수속도정수(ka)와 소실속도정수(ke)의 크기에 따라 피크가 1개로 보이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가설을 제안하였다. 이 가설은 ka와 ke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시뮬레이션 연구를 통해 그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 가설, 즉 ‘특수한 약물이나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면, 경구투여된 약물의 혈중농도 패턴은 원칙적으로 피크가 1개가 아니라 2개가 나타난다’는 가설은 약물동태학의 기본 전제를 바꾸어야 할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것이다. 또한 ‘혈중농도 패턴이 사람에 따라 고유하다’는 사실도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다.
나는 이와 관련된 일련의 연구 결과를 몇 편의 논문으로 학술지에 발표하고, 또 1992년 미국 캔자스대학 주최로 열린 제25회 Higuchi 심포지엄에서 구두(口頭) 발표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마음에 흡족할 정도의 논문을 쓰지 못했다. 후학(後學) 중 누군가가 이 가설을 멋지게 정리해 논문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3-03-30 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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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6>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의 도입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18
이번에는 석사 과정 학생에게 국내 최초로 ‘생물학적동등성시험(生物學的同等性試驗, bioequivalence test, 이하 생동성시험)’을 연구하게 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1986년, 나와 대학 동기로 일동제약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 H가 나의 석사 과정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나는 그에게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미래 동향에 대비하기 위하여 생동성 연구를 하도록 하였다.
이 연구는 피험자(volunteer)들을 어떻게 모집 선정하고, 식사는 어떻게 제공하고 채혈은 어떻게 하며 비용과 시험 공간은 얼마가 필요한지 등을 조사하는 일종의 파일럿 연구였다. 이때 일동제약에서 만드는 ‘큐란’ [라니티딘(ranitidine) 함유 정제]을 시험약(test drug)으로, GSK의 ‘잔탁(Zantac)’을 대조약(reference drug)으로 선정하여, 두 약을 1주일 간격으로 교차 투여 (2x2 cross-over)한 후 HPLC로 분석한 라니티딘의 혈중 농도를 바탕으로 두 약이 생물학적으로 동등(同等)한지 여부를 판정하였다. 연구는 2년 안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H는 1988년 ‘라니티딘의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이라는 제목으로 약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내가 생동성시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약대 교수 휴게실에 배달되고 있는 일본공정서협회(日本公正書協會) 발간의 『의약품연구(醫藥品硏究) 』라는 잡지를 통해서였다. 이 잡지에는 일본의 생동성시험에 대한 해설이 연재되고 있었는데, 나는 머지않아 이 시험이 우리나라에 도입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측하고 미리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시험에서 약물 투여와 혈중농도 분석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것은 두 약의 혈중농도 데이터가 ‘동등’한지 여부를 통계학적으로 판정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두 약이 “통계학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판정은 Student’s t-test를 사용해서 쉽게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동등’하다는 판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두 약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바로 ‘동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선 판정에 필요한 피험자의 수가 약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몇 사람에게 약을 투여해 보면 동등성 여부를 알 수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그건 시험을 해 보아야 압니다”라고 대답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나중에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에서 생동성 시험 규정을 만들 때에도 이 통계 개념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나는 이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에 생동성시험을 도입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이 연구는 1989년부터 우리나라에서 제네릭 의약품의 승인 신청 시 생동성시험 자료를 제출하도록 의무화하는 데 견인차(牽引車) 노릇을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험 데이터를 가지고도 통계학적으로 두 약의 동등성 여부를 판정하기는 제법 복잡하였다. 그래서 시험 데이터만 입력하면 동등성 여부의 판정은 물론 최종보고서까지 자동으로 프린트 아웃되는 『생물학적동등성 판정 통계 프로그램(K-BE test) 』을 개발하여, 1998년과 2002년에 프로그램 등록을 하였다. 이 개발은 컴퓨터를 잘 아는 대학원생인 S와 L가 주도하였다.
이 통계 판정 프로그램의 개념도 『의약품연구』에 나와 있어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이 K-BE test를 식약청에 제공하여 우리나라의 생동성시험 판정을 위한 공식 통계처리 프로그램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생동성시험의 기반을 대폭 넓힐 수 있도록 이 프로그램을 전국의 모든 생동성시험 연구자에게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아마 그동안 국내에서 수행된 수많은 생동성시험 중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은 연구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와 우리 연구팀이 국내 제약산업의 발전에 작은 기여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나는 이 연구를 계기로 ‘생동성시험의 권위자’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평판을 얻었는데, 이 평판이 내가 2003년 식약청장으로 부름 받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2023-03-15 0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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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5> 석사과정 논문 지도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17
나는 30년간(1983-2013)의 재직 기간 동안 118명의 석사를 지도하면서 되도록 그들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투고하게 하였다. 그들 중 제일 먼저 권위 있는 국제 학술지 (J. Pharm. Sci. 76(1987, 784-787))에 석사 학위 논문을 게재한 사람은 J군이었다.
그의 연구내용은 사람이 테오필린 정제를 복용하였을 때의 타액(唾液) 중 약물 농도를, 간단히 이 정제의 시험관내 (in vitro) 용출(溶出, dissolution) 속도를 측정함으로써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선행(先行) 연구에 따르면 타액 중 농도는 혈중 농도를 반영하기 때문에, 결국 이 약에 대한 간단한 in vitro 시험으로부터 이 약의 in vivo 혈중농도 프로필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워낙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보지 못하던 시절이라 대학원생들과 함께 매우 기뻐했던 추억이 생생하다.
그 때에는 논문의 본문은 타이프라이터로 치고, 그래프는 일일이 손으로 그린 다음, 각 3부씩을 딱딱한 종이 사이에 끼워서 항공 등기 우편으로 학술지의 편집위원장에게 보내야 했다. 당시에는 이메일 투고가 없었다. 한 두 달을 초조하게 기다리면 마침내 Fedex로 회신 편지가 온다. 그 때 봉투를 뜯어 심사 결과를 알리는 편지를 읽을 때의 두근거림이란! 오랫동안 논문을 투고하다 보니 다 읽지 않아도 편지가 ‘I regret.’으로 시작되면 거절된 것이고, ‘I am pleased’로 시작하면 채택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운 좋게 채택(accept)되었음을 확인하면 야호!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채택보다는 거절(reject)되었다고 써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거절되었을 때의 좌절감은 상당 기간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채택이나 거절보다는 ‘첨부한 지적사항을 반영하여 수정(revision)해서 다시 보내주면 재고(再考)하겠다’는 회신을 받는 경우가 제일 많았는데, 이런 회신만 받아도 희망을 가질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내가 지도한 석사과정 학생들의 연구 논문의 키워드들을 보면, 생체내이용률, 소장 흡수, 지속성 방출, 약물동태, 제어방출, 경구 DDS, 용량의존적 체내동태, 담즙배설, 직장(直腸)흡수, 경비(經鼻)흡수, 신장해(腎障害), 간장해, 생물학적동등성시험, 한방약, 용출, 타액 중 약물농도, 지속성 정제, 인터페론, 음주와 약물동태, 뇌 중 약물농도, 신장 배설, 인터루킨, 프리포뮬레이숀, 다중(多重)피크 현상, 포뮬레이션, aucubin, 이온토포레시스, 경피투여, 부위 특이적 흡수, 팽윤하이드로젤, 프로리포솜, 가용화, 간 타게팅, asialofetuin, 리포솜, 담즙산, 간 마이크로좀, 간담배설, 마이크로캡슐, PVP-하이드로젤, 유기양이온의 간수송, 유리(遊離)간세포, 모세담관막 소포체, 쇄자연막 소포체, 혼합미셀, 패치, 프로드럭, BBB관문의 개방, 하이드로코티손의 피부 흡수, gliclazide의 가용화, 하이드로젤 연고, 간세포 배양계, 연어 칼시토닌 함유 프로리포솜, 위장관운동 촉진제, P450, P-gp, Caco-2 세포단층막, LLC-PK1 세포단층막, 호르몬 disrupter의 영향, berberin, P-gp, LPS 유발 급성 염증 모델, rMRP2, 유기양이온수송체(OCT), oct2, rOCT1, YH439, 실험적 콜레스타시스, SNEDDS, GFP tagging, oat3, 이온 페어 형성, 고체 분산, 장관운동 촉진, 항 비만 효과, BCRP, efflux, influx, 키토산 마이크로스피어, floxacin의 기관지 송달, 지실, ghrelin 수용체, motilin 수용체, 마크로파지 송달, gemifloxacin, 아미노산 수송체, naringin 등으로 매우 다양하였다.
연구 주제가 이처럼 다양했다는 것은 실은 내 지도가 몇 가지 주제에 집중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 지도 능력의 한계 때문에 깊이 있는 지도를 받지 못한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2023-02-22 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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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4> 박사 논문 지도 – 삶속의 작은 깨달음 16
내 이름으로 박사 학위를 준 학생은 총 21명이다. 첫 졸업생은 조교수 발령을 받은 지 12년 만인 1995년에 학위를 준 H이다. 그는 유기 양이온의 간담(肝膽) 수송 기전을 연구해 Drug Met. & Dispos. 27(1999)에 발표했다. 그 후 나는 약물의 체내동태 기전(pharmacokinetics)을 분자 레벨에서 밝히는 연구를 계속하였다. H는 나중에 도쿄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박사후연구를 한 다음, BMS사에서 신약개발 관련 연구를 한 후 귀국해 국내 유명 제약회사에서 사장으로 활약 중이다.
1996년에는 L이 EGF의 경피(經皮) 흡수를 연구해 학위를 받았다. 1998년에는 K 교수님의 제자인 Y와, L교수님의 제자인 C와 K가 부분적으로 내 지도를 받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K(L 교수님 학생)와 S, L, J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 K는 록소프로펜의 인체 내 약물동태를, S는 관절염 치료를 위한 방사성 동위원소 화합물의 제조를, L은 시클로스포린 A의 약물동태와 P-gp와의 관련성을, J는 니코틴의 경비(經鼻) 흡수를 통한 혈중 농도의 지속화 방안을 연구했다. 2001년에는 S, H 등이 유기 양이온의 막 수송기전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2001년에는 L이 위장관운동 촉진제가 라니티딘의 위 장관 흡수에 미치는 영향을, 또 중국 국적의 동포인 L이 신약후보물질인 YH1885의 소장상피세포 투과 기전을 연구해 학위를 받았다. 2003년에는 S가 칼시토닌의 소장흡수를, L이 영양결핍이 간수송체의 발현에 미치는 영향을, 2005년에는 C가 4급암모늄인 TBuMA의 모세담관막 투과 기전을, 2006년에는 K가 TBuMA의 소장흡수를, 2008년에는 H가 오플록사신함유 마이크로스피어를 이용한 폐 마이크로파지 송달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2009년에는 J가 고지혈증에서 간 Oct1의 발현 감소에 의한 메트포민의항당뇨작용 감소 기전을, K(중국동포)가 신장해시 Oat1 및 Bcrp의 발현 감소 기전을, L이 폐결핵 시 ABC 및 SLC 수송체의 mRNA 발현 변화를 연구해 학위를 받았다. 또 2009년에는 중국 심양약대 Cui 교수의 위탁생인 Y가 키토산으로 표면을 수식한 나노입자가 혈액 중에서 일시적인 회합체를 형성함으로써 폐에 선택적으로 이행한다는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2010년에는 동아제약의 K가 엑세나티드의 지속성 제제의 약물동태로, 오유경 교수와 공동지도한 K가 올리고핵산염약물의 송달로 학위를 받았다. 2012년에는 K가 ‘항암제의 아미노산 유도체화를 통한 암세포 이행성 개선’으로, C가 ‘헤마토포르피린 수식 나노파티클을 이용한 독소루비신의 간암이행성 개선’으로 학위를 받았다.
2013년에 나는 S와 ‘유기 양이온의 수송 및 ion-pair 가설’이란 제목의 종설을 공동 발표했다. 여기에서 나는 (1)분자량>200인 4급암모늄 화합물(HQA)은 간세포의 쇄자연(sinusoidal)막에 발현돼 있는 OCT1이라는 influx 수송체 단백에 의해 인식되어 간세포 속으로 들어간 다음, (2)간세포 내에서 담즙산염(BS)과 ion-pair 복합체(IP)를 형성하는데, (3) 이 IP가 모세담관(canalicular)막에 발현되어 있는 P-gp라고 하는 efflux 수송체 단백에 의해 인식돼 능동적으로 담즙으로 배출되는데, (4)1~3의 과정이 간이 HQA를 해독하는, 즉 HQA의 3상(Phase III) 대사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분자량 <200인 4급암모늄 화합물(LQA)은 간세포 안에서 BS와 IP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P-gp를 통해 담즙으로 배설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분자량>200인 4급암모늄은 주로 답즙으로 배설되지만, <200인 4급암모늄은 주로 소변으로 배출되는 신비한 현상(분자량 threshold)’의 기전을 명쾌하게 밝힐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모두 좀 더 깊은 연구를 했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 과제들이다.
2023-02-08 1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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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3> 연구,저술 및 강의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15
나는 30년간의 교수 생활을 통해 학문적으로 큰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양적으로는 제법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217편의 논문을 소위 SCI급 국제 잡지에, 102편의 논문을 국내 잡지에 발표했으며, 87회 국내 강연, 43회 국제학술대회 강연을 했고, 91개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내 논문의 34%는 생물약제학(biopharmaceutics), 30%는 약물송달학(drug delivery), 25%는 약물동태학(pharmacokinetics), 10%는 약물분석 등에 관한 것이었다.
1984년에는 ‘약물치료시스템’이라는 영문 책(도서출판 샤론)을 번역했고, 1993년에는 K, C교수와 교토대학의 세자끼 교수 등이 쓴 ‘약물송달학’을 공동번역(도서출판 한림원)했으며, 1994년에는 ‘약물체내속도론’을, 1999년에는 ‘생물약제학’(이상 서울대학교 출판부)을 저술했다. 뒤의 두 책은 외국의 책을 번역한 뒤 부족한 내용을 추가 보완한 책이다. 외국 책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독창성을 발휘한 책이긴 하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표절’이라는 판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책들은 약제학의 새로운 물결 3가지 전부를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교과서라는 데 의미가 있다. 이외에도 나는 약제학 실습서 등 상당 수의 책자와 프린트물들을 만들어 교재로 사용했다.
정년을 3년 정도 앞두고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서울대학교 바이오 대중강좌’에 타 학과 교수 6명과 함께 강사로 참여했다. 이 때의 강의 내용이 ‘뇌약구체(腦藥口體)’라는 책(2013년)의 한 챕터로 실렸다. 또 새로 개정된 6년제 약제학 교과서에 ‘맞춤약제학’이란 챕터를 썼는데, 국내외 처음으로 교과서에 21세기 약제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보람을 느낀다. 이 저술에는 제자인 S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이 외에도 『핵심과학기술용어집』(공편, 2005), 『복약지도 서브노트』(역, 2006), 『약학용어집』(편, 2008), 『새로운 약은 어떻게 창조되나』(역, 2012), 『창약과학의 매력』(공역, 2014), 『약창춘추』 1, 2(수필집, 2012, 2018), 『정말 무서운 약물의존』 (역, 2015) 등을 펴냈다. 이 중 ‘새로운 약은 어떻게 창조되나’는 지난해 12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당시 나는 약대 교수 휴게실에 있던 최신식 ‘금성메모리 타자기’를 사용해 원고를 작성했다.나는 원고의 작성, 입력 및 교정의 모든 과정에서 대학원생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는데, 이는 남이 한 작업을 믿을 수 없다는 경험에 근거한 결벽증 때문이었다.
연구는 1990년대 초반까지는 주로 두 은사 교수님의 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을 대리 지도하면서 지냈다. 이는 신참 조교수가 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자기 이름으로 박사과정 학생을 받기가 좀 거북했던 당시의 학교 분위기 탓에, 내 밑에 들어온 박사과정 학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지도한 박사과정 학생은 총 10명이었는데 이 중 8명이 약물동태학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학교에 약물동태를 연구하기에 적절한 품질의 실험동물이나 동물 수술 기구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일본에서 사용하던 수술 기구를 학생들에게 보급하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꼈다.
강의는 약제학 분야 중 주로 약물동태학과 생물약제학 및 약물송달학을 강의하였는데 이들이 모두 당시 국내에 새로운 학문이었기 때문에 가르치고 연구하는데 재미가 있었다.
강의를 잘하는 비결은 실력과 강의 기술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강의 기술은 학생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실력은 부족했지만,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충만하였다. 내 강의를 녹음해 놓았다가 다음 해 강의 직전에 다시 들어봄으로써 강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기도 했다. 그 덕분이었는지 2008년 약대 학장으로부터 ‘우수 강의상’을 받았다. 얼마나 객관성이 있게 받은 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이 상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23-01-2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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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2> 새해에는 꿈을
어렸을 때 자다가 오줌을 싼 적이 있다. 화장실인 줄로 착각하는 꿈을 꾼 때문이다. 또 친구들과 다투다가 헛주먹질을 하는 꿈, 싸우다가 소리를 지르려 해도 소리가 안 나와 고생하는 꿈을 꾼 적도 있다. 요즘 나는 줄거리도 엉터리고 앞뒤도 안 맞는 꿈을 많이 꾼다. 충청도 말로 ‘개갈’이 안 나는 이런 꿈을 개꿈이라고 한다. 이런 꿈은 깨고 나면 금방 잊어버린다.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이나 재현되어 고생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나는 얼마 전까지 대학 다닐 때 지각을 많이 해서 공부를 제대로 못 했다가 시험 때 당황하는 꿈을 꾸었다. 다시 군대에 끌려나가 고생을 하면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나 고민하는 꿈도 많이 꾸었다. 특히 군대에서 집합 시간에 신발이 없어져 여기저기 헤매는 꿈을 수없이 꿨다. 또 일본 유학 때 멋도 모르고 결혼식 피로연 축가를 부르도록 초청을 받았던 트라우마 때문인지 요즘도 준비 없이 무대에 오르며 당황하는 꿈을 꾼다.
드물지만 제법 줄거리가 있는 꿈을 꿀 때도 있다. 이런 꿈은 깬 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은 장차 일어날 일을 꿈속에서 미리 보기도 한다.나는 이런 계시(啓示)의 꿈을 꾼 기억이 없는데 아내는 적어도 세 번 정도 이런 류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1987년 어느 날 아내는 기관지에 돌이 생겨 서울대병원에서 폐를 절제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았다. 폐 절제를 하루 앞둔 어느 날 아내가 입원실에서 잠을 자는데 꿈 속에 후광이 있는 어떤 분이 나타나서 두 손을 펼치며 ‘이제 다 나았다’고 했단다. 다음 날 아침 내과의가 와서 폐 절제에 앞서 기관지 내시경으로 돌을 빼 보자고 해서 응했는데, 정말 기적적으로 돌을 빼는 데 성공함으로써 폐절제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또 2003년 초 어느 날 아내는 내가 새로 선출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나란히 서 있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정말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식약청장 발령을 받고 나란히 서는 일이 일어났다. 얼마 뒤 아내는 노 전 대통령이 탄 차가 굴렀으나 대통령이 무사하게 살아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했는데, 그즈음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이 탄핵이라는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가 벗어나는 일이 있었다. 아내의 꿈이 일어날 일을 기가 막히게 계시해 준 사례들이다.
아내의 꿈처럼 비교적 해석하기 쉬운 꿈도 있지만, 보통 사람은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꿈도 많다. 성경에 그런 꿈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오는데, 감옥에 갇혔던 요셉이 이집트 왕의 이상한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일약 죄수에서 총리로 발탁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꿈의 해석에 대해서 프로이트 같은 정신분석가들이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지만 모든 꿈의 완벽한 해석은 아직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을 것이다.
끝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가리키는 의미로서의 꿈이 있다. 소위 ‘청운(靑雲)의 꿈’이라고 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청소년에게 꾸라고 가르치는 꿈이 이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린 시절 제대로 된 청운의 꿈을 꾸어 보지 못했다.
문득 유독 우리나라 말에서만 ‘꿈을 꾼다’라고 표현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영어에서 ‘dream a dream’이라고 하고, 일본어에서 ‘유메오 미루’ 즉 꿈을 본다고 하는 것과 분명히 대비된다. 아마 우리는 꿈을 ‘과거나 현재의 경험으로부터 상상한 미래로부터 꾸어 오는(차용)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청운의 꿈이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청운의 꿈을 꾸지 못했던 것은 전깃불도 없는 캄캄 시골에서 자라는 바람에 보고 듣는 것이 적어 미래에 대한 상상이 부족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늙은이도 젊은이처럼 상상의 날개를 펴 청운의 꿈을 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새삼 성령이 임하면 늙은이도 꿈을 꿀 수 있다는 성경말씀(요엘2:28)이 떠오른다.
2023-01-12 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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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1> 약학사회지 제5호
2014년 창립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가 발행하는 ‘약학사회지(藥學史會誌)’ 제5호가 지난 10월 발간됐다. 이번 5호에는 원보(原報) 2편, 단보(短報) 1편, 원로 녹취록 2편, 약학사 관련 회고 4편과 ‘약학사 관련 도서 소개’, ‘약학사 관련 국내 및 일본 논문 소개’, ‘회무 및 정보’ 등이 실려 있다. 이하에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1. 논문
(1)원보인 ‘1950년대 의약품 신문광고와 여성 의약 문화’(이영남, 충북대학교 명예교수)에는 의약품 구매나 소비에 소극적이었던 한국 여성이 일제강점기에서 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적극적인 소비자로 바뀐 과정이 서술돼 있다.
(2)두번째 원보인 ‘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의 역사’(박혜영 이화여대 명예교수 외 2인)에는, 1945년 제1회 입학생을 모집한 이화여대 약학대학의 역사와 발전상이 소개돼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화여대 약대의 역사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의미가 큰 논문이다.
(3)단보인 ‘천연물화학 연구의 개척자 우린근 박사’(이은방 서울대 명예교수)에는 1940년부터 서울대학교 생약연구소(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천연물과학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연구소의 발전을 주도했던 고 우린근 교수의 공적이 실려 있다.
2. 녹취록
(1)첫 번째로 서울대 이상섭 명예교수의 ‘냉전기 동구권 학회 참석기’가 실려 있다. 1981년 불가리아에서 열린 학회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한 이야기인데, 서울대 김진웅, 주승재 교수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상섭 교수는 1954년 서울대 약대를 8회로 졸업한 원로이다. 이 녹취록은 약학사회지 제4권에 실린 고 손동헌 교수에 이어 두 번째로 실린 ‘약계 원로의구술사’이다.
(2)두번째는 ‘광복 후 혼란기에 학교를 지켜내다: 서정규 서울약학대학 4년제 제1회 졸업생의 회고’라는 제목의 녹취록인데, 심창구, 김진웅, 주승재 교수가 서정규 님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서정규 님은 1948년 서울약학대학 전문부를 제1회로 졸업한 후 1950년 다시 4년제 학부를 제1회로 졸업한 특이한 학력의 소유자이다. 이 녹취록에는 일제(日帝)로부터 광복 후 학교(사립 서울약학대학)의 혼란상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학교를 미군정에 팔아 넘기고 일본으로 도주하려 했던 일본인 교장 타마무시(玉蟲)에 맞서 당시 학생과 동문 등이 어떻게 학교를 지켜냈는가 하는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안타깝게도 서정규 님은 약학사회지 제5권 발간 도중에 작고하셨다.
3. 약학사 관련 회고
여기에는 (1)‘임상약학 도입 배경과 Pharm. D. 양성에 대한 소회’(김종국 서울대 명예교수) (2)‘한국 신농약1호, KH502의 개발 배경 및 과정’(황기준, 전북대 명예교수) (3)‘우리나라 약학교육 발전에 공헌한 한국약학교육협의회 설립 10년에 붙여’(문애리 덕성여대 교수) (4) ‘서울약학대학 전문부 졸업(1회)후 화공업계에 투신한 나의 아버지 김선봉’(김형순, 김선봉 님의 아들)의 글이 실렸다. 애통하게도 김종국 교수님도 이 글을 마지막으로 작고하셨다.
4. 약학사 관련 도서 소개
지난 1년간 국내에서 발간된 약학사 관련 도서 중 ‘한국약학교육협의회 10년’(한국약학교육협의회), ‘한국약제학회50년사’(한국약제학회), ‘역사가 묻고 화학이 답하다’(장홍제), ‘도핑의 과학: 경기장을 뒤흔든 금지된 약물의 비밀’(최강),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전사(前史)’(심창구)등의 내용이 소개돼 있다.
5.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된 약학사 관련 논문 소개
국내 논문 3편과 일본 약사학회지에 실린 논문 1편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6. 회무 및 정보
약학사분과학회 뉴스레터 8호를 전재(轉載)함으로써 분과학회의 올해 활동을 알 수 있게 했다.
7. 끝으로 분과학회의 정관과 ‘약학사회지’의 투고 규정이 실렸다.
제한된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발간된 약학사회지의 일독을 권고드린다. 아울러 약학사와 관련해 약계 제현의 투고 및 제언을 부탁드린다.
2022-12-28 1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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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0> '일본의 풍속' - 삶 속의 작은 깨달음14
1979~1982년, 일본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 몇 가지를 적어 본다.
성 풍속이 문란해 보였다
당시 대로변 극장에 포르노 영화 간판이 걸려있는 곳이 많았다.사람들은 별로 거리낌(?) 없이 포르노 극장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서점에 가면 주간지 비슷한 잡지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펼쳐보면 거의 예외 없이 앞뒤 화보에 여성의 누드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은 태연하게 그런 잡지들을 사 보고 있었다. 하도 태연스러워서, 원래 그들의 태도가 맞는 것이고,우리처럼 쉬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었나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모습들이 결코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였다
처음 동네 은행에 갔을 때문에 들어서는데 여러 명이 큰 소리로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나는 내 뒤에 vip고객이 들어오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 바로 나를 보고 인사를 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일본인은 왜 이렇게 친절할까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일본인은 남을 매우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사무라이 시대였는데, 칼을 차고 지내다 보니 서로 말이 친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총을 차고 사는 미국인들이 처음 본 사람에게 하이!와 탱큐!를 남발(?)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한다. 일본말에 욕이 별로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나는 ‘사람을 무서워하는 나라, 일본’ 이라는 주제로 십여 편의 글을 ‘약창춘추’에 썼고, 같은 주제로 2번 정도 일본 전문가들 모임에서 강연을 한 바 있는데, 많은 사람이 내 주장에 동의해 주었다. 나는 요즘도 ‘칼 찬 사람에 대한 무서움’으로 일본 문화를 해석해 보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데, 다소 견강부회(牽强附會)도 있을지 모르겠다.
매사에 정교하였다
일본인들은 예컨대 도로 공사를 하면 공사가 끝나는 대로 바로 도로를 복구하였다. 또 인도와 집 사이 빈 공간도 옛날에 어머니가 부뚜막 바르듯 정교하게 마무리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파내는 공사 따로, 복구하는 공사 따로 함으로써 도로를 오랫동안 파헤쳐 놓던 시절이었다.
요즘 우리동네에 인도를 파고 배수관을 묻는 공사를 하는 걸 보니 우리도 관을 묻자마자 바로 인도를 복구할뿐더러 마무리도 일본 못지않게 정교하게 하는 것이었다. 대단한 변화에 새삼 감동을 느꼈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이 아마 이런 것인 모양이다.
숨막히는 사회라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일본 동경대 약대 학생들은 4학년이 되면 각자 여러 연구실에 배정되어 1년 동안 연구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때부터 학생들은 그 연구실 교수의 문하생으로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 같았다.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집에도 그 학생들의 명단이 실릴 정도였다.
회사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대개 교수의 추천서를 받는다. 그러지 않고 뽑으면 앞으로 교수가 졸업생을 보내주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한다. 회사가 직원을 승진시키거나 해외에 유학을 보낼 때에도 학생 시절의 지도교수와 상의하는 절차를 거친다. 또 회사가 직원을 대학원에 보낼 때에도 고위 상사가 직원을 데리고 교수를 찾아가 잘 지도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한다. 직원을 대학원에 보내는 것이 마치 특혜를 베푸는 것처럼 생각하던 우리나라 회사와는 정반대의 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사회의 치밀한 짜임새를 답답해하고, 오히려 우리나라의 적당한(?) 거침을 좋아하는 일본 사람도 적지 않아 보였다. 맨날 검토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본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처럼 독재해서라도 일을 시원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사람도 만나 보았다.
일본에서는 고고하기만 하던 교수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일본의 회사원들이 우리나라로 출장 오고 싶어함에 놀란 적도 있었다. 이는 일본 사회의 숨 막힘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는 본능의 표현 같았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우리와 너무 다른 일본이었다.
2022-12-16 1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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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59> 커피믹스 개발의 주역 조항연 약사
2022년 11월 5일, 경북 봉화에 있는 아연 광산의 수직 갱도에 9일이나 갇혀 있던 광원(鑛員) 둘이 걸어서 생환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들은 인스턴트 믹스 커피의 대명사인 ‘커피믹스’를 먹으며 버텼다고 한다. ‘봉화의 기적’을 일으킬 정도로 ‘커피믹스’는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올해 11월 8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한국을 빛낸 발명품’의 하나로 커피믹스가 선정된 바 있다고 한다. 즉 2017년 특허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커피믹스가 훈민정음, 금속활자, 온돌, 거북선에 이어 ‘한국을 빛낸 발명품’ 제5위로 선정되고, 이태리 타월과 첨성대가 6~7위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커피믹스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필자는 커피믹스를 인류 문화사에 주목할 만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
커피믹스의 위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커피믹스를 누가 발명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다행히 필자가 서울대 약대 동창회보 제100호(2022년호)를 편집하는 중에, 1957년 서울대 약대를 제11회로 졸업하고 당시 동서식품㈜의 생산담당 기술자였던 조항연 약사가 커피믹스의 개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흥분되는 마음을 억누르고 필자가 파악한 커피믹스의 개발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아이디어가 떠오르다
조항연 약사가 회사에 다니던 어느 날 등산이나 낚시를 하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먹일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커피 1술, 크림 1술, 설탕 1술을 섞어서 봉지에 담아 5봉짜리 포장물을 만들어보니 담배갑 1개 크기가 되었다. ‘이거 잘 하면 좀 팔리겠네’라는 생각이 들어 1봉지를 개봉하여 컵에 쏟은 다음 더운 물을 붓고 차 숟갈로 저어보았는데, 몇 번을 시도해도 깨끗이 용해되지 않고 무언가 불용물이 표면에 뜨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커피의 산성 때문에 커피크림 성분 중의 하나인 '카제인 나트륨'이 '카제인'으로 석출되어 표면에 뜬 것이었다. 이런 때는 '약산의 염'을 조금 넣어주면 완충제 작용을 하여 카제인이 석출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약대에서 배운 것이 생각난 것이었다. 그래서 소량의 인산 나트륨, 인산 칼륨 등을 봉지에 넣어 섞은 다음, 더운 물에 넣어보았더니 과연 부유물이 생기지 않고 깨끗하게 녹았다.
2. 파우치(pouch bag)형 커피믹스의 출현
초기의 커피믹스는 네모난 파우치 봉투에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봉지 포장기 몇 대를 돌려 생산 공급하였으나, 순식간에 제품이 인기를 끌어 판매량이 엄청나게 증가하는 바람에 이런 구식 포장으로는 판매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적당한 포장설비를 찾던 중에 1초에 10봉을 포장하는 포장기가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당장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 포장기 회사를 찾아 갔다. 정말 분당 600포라는 경이로운 속도로 설탕을 포장하는 기계였다. 그 자리에서 포장기 구입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3. 막대(stick bag)형 커피믹스의 출현
세월이 조금 지나면서 회사 내의 마케팅 및 판매부서로부터 커피믹스도 시판 설탕의 포장처럼 막대형으로 포장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국제포장전시회에 다녀봐도 막대형 포장은 전부 기껏해야 3~4줄로 포장하는 기계뿐이었다.
할 수 없이 발전성이 보이는 국내의 모 기계제작소와 상호 협력하여 세계 최초로 10줄짜리 포장기를 개발하였다. 이 포장기의 능률은 기존의 외국제 보다 3배나 높았다. 16년 전인 2006년의 일이다.
·부언
조항연 약사는 커피믹스가 동서식품과 동료들의 협력으로 개발된 품목이므로 본인이 단독개발자로 기록되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였다. 그러나 대학 동기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커피믹스 개발의 실질적인 주역이었음은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본인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 바이다.
2022-11-24 2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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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58> '교수가 되다' - 삶 속의 작은 깨달음13
18) 하나님 은혜로 서울대 약대 조교수가 되다
학위를 받고는 곧장 귀국하였다. 1982년 9월이었다. 할 일도 없는 나는 틈틈이 모교의 약제학연구실에 나가 실험실 후배들을 지도하곤 하였다. 약제학실에는 K,L 교수님이 재직하고 계셨고, 몇 년 전 정년퇴직하신 우종학 교수님의 후임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그때가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어려워 신임 교수 채용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어 있었다. 다음 해인 1983년이 되자 다행히 신임교수 채용이 재개되었다. 나는 약제학 전공에 원서를 냈다.
나는 원래 약품분석실에서 석사를 하였고 박사 학위는 일본에서 하였기 때문에 약제학연구실과 특별한 연고가 없었다. 또 내가 도쿄대학에서 공부할 때 일시 도쿄대학에 오신 L교수님께서 “약제학 전공 신임교수 채용 1순위는 L군이야”라고 말씀하신 바도 있어서 내가 채용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L군이란 당시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약물동태학을 전공한 L선배였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L선배가 원서를 내지 않았다. 내게는 기적과 같은 행운이었다. 그래서 나 말고 약제학에 원서를 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지만 결국 내가 신임 조교수로 선정되었다. 만약에 그때 L선배가 원서를 냈더라면 십중팔구 나는 선정되지 못했을 것이다. L선배로 하여금 원서를 내지 않게 하심으로 내가 선정되게 역사(役事)해 주신 하나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여러모로 부족한 나를 채용해 주신 두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훗날 L선배도 마음이 변해 약제학이 아닌 다른 전공에 지원하여 교수가 되었다. 이 일을 통해 역시 인생은 하나님 은혜로 풀리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19) 교수로서 첫발을 떼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83년 2월 25일 서울대학교로부터 약학대학 제약학과 조교수 임용 예정 통보를 받았고, 3월 30일 문교부 장관 명의로 조교수 14호봉 발령을 받았다. 임용 기간은 1986년 3월 29일까지의 3년이었다. 드디어 김포 검단면 당하리 새텃말의 촌놈이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것이다. 그 후 재임용과 부교수, 교수로의 승진을 거쳐 2013년 8월까지 30년 6개월 동안 교수직에 봉직하였다.
나는 주로 약물동태학(pharmacokinetics)과 생물약제학(biopharmacutics), 그리고 약물송달학(drug delivery)분야에 대해 강의하고 연구하였는데, 비교적 새로운 내용이라 매우 재미있었다.
나는 대학원 학생들의 연구 결과를 되도록 학술지에 발표하도록 지도하였다. 1987년에는 C군의 석사 학위 논문을 J. Pharm. Sci.(76, 784-787(1987))에 실었다. 각종 테오필린 정제의시험관내 용출(溶出)속도를 측정하면 사람에게 투여한 후의 타액(唾液, saliva) 중 농도를 예측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타액 중 농도가 혈중 농도와 비례함은 이미 우리가 밝힌 바 있으니, 결국 용출 속도를 측정하면 혈중 농도를 예측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내가 교수가 되어 지도한 논문 중 최초로 권위 있는 국제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이었다.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 보지 못하던 시절이라 매우 기뻤다.
당시에는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려면, 타이프라이터로 친 원고와 손으로 그린 그림 (Figure)과 표(Table) 각 3부를 딱딱한 종이 사이에 끼워서 등기 우편으로 편집장에게 보내야 했다. 그리고 편집장의 회신을 연애 편지 답장 기다리듯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오랜 세월(보통 한 두 달)을 기다려 마침내 편집장의 편지가 우편함에 도달하면 두근거리는 마음,두려운 마음으로조심 조심봉투를 뜯는다.
편지 첫 줄이 가장 중요했다. “I am pleased to”로 시작되면 채택된 것이고, “I regret”이면 거절된 것이었다. 문장이 좀 길어도 ‘수정후 게재 또는 재심사’라고 쓰여 있으면 잘 수정 보완하면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느낌이 생생하지만, 다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2022-10-27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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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57> '유학 중 연구실 안팎' - 삶 속의 작은 깨달음12
(16) 자기 연구 주제에 대한 주인 정신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자기가 연구할 주제를 스스로 정해 제안하게 하셨다. 학생은 전 교실원 앞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의 주제와 배경 그리고 의의를 발표해 지도교수의 승락을 받아야 했다. 독창성이 없거나 의미가 없는 주제는 교수님을 설득할 수 없었다. 학생이 발표를 잘 해도 대개는 ‘네 제안에 문제가 많은데 잘 극복할 자신이 있으면 한번 해보라’고 소극적인 승낙을 해주실 뿐이었다.
나중에 내가 교수가 되고 보니 이 방법은 지도교수로서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우선 만의 하나 과제가 잘 진행되지 않아도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학생 본인이 져야 했다. 자기가 제안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도쿄 대학생들은 자기 연구 주제에 대해 주인정신을 가지고 그 가치를 관리하는 것 같았다. 가끔 두 세명이 모이면, 서로 ‘네 연구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대답하는 모습을 여러번 봤다. 또 학생들은 남보다 더 많은 논문을 쓰려고 경쟁하였다. 당시(1970년대 후반)의 일본 약학계는 외국잡지에 많은 논문을 내려고 열을 올릴 때였다. 교수님은 갯수나 늘리려고 논문은 써선 안된다고 한가한(?) 잔소리를 하셔도 될 정도였다.
내가 나중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해 보니 당시의 서울대 대학원생들에게는 자기 과제에 대한 주인정신이 부족하였다. 세미나 시간에 “너는 왜 이 연구를 하고 있는가?” 물었더니 “교수님이 시키셨잖아요?”라고 대답하는 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또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려는 의지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요즘 서울대 대학원생들은 국제학술지 중에서도 매우 저명한 학술지에만 투고하려고한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17) 결혼식 피로연의 초대가수가 되다
도쿄대제제학 교실의 대학원 학생들은 매주 금요일 오후에는 교수실에 모여 교수님과 함께 술을 마시며 논다. 그 정도로 교수님은 술을 좋아하셨다. 일종의 다과회 겸 친목회인데 이런 모임을 콤파라고 불렀다. 그 콤파에서 술이 좀 들어가면 영락없이 노래부르기를 시작한다. 아직 가라오케는 없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는 했지만 노래를 썩 잘 부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보고는 한국 가요를 불러 보라고 했다. 나는 ‘가슴아프게’ 같은 한국 가요들을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사과정 남학생 하나가 나보고 자기 결혼식 피로연에 와서 축가를 불러 달라고 했다. 나는 우리나라 식으로 시끌벅적한 피로연이라면 뭐 못 부를 것도 없겠지 생각하고 그러마 수락하였다. 그러나 당일 피로연장에 가보고 큰 일이 벌어진 걸 깨달았다.
알고 보니 일본의 피로연은 마치 우리나라의 국경일처럼 매우 엄숙하게 진행되는 행사였던 것이다. 피로연장에 들어가기 전에 방명록에 붓글씨 서명을 해야 할 때부터 긴장되기 시작하였다. 피로연장에 들어가 하객용 지정석에 앉아 보니 인쇄된 식순지가 놓여 있었다. 내 축가 순서는 중매인 인사와 명사(名士)들의 축사 다음이었다. 나는 피로연 분위기가 이처럼 경직된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식장을 한바퀴 둘러보니 홀 맨 앞 긴 테이블 중앙에 중매인(나까오또) 부부가, 그 좌우에 신랑 신부가, 그리고 그 좌우에 축사를 할 몇 분이 앉아 있었다. 양가 부모는 의외로 일반 하객석에 앉아 있었다. 피로연은 코스 식사와 함께 진행되었는데, 나는 긴장되어 제대로 음식을 즐길 수도 없었다. 마침내 내 순서가 되었을 때,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최무룡씨가 불렀던 ‘단둘이 가봤으면’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흰구름이 피어오른’으로 시작되는 가요였다. 일부러 일본인들이 모르는 노래를 선택한 것이었다. 덕분에 어찌어찌 내 순서를 마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내가 무식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내 노래 평판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지 6개월 후, 다른 학생의 피로연에서 또 한번 축가를 부르게 되었다. 이 초대가수 사건은 오랫동안 내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대로 나가다 당황하는 꿈을 아직도 꿀 때가 있다.
아 옛날이여!
2022-10-13 0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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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56> '박사 학위를 받다' - 삶 속의 작은 깨달음11
(15) 이온대 화합물의 소장 흡수
박사 과정 첫 번째 과제인 이 주제에 대해서는 교토(Kyoto)대학의 세자키(Sezaki) 교수팀이 활발히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극성(極性)을 띠고 있는 양(陽)이온성 약물에 음(陰)이온성 물질을 첨가하면 극성이 낮은이온대 화합물(ion-pair complex, IP complex)을 형성하기 때문에 약물의 소장 투과(흡수)성이 높아진다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나는우선 IP complex의 참분배계수(分配係數) 등을 정확히 구하여 IP complex형성이 약물의 소장 흡수에 미치는 영향을 정량적으로 파악하기로 하였다. 참분배계수를 구하는 논문이 유명 학술지에 발표된 적이 있었지만, 모두 ‘IP complex는 유기용매 층으로만 분배된다’는 근거 없는 가정(假定) 위에 세운 수식(數式)을 이용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부정확한 방법이었다. 나는 IP complex가 물 층으로도 분배될 수 있다는 보편적인 가정 위에 수식(數式)을 세우고자 하였다.
몇 달 동안 자나깨나 수식 생각에 얼이 빠져 지냈다. 그러던 1980년 5월의 어느 날, 유학생을 위한 야외 파티 참석 중에 영감(靈感)이 떠올라 급히 연구실로 달려가 마침내 정확한 수식을 세울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간단한 수식이었지만 오랫동안의 고민이 풀려 날아갈 듯 기뻤다. 소정(所定)의 분배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이 수식에 따라 플롯하여 이온대 화합물의 참분배계수를 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를 Int. J. Pharmaceut. 8(1981)에 발표하였다. 내가 제1저자로 발표한 최초의 국제학술지 논문이었다.
(16) 신장 배설 기능의 예측
위 논문을 쓴 후에 ‘내인성(內因性) 물질인 N-methylnicotinamide, NMN)을 마커로 하여신장의 염기성 약물 배설(腎排泄)능력을 예측할 수 있는가’라는 가설을 검증하는 것으로 연구 주제를 바꾸었다. 실험적 신장해를 유발시킨 쥐의 신세뇨관(腎細尿管)에 PE-10이라는 매우 가는 카테터를 삽입하고 3H 라벨을 한 모델 약물(tetraethylammonium, TEA)을 정맥주사한 다음, 시간에 따라 채취한 혈액과 요(尿)중의 TEA 및 NMN의 농도를 측정함으로써 두 물질의 신배설클리어런스(CLr)를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실험 결과, 신장해시 두 물질의 CLr가 같이 변동(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로부터 NMN을 이용하여 염기성 약물의 신배설을 예측할 수 있음을 J. Pharmacokin. Biopharm. 12(1984) 등에 발표할 수 있었다.
약물의 신배설을 예측하는 종래의 방법은 신부전(腎不全) 환자에게 PAH라고 하는 화학물질을 주사한 후 이 물질의 신배설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개발한 방법은 원래 우리 몸에 존재하는 물질인 NMN의 혈중 및 요중 농도를 단 한 번씩만 측정하면 되기 때문에 안전이나 시간 면에서 종래의 방법에 비해 장점이 많다. 내 방법을 사람에게까지 적용해 보지 못하고 연구를 끝낸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다.
나는 또 ‘신장 기능이 나빠지면 신장의 혈류(腎血流)가 느려진다’는 기존의 보고들이 틀렸음도 밝혔다. 즉 쥐의 신장으로 들어가는 신동맥과 신장에서 나오는 신정맥 혈중의 약물 농도, 그리고 이 약물의 요중 배설속도를 실측해 본 결과, 신장이 나빠지면 신장에서 요로의 약물 추출률(腎抽出率)이 낮아지지 신장의 혈류가 느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박사과정 3년을 통하여 총 7편의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 연구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연구 결과 중 ‘염기성(鹽基性) 약물의 신장 배설 기능의 예측’에 관한 부분을 정리하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1982년 9월 30일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게는 박사학위 가운을 입고 찍은 사진이 없다. 그것은 도쿄대학에 졸업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각자 약대 행정실에 가서 박사 학위기(學位記)를 받으면 그것으로 ‘졸업 끝’이었다. 졸업! 조금은 허망한 이벤트였다.
2022-09-29 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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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55> '박사 과정을 시작하며'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10
(13) 박사과정 입학
유학을 갔지만 6개월 후에 박사과정 입학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생화학이었다. 대학 다닐 때 학장이셨던 K교수님으로부터 효소(酵素)한 챕터밖에 배운 것이 없어서 걱정이 되었다. 할 수 없이 일본어로 된 생화학책 하나를 사서 열심히 공부했더니 다행히 합격되었다.
마침내 1979년 9월1일, 나의 박사 과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제제학(製劑學) 교실의 교수님은 하나노(花野?)셨다. 드물게 도쿄대학 출신이 아닌 교수님은 약주를 좋아하고 학생들과 담소하기를 좋아하셨다. 매주 목요일 오후면 얼음 덩어리를 넣은 위스키 잔을 흔들며 실험실로 오시곤 했다. 그럴 기미가 보이면 약삭빠른 일본 학생들은 황급히 집으로 도망쳤다. 교수님께 한번 걸리면 두세 시간 붙잡히는 것은 예사였기 때문이다. 대신 애꿎은 나와 타이완 출신 유학생이 교수님과 대작(對酌)해 드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간에 교수님의 인생관이나 학문관(學問觀) 같은 좋은 말씀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예컨대 “일본의 지도자는 미국과 소련(당시) 사이에 전쟁이 나면 언제 어느 편으로 어느 정도 가담해야 일본 국익에 도움이 될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제제학 교실에는 교수님 밑에 조교수 1명, 조수(助手) 2명과 교무직원 1명이 팀을 이루고 있었다. 조교수로는 훗날 도쿄대학 병원약제부장(교수)을 거쳐 일본약제사회 회장을 역임한 이가(伊賀立二) 박사가, 조수로는 니시가키(西坦) 박사와 스기야마(衫山雄一) 박사가 있었다.
스기야마 박사는 나중에 도쿄대 교수 겸 세계적인 학자가 된 대단한 학구열의 소유자로 시종일관 학생들을 다그쳤다. 나는 니시가키박사 밑에서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학문에 대한 실력이나 열정은 스기야마만 못했지만 인품이 점잖았다. 실력이 부족하고 기(氣)가 약한 내가 스기야마 대신 니시가키의 지도를 받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 같다.
(14) 와신상담(臥薪嘗膽)과 명예회복
박사과정에 들어가자마자 서울대 석사과정에서 수행한 연구를 발표해 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도쿄대학에 와 보니 서울대와의 실력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나는데다가, 특히 내 석사학위 논문의 수준이 형편없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발표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1~2주간의 괴로운 나날을 보낸 후 안면몰수(顔面沒收)하고 발표를 하였다. 그런데 막상 발표를 마치고 나니 교수님이나 대학원생 중 질문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질문할 가치도 없다는 것 같았다. 나는 평생 이때의 창피함을 잊지 않고 와신상담해 왔다.
하나노 교수님은 박사 과정 과제로 이온 대 화합물(ion-pair complex)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하셨다. Chemical Abstract을 찾아보니 이 키워드가 들어 있는 논문은 제목만 해도 수십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이 중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공부를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심하던 어느 날, 교수님은 ‘이온 대 화합물과 생체 흡수’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2차 지시를 하셨다. 이 주제에 한정해서 조사해 보니 그림이 좀 그려지는 것 같았다.
과제를 받은 지 석 달쯤 지났을 때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교실 세미나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나는 이온 대 화합물의 흡수에 대한 기존 학설을 몇 개로 분류한 다음 각 학설을 그림과 함께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물론 발표하는 연습도 성실히 하였다. 발표를 마치고 둘러보니 청중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다들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대학원 후배이자 뒷날 도호쿠(東北)대학 약학부 교수를 역임한 데라사키(寺崎) 박사는 지금도 그날의 내 발표에 감동하였다고 말하고 다닌다.
이 발표를 통해 석사 논문 발표로 구겨진 내 명예(?)를 상당 부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훗날 세계적인 학자가 된 스기야마 등 당시의 동료와 평생 학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교류할 수 있었다. 할렐루야!
2022-09-14 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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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54> '일본 유학을 떠나다'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9
(11) 유학의 길이 보이다
영진약품에 다닐 때 대학 동기이자 약대 조교인 C군이 일본 문부성(文部省) 장학생 시험에 붙어 도쿄 대학으로 유학 가는 것을 보았다. 우연히 유학가는 방법을 발견한 나는 그 길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험은 정식 조교(助敎) 발령을 받은 사람만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었다. 당시 약대 전체에 조교 TO가 3~4명밖에 없어 조교 발령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나는 1년이상 대학원 분석실에서 백의종군하며 기다린 끝에 1977년 12월 9일 조교 발령을 받았다.
다음 해인 1978년 문부성 시험에 원서를 냈다. 시험 당일, 시험 장소인 한국외국어대학교에 가 보니 전국에서 응시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인하대 출신인 이종 사촌 동생도 와 있었다. 집안에 소문이 날 걸 생각해서라도 시험에 꼭 붙어야만 했다. 시험과목은 일어, 역사, 상식이었다. 다행히 얼마 후 발표된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 더구나 내가 이과(理科)에서 1등이란다. ‘목표가 있으면 길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마침내 장학금을 받으며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박사학위를 공부할 곳으로 도쿄(東京)대학 제제학(製劑學) 교실을 지원하였다. 석사학위를 받은 약품분석학에서 제제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이다. 제제학이란 약효가 잘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제제(製劑)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영진약품 근무 시 그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12) 천식(喘息)의 나라 일본
1979년 4월 9일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난생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유학생 일행은 모두 33인이었다. 아내와 두 아들은 일단 두고 가기로 하였다. 도쿄 나리타(成田) 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고마바(駒場) 캠퍼스에 있는 도쿄대학 기숙사(瞭)에 도착하였다.
약 석 달이 지나 도쿄 생활에 조금 감(感)이 잡혔을 때, 이타바시(阪橋)구 시무라사카우에(志村阪上)역 근처에 있는 다이쪼소(大長莊)라고 하는 2층짜리 허름한 아파트 하나를 빌려 가족을 불러들였다. 집세는 월 4만엔 정도였는데,당 시 월 17만엔인 내 장학금에 비추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당시 엔:원 환율은 약 3:1이었다. 문부성 장학생은 고맙게도 학교 수업료와 각종 세금 일체를 면제받았다.
일본에서 아파트란 우리나라의 연립주택 비슷한 다세대(多世帶) 주택을 말한다. 이 아파트는 훗날 유학생인 C군, S군을 비롯하여 모교에서 도쿄대학을 방문하는 교수님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1층에 있는 우리 아파트는 6조(다다미 6장) 크기의 방 하나에 조그만 부엌과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다다미는 낡았고, 벽에서는 종이흙(紙粘土) 부스러기가 끊임없이 떨어지는 오래된 아파트였다. 고온다습(高溫多濕)한 도쿄 날씨에 1층 방이라 더욱 습기가 많았다. 당시에는 일본에도 아파트나 학교에 에어컨이 없었다.
결국 이 집에서 산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두 아들이 모두 천식에 걸렸다. 알고 보니 일본은 소아(小兒)천식의 나라였다. 아이들이 모여 놀다가 천식 발작을 일으키면 스스로 동네 의원에 가서 현관에 설치되어 있는 분무기를 입에 대고 천식약을 흡입할 정도로 소아 천식이 만연(蔓延)하고 있었다. 두 아이의 천식은 일본에 사는 3년 6개월 동안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혔다. 세월이 갈수록 발작이 심해져 한밤중에 아이를 들쳐 업고 응급실로 뛰어간 적도 몇 번 있었다. 구청으로부터 아이 당 매달 4만엔씩의 위로금을 받을 정도였다. 아이들때문에 라도 한시바삐 일본을 떠나고 싶었다.
학교까지는 미타(三田)선이라는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편도에 1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다. 점심과 저녁은 학교 구내식당이나 아까몽(赤門)밖에 있는 모리카와(森川)식당에서 사 먹었다. 아직도 문을 열고 있는 모리야 식당의 400엔짜리 참치덮밥은 정말 맛있었다.
좀 비싸더라도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정했더라면 통학 시간도 절약되고, 점심과 저녁을 집에서 먹을 수 있어 오히려 경제적이었을 텐데, 이를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2022-08-25 21: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