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68> 조선약학교 학생 이호벽의 삼일운동
올해는 일제하에서 3.1운동 (1919년)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8년에 설립된 조선약학교의 학생들도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자료를 보면 ‘조선독립선언서 및 청원서’와 관련하여 경성지방법원에서 신문을 받은 362명 중에 조선약학교 학생이 14명 (김유승, 김광진, 박준영, 박병원, 박흥원, 박희창, 오충달, 전동환, 김정오, 강일영, 김용희, 이인영, 정태화, 이용재 등)이나 있었다. 이들 중 김용희, 이용재, 이인영, 전동환에 대해서는 신문 카드도 남아 있다.
고종황제의 국장일(國葬日)인 1919년 3월 5일에는 조선약학교를 비롯한 각 학교가 동맹휴교에 들어 갔는데, 이날 김광진, 김유승, 오충달 등은 남대문에서 개최된 제2의 만세운동에도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7).
1818년에 조선약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한국인이 60명, 일본인이 30명 정도이었으나 2년 후인 1920년에 제1회로 졸업한 한국인은 이호벽 등 약 10명에 불과하였다. 3.1 운동의 여파(餘波) 때문이었다. 신문을 받은 한국인 14명 중 3명은 한해 뒤인 1921년에 제2회로 졸업하여 총 13명의 한국인이 졸업하였지만, 나머지 한국인 47명은 끝내 졸업하지 못하였다. 이 47명 중 27명에 대해서는 이름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조선약학교 선배들의 3.1운동 참여 기록을 발굴하였을 때, 나는 선배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러면서 혹시 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한국인들은 3•1운동에 불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차에 조선약학교 1회 졸업생이자 한국인 약사 면허 1호인 이호벽 선배님이 『약사공론』(1974년 5월 16일)에 쓴 ‘나와 3•1만세사건’이라는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전문(全文)을 소개한다.
“3•1만세사건 이야기가 났으니 그때 나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빠트려서는 안 되겠다. 스물 안팎의 그때나 칠십을 훨씬 넘은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나는 활달하다거나 용맹에 찬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담담하고 차분하게 인생을 밟아왔다고만 생각한다. 그때 나는 참으로 순진한 소년이었다. 집에서 학교, 학교에서 집으로만 향했으며, 책밖에 더 벗할 것이 없었다. 그런 나의 처지이고 보니 친구도, 말 상대도, 자연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3•1만세사건이 사전에 준비되고 있는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고, 고종황제 인산(因山) 때를 이용한 그 숨막히던 순간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참으로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날 나는 친구를 찾아 대한문(大漢門) 근처를 향하고 있었는데, 대한문 앞 고종황제 붕어(崩御)를 애도하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르는 것을 보았고, 품에 감춰두었던 태극기가 손에 손에 쥐어져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시에 달라진 함성과 태극기의 세계를 경이롭게 듣고 보다가 나는 그 군중 속으로 나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어갔다.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조금 있자 일인 순사와 헌병들이 달려와 장도(長刀)와 단도(短刀)로 우리 군중을 치고 찌르고 더러는 끌어가는 것이 아닌가. 혼비백산한 나는 그 길로 집을 향해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눈 앞이 아득하고 간이 콩알만해졌던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해방 후 3•1절 기념일 때만 되면 더욱 후회 반, 부끄럼 반을 져버릴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이호벽 선배님이 매우 솔직하고 겸손한 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복잡한 심정도 헤아리게 되었다. 과거에 친일(親日)을 한 사람이 이제 와 반일(反日)을 했노라 하면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호벽 선배님과 같은 분들의 처신과 고백은 오히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며칠전 일제(日帝)하에서 우리 말 사전을 펴내느라 온갖 고초를 겪었던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대한 영화 (말모이)를 보고 (속으로)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2019-02-27 09:38 |
[기고] <267> 친절한 상술
1979-1982년 동경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대학 구내에 있는 생활협동조합 (보통 生協, 즉 ‘세이꾜’라고 불렀다)에 가전(家電) 제품과 문방구 등을 파는 코너가 있었다. 가전 제품에는 거의 늘 “안 사면 손해, 전시 품목에 한해 50% 할인!” 같은 충격적인 광고가 붙어 있었다. 나도 당장 사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뺏길 것 같은 초초한 마음으로 아침 일찍 달려가 쏘니 티브이를 한대 산 적이 있었다.
문방구 코너에 가면 자잘한 아이디어 상품이 너무 많았다. 특히 신기했던 것은 요즘의 컴퓨터 마우스 만한 크기의 탁상용 고무지우개 파편 흡입기 (진공 청소기)였다. 소형 밧데리로 작동되는 것이었는데 연필로 쓴 글씨를 지우개로 지웠을 때 생기는 고무나 종이 파편을 제거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가볍게 누르면 귀여운 엥~ 소리와 함께 파편을 흡인하는 모습이 얼마나 앙증맞던지!
그러나 탁상용 진공청소기보다 내가 더 감탄했던 것은 문장 중 잘못 쓴 글자만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도록 다양한 크기의 구멍들을 뚫어 놓은 얇은 플라스틱 막대자였다. 잘못 쓴 문장 위에 그 막대자를 올려 놓고 구멍을 지우고자 하는 글자 위에 맞추어 놓은 다음, 고무지우개로 구멍 부위를 문지르면 목표로 한 글자만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었다.
구멍의 크기를 선택하기에 따라 한 글자로부터 다섯 글자까지 지울 수 있었다. 당연히 옆의 글자는 지워지지 않는다. 지우고 난 다음에 생기는 고무 파면은 앞서 말한 탁상용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면 상황 끝이었다.
말이 난 김에 하나 추가하자면 세이꾜에 가면 도장포 (圖章鋪)가 있었는데 신기한 것은 일본 사람들은 도장을 파 달라고 주문하지 않고,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는 기성품 도장을 산다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도장에 성(姓)만 새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명 (姓名)을 다 새기니까 그 많은 성명을 미리 도장에 파 놓을 수 없지만, 일본인의 성은 우리의 성명 보다 훨씬 그 수가 적기에 미리 새기기가 가능하였다. 덕분에 급히 도장이 필요할 경우 후딱 세이꾜에 가서 사오면 끝이었다. 물론 나처럼 일본에서 희성(稀姓)인 사람은 주문해서 도장을 새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세이꾜 문방구에 가서 ‘혹시 이러이러한 문방구 팝니까?’ 물었는데 마침 그 물건이 없다면, 그 때의 점원의 반응은 우리나라의 경우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없어요’ 라고 대답하곤 끝이다. 손님이 ‘그런 물건 어디 가면 살 수 있을까요?’ 라고 추가로 물으면 대개는 ‘모릅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딴 일을 본다.
한번은 ‘무슨 가게에 가보세요’ 라고 하길래 ‘그 가게가 어디 있는데요?’ 라고 물었더니 ‘인터넷 뒤져 보세요’ 하였다. 자기네 가게에서 안 파니 더 이상 나에게 말 시키지 말라는 분위기였다.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다시 이 가게에 오나 봐라’
세이꾜에서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상품이 없을 경우 점원은 반드시 이렇게 말한다. “아, 대단히 죄송합니다. 필요한 물품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 최선을 다해 수배하겠습니다. 구내 번호를 남겨 주시면 곧 가부 간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2, 3일 후엔 정말 가부간에 연락이 온다. 이렇게 해서 내가 원하던 문방구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세이꾜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내가 있던 약학부 제제학 연구실에는 각종 시약과 기구를 공급해 주는 업자가 주 2-3회 방문하였는데, 카탈로그에 없는 유리 기구도 그 사람에게 설명하면 최선을 다해 어디에선가 구해다 주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니까 연구자도 극히 소량 밖에 수요가 없는 기구를 구입하려면 어디서 사면 좋을지 몰라 어려움이 많았다. 이럴 때 그 업자에게 설명해 주면 어디선가 구해다 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오늘날 사업이나 장사가 안되어 죽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요리 사업가 백종원씨의 말마따나 ‘경쟁이 너무 치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일본인들의 친절한 상술을 배우면 상황이 좀 나지지는 않을까? 내가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본 것일까?
2019-02-13 09:38 |
[기고] <266> 건방져
새 해가 오면 집안의 윗사람이나 연상(年上)의 사람 또는 직장의 상사들과 인사를 나눌 기회가 많아진다. 이 때 까딱 잘못하면 갑(甲)의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을(乙)인 내가 건방진 사람으로 찍히기 쉽다. 건방져 보이지 않기 위해 ‘을’이 갑’의 앞에서 조심해야 할 사항들을 열거해 본다.
1. 외모 및 태도: 안경 (특히 선글라스), 모자 (특히 남자)나 마스크를 쓰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얼마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선글라스를 쓰고 전방을 시찰했다가 자기 정치를 한다고 비난을 받았다. 선글라스가 건방져 보인 탓도 있었을지 모른다. 젊은이가 수염을 기르는 등 나이 들어 보이게 외모를 가꾸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특히 자식이 수염을 길러 부모보다 나이 들어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 늘 옷을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 단추를 풀고 있어서는 안 된다. 껌을 ‘짝짝’ 씹어서도 안 된다.
2. 담배 피우기: 담배를 뻑뻑 펴대거나, 맞담배질 해서는 안 된다. 갑이 나타나면 잽싸게 돌아서서 비벼 끄거나, 최소한 돌아서서 피우는 제스처를 해야 한다.
3. 술 마시기: 물건을 드리거나 받을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술의 경우 한 손으로 따르거나 받아서는 안 된다. 무릎 꿇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잔을 드리고 술을 따라 올려야 하며, 받을 때에는 ‘감사합니다’ 사의를 표한 후 역시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받아, 돌아서서, 남김없이 마셔야 한다. 그러고는 마치 진 빚을 갚는 것처럼 신속하게 ‘갑’에게 다시 한잔을 따라 올려야 한다.
4. 말하기: ‘갑’이 말씀 하시는데 쥐뿔 나게 톡 튀어나와 한 마디 해서는 안 된다. 무례하게 나대는 것으로 보인다. 딴청을 부려서도 안되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해서도 안 된다. 또 토를 달아서도 안 된다. 너무 큰 소리로 말해도 안 된다. ‘에헴’ 따위의 헛기침을 특히 ‘크게’ 해서는 안 된다. ‘갑’과 슬슬 말을 트려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완벽한 경어체로 말해야 한다.
5. 쳐다보기: 윗사람을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 봐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눈 깔아”라는 ‘갑’의 마음속 호령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아래를 내려보는 각도가 안전하다. 특히 ‘째려’본다는 오해를 받았다가는 치명적이다.
6. 만나기: 만날 장소에 먼저 가 있다가 ‘갑’을 만나자 마자 벌떡 ‘일어나’ ‘먼저’ 인사해야 한다. 떡~하니 앉아서 인사를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실내라면 안쪽 편안한 자리인 상석(上席)으로 안내해 드려야 한다. 겉옷은 받아서 옷걸이에 걸어 드리고, 의자를 빼어 앉기 편하게 해 드려야 한다. 여기까지의 절차가 끝 났다면 이제 앉아도 좋다. 바닥에 앉는 경우라면, 다리를 꼬고 앉는 ‘양반다리’로 앉아서는 절대 안 된다. 양반다리는 ‘갑’만이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7. 악수하기: ‘갑’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쌍놈’소리를 듣는다. ‘갑’이 먼저 내민 손을 잡을 때 한 손으로 그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 특히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악수를 하는 것은 최악이다. 얼른 두 손으로 ‘갑’의 손을 잡고 황송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물론 갑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손을 내밀 것이다. 이때 ‘을’은 15-20도 정도 허리를 구부려야 공손해 보인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갑’이 키가 작더라도 결코 갑의 어깨에 손을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감히 ‘갑’을 격려하는 모양새가 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이상의 사항들을 일종의 예의범절(禮儀凡節)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오늘날 젊은이들이 이런 것들을 다 지키고 살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 ‘갑’은 이런 예의범절 대접을 받지 않고 살아도 괜찮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하고, 반대로 ‘을’은 그래도 어느 정도의 예의범절은 지키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젊은이는 자리를 양보하려고 들고 노인은 이를 만류하는 모습이, 겸손한 갑과 공손한 을이 함께 사는 아름다움으로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2019-01-30 08:40 |
[기고] <265> 참한 며느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같이하는 J집사 내외분이 최근 며느리를 맞았다. 만나보니 요즘 보기 드물게 참한 사람이었다. 그 며느리의 칭찬할 만한 점을 이하에 정리해 보았다.
1. 아들과 다툰 며느리 감이 혼자서 시부모를 만나러 왔다. 시부모는 놀랐다. 이런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시부모를 만나러 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하고 같이도 안 올 판인데 아들이 안 오는데 며느리 감만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2. 시부모와 평소 가깝게 지내는 열명 정도의 교회 멤버들이 점심을 함께 하는 자리에 아들과 며느리 감이 나왔다. 교회 멤버들은 놀랐다. 보통은 ‘그런 자리는 저희들이 거북하고 어려우니 아버지 어머니만 다녀 오세요, 저희들은 따로 먹을게요’ 하며 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아들 며느리라면 아마 안 왔을 것이다. 식당에 온 며느리 감은 밝은 얼굴로 수저와 컵 등을 어른들께 나눠드리는 등의 서비스를 하였다. 다들 ‘색시가 참 싹싹하다’고 칭찬할 수 밖에 없었다.
3. 결혼을 앞두고 시부모가 ‘집안에 이러이러한 대소사가 있다’고 일러주자 며느리가 바로 받아 적더란다. 요즘은 결혼 후에도 집안 대소사가 귀찮아 챙기지 않는 며느리가 많다고 하는데, 결혼도 하기 전에 큰 며느리로서 주인 정신을 갖는 모습에 시부모는 감명을 받았단다.
4. 결혼 전에 시아버지 생신이 있었는데, 그날 며느리 감이 신접 살이 용 집으로 마련해 놓은 아파트로 시부모를 초대 하더란다. 가 봤더니, 촛불 케이크와 하트 모양 장식 등을 준비해 놓고 서프라이즈 파티 비슷하게 축하를 해 주었다고 한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시아버지 생신을 챙기다니, 시아버지는 다시 한번 큰 감동을 받았다.
5. 결혼식 당일, 식이 끝나 하객들이 다 헤어진 후 며느리가 이모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결혼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드렸단다. 신혼 여행 가기도 바쁠 텐데, 그리고 바쁘지 않더라도 어른들께 일일이 전화를 드리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이와 같은 인사성은 우리들이 결혼하던 1970년대에도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6. 결혼식 후, 신랑 신부는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거기서 자주 동영상을 찍어 카톡으로 시부모께 보내왔다고 한다. 애들이 궁금해도 처분만 기다릴 수 밖에 없던 시부모가 엄청 기뻐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7. 결혼 직후, 시아버지가 가족 카톡방에 며느리를 초대하였는데, 이를 두고 시어머니는 부담가게 며느리를 왜 초청했냐고 시아버지를 추궁하였다. 며느리를 카톡방에서 나가게 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놔둘 것이냐를 두고 시부모 내외가 갈등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며느리는 ‘저도 얼른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어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했단다. 이 대답을 들은 시부모는 ‘공연한 걱정을 했네’하며 안도하였단다.
8. 독실한 교인인 시부모는 아들 내외가 결혼 후에 교회에 잘 다니기를 바랐다. 그런데 아들은 부모의 기대와 달리 교회에 잘 나갈 생각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이 상황을 파악한 며느리는 신랑을 잘 설득해서 교회에 함께 잘 출석하고 있다고 한다. 지혜로운 며느리에 시부모는 안심하였다.
9. 끝으로 금상첨화로, 며느리는 우리들이 볼 때 인물도 매우 좋았다.
이렇게 하는 짓마다 예쁜 며느리를 본 J집사님 내외분은 아들보다 며느리를 더 예뻐 하신다. 교인들도 며느리 잘 봤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한다. 요즘에는 시부모가 귀찮아서 시부모 전화번호도 알려 들지 않는 며느리가 있다던데, 이 댁 며느리는 정말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참하다.
시대가 바뀌어도 시어른에게 잘 하는 며느리가 귀염을 받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인 것 같다. 성경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말씀이 다섯 번째 계명으로 나온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다. 젊은이에게는 고리타분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J집사님의 아들 며느리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도 드린다.
2019-01-16 09:16 |
[기고] <264> 빈 방 있어요?
1) 미국의 어느 작은 교회에서 초등학생들이 성탄절 기념 연극을 공연하였을 때의 일이다. 예수를 잉태하여 만삭이 된 마리아가 남편인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의 한 여관을 찾아 가 여관집 주인에게 “빈 방 있어요?” 물었다.
여관 주인 역을 맡은 어린이는 각본에 써 있는 대로 “빈 방 없어요”라고 대답하였고, 이에 마리아 부부는 할 수 없이 여관 문을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지켜 보고 있던 어린이가 갑자기 “제발 돌아 오세요” 라며 울먹이는 것이 아닌가?
그 어린이는 각본에 따라 일단 “빈 방 없어요”라고 대답했지만, 힘없이 집을 나서는 마리아 부부의 딱한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워 자신도 모르게 이런 반응을 보이고 만 것이었다. 이 사고(?)로 연극은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원래 각본은 여관에 들지 못한 마리아가 마구간에 가서 예수를 출산하는 내용이었다. 연극은 엉망이 되었지만, 관객들은 어린이의 돌발 연기에 오히려 더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2)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여관에 조지 볼트라고 하는 청년이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치는데 한 노부부가 찾아 와서 와 빈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날은 마침 마을에 큰 집회가 있어서 여관에 빈 방이 없었다.
마을에는 달리 찾아 갈 여관도 없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청년은 노인에게 “빈 방은 없습니다만 (No Vacancy), 제 방에서 주무시고 가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노인은 그렇게 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다며 몇 번 사양을 했지만, 청년은 극구 노부부를 붙들어 자기 방에서 자고 가게 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 청년은 그 노인으로부터 뉴욕으로 좀 와달라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비행기 표도 함께 들어 있었다. 청년은 필라델피아에서의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좋은 호텔에서 하루 먹이고 재워주려는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청년을 만난 노인은 그를 데리고 어느 신축 호텔로 가더니, “이 호텔은 그날 자네를 만난 후, 자네에게 경영을 맡기려고 짓기 시작한 호텔일세. 이제 준공이 되었으니 자네가 경영을 맡아 주게나” 라고 부탁하는 게 아닌가? 그 노인의 이름은 윌리엄 월돌프 아스토리아, 그리고 조지 볼트가 초대 지배인이 되어 유명해진 그 호텔의 이름은 월도프 아스토리아이었다.
3) 이상의 두 실화는 모두 ‘빈 방 있어요’라고 대답함으로써 얻어진 긍정적인 결과를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 문 앞에 서서, “혹시 저 들어 갈 빈 방이 있을까요?”라고 물을 때, “빈 방이라니? 이 천국 전체가 다 너를 위해 만든 거란다. 얼른 들어 오너라” 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 곧 하나님이 우리들 마음에 들어 오시려고 “네 마음에 빈방이 있느냐?”고 물으셔도, “없어요 (No Vacancy)” 또는 “나 지금 바빠요”라고 거부의 대답을 하곤 한다. 필경 마음이 온통 세상의 정욕으로 가득 차 주님을 받아들일 빈 방 (vacancy, room)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물으셨을 때 “빈 방이 있고 말고요” 라며 주님을 받아 들인다면 뉴욕이 아니라 천국의 초청장을 받게 될 것이다.
이상은 온누리 교회에서 이상준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2018년 성탄절 설교 내용을 나름대로 요약한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더 공감이 가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큰 위로를 받아 마음이 평안해짐을 느낀다.
1년에 주일이 52번 있으므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적어도 1년에 52회에 걸쳐 이런 위로와 평안을 경험하게 된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새해에는 우리들 마음에 큰 빈 방 하나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그 방에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져 그 사랑으로 우리나라와 민족, 나아가 인류 전체가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질투, 조롱, 비하, 비난, 저주, 분열, 전쟁이 사라지고 위로, 격려, 관용, 용서, 이해, 화목, 평화와 통합이 자리잡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새해를 맞는다.
근하신년 (謹賀新年)!!
2019-01-02 09:38 |
[기고] <263> 대표 기도
나는 온누리 교회에서 2004년에 장로(長老)가 되어 만 70세가 넘는 금년 말에 장로 정년을 맞는다. 보통 70세 이전을 그냥 ‘장로’ 또는 ‘시무장로’라 부르고, 70세가 지난 장로를 ‘사역 장로’라고 부른다. 시무 장로는 1년에 2-3번 정도 교회의 주일 예배에서 대표 기도를 드리게 된다.
나는 지난 10월 28일, 서빙고 온누리 교회 3부 예배에서 시무 장로로서의 마지막 대표 기도를 드렸다. 2004년 첫 기도를 드렸을 때에는 나 같은 사람이 대표 기도를 드려도 되나 두려운 마음뿐이었으나, 세월이 가면서 다소 뻔뻔한 마음으로 기도를 준비한 적이 많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지막 대표기도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초심으로 돌아가 진지한 마음으로 기도문을 준비하였다. 이하에 그 마지막 대표기도문을 공개한다. 이는 교회 기도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 분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마라’ 하나님 아버지, 지난 한 주간도 주님의 은혜 속에 지내다가 다시 아버지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립니다. 저희에게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고자 결단하는 마음을 주신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나라는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바닷물을 먹물 삼아도 다 쓸 수 없을 만큼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범사(凡事)에 불평 불만을 앞세우는 강퍅한 마음으로 살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 저희로 돌이켜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다시는 전쟁이 없는 완벽한 평화체제가 구축되게 하시고, 나아가 평화 통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역사(歷史)를 쓰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出)애굽 시키신 하나님, 믿지 않는 바사왕(王) 고레스를 통해서도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귀환토록 역사(役事) 하신 하나님, 지금껏 그리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도, 하나님께서 직접 주장(主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모두 합심해서 기도하게 하옵소서)
오늘날 세상은 날로 하나님의 창조질서(創造秩序)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께 귀를 막고 있습니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 아버지, 세상 모두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으로 되돌아오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저희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치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고, 때로는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거룩한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저희의 믿음생활을 바로잡아 주시옵소서.
저희로 정직, 온유, 겸손하며, 상대방을 관용, 격려, 축복하는 사랑의 등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행여 정의(正義)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분열케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교회와 나라를 하나되게 통합하는 그런 크리스찬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국론을 분열시키는 언행을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온누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더욱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로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사명을 위해 전력으로 수고하시는 우리 이재훈 담임목사님과 교역자님들을 영육 간에 강건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땅끝까지 선교하고 계신 선교사님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주향한 찬양 사역팀”을 비롯하여 여러 모습으로 교회를 섬기는 손길들에 예수님의 평강이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병석에 계신 환우 한 분 한 분을 치료하고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저희에게 믿음을 주시고, 온누리 교회를 주시고, 또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시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괄호 안은 실제 기도 시 생략하였던 부분임)
2018-12-19 09:38 |
[기고] <262> ‘한국약학사회지’ 발간사
요즘 금년 말에 창간할 ‘한국약학사회지(藥學史會誌)’의 발간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하 그 초안을 공개한다.
“1914년 약품취급강습회로 첫 발을 뗀 근대 약학교육은 100여년의 기간을 두고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교육 기간 면에서는 3개월, 1년, 2년, 3년 4년을 거쳐 2011년부터는 팜디(Pharma D)를 배출하는 6년제 교육이 시작되었고, 전국의 약학대학 수도 1개교에서 전후(戰後) 20개교 시절을 거쳐 2011년부터 35개교로 늘어났습니다.
1999년 선플라(SK 케미칼)로부터 시작된 국산 신약개발은 2018년에 케이캡정 (CJ 헬스케어)의 개발로 그 수가 무려 30개에 이르렀습니다.
2000년부터 실시된 의약분업을 통하여 의약품의 안전 사용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 의약품의 제조 및 사용 등 전 유통 과정을 투명하게 관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1998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이 설립되고 2013년에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로 발전 개편됨으로써 규제 및 관리를 통하여 의약품의 안전성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식약처는 2016년 세계 6번째로 국제의약품규제조화위원회(ICH)의 정회원이 됨으로써 국제 의약품 안전관리를 리드하는 규제기관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그 동안 우리나라의 약학 관련 제(諸) 분야는 문자 그대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역정(歷程)에 대한 기록을 돌아 보면 한국약업사(홍현오, 1972), 한국의약사(김신근, 2001), 서울대학교약학대학100년사(2016) 및 한국약학사(한국약학대학교육협의회, 2017) 등 빛나는 업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그 양과 질은 매우 빈약합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다른 분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약계 또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에 여력(餘力)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과거의 역사로부터 미래를 발전시킬 지혜를 찾아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방법에 대한 지혜를 주고, 시행착오의 반복을 피하게 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과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의 효율적인 발전 방안을 추구하는 미래학이라 할 것입니다. 과거에 관한 자료와 기록의 집적(集積)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를 갖지만, 이들에 대한 시대사적 및 문화사적 해석을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서 현재와 미래에 대한 통찰을 주는 역사로 승화(昇華)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학사 연구 현황은 역사 연구의 첫 재료가 되는 자료와 기록의 집적에서부터 매우 빈약한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늘 과거사에 대한 자료의 빈약함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안에 관한 자료 수집과 기록 역시 소홀히 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반성하여야 합니다.
이에 대한 반성에서 만들어진 것이 2014년 4월 대한약학회 소속으로 창립된 약학사 분과학회입니다. 우리 분과학회는 창립된 이래 9회에 걸쳐 한국의 약학사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여 우리나라 약학사를 연구하여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 동안의 활동을 그때 그때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이루었습니다.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바로 이 ‘약학사회지’의 창간입니다. 앞으로 이 회지에는 다양한 약계의 과거사와 더불어 현재 진행형 사안에 관한 자료와 사실이 기록으로 실릴 것입니다. 비록 창간호는 연 1회 뉴스레터 성격으로 발간되지만 머지 않은 장래에 연 4~12회 발간되는 원보(原報) 중심의 학술지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약학사회지’ 및 ‘약학사분과학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한 약계(藥界) 제현(諸賢)의 적극적인 지도 편달을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끝으로 분과학회의 나아갈 바를 자문해 주시는 운영위원 여러분, 이 회지 발간을 위해 헌신해 주신 편집위원 여러분, 그리고 이 회지의 발간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아무쪼록 창간 과정이 순조롭기를 바랄 따름이다.
2018-12-05 06:38 |
[기고] <261> 논쟁의 기술-목소리와 태클
1. 한약분쟁과 여의도 법정- 1993년 3월 31일 오후 7시 반에 한국방송공사(KBS-TV)에서 신기남 변호사가 재판장 역할을 하는 ‘여의도 법정’이라는 공개방송이 있었다. 주제는 약사가 한약조제를 하는 것이 타당한가였다.
진행 방식은 한의사 측에서 두 명, 약사 측에서 두 명이 나와 1시간 정도 토론을 하고 난 후 시청자들의 전화 투표를 집계하여 어느 쪽의 주장이 여론의 지지를 더 받았는가를 공개하는 것이었다. 나는 약사 측 변론인으로, 대치동에서 약국을 개업하고 계신 김양일 약사님은 약사 측 참고인으로 출연하였다.
나는 약사의 한약 취급이 당연하다는 논리에 비교적 자신이 있었으므로 차분한 톤으로 내 주장을 전개해 나갔다. 때때로 한의사 측에서 거칠게 공격해 왔지만 나는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내 옆에 앉은 김 약사님은 한의사 측의 공격을 한번 세게 맞받아치고 싶은 기색이었다.
나는 김 약사님의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그냥 점잖게 가시죠’라며 흥분을 제지하였다. 그런데 1시간인가 걸린 양측의 토론이 끝나자마자 공개된 전화 여론 조사의 결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응답자의 79%가 약사의 한약조제를 반대하였다. 어이가 없었다.
뒤에 나와 약사회는 우리가 왜 이 논쟁에서 졌는가를 곱씹어 보았다. 결론 중 하나는 대중들을 상대로 한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토론자의 목소리가 클 필요도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시장에서의 싸움에서는 싸움꾼의 목소리가 커야 구경꾼의 호응을 얻는 데 유리한 것처럼, 시종 차분했던 약사 측 주장보다는 큰 목소리로 흥분해서 우겼던 한의사 측의 주장이 시청자들에게 더 그럴 듯 해 보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1) 변론인(나)의 보다 강력한 논리 전개, (2) 참고인(김 약사님)의 큰소리 후원, (3) 약사회원들의 보다 적극적인 전화 걸기 등이 필요했던 것 같다.
2. 의약정 토론회- 2000년(?) 11월 1일 저녁 과천에 있는 보건복지부 회의실에서 최선정 장관 주재로 의약분업 실시에 대한 의약정(醫藥政, 의사, 약사, 정부)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의사 측에서 10명, 약사 측에서 10명이 토론자로 참여하였는데 나는 약학계를 대표하는 약사팀의 일원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약사 측 참석자는 의약분업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의사 측은 분업을 반대하는 논리를 전개하는 상황이었다. 양측은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자기 측의 주장을 개진하였다.
결국 이날 토론회를 계기로 2000년 11월 11일 의약분업 실시에 관한 의약정 합의에 도달하게 되었지만, 내가 이 토론회를 통하여 깨달은 것은, 위에서 언급한 ‘여의도 법정’을 통하여 깨달은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 토론회에서 어떤 의사 측 인사가 약사 측에 신랄한 공격을 해 오고 있을 때이었다. 마침 그 사람은 아마 약국이라고 말해야 할 대목에서 약방이라는 식의 실언을 하였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인 용어 사용에 실수를 하였다.
그러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약사 측 토론자 S 씨가 돌연 큰 소리로 “약방이 아니라 약국입니다. 사과하세요” 라는 식으로 상대방에게 태클을 걸었다. 나는 순간 ‘왜 점잖지 못하게 사소한 문제를 저렇게 까지 걸고 넘어지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 측 인사는 자존심 때문인지 쉽사리 사과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S씨는 상대방의 발언을 물고 늘어지며 끈질기게 사과를 요구하였다. 의사 측 인사가 끝내 사과를 하였는지 여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S씨의 태클 때문에 그 사람이 자신의 논리를 잃고 비틀거렸다는 것이다. 이 때 나는 논쟁에서는 무식한 태클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의 두 경험을 통해서 나는 논쟁에 나갈 때에는 (1) 차문하게 논리적인 주장을 전개하는 사람과 (2) 무식해 보일 정도로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비논리적인 사람을 한 팀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결국 오직 논리로만 논쟁에 임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한 것 같다. 논리가 이기는 세상이 더 합리적이긴 하지만….
2018-11-21 09:38 |
[기고] <260> 전도(傳道)의 조건
교회는 오늘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어라, 예수님을 믿어라’ 외친다. 교인들도 여기저기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믿으라’고 전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웬 일일까? 잘 알 수는 없지만, 혹시 ‘믿으라’고 말하는 교인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교인은 말을 안 해도 존재 자체만으로 많은 사람을 감동시켜 하나님을 믿게 만들 수 있다. 1908년 미국 선교사가 세운 금산 교회 (전북 김제시 금산면)에서 첫 장로를 세우게 되었을 때, 교인들은 황당(?)하게도 부농(富農)이자 함께 교회를 세웠던 양반 조덕삼 대신 그의 마부(馬夫)이자 상놈인 이자익을 뽑았다.
뽑은 교인들마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조덕삼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앞장 서서 이자익을 장로로 받들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이자익을 물질로 후원하여 신학교에 다니게 하였다. 그리고 이자익이 목사가 되자 그를 초빙하여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양반 상놈의 구별이 엄격하던 그 시대에 이 소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감동을 주었다. 교인뿐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교회도 남녀차별이나 교육, 의료, 행정 등 모든 면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자연히 사람들은 교회를, 그리고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에 감동도 없고 배울만한 선진 문화도 없으며, 교인들의 언행도 모범적이지 못하다고 수군댄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연일 보도되는 교회 안의 다툼이나 교인들의 부도덕한 언행이 그런 인식을 만들고 말았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처럼 교회와 교인을 믿지 않는다. 자연히 그들이 외치는 ‘예수 믿으세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1980년대 학교 교수실에는 문학전집 같은 것을 팔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가진 돈이 없다고 해도 ‘돈은 나중에 주셔도 된다’며 물건을 놓고 도망치듯 사라지곤 했다. 그들은 물건 값을 떼어먹고 도망 갈 교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교수는 100% 믿을 수 있는 고객이었다.
1980년대 후반, 내가 집을 살 때에도 집을 파는 사람이 내게 이것 저것을 묻다가 내가 서울대 교수라는 사실을 밝히자, 순간 나를 무조건 믿을 수 있다며 계약서에 바로 도장을 찍었다. 그에게도 서울대 교수는 믿을 수 있는 보증수표 자체였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사람들로부터 그런 신뢰를 받고 있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라는 교회와 교인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식약청장으로 근무하던 2004년, 감기약 성분인 PPA의 안전성과 관련한 사안이 발생하여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나가 설명을 할 일이 생겼다. 그 때 일부 국회의원들은 식약청이 제약회사로부터 뭔가 대가(代價)를 받고 제약회사에게 유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모두(冒頭) 발언을 통해 “내가 이 일과 관련하여 떳떳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내가 교인임을 밝히는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을 믿는 교인이라면, 자신이 교인임을 밝히는 순간 바로 사람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교인들의 언행(言行)도 전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모태교인(母胎敎人)인데 토요일 저녁에 술을 마시더라도 일요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예배 중 찬송가를 부르려는데 옆자리에 앉은 아내가 갑자기 ‘여보 술 냄새 나니 입 벌리지 말아요’하며 입을 틀어 막았다.
그 순간 그는 ‘아, 내가 바로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이었구나’를 깨닫게 되었단다. 결국 그는 뒷날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다.
오늘 날 도처에서 하나님의 질서가 급격하게 파괴되고 있다. 진리를 통한 인류의 구원이 오늘 날처럼 절실한 때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교회와 교인은 ‘하나님을 믿으라’ 외치기 전에 스스로 돌이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오 하나님!!
2018-11-07 09:38 |
[기고] <259> ‘해방’이 아니라 ‘광복’
오늘은 경향신문의 엄민용 기자가 2015년 광복절에 쓴 “[광복 70주년 기획] 절대 써서는 안 될 일본말 찌꺼기-①역사왜곡”이란 글을 다소 수정 압축하여 소개한다.
1) ‘민비 시해(閔妃 弑害)’가 아니라 ‘명성황후 살해 (明成皇后 殺害)’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부인은 ‘명성황후’이다. 그런데 일본은 그를 ‘민비’라고 깎아 내렸다. 비(妃)는 원래 “임금이나 황태자의 아내”를 가리키는 말로, “황제의 정실부인”을 가리키는 후(后)보다는 품계가 낮은 호칭이다.
이도 모자라 일본은 고종 32년(1895)에 자객들을 시켜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을미사변인데, 일본은 이 사건을 ‘민비 시해’라고 부른다. ‘시해’란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신하가 왕을 죽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결국 ‘민비 시해’란 조선인이 “고종왕의 부인인 민 씨를 죽였다”는 역사왜곡을 담고 있는 말이다. ‘명성황후 살해’라고 해야 맞다.
2) ‘해방(解放)’이 아니라 ‘광복(光復)’
‘해방’은 일본이 만든 한자말은 아니다. 그러나 ‘8•15 해방’이라고 하면 역시 역사를 왜곡하게 된다. 해방은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함”을 뜻하는 말로, 자유를 찾거나 찾게 한 주체가 ‘내’가 아니라 ‘남’이라는 의미의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이라고 하면, 우리가 우리 힘으로 주권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일본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권을 돌려줬다는 얘기가 되고 만다.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을 뜻하는 말은 광복이다. 더 이상 ‘해방’ 이란 말을 써서는 안되겠다.
3) ‘이조(李朝)’가 아니라 조선(朝鮮)
‘이조’란 “이씨 조선”을 줄인 말인데, ‘이씨 조선’은 일제가 조선의 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만들어 낸 말이다. “이씨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이는 옛날에 중국이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들을 오랑캐로 격하해 불렀던 일과 똑같은 것이다. 이조가 아니라 조선이다.
4) ‘정신대(挺身隊)’나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가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또는 ‘일본에 의한 성노예’라고 해야
‘정신대’’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뜻이다. 한국 여성들이 일본을 위해 스스로 부대를 만들어 전선으로 갔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종군기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군위안부’ 역시 “자발적으로 군을 따라 다님”을 의미한다.
자신들이 한 짓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여성들이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몸을 팔았다고 주장하는, 뻔뻔하고도 악랄한 낱말이다. 현재 한국과 중국 등 한자문화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을, 유엔 등 국제기구를 비롯한 영어권에서는 ‘일본에 의한 성노예’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5)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아니라 ‘을사조약(乙巳條約)’ 또는 ‘을사늑약(乙巳勒約)’
흔히 ‘을사보호조약’이라고 부르는 것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지켜 주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라는 뜻을 지닌 말로, 일본이 마음대로 만든 용어이다. 우리는 그냥 ‘을사조약’ 또는 ‘을사늑약’이라고 써야 한다. 늑약이란 “억지로 맺은 조약”이란 의미이다.
6) ‘한일합방(韓日合邦)’이나 ‘한일병합(韓日倂合)’이 아니라 ‘일본에 의한 병탄(倂呑)’ 또는 ‘강제 한일합병(韓日合倂)’
‘합방’이나 ‘병합’은 두 나라가 평화적으로 합의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흡수 통합한다는 의미이다. 이 용어를 일본의 군인과 경찰이 서울을 장악하고 창덕궁을 포위한 뒤 날조된 문건으로 국권을 강탈한 사건에 쓰는 것은 매국노나 할 짓이다.
실제로 ‘한일합방’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들은 을사오적(乙巳五賊,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다. 우리는 “무력에 의한 침탈”을 의미하는 ‘병탄’이란 말을 써야 한다. 굳이 ‘합병’이나 ‘병합’이란 단어를 사용하려면 그 앞에 ‘강제’란 말을 붙여야 한다.
앞으로는 관련 용어의 의미를 잘 알고 써야겠다는 생각이다.
2018-10-24 09:38 |
[기고] <258> 성상현 교수 추모
지난 7월 24일, 서울대 병원에서 서울 약대 성상현 교수가 향년 50세로 별세하였다. 성 교수는 1990년 2월 서울약대를 졸업하고 1992년 2월 동 대학원에서 생약학으로 석사 학위를, 1998년 8월 생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2006년 2월 서울 약대 전임강사로 시작하여 2008년 2월 조교수, 2012년 3월 부교수, 그리고 금년 3월부터 교수로 봉직하였다.
7월 26일 오전 11시, 관악 캠퍼스 신약개발센터 진양홀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이봉진 약대 학장은 “오늘 우리는 너무나 아까운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성상현 교수님을 추모하기 위해 이 곳에 모였습니다. 성상현 교수님은 2008년 서울대 약대에 부임하신 뒤 소탈한 성품과 친근함으로 서울대학교 전 구성원들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이신 많은 교수님들과 직원 그리고 학생들 모두 성 교수님을 그리워하기에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특히 성 교수님은 2015년 2학기부터 교무부학장으로 근무하며, 저와 약대의 많은 현안을 함께 해결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후략)”라며 고인을 추모하였다.
이어 37대 약대 학생회장 성혜빈 양은 “온 마음을 다하여 주변에 사랑의 의미를 전하시고 세상을 밝히시던 교수님께, 그 밝으신 웃음 뒤에 감춰져 있던 남은 날들이 사라져 가는 걸 저희는 미쳐 알지 못했습니다. 강단에 서서 저희에게 전해주시던 그 불꽃 같던 열정의 온기가 다 식기도 전에 당신은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학생을 위한 교수님이셨습니다 (후략)” 라고 추모하였다.
한편 대학 동기인 강수연 박사는 페이스 북에 다음과 같은 추모의 글을 올렸다.
"제 이름은 승~상현입니다." "승? 우리나라에 승씨가 있어요? 승상현이예요?" "아니요, 승이 아니고 승~이요" "그러게요, 승!" "아이 참, ㅅ, ㅓ, ㅇ, 승!"
1986년 봄이었다. 대학 새내기들로 서로 얼굴 바라보는 것도 수줍었던 그 때, 젊음처럼 빛나던 허공을 향해 상현이는 자신의 이름을 써 보였다. 아무리 애써도 승~상현으로 끝나는 이름 때문에 우리 모두는 까르르 웃어댔고 그 웃음 가운데 우리보다 더 수줍은 미소의 상현이가 있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스스로 손을 들고 과대표가 된 친구, 이후로 오랫동안 우리는 상현이를 승~상현이라고 놀렸지만 사투리가 하루 이틀에 없어지는 게 아니라며 상현이는 즐거이 우리의 농담을 받아주었고 늘 웃어주었다.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착한 사람입니다'라고 이마에 써 붙여 놓은 것 같던 친구, 그런 사람이었다, 상현이는.
그랬던 그가 영정사진으로 남았다.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현실 같지 않은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나는 기도를 올리다 말고 상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학교에 방문했을 때 전화해서 차 한잔이라도 같이 할 것을.., 중환자실 면회가 안 된다 해도 문 앞에라도 가 볼 것을.., 하나님께 기도를 더 열심히 할 것을.. 나는 보이지 않는 주먹으로 내 가슴을 계속 아프게 내리쳤다.
바보같이 나는 왜 또 기적을 믿었을까.. 서울대 약대 21동의 추억이 상현이와 함께 내 마음 한구석에서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잡지 못했다. 잡을 수가 없었다. '성상현교수, 천국에 가면 네 이름 잘 말할 수 있지? 또 우리 같은 친구들 만나서 승상현이라 불리우지 말고, 자기소개 잘 해. 내 친구여서 고마웠다. 잘 가라. 좋은 친구.'
8월 16일, 고인의 부인 고수경님은 조문해 주신 분들께 다음과 같은 감사의 인사를 보내 왔다. “조문과 따뜻한 위로에 감사 드립니다. 남편이 떠나고 벌써 3주가 지났습니다. 많은 분이 가는 길에 함께 해주신 덕에 남편을 외롭지 않게 보냈으나, 부서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것도 힘겨워 이제야 감사 인사를 드리게 되어 송구한 마음입니다. (중략). 22년을 늘 새신랑 같았던 남편이 없는 세상이 막막하기만 하지만, 남편을 추억하며 다양한 기억을 나눠 주시면 앞으로 살아가는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후략).”
성 교수! 편히 가시오.
2018-10-10 09:38 |
[기고] <257> 제1회 약물동태 워크샵
서울대 약제학 연구실은 지난 6월 18-19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게스트 하우스에서 <2018 한국 약물체내동태학 붙캠프(Bootcamp) 워크샵>을 개최하였다. 하루 반의 일정으로 진행된 이 워크샵은 서울대 종합약학연구소, 한국약제학회 및 일본 나가이 재단의 후원을 받았다.
내가 2년전 일본 Riken (理硏)의 스기야마(Sugiyama) 교수 팀이 개최한 워크샵을 참관하였을 때, 우리도 이런 워크샵을 개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대 약대 정석재, 김대덕, 이우인 교수 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워크샵을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기쁜 마음으로 간단하게 그 경과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이번 워크샵에 대한 국내 연구자들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실제로 국내 15개 제약사, 연구소 및 9개 대학으로부터 총 73명 (서울대 약제학 전공 대학원생 25명 포함) 이 참가하였다. 특히 한국어 의사 소통이 가능한 미국 및 중국의 연구자도 몇 명 참가하여 활발한 질문과 토론에 참여함으로써, 이 워크샵이 국제적 학술행사로 발전될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첫날에는 1) 컴파트먼트/비컴파트먼트 모델 분석 (정석재) 및 연습 (안성훈, 신소영), 2) 클리어런스 및 PBPK 개념 (정석재) 및 연습 (이경륜, 구태성)을 다루었다. 둘째 날에는 3) in vitro 실험결과로부터 in vivo 클리어런스 예측하기 (IVIVE, 이우인, 이승학) 및 연습 (윤인수, 맹한주), 4) 약물 상호작용 예측 (DDI, 이우인, 김수진) 및 연습 (김수진, 이가영), 5) 약물유전체학 (이우인)을 다루었다. 또 둘째 날에는 약물동태학 분야의 최근 연구 성과 (스기야마 교수)와 신약후보물질의 IND 신청시 PK 데이터 파일링의 사례 (구태성)도 소개되었다.
이번 워크샵의 하일라이트는 신약개발 과정에서 얻은 약물동태 데이터를 이용하여 문제를 푸는 시간이었다. 모든 참가자를 한 조에 약 6명씩 10개 조로 나누고, 각 조에게 1~4번 주제와 관련된 실제 데이터를 주고 제시된 문제를 풀게 한 다음 그 결과를 해석해 보도록 하였다.
이 문제 풀이를 돕기 위해 서울대약대 대학원생으로 구성된10명의 준비팀은 사전에 수 차례에 걸쳐 교육자료 및 실전문제를 작성하고 수정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들 준비팀 및 참가자들의 열정과 전문지식은 국내 약물동태학 연구 커뮤니티에 성장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감사하게도 워크샵은 물론 준비팀의 뒤풀이 모임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뒤풀이 모임에서는 이번 워크샵 참여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다음 번 워크샵에서는 더욱 효율성을 높이자는 다짐이 있었다. 예컨대 교육 수준을 초급 및 중급으로 나누고, 문제풀이 시간을 충분히 배정하자는 등의 개선 방안에 의견이 모아졌다.
국내 제약회사에서 약물동태학은 아직도 뿌리를 튼튼히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30년간 이 분야를 전공하고 제자를 길러낸 은퇴 교수로서 이에 대해 늘 책임감과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아무쪼록 이 워크샵이 신약개발의 현장에서 약물동태학의 착근(着根)에 실질적인 기여를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끝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이번 워크샵을 주도한 정석재, 이우인 교수 및 헌신적으로 봉사해 준 국내 약물동태학 분야의 실무연구자들, 교재 등 워크샵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준비한 서울약대 대학원 약제학 전공 대학원생들, 그리고 수년간의 노우하우를 숨김없이 전수해준 준 Riken의 스기야마 연구실의 협력에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끝으로 이 워크샵을 준비한 팀원들의 이름과 소속은 다음과 같다. 정석재 (서울약대), 이우인 (서울약대), 안성훈 (강원대약대), 신소영 (원광대 약대), 이경륜 (생명공학연구원), 구태성 (충남대 약대), 윤인수 (부산대 약대), 이승학 (LG 화학), 맹한주 (가천대 약대), 김수진 (CJ헬스케어), 이가영 (대웅제약), 이영주 (경희대약대), 심창구 (서울대), Yuichi Sugiyama (Riken).
2018-09-19 09:38 |
[기고] <257> 초청강연
지난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4박 5일 동안 중국 감숙성 (甘肅省)의 성도(省都)인 란주 (蘭州, Lanzhou)시 소재 란주대학교에서 열린 ‘제3회 약물전달체 란주 포럼’에 참석하여 “Transporter-targeted delivery of drugs”란 주제로 초청강연을 마치고 돌아 왔다.
초청자는 란주대학교 교수인 무신안 (武新安, Xian Wu) 박사였다. 나와 함께 UCSF의 Benet교수, Kanazawa 대학의 Tamai 교수도 초청을 받았다.
이번으로 내가 국제학술대회에서 초청강연을 한 횟수는 47회에 이른다. 이 중 세 번은 일본어로, 44회는 영어로 발표하였다. 어떻게 횟수까지 기억하느냐 하면, 몇몇 국내외 학회의 펠로우가 되기 위해, 또는 무슨 무슨 상을 받기 위해 이보다 더한 것까지 시시콜콜 적어낸 적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내가 교수가 된 1983년 즈음에는 국제 학회에 자비(自費)로 참석하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참가 횟수가 늘어나면서 비용과 노력에 비하여 얻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우선 내 영어 실력이 시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미국이나 유럽 학회에 참석할 경우 시차(時差) 때문에 더욱 영어가 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로는 내 전공 실력이 부족해서 발표 내용을 들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 이유에서 나는 ‘내가 들어서 알만한 내용은 듣지 않아도 될 것이고, 내가 모르던 내용은 들어 봤자 이해를 하지 못하니까 들을 필요가 없다, 즉 어느 경우에나 들어봤자 별 소득이 없다’는 냉혹(?)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 해외에 나가면 모처럼 만난 동료나 제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느라 학회장에 들어갈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래저래 점차 ‘비싼 내 돈 내고 국제학회에 갈 일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경비를 부담할 테니 와서 강연해 달라는 학회에만 가기로 마음을 먹고 실행하였다.
내가 47회에 걸쳐 강연한 학회 중 상당수는 세계 일류의 학회는 아니다. 내 연구 성과가 그 정도로 대단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후배 연구자들은 세계 최고의 학회로부터 초청을 받아 특강을 할 정도로 뛰어난 연구 업적을 쌓기를 기원한다.
내 경우, 국제학회의 강연 초청을 수락하고 나면 곧바로 영어 발표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습하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한 나는 일본어 발표는 어느 정도 임기응변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영어로 발표하는 경우에는 무슨 말로 시작을 해야 하나부터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매 문장마다 ‘그러므로’, ‘그러나’, 또는 ‘한편’ 과 같은 접속사 선택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러나’로 시작해야 할 문장을 얼떨결에 ‘그러므로’로 말해 버리고 나면 그 뒷감당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반드시 설명했어야 하는 말을 빼놓는 가는 바람에 당황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나는 ‘그러나’, ‘그러므로’를 포함해서 내가 해야 할 거의 모든 말들을 슬라이드에 빽빽하게 써 넣는다.
나도 스티브 잡스처럼 키워드나 사진 몇 개만 스크린에 띄어 놓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무대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설명을 하면 한결 폼이 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언감생심! 그건 내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 중국학회에서는 학회일 하루 전에 그 곳 대학원생들을 지도하는 워크샵도 있었다. 20여명의 대학원생과 그곳 지도교수가 모인 자리에서 세 명의 대학원생이 각자 자신의 연구 결과를 30분씩 영어로 발표하면, 내가 질문이나 코멘트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초청 받은 다른 두 명의 교수도 나처럼 각자 세 명의 논문 발표를 지도하였다. 이 워크샵은 사전에 예기치 못한 일이었는데, 두 시간에 걸친 워크샵을 통하여 그들의 높은 연구 수준에 큰 자극을 받았다.
포럼 전날 란주 시내를 관통하는 황하(黃河)를 보고, 학회 후에는 돈황(敦煌)에 날아 가서 낙타를 탄 다음, 막고굴(莫高窟)을 구경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2018-09-05 09:38 |
[기고] <255> 바로 다툴 준비를 하고 사시나요?
십여 년 전 모 지방 큰 도시에 갔을 때 택시 정거장 부근에서 본 장면이다. 두 대의 택시가 서 있었는데, 뒤에 선 택시가 앞 차에게 경적을 울렸다. 내 차 좀 나가게 앞으로 차를 좀 빼달라는 의미 같았다. 그러나 앞 차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아마 ‘네가 후진 했다가 돌아 나가면 되는데 왜 나보고 비키라느냐’ 반발하는 것 같았다. 화가 난 뒷 차는 수 차례 반복해서 경적을 울려댔다. 잠시 후 앞 뒤 차의 문이 열리더니 두 차의 운전자가 내렸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거두절미(去頭截尾) 하고 바로 서로 치고 받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와! 나는 두 사람의 성격 급함에 기가 질려버렸다.
얼마 후 다른 지방 큰 도시에 갔을 때의 일이다. 택시를 탔는데 얼마나 운전이 난폭 하던지 택시 뒷좌석 창문 위에 달린 손잡이에 결사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기사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약국에 감기약을 사러 갔는데 약사가 몇 가지 불필요(?)한 약의 구입을 권유하기에 화가 나서 바로 약사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와 차도에 팽개쳤다고 한다. 마치 자기 자랑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와! 이 동네 사람들 성질 한번 대단하구나. 내가 만약 여기 와서 약국을 열었다면 그런 꼴을 당할 뻔 했구나’ 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사람들은 잘도 다툰다. 별 일도 아닌 것에 용케도 싸움을 한다. 물론 살기가 각박해진 데에 첫 번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같이 체격이 왜소한 사람은 싸우고 남을 만큼 억울한 일을 당해도 아무 말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나는 평생 남에게 싸움을 걸지 못하는 체질이 되어 버렸다.
약 40년전 낙성대 근처에 살 때, 두 옆집 사람이 후딱 하면 싸우길래 하루는 어떡하면 저렇게 잘 싸울 수 있나 한 수 배울 참으로 아내와 함께 유심히 관찰하였다. 들어 보니 우리 같으면 도저히 싸울 깜도 되지 않는 걸 가지고 용케도 잘 싸우고 있었다. 그 때 깨달았다. 우리는 싸움 체질이 못 된다는 것을. 그 때부터 싸움하는 법 배우기를 아예 포기하였다.
서울 모처에 있는 처가에 갔을 때의 일이다. 부득이 주택가 어느 집 앞에 잠시 주차를 하려 드는데 어떤 젊은이가 나오더니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남의 집 앞에 차를 새우면 자기 차가 어떻게 나가느냐는 것이었다. 잘하면 사람을 칠 기세이었다.
물론 내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토록 난폭하게 나올 일까지는 아니었다. 체격이 왜소한 나는 그 젊은이에게 그저 미안하다고 굽실거리며 얼른 차를 빼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남부순환도로에서 까치고개를 넘어 사당역 쪽으로 차를 운전해 내려가는데, 갑자기 차도(車道) 한 선이 밀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내다 보니 젊은 남자가 늙수그레한 남자 한 명의 멱살을 잡고 봉고 차 옆면에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젊은이는 “그래 나 몇 살 안 먹었다. 어쩔래 이 XX야” 하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십중팔구 두 사람은 운전 중 누군가 때문에 언쟁을 하게 되었다. 차를 세우고 서로 당신이 잘못한 거라고 다투다가, 바락바락 덤비는 젊은이에게 ‘너 몇 살이냐? 어딜 어른한테 그 따위로 덤비느냐?’고 연장자가 야단을 쳤을지 모른다.
이 말이 젊은이의 화를 돋구었는지 결과적으로 백주 대로(白晝大路)에서 젊은이에게 목을 졸리는 망신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본 이후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비굴하게 사는 게 인생의 지혜’라는 평소의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뉴스는 매일 같이 말다툼, 주먹다짐, 칼부림 같은 다툼 소식을 쏟아낸다. 나라간에는 무역전쟁, 외교전쟁 또는 진짜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도 나라도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싸울 수 있는 만반의 준비, 즉 임전태세(臨戰態勢)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정녕 하나님 뜻대로 서로 사랑하며 살 수는 없는 일일까? 하나님 섭리의 결말이 두려워진다. 모든 힘있는 사람들과 나라들의 각성이 절실해 보인다.
2018-08-22 09:38 |
[기고] <254> 통일약학연구회의 창립
지난 6월 26일 오후 3시 30분, 서울대학교 21동 414호실 (약학역사관 자료실) 앞에 이봉진 서울대 약대 학장 외 8명의 교수 등이 모여 조촐하게 서울대약대 ‘통일약학센터’의 현판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4시부터는 신약개발센터 (143동)에서 ‘통일약학연구회’ 창립기념 심포지엄 및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연구회의 창립에 앞서서 1) 서울대 약대 박정일 교수의 ‘북한 약용식물 자원의 산업적 활용을 위한 기반연구’ (2017. 4,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지원), 2) 이혜경 약사의 ‘북한의 약학제도’ 세미나 (2018. 1. 13, 호암교수회관), 3) 박태춘님의 ‘북한의 약학교육’ 세미나 (2018. 2. 27, 호암교수회관), 4) 박정일 교수의 ‘북한의 약사양성제도’ 연구 (2018. 4,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지원), 5) 박태춘님의 ‘북한의 약학교육과 악사제도’ 세미나 (2018. 4. 20, 제8회 약학사분과학회 심포지엄, 코엑스) 등의 통일약학 관련 학술 활동이 있었다.
여기에서 이혜경 약사는 1990년 함흥약대를 졸업한 북한 약제사로 탈북 후 2009년에 대한민국의 약사면허를 취득하였고, 박태춘님은 탈북하기 전에 함흥약대 교원이었다.
이상과 같은 관련 학술 활동이 거듭되면서 약학자들 간에 통일약학연구회의 설립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알고 보니 이미 서울대학교는 2016년부터 통일부의 ‘통일교육 선도대학’으로 선정되어 활동하고 있었고, 2011년 4월에 ‘통일포럼(2000년 11월 출범)을 모태로 출범한 통일평화연구원(IPUS)은 산하에 통일학 센터와 HK평화인문학연구단을 두고 교내 33개 통일 연구기관을 하나로 묶어 통일 관련 교육 및 연구를 선도하고 있었다.
또 2012년에는 서울대 의대에 통일의학센터가, 2013년에는 치과대학에 통일치의학센터가 설립되어 있었다. 이처럼 서울대학교 안에서만도 이미 본부 및 여러 단과 대학 차원에서 통일 관련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금년도에는 남북정상회담(판문점, 4.27) 및 북미 정상회담(싱가포르, 6.12)의 개최로 통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국가적 화두가 되었다. 이러한 주변 상황을 토대로 통일약학연구회 및 통일약학센터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2018년 6월 12일, 박정일 교수를 중심으로 12명의 교수 등이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모여 창립 준비회의를 갖고, 2018년 6월 26일에 이 연구회의 창립 총회 및 기념 심포지엄을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로 6월 26일 오후 4시부터 신약개발센터 1층에 있는 신풍홀에서 다음 순서로 연구회의 창립 기념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개회 순서에서는 이봉진 학장의 개회사와 전직 및 현직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장의 축사가 있었다.
16:00 개회
16:10 서보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한반도 평화의 길
16:30 김진숙(보건복지부): 통일약학의 현황과 시사점,
16:50 정소현(가천대 약대): 통일시대 의약품안전관리체계 구축 및 운영방안
17:10 백우현(KPDA): 내가 본 북한의 제약
17:30 창립총회 및 기념촬영
18:00 간친회(신약개발관 143동)
이 심포지엄은 아침부터 시작된 장마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약 70명이 넘는 청중이 참석하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이메일 등을 통해 이 연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겠다고 회신한 사람도 120여명에 이르렀다.
통일약학 연구에 대한 참석자들의 뜨거운 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 열린 총회에서는 회칙을 통과시킨 후, 서울대 심창구 명예교수를 회장으로, 이은방 명예교수를 감사로 추대하였다.
앞으로 이 연구회 및 센터가 약학 교육 및 연구, 약사 양성, 의약품의 인허가 및 안전관리, 의약품 제조 및 유통, 병원 약사 업무, 개업 약사 업무 등 약무(藥務) 전반에 걸쳐 남북 간의 차이를 파악하고, 남북간의 제 분야에 걸친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동질성 확보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끝으로 이 연구회 및 통일약학 센터의 출범을 시종 주도한 서울대 약대 박정일 교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2018-08-08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