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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48> 내리 사랑
연녹색 나뭇잎에 기분이 상쾌해지는 봄이다. 봄은 아마 네 계절 중 가장 “볼만’하다고 해서 ‘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봄이 볼만한 것은 꽃도 나무도 이 때 어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그 어린 모습이 예쁘기 때문이다. 어린 모습이 예쁜 것은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강아지가 개보다 귀엽고, 어린이가 어른보다 예쁘다.
반면에 늙거나 오래된 것은 사람, 동식물, 물건을 막론하고 솔직히 말해서 대체로 추하다. 얼마 전 모처럼 당구장엘 가봤더니 손님이라고는 몽땅 노인들뿐이었는데, 분위기가 좀 ‘거시기’하였다. 60대에도 경로당에 가기 싫어하셨던 어머니 마음이 대번 이해되었다.
사람이나 동물은 자기 자식(새끼)을 엄청 예뻐한다. 부모에게는 새끼가 정말로 예쁘게 보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자식은 다 예쁘고, 늙으면 다 추해지도록 프로그램 해 놓으셨을까? 만약 아기가 팔구십 늙은이의 추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어땠을까?
아마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기 쉽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로 종족을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또한 사람이 늙어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의 모습이 갓 태어난 아기처럼 가장 예쁘도록 프로그램화 놓으셨다면, 자식들은 부모와의 헤어짐을 지나치게 가슴 아파하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모습을 추하게 만들어 놓으신 이유는, 부모와의 이별을 쿨하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종족의 보존’과 ‘쿨한 이별’을 위하여, 태어날 때 가장 예쁘고, 떠날 때 가장 추한 모습이 되게 만드신 하나님의 프로그래밍(섭리)에 감사 드린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쁜 새끼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부모의 본능이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부모로부터 자식으로의 ‘내리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 사랑을 지나치게 자랑할 일은 아니다.
반면에 자식의 부모 사랑, 즉 효도는 물을 상류로 역류(逆流)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효도는 인간의 본능이 아닌 모양이다. 나이 먹어 추한 모습으로 바뀐 부모를 예쁜 어린 새끼 사랑하듯 사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어느 정도는 억지로 해야 한다.
효도(孝道)! 오죽하면 효(孝)하기가 도(道)를 닦는 만큼이나 어렵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므로 누구라도 부모를 자식의 반의 반만큼, 아니 자신이 매일 산보시키고 목욕시키는 애완견의 반의 반만큼만 챙겨드리는 사람은, 온 천지의 효자 칭송을 받아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세태는 꼭 그렇지도 않지만, 지금까지는 자식들이 섭섭해지기 시작할 때쯤이면 손주들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쓸쓸한 늙은이에게 천만 다행한 일이다. ‘내리사랑의 법칙’에 따라 자 손주들이 자식보다 훨씬 더 예쁘다. 손주들은 재롱을 떨어주고 아직 자식처럼 덤비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손주들도 머지 않아 할머니 할아버지 품을 떠난다. 그래도 자식보다는 손주들이 더 오랫동안 사랑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착각이라 해도 관계없다.
손주가 자식보다 더 예쁘므로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자주 손주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는 요즘 손주들이 학원을 다니느라 너무 바빠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놀아 줄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국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인데, 정치지도자 중 이 측면을 고려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내가 만약 집권하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다.
나는 가끔 자식들이 섭섭해지면 ‘나는 부모님께 잘 했는가’ 되돌아 본다. 늘 편찮다고 하시던 어머니를 귀찮아 하고, 부모님께 말대꾸 한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자꾸 부모님이 그리워진다. 곧 자식들에 대한 섭섭함이 중화(中和)된다.
어린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늙은 부모님을 귀찮아 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자 원죄(原罪)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성경을 비롯한 모든 도덕이, 자식 사랑은 억제하고 부모 사랑은 억지로라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내리사랑’은 이러한 모습으로 반복되며 또 다음 세대(世代)로 흘러 내려 갈 모양이다. 예쁜 봄은 언제나 짧았다.
2018-05-0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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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47> 참고 견딤 위에 세워진 사랑
1. A장로는 50세 중반에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체육교사 직을 사직하고 부인인 B권사와 함께 아프리카에 있는 보츠와나라는 나라에 선교사로 떠났다.
1년만에 혼자서 일시 귀국한 그는 “그 곳이 너무 덥고 힘들어 빨리 돌아 가고 싶지 않은데 B권사가 자꾸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고 고백하였다. 그 때까지 나는 선교사는 ‘예수에 미쳐서, 그리고 자기가 좋아서’ 나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나는 A 장로의 말을 듣고 그들도 가기 싫은데 참고 가는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때부터 나는 그 분들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A 장로 내외분이 부탁한 대로 두 분이 현지에서 사역하는 모습의 사진을 화장실 변기 맞은 편에 붙여 놓고, 변기에 앉을 때마다 기도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분들과 20년도 넘게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자랑거리이다. 그러나 말로만 예수를 믿는 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2. 여수에 있는 애양원(愛養院)은 고 손양원(孫良源) 목사님이 한센병 환자들을 섬기던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1948년 여순반란 사건 때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C 등의 고등학생들에 의해 두 아들을 잃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C는 군경에 붙잡혀 사형장으로 끌려 가게 되었는데, 손목사님은 “이 아이를 죽이면 내 아들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이 아이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 사람 되게 하겠습니다”라며 살려주기를 애원하였다.
덕분에 C는 목숨을 건졌고 손목사의 양자(養子)까지 되었다. 손 목사의 딸은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은 몰라도, 살인범을 오빠라고 부르게까지는 하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대 들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성경에 원수를 용서까지만 하라고 했더냐?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더냐?’며 끝내 C를 양자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딸은 골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꺼이 꺼이 소리 죽여 우는 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그제서야 딸은 아버지도 두 아들을 잃은 말할 수 없이 큰 슬픔과 분노를 참으며 C를 양자 삼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애양원을 떠나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던 손목사는 끝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던 날 인민군에 의해 피살당했다. 그의 장례식 때 상주를 맡은 이는 살인범이자 수양 아들인 C 였다. 훗날 C의 아들은 긴 방황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약춘 212 참조).
3. 한국전쟁 때 3살이었던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김포에서 평택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어느 추운 겨울날, 어느 집의 비좁은 방에 들어 가 밤을 지새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밤새 벽의 냉기를 자신의 등으로 막고 나를 안고 앉아 계셨다고 한다. 방이 좁아 눕지도 못 하였단다.
이 일로 인해 어머니는 그 후 상당히 오랫동안 몸이 편치 않으셨다. 또 한번은 주안 염전 근처에 임자 없는 밀가루 자루가 쌓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삼십리 길을 달려 가 몇 자루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날라 오신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깨와 허리가 끊어지게 아팠지만, 오직 자식과 식구를 먹일 욕심으로 그 고통을 참아내신 것이다. 어머니의 그 욕심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4. 사랑을 위한 참고 견딤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견줄 것이 있을까? 신성(神性)과 함께 인성(人性)을 가지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날 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막 14:36)”라고 기도하였다.
예수님도 십자가가 두려우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밤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는 새 계명을 주셨다. 아!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의 두려움을 견뎌내신 것이다.
A장로님, 손목사님, 우리 어머니,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 어렵고 힘듬을 ‘참고 견뎌 내’ 세운 고귀한 것이었다. 돌아 보면 세상에 이와 같은 사랑이 적지 않음을 발견하고 감동하게 된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2018-04-25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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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46> 故 김기우 학장의 가족사
김기우(金基禹)는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專) 출신은 아니지만 독학으로 조선약제사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위생시험소에 근무하다가, 1941년 금강제약 전용순(全用淳) 사장의 후원으로 동경제국대학 약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중도 귀국하여, 광복 후 당시 경성약전에서 사립 대학으로 승격된 서울약대의 교수 (1949.1~1949.12) 및 학장 서리를 (1949.1~1950.3?)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약학대학 100년사).
최근 서울약대 김진웅 교수가 발굴한 자료에 의하면, 김교수는 1911년 11월 26일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남면(南面) 수우리(修隅里) 58번지 (본적)에서 출생하였고, 1950년 7월 16일 자택인 종로구 관훈동 84번지 11호에서 납치되었다.
부인 박보렴(朴寶奩) 여사는 14살 연상으로 1897년 11월 8일생인데 1950년 7월 30일에 역시 자택에서 인민군 3명에 의해 납치되었다. 당시 박여사는 60세로 대한여자국민당 부위원장이었다. 이는 김기우 교수의 장남인 김우종(金宇鐘)이 1956년 6월 19일 대한적십자사에 제출한 ‘피납치인 신고서’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이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보면, 경남 진주군 진주면 평안동 77번지를 본적으로 하는 박여사는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혀 23세인 1919년 1월 2일 기소유예 판결을 받았다.
2017년 어느 날 서울대 가산약학역사관의 장윤이 학예사가 김기우 교수의 손녀딸 (Alison Kim Flageul)이 프랑스 보르도에 살고 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를 보았다. 이에 김진웅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Alison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연락을 주고 받은 후 프랑스로 ‘서울대 약대 100년사’ 한 권을 보냈다.
마침 딸 Alison을 보러 갔던 미국에 사는 Alison의 어머니 (김기우 교수의 며느리) 장유경이 그 책에 실린 김기우 교수의 이야기를 읽고, 3월 8일 김진웅 교수에게 한글로 쓴 이메일을 보내 왔다. 장유경을 통해 알게 된 김기우 교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기우 교수는 김우종(金宇鐘)을 아들로 두었다. 김우종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 공대 화공과에 입학, 1958년 화공과를 우수한 성적 (총장상)으로 졸업(12회)한 다음 1959년에 도미(渡美)하여 Carnegie Mellon에서 화공학 박사 및 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35년간 Stony Brook University에서 응용수학과 교수 및 Graduate Studies의 Director로 근무한 후 2004년 뇌암으로 작고하였다. 1981년쯤 김우종 부부는 미국 적십자사로부터 어머니(박보렴)가 평양에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찾아 뵈려고 준비하던 중, 어머니가 작고하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아버지(김기우)소식은 언젠가 중국에 계시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전부이었다.
장유경은 이화여중 1학년 때(13세)인 1963년에 미국 줄리어드에 유학하였다. 이는 당시 장안의 화제이었다. 졸업 후 그녀는 25년간 Stony Brook School에서 교편을 잡았다. 현재는 은퇴하여 뉴욕과 플로리다를 오가며 살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연세대 상대 학장을 지낸 장희창 교수로 그 역시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김기우 교수에게는 김우종 교수가 낳은 손자 손녀가 있다. 손자인 Jason Kim은 Princeton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Stony Brook 대학 병원의 비뇨기과 의사 겸 Women’s Pelvic Health and Continence Center의 Co-Director로 근무하고 있다. 그와 한국인 부인 사이에 돌맞이 아들이 있다.
손녀인 Alison은 Jason의 동생으로 Harvard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 갔다가 와인 사업을 하는 프랑스인 남편과 결혼하여 2남 (10살 8살)을 두었다.
3월 16일, Alison이 감사의 뜻으로 남편 회사 Chateau Brillette의 와인을 보내 왔다. 지구촌을 감싸 도는 역사의 물결에 감회가 깊다.
2018-04-1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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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45> 서열(序列)과 질서
몇 해 전 재미있는 건배사를 하나 배웠다. 그것은 잔을 들고 짧게 “얘들아, 마시자” 라고 외치는 것이다. 참석자들이 이에 호응하여 “예, 형님”, 또는 “예, 오빠”라고 외치면 상황 끝이다.
그러면 참석자들, 특히 “얘들아!”하며 건배사를 외친 사람은 자기가 무슨 조폭(조직폭력단)의 우두머리 (그들 말로 ‘형님’)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야릇한 쾌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얘들아”를 외치고 다닌다..
1967년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학생이 갑자기 강의실 단상에 올라가더니 ‘나는 여러분과 입학 동기이지만 이런 저런 사유로 몇 살 더 먹었으니, 나를 야! 자! 하며 부르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하였다. 그 후 우리들은 그를 ‘형’이라고 부름으로써 오늘날까지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처럼 사람을 만나면 누가 형 (또는 언니)이고 동생인지 서열부터 정해야 한다. 서열이 결정되면 연하(年下)인 사람은 연상(年上)인 사람을 ‘형님’ 또는 ‘선배님’ 이라고 부르며 대우를 해야 한다. 만약 연하인 사람이 슬슬 반말을 트려고 나오면 연상인 사람은 금방 심기가 불편해 진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도 좋은 방향으로 진전되지 못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우두머리나 형으로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진짜 나이보다 몇 살 더 먹었다고 속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다가 운 나쁘게 주민등록증이 공개되어 진짜 나이가 들통(?)나면, 예외없이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그렇다’고 둘러댄다.
나는 한 해 재수(再修)해서 대학에 들어 갔기 때문에 고등학교 1년 후배들하고 같은 학년이 되었다. 후배들은 고래(古來)로 당연한 관습에 따라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1살 빠른 7살에 초등학교에 들어 갔기 때문에 일부 후배와 나이가 같았다.
어떤 후배는 나보다 생일이 빨라 실제로는 그가 몇 달 ‘형’인 경우도 있었다. 그런 후배들이 나를 ‘형’이라고 부를 때면 은근히 마음이 거북하였다. 그래서 그런 후배들하고는 지금까지 서로 야! 자! 하지 않고 올림 말도 내림 말도 아닌, 문자 그대로 ‘반말’을 사용하기로 하는 등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고 있다.
서열이 중요한 것은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부모 자식 간에는 물론이고, 형제 남매 간, 동서 간 등에도 서로 서열에 합당한 말을 사용하여야 한다. 가족 간에는 나이에 앞서 어떤 관계인가가 서열을 결정짓는다. 자식은 부모님께 경어를 써야 하고, 제수(弟嫂)는 나이 적은 형수(兄嫂)에게도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집안이 제대로 돌아 가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서열이 가장 엄격한 곳은 아무래도 군대와 직장이다. 거기에서는 나이가 아니라 누가 계급이 높으냐, 누가 상사(上司)이냐가 서열을 결정한다. 그렇다고 나이나 관계 등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내가 사병으로 군에 복무할 때, 이종사촌 동생의 친구가 우리 부대에 ROTC 소위로 부임하였다. 당연히 나는 그를 상사로 모셨지만, 그는 나를 제 친구의 형님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다. 그 죄(?)로 그는 지금까지 내 기억에 인간성이 별로인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서열 사회, 즉 누가 형이냐, 어른이냐, 상사이냐에 따라 사람의 서열이 결정되는 사회는 일견 불합리해 보인다.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한데, 왜 자식은 부모에게 경어를 써야 하고, 동생은 형의 말을 들어야 하며, 왜 젊은이는 어르신에게 공손해야 하고, 부하는 상사를 깍듯이 모셔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일까? 사회의 서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그런데 세상살기는 전에 비해 오히려 더 각박해졌다. 오죽하면 나이 좀 먹었다고 젊은이를 훈계하다가는 큰 화를 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겠는가? 비굴하게 살아야만 안전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돌이켜 보면 적절한 서열은 우리 사회의 질서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질서의 파괴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면, 서열 파괴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얘들아, 안 그러냐?”
2018-03-28 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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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44> 대학원 신입생들에게
얼마 전 서울대학교 약학과 석박사 과정 신입생들에게 강의(2월 28일)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학생 중에 타 학과 출신도 많은 점을 고려해서 그들에게 약과학자로서의 책임감과 자긍심을 불어 넣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은 ‘바담 풍(風)’ 하면서도 학생들에게는 ‘바람 풍’ 하기를 바라던 훈장님과 같은 처지이지만, 용기를 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강의를 준비하였다.
1. 인생을 조금 긴 안목(眼目)으로 바라 보라 – 젊을 때는 1~2년이 긴 세월로 느껴진다. 그래서 빠른 시일 내에 성취를 이루고자 조바심을 내기 쉽다. 그러나 나이 70이 되어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1~2년 정도는 인생에서 그리 긴 시간이 아닐 수 있더라. 그러니 행여 출발이 남보다 1~2년 늦었더라도 너무 초조해 하거나 배우기를 포기하지 마라.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실은 전혀 늦지 않은 경우가 많음을 믿어라.
2. 생명 현상의 본질적인 의문에 도전하라 – 일생을 걸고 해명할 가치가 있는, 예컨대 생명 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 도전하라. 때로는 저널을 덮고 혼자 생명의 신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 기성 연구자들과 다른 시각에서 생명을 바라보라. 석사 과정 때부터 자기 연구 주제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젊을수록 자연과학 전반에 대한 건강한 상식을 갖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3.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야 한다 – 서울 약대 연구진이 국제 저널에 발표하는 연구 논문은 그 수(數)로는 이미 세계 최고이다. 이제는 연구의 질(質)을 높이는 것이 과제이다. 앞으로 여러분은 질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지 않으면 스스로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충분히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 자신감을 가져라. 여러분은 장차 외형적으로는 권위 있는 국제학회에 특별강연 연자로 초청받는 연구자로 성장하여야 한다.
4. 머리만 쓰지 말고 수고를 아끼지 마라 – 꾀 많은 연구자는 흔히 실험이라는 수고를 아끼려 든다. 우직한 연구자가 10번 반복 측정할 때에, 꾀돌이 연구자는 3번만 측정해도 결론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고를 아끼면 결과의 재현성(再現性, reproducibility)이 낮아지고, 덩달아 결론의 설득력도 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손이 게으른 자는 결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법이다.
5. 연구 윤리를 지켜라 – 세계적인 학자가 되려는 야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논문 발표가 급해도 생명의 존엄성을 허술히 생각하거나, 또 불확실한 실험 데이터를 발표해서는 안 된다. 데이터를 조작해서, 또는 생명윤리를 지키지 않아서, 저 높은 곳에서 나락으로 추락한 스타 연구자들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라. 욕심이 지나치면 죄를 낳는 법이다.
6. 초고령화(超高齡化) 시대를 상정하라 – 2017년 Lancet 2월호를 보면 2030년대에는 우리나라 남녀의 평균 수명이 90세를 넘게 된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초고령화 시대에 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나라 인구 중 일상생활기능이 저하된 노인이 차지 하는 비중이 엄청나게 커진다는 말이다. 여러분의 연구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선도하거나 또는 적어도 그 변화에 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연구는 현실에서 외면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7.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라 –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런 생활 중에서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한다. 나는 연구에만 몰두하고 나머지 인생 문제는 남이 다 해결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절대 오지 않는다. 여러분은 아무리 바빠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다 하며 살아야 한다.
때를 놓쳐 끝내 결혼을 하지 못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가정을 이루지 못하면 오히려 계속 연구에 몰입하려는 초심을 지키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라. 결혼과 육아는 사람이 마땅히 거쳐가야 하는 하는 필수 과정이다. ‘결혼하라!’ 이는 내가 가장 확신을 갖고 젊은이에게 권하는 말이다.
2018-03-1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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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43> 하목사님
2011년 8월에 소천하신 온누리 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은 유연하고 푸근한 분이셨다.
1. 그럼 그만 두세요
외교관인 M 집사는 뉴욕에 근무할 때 교민들을 상대로 ‘성경의 맥을 잡아라’라는 주제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었다. 인기가 매우 높았는데 어느 날, 교민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공무원이 특정 종교에 대한 강의를 해도 되느냐? 일과 후에 한다고는 하지만 강의 준비로 일과 시간을 뺏길 것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고민에 빠진 M 집사는 얼마 후 하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하 목사님은 “그럼 그만 두시죠”라고 대답했단다. ‘믿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니 흔들리지 말고 밀고 나가라’ 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M집사는 예상 외의 대답에 몹시 놀랐다. 뒤이어 감동과 마음의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 결국 M 집사는 나중에 더욱 유명한 성경공부 강사가 되었고 현재는 목사가 되었다.
2. 너무 뜨거우면 데어요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하던 L교수가 장로 피택(被擇)을 권고 받고 하 목사님에게 말했다. “저는 믿음이 뜨겁지 못해 장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자 하 목사님은 “너무 믿음이 뜨거우면 옆의 사람들이 데어요” 하였다.
L 교수는 다시 “저는 병원 의사라 바빠서 교회에 자주 나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사양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하 목사님은 “교회 오지 마세요, 그냥 병원에서 사역하세요” 했단다. L 교수는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그 후 교회의 대표적인 장로가 되었다.
3. 그냥 주고 나오세요
교회의 원로 장로님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사업을 하던 그 분은 하 목사님의 부탁으로 가까운 섬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몇 년간 온갖 수고를 다 해 드디어 교회를 지을 땅을 확보하였다.
그런데 막상 교회를 지으려 하자 그 섬의 다른 교단 책임자들이 찾아 와, ‘이 섬에 온누리 교회를 세우면 우리 교단 교회들이 살아 남을 수 없을 것 같으니 제발 교회 건립을 취소해 달라’고 하였단다. 그래서 장로님은 하 목사님을 찾아가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하 목사님은, “그럼 그냥 포기하고 나오시죠” 하더란다. ‘아니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생을 해서 마련한 땅인데, 그냥 포기하고 나오라니?’ 장로님은 어이가 없어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할 수 없어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섬을 나왔다.
그랬는데 그 후 어느 날 그 교단에서 사람들이 장로님을 찾아 와, ‘제발 원래 계획대로 온누리 교회를 세워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웬일인가 알고 보니 ‘만약 이 섬에 온누리 교회를 못 세우게 하면, 우리들도 기존의 교회에 안 나겠다’고 섬 주민들의 반발하였던 모양이다. 결국 장로님은 기존의 교단과 아무런 갈등 없이 그 섬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4. 세미나하지 마세요
생전 하 목사님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다. “여러분, 교회 현관에 누가 X을 싸 놓았거든, 근본적인 재발 방지대책 세운다고 세미나 하지 마세요. 그냥 본 사람이 조용히 치우세요”
지금까지도 울림이 있는 말씀이었다.
5. 그 놈이 그 놈
어느 날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이 온누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사회자는 무심코 버릇대로 “오늘 설교는 하용조 목사님이 하시겠다”고 소개하였다.
뒤이어 강단에 선 이 목사님은, “방금 사회자가 나를 하용조라고 잘못 소개했는데, 뭐 괜찮습니다. 다 그 놈이 그 놈입니다” 하였다. 그 말에 참석자들은 박장대소하였다. 이동원 목사의 아량과 재치, 두 사람의 격의 없는 우정과 마음 그릇의 크기가 감동을 주는 해프닝이었다.
이처럼 유연하고 푸근해서 사람들을 다가 오게 만들던 하 목사님이 새록새록 그립다.
그 분의 병세가 깊어졌을 때 내게 두 번 전화를 주셨다. 한번은 일본에서, 한번은 세브란스 병원에서였다. 두 번 다 내게 하신 말씀은 “책을 쓰세요” 뿐이었다. 신앙 간증 같은 책을 쓰라는 말씀 같았지만, 나는 당황해서 “네?” 소리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껏 감히 그런 책을 쓸 수 없는 내가 부끄럽고 죄스러울 따름이다.
2018-02-2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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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42> 혼자서도 잘 산다구요?
누구나 늙을수록 누군가 함께 놀아주길 바란다. 여기에서 ‘누군가’란 단연 손주, 자식, 며느리, 사위 같은 가족을 말한다. 젊어서는 혼자 사는 게 좋을 때가 많다. 혼자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혼밥’ ‘혼술’을 즐기는 젊은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이가 모르는 게 한가지 있다. 늙으면 본의 아니게 몸이 아프고, 우울해지고, 외로움을 타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도 그랬었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말씀하시면 ‘또 시작이신가’하고 귀찮게만 생각했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나는 참 무심한 자식이었다.
의사도 자신이 병을 앓아 보고 나서야 환자를 살갑게 치료한다고 한다. 비로소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가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노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얼마 전 유행하던 노래에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란 가사가 있다. 늙은이는 젊어 봐서 젊은이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젊은이는 늙어보지 못해서 늙은이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내용이다.
아무튼 늙은이는 이런 저런 이유로 누군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식보고 그래 달라고 하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우선 젊을수록 바쁜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손주들도 학원 다니느라 할아버지 할머니와 놀아 줄 시간이 없어졌다. 어쩔 수 없이 늙은이는 스스로 자신의 아픔과 외로움을 감당해 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대개 교양(敎養)있는 사람일수록 자식에게 덜 의존하려고 노력한다. 교양이란 음악 미술 영화의 감상, 독서, 산책 등처럼 혼자 잘 노는 기술을 말한다. 이런 기술, 즉 교양이 없을수록 자식들이 싫어한다. 자식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늙은이에게 교양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늙은이는 누구나 교양 있게 늙다가 품위 있게 죽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천부적으로 교양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옛날 시어머니가 흔히 했던 며느리 괴롭히기도 어쩌면 심심해서, 외로워서, 즉 교양이 없어서 할 수 밖에 없었던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소위 교양이 있는 (척 하는) 사람은 이런 행동을 자제하지만, 아무리 교양이 있어도 더 나이를 먹어 몸이 아프거나 우울증 등이 생기면, 내심 자식들이 안 놀아주나 바라게 된다.
다만 겉으로 괜찮은 척, 교양 있는 척, 위선을 떨고 있어서 남들이 잘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아무튼 혼밥, 혼술은 특히 늙어서는 절대 피하고 싶은 못된 생활양식이다.
자식, 특히 손주를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무지하게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식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더니 우리 부부도 정말 아들딸보다 손주가 더 예쁘다. 내리사랑은 하나님의 섭리인 듯 하다.
함께 살며 수시로 손주들의 재롱을 즐기는 우리 부부지만, 우리도 몸이 아플 때면 자식이 그리워진다. 하물며 가족과 가정도 없이 평생을 혼자 사는 독거노인의 삶은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응급 시 119에 전화 걸어줄 사람, 아플 때 병원에 데려다 줄 사람도 없는 노년을 산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다. 그것은 결코 교양 있는 삶이 아니다.
요즘 비혼(非婚)이 무슨 풍조(風潮)처럼 되어 있지만 20-30년 후, 나는 사회가 독거노인 생활의 어려움을 심각하게 인식한 다음에는 다시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하는 시대로 돌아 오게 되리라 믿는다.
2030년이 되면 인류 최초로 평균수명이 90세가 되는 나라가 출현한단다. 그리고 그 나라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란다. 작년에 Lancet이라는 의학잡지에 실린 내용이다. 머지않아 인생의 대부분은 늙은이로서 살게 될 모양이다.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결혼해서 가족과 함께 늙어가기 바란다.
우리 부부도 교양 있게, 자식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인생 말년을 잘 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우리도 어느덧 자식의 따듯한 말과 사랑의 기도가 그리운 나이가 되었다. 늙을수록 자식들, 특히 손주들을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다.
2018-02-1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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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41> 13년만의 걷기, 그리고 구세주
2001년 경미한 보행 장애를 겪고 있던 3살짜리 여아 (A양)가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서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수 차례 입원치료를 받고 국내외 병원을 전전했으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20세가 된 2012년 7월, 전처럼 재활치료를 받던 중 물리치료사 윤씨로부터 “뇌병변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다시 진찰을 받았다.
의료진은 MRI 사진 등을 보더니 이 병은 ‘뇌성마비가 아니라 도파 반응성 근육긴장이상’이라고 했다. 즉 신경전달 물질과 관련된 효소의 이상으로 주로 소아에게 나타나는 소위 ‘세가와병’이라는 인데, 소량의 도파민을 투여하면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고 대구 병원과는 다른 진단을 내린 것이다.
새로운 진단에 따라 도파민을 투여 받은 A양은 투여 개시 단 1주일만에 스스로 걷게 되었다. 13년을 못 걷던 사람이 1주일 만에 기적적으로 걷게 되다니 기적이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지난 13년간이 누워지낸 세월이 억울하게 생각된 A양과 A양의 아버지는 대구의 그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 당시의 의료 기술로는 세가와 병이라고 진단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 “환자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환자 가족은 이 결정을 수용했다고 한다. 이상은 2017년 12월 6일자 한국일보 기사를 가감한 것이다.
13년 누워있던 세월을 어찌 1억원에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100억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이 판결은 환자의 삶을 너무 낮게 평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구의 그 병원도 고의(故意)로 오진(誤診)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의료수준으로 세가와 병인 줄 알기 어려워 그리 진단한 것이라니 크게 나무랄 수도 없는 법적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A양에게 있어서 세가와 병이라고 새로운 진단을 내려 준 의료진은 구세주(救世主)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당신의 병은 뇌성마비가 아닌 것 같으니 다른 데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보라’고 말해 준 물리치료사는 환자를 구세주 앞으로 인도한 복음(福音)의 전도자였던 셈이다.
이 세상의 의료진은, 극히 일부 악덕(惡德)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환자의 치유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모두 선(善)한 의도로 환자 치료에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A양의 경우처럼 어느 의료진을 만나느냐에 따라 병을 고치느냐 못 고치느냐가 극명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환자를 다른 의료진이나 다른 의료기관으로 보내는 것이 선한 의도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가 치료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환자를 붙잡아 둔 결과, 환자의 생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면 그 의료진의 고집은 더 이상 선의(善意)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문외한(門外漢)들이 어떤 환자에게 섣부른 조언을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그 조언 때문에 환자가 더 좋은 진료를 받을 기회를 늦추거나 잃게 되었다면 그 조언은 결과적으로 악(惡)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지어 의료진까지도, 환자의 질병이나 건강에 관해 조언을 하거나 의술을 베풀 때에는 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행여 나 때문에 환자가 더 좋은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TV를 보면 건강에 대해 지나치게 단정적인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행여 그들의 조언 때문에 시청자들의 건강이 훼손되지 않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며칠 전 교회에서 ‘왜 예수님만을 구세주라 하는가?’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나에게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영육(靈肉)을 살려 줄 진정한 구세주 단 한 명이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선한 의지를 가진, 그러나 환자를 살릴 능력이 모자라는 의료진을 모두 구세주라 할 수는 없다는 말씀이다.
새 해 아침, 물리치료사의 복음을 경청했던 A양처럼, 나를 구세주 앞으로 인도하는 진정한 복음에 더욱 귀와 마음을 열고 살기를 다짐해 본다. 근하신년(謹賀新年)
2018-01-3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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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40> ‘식후 30분’ 무용론 유감
2017년 9월 27일 서울대병원은 그 동안 ‘식후 30분’에 먹으라던 약의 복용 규정을 ‘식사 직후’로 바꾸기로 했다고 밝혔다. ‘식후 30분’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며, 식약처의 허가사항에도 ‘30분’이라는 기준은 없기 때문이란다.
나는 환자가 정확히 식후 30분에 약을 복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 자신도 식후 30분 맞추려다가 복용을 잊어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서울대 병원의 조치가 ‘30분 지키려다가 복용을 잊어먹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조치일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식사 직후나 식후 30분이 정말로 약물의 흡수면에서 동일하다는 인식이 보편화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특히 약물요법의 최적화를 공부하는 약학인들이 이렇게 인식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음식물을 먹으면 우선 위내용배출시간(胃內容排出時間, gastric emptying time: 위 안에 들어있는 물질이 소장으로 내려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연장된다. 음식물을 반죽하고 소화시키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 연장되면 식사 직후에 먹은 약이 위장 내에 오래 머무르기 때문에 약에 따라서는 위액에 의해 분해된다. 또 약의 흡수부위인 소장(小腸)에 늦게 도달하기 때문에 약효가 늦게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타이레놀 정은 굶고 먹으면 30분 이전에 최고 혈중농도가 나타나지만 아침 식사 후에 복용하면 2시간이 지나서야 최고혈중농도가 나타난다.
식사, 특히 밥을 먹으면 위장관 내액(內液)이 밥의 연화(軟化) 과정에 사용되기 때문에, 약물의 붕해(崩解, 부스러짐)나 용해(溶解, 녹음)에 사용될 위장관 내액이 부족해져 약물의 흡수가 지연될 우려가 있다. 또 음식물은 위장관 내용물의 점도(점도, viscosity)도 증가시킨다.
그러면 위장관 내에서 약물의 확산속도(擴散, disffusion)가 낮아져 약물의 흡수가 낮아지기도 한다. 마치 물이 들어 있는 비이커에 잉크 한방울을 떨어트리면 금방 확산되어 비이커 기벽(器壁)에까지 잉크가 도달하지만, 비이커에 죽을 담아 놓은 경우에는 좀처럼 비이커 기벽에까지 잉크가 퍼지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밥을 먹은 직후의 소장 안의 상태는 비이커에 죽을 담아 놓은 상태와 비슷해 지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약물이 흡수 부위인 소장벽에까지 확산되지 못하고 분해되거나 대변으로 나가기 쉽게 된다. 즉 흡수의 속도와 양이 감소하는 것이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도 흡수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고(高)지방식을 하면 담즙분비가 촉진되기 때문에 담즙에 의해 녹는 grisefulvin(먹는 무좀약)같은 약물의 흡수를 촉진한다. 일반적으로 설탕은 약물의 흡수를 지연시킨다. 술은 위장관 혈류를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용해를 촉진하기 때문에 어떤 약물의 약효를 빠르고 강하게 만들어 준다.
자몽 주스를 계속해서 마시는 사람이 고혈압약을 먹으면 주스를 안 마신 사람보다 4배 이상 혈중약물농도가 높아진다. 자몽 주스가 약물을 분해하는 효소의 역가를 낮추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첨언하자면 음식물뿐만 아니라 제제(製劑)를 만들 때 어떤 첨가제를 얼마나 사용했느냐에 따라 약의 흡수가 현저하게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약의 성분과 함량이 같다고 해도 제제 설계에 따라 약효에 차이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주목하여 이런 변동요인들을 엄격하게 컨트롤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제제학 또는 약제학(藥劑學)이라고 한다.
요컨대 ‘식후 30분’은 ‘식사 직후’와 위장관 내 상황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약물의 흡수에 차이를 보인다고 생각해야 한다. 엄격한 척 30분을 고집하다 약 먹기를 잊어먹는 문제가 더 심각하기 때문에 서울대 병원이 ‘식후 30분’을 ‘식사 직후’로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이 가지만, 이를 모든 약, 모든 음식에 대해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진리’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이번 조치가 행여 약학이나 약물요법학 발전에 역행하는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2018-01-1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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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39> 아버지
1. 어렸을 때 집 근처에 있는 국민학교에 다녔던 박동규(서울대 명예교수)는 어느 날 하교(下校) 길에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 손을 잡고 오면서 아들은 오늘 쪽지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다고 자랑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대견해서 길 옆에 있는 빵집에 데리고 들어 가 빵 한 개를 사 주셨다.
얼마 후 아들은 하교 길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다. 그날은 쪽지 시험에서 100점을 못 맞아 다소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아버지 손을 잡지 못하고 몇 발자국 뒤에서 아버지를 따르면서 저번에 아버지가 빵을 사 주셨던 가게를 흘깃거렸다. 그 때 아버지가 물으셨다. “얘야 오늘은 왜 아버지 손을 잡지 않고 빵도 사달라지 않느냐?” 아들은 머뭇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오늘은 100점을 못 맞았거든요.”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서서 아들에게 다가 왔다. 그리고는 와락 아들을 껴 안으며 “얘야,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언제 100점을 맞아야 너를 예뻐하고 빵을 사준다고 했더냐? 너는 100점을 맞던 못 맞던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 하시면서 빵집으로 데리고 들어 가 빵을 사 주셨다. 아들은 울었다.
박동규가 장성(長成)하여 서울대학교 강사가 된 어느 날, 하루 종일 강의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가는 시내 버스를 탔다. 버스 안은 언제나처럼 퇴근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그 때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 보니 아버지였다. 의외였다. 아버지는 ‘서울 시내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버스를 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우연이냐’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가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자꾸 아들의 배를 만지시는 것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왜 그러시나 몰랐다. 잠시 후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번 정거장에서 내리자고 하셨다. 아직 집에 가려면 다섯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데 말이다.
둘이 내리자 아버지는 “너 배 고프지? 집에 가려면 아직 머니 우리 여기서 같이 국수 한 그릇씩 먹고 가자. 내 주머니에 잔치국수 사줄 돈이 있구나” 하시며 국수를 사 주셨다. 아버지는 아들의 홀쭉한 배를 만져 보시고 아들이 배 고프다는 걸 아신 것이었다. 아버지가 사 주시는 국수를 먹으며 아들은 그만 울고 말았다고 한다.
위 두 이야기는 80이 넘은 박동규 교수가 어떤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아버지 박목월 시인을 회고한 이야기이다. 박동규 교수는 늘 이와 같은 따듯한 이야기로 듣는 이의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어 준다. 그는 늘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그의 가슴은 상당 부분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추억으로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박동규 교수의 가슴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2. 우리 아버지의 사랑은 박목월 시인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고 평생을 근면, 검소, 정리, 정돈하는 삶을 사셨다. 덕분에 나는 담배를 숨어서 피워야 했고, 처자식과 함께 시골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갈 때 택시를 타더라도 아버지 눈에 띄지 않도록 멀리서 내려서 걸었다.
젊은 놈이 담배 값이나 택시비로 돈을 낭비한다고 걱정하실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또 아버지는 깜깜한 밤에라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물건을 잘 정리 정돈해 두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덕분에 나도 정리하는 버릇이 몸에 배었다.
내가 대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네 인생의 방향을 정했느냐?”고 물으셨다. 당신은 이미 스무 살 때 정했었노라고 하셨다. 그날 그날 대충 살고 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때부터 나도 인생의 진로를 고민해 보기 시작하였다.
삶으로 인생을 가르쳐주신 우리 아버지가 지난 11월 13일, 98세를 일기(一期)로 소천(召天)하셨다. 돌아보면 죄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남은 몰라도 나는 안다. 나는 솔직히 불효자이었다.
그나마 2014년에 세례를 받게 해 드린 일, 그리고 마지막 6개월을 우리 집에서 다시 모신 일 등이 작은 위로가 된다. 소천하신 순간 나는 아버지 귀에 말씀 드렸다. 아버지,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2018-01-03 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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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38> ‘한국약학사’ 발간에 붙여
지난 2017년 10월말에 ‘한국약학사’라는 책을 약업신문사를 통하여 발간하였다. 이 책은 내가 2013년 한국약학교육협의회(이하 약교협)의 김대경 이사장(현 중앙대 약대 교수)의 부탁을 받아 40여명의 전문가로 필진을 구성하여 집필 제출한 보고서를 책으로 인쇄한 것이다.
2013년 막상 한국약학사 집필 작업에 들어가 보니 우선 ‘약학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부터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약학을 ‘약학대학을 중심으로 수행된 교육과 연구’로 좁게 보기 보다는, 제약기업에서의 신약개발 연구는 물론, 약과 관련된 모든 제도와 기술 및 연구까지를 포함해서 넓게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약학의 범위를 이처럼 넓게 잡고 보니, 기존의 약학사에 대한 선행연구 결과물에만 의지해서는 도저히 「한국약학사」를 집필할 수 없었다. 이는 대부분의 선행연구가 신약개발이나 제약산업을 부실하게 다루는 등 그 관심 범위가 이 책의 범위보다 훨씬 좁기 때문이었다.
천만 다행으로 책의 범위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제약산업과 신약개발의 역사 등을 집필해 줄 수 있는 탁월한 국내외 전문가들을 집필진으로 모실 수 있었다.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단군신화에서 현대 약학까지: 시대별로 보는 한국 약학의 발자취(제1장), 약학교육 및 연구 활동(제2장), 한국약업 100년(제3장), 신약개발의 역사(제4장)의 4개 장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3장과 4장에는 각각 ‘한국제약기술발달사’와 ‘신약개발사’를 첨부하였다.
각 장은 주승재(1), 김진웅(2), 이종운(3), 여재천(4) 님 등이 각각 총괄 집필하였다. 그리고 각 장의 세부 내용은 주경식, 이덕규, 정규혁, 류종훈, 윤기동, 서영거, 문애리, 오유경, 강삼식, 양현옥, 이현선, 이선경, 한효경, 김병각, 홍청일, 안해영, 이범진, 안창호, 한용해, 이은방, 권순경, 이덕규, 백우현, 장문호, 고광호, 이강추, 반재복, 이종욱, 이봉용 님 및 각 제약회사(한미약품, 유유제약, 일동제약, 신풍제약, 동아제약, 대웅제약, CJ 제일제당, 한국유나이트 제약, 종근당)의 신약개발 담당자님들이 집필해 주었다. 주승재님은 발간위원으로서 원고 전반의 오류를 면밀히 점검하였고, 김현정님은 발간위원 회의 업무 전반을 챙겨주었다. 나와 서울대 약대의 김진웅 교수는 발간 작업 전반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솔직히 이 책은 여러 면에서 부족한 점이 적지 않음을 고백한다. 모름지기 역사서란 단순히 과거의 자료를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시대정신을 읽고 미래에 대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 자체도 충실하게 정리해 놓지 못하였다. 변명 같지만 이는 2013년 11월에 약교협에 제출한 ‘한국약학사’ 보고서를, 2017년 어느 날 느닷없이 책으로 발간하게 된 데에 기인하는 바 적지 않다. 즉 갑작스러운 발간으로 인하여 최근 4년간의 약학사가 비어 있고, 완벽한 책자로의 편집에도 만전을 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의 탄생을 바라보는 나의 소감은 기쁨과 함께 부끄러움이다. 다만 바라는 것은 이 책이 앞으로 완벽한 한국약학사가 발간될 때까지만이라도 우리나라 약학사 정리에 조그마한 징검다리 역할을 감당해 주는 것뿐이다.
끝으로 「한국약학사」의 발간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업을 의뢰하고 후원해주신 약교협의 역대 이사장님들(김대경, 이범진, 정규혁님)의 결단과 재정 후원에 감사 드린다.
또한 광고 협찬을 해 주신 8개 회사 (녹십자, 대웅제약, 동아제약, 동화약품, 보령제약, 유한양행, 종근당, 한미약품) 및 관계자 여러분, 표지 디자인 및 원고 교정작업을 도와주신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출판 작업을 주관하여 주신 약업신문사의 노고에 깊이 감사 드린다.
크고 작은 하나의 작품은 실로 여러분의 노고의 결과물임을 실감하게 된다.
2017-12-2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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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37> 종교약학
일본약사학회(日本藥史學會)가 발행하는 ‘약사학잡지(藥史學雜誌)”의 최근호(Vol. 52, No.1, 2017, 71~73쪽)를 보니, 오쿠다 준(奧田 潤) 교수가 쓴 “인문사회약학 1. 종교약학”이란 제목의 논문이 눈을 끈다.
‘종교약학’은 다양한 인문약학 과목이 개설되어 있는 일본의 약대에서도 생소한 과목이다.
오쿠다 교수는 오래 전 메이조(名城)대학 약학부를 퇴임한 명예교수로 퇴임 전에 제자 한 명에게 윤리학 전공으로 약학박사 학위를 줄 정도로 인문약학(人文藥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분이다. 이하에 그의 논문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1. 종교약학이란?
원래 일본에서는 약을 물질(物質)로 보고, 약학을 물질인 약의 성질, 제조, 분석, 조제, 위생, 약리 및 응용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연과학계 학문으로 여겨 왔다. 그래서 약학을 ‘기초약학(基礎藥學)’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다가 2006년부터 약학교육이 4년제에서 6년제로 바뀌면서 약제사가 의료 팀의 일원으로 환자와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는 것을 고려하여, 상기한 ‘기초약학’ 외에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윤리, 약사학(藥史學), 심리학, 사회약학, 약사법규, 커뮤니케이션 등의 과목도 개설하였다.
저자는 인간성이 더욱 풍부한 약제사를 길러내기 위해서 무슨 과목을 더 추가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2012년부터 인문과학(human science)과 사회과학(social science) 중에서 약학과 관련 있는 항목을 뽑아 이에 ‘인문사회약학(人文社會藥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앞으로의 약학교육은 ‘기초약학’과 ‘인문사회약학’이라는 두 기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종교약학 각론
여러 종교에서는 신(神), 부처, 인물, 약물 및 관련 사상(事象)을 통해 사람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내용의 키워드 또는 골자(骨子)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불교: (1)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과 약사여래 본원경(本願經), (2) 사천왕사(四天王寺)와 시약원(施藥院), (3) 법륭사의 약사여래상과 약물관계 기록, (4) 고승 감진(鑑眞)과 동대사 정창원(正倉院)의 약 장부(藥帳), (5) 고승 영서(榮西)와 차(茶), (6) 서대사(西大寺)의 풍심단(豊心丹), (7) 주방국분사(周防國分寺)의 약사여래상과 약병(藥壺)
2) 기독교: (1) 다미안(약사)과 코스마스(의사) – AD 300년경 아랍 (현 터키)의 쌍둥이 형제로 태어난 두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가 병에 걸리면 치료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303년, 기독교를 탄압하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아디누스에 의해 체포되어 익사형, 화형, 화살형 등을 차례로 받았으나 매번 기적적으로 살아 났다.
끝내 단두형으로 죽었을 때에는 그들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 가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사후에 이스탄불이나 로마 등지에 성자로 추대된 이 두 사람을 추모하는 웅장한 교회가 건립되었다. 이 두 사람을 의약분업의 마중 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 중세유럽의 수도원 약국과 약사.
(3) 영국에서 평화와 자유로운 신앙을 찾아 아메리카로 온 셰이커 교도들은 뉴욕의 뉴레바논에서 약초를 재배하였다.
(4) 약사가 된 예수 그림이 유럽에 98점 있다고 한다. 독일 하이델베르그 성에 있는 약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5) 동경대 약대 교수와 일본약제사회 회장을 역임한 이시다떼(石館守三) 박사는 기독교 교인으로서 의약분업을 촉구하는 포스터에 “사랑은 모든 것을 완성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종교는 보상(補償), 통합, 창조와 같은 일반적인 기능 외에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을 부여함으로써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학문의 탄생은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약사에게 ‘종교약학’을 교육하는 것은, 환자를 더욱 사랑해야 하는 변화된 환경에 약사를 적응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일 것이다.
일본의 종교약학 교육! 우리에겐 무엇을 시사하는지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2017-12-0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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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36> 일본약제학회의 “일본 약제사 선언”
금년 6월 30일, 일본약제학회는 2025년도까지 일본도 한국처럼 완전의약분업을 실시토록 하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학회 내에 “의료 ZD 및 완전분업” 포커스 그룹(FG)을 만들어 “약제사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다음은 최근 나가이(永井 恒司)교수가 보내온 선언문의 전문(前文)과 본문을 번역한 것이다. *ZD: Zero Defect 무실점 운동.
전문 (前文)
1985년 10월 1일에 창립된 공사(公社, 공익사단법인) 일본약제학회는 1987년 8월 29일 국제약학연맹(FIP)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일본에서도 국제표준 의약분업(=완전분업)이 시행될 수 있도록 추진하는 활동을 해 왔다.
즉 2011년 5월 24일 약제학회의 회장과 명예회장이 당시 후생노동대신을 만나 이 사업의 추진 의사를 밝히고 지원을 부탁함으로써 공식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위에서 말한 전 후생노동대신의 지도편달을 받아 FIP의 100주년 기념대회(2012)에서 “The Internationalization of Pharmacy-Moving away from Medical Doctor’s Dispensing in Japan”이라는 주제로, 그리고 아시아약과대학(藥科大學) 학장회의(AASP, 2014)에서 “Activity for Moving away from Doctor’s Dispensing in Japan”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였으며, 일본 내의 각종 심포지엄, 시민 강연회 등에서도 활동해 왔다. 2015년에는 학회 내에 “의료 ZD 및 완전의약분업” 포커스 그룹을 설치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국제 강연 시 “선진국인 일본에서 의사가 조제할 수 있다니?” 하며 놀라면서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때 일본이 선진국 중 유일한 “의사 조제” 용인국이라는 사실에 국제적 관심이 확대되고 있음을 느꼈다. 약(제)사의 신분은 국제 공통이기 때문이다.
유신(維新)을 한 명치(明治) 정부는 1874년 구미 문화 도입의 일환으로 의약분업 포고(布告)를 내렸다. 그 내용은 의제(医制) 41조에 “의사 스스로의 조제를 금지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처방서를 부여함으로써 소정의 진찰료를 받는다”라고 써 있는 것처럼 완전분업이었다.
그러나 이 분업은 겨우 15년간 지속되다가 1889년 약제사의 부족을 이유로 “의사의 조제”를 용인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이를 “임의분업”이라고 불렀다. 그 후 약 130년 동안 “의사의 조제”를 금지했던 분업의 원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 약제사 선언 본문
1. 분업은 “의사는 처방하고 약제사는 조제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의사법 제22조, 치과의사법 제 21조 및 약제사법 제 19조 각각의 예외 규정에 따라 “의사의 조제”가 용인되어 있는 탓에 선진국 중 유일하게 참된 의미의 약제사 자격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
2. 분업은 인류의 예지(叡智)에서 유래한 것으로, 의사와 약제사가 서로 독립되어 있는 2인제 더블체크 시스템이다. (일본에서는) 의사(처방전 피 감사인)와 약제사(처방전 감사인) 각각의 기능이 발휘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의약의 안전이 보증되어 있지 않다.
3. 조제는 “처방감사”와 “약제조제”의 2단계로 구성된다. 조제의 주 업무는 “처방감사”로 이는 약제사의 고유한 업무이다. (일본에서는) “처방감사”가 경시되고 “약제조제”가 조제의 주 업무로 인식되는 바람에, 의사라면 조제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여 “의사의 조제”를 용인하게 되었다.
4. 분업이라는 제도와 기구(機構)에 의해, “약제사 Ethics (윤리)”가 약제사 직업의 기반이 되었다. 그 덕분에 “약제사는 시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최상위의 직업”이라는 사회적 평가(Gallup 조사)를 연속적으로 받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분업이 시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약제사의 Ethics” 개념이 생겨나지 못한 실정이다.
추기: 상기한 법의 각 조문을 폐지하면 “의사의 조제”를 금지할 수 있다 한국은 2000년에 “의사의 조제”를 폐지한 의료선진국이다.
2017-11-2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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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35> 깜박이와 젓가락질
오늘은 고집(固執)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자동차 운전시 방향지시등(속칭 깜박이)을 켜지 않고 좌 또는 우회전을 하는 자동차가 너무 많다. 대충 절반 이상의 자동차가 깜박이를 제대로 켜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저 차가 오른쪽으로 갈 줄 알았다면 나도 우회전해서 갈 수 있었는데 공연히 기다렸다가 화가 났던 적이 적지 않다.
깜박이를 켜 주면 다른 차들의 진행이 원활해질 뿐만 아니라 많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깜박이를 켜지 않을까? 혹시 배터리 아낄려고? 아님 자기 가는 방향이 비밀? 도대체 무슨 심보로 깜박이를 켜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또 예전보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빨간 신호등이 들어 와도 슬금슬금 정지 대기선을 넘어서 서는 차들이 많다. 그런다고 해서 더 빨리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이처럼 별 이익이나 의미도 없이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의미 없는 위반’이라고 지적을 해줘도 좀처럼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 나는 이런 것도 일종의 고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할 때 일상(日常) 중의 으뜸가는 고집은 단연 흡연(吸煙)이다.
흡연은 건강에 백해무익하다고 그렇게 광고를 해도 담배를 끊지 않는(또는 못하는) 사람이 많다. 등산이나 골프 같은 운동을 하며 건강을 도모하는 한편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사실 고집은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특성이기는 하다. 많은 사람들은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걸 잘 알면서도 게을러서 운동을 하지 않는다. 미련하게도 몸이 아플 때만 겁을 먹고 억지로 운동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게으름도 일종의 고집일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고집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가짓수가 많음을 깨닫게 된다.
사소한 고집 하나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집 애들(두 아들, 두 며느리)은 젓가락질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우리 애들뿐만이 아니다. 돌아보면 젊은 사람 중에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오히려 적어 보인다.
우리 애들에게 지금이라도 제대로 배워보라고 하면 ‘잘 집기만 하면 됐지 꼭 정해진 방식대로 해야 됩니까?’ 하는 표정을 짓는다. 예전에는 ‘젓가락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며느리로 들이지 말라’는 말까지 있었다는데, 세상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제대로 된 젓가락질을 강조하는 사람의 논리는, 젓가락질을 제대로 배우려 들지 않는 사람의 게으름 또는 고집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젓가락질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우리 집 애들(손주 포함)도 나름대로 알콩달콩 잘만 살고 있는 걸 보면, 그 정도의 고집은 용납해 주어야 하는 세상이 된 모양이다. 결국 제대로 된 젓가락질을 강조하는 나의 시대착오적인 고집을 버리기로 작정한지 오래 되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고집이 세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성격이 부드러워지는 사람도 있다. 98세 잡수신 우리 아버지는 젊어서는 늘 깐깐하게 근면 성실 검소를 강조하는 분이셨다. 그 바람에 이웃들이 우리 집에 별로 놀러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놀러 온 내 친구들에게 ‘숙제는 다 하고 왔느냐? 학교에서 공부는 잘 하고 있겠지?' 등을 물으시는 바람에 친구들이 질려서 도망가기도 하였다. 그러시던 아버지가 연세가 드시면서 점차 부드러워지셔서 언제부터인가는 자식이나 친척은 물론 이웃들도 전혀 싫어하지 않는 분이 되셨다.
나도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없어지고 성격이 부드러워지기를 희망한다. 플라스틱 제조 시 제품이 너무 딱딱해서 사용 중 부러지거나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보통 소량의 가소제(可塑劑, plasticizer)를 첨가하는데, 나도 나이가 들수록 이웃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성격에 가소제를 조금씩 첨가해 나갈 결심이다. 아마 감사와 겸손이 성격의 가소제 역할을 해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래도 젓가락질은 몰라도 깜박이는 당분간 더 우기려고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2017-11-08 0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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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34> 약방의 감초?
오늘은 내가 학창 시절에 잘못 알고 있던 약학 관련 용어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약방의 감초’란 말이 있다. ‘너는 약방의 감초처럼 안 끼는 데가 없냐?’ 와 같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 말을 ‘약방(藥房)에 감초(甘草)가 있듯이 꼭 있다’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약방은 藥房이 아니라 藥方 즉 약 처방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한약 처방에 감초가 들어가듯 꼭 있다’라는 의미이다. 옛날부터 한약 처방에 감초가 많이 사용된 데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
2. 상등액/상징액 (上澄液): 어떤 혼합 액체를 원심분리하였을 때 위 층에 생기는 맑은 액을 상등액이라고 배웠다. 澄자의 오른 쪽 登(등) 때문에 澄을 ‘등’으로 잘못 읽은 것이다. 그러나 澄은 ‘물 맑을 징’자이므로 상등액이 아니고 상징액으로 읽어야 한다. 물이 맑다고 할 때에도 ‘징명(澄明)하다’고 해야 한다.
3. 천평/천칭 (天秤): 저울을 말하는데 천평으로 잘못 읽곤 하였으나 천칭이라고 해야 한다. 역시 秤자의 오른 쪽 平(평) 때문에 秤을 ‘평’으로 잘못 안 것이다. ‘저울로 달다’라는 의미의 秤量도 평량이 아니라 칭량이다.
4. 활탁제/활택제 (滑澤劑): 약제학 시간에 활탁제라고 배웠으나 활택제가 맞다. 澤을 탁으로 읽을 근거가 없는데 탁으로 잘못 읽게 된 내력이 오랫동안 궁금하였다. 마침내 일본어에서는 澤의 일본자인 沢을 ‘타꾸’로 읽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일제 때 일본어로 약제학을 배우신 원로 교수님들 입에 밴 ‘활타꾸제’에서 활탁제가 나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5. 충진/충전 (充塡): 역시 약제학 시간에 충진이라고 배웠으나 충전이 맞다. 오래 전 모 제약회사 공장에 가 봤더니 어떤 방에 ‘충진실’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塡자의 오른 쪽에 있는 眞(진) 때문에 塡을 ‘진’으로 잘못 읽은 것이다.
6. 각반/교반 (攪拌): ‘저어준다’는 뜻인데, 각반이 아니라 교반으로 읽어야 한다. 攪자의 오른 쪽 覺(각)에 속아서는 안 된다.
7. 엑기스/엑스 (Ex): 흔히 ‘인삼 엑기스’라고 부르지만 실은 ‘인삼 엑스’가 옳은 표현이다. 대한약전(大韓藥典)에서는 오래 전부터 의약품 ‘엑기스’를 ‘엑스’로 바꾸어 부르도록 정하였다. 엑스는 extract (Ex)의 번역에 해당하는 말인데, 일본 사람들은 일본어의 특성 상 Ex를 엑기스라고 밖에 발음하지 못 한다.
왜정 때 일본어로 약학을 배운 우리의 선배들도 자연히 엑기스가 정답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서 우리는 Ex를 ‘엑스’라고 발음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 때부터 엑기스 대신 ‘엑스’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은 것 같기도 하다. 엑스라고 하면 어쩐지 ‘엑기스’처럼 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8. 캅셀/캡슐: 예전에는 capsule을 캅셀이라고 불렀다. 역시 ‘캅세루’라고 읽을 수 밖에 없는 일본어 교육의 잔재이다. 뒤늦게 우리는 캡슐이라고 발음할 수 있음을 깨달은 다음부터 대한약전에서 ‘캡슐’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참고로 캡슐과 캡슐제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빈 캡슐에 약을 충전하면 그 때 캡슐제가 되는 것이다.
9. 프세이도/슈도: pseudo를 ‘프세이도’라고 발음하는 분을 본 적이 있다. 슈도가 맞다.
10. 불계속성 초본: 약용식물학 전공의 고 임기흥 교수님은 약용식물을 계속성 초본 (草本)과 불계속성 초본으로 분류하고 각각을 continuous plant와 uncontinuous plant라고 명명하여 논문을 발표하셨단다. 그런데 한참 뒤에 영어 사전을 뒤져보니 아뿔싸! 불계속성은 uncontinuous 가 아니라 discontinuous이었단다. 본인이 강의 중에 하신 말씀이다.
이상의 오류는 옥편(玉篇)만 한번 찾아 봤어도 진작에 바로 잡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돌아보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에는 모든 정보가 다 부족했었다. 아, 옛날이여!
2017-10-25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