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81> 아버지의 정리정돈
아버지의 근검절약에 이은 두 번째 좌우명(座右銘)은 정리정돈(整理整頓)이었다. 아버지의 하루 일과는 아침 일찍 바깥마당과 안마당을 쓰시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비질 소리에 식구들이 아침 잠을 깨는 날도 많았다.
오후에 군청에서 퇴근하시면 자전거를 바깥 마당에 세워 놓으신 채로 마당을 다 쓸고 나서야 대문을 넘어 오셨다. 집안에 들어 오셔서도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는 것들을 정리하기 전에는 옷을 갈아 입지 않으셨다.
멀리서 아버지가 퇴근해 오시는 기척이 나면 나는 부리나케 주변을 정리하고 공부를 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한 말씀 들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아버지의 정리정돈은 용모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구들이 외출 할 때마다 머리와 복장은 단정한지, 구두는 잘 닦았는지 등을 늘 살펴주셨다. 노년에는 내 자동차의 세차 상태도 자주 지적하셨다.
“깜깜한 밤에도 금방 찾을 수 있도록 늘 정해진 자리에 물건을 놓아라”. 그게 아버지의 정리정돈 기준이었다. 아버지는, 좀 불경스러운 표현이지만, 늘 ‘정리정돈’을 노래 부르듯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느 아내들이 다 그러하듯, 아버지의 말씀을 그다지 괘념치 않으셨다. 어머니는 당신의 라이프 스타일, 즉 ‘사람이 좀 어질러 놓고 살면 어떠냐’고 생각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아버지의 문제는 잘 정리해 놓으신 물건을 나중에 어디에 두었는지 종종 기억해내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정리’란 대개 물건을 잘 안 보이는 깊은 곳에 두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장소를 금방 생각해 내기 어려우셨던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는 어머니의 반격을 받으신다. “내가 둔 대로 그냥 놔 두었으면 금방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치워서 못 찾게 만드느냐?”어머니의 질책에 난감해 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어느새 나도 정리정돈이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올바른 생활태도라고 신봉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백분의 일 수준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나도 어질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게 된 것이다. 특히 신기한 것은 나도 정리를 해 놓고는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부전자전 (父傳子傳)! 사실 정리란 아버지나 나처럼 기억력이 좋지 못한 사람이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자구책으로 생활화한 습관일지도 모르겠다. 정리마저 해 놓지 않으면 끝내 찾지 못하고 기억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 생긴 버릇이라는 말이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 C 교수님 방에 가 봤더니 큰 탁자 위에 온갖 책과 서류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그 교수님은 “지금 정리 중이야” 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묻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본인도 그 혼란스러운 상태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 산더미는 그 교수님이 정년 퇴임할 때까지 없어지지도, 그 크기가 줄어들지도 않았다. 쌓아놓고 사는 것은 그 분의 습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분들은 그 산더미 속에서 본인이 필요한 것을 용케도 찾아낸다. 아마 그분들은 구태여 정리 정돈해 놓지 않아도 다 찾을 수 있는 기억력이 뛰어난 분들일 것이다.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리정돈은 근검절약과 세트를 이루는 생활습관이 아닐까 한다. 정리정돈을 잘 해 놓으면 이미 있는 물건을 또 사는 낭비를 막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고관리를 잘 하면 물자의 낭비를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근검절약이 아니라 낭비가 미덕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공휴일을 많이 만들어야 사람들이 돈을 많이 쓰고, 그래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말도 들린다. 맞는 말이니까 하는 것이겠지만 평생을 근검절약, 정리정돈을 모토로 삼아 사신 아버지를 회상할 때, 아무래도 낭비와 어질러 놓음에 대해 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심플 라이프! 실천은 못하고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추구하게 되는 나의 좌우명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새삼 그리워진다.
2019-09-04 09:38 |
[기고] <280> 아버지의 근검절약
우리 아버지의 첫 번째 인생 철학은 내가 보기에는 ‘근검절약(勤儉節約)’이었다. 넉넉하지 못한 농촌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근면하게 일하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는 것만이 잘 사는 비결이라고 믿으셨던 것 같다.
40대까지 군청에 다니셨던 아버지는, 당시 대부분의 시골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농사 및 집안 일을 돌 본 후 출근하셨고, 퇴근 후에도 저녁 늦게까지 같은 일을 돌보셨다.
우리 집에서는, 제법 잘 살게 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하루 한끼는 김치죽을 쑤어 먹었는데, 이는 묵은 김치를 활용하여 밥의 양을 늘리는 아이디어였다. 나는 괜찮았지만 할아버지는 김치죽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소천(所天)하시기 한참 전 어느 날 “내가 나이 먹어보니 김치죽을 먹어서는 영 기운이 나질 않는구나. 그걸 모르고 전에 할아버지께 계속해서 김치 죽을 드린 것이 죄송하구나”하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아무개 집안은 가방을 하나 사서 삼대(三代)가 썼다더라”는 식의 교훈을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한번은 내가 중학생 때에 학생모자를 새로 사주십사 말씀 드렸더니 “머리에 가만히 얹어 놓고 다니는 모자가 어째가 헤지느냐?”고 질책하셨다.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었다. 당시 학생 모자는 검은색 천으로 만들고 검은 색 비닐 챙을 달은 조잡한 물건이었지만 머리 위에 얌전히 얹고만 다녔다면 그렇게 빨리 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시로 의자 대신 깔고 앉고, 챙을 잡고 던지고 장난치는 바람에 모자가 빨리 망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유구무언 (有口無言)! 새 모자 사기 실패! 범사가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는 본인부터 철저한 본을 보이시는 분이셨다. 예컨대 아버지는 평생 돈 내는 이발소에는 다니지 않으셨다. 시골 앞 동네에 이발사 한 분이 있었는데 우리 가족이 일년 내내 필요할 때 이발을 하고 가을에 곡식 일정량을 주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다.
순회 공연처럼 이 이발사가 우리 동네에 오면 동네 사람들이 차례로 와서 머리를 깎곤 했었다. 마침 머리가 길었는데 이발사가 안 오는 때에는 오리 (五里)도 더 되는 산골까지 이발사 집을 찾아가 이발을 하고 와야만 했다. 나는 이발사 집을 찾아가서 이발하는 것이 특히 싫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나는 대학생 때 담배를 피웠지만 특히 아버지가 모르시도록 조심하였다. 이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건방져 보일까 봐’가 아니라, ‘버는 것도 별로 없는 학생이 담배를 사서 피우는 낭비를 한다고 야단 맞을까 봐’ 때문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제약회사에 취직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오신 일이 있었다. 모처럼 두 분께 점심 식사를 대접하려고 대중 음식점에 모시고 들어 갔는데, 벽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보신 아버지가 이내 “무슨 점심이 저리 비싸냐? 다른 집에 가면 훨씬 싼데… ” 하며 앞장 서 나가시는 것이었다. 이런 절약 정신 때문에 아버지가 칠십이 되시기 전까지맛 있는 음식도 제대로 사드릴 수 없었다.
부모님이 계신 시골집에 가는 것은 늘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경인선을 타고 부평에서 내려 시외 버스를 타고 장기리라는 곳에 내린 다음 오~십리 시골길을 한 40분 이상 터벅터벅 걸어야만 갈 수 있었다.
결혼 후 한 번은 아내와 서너 살짜리 두 아들과 함께 장기리에서 택시를 탔다. 어린 애들이 걷기에는 날씨가 너무 더웠고, 부모님께 드리려고 산 수박이 손이 끊어지게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택시가 시골집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행여 아버지가 보시면 ‘젊은 놈이 벌써부터 택시나 타고 다니며 돈 낭비를 한다’고 걱정을 하실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골 집에서 택시가 보이기 시작할 것 같은 지점에서 택시에서 내려 집에까지 걸어 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택시를 탄 것은 그 때 한번뿐이었다.
아버지는 이처럼 근검절약의 본을 보이셨지만 결코 남에게 인색하지는 않으셨다. 2년 전 98세로 소천하신 아버지가 요즘의 내 생활을 보신다면 얼마나 지적하실 게 많을까 때때로 생각해 본다.
2019-08-21 09:38 |
[기고] <279>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의 고마움
“자고 일어나 눈을 뜨면 사물이 저절로 보이고, 물을 마시면 저절로 오줌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 동안 눈과 신장이 수고를 해주는 덕택에 사물을 보고 소변을 봤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 했어요. 그래서 눈과 신장의 노고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온누리 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가 오래 당뇨를 앓아 온 몸에 이상이 생긴 시점에서 한 말이다.
나도 나이를 좀 먹으니 안 아픈 데가 어딘가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 쑤신다. 무릎과 허리가 아프고, 잘 안보이고 덜 들리며 소변도 잘 안 나온다.
젊었을 때에는 내 몸에 무릎, 허리, 눈, 귀, 전립선이 어디 있는지 의식도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 이들 기관이 시원찮아지니까 이들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존재들 덕분에 우리가 무사히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돌아보면 그런 존재들은 무수히 많다. 우선 공기가 그렇다.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면 제일 부러운 게 맑은 공기다. 공기가 달다. 하늘에 먼지 한 점 없는 날이 많다. 늘 그러니까 거기 사는 사람들은 하늘에 맑은 공기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며 지낸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기에 예민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이 맑은지, 공기는 어떤지부터 살핀다. 미세먼지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어쩌다 공기가 맑은 날에는 창문을 열어 놓고 심호흡을 하게 된다. 사람이 공기를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옛날에는 우리도 공기를 인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제와 보니 그 때가 바로 공기에 감사하며 살아야 할 시절이었다.
우리 몸과 공기 외에도 감사해야 할 존재는 무수히 많다. 지구, 태양, 별들이 우주 내에서 자기 위치를 유지하며 규칙적인 운행을 하는 바람에 일출과 일몰, 그리고 사계절의 순환이 기가 막힐 정도로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또 물이 뜨거우면 끓고 차가우면 얼며, 사과가 중력에 의해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등의 자연법칙이 시공(時空)에 관계없이 지켜지고 있음도 감사한 일이다. 만약에 이런 자연 법칙들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인류의 과학과 문명은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또 생명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질서, 그리고 같은 땅에 뿌려도 씨에 따라 참외와 수박이 달리 열리는 종(種)의 규칙도 너무나 신비하고 감사하다.
사람이 두발로 설 수 있고 뛰고 걸을 수 있는 것도 기적이며,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출몰하고 전개되는 덕분에 우리가 무심히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모두 엄청나게 감사한 일들이다.
나아가 우리에게 나라가 있고, 가정과 가족이 있다는 사실도 매우 감사한 일이다. 만약 지금 내가 이들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내가 지금 그 안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만약에 이들이, 마치 잔소리하는 노년의 아내처럼, 내게 무거운 존재감으로 느껴진다면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의식되지 않는 존재가 진정 고마운 존재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앞으로는 이제까지 잘 의식하지 못한 존재 중에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며 살 작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일월성신 (日月星辰),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된다. 이 대목에 이르면 늘 연극 무대가 연상된다. 연극 감독은 모든 세팅을 완료해 놓고 배우들을 무대에 세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법칙과 환경을 준비해 놓으신 뒤에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돌아 보면세상이라는 무대에 존재하는 사물과 제도 중에 내가 수고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할렐루야!
2019-08-07 09:38 |
[기고] <278> 젊은이에 건다
지난 64회 현충일 아침, 티브이로 기념식 중계 방송을 보면서 3.1 운동, 독립운동, 6.25 전쟁과 4.19 혁명 같은 우리나라 근 현대사의 변곡점에는 젊은이들의 용감한 참여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젊은이의 혈기(血氣)가 역사를 바꾸는 구동력(驅動力)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우리나라가 오늘날의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된 것은 ‘지금은 늙었지만 그 때는 젊었던’ 사람들의 희생이나 기여 덕분일 것이다.
세상은 엄청 바뀌었다. 과거 우리 세대에게 클리프 리차드나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즈는 서양 우상(偶像)이었다. 그런데 최근 케이팝을 하는 방탄소년단 (BTS)이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하였는데 관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의 BTS가 세계인의 우상이 된 것이다. 한 마디로 기적이다.
잠깐 최근사를 돌아보면 올림픽 개최, 월드컵 축구 4강 진출, 박세리, 박찬호, 추신수, 김연아, 손흥민, 류현민 선수 등의 활약,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등, 우리 세대는 꿈도 못 꾸어 본 기적들이 꼬리를 물어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런 활약을 하는 나라가 최근의 우리나라인 것이다.
내가 1967년에 약대에 입학하여 다닐 때에는 정말 너나 할 것 없이 공부를 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 공대는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수재들만 들어가는 대학이었지만, 공대 학생들도 매일같이 카드 놀이와 술 마시기, 남녀 미팅 등으로 세월을 축내고 있었다. 끊이지 않던 데모와 장기간의 학교 휴업도 학생들의 노는 풍조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대학생들의 전반적인 실력은 형편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우선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한다. 우리 때에 많았던 휴강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 오늘 날의 대학생은 우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실력이 높다.
교수들도 달라졌다. 우리 때의 교수들은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내는 방법 자체를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분들은 대개 전문학교 출신들로 연구와 논문 투고에 대한 경험이 없는 채로 광복 후 갑자기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여년 전부터 서울대 약대 교수들의 논문 발표 실적이 세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또 내가 학교 다닐 때 어떤 교수님은 우리나라에서 신약이 개발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장담(?)을 하셨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가 개발한 신약의 개수가 30개를 넘고 있다. 이게 다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학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교육도 엄청 달라졌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어떤 선생님은 한글 맞춤법을 정확히 모르는 채로 국어를 가르치셨다.
벽지 학교에까지 실력 있는 정교사를 보낼 형편이 못 되었던 시절 탓이다. 또 우리 아들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에는 ‘가장 깊은 바다에 사는 물고기 이름’ 같은 쓸데없는 지식을 암기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요즘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주들을 보니 이제는 학교에서 그런 쓸 데 없는 공부는 시키지 않는 것 같았다. 손주들이 다니고 있는 영어 학원에서도 문법 중심의 죽은 영어 대신 원어민을 통한 살아있는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처럼 높아진 젊은 세대들의 실력은 ‘왕년에 놀기만 했던’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젊은이만 어른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젊은이를 잘 모르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른들은 때로는 젊은이로부터 배워야 할 대목에서도 오히려 젊은이를 가르치려 드는 우(愚)를 범하기도 한다.
오늘날 여러 부분에서 세대 간 갈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는 반증(反證)일 수도 있겠다. 만약에 어른들이 젊은이를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때로는 배움의 대상으로 바라봐 준다면 이 갈등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아무쪼록 실력 있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세계관과 역사관으로 더 좋은 미래를 열고 나가기를 기원한다. 그 때 그 때 젊은이는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2019-07-17 09:38 |
[기고] <277> 사서 기뻤던 물건, 티브이
1972년, ‘여로(旅路)’라고 하는 티브이(TV) 일일연속극이 시청률 70%를 넘기며 전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시골 소읍에 사시던 장모님은 저녁마다 이 연속극을 보러 이웃 마을까지 걸어 다니셨다.
그래서 아직 결혼 전이었던 아내는 어머니를 위해 흑백 티브이 한 대를 사서 안방에 설치하였는데, 그 일이 지금껏 가장 기뻤던 일로 회상된다고 하였다. 당시 컬러 티브이는 아직 나오지 않았던 때였다.
티브이를 사 놓자 장모님이 더 이상 이웃 마을까지 가시지 않아도 되어 좋았지만, 대신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동네 사람들이 아이 어른 구분없이 매일 저녁 처가 댁 안방으로 몰려드는 것이었다. 티브이를 설치한 집은 매우 드물고, 여로를 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저녁 내내 방안에는 동네 개구장이들의 발가락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흑백 티브이를 사드렸던 때가 가장 기뻤던 생각이 난다. 1974년 5월, 만 34개월 간의 육군 사병 생활을 마치고 그 해 7월 영진약품에 특별채용(특채) 되었다. 대학 2년 선배인 장정훈 씨의 주선에 따른 것이었는데, 입사 한 달쯤 뒤 회사의 오너이신 김생기 사장님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사장님은 내게 “자네는 어떤 자세로 회사에 다닐 생각인가?” 물으셨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나는 평소 생각한 대로 “사장님은 영업부 직원이 지난 달보다 매출을 더 올리면 열심히 일한 것으로 평가하시죠? 그러나 저는 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이므로 제제 중에 들어 있는 주성분의 함량을 전임자보다 더 정확하게 분석해 내면 그걸 열심히 일한 것으로 평가받고자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이 다시 물으셨다. “회사에 요구하는 입사 조건이 있나?” 나는 “없습니다. 다만 대학원 석사 과정에 파트 타임으로 다녀야 하니까, 회사가 이를 방해만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당시 특채로 입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저런 입사 조건을 회사에 제시하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대학원을 다니기 위한 방편으로 회사 취직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조건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10여분 정도의 면접을 마치고 사장실 밖으로 나오니 모 부장님이 내게 흰 봉투를 전해주시는 것이었다. 열어보니 현찰 20만원이 들어 있었다. 당시 신입사원 초봉이 6만원이었으니까 20만원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깜짝 놀라 웬 돈이냐고 물었더니, ‘사장님이 장학금으로 주시는 것이니 그냥 받으라’는 것이었다.
사장님이 왜 거금을 주셨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엄하신 사장님 질문에 또박또박 말 대답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구질구질하게 입사 조건을 내걸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드셨던 것 같았다. 나중에 보니 사장님은 감히 말 대꾸를 하는 직원이 없을 정도로 회사 안에서 엄청나게 무서운 존재였다. 그것도 모르고, 아니 몰랐기 때문에 나는 사장님 말씀에 감히 말 대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식해서 득을 본 셈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 돈으로 흑백 티브이 한 대를 사서 티브이 가게로 하여금 시골에 있는 부모님 댁에 설치해 드리도록 하였다. 다행히 그 동네에는 2년 전부터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당시 부모님 댁에는 물론 그 동네에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티브이를 사 보낸다는 말씀을 사전에 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고없이 기사가 들이닥쳐 티브이를 달아드릴 때 부모님이 놀라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 기분이 짜릿하였다. 당시 그 동네에 티브이를 설치한 집은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온 2년 선배 집 하나 밖에 없었다. 우리 집이 첫 번째가 아니고 두 번째가 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막 군대를 제대한 장남이 턱하니 티브이를 설치해 드리는 만족감에 가슴이 벅찼다.
1980년, 일본 유학 중 아버지 회갑연 참석차 귀국해서 컬러 티브이로 바꿔드릴 때까지, 이 흑백 티브이는 부모님에 대한 내 효도의 증표이자 자부심이었다. 부모님 생전에 이와 같은 사드리는 기쁨을 더 많이 누리지 못한 아쉬움에 가슴이 아릿하다.
2019-07-03 09:38 |
[기고] <276> 빛과 소금: 세상을 따듯하고, 맛있게까지 만들어야
내가 1966년에 졸업한 제물포 고등학교의 교훈은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었다. 모자에 붙이는 모표(帽標)도 세 개의 소금 결정 한 가운데에 고(高)자를 등대(燈臺) 모양으로 써서 만들었다(그림 참조).
1954년에 문을 연 이 학교는 이미 5회 졸업생이 서울대에 전체 수석으로 합격한 바 있고, 1966년에는 300명의 졸업생 중 80여명이 서울대에 합격하여 ‘학식’ 면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에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특별히 ‘양심’ 교육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이 학교는 국내 최초로 195년부터 무감독(無監督) 시험 제도를 도입하여 지금까지 실시하고 있다. 무감독 시험이란 교사가 시험지와 답안지를 나눠주고 교실 밖으로 나간 뒤, 시험 종료 10분 전에 돌아와 답안지를 회수하는 제도를 말한다.
첫 무감독 시험에서 전교생 569명 중 무려 53명이 60점 이하를 받아 낙제를 했는데, 이 때 길영희 교장 선생님은 “낙제생 여러분들이야말로 믿음직한 한국의 학도”라며 그들의 정직성을 칭찬했다고 한다.
이 제도는 한 때 대학 입시 경쟁이 과열되면서 내신 성적 형평성과 공정성 문제로 폐지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학생, 학부모, 교사 및 동문이 합심하여 문제점을 보완함으로써 오늘날까지 60년의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10여개 중고교가 이 제도를 따라 하고 있는데, 이에 제물포고 동창회에서는 이 무감독 시험 제도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하려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무감독 시험제와 함께 제물포고가 시행한 또 하나의 양심 교육은 도서관을 완전 개가식 (開架式)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개가식이란 도서관 이용자가 사서(司書)의 도움 없이 자유롭게 서가(書架)에 가서 보고 싶은 책을 꺼내 읽은 후 스스로 되꽂아 놓는 제도를 말한다.
더러 책이 분실되기도 했지만 학교측은 학생들의 양심 훈련을 위해 고집스럽게 이 제도를 지켰다. 이제 와 돌아보니 제물포고는 학식과 양심 (정직) 교육의 파라다이스였다.
양심 교육과 관련해서 떠 오르는 시(詩) 한편이 있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에 고 홍문화(洪文和) 교수님이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졸업 앨범에 써 주신 ‘소금에 붙이는 독백’이라는 격려시(激勵詩)이다.
<소금에 붙이는 독백>
Na의 양성(陽性)과 Cl의 음성(陰性)을
한 가슴에 간직하면서도
전설의 호수처럼 고요한 중성(中性)
환경의 온도야 높거나 말거나
한결같은 용해도를 지키는 절개(節槪).
너!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의 이마에 즐겨 결정(結晶)하는 심사(心事)여
아! 그 이름은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리오
땅에 버리어 밟힐 뿐이니….
세상에 들끓는
온갖 싱거움과 오탁(汚濁)을
도맡아 조미(調味)하고 방부(防腐)해 주려무나!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세 가지 이유로 감동한다. 우선은 중성, 용해도, 결정성, 방부력과 같은 소금의 특성을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승화시키신 교수님의 문학적 천재성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오탁을…방부해 주려무나!”하며 전쟁의 와중(渦中)에서도 졸업생들에게 세상의 방부제가 되라고 정직성을 당부하신 데에 감동한다.
그러나 가장 감동스러운 부분은 “세상의 온갖 싱거움을 도맡아 조미해 달라’고 당부하신 대목이다. 교수님은 제자들에게 소금의 방부 작용에 머물지 말고 소금의 조미 작용까지 배움으로써 ‘세상을 살 맛나는 세상으로 만드는’ 리더가 되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품격 높은 가르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빛과 소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온다. 나는 요즘 이 말씀을, 크리스찬은 1) 빛 (등대)처럼 세상을 밝힘으로 길 안내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따듯함’까지 전파해야 하며, 또 2) 소금처럼 세상을 썩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맛갈스럽게 조미’까지 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고 있다. 할렐루야.
2019-06-19 09:38 |
[기고] <275> 섭섭증 극복하기
사람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참 효자이시네”, “늘 챙겨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제일이야”, “은혜 잊지 않고 삽니다”, “존경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또는 “믿음이 참 좋으시네요” 같은 소리를 들으면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누구나 ‘듣기 좋은 말’을 듣기 좋아한다. 또 좋은 사람이라는 인정(認定)을 받고 싶어 한다. 때로는 아부의 말이 분명한 데도 들으면 기분이 살짝 좋아진다. 나이가 들수록,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것이 없어질수록 더욱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생전의 우리 아버지는 건성으로 인사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해하셨다. 저만치서 고개만 까닥 하고 마는 인사를 제일 싫어하셨다. 아버지는 두 손을 붙잡고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공손하게 여쭈며 확실하게 인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셨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나 정신 활동이 저하되는 것을 본인 스스로 깨닫는다. 자존감(自尊感)이 낮아지고 누가 뭐래지 않아도 자격지심(自激之心)이 들어 주눅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대접하지 않고 무시한다고 삐치고 섭섭해 한다. 섭섭증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이 증상이 반복되면 마음의 상처가 된다. 상처는 누가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받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상처는 자가발전(自家發電)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상처의 자가발전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지혜였을까? 옛 어른들은 고개만 까딱이는 목례(目禮)대신 큰 절 인사 받기를 예절이라는 이름 하에 제도화 해 놓았었다.
어머니는 말년에 병원에 입원하시길 좋아하셨다. 입원이나 해야 친척들이 찾아 오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문안 온 친척들의 염려, 위로의 말을 들으시면 당신의 삶에 대한 인정을 받는 것 같으셨을 것이다. 찾아 온 사람들이 용돈을 쥐어드리면 더욱 좋아하셨다. 반면에 꼭 올 만한 사람이 찾아오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셨다. ‘아무개는 내가 베푼 것이 많으니까 꼭 찾아오겠지’ 하며 꼽고 계시기도 하였다.
나도 큰 병으로 입원해 보니, 친구들이 찾아 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친구들을 보면 ‘아, 내가 크게 잘못 살진 않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히 늙어서 앓아 누웠을 때 가족, 친지, 친구, 세상으로부터 잊혀 가는 과정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래서일까? 요양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 가장 좋아하는 방은, 전망이 좋거나 조용한 방이 아니라, 현관이 잘 보이는 방이라고 한다. 혹시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을 금방 발견할 수 있는 방이 가장 인기가 높다는 것이다.
왕년에 잘 나갔던 사람일수록 말년에 외로움, 섭섭증, 마음의 상처, 우울증 등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모든 부정적인 증상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령(聖靈)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오직 성령을 받아야만 남의 인정이나 이생의 자랑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으면 내가 남에게 인정을 덜 받아도 외로움, 섭섭증, 상처, 우울증으로 고생하지 않게 되고 성격이 온유해진다.
“오직 주의 이름만 이곳에 있습니다”라고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겸손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해질 수 없다. 최소한 ‘겸손한 사람’ 이라는 평판이라도 듣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기 때문이다.
최근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었다. 그분은 신학 대학원 학생 때에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른 학생에게 양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돈을 포기하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고자 하는 자신의 비열한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참으로 겸손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것이 겸손의 극치라고 한다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스스로 달리신 예수님 밖에 안 계시다 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성령을 받아 나에 대한 인정의 욕구, 위장된 겸손의 가식을 벗어버리고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하였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019-06-05 09:38 |
[기고] <274> 불천위(不遷位) 종가(宗家)
지난 4월 6일, 경주 김씨 충암공파 17대 종손(宗孫)이자 서울대 약대 동기인 김응일의 초청을 받아 대전에 있는 충암(冲菴) 김정(金淨)선생의 종가를 방문하였다. 충암 선생은 중종(中宗) 반정(反正) 이후 순창 군수로 재직 시, 반정으로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생을 마감한 왕비 신씨의 복위를 상소하다가, 보은(報恩)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9개월 뒤 정암 조광조 등의 신진사림(新進士林)의 구원에 힘입어 방면되었으나 정치에 염증을 느껴 속리산과 금강산에 칩거하였다. 그러던 중 중종 14년(기묘년)에 조광조의 끈질긴 권유로 34세의 나이에 형조판서에 올랐다.
형조판서에 오른 충암은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하였는데, 이는 중종 반정 때 허위로 공신록에 이름을 올린 가짜 공신과 그 친인척을 가려내어 이들에게 준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자는 것으로, 반정의 공신인 혁명세력의 전횡을 막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 작업이었다.
그러나 중종의 우유부단 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충암이 혁명세력의 역공을 받아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것이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유명한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겨우 목숨을 보전한 충암은 1520년 8월 35세의 나이로 금산(錦山)및 진도(珍島)유배를 거쳐,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에 충암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제주도로 모여들자 불안감을 느낀 조정은 제주도 유배 14 개월만인 1521년 10월 그믐에 충암에게 사약(賜藥)을 내렸다.
충암이 죽은 후 제주민들은 자제(子弟)의 교육을 위해 김정의 배소(配所) 자리에 현 제주명문 오현고등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귤림서원(橘林書院)을 세웠다. 충암은 제주 유배 중에“제주 풍토록(風土錄)”과 “우도가(牛島歌)”를 남겼는데, 지금도 우도에 가면 “우도가시비(詩碑)”를 볼 수 있다.
충암은 사약을 받은 지 24년 뒤인 1545년 (인종 원년)에 복권(復權)이 되었다. 1576년에는 선조 임금으로부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마침내 1790년 정조로부터 불천위(不遷位)의 윤허를 받았다. 불천위란 국가에 큰공을 세웠거나 학식이 풍부하여 백성의 본보기가 되는 자에게 임금이 내리는 은전이다. 충암의 사후 충암이 불천위를 받을 때까지 약 270년 간 상소를 올린 사림(士林)들의 끈기가 경이롭다.
일반적으로 사대부(士大夫) 양반 집에서는 돌아 가신 4대 조상까지만 사당(祠堂)에 위패 (位牌, 神柱)를 모시고 돌아가신 날에 방안에서 제사를 지낸다. 이를 기제사(忌祭祀) 또는 방안 제사라고 한다.
5대 이상의 조상에 대해서는 신위(神位)를 사당에서 묘소 앞으로 옮겨(遷位) 땅에 묻고, 돌아가신 날이 아닌 정해진 날에 묘제(墓祭)를 지내는데 이를 시향(時享), 시제(時祭) 또는 세일사(歲一祀)라고 한다. 그러나 불천위를 받으면 4대가 넘어도 신위를 묘소 앞으로 옮기지 않고 (不遷位), 후손이 끊어질 때까지 돌아가신 날에 방안 제사를 지낸다.
종가(宗家)란 원래 적장자(嫡長子)로 이어온 가문중에서 "불천위"를 받은 집안을 말하고, 이런 종가를 지키는 장손을 종손(宗孫)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장남 집안을 종가라 부르지 않는 것이다. 또한 불천위란 원래 국가로부터 받는 국(國)불천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에는 불천위가 남설(濫設)되었다. 즉 지역 유림의 공론을 거쳐 지정하는 향(鄕)불천위, 해당 문중의 중론을 모아 추대하는 사(私)불천위, 집안사람들이 합심하여 추대하는 가(家)불천위 등도 생긴 것이다. 조선시대에 국불천위를 받은 집안은 전국에서 200여집, 향불천위와 사불천위를 받은 집은 도합 280여집이라고 한다.
종가의 최대 덕목은 봉제사접빈객이다. 훌륭한 어른의 제사를 잘 받들고(奉祭祀), 찾아오는 손님을 극진히 대접(接賓客)하는 것이 종가의 사명이라는 뜻이다. 빈(賓)이란 초대받은 손님을, 객(客)이란 예고 없이 방문한 나그네 손님을 말한다. 빈에게만 하루 전부터 곶감을 넣고 우려내야 하는 수정과를 대접한다고 한다. 내가 그날 수정과를 대접받으며, 종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배웠다.
2019-05-22 09:38 |
[기고] <273> 양영학원의 수학 선생님
53년전 이야기이다. 내가 다니던 제물포 고등학교의 졸업 예정자 중 11명이 Y대 의대의 입학시험을 쳤는데, 그 중 9 명이 합격하고 나를 포함한 2 명이 떨어졌다. 내가 떨어진 것은 수학 때문이었다. 출제된 주관식 10 문제 중 끝까지 제대로 푼 문제가 없었으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학 입시에 떨어진 후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학원이라는 곳에 다녔다. 인천에서 경인선을 타고 통학하였다. 그런데 옆에 앉은 동료 재수생들을 보니 그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너무 낮았다. 이런 곳에서 계속 공부를 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었다. 그래서 그 해 9월, 최고의 입시 명문으로 소문난 양영학원 (종로 1가 소재)의 편입 시험에 도전하였다. 대여섯 명을 뽑는데 수백 명이 몰려 올 정도로 편입 경쟁률이 높았지만, 하나님 은혜로 이 시험에 합격하였다.
양영학원에 들어가 보니 명성에 걸맞게 학생들의 실력도 높았다. 내가 첫 수학 시험에서 겨우 20점인가 30점을 받을 때 무려 90점을 받는 학생도 있을 정도이었다. 학생 중에는 제1지망 학과에는 떨어졌으나 제2지망 학과에는 합격한 서울대 학생들도 제법 있었다.
다시 1지망 학과에 도전하고자 재수를 자원한 학생들이었다. 나는 내심 기가 죽어 그저 열심히 해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인천에서 통학하는 시간이 아까워 청계천 변에 있는 독서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주야로 공부만 하였다.
양영학원의 수학 선생님 K는 정말로 수학을 잘 가르치시는 분이셨다.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은 내가 소화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방대한 양의 문제를 풀도록 지도하는 분이셨다. 그래서 내게 수학은 언제나 정리가 잘 안 되는 어수선한 과목이었다.
그런데 양영학원에 가 보니 우선 수학 문제집의 두께가 매우 얇았다. 문제집에 실린 문제수도 고등학교 때 풀던 문제수의 10분의 1 정도 밖에 안되었다. 그런데도 K 선생님은 ‘이 문제들만 제대로 풀 수 있다면 입시에 어떤 문제가 나와도 다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셨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나도 소화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K 선생님의 문제 풀이는 더할 수 없이 간결 명쾌해서 이해하기 쉬웠다. 칠판에 써 주시는 답 풀이는 대개 서너 줄을 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점차 수학 공포증에서 벗어나 수학의 원리에 눈을 뜨게 되었고, 마침내 그 해 12월에는 수학이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이 되어 있었다.
그 선생님 덕분에 나는 1967년 서울대 약대 입시에서 경이로운 수학점수를 얻었다. 주관식 열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시험지를 받자마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아홉 문제를 풀었다. 그 순간 “아홉 문제를 풀었거든 열 번째 문제 풀이에 도전하지 말고 풀은 문제를 검산하라”고 하신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래서 아홉 문제의 풀이를 하나하나 차분히 검산해 보았다. 그랬더니 아홉 문제 모두 한 점도 고칠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풀려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열 번째 문제 풀이에 도전해서 수학 만점이라는 기록이나 한번 세울 걸 하는 아쉬움마저 들었다.
결국 그 어렵다는 수학에서 무려 90점을 받은 덕택에 나는 재수 1년 만에 서울대 약대에 수석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모두 K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다. 이 체험으로부터 나는 선생님이 잘 가르치는 것이 학생 교육에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훗날 내가 교수가 되었을 때 ‘나는 과연 잘 가르치고 있는가’를 자문(自問)하곤 하였다. 그 때마다 실력이 부족해 충분히 잘 가르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대학의 교육의 질도 교수의 실력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는다. 아무리 학생이 우수하고, 시설이 좋고, 커리큘럼이 화려해도 가르치는 사람의 실력이 없으면 결코 교육의 질이 높아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최고로 실력 있는 교수를 채용하는 것이 대학 발전의 지름길’ 이라고 확신한다.
끝으로 정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런 이야기를 강조하는 나의 비겁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2019-05-08 09:38 |
[기고] <272> 예비약사 선서식 (White Coat Ceremony)
작년 (2018년) 11월 27일 (화), 서울대병원 연건캠퍼스에 있는 서울약대 임상약학 교육연구동에서는 전에 서울약대에서 보지 못하던 White Coat Ceremony (이하 예비약사선서식)라고 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 선서식은 약대 5학년 (약대진입 3년차)을 마친 학생들이 6학년 임상실습에 들어가기 전에 약사의 상징인 흰색 가운을 입고 예비약사로서의 긍지와 책임감을 다짐하는 행사이다.
이는 주요 국가의 의대와 간호대에서 오래 전부터 행해지고 있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식이나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벤치마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비약사 선서식은 우리나라의 약대가6년제로 개편되면서 신설 약대를 중심으로 개최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날 행사는 이봉진 학장, 김연수 서울대병원 진료부원장의 개회사 및 격려사, 학생들에 대한 가운 및 명찰 수여, 내외빈들이 학생들에게 가운 입혀주기, 학생 일동 (71명)의 선서 (디오스코리데스 선서 및 약사윤리강령 낭독) 및 기념촬영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 날 선서식의 주관 교수였던 오정미 임상약학 교수에 의하면 이 행사의 목적은 (1) 약사의 전문성 증진과 환자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및 헌신에 대한 마음가짐을 가다듬고, (2) 약사로서의 도덕적, 윤리적, 법적 행위의 원칙을 강조하며, (3) 휴머니즘 정신을 강조함과 동시에, (4) 본격적인 실무실습에 임하는 5학년 학생들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이 선서식은 매년 5학년을 마친 학생들이 현장 실무실습에 들어가기 전에 거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예비약사 선서식은 임상 실습을 앞둔 약대 학생들의 마음 가짐을 가다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선서식이 모든 약학대학의 전통으로 자리잡는 것도 바람직해 보인다. 다만 선서의 이름이나 내용의 정통성 면에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음(약사공론 2017.1.18)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날 행사에서 사용된 ‘디오스코리데스 선서’는 미국 ‘약사의 선서 (Oath of a Pharmacist)’를 경성대학교 약학대학 학생들이 번역(2001년)한 다음, 고대 그리스의 약리학자인 Pedanius Diocorides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 앞에서 약학의 전문인으로서의 내 삶을 인류를 위해 바치겠다는 엄숙한 선서를 합니다. 나는 오늘 이 순간부터 고통받는 인류의 복지와 행복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중략) 나는 약학의 전문인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근거하여 이 모든 조항들을 자발적으로 수행할 것임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에 대해 우선 디오스코리데스를 약사의 상징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또 선서의 내용도 미국 약사의 선서라 이 사람과 관련이 없다. 실제로 약대 학생들이 디오스코리데스 선서라는 이름으로 선서하는 나라가 없다고 한다.
내용도 대한약사회가 제정한 ‘약사윤리강령 (1965년 제정, 2007년 개정, 약학회지56권 5호 275-279, 2012)’과 중복된다는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임상약학 실습에 들어가는 예비약사들의 선서는 기성 약사들의 선서와 그 내용이 같을 수 없다는 지적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 선서식이 전통과 권위를 덧입기 위해서는 한국약학교육협의회(약교협)와 같은 공식 기구가 ‘예비약사 선서문’을 만드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예비약사 파이팅!
2019-04-24 09:38 |
[기고] <271> 성균관대 약대생들의 4•19 참여
1960년 4.19 시위가 일어난 지 올해로 59주년이다. 서울약대 학생들의 4.19 참여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당시 및 2017년 4월 19일자 A12면)에 소개된 바 있으나, 다른 약대 학생들의 4.19 참여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차에 마침 성균관대 약대를 졸업한 장우성 박사 (1960년 입학)가 ‘대한약학회 제9회 약학사분과학회 심포지엄 (2017년 10월 19일)’에서 “내가 본 성대약대생의 4.19 혁명참여”란 연제로 발표를 한 바 있어, 녹취록으로부터 그 내용을 발췌하여 이하에 소개한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약학사회지” 창간호 (2018년 12월)를 참고하기 바란다.
“(전략)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지속적인 횡포에 민주 세력들이 많이 결집되는 상황에서 1960년 3•15 부정선거 때문에 사망한 마산의 김주열 학생을 바다에서 건져내는 모습이 매스컴에 들춰지자 국민들이 울분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쟁점이 되어 4월 18일 고대에서 이기택, 이세기 두 위원장의 주도로 교내 소요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4월 19일 아침 9시에 1학년 수업을 듣는데 30분쯤 지났을까 약대 김병태 학생회장과 성대 총학생회장 등이 와서 ‘문리대 앞 대운동장으로 전부 모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400명쯤 되는 약대생들이 강의를 듣다가 또는 실습을 하다가 가방을 들거나 가운을 입은 채로 대운동장에 모였어요. 아마 총 몇 천 명의 학생이 결집을 한 것 같습니다.
총학생회장이 시위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우리는 경무대 (景武臺, 현 청와대)로 가야 된다’, ‘독재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의 선봉이 되어야 한다’고 저희를 고무했던 것 같습니다. 몇 천 명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광화문 네거리까지 가보니 인산인해(人山人海)라 시위 군중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벌써 서울대, 고대, 동국대 학생들이 나와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서울대는 일찍 8시경에 나왔던 것 같아요. 거기서 한 두 시간 구호를 외치다 보니까 경무대에서 기관총 소리가 계속 나는 거에요.
그러더니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 태극기와 깃발을 흔드는 학생들 20-30명이 탄 트럭이 광화문 앞으로 군중을 헤치고 서서히 지나갔습니다. 그들의 피를 보는 순간 우리 모든 학생들의 울분이 극에 달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당시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의 약국에서 근무하셨던 임경자 선배님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때 환자들이 경무대에서 나와서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는 경무대까지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화문에서 총학생회를 따라 서대문 이기붕 부통령 저택 앞으로 가 연좌데모를 하면서 서대문 4거리를 쳐다보았더니,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연대 학생들을 막고 있었어요. 그 바람에 저희는 거기서 두어 시간 연좌를 했는데, 루머인지 모르겠지만 이기붕 부통령이 뒷문으로 도망쳤다는 얘기가 나와서 저희는 연좌를 끝냈어요. 그리고 서대문에 있는 당시 정부의 기관지인 서울신문사에 가 봤더니 이미 신문사에 불길이 솟아오르더라고요.
그 광경을 보고 저희들은 그럼 내무부가 원인이니까 내무부가 있는 을지로 입구를 향해 갔어요. 그런데 그 앞에 가니까 총을 막 쏴대는 거예요. 불시(不時)에 당하니까 낮은 포복으로 골목으로 들어가 급히 피했는데, 성대 학생 네 명이 그 때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전화해 봤지만 아직까지 이 사실을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중략)
저는 당시 1학년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시위대를 따라가다가 생사를 가르는 대열에 섰었습니다. 어쨌든 역사는 너무나 귀중한 것으로 이 역사가 후학들의 발전을 위한 좋은 모멘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감사합니다”
한편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중앙대 약대 손동헌 명예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흑석동에 있던 중앙대 약대생들도 한강을 넘어 내무부 (현 롯데 빌딩 자리)까지 진출했다가 3학년 김만록 학생 등 5명 (또는 7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희생자들의 이름은 중앙대 도서관 앞 추모비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새삼 역사의 비장(悲壯)함이 무겁게 다가온다.
2019-04-10 09:07 |
[기고] <270> 옛날 학생활동, 소(牛)모임의 60년사
작년 11월 10일 저녁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소(牛)모임 60주년 기념식에 다녀 왔다. 소모임은 1957년에 서울대 약대에 입학한 김용호, 김용찬, 김중선, 홍청일 등(15회 졸업)이 2학년 때인 1958년에 결성한 농촌 봉사 단체로 1988년경까지 활동하였다고 한다.
나도 회원은 아니지만 4학년인 1970년 여름 방학 때 동기인 신영호 회원(25회, 전 약사공론 사장)의 권유로 경남 양산으로 봉사 활동을 다녀 온 바 있다.
사실상 해단식인 이날의 모임에는 왕년의 회원 30여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어떤 모임의 해단식에 참석해 보는 것은 나로서는 처음이었다. 참석자 모두가 옛날의 열정을 떠올리며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에 가슴이 찡하였다.
기념식은 신영호 전 회원의 60년 회고담에 이어, 이규호 준비위원장(서울 약대 19회)의 개회사, 그리고 식사와 환담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 날의 개회사를 이하에 옮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소모임 동지 선후배 여러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뵙게 되어 한없이 반갑습니다. 오늘은 우리 소(牛)가 환갑을 맞는 뜻 깊은 날입니다. 오늘 이 뜻 깊은 자리를 빛내기 위해 바쁘신데도 불구 하시고 참석해 주신 모교 심창구 교수님, 고 심길순 교수님에 이어 우리 소모임을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문창규 지도교수님 반갑고 고맙습니다. 특히 멀리 지방에 계신 데도 불구하시고 참석해 주신 소모임의 백성기, 김병년 선배님,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 소모임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제1공화국 자유당 말기인 1958년, 당시 우리나라에는 학생운동이라고는 전무하고 더구나 농촌 봉사활동은 과거 식민지 시절에 심훈의 상록수 속에서나 기억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의 선배님들에 의해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렸습니다.
어찌 보면 소모임은 우리나라 학생 애국봉사 활동의 효시라고 할만한 쾌거입니다. 우리 선배들의 이러한 운동은 급기야 4.19혁명 이라는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었고, 그 후 5.16 이후 정부에 의해 새마을 운동으로까지 확산되어 우리나라 농촌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소모임의 농촌 봉사활동은 비록 실적이 미미하였다 할지라도, 소처럼 말 없이 묵묵히 끈기 있게 봉사하는 소모임의 정신이 하나의 밀알이 되어 우리나라 자립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과 결합하여 조국근대화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소모임은 그 후 우리나라가 근대화에 들어서고 더 이상 우리 학생의 도움이 필요 없을 때까지 지속되다가 44 회 졸업생 이후 명맥이 끊어지긴 했지만 소모임을 거쳐간 소모임 동기들은 소모임의 정신으로 그간 약업계를 위시한 조국근대화의 현장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습니다.
60회 생일을 준비하면서 느낀 바는 60년이란 세월이 짧지만은 않아 소 동기 중 많은 분이 타계하시고, 특히 소모임을 발기한 15회 선배님 중 타계하신 분이 계시고, 또한 생존해 계셔도 80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못하셔서 참석하시지 못 한 분이 계신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소모임 정신은 아직까지 여전히 살아 계심을 이번 행사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이번 행사에서, 후배들이 소모임 재직 시 별다른 활동과 공헌도 하지 못한 저에게 준비 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겼습니다만, 저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고 준비위원인 신영호, 윤웅찬, 박정일, 김국현 제군이 열심히 힘쓴 결과 오늘 이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만 워낙 준비기간이 짧고 갑작스런 모임이라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다만 그간 서로 못 만난 얼굴이라도 보며 지난 60년의 회포를 잠시나마 푸는 기회가 되었으면 오늘의 큰 보람으로 느끼고자 합니다.
또한 머지 않아 우리가 60년간 소모임을 통해 나눈 일들을 모아 ‘소모임 60년사’라는 책자로도 만든다고 하니 갖고 계신 자료가 있으시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선후배가 한자리에 모인 모처럼의 기회이니 담소를 나누시며 유쾌한 생일 잔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음메~ 돌아보니 긴 세월이었다. 아 옛날이여!
2019-03-27 09:38 |
[기고] <269> 자동사, 타동사, 수동태
1. 요즘 매스컴을 보면 타동사를 자동사로 잘못 사용하는 사례가 많다.
1) 개봉(開封): ‘극장에서 OOO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다’ 라는 표현은 ‘영화가 개봉되었다’가 맞을 것이다. ‘개봉’이란 ‘봉투를 연다’는 의미의 타동사이기 때문이다.
2) 상연(上演): ‘OOO라는 영화가 상연한다’라고 하던데, 이는 ‘영화가 상연된다’로 고쳐 써야 한다. ’상연’이란 ‘공연에 올린다’는 의미인데 영화가 자기를 상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둔화(鈍化): ‘최근 경제 성장률이 둔화했다’라고 하던데 ‘둔화되었다’가 맞을 것이다.
4) 종료(終了): ‘이달 말에 계약이 종료한다’는 ‘계약이 종료된다’가 맞을 것이다.
5) 분단(分斷): ‘일본 때문에 한반도가 분단했다’는 ‘한반도가 분단되었다’로 고쳐 써야 한다. ‘분단’은 잘라 나누었다는 뜻인데 사람이 아닌 ‘한반도’가 분단의 주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6) 엄수(嚴守): ‘어제 추모제가 엄수하였다’는 ‘추모제가 엄수되었다’, 또는 ‘추모제를 엄수하였다’가 맞겠다.
7) 시작: ‘기념식은 애국가 봉창으로 시작하였다’는 ‘애국가 봉창으로 시작되었다’가 자연스러워 보인다.
8) 확산(擴散): ‘불신감이 확산하고 있다’는 ‘확산되고 있다’로 써야 한다.
9) 대여(貸與): ‘한진 그룹은 약사면허를 대여하여 약국을 열었다’는 ‘약사면허를 대여받아 약국을 열었다’ 가 옳을 것이다. ‘대여’란 ‘빌려준다’는 의미이지 빌려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대여하여’를 ‘빌려서’로 바꿔 쓰는 것이 좋아 보인다.
10) 본격화(本格化): ‘갈등은 본격화 할 전망이다’는 ‘갈등이 본격화될 전망이다’가 나아 보인다.
11) 이어가다: ‘흥행이 쭉 이어가길 바란다’는 ‘쭉 이어지길 바란다’가 나아 보인다.
12) 지속(持續): ‘평화는 군이 강할 때 지속한다’는 표현은 ‘군이 강할 때 지속된다’가 맞을 것이다.
13) 전하다: ‘OO총서는 총 16책이지만 그 중 1책이 전하지 않는다’에서 ‘전해지지 않는다’로 해야 한다.
14) 부상(負傷)하다: ‘난폭하게 질주하는 차량에 세명의 행인이 부상하였다’는 ‘부상을 입었다’ 또는 ‘부상을 당했다’가 맞지 않을까?
15) 발생(發生): ‘발생’의 경우는 좀 헷갈린다. 사전을 보니 ‘화재가 발생하였다’와 ‘화재가 발생되었다’ 두 가지 표현이 다 맞는 것 같다. 아마 ‘발생’은 타동사 겸 자동사인 모양이다.
2. 수동태의 남용도 눈에 띈다.
1) ‘생각된다’와 ‘생각되어진다’: 나는 되도록 ‘생각한다’로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생각된다’가 이미 너무 보편화 되어서, 이제 와서 ‘생각한다’로 쓰는 것이 오히려 어색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생각되어진다’만은 용서할 수 없다. 불필요한 이중(二重) 수동이므로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생각된다’로 충분하다.
2) ‘보인다’와 ‘보여진다’: ‘보여진다’도 이중(二重) 수동태이므로 ‘보인다’로 충분하다.
3) ‘전망된다’와 전망되어진다’: ‘전망된다’로 충분하다.
내가 ‘생각된다’, ‘보인다’, ‘전망된다’와 같은 수동태(受動態)의 사용을 자제하자고 하는 것은, 수동태는 나의 의지나 주관에 상관없이 ‘그렇게 생각되고, 보이고, 전망된다’며 주체(주체)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주장에 자신감이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수동태 뒤에 숨는 비겁함이 엿 보이기 때문이다.
수동태의 남용은 일본어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일본 사람들은 오모이마쓰 (생각합니다) 보다 오모와레마쓰 (생각됩니다)를 많이 사용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본인’은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 는 표현보다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된다’고 하는 돌려 표현하는 것이 상대방을 덜 자극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어나 우리말에도 “Be seated”와 “한번 뵙겠습니다”처럼 공손하게 말하고자 할 때 수동태를 사용하는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일본어만큼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요즘 내가 너무 한가하거나 까칠해진 것 같다.
2019-03-13 09:38 |
[기고] <268> 조선약학교 학생 이호벽의 삼일운동
올해는 일제하에서 3.1운동 (1919년)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8년에 설립된 조선약학교의 학생들도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자료를 보면 ‘조선독립선언서 및 청원서’와 관련하여 경성지방법원에서 신문을 받은 362명 중에 조선약학교 학생이 14명 (김유승, 김광진, 박준영, 박병원, 박흥원, 박희창, 오충달, 전동환, 김정오, 강일영, 김용희, 이인영, 정태화, 이용재 등)이나 있었다. 이들 중 김용희, 이용재, 이인영, 전동환에 대해서는 신문 카드도 남아 있다.
고종황제의 국장일(國葬日)인 1919년 3월 5일에는 조선약학교를 비롯한 각 학교가 동맹휴교에 들어 갔는데, 이날 김광진, 김유승, 오충달 등은 남대문에서 개최된 제2의 만세운동에도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7).
1818년에 조선약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한국인이 60명, 일본인이 30명 정도이었으나 2년 후인 1920년에 제1회로 졸업한 한국인은 이호벽 등 약 10명에 불과하였다. 3.1 운동의 여파(餘波) 때문이었다. 신문을 받은 한국인 14명 중 3명은 한해 뒤인 1921년에 제2회로 졸업하여 총 13명의 한국인이 졸업하였지만, 나머지 한국인 47명은 끝내 졸업하지 못하였다. 이 47명 중 27명에 대해서는 이름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조선약학교 선배들의 3.1운동 참여 기록을 발굴하였을 때, 나는 선배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러면서 혹시 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한국인들은 3•1운동에 불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차에 조선약학교 1회 졸업생이자 한국인 약사 면허 1호인 이호벽 선배님이 『약사공론』(1974년 5월 16일)에 쓴 ‘나와 3•1만세사건’이라는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전문(全文)을 소개한다.
“3•1만세사건 이야기가 났으니 그때 나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빠트려서는 안 되겠다. 스물 안팎의 그때나 칠십을 훨씬 넘은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나는 활달하다거나 용맹에 찬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담담하고 차분하게 인생을 밟아왔다고만 생각한다. 그때 나는 참으로 순진한 소년이었다. 집에서 학교, 학교에서 집으로만 향했으며, 책밖에 더 벗할 것이 없었다. 그런 나의 처지이고 보니 친구도, 말 상대도, 자연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3•1만세사건이 사전에 준비되고 있는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고, 고종황제 인산(因山) 때를 이용한 그 숨막히던 순간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참으로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날 나는 친구를 찾아 대한문(大漢門) 근처를 향하고 있었는데, 대한문 앞 고종황제 붕어(崩御)를 애도하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르는 것을 보았고, 품에 감춰두었던 태극기가 손에 손에 쥐어져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시에 달라진 함성과 태극기의 세계를 경이롭게 듣고 보다가 나는 그 군중 속으로 나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어갔다.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조금 있자 일인 순사와 헌병들이 달려와 장도(長刀)와 단도(短刀)로 우리 군중을 치고 찌르고 더러는 끌어가는 것이 아닌가. 혼비백산한 나는 그 길로 집을 향해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눈 앞이 아득하고 간이 콩알만해졌던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해방 후 3•1절 기념일 때만 되면 더욱 후회 반, 부끄럼 반을 져버릴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이호벽 선배님이 매우 솔직하고 겸손한 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복잡한 심정도 헤아리게 되었다. 과거에 친일(親日)을 한 사람이 이제 와 반일(反日)을 했노라 하면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호벽 선배님과 같은 분들의 처신과 고백은 오히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며칠전 일제(日帝)하에서 우리 말 사전을 펴내느라 온갖 고초를 겪었던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대한 영화 (말모이)를 보고 (속으로)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2019-02-27 09:38 |
[기고] <267> 친절한 상술
1979-1982년 동경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대학 구내에 있는 생활협동조합 (보통 生協, 즉 ‘세이꾜’라고 불렀다)에 가전(家電) 제품과 문방구 등을 파는 코너가 있었다. 가전 제품에는 거의 늘 “안 사면 손해, 전시 품목에 한해 50% 할인!” 같은 충격적인 광고가 붙어 있었다. 나도 당장 사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뺏길 것 같은 초초한 마음으로 아침 일찍 달려가 쏘니 티브이를 한대 산 적이 있었다.
문방구 코너에 가면 자잘한 아이디어 상품이 너무 많았다. 특히 신기했던 것은 요즘의 컴퓨터 마우스 만한 크기의 탁상용 고무지우개 파편 흡입기 (진공 청소기)였다. 소형 밧데리로 작동되는 것이었는데 연필로 쓴 글씨를 지우개로 지웠을 때 생기는 고무나 종이 파편을 제거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가볍게 누르면 귀여운 엥~ 소리와 함께 파편을 흡인하는 모습이 얼마나 앙증맞던지!
그러나 탁상용 진공청소기보다 내가 더 감탄했던 것은 문장 중 잘못 쓴 글자만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도록 다양한 크기의 구멍들을 뚫어 놓은 얇은 플라스틱 막대자였다. 잘못 쓴 문장 위에 그 막대자를 올려 놓고 구멍을 지우고자 하는 글자 위에 맞추어 놓은 다음, 고무지우개로 구멍 부위를 문지르면 목표로 한 글자만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었다.
구멍의 크기를 선택하기에 따라 한 글자로부터 다섯 글자까지 지울 수 있었다. 당연히 옆의 글자는 지워지지 않는다. 지우고 난 다음에 생기는 고무 파면은 앞서 말한 탁상용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면 상황 끝이었다.
말이 난 김에 하나 추가하자면 세이꾜에 가면 도장포 (圖章鋪)가 있었는데 신기한 것은 일본 사람들은 도장을 파 달라고 주문하지 않고,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는 기성품 도장을 산다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도장에 성(姓)만 새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명 (姓名)을 다 새기니까 그 많은 성명을 미리 도장에 파 놓을 수 없지만, 일본인의 성은 우리의 성명 보다 훨씬 그 수가 적기에 미리 새기기가 가능하였다. 덕분에 급히 도장이 필요할 경우 후딱 세이꾜에 가서 사오면 끝이었다. 물론 나처럼 일본에서 희성(稀姓)인 사람은 주문해서 도장을 새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세이꾜 문방구에 가서 ‘혹시 이러이러한 문방구 팝니까?’ 물었는데 마침 그 물건이 없다면, 그 때의 점원의 반응은 우리나라의 경우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없어요’ 라고 대답하곤 끝이다. 손님이 ‘그런 물건 어디 가면 살 수 있을까요?’ 라고 추가로 물으면 대개는 ‘모릅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딴 일을 본다.
한번은 ‘무슨 가게에 가보세요’ 라고 하길래 ‘그 가게가 어디 있는데요?’ 라고 물었더니 ‘인터넷 뒤져 보세요’ 하였다. 자기네 가게에서 안 파니 더 이상 나에게 말 시키지 말라는 분위기였다.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다시 이 가게에 오나 봐라’
세이꾜에서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상품이 없을 경우 점원은 반드시 이렇게 말한다. “아, 대단히 죄송합니다. 필요한 물품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 최선을 다해 수배하겠습니다. 구내 번호를 남겨 주시면 곧 가부 간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2, 3일 후엔 정말 가부간에 연락이 온다. 이렇게 해서 내가 원하던 문방구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세이꾜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내가 있던 약학부 제제학 연구실에는 각종 시약과 기구를 공급해 주는 업자가 주 2-3회 방문하였는데, 카탈로그에 없는 유리 기구도 그 사람에게 설명하면 최선을 다해 어디에선가 구해다 주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니까 연구자도 극히 소량 밖에 수요가 없는 기구를 구입하려면 어디서 사면 좋을지 몰라 어려움이 많았다. 이럴 때 그 업자에게 설명해 주면 어디선가 구해다 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오늘날 사업이나 장사가 안되어 죽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요리 사업가 백종원씨의 말마따나 ‘경쟁이 너무 치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일본인들의 친절한 상술을 배우면 상황이 좀 나지지는 않을까? 내가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본 것일까?
2019-02-13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