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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417>. 약학의 특성 11. 임상약학과 맞춤약학
내가 1967년 약대에 입학했을 때부터 조윤성 교수님은 임상약학(clinical pharmacy, 臨床藥學)의 도입 필요성을 주장하셨습니다. 그 후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논란을 벌이다가 근래에 와서 드디어 임상약학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6년제 교육을 실시하던 2009년부터 본격적인 임상약학 교육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임상약학이란 창약학, 제약학, 용약학(用藥學)이라는 약학의 3대 분야 중에서 용약학의 목적을 구체화시킨 이름입니다. 임상약학 교육을 통해 약사들의 보다 정확하고 안전한 약물 투여가 가능해졌습니다. 종래의 약물요법을 돌이켜보면, 환자에게 어떤 약을 투여할 때 일률적으로 어른은 1정, 어린이는 1/2정을 투여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체중이 심하면 2배 이상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어른은 무조건 1정을 투여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이지 않습니까? 더구나 인종이나 개인에 따라 약물에 대한 반응 (약효 또는 부작용)도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률적으로 일정량을 투여하는 종래의 약물 투여방식에는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지요. 1995년 강박장애를 앓고 있는 9살짜리 소녀가 어느 날 프로작(Prozac, fluoxetine)이라는 치료약을 복용하는 도중에 발작을 일으키고 사망하는 사고가 미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소녀를 부검한 결과 프로작의 혈중 농도가 엄청나게 높았습니다. 그래서 이 소녀를 입양한 양부모가 살인 의혹을 받았는데,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 유전자 검사를 해 본 결과 이 소녀에게는 간에서 프로작을 대사시키는 CYP2D6라는 효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상용량의 약을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약이 간에서 대사되지 않고 체내에 축적되어 사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2000년도에 포춘(Frotune)이라는 잡지의 표지에 ‘유전자 비극(a DNA tragedy)’라는 제목으로 크게 실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약물 대사에만 개인차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약물 분자가 결합하여 약효를 나타내는 체내 약물수용체(receptor)에도 개인차가 있었습니다. 아스트라제네카에서 개발한 폐암 치료제인 이레사(Iressa, gefitinib)는 서구인보다 아시아인에서 높은 치료 효과를 보이는데, 이는 이 약의 수용체인 EGFR의 변이체(mutation)가 아시아인에게 월등히 높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밖에 약물의 흡수와 배설의 속도를 좌우하는 막 수송 단백질(membrane transporters)도 인종과 개인에 따라 그 발현과 활성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와 같은 환자의 유전적 특성의 개인차를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같은 약을 같은 용량으로 투여하는 종래의 약물요법은 매우 잘못이라는 사실을 모두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특정한 약에 대해서는 환자의 유전적 특성을 파악한 다음에 투여할 약을 선택하고 사용량을 결정하도록 되었지요. 옛날에 이제마 선생이 주창한 사상의학(四象醫學), 즉 환자의 체질에 따라 약을 달리 써야 한다는 생각과 같은 맥락이지요. 이처럼 환자의 유전적 특성을 고려하여 약물요법을 결정하거나 신약을 개발하고자 하는 생각을 맞춤약학(individualized or personalized medicine)이라고 부릅니다. 구두에 발을 맞추는 방식에서 발에 구두를 맞추자는 생각이라고나 할까요? 미국 UCSF병원에서는 약 의사 (藥醫師, Pharm. D)가 환자상담을 통해 맞춤약학을 시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약학, 특히 임상약학에서 약물유전학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될 것입니다. 다만 환자의 유전자(DNA) 검사는 윤리적 문제 때문에 당장 일반화하기는 어렵습니다. 개인의 유전적 정보가 공개될 때의 문제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장차 과학과 윤리가 적절한 합의를 이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맞춤약학’에 대해서는 이미 약춘 31과 32 (2008.1.2과 1.16일)에서 언급한 바 있음을 밝힙니다.<필자소개>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04-23 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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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6>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
심창구 교수 지난 2월 11일부터 14일까지 3박 4일 동안, 근대 서양의약학이 일본에 도입된 경로인 규슈 지방을 탐방하고 돌아왔다. 방문한 모든 곳이 다 의미가 깊었지만, 그 중에서도 구마모토 현 오쿠니정에 있는 기타자토 시바사브로 (北里紫三郞) 기념관은 또 다른 의미에서 기억에 남는다. 기타자토는 뛰어난 세균학자로 작년부터 일본의 천엔짜리 지폐에 초상이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8살 때에 집안 형편이 넉넉치 못해 2년간 외가 쪽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집에서는 먹여주고 학교 보내주는 대신 툇마루 걸레질을 시켰다고 한다. 키타자토는 툇마루에서 광이 날 정도로 성실히 걸레질을 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유명한 사람으로 성공하자 구마모토 현에서는 소학교 1, 2 학년 도덕 교과서에 이 이야기를 실어 놓고 이처럼 ‘성실’하게 살아야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소년 기타자토가 무릎을 꿇고 열심히 걸레질하는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는 미담(美談)을 유난히 좋아하는 일본 사람다운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옆을 보니 그가 걸레질했던 바로 그 툇마루 2장이 함께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와! 아무리 세세한 것까지 전시를 잘 하는 일본 사람들이지만 그 툇마루까지 떼어서 전시할 줄은 미처 몰랐다. 문득 이어령 선생님이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책의 한 구절이 머리에 떠오른다. 오래 전에 일본 기술자가 한국기술자에게 무슨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유의사항 10가지를 설명하는데, 한 7, 8가지쯤 설명한 시점에서 한국 기술자는 슬슬 궁둥이를 들썩거린다는 것이다. 한국 기술자는 “대충 기술의 원리를 알았으면 됐지 고지식하게 10가지를 꼭 배운 그대로 할 필요까지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단다. 일본 기술자의 입장에서는 10개가 다 필요해서 가르치는 것인데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는 한국 기술자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매뉴얼에 적혀 있는 그대로 따르는 것을 성실한 태도로 받아들인다. 또 일의 성패(成敗)에 못지않게 과정 중에서 매뉴얼을 성실하게 따랐느냐 여부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설사 일의 결과가 좋게 나오더라도 매뉴얼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책임을 추궁당할 가능성이 큰 나라가 일본이 아닌가 한다. 반면에 우리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해 왔다. ‘대충 해라’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결과의 중요성만 강조해 왔다. 적어도 과거의 우리에게 과정이란 빨리 빨리 통과해야 할 단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본의 정신이 ‘과정을 꼼꼼하게’였다면 우리의 시대 정신은 ‘빨리 빨리’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 ‘빨리 빨리’ 정신은 분명 우리나라를 이토록 빠른 기간에 선진국으로 ‘압축 성장’ 시킨 동력의 하나이지만, 성수대교와 삼풍 아파트 붕괴로 상징되는 부실, 졸속, 날림 공사로 이어져 막대한 사회적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다. 오늘 아침 우연히 옛날 영상 하나를 보았는데, 시골에 가 있는 전직 대통령이 동네 어린이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작은 일을 성실하게 잘 하면 사람들이 더 큰 일을 맡긴다. 큰 일을 하려면 우선 작은 일을 성실하게 해 버릇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빨리 빨리’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과정의 중요성까지 몸에 익혀 과정 중시와 결과 중시의 사고가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다시 한번 질 높은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는 단연 일본에서 배워야 한다. 혹자는 일본을 그대로 모방하면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답답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나도 동감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국민의 유전자 특성상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일본만큼 꼼꼼한 사회가 되지는 못하리라 확신한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일본의 과정 중시 정신을 배웠으면 좋겠다.우리에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툇마루 걸레질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일을 제대로 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나라가 된 것이다.
2025-04-08 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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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5> 규슈 지방의 근대 의약학 수용사 탐방기-2
1. 둘째날 오후제인스 저택: 이틀째 오후에는 메이지 유신 (1868) 이후 구마모토에서 서양 교육을 했던 제인스 저택을 방문하였다. 1869년 구마모토번(藩)이 세운 양학소(洋學所)는 다름 해 양학교로 개명하고, 구마모토 최초로 서양식 건물 2동을 세워, 양학교 교사로 초빙한 미 육군 포병장교 출신 제인스의 가족과 의학소 교사 만스펠트의 저택으로 제공하였다. 제인스는 3년간 수학, 지리, 물리, 화학, 천문, 생물 등을 혼자 영어로 강의하였다. 이 건물은 2016년 구마모토 지진으로 완전 붕괴되었다가 2023년 재건되었다. 사노쓰네타미 기념관: 사노는 에도(江戶)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에 걸쳐 근대화에 공을 세운 ‘사가의 7현인’ 중 한 명으로, 당시의 대표적인 난학자(蘭學者, 네델란드 학문)들로부터 최신 서양의학과 과학이론을 배웠다. 1852년에 번주(藩主)가 세운 세이렌카타(精煉方)이라는 이화학연구소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네델란드 군 교관을 통해 대포와 화약 개발에 필요한 화학 실험 및 기계 시험제작 등을 배워1855년 일본 최초로 증기선 모형 제작에 성공하였다.사가번(佐賀藩)은 1857년 네델란드로부터 군함 실습용 증기선을 구입하고, 1865년에는 일본 최초의 실용 증기선을 건조하였다. 2005년 미에쓰 해군소(3重津海軍所) 터 발굴 중 발견된 19세기 말의 드라이 도크가201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일과를 마치고 히라도(平戶)시로 이동하였다. 2. 셋째날 ‘히라도상관(平戶商館)’: 1609년 애도(江戶) 막부(幕府)로부터 무역허가를 받은 네델란드 동인도회사가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설립하였다. 1641년 나가사키에 있는 데지마(出島)로 상관을 이전하면서 33년의 역사를 마쳤다. 하비에르 기념교회: 하비에르(Javier)는 포르투갈 국왕인 주앙 3세로부터 선교사로 임명되어 인도, 실론, 말레이 반도 등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1548년 일본인 야지로에게 세례를 준 것을 계기로 1549년 가고시마(鹿児島)에 상륙하였다. 많은 주민들에게 세례를 주고, 메이지 시대에 금교령(禁敎令)이 해제되자1931년 현 위치에 성당을 세웠다. 점심 식사 후 나가사키(長崎)로 이동하여 원폭자료관과 평화공원을 둘러 ‘지볼트(Siebolt) 기념관’을 탐방하였다. 지볼트 기념관: 1823년 일본에 온 신성로마제국 주교령 뷔르츠부르크 (현 독일 바이에른 주) 출신의 의학자 겸 박물학자인 지볼트는 에도시대에 일본에 서양의학과 박물학을 전수하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일본의 자연과 문화 등을 유럽에 널리 소개한 인물이다. 1832년 네델란드 라이덴에 ‘일본박물관’을 개설하였다. 데지마(出島): 이어서 나가사키 시의 데지마를 방문하였다. 1550년 포르투칼 상선이 입항한 것을 계기로 히라도는 일본과 중국 등지와의 무역, 즉 남만(南蠻) 무역과 일대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상황의 변화로 데지마로 그 거점이 옮겨졌다. 데지마는 바다를 메운 4천평 미만의 섬이다. 네델란드가 기독교 포교 금지와 관련되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치고 유일한 서양 통상국이 되었다. 데지마에는 상관장(商館長), 서기, 창고장 등의 상원과 의사, 목수, 요리사 등 10~15인의 네델란드인 등이 거주했다. 상관장은 애도를 방문하여 서양 지식을 일본에 확산시켰다. 3. 마지막 넷째날출발지인 후쿠오카로 돌아와 ‘규슈대학의학역사관’과 근처에 있는 원구사료관(元寇史料館)을 방문하였다. 원구사료관: 13세기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2차례 일본을 침략하였다. 1274년 제1차 침공에는 고려군 5천여명을 포함한 약 3만명의 원군이, 1281년 2차 침공에는 고려군 4만명을 포함한 14만병이 나섰다. 그러나 두 번 다 폭풍우(神風, 가미가제) 때문에 퇴각하였다. 이번 탐방은 일본 근대화의 경로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공부가 되었다.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대한의사학회(大韓醫史學會)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상의 내용도 동 학회의 ‘2025해외답사-일본 근대 의료사’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힌다.
2025-03-26 1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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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4> 규슈 지방의 근대 의약학 수용사 탐방기-1
규슈 지방의 근대 의약학 수용사 탐방기-1 지난 2월 11일부터 14일까지 3박 4일간, 일본의 규슈 지방을 탐방하였다. 규슈는 일본이 서양의학을 수용한 대표적인 지역이다. 한국의사학회(醫史學會)가 기획한 해외 탐방에 우리 약학사분과학회 회원 6명이 합류한 탐방이었다. 참여자는 총 18명이었다. 1. 첫날, 오전 10:20에 후쿠오카 공항에 내렸다. 버스를 타고 먼저 사가현(佐賀縣)의 도스시(鳥栖市) 다시로(田代) 지역에 있는 ‘나카토미(中富) 약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이 지역은 18세기 중엽부터 히사미츠(久光) 제약이 배치매약(配置賣藥)이라는 기법으로 주로 붙이는 약을 판매했던 곳이다. 배치매약이란 개인집을 방문하여 약을 먼저 주고 반년이나 1년 후에 다시 방문하여 요금을 받는 방식을 말한다. 이어서 구마모토(熊本) 현 아소군(阿蘇郡) 오쿠니쬬(小國町)에 있는 ‘키타자토 시바사브로(北里紫三郞)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키타자토는 근대 일본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세균학자이다. 그는 1871년 신설된 구마모토의 ‘후루시로(古城) 의학교’에 입학했다가 네델란드 해군 군의관인 콘스탄트 만스펠트(Mansvelt)의 권유로 ‘도쿄대학 의학부’로 진학했다. 1886년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 위생연구소에 유학하여 탄저균과 결핵균 배양 등의 병원미생물학 연구의 일인자인 로베르토 코흐(Koch) 에게 사사하였다. 1890년 동료였던 베링(Behring)과 ‘동물에서의 디프테리아 면역과 파상풍 면역의 성립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두사람이 동시에 제1회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으니1인에게만 상을 수여한다는 당시 규정에 따라 베링만 노벨상을 수상했다. 귀국 후 ‘사립 키타자토 연구소’를 설립하여 광견병, 인플루엔자, 이질, 발진디푸스 등의 혈청 개발에 힘썼다. 1916년 난립한 의사회를 규합하여 대일본의사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17년 게이오(慶応) 대학 의학부 병원의 병원장을 역임하고 1931년 만 78세에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얼마전 바뀐 일본 1000엔 지폐에서 그의 초상을 볼 수 있다. 2. 둘째날인 2월 12일에는 2016년 지진으로 대다수의 전각(殿閣)과 석축(石築)이 훼손되어 보수 중인 구마모토성(熊本城)을 잠시 구경한 다음, 구마모토 시의 히고(肥後) 지역에 있는 ‘히고의육박물관(肥後醫育博物館)’을 방문하였다. 1756년에 세워진 일본 최초의 공립의학교인 재춘관(再春館, 사이슌칸) 및1878년에 세워진 사립 구마모토 의학교가 오늘날의 구마모토대학 의학부로 이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구마모토의 번주(藩主) 등은 약초강습회(1756)를 열다가 재춘관이 설립된 후에는 약초 실습소 (오늘날의 약초원)인 반지엔(藩滋園, 1870-1870)을 설립했다. 1885년에는 당시 구마모토에서 근무하던 육군약제관들과 당시 현립 구마모토 의학교 약무국장 등 지역 약업가들이 출연하여 ‘사립구마모토약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구마모토 대학 약학부로 이어진다. 약학대학 관내에 반지엔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약학교육의 역사를 소개하는 ‘구마약(熊藥) 박물관’이 있다고 하나 시간 관계상 방문하지 못 하였다. 이어 구마모토 시의 ‘야마사끼(山崎)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야마사끼 마사타다는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901년 현립 구마모토병원 산부인과 부장 및 사립 구마모토 의학교 교수로 근무하다 1909~1910년 독일 뮌헨 대학과 본 대학에서 산부인과 유학 후 1911년 사립 구마모토 산파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1925년에는 현립구마모토의과대학 학장을 역임한 후 이 현립(縣立) 대학을 관립(官立)으로 이관시켰다. 이 기념관은 그가 1929년 히고(肥後) 지역의 의학교육사인 ‘히고의육사(肥後醫育史)’를 저술한 공적을 기려 세운 것이다. 일본이 서구 의약학을 재빠르게 도입한 데에는 해운 항로가 일찍 열린 데다가 지도층의 적극적인 수용 자세가 크게 기여한 것 같았다.이어서 제인스(Janes)의 저택과 ‘사노 쓰네타미(佐野常民)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다음 회에 계속)
2025-03-12 0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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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413> 약학의 특성-10. 의약품의 순결성(純潔性)
심창구 교수 약학은 생체이물(生體異物, xenobiotics)을 적용하여 인체의 생명 현상을 바람직하게 조절하는 학문입니다. 이때 생체이물을 약(drug)이라고 부릅니다. 인체에 적용하는 만큼 의약품은 우선 활성성분(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 API)의 함량이 정확하고 균일해야 합니다. 즉 정밀성(精密性)이 요구됩니다. 특히 API 함량이 수 밀리그램이나 마이크로그램에 불과할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의약품의 두번째 특징은 순결성(purity), 즉 되도록 API이외의 불순물(不純物, impurity)을 함유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각 나라의 약전(藥典)은 의약품 원료로 사용하는 각 API에 혼입(混入) 가능성이 있는 불순물의 한도를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API에 대해서는 황화물이나 염화물의 혼입 한도를, 또 다른 API에 대해서는 비소나 납의 혼입 한도를 규정하는 등 API마다 규제하는 불순물의 종류가 다릅니다. 얼핏 생각하면 모든 API에 대해 동일한 규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제가 1974~1976년 모 제약회사 시험과에서 근무할 때, 저는 API마다 순도 시험 항목이 다른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몸에 해로운 모든 불순물을 검사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API의 제조 공정, 즉 합성이나 정제(精製) 과정에서 혼입될 가능성이 있는 물질(불순물)에 대해서만 검사하도록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사전(事前)에 승인된 방법에 따라 제조한 API는 약전에 규정된 순도 시험만 통과하면, 불순물의 혼입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승인받지 않은 방법으로 제조한 API의 경우, 설령 약전에 규정되어 있는 순도 시험에 ‘적합’했다고 하더라도 그 물질의 안전성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승인된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제조할 경우, 예상하지 못한 불순물이 혼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조 공정에서 A라는 화학 물질을 사용하겠다고 승인받아 놓고 실제로는 B라는 물질을 써서 API를 제조했다면, 약전 규정에 따라 '잔류 A 농도'를 검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정부는 API가 승인된 방법에 따라 제조되고 있는지 확실히 감독해야 합니다. 또 하나 유의할 점은 약전에 수재된 순도 시험이 그 원료에 대한 최소한(最小限)의 시험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불순물 시험 규정을 모두 통과한 원료 속에서 작은 옷핀이 하나 발견되었다면, 이 원료를 사용하여 의약품을 제조해도 괜찮을까요? 약전에는 이러한 ‘옷핀’이 혼입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원료는 당연히 폐기해야 합니다. 약전의 규정은 최소한도의 규정일 뿐 규정되지 않은 불순물이 존재해도 괜찮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1996년, D 제약에서 제조 ·판매하던 징OO이라는 정제(錠劑)에서 메탄올이 검출되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는 은행잎으로부터 이 약의 유효 성분을 추출할 때 사용한 메탄올이 정제에 극미량 남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메탄올은 휘발성이 강해 제조 과정에서 대부분 증발해 버립니다. 그래서 "시중의 소주 한 잔에 들어 있는 메탄올 양이 이 정제 100정에 들어 있는 양보다 훨씬 많다"는 변명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소비자의 안전성 요구 수준에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D 제약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만약 정부가 이 약의 제조 공정을 사전에 검토하여 제품 중 잔류할 가능성이 있는 메탄올의 허용 한도를 엄격히 규정하고 관리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었습니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첨가제(excipients)의 순결성입니다. 의약품 제조에는 대부분 결합제, 붕해제, 착색제 같은 첨가제가 함께 사용됩니다. 앞으로는 안전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수준이 상승하고, 분석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API뿐만 아니라 첨가제들의 순도도 의약품 품질 평가의 중요한 이슈가 될 것입니다. 의약품은 언제나 정밀하고 순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2025-02-26 0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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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2> 몇 살이세요?
심창구 교수 새해 (2025년) 설날 아침이다. 그래서 속절없이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 설날이면 나이 먹어 좋아라 하는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더 늙게 되었다고 한숨을 내 쉬는 노인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문득 내가 몇 살이나 먹었는지 잘 모르겠다. 누가 몇 살이냐고 물어도 금방 대답을 못할 정도이다. 치매(痴呆)에 걸려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나이 셈법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어나자 마자 한 살로 치는 전통적 나이 셈법이 있는가 하면, 태어난 다음 해부터 한 살로 치는 셈법, 또 자기가 태어난 생일이 되어서야 비로서 한 살을 더 먹는 서구식 셈법 등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뱃속에서 열 달 있다가 태어나기 때문에 태어나자 마자를 한 살로 치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도 12월 31일에 태어난 아기가 다음날 아침에 두 살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빨라 보인다. 최근에 정부가 서구식 즉, 생일날에 나이를 먹는 셈법을 권장(?)하자, 갑자기 나이가 줄어들었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바람에 나이 셈법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생일날 축하 케이크에 양초를 몇 개 꽂아야 하는 지도 금방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누가 나이를 물으면 아예 ‘몇 년 몇 월 몇 일생’이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과연 나는 몇 살이라고 해야 옳은가? 같은 맥락에서 언제 나이를 먹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양력 새해 첫 날인지, 음력 새해 설날인지, 아니면 생일인지 헷갈린다. 생일에도 양력, 음력이 다 있으니 더욱 헷갈린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은 세월이 너무 빠르다며 나이 먹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으로는 김형석 교수님처럼 100세가 훨씬 넘은 분들의 장수를 부러워한다. 나이 먹기를 싫어하면서 나이 많은 분을 부러워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나이 먹는 일을 기쁘고 감사한 일로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나이를 더 먹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얼른 얼른 나이를 먹다 보면 어느덧 나도 내가 평소에 부러워하던 대 선배님들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건강해야 나이도 먹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젊은이들의 나이에 대해서는 느낌이 좀 다르다. 우리 아들 며느리들과 손주들은 언제까지나 나이를 먹어 늙지 말고 젊게 활기차게 살았으면 좋겠다. 요컨대 늙은이가 나이 먹는 것은 괜찮지만, 젊은이들이 나이를 먹어 늙는 것은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다. 문득 ‘나이’의 어원(語源)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거의 전지전능(?)한 챗지피티(Chat GPT)에게 물어봤더니 ‘낳다(출생하다)’가 ‘낳이’를 거쳐 변한 것이란다. 맞는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또 왜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는지도 물어봤다. 영어로는 ‘get older’ 또는 ‘age’라고 하고 일본어로는 ‘年を取る年(토시오토루)’라고 하는데 우리는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대답인즉 ‘먹는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음식물을 섭취하는 행위를 가르키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경험의 축적, 내면화(內面化), 체화(體化, 몸에 축적됨을 가리킴)를 강조하는 의미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음식을 먹고 시간이 지나면 몸속에 쌓이는 것처럼, 나이도 경험처럼 삶의 일부로 몸속에 쌓인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더위를 먹는다’, ‘욕을 먹는다’, 상대방에게 한방 먹었다’ 등도 비슷한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설명 같았다. 챗지피티에게 물으면 무엇이든 일단 아는 척은 잘 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다. 나는 오히려 무엇이든 먹는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배고프던 시절에 나이라도 ‘먹자’라는 생각에서 이런 표현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독자 여러분, 이번 설을 쇠시면 몇 살이 되시나요? 어르신들께는 이렇게 여쭙겠습니다. 올해로 춘추(春秋)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연세(年歲)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올해도 연부역강(延富力强) 하시고 평안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근하신년(謹賀新年)!
2025-02-12 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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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1> 무재능(無才能)의 비유전(非遺傳).
심창구 교수 얼마전에 ‘약창춘추 3’이라는 수필집을 내면서 막내 손녀 (초5)가 그린 그림을 표지에 실었더니 주변에서 그림이 참 좋다는 평들을 해 주셨다. 그림을 잘 그리는 피(遺傳)가 흐르지 않는 우리 집안으로서는 좀 신기한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림과 나의 인연을 회고해보았다. 내가 시골 초등학교 6학년일 때 (1959년) 담임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멀리 보이는 계양산 (인천)을 그린 일이 있었다. 크레용으로 그린 내 그림을 보신 선생님은 ‘산의 등성이와 계곡을 입체감 나게 묘사했다’고 몇 번이나 칭찬을 해 주셨다. 계곡을 산등성이보다 진하게 칠한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럼 혹시 내가 그림에 재능이 있나?” 이런 생각을 그때 살짝 했던 추억이 있다. 그 후 나는 인천으로 가 동산(東山)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첫 미술 시간에 미술 선생님께서 ‘미술반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할 때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초등학교 때 들은 칭찬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누님에게 이 말씀을 드렸더니 ‘그림을 그리면 배가 고프다’며 미술반에 들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그 말에 별 아쉬움도 느끼지 않고 미술반 가입을 취소하였다.그 미술 시간에 한번은 에노구(絵の具)라는 수채화 물감으로 흰색 꽃병을 그리다가 그만 파란색 물감 한 방울을 떨어트리는 실수를 했다. 잘 지워지지가 않기에 일부러 파란색을 한 방울 더 떨어뜨려 큰 원을 그려 넣었다. 나름 독창성(?) 을 발휘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를 보신 선생님은 ‘물감을 잘못 떨어트렸으면 지워야지’라고 지적하셨다. 나 혼자 독특하다고 우겨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나는 중학교 3년간 인천 금곡동 집에서 동산 중학교까지 약 3km 길을 걸어서 다녔는데 그 길에 외화 재개봉(再開封) 상영관인 문화극장이 있었다. 문화극장에서는 미국의 서부영화를 상영하는 날이 많았다. 당시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게리 쿠퍼' ‘버트 랑카스터’ 그리고 '아란 낫드’가 결투를 하면 누가 이길까? 같은 논쟁(?)을 할 정도로 서부영화가 인기가 높았다.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또는 시간 날 때면 일부러 문화 극장 앞에 가서 입구 위에 크게 걸려있는 영화 광고 간판을 쳐다보곤 했다. 당시는 사람이 일일이 간판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문화 극장의 경우 극장 입구 바로 왼쪽에 간판을 그리는 화실이 있었는데 가끔 입구가 반쯤 열려 있어 간판 그리는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우선 지난번에 사용했던 캔버스 간판에 있는 그림을 흰 유화 물감으로 덧칠해서 완전히 지우고 난 다음에 새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 중 특히 인물의 모습이 영화 포스터에 있는 배우의 모습과 어쩌면 그리 똑같은 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문화 극장의 그 그림들이 국내 아니 어쩌면 세계에서 최고의 극장 간판 작품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그림들이 멋있어서 나도 몇 번 스케치 북에 서부영화 주인공을 그려 보기도 했다. 그후로는 그림에 흥미를 느껴본 기억이 전혀 없다. 1967년 대학에 들어 갔는데 바로 엉뚱한 일이 일어났다. 미술반에 놀러갔다가 고등학교 동기의 권유로 얼떨결에 미술반장에 추대(?)됨을 당한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명색이 반장인 내가 문외한이니 미술반도 당연히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함으로 반항(?)하고 지내는데 어느 날 정말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숙명여대 종학생회 회장 출마자로부터 선거 포스터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실력이 없어 못 그리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몇일을 고민한 끝에 지물포(紙物鋪)에 가서 예쁜 도배지 한 장을 사서 포스터 크기로 자른 다음, 그 위에 파스텔로 후보자의 성명과 공약 몇 자를 써 봤더니 제법 그럴 듯했다. 휴~ 잔꾀로 위기를 모면한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에 진땀이 난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 손녀는 이런 나의 무재능을 전혀 물려받지 않아 정말로 그림을 잘 그린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할렐루야! 혼돈기에 한가한 이야기를 쓰는 심사가 괴롭다. 약창춘추3 표지에 실린 손녀딸의 그림.
2025-01-22 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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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0> 약대 교가(校歌)의 부활
약대 교가(校歌)의 부활1950년 사립 서울 약학대학이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그때에는 김광균(金光均) 작사, 김성태(金聖泰) 작곡의 약학대학 고유의 교가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2015년). 가사는 다음과 같은데, 과연 당대 시인의 작품답게 힘차고 원대한 약학의 포부가 잘 표현되어 있다. 1. 진리의 횃불 두 손에 들고 성동(城東)벌 고대(高臺) 위에 모인 우리들 배움의 길은 멀고 험(險)하나 희망에 가득 찬 깃발 올리자. 희망에 가득 찬 깃발 올리자. 2. 조국은 우리 것, 힘을 합하여 거치른 황토밭에 씨를 뿌리자. 장차 올 영광의 날 두 품에 안고 하나의 이름 없는 초석(礎石)이 되자. 3. 찬바람 불고 비가 나린들 우리의 갈 길을 누가 막으랴. 장하다 약대 500의 학도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그러나 교가의 악보(樂譜)는 지금까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당시 국립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던 김성태님이 작곡했다는 기록만 보일 뿐이었다. 아마 악보가 전해지지 않은 것은 당시의 편집 기술 상 악보 그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악보까지 찾아 내 그 교가를 다시 불러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고 있던 중에 작곡가의 장남이 서울대 경영대학의 명예교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둘러 그분께 전화를 드려 ‘혹시 그 악보를 찾을 수 있겠느냐’ 문의했더니 ‘당시 (광복 이후) 아버지께서 작곡하신 각급학교의 교가가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에 악보 찾기를 일단 포기하고 언젠가 우연히 발견되기만을 기대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인 2024년 12월 어느 날,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 단기 4288년, 그러니까 서기 1955년에 발간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제9회) 앨범이 서울대 약학역사관에 입수되었는데, 그 앨범에 그 악보가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만세 만세! 반가운 소식에 저절로 환호가 나왔다. 서울대 약학대학 교가 원보 ©서울대 약학역사관이제 약대 교가의 가사와 악보를 완벽하게 알게 되었으니, ‘동창의 날’ 같은 때에 이 교가를 합창해 보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니 아예 약대의 교가로 되살려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이런 상상을 하며 달콤한 꿈을 꾸는 요즘이다. 그런데 1950년경에 만들어진 이 교가가 언제까지 공식적으로 불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약대에 입학한 1967년 이후에는 한번도 들어 본 일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1960년대에 들어서기 전후부터 서서히 부르지 않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참고로 이 귀한 앨범을 소장했던 분은 1951년 국립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1955년 3월 25일에 졸업(제9회)한 박한순(朴漢順)님이다. 박한순은 박명진(1903~1957, 서울 치과대학 초대학장)의 4녀인데, 둘째 오빠 박한덕(경성약전 14회, 1943년 졸업), 첫째 언니 박한원(사립 서울약학대학 전문부 4회, 1950년 졸업), 둘째 언니 박한일(전문부 4회, 1950년 졸업, 박한원과 쌍둥이) 등 4남매 (1남 3녀) 모두가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특별한 기록도 갖고 있다. 박한덕의 딸 박영애가 박한순의 딸 제미경 인제대 교수 (박영애의 사촌 동생, 어머니와 부산시 해운대구 거주)로부터 박한순의 앨범을 빌려 와 이영남 (충북대 명예교수, 현 약학역사관 자문위원, 박영애와 여고 동창으로 절친)에게 보여줌(2024년 11월 중순)으로써 위 내용(악보 등)이 공개된 것이다. 참고로 이 앨범에 실려 있는 당시의 약학대학 교기(校旗)의 모습도 소개한다. 3개의 벤젠핵 모습이 과연 약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 당사 서울대 약학대학 교기 ©서울대 약학역사관
2025-01-08 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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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09> 일본인의 전통 지키기
심창구 교수.◇합격자 발표작년 초인가 TV를 보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요즘도 일본 동경대학 입시에 응시한 학생들이 발표 당일 학교에 가서 게시판에 게시된 합격자 명단(수험번호)를 보고 있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이 인터넷 시대에 아직도 그런 옛날 방식으로 합격자 명단을 발표한다고?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되는대로 이 것이 과연 사실인지 확인해 보리라 마음먹었다.그런데 마침 작년말에 동경대학 한인(韓人) 유학생 송년 모임이 있어서 참석했더니, 현재 동경대학에 다니고 있는 일본인 여학생 한 명이 봉사자로 참석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대뜸 ‘과연 게시판에 합격자 번호를 써 붙인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봤더니, 그 학생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대답하였다.와, 그게 사실이었구나! 다만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게시판을 보기 전에 인터넷 등으로 자신의 합격 여부를 미리 알기는 한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수험번호를 써서 운동장에 게시를 하느냐? 그리고 설마 수험번호도 아직 붓글씨로 쓰는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그 학생 왈 ‘합격자 발표는 옛날부터 그렇게 써 붙이는 것이 전통이라 그러는 모양’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붓글씨로 쓰지는 않고 아마 컴퓨터 글씨로 프린트하는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전통이라 그냥 하는 거라고?우리나라에서는 게시판에 가서 합격자의 수험번호를 확인하는 그 전통이 없어진 것이 언제였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67년에는 얼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약대 운동장 한 곁에 서있는 게시판에 가서 자신의 합격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합격한 수험생과 부모는 환호했고, 떨어진 학생과 부모는 낙심의 한숨을 쉬곤 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없어진 그 전통이 왜 일본에는 아직도 남아 있을까?◇전국고교야구대회2024년 일본에서 열린 제106회 고시엔(甲子園) 전국 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에서 재일 한국인이 설립한 교토국제고가 결승전에서 연장전 끝에 간토다이이치고를 2-1로 꺾으며 대회 사상 외국계 학교로는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특히 경기 후 한국어 교가(校歌)가 일본 전역에 생중계됨으로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오늘은 교토국제고가 아니라 고시엔 대회의 권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시엔 대회는 몇 개의 일본 고교 야구 대회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이 대회에 출전하는 학생들은 출전 자체를 엄청난 명예로 생각한다고 한다. 다들 고시엔 운동장 흙을 기념으로 담아 가는 바람에, 주최 측이 계속해서 흙을 보충해 주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우리나라에도 고교 야구가 인기를 끌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인천에서 중 고등학교 다닐 때(1960년대 전반)만 해도 약 5개의 전국규모의 고교 야구대회가 국민들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적인 스포츠 이벤트가 되는 고교 야구대회는 없어지고 말았다. 전통이 사라진 것이다.가장 큰 원인은 물론 프로야구의 출범이겠지만, 프로야구의 인기 가운데서도 고시엔 대회의 인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일본을 보면 두 나라의 사정이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야구 팀 수가 우리나라의 야구선수 수보다 훨씬 많다고 할 정도로 야구 인구가 워낙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에 비해 적은 야구 인구에도 불구하고 전국 고교 야구대회 수가 너무 많아 인기가 시들 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먼저 출범한 전국 대회의 권위와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신문사마다 전국대회를 만든 바람에 빚어진 당연한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고찰일본인의 심성이 우리와 얼마나 다르기에, 때로는 시대착오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전통을 이토록 잘 지키고 있는가? 혹시 나의 지론처럼 일본인은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섣부른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 결과가 이와 같은 전통 지키기로 남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변화무쌍 정도가 아니라 늘 격변의 와중에 있는 우리와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2025-01-03 0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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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08> 여동문회 창립 45주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여동문회가 창립 45주년을 맞아 기념회지를 발간하고 총회(11월 5일)를 열었다. 이 기념호를 통해 월계회(月桂會)를 모태로 하여 발전을 거듭해 온 여동문회의 45년에 걸친 발자취를 정리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기념회지에 축사를 쓰는 영광을 얻었다. 그 내용을 다소 수정하여 이하에 소개한다. ‘서울대 약대 여동문회’가 창립 45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회지를 발간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일찍이 1915년에 설립된 약학강습소를 이어 1918년에 문을 연 조선약학교는 1924년에 3명의 여동문을 배출하였습니다. 그 후 1928년까지의 조선약학교 시절에 총 15명의 여동문이 배출되었습니다.조선약학교가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승격된 시절 (1931~1947, 1~17회)에는 여성의 입학의 길이 닫혀 있어 여동문이 1명도 배출되지 못 했습니다. 그 후 1945년 광복 이후의 사립 서울약학대학시절 (~1950년)에는 총 38명의 여동문이 배출되었고, 1950년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된 후에는 오늘날과 같이 여동문의 배출이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여동문회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여동문들의 활동상에 시대에 따른 큰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제가 학부를 졸업 (1971년, 25회) 하기 전에는 물론 그 이후까지도 상당기간 국내 제약회사는 여동문의 취업에 폐쇄적이었습니다. 또 어렵게 취업이 되더라도 결혼하거나 늦어도 출산시에는 회사를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약대에 여학생이 많아지는 현상을 우려하곤 했습니다.그러나 제가 2년간 제25대 약대 동창회장을 역임 (2020~2021)하면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은 1987년 우리나라에 물질특허 제도가 도입되고 이어서 다국적 제약기업이 국내에 다수 설립되면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다국적 기업은 우리나라 기업과 달리 여성의 취업에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회의 각 방면에서 여동문들이 눈부신 활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동문님들의 유능함이 드디어 빛을 발(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이제 약학대학 내외에서 여성의 수가 너무 많다는 시대착오적인 우려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날의 여동문들은 서울대 약대 개교 이래 최고의 전성기(全盛期)를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가 갈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남과 여의 구별은 부질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모교 동창회에서도 머지않아 여동문의 멋진 리더십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코를 거울에 박고는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했답니다. 이 말처럼 현재를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는 유구한 역사(歷史) 속에서 현재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 쉽지 않습니다. 현재를 하나의 점(点)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 하나만 가지고는 역사의 나아가는 방향을 인식하기 어렵지만, 과거의 점과 현재의 점을 연결하면 비로소 선(線)이 만들어지고 선의 방향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선이 장차 어느 방향으로 뻗어 나갈 것인지 그 지향점(指向點)도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히 그 지향점이 바람직한 지, 아니면 바꿔야 할지도 성찰해 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과거에 안주하는 과거학이 아니라 미래의 방향을 탐색하는 미래학(未來學)입니다.저는 대한약학회 내에 약학사(藥學史)분과학회를 창립(2014년)하고, 모교의 약학역사관 설립(2015년)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발간(2016년)을 주도한 자칭 ‘약학사맨’입니다. 제가 약 45년에 걸친 여동문회의 역사가 정리된 ‘여동문 회지’의 기념호 발간을 남다른 감회로 기뻐하는 이유입니다.마침 지난 10월 10일 우리 나라의 작가 한강님의 2024년 노벨상 수상 발표 소식을 들었습니다. 18번째 여성 수상자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 여동문회가 뻗어 나갈 미래를 계시하는 의미 심장한 경사라고 생각합니다. 여동문회의 발전과 여동문회지의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24-12-16 0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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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07>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심창구 교수.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의 학술지인 “약학사회지” 제7권이 최근 발간되었다. 실린 글들 중 특히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이하 마퇴본부)의 설립배경 및 발전 과정”이라는 논문이 눈길을 끈다. 이 논문은 이 주제로 열린 좌담회 내용을 필자인 내가 정리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마약류의 남용과 유통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전문 조직이 필요해졌다. 이에 안필준 보건사회부(보사부) 장관이 대한약사회 권경곤 회장에게 마퇴본부의 설립을 제안하였고, 이에 따라 1992년 4월 22일 재단법인 마퇴본부가 대한약사회 주관으로 설립되었다.마퇴본부는 2002년 12월,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에 의한 법정단체로 전환되었고, 이듬해인 2003년 4월 기획재정부로부터 공익법인(구 지정기부급단체)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 유일한 마약류 예방과 재활전문기관이었던 마퇴본부는 대한약사회 회원들의 회비 납부와 헌신적인 노력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이 마퇴본부가 2024년 1월 31일 기획재정부로부터 ‘기타공공기관’으로 지정되어 약사회로부터 식품의약품안전처로 업무 주관이 바뀌었다. 마약의 범람에 따른 예산 등의 문제가 배경이 되었을 터이지만 그동안 마퇴본부를 키워 온 약사회로서는 여간 서운한 일이 아닐 것이다.이 시점에서 마퇴본부의 설립과 발전 과정을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이에 당시 약사공론 편집국장 및 마퇴본부 사무총장을 역임한 강창덕 총장, 보사부를 출입한 약사공론 정동명 기자, 전 약사공론 신영호 사장 및 조동환 주간 등을 모시고 마퇴본부의 설립과 발전 과정에 관한 숨은 이야기를 들어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그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소개한다.1991년 5월 27일 약사 출신 김정수 장관 후임으로 안필준씨가 보사부 장관이 부임했다. 노태우 정권의 마지막 보사부 장관이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가수 등 연예인들이 마리화나 필로폰 등 마약류 복용 사건이 종종 발생하고, 특히 청소년들이 마리화나나 필로폰 등을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까지 선포하는 상황이었다.약사회에서도 약사의 직능과 관련하여 마약퇴치를 위한 세미나도 여는 등 마약퇴치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정기자는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나지만, 1991년 가을쯤에 권경곤 대한약사회장이 보사부에 들어오신다고 하여 제가 5층 약정국장실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4층 장관실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약사공론 기자는 대한약사회에서 임원이 오시면 국장실이나 장, 차관실까지 수행도 해드리고 했습니다. 약사회장과 인사를 나눈 안필준 장관이 약사회에 아주 귀한 선물을 주겠다는 의미로 다음과 같은 말을 꺼냈습니다.”“우리나라도 지금 마약이 크게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약제사들이 앞장서서 마약 · 각성제 남용 방지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한약사회가 조직도 잘 되어 있고, 힘도 있는 단체이니 마약퇴치 운동 단체를 만들어 국민 캠페인 같은 것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약은 약사들과 관련이 있으니, 약사회가 맡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기자는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안장관이 대충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이 제안을 받은 약사회장이 숙고를 하는 와중에 다시 안장관의 독촉을 받아 1992년 4월 22일 ’재단법인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권경곤 대한약사회장이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사무실은 약사회관 1층 서울시약사회 회의실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6월 21일 세계마약퇴치의 날에는 서울신문‧스포츠서울과 공동으로 장충공원에서 ‘마약류 및 약물 오남용 예방을 위한 국민 대행진’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에는 김대중, 박찬종 등의 정당 대표 등 각계 인사와 6,0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그후 약사회는 인천 부산 등지에 마퇴본부 지부를 설립하고 열정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펴 왔다.이렇게 발전해 온 마퇴본부가 금년에 식약처로 이관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약학사회지를 참조하며 아쉬움을 달래기 바란다.
2024-12-16 0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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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06> 약학사(藥學史)분과학회 창립 10주년
심창구 교수.지난 10월 22일, 더케이 호텔 서울 대금홀에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미옥 대한약학회장과 나영화 한국약학대학교육협의회 이사장의 축사에 이어 필자(본 분과학회 초대 회장, 현 명예회장)와 김진웅 현회장이 각각 창립 10년간의 활동과 미래전망에 대해 강연하였다.이채롭게도 휴식 시간에 정기화 명예교수가 ‘대양에 새로운 배를 띄우며’라는 자작(自作) 시를 낭송하여 10주년을 축하하였다.뒤이어 약업신문사 함태원 사장이 ‘한국약업 100년’이라는 주제로 우리나라 약업의 지난 발자취와 앞으로 나아 갈 바에 대해 통찰력 깊은 강의를 하였다. 끝으로 동경대 츠타니 교수가 우리에게는 없는 일본의 기부강좌(寄付講座)의 역사와 육약학(育藥學) 강좌에 대해 소개하였는데, 기부강좌 제도가 약학대학 교수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약창춘추 405 참조).필자는 은사이신 이상섭 교수님의 강권(强勸)에 못 이겨 2006년 시청 앞 프레지던트 호텔의 한 객실에서 일본 약학사 연구팀 10명에게 한국 약학사에 대한 강의를 한 일이 있었다. 이 강의는 2007년 일본약학사 총회(동경대)에서의 특강으로 이어졌는데, 이를 계기로 약학사에 문외한이었던 필자가 약학사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2012년에는 약학교육협의회(당시 이사장 김대경)가 필자에게 '한국약학사'의 편찬을 의뢰했는데 이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약 33명의 전문가의 도움(집필)을 통해 다음해 1월에 819쪽의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이 보고서는 2017년 약업신문사를 통해 ‘한국약학사”라는 814쪽의 책으로 발간되었다.필자는 이 책에서 1) 단군 이래 우리나라 의약제도의 변천사, 2) 약학교육 및 연구 활동, 3) 한국약업 100년사, 4) 신약개발 동향 및 전망 등, 되도록 약학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다루고자 노력하였다. 약학사 분과학회의 창립은 2013년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필자와 김진웅 회장 등은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여 대한약학회(회장 서영거)에 제출하여 2014년 4월 16일 대의원 총회 승인을 받았다. 이 때 적극적으로 도와 주신 서영거 회장께 감사드린다.창립 이후 우리 분과학회는 '근현대 약학 및 약업의 발전사를 조사·정리·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매년 2회의 약학사 심포지엄을 개최해 오고 있다. 2018년에는 공식 학술지인 '약학사회지'를 창간하였다. 금년까지 총 20회의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약학사회지 7권을 발간하였으며 매년 1회씩 뉴스레터를 발간하는 등 나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17년에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발간을 주도하였는데,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근대 약학 교육의 초창기 100년의 역사가 처음으로 정리되었음에 큰 보람을 느낀다. 요즘은 1971년 홍현오 선생(전 약업신문 편집국장, 사장)이 저술한 '한국약업사’의 보정판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근대 약업사를 정리한 기념비적인 명저(名著)이다.필자에 이은 발표에서 김진웅 분과학회장은 약학사 분과학회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우선 약학대학 교수를 비롯해 전문적인 역사학 전공 연구자들과의 협력 강화에 나서겠다고 하였다. 즉 신진 역사학자들에게 장학금이나 연구장려금을 지급하고 약계 원로들과 멘토-멘티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그들이 약학사를 연구하는 모티브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또 약계에서 활약했던 원로들의 이야기를 녹취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도 열심히 하겠다고 하였다.또 약학대학 교육과정에 '약학사' 또는 ‘의약품개발사’ 교과목을 개설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를 위해 표준 교육안(敎育案) 개발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였다.이 날의 심포지엄에는 약 60명의 청중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셨다. 앞으로 우리 분과학회는 김진웅 회장의 리더십과 이영남, 주승재 교수 등의 약학 및 역사에 대한 전문성, 그리고 운영위원들의 헌신에 힘입어 더욱 발전해 나갈 것을 굳게 믿는다.
2024-12-16 0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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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05> 동경대학 약학부의 기부강좌의 역사
심창구 교수.약학사분과학회의 창립 10주년을 맞아 10월 22일 개최된 제20회 심포지엄에서 동경대학 츠타니 교수(津谷喜一郎, Kiichiro Tsutani, 전 의약정책학 교수)가 보내온 강연 초록을 발췌 소개한다.츠타니 교수는 1954년에 설립된 일본약사학회(日本藥史學)의 제6대 회장으로서 우리 분과학회의 창립 총회와 심포지엄(서울)에 참석한 바 있고, 일본의 약사학회지(藥史學會誌)에 필자(심)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한 바도 있다.1. 드라이랩(Dry Lab)의 역사드라이랩은 이제 의학이나 약학에서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츠타니 교수가 조사한 결과, 1893년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약학과에 생긴 위생재판화학 강좌가 일본의 드라이랩의 시작이었다.1966년(~ 1976년)에 동경대학 약학부에 부속 약해(藥害) 연구 시설이 설립되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약해(藥害)이었던 탈리도마이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탈리도마이드 피해자는 사산(死産)과 유산(流産)을 합쳐 약 1,000명으로 추산된다. 그 외의 SMON, AIDS, 소리부딘, 간염 약해 등도 이 시설의 연구 대상이었다. 일본에서 약해가 얼마나 중요한지2020년판 ‘약학 교육 모델 코어 커리큘럼’에 "약해"라는 단어가 17번이나 나온다.2. 기부강좌(寄付講座, endowed chair)의 역사기부강좌는 주로 민간 기업과 같은 학교 외부로부터의 기부금이 그 재원이다. 일본의학회(日本醫學會)는 각 분과회를 연구·교육 내용에 따라 기초부회(15), 사회부회(20), 임상부회(108)로 나눈다 (숫자는 부회 내 분과회의 수). 일본약학회는 10개의 부회로 나누고 있는데, 그 중 ‘환경·위생부회’와 ‘규제과학부회’가 의학회의 ‘사회부회’에 해당된다.동경제국대학 의학부약학과 최초의 기부강좌는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인 1930년에 설립된 장기약품화학강좌(臟器藥品化學講座)이다. 이 강좌는 기본적으로 웻랩(Wet Lab)이었다. 이 강좌의 설립에 관여한 사람은 게이마츠 (慶松, 1876-1954)로 그는 나중에 국회의원, 일본약사회 회장직을 역임하고, 전후에는 참의원 의원을 지내는 등 기획력과 실행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이러한 인물들이 기부강좌의 설립을 주도하였다.전후인 1958년에 약학과는 약 80 년간 소속되어 있던 의학부에서 약학부로 분리 독립하였다. 그 후 의약분자설계학 (1990.4-1995.3), 기능병태학 (1994.1-, 1996.4부터 임상약학), 의약경제학 (2001.4-현재: 드라이랩, 2006.4부터 의약정책학), 창약이론과학 (2001.4-?) 파마코비즈니스 이노베이션 (2002.9-?, 드라이랩), 의약품정보학 (2004.10-현재: 드라이랩, 육약학(育藥學)으로 변경), 산학연계 공동연구실 (2004.10-?), 아스텔라스 창약이론과학 (2007.4-?) 등의 기부 강좌가 약학부에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3. 드라이랩 기부강좌인 "육약학(育藥學) 강좌" (https://lab.ikuyaku-ut.jp/about)동경대학 약학부에 설치된 육약학 강좌는 "의약품의 적정 사용"을 위해 지역 약사와 의사에게 필수적인 우수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한편, 새로운 정보를 창출하는 것이 설립 목표이다.육약학은 신약 개발 단계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부작용의 증거, 유해 사건, 약물 상호작용, 사용법, 적용법, 사용상 주의 사항, 적응증 외의 사용법 등의 실태를 조사하고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학문이다.츠타니 교수는 처음에는 도쿄와 후쿠오카, 가라쓰를 연계해서, 최근에는 전국적으로 네트워크를 확장해서 ‘의약품 라이프타임 매니지먼트 (DLM)’라는 연구를 통해 의약품 적정 사용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약물 치료에 있어서 약학대학(약학부)가 의사와 약사를 연계하는 플랫폼 역할을 한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츠타니 교수의 육약학 관련 서비스는 ‘대학이 의약품 시판 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24-11-11 0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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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04> 약학의 특성-9. 규격의 국제성
심창구 교수.두 약품을 건강한 2군(群)의 지원자들에게 교차(交叉, cross over)로 경구 투여하였을 때 두 약품의 생체이용률(生體利用率, bioavailability, BA)이 동일하면 두 약을 생물학적으로 동등(同等)하다고 평가합니다. BA는 약물의 흡수 속도(rate)와 정도(extent)로 나타냅니다. 두 약품의 BA가 같은 지 여부를 평가하는 시험을 생물학적동등성(生物學的同等性, bioequivalence) 시험(생동성시험, BE Test)이라고 부릅니다.오리지날 약(브랜드 약)과 BA가 동등함이 입증된 복제약(複製藥)을 제네릭(generic)이라고 하는데, 약사는 의사가 처방한 브랜드 약 대신 제네릭을 써서 대체조제(代替調劑)할 수 있습니다. 생동성은 브랜드 약 제조회사가, 다른 회사가 복제품을 만들어 싸게 파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개념입니다. 즉 브랜드 약과 BA가 동등하지 못한 복제약을 브랜드약의 대체약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1987년부터 이 생동성 제도를 도입하여 BA가 동등함이 입증된 복제약이 아니면 제네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BE Test를 통해 두 약의 동등성을 입증하려면 적지 않은 돈과 기간이 소요됩니다. 결국 BE Test는 복제약의 시장 진입을 막거나 늦추는 장치로 작동하게 되었습니다. 오리지날 약을 개발한 회사는 이처럼 그럴 듯한 과학을 명분으로 제네릭의 시장 진입을 견제하고 있는 것입니다.물론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생동성시험은 굉장히 명분이 있는 시험입니다. 옛날에는 흡수(BA)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그래서 얼마나 흡수가 되는지 확인도 안해보고 약을 판매했어요. 그래서 흡수가 불량한 의약품이 시판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BE Test가 도입되면서 모든 회사가 BA를 관리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국산의약품의 품질도 한 차원 높아졌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복제한 제네릭은 BE Test를 해 보나마나 거의 100% 오리지날 브랜드 약과 품질이 동등하게 되었습니다.나는 1980년대에 국내 최초로 BE Test의 파일롯 스터디를 수행한 후 이 시험을 국내에 도입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으니 도입하자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 바람에 ‘생동성 전문가’라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그런데 사실 BE Test는 제네릭약에 일방적으로 불합리한 시험입니다. 브랜드 약의 BA를 모방하려면 ‘브랜드 약의 BA는 항상 일정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브랜드 약의 BA가 제조 롯트(lot)별로 다르다면 제네릭은 어떤 롯트의 브랜드약과 동등하도록 만들어야 할지 난감해집니다. 그런데 BE Test 규정에는 브랜드 약의 BA가 롯트에 관계없이 일정해야 한다는 당연한 규정이 없는 거예요. BE Test의 이런 불공정성은 개선되어야 마땅합니다. 오늘날 과학은 무역 장벽의 구실이 되기도 합니다. 화산(火山)이 많은 일본의 쌀은 수은(水銀) 함량이 높아서 식품공전(CODEX) 규격상 국제 통용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이 코덱스 회의에 참여하여 일본 쌀 정도의 수은 오염은 허용하기로 규정을 바꾸었다고 합니다.의약품 원료도 순도(純度, purity)가 얼마 이상이 아니면 국제적으로 유통될 수 없습니다. 이런 품질 기준은 국제의약품규제조화위원회(ICH) 같은 기구에서 정합니다. 원료의 순도는 원래 100%이어야 바람직하지만 어떤 원료는 심지어 90%만 넘어도 허용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ICH 회원국들의 제약회사가 그보다 높은 순도의 그 원료를 만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그래서 일본 쌀의 경우처럼 우리도 우리의 입장을 국제기준에 반영할 수 있도록 국제회의에 멤버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행히 식약처는 2016년 6월부터 ICH의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불합리한 의약품 기준이 설정되는 것을 견제할 수도 있고, 어떤 사항은 우리의 높은 수준을 국제 기준으로 삼자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과학을 빙자한 무역 장벽에 대한 인식도 필요해 보입니다.
2024-10-28 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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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03> 약학의 특성 – 8. 규제
심창구 교수.제약(製藥)산업을 제약(制約)산업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다른 산업에도 규제(規制)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제약산업에 특히 규제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규제는 다들 싫어합니다. 그래서 정부는 선거철만 되면 각종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발표해서 국민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그러나 규제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쁜 규제는 나쁘지만 좋은 규제는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기차와 철로(鐵路, rail)의 관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기차는 철로 위로만 달리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철로 위로만 달리라고 제한하느냐? 아무 데로나 다닐 수 있게 하자며 철로를 없애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 기차가 달리 수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사실 철로는 규제가 아니라 기차가 빠르고 안전하게 달리도록 돕는 가이드라인입니다. 의약품관련 규제도 제약산업의 발전을 이끌어주는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쁜 규제입니다. 그런 규제는 폭이나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은 철로처럼 기차를 제대로 달릴 수 없게 만듭니다. 제약산업의 발전을 가로막습니다.과거 우리나라의 규제는 품질이 좋지 않았습니다. 앞뒤가 모순되거나 애매하거나 필요한 부분이 누락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규제에 제약산업이 순응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은 아예 이런 규제들을 통째로 없애자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그러나 규제를 아주 없앨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의약품의 안전성과 유효성의 보장은 정부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의약품 관련 규제의 품질을 높여 나쁜 규제를 좋은 가이드라인으로 바꾸어야 합니다.우리나라의 의약품 관련 규제의 품질이 불량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규제전문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의약품에 대한 규제 수준은 의약품의 유효성과 안전성을 평가하는 전문가의 안목의 높낮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따라서 그 동안 우리나라 규제의 품질이 불량했다는 것은 약학자를 비롯한 평가과학 전문가의 수준이 미흡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가과학 수준이 낮으면 규제의 품질을 높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품질이 불량한 규제 하에서 세계최초의 신약이나 우수한 의약품이 개발되기는 어렵습니다. 새로운 약을 개발하고자 할 때에, 무슨 시험을 어떻게 해서 어떤 결과를 제출하면 정부가 승인해 줄지 미리 알 수 없는 환경에서는, 관련 규정(規定)과 규제는 기업을 괴롭히는 걸림돌에 불과합니다. 정답을 모르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반에서 전교 1등 학생이 나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불량한 규제 밑에서 세계최초의 우수한 의약품이 개발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규정이 사전에 공지되어 있는 상황이면 개발자는 이 규정대로만 시험을 진행하면 되므로 불필요한 시험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국제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 때 비로소 규제가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사실 우리의 규제 수준이 과거에는 좀 험악했습니다.또 개발자가 시험성적서를 규제 당국에 제출하면 그 때부터 규제기관 담당자들이 정답이 무엇일까 공부를 시작하는 바람에 시간이 엄청나게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수많은 신약개발 경험을 축적한 오늘날 우리나라의 규제 수준도 매우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수준의 규제(선생님)가 있어야 세계 최고의 의약품(우등생)이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스마트한 규제, 즉 부족하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규정이 미리 제시되어 있는 환경 하에서의 신약개발이 최고의 경쟁력을 가질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제약기업의 개발 수준이 눈부시게 높아졌기 때문에 정부 규제의 품질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여야 합니다.이 시점에서 평가과학(評價科學)의 본산(本山)임을 자처하는 약학은, 우리나라의 의약품관련 규제 수준을 세계 최고로 높이기 위한 노력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약대 후배 교수님들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2024-10-02 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