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한 음악에 대해서도 의견은 갈린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래 호흡을 맞췄고 불멸의 스코어도 많이 작곡했건만 히사이시 조가 이번 작품을 통해 들려주는 것은 화려한 선율이 아니라 악기와 음의 움직임을 극도로 단순화한 미니멀 음악이다. 즉 장식적인 악기나 음은 완전히 배제하고 애초에 사운드 이펙트와 함께 디자인된 음악이 주를 이루는데, 음악만 따로 들어 보면 작곡과 연주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집요할 정도로 세심하게 해당 장면에 맞춰 컨트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음악도 서사에 주석을 달아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흐르는 요네즈 켄시의 ‘Spinning Globe’만큼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이야기가 녹아 있는 이 애니메이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났어/ 그날과 변함없는 다정한 얼굴로 지금도 어딘가 먼 곳에/ 바람을 맞으며 달려 잔해 더미를 넘어/ 이 길의 끝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어”
평생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던 거장에게 애니메이션은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진짜 은퇴작으로서 해야만 될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그러나 앞 일은 알 수 없다. 몇 년 후 그의 신작이 개봉한다면, 우리는 또 기꺼이 티켓을 예매하지 않을까.
윤성은의 Pick 무비
정지영이라는 이름이 한국영화계에서 갖는 의미는 크다. 1946년생인 그는 치정 스릴러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3)로 데뷔한 후, 80년대 후반부터 사회성 짙은 드라마를 선보여왔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조명한 ‘남부군’(1990), 베트남 참전 용사의 파괴된 내면과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하얀 전쟁’(1992), 영화에 미친 할리우드 키드의 지난한 일생을 그린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만으로도 그의 필모그래피는 꽤 묵직하다. 그런 그의 21세기 첫 연출작, ‘부러진 화살’(2011)은 부당하게 검거된 한 교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법정드라마로, 2012년 1월 개봉 당시 많은 관객들의 공분을 사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부러진 화살’의 성공은 청각장애학교의 폭력 실화를 담은 ‘도가니’(2011)와 마찬가지로 영화가 진실을 규명하고 대중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음을 보여준 하나의 현상으로 회자된다. 이후, 그는 군부독재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한 ‘남영동 1985’(2012), 론스타 게이트를 쉽게 풀어낸 ‘블랙머니’(2019) 등 비슷한 결의 영화들을 선보여왔다. 모두 실화 기반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이다.
그가 4년만에 내놓은 신작, ‘소년들’은 ‘부러진 화살’과 가장 유사한 맥락에 있다. 누명을 쓰고 수감 생활을 했던 소년들이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목소리를 낸다. 첫 사건은 1999년에 일어났고, 재심은 2016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화는 17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데,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럽다. 배우들의 머리는 희끗해졌고 경찰서의 집기들도 바뀌었지만, 내부의 강압적인 분위기는 과거와 현재가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한 슈퍼에서 강도치사사건이 발생한다. 3인조 강도가 침입해 주인 할머니가 사망하고 현금과 금품을 갈취한 것이다. 사건 9일 만에 동네 소년 3인이 용의자로 검거되고 자백과 함께 수사는 종결된다. 그러나 이 때 강력반 수사반장으로 부임한 ‘황준철’(설경구)은 한 제보전화를 계기로 재수사에 나선다. 어긋난 진술, 조작된 증거가 발견되자 준철은 수사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전북청 수사계장 ‘최우성’(유준상)을 비롯한 책임자들이 그를 협박하고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윤미숙’(진경) 마저 그를 외면하면서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17년 후 형을 마친 세 명의 소년들이 변호사를 선임한 미숙의 설득으로 결백을 밝히려 하면서 수사는 다시 시작된다. 현재로 시점이 옮겨지면, ‘소년들’은 용기에 관한 이야기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간과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용기가 이 사건에 관계된 모든 인물들에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개과천선하여 가족까지 꾸린 진범에게는 자신이 살인자임을 고백해야 하는 엄청난 결단이 필요하다. 영화는 딜레마에 서 있는 여러 인물들의 내면을 추적하면서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정지영 감독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 부재한 정의와 양심을 건드리면서 다양한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이런 부당한 사건이 내 가족과 이웃에게 벌어질 수 있음을 보다 더 강조한다. 데뷔 40주년을 맞았지만 아직 그는 할 말이 많이 남은 듯하다. 영화에 대한 애정,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변함 없는 열정에 갈채를 보낸다.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미니멀한 음악에 대해서도 의견은 갈린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래 호흡을 맞췄고 불멸의 스코어도 많이 작곡했건만 히사이시 조가 이번 작품을 통해 들려주는 것은 화려한 선율이 아니라 악기와 음의 움직임을 극도로 단순화한 미니멀 음악이다. 즉 장식적인 악기나 음은 완전히 배제하고 애초에 사운드 이펙트와 함께 디자인된 음악이 주를 이루는데, 음악만 따로 들어 보면 작곡과 연주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집요할 정도로 세심하게 해당 장면에 맞춰 컨트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음악도 서사에 주석을 달아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흐르는 요네즈 켄시의 ‘Spinning Globe’만큼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이야기가 녹아 있는 이 애니메이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났어/ 그날과 변함없는 다정한 얼굴로 지금도 어딘가 먼 곳에/ 바람을 맞으며 달려 잔해 더미를 넘어/ 이 길의 끝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어”
평생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던 거장에게 애니메이션은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진짜 은퇴작으로서 해야만 될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그러나 앞 일은 알 수 없다. 몇 년 후 그의 신작이 개봉한다면, 우리는 또 기꺼이 티켓을 예매하지 않을까.
윤성은의 Pick 무비
정지영이라는 이름이 한국영화계에서 갖는 의미는 크다. 1946년생인 그는 치정 스릴러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3)로 데뷔한 후, 80년대 후반부터 사회성 짙은 드라마를 선보여왔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조명한 ‘남부군’(1990), 베트남 참전 용사의 파괴된 내면과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하얀 전쟁’(1992), 영화에 미친 할리우드 키드의 지난한 일생을 그린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만으로도 그의 필모그래피는 꽤 묵직하다. 그런 그의 21세기 첫 연출작, ‘부러진 화살’(2011)은 부당하게 검거된 한 교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법정드라마로, 2012년 1월 개봉 당시 많은 관객들의 공분을 사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부러진 화살’의 성공은 청각장애학교의 폭력 실화를 담은 ‘도가니’(2011)와 마찬가지로 영화가 진실을 규명하고 대중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음을 보여준 하나의 현상으로 회자된다. 이후, 그는 군부독재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한 ‘남영동 1985’(2012), 론스타 게이트를 쉽게 풀어낸 ‘블랙머니’(2019) 등 비슷한 결의 영화들을 선보여왔다. 모두 실화 기반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이다.
그가 4년만에 내놓은 신작, ‘소년들’은 ‘부러진 화살’과 가장 유사한 맥락에 있다. 누명을 쓰고 수감 생활을 했던 소년들이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목소리를 낸다. 첫 사건은 1999년에 일어났고, 재심은 2016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화는 17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데,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럽다. 배우들의 머리는 희끗해졌고 경찰서의 집기들도 바뀌었지만, 내부의 강압적인 분위기는 과거와 현재가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한 슈퍼에서 강도치사사건이 발생한다. 3인조 강도가 침입해 주인 할머니가 사망하고 현금과 금품을 갈취한 것이다. 사건 9일 만에 동네 소년 3인이 용의자로 검거되고 자백과 함께 수사는 종결된다. 그러나 이 때 강력반 수사반장으로 부임한 ‘황준철’(설경구)은 한 제보전화를 계기로 재수사에 나선다. 어긋난 진술, 조작된 증거가 발견되자 준철은 수사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전북청 수사계장 ‘최우성’(유준상)을 비롯한 책임자들이 그를 협박하고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윤미숙’(진경) 마저 그를 외면하면서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17년 후 형을 마친 세 명의 소년들이 변호사를 선임한 미숙의 설득으로 결백을 밝히려 하면서 수사는 다시 시작된다. 현재로 시점이 옮겨지면, ‘소년들’은 용기에 관한 이야기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간과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용기가 이 사건에 관계된 모든 인물들에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개과천선하여 가족까지 꾸린 진범에게는 자신이 살인자임을 고백해야 하는 엄청난 결단이 필요하다. 영화는 딜레마에 서 있는 여러 인물들의 내면을 추적하면서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정지영 감독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 부재한 정의와 양심을 건드리면서 다양한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이런 부당한 사건이 내 가족과 이웃에게 벌어질 수 있음을 보다 더 강조한다. 데뷔 40주년을 맞았지만 아직 그는 할 말이 많이 남은 듯하다. 영화에 대한 애정,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변함 없는 열정에 갈채를 보낸다.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