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흥행에서 참패를 맛보고는 있으나 작년부터 시작된 뮤지컬 영화 러시는 유행이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 봐야할 만큼 두드러진다. 그 중에서도 ‘디어 에반 핸슨’(스티븐 크보스키, 2021년 11월 개봉),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스티븐 스필버그, 2021년 12월 개봉), ‘시라노’(조 라이트, 2022년 2월 개봉)로 이어지는 뮤지컬 영화들에는 공통점이 많다.
영화보다 먼저 무대 공연으로 제작되었다는 점, 따뜻하고도 슬프고, 로맨틱하면서도 위험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코로나 이전부터 기획된 작품들이기는 하지만 개봉 시기가 비슷한 것을 보면 팬데믹 시대 마지막 골짜기의 집단적 우울함에 애절한 러브스토리와 감성적인 음악이 위로가 될 거라 믿었던 것 같다. 흥행 실패에 대한 이유는 조금씩 다른데 톱 스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공히 마케팅에 불리한 지점이었다. 그 중에서도 ‘시라노’는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므로, 태생적으로 주인공의 미모가 장점이 될 수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만큼 ‘시라노’는 삶의 영원한 난제, 사랑에 대한 순수함과 절절함으로 가득차 있다. 시인이자 군인인 ‘시라노’(피터 딘클리지)는 ‘록산’(헤일리 베넷)을 오랫동안 사랑해왔지만 난장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친구 이상으로 다가설 용기가 없다. 그러다가 부하로 들어온 ‘크리스티앙’(켈빈 해리슨 주니어)도 록산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는 곡절 끝에 크리스티앙 대신 연서를 써주게 된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남자를 좋아하는 록산은 아무것도 모른 채 크리스티앙의 황홀한 글솜씨에 끌려 부부의 연까지 맺는다. 그러나 두 남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최전방으로 차출되고, 세 사람은 운명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시라노’의 음악은 아론 데스너, 브라이스 데스너 형제가 작곡했다. 록 밴드 ‘더 내셔널’의 멤버이자 팝 스타들의 음반 프로듀서로 활동해온 두 사람의 음악적 성향이 잘 드러난다. 트렌디한 리듬과 편곡 덕분에 19세기 말에 쓰여진 원작 소설의 오래된 서사가 생기를 얻어 젊고 발랄하게 되살아났다. 화려한 수사에 허영심이 많은 록산을 귀엽고 사랑스럽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겁쟁이인 시라노를 성숙하고 남자답게 포장하는 것도 각 캐릭터가 부르는 넘버들이다.
또한, 롱테이크, 쇼트테이크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조 라이트 감독의 편집 리듬과 사운드트랙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도 느낄 수 있다. 로맨틱한 분위기의 ‘Someone To Say’, 낮게 읊조리는 듯한 ‘Your Name’도 빼놓을 수 없는 넘버지만 엉뚱하게도 주인공들이 부르지 않는 노래 하나가 유명해졌는데 바로 ‘Wherever I Fall-Pt.1’이다. 저예산 음악영화로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원스’(존 카니, 2006)의 주인공, 글렌 핸사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 수상 가수이면서도 다른 목소리들 사이에서 튀지 않고, 병사의 고통만을 전달하려 한 배려가 돋보인다. 흥행 여부만으로는 알 수 없는 개성과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윤성은의 Pick 무비
중증 장애인의 아주 특별한 하루,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감독 테무 니키, 이하 ‘그 남자는’)의 주인공 ‘야코’(페트리 포이콜라이넨)는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지만 앞을 볼 수 없고, 춤추듯 유연하게 움직이지만 휠체어 신세다. 다발성 경화증으로 시력도 잃고 하체도 마비된 야코의 유일한 낙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여자친구와의 대화다. 여자친구도 암투병 중이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여느 연인들과 다름 없이 다정하고 로맨틱하다.
어느 날, 여자친구가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고 우울해 하자 야코는 혼자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의 야심찬 모험은 금세 벽에 부딪치고 만다. 돌발적인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야코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는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야코가 장애인 택시 안에서 ‘자유!’를 외친지 몇 시간도 안 되어 마주한 것은 장애인의 돈을 노리는 나쁜 인간들일 뿐이다. 야코는 과연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남자는’은 지난 10년간 가장 인상적인 형식의 영화 중 한 편인 ‘사울의 아들’(감독 라즐로 네메스, 2015)을 떠올리게 한다. 카메라가 시종일관 야코의 얼굴을 집요하게 비추기 때문이다. 얼굴 외의 부분은 초점이 잘 맞지 않아 흐리게 보일 뿐이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주변의 어떤 사물이나 상황도 확신할 수 없는 야코의 답답함에 관객들이 몰입하게 해주는 장치다. 대신 사운드와 대사에 더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특히, 야코의 대사를 듣고 있으면 그 캐릭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중증 장애인이 고생하는 이야기라 불편할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유머와 온기, 긍정으로 가득차 있다.
실제로 감독의 오랜 친구이자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는 페트릭 포이콜라이넨은 풍부한 감수성으로 경이로운 연기를 보여준다. 페트릭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짧은 시간 동안 예상치 못한 행운을 얻기도 하고, 험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생은 늘 예측불가이기에 살아볼 만하다는 이야기를 적확한 형식으로 들려주는 것, 우리가 바라는 영화의 예술성이란 이런 것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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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클래식 감성의 현대적 뮤지컬 ‘시라노’
편집부 기자
news@yakup.co.kr
입력 2022-03-18 10:40
수정 최종수정 2022-03-18 10:45
클래식 감성의 현대적 뮤지컬 ‘시라노’
비록 흥행에서 참패를 맛보고는 있으나 작년부터 시작된 뮤지컬 영화 러시는 유행이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 봐야할 만큼 두드러진다. 그 중에서도 ‘디어 에반 핸슨’(스티븐 크보스키, 2021년 11월 개봉),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스티븐 스필버그, 2021년 12월 개봉), ‘시라노’(조 라이트, 2022년 2월 개봉)로 이어지는 뮤지컬 영화들에는 공통점이 많다.
영화보다 먼저 무대 공연으로 제작되었다는 점, 따뜻하고도 슬프고, 로맨틱하면서도 위험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코로나 이전부터 기획된 작품들이기는 하지만 개봉 시기가 비슷한 것을 보면 팬데믹 시대 마지막 골짜기의 집단적 우울함에 애절한 러브스토리와 감성적인 음악이 위로가 될 거라 믿었던 것 같다. 흥행 실패에 대한 이유는 조금씩 다른데 톱 스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공히 마케팅에 불리한 지점이었다. 그 중에서도 ‘시라노’는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므로, 태생적으로 주인공의 미모가 장점이 될 수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만큼 ‘시라노’는 삶의 영원한 난제, 사랑에 대한 순수함과 절절함으로 가득차 있다. 시인이자 군인인 ‘시라노’(피터 딘클리지)는 ‘록산’(헤일리 베넷)을 오랫동안 사랑해왔지만 난장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친구 이상으로 다가설 용기가 없다. 그러다가 부하로 들어온 ‘크리스티앙’(켈빈 해리슨 주니어)도 록산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는 곡절 끝에 크리스티앙 대신 연서를 써주게 된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남자를 좋아하는 록산은 아무것도 모른 채 크리스티앙의 황홀한 글솜씨에 끌려 부부의 연까지 맺는다. 그러나 두 남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최전방으로 차출되고, 세 사람은 운명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시라노’의 음악은 아론 데스너, 브라이스 데스너 형제가 작곡했다. 록 밴드 ‘더 내셔널’의 멤버이자 팝 스타들의 음반 프로듀서로 활동해온 두 사람의 음악적 성향이 잘 드러난다. 트렌디한 리듬과 편곡 덕분에 19세기 말에 쓰여진 원작 소설의 오래된 서사가 생기를 얻어 젊고 발랄하게 되살아났다. 화려한 수사에 허영심이 많은 록산을 귀엽고 사랑스럽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겁쟁이인 시라노를 성숙하고 남자답게 포장하는 것도 각 캐릭터가 부르는 넘버들이다.
또한, 롱테이크, 쇼트테이크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조 라이트 감독의 편집 리듬과 사운드트랙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도 느낄 수 있다. 로맨틱한 분위기의 ‘Someone To Say’, 낮게 읊조리는 듯한 ‘Your Name’도 빼놓을 수 없는 넘버지만 엉뚱하게도 주인공들이 부르지 않는 노래 하나가 유명해졌는데 바로 ‘Wherever I Fall-Pt.1’이다. 저예산 음악영화로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원스’(존 카니, 2006)의 주인공, 글렌 핸사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 수상 가수이면서도 다른 목소리들 사이에서 튀지 않고, 병사의 고통만을 전달하려 한 배려가 돋보인다. 흥행 여부만으로는 알 수 없는 개성과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윤성은의 Pick 무비
중증 장애인의 아주 특별한 하루,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감독 테무 니키, 이하 ‘그 남자는’)의 주인공 ‘야코’(페트리 포이콜라이넨)는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지만 앞을 볼 수 없고, 춤추듯 유연하게 움직이지만 휠체어 신세다. 다발성 경화증으로 시력도 잃고 하체도 마비된 야코의 유일한 낙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여자친구와의 대화다. 여자친구도 암투병 중이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여느 연인들과 다름 없이 다정하고 로맨틱하다.
어느 날, 여자친구가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고 우울해 하자 야코는 혼자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의 야심찬 모험은 금세 벽에 부딪치고 만다. 돌발적인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야코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는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야코가 장애인 택시 안에서 ‘자유!’를 외친지 몇 시간도 안 되어 마주한 것은 장애인의 돈을 노리는 나쁜 인간들일 뿐이다. 야코는 과연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남자는’은 지난 10년간 가장 인상적인 형식의 영화 중 한 편인 ‘사울의 아들’(감독 라즐로 네메스, 2015)을 떠올리게 한다. 카메라가 시종일관 야코의 얼굴을 집요하게 비추기 때문이다. 얼굴 외의 부분은 초점이 잘 맞지 않아 흐리게 보일 뿐이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주변의 어떤 사물이나 상황도 확신할 수 없는 야코의 답답함에 관객들이 몰입하게 해주는 장치다. 대신 사운드와 대사에 더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특히, 야코의 대사를 듣고 있으면 그 캐릭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중증 장애인이 고생하는 이야기라 불편할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유머와 온기, 긍정으로 가득차 있다.
실제로 감독의 오랜 친구이자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는 페트릭 포이콜라이넨은 풍부한 감수성으로 경이로운 연기를 보여준다. 페트릭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짧은 시간 동안 예상치 못한 행운을 얻기도 하고, 험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생은 늘 예측불가이기에 살아볼 만하다는 이야기를 적확한 형식으로 들려주는 것, 우리가 바라는 영화의 예술성이란 이런 것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