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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준의 클래스토리
편집부
입력 2022-02-04 13:3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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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이틀과 협주곡>

1946년 10월,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N. Milstein, 1904-1992)은 피아니스트 요세프 블랏(J. Blatt, 1906-1999)과 함께 미국 의회 도서관(The Library of Congress)에서 리사이틀을 가졌습니다. 당시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습니다.
1. 비탈리: 샤콘느
2.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3. 밀스타인: 파가니니아나
------------휴식--------------
4.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앙코르는 밀스타인이 편곡한 쇼팽의 <녹턴>과 비에니아프스키의 <스케르초 타란텔라>가 연주되었습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구성이 조금 독특하지요? 분명 피아노와 함께 연주했던 리사이틀인데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리사이틀에서 원래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된 작품을 연주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오케스트라 파트를 피아노로 옮겨서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원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되었던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는 예나 지금이나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조합으로도 활발히 연주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점을 협주곡이라는 장르로 옮겨보면 양상이 다릅니다. 오늘날 협주곡은 대부분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음악회에서 연주됩니다. 협주곡을 피아노와 함께 연주하는 경우는 음악대학교에서 열리는 학생들의 음악회, 콩쿠르, 그리고 오디션 등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일반적인 리사이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요. 사실, 독주 악기와 피아노를 위해 작곡된 작품들이 매우 다양하고 많기 때문에 오늘날 연주자가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 협주곡을 굳이 포함시켜야 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1946년의 밀스타인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해 작곡된 수많은 작품들을 제쳐두고 왜 굳이 협주곡을 골랐을까요? 사실 ‘왜 굳이 협주곡을 골랐나’라는 질문은 밀스타인을 비롯하여 20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음악가들에게 굉장히 의아하게 여겨질 것이 분명합니다. 피아노 리사이틀이 아닌 기악 리사이틀에서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은 절대 낯설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뉴욕의 카네기홀(Carnegie Hall)이나 빈의 무직페어라인(Musikverein)처럼, 역사가 깊은 연주홀의 프로그램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카네기홀은 홀이 개관한 1891년부터, 그리고 1870년 개관한 무직페어라인은 1926년부터 열렸던 음악회의 프로그램 목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20세기 초에는 리사이틀에서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당연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협주곡이 연주되지 않은 리사이틀이 더 적었지요. 다만 빈에서는 1930년대 후반에 리사이틀에서 협주곡이 연주되지 않는 경향이 이미 뚜렷해진 반면 뉴욕에서는 이 경향이 빈보다는 조금 늦은 1950년대에 본격화되었다는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20세기 전반만 해도 기악 리사이틀이라고 하면, 피아노 리사이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이올린 리사이틀이었는데 여기에서 연주된 협주곡들은 상당히 다양합니다. 모차르트, 멘델스존, 브루흐, 비외탕, 그리고 비에니아프스키의 협주곡들은 그 중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작품들이지요. 오늘날에는 드물게 연주되는 브루흐의 협주곡 2번이나 비외탕의 협주곡 4번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1946년 10월 8일에 열린 밀스타인의 리사이틀 프로그램 책자 중 일부분.  하루 앞선 7일에 같은 프로그램으로 열렸던 리사이틀은 녹음되었고, 후에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출처: The Library of Congress 홈페이지)

그렇다면 당시 리사이틀에서 협주곡은 언제 연주되었을까요? 서두에 언급된 밀스타인의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보면 협주곡이 리사이틀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리사이틀에서 무게감 있는 소나타가 후반부에 배치되는 프로그램 구성을 떠오르게 하지요. 이러한 구성은 빈보다는 뉴욕에서, 그리고 20세기 초보다는 중반에 열렸던 리사이틀에서 더 발견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러한 프로그램 구성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다 보편적인 구성은 협주곡이 리사이틀 초반에, 그러니까 2번째나 3번째 순서에 등장하는 것이었지요. 음악회에서 휴식(Intermission)이 언제 행해졌는지 알 수 있는 무직페어라인의 기록을 보면 이를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협주곡은 대게 휴식 전, 그러니까 전반부의 마지막 순서로 연주되었지요. 전반부에는 소나타와 협주곡 등 무게감 있는 작품들이 배치되고 후반부에는 라벨의 <치간느>처럼 연주자의 기교를 마음껏 뽐낼 수 있는 화려한 작품들, 그리고 오늘날에는 앙코르 무대에서 연주될법한 소품들이 자리하는 구성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아닌 피아노와 함께 하는 협주곡 연주에는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요? 우선, 단점으로는 음향적인 측면을 들 수 있겠습니다. 다양한 악기로 구성되어 있는 오케스트라 파트를 피아노로 옮기게 되면 색채와 입체감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겠지요. 또 오케스트라 악기에 적합하게 설계된 음형이 피아노에는 잘 들어맞지 않을 수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반면 독주자가 지휘자를 통해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추는 것보다 피아니스트 한 명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 더 편하고 용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청중은 독주자의 소리를 더 자세하고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고요.

리사이틀에서 협주곡을 연주하는 관습은 이미 옛 것이 된 지 오래입니다. 지금 대세를 이루고 있는 관습도 시간의 흐름 속에 점차 변해가겠지요. 음반으로는 드물게 남아버린 옛 관습과는 달리, 현재와 앞으로 등장할 관습의 기록은 풍성하게 그리고 오래도록 잘 남겨지기를 바래봅니다. 

추천영상: 본문에서 언급했던 밀스타인의 1946년 리사이틀 실황은 음반으로 발매되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아닌 피아노와 함께 연주된 멘델스존의 협주곡 음반은 희소성 면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밀스타인의 멋진 연주가 그 가치를 높입니다. 별도의 편집은 없었을 것이라 예상되는 녹음은 건조하며, 밸런스도 바이올린에 보다 치우친 면이 있는데 이는 분명 단점이지만 동시에 밀스타인의 연주를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장점으로도 작용합니다. 군더더기 없고 생동감 넘치는 그의 연주를 이 특별한 버전으로 감상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ag5Z8L4jG10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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