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런던에서는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녹음되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이 처음으로 스튜디오에서 녹음되는 역사적인 현장이었지요. 이에 걸맞게 당시 음반사(EMI)는 최고의 캐스팅을 이루어냈습니다. 지휘에는 거장 푸르트뱅글러, 트리스탄과 이졸데 역에는 각각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었던, 주트하우스와 플라그스타가 기용되었습니다. 녹음 프로듀서는 EMI를 대표했던 프로듀서, 레그가 맡았지요.
그런데, 녹음 과정에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57세로, 빛나는 커리어의 정점에서 내려오고 있었던 플라그스타가 2막에서 두 번 나오는 높은 음(High C) 처리에 난색을 표했던 것이었죠. 중요한 부분이어서 은근슬쩍 넘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어느 대타가 그 높은 음을 대신 불러주는 방법으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 대타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무명의 가수가 아닌, 플라그스타처럼 20세기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중 한 명인 슈바르츠코프였지요. 당연히 이 과정은 외부에는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당시 레그와 연인이었던 슈바르츠코프가 대타를 맡게 된 것도 (그들은 이듬해인 1953년 결혼했습니다) 비밀 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녹음에 참여했던 가수들, 녹음 기사들, 지휘자 및 오케스트라 단원들 등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지켜보았으므로, 비밀이 지켜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1953년 이 비밀은 탄로나고 말았고, 떠들썩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논란의 요지는 너무도 자명했지요. 플라그스타가 속임수를 썼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이를 묵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깊은 존경을 받던 지휘자 푸르트뱅글러까지도요. 이 에피소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요?
이 에피소드를 잘 이해하려면, 녹음 및 음반이 공연과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연과 음반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소리를 담아둘 수 있는가 없는가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공연장에서의 음악은 매순간 청중들에게 전달되지만 동시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방금 전달된 그 음악 소리는 절대 되돌릴 수 없지요. 마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요. 공연장에서 듣는 음악은 그래서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에 반해, 음반에 담겨진 음악은 되돌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언제나. 공연장에서의 음악이 시간에 매여 있다면, 음반에 담겨진 음악은 시간을 초월하는 속성을 지녔다고도 여겨질 수 있겠습니다.
이졸데로 분한 플라그스타 (출처: 위키피디아)
편집의 가능 여부 또한 공연과 음반 사이의 커다란 차이입니다. 공연에서든 음반 녹음 중에서든, 음악가가 실수를 하거나, 특정 부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곤 합니다. 공연 중의 실수는 수정될 수 없습니다. 이는 이미 발생한 실수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 실수가 담긴 음악 자체가 되돌려지지 않으니까요. 이에 반해, 음반에서는 녹음 과정에서 편집을 통해 실수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수를 편집하지 않을 경우, 그 실수는 되살아나게 되지요. 그 실수가 언제나 재생 가능한 음반 속의 음악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편집을 위해서는 대게 한 부분 혹은 전체를 반복해서 녹음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연주가 들쑥날쑥하면 편집이 매끄럽게 이루어지기가 힘들기 때문에, 음악가에게는 반복되는 녹음 과정에서도 고른 수준의 연주를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지요.
서두에 나왔던 에피소드에서 플라그스타가 대타를 썼던 이유도 반복 녹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플라그스타가 그 고음을 낼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대타였던 슈바르츠코프에게 말했듯이, 공연에서라면 그 고음은 가능했지만, 녹음을 하면서 5~6번씩 고른 수준으로 반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죠.
만약 플라그스타가 대타를 쓰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문제의 고음 부분이 매끄럽지 않게 처리되었다면 어땠을까요? 혹시 우리는 ‘다 좋은데, 그 고음이 두고두고 아쉽네’ 라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까요?
공연과는 다른 음반의 특성을 생각할 때, 가능한 한 최고의 녹음을 남기고자 했던 플라그스타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속임수가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음반이 편집을 포함하는 예술이라고 해도, 이는 선을 넘은 것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음반에 담긴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은 마치 한 번에 연주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많은 편집을 통해 완성된 것이라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속임수가 아닌가?’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공연과 음반의 예술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공연 예술의 잣대로만 음반 예술을 평가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음반은 많은 장점을 지닌 매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반을 통해 음악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음악가들의 음악을 여전히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해 주었죠. 음악가들의 해석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음반은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변화를 거듭해오며 우리 곁에 자리한 음반의 예술이 앞으로도 계속 꽃피워지길 기대해봅니다.
추천음반: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반 중에서, 플라그스타가 자신의 파트를 슈바르츠코프와 나누어 불렀던 순간을 소개합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정열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2막 2장의 한 부분인데요. 57초와 1분 16초에서 문제의 대타 논란이 있는 고음 부분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 음반이 커다란 찬사를 받고 있으며, 그 찬사의 상당 부분이 플라그스타를 향해 있음을 생각하면, 문제의 부분은 아쉬움과 흥미로움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