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가스와 항암제(2)
이탈리아를 장화처럼 생긴 나라라고 하는데, 그 장화의 발뒤꿈치에 위치한 도시가 바리(Bari)다. 로마,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 등 이탈리아 중심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유럽여행에서 소외되기 일쑤고 심지어 폼페이나 나폴리같은 이탈리아 남부투어를 통해서도 가지 못하는 도시지만,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풍경과 남부 이탈리아 특유의 기후가 더해져서 현지인들에게는 중요한 관광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 반도 수복을 위한 연합군의 주요 거점 도시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2월 2일, 바리 항에 수상한 전함이 들어오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은 연합군이 점령했던 곳이고 지리적인 특성상 각종 전쟁 물품을 선적하던 장소였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적군의 주요 항구에 들어오는 물품이 무엇이든 간에 본인들에게 도움되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함을 포착하는 순간 나치 폭격기들은 성실하게 폭탄을 투여하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탄 비에 전함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전함들은 목적지를 눈 앞에 두고 원통하게도 바다에 가라 앉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때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한 선적품이 있다. 바로 질소겨자가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전장에서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등의 포로수용소에서 저항력 없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용도로 사용하긴 했지만, 전투 목적으로 사용한 기록은 없다. 생산은 했지만, 사용은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불명확하다. 대체적으로는 연합국의 화학무기 사용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추론하는 정도다. 어쨌든 냉전시대의 핵무기처럼 당시는 화학무기를 서로 생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연합국의 상징인 미군이 연말에 몰래 질소겨자가스를 전장에 들여오고 있었다. 어쨌든 화학무기는 국제적으로 사용금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동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 발생할 것도 분명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선적물 중 질소겨자가스와 같은 화학무기가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해둔 상태였다. 알고 있던 사람들은 고작해야 해당 선박인 존 하비호의 일부 승무원들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나치의 공습과 함께 현장에서 즉사했다. 화학무기는? 안타깝게도 화학무기는 바람을 타고 코앞에 있던 바리항으로 들어와 버렸다. 이후 파도를 타고 바리 해안가로 들어온 질소겨자가스까지, 바리항은 폭격 이후 더 큰 참사를 겪어야 했다.
이때 바리항의 참사가 커진 것은 들어온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화학무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라도 대응을 했을 터인데 현장에서 수습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정보도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하긴, 미군이 몰래 독가스 들어오려다 나치한테 걸려서 유출되고 아수라장이 됐다는 사실을 어떻게 공표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수습에 더 큰 시간이 걸렸다. 가령 해안가로 들어온 부상병을 치료하려면 의사들이 부상병을 옮겨야 하는데 이때 의사들도 함께 독가스에 노출되었다. 12월의 추위를 이겨내려면 부상병에게 이불을 덮고 따듯하게 해줘야 하는데 이때 질소겨자가스가 피부를 통해 더 빠르게 흡수되었다. 알면 대처를 하는데 모르면 속수무책이다. 당시 2,000명 가량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진주만 습격의 2,400명에 버금가는 수준의 사망자였다. 그리고 진주만 습격과는 다르게 의료진들의 피해가 컸다는 게 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질소겨자가스가 대규모로 유출되자 역설적으로 생존자들에 대한 검사 결과도 늘어났다. 비교적 가볍게 노출되어 회복한 사람들을 조사해본 결과 혈액 중 백혈구 수치가 감소한 것도 알 수 있었다. 질소겨자가스의 고유한 특징이긴 했지만 대규모 임상시험에 돌입하기에는 여러모로 근거가 부족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바리항의 대참사가 발발하면서 의료계 관계자들은 질소겨자가스에 대해서 한층 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군의관이자 약물학자였던 알프레드 길만은 또다른 약물학자 루이스 굿맨과 함께 관련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이 백혈병 치료를 위해 사용했던 물질은 질소겨자가스 그 자체였다. 단지 농도를 다르게 해서 약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능성을 본 연구진은 이후 질소겨자가스를 다른 구조로 변화시킨다. 처음 질소겨자가스가 개발될 당시 질소의 세 번째 치환지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메틸(CH3)기였지만, 어느덧 다양한 치환기를 바꿔가며 약으로서 변신을 거듭해가기 시작했다. 사이클로포스파미드(Cyclophosphamide)와 같은 약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개발한 대표적인 약이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독가스와 항암제(2)
이탈리아를 장화처럼 생긴 나라라고 하는데, 그 장화의 발뒤꿈치에 위치한 도시가 바리(Bari)다. 로마,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 등 이탈리아 중심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유럽여행에서 소외되기 일쑤고 심지어 폼페이나 나폴리같은 이탈리아 남부투어를 통해서도 가지 못하는 도시지만,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풍경과 남부 이탈리아 특유의 기후가 더해져서 현지인들에게는 중요한 관광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 반도 수복을 위한 연합군의 주요 거점 도시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2월 2일, 바리 항에 수상한 전함이 들어오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은 연합군이 점령했던 곳이고 지리적인 특성상 각종 전쟁 물품을 선적하던 장소였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적군의 주요 항구에 들어오는 물품이 무엇이든 간에 본인들에게 도움되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함을 포착하는 순간 나치 폭격기들은 성실하게 폭탄을 투여하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탄 비에 전함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전함들은 목적지를 눈 앞에 두고 원통하게도 바다에 가라 앉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때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한 선적품이 있다. 바로 질소겨자가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전장에서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등의 포로수용소에서 저항력 없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용도로 사용하긴 했지만, 전투 목적으로 사용한 기록은 없다. 생산은 했지만, 사용은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불명확하다. 대체적으로는 연합국의 화학무기 사용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추론하는 정도다. 어쨌든 냉전시대의 핵무기처럼 당시는 화학무기를 서로 생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연합국의 상징인 미군이 연말에 몰래 질소겨자가스를 전장에 들여오고 있었다. 어쨌든 화학무기는 국제적으로 사용금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동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 발생할 것도 분명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선적물 중 질소겨자가스와 같은 화학무기가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해둔 상태였다. 알고 있던 사람들은 고작해야 해당 선박인 존 하비호의 일부 승무원들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나치의 공습과 함께 현장에서 즉사했다. 화학무기는? 안타깝게도 화학무기는 바람을 타고 코앞에 있던 바리항으로 들어와 버렸다. 이후 파도를 타고 바리 해안가로 들어온 질소겨자가스까지, 바리항은 폭격 이후 더 큰 참사를 겪어야 했다.
이때 바리항의 참사가 커진 것은 들어온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화학무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라도 대응을 했을 터인데 현장에서 수습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정보도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하긴, 미군이 몰래 독가스 들어오려다 나치한테 걸려서 유출되고 아수라장이 됐다는 사실을 어떻게 공표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수습에 더 큰 시간이 걸렸다. 가령 해안가로 들어온 부상병을 치료하려면 의사들이 부상병을 옮겨야 하는데 이때 의사들도 함께 독가스에 노출되었다. 12월의 추위를 이겨내려면 부상병에게 이불을 덮고 따듯하게 해줘야 하는데 이때 질소겨자가스가 피부를 통해 더 빠르게 흡수되었다. 알면 대처를 하는데 모르면 속수무책이다. 당시 2,000명 가량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진주만 습격의 2,400명에 버금가는 수준의 사망자였다. 그리고 진주만 습격과는 다르게 의료진들의 피해가 컸다는 게 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질소겨자가스가 대규모로 유출되자 역설적으로 생존자들에 대한 검사 결과도 늘어났다. 비교적 가볍게 노출되어 회복한 사람들을 조사해본 결과 혈액 중 백혈구 수치가 감소한 것도 알 수 있었다. 질소겨자가스의 고유한 특징이긴 했지만 대규모 임상시험에 돌입하기에는 여러모로 근거가 부족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바리항의 대참사가 발발하면서 의료계 관계자들은 질소겨자가스에 대해서 한층 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군의관이자 약물학자였던 알프레드 길만은 또다른 약물학자 루이스 굿맨과 함께 관련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이 백혈병 치료를 위해 사용했던 물질은 질소겨자가스 그 자체였다. 단지 농도를 다르게 해서 약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능성을 본 연구진은 이후 질소겨자가스를 다른 구조로 변화시킨다. 처음 질소겨자가스가 개발될 당시 질소의 세 번째 치환지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메틸(CH3)기였지만, 어느덧 다양한 치환기를 바꿔가며 약으로서 변신을 거듭해가기 시작했다. 사이클로포스파미드(Cyclophosphamide)와 같은 약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개발한 대표적인 약이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