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러스
백승만교수의 '전쟁과 약' 이야기
<14>  미국으로 건너간 페니실린
백승만
입력 2024-02-15 17:43 수정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스크랩하기
작게보기 크게보기

 미국으로 건너간 페니실린

페니실린’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보통 알렉산더 플레밍이고 실제로 유례없는 기적 끝에 페니실린을 발견한 사람이긴 하지만 개발은 이야기가 다르다플레밍이 포기하고 잊어버렸던 물질 페니실린에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를 부여한 사람들은 하워드 플로리에른스트 체인노만 히틀리 등으로 대표되는 옥스퍼드 병원의 연구진들이다.

에른스트 체인은 유대계 화학자였다나치가 집권한 후 유대인이 악의 근원으로 지목되며 대거 축출되자 영국으로 넘어온 상태였다그가 영국에서 찾고자 하는 물질은 항생제독일에서 넘어오기 직전 들었던 프론토실과 같은 항생제를 영국에서도 만들고 싶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프론토실은 시판 직후 설파제에 영광의 자리를 물려준 상태였고그 설파제 역시 잦은 내성 등으로 인해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이런 때에 설파제를 능가하는 항생제를 만들어낸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그는 옥스퍼드 병원 내과장이던 하워드 플로리의 지휘 아래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리고 좋은 물질 어디 없을까하고 관련 문헌을 공부하던 체인의 눈에 플레밍의 논문이 들어왔다.

플레밍도 나름 페니실린을 정제한다고 했고 병리학자임을 고려하면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전문적인 화학자의 눈으로 봤을 때 플레밍의 연구는 허점이 많았다어쩌면 플레밍의 동물실험이 한계를 보였던 이유도 이처럼 화합물의 순도 때문일지도 몰랐다검증이 필요한 상황이다체인은 관련 실험을 독자적으로 진행했고 플레밍의 연구 수준보다 높은 순도로 페니실린을 정제할 수 있었다이 상태에서 동물실험을 진행했을 때기존의 항생제와는 비교도 안 될 항균 활성이 나오는 것도 관찰할 수 있었다베일에 가려진 페니실린이 다시 한 번 기적적으로 세상에 소개된 순간이다.

이후 플로리의 연구팀은 인력을 보강하여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에 나섰다배양 접시의 수를 늘리고 푸른곰팡이가 최대한 편안하게 증식할 수 있도록 온도습도양분 등의 조건을 최적화했다일용직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하여 생산량을 늘렸고전문 화학자를 섭외해 순도를 높이는 노력도 병행하였다그렇게 1941년 2월 12일 사람을 대상으로 페니실린을 투여할 수 있었다대상자는 패혈증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전직 경찰관이었다.

페니실린의 항균 효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하지만 양이 모자랐다이 환자는 5일여 간 기적처럼 증상이 개선됐지만 이후 페니실린이 부족해지면서 투여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환자의 소변에서 페니실린을 다시 확보하려는 시도도 별 소용이 없었다그는 총알이 떨어져 허무하게 죽음을 맞은 군인처럼 죽었다.

한 명의 환자를 구하지 못한 약이 세상을 구할 수는 없다획기적으로 생산 시설을 확장하지 않는 한 페니실린은 그럭저럭 좋은 논문 한 편으로 끝나버릴 연구 주제였다하지만 1941년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이었고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논문이 아닌 현실에 쓸 수 있는 치료제였다따라서 옥스퍼드의 연구진은 미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매일 밤 쏟아지는 나치 공습기의 공습 하에서는 지속적 연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페니실린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관련 연구진이 모여들어 푸른곰팡이의 페니실린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연구했다푸른곰팡이 표본을 고르고엑스선으로 돌연변이를 만들어 수득률을 높이기도 했다배양액에 옥수수 추출물을 넣어서 생산효율이 올라가는 것도 알 수 있었다무엇보다도 배양접시를 벗어나 배양탱크를 적용한 것이 결정적 변화였다당시 미국 최고의 발효 노하우를 가지고 있던 원료 생산업자 화이자사는 자신들의 구연산 생산 기술을 페니실린에 적용해 발효 탱크 차원에서 생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42년 11월 미국 보스턴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화재가 발생했다유일한 출입구인 회전문에 사람들이 탈출을 위해 몰려들면서 회전문이 멈추고피해 규모가 더 커진 이 사건은 이후 멈춰버린 회전문 앞에서 대량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5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이슈가 안 될 수가 없었다그런데 이 사건은 페니실린의 개발 측면에서도 의미를 가진다당시 중증 화상환자의 치료를 위해 페니실린이 사용됐기 때문이다당시 극비로 개발중이던 페니실린은 시의 적절하게 생산되어 보스턴 지역의 사망자를 줄이는데 일조하였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후반 페니실린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데에도 기여했다전쟁이 아니었다면 페니실린이 이토록 빠르게 개발될 수 있었을까 싶지만이렇게 개발된 의약품이 전투 중 부상병의 치료를 위해 사용된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전쟁과 약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약품이 바로 페니실린이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전체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약업신문 타이틀 이미지
[]<14>  미국으로 건너간 페니실린
아이콘 개인정보 수집 · 이용에 관한 사항 (필수)
  - 개인정보 이용 목적 : 콘텐츠 발송
- 개인정보 수집 항목 : 받는분 이메일, 보내는 분 이름, 이메일 정보
-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 기간 : 이메일 발송 후 1일내 파기
받는 사람 이메일
* 받는 사람이 여러사람일 경우 Enter를 사용하시면 됩니다.
* (최대 5명까지 가능)
보낼 메세지
(선택사항)
보내는 사람 이름
보내는 사람 이메일
@
Copyright © Yakup.com All rights reserved.
약업신문 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약업신문 타이틀 이미지
[]<14>  미국으로 건너간 페니실린
이 정보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
스크랩한 정보는 마이페이지에서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 © Yakup.com All rights reserved.
약업신문 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