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플레밍은 1차 대전 참전 용사다. 군의관으로 활약하며 후방에서 부상병들을 회복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시대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는 법. 끝없이 밀려오는 부상병 속에서 2차 감염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부상보다도 감염으로 더 많은 병사들이 죽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는 전쟁 후 감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실마리가 잡힌 건 전쟁이 끝나고 5년 후인 1923년. 실험 도중 그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는 균이 자라지 않는 것을 확인하였다. 좀 더 면밀히 연구해보니 눈물 외에 콧물 등의 다른 체액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었다. 여기에 균을 죽일 수 있는 물질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이 물질을 리소자임(lysozyme)이라 명명하고 학회에 보고하였다. 하지만 학회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리소자임으로 죽일 수 없는 균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죽일 수 있는 균도 우리 몸에 도움이 되는 균이 대부분이었다. 학술논문으로는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상업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꺾일 법도 했지만 플레밍은 연구를 이어갔다. 실험방법은 간단하다. 배양접시에 균을 키우고 가능성 있는 물질을 떨어뜨려 그 주위로 균이 자라지 않으면 항균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실험방법이 간단할수록 결과도 좋다. 빠른 시간에 많은 물질을 테스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약물학자들이 고민하는 빠르고 정확한 약물 효능 평가 시스템 구축을 위해 플레밍도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기적이 찾아왔다.
리소자임을 찾아내고 다시 5년이 흐른 1928년 8월, 플레밍은 지친 몸을 이끌고 휴가를 떠나려 했다. 목적지는 고향인 에든버러. 언덕 위 웅장한 성채를 자랑하는 스코틀랜드의 중심지 에든버러는 지금도 런던에서 가려면 운전으로 7시간이 넘게 걸리는 지역이다. 영국을 종단하는 이 여행에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은 1928년에도 마찬가지. 플레밍이 계획한 여행은 무려 2주였다. 열심히 일하고 긴 휴가를 떠나는 유럽인답다.
그런데 정작 플레밍은 배양접시 뚜껑을 열어 놓고 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기차 시간에 늦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굉장히 허둥지둥 나간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 실험실 창문도 열어놓고 가버렸다. 꼼꼼한 것으로 유명한 플레밍의 행동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틈이다. 그리고 그 틈으로 푸른곰팡이가 날아들었다. 플레밍 실험실의 아래층에 있던 미생물 배양실에서 푸른곰팡이가 날아와 실수로 열려있던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그리고 실수로 열려있던 배양접시 위에 살포시 내려 앉았다. 그리고 우연히도 무더웠던 런던의 8월 속에서 2주일간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배양접시 속 다른 균들을 무참히 죽였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플레밍의 표정을 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실험 결과가 떡하니 자기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은 간다. 플레밍은 이런 기적을 허투루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배양접시에 날아든 물질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가능성을 타진했고 범인의 흔적을 찾는 형사처럼 경로를 역추적했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날아온 푸른곰팡이를 찾아냈다. 유레카.
이제 다음 단계는 푸른곰팡이에서 어떤 물질이 실제 항균효과를 띄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감염증을 치료하겠다고 푸른곰팡이를 갈아마시거나 상처에 바르는 용자는 없을테니 말이다. 꿈에 찾던 물질을 눈 앞에 두고서, 플레밍이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잘만 한다면 1910년 마법의 탄환이란 찬사를 들었던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소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플레밍의 후속 연구는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푸른곰팡이가 만들어 낸 물질을 분리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리는커녕 물질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이 물질이 단백질인지 작은 화합물인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정제가 안 됐으므로 동물실험에서 보이는 효과도 미미했다. 사람에게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플레밍은 이듬해에 논문을 하나 발표하는 것으로 연구를 마무리했다.
플레밍의 연구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가 하나는 아니겠지만, 가장 큰 한계는 화학자의 부재였다. 페니실린이 화합물인 만큼 정제와 개발을 위해서는 화학자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는데 정작 플레밍은 화학에 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였다. 그렇다면 공동연구를 통해서 한계를 극복해야 하건만 무슨 이유에선지 플레밍은 이러한 협력을 추구하지 않았다. 아마도 페니실린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화학자와의 협력을 통해 진일보한 항생제 프론토실을 선보인 독일 연구진들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페니실린은 다시 돌아온다. 수많은 화학자의 도움과 함께 말이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알렉산더 플레밍은 1차 대전 참전 용사다. 군의관으로 활약하며 후방에서 부상병들을 회복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시대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는 법. 끝없이 밀려오는 부상병 속에서 2차 감염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부상보다도 감염으로 더 많은 병사들이 죽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는 전쟁 후 감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실마리가 잡힌 건 전쟁이 끝나고 5년 후인 1923년. 실험 도중 그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는 균이 자라지 않는 것을 확인하였다. 좀 더 면밀히 연구해보니 눈물 외에 콧물 등의 다른 체액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었다. 여기에 균을 죽일 수 있는 물질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이 물질을 리소자임(lysozyme)이라 명명하고 학회에 보고하였다. 하지만 학회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리소자임으로 죽일 수 없는 균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죽일 수 있는 균도 우리 몸에 도움이 되는 균이 대부분이었다. 학술논문으로는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상업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꺾일 법도 했지만 플레밍은 연구를 이어갔다. 실험방법은 간단하다. 배양접시에 균을 키우고 가능성 있는 물질을 떨어뜨려 그 주위로 균이 자라지 않으면 항균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실험방법이 간단할수록 결과도 좋다. 빠른 시간에 많은 물질을 테스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약물학자들이 고민하는 빠르고 정확한 약물 효능 평가 시스템 구축을 위해 플레밍도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기적이 찾아왔다.
리소자임을 찾아내고 다시 5년이 흐른 1928년 8월, 플레밍은 지친 몸을 이끌고 휴가를 떠나려 했다. 목적지는 고향인 에든버러. 언덕 위 웅장한 성채를 자랑하는 스코틀랜드의 중심지 에든버러는 지금도 런던에서 가려면 운전으로 7시간이 넘게 걸리는 지역이다. 영국을 종단하는 이 여행에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은 1928년에도 마찬가지. 플레밍이 계획한 여행은 무려 2주였다. 열심히 일하고 긴 휴가를 떠나는 유럽인답다.
그런데 정작 플레밍은 배양접시 뚜껑을 열어 놓고 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기차 시간에 늦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굉장히 허둥지둥 나간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 실험실 창문도 열어놓고 가버렸다. 꼼꼼한 것으로 유명한 플레밍의 행동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틈이다. 그리고 그 틈으로 푸른곰팡이가 날아들었다. 플레밍 실험실의 아래층에 있던 미생물 배양실에서 푸른곰팡이가 날아와 실수로 열려있던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그리고 실수로 열려있던 배양접시 위에 살포시 내려 앉았다. 그리고 우연히도 무더웠던 런던의 8월 속에서 2주일간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배양접시 속 다른 균들을 무참히 죽였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플레밍의 표정을 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실험 결과가 떡하니 자기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은 간다. 플레밍은 이런 기적을 허투루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배양접시에 날아든 물질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가능성을 타진했고 범인의 흔적을 찾는 형사처럼 경로를 역추적했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날아온 푸른곰팡이를 찾아냈다. 유레카.
이제 다음 단계는 푸른곰팡이에서 어떤 물질이 실제 항균효과를 띄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감염증을 치료하겠다고 푸른곰팡이를 갈아마시거나 상처에 바르는 용자는 없을테니 말이다. 꿈에 찾던 물질을 눈 앞에 두고서, 플레밍이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잘만 한다면 1910년 마법의 탄환이란 찬사를 들었던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소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플레밍의 후속 연구는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푸른곰팡이가 만들어 낸 물질을 분리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리는커녕 물질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이 물질이 단백질인지 작은 화합물인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정제가 안 됐으므로 동물실험에서 보이는 효과도 미미했다. 사람에게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플레밍은 이듬해에 논문을 하나 발표하는 것으로 연구를 마무리했다.
플레밍의 연구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가 하나는 아니겠지만, 가장 큰 한계는 화학자의 부재였다. 페니실린이 화합물인 만큼 정제와 개발을 위해서는 화학자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는데 정작 플레밍은 화학에 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였다. 그렇다면 공동연구를 통해서 한계를 극복해야 하건만 무슨 이유에선지 플레밍은 이러한 협력을 추구하지 않았다. 아마도 페니실린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화학자와의 협력을 통해 진일보한 항생제 프론토실을 선보인 독일 연구진들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페니실린은 다시 돌아온다. 수많은 화학자의 도움과 함께 말이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