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러스
백승만교수의 '전쟁과 약' 이야기
<12> 총알과 수면제
백승만
입력 2023-12-07 10: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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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총알과 수면제

코르다이트란 물질이 있다영국에서 19세기 후반에 만든 이 물질은 폭발력이 강해 화약으로 인기가 높았다만드는 방법도 간단했다니트로글리세린과 니트로셀룰로오스바세린을 아세톤에 녹여서 적당하게 섞어주기만 하면 됐다만들기도 쉽고 성능도 좋은 이 화약은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주요 화약으로 사용하게 된다.

문제는 아세톤의 공급이었다아세톤은 당시 독일에서 원료를 수입해서 가공하고 있었다그런데 전쟁이 길어지자 독일이 이 원료를 전략물자로 규정해 영국에 팔지 않게 된 것이다영국에 아세톤이 부족해진 것은 당연한 노릇이고시간이 지나며 코르다이트 마저도 부족해지기 시작했다전장에서 총알을 아껴쏘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기관총 사수에게 총알을 세어 가면서 발사하라고 하면 과연 참호를 지켜낼 수 있을까영국은 아세톤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때 영국이 자체적으로 아세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방법은 발효였다차임 바이츠만이라는 러시아 태생의 유대계 생화학자가 그전에 기막힌 방법을 개발해 놓은 것이었다바이츠만이 미래라도 내다본 것일까그렇지는 않다그는 합성고무를 만들기 위해 설탕의 발효를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에탄올과 아세톤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합성고무는 아니지만 어쨌든 괜찮은 물질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는 특허를 신청했고 이후 전쟁 중 위기를 맞은 영국 정부가 아세톤에 주목해 이 과정을 전략적으로 채택한 것이다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영국군은 더 이상 총알을 걱정하지 않고 전장에서 기관총을 난사할 수 있었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당시 영국에서 바이츠만의 공법으로 생산한 아세톤의 양은 연간 3만톤에 이른다고 하니 그 중요함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바이츠만은 이때 영국 정부의 눈에 들어서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 냈고 이후 이 선언은 이스라엘 독립의 주요 근거가 된다그리고 바이츠만도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여러모로 전설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의약품 개발과 관련해서도 바이츠만 공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그가 만들어낸 공법에 따라 설탕을 발효시키면 에탄올과 아세톤 외에 부탄올도 만들어진다심지어 부탄올이 생성물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만들어진다그런데 이렇게 많이 만들어낸 부탄올을 어디다 써야 할까아세톤이야 전쟁 때 필수 불가결한 물질이었고 에탄올도 나름의 용도가 있지만 부탄올은 그렇지 않았다결국 전쟁이 길어지며 부탄올은 처치 곤란한 물질로 공장에 쌓여가고 있었다.

제약회사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항상 연구비 부족에 시달리던 제약회사 연구진은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출발물질을 언제나 주시하곤 한다부탄올도 그랬다영국의 제약회사는 부탄올을 대량으로 사들여서 새로운 의약품 골격에 연결해서 더 뛰어난 물질을 만들고자 하였다대표적인 물질이 부토바비탈이다.

바비탈은 20세기 초반 독일에서 개발해 판매한 수면진정제다이후 페노바비탈이 나오면서 그 강력한 수면효과를 앞세워 수면제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나름의 불편함도 있었다작용시간이 길어서 낮에도 졸립다거나본인이 약을 먹었는지 몰라서 다시 먹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또한 바비탈계 수면제에 중독되는 경우도 있었고이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늘어나던 상황이었다여러모로 페노바비탈의 단점을 개선하는 물질이 필요한 시기가 1910년대 후반이었다.

영국의 제약회사는 페노바비탈의 구조를 바꿔 부토바비탈을 합성했다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페닐기 대신 값싼 부탄올을 도입한 물질이다이 물질은 페노바비탈보다 작용시간이 짧아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그리고 다음 단계 의약품으로 넘어가는 출발이 되었다어쨌든 전쟁 때 부랴부랴 만든 물질 아닌가전쟁이 끝난 후 보다 체계적으로 검증을 거치는 일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부토바비탈은 이후 탄소가 하나 더 늘어나 펜토바비탈이 되었다바비탈계 수면제 중 그나마 페노바비탈의 명성에 비빌 수 있는 물질이 펜토바비탈이다그리고 펜토바비탈은 다시 정맥마취제인 소듐 펜토탈로 바뀌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된다바이츠만은 고무를 만들어 내는 데 실패했지만 정작 그의 연구가 전혀 상관없는 의약품 개발까지 영향 미친 것을 보면 세상 일은 더욱 더 알 수가 없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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