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수상을 구한 독일산 항생제
게르하르트 도마크는 편지를 교환했다. 같은 편지를 열다섯 장이나 써서 모두가 똑같이 나눠 가진 것은 열다섯 명의 전우 중 누가 살아남을지 모르는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유족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도마크와 전우들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편지를 쓰고 나눠 가졌다.
도마크가 1914년 10월 말 제1차 세계대전 중 최대 격전 중 하나인 제1차 이프르 전투에 참가한 것은 그의 나이 고작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넘치는 애국심으로 다니던 대학교도 한 학기만 마치고 입대했지만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도 못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일을 수행하는 부대인 척탄병으로 배치되었다. 척탄병은 지금으로 치면 수류탄을 던지는 부대다. 다만 지금의 비교적 가벼운 수류탄과는 달리 크고 무거워 멀리 던지기 어려웠다. 따라서 적군 가까이 접근해서 던져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성공적으로 던지고 나서도 적군에게 노출되어 죽는 일이 허다했다. 당시 척탄병 연대는 가장 위험한 일을 하는 부대였고, 그만큼 자부심 높은 부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연대에 소년병을 배치한 것이다. 당시 독일군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도마크의 부대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세 명이다. 열두 명은 적군 근처도 못 가본 채 사살되었고 도마크 역시 부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총을 맞았다. 머리에. 그럼에도 살아 남았다. 그가 쓰고 있던 전투모에 총알이 정통으로 맞았고 전투모가 튕겨져 날아갔지만 도마크는 무사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해 치료를 받았다. 이후 이 억세게 운 좋은 학도병은 드디어 조금 더 편한 보직을 받게 된다. 바로 의무병이다. 한 학기이긴 했으나 그가 대학 다니다 온 점을 감안한 배려였다. 그는 의대생이었다.
고작 한 학기 수업 들은 의대생이 의무병으로서 얼마나 활약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도마크는 그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의무병으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군인이 감염병으로 죽는가를 알게 되었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받는 환자는 많았다. 그리고 절단이든 절개든 성공적으로 봉합을 마치고 회복하는 환자도 많았다. 하지만 그 환자들 중 상당수는 일주일 안에 수술 부위 감염증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수술 부위가 빨갛게 변하고 기포가 차오르는 이 증상을 가스 괴저라고 불렀다. 수술 중 감염으로 인한 증상이었다. 전방의 참호나 후방의 병원이나 도마크에게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의 경험이 강하게 남아 있던 도마크는 전쟁이 끝난 후 의대 공부를 마치고 연구직을 택했다. 그는 바이엘사 연구팀에 합류해 이후 연구팀을 이끌었다. 화학자와 약물학자 등 전문가들이 뭉친 이 연구팀은 천 개가 넘는 화합물을 만들며 일일이 활성 검색을 하였다. 이들은 10년 전부터 연구하던 화학 염료를 기반으로 활성을 개선해가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10년간 별다른 성과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활성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1932년 겨울, 프론토실이라는 현대적 개념의 항생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특유의 붉은 색을 띄는 이 물질은 1935년 시판되자마자 기적의 항생제로 찬사를 받으며 시장을 선도해 나갔다.
그런데 정작 10여 년의 연구 끝에 나온 이 물질은 그다지 많은 매출을 올리지 못했다. 프랑스의 연구팀이 프론토실의 실제 활성 골격인 설파닐아마이드를 곧바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프론토실은 우리 몸 안에 들어가 활성 성분인 설파닐아마이드로 전환되어 세균을 죽인다. 설파닐아마이드는 비교적 간단한 물질로서 이미 1900년대 초반에 생산된 물질이다. 구조가 간단하다 보니 화학적으로 수식해 유도체를 만들기도 쉬웠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질들은 대부분 항균활성이 뛰어났고 사람들은 이 물질들을 통틀어 설파계 항생제라고 불렀다.
설파계 항생제는 이후 윈스턴 처칠이 폐렴으로 죽을 뻔 했을 때 복용 후 무사히 회복하면서 다시 한 번 유명세를 타게 된다. 독일에서 개발한 프론토실이 돌고 돌아 설파계 항생제로 진화해 영국의 수상을 살린 것이다.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지휘한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래도 도마크로서는 전쟁이 끝나고 노벨상을 수상했으니 나름 해피엔딩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도 하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영국 수상을 구한 독일산 항생제
게르하르트 도마크는 편지를 교환했다. 같은 편지를 열다섯 장이나 써서 모두가 똑같이 나눠 가진 것은 열다섯 명의 전우 중 누가 살아남을지 모르는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유족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도마크와 전우들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편지를 쓰고 나눠 가졌다.
도마크가 1914년 10월 말 제1차 세계대전 중 최대 격전 중 하나인 제1차 이프르 전투에 참가한 것은 그의 나이 고작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넘치는 애국심으로 다니던 대학교도 한 학기만 마치고 입대했지만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도 못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일을 수행하는 부대인 척탄병으로 배치되었다. 척탄병은 지금으로 치면 수류탄을 던지는 부대다. 다만 지금의 비교적 가벼운 수류탄과는 달리 크고 무거워 멀리 던지기 어려웠다. 따라서 적군 가까이 접근해서 던져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성공적으로 던지고 나서도 적군에게 노출되어 죽는 일이 허다했다. 당시 척탄병 연대는 가장 위험한 일을 하는 부대였고, 그만큼 자부심 높은 부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연대에 소년병을 배치한 것이다. 당시 독일군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도마크의 부대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세 명이다. 열두 명은 적군 근처도 못 가본 채 사살되었고 도마크 역시 부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총을 맞았다. 머리에. 그럼에도 살아 남았다. 그가 쓰고 있던 전투모에 총알이 정통으로 맞았고 전투모가 튕겨져 날아갔지만 도마크는 무사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해 치료를 받았다. 이후 이 억세게 운 좋은 학도병은 드디어 조금 더 편한 보직을 받게 된다. 바로 의무병이다. 한 학기이긴 했으나 그가 대학 다니다 온 점을 감안한 배려였다. 그는 의대생이었다.
고작 한 학기 수업 들은 의대생이 의무병으로서 얼마나 활약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도마크는 그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의무병으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군인이 감염병으로 죽는가를 알게 되었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받는 환자는 많았다. 그리고 절단이든 절개든 성공적으로 봉합을 마치고 회복하는 환자도 많았다. 하지만 그 환자들 중 상당수는 일주일 안에 수술 부위 감염증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수술 부위가 빨갛게 변하고 기포가 차오르는 이 증상을 가스 괴저라고 불렀다. 수술 중 감염으로 인한 증상이었다. 전방의 참호나 후방의 병원이나 도마크에게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의 경험이 강하게 남아 있던 도마크는 전쟁이 끝난 후 의대 공부를 마치고 연구직을 택했다. 그는 바이엘사 연구팀에 합류해 이후 연구팀을 이끌었다. 화학자와 약물학자 등 전문가들이 뭉친 이 연구팀은 천 개가 넘는 화합물을 만들며 일일이 활성 검색을 하였다. 이들은 10년 전부터 연구하던 화학 염료를 기반으로 활성을 개선해가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10년간 별다른 성과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활성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1932년 겨울, 프론토실이라는 현대적 개념의 항생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특유의 붉은 색을 띄는 이 물질은 1935년 시판되자마자 기적의 항생제로 찬사를 받으며 시장을 선도해 나갔다.
그런데 정작 10여 년의 연구 끝에 나온 이 물질은 그다지 많은 매출을 올리지 못했다. 프랑스의 연구팀이 프론토실의 실제 활성 골격인 설파닐아마이드를 곧바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프론토실은 우리 몸 안에 들어가 활성 성분인 설파닐아마이드로 전환되어 세균을 죽인다. 설파닐아마이드는 비교적 간단한 물질로서 이미 1900년대 초반에 생산된 물질이다. 구조가 간단하다 보니 화학적으로 수식해 유도체를 만들기도 쉬웠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질들은 대부분 항균활성이 뛰어났고 사람들은 이 물질들을 통틀어 설파계 항생제라고 불렀다.
설파계 항생제는 이후 윈스턴 처칠이 폐렴으로 죽을 뻔 했을 때 복용 후 무사히 회복하면서 다시 한 번 유명세를 타게 된다. 독일에서 개발한 프론토실이 돌고 돌아 설파계 항생제로 진화해 영국의 수상을 살린 것이다.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지휘한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래도 도마크로서는 전쟁이 끝나고 노벨상을 수상했으니 나름 해피엔딩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도 하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