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 콜럼버스가 신항로를 개척하고 일종의 기자회견을 한 이후 유럽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전례없는 부동산 호재에 사람들은 희망에 부풀어 올랐고 향료나 황금을 찾을 수 있다며 자본가와 힘을 합쳐 탐험대를 꾸렸다. 이후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신대륙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이 희망은 절정에 달했다. 탐험대는 현지에서 발견할 황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법률가나 기록원, 종교인까지 대동해 부랴부랴 대서양을 건넜다. 비록 콜럼버스가 가져온 물건 중에 돈 될 만한 것은 거의 없었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30여 년이 지나서 아즈텍이나 잉카 문명을 발견했고 그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황금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약탈했다. 현지에 뿌리내리고 있던 왕국은 이 과정에서 철저히 궤멸되었고, 남아메리카 정복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다. 스페인 정규군이 가서 남아메리카 현지 문명을 무너뜨렸다는 생각이다. 스페인 정규군이 들어간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의 일이다. 그보다 처음 아즈텍이나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사람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민간인 탐험대였다. 민간인이 자본가를 등에 업고 사람들을 아무리 불러 모아봤자 한계가 있다. 실제 잉카를 멸망시킨 피사로의 탐험대는 200명 남짓이었다. 그나마도 모두 전투원이었던 것도 아니고 앞서 언급했듯이 상당수는 자신의 탐험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인력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잉카 제국 10만 원주민을 이겼다.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스페인 탐험대가 총으로 잉카 제국을 쓰러뜨렸다는 생각이다. 당시 탐험대가 총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지금의 총과는 상당히 달랐다. 한 번 총을 쏘고 나면 다시 장전하고 쏘는 데 능숙한 사수도 30초 가량 걸렸다고 한다. 일 분에 두 발이라면 아무래도 핵심 전력이 되긴 어렵다. 물론 발포 소리 때문에 원주민이 놀라긴 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연이어 전투가 계속되면서 적응해 갔다.
오히려 총보다는 칼이 더 무서운 무기였다. 스페인의 칼은 강철로 제련되어 있었던 데 비해, 남미 원주민은 돌을 연결한 막대기나 몽둥이로 싸웠다.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석기, 청동기, 철기로 나누는 것은 보통 도구의 재료다. 이 재료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원의 벽이 있으니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다. 스페인의 남미 정복 당시 두 문명의 전쟁 무기는 석기와 철기의 차이였다. 무기로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무기를 말 위에서 휘둘렀다. 말은 당시 남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동물이었기에 스페인 탐험대의 말은 좋은 무기가 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무기가 좋다고 한들 200명으로 어떻게 10만 명을 이길까. 스페인의 검이 광선검도 아닌데 너무 심하다. 베다가 지쳐 말도 쓰러질 정도의 숫자다. 지금 학자들이 생각하는 요인은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바로 천연두다. 남아메리카 대륙 탐험이 본격적으로 이어지며 유럽인과 남미인의 접촉이 늘어났고 그 과정에서 천연두가 전파되었다. 어느 정도 면역이 있던 유럽인과는 달리 남미인들은 천연두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그렇게 하나둘 전사를 잃었다. 현지인들이 ‘코코리츨리’라고 부르는 이 질병은 하늘이 내린 벌이었고 죽음을 뜻하는 증상이었다.
그래도 이 와중에 유럽인들을 벌벌 떨게 만든 남미인들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활이었다. 대롱에 화살을 넣고 입으로 부는 활이었는데 그 자체의 경쟁력은 약했다. 비슷한 시기 줄의 탄력을 최대한 살려서 먼 거리를 빠르게 공격하는 조선의 활이 훨씬 더 강력했다. 남미의 활에 경쟁력을 더해준 것은 독이었다. 원주민들은 독초를 빻아서 즙을 만들고 화살에 묻히면, 이 화살에 맞은 사냥감이 즉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냥에 쓰던 이 노하우를 스페인 탐험대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밀림 속에서 은밀하게 발사하고 사라지는 이 독화살은 탐험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독화살이 강력하긴 했지만 전체 전황을 바꾸지는 못했다. 사냥이나 암살에 적합한 무기일 뿐 양측이 어우러져 싸우는 난전이나 전면전에 적합한 무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 유럽의 학자들은 이 화살독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잘 죽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죽이는가가 궁금했다. 그리고 독으로 사냥을 했는데 그 사냥감을 먹는 사람들은 왜 멀쩡할까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19세기 후반 독화살의 주요 독성분이 분리된다. 튜보큐라린(Tubocurarine)이라는 이름의 이 물질은 분리해서 보니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혔다. 우선 화합물이 이온으로 존재하는 수용성 물질이라서 먹었을 때 흡수되지 않았다. 즉 화살에 맞은 사냥감은 독이 혈관 속으로 퍼져서 바로 죽겠지만 먹어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냥감을 죽이는 기전도 밝혀졌다. 근육 마비였다. 튜보큐라린은 몸속을 돌며 이온 채널을 교란시키고 근육을 못 움직이게 만들었다. 결국 호흡 근육도 멈추고 사냥감은 죽는다. 그런데 이 기전을 알게 된 의사들이 뜻밖에도 이 물질을 전신 마취에 이용했다. 전신 마취를 위해서는 마취 가스를 삽관해야 하는데 기도 주변의 근육이 이를 방해한다. 그래서 튜보큐라린을 주입하고 근육을 마비시킨 후 재빨리 마취 가스관을 넣어준 것이다. 이후 수술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때는 1942년이었지만, 이러한 수술 중 마취는 지금도 사용하는 방식이다. 독은 약이고 약은 독이라는 말 뒤에 중요한 건 양이라는 말이 따라 나오곤 하는데, 양 못지 않게 용법도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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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연두에 맞선 독화살
백승만 교수의 '전쟁과 약' 이야기
백승만 기자
news@yakup.com
입력 2023-01-26 13:37
수정 최종수정 2023-01-27 15:38
천연두에 맞선 독화살
1492년 콜럼버스가 신항로를 개척하고 일종의 기자회견을 한 이후 유럽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전례없는 부동산 호재에 사람들은 희망에 부풀어 올랐고 향료나 황금을 찾을 수 있다며 자본가와 힘을 합쳐 탐험대를 꾸렸다. 이후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신대륙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이 희망은 절정에 달했다. 탐험대는 현지에서 발견할 황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법률가나 기록원, 종교인까지 대동해 부랴부랴 대서양을 건넜다. 비록 콜럼버스가 가져온 물건 중에 돈 될 만한 것은 거의 없었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30여 년이 지나서 아즈텍이나 잉카 문명을 발견했고 그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황금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약탈했다. 현지에 뿌리내리고 있던 왕국은 이 과정에서 철저히 궤멸되었고, 남아메리카 정복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다. 스페인 정규군이 가서 남아메리카 현지 문명을 무너뜨렸다는 생각이다. 스페인 정규군이 들어간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의 일이다. 그보다 처음 아즈텍이나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사람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민간인 탐험대였다. 민간인이 자본가를 등에 업고 사람들을 아무리 불러 모아봤자 한계가 있다. 실제 잉카를 멸망시킨 피사로의 탐험대는 200명 남짓이었다. 그나마도 모두 전투원이었던 것도 아니고 앞서 언급했듯이 상당수는 자신의 탐험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인력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잉카 제국 10만 원주민을 이겼다.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스페인 탐험대가 총으로 잉카 제국을 쓰러뜨렸다는 생각이다. 당시 탐험대가 총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지금의 총과는 상당히 달랐다. 한 번 총을 쏘고 나면 다시 장전하고 쏘는 데 능숙한 사수도 30초 가량 걸렸다고 한다. 일 분에 두 발이라면 아무래도 핵심 전력이 되긴 어렵다. 물론 발포 소리 때문에 원주민이 놀라긴 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연이어 전투가 계속되면서 적응해 갔다.
오히려 총보다는 칼이 더 무서운 무기였다. 스페인의 칼은 강철로 제련되어 있었던 데 비해, 남미 원주민은 돌을 연결한 막대기나 몽둥이로 싸웠다.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석기, 청동기, 철기로 나누는 것은 보통 도구의 재료다. 이 재료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원의 벽이 있으니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다. 스페인의 남미 정복 당시 두 문명의 전쟁 무기는 석기와 철기의 차이였다. 무기로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무기를 말 위에서 휘둘렀다. 말은 당시 남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동물이었기에 스페인 탐험대의 말은 좋은 무기가 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무기가 좋다고 한들 200명으로 어떻게 10만 명을 이길까. 스페인의 검이 광선검도 아닌데 너무 심하다. 베다가 지쳐 말도 쓰러질 정도의 숫자다. 지금 학자들이 생각하는 요인은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바로 천연두다. 남아메리카 대륙 탐험이 본격적으로 이어지며 유럽인과 남미인의 접촉이 늘어났고 그 과정에서 천연두가 전파되었다. 어느 정도 면역이 있던 유럽인과는 달리 남미인들은 천연두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그렇게 하나둘 전사를 잃었다. 현지인들이 ‘코코리츨리’라고 부르는 이 질병은 하늘이 내린 벌이었고 죽음을 뜻하는 증상이었다.
그래도 이 와중에 유럽인들을 벌벌 떨게 만든 남미인들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활이었다. 대롱에 화살을 넣고 입으로 부는 활이었는데 그 자체의 경쟁력은 약했다. 비슷한 시기 줄의 탄력을 최대한 살려서 먼 거리를 빠르게 공격하는 조선의 활이 훨씬 더 강력했다. 남미의 활에 경쟁력을 더해준 것은 독이었다. 원주민들은 독초를 빻아서 즙을 만들고 화살에 묻히면, 이 화살에 맞은 사냥감이 즉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냥에 쓰던 이 노하우를 스페인 탐험대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밀림 속에서 은밀하게 발사하고 사라지는 이 독화살은 탐험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독화살이 강력하긴 했지만 전체 전황을 바꾸지는 못했다. 사냥이나 암살에 적합한 무기일 뿐 양측이 어우러져 싸우는 난전이나 전면전에 적합한 무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 유럽의 학자들은 이 화살독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잘 죽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죽이는가가 궁금했다. 그리고 독으로 사냥을 했는데 그 사냥감을 먹는 사람들은 왜 멀쩡할까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19세기 후반 독화살의 주요 독성분이 분리된다. 튜보큐라린(Tubocurarine)이라는 이름의 이 물질은 분리해서 보니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혔다. 우선 화합물이 이온으로 존재하는 수용성 물질이라서 먹었을 때 흡수되지 않았다. 즉 화살에 맞은 사냥감은 독이 혈관 속으로 퍼져서 바로 죽겠지만 먹어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냥감을 죽이는 기전도 밝혀졌다. 근육 마비였다. 튜보큐라린은 몸속을 돌며 이온 채널을 교란시키고 근육을 못 움직이게 만들었다. 결국 호흡 근육도 멈추고 사냥감은 죽는다. 그런데 이 기전을 알게 된 의사들이 뜻밖에도 이 물질을 전신 마취에 이용했다. 전신 마취를 위해서는 마취 가스를 삽관해야 하는데 기도 주변의 근육이 이를 방해한다. 그래서 튜보큐라린을 주입하고 근육을 마비시킨 후 재빨리 마취 가스관을 넣어준 것이다. 이후 수술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때는 1942년이었지만, 이러한 수술 중 마취는 지금도 사용하는 방식이다. 독은 약이고 약은 독이라는 말 뒤에 중요한 건 양이라는 말이 따라 나오곤 하는데, 양 못지 않게 용법도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