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러스
정재훈의 알아두면 쓸데있는 신비한 약이야기
<129> 잠과 음식 이야기
정재훈
입력 2023-03-30 09:12
수정
상추는 졸음 유발의 누명을 쓴 대표적 음식이다. 200여 년 전에 이미 상추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1800년 <승정원 일기>에는 사람들은 상추가 졸린다고 하는데 의서에는 잠이 잘 안 온다고 쓰여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결론은 ‘알 수 없다’였다. 상추를 먹으면 졸린지 그렇지 않은지 불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현대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상추는 졸음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생종이 아닌 재배종이기 때문이다.
야생의 상추는 졸음을 유발한다. 야생상추에는 진정 효과가 있는 락투신, 락투코피크린과 같은 성분이 들어있다. 2009년 4월 <BMJ 케이스 리포트>에는 이들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 야생상추를 먹었다가 응급실에 실려 간 이란인들의 사례가 실렸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상추는 야생상추와는 다른 종이다. 야생상추를 지금의 상추로 육종하는 과정에서 쓴맛 성분이 크게 줄어들었고, 따라서 졸음, 진정 효과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승정원 일기>에서 ‘알 수 없음’이란 결론을 내린 것을 보면 이미 조선 시대에 재배하던 상추도 야생상추와 성분상 차이가 컸던 듯하다. 상추 자체의 졸음 유발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보니 아마도 어떤 음식과 함께 먹느냐에 따라 진정 효과에 대해 상반되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음식 속 어떤 성분이 졸음을 유발하며 어떤 성분이 잠을 깨우는가는 아직 불분명하다. 2016년 스크립스(Scripps) 연구소 실험 결과 단백질, 염분이 초파리에서 식후 졸음을 유발했다. 사람에게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심증만 있을 뿐이다. 과식한 뒤에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목이 마르다. 짜게 먹고 잤기 때문이다. (소금과 단백질이 문제인지 아니면 과식이 자체가 문제인지 둘 다 문제인지 아직 알 수 없다. 후속 연구를 기다린다.) 밤에 잠이 안 온다고 일부러 음식을 짜게 먹진 마시길. 2019년 초파리 연구에서는 초파리에게 고염식을 주면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MSG가 졸음을 유발한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 않다. MSG를 먹어도 뇌 속으로 거의 들어가지 못한다. 글루탐산은 우리 뇌에서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다. 식사로 섭취한 글루탐산은 혈관-뇌 장벽을 통과해 들어갈 수 없다. 1960년대 중국음식증후군에 대한 논란이 시작된 이후 60년 동안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MSG 때문에 졸리거나 두통이 생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추와 MSG는 억울하게 범인으로 누명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상추나 MSG를 단독으로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른 음식과 함께 먹기 마련이다. 이들을 먹고 졸린 이유는 그저 음식을 먹고 난 뒤의 졸음, 즉 식곤증일 가능성이 높다.
잠이 안 온다고 술을 마시면 수면의 질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술을 한두 잔 마시면 빨리 잠드는 데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알코올은 정상적인 수면 패턴을 깨뜨린다. 처음에는 졸음을 유발해서 깊은 잠에 빠지는 듯하다가 나중에는 알코올이 대사되면서 뇌가 과잉으로 활성화한다.
이에 더해 알코올은 저혈당을 유발하여 악몽을 꾸게 할 수도 있다. 알코올은 이뇨제로도 작용한다. 술 마신 날 자다가 한밤중에 자다 깨는 이유가 이렇게 여러 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고 자는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위험하다. 숙면하지 못하니 더 과음하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침에도 개운치 않다. 그러니 커피를 더 찾게 되고 그 결과 밤에 잠을 청하기 더 어려워진다. 숙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면 오후에는 커피와 카페인 음료를 피하는 게 좋다.
자기 전 흡연도 수면의 질을 떨어뜨린다. 니코틴 부작용으로 생생한 꿈 또는 악몽을 꾸게 될 수 있다. 너무 배가 고파도 잠이 오지 않지만 과식도 숙면에는 방해가 된다. 반대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다음날 과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루 섭취 칼로리가 400-500kcal까지 늘어날 수 있는데 특히 지방 섭취가 늘어난다. 2016년 연구에서는 섬유질이 적고 지방, 당분 함량이 높은 식사를 할수록 수면의 질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숙면에 필요한 것은 특정 음식이나 영양성분이 아니라 균형 잡힌 전체 식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