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약은 빈속에 먹어야 할까? 이유는 약마다 다르다. 어떤 약은 다른 약이나 음식과 함께 먹으면 흡수가 덜 되기 때문에 빈속에 먹어야 한다. 갑상선 호르몬제, 골다공증 치료제가 대표적이다. 소장은 십이지장, 공장, 회장으로 이뤄져 있다. 대부분 약물은 소장이 시작되는 부분인 십이지장에서 흡수된다. 하지만 갑상선 호르몬제라고 부르는 레보티록신은 주로 공장(jejunum)에서 흡수된다. 위에서 레보티록신이 흡수되진 않지만 그렇다고 위에 아무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에 머무는 동안 위산과 접촉하면서 알약 속 약성분이 녹아나온다. 지난해 이탈리아 연구진은 리뷰논문에서 이렇게 위에서 알약이 붕해되고 약 성분이 용해되는 과정이 갑상선 호르몬제 흡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음식은 위의 산도에 영향을 주어 약 성분이 용해되는 것을 방해하고 장에서 갑상선 호르몬이 흡수될 때 경쟁해 약 성분이 덜 흡수되게 할 수 있다. 갑상선 호르몬제를 주로 아침 빈속에 30분~1시간 식전에 복용하도록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약을 먹고 나서 30분~1시간을 기다린다는 게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매일 아침 식전 복용이 어려운 사람은 저녁 식후 2시간 간격을 두고 자기 전에 복용해도 효과에 큰 차이가 없다는 2020년 메타분석 연구결과가 있다. 아침 식전 복용이 제일 안정적이지만 그렇게 하기 힘든 사람은 의사, 약사와 상의해 복용 시간대를 바꾸는 것도 고려 가능하다. 다만 매일 동일한 시간에 식사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복용해야 약이 흡수되는 정도에 차이가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칼슘보충제, 철분제와 같은 약은 갑상선 호르몬제와 결합해 흡수를 방해한다. 제산제, 위산억제제(PPI)도 갑상선 호르몬제의 흡수를 저해한다. 이런 약을 복용 중일 때는 갑상선 호르몬제와 최소한 4시간 이상의 간격을 두고 복용하는 게 좋다.
어떤 약은 위산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식전에 복용해야 한다. 페니실린 계열의 일부 항생제는 위산과 반응해 약효를 잃어버린다. 이런 약은 위산과 접촉하는 시간을 최소로 할수록 흡수가 잘 된다. 음식과 함께 복용하면 위에 머무르는 시간이 2~3시간으로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에 오래 머물면 위산이 약물 분자와 반응해 약효를 잃게 만들 수 있다. 같은 이유로 프로바이오틱스도 식전에 복용 또는 섭취하는 게 이상적이다. 하지만 위산과 접촉을 막는 코팅 공정을 거쳐 제조한 프로바이오틱스는 식후에 복용해도 별문제가 없다. 마찬가지로 위산에 취약한 약물이어도 장용정처럼 위에서 녹지 않도록 코팅을 한 경우에는 식후에 복용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런 식으로 특수 코팅을 한 알약은 부수거나 갈면 안 된다.
흡수가 잘 안 되는 약은 빈속에 복용해야 그나마 최대한 흡수되도록 할 수 있다. 골다공증 치료제가 대표적이다. 비스포스페이트 계열의 골다공증 약물은 빈속에 먹어도 겨우 1% 정도밖에 흡수되지 않는다. 음식이나 다른 약과 함께 복용하면 흡수율이 더 낮아진다. 알약으로 삼켜서는 아예 흡수가 되지 않는 약도 있다. 덩치가 너무 큰 약물 분자가 그렇다. 아미노산 여러 개가 결합한 구조로 되어 있는 펩타이드는 먹어서는 흡수되지 않으므로 통상 주사하는 방식으로만 투여 가능하다. SNAC(sodium N-(8-[2-hydroxylbenzoyl] amino) caprylate)와 같은 흡수촉진제를 쓰면 덩치 큰 펩타이드 약물이 위장관에서 흡수되도록 할 수 있다. 당뇨치료약 세마글루티드는 SNAC와 함께 만든 알약으로 먹어서 복용이 가능하다. SNAC는 위에서 국소적으로 pH를 높여서 약물 흡수를 높이고 위산에 약물 분자가 파괴되는 것을 막아준다. 대신 복용방법은 까다로운 편이다. 아침 식전 30분에 다른 어떤 약보다 앞서 복용해야 한다. 물도 반 잔(120mL)만 마셔야 한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흡수촉진제 성분이 희석돼 약 성분의 흡수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용해도 흡수되는 약 성분은 1% 정도에 불과하지만 주사하는 대신 먹을 수 있는 알약이라는 건 커다란 장점이다.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제형, 새로운 성분의 약이 늘어난다. 약사는 역시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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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빈속에 먹는 약 이야기
정재훈 약사
편집부
@yakup.com
입력 2022-12-28 15:52
수정 최종수정 2022-12-28 15:53
왜 어떤 약은 빈속에 먹어야 할까? 이유는 약마다 다르다. 어떤 약은 다른 약이나 음식과 함께 먹으면 흡수가 덜 되기 때문에 빈속에 먹어야 한다. 갑상선 호르몬제, 골다공증 치료제가 대표적이다. 소장은 십이지장, 공장, 회장으로 이뤄져 있다. 대부분 약물은 소장이 시작되는 부분인 십이지장에서 흡수된다. 하지만 갑상선 호르몬제라고 부르는 레보티록신은 주로 공장(jejunum)에서 흡수된다. 위에서 레보티록신이 흡수되진 않지만 그렇다고 위에 아무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에 머무는 동안 위산과 접촉하면서 알약 속 약성분이 녹아나온다. 지난해 이탈리아 연구진은 리뷰논문에서 이렇게 위에서 알약이 붕해되고 약 성분이 용해되는 과정이 갑상선 호르몬제 흡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음식은 위의 산도에 영향을 주어 약 성분이 용해되는 것을 방해하고 장에서 갑상선 호르몬이 흡수될 때 경쟁해 약 성분이 덜 흡수되게 할 수 있다. 갑상선 호르몬제를 주로 아침 빈속에 30분~1시간 식전에 복용하도록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약을 먹고 나서 30분~1시간을 기다린다는 게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매일 아침 식전 복용이 어려운 사람은 저녁 식후 2시간 간격을 두고 자기 전에 복용해도 효과에 큰 차이가 없다는 2020년 메타분석 연구결과가 있다. 아침 식전 복용이 제일 안정적이지만 그렇게 하기 힘든 사람은 의사, 약사와 상의해 복용 시간대를 바꾸는 것도 고려 가능하다. 다만 매일 동일한 시간에 식사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복용해야 약이 흡수되는 정도에 차이가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칼슘보충제, 철분제와 같은 약은 갑상선 호르몬제와 결합해 흡수를 방해한다. 제산제, 위산억제제(PPI)도 갑상선 호르몬제의 흡수를 저해한다. 이런 약을 복용 중일 때는 갑상선 호르몬제와 최소한 4시간 이상의 간격을 두고 복용하는 게 좋다.
어떤 약은 위산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식전에 복용해야 한다. 페니실린 계열의 일부 항생제는 위산과 반응해 약효를 잃어버린다. 이런 약은 위산과 접촉하는 시간을 최소로 할수록 흡수가 잘 된다. 음식과 함께 복용하면 위에 머무르는 시간이 2~3시간으로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에 오래 머물면 위산이 약물 분자와 반응해 약효를 잃게 만들 수 있다. 같은 이유로 프로바이오틱스도 식전에 복용 또는 섭취하는 게 이상적이다. 하지만 위산과 접촉을 막는 코팅 공정을 거쳐 제조한 프로바이오틱스는 식후에 복용해도 별문제가 없다. 마찬가지로 위산에 취약한 약물이어도 장용정처럼 위에서 녹지 않도록 코팅을 한 경우에는 식후에 복용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런 식으로 특수 코팅을 한 알약은 부수거나 갈면 안 된다.
흡수가 잘 안 되는 약은 빈속에 복용해야 그나마 최대한 흡수되도록 할 수 있다. 골다공증 치료제가 대표적이다. 비스포스페이트 계열의 골다공증 약물은 빈속에 먹어도 겨우 1% 정도밖에 흡수되지 않는다. 음식이나 다른 약과 함께 복용하면 흡수율이 더 낮아진다. 알약으로 삼켜서는 아예 흡수가 되지 않는 약도 있다. 덩치가 너무 큰 약물 분자가 그렇다. 아미노산 여러 개가 결합한 구조로 되어 있는 펩타이드는 먹어서는 흡수되지 않으므로 통상 주사하는 방식으로만 투여 가능하다. SNAC(sodium N-(8-[2-hydroxylbenzoyl] amino) caprylate)와 같은 흡수촉진제를 쓰면 덩치 큰 펩타이드 약물이 위장관에서 흡수되도록 할 수 있다. 당뇨치료약 세마글루티드는 SNAC와 함께 만든 알약으로 먹어서 복용이 가능하다. SNAC는 위에서 국소적으로 pH를 높여서 약물 흡수를 높이고 위산에 약물 분자가 파괴되는 것을 막아준다. 대신 복용방법은 까다로운 편이다. 아침 식전 30분에 다른 어떤 약보다 앞서 복용해야 한다. 물도 반 잔(120mL)만 마셔야 한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흡수촉진제 성분이 희석돼 약 성분의 흡수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용해도 흡수되는 약 성분은 1% 정도에 불과하지만 주사하는 대신 먹을 수 있는 알약이라는 건 커다란 장점이다.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제형, 새로운 성분의 약이 늘어난다. 약사는 역시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