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디아제팜을 복용해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만약 디아제팜 5mg 한 알을 삼킨다면 아마도 15분 정도 지나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같은 약을 계속해서 오랫동안 복용한 사람의 경우 그 200배인 1000mg을 복용해도 안 자고 버틸 수 있다. 약에 대한 내성이 생긴 것이다.
아편유사 진통제(opioid)의 경우에도 비슷해도 처음 복용하면 졸음, 진정 효과가 나타나지만 오래 복용하면 그런 부작용에 적응하게 된다. 토론토 다운타운 약국에서 일하던 어느 날 옥시코돈을 함유한 진통제 약병을 환자가 받자마자 알약을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 먹는 장면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난다.
약효 또는 부작용에 대한 내성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약이 작용하는 수용체의 개수가 줄어들거나 결합이 약해져서 효과가 줄어들 수도 있고 약효에 대한 반작용이 증가해서 그럴 수도 있다. 또는 약을 오래 복용하면서 간과 신장이 그 약 성분을 청소하는 능력이 증가해서 더 빠르게 몸 밖으로 내보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알코올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술을 자주 마시면 알코올을 분해하는 마이크로솜 산화계(MEOS) 활성이 증가하여 전체 알코올 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25% 이상으로 증가한다. 술이 엄청나게 세지는 건 아니지만 대사가 아주 조금 빨라지긴 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알코올의 진정 효과에 대한 내성이다. 처음에는 술을 한두 잔만 마셔도 취해서 비틀거리고 더 마시면 졸면서 쓰러지던 사람이 자꾸 술을 마시면 적응이 된 것처럼 같은 양을 마시고도 덜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코올의 효과에 인체 기능이 온전히 내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술 마신 뒤에 계산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음주 운전을 시도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우리 신체의 모든 조직과 장기가 약효 또는 부작용에 동일하게 적응하는 것도 아니다. 아편유사 진통제를 장기 복용하면 내성이 생겨 약효가 전보다 떨어지고 따라서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한다. 하지만 변비와 같은 부작용에 대한 인체의 적응은 매우 느린 편이다. 아편유사 진통제를 복용 중인 환자에게 변비약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진통제를 오남용하는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약물의 쾌락에 중독된 뇌는 더 많은 양의 약을 요구하지만, 심장과 폐와 같은 중요한 장기들은 약의 부작용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여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잦은 음주로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고 술을 더 마시는 사람의 경우도 비슷하다. 뇌가 알코올의 효과에 일부 적응했을지 몰라도 간, 신장, 근육, 위장 등의 여러 장기가 알코올의 독성에 그대로 노출되고 결국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게 된다.
하지만 약의 내성을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성은 나쁘기만 한 게 아니다. 부작용에 대한 내성이 생기면 약을 더 잘 복용할 수 있다. 이런 의미를 더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내약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대다수의 약에는 내성이나 중독성 문제가 잘 나타나지 않으며 때로는 복용 간격을 조절해서 내성을 막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협심증 약으로 유명한 니트로글리세린은 저녁에는 약 사용을 중지하는 방식으로 약효를 유지할 수 있다.
일부 예외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내성을 걱정해서 약을 아껴 쓴다고 나중에 약이 더 잘 듣거나 하지는 않는다. 소염진통제의 내성을 걱정해서 생리통을 계속 참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야 비로소 약을 찾는 경우를 종종 본다. 하지만 이렇게 늦게 약을 쓰면 통증의 원인 물질이 이미 많이 쌓인 상태여서 효과를 보기 더 어렵다. 증상 초기에 사용해야 적은 양으로도 효과적이다.
과거 연구로 인해 내성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약도 있다. 피부에 국소적으로 사용하는 스테로이드 연고, 크림에 빠른 내성(tachyphylaxis)이 생긴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하지만 70년대 이야기다. 최근 연구에서는 국소 스테로이드에 내성이 생긴다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과거 80년대에는 항히스타민제를 오래 복용하면 내성이 생겨 효과가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 이전 연구 조사의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항히스타민제를 오래 쓴다고 내성이 나타난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게 최근 견해다. 세상에는 내성을 걱정해야 하는 약보다 올바른 복용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약이 훨씬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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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약의 내성 이야기
정재훈 약사 기자
webmaster@yakup.com
입력 2020-04-08 11:00
수정 최종수정 2020-04-08 11:06
▲ 정재훈 약사
나는 아직 디아제팜을 복용해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만약 디아제팜 5mg 한 알을 삼킨다면 아마도 15분 정도 지나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같은 약을 계속해서 오랫동안 복용한 사람의 경우 그 200배인 1000mg을 복용해도 안 자고 버틸 수 있다. 약에 대한 내성이 생긴 것이다.
아편유사 진통제(opioid)의 경우에도 비슷해도 처음 복용하면 졸음, 진정 효과가 나타나지만 오래 복용하면 그런 부작용에 적응하게 된다. 토론토 다운타운 약국에서 일하던 어느 날 옥시코돈을 함유한 진통제 약병을 환자가 받자마자 알약을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 먹는 장면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난다.
약효 또는 부작용에 대한 내성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약이 작용하는 수용체의 개수가 줄어들거나 결합이 약해져서 효과가 줄어들 수도 있고 약효에 대한 반작용이 증가해서 그럴 수도 있다. 또는 약을 오래 복용하면서 간과 신장이 그 약 성분을 청소하는 능력이 증가해서 더 빠르게 몸 밖으로 내보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알코올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술을 자주 마시면 알코올을 분해하는 마이크로솜 산화계(MEOS) 활성이 증가하여 전체 알코올 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25% 이상으로 증가한다. 술이 엄청나게 세지는 건 아니지만 대사가 아주 조금 빨라지긴 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알코올의 진정 효과에 대한 내성이다. 처음에는 술을 한두 잔만 마셔도 취해서 비틀거리고 더 마시면 졸면서 쓰러지던 사람이 자꾸 술을 마시면 적응이 된 것처럼 같은 양을 마시고도 덜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코올의 효과에 인체 기능이 온전히 내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술 마신 뒤에 계산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음주 운전을 시도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우리 신체의 모든 조직과 장기가 약효 또는 부작용에 동일하게 적응하는 것도 아니다. 아편유사 진통제를 장기 복용하면 내성이 생겨 약효가 전보다 떨어지고 따라서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한다. 하지만 변비와 같은 부작용에 대한 인체의 적응은 매우 느린 편이다. 아편유사 진통제를 복용 중인 환자에게 변비약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진통제를 오남용하는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약물의 쾌락에 중독된 뇌는 더 많은 양의 약을 요구하지만, 심장과 폐와 같은 중요한 장기들은 약의 부작용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여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잦은 음주로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고 술을 더 마시는 사람의 경우도 비슷하다. 뇌가 알코올의 효과에 일부 적응했을지 몰라도 간, 신장, 근육, 위장 등의 여러 장기가 알코올의 독성에 그대로 노출되고 결국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게 된다.
하지만 약의 내성을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성은 나쁘기만 한 게 아니다. 부작용에 대한 내성이 생기면 약을 더 잘 복용할 수 있다. 이런 의미를 더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내약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대다수의 약에는 내성이나 중독성 문제가 잘 나타나지 않으며 때로는 복용 간격을 조절해서 내성을 막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협심증 약으로 유명한 니트로글리세린은 저녁에는 약 사용을 중지하는 방식으로 약효를 유지할 수 있다.
일부 예외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내성을 걱정해서 약을 아껴 쓴다고 나중에 약이 더 잘 듣거나 하지는 않는다. 소염진통제의 내성을 걱정해서 생리통을 계속 참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야 비로소 약을 찾는 경우를 종종 본다. 하지만 이렇게 늦게 약을 쓰면 통증의 원인 물질이 이미 많이 쌓인 상태여서 효과를 보기 더 어렵다. 증상 초기에 사용해야 적은 양으로도 효과적이다.
과거 연구로 인해 내성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약도 있다. 피부에 국소적으로 사용하는 스테로이드 연고, 크림에 빠른 내성(tachyphylaxis)이 생긴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하지만 70년대 이야기다. 최근 연구에서는 국소 스테로이드에 내성이 생긴다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과거 80년대에는 항히스타민제를 오래 복용하면 내성이 생겨 효과가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 이전 연구 조사의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항히스타민제를 오래 쓴다고 내성이 나타난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게 최근 견해다. 세상에는 내성을 걱정해야 하는 약보다 올바른 복용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약이 훨씬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