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훈 약사대개 약의 상호작용이라 하면 약끼리 충돌하는 것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약끼리 맨날 싸우기만 하는 건 아니다. 친구가 서로 도와주듯 약도 함께 쓰면 효과는 커지고 부작용은 줄어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고혈압에 쓰이는 칼슘채널차단제(Calcium Channel Blocker, CCB)와 ARB(Angiotensin Receptor Blocker, 안지오텐신 수용체 차단제)의 조합이다. 혈압약이 혈압을 떨어뜨리는 원리 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혈관 확장이다. 칼슘채널차단제는 주로 동맥 혈관을 확장시켜서 혈압을 떨어뜨린다.
길이 좁으면 차가 밀리고 길을 넓혀주면 차가 좀 더 쌩쌩 달릴 수 있듯이 혈관을 확장해주면 혈압이 떨어진다. 그런데 만약 넓어진 길이 갑자기 좁아지면 어떻게 될까? 교통 정체가 일어난다. 혈액 순환의 경우도 비슷하다. 혈액은 심장의 동맥에서 세동맥, 모세혈관, 세정맥으로 흐르고 다시 정맥을 거쳐 심장으로 돌아온다.
칼슘채널차단제는 심장에서 조직으로 가는 하행선과 같은 동맥을 확장시키지만 조직에서 심장으로 돌아오는 상행선에 해당하는 정맥은 확장시키지 못한다. 혈액 순환 도로에 체증이 생기면 그 결과는 하지 부종이다. 종아리와 발목 또는 발이 붓는다. 암로디핀 같은 칼슘채널차단제의 흔한 부작용이다. 이때는 이뇨제를 써도 효과가 미미하다.
그렇다면 정맥혈관, 즉 조직에서 심장으로 가는 상행선도 확장을 시켜주면 부작용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 나온 게 칼슘채널차단제와 ARB의 조합이다. ARB는 안지오텐신II의 작용을 차단하여 동맥뿐만 아니라 정맥 혈관을 확장시킨다.
실제로 두 종류의 다른 항고혈압약(CCB, ARB)을 사용하면 칼슘채널차단제 한 가지만 썼을 때보다 부종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고 부작용으로 인해 약 복용을 중단하는 사람의 비율도 1/3로 줄어든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류의 항고혈압약 2가지를 함께 사용하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혈압을 떨어뜨리므로 효과도 상승한다.
따라서 더 적은 양으로 효과를 보게 되니 각각의 약의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실제로 고혈압 환자의 절반 이상이 한 가지 약 성분으로는 혈압 조절이 잘 안 되는데 이럴 때 약의 용량을 늘리는 것보다 종류를 늘려주는 게 효과는 올리고 부작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두 성분을 하나의 알약에 모은 복합제를 사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체중 감량하는 약 가운데도 두 가지 성분이 서로 도와주는 식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이어트, 체중 감량을 위해 사용하는 약 중에 날트렉손이라는 약성분과 부프로피온이라는 약성분이 함께 들어있는 약이 있다.
날트렉손은 원래 알코올 중독과 마약성 진통제 의존증이 있을 때 쓰는 약이고 부프로피온은 우울증 치료와 금연보조용으로 사용하는 약이다. 그런데 체중 감량을 위해 쓸 때는 두 가지 약성분이 함께 비슷한 부위지만 다른 방식으로 서로 효과를 높여주어서 포만감을 늘리고 식욕과 식탐을 억제하는 데 효과를 나타낸다.
펜터민과 토피라메이트라는 두 가지 약성분도 함께 사용된다. 펜터민은 식욕을 억제하고 토피라메이트는 포만감을 높여주는 방식으로 함께 사용하면 효과가 증가한다. 하지만 이렇게 약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하는 게 항상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약을 함께 써서 부작용이 증가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펜-펜(fen-phen)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1990년대 미국에서 펜플루라민(fenfluramine)이란 성분의 식욕억제제와 펜터민(phentermine)을 함께 쓰는 조합이 크게 유행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체중 감량 효과는 더 좋았으나 아주 심각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심장질환 발생율이 증가하여 사망한 사람들의 사례가 100건 넘게 FDA에 보고되고 결국 1997년 미국 시장에서 펜플루라민이 회수, 퇴출됐다. 각각 따로 썼을 때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펜플루라민의 부작용이 펜터민과 함께 쓰자 증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약이 좋은 친구인지 해로운 만남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야한다. 알고 보면 약은 사람과 참 많이 닮았다.